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야왕
    2025-09-04
    검색기록 지우기
  • 비닉스 가짜-비닉스-【pom5.kr】-비닉스 필름 Visit our website:(vinix55.com)
    2025-09-0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30
  • 군립박물관이 국립을 눌렀다

    군립박물관이 국립을 눌렀다

    한적한 농촌지역인 경북 고령이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신비의 왕국’ 대가야(42∼562년)의 수도 고령의 역사와 문화를 관람하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대가야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군립 박물관이면서도 연간 관람객 수가 웬만한 국립박물관을 앞지른다. 11일 고령군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달 말까지 대가야박물관을 찾은 전체 관람객은 20만 3684명(외국인 1439명 포함)으로 집계됐다. 이는 같은 시기 가야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박물관인 김해박물관 18만 6789명보다 1만 6895명, 진주박물관 18만 6305명보다 1만 7379명이 많다. 특히 규모와 시설면에서 비슷한 거창군립박물관 3만 726명과 창녕공립박물관 2만 4129명에 비하면 6∼8배가 많은 셈이다. 2000년 10월 문을 연 가야박물관은 그해 관람객 2만 5000여명이던 것이 매년 증가해 지난달 말까지 122만 9243명이 찾았다. 이로 인한 지역홍보는 물론 직·간접적 효과가 엄청나다는 게 군 관계자의 설명이다. 관람수입 4억 6000여만원에다 딸기 등 농특산물 판매액 등을 합하면 수십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대가야박물관이 관광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끄는 것은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삼국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대가야의 찬란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이 곳에서 한눈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령읍 지산리에 자리한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왕릉전시관과 대가야역사관, 우륵박물관으로 구성돼 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연면적 300여평)은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이자 최대 규모인 지산동 44호분을 원형 그대로 복제, 재현하고 있다. 무덤 외곽으로는 출토 유물과 고분의 순장 유형, 대가야의 토기·말갖춤·무기, 갑옷과 투구 등의 사진물이 전시됐다. 대가야의 역사,44호분의 성격, 역사적 의의 등을 담은 영상물 코너도 마련됐다. 대가야역사관(연면적 1000여평)은 금관·장신구·마구·무기류 등 대가야의 진품 유물 20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또 대가야 토기의 시대적 변천과 고분 축조과정, 토기 및 철기의 제작과정을 재현한 모형 등이 전시돼 있어 대가야 문화의 우수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륵박물관은 가야 말기의 악성(樂聖)으로 가야금을 만든 우륵과 가야금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게 전시돼 있다. 박물관은 ▲악성 우륵 ▲가야의 혼을 지킨 우륵 ▲민족의 악기 가야금 ▲우륵의 후예 등 다섯 가지 주제로 꾸며져 있다. 가야금과 우륵의 생애를 밝혀 주는 영상물 2편, 가야금과 양금을 연주해 볼 수 있는 체험장도 마련돼 있다. 이태근 고령군수는 “대가야박물관이 다른 박물관과 차별화된 역사전문박물관으로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 문화유적 답사, 어린이 현장체험학습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면서 “앞으로 가야 고분 200여기가 있는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등 각종 문화재와 연계해 고령을 문화유적 테마 관광지로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고령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김훈 세번째 장편 ‘현의 노래’

    장편 ‘칼의 노래’로 2001년 동인문학상,단편 ‘화장’으로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눈부신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는 작가 김훈(56)이 세번째 장편 ‘현의 노래’(생각의나무 펴냄)를 냈다. ‘칼’에서 ‘현’으로 나아간 작가가 섬세한 문학적 촉수를 뻗은 곳은 가야금의 예인 우륵.삼국사기와 구전설화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사료를 훑은 작가는 한 역사적 인물에 특유의 상상력으로 호흡을 불어넣고 있다. 소설은 ‘소리’를 이루려는 일념 하나로 가야에서 신라로 나라까지 바꾸는 우륵의 삶을 큰 얼개로 삼아,소리를 통해 득도(得道)에 이르는 과정을 부각시키며 풀어진다.물론 우륵의 제자이자 ‘소리 벗’인 니문,가야의 무기 제조장 야로,진흥황 가야왕의 시녀 아라 등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을 불러들여 이야기 그물을 촘촘히 엮는다.그 속에서 작가는 세상사의 모든 것이 담긴 ‘소리’(우륵,니문)라는 원초적 감각과,그것의 울림판인 ‘쇠’(야로 父子)의 비유를 통해 삶의 의미와 현실을 투영한다.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덧없음으로 늘 새롭다.”(285쪽).죽음을 앞에 둔 우륵의 말에 기대어 자신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스타일리스트라 불리는 작가 특유의 문체는 ‘현의 노래’에서 빛을 발한다.골자만으로 이어지는 대사,빠른 사건 전개,묘사와 배치를 섞어 완급을 조절하는 수사로 읽는 이들을 강하게 빨아들인다.‘칼’에서 ‘현’으로 나아간 작가는 “악기가 통과해온 살육과 유혈의 시대를 생각하는 일은 참담했다.악기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악기가 아름답고 무기가 추악한 것은 아니다.무기가 강력하고 악기가 허약한 것도 아니며,그 반대도 아닐 것이다.이 작품은 그 악기들 내면의 맹렬한 적막에 대해 쓴 것”이라고 말한다. 이종수기자˝
  • 대가야 한자표기 ‘골치’

    대가야문화권개발에 나선 경북 고령군이 대가야의 한자 표기를 놓고 고심에 빠졌다.대가야의 한자는 大加耶와 大伽倻,大伽耶 등 3가지로 지역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군은 96년 군정조정위원회를 열어 大伽倻로 쓰기로 의결,홍보물이나 표시판에 적어왔다. 그러나 대가야왕릉전시관 개관을 앞둔 지난해 6월 주보돈경북대교수 등 전시관 자문교수들이 군의 한자 표기에 의의를 제기했다.고대사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의 표기대로 大加耶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역사학회 소속 교수들도加耶에 ‘사람 인(人) 변’이 붙은 伽倻나 伽耶의 표기는 고려시대 이후 불교나 유교 등의 영향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고령군은 학계의 주장에 따르기로 내부 방침을정했다.하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다.가야산(伽倻山) 등지역의 유명 지명에는 모두 사람 인 변이 붙은 것을 사용하고 있는데다 최근 열린 의회 임시회에서 의원들이 大伽倻로사용하는 게 지역 정서에 맞다며 문제삼고 있어서다. 고령 한찬규기자 cghan@
  • 신간 맛보기

    ■스페인제국사(존 엘리엇 지음,김원중 옮김,까치 펴냄) 15세기말부터 18세기초까지 스페인의 역사를 종합적인 관점에서 정리.스페인은1469년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결혼에 의해 이뤄진 카스티야왕국과 아라곤왕국의 결합으로 절대주의가 시작된 이래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누리고 유럽과 중남미국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스페인이 유럽과 동떨어진 별개의 세계로서 편협하고 후진적이라는 역사가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스페인 이외 학자의 첫 저작. 스페인은 1716년 카탈루냐의 자치가 끝나면서 유럽의 변방으로 전락한다.1만5,000원■여성과 광기(필리스 체슬러 지음,임옥희 옮김,여성신문사 펴냄) 미국의 저명 심리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지은이가 여성 정신질환자들을관찰한 결과,그들이 오랫동안 가부장제 문화와 의식에 희생돼왔음을자료로 입증하고 도표화했다.남성 중심의 역사는 언제나 여성들에게무성적(無性的) 성모마리아의 이미지를 강요해왔다는 주장과 함께책은,생물학적 조건때문에 문화적으로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과 그극복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한다.72년 처음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250만부 이상이 팔린 대표적 페미니즘 연구서. 2만원■미래의 부(스탠 데이비스·크리스토퍼 메이어 지음,신동욱 옮김,세종서적 펴냄)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 가져올 엄청난 기회와 가능성을 설명하면서 개인과 기업,국가사회 전체의 부를 늘리기 위한 기본원칙들을 제시.다가올 연결된 경제는 속도와 상호연관성,무형성의 세가지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생산이나 서비스보다 금융활동이,유형자산보다 무형자산이,조직보다는 개인이 창출·관리하는 부가 늘어날것으로 전망.부는 더 이상 부자들만의 것이 아니라며 연결하고 참여하라는 등 미래의 부를 향유할 구체적인 방법도 알려준다.1만4,000원■인터넷으로 보는 일본문화 코드북(정숙경 지음,넥서스 펴냄) 일본문화와 관련된 사이트들을 분야별로 정리해 놓은 실용서.일본 국내의인터넷 자료는 1억 페이지가 넘는다.이 책에서는 그중에서도 자료적가치가 있는 사이트들만을 엄선해 실었다.인터넷을 통해 일본어를읽고 쓰려면 일본어 폰트와 입력기를 설치해야 한다.그런 점을 감안,먼저 마이크로소프트 익스플로러 4X이상에서 일본어 입력기를 설치하는 방법부터 다뤘다.일본어를 모르거나 글자가 깨져 나와 볼 수 없는고충도 없앴다. 일본 인터넷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법부터 자동번역프로그램 사용법까지 정리돼 있다.1만2,800원
  • 고령 가야대학교에 ‘日 개국터’ 비석 세운다

    경북 고령 가야대학교에 이곳이 일본 천황가의 출신지임을 알리는 비석이 선다.가야대는 오는 28일 오전11시 교정에서 ‘고천원고지(高天原故地)’비 제막식을 갖고 오후에는 강당에서 강연회 및 토론회를 갖는다. 고천원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지명으로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살았다는 곳이다. 가야대가 비석을 세우는 이유는 대가야의 도읍지인 고령이 바로 고천원으로추정되기 때문이다. 고천원을 고령으로 비정(比定)하는 학설은 한·일 학자들 사이에서 두루 제기되었다.지정학적으로 보면 가야는 한반도의 어느 지역보다 일본과 가깝고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기술된 일본 신들의 계보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두 신에서 시작된다.국민대 총장을 지낸 이종항교수는 이자나기(伊邪那崎)와 이자나미(伊邪那美)는 대가야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진아시(伊珍阿鼓)와 동일인이며 이자나기는 천부(天父)신,이자나미는 지모(地母)신이라고 했다.또 이자나기의 딸로서 일본 국조신으로 추앙받는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의 손자로 일본 개국신인 니니기노미코도(邇邇藝命)는 고천원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부산일보 동경지사장 최성규씨는 ‘일본왕가의 뿌리는 가야왕족’이라는 논문에서 ‘다카마노하라(高天原)’의 ‘다카마(高天)’는 고유명사로서 곧 ‘다카마(高靈)’에서 온 말이고 ‘노’는 조사,‘하라(原)’는 장소를 뜻한다고 했다. 일본 연구자 아라 에이세이(荒榮誠)는 일본 건국신의 하나인 다가미무수비노미코도(高皇産靈尊)가 가야의 고령출신이고 ‘高靈’과 ‘皇産’(천황을 산출한다)의 두글자로 구성됐다는 설도 있다고 말한다. 일본 쓰쿠바대학 명예교수 마부치 가즈오(馬淵和夫)박사도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 수사노오노미코는 성질이 난폭해 고천원에서 추방된 뒤 신라국에서 살았다며 고천원을 신라 서쪽에 인접한 나라인 대가야,곧 고령으로 비정했다. 가야대 이경희 총장은 신화를 상상의 세계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를 신화형식으로 빌려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가야는 일본왕조형성에 깊이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동상 제막식이 끝난 오후에는 마부치 교수가 고대 한일 문화교류에 관해 주제발표를 하고 향토사학자 김문배씨,가야대 엄경호교수,이종항 전 국민대총장 등이 토론을 벌인다. 임태순기자 stslim@
  • 태국 아유타야(세계 문화유산 순례:8)

    ◎불탄 왕시·목잘린 불상… 「장엄한 폐허」/무자비한 버마군 약탈·파괴 흔적 그대로/14세기 동서무역 중심 아유타야왕국 수도/“참행에 신체변화” 불상은 하나같이 여체닮아 수코타이가 태국문화의 뿌리를 상징한다면 아유타야는 굵은 줄기라 할 만하다.수코타이왕국에서 싹튼 태국문화는 아유타야왕국(1350∼1767)때 번성했다.그 나라 수도가 방콕 북쪽 72㎞쯤에 있는 아유타야였다.강 세줄기로 둘러싸여 섬과 다름없는 이 소도시에는 지금도 옛날 영화)를 보여주는 유적이 곳곳에 널려 있다. 수코타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유타야의 중심부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왕궁단지가 자리잡았다.그곳에 들어서면 바로 왕사 「프라 시 산펫」이 있다.산펫은 그야말로 「장엄한 폐허」였다.불에 타 시커멓게 변한 체디(불탑)들,바닥에 뒹구는 붉은 벽돌들.그러나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못 없는 불상들이었다.경내를 다 둘러보아도 얼굴 있는 부처님은 두엇에 불과했다.미소짓지 않는 불상,팔다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불상을 보노라니 가슴이 저렸다.이처럼 철저한 파괴는 무엇에서 비롯됐을까. 크메르제국이 샴족에게 쫓겨 앙코르를 버리고 달아났듯이 아유타야왕국은 이웃 버마군에게 멸망당했다.아유타야를 점령한 버마군은 산펫을 무자비하게 깨부수고 보물을 약탈했다.당시 이곳에는 1백70㎏의 금을 입힌 불상이 있었는데 이 금을 녹이고자 불을 질러 사원을 불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그렇더라도 같은 불교도인 버마군이 불상의 목을 자른 까닭은 무엇일까. 그나마 우뚝 솟은 거대한 체디 3기가 마음을 위로한다.왕들의 유해를 모셨다는 이 체디에는 사방에 계단이 있다.올라가보았더니 널길(선도)입구는 붉은 벽돌로 막아놓았다.사방을 내려다보고 유네스코가 「아유타야의 폐허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고 한 이유를 터득할 만했다.자연재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역시 사람이 저지른 파기와 약탈이었다. 왕궁단지를 나와 정문앞 「비하라 프라 몽콘보핏」에 들렀다.1956년 복원했다는 몽콘보핏은 사원이라기보다는 예불당에 속한다.그 안팎은 신도로 붐볐다.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사람들은 향과 초를 불상앞에피워놓고 연신 절을 하거나 또는 산통을 흔들며 갖가지 형태로 소원을 빈다.본당에는 태국에서 가장 크다는 청동좌불상이 자리잡았다.왕국 멸망때 버마군에게 약탈당했다가 절을 복원하면서 돌려받은 이 청동상은 마치 은진미륵이 앉아 있는 듯 거대하다. 화교의 절 「왓 프라차오 파난초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온통 한자로 뒤덮인(태국인은 한자를 상용하지 않는다) 이 절에는 크고 작은 불상이 워낙 많아 사람이 꽉 차도 불상의 수효에는 미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주불은 앉은 키 19m인 좌상으로 온몸에 금을 입혀 휘황찬란하다.아유타야시민이 가장 존경한다는 이 불상이 1325년쯤 조성됐으니 파난초엥은 아유타야왕국보다 역사가 오랜 셈이다. 특이한 것은 불상이 하나같이 여체를 닮아 가슴은 봉긋하고 허리는 가늘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불상의 성을 따질 필요는 물론 없다.『수행을 많이 하면 그같은 신체적 변화가 온다』는 이 절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면 누구나 의문이 풀릴 것이다. 아유타야에는 이밖에도 ▲프레스코벽화와 정교한 조각기둥들이 볼만한 「왓 수완다람」 ▲2.5㎏의 황금염주를 꼭대기에 얹은 80m 높이의 「체디 푸카오통」 ▲작은 앙코르 와트인 「왓 차이왓타나람」등 명소가 많았다.아유타야유적은 폐허가 된 곳이건 온전히 남거나 복원된 곳이건 모두 장엄했다.그 이유는 간단하다.당시 아유타야는 세계무역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동서무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곳에는 영국·네덜란드·포르투갈등 서양배를 비롯해 중국·인도·아랍·일본배가 들락거렸다.무역선은 샴만(타이만)으로 들어와 차오프라야강을 거슬러 아유타야에 진입했다.역사가들은 그때 아유타야가 런던·파리보다 더 큰 도시였으리라고 추정한다. 아유타야시 남쪽을 흐르는 차오프라야강가로 나갔다.아유타야의 젖줄인 차오프라야강은 오늘도 흐른다.1시간남짓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많은 배가 물길을 따라 오갔다.쇳덩어리를 가득 실은 바지선이 지나간 뒤를 「통통통」소리를 내며 유람선이 따라간다.언제부터인가 고개를 내밀고 이방인을 쳐다보던 새끼악어는 눈길이 마주치자 냉큼 머리를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강은 오늘도 흐른다. ◎여행가이드/방콕서 버스·열차 수시로/체증심해 자전거관광 편리 아유타야는 방콕에서 육로로 1시간 거리이므로 방콕에 있으면서 하루쯤 시간을 내 관광할 만하다.에어컨버스와 열차편이 시간마다 있다.다만 교통체증이 심해 여유 있게 계획을 짜야 한다.아유타야시내에서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유적지간 거리가 걷기에는 멀고,그렇다고 꼭 차를 타야 할 만큼 멀지도 않기 때문.자전거대여점이 많이 있다.수코타이관광도 마찬가지. 특색 있는 관광으로는 선상유람이 있다.방콕에서 배를 타고 차오프라야강줄기를 따라 아유타야로 가 그곳에서도 뱃길로 유적지를 돈다.식사·음료를 제공한다.흠이라면 값이 비싸고(3만5천원쯤),유적지를 몇군데밖에 못본다는 점.유명호텔에서 매일 상오8시 출발한다.
  • 「임나일본부설」 CD에 수록/미 MS사 오류 시인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는 96년 발행한 CD롬 백과사전 「엔타르카 엔사이클로피디어」에 「가야왕조가 일본 야마토 일족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기술한데 대해 사과하고,오는 10월에 발행되는 97년판부터 수정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왔다고 외무부가 30일 밝혔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부정확한 내용을 백과사전에 기술해 한국민을 욕되게 하고 한국의 국가 종주권에 의문을 제기한데 대해 심심한 사과를 한다』면서 『본사는 가야가 야마토 일족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 금관가야 대규모 해안주거지 발굴

    ◎농어업 생활기반… 바다무대로 국제활동 하던 외항 추정/동아대 박물관팀,진해 용원동 토지개발지구서/인도 아유타국 공주 도래 망산도와 이웃/AD 2∼3세기 집터·토기제작 등 확인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의 외항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해안주거유적이 경남 진해시 용원동 녹산토지개발지구에서 발굴되어 초기가야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은 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배를 타고 도착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망산도와 불과 2백m 쯤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이 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밝혀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4월 용원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 들어간 동아대박물관(관장 심봉근)은 지금까지 AD 2∼3세기의 집터와 창고터 50여개와 토기제작지,대형조개무지를 확인한 것을 비롯해 토기와 쇠화살촉·어망추·숫돌·맷돌·사슴뿔로 손잡이를 만든 쇠칼 등 수백점의 유물을 찾아냈다.조사단은 현재 퇴적층의 맨 아래 쪽에서 가야제국의 형성기에 해당하는 AD 1세기 퇴적층을 확인하고 발굴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조사단의 눈길을 끈 것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규모의 집터들이 중앙의 가장 큰 집터를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고 고상 창고터가 상당수 확인되었다는 것.또 일본의 야요이후기에 해당하는 토기들도 상당수 출토됐다는 점이다. 이에따라 박물관측은 이 유적이 가야 초기 농경과 어로작업을 생활기반으로 바다를 무대로 국제적인 활동을 하던 집단의 중심지로 보고 있다.또 이들이 상당한 정도로 국가형태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경상남도 남해안 일대에 있던 8개의 소국로 「삼국사기」에 전하는 포상팔국의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가 전하는 인도 아유타 공주의 도래는 AD 48년.「삼국유사」에 따르면 신하들은 수로왕이 시키는대로 망산도에 나가 기다렸고 붉은 빛깔의 돛을 단 배가 나타나자 횃불을 올려 배를 대도록 했다.허황옥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수로왕은 난으로 만든 키와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맞이해오라고 한뒤 그와 결혼했다는것이다. 용원유적은 낙동강을 타고 김해로 들어가기 위한 서쪽 관문에 해당한다.포상팔국은 금관가야의 세력권.그런 만큼 수로왕이 신하들을 망산도에 나가 기다리도록 한 것은 해로에 익숙지않은 외국배를 마중나가도록 한 것이며 난초와 계수나무로 치장한 호화로운 배를 보냈다는 것은 왕비가 타고온 배를 망산도에 정박시키고 가야왕실의 배로 왕비를 수도까지 데리고 간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즉 망산도로 대표되는 이 유적은 당시 중국과 일본·낙랑 등의 배가 드나든 해상교류의 전진기지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발굴책임자인 심봉근 동아대박물관장은 『허황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삼국유사」도 연대에 혼란을 겪고 있는 만큼 현재로서는 허황후와 이 유적의 편년을 정확히 일치시키기는 힘들다』면서 『그러나 이 유적에 살고 있던 집단이 수로왕 및 허황후와 관련이 있던 것 만은 틀림 없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임나일본부는 위의 외교사절”/이영식인제대교수 「역사비평」서 주장

    ◎일본서기 필사본에 「가야에 파견된 사신」 명시/“가야왕의 통제따라 가야 이해를 대변” 가야 고분 발굴에 오랫동안 관여하고 있는 한 고고학자는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사를 제발 좀 쓰지말라』고 당부하곤 한다.벌써 오래 전부터 그 설을 지어낸 일본 학계에서 조차 임나일본부를 「위가 가야지역을 정복해 세운 식민지 통치기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웃음 거리가 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그런 판국에 우리가 임나일본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애써 강변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꼴이라는 설명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제 임나일본부설에 과민반응할 필요는 없어진 것 같다.그렇지만 임나일본부의 성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임나일본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그런만큼 『임나일본부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아직도 남는다. 인제대 이영식교수(한국사)는 『임나일본부는 가야에 파견된 왜의 외교사절로 가야왕의 통제에 따랐으며 가야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최근 나온 계간「역사비평」 가을호에 쓴 「임나일본부를 재해석한다」라는 글에서 『이같은 「외교사절설」의 골격은 이미 19 70년대에 완성되었으며 최근에는 한일 고대사학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학설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교수는 종래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고대 일본이 4∼6세기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는데 중심적 통치기관이었다는 「출선기관설」 ▲가야지역에 몰려살던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었다는 「가야의 위설」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 안에 있던 대화정권의 분국이었다는 「분국설」 ▲백제가 가야지역에 세웠던 군사령부와 같은 성격이라는 「백제군사령부설」로 대별된다고 소개했다. 그는 그러나 『이같은 한일학계의 연구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었다기보다 일본학계의 막연한 선입관과 한국학계의 감정적 반발의 산물』이라면서 『가야의 이해관계를 전혀 도외시한 채 왜나 백제를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서기」의 여러 필사본과 주석서를 통해 볼 때 「임나일본부」의 「일본부」는「야마토의 미코토모치」(위의 어사지)로 훈독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당시 「미코토모치」란 왕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됐다가 일이 끝나면 되돌아오는 「일회성의 사신」이었다.따라서 「임나일본부」란 왜에서 임나,즉 가야에 파견된 사신이라는 것이다.또 「안라일본부」를 『안라(함안의 아라가야)에 있는 여러 위신들』이라고 표기한 「일본서기」의 또다른 기록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일본부들은 가야계 도래인이었거나 가야문화에 익숙한 사람들로 장기간 가야에 머무름에 따라 왜왕은 그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면서 『가야제국의 왕들이 자국의 독립유지를 위해 백제·신라·왜와의 외교교섭에서 「일본부」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고 밝혔다.
  • 가야금동관 2점 발굴/협천 옥전고분군서

    ◎은관 함께… 3점 출토는 처음/5∼6세기 다라국 추정/귀고리등 유물 2백점도 고대가야왕국의 하나인 다라국의 왕무덤으로 보이는 고분이 발굴되어 주목되고 있다. 경남 협천군 쌍책면 옥전고분군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는 경상대박물관조사단(단장 조영제교수)은 대형본토분인 M6호분에서 지금까지 왕의 무덤에서만 출토되어온 금동보관과 은제관,당봉환두대도가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다라국의 왕 무덤임이 명확해졌다고 21일 발표했다. 이번조사는 지난해 12월10일부터 진행된 옥전고분군에 대한 제5차 조사로 M6고분에서 금동관 2점과 은제관 1점등 3점의 관모 출토된것은 우리나라 발굴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이와함께 받침이 높은 잔과 항아리등 80점의 토기와 말안장 재갈 철모 철촉등 철기류 1백14점,금제귀고리등 11점의 장신구류가 15기의 고분에서 발굴됐다. 특히 M6호분에서 출토된 금제귀고리 한쌍은 정교한 장식과 세공이 돋보이는 국보에 준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M6호분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축조된대형 봉토분으로 네벽은 막돌을 차곡차곡 쌓아 축조하였고 평면은 비교적 긴 장방형으로 천장은 나무뚜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중요 부장품은 발쪽에 놓여있었다. 이번에 조사된 고분군은 M6호등 대형봉토분 2기와 석곽묘 11기,목곽묘2기등 모두 15기이다. 옥전고분군은 지난 85년부터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지난 88년7월28일 사적 제32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모두 3천5백여점의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사를 해명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