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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칼럼] 한국대선에 촉각 곤두선 일본/박홍기 도쿄 특파원

    일본의 한국 대선에 대한 관심은 엄청나다. 일본 신문들은 아예 ‘07 한국 대통령선거’라는 표제까지 붙이고 시시콜콜한 상황까지 연일 보도하고 있다. 대선의 흐름을 읽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을 정도다. 대통령 선거가 11일 앞으로 다가왔다. 일본의 언론에 비치는 빈도도 그만큼 잦아졌다. 한국 대선을 지켜보며 나름대로 판세를 점치는 이들도 적잖다.“다이내믹 코리아답다.”,“막판까지 흥미진진할 것 같다.”고도 말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의 대선을 통해 선거의 묘미를 한껏 즐기는 듯싶다. 일본은 정권교체 경험이 적고 유력 파벌에서 미는 후보가 총리에 오르지 못한 적도 없다. 게다가 국가의 얼굴인 총리를 직접 선출할 기회가 없는 까닭에서다. 일본의 한 외교 소식통은 “일본은 전통적·지리적·방위적으로 한국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면서 “더욱이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는데 오죽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따져 보면 한국의 대선은 현해탄 건너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은 정치·안보·경제·문화 등에서 다양하게 얽히고설킨 만큼 동시에 풀어야 할 난제도 즐비한 탓이다. 특히 한국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일본의 외교 노선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일본이 한국 대선과 관련, 현 시점에서 가장 신경쓰는 분야는 대북정책이다. 북핵 문제 자체보다도 국내 현안인 납치문제의 해결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현실에서 북한을 둘러싼 정책의 엇박자가 미·일, 한·일 관계에서도 미묘한 불협화음을 낳고 있다. 한국과 북한, 미국과 북한의 포용·유화정책에 일본의 대북 강경책이 비집고 파고들기가 벅차다는 판단에서다. 그렇다고 국내 여론과 달리 섣불리 완화정책으로 선회할 수도 없다. 때문에 한국의 차기 대통령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 대북정책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노무현 정권과는 대북정책이 조금이나마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섞인 기대에서다. 실제 대선 후보들의 대북정책 공약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다음은 막힌 한·일 관계의 회복이다. 일본의 노 정권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후한 편이 아니다.“한·일 관계가 껄끄럽다.”는 말도 노골적으로 나오고 있다. 한·일 관계의 바람직한 기준은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서명한 ‘21세기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여기고 있다. 실질적인 한·일 관계를 통한 미래 지향적이라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러나 수월하지는 않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도발적인 우경화 행보에 2005년 6월 이후 셔틀외교는 중단된 상태이다. 독도·역사왜곡·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3가지 불씨는 여전히 잔존해 있다. 뒤틀린 한·일 관계의 귀책 사유가 일본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노 정권보다는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말만 되풀이될 뿐 경색된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제대로 짚어보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아시아 중시외교를 위해서는 주변국과의 원활한 관계가 요구되고 있다. 중국과의 해빙외교는 비교적 순조롭다. 그럴수록 아시아의 역학관계에서 한국과의 파트너십에 대한 필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후쿠다 총리 역시 꼬인 정국의 돌파구를 외교에서 찾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본 언론들이 한결같이 “한국의 대선을 이웃나라로서 주목하고 있다.”는 논조를 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대선은 일본의 눈에 비친 그대로의 단순한 ‘다이내믹 코리아’로 끝나서는 안 된다. 튼실하게 도약하는 진정한 ‘다이내믹 코리아’임을 보여줘야 한다. 한국 유권자들의 선택이 한층 의미가 더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박홍기 도쿄 특파원 hkpark@seoul.co.kr
  • 조선도공 후예 도고 서울대 초빙교수 “아직도 핏줄이 당긴다”

    조선도공 후예 도고 서울대 초빙교수 “아직도 핏줄이 당긴다”

    임진왜란 때인 1598년 전북 남원에서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400년 이상 흘렀다. 그 핏줄을 이어받은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62)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뿌리찾기에 나섰다. 그는 규슈 가고시마현 미야마 마을에 정착, 지금도 14개 가마에서 그릇을 굽고 있는 조선도공들 가운데 박씨의 후손이다. 한·일관계는 물론 뒤엉킨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도고 교수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할아버지 시게노리 2차대전 때 외무대신 역임 도고 교수의 할아버지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전과 패전시 외무대신을 역임한 도고 시게노리다. 아버지도, 그도 고위외교관 출신으로 3대 외교관 집안이다. 도자기노예인 조선도공 박씨 집안 3대가 일본의 고위 외교직을 차례로 역임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시게노리는 원래 박무덕이었다. 부친 박수승 대까지 도자기노예 후예로서 모진 삶을 이어갔다. 그런데 메이지유신으로 차별이 심화됐다. 수승은 박씨란 성을 자신의 대에서 끊고 귀화했다.1882년생 시게노리가 5살 때이다. 수재 시게노리는 고향에서 중고교를 졸업한 뒤 도쿄대학에 들어가 독일문학을 공부했다. 그 뒤 외교관 시험에 합격했다. 독일 외교관시절 만난 그의 아내는 독일여자였다. 아이가 다섯 있던 그녀의 사별한 남편 게오르그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기본 설계한 건축기사다. 시게노리는 독일과 소련 대사를 역임한 뒤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인 1941년 외무상에 발탁되었다. 군부에 맞서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외무상을 그만뒀으나 종전 직전인 45년 4월 외무상에 재기용됐다. 그때 일왕에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라고 강력 주장, 조기종전으로 일본사람의 전멸을 피하게 했다는 칭송도 받았다. 시게노리는 A급 전범으로 20년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개전 반대 노력 등을 전범재판소가 평가, 사형은 피했다. 도고 교수는 “다섯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막연한 기억밖에 없다. 어머니, 형과 함께 가끔 스가모형무소로 면회갔을 때 낭하에서 검붉은 환자복을 입고 걸어나오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시게노리는 미군병원에서 1950년 7월 숨졌다. 시게노리는 겉으로는 도공 박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숨겼지만 가보지 못한 조선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국장 시절 조선에서 최초로 외교관 시험에 합격, 일본 외무성 과장으로 부임했던 직원에게 자신도 조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토로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현재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고, 무덤은 도쿄시내 아오야마묘지에 있다. ●DJ납치, 주한미군철수와 아버지 시게노리는 외동딸만을 두었다. 딸과 결혼한 자신의 비서관 출신 사위를 호적에 양자로 입적시켜 도고 후미히코라고 하게 된다. 후미히코의 한국사랑은 유별났다.1973년 한일 각료회의 때 외무성 심의관으로 한국을 방문, 김대중납치사건을 처리했다. 문세광의 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뒤 한국을 재방문, 사건수습에 진력했다고 한다. 외무성 차관 때도 한국과 인연을 맺었으며 차관 사임 뒤 부부가 한국을 다시 방문해 판문점과 휴전선 부근의 남침용 땅굴을 보고, 한국의 안보 상황을 체험했다.77년 카터 전 미 대통령 시절에는 주미 일본대사로 카터가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자 워싱턴 조야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안보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설득, 한·일 공동외교를 폈다. 부친이 한국과 공동외교전을 폈다는 사실에 대해 도고 교수는 “거의 모르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본다. 아버지는 사무차관 때 중국 및 한국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으셨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참 오래 전부터(400여년전) 한국과 연결됐다.”고 독백처럼 말했다. 후미히코는 20여년 전, 부인은 10여년 전 숨졌다. ●남원의 박씨 집안 후손… 뿌리를 찾아나섰다 후미히코는 태평양전쟁 말기 노약자 소개정책에 따라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을 뒀다. 형 시게히코는 워싱턴포스트지 도쿄특파원을 하다 최근 퇴직했다. 특파원 시절에는 한국도 여러번 방문, 따뜻한 가슴으로 여러편의 기사를 작성해 신문에 실었다.“현재 퇴직후 공부중”이라고 한다. 도고 교수는 도쿄대학 출신 엘리트외교관이었다.17년간 러시아관계 일을 맡아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했다. 한국어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두마디만 할 수 있다. 두 아들(각각 34·30세)은 현재 일본의 회사에 재직중이다. 형도 아들만 둘이다. 도고 교수는 “내 핏속에는 독일인 피도 4분의1이 흐른다. 일부 조선인의 피도 흐른다.”며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도 많이 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일본이 나의 유일한 조국”이라며 단호했다. 그러나 핏줄찾기 열의는 대단하다. 최근의 일본인들에게 핏줄의식은 없지만 자신에게는 “조금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가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하기 전 고향 미야마 마을을 찾았다고 밝힐 때는 고향·핏줄을 중시하는 조선도공의 영향이 느껴졌다. 그의 조상들이 남원서 왔다는 것은 형의 ‘조부 시게노리’라는 책에 실려 있다.“한국에 있는 4개월 동안 반드시 가보고 싶다.”면서 남원과 ‘춘향전’,‘광한루’ 등이라고 적은, 소중하게 갖고 온 메모지를 보여주었다. 형 시게히코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조선시대 도자기 사발을 가보로 모신다. 자신도 미야마의 조선도공 출신 심수관씨로부터 받은 몇 개의 도자기를 도쿄 미나토구 한국대사관 근처 자택에 “소중히 보관중”이라고 소개했다. 한국과 연결된 끈들이다. ●현대사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도고 교수는 2002년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촉망받던 고위 외교관리였다.1997년 유럽아시아 국장이었다.98년 11월 조선도공들의 가고시마 정착 400주년 기념식장에 당시의 한·일 각료회의에 참석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김종필 한국 총리 등과 동석하는 큰 영광도 누렸다. 그 해에 ‘시게노리 기념관’이 생겨나는 등 고향 미야마 마을은 온통 조선도공의 열기였다고 회상한다. 특히 양국 총리와 외무장관 등이 시게노리의 동상 등을 방문했을 때는 마을의 지도자와 한국측 참석자들이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당시를 “아주 독특하고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일본 현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측근인 외무성의 사토 마사루가 2차대전 뒤 일·러간 현안인 북방4개 섬 일본 반환문제를 대화로 풀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다가 2002년 구속되면서다. 그도 네덜란드대사 부임 8개월 만에 해임돼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지난해 6월 사토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까지 4년 이상 일본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조국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4개 섬 일괄반환론 틀 안에서 4개 섬의 귀속을 인정해주면 러시아가 언제까지 보유해도 무방하다는 ‘가나와 제안’을 추진한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안 되면 우선 2개 섬 반환을 확실히 하고,2개 섬은 다음에 교섭하는 단계론을 펴다 우익 학자와 시민단체들의 맹렬한 공격에 사토가 구속되고 실무 추진 당시 상사였던 그는 해임됐다. 도고 교수는 “북방영토가 일본의 영토라는 원칙은 전후에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단지 교섭 방법론이 문제였다.”며 당시에는 자신도 네덜란드에서 귀국하면 구속될 수 있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아 일본행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에 눌러앉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망명은 저널리즘적인 표현이다. 그저 일본이 싫어서 귀국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외무성을 퇴임한 뒤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에서 2년, 미국 프린스턴대학 2년, 타이완 단코대 4개월,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학 6개월 등의 교수를 거쳤다. 지난 7월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부인과 함께 일본 도쿄에 주민등록을 해 영주키로 했다. ●“한국학생들 매우 논리적” 그는 미국에서 맺은 인연으로 이번 학기 초빙교수 자격으로 서울대에서 일주일에 3시간짜리 한 강좌를 맡고 있다. 한국 학생 20명과 외국학생 10명에게 한·일관계 등 동북아 외교 현안을 정면으로 가르친다. 도고 교수는 “한국 학생들은 감성적이지 않다. 매우 논리적이다. 이들이 한국지도부에 들어가는 날 한·일 양국관계는 매우 밝다고 본다.”고 자신했다. 학자, 시민단체 등 새로운 형태의 한·일 교류가 활발한 것도 반기고 있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 정권이 한·일 관계를 잘 해갈 것이라며 급한 국내과제를 해결, 일본 내부 반발을 해소해 정권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최근 정치·경제적으로 ‘자신감’을 가진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자신감이 북한·일본과의 관계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봤다. 대통령선거 뒤 한·일 양국이 정상간 셔틀외교를 재개하길 바랐다. 아울러 ‘일본은 없다’,‘혐한류’ 등 책이 출판돼 양국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며 우려하기도 했다. 도고 교수는 일본이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 동북아시아 평화시대를 열어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사회가 우경화됐다지만 우경화되거나 반한사상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건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흐름상으로 한반도는 통일될 시기를 맞았다.”고 분석했다. 이춘규기자 taein@seoul.co.kr ■도고 가즈히코 교수 ▲1945년 나가노현 출생(태평양전쟁말기 노약자의 소개정책으로 인해 모친이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거주중) ▲68년 도쿄대학 교양학과 졸업 ▲68년 4월 외무성 입성 ▲72년 모스크바 일본대사관 근무(모두 3차례 대사관 근무를 포함 소련과장과 유럽아시아국장 등으로 17년간이나 러시아관계 일을 맡음) ▲91년 워싱턴 일본대사관 총괄공사 ▲98년 외무성 조약국장 ▲99년 유럽아시아 국장 ▲2001년 네덜란드대사 부임 ▲02년4월 네덜란드대사 해임 ▲02년5월 일본을 떠나 유랑 ▲07년7일 5년 만에 일본 귀국 ●최근의 저서 ‘북방영토 교섭비록’(일어) ‘일본외교 1945∼2003’(영어)
  • 日 아베 2기내각 외교·안보 정책은

    |도쿄 박홍기특파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7일 새로 짠 ‘제2기 내각’의 외교·안보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아베 총리가 국내 문제 때문에 외교·안보 쪽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지역이 활력을 되찾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라는 아베 총리의 말대로 우선 지역 활성화와 양극화 해소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마치무라 노부타카 외무상과 고무라 마사히코 방위상 모두 아베 총리와 같이 우파적 성향이 짙다. 아베 외교·안보팀이 주변국과 충돌할 수 있는 ‘가치관 외교’를 고수할 가능성이 높다. 역시 ‘전후체제의 탈피’ 노선도 주변국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기는 하다. ●마치무라 외무상 “재임중 참배 안해” 마치무라 외무상은 2004∼05년 첫번째 외무상을 맡을 당시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 대한 망언으로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샀었다. 한국과 중국 정부가 주시하는 이유다. 그런 탓인지 마치무라 외무상은 첫 기자회견에서 “재임중에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계획이 없다.”는 발언을 했다. 2기 내각의 외교·안보팀은 당장 미·일 동맹을 고려, 민주당에서 반대하는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의 연장이라는 최대 현안을 처리해야 한다. 중국과 센카쿠 열도 소유권 분쟁, 러시아와 남쿠릴 열도의 4개섬 반환 문제 등도 언제든지 부각될 수 있는 과제들이다. 대북 강경정책은 바뀔 조짐이 거의 없다. 아베 총리는 비판을 받아 온 ‘총리 보좌관’을 5명에서 2명으로 축소하면서 나카야마 교코 납치담당보좌관은 그대로 남겼다. 북핵보다 납치문제를 우선시하는 아베 총리의 의지다. ●“납치문제 진전없으면 대북지원 없다” 마치무라 외무상은 역시 “북한에 의한 납치문제에 진전이 보이면 경제 지원과 에너지 지원 분야에 한층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납치문제의 진전이 없으면 지원하지 않는다.’는 1기 내각의 기본 방침에 대한 유지다. 그러나 다음달 5·6일 이틀 동안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갖기로 합의한 6자회담의 제2차 북·일 실무회의는 북·일 관계에 새로운 단초를 제공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3월 베트남 하노이 회의 이래 6개월 만에 열리는 만큼 일말의 기대감도 있다. 한편 마치무라 외무상과 고무라 방위상은 ‘중진’의 무게를 최대한 활용, 다음달 10일부터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테러특별법’의 연장을 위해 민주당 설득의 전면에 나설 방침이다. hkpark@seoul.co.kr
  • [특파원 칼럼] 광복절과 종전기념일/박홍기 도쿄 특파원

    사흘전은 8·15 광복절이었다. 반면 일본에는 종전기념일이다.62년전 그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동시에 한국은 36년 동안 잃었던 빛을 되찾았다. 일본의 종전기념일은 기념일이기보다 추모일이다.‘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라는 광복절의 노랫말처럼 감격에 휩싸인 날이 아니다. 패망의 슬픔과 상처를 달래는 그런 날이다. 올해도 곳곳에서 ‘전국 전몰자 추도식’이 열렸다. 일본에서 맞은 종전기념일은 낯설기 그지없다. 가해자로서의 전범이 아닌 원자폭탄을 맞고 어쩔 수 없이 백기를 든 전쟁의 피해자로서만 부각시키는 일본의 태도 때문이다. 8월 초입부터 미국에 의한 원폭 투하와 태평양 전쟁은 사회적 이슈로 다가왔다. 미디어들은 일제히 당시의 원폭 피해자, 참전 군인들의 증언이나 자료 등을 발굴,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데 여념 없었다.8월6일 히로시마,8월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날을 평화의 날로 지정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전쟁의 폐해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강조한 듯하다. 실제 종전기념일까지 10일 동안 3차례에 걸쳐 ‘평화’를 염원하는 공식 행사가 치러진다. 일본에서는 1945년 8월6일부터 8월15일까지만 전쟁을 벌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길게 잡아야 미국의 도쿄 대공습이 있었던 3월10일부터다. 초점이 원폭과 대공습 등의 전흔에만 맞춰진 까닭에서다. 일본, 자신들에 의한 전쟁은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아예 빼거나 왜곡시킨 탓이다. 더욱이 62년이라는 세월과 맞물려 전쟁의 폐해를 몸으로 경험한 일본인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나아가 젊은이들은 자국의 전쟁 도발과 식민지에서의 야만성 등에 대한 근·현대사에 별다른 관심조차 없다. 공교육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최근 만난 일본의 한 고교 교사의 ‘근·현대사를 가르칠 기회도, 제도적인 여건도 안 돼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실상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의 역사인식은 독선적이다. 아전인수격의 역사관에 갇혀 한국을 비롯, 주변국들이 겪었던 질곡과 고난의 역사를 인정할 만한 자세를 갖지 못해서다. 전쟁터로 끌려가 희생된 수많은 한국의 학도병, 위안부, 건설노동자 등에 대한 진실된 사죄는커녕, 반성도 없다. 물론 아베 신조 총리는 올해 종전기념일의 추도사에서 “깊은 반성과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했지만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지난 1995년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서도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국민들에게 손해와 고통을 줬다.”며 공표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정권에 따라, 시대의 상황에 따라 반성과 사과는 형식적으로만 되풀이됐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교과서 왜곡, 독도 등의 문제도 변화없이 그냥 그대로다.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는 이유다. 아베 총리 스스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한 것도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본은 분명 가해자로서의 과거사 청산에 적극 나서야 한다. 역사의 겸허함을 수용해야 한다. 굳이 독일이 실천한 ‘전후 피해 보상과 화해의 과정’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깊은 사죄만이 유일한 길이다.1965년 한·일 회담에서 이미 강점기와 관련해 포괄적인 해결이 이뤄졌음을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당시 회담은 국제 정세에 따른 안보논리에 의거해 이뤄졌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62년전의 역사를 새삼 들춰낸 것은 광복절을 계기로 종전기념일에 전쟁의 피해를 내세워 역사적 진실을 호도하는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다시 올 종전기념일은 패망을 위무하는 자신들만의 날이 아닌 국제 평화와 화해를 도모하는 날이 됐으면 한다. 나아가 사죄와 용서를 통해 진실된 소통이 가능한 한국과 일본의 미래 관계가 조성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홍기 도쿄 특파원 hkpark@seoul.co.kr
  • [사설] 日내각 ‘야스쿠니 참배 보류’ 지속돼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내각의 각료 16명 전원이 2차대전 종전기념일인 8월15일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지 않기로 했다고 일본 언론이 지난 10일 보도했다. 각료 전원이 참배하지 않기로 한 것은 1950년대 중반 각자의 뜻에 따라 참배 여부를 정하도록 한 뒤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최근 참의원 선거 참패에 따른 자숙의 의미가 강하고, 그에 앞선 미국 하원의 군위안부 결의안 통과, 그리고 한·일, 중·일 관계 개선 상황 등을 고려한 판단이다. 배경이야 어찌 됐든 우리는 각료들의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판단을 환영한다. 아울러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일회성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군국주의 부활과 팽창주의에 집착하는 일본 집권층이 종전기념일을 기해 신사를 참배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한국과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오만한 행보를 계속해 한·일 및 중·일 외교관계를 경색시켰다. 북핵문제, 동아시아 긴장완화, 경제협력 등 동북아 지역의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이 지역 주요 3국 정상 간에 신뢰 있는 대화 채널이 일부 끊어진 것은 유감스러운 상황이다.3국이 불편한 관계를 접고 상생의 길로 나아가려면 일본이 먼저 과거에 대해 사죄하고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징성이 강한 야쿠니신사 참배를 앞으로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왜곡된 과거사 문제를 시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동북아지역 협력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 일본 각료 16명 전원 8·15 신사참배 않기로

    |도쿄 박홍기특파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 내각의 각료 16명 전원이 2차대전 종전기념일인 15일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10일 보도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 7일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를 하지 않겠다는 의중을 드러냈었다. 각료들의 이같은 움직임은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상황에서 신사를 참배할 경우,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을 자극해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특히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내년에 일본을 방문할 의향을 내비친 만큼 일·중 관계의 개선도 충분히 감안한 것 같다. 지난 1950년대 중반 이후 종전기념일에 각료들이 대거 야스쿠니를 참배해 왔으나 전원이 참배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은 처음이다. 시오자키 야스히사 관방장관은 참배하지 않기로 한 이유에 대해 “본인의 신조에 따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부키 분메이 문부과학상은 “종교행사의 소관 대신으로서 공평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며 직무 관련성을 들었다.hkpark@seoul.co.kr
  • 히로히토 前일왕, 야스쿠니 A급전범 합사 반대 이유 “전쟁 관련국과 깊은 화근될 것”

    |도쿄 박홍기특파원|히로히토 전 일왕이 야스쿠니 신사의 A급 전범 합사와 관련,“전쟁과 관련이 있는 나라와 앞으로 깊은 화근을 남기게 될 것”이라며 합사를 경계했던 이유가 밝혀졌다고 도쿄신문이 5일 보도했다. 또 “전사자의 영혼을 달래는 신사의 성격이 변한다.”며 A급 전범의 합사에 우려도 표시했다. 히로히토의 이같은 발언은 최측근이었던 고(故) 도쿠가와 요시히로 시종장이 지난 1986년 가을 왕실의 시 지도를 맡아왔던 시인인 오카노 히로히코(83)에게 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오카노는 지난해 말 출간한 저서 ‘사계의 노래’에도 히로히토 전 일왕의 이 발언을 실었다. 히로히토 전 일왕이 야스쿠니신사의 A급 전범 합사에 불쾌감을 나타냈다는 사실은 도미타 도모히코 전 궁내청장관의 메모 등을 통해 알려졌으나 구체적인 이유는 지금껏 명확하지 않았었다. 도쿠가와 시종장은 히로히토 전 일왕의 시에 대한 상담을 위해 오카노를 방문한 자리에서 “윗분이 A급전범 합사에 대해 반대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하나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신사의) 성격과 맞지 않고, 또 하나는 전쟁과 관련이 있는 나라와 장래에 깊은 화근을 남길 우려가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히로히토 전 일왕은 제2차대전이 끝난 뒤 모두 8차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으나 A급 전범의 합사 사실이 드러나기 전인 1975년 11월이 마지막이었다. 합사는 1978년 10월 비밀리에 이루어진 뒤 이듬해 4월 언론에 보도됐다. 현 아키히토 일왕은 즉위 이후 단 한 차례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hkpark@seoul.co.kr
  • 리덩후이 “韓.中 야스쿠니 참배 비난말라”

    일본에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 파문을 일으킨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이 9일 한술 더떠 “(한국과 중국 등) 다른 국가가 야스쿠니 참배를 비난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리 전 총통은 이날 일본을 떠나기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나라를 위해 전사한 사람들을 위한 제사는 당연한 것으로 번갈아가며 다른 국가의 비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리 전 총통은 지난달 30일 총통 퇴임후 세번째로 일본을 방문, 강연과 관광을 하면서 지난 7일에는 일본군으로 전쟁터에서 숨진 친형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리 전 총통은 대만에 도착, 다시 기자회견을 갖고 “오래동안 가슴에 묻어둔 친형을 추모하고, 야스쿠니신사에 안치된 형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개인 신분으로 신사를 참배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신사참배에 대한 중국측 항의를 묻는 질문에 흥분한 목소리로 “일본 당국의 태도는 더 강경해야 한다. 일본은 외국 정부의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 제사는 국가 전몰자를 위한 당연한 일”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리 전 총통은 일본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던 도중 나리타(成田)공항 출국장에서 30대 중국인 남성으로부터 페트병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일제 시절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군 소위를 지냈던 리 전 총통은 일본인이 아닌 대만인으로 태어난 비애를 얘기하며 일본을 찬양할 정도로 친일 노선을 걷고 있는 대표적인 대만 정치인이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 승리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대만을 합병, 1945년까지 50년간 통치했지만 상당수 대만인들은 당시 일본의 식민통치가 대만 현대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당시의 동화정책과 전후 친일 교육 등으로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연합뉴스@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일본소식] 상호이해 없는 아시아 공동체?

    한일관계를 얘기할 때 정치가들은 ‘과거 문제’’미래지향적 관계’ 등을 입에 올리며 최근에는 ‘아시아 공동체’까지 화제가 커지고 있다. 과연, 공동의식 없는 공동화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보인다. 한·중·일의 정치면에서나 민간에서나 현안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직면하는 것은 가치관, 사고방식, 사회 구조의 차이 등이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관한 상호이해의 육성을 피하고 ‘미래지향’이라고 외쳐봐도 헛돌아갈 뿐이며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회 구조의 차이에 관해서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하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사람들은 몇몇이 어울려서 식당에 갈 경우 모두 같은 메뉴를 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최근에는 줄어들었지만 회사 일로 손님 대접을 할 때에 미리 메뉴를 정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고,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방문한 거래처에서는 방문객의 취향을 묻지 않고 음료수도 내준다. 여러 나라를 상대로 일을 해보면 일본은 ‘개인의 공간’ 즉, 자유롭게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좀 좁게 느껴진다. 개인을 가장 주장하는 곳이 미국, 유럽이라면 가장 사양하는 나라에 속하는 곳이 일본이 아닐까. 한국과 중국은 그 중간쯤일 듯싶다. 일본 회사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중국인의 고민을 물어보면 부정적인 의견, 의사 표현이 어렵다고 말한다. 세계적으로도 일본사람은 조용한 민족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3대 네트워크의 어느 아시아 지국장이 이러한 얘기를 한다. ‘일본의 영상뉴스를 뉴욕 본사에 보내면 방송되는 경우가 드물다. 감정을 자제하고 드라마성도 적으며 너무 조용하다’는 이유란다. 필자의 인상으로는 일본사람도 한국사람만큼 감정적이지만 일본사람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이 시점에서 ‘다테마에와 혼네’를 떠올리게 된다. 다테마에란 겉모양, 체면을 뜻하고 혼네는 진짜 속마음을 말한다. 어느 나라에도 다데마에와 혼네가 있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쪽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한·중·일 세 나라 중 혼네가 가장 드러나는 것이 한국사람이고 한다. 중국의 문헌에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현재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일본인과 다른 점은 중국인은 자기가 추구하는 목적 달성을 위해 속셈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해받기 쉬운 아이즈치 아이즈치는 상대방의 발언에 관하여 동의하는 것 같은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자신의 의견과 일치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람은 자기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을 경우 상반된 의견에 동의하는 자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밀접한 결합의 일본, 소원한 결합의 한국과 중국 일본에는 ‘국가’’가족’이라는 단위 사이에 ‘村’(마을, 지금은 회사)이라는 상당히 강력한 집단이 있다. 한국과 중국에도 이 중간층이 있지만 그 영향력은 상당히 다르다. 대표적인 예로 회사에의 충성심을 들 수 있다. 말을 바꾸자면 일본의 마을 사회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개인’의 공간이 좁다. 한편 한국과 중국에서는 중간층의 기업 내 인간관계가 소원하여, 그 요소는 지연, 혈연, 학벌 등 다양하면서 어느 정도는 ‘개인’을 드러낼 수 있다. 기업 합병의 과정을 보면, 밀접한 결합의 조직과 소원한 결합의 조직의 결속의 차가 나타난다. 얼마 전 경험한 일이다. 그 전에 거래하던 은행이 타은행과 합병을 하여 지점통합이 있어났다. 은행 창구에 가니 낯익은 얼굴의 직원이 대응해 주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같은 사람이 담당하고 타은행 출신 직원은 인사만 시킨다. 이유를 물어보니 ‘장부가 따로따로 되어 있어서 아직 업무를 나누어서 하고 있다’라고 얘기한다. 얼마가 지난 후 가보았더니 보통 때의 1/3의 시간으로 처리가 끝났다. 이번에는 ‘타은행의 최신 컴퓨터 시스템이 이제야 쓸 수 있게 되어서,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2년이 지나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회 구조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중국에서의 일본기업의 과제를 살펴보겠다. ●일본 기업은 왜 현지사원에게 인기가 없는가 중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지의 우수한 인재의 확보와 유지가 꼭 필요한데 중국에서 일본 기업의 인기는 별로 좋지 않다. 고쿠시칸 대학의 고지마 교수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중국에서 ‘존경받는 기업’의 상위 20위에 일본 기업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50위 이내에 들어간 마쓰시다 전기(46위)는 중국에 10억 불이 넘는 투자를 했는데도 말이다. 직장을 옮길 때도 일본 기업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일본재외 기업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계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중국사람의 69%가 구미기업체로 옮기고 싶어한 반면 일본 기업체를 택한 사람은 7%에 불과했다. 왜 그럴까. 반일교육이 그 원인이라고 일본에서는 말하지만 실제의 이유는 무엇일까. 서-차이나(searchina)라는 조사회사에 의하면 일본에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는 중국인은 21%에 그치고 비우호적이라고 답한 사람은 71%에 달한다. 야스쿠니신사 문제뿐 아니라 양국 수뇌가 몇 년 간이나 만나지 않았던 일도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본다. 한편 일본 기업에서 일하는 중국사람은 ‘회사 명함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도 한다. 예전 일본의 방송국에서 이 문제를 취급한 적이 있는데 일본 기업의 중국 인사원에게 인터뷰를 하였다. 일류대학 출신의 사원이 동창회에 가서 명함을 교환하면 구미 기업에 있는 동창의 직위가 높다고 한다. 승진이 빠른 사람도 있지만 비슷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조금 높은 자리를 주고 다른 회사와 거래할 때에 상대회사의 높은 레벨의 인맥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 기업의 현지사원의 불만이 조금은 나타난다고 하겠다. 인재컨설팅 회사 파소나 테크에 의하면 일본계 기업에 대한 현지사원의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본사 현지 법인을 포함하여 장기적 중국 전략이 불투명, 중국 법인은 일본 본사의 지원부대에 지나지 않으며 사원의 창조력 발휘 기회는 없음, 일본계 기업은 중국 국영기업처럼 사업의 책임자가 애매함, 일본계 기업은 현지사원을 신뢰하지 않는 느낌이 있음, 일본계 기업에서 구미 기업으로 옮긴 후 간부 사원이 된 친구가 몇 명이나 있음.’ 반대로 일본 기업의 경영자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JVC의 중국사업 총책임자를 역임한 희라사와 씨는 일본 기업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의사 결정의 속도가 느리며 진출 의사가 불투명, 사원들의 전략 공유가 약하다’’끼리끼리 뭉치고 책임 소재가 애매하다.’’일본인의 지위가 한 단계 높고 대우도 비교할 수 없다.’ 이상에서 보면, 현지사원과 일본인 총책임자의 의견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일을 하려고 할 때 과거의 문제, 미래지향적 지세에 있는가 하는 것은 전혀 관계없는 과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점을 잘 이해하고 해결하지 않고는 북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 [사설] 日, 평화헌법 손 댈 자격 있나

    일본 참의원이 헌법 개정 절차를 담은 국민투표법안을 어제 통과시켰다. 중의원에 이은 참의원 가결로 일본은 1947년 제정한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법률을 두게 됐다. 개헌은 집권 자민당이 창당때 내건 목표다. 아베 신조 총리도 임기 안에 개헌을 이루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미군정이 지은 낡은 옷인 ‘평화헌법’을 벗고, 일본인 손으로 만든 ‘자주헌법’으로 갈아입겠다는 것이 개헌론자들의 주장이다. 개헌세력은 시대에 맞는 국가이념, 환경문제를 새 헌법에 담겠다고 주장한다. 핵심은 전쟁과 군대보유를 금지한 9조의 폐지 혹은 개정에 있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게 헌법 제정 당시 국제사회와 일본의 합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전쟁을 경험한 호헌파 세대들이 하나둘씩 퇴장하면서 개헌 세력이 힘을 얻어온 게 일본이다. 식민지배와 전쟁에 휘말렸던 우리를 포함한 주변국으로선 9조를 개정하려는 움직임에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반세기 넘게 현행 헌법으로도 충분히 경제적으로는 물론이요, 군사적으로 강성하게 됐는데도 굳이 9조에 손을 대려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호헌보다는 개헌쪽을 약간 더 지지하는 일본인들은 9조 개정이라는 각론에서는 반대의견이 훨씬 많다. 게다가 군위안부, 역사교과서, 야스쿠니신사 문제 등에서 아베 총리를 포함한 개헌주도 세력이 보이는 역사망각적 언행은 개헌의 본심이 군국주의 회귀에 있지나 않은지 의심케 한다. 일본의 개헌주도 세력은 지난 세기 동아시아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부정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들이 이제 전쟁과 군대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마저 버리려 한다. 이것이 세계는 물론 일본 스스로에게도 새로운 불행의 씨앗이 아닌지 자문해보기 바란다.
  • 아베, 야스쿠니신사에 ‘공물’

    |도쿄 박홍기특파원·서울 김미경기자|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21∼23일 치러진 야스쿠니신사 춘계대제 기간에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의 명의로 신사에 공물을 바친 사실이 8일 확인됨에 따라 신사참배를 둘러싼 외교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개인 비용으로 춘계대제 때 5만엔 상당의 높이 2m인 비쭈기나무 화분을 신사 측에 보냈다고 일본 언론들이 이날 보도했다. 일본에서 비쭈기나무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져 신전에 바쳐지고 있다. 화분은 신사 본당으로 올라가는 목제 계단의 옆에 다른 화분들과 함께 배치됐다. 신사에 대한 공물 제공은 지난 1985년 8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이래 22년 만이다. 신사참배 여부에 애매한 입장을 취해 왔던 아베 총리는 결국 한국·중국 등 주변국의 강한 반발을 의식, 직접 참배하지 않는 대신 신사측에 마음을 전한 셈이다. 때문에 아베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사과를 비롯, 일련의 사죄성 발언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는 처지에 놓였다. 외교부는 이와 관련,“과거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 범죄자를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에 아베 총리가 공물을 보낸 것은 역내 평화와 안정의 근간이 되는 올바른 역사인식 정립에 역행하는 것으로 매우 유감스럽다.”고 논평했다. 중국 외무성도 “중·일 관계에 있어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라며 일본 측에 신중한 자세를 촉구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저녁 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며, 명복을 빈다. 이런 생각을 계속 갖고 싶다.”라며 봉납 사실을 인정했다.한편 민주당을 비롯, 야당들은 아베 총리의 애매한 대응에 “양다리를 걸친 태도”라며 일제히 비판, 정치적 이슈로 삼고 있다.hkpark@seoul.co.kr
  • 야스쿠니 A급전범 분사 日 유족회 “긍정적 고려”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야스쿠니신사에서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에 대한 분사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일본 유족회(회장 고가 마코토 전 자민당 간사장)는 8일 A급 전범을 신사에서 분리, 안치할지 여부 등을 검토하기 위한 ‘연구회’의 첫 회의를 갖기로 했다. 유족회는 집권 자민당의 최대 지지기반이자 야스쿠니 신사의 최대 지원 단체이다. 6일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최근 히로히토 일왕이 ‘A급 전범의 합사에 불쾌, 신사 참배를 중단했다.’는 등의 증언 및 자료가 잇따라 공개됨에 따라 유족회 안에 ‘A급 전범의 분사용인론’이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가 회장도 “국립국회도서관의 신자료집에서도 합사 과정에 정부가 적극 개입한 사실이 드러난 만큼 연구회에서 분사를 논의해도 좋다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말했다. 특히 ‘연구회’의 회원 15명 가운데 분사를 긍적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회원이 8명으로 절반을 넘는다고 신문은 전했다. 적극적인 분사 찬성과 충분한 논의를 조건으로 한 분사 용인이 각각 4명 정도씩이다. 연구회는 회의에서 우선 1978년 10월의 A급 전범 합사의 경위 등 야스쿠니의 역사나 과거의 유족회 활동 등을 정리한 뒤 일단 실질적인 분사 논의는 오는 7월 참의원 선거 뒤로 미룰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hkpark@seoul.co.kr
  • 아베 신사참배 여부 ‘촉각’

    |도쿄 박홍기특파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1일 시작되는 야스쿠니신사의 봄 축제인 ‘춘계대제(春季大祭)’에 참석,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지에 일본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4월 관방장관 재직때 춘계대제 직전, 신사를 참배한 전례가 있다. 총리 이후 처음 맞는 춘계대제이기도 하다. 특히 “(참배) 자체가 외교 문제가 되는 현실에 있는 이상 참배할까, 하지 않을까를 말하지 않겠다.”는 아베 총리의 애매모호한 입장도 관심을 불러모으는 데 한몫하고 있다. 일각에선 “올해도 또 참배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지만 큰 흐름은 “참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쪽이다. 무엇보다 지난 11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일본 방문으로 모처럼 다져진 양국간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굳이 깨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나아가 오는 26·27일의 방미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4월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주관한 신주쿠교엔 벚꽃감상회에 가기 전에 신사를 찾았다. 그러나 지난 14일 자신이 벚꽃감상회를 주관했지만 야스쿠니신사는 참배하지 않았다. 원 총리의 방일 직전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중국 인민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했다. 두번 다시 없기를 희망한다.”는 ‘경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터이다. 외무성 한 간부는 “만약 신사를 참배한다면 (중·일 관계개선에 나선) 중국의 후진타오 정권의 기반도 위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중국 관계에 신경을 쓰는 이상 춘계대전뿐 아니라 이후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어려울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렇다고 변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베 총리의 ‘소신 행보’가 가장 큰 미지수다. 또 자민당 일각에서 터져나오는 “중국의 말에 따라 참배를 피해서는 안 된다. 종전 기념일인 8·15에는 당당하게 참배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자민당의 한 관계자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다면 8월15일이나 추계대제 기간에 참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20일 교도통신이 전했다.hkpark@seoul.co.kr
  • 원자바오 中총리 “日, 역사문제 행동으로 보여달라”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을 공식 방문 중인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12일 역사문제에 대해 “실제 행동으로 보이길 진심으로 희망한다.”며 일본의 전향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원 총리는 이날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전략적 호혜관계의 구축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역사문제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22년 만에 일본 국회에서 연설하는 중국 지도자이자 7년 만에 일본땅을 밟은 중국 총리라는 ‘상징성’으로 국제 사회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원 총리의 연설은 일본과 중국에 TV로 생중계됐다. 원 총리는 1937년의 중·일 전쟁과 관련,“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중국 인민은 중대한 재난을 당했다.”면서 “그러나 침략전쟁의 책임은 소수의 군국주의자가 져야 한다. 일본 국민도 전쟁의 피해자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측의 깊은 반성과 사과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고 전제한 뒤 “일본은 태도 표명과 약속을 실제 행동으로 보이길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또 “역사를 귀감으로 삼는 것은 원한을 계속 안고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미래를 열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및 일본군 위안부 등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적극적인 행동 변화를 에둘러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원 총리는 국회 연설에 이어 왕궁을 방문,30분 동안 아키히토 일왕과 면담한 자리에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초청 의사를 밝혔다. hkpark@seoul.co.kr
  • 中-日 ‘해빙 여행’

    中-日 ‘해빙 여행’

    |도쿄 박홍기특파원|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일본 방문을 ‘해빙의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또 “상호 신뢰와 우정을 증진시키고 싶다.”는 의중을 밝혔다. 일본 역시 6년 6개월 만에 방문하는 중국 총리에 대한 접대가 여느 때와 다르다.11일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12일 중국 총리로서는 처음 국회에서 연설하는 데다 일본 왕도 접견할 예정이다.13일에는 오사카와 교도를 방문해 농촌을 둘러보고, 현지 대학생들과도 대화를 나눈다.‘우호 무드’를 강화하기 위한 중국측의 행보이자 일본측의 배려인 셈이다. 지난해 10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기 전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정치 문제와 얽혀 냉랭하기 짝이 없던 양국 관계가 아니다. 중국과 일본은 민감한 정치문제보다 경제관계에 가급적 비중을 뒀다. 양국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정치 현안은 미루고 실리를 담보할 수 있는 경제 쪽을 택한 것이다. 실제 지난해 10월 중·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전략적 호혜관계’의 본격적인 구축에 나섰다. 대표적인 사례로 해마다 한 차례씩 열릴 ‘중·일 고위급 경제대화’라고 일컫는 경제각료회의체의 구성을 꼽을 수 있다. 또 일본의 에너지 절약 기술을 지원하는 ‘에너지 정책대화’ 개최도 마찬가지다. 양국이 갖가지 경제정책을 톱다운 방식으로 추진하는 경제대화는 12일 첫 회의를 갖는다. 일본 아소 다로 외무상과 중국의 쩡페이옌 국무원 부총리가 대표로 나설 계획이다. 대화에서는 에너지 분야의 협력뿐 아니라 지적재산권 보호와 중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의 보장 등이 집중 논의될 예정이다. 특히 중국은 2003년 병해충 반입을 우려, 금지해온 일본 쌀의 수입을 4년 만에 받아들였다. 일본측은 중국의 경제발전에 힘입어 커지는 쌀소비 시장에 줄곧 눈독을 들여왔었다.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상은 “일본 농산물의 상징인 쌀이 2억t의 시장인 중국에 들어가는 데 의의가 크다.”고 밝혔을 정도다. 나아가 일본 하네다와 상하이 훙차오 공항 간의 전세기 직항노선도 개설돼 양국 사이의 경제교류가 한층 활발해질 것으로 관측된다. 양국은 범죄수사 공조체제도 갖추기로 했다. 물론 중·일 정상은 양국 사이에 마찰을 빚고 있는 동중국해의 가스개발과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강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을 뿐이다.‘정치적 수사’만 오갔을 뿐 확고한 해결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역사 문제에 대해 “일본은 평화국가로서 걷고 있다.”는 등의 답변으로 얼버무렸다. 동중국해 가스전 개발이나 북핵 대응에 있어서는 적잖은 온도차를 확인했다.‘해빙’의 ‘불안정 요소’인 셈이다. 어쨌든 원 총리의 답방에 이어 아베 총리가 가을에 중국을 다시 방문할 의향을 가진 만큼 중·일 관계는 분명 새로운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hkpark@seoul.co.kr
  • “日軍 위안소 설치 지시 네덜란드 판결문 발견”

    |도쿄 박홍기특파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가 없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뒤집는 증거가 네덜란드의 법원 판결문에서 발견됐다고 교도통신이 11일 베를린발로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자료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던 일본인 아오치 와시오(사망)가 2차 세계대전 후 체포돼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에서 증언한 판결문 내용이다. 아오치는 재판에서 점령지의 군정 당국인 군정감부(軍政監部)의 지시를 받고 민간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오치는 지난달 일본 국회도서관의 야스쿠니신사 자료 공개에서 지난 1967년 전사자들과 합사됐던 것으로 드러난 당사자다. 독일에 체류 중인 언론인 가지무라 다이치로가 입수한 전범재판소 판결문은 “아오치는 1943년 6월2일 군정감부로부터 매춘업소를 개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차 지시를 받은 뒤 수용했다.”고 기록, 군이 위안소 설치를 지시한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또 아오치는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 중이던 1943년에 ‘사쿠라클럽’이란 위안소를 설치했다고 적고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아오치의 애인인 네덜란드 여성은 “헌병을 부르겠다.”며 협박, 소녀를 포함해 네덜란드인 여성들에게 매춘을 강요했다. 매춘을 거부하는 여성들은 관헌에 체포돼 감금당하기도 했다. 아오치는 1946년 10월 네덜란드군이 개설한 임시 군법회의에서 강제 매춘죄로 금고 10년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 숨졌다.hkpark@seoul.co.kr
  • [한·미 FTA 시대] 日, 한·일FTA 교섭재개 시사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시오자키 야스히사 관방장관은 3일 한·일 양국간의 중단된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대해 “구체적인 문제는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면서 “언제라도 교섭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교섭 재개 의사를 내비쳤다. 아베 신조 총리도 이날 “(한·일 양국의 FTA 협상 재개를 위해) 서로가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시오자키 장관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정상 레벨을 포함해 협상 재개를 한국측에 요청해 왔으며, 앞으로도 성의를 갖고 조기 협상재개를 위해 한국측에 촉구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한·미 FTA 합의와 관련,“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 경제의 한 단계 발전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번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평가한 뒤 “일본의 미국이나 한국으로의 수출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한·미 협정의 내용을 잘 보고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일 FTA 협상은 2004년 11월 이후 중단됐다. 한국의 대일 농산물 시장개방 요구에 일본측의 반대가 극심했다.반면 한국 중소기업들이 일본의 공산품 수입관세 철폐에 반발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둘러싼 외교적 마찰까지 겹쳐 협상이 진행되지 못했다. 한편 아베 총리는 이날 미·일 양국의 FTA 협상 가능성에 대해 “양국의 경제규모를 염두에 두면서 (협정을) 장래의 과제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hkpark@seoul.co.kr
  • 日 “고노담화 계승하겠다” 韓 “잘못된 발언 하지말라”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외상이 일제 군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일본 정부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아소 외상은 지난 31일부터 1일까지 제주도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과 만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지난 26일 국회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답변한 바와 같이 일본은 고노 담화를 계승하며 위안부 당사자들에 대해 사과하는 정부의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고노 담화’는 지난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晋三) 당시 관방장관이 태평양전쟁 당시 종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일본 관리들이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사과를 표시한 것이다. 회담에서 양국은 외교·국방부 국장급 당국자들간 실무협의체인 한·일 안전보장대화를 5월 중 재개, 북한문제 및 동북아 정세 변화 등에 공동으로 대응키로 했으며 오는 6월3일 제주에서 한·중·일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 동북아 지역협력 등을 논의키로 했다. ●아직도 갈 길 먼 역사인식문제 송 장관은 모두발언에서부터 역사인식 문제를 지적하며 일본측을 압박했다.2시간가량 진행된 공식 회담에서 양측은 군대 위안부·독도·교과서 검정·야스쿠니신사 문제 등에 대해 설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군대 위안부 문제와 관련, 일본측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에 따라 더 이상 거론하기 꺼려했지만 우리측은 일본 지도자들의 잘못된 발언에 유감을 표하며 재발 방지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관계자는 “아소 외상은 고노 담화 계승만 확인했을 뿐 지도자들의 발언에 대해서 사과한다는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송 장관과 아소 외상은 독도 문제와 고교 교과서 검정, 야스쿠니신사 문제 등에서도 이견을 드러냈다. 독도에 대한 고교 교과서 검정에 대해 “어떤 영유권 주장도 용납할 수 없다.”는 우리측 입장에 일본측은 “다케시마(독도)에 대해서는 일본도 일본측의 입장이 있으며, 대국적인 관점에서 냉정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며 맞섰다. ●FTA,6자회담도 미묘한 시각차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재개는 일본측이 필요성을 강조하며 먼저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측은 한·미 FTA가 막바지인 만큼 당장은 한·일 FTA에 나서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높은 수준의 FTA가 체결될 수 있는 기반 마련이 먼저 필요하다.”며 신중한 입장을 전달했다. 아소 외상은 “한국측이 한·미 FTA를 하는 상황에서 사람이 부족하고 물리적으로 힘들어서 한·일 FTA까지 할 인력이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6자회담 ‘2·13합의’에 대한 의견도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우리측은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측 입장을 이해한다고 밝히면서도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에 일본측이 참여해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귀포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日교과서 독도 영유권 주장 강화

    日교과서 독도 영유권 주장 강화

    |도쿄 박홍기특파원 서울 김미경 기자| 일본 정부가 내년부터 사용될 고교 2·3학년의 교과서에 독도의 일본 영유권 주장을 한층 강화했다. 또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 부분은 아예 뺀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30일 2008년도의 지리·역사 등 205종의 고교 교과서에 대한 검정결과를 발표했다. 문부성은 검정과정에서 한국과 북한·중국에 관한 역사 내용에 강하게 수정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정부가 역사의 왜곡·축소를 주도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외교부는 이날 성명을 내고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술한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킨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즉각적인 철회를 촉구했다. 또 교과서 내용을 철저히 검증한 뒤 강력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문부성은 일본사 A·B과목 교과서를 검정하면서 독도와 관련, 검정 신청본의 ‘1693년 조선과의 사이에 다케시마 문제 발생’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라는 이유로 문제 삼아 삭제했다. 독도의 일본 영유권 주장을 강화한 것이다. 문부성은 ‘센카쿠열도나 다케시마의 영유권 문제 등 미해결 문제가 있다.’는 부분도 같은 이유를 들어 ‘한국과는 다케시마를 둘러싼 문제가 있으며, 중국은 센카쿠 열도의 영토를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바꾸게 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독도 관련 표현은 16군데에서 발견됐다.”면서 “그 흐름은 일본 영유권을 강화 쪽에 맞춰졌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난징대학살과 관련, 검정신청본은 ‘희생자수가 후일 극동군사재판에서 20만명으로 나오는 등 일본의 책임이 엄격히 추궁됨’이라고 표현돼있으나 통과본은 ‘20만명’에 각주를 달아 ‘희생자수에 대해서는 십 수만명,4만명 전후 등 다양한 설이 있으나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중국은 30만명이라고 주장함’이라며 얼버무렸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관련,‘지금까지 합헌이라는 판결은 없음’이라는 내용에 대해서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며 ‘지금까지 공식참배를 합헌으로 인정한 판결은 없음’으로 고쳤다. 동해 명칭의 경우, 당초 검정신청본에 ‘우리들이 부르는 일본해라는 명칭은 한국에서는 동해라고도 불리우고 있음’이라고 돼 있었지만 ‘세계지도에서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일본해는 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불리워짐’으로 기술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경우, 신청본에 ‘과거 일본이 행한 강제연행, 종군위안부 관련 문제에서 현재 개인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제기되어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되고 있음. 정부는 전후보상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갖고 있으나 위안부의 다수는 국가에 의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음’으로 실렸었으나 통과본에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되고 있음’이 빠졌다. 교도통신은 이날 대부분의 일본사와 세계사 교과서에는 군대 위안부의 모집 과정에서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는 표현은 검정을 신청하는 단계에서부터 제외됐다고 보도했다. 군대 위안부 문제는 세계사와 일본사 11권의 21곳에 기재된 것으로 전해졌다. 문부성은 일본사 A,B과목에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자결을 강제했다고 쓴 7곳에 대해 수정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져 심각한 과거사 왜곡이라는 내부 비판에 직면했다. hkpark@seoul.co.kr
  • [씨줄날줄] 후나바시 요이치/황성기 논설위원

    일본 아사히신문의 명 칼럼니스트 후나바시 요이치가 이달 30일자 주간 아사히에 쓴 칼럼은 군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일본고립의 내적인 구조에 눈을 돌릴 때이다’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미국 지도층들이 일본을 보는 냉랭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위안부문제와 더불어 6자회담에서 북핵 해결보다는 납치문제를 우선시하며 고립해 가는 일본 외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칼럼 서두에서 “(미국의)지일파가 일본에 대한 위화감을 표명하기 시작했다.”면서 “(워싱턴에서)누구라도 위안부문제를 먼저 제기한다.”고 쓰고 있다. 그가 만난 미 행정부, 의회, 싱크탱크 관계자의 말을 옮겨보자.“일본 정치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일본인 납치문제에 동정적인 공화당 의원조차도 위안부 결의안에 반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야스쿠니신사 문제로 그렇게 외교적으로 점수를 잃었는데도 위안부문제로 더 실점할 셈인가. 일본이 이런 상태라면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전략문제에 대해 중국을 파트너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후나바시는 부시 행정부가 “위안부문제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와는 다르다. 누구도 일본을 변호해줄 수 없다. 일본이 고립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는 얘기도 아울러 전했다. 후나바시는 이라크전쟁의 전우로서 돈독했던 부시·고이즈미 시대에는 리처드 아미티지, 마이클 그린 같은 지일파가 정권의 핵심에 있어서 대일 관계가 전략적으로 행해졌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부시·아베 시대에는 서로의 이해·관심을 각자 쏟아내고만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전후세대의 정치지도층을 중심으로 납치나 군위안부 같은 단일 이슈로 외교에 임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야스쿠니 문제로 아시아에서 외면당하고 미국 일변도 외교를 펼쳤던 고이즈미 시대의 혼란스러움이 아베 신조 정권에도 이어져 동북아 협력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는 후나바시의 식견은 탁월하다. 군위안부 문제로 미국마저 등을 돌리며 국제고립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이 지금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 칼럼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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