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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 대통령 “결코 5대비리 배제 공약 후퇴 아니다”

    문 대통령 “결코 5대비리 배제 공약 후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9일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등의 위장전입 논란과 관련, “지금의 논란은 (‘5대비리 관련자 고위공직자 배제’ 원칙을 실제 적용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하는) 그런 준비과정을 거칠 여유가 없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란 점에서 야당 의원들과 국민께 양해를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5대 비리(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세금 탈루, 논문 표절)에 관한 구체적 인사기준을 마련한다는 것은 결코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거나 또는 후퇴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 여민1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 모두 발언에서 “발생한 논란들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개별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의 인사를 위해서 국정기획자문위와 또 인사수석실, 민정수석실의 협의를 통해서 현실성 있게, 국민 눈높이에 맞게, 원칙을 지킬 수 있는 구체적 인사 기준을 빠른 시일 내 마련해 주시기를 바란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인사기준을 마련하면서 공약의 기본 정신을 훼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제가 당선 첫날(10일) 곧바로 총리 후보자를 지명했는데, 최대한 빠르게 내각을 구성해서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인사 탕평을 바라는 국민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총리 후보자의 국회 인준이 늦어지고, 또 정치화되면서 한시라도 빨리 후보자를 지명하고자 했던 저의 노력이 허탈한 일이 되어 버렸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문 대통령은 또한 “(5대비리 배제원칙이)지나치게 이상적인 공약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제가 공약한 것은 그야말로 원칙이고,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구체적 기준이 필요하다”면서 “사안마다 발생 시기와 의도, 구체적 사정, 비난 가능성이 다 다른데 예외없이 배제라는 원칙은 현실 속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문 대통령은 “그때그때 적용이 달라지는 고무줄 잣대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라며 “만약 인수위 과정이 있었다면 구체적 기준을 사전에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지 못한 가운데 시작됐기 때문에 논란이 생기고 말았다”고 해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알고 계셨나요] ‘세종청사의 허리’ 법제처…정부부처의 미드필더로

    [알고 계셨나요] ‘세종청사의 허리’ 법제처…정부부처의 미드필더로

    우리 몸의 중심이 되는 척추를 받쳐 주는 허리는 사람에게 중요한 부위이다. 축구는 통상 중원의 허리 싸움에서 승기를 잡는 팀이 이긴다. 조직도 강해지려면 허리에 속하는 중간관리층의 맨파워가 좋아야 한다.행운의 숫자 7번 동에 위치한 법제처는 용틀임 형태를 하고 있는 정부세종청사의 허리 부분에 위치해 있다. 정부청사의 중심에 있는 법제처의 입지 여건은 다른 부처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무엇보다 교통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다. BRT(간선급행버스체계) 정류장과 고속버스터미널이 가까운 그야말로 역세권이다. 또 문화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지척에 있는 홈플러스 문화센터에서 기타, 드럼, 요가, 댄스 등 다양한 취미활동이 가능하다. 쾌적한 주차시설을 무료로 이용하고 퇴근길에 편하게 쇼핑할 수도 있다. 길 건너에 있는 테니스장과 축구장은 체력단련과 스트레스 해소에 제격이다. 청사 건물 바로 옆을 흐르는 방축천 산책길은 청계천이 부럽지 않다. 방축천 지킴이 왕벚나무 아래 돗자리 깔고 짜장면 시켜 먹는 재미는 덤이다. 쾌적하고 채광이 좋은 법제처 구내식당은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찾아오는 타 부처 공무원들로 북적댄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다. 대표적 감정노동자인 법제처 직원들에게 잘 다져진 심신의 건강은 고품질의 법제서비스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법제처가 적극 행정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공공기관 종합청렴도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된 것은 이러한 입지 여건도 한몫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세종청사의 허리 법제처가 강해야 정부가 강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동안 정부입법의 수문장이었던 법제처가 중원을 장악하는 미드필더로서 결승골의 특급 도우미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 채향석 명예기자(법제처 대변인)
  • 최다 우승에도… 벵거 거취 ‘안갯속’

    내일 소집 이사회 결론 불투명 잉글랜드 축구협회(FA)컵 팀 최다(13회) 우승과 사령탑으로서 일곱 번째 우승을 차지했지만 아르센 벵거(58) 아스널 감독의 운명은 여전히 안갯속이라고 미국 ESPN FC가 28일 지적했다. 벵거는 첼시를 2-1로 꺾고 우승함으로써 1887~1920년 사이에 여섯 차례 우승한 조지 램지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이 대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령탑으로 자리매김했다. 벵거는 자신이야말로 아스널 감독에 가장 맞춤한 인물로 여겨진다고 밝혔다. 나아가 자신을 몰아내려는 것은 21년 동안 지휘해 온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30일이나 다음날 소집될 예정인 구단 이사회도 같은 생각일지는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벵거는 “완벽한 방법이란 없다. 우리 클럽을 위해 내가 더 나은 역할을 하길 원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사들은 내가 이 클럽을 이끄는 데 걸맞은 인물인가를 따질 것이다.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건 인기의 문제가 아니라 적절함의 문제”라고 단언했다. 스스로를 적임자라고 믿느냐는 질문엔 “이봐요. 여러분이 그 자리에 가장 맞춤한 인물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최고의 자리에 35년이나 머무를 수 있겠어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사회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불투명하다. 가장 많은 지분을 소유한 스탠 크로엔케와 이반 개지디스는 웸블리 구장에서 경기를 지켜봤지만 취재진의 질문에 함구로 일관했다. 아스널 팬들은 스스로의 결단을 촉구하는 펼침막 ‘아르센은 알고 있다’를 내걸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FA컵] 대회 최다(13회) 개인 최다(7회) 우승한 벵거, 먹구름 걷힐까

    [FA컵] 대회 최다(13회) 개인 최다(7회) 우승한 벵거, 먹구름 걷힐까

    잉글랜드 축구협회(FA) 컵 최다 우승인 13회째 우승과 자신이 지휘봉을 잡고 7번째 우승을 이뤄지만 아르센 벵거 감독의 운명은 여전히 안갯속이라고 미국 ESPN FC가 28일 지적했다. 이날은 유럽 프로축구 컵대회 결승이 일제히 막을 내린 날이다. 스페인 프로축구 바르셀로나가 코파 델레이(국왕컵) 3연패에 성공했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독일축구협회(DFB) 포칼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셀틱이 스코틀랜드컵을 제패하며 시즌 트레블을 달성했고, 파리 생제르맹(PSG)은 프랑스컵 통산 11번째이자 세 시즌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모든 소식을 보잘 것 없게 만든 위기의 남자가 바로 벵거 감독. 그는 이날 10명이 뛴 첼시를 2-1로 꺾고 우승함으로써 1887년부터 1920년까지 여섯 차례 우승한 조지 램지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이 대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령탑의 영예를 차지했다. 벵거는 자신이야말로 아스널 감독에 맞춤한 인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이런 식으로 몰아내는 것은 21년 동안 지휘해온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태도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30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구단 이사회도 같은 생각일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벵거는 “완벽한 방법이란 없다. 우리 클럽을 위해 내가 더 나은 역할을 하길 원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사들은 내가 이 클럽을 이끄는 데 맞춤한 인물인가를 따질 것이다.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건 인기의 문제가 아니라 적절함의 문제”라고 단언했다. 자신이 적임자라고 믿느냐는 질문에는 “이봐요. 여러분이 그 자리에 가장 맞춤한 인물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최고의 자리에 35년 동안 있을 수 있을 수 없다고 믿을 수 있겠어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사회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불투명하다. 가장 많은 지분을 소유한 스탠 크로엔케와 이반 가지디스는 웸블리 구장에서 이날 경기를 지켜봤지만 취재진의 질문에 함구로 일관했다. 아스널 팬들은 이날 격렬한 시위보다 벵거 감독의 선택을 촉구하는 다음 펼침막을 내걸며 조용한 압박에 나섰다. ‘아르센은 알고 있다.(Arsene Knows)’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살이] ‘백악산도 돌려주오’

    [노주석의 서울살이] ‘백악산도 돌려주오’

    지난 주말 백악산(북악산) 탐방길에 못 볼 걸 봤다. 사적 제10호 국가지정 문화재인 한양도성 성벽 위에 세워진 군 초소들이 그것이다. 철거 가능한 목제가 아니라 시멘트 벽돌 구조체를 성벽 위에 포갰거나 덧대 지었다. 체성(體城)의 성가퀴 옥개석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얹은 불법 이층 초소도 보였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려는 시설물인지 궁금하다. 모 방송국 드라마 제작팀이 사적 제125호 덕수궁 돌담에 낙서 포스터를 붙였다가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것이 벌써 십수년 전 일이다. 백주 대낮 서울의 턱밑에서 벌어진 문화재 훼손 현장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뿐 아니다. 우리가 흔히 ‘청와대 뒷산’이라고 부르는 백악산은 신분증이 없으면 오를 수 없다. 안내소에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출입증을 받아야 한다. 웬만한 국경이나 공항의 출입국 절차를 방불케 한다. 이곳에 상주하는 역사해설사들도 마찬가지란다. 늘 보는 얼굴이건만 휴대전화에 담긴 사본 제시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깐깐하다. 여권이 없는 외국인에게도 예외는 없다. ‘군·사·시·설·보·호·구·역’이기 때문이다. 백악산에서 경관이 트인 곳은 어김없이 촬영을 금한다. 군복 대신 등산복 차림의 초병이 눈을 부라리고 제지한다. 백악마루(342m)나 청운대(293m)에서는 늘 극심한 ‘촬영전쟁’이 벌어진다. 카메라나 휴대전화를 들이대면 안 된다. ‘가’급 국가 주요 보안시설인 ‘청·와·대’가 앵글에 담기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김신조 일당이 남긴 반세기 전 유물이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 이곳은 닫혀 있었다. ‘수도 서울 사수’와 ‘청와대 경호’의 논리가 40년간 지배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숙정문에 올랐고, 그 후 1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악의 시계는 멈춰 있다. 초소에 들어가서 서울을 지키거나 신분증 검사로 청와대를 방어한다는 논리는 그때 사라져야 했다. 북한이 잠수함에서 탄도미사일을 쏠 능력을 갖췄고, 장사정포 340문이 서울을 사거리 안에 두고 있는 마당이다. 15개의 총탄 자국에 흰 페인트를 뒤집어쓴 수령 200년의 ‘1·21사태 소나무’처럼 백악 구간은 요지부동이다. 한양도성 성벽에 기대 나라를 지키려던 왕조시대의 발상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군소리 없이 묵묵히 통제에 따른 시민을 볼모로 ‘김신조 망령’이 춤추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주말 일정을 출입기자들과 함께 백악산에서 보냈지만 아쉽게도 불필요한 군사보호시설 해제에는 눈길이 닿지 않은 듯하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복원 비용으로 수백억원의 세금을 쓴 도성 성곽을 훼손하는 초소는 물론 백악 자락에 흉물처럼 도사리고 있는 갖가지 군 시설물이 ‘서울 최고의 경관’을 망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백악산 군 시설물이야말로 새 정부의 청산 대상 적폐 중 한 가지가 아닐까. 대통령 집무실의 광화문 이전과 청와대의 공원화 공약이 기정사실화되면서 그동안 마음 놓고 오갈 수 없었던 금역의 개방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존재다. 서울의 모성(母城) 한양도성 위에 군림하는 군 시설물은 철거하는 게 마땅하다. 서울의 주산(主山) 백악산 일대를 DMZ화하는 시대착오적인 군사보호구역도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의 경계망은 경복궁 궁역 안으로 물려도 충분하다고 본다. 오가는 시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킬 것이다. 청와대와 더불어 백악산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나만 옳다’는 생각이야말로 극단주의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나만 옳다’는 생각이야말로 극단주의

    지난 22일 영국 맨체스터의 한 공연장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로 22명이 사망했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보도에 따르면 용의자는 이슬람국가(IS)의 극단주의를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혼자서 계획하고 실행하는 ‘외로운 늑대형 테러’를 자행했다. 최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의 대부분이 외로운 늑대형 테러라는 점에서 심각성은 크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증가로 유럽 각국은 난민에 대한 빗장을 굳게 걸었고, 이는 또 다른 테러를 배태하는 슬픈 구조를 만들고 있다. 영국뿐 아니라 최근 소말리아에서도 차량 폭탄 테러가 일어나 선량한 시민들이 희생됐다. 세계는 지금 테러 공포에 떨고 있다.이슬람 진영의 테러 위협으로 생의 푸르른 날들을 잃어버린 한 작가가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 중 가장 도발적인 것을 취해 이슬람교의 탄생을 묘사한 소설 ‘악마의 시’로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1989년 파트와, 즉 종교 칙령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살만 루슈디가 그 주인공이다. 루슈디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탄을 대천사로 착각해 사탄의 말을 코란에 기록했다가 삭제했다는 일화를 ‘악마의 시’에 담아 냈는데, 이는 이슬람 세계의 최대 금기 중 하나다. 살해 위협은 계속됐고, 결국 루슈디는 영국 경찰의 보호 아래 숨어 살아야만 했다. 파장은 커서 루슈디뿐 아니라 ‘악마의 시’를 출간한 출판인과 번역가, 서점, 도서관도 테러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조지프 앤턴’은 영국 경찰의 보호 아래 숨어 살며 자신과 작품을 지키고자 했던 루슈디의 분투가 담긴 회고록이다. 파트와는 1998년 9월 종식됐지만, 루슈디는 이후 4년 더 영국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 루슈디는 13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에 갇힌 기분”의 나날이었다고 고백한다. 조지프 앤턴은 루슈디가 존경하는 작가 조지프 콘래드와 안톤 체호프를 조합해 만든 가명인데, 그의 실체를 모르는 주변 이웃들은 그저 ‘앤턴씨’ 혹은 ‘조’라고 불렀다. 감옥에서 벗어난 10년 후인 2012년 선보인 ‘조지프 앤턴’은 프랑스 월간 ‘르푸앵’으로부터 “스릴러이자 한 편의 서사이며 정치적 에세이이자 사랑 이야기이고 자유에 대한 송가”라는 극찬을 받았다.‘조지프 앤턴’에서는 숨어 살던 시절의 한풀이나 이슬람에 대한 비판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감옥과도 같은 날들을 통해 작가로서 정체성을 더욱 충실하게 다져 간 내용이 주를 이룬다. 설령 어떤 작품이 신성모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이야기를 통제할 권리”를 누군가에게 주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루슈디는 “경건하든 불경스럽든, 열광적이든 냉소적이든 그것은 열린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환경을 떠받치는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더 존엄해진다는 사실을 루슈디는 감옥과 진배없는 시공간에서 깨우친 것이다.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한 종교 안에서는 진리인 것이 다른 종교, 다른 세상에서는 절대 진리일 수 없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는 결국 진리의 과해석이 낳은 혹은 잘못된 진리를 받아들인 결과인 셈이다. 이슬람 극단주의뿐 아니다. 여타 종교의 극단주의와 원리주의가 세상을 파괴로 이끈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누누이 배워 왔다. 어디 종교뿐이겠는가.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실은 세상을 파괴로 이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테러는 어쩌면 우리, 아니 내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때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 [열린세상] 우리 언론, 적폐인가/김종면 서울여대 국문과 겸임교수

    [열린세상] 우리 언론, 적폐인가/김종면 서울여대 국문과 겸임교수

    언론은 세상을 향한 창이다. 언론은 일정한 프레임과 잣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뉴스를 전달한다. 문제는 언론이 반드시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보도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논할 때 흔히 언급되는 미국의 허친스위원회는 “이제 사실을 진실하게 보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에 관한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단순한 사실 보도를 넘어 이면의 진실까지 깊이 살펴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그와 거리가 멀다. 세월호 보도만 해도 그렇다. ‘전원 구조 오보’ 소동까지 빚었다. 당시 KBS 기자들은 “구조 당국의 미흡했던 초기 대응, 사고 대처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부족한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못했다”는 성명서를 냈다. MBC 기자들 또한 “유족과 실종자 가족을 찾아간 박근혜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는 빠짐없이 보도했지만 정작 현장 상황은 누락하거나 왜곡한 적이 많았다”고 시인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는가. 사실 뒤에 가려진 진실을 보여 주기는커녕 사실 보도조차 제대로 못 했다. 세월호 관련 보도 참사는 최근에도 벌어졌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SBS는 해양수산부가 세월호 인양을 차기 정권과 거래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세월호 인양을 3년 동안 방치한 것이 대선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SBS는 오보임을 인정하고 사과 방송까지 했지만 만만찮은 후폭풍을 몰고 왔다. SBS는 결국 취재와 기사 작성, 데스킹, 게이트키핑 모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것이 이른바 ‘지상파 3사’라는 방송의 수준이다. 정파적 저널리즘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이 같은 언론 아닌 언론의 행태를 언제까지 보아야 할까. 사회 공론을 왜곡하는 ‘정치언론’이 너무 많다. 종합편성채널 출범 이후 정치 시사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면서 등장한 ‘패널’이라는 사람들의 마구잡이 발언은 언론의 저급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최소한의 공평성이라도 지킨다면 소극적인 의미에서나마 ‘공정방송’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대놓고 정파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한 건 잡았다는 식의 흠집 내기 ‘가차(gotcha) 저널리즘’이 판친다. 어느 종편 진행자는 출연자에게 공직생활 중 취득한 ‘기밀’을 말하라며 죄인인 양 다그치는 한심한 태도를 보여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 땅의 언론은 죽었는가. 그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꼴이다. 언론에 대한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과 관련해서는 ‘부역언론’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온다. 언론이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라는 본연의 기능을 망각하고 스스로 정치 권력화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오피니언(의견)과 팩트(사실)를 뒤섞어 국민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언론’은 더이상 언론이 아니다. 그 자체로 ‘적폐’다. 오죽하면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들이 만난 자리에서 방송 개혁을 검찰, 국가정보원 개혁과 함께 ‘3대 개혁’으로 규정하고 국회에서 논의하기로 합의까지 했겠는가. 방송을 포함한 언론 개혁은 어떤 개혁보다 절실하고 본질적인 것이다. 언론이 사회의 양심으로 제 기능을 다해야 검찰 개혁도 국정원 개혁도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언론 또한 검찰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검찰은 공무원 조직인 만큼 강력한 인사와 제도의 혁신을 통해 비자발적이나마 개혁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은 사정이 다르다. 개혁을 강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그렇다고 ‘적폐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언론 개혁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타락한 중세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해성사를 했다. 로마 순례 중에는 예수가 끌려 올라간 ‘빌라도 28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회개와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던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언론 스스로 개혁에 나서야 한다. 언론이 적폐라면 그것은 국민의 불행이요 국가의 수치다.
  • “올해·내년 기회” “공시 몰릴라”… 들썩들썩 노량진

    “올해·내년 기회” “공시 몰릴라”… 들썩들썩 노량진

    “하반기 경찰 채용 인원이 2배 정도 늘어난다니 이번에야말로 꼭 합격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경찰공무원 준비생 이모(27)씨 “6개월 정도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는데 공무원 증원은 반갑지만 공무원시험 열풍이 태풍으로 변해 경쟁자만 늘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일반행정직 공무원 준비생 최모(25)씨25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에서 만난 공무원시험 수험생들은 문재인 정부의 공무원 증원에 큰 기대감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 수험생은 고등학생까지 공무원시험에 나서는 상황에서 늘어나는 채용 인원보다 경쟁자가 더 많아질까 우려했다. 오전 7시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출구 인근에서 만난 서모(27)씨는 “수험 생활을 3년째 하다 보니 확정되지 않은 선발 인원 증원보다 당장 다음달에 있는 지방직 9급 시험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며 “정확한 추가 선발 인원이나 시기를 발표하지 않는다면 수험생들 사이에 혼란만 가중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올해 내에 늘리기로 한 공공부문 일자리는 1만 2000개 정도지만 구체적인 선발 시기와 채용 인원이 나온 것은 경찰공무원이 유일하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지난 22일 하반기 채용 인원을 기존의 1617명에서 3117명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소방직 1500명, 사회복지직 1500명, 군무원(부사관) 1500명, 일반행정직 3000명, 교육직 3000명은 아직 구체적인 채용계획이 나오지 않았다. 4년째 경찰공무원을 준비하는 성모(27)씨는 “하반기에 예정 인원의 2배를 뽑는 만큼 ‘합격의 기회’라는 인식이 많다”며 “시험을 보는 9월 2일까지 치열한 경쟁을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방공무원을 준비하는 오모(24)씨는 “명확한 인원이나 시기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선발 인원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 학원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한 경찰공무원 학원 관계자는 “상담이 지난달에 비해 10~20% 정도 늘었다”며 “특히 합격권에 있는 학생들은 이번 추가 선발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반행정직 수험생들은 우선 다음달 17일과 24일에 치러지는 지방직 9급과 서울시 7·9급 필기시험에 집중하고 있다. 황모(27)씨는 “가장 많은 사람이 준비하는 일반행정직은 별다른 기대감 없이 차분한 편”이라며 “시험이 코앞인데 결정되지 않은 뉴스를 보면서 희망에 부풀어 있을 시간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무분별한 공무원시험 준비생 증가로 인한 경쟁률 심화와 채용 인원 증가의 후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올해 초부터 시험을 준비한 박모(23)씨는 “장기전으로 내다보고 준비하는데 올해와 내년에 많이 뽑고, 이후 채용 인원이 줄어들까 걱정된다”고 털어놨다. 이모(23)씨는 “수험생 입장에서 공무원 증원을 환영하지만 정부의 비대화가 국가 발전에 유리한지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 대해 공무원시험 학원 관계자는 “일반행정직의 경우 아직 수강신청이나 문의전화가 크게 늘지 않았다”며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공무원을 생각하는 학생들은 이미 대부분 시험 준비에 뛰어들어 채용을 늘린다고 공시생이 크게 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예술산책] 일본 문화 중심지서 만난 1700점 한국 문화재…누구나 찾는 ‘공동의 광장’

    [함혜리 선임기자의 예술산책] 일본 문화 중심지서 만난 1700점 한국 문화재…누구나 찾는 ‘공동의 광장’

    언젠가 일본 교토에 가게 되면 반드시 방문하겠다고 마음먹은 장소가 있다. 고려미술관(高麗美術館)이다. 일본인들이 자부심을 갖는 ‘천년의 고도’ 교토에 우리나라 유물만을 모아 전시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그 미술관을 세운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에 우리 문화재로 미술관을 세웠는지도 궁금했다. 5월 초 교토 여행길에 시간을 내어 이 미술관을 찾았다. 교토역 앞에서 시영버스 9번을 타고 교토 시내의 북동쪽 가모가와 중학교 앞에서 내리니 바로 ‘고려미술관’ 방향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조용한 교토의 주택가, 푸른 하늘 맑은 공기 속에 새소리가 듣기 좋았다. 골목으로 접어들자 낯익은 우리의 돌담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우락부락하지만 맘결은 한없이 부드러울 것 같은 석인(石人)상이 반겨주듯 철문 양쪽에 지키고 서 있는 곳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고려미술관이다.일본 땅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미술관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이나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등에 설치된 한국유물 전시실을 찾았을 때와는 감동의 질이 완전히 달랐다. 고려미술관은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 혹은 기업의 도움 없이 정조문(1918~1989)이라는 재일동포 실업가 한 사람의 집념과 열정으로 설립된 곳이기 때문이다. 해외의 유일한 한국역사유물 전문 미술관인 고려미술관은 소장품 전시뿐 아니라 연구실을 두고 소장품의 조사연구와 강좌, 일본 내 다른 미술관·박물관과 전시교류 등을 하면서 조선고고학 연구, 민속학도서 자료수집 및 연구자료 출간도 하고 있다. 정부 기관이 하지 못하는 일을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해 나가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다.●‘재일동포 실업가’ 정조문의 집념과 열정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왼쪽의 정원으로 들어가자 연둣빛 이끼가 가득 덮인 오층 석탑과 다양한 석인상 등 석물들이 5월의 햇살 아래서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고베 부농의 밭에 흩어져 방치되던 것을 발견한 정조문이 15년 동안 찾아다니고 설득해 2000만엔을 주고 손에 넣은 것이라고 한다. 수백년의 세월을 품고 일본 땅 위에 서 있는 석물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하면 우리 문화재를 기반으로 하는 이 미술관이 1000여년에 걸쳐 일본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 교토에 자리잡았다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고려미술관을 설립한 정조문은 경북 예천군 우망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정건모)가 구한말 과거 급제 후 정삼품대부의 벼슬까지 한 관리여서 집안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으나 37세에 낙마 사고로 별세한 뒤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더욱이 정조문이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정진국)가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바람에 가산은 거의 바닥이 났다. 6년 만인 1924년 상해에서 돌아온 정진국은 일본 경찰의 감시로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와 아내, 큰아들 귀문(당시 8세)과 둘째 조문(당시 6세)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에 터를 잡고 베 짜는 일을 시작했지만 경찰의 감시 속에 가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학교에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정조문은 소학교 4학년에 겨우 편입해 3년을 공부했다. 그가 유일하게 받은 학교교육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겼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배달하며 9살부터 다녔던 학교생활 3년간이다. ‘아야어여’도 모르는 나는 갑자기 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고 학우들을 따라가느라 고생했다. 1년이 지나 어려움은 사라졌지만 역사수업만큼 나를 괴롭힌 것은 없었다. 신라정벌, 조선정벌, 조선병합…. 역사에서 조선은 언제나 약한 입장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못된 애들이 ‘조선 정벌이야!’ 하면서 나에게 돌을 던지며 때렸다. 그 무렵부터 내 가슴에는 역사에 대한 의문의 뿌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왜 조선은 늘 약할까?” 1937년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후처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정조문은 할머니, 동생들과 함께 오사카에 가서 부두 노동자가 됐다. 그러다 광복을 맞았다. 일본에 있던 한국인들은 귀국하거나 일본에서 다시 국적을 취득해야 했다. 그러나 몇 해 만에 조국이 분단되면서 남한의 민단과 북한의 조총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정조문은 조국은 하나라며 어느 쪽도 취득하지 않고 ‘조선 국적자’로 남았다.●우연히 만난 조선백자의 매력과 상상초월 가치 오사카에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그는 교토로 가서 1951년부터 파친코 사업을 시작했다. 선술집, 초밥집, 찻집을 개업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어느 날 교토 시내의 고미술상가를 지나다 ‘야나기’라는 고미술상 쇼윈도에 놓인 백자 항아리를 발견했다. 아무 장식도 없는 하얀 도자기가 지닌 고졸한 아름다움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즐겨 입으시던 하얀 치마저고리를 떠오르게 했다. 빨려들 듯이 가게로 들어간 그는 상상 외로 비싼 가격에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비싼지 물으니 조선 도자기의 가치에 비하면 싼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교에서, 공사판에서 ‘조센징’이라고 놀림받고 따돌림받으면서 살아온 그에게는 그야말로 세상이 뒤바뀌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는 우리 문화재의 가치가 그렇게 높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고 한다. 1년간 할부로 도자기를 구입한 뒤 다짐했다. “문화재를 수집해 보자. 일본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 미술관을 세우고 자신을 잃은 재일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거리’를 보여 주자. ” 그는 재일동포와 자라나는 2세들이 이유 없이 멸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려면 문화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돼야 하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진품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 전국의 고미술상을 찾아다니며 우리 문화재 수집에 온 힘을 다하는 한편 조선의 역사와 문화 연구 활동을 시작하며 비뚤어진 고대 한·일 관계사를 바로잡고자 했다. 형 정귀문과 도쿄에서 활동하는 재일작가 김달수와 함께 한·일 고대사에 관한 의문점들을 하나씩 풀어 보고자 교토대에 재직하고 있던 역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를 찾아갔다. 우에다 교수는 저서 ‘귀화인’(歸化人·1965)을 통해 조선반도에서 고대 일본에 온 사람을 귀화했다고 말할 수 없다며 도래인(渡來人)이 맞다는 주장을 폈던 진보적인 학자였다. 우에다 교수는 비뚤어진 한·일 관계사를 바로잡는다는 뜻에 흔쾌히 동참했다. 사쓰마요를 만든 도래인 심수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작가 시바 료타로도 합류했다. 정조문은 일본인 지식인 및 학자들과 조선인 학자들의 공동 연구로 1969년부터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발간했다. 조선 고대사 연구에 일대 선풍을 일으킨 이 잡지는 1981년 50호 발간으로 휴간에 들어갈 때까지 한·일 역사학은 물론 조선 고대 불교학, 민속학, 풍속학, 고대 언어학 등에서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잡지는 광고가 한 줄도 들어가지 않았다. 광고를 실으면 의미는 퇴색한다. 북측 기업광고가 게재되면 북측의 읽을거리가 되고 남측 기업광고가 실리면 남측의 잡지가 된다. 일본 기업은 당치도 않았다.●통일된 조국 꿈꾸며 미술관 이름 ‘고려’로 이런 정조문의 사고방식은 고려미술관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미술관 이름을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 이름을 따와 ‘고려’로 한 것은 남도, 북도 아닌 오직 통일된 조국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누구나 찾아와 선조들이 남긴 아름다운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는 ‘공동의 광장’을 그리며 그는 미술관 건립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교토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일본 문화의 중심지이며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그런 교토에 미술관을 지어 한국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었다. 장소를 물색하다 여의치 않자 교토의 자택을 헐고 지하 1층, 지상 2층의 미술관을 지었다. ●교토 자택 헐고 미술관 지어… 1988년 10월 개관 1988년 10월 25일 고려미술관이 개관했다. 학교라고는 소학교 3년이 전부인 파친코 사업자가 백자 항아리와 운명적인 만남을 한 지 40여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가 각고의 노력으로 일본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되찾은 우리 문화재 1700점이 관람객을 맞았다. 소장품은 고분 부장품부터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도자기, 회화, 나전 바둑판과 목가구 등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개관 후 1개월간 미술관 입구에서 늘 관람객을 맞았던 정조문은 개관 후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11월 미술관에서 쓰러져 1989년 2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였다. 장례 당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2000여명의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국제인이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조선이나 한국의 풍토 속에서 성숙한 아름다움은 여기 일본에서도 언어, 사상, 이념을 넘어 이야기합니다. 부디 조용한 마음으로 그 흥취를 느껴 주시기 바랍니다.”(고려미술관 초대이사장 정조문, 고려미술관 리플릿 중) 운영은 어렵지만 고려미술관은 건재하다. 장남 정희두, 차남 정혜윤이 중심이 되어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을 유지관리하고 있고 장녀 정령희의 작은딸 이수혜가 미술관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외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가고 있다. 글 사진 lotus@seoul.co.kr
  • “적폐 청산… 기억하라! 촛불의 명령”

    “적폐 청산… 기억하라! 촛불의 명령”

    첫 대통령 탄핵 이끈 ‘역사’ 백서 제작… 내년 10월 공개“시민들의 힘으로 부패한 권력이 무너지고, 촛불 민심으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23차례 촛불집회를 뒷받침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24일 공식 해산했다. 약 1700만명(주최 측 주장)이 참석하며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이끈 촛불집회는 국민주권의 힘을 보여 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반면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대립함으로써 ‘사회통합’이 시대의 과제라는 명제도 남겼다.이날 퇴진행동 관계자 40여명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해산식을 겸한 기자회견을 열고 “늦가을에 시작해 매서운 한파를 뚫고 새봄이 올 때까지 촛불을 꺼뜨리지 않은 시민들이야말로 위대한 촛불항쟁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최종진 퇴진행동 공동대표는 “광장 자체가 민주주의 학습의 장이었고 해학으로 어우러진 축제장이었다”며 “모두가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싸운 것이 응축돼 역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촛불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라며 “앞으로 적폐 청산과 촛불 대개혁 등 촛불의 명령과 남은 과제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전했다. 이들은 해산 이후 기록기념위원회를 구성해 그간 촛불집회가 걸어온 길을 백서로 제작하고, 촛불집회 2주년인 내년 10월 29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퇴진행동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참여연대, 4·16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20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지난해 가을 출범했다. 이들은 지난 4월 29일 마지막으로 개최한 23차 집회까지 1684만 8000명의 시민이 참여했다고 추산했다. 지난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까지 1588만 2000명이 거리로 나왔다.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한 집회는 지난해 12월 3일 6차 집회로 232만 1000명이 참가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직전 집회다. 후원금은 약 39억 8000만원으로 집계됐고 이 가운데 약 32억 1000만원을 썼다고 전했다. 잔액 약 7억 7000만원은 백서사업 및 미디어기록사업, 오는 11월 열리는 ‘촛불 1년 문화제’, 촛불행진 가처분 신청 관련 변호사 비용 등으로 쓰일 예정이다. 이날 퇴진행동 측은 기자회견 후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킨 촛불항쟁 만세’를 외치고 국민을 향해 두 차례 인사한 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노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를 제창했다. 전문가들은 촛불집회가 지속적으로 사회의 문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동력이 되기를 기원했다. 박래군 퇴진행동 공동대표는 “30년 전 6월항쟁 이후 (민주화를) 다시 정치권에만 맡겨 뒀던 우를 범하지 말고 더 민주적인 세상을 만들고 적폐 청산·사회개혁을 이루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홍국 경기대 국제정치학과 겸임교수는 “촛불의 성과는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권력에 의존하거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음을 보여 줬다는 데 있다”며 “검찰개혁, 경제민주화, 노동환경 개선 등 사회의 현안에 대해 국민이 감시·견제하는 역할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문화와 정치적 저항을 결합해 평화적인 집회를 만들어 나간 점이 인상적”이라며 “이제는 집회 형식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시스템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英 맨체스터 테러 부상자 도운 ‘영웅들’, 알고보니…

    英 맨체스터 테러 부상자 도운 ‘영웅들’, 알고보니…

    영국 맨체스터에서 발생한 테러로 2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가운데, 폭탄이 폭발했을 당시 경기장 밖에서 목숨을 걸고 현장을 수습한 ‘영웅’의 정체가 밝혀졌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맨체스터에서 노숙인으로 살아가던 스테판 존스(35)와 크리스 파커(33). 스테판 존스는 테러가 발생했을 당시 엄청난 굉음과 함께 공연장 밖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뒤 자신도 친구와 함께 몸을 피했다. 하지만 이내 발길을 돌려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는 현지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영문도 모른 채 도망쳤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자마자 다시 돌아갔다. 현장에서는 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뛰어나오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우리는 사람이다. 우리에겐 여전히 심장이 있고 본능적으로 사람을 도우려는 습성이 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자신의 몸에 박힌 못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돕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또 “만약 내가 그 아이들을 돕지 않고 내버려둔 채 도망쳤다면 스스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존스는 자신의 친구와 함께 출혈이 심한 여성의 다리를 들어올린 채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돌보는 등 여러 생명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영웅으로 꼽히는 노숙인 크리스 파커 역시 테러가 벌어지던 당시 근처에 있다가 부상자들을 구하는데 일조했다. 그는 “폭발 후 부상자들을 구하러 다니다가 다리와 머리를 심하게 다친 60대 여성이 내 품에서 숨을 거뒀다. 그야말로 전쟁터 같았다”면서 “이 여성은 죽기 전 내게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폭발로 인해 다리를 잃은 소녀도 봤다. 나는 티셔츠를 구해 소녀의 몸을 감싸고 소녀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엄마와 아빠에 대해 물었다”고 전했다. 사회적 약자로 취급받던 노숙인들이 끔직한 테러 현장에서 목숨 걸고 부상당한 이들을 돌봤다는 목격담이 터져 나오면서, 이들에게 주거지를 마련해주기 위한 모금 활동이 시작됐다. ‘고펀드미’(GoFundMe)와 ‘저스트기빙’(Just Giving) 등 모금 사이트를 통해 오후 2시 40분(한국시간) 기준 크리스 파커에게 모금된 액수는 2만 2201파운드(약 3250만원), 스테판 존스에게 모금된 액수는 1만 5000파운드(약 2200만원)에 달한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정서린 기자의 잡식주의자] 고통을 기억할 때, 치유는 시작된다

    [정서린 기자의 잡식주의자] 고통을 기억할 때, 치유는 시작된다

    가슴 아픈 뉴스를 잘 보지 못합니다. 특히 여리고 순전한 아이들을 어찌어찌했다는 학대 기사는 제목만 봐도 끔찍해서 피해 보려 애씁니다. 눈앞 장면처럼 어룽대는 잔상과 통증에 난감하게도 사무실에서도 울컥하곤 하거든요. 그래서일까요. 트라우마가 된 과거를 드잡이하듯 집요하게 붙들고 작품으로 복기해 내는 작가들이 유독 커 보입니다. 그들도 실은 형벌을 받듯 아파하면서 쓰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는 더더욱이요. 최근 대통령의 5·18 기념사는 울림이 컸습니다. “사람의 존엄함을 하늘처럼 존중하겠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가치라고 믿는다”,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나눈 주먹밥과 헌혈이야말로 우리 자존의 역사”라는 대목에서 3년 전 이맘때 나온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포개졌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그해 여름을 끝내 건너오지 못한 소년의 이야기는 치받아 오르는 감정에 여러 번 숨을 고르고 읽어야 했습니다. ‘읽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쓰는 건 얼마나 힘들었겠느냐’는 말에 작가는 그러더군요. “살인 현장을 조사하는 프로파일러분이 직업 때문에 길을 가다가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바닷가에 가면 뛰어들고 싶다고 하는 인터뷰를 봤는데, 5·18 자료와 영상만 보다 보니 딱 그 상태가 되더라”고요. “인간이 너무 참혹해서 매일 눈물이 났는데 1년 반을 그렇게 보내니 벌을 받는 것 같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심장 가운데를 통과하듯’ 써야 했다고 했죠. 무참한 폭력 뒤로 밥을 나누고 망자를 흰 천으로 덮어 주는 ‘반짝이는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작가가 줄곧 품어 온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했습니다. “오월의 광주에서 인간은 생명을 맨 앞에 두고 예를 갖추고 싶어 하고 존엄을 지키려는 존재였다”는 작가의 말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국제문학포럼 참석차 한국을 찾은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수백 명의 목소리로 전쟁, 원전 사고 등 고통의 역사를 치밀하게 직조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책 한 권 쓸 때마다 200~500명을 인터뷰한다는 그의 작품들은 ‘목소리 소설’로 불립니다. 그 저작들은 그에게 “다성악 같은 글쓰기로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를 담았다”는 평과 함께 2015년 노벨문학상을 안겼죠. 최근 국내에 출간된 ‘아연 소년들’에서 그는 ‘사람이 양동이 반만큼의 살점으로 남는’ 전쟁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전하면서도 진저리치듯 고백합니다. “전쟁에 대해 쓰면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킬 힘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다 써 버렸다”고요. 그렇게 지독한 작업을 어떻게 40여년간 이어 왔을까요. “고통도 정보의 한 형태이고,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때문에 저는 계속해서 정보를 남길 겁니다.” 고요한 얼굴로 작가가 들려준 답입니다.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장면과 기억들은 불과 몇 년 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숱하게 쌓이고 있습니다. 아프고 힘든 게 싫어서 고개 돌리고 달아나려는 우리에게 이 작가들은 충언합니다. 고통을 되새기는 자리에서 치유가 시작된다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데서 함부로 상처 난 삶이 복원된다고요.
  • [고전으로 여는 아침] 개인의 자유정신을 진작하라/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고전으로 여는 아침] 개인의 자유정신을 진작하라/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저성장 시대의 진통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 지 오래다. 자연히 우리의 대내외 경제 환경도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비교적 순탄한 경제성장의 수혜를 누려온 우리의 관성은 일자리가 축소되고 임금 수준이 열악해지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더구나 호전적인 북한의 도발이 거세지고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는 요즘의 복합적인 국가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자기 이익을 지키고 키우기에 골몰하기 십상이다. 이런 때에 국가적 안목을 가진 통치자들이 주도해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자칫 국가의 정책 대안들이 소망하는 대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설계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국가의 역할 못지않게 기업과 사회 구성원인 개개인의 인식과 행태의 변화가 더 주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중반 50여 년간 고대 아테네가 황금시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인들의 자유정신이 마음껏 발휘된 덕택이다. 우리는 투키디데스(BC 460?~400?)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페리클레스(BC 495?~429)는 아테네는 ‘헬라스의 학교’라고 자부했다. 그는 아테네인들의 모험심과 자유로운 역량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웠다. “시민 개개인은 인생의 다양한 분야에서 유희하듯 우아하게 자신만의 특질을 개발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아테네인들의 남다른 선행의 풍조도 찬탄했다. “우리는 손익을 따져보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믿고 아무 두려움 없이 도와줍니다.” 그는 상호 부조와 더불어 자조·자립의 정신도 북돋웠다. 페리클레스는 “위험도 피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정신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며, “우리에게 부는 행동을 위한 수단이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가난을 시인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가난을 면하기 위해 실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들의 적극적 정치 참여 못지않게 스스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실천적 노력을 권장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가 이끌던 황금시대는 아테네인들의 자유정신이 충만했던 때다. 헤겔(1770~1831)이 ‘역사철학 강의’에서 그리스정신의 핵심 유산을 ‘자유정신이 충만한 아름다운 개인’으로 본 것도 의미심장하다. 통치자는 국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 못지않게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고 책임지는 도전정신을 진작할 수 있어야 한다. 일자리 만들기와 빈부 격차 해소는 국가의 노력만으론 이루기 어렵다. 민간의 활력을 살려야 한다. 도전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아름다운 개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경제 블로그] 1+1 커피, 1대1 소통 신한카드 ‘임의 효과’

    [경제 블로그] 1+1 커피, 1대1 소통 신한카드 ‘임의 효과’

    서울 중구 신한카드 본사 인근 커피전문점 사장들이 요새 싱글벙글이라고 합니다. 지난 3월 임영진 신한카드 사장 취임 이후 매출이 부쩍 늘어서라는데요. 임 사장의 ‘1+1’(원 플러스 원) 전략 덕분이랍니다. 마트 판촉 행사도 아니고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임 사장은 취임 직후부터 “점심 먹고 들어올 때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한 잔 더 사서 주고 싶은 사람을 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고 싶은 사람이 없다고요? 이런 ‘삐딱한’ 직원을 만나도 임 사장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럼 (회사 들어오다가) 처음 만난 직원에게 건네라”고 받아칩니다. 무언가를 건네고 대화를 시작하는 작은 일상부터 소통과 화합이 시작된다는 게 임 사장의 지론입니다. 그가 ‘1+1’ 문화 만들기에 공을 들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임 사장은 사석에서도 “후배에게 커피를 선물받은 부장은 2잔, 3잔, 아니 10잔을 돌리면서 직장 생활의 애환이나 힘든 점을 물어보라”고 주문합니다. 자유로운 대화와 소통이야말로 유연한 조직의 근간이라는 것이지요. 부장이 10잔이면 사장은 몇 잔이냐고요? 커피를 건네받는 날이면 임 사장은 해당 부서가 있는 층에 통째로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돌립니다. 한 층에 100명쯤 근무한다고 하네요. 임 사장은 “직원들에게 힘과 지혜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라며 “사장은 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국 지점 등에 ‘해피트리’ 화분 200여개를 선물한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함께 꿈을 행복하게 키워 가자’는 의미입니다.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이 주로 도입한 복장 자율화를 모든 직원에게 시범 확대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인터넷 전문은행 돌풍이 카드업계에 위기가 될 수 있는 만큼 유연함을 특성으로 하는 디지털 기업식 문화를 신속하게 이식하자는 것이지요. 조직이 유연해져야 자발적인 참여가 늘고 자발적인 참여가 늘어야 성과가 커진다는 최고경영자로서의 ‘계산속’도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구성원들 생각이 유연해져야 디지털 시대에 가장 중요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략의 산물입니다. 편한 복장, 커피 한 잔의 ‘나비효과’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단절된 남북대화 … 교황 ‘중재자’ 나서나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보내는 친서에 한반도에서 전쟁의 암운을 걷어낼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바람을 담은 것으로 전해졌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23일 “문 대통령은 친서를 통해 2014년 8월 교황의 방한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가 깃들도록 교황이 기도해 주길 요청했다”고 밝혔다. 교황청은 그동안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 콜롬비아 평화협정 타결 등에 중재 역할을 하는 등 국가나 세력 간 관계 정상화에 기여해 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달 29일 이집트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핵 문제는 오랫동안 논의돼 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지나치게 고조된 것 같다”면서 유엔과 제3국, 특히 노르웨이가 중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실제로 북한과 미국은 노르웨이의 중재로 지난 8~9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반관반민 형식의 ‘1.5트랙’ 대화를 가졌다. 일부에선 이런 점을 볼 때 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북핵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거나 남북 정상회담의 물꼬를 틀 수 있도록 중재 역할을 우회적으로 부탁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기도해 달라’는 완곡한 표현에서 교황의 지원을 바라는 문 대통령의 의중이 읽힌다. 그러나 박 대변인은 “남북 정상회담 중재를 요청한다는 내용은 친서에 담겨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문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20일(현지시간) 오후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한 김희중(대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은 “교황청은 국익에 구애받지 않고, 보편적인 정의, 세계 평화라는 대의에 따라 북핵 위기 해법을 조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며 “(교황청 특사 파견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덕적 지지를 얻는 데 교황청만 한 곳이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처하면서도 우회적으로 대화를 모색하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조만간 군 통신 등 남북 간 비상연락망을 다시 연결하고 낮은 수위의 민간 교류부터 시작해 남북 교류의 수준을 차츰 높여 나가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앞서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당장 복원은 못 하지만 남북대화 단절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면서 “주변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차근차근하겠지만, 남북관계야말로 우리가 주도해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한편 청와대 관계자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과 준(準)전시 상태라도 민간 교류는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관련, “청와대의 입장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신한카드 주변 커피숍 싱글벙글이라는데..

    신한카드 주변 커피숍 싱글벙글이라는데..

    서울 중구 신한카드 본사 인근 커피전문점 사장들이 요새 싱글벙글이라고 합니다. 지난 3월 임영진 신한카드 사장 취임 이후 매출이 부쩍 늘어서라는데요. 임 사장의 ‘1+1’(원 플러스 원)’ 전략 덕분이랍니다. 마트 판촉행사도 아니고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임 사장은 취임 직후부터 “점심 먹고 들어올 때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한 잔 더 사서 주고 싶은 사람을 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고 싶은 사람이 없다고요? 이런 ‘삐딱한’ 직원을 만나도 임 사장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럼 (회사 들어오다가) 처음 만난 직원에게 건네라”고 받아칩니다. 무언가를 건네고 대화를 시작하는 작은 일상부터 소통과 화합이 시작된다는 게 임 사장의 지론입니다. 그가 ‘1+1’ 문화 만들기에 공을 들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임 사장은 사석에서도 “후배에게 커피를 선물받은 부장은 2잔, 3잔, 아니 10잔을 돌리면서 직장생활의 애환이나 힘든 점을 물어보라”고 주문합니다. 자유로운 대화와 소통이야말로 유연한 조직의 근간이라는 것이지요. 부장이 10잔이면 사장은 몇 잔이냐고요? 커피를 건네받는 날이면 임 사장은 해당 부서가 있는 층에 통째로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돌립니다. 한 층에 100명쯤 근무한다고 하네요. 임 사장은 “직원들에게 힘과 지혜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라며 “사장이라는 존재는 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국 지점 등에 ‘해피트리’ 화분 200여개를 선물한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함께 꿈을 행복하게 키워가자’는 의미입니다.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이 주로 도입한 복장 자율화를 모든 직원에게 확대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인터넷전문은행 돌풍이 카드업계에 위기가 될 수 있는 만큼 유연함을 특성으로 하는 디지털 기업식 문화를 신속하게 이식하자는 것이지요. 조직이 유연해져야 자발적인 참여가 늘고 자발적인 참여가 늘어야 성과가 커진다는 최고경영자로서의 ‘계산 속’도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구성원들 생각이 유연해져야 디지털 시대에 가장 중요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전략의 산물입니다. 편한 복장, 커피 한 잔의 ‘나비효과’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파수꾼’ 이시영, 첫 등장부터 경찰과 총구 대치 ‘일촉즉발 상황’

    ‘파수꾼’ 이시영, 첫 등장부터 경찰과 총구 대치 ‘일촉즉발 상황’

    ‘파수꾼’ 이시영이 추격전으로 스펙터클한 포문을 연다. 22일 첫 방송되는 MBC 새 월화드라마 ‘파수꾼’ 측은 경찰들과 총구를 대치하고 있는 이시영의 스틸을 공개했다. 사진 속 이시영은 도심 한복판에서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다. 그는 남자를 한 손으로 제압한 채 다른 손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한 듯 보인다. 날이 선 이시영의 표정, 눈빛은 긴박감이 넘쳐 흐르며 본 상황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하고 있다. 앞에는 김영광, 김태훈을 비롯한 경찰들이 그를 포위하고 서 있다. 무엇보다 그런 이시영을 강렬히 주시하고 있는 김영광의 모습은 이들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예고하고 있어 귀추를 주목하게 한다. 이시영은 극 중 사격선수 출신의 형사 ‘조수지’로 등장한다. 범죄로 사랑하는 딸을 잃은 조수지가 범인을 처단하기 위해 파수꾼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다. 형사였던 그가 경찰들에게 쫓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지, 그녀가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선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증이 모아지고 있다. 한편, MBC 새 월화드라마 ‘파수꾼’은 범죄로 사랑하는 이를 잃고 평범했던 일상이 하루 아침에 산산조각 나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날 오후 10시 첫 방송. 사진제공=MBC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두 남자의 운명…노무현과 문재인, 5월의 기록

    두 남자의 운명…노무현과 문재인, 5월의 기록

    다시 5월이다. 누군가는 손 꼽아 기다렸던 황금연휴의 5월이고, 누군가에게는 뜨겁고도 처절했던 5·18 민주화운동의 5월이다. 또 누군가는 불꽃같은 삶을 스스로 접어야했던 5월이고, 비탄에 빠졌던 한 남자가 새 역사를 쓰기 위해 일어선 5월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었고, 또 대통령이 된 두 남자의 5월을 돌아봤다.● 평온했던 5월 23일 아침, 대한민국이 뒤집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오늘 오전 9시 30분경 이곳 양산 부산대 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오늘 새벽 5시 45분경에 사저를 나와 봉화산 등산을 하시던 중 6시 40분 쯤에 봉화산 바위 위에서 뛰어내리신 것으로 보입니다. 즉시 가까운 병원으로 후송을 했습니다만 상태가 위독해서 양산 부산대 병원으로 다시 옮겼고 조금 전 9시 30분경 돌아가셨습니다” 남색 정장 차림의 한 남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담긴 발표문을 읽어 내려갔다. 비통함을 애써 담담하게 억누른 어조였지만, 얇고 검은 안경테 너머 눈빛은 단단했다. 2009년 5월 23일 오전 11시,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그렇게 자신의 반평생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 노무현의 죽음을 세상에 알렸다.2002년 당내 경선 2% 지지율로 출발해 제16대 대통령 당선이라는 기적을 일군 노무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인권변호사를 거쳐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그가 허망하게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대통령직을 떠나 고향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간 지 1년 3개월 만의 일이다.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거리의 변호사로, 국회 청문회에서 요즘 말로 ‘전국구 사이다’로 급부상한 국회의원으로, 그리고 대통령까지 지낸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것은 달랑 171자 메모 형식의 유서 한 장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미안해하지 마라.누구도 원망하지 마라.운명이다. 화장해라.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오래된 생각이다. 이런 내용이 담긴 문서는 노 전 대통령이 사저에서 사용한 컴퓨터에서 발견됐고, 산으로 떠나기 직전인 오전 5시 10분쯤 직접 쓴 것으로 확인됐다.유서 내용이 공개되면서 노 전 대통령 지지층의 분노는 이명박 정권으로 향했다. 2008년 4월 정부 출범 초기부터 전국적인 대규모 ‘광우병 촛불집회’ 파동으로 국정운영 동력을 잃은 이명박 정부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측에게 거액의 뇌물을 줬다는 내용의 ‘박연차 게이트’를 국면 전환 카드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소환 조사를 위해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 딸 정연씨 등도 앞서 소환 조사했고, 확인되지 않은 내용들을 언론을 통해 흘리며 노 전 대통령을 압박했다. 그런 노 전 대통령 곁을 지킨 사람은 언제나처럼 문재인이었다. 참여정부에서 초대 민정수석을 포함해 두 번의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임기 말 비서실장을 맡았고 2004년 4월 탄핵심판 당시 노 전 대통령 변론도 맡아 기각을 이끌어냈다. 1982년 법무법인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문 대통령은 2009년 5월 7일간의 국민장 상주로 ‘친구 노무현’의 세상 떠나는 길을 지켰다. 1970~80년대 부산에서 소위 잘 나가던 ‘변호사 노무현’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이도 문재인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문재인과의 첫인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문재인 변호사와 손을 잡았다. 원래 모르는 사이였지만 1982년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서도 판사 임용이 되지 않았다. 정직하고 유능하며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그 당시 세속적 기준으로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사건도 많았고 승소율도 높았으며 돈도 꽤 잘 벌었다. 법조계의 나쁜 관행과도 적당하게 타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변호사와 동업을 시작하면서 그런 것들을 다 정리하기로 약속했다.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울분과 비통함만이 가득했던 봉하마을과 영결식장에서 문 전 실장이 보여준 의연함은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참여정부의 퇴장과 함께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고 경남 양산 자택에서 생활하던 문 전 실장은 노 전 대통령 비보를 들은 즉시 병원으로 달려와 그날부터 봉하마을을 지켰고, 5월 29일 발인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의 영결식, 수원 연화장 화장과 다시 봉화산 정토원 안치까지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는 모든 순간을 함께했다. 국민장 기간 내내 의연한 모습을 보였던 문 대통령도 분골함 안치를 위해 정토원으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는 눈물을 훔쳤다.특히 영결식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헌화 도중 백원우 민주당 의원이 “정치보복을 사죄하라”고 고함치자, 현장을 수습한 후 문 전 실장이 이 대통령을 찾아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은 ‘인간 문재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훗날 당시의 기억에 대해 “그날만큼 내가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게 후회된 적이 없다. 시신 확인에서부터 운명, 서거발표, 그를 보내기 위한 회의 주재까지. 나 혼자 있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노무현의 운명, 문재인의 운명 “정치, 하지 마라… 정치인은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 걱정하는 것은 정치의 신뢰가 이런 속도로 계속 떨어지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점차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검찰 수사를 받고 있던 2009년 3월 4일 공식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에 쓴 글의 일부다. 실제 노 전 대통령은 가까운 참모들에게는 제도권 정치에 나서는 것을 만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참여정부 종료와 함께 자연인으로 돌아간 문 전 실장에게도 정치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변호사 문재인이 잘 나가던 ‘변호사 노무현’을 훗날 대통령의 길로 이끌었듯이, 퇴임 대통령 노무현의 죽음은 그를 운명처럼 정치의 중심으로 불러냈다. 이를 두고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다.“그(노무현)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 하게 됐다” ● 대통령 문재인, 다시 봉하마을로 간다 총 1342만 3784표, 득표율 41.08% 기호 1번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선. 지난 9일 치러진 대선에서 9년간 보수 정당에 표를 줬던 국민의 선택은 적폐 청산과 나라다운 나라를 약속한 문재인이었다. 2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는 557만 938표 앞서며 역대 대선에서 가장 많은 표 차이다. 취임사에서도 ‘나라다운 나라’를 강조한 문 대통령은 연일 소통과 탈 권위, 국민 통합의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당장 집무실을 청와대 참모들의 업무 공간인 여민관으로 옮겼고,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공공부분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약속했다. 스승의 날인 지난 15일에는 세월호 참사로 숨진 기간제 교사 김초원·이지혜 교사의 순직 인정을 지시하고,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는 직접 참석해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제창을 금지했던 ‘님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불렀다.제1 야당이 된 자유한국당은 이런 문 대통령을 ‘좌파 행보’라며 연일 비판하고 있지만,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정의당 등에서는 지지의 평가가 나오고 있다. 바른정당의 이혜훈 의원은 “문재인 정부가 굉장히 잘한다. 솔직한 말씀으로 무섭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겨울, 국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지켰던 남자. 변호사 노무현이 사람 사는 세상에 눈 뜨게 하고, 그의 모든 순간을 함께했던 노무현의 동지 문재인. 그가 5월 23일, 대통령 문재인으로 다시 봉하마을을 찾는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나태주 풀꽃 편지] 우리 집 자장가

    [나태주 풀꽃 편지] 우리 집 자장가

    ‘자장자장 잘도 잔다 우리 애기 잘도 잔다/ 멍멍개도 잠을 자고 꼬꼬닭도 잠을 잔다/ 자장자장 잘도 잔다 우리 애기 잘도 잔다/ 멍멍개야 짖지 마라 꼬꼬닭아 울지 마라.’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나를 등에 업고 손으로 내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밤마다 불러 주시던 자장가다. 그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의 나라를 찾아가곤 했다. 거기다가 한 가락을 더 붙인다면 이런 자장가가 되기도 한다. ‘자장자장 우리 애기 잘도 잔다 우리 애기/ 복일랑은 석순이 복을 명일랑은 동박삭이 명을/ 은자동아 금자동아 자장자장 잘도 잔다/ 금을 준들 너를 사랴 은을 준들 너를 사랴.’ 나는 외할머니가 불러 주시던 자장가 소리의 내용이나 의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자장가의 가사와 곡조를 그만 외워 버리고 말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나의 체질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정서의 바탕이 된 것이다. 그렇게 자라서 나도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어렵사리 아들과 딸아이 하나씩을 낳아 키우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아이 키우는 아내를 도와 우리 집 아이들을 등에 업는 날이 많았다. 차라리 나는 아이들 업어 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떤 날은 아예 아이를 둘러업고 동네 큰길까지 스스럼없이 나가곤 했고 아내가 빨래하러 개울에 나가거나 시장 길에서 늦을 때는 아이를 둘러업고 대문간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아내가 찔끔했지만 나는 전혀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나는 아이들을 지금 업어 주지 않으면 언제 업어 주겠느냐 항변하곤 했다. 그러면서 가끔은 업은 아이의 궁둥이를 두드리며 자장가를 불러 주기도 했다. 내가 어려서 외할머니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 자장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스르르 잠이 들기도 했다. 하나의 마력 같다고나 할까. 외할머니는 비록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나의 자장가 속에 분명히 살아서 숨 쉬고 계셨고 그 자장가를 통해 우리 집 아이들을 편안하게 잠의 나라로 안내해 주시곤 했다. 이것도 하나의 생명의 강물이라 그럴까. 그렇게 자란 우리 집 아이들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아들아이는 40살이 되었고 딸아이는 30대 후반이 되었다. 이른바 중년의 나이들이다. 물론 그들도 제각기 배필을 맞아 자식들을 낳아 기르는 부모가 되었다. 얼마 전의 일이다. 아들아이가 새롭게 집을 얻어 들었다기에 아내와 함께 아들아이네 집을 찾은 적이 있다. 이미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자아이다. 그 손자아이를 등에 업고 아들아이가 자장가를 불러 주고 있었다. ‘자장자장 잘도 잔다 우리 애기 잘도 잔다/ 멍멍개도 잠을 자고 꼬꼬닭도 잠을 잔다…’ 어라! 저 노래는 내가 외할머니한테 들어서 배웠고 또 우리 집 아이들, 그러니까 지금 저의 아이를 업고 있는 아들아이 어렸을 적에 저를 위해 불러 주었던 바로 그 자장가가 아닌가. 나는 적이 놀라는 마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외할머니의 자장가는 나를 통해서 아들아이에게 전해지고 또 손자아이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문화적 계승인가. 어쩌면 손자아이도 저 자장가를 외워 두었다가 이담에 제가 부모가 되었을 때 저의 아이 재울 때 불러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야말로 자장가의 내림이고 목숨의 강물이 멀리까지 흘러서 넘침이다. 하나의 자장가를 통해서 지금 나의 손자아이는 얼굴도 보지 못한 나의 외할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있고 그분의 자애로운 마음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아, 지극히도 아름답고도 고마우신 사랑의 강물이여. 더욱 오래 멀리까지 흘러 넘쳐 그침이 없으시라. ‘자장자장 잘도 잔다 우리 애기 잘도 잔다/ 멍멍개도 잠을 자고 꼬꼬닭도 잠을 잔다/ 자장자장 잘도 잔다 우리 애기 잘도 잔다/ 멍멍개야 짖지 마라 꼬꼬닭아 울지 마라.’ 그 노래는 그만 우리 집 내림의 자장가가 되어 버렸다.
  • 백령도 지키는 ‘군인 부부 러브스토리’

    백령도 지키는 ‘군인 부부 러브스토리’

    해사 동기… 아내 동반 근무 자원 고향·종교 달라도 안보 앞 한몸 “부부가 지키는 이 바다야말로 가장 믿음직스럽지 않겠습니까?” 21일 해병대사령부에 따르면 서해 최북단 백령도의 해병대 제6여단에는 해군·해병대 동기 부부가 함께 근무하며 서북도서 방어에 큰 힘을 보태고 있다. 남편 서성욱(38) 해병 소령과 아내 김부경(37) 해군 소령이 그 주인공이다.남편 서 소령은 공병중대장으로 서북도서 방호를 위한 철조망 등 장애물 설치와 통로개척, 작전 시설물 구축, 대규모 시설공사 등을 총괄하고 있다. 해군 연락장교인 아내 김 소령은 해병대와 해군의 원활한 합동작전 등을 조율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이들은 해군사관학교 57기 동기생이다. 해사 최초 여생도였던 김 소령을 남편 서 소령이 짝사랑했고, 해사 응원단 활동을 함께하며 친분을 쌓아 4학년이 되던 해 서 소령의 고백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해병대와 해군으로 각각 임관한 두 사람은 4년간 연애한 뒤 2006년 대위로 진급하던 해 부부가 됐다. 결혼 11년째이지만 대부분의 군인 부부가 그렇듯 부부가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한 시간은 2년여에 불과하다. 아이 둘의 유년기에 가족들이 모두 한 집에서 생활한 기억이 아예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김 소령 뇌리에 스쳤다. 결국 김 소령은 둘째가 여섯 살이 된 올해 초 남편이 있는 백령도 근무를 지원했다. 경상도(남편)와 전라도(아내)로 고향도 다르고, 불교 집안(남편)과 기독교 집안(아내)으로 서로를 포용하기 힘든 환경에서도 두 사람은 부부가 됐다. 각자 속한 해군과 해병대 조직에 대한 애정이 유별나 때로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부부이자 동기, 그리고 전우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면서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남편 서 소령은 “적 해안포가 포문을 열고 있는 최전방 백령도에 내 가족이 있다.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 너무 명확하다”고 말했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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