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 국내 첫 북아트숍 여는 서은진씨
지난달 13일, 아마추어 예술인들이 자주 들리는 ‘프리마켓(예술장터)’ 홈페이지에 ‘찾습니다’로 시작하는 글이 올라왔다.
“인사동에 북아트/핸드메이드 노트를 전시, 판매하는 가게를 열게 되었습니다. 북아트 작업을 하고 계신 분들을 찾고 있어요…저도 젊은 작가이고, 좀더 많은 분들의 상상력이 세상에 보여질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서은진(28·여)씨는 북아티스트겸 그래픽디자이너이다. 지난 달 첫 개인전을 연 초보 북아티스트인인 그는 다음달 18일 인사동 쌈지예술골목에서 총 150여가지의 핸드메이드 책과 노트를 파는 가게를 열 계획을 세우고 있고 이 곳에 작품을 출품할 아마추어 북아티스트들을 모집 중이다.
핸드메이드 노트나 책은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만큼의 가격을 주고 사는 사람이 없어 이익이 남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는 왜 ‘돈 안되는’ 일을 벌이는 것일까. 서씨의 “벌고 있는 돈을 모두 쏟아 부어서라도 꼭 해내겠다.”는 의지는 책에 대한 끝없는 애착에서 나오는 것같다.
●책은 세상과의 연결통로
13일 저녁, 홍대 앞에 위치한 그의 아담한 집은 작지만 넓은 세상을 담은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실의 벽면 한 쪽은 묵직한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고, 바로 앞에 놓인 나무 테이블 위에는 구식 타자기, 특이한 재질의 종이들, 스템플러 등 책을 만드는 도구들이 놓여있다.
다른 한쪽에는 직접 만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the gap of timing’란 이름의 책은 책장의 4분의3이 여백이다. 맨 끝 4분의1정도를 차지하는 부분에 글이 쓰여 있고, 원한다면 끝부분만 넘기며 빠르게 책을 읽을 수 있다.
“한장한장 넘기며 여백까지 보는 사람이 있고, 끝부분만 빨리 넘겨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과학적으로는 공통된 시간을 가졌지만, 사람마다 감성적인 ‘빠름’과 ‘느림’이 존재한다는 것을 책을 통해 표현한 것이죠.”
‘평생 간직하고픈 책은 평생간직하고픈 사람과 상통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책은 사람들의 전화번호와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화를 걸듯 책장을 다이얼처럼 돌려가며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주로 사람과 관계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을 다양한 형태의 책으로 표현한다.
서씨와 책의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부모님이 바쁘셔서 저는 늘 책을 읽었고, 책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했어요. 책은 세상과 저를 연결해주는 통로였죠.”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면서도 책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했다. 우연히 북아트라는 장르를 알게 됐고,‘이거다’싶어 평생의 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북아트를 본격적으로 배울 만한 곳이 없었다. 영국국립미술학교에 가면 북아트를 배울 수 있다기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2000년 영국으로 떠났다.
2년 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차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2∼3년전부터 한국에서도 북아트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예술로서는 여전히 생소한 분야고, 초보 예술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적었다.
‘먹고사는 문제’도 무시할 수 없어 그래픽디자인을 시작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직업을 ‘북아티스트/그래픽 디자이너’로 소개하고 꾸준히 작품을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돈 안되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이 일에 왜 매달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음악가나 화가가 영감을 받으면 선율이나 색으로 표현하려 하듯이 제게는 살아가는 경험 하나하나가 책을 만드는 이유입니다.”
구하면 열린다고 했던가. 우연히 서씨의 작품을 본 미술관 큐레이터가 전시회를 열자는 제안을 해왔다.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2일까지 인사동 ‘iswas’ 갤러리에서 ‘북아트쇼’라는 제목으로 총 50여개의 작품을 보여주는 첫 개인전을 열었다.
●첫 개인전,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찾아 큰 관심을 보였지만, 바뀐 것은 별로 없었다.‘돈과 연줄’없는 작가들이 예술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서씨는 북아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판로가 없어 세상에 자기 작품을 내놓지도 못한 채 음지에서 소극적으로 활동하거나, 아예 꿈을 접어버리는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누군가는 ‘간지러운 곳’을 긁어줘야 하는데, 내가 그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국내 최초 ‘북아트 전문숍’을 잘 꾸려갈 수 있을지 자나깨나 고민이라고 하지만, 그는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도전을 즐기는 듯했다. 내년부터는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잡지 만드는 작업에 참여할 계획이란다. 잡지 디자인을 맡기로 했지만, 어떤 일을 할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삼겹살에 소주를 들이키던 그가 대뜸 물었다.“기자 일 재미있어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일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벌써 기자란 직업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글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