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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색 봉사’ 스타벅스, 창경궁에 1000그루 나무 심기

    ‘녹색 봉사’ 스타벅스, 창경궁에 1000그루 나무 심기

    식목일을 앞두고 지난 3일 스타벅스 바리스타 50명이 서울 종로구 창경궁에서 산앵두나무 300그루를 심는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스타벅스 코리아는 올 한 해 창경궁에 진달래, 미선나무, 히어리 등 총 1000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문화재 보존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스타벅스 제공
  • 경회루의 봄, 나만 알고 싶나 봄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는 오는 4월 1일부터 7월을 제외하고 10월 30일까지 6개월간 매일 4회씩 경회루 특별 관람을 시행한다고 21일 밝혔다. 경회루는 연못 안에 조성된 국내 최대의 2층 목조건물로, 이곳에서 왕이 연회를 베풀거나 사신을 접대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경회루 2층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경복궁 경관을, 서쪽으로는 인왕산이 산수화처럼 펼쳐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특별 관람은 전문해설사의 인솔로 30~40분간 무료로 진행된다. 관람은 사전 예약제로만 운영되며 문화유산 보호와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 회당 30명으로 제한된다. 예약은 관람 희망일 일주일 전부터 하루 전까지 하면 된다. 오는 25일 오전 10시부터 경복궁관리소 누리집(www.royalpalace.go.kr)에서 예약이 시작되며 1인당 2명까지 가능하다. 한편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4대 궁과 종묘, 조선왕릉에서 봄꽃의 정취를 즐길 수 있도록 궁능 봄꽃 개화 시기와 명소를 공개했다. 궁궐과 조선왕릉의 봄꽃은 23일 경복궁 일대의 앵두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능수벚나무 등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피기 시작해 3월 말부터 4월 초 사이에 절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 봄꽃 정취는 궁·왕릉에서 느껴야 제맛

    봄꽃 정취는 궁·왕릉에서 느껴야 제맛

    오는 4월 1일부터 경복궁 경회루에 올라 봄꽃을 즐길 수 있다.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는 오는 4월 1일부터 7월을 제외하고 10월 30일까지 6개월간 매일 4회씩 경회루 특별관람을 시행한다고 21일 밝혔다. 경회루는 연못 안에 조성된 국내 최대 2층 목조건물로 왕이 연회를 베풀거나 사신을 접대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경회루 2층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경복궁 경관, 서쪽으로는 인왕산이 산수화처럼 펼쳐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특별관람은 전문해설사의 인솔로 30~40분간 무료로 진행된다. 관람은 사전 예약제로만 운영되며 문화유산 보호와 관람객 안전을 위해 회당 30명으로 제한된다. 예약은 관람 희망일 일주일 전부터 하루 전까지 예약하면 된다. 예약은 오는 25일 오전 10시부터 경복궁관리소 누리집(www.royalpalace.go.kr)에서 시작되며 1인당 2명까지 예약이 가능하다.한편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4대궁과 종묘, 조선왕릉에서 봄꽃의 정취를 즐길 수 있도록 궁능 봄꽃 개화 시기와 명소를 공개했다. 궁궐과 조선왕릉의 봄꽃은 오는 23일 경복궁 일대 앵두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능수벚나무 등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피기 시작해 3월 말부터 4월 초 사이에 절정을 이룰 것이라고 전망됐다. 궁능유적본부는 △경복궁 아미산 화계 △창덕궁 낙선재 화계 △창경궁 옥천교 어구 일원 △남양주 홍릉과 유릉, 덕혜옹주묘 일원 △서울 태릉과 강릉 산책로 △경기 수원 화성 융릉과 건릉 산책로 등을 봄을 만끽할 장소로 추천했다. 이와 함께 봄을 맞아 궁궐에서는 다채로운 문화 행사도 진행될 예정이다. 경복궁에서는 ‘경회루 특별관람’(4월 1일~10월 30일)과 ‘2023 봄 경복궁 야간관람’(4월 5일~5월 31일)이 시작되고 ‘집옥재 작은 도서관’(4월 5일~10월 30일) 행사로 집옥재 내부도 개방된다. 창덕궁에서는 ‘봄을 품은 낙선재’(3월 21일~4월 6일), ‘동궐도와 함께하는 창덕궁 나무 답사’(4월 19일~5월 6일)가 진행된다. 창경궁에서는 1인 가구 대상의 반려 식물 기르기 행사인 ‘우리 함께 모란’(4월 21~22일), 무드등을 만들어보는 ‘정조의 꽃’(4월 29일) 행사가 펼쳐지며 덕수궁에서는 살구꽃과 함께 주요 전각 내부를 볼 수 있는 ‘전각 내부 특별관람’(3월 28일~4월 5일)이 운영될 예정이다.
  • 매년 5·18 고발 만평 그린 ‘나대로 선생‘ 이홍우 화백 별세

    매년 5·18 고발 만평 그린 ‘나대로 선생‘ 이홍우 화백 별세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미나리 여사’, 동아일보 ‘나대로 선생’ 등 네 컷 연재만화로 세상을 풍자한 시사만화가 이홍우(李泓雨) 화백이 23일 오후 5시 10분쯤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73. 지난 9월 코로나19에 확진된 뒤 합병증으로 장기간 입원해 치료를 받아 왔다. 유족은 “‘나는 죽을 때까지 나대로였다’, ‘후회 없이 멋지게 살았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했다.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개성중 1학년 때 부산 ‘국제신보’에 투고한 독자만화가 당선되면서 신문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시사만화가의 꿈을 안고 서울로 유학, 서라벌고에 다닐 때부터 여러 신문과 학생 잡지에 만화를 실었고, 1967년 서라벌예술대 2학년 때 대전 중도일보에 ‘두루미’를 그리기 시작해 1973년 이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연재했다. 같은 해 전남일보로 옮겨 ‘미나리 여사’를 그렸다. 1980년 5월 20일 이 신문에 글자 한 자 없는 이색적인 네 컷 만화가 실려 눈길을 붙들었다. 마지막 칸에 주인공 ‘미나리 여사’가 소주를 앞에 놓고 담배를 피워 문 채 울고 있고, 옆에 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고인은 당시 전남일보 서울지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2019년 5월 ‘신동아’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최승호 전남일보 편집국장으로부터 “지금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만행을 기록한 모든 기사가 휴지통에 들어가고 있다. ‘미나리 여사’를 통해 은유적으로 이 상황을 전달할 방법이 없겠느냐”는 전화를 받고 이 네 컷 만화를 그렸다고 했다. 그리고 매년 5월이 되면 5·18 민주화운동을 만평으로 그렸다. 고인은 그 뒤 스포츠동아 ‘오리발’을 거쳐 1980년 11월 12일부터 김성환(1932∼2019) 화백의 ‘고바우 영감’ 바통을 이어받아 동아일보에 ‘나대로 선생’을 연재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무작정 상경해 김성환 화백의 전시회를 찾아 만난 적이 있었다. 지만 해마다 5월이면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만화를 실었다. ‘나대로 선생’은 2007년 12월 26일 제8568회로 마무리될 때까지 만 27년간 연재되며 1991년 당시 6공 정부를 6신(외교 굽신, 경제 망신, 치안 불신, 정책 등신, 날치기 귀신, 국민 배신)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1986년 보도지침에 따라 보도가 금지됐던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폭력 사건을 “맞고 나니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하더군”이라고 묘사한 만화를 실었다가 보안사에 끌려가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 건국대 시위 때 학생 1290명이 구속되자 그는 수북이 쌓인 낙엽을 치우고 돌아오니 다시 낙엽이 쌓여 있는 내용의 만화를 그렸다. 시위대를 잡아넣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란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1997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를 다루며 “대쪽 집안이라 속이 비어 몸무게가 안 나간다”고 그려 항의를 받았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1992년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 시절 얼굴의 검버섯을 빼 달라고 이 화백에게 매달리기도 했다.그의 풍자가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16대 국회에서 자민련이 17석으로 교섭단체를 못 만들자 “3명 꿔오면 되지”라고 그렸는데, 그해 말 실제로 국민회의 의원 3명이 자민련으로 이적했다.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 ‘삼팔선’(38세도 선선히 사표를 받아준다) 등 유행어도 남겼다. 2011년 한국대학신문 인터뷰를 통해 “나는 독자와의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검열로 인해 하루에 7∼8번 다시 그리는 일이 있더라도 연재를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시사만화가로 살아오면서 독자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마감에 쫓기느라 하루에 담배를 3갑 피웠던 일화는 유명하다. 2007년 제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한 적이 있고,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 만화영상학과 교수·석좌교수, 한국시사만화가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미스앵두’(1979), ‘오리발’(1987), ‘문민아 너 어디로 가니’(1995), ‘재롱이 만화일기’(1996), ‘나대로 간다’(2007) 등 저서를 남겼고, 제1회 고바우 만화상(2001), 동아일보 ‘동아대상’(2007), 제16회 대한언론인상 공로상(2007)을 받았다. 최근까지 스카이데일리에 시사만화 ‘도두물 선생’을 그렸다. 유족은 부인 이경란씨와 사이에 아들 상민 시공사 만화팀 편집자, 딸 지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강사가 있다. 빈소는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6일 오전 8시 10분. 070-7816-0349
  • 황금사과의 향연… 청송 축제 내일 팡파르

    황금사과의 향연… 청송 축제 내일 팡파르

    ‘사과의 메카’ 경북 청송은 요즘 온통 붉고 노란 열매들로 넘실거린다. 수확철을 맞아 사과 품종인 부사와 시나노골드가 탐스럽게 익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청송에서 황금사과의 향연이 펼쳐진다. 청송군은 9~13일 청송읍 월막리 현비암 앞 용전천에서 ‘제16회 청송사과축제’를 개최한다고 7일 밝혔다. ‘황금진 청송사과, 세상을 밝히다’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축제는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대면 축제로 대한민국 대표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됐다. 축제 기간 내내 대표 킬러 콘텐츠인 ‘청송 퀴즈’, ‘만유인력-황금사과를 찾아라’, ‘꿀잼-사과난타’, ‘도전-사과선별로또’ 등을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 또 ‘청송사과 퍼레이드’, ‘청송 꽃줄엮기 전국대회’ 등 주민과 관광객이 하나 되는 참여형 프로그램과 ‘청송 골든벨 사과 올림픽 3종’, ‘사과낚시’ 등의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접할 수 있다. 축제의 흥을 돋우는 공연도 매일 마련된다. 개막일인 9일 오후 6시부터 ‘청송문화제 축하공연’이 열리며 김희재, 양지은, 박혜민 등이 출연한다. 다음날 같은 시간에는 ‘MBC 가요베스트’ 녹화 공연이 마련돼 현숙, 배일호, 조정민, 김범룡, 박상철, 진시몬, 서지오, 한혜진, 반가희 등이 출연한다. 셋째 날 축하공연에는 이찬원, 박서진, 조명섭, 앵두걸스, 현진우, 이소나 등의 무대가 마련됐다. 이 밖에도 축제 기간 시니어 한마당, 독도사랑스포츠공연단 공연, 축하공연 등의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돼 있다. 윤경희 청송군수는 “청송군 제1소득원인 청송 사과의 특별함을 홍보하고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한 축제에 많은 성원과 참여를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고려시대 개성, 금주령 잦았지만 막걸리 즐겼다/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고려시대 개성, 금주령 잦았지만 막걸리 즐겼다/전 국립고궁박물관장

    대표적인 개성 음식은 보쌈의 원조 격인 개성 쌈김치, 만두, 개성 장땡이, 약과, 조랭이 떡국 등을 들 수 있다. 개성 음식은 조선왕조의 도읍지 서울 음식과 조선왕가의 발상지 전주 음식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음식의 하나이다. 개성 음식의 발달 요인은 고려의 식문화에서 기인한다. 개성은 지리적 이점으로 해산물과 농산물 등 식재료의 풍부함에 고려 궁중음식의 화려함이 더해져 식문화가 발달했다. 하지만 고려의 음식문화에 대한 기록과 자료는 몇몇 고문헌과 당시 문인들의 시를 통해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루 몇 끼를 먹고 무엇을 먹었는지 등은 너무 일상적이고 당연한 사실이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고려 때 개성사람들은 뭘 먹었을까. 고려인들이 주로 먹었던 곡물은 쌀과 보리, 밀?콩류?조?기장?피 등이었다. 쌀은 알이 크고 달아 선물로 주고받기도 했다. 고려 말 이색은 ‘목은집’에서 “부잣집들은 노적가리가 마치 높은 언덕을 이루며 썩어 나지만, 가난한 집은 그날그날 방아를 쪄 땟거리를 마련하고 햅쌀이 아닌 묵은쌀도 겨우 먹었다”고 했다. 백설기는 하늘이 내린 음식이라 할 정도로 맛이 있고, 약밥을 선물로 받기도 했으며, 쌀죽을 끓여 먹었다고 했다. ‘늘그막에 병중에서 맞이한 동지’라는 시에서는 ‘연유 같은 팥죽이 푸른 사발에 가득하구나’라며 팥죽이 꿀보다 맛있다고 했다. 두부 반찬을 보고는 마치 막 썰어낸 비계처럼 맛있고 부드러워 늙어서도 보양식으로 먹기 좋다고 했다. 또한 점심에 부인이 해 준 오이채와 연한 부추 잎을 곁들인 국수를 먹고 감동해 ‘오찬’이란 시를 남기기도 했다. 국수는 요즘과 달리 사신 접대나 생일, 잔치 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그 이유를, 고려는 밀이 생산되지 않고 모두 중국에서 사와야 해서 값이 비싼 때문이라 했다. 고기는 양과 돼지, 소, 꿩 등을 먹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숭불정책으로 살생과 도살을 싫어해 서민들은 잘 먹지 못했다. 1123년 6월 개성에서 한 달을 보낸 서긍은 “고려인들은 양과 돼지를 기르지만 왕과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했고, 대신 해산물이 풍부해 서민들이 많이 먹는다”고 했다. 특히 해산물은 귀천에 관계없이 주로 복?조개?미꾸라지?왕새우?문합?게?굴?해초?거북이 다리?다시마 등을 먹었다. 당시에도 김치를 먹었을까. 그렇다. 김치가 최초로 문헌에 등장한다. 오늘날 배추김치와는 다른 순무를 재료로 한 김치이다. 이규보는 채마밭에 여섯 종류의 채소를 심고 읊은 ‘가포육영’에서 “무장아찌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 되네”라고 해 당시 무장아찌와 동치미를 먹었음을 알게 해 준다. 이색은 우엉과 파와 무를 섞어 담근 침채장을 선물로 받았다고 했다. 과일은 어떤 것들을 먹었을까. 이색은 자신이 좋아하고 즐겨 먹었던 산딸기?수박?참외?앵두?배?복숭아?홍시?살구 등을 시로 읊었으며, 서긍도 ‘도려도경’에서 참외?사과?복숭아?배?대추?앵두?개암?잣?연근?능금?인삼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다양한 과일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술은 잦은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많이 마셨다. 서긍은 “고려인들이 술과 단술을 귀하게 여기며, 맵쌀에 누룩을 섞어서 술을 빚는데 빛깔이 걸고 맛이 독해 쉽게 취하고 깬다. 서민들의 술은 맛이 싱겁고 빛깔은 찐한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들 맛있게 마신다”고 했다. 개성에서는 술을 주막에서 팔았다. 이규보는 높은 관직에 있을 땐 청주를 마셨지만 관직이 없을 땐 막걸리를 마셨고, 주막의 푸른 깃발만 봐도 목이 축여지는 것 같다고 시로 읊었다.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화려한 화단과 척박한 땅의 간극/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화려한 화단과 척박한 땅의 간극/식물세밀화가

    유년 시절의 추억 속 식물을 떠올려 본다. 우리 집 거실에 있던 소철 화분과 보라매공원에서 본 붉고 노란 튤립.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식물은 대부분 재배식물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지난여름 친구들과의 단체 대화창에 닭의장풀 꽃 사진을 올렸더니 친구 하나가 어릴 적 이 식물을 잉크꽃이라 불렀다고 했다. 1980년대 중반 경기도 양평에서 나고 자란 친구는 자신이 식물에 딱히 관심 있던 것은 아니지만 닭의장풀, 애기똥풀, 하늘타리와 같은 들풀을 자주 봐 온 터라 자연스레 들풀 이름을 많이 알게 되었다 말했다.친구와 나는 같은 시기 같은 한국, 50㎞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살았지만 서로 다른 식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재배식물을 보아 온 나와 자생식물을 보아 온 친구 사이에는 각자가 살아온 땅의 간극이 분명 존재했다. 일정 장소에 모여 사는 식물군, 식생 차이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기후와 토양, 지형이다. 남미의 사막에 사는 식물과 우리나라에 사는 식물이 다르고, 내가 사는 경기도와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식물도 다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땅의 식생 차이는 자연적인 요인보다는 인위적인 개발의 영향이 훨씬 커 보인다. 지난해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과 식물 수업을 하던 중 제철을 맞은 앵두(앵도)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한참 앵두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어린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를 물으니 학생 3분의2가 앵두를 모른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가만히 앵두나무를 되뇌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앵두나무는 도시 주택의 정원수로서 흔히 심어져 왔다. 그러나 도시에 아파트가 들어서며 앵두나무는 뽑히고 베어져, 이제 이들은 서울 공원이나 대형 정원 혹은 경기도 외곽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가 되었다. 우리가 고층 건물을 짓느라 앵두나무를 도시 밖으로 내쫓은 셈이다. 앵두나무와 감나무, 할미꽃이 있던 도시 주택가는 콘크리트와 시멘트를 부어 만든 새 아파트와 외국에서 육성된 이름 모를 외래 식물이 가득한 화단이 되었다. 앵두나무가 있기 전의 땅에는 또 다른 고유 식물들이 살아왔을 것이다. 지루하고 지저분한 것은 멀리 내쫓고, 새롭고 깨끗한 존재를 내 가까이에 들여놓는 일의 반복이야말로 지금껏 인류가 해 온 일이다.가끔 도심 화단을 지날 때면 식재된 식물종의 다양성과 화려함에 놀라곤 한다. 생소한 품종의 달리아, 해바라기, 튤립 외에도 범부채와 나리, 상사화와 같은 야생화 그리고 민트, 로즈메리 등의 허브식물도 볼 수 있다. 예산이 넉넉한 지역일수록, 주민의 미감이 까다로울수록 그에 맞게 화단 생태계는 발전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이용되지만 더이상 도시 안에서 식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앵두나무와 감나무 그리고 그 외의 채소와 과일의 행방을 생각해 보자. 서울에서 차로 10분도 걸리지 않는 경기도 외곽 지금 내가 사는 지역에는 크고 작은 공장과 택배회사, 갖가지 채소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농장이 즐비하다. 신선한 상태의 식재료를 서울에 공급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서울에 생활용품을 유통하기 위해서는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외곽에 농장과 공장을 지어야 했다. 가끔 이곳은 서울을 위해 존재하는 동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곳은 아니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고향인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그저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으나, 이제 귀한 야생화나 여유로운 농촌 풍경 대신 트럭 무게에 깨진 콘크리트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초들이 무성하다. 물론 우리 지역이 도시 조경 관리에 소홀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십여 년 전, ‘공장지대’가 된 초기만 해도 봄이 되면 지자체에서 길가 화단에 대대적으로 화려한 재배식물 모종을 심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트럭들이 오가며 내뿜는 매연과 뜨거운 바람 그리고 쓰레기 때문에 화단의 꽃이 잘 자라지 못하다 보니 이제 지자체에서는 화단에 맥문동과 팬지처럼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생존력이 강한 소수의 식물만을 심게 되었다. 흙이 노출된 땅에는 오염된 환경에서도 비교적 잘 자라는 애기똥풀, 딱지꽃, 지칭개와 같은 들풀이 건조한 모습으로 생장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매일 만나는 식물 풍경이다. 내 눈앞에 화려한 재배식물 화단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생존력이 강한 식물만이 살아갈 수 있는 오염된 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경기도 외곽의 어느 동네를 산책하며 깨달았다.
  • 동해 ‘송정오감(五感) 막걸리축제’ 3년만에 연다

    동해 ‘송정오감(五感) 막걸리축제’ 3년만에 연다

    강원 동해 송정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송정오감(五感) 막걸리축제’가 오는 9월 2~ 3일까지 이틀간 동해역광장 일대에서 열린다. 동해시는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막걸리축제를 3년 만에 다시 열어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 넣겠다고 30일 밝혔다. 축제 첫날인 2일에는 해군군악대 연주와 김소영 작가의 서예퍼포먼스, 아재스의 막걸리송을 시작으로, 나팔박, 통일악단, 려화, 당찬, 앵두걸스 등의 공연이 펼쳐진다. 3일에는 지역 아동들의 태권도시범과 소고춤, 각종 국악공연을 비롯해 댄스팀과 무예시범 지역가수들의 공연이 마련되어 있다. 또 최상아의 나이트 믹스 등 행사의 흥을 높여줄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됐다. 막걸리축제에 어울리도록 동해시에서 제조되는 막걸리와 함께 전국 유명 막걸리를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먹거리마당도 준비됐다. 이밖에 다양한 전시·체험·게임이 마련 되었고, 3대가 100년 이상 전통을 이어온 송정막걸리와 학비형국(학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비상하는 모습)의 마을지형을 키워드로 아이에서 어르신까지 공감 할 수 있는 이야기와 마을생활 문화가 함께하는 잔치마당을 열 예정이다. 홍일표 송정동장은 “2회째를 맞는 송정오감 막거리 축제가 지역발전을 염원하는 주민의 뜻을 하나로 모아 송정시장의 전통 시장 인정 등록, 마을 도시재생, KTX와 연계한 지역경제 활성화 등 송정의 옛 명성 회복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젤리크루-신세계사이먼, 캐릭터 페어 ‘국캐대표 선발전’ 시선 집중

    젤리크루-신세계사이먼, 캐릭터 페어 ‘국캐대표 선발전’ 시선 집중

    크리에이터 커머스 플랫폼 젤리크루(대표 박준홍)가 신세계사이먼·일러스트코리아와 공동 주관한 ‘국캐대표 선발전’(국민 캐릭터 대표 선발전)의 ‘톱10’ 크리에이터가 선정됐다. 이번 행사는 창작 캐릭터들이 대중들의 선택을 통해 인지도를 쌓고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기획됐다.17일 젤리크루와 신세계사이먼 등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열흘간 진행된 이번 행사에는 약 150여명의 크리에이터가 참여했으며 고객 투표에는 16만명이 참여했다. 고객이 취향에 맞는 캐릭터를 직접 뽑고, 그 캐릭터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이색 마케팅이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평가다. 투표 기간 젤리크루 온라인 플랫폼 방문자 수는 하루평균 대비 5배 이상이었으며, 플랫폼 입점에 대해 문의하는 크리에이터의 수도 평소 대비 3배가량 늘었다. 온라인 투표수와 소셜미디어(SNS) 채널의 좋아요·댓글 수를 종합 집계해 선정된 톱10 크리에이터는 눙눙이, 라라하우스, 람찌네소품샵, 밤토리상점, 소소로운, 소푸빌리지, 앵두앤유, 영이의 숲, 으나네작업실, 푸르름디자인 등이다. 오는 9월에는 톱10 캐릭터들의 온라인 특별 기획전이 젤리크루 온라인 플랫폼에서 진행되고 10월에는 신세계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오프라인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오프라인 페스티벌에서는 ‘내가 직접 뽑은 캐릭터’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남길 수 있는 대형 조형물과 포토존이 조성되고 젤리크루 팝업스토어와 함께 다양한 체험형 이벤트도 진행될 예정이다.
  • [길섶에서] 꽃대궐/이동구 에디터

    [길섶에서] 꽃대궐/이동구 에디터

    여행, 잔칫집, 희망봉, 꽃길같이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들이 있다. 봄이 다가오는 요즘엔 ‘꽃’이 붙은 단어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기분을 좋게 한다. 꽃단장, 꽃소식, 꽃구경, 꽃방석, 꽃망울 등등. 그중에 눈과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단어는 ‘꽃대궐’이 아닐까. 꽃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하게 피어나 그렇게 표현했을까. 상상만 해도 행복해진다. 서울을 “삭막하다, 잿빛 도시다”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정겹고 아름다운 곳도 많다. 봄이면 궁궐과 왕릉은 꽃들로 시민들의 시선을 모은다. 경복궁은 앵두꽃과 살구꽃이, 창덕궁은 능수벚꽃과 매화가 아름답다. 창경궁은 생강나무꽃과 앵두꽃, 덕수궁은 벚꽃과 모란, 종묘는 개나리와 오얏꽃이 유명하다. 정릉에서는 벚꽃과 개나리꽃과 진달래꽃, 태릉과 강릉에서는 산수유꽃과 진달래꽃, 선릉과 정릉에서는 산수유와 때죽나무꽃이 봄을 알린다. ‘꽃대궐’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올봄엔 가족들과 꽃대궐에 취해 보고 싶다.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우리가 매화를 찾는 이유/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우리가 매화를 찾는 이유/식물세밀화가

    지난해 봄 소셜미디어(SNS)에서 가장 주목받은 식물은 단연코 매화였다. 코로나19로 인해 매년 열리던 식물 축제가 취소되고, 외국 여행뿐만 아니라 국내 여행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도심의 궁궐 식물에 눈을 돌렸고, 그중 창덕궁의 한 나무에 유독 사람들이 몰렸다. 나 역시 늘 그렇듯 지난해 봄에도 창덕궁을 찾았다. 창덕궁 성정각 자시문 앞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매실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어김없이 이 나무를 찾았고, 가까이 다가가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무 주변을 둘러싸고 사진을 찍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 인파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무 한 그루를 보기 위해 청소년부터 노년층까지 이토록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모이는 일은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그간 매실나무는 옛 식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난,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 중 하나이며, 우리나라 궁궐의 정원수로도 많이 식재되었다. 옛 유물과 유적에서 매화 기록을 자주 볼 수 있기에 우리에게는 익숙한 식물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이색적이고 특별한 식물을 찾는 젊은 식물 소비자층에게는 범접하기 힘든 식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는 우리에게 먼 곳의 존재보다 가까이에 있는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고, 이 가까운 존재 중에 매실나무가 포함된 것이다. 매화는 매실나무의 꽃을 가리킨다. 흔히 매화나무라고도 하지만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목록은 매실나무를 정명으로 추천한다. 다만 꽃이 피는 시기의 나무를 가리키거나 꽃을 관상하는 목적에서 식재된 경우에는 간혹 매화나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3월과 4월 사이에 꽃이 피고, 6월이면 열매가 다 자란다. 우리는 이 열매를 수확해 매실청이나 매실주를 만드는 데에 쓰고, 약으로도 먹는다. 매실나무와 매화나무 이름의 논란은 꽃과 열매 중 어떤 기관이 더 인간에게 유용한지의 문제일 것이다. 어쨌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물이 열매까지 유용하니 우리는 매실나무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물론 매화가 사군자 중 하나인 것은 꽃의 아름다움, 열매의 유용함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의 생활형 때문이다. 아직 겨울이 다 지나지 않은 추위 속 매실나무는 꽃을 피워 낸다. 황량함을 뚫고 피어나는 꽃, 추위를 딛고 깨어나는 꽃의 존재는 과거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기에 충분했다. 현대 사람들이 매화축제에 찾아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겨우내 산뜻함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을 해소해 줄 만한, 이른 봄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실나무가 속한 벚나무 속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살구나무, 앵두나무, 복사나무, 자두나무, 벚나무 등이 있는데 이들 중에도 매실나무가 가장 빨리 꽃을 피운다. 해도 짧고 매개동물이 적은 계절에 꽃을 피우기란 식물에게도 도전이기에 이른 봄 꽃을 피우는 식물의 용기에 깊은 의미를 두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매실나무는 우리나라 자생식물이라고도 오해받지만 중국 양쯔강 유역 쓰촨성 원산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돼 식재된 식물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왕벚나무와 착각하기도 한다. 매실나무와 왕벚나무가 도심 조경수로 가장 많이 식재되기 때문에 개화한 매화를 보고 벚나무가 벌써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둘은 개화 시기도, 꽃의 형태도 매우 다르다. 왕벚나무보다 매실나무의 개화가 더 빠르며 왕벚나무는 꽃자루가 길어 꽃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반면 매실나무는 꽃자루가 짧아 가지에 꽃이 붙어 난다.또한 매실나무에서는 강한 꽃 향이 난다. 아직 추위가 다 가지 않은 계절,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올 때 꽃향기가 난다면 주변을 둘러보길. 그곳에 매화가 있을 것이다. 매화 향기는 기록이 불가능한 식별키다. 그리고 이 향기의 존재는 매화를 사진이나 그림이 아닌 실제로 보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식물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면 눈에 익숙해 그 아름다움에 무뎌지기 쉽다. 그러나 매화만큼은 무뎌질 수 없는 아름다움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겨울 한기가 다 가지 않은 계절, 건조한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용기를 내 꽃봉오리를 내고 화사한 향을 내뿜는 식물. 가만히 매실나무를 들여다보면 매화를 유난히 좋아했다는 조선 태종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매년 보는 매화도 이리 반가운데 선물받은 만첩홍매의 개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 얼마나 기뻤을지 말이다. 게다가 이들은 우리나라에 자생하지 않는 식물, 자연이 우리에게 쥐여 주지 않은 식물이다. 이것이 수백 년간 우리가 매실나무를 욕심내 온 이유일지도 모른다.
  • 무작정 상경한 두 처녀, 탈농촌·도시화의 상처 껴안은 건 용서와 화해

    무작정 상경한 두 처녀, 탈농촌·도시화의 상처 껴안은 건 용서와 화해

    1950년대 농촌서 서울로 도망간 두 여성일확천금 꿈꿨지만 현실은 뒷골목 여인신부 찾아온 두 남자 ‘화해의 손’ 내밀어무작정 상경 경계·분열된 국민감정 통합 김정애 KBS 노래자랑서 눈에 띄어 데뷔경쾌한 노래로 슬픔에도 새 힘 생성시켜젊은이들이 떠나고 아기 울음소리마저 끊긴 농촌의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1953), 배호의 ‘두메산골’(1963),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네’(1971), 홍세민의 ‘흙에 살리라’(1973), 그리고 배일호의 ‘신토불이’(1993)까지 농촌을 지키려는 의식이 깃든 노래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농촌 공동화에 따른 부작용을 염려하는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나 같은 시골 총각은 남자도 아닌가/ 여자 여자 없소 여자 여자 없소/ 나 좀 장가들게 해 줘’. 필자가 작곡한 이용주의 ‘여자 없소’(2020)도 마찬가지다. 농촌 인구의 대대적인 도시 이동을 예견했던 노래가 있으니 바로 김정애의 ‘앵두나무 처녀’(1956)다. 중장년층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노래는 신세계를 동경하는 당대 사람들의 심리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따뜻하게 포용하는 휴먼 드라마가 담겨 있어 더욱 사랑받는 곡이기도 하다.‘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농업 본위의 산업 구조를 채 벗어나지 못했던 1950년대. 농촌에서는 일손 하나가 아쉽던 시절이지만, 농업에 기반한 생활은 육체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어 늘 고달프기만 했다. 더구나 여성들은 살림과 출산, 육아 및 노동으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 식구들을 먹이고, 설거지를 마치면 일꾼들의 새참을 준비해 논밭으로 가야 했다. 일꾼들이 새참을 먹을 동안 여성들은 쉬지도 못하고 잡초나 피를 뽑거나 밭고랑의 김을 맸다. 점심을 나르고 또 새참을 나르고 저녁밥을 지어 올리고 난 후 온 식구들이 잠들어도 일거리는 산적해 있었다. 인두와 다리미로 옷과 동정에 풀을 먹여 다렸고, 물레로 실을 잣고 베틀을 놓아 실을 뽑고 옷감을 짜야 했다. 여성들의 삶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강행군의 연속이었고, 이러한 고된 생활에 진력이 날 수밖에 없다. 이런 농촌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한 마을의 두 처녀가 서울로 도망을 가면서부터 동네가 발칵 뒤집히는 상황을 그리면서 ‘앵두나무 처녀’는 시작된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우물가는 빨래터와 함께 동네 아낙네들의 정보교환장이다. 아낙네들은 우물에서 양동이에 물을 긷는 그 짧은 순간에 간밤에 동네에서 일어난 긴급 뉴스를 죄다 공유한다. 앵두나무가 둘러선 우물가에서 듣자 하니 ‘서울은 온 거리마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고 전기가 들어와 네온불이 현란하게 돌아가며 빌딩이 하늘 끝 간 데까지 맞닿은 별천지’라는 것이다. 농사일에 이골이 나 있던 이쁜이와 금순이는 그 말을 듣고 이내 단봇짐을 꾸려 서울로 내뺐다. 노랫말 중에 나오는 ‘물동이’는 살림을, ‘호미자루’는 농사일을 대표하는 환유법으로 그것들을 내던졌다는 것은 살림과 농사일을 내팽개쳤다는 뜻이다.탈농촌화는 이때부터 서서히 시작돼 1960년대 이후 도시화의 물결이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서울에 가면 일확천금과 벼락출세를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안고 가난했던 농촌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쁜이와 금순이를 환영할 도시는 없었으니 이게 문제였다. 도망간 신붓감을 찾으러 서울로 올라간 복돌이와 삼용이는 뒷골목에서 웃음을 파는 ‘에레나’(주점에서 일하는 여성이 사용한 가명)가 된 이쁜이와 금순이를 발견한다. 자신의 신붓감이 뒷골목 여인이 돼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선뜻 용서해 줄 아량이 있을까. 더구나 이 당시는 여성들에게 정조를 강요하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때다. 그런데 복돌이는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며 이쁜이를 달랜다. 자신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준 복돌이의 마음에 이쁜이는 눈물을 쏟는다. 용서를 통해 이쁜이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준 복돌이의 마음에는 6·25전쟁은 물론 멀리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반목하고 분열된 국민 감정을 통합하고자 하는 시대 정신이 은근하게 녹아 있다. ‘앵두나무 처녀’는 1956년 도미도레코드에서 발표됐다. 작사가 천봉이 가사를, 작곡가 한복남이 곡을 썼다. 경쾌한 스윙 리듬에 실린 김정애의 노래는 봄볕처럼 따뜻하고 해맑다. 김정애의 가수 데뷔는 시작이 사뭇 특이했다. KBS에서 처음으로 노래자랑이 시작돼 엄청난 인기를 모으자 전국 각지에서 공개방송 유치를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때 대구에 주둔하던 공군에서 비행기를 제공하며 방송을 유치했고 대구 군부대에서 전화 교환 업무를 담당하던 김정애는 노래자랑에 나가게 된다. 김정애는 백설희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을 불렀고 방송 관계자의 눈에 띄어 KBS 전속가수가 된다. 이후 ‘앵두나무 처녀’와 ‘닐니리 맘보’ 등을 발표하면서 스타 반열에 오른다. 30여년간 가수 활동에 전념한 그는 1987년 간경화로 세상을 뜨기 한 달 전까지 무대에 올랐다. 민요에서도 나타나듯이 우리 민족은 시름겨운 일상이나 한을 노래할 때 오히려 경쾌한 리듬에 노래한다. 슬픔을 슬픔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새로운 힘을 생성시키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앵두나무 처녀’도 무작정 상경에 경종을 울리는 골계미, 에레나가 된 두 처녀의 비극미, 그리고 용서와 화해로 막을 내리는 우아미까지 다양한 미의식의 전환을 경쾌한 스윙 리듬을 통해 들려준다. 이 노래는 탈농촌과 도시화 물결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 시대의 단면도로서 유행가의 본령을 보여 준다. 또한 상처를 용서와 화해로 통합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교훈을 던진다. 작곡가·문학박사
  • [열린세상] 외모 지상주의와 유기농/조이한 아트에세이스트

    [열린세상] 외모 지상주의와 유기농/조이한 아트에세이스트

    잘생긴 사람이 능력도 좋고 인성도 좋다는 생각은 인생 경험이 쌓이면서 폐기해야 마땅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외모에 먼저 반응한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칭찬하는 것만큼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조롱을 퍼붓는 문화는, 특히나 내 편이 아닌 사람을 향할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진다. 잠시만 경계의 끈을 놓치면 나 역시 쉽게 빠질 수 있는 위험이다. 그런데 이게 단지 사람의 외모에만 한정된 이야기일까?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시절에야 과일의 모양을 따질 여유가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식구들 입에 들어갈 먹거리”는 늘 크고, 잘생기고, 흠 없는 것을 고르셨다. 당연히 그런 것은 비싸다. 나는 아직 그 정도의 살림 구력이 되지 않아 싼 것에 먼저 손이 가지만, 우리는 크고 잘생긴 먹거리에 익숙해져 버렸다. 식구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픈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과연 이 생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시골에 살기 전까지는 그것에 딱히 의문을 품지 않았다. 돈을 내니 당연히 흠 없는 물건을 산다고 생각했다. 값을 치르고 벌레 먹거나 찌그러진 과일을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기농을 외친다. 농약은 물론 제초제 같은 걸 써도 안 된다, 그런 것은 땅을 약하게 만들고 사람도, 지구도 병들게 한다고 주장한다. 겨우 2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을 시골에서 살면서 나는 그 일이 얼마나 양립 불가능한 것인지 깨달았다. 유기농이되 잘생긴 과일과 채소라니…. 그건 마치 네모난 동그라미, 혹은 따뜻하지만 눈도 내리는 풍경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동네 어르신 말씀을 빌리면 엉덩이 반의 반쪽만 한 텃밭을 가지고 나는 봄 여름 가을 내내 종종거렸다. 약을 치지 않으니 양배추 같은 채소는 성긴 그물이 됐고, 앵두나무는 진드기가 꼬여 손으로 일일이 잡다가 진저리를 쳐야 했다. 봄부터 나기 시작한 풀은 며칠만 내버려 두어도 마당을 폐가 수준으로 만들었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벌레들은 사람이 좋아하는 채소를 특히 좋아했다. 오이는 예외 없이 다 비틀어진 상태로 자랐고, 호박도 가지도 마트에서 보는 것 같은 모양이 아니다. 시중에 나오는 건 봉지나 비닐로 모양과 크기를 일정하게 잡아 줘서 키운 것이다. 프로 농부들은 과연 약을 치지 않고도 충분한 수입을 보장할 만한 수확량과 보기에도 좋은 농산물을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마트에는 벌레 먹거나 시든 것은 나오지 않는다. 농부들은 약을 치지 않으면 수확량이 현저히 적을 뿐만 아니라 상품으로 내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약을 치지 않아 생기는, 벌레 먹거나 못생긴(?) 농산물은 누구도 돈 주고 사 먹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농부들이 시장에 내놓을 것과 본인 먹을 것을 구분한다고 했다. 주변에 정직하게 친환경으로 과수원을 하다가 깊은 상처를 받고 농사를 접은 사람이 있다. 무농약이나 친환경이어서 좋다고 주문해 놓고 벌레 먹은 게 있거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모양이 반듯하지 않은 게 섞여 있다고 항의하고 환불을 요청한다. 약도 안 치니 일도 줄었들 텐데 왜 비싸냐는 소리도 한다. 약을 치지 않으면 풀을 일일이 뽑아내야 하고 벌레도 손으로 잡아야 한다. 그렇게 지켜 낸 농산물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몇 곱절 더 노동력과 시간이 들어간다. 하지만 소비자는 그런 일 따위 알 바 아니다. 어쨌든 돈을 냈으니 번듯한 물건을 내놓으라고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요구를 한다. 시골 살면서 직접 조그마한 상자 텃밭이라도 짓지 않았다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도시농부 문화가 혹시 그런 우리의 생각을 바꿀 계기가 돼 줄 수 있을까? 코로나로 인해 환경 문제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더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완전한 무농약은 불가능하더라도 친환경 농법을 더욱 연구하고, 우리가 먹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지 전반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불어 사는 삶을 바란다면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를 먼저 버려야 하는 것처럼 정말로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한다면 보기 좋은 식재료에 집착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 기세등등 암릉에 안길쏘냐…찰박찰박 붉은해 품을쏘냐…곱디고운 쪽빛에 물들쏘냐

    기세등등 암릉에 안길쏘냐…찰박찰박 붉은해 품을쏘냐…곱디고운 쪽빛에 물들쏘냐

    하늘은 맑고 대기는 따스했다. 전남 진도의 관매도 가는 길. 바람은 다소 세찼지만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질 법한 날씨였다. 한데 진도항(옛 팽목항) 여객선 터미널의 매표원이 전한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심드렁한 표정의 그는 메마른 목소리로 내일 날씨가 안 좋다고, 돌아오는 배가 뜨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새벽부터 먼 길을 달려온 여행자로선 그야말로 ‘멘붕’의 순간이었다. 자연의 제약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섬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전하려는 건 그날 진도의 남쪽에서 만난 별 같은 풍경들에 대한 이야기다. 비유하자면 ‘멘붕 끝에 낙이 온다’ 정도려나. 관매도와 아직 마주하지는 못했어도, 절대 꿩 대신 닭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높이는 뒷동산, 난이도는 1000m급 ‘동석산’ 진도항 가는 길에 시선을 사로잡은 산이 있었다. 그 산은 해안가에서 흔히 보는 육산과 결이 달랐다. 보통의 산들은 바다와 만나면서 어딘가 유순하고 말랑말랑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산은 강경했다. 육지를 내달려 오던 그 기세 그대로 완강하게 서 있었다. 오르고 나서야 알았다. 그 산이 등산가들 사이에서 소문난 동석산(銅錫山·219m)이란 것을. 왜 동네 뒷산만큼 작은 산을 오르면서 오금이 저려야 했는지, 그리고 그게 그리 창피해할 일이 아니란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동석산은 진도 남쪽에 솟은 산이다. 높이는 낮지만 나라 안의 200m급 산 중에선 가장 빼어나다는 상찬을 받는다. 바닷가에 솟은 덕에 산정에서 굽어보는 다도해 풍경도 그만이다. 등산을 즐기는 이들이 오르기 힘든 산을 두고 자주 쓰는 표현들이 있다. 가장 흔한 건 “암릉 종합선물세트”일 터다. “산은 높이로 말하지 않는다”거나 “높이는 뒷동산급, 난이도는 1000m급”이란 표현도 종종 듣는다. 동석산은 이런 표현들이 적확하게 들어맞는 산이다. 사실 오르는 것 자체가 힘들지는 않다. 어느 고산준봉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아찔한 스릴, 그로 인해 몸이 느끼는 ‘저세상 텐션’ 탓에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지 싶다. 동석산 들머리는 세 곳이다. 남쪽의 종성교회와 천종사, 북쪽의 세방마을이다. 남쪽은 ‘흉악하기 짝이 없는 악산(岳山)’이고 북쪽은 상대적으로 완만한 육산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완만한 곳을 선택하는 게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동석산의 남쪽을 ‘봐 버린’ 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들머리로 삼는 곳은 종성교회다. 예전엔 천종사 코스로 오르는 이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나마 등산로의 흔적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했기 때문이다. 철제 난간, 등반 로프 등 각종 안전 설비가 마련된 요즘엔 바뀌었다. 오금 저리는 상황을 즐기려는 이들이 부러 종성교회 코스를 찾는다. 물론 안전 설비가 갖춰졌다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한때 ‘목숨 걸고 오른다’고 했을 만큼 난코스였던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특히 칼날능선(사실 칼보다는 두툼한 모양새가 작두에 더 가깝다) 같은 곳은 말 그대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암릉 구간이어서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강풍도 잦다. 조산운동 초기에 항아리처럼 둥글었을 바위가 칼날처럼 날렵하고 매끈한 모습이 된 건 십중팔구 풍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매도에 들지 못한 이유를 다시 상기해 보시라. 걸핏하면 배가 끊기는 이유도 이 세찬 바람 때문이었다. ●급치산 오르니 다도해 경관 오롯이 내눈에 들머리의 교회도, 절집도 이름에 하나같이 ‘쇠북 종’(鍾)자가 들어간다. 그 이유는 산 중턱의 종성바위에 오르면 알게 된다. 종성바위는 바람이 지날 때면 종소리가 난다는 곳이다. 신라 때 한 승려가 지나는데 동석산 봉우리들이 일제히 종소리를 토해 냈다지. 그때부터 산 아래는 종성골이라 불렸고, 동쪽 직벽 아래에 1000개의 종을 뜻하는 ‘천종사’, 남쪽 바위 아래에는 ‘종성교회’가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정상까지 빠르게 오르려면 천종사 코스가 낫다. 동석산 가운데쯤에서 출발해 정상과 가깝다. 반면 산자락 초입의 암릉미를 감상하려면 갔던 길을 되짚어 와야 하는 단점이 있다. 동석산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암릉이다. 어디서 출발하든 ‘워밍업’ 따위는 없고 곧바로 오르막이다. 3~4시간 소요되는 원점회귀가 일반적이지만 석적막산, 애기봉 등을 거쳐 세방마을로 내려서는 종주산행을 즐기는 이들도 있다. 이 경우 산행 시간은 5시간 이상으로 늘어난다. 동석산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에 진도의 명소들이 매달려 있다. 제때 제자리에 서려면 시간 안배를 잘해야 한다. 1박 2일 여정일 경우, 첫날 마지막 목적지는 당연히 세방낙조 전망대여야 한다. 여건만 맞는다면 일생에 두 번 보기 힘든 해넘이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동석산 바로 옆은 급치산이다. 다도해 경관을 한눈에 품을 수 있는 곳이다. 급치산에도 낙조전망대가 있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호젓한 것이 장점이다. 주변 의식할 필요 없이 마음껏 셀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오르는 도로도 잘 닦여 있다. 한데 노을 풍경으로만 보자면 세방낙조나 동석산에 견주기는 어려워 보인다.●갯벌 따라 마음 적시는 해넘이 ‘세방낙조’ 세방낙조 전망대 주변은 ‘시닉(Scenic) 드라이브 코스’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 줄곧 빼어난 풍경이 매달린다. 해넘이는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맞는다. 사위가 노을로 붉게 물들 때면 주차장과 도로가 차들로 북새통이다. 전망대 아랫마을에서 맞는 해넘이 장면은 좀더 서정적이다. 바닷물이 찰박대는 갯벌 너머로 붉디붉은 해가 넘어간다. 두 채의 펜션이 나란히 선 곳이 포인트다. 둘 다 사유지여서 꺼려지긴 하지만, 염치 불고하고 들어가야 한다. 민망한 시간은 짧고 남겨질 사진의 시간은 길다. 동석산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10분 남짓 내려가면 팽목항(현 진도항)이 나온다. 대한민국 사람 누구에게나 가슴 한 켠에 상흔처럼 새겨졌을 지명이다. 팽목항 주변에 당시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많다. 누구나 갖고 있을 먹먹한 아픔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차분하게 고백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팽목항 상흔 지나면 ‘삼별초 항전’ 남도석성 팽목항에서 서망항을 지나면 곧 남도석성이다. 삼국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이다. 고려 때 진도까지 밀려온 삼별초가 몽골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남도석성 앞에 쌍홍교와 단홍교 등 두 개의 홍예교(무지개다리)가 있다. 편마암 판석을 겹쳐 세워 질박한 아름다움이 일품이다. 진도 일대에는 삼별초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남도석성, 용장산성 등이 대표적이다. 굴포리엔 이 포구에서 전사한 삼별초 장군 배중손의 사당이 조성됐고, 의신면엔 왕족 왕온을 모시던 궁녀들이 몸을 던졌다는 삼별초 궁녀둠벙이 정비돼 있다. 남도석성 바로 앞은 동령개 마을이다. 대단한 볼거리는 없지만 동령개 소공원, 해안가 숲 등에서 넋 놓고 쉬어갈 만하다. 동령개는 여느 갯마을과 달리 해안이 몽돌이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나는 독특한 소리가 마음을 다독이고 가라앉혀 준다. 여귀산 돌탑길은 이름 그대로 여귀산 아래에 돌탑들을 세워 조성한 길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귀산 남신과 여신 전설을 돌탑의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돌탑 주변엔 시비도 세웠다. 이 지역 문인들이 쓴 창작시들이다. 돌탑길 아래에 탑립마을, 아리랑마을 등이 있다. 진도아리랑 가락을 보듯, 유연하게 굽이치는 마을길이 일품이다. 죽림리의 해안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일대 바다는 물색이 아주 곱다. 연한 사파이어빛 바다와 갯벌이 잘 어우러져 있다. 죽림마을 앞 솔숲은 얼추 400년 역사가 담긴 방풍림이다. 낮은 돌담이 둘러친 마을 안길을 자박자박 걸어도 좋고, 솔숲에 앉아 쉬어 가도 좋겠다.의신면 도로변엔 ‘훈장님탑’이 있다. 이름 그대로 ‘서당 훈장님’들을 기리며 세운 탑이다. 공덕비도 여럿 세웠다. 의신면으로 ‘위리안치’됐던 한양 출신 훈장님도 있고, 출세길에 나서지 않고 고향에 남은 훈장님도 있다. 나라 안에 ‘사또님’ 공덕비 무리는 숱하게 봤어도 훈장님의 공덕을 칭송하는 탑과 비석 무리는 처음인 듯하다.●유배지서 웰빙 등산길로… ‘섬 속의 섬’ 접도 이제 접도를 말할 차례다. 진도 동남쪽 여정에서 긴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이다. 접도는 섬 속의 섬이다. 진도와 접해 있다고 해서 접도다. 해안선 길이라야 12㎞ 정도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1989년에 접도대교가 놓이면서 진도와 연결됐다. 접도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 중 하나였다. ‘유배지 공원’ 안내판에 따르면 1703년 박필위를 시작으로 모두 21명이 유배를 왔다고 한다. 접도는 아담하고 예쁘다. 대표 명소는 ‘웰빙 등산로’다. 접도 최고봉인 남망산 일대의 숲과 해안을 아우르는 길이다. 들머리는 수품항과 여미주차장 등 두 곳이다. 여미주차장 코스가 비교적 짧지만, 그마저 최소 3시간은 잡아야 한다. 일반 여행객들이 준비 없이 나서기는 사실 쉽지 않은 거리다. 여기서 ‘꿀팁’ 하나. 쉽고 편하게 남망산 정상에 오르는 방법이 있다. 수품항 초입 언덕에서 오른쪽 남망산 방향으로 도로가 나 있다. 도로 중간쯤 여미재에 차를 대고 오르면 10분 만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체력은 정력’이라는 ‘거창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다. 등산을 꺼리거나 시간이 없는 도시 여행자에게는 그야말로 ‘웰빙’ 등산로이지 싶다. 남망산은 밖에서 보면 별 특징이 없는 야산처럼 보인다. 한데 숲 안으로 들어서면 다양한 수종의 상록수림이 펼쳐진다. 정상은 쥐바위(159m)다. 표지석이 세워진 곳보다 맞은편 바위에서 보는 전망이 훨씬 좋다. 남망산 아래 수품항도 예쁘다. 항구 주변에 낚시 공원이 조성돼 가족들이 편히 낚시를 즐길 수 있다. 글 진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뜸부기탕은 진도의 독특한 먹거리 중 하나다. 해초인 뜸부기를 소갈비 등과 함께 끓여낸다. 읍내 신호등회관, 맛나식당 등에서 맛볼 수 있다. 소담은 수제 돈까스, 김치찌개 등을 맛깔스럽게 낸다. ‘신비의 바닷길’ 인근에 있다. 용궁관은 현지인들이 ‘강추’하는 중국집이다. 특히 홍합짬뽕은 앵두를 씹는 것처럼 차지고 포실한 홍합 맛이 일품이다. 양도 푸짐하고 재료도 신선하다. 세방낙조와 가까운 지산면 소재지에 있다. -세방낙조 주변에 펜션들이 많다. 다만 인근에 맛집들이 많지 않아 지산면이나 진도읍에서 먹고 들어가야 한다. 접도 쪽도 먹거리 사정은 좋지 않은 편이다. 접도 끝자락의 수품항에 작고 깔끔한 커피숍이 한 곳 있다.
  • [근대광고 엿보기] 1930년에 변색 안경이?

    [근대광고 엿보기] 1930년에 변색 안경이?

    “미국 최고급품 주야 변색 클억쓰 안경” 1930년 12월 9일자 매일신보에 동그란 모양의 안경 광고가 실렸다. 가느다란 테가 돋보이는, 당시로서는 최신 모델이다. 미국 클락스사의 제품으로 보이는데 특히 날씨에 따라 안경색이 변하는 안경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안경알이 맑은 날씨에서는 연청색, 구름 낀 날씨에서는 회색, 밤에는 연한 앵두색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온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오늘날의 변색 렌즈보다 더 색 변화가 다양하다. 악(惡) 광선을 막고 눈을 보호하는 데 특효가 있으며 안경 값은 10원인데 광고와 실물이 다르면 100원을 진정(進呈·자진해서 줌)한다고 했다. 요즘의 ‘전액 환불’ 마케팅보다 더 파격적이다. 판매처는 만주 안동현 ‘국제양행 안경부’로 돼 있고 조선에서는 금을 주어도 구경하지 못하는 물건이라고 광고하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시험해 보라고 주문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안경은 1280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도미니크 수도원의 수사인 알렉산드로 드 스피나와 그의 친구인 물리학자 살비노 데질르 알망티가 발명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580년경 중국을 통해 최초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씌어 있는 내용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성일이 사용했다는 안경 실물이 남아 있다. 양반 계층에서 안경을 두루 쓰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개화기에 외국 무역상들이 안경을 들여와 팔았다. 당시 안경은 눈이 나쁘지 않은 사람도 쓰고 다녔다. 지식층임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이자 일종의 액세서리였던 셈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한 최초의 안경점은 ‘명안당’이다. 명안당은 1920년 4월 2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광고를 실었다. 주인은 장희원이다. 안경 제작 기술을 최초로 한국인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세브란스병원을 창립한 에비슨이라고 한다. 에비슨은 휴가를 얻어 미국에 갔을 때 그곳에서 렌즈 연마기를 들여와 안경을 제작해 팔고 있었다. 그러나 재고가 많아 고심하고 있던 터에 한국인 젊은이가 나타나 안경 사업을 인수해 확장해 나갔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에 그렇게 적혀 있다. 이 젊은이가 장희원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명안당은 주로 미국제와 독일제 금테 안경을 취급했다. 가격은 5원부터 20원대까지 다양했다. 금 한 돈에 5원 50전 정도 할 때였다. 또 20년을 보장하고 만약 금테가 변색되면 100원을 주겠다고 했다. 1922년 명안당 광고를 보면 명안당은 현재의 서울 종로2가에 있었다. 지점도 그 근처에 있었고 공장은 관철동에 있다고 돼 있다. “개업한 지 십유오년…”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실제 창립 연도는 1907년경이라는 말이 된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서울포토]‘단군 이래 최고의 미녀’라는 그녀

    [서울포토]‘단군 이래 최고의 미녀’라는 그녀

    1954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정윤희는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앵두 같은 입술로 별명은 ‘깜씨’. 윤곽이 뚜렷한, 당시 보기 드문 서구형 미인이다. 해태제과 모델로 대중에게 얼굴을 널리 알리고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활약하며 1970∼1980년대 한국영화계를 이끌었다. ‘단군 이래 최고의 미녀’라는 수식어를 차지한 그녀는 세 명 중 미모 원톱이였다. 정윤희는 정진우 감독의 두 작품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1981년과 1982년 잇달아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까지 인정받았다. 역대 미녀 배우 중 명실상부 가장 성공한 스타가 됐다. 한창 잘나가던 그는 1984년 유부남인 한 건설사 대표와 간통 혐의로 고소돼 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뜨렸다. 다행히 대표의 전처가 고소를 취하해 그해 말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났다. 이후 1993년 남편 회사의 가구 브랜드 TV 광고에 출연하며 오랜만에 얼굴을 비쳤고 2011년 미국 유학 중이던 친아들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예순 살이던 2013년에는 수수한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스포츠서울
  •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부산해지는 봄날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부산해지는 봄날

    언덕 경사지에서 자라는 생강나무 좀 낮게 키울 요량으로 전지를 했다. 굵은 나무는 잘라 쌓아 두고 꽃 피어 있는 가지를 화병에 꽂아 두었다. 이미 피어 있는 노란 꽃 사이로 잎이 나오고 있다. 마당에는 수선화가 노란 꽃을 피우고, 튤립이 꽃대를 올린다. 매화와 살구꽃이 한창이고 앵두꽃도 하얗게 피고 있다. 그렇게 봄을 맞이하니 춥다고 미뤄놓은 일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화단 지나는 길 손보고, 계단 만들어야 하고, 닭장으로 가는 길에 블록 깔아 주어야 하고, 데크와 현관문 칠해야 하고, 쥐가 드나들기 시작한 닭장 손봐야 한다. 지난해 기록적인 폭우로 무너진 돌담도 마저 보수해야 하고 울타리도 설치해야 한다. 무슨 일이 끝도 없다. 대부분 새로 만들기보다 고치고 보완해야 하는 것들이다. 이사 와서 새로 만든 창고와 닭장, 텃밭상자와 아궁이. 창고는 방치와 보수로 점철되고, 퇴비장은 몇 번을 만들었던지. 아궁이는 좀더 편리하고 적당한 자리 찾는다고 서너 번은 만들고 허물고 그랬다. 화단은 구성이 달라지고, 지하수 쓰다가 수도를 놓으며 수돗가는 처음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공사로 잔디가 뒤집어진 것이 서너 번이다. 늘 그대로인 듯한 집과 마당은 오늘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듯하다. 적응하기 바쁘더니 욕심내기 끝이 없네. 경험 없는 탓에 호미 들고 하루 보내기가 쉽지 않더니, 이제는 아쉬워 새로 텃밭상자 하나를 더 만들었다. 인연으로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아 정신없이 한두 해 보내고 나니 이제 9마리도 많다 느껴지지 않는다. 그 많던 닭이 세 마리만 남으니 볼 때마다 쓸쓸하다. 예전엔 작업하는 공간만 챙기면 되었는데 이제 집이다. 꽉 차게 보이던 곳이 허술하게 다가오고 망가진 곳이 크게 보이니 무덤덤하게 외면하기 쉽지 않다. 그러면서 일이 많고 힘들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당연한 상황에 적응이 덜 된 탓일까, 과한 욕심 탓일까. 생각이 매일매일 바뀐다. 나이 들수록 달라지는 것은 생각대로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는 것. 이제는 몸이 가는 만큼 생각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본다. 뛰지 말고 천천히. 요즘 내게 건네는 위로다. 격려의 말이기도 하다. 슬슬 연장들을 꺼내야 할 때가 됐다.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는 봄은 길지 않다.
  •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그의 눈에 비친 미인, 당신이 보는 미인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그의 눈에 비친 미인, 당신이 보는 미인

    여성이 여성이기에 화제의 중심이 된 것은 인류사에서 종종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덜했다. 그런 까닭에 신윤복의 ‘미인도’가 일찍이 주목을 받은 모양이다. 흔히 신윤복의 ‘미인도’를 조선 미인도 중 최고 걸작이라 말하지만 실상 조선의 미인도는 대개 작자 미상의 여인 그림 몇 점이 전부다.신윤복의 그녀는 새초롬한 얼굴로 오른편 아래를 내려다본다. 가늘고 섬세한 필치에서 마늘쪽 같은 코에 앵두 같은 입술의 앳된 모습이 더 돋보인다. 곱게 빗어 올린 삼단 같은 머리와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드리운 붉은 띠가 상당히 멋을 부린 차림새다. 소매가 좁고 꼭 끼는 삼회장저고리에 잡아맨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수줍은 어린 기녀다. 신윤복은 보는 이의 시선을 버선코로 이끈다. 푸른빛 치맛단 아래 삐죽이 내민 버선은 새침한 그녀의 도발이고 반항이다. 말갛고 투명해 보이는 그녀의 꾹꾹 눌러 둔 반항을 신윤복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보는 그녀의 내밀한 속내가 눈매와 버선발에서 드러나는 걸 보면 그와 그녀는 사적인 관계였던 듯하다. 드러낸 적 없던 조선의 여인이 처음 표현된 건 이처럼 개인적인 필터를 통해서였다. 윤두서의 ‘채애도’부터 여성 그림이 늘었다. 풍속적 요소를 반영한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좀더 초상화에 가까운 여성화가 그려진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서양화법이 가미된 채용신(1848~1941)의 ‘운낭자’는 여러 모로 ‘미인도’와 비교된다. 실제 초상화는 아니지만 얼굴이 훨씬 구체적이라 특정한 개인을 모델로 한 것처럼 보인다.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은 매우 긍정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자세는 당당하다. 신윤복의 미인과 채용신의 운낭자는 치마저고리의 색도 비슷하고, 왼쪽 버선발을 슬며시 치마 밖에 내놓은 모습도 같다. 하지만 두 여인의 인상은 전혀 다르다. 화가의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고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한 바 있는 채용신은 세밀한 필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운낭자는 원래 가산군수 정시(1768~1811)의 첩실이던 기생 최연홍(1785~1846)의 별칭이다. 그녀가 27세 되던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정시가 살해되자 정시 부자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내고 그 동생을 몰래 치료해 줬다. 이에 그녀의 행적을 가상히 여긴 조정에서 기생의 신분을 면해 주고, 사후에는 초상화를 그려 열녀각인 평양 의열사에 봉안했다. ‘순조실록’에서는 그녀를 ‘구국의 열녀’로 칭송했다. 채용신은 1914년 운낭자가 27세이던 때를 상상해 이 그림을 그렸다. 뒷면에 채색을 해 색이 배어 나오게 하는 배채법 등 전통 화법과 옷주름의 음영을 살린 입체감, 사진처럼 세밀한 묘사 등 서양화법을 접목해 초상화에 근대로 향하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 건강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기독교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을 떠올리게 한다. 신윤복의 그림이 기녀를 향한 내밀한 감상이라면 채용신의 그림은 심지 굳은 대중의 어머니와 같다. 같은 기녀임에도 개인의 은밀한 관찰과 사당에 걸기 위한 공적 인물 묘사는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았다. 분명 여성을 대하는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앵두나무와의 가위 바위 보/심재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앵두나무와의 가위 바위 보/심재휘

    산앵두나무와의 가위 바위 보/심재휘 동네 입구 꽃집 구석에는 잔가지들을 함부로 거느린 나무가 있어서 오고 가는 길에 볼품없더니 산앵두나무란다 산을 버리고 꽃집 구석의 화분에 발목도 없이 웅크리고 앉아 제 몸을 파는 산앵두나무 한철 노숙을 제 얼굴에 드리우고 있어서 많이 야위었다 여기었더니 삼월 어느 저녁엔 나를 불러 연두 주먹을 내보인다 이내 주먹을 펴 보인다 다음엔 필경 분홍의 무언가를 낼 심사인데 나는 연두도 분홍도 못 되는 기껏 빈 손바닥을 쳐다보다가 무엇을 내도 필패이려니 싶어 그냥 그 나무 옆에 집 없는 사람처럼 서 있다가 왔다 젊은 시인은 꽃집 구석에서 만난 산앵두나무와 가위바위보 하려다 멈춥니다. 처음엔 꽃 아직 안 핀 산앵두나무가 어리숙해 보여 가위바위보를 하면 이길 것 같았지요. 그 순간 자신의 삶 생각합니다. 집, 사랑, 결혼, 직장, 여행…. 모든 싸움에서 이긴 적 없습니다. 산앵두나무와의 가위바위보 또한 필패하지 않겠는지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궁핍과 사랑. 젊은 날 시인이 운명적으로 사랑하고야 말 덕목 아니겠는지요. 나 가위바위보 하면 꼭 져 줄 착한 물앵두나무들 꽃피는 마을 알고 있지요. 오세요, 봄에 그곳에서 우리 가위바위보 해요. 곽재구 시인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집콕’의 순간, 원예의 시간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집콕’의 순간, 원예의 시간

    코로나19의 여파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개강이 2주 뒤로 연기됐고, 직장인 친구들은 재택근무 중이다. 친구들은 혼자 일하기 지루한지 종종 내게 연락해 산이나 식물원에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난, 언제 한 번 같이 산책을 하자거나 집에서 식물을 재배하는 건 어떠냐며 은근슬쩍 식물 문화 안으로 끌어들인다. 최근 어떤 화분을 들일지 묻는 친구와 이미 많은 식물을 재배 중이라 재택근무 동안 오랫동안 식물을 볼 수 있다며 좋아하던 친구들을 보면서 요즘 나는 부쩍 가정 원예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한다.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이 많던 1990년대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조그마한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는 앵두나무 한 그루와 엄마와 아빠가 심어 놓은 오이와 상추, 가지 등이 가지런히 커갔다. 저녁 무렵 엄마가 채소를 수확할 때면 나는 옆에서 마당을 뛰어다니고, 여름이면 아빠와 함께 앵두를 따서 바구니에 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모님이 특별히 식물 가꾸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마당이 있는 이상 무언가를 심고 가꾸어야 했다. 그리고 10년 후 우리는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아파트에는 꽤 널찍한 베란다가 있었다. 엄마는 베란다에 여러 종류의 난과 소철, 고무나무, 드라세나 등을 두었다. 마당만큼은 아니지만 베란다는 자연을 느끼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딱 1년 전 우린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지금 내가 사는 집엔 베란다가 없다. 엄마는 주방 뒤편에 창고 겸 작은 베란다가 있어 특별히 베란다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며 거실 확장 공사를 했다고 말씀하셨다. 요즘은 베란다를 다 없애는 추세라고. 전에 살던 집에 있던 화분과 식물들은 지금 거실 구석구석, 또 내 방에 흩어져 놓여 있다. 환기가 많이 필요한 식물들은 내 작업실로 옮겨 왔다.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온 집의 형태에 따라 나는 채소와 과일을 수확하는 원예인이 되기도, 식물을 거의 재배하지 못하기도 했다. 주거 형태에 따라 원예 생활의 모습과 규모가 달랐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가정 원예’는 변화하고 있었다. 최근 1인 가정이 많아지고 원룸 형태의 주거양식이 늘면서 도시 식물 또한 변화하고 있다. 내가 굳이 식물을 사지 않아도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식물을 가꾸시기에 집 안에서 식물을 볼 수 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내가 나서지 않으면 식물을 볼 수도 접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됐다. 1980~1990년대 실외 정원에 심는 초화류와 베란다의 난과 식물의 인기, 그리고 현재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엽식물로 인기 흐름은 이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최근에는 집이 좁다 보니 관엽식물 중에서 크기가 작은 종을 선택하고, 혼자 살다 보면 식물에 많은 신경을 써 주지 못하기에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는 공중식물이나 테라리움 등을 키우기 시작한다. 여러 이유 때문이지만 주거양식의 변화도 하나의 요인으로, 화훼 소비량도 2005년까지 점점 호황기를 맞다가 그 후로 현재까지는 주춤하고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다양한 품종을 원하고, 더 깊숙이 원예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5년여 전부터 식물 인기 흐름에 올라탄 젊은 소비층이 그렇다. 이들은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식물을 원한다. 나의 반려식물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원예 관련 책을 보고, 강의도 듣는다. 최근 2년 새 출판계에 ‘식물 책’ 바람이 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신의 반려식물 정보를 게시하는 ‘식물 계정’도 부쩍 늘었다.내 친구들도 종종 원예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원예의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다. 식물을 재배하고 나서 외롭지 않게 됐다거나 불안했던 정서가 안정된 것 같다던가 혹은 식물에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하고, 죽은 고사지를 정리하느라 몸이 지쳤지만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들을. 그래서 나는 화훼 산업이 주춤하고 있다는 지금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 젊은 원예인들은 식물을 재배하기 힘든 상황에도 그 어느 때보다 식물을 강력히 원하며, 공기 오염과 미세먼지 증가, 지금과 같은 정서적 불안의 환경은 인류가 식물을 더 원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고 있다. 그저 지금은 식물 문화가 일상으로 스며드는 과도기가 아닐까. 며칠 전 지금은 절판된 옛 원예서인 ‘원예대백과’를 읽다 마음에 남는 한 구절을 보았다. ‘우리 집의 사철을 어떻게 꾸밀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계획을 하는 즐거움에 의욕이 솟아올랐다면 당신은 이미 한 사람의 원예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원예’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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