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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설은 음악가로서 사회적 책임감 때문”

    “독설은 음악가로서 사회적 책임감 때문”

    “안녕하세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독설가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작곡가인 방시혁(39).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위탄)에서 까칠하고 냉철한 심사평으로 ‘독설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는 요즘 웬만한 연예인 못지 않은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지난 23일 서울 압구정동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방시혁을 만났다.   낯가리는 방시혁, ‘위탄’ 출연 이유는? 백지영의 ‘총맞은 것처럼’, 2AM의 ‘죽어도 못보내’, 옴므의 ‘밥만 잘 먹더라’, 비의 ‘나쁜 남자’, god의 ‘하늘색 풍선’…. 자신의 이름보다 더 유명한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방시혁은 가요계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기 작곡가다. 낯가림이 심해 인터뷰는 물론 방송 노출을 꺼리던 그가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유부터 물었다. “처음엔 ‘슈퍼스타K’의 짝퉁이란 얘기가 있어서 위험 부담도 컸어요. 하지만 시장 선도 업체들이 있는 상황에서 저희 회사 음악을 빨리 알리기 위해서는 사장인 제가 스스로 브랜드화되고 킬러 콘텐츠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제작자가 유명해지면 사회적인 책임도 커지겠지만, 그만큼 일관성과 충성도도 커지니까요.”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시절, 박진영 대표와 손잡고 많은 스타들을 키워냈던 그는 2007년 독립했다. 2AM, 임정희, 에이트 등이 그의 회사 소속이다. 그렇다면 ‘위탄’ 출연으로 인한 손익 계산서는 어떻게 될까. “요즘 신입사원을 채용 중인데 제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지원자가 10배 가량 늘었습니다. 저의 멘토 스타일을 본 뒤 (우리 회사) 오디션 응시자도 부쩍 늘었어요. 하지만 삶 자체가 노출되는 데 따른 불편함도 있어요. 공공장소에서도 그렇고,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글을 올릴 때도 자꾸 자기 검열을 하게 되더라구요.” 얼마 전 SNS에 평소 절친한 사이인 가수 엄정화와 ‘우리, 결혼했어요’에 한번 출연해보고 싶다는 우스개 소리를 올렸더니 인터넷에 ‘방시혁, 공개 구애’라는 기사가 떴다며 방시혁은 웃었다. 그래도 소속 아티스트들의 애로 사항을 확실히 알게된 것은 ‘수확’이란다. 그는 예전부터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했다. “제가 직접 프로듀서를 맡을 때는 녹음실에서 울면서 노래한 가수들이 많았어요. 그래도 울면서 나간 가수는 없어요. 나가면 다시는 못 돌아오니까. 케이윌, 에이트, 임정희 등 지금은 유명한 가수들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앨범 제작을 중단한 적도 있어요. 물론 화만 낸 것은 아니고, 성악 발성을 가르치는 보완책을 마련해줬죠.”   방시혁이 말하는 ‘독설의 철학’ 방시혁은 ‘위탄’에서의 자신의 이미지는 자사 오디션이나 소속 가수들을 볼 때의 중간 쯤이라고 했다. “독설은 애정이 있어야 나오는 겁니다. 소속 가수들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것은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구요. ‘위탄’ 도전자들에게 독설을 하는 것은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이 들어서예요. 정말 가수가 되고 싶은 절박한 마음에 온 친구들인데, 단점이 보이는데, 다음 기회는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독하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가끔은 자신이 봐도 정말 밉살스러울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일에 집중할 때의 모습이 TV에 그대로 나와 더욱 경직되게 보인다는 것. “전 제 말이 꼭 독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남을 비방하거나 해할 의도가 있지 않기 때문이죠. 요즘 독설 화법이 유행하는 것은 명분을 앞세우는 한국 사회에서 체면을 생각해 에둘러 말하거나 거짓을 얘기하기보다는 좀 불편하더라도 솔직하게 말을 하기 때문일 겁니다. 엄숙주의를 깨는 데 대한 대리만족이나 통쾌함도 작용한 것 같구요.” 방시혁은 ‘위탄’에서 노지훈과 데이비드 오 두 명의 도전자를 최종 합격시켰다. 두 사람은 새달 8일부터 다른 ‘멘토 스쿨’의 최종 진출자들과 생방송 무대에서 치열하게 경합한다. 그의 오디션 심사 기준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1등을 할 가능성을 먼저 고려했죠. 제 심사 기준은 무대에서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재능입니다. 가수는 물론 가창력이 중요하지만, 무대에 서는 순간 스타성으로 표현되는 무대 장악력이 화면으로 뿜어져 나와야한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지금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무대를 보여줄 수 있느냐가 주된 평가 기준이죠.”   서울대 미학과 출신, 어려서부터 빌보드 꿰고살아 서울대 미학과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빌보드(미국 대중음악 차트)를 꿰고 살았다는 그는 아직도 박진영의 음악적 유산이 자신에게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작곡가로서 박진영의 문법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숙제”라고도 했다. “작곡가는 평생 하청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을의 정신’에 투철합니다. 일단 곡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또한 새로움의 요소가 없으면 제가 쓴 곡이 아무리 유행해도 달갑지 않아요. 작곡은 모르겠지만, 작사는 당대 감성을 그 시대의 말로 풀어내는 남다른 문법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만족하는 편입니다.” 평소엔 TV를 잘 보지 않고, 주로 뉴스를 보면서 시류를 파악하고 사람들이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은지 고민한다는 방시혁. 그는 요즘 아이들을 위한 동요 사업과 걸 그룹 ‘글램’의 데뷔(7월) 준비에 여념이 없다. 불혹을 앞둔 나이.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지혜로운 여성을 찾고 있지만, 음악보다 가정을 우선시할 자신이 없어서 당분간은 (결혼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 음악을 더 오래 하기 위해 다이어트에 돌입하는 등 체력 관리에도 신경쓰고 있다는 그를 보며 ‘독설가’보다는 ‘완벽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서인국 성형 논란?…“살 빠졌을 뿐”

    서인국 성형 논란?…“살 빠졌을 뿐”

    가수 서인국이 또 다시 성형 논란에 휩싸였다. 서인국의 성형 논란은 24일 ‘모던 페티쉬룩’ 콘셉트의 시스루룩을 입고 찍은 재킷 사진이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사진 속 서인국은 지난해 ‘애기야’로 활동할 당시보다는 사뭇 다른 모습에 날렵해진 턱선과 콧날, 도톰해진 입술 등을 근거로 성형 의혹을 샀다. 이에 대해 소속사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3~4kg 정도 살이 빠졌을 뿐이지 성형한 것은 아니다.”면서 “여기에 화장법이나 사진보정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이게 됐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여배우도 아닌데 앨범이 발매 될때마다 성형설에 휘말리니 황당할 뿐”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편 서인국은 오는 31일 새 음원 공개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사진=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슈스케3’ 지원자 보름새 68만명 돌파...기록 세울까

    ‘슈스케3’ 지원자 보름새 68만명 돌파...기록 세울까

    오디션 열풍의 주역인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 ‘슈퍼스타K(슈스케) 3’에는 원서 접수 시작 보름여 만인 25일 현재 68만여명이 몰려들었다. 여기, 두 명의 젊은이가 있다. 한 명은 오디션을 통해 가수의 꿈을 이뤘다. 대신, 들춰내고 싶지 않던 가족사를 해부당해야했다. 또 한 명은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뮤지컬배우 오디션장으로 달려갔다. 이들의 도전은 아직 진행형이다. 가수 김보경(21). 아직은 전철을 타거나 시내를 활보해도 알아보는 이들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가수다. 꽤 괜찮은 가수다. 지난해 숱한 화제를 일으켰던 ‘슈스케2’ 출신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슈퍼위크’(도전자 11명을 추려 생방송 무대에 올린 뒤 차례로 탈락시키는 무대) 직전까지 갔다. 심층면접 과정에서 어릴 적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투병, 어린 동생들을 보살핀 사연 등이 알려지면서 시청자와 심사위원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 아쉽게 ‘톱 11’에 뽑히지는 못했지만 서너 곳의 기획사에서 손을 내밀었다. ‘슈스케2’ 출연자 중 가장 먼저 소속사(소니뮤직)를 만났다. 5곡이 실린 첫 미니앨범 ‘퍼스트 데이’(The First Day)로 활동하고 있다. 김씨는 처음에는 오디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했다. “그런 건 화려한 아이돌을 꿈꾸는 애들이나 나가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지원서를 쓴 이유는 딱 한 가지.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오디션을 통해 싱어송라이터로 성공한 미국의 켈리 클락슨이 ‘슈스케2’의 3차 예선에 심사위원으로 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원서에 나와 있는 ‘노래를 하게 된 이유’, ‘가장 힘들었던 고비’ 등의 항목은 적지 않고 빈 칸으로 놔뒀다. 정작 클락슨과의 조우는 실패했다. 외려 걱정했던 일이 현실화됐다. “(부모님 이혼 등은) 다 지난 일인데 고등학생과 초등학생인 동생 친구들이 뒤늦게 알게 돼서 무척 힘들어했어요.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부른 것도 삼촌 친구가 운영하는 곳에서 경험 삼아 아르바이트를 한 건데 생계형 소녀가장으로 편집됐죠.” “우리 사회의 가혹한 경쟁을 단기간에 경험한 기분”이라는 김씨는 “오디션이 ‘양날의 칼’일 테지만 짧은 기간에 담금질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고 털어놓았다. “슈스케에서 탈락하고서야 비로소 ‘아, 그동안 막연하게 음악을 하겠다고 설쳤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만의 (음악)색깔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스타 탄생’을 꿈꾸고 있을 숱한 오디션 도전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을까. “또래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의지와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심사위원이나 멘토의) 날 선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매우 중요해요. 상처를 음악으로 메워 나간다면 약이 될 테지만, 그렇지 않으면 중심을 잃어버린 채 추락할 수 있습니다. 맷집이 강해져야 해요.” 뮤지컬 배우 양경원(29). 언제든 다시 ‘마찰적 실업자’(이직 직전의 실업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래도 당당한 뮤지컬 배우다. 지난해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로 처음 무대에 섰다. 오디션에 합격해 오는 6월 ‘아가씨와 건달들’에, 9월에는 ‘조로’에 거푸 출연한다. 고교 때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할 만큼 춤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도 고민이 컸다. 눈길은 ‘이쪽’으로 쏠렸지만, 현실은 ‘저쪽’(건축설계)을 선택했다. 졸업 이후 건축 프로젝트매니지먼트(PM) 회사에 취직했다. 그런데 몸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과야 모르지만 어쨌든 ‘최선’이 있는데 ‘차선’을 택한 게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직장생활 2년차가 됐을 때부터 이중생활을 했죠.” 퇴근하면 곧장 서울뮤지컬아트센터로 달려가 연습생 생활을 한 것. 1년쯤 지났을 때 확신이 들었다. 사표를 던지고 아예 서울뮤지컬아트센터로 출퇴근했다. 외부 활동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고 ‘브로드웨이 42번가’ 오디션에 도전했다. “회사 다니면서 (오디션) 준비하려면 포기해야 하는 게 많아요. 사회생활 하면서 생긴 경제관념이나 인간관계 같은 건 다 놓아버려야 합니다.” 사표를 내고 1년 동안은 수입이 한 푼도 없었다. 보험을 해약하고 적금을 깨서 버텼다. 오디션을 통과해도 연습이 시작돼야 비로소 수입이 생기는 게 이 바닥이다. 지금도 연수입으로 따진다면 회사 다닐 때의 절반밖에 안 된다.“6월에 작품 시작하기 전까지는 수입이 없으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요. 관공서나 기업 행사에서 갈라쇼 식으로 뮤지컬 명장면이나 노래를 3~5곡 정도 부르는 거죠.” 이런 행사는 주로 연말에 많아 비수기에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 일감을 찾아야 한다. 요즘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설치미술 작품을 전시해 놓은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퍼포먼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뮤지컬계는 어차피 최상급 스타가 되기 전까지는 끊임없는 오디션의 반복이다. 작품에 따라 5~6차에 걸친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해야 배역을 따낼 수 있다. 피 말리는 오디션이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에게 방송사 오디션은 어떻게 비칠까. “대단하죠. 아마추어들인데 공개된 장(場)에 나서는 용기가 대단한 것 같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까지도 까발려지는 공간이란 걸 알면서도 나서는 것을 보면 저 사람들이 정말 절실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뮤지컬을 보러 오는 관객 중에도 나보다 더 목마르고 간절한 분들이 있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하게 돼요.”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오디션 출신 ★들은 누구

    오디션 출신 ★들은 누구

    대표적인 국민 팝송 중 하나인 ‘비코즈 오브 유’(Because of You)’의 주인공인 미국 팝스타 켈리 클락슨.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스무 살이었던 2002년,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 1에서 우승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듬해 데뷔 앨범 ‘생크풀’(Thankful)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석권한 데 이어 석 장의 앨범을 5600만장이나 팔아치웠다. 4집에 수록된 싱글 ‘마이 라이프 우드 석 위드아웃 유’(My life would suck without you)는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10곡’에 들었다. 오디션 스타 탄생의 시작은 2001년 영국의 ‘팝 아이돌’이었다. 방송계의 따라하기 습성은 외국도 다를 바 없었다. 같은 해 호주에서 ‘오스트레일리안 아이돌’을, 독일에서는 ‘독일의 슈퍼스타를 찾습니다’가 선보였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이젠 전설적인 프로그램이 된 ‘아메리칸 아이돌’로 재탄생했다. 이 오디션 심사위원이자 독설가로 유명한 사이먼 코웰에게 “어느 참가자보다 많은 앨범을 팔아치울 것”이라는 찬사를 들은 미녀 컨트리가수 캐리 언더우드(시즌 4 우승자)나 영화 ‘드림걸스’로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조연상까지 받은 가수 겸 배우 제니퍼 허드슨(시즌 3의 7위) 등은 ‘아메리칸 아이돌’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생 역전 스타들이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생겨났다. 2001년 SBS의 ‘영재육성 프로젝트’와 2002년 MBC의 ‘목표달성 토요일-악동클럽’이 바로 그것. ‘목표달성’은 ‘아메리칸 아이돌’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정윤돈 등 5명의 멤버로 구성된 그룹 ‘악동클럽’도 배출됐지만 반짝 활동에 그쳤다. 가수 박진영(현 JYP 사장)이 심사위원으로 나선 ‘영재육성’은 오늘날 대표 아이돌이 된 선예(그룹 원더걸스 멤버)와 조권(2AM 멤버)을 배출했다. 휴대전화 외판원 폴 포츠와 ‘볼품없는 외모’의 가수지망생 수전 보일을 세계적인 성악 스타로 발돋움시킨 영국의 ‘브리튼스 갓 탤런트’ 등이 인기를 끌면서 2009년 다시 오디션 바람이 국내에 불기 시작했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와 ‘아메리칸 아이돌’을 합성시킨 케이블채널 엠넷(Mnet)의 ‘슈퍼스타 K’(슈스케)가 그해 7월 선보였다. 특히 지난해 방송된 ‘슈스케’ 시즌2는 케이블 사상 최고 시청률(19%)을 기록했다. 3~4%면 대박이라는 케이블 TV에서 시청률이 10%를 넘는다는 것은 지금도 ‘기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하동균, 제대 앞서 드라마 OST로 인사

    하동균, 제대 앞서 드라마 OST로 인사

    가수 하동균이 군 제대를 앞두고 드라마 OST로 먼저 팬들을 찾았다. 하동균은 입대 이후 2년 6개월 만인 25일 MBC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 OST의 ‘애프터더러브’(After the Love) 음원을 공개했다. ‘애프터더러브’는 브리티쉬한 느낌의 곡으로 남녀가 헤어진 뒤 이별의 원인과 방법, 상처를 혼자 만의 체념을 통해 지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한 남자의 이별 이야기를 담은 곡으로 하동균 특유의 보컬과 음악적 감성 그리고 깊이가 한층 더 해진 아날로그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곡이다. 이 곡은 하동균이 입대 전 미니앨범 발매를 위해 직접 작사, 작곡, 편곡, 녹음 디렉팅까지 모두 참여한 곡으로 갑작스러운 입대로 인해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곡을 들은 주변의 끊임없는 권유로 드라마 OST를 통해 발표하게 됐다고. 26일부터 드라마에 삽입될 예정인 ‘애프터더러브’는 극 중 주인공들의 삼각관계를 미리 암시하듯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느낌으로 그들의 심정을 나타내 큰 사랑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하동균은 지난 2002년 그룹 원티드로 데뷔한 뒤, 2006년 솔로로 변신해 ‘그녀를 사랑해줘요’, ‘나비야’ 등의 히트곡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WS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걸스데이, 속옷 노출 논란 해명 “속옷 아닌 속바지”

    걸스데이, 속옷 노출 논란 해명 “속옷 아닌 속바지”

    걸그룹 걸스데이가 속옷 노출 논란에 휩싸여 소속사 측이 해명에 나섰다. 24일 소속사는 방송용 무대의상 속옷 노출 논란에 대해 “직접 자체 제작한 교복패션의 무대의상 치마 속 하의 속바지가 흰색인데다가 레이스 장식을 달아 속옷으로 보였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앞서 걸스데이는 지난 16일 컴백을 앞둔 쇼케이스 무대부터 일부 블로그나 트위터, 미투데이 사용자들에 의해 안무 중 속옷이 노출된다는 이유로 논란이 된 바 있다. 이에 소속사는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어 앞으로 주의 또는 부분 수정을 통해 착용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걸스데이의 세 번째 싱글앨범 타이틀곡 ‘반짝반짝’은 멜론, 엠넷, 소리바다, 도시락 등 모든 온라인 음악사이트 10위권에 안착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사진=드림티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고우리, ‘실험녀’ 시절 공개…화장 전후 충격

    고우리, ‘실험녀’ 시절 공개…화장 전후 충격

    걸그룹 레인보우 멤버 고우리가 데뷔전 ‘스펀지 실험녀’로 활동한 사실이 밝혀져 눈길을 끈다. 지난 11일 방송된 KBS2 ‘스펀지 제로’는 고우리의 과거 실험녀 시절 모습을 공개했다. 당시 착시현상의 한 예로 메이크업의 효과를 소개하던 중 실험녀로 등장한 고우리는 화장 전-후의 비교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났다. 이날 게스트로 출연한 고우리는 자신의 촌스러운 과거 모습에 당황하는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고우리의 모습을 본 MC 이휘재는 “명제와 정답보다 (고우리의 모습이) 더 충격”이라며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혼자 쓰러지느냐”고 말해 고우리를 당황케 했다. 이에 대해 고우리는 “데뷔 전 ‘스펀지’ 실험에 참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화장 예쁘게 해준다고 해서 왔었는데….”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러자 이휘재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KBS가 망하지 않는 한 저 자료사진은 평생 갈 것”이라고 말해 웃음을 선사했다. 한편 고우리는 지난해 자신이 속한 레인보우의 디지털 싱글 앨범 주제곡 ‘마하’ 활동을 마무리하고 개인활동에 임하고 있다. 사진=KBS 서울신문 나우뉴스팀 nownews@seoul.co.kr
  • ‘장기하와 얼굴들’서 독립선언 ‘미미시스터즈’

    ‘장기하와 얼굴들’서 독립선언 ‘미미시스터즈’

    유난히 흰 피부에 도드라져 보이는 붉은 입술, 1960~70년대 유행했던 복고풍 원피스, 망사 장갑 등으로 무장한 무표정의 2인조 여성 그룹 ‘미미시스터즈’에는 ‘큰 미미‘와 ‘작은 미미’가 있다. 전체 관람가 수준으로 설명하면 크고 작고의 기준은 키와 몸무게, 19세 이상 관람가로 이야기하면 가슴이 더 크고 작고의 차이란다. 진짜 이름은영원히 공표하지 않을 작정이다. 콘셉트 자체가 ‘지상 최고로 도도한 신비주의’다. 평소에는 일반 직장을 다니며 친구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20~30대 여성이지만 미미시스터즈라는 옷을 입고 대중 앞에 서는 순간, 그녀들은 세상 누구보다 도도해진다. 미미시스터즈에게 ‘말’이란 불필요한 장신구다. 손짓, 몸짓 하나로 소통하는 게 즐겁다. 미미시스터즈는 3년 전 ‘장기하와 얼굴들’ 곁에서 코러스와 안무를 담당하며 대중들에게 처음 얼굴을 알렸다. 그런데 돌연 장기하와 ‘협의 이혼’을 선언했다. 장기하에게서 독립, 1집 앨범 ‘미안하지만…이건 전설이 될거야’를 낸 것. 이혼사유? “미미시스터즈만의 음악을 하고 싶어서”란다. 지난 17일 서울 서교동 붕가붕가레코드 사무실에서 미미시스터즈를 만나 봤다. “프로 음악인은 아니지만, 음악이 굉장히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냉면집 탐방, 자전거 여행 등을 통해 만난 뮤지션 ‘서울전자음악단’, ‘로다운 30’, ‘크라잉넛’ 등을 유혹했죠(웃음). 흔쾌히 이번 앨범 작업에 함께해 주셨어요.” (큰 미미) “올 여름에 장기하 앨범이 나올 예정인데 미미시스터즈 데뷔앨범과 비교해 들어보시면 왜 서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됐는지 알게 되실 거예요. 음악 색깔이 많이 다르거든요. 하지만 여전히 시간 나면 함께 술도 마시는 좋은 친구예요. 그런데 회사에서 협의 이혼이란 말 쓰지 말라고 했는데…(웃음)”(작은 미미) 미미시스터즈의 데뷔 앨범에는 ‘록의 대부’ 신중현(73)이 작곡하고 ‘바니걸스’가 부른 ‘우주여행(16분 34초)’, 김창완(57)이 프로듀서로 나서 가수 인희의 ‘폭탄소녀’를 리메이크한 ‘다이너마이트 소녀’ 등 8곡의 곡이 실려 있다. 큰 미미는 “디지털 음원이 하루 먼저 공개되고 나서 ‘초 일반인 같다’는 평이 많았어요. 오히려 기분이 좋더라고요. 미미시스터즈는 아마 요즘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했으면 바로 탈락했을 거예요. 평가 기준이 테크니컬하잖아요. 저희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작은 미미는 “저희가 음반을 내고 가수 활동을 하게 된 이유”라고 거들었다. 3년 전부터 미미시스터즈로 활동하고 있는 큰 미미와 작은 미미는 사실 10년 전 12월 31일 처음 만났다.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 있는 작은 막창집에 각자 손님으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어요. 테이블이 3개가 전부일 정도로 작고 허름한 가게였죠.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얼큰하게 취한 손님들이 모두 친구가 됐지요.” 그때 큰 미미와 작은 미미도 처음 만나 ‘베프’(베스트 프렌드)가 됐다며 큰 미미가 호탕하게 웃었다. “솔직히 취향은 좀 달랐어요. 하지만 말이 통하는 데다 동갑이라 금방 친해졌죠. 매일 통화하고 집에서 떡볶이를 해먹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기타 코드 3개를 배운 뒤 ‘감수광’이란 노래를 연주할 수 있게 됐어요. 너무 기쁜 마음에 새벽 2시에 기타를 멘 채 택시를 타고 큰 미미네 집으로 달려가 들려줬습니다.”(작은 미미) 미미시스터즈라는 이름은 이들이 평소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에서 비롯됐다. 두 사람의 닉네임에는 공통으로 ‘미’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이를 보고 한 친구가 무심코 “그냥 미미시스터즈 해라.”라고 말한 것이 굳어졌다. 그 이름을 지어준 친구는 장기하와의 인연도 만들어줬다. 작은 미미는 “원래 그 친구를 통해 기하를 만나게 됐어요. 근데 너무 만남이 극적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예전에 인터뷰할 때는 저희가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데 장기하가 그 모습을 보고 삼고초려를 해 두 여인을 모셔왔다고 둘러대기도 했어요.”라고 고백(?)하며 깔깔깔 웃었다. 앙 다문 입술로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종전 ‘신비주의’ 콘셉트와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신비주의에 얽힌 웃지 못할 일화도 많다. “큰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다 보니 몇 년 전 인터넷에 미미시스터즈의 민낯이라며 사진이 돌았어요. 문제는 저희 사진이 아니었다는 거죠.”(작은 미미) “사실 네티즌 수사대의 능력만 놓고 보면 저희 신상을 밝히는 데 하루도 안 걸릴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미미시스터즈의 신상을 모르는 게 더 재미있다며 (수사하지 않고) 그냥 지켜주세요.”(큰 미미) 대선배 인순이에게 혼난 일화도 유명하다. 2009년 7월 가수 이문세가 진행하는 한 라디오방송에 함께 출연한 인순이가 도통 말을 안 하는 미미시스터즈에게 “인사성이 없다.”며 불쾌감을 표시한 것. 후에 오해가 풀려 ‘화해 인증 샷’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미미시스터즈는 데뷔앨범 배송 서비스에 직접 나섰다. “1집 CD와 떡, 직접 준비한 오미자차 등을 들고 서울 강남의 사무실 직장인, 목동의 세 살배기 아기, 경기 안산의 슈퍼마켓 사장님을 만나러 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리죠?” 일상 속의 그녀들에게서는 도도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힙합 래퍼로 변신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힙합 래퍼로 변신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책 속에 파묻혀 지낸 40여년, 경제학과 법학 박사학위 타이틀에 무어 아쉬운 게 있을까. 더욱이 이순(耳順)이 멀지 않은 연배에, 자유시장 이념의 선봉장이 되겠다고 작정한 김정호(55) 자유기업원 원장이 힙합 래퍼로 변신했다. 7년째 이 ‘액션 & 싱크 탱크’를 꾸려 오고 있는 그가 마이크를 잡고 리듬에 몸을 맡긴 이유가 궁금했다. 김 원장은 3일과 10일 두 차례 인터뷰에서 “딱딱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며 “미래 동력인 젊은이들이 사상적으로 방황하고 목표를 상실한 것 같아 이들에게 올바른 시각을 심어줄 수단을 찾은 결과가 힙합”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변신 자체도 놀라움이지만 지난 1월 프로젝트그룹 ‘김 박사와 시인들’이 출시한 앨범에 담긴 3곡의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트로트계 ‘이 박사’가 힙합계의 ‘김 박사’로 현신했다고나 할까.‘개미보다 베짱이가 많아’란 노래에는 ‘일자리를 달라고만 하니…공짜는 없어…독립문이 왜 서대문에 있는 줄 알아?…김정일은 벌써 북한 팔아먹어’ 등 신랄한 어조로 가득하다. 3분 50초 뮤직비디오에는 강의 도중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이내 힙합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손동작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차 안에선 리듬에 맞춰 손가락으로 ‘탭’(tab) 하고 어깨를 들썩인다. 김 원장은 “주요선진20개국(G20)에 안주하지 않고 G5로 진입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단순한 저항을 뛰어넘어 긍정적인 변화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주 연세대, 중앙대, 숭실대에서 랩을 곁들여 2~3시간 강연했고 인터넷TV를 통해 ‘프리스타일 코리아’ 강연을 계속하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자유기업원부터 소개해 달라. -액션 & 싱크 탱크다. 보통 싱크 탱크라고 하는데 우리는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행동까지 담보하는 싱크 탱크라 보면 되겠다. →표방하는 바는. -한민족은 굉장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본격 발휘된 것은 대한민국에 들어와서였다. 보통 반만년 역사라고 하는데 대한민국 이전에는 그다지 잠재력이 발휘되지 못했다. 이걸 이어나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최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우리도 고래가 되자, 될 수 있다는 메시지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랩인가. -강연으로 전달하려니까 몇 사람 안 되고 강연 끝나면 다 잊어먹고 그렇더라. 국민들의 마음에 직접 다가가 행동을 이끌어 내려면 감성에 호소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노래가 좋겠다, 해보자 했는데 노래를 잘 못하니까 노래 못하는 사람이 잘할 수 있는 노래가 랩이었다. 리듬감만 있고 조금 용감하면 되겠다 싶었다.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이 랩을 한다면 관심을 많이 가질 것 같더라. 그런데 때마침 하드코어 랩으로 유명한 힙합 그룹 ‘거리의 시인들’ 리더 노현태씨가 도와주겠다고 나서 프로젝트 그룹까지 만들게 됐다. →그래도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텐데. -2009년 5월 대학을 졸업한 딸이 ‘꿈꾸는 다락방’이란 책을 건네며 아빠가 꿈을 잃은 것 같다고 말해 충격을 받았다. 돌아보니 자유기업원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그저 목표 없이 떠돌았다는 성찰을 하게 됐다. 그래서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고자 했고 사회운동가로서 좌표를 다시 설정하게 됐다. 그 연장이 힙합인 것이다. →랩을 배우면서 재미있는 일 많았겠다. -힙합은 생각보다 빨리 배울 수 있어서 나도 놀랐고 젊은 친구들도 놀랐다. 지난 1월에 뮤직비디오를 18시간 걸려 촬영하는데 굉장히 추웠다. 바지를 갈아입을 일이 있었는데 젊은 친구들은 바지를 올리니까 바로 맨 다리가 드러나더라. 그런데 난 내복을 껴입고 있었다. 무지 창피했다. →주위의 반응은. -‘하던 일이나 잘하지.’ 하는 분들이 많다. 직원들도 ‘왜 저러나?’ 한다. →잘한 일이라고 보나.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본다. 힙합을 하면서 젊어졌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앨범 수록곡을 소개해 달라. -‘개미보다 베짱이가 많아’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내용이다. 대한민국이 얼마든지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챔피언 한국’은 대한민국이 우리의 국호이고 1948년에 건국돼 63년 동안 이만한 성과를 거뒀으며 이 대척점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다. →‘똥파리들’이란 곡에 거친 표현도 보이더라. -젊은이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꾸짖고 싶었다. 악플만 달고 있지 말고 국가와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스펙만 쌓지 말고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기업가 정신을 가져 달라고 주문했다. 사실 욕설에 가까운 내용도 있는데 원래 힙합이 욕설에서 시작한 것이다.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 그런 노래에 참여하는 게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래퍼가 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곡 모두 지상파 3사에서 계층 간 갈등 조장, 특정 정당 및 국가 언급 등을 이유로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반항과 저항은 청년들의 특권이다. 생물학적 특권이기도 하고 도덕적으로 봐도 그렇다. 그런데 저항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느냐가 문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미국의 반대편, 우리의 반대편을 지향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북한과 비슷해지는 것을 진보라고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이나 중국 체제와 비슷하게 가는 것을 진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위험하다. 지금 중동의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데 이것이 이슬람 독재나 중국처럼 공산당 일당독재 비슷한 무엇을 꿈꾸고 있다면 진보가 아니다. →진보에 냉소하는 건가. -진정한 진보라면 김정일 정권을 제거하고 북한 인민에게 자유를 주는 진보를 꿈꿔야 한다. 우리 사회도 완벽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가야 한다고 꿈꾸는 것이 진정한 진보다. 내가 돈을 벌어서 남을 돕고 기업을 만들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진보다. 그런데 남의 호주머니 털어 그걸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은 도둑질이다. 내가 변해서 세상을 구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이며 모든 사람이 그렇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영국의 1940년대와 비슷한 구석이 적지 않다. 지식 지형이 완전히 왼쪽으로 기울고 있다. 예전에 남로당 지원을 받던 좌파가 아니라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겨나고 그 여파로 ‘강남 좌파’란 말이 등장할 정도다. 이들이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국가에 생떼를 쓰게 만들고 이도저도 안 통하면 짱돌을 들라고 가르친다. 어쩌자는 것인가. 심지어 기업도 우파 싱크탱크를 외면하고 좌파에 돈을 갖다 받치고 있다. 이런 사상 지평을 바꾸고 싶다. →트위터에 ‘우파 문선대’란 비아냥도 있더라. -그런 지위를 내게 부여해 준다면 영광이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랩을 2~3분 들려주고 젊은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2~3시간짜리 강연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2017년까지 이런 활동을 계속할 것이며 언제든 어디든 달려갈 것이다. →왜 2017년인가. -차차기 대선이 실시되는데 그때까지 진정한 자유시장경제, 보수 이념을 표방하는 정권과 정부가 출범할 수 없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까지 진정한 보수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인가. -이 정부가 한번도 진정한 보수임을 표방하지 않았다. 늘 중도 보수라고 물을 타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잘못된 비판을 가하곤 한다.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먼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도 2009년 5월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 만나기 두려워하고 게으름 피우다 밤늦게 잠들곤 했던 내가 이만큼 달라질 정도로 인간의 잠재력은 놀랍다. 여러분의 잠재력을 지금 살리고 있나? 아니면 ‘잠 재’우고 있나? 그건 여러분 태도에 달려 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를 묶은 ‘대한민국 이야기’(이영훈 지음)와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문화를 파헤친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박성현 지음)을 권한다. 임병선·강경윤기자 bsnim@seoul.co.kr ●김정호 원장 ▲1956년 서울 출생 ▲1979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1988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경제학 박사 취득 ▲2003년 숭실대 법학 박사 취득 ▲2009년 12월 인터넷방송국 ‘프리넷 뉴스’ 개국 ▲2004년~ 자유기업원 원장
  • 파커 콰르 텟 “멤버 넷 중 셋이 한인 美 클래식계 대세죠”

    파커 콰르 텟 “멤버 넷 중 셋이 한인 美 클래식계 대세죠”

    콰르텟(현악 4중주단)을 결성한 뒤 첫 공식 공연이 열린 어느 날. 멤버 3명의 한국인 부모는 ‘아이들’을 위해 퓨전 일식당에서 ‘쫑파티’를 열었다. 유일한 미국인 제시카는 초밥을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려다 젓가락질이 서툴러 종지에 빠뜨렸다. 간장 국물이 튀어 테이블은 온통 엉망이 됐다.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다니엘 정(27·바이올린)과 위스콘신 출신 카렌 김(28·여·바이올린), 서울 출신 김기현(29·첼로), 텍사스 출신 제시카 보드너(28·여·비올라)가 결성한 파커 콰르텟(The Parker Quartet)의 출발은 이처럼 조금은 엇박자였다. 하지만 만 8년을 넘기면서 호흡이 척척 맞고, 손끝에도 관록이 붙을 무렵 ‘대형사고’를 쳤다. 지난 2월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제53회 그래미어워드에서 ‘리게티의 현악 4중주 앨범’으로 최우수 실내악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한 것. 이들은 수상을 짐작조차 못 했단다. 김씨는 플로리다에서 다른 팀과 연주를 하느라고 시상식에 참석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당사자들은 놀랐지만, 실력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2년마다 한 번씩 뽑는 클리블랜드 콰르텟 상도 받았다. 지난해 10월 뉴욕 카네기홀 공연은 전석 매진. 한국계 클래식 연주자로는 처음 그래미를 수상한 파커 콰르텟 멤버들을 이메일을 통해 만났다. 그래미의 위력은 대단했다. 20대 후반의 실내악 연주자를 하루아침에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팀의 리더인 다니엘은 “제시카와 버스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우리 악기를 보더니 ‘당신들을 TV에서 봤다.’면서 승객들에게 우리를 소개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물론 시작은 소박했다. 2002년 여름 제시카와 카렌, 다니엘은 버몬트주 퍼트니에서 열린 옐로 반 뮤직 페스티벌에서 처음 만났다. 단박에 서로 재능을 알아본 데다, 세명 모두 그해 가을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컨서버토리)에 입학할 예정이란 것을 알고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공석인 첼리스트는 다니엘이 16세 때부터 알고 지낸 김씨를 추천했다. 팀명은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이자 상징 건물인 ‘옴니 파커 하우스’에서 따왔다. 파커 콰르텟의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국내에서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멤버의 75%가 한국인 유전자(DNA)이기 때문. 그러나 현지에선 인종적 요인으로 주목받지 못했다고 한다. 제시카와 다니엘은 “전적으로 우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팀을 만들 때만 해도 의식하지 못했다. 교포 2세인 카렌과 다니엘은 한국말이 서툴러 의사소통도 영어로 했다. 물론 75%가 한국인이다 보니 생기는 일들도 있다. 김씨는 “다니엘과 카렌 역시 한국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비슷하고 이동하는 동안 한식이 당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다니엘은 “가끔 우리끼리 ‘제시카는 명예 한국인’이라고 농담을 한다. 우리만큼이나 한식을 사랑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유독 한국인 비중이 높은 이유는 뭘까. 김씨는 “주요 음악원이나 오케스트라에는 한국인이 상당수일 만큼, 미국 클래식계는 점점 한국인이 장악하고 있다.”면서 “3명이 한국인이란 점도 미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오는 6월 한국에서 첫 단독콘서트를 갖는다. 25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클래식계의 블루칩 ‘앙상블 디토’와 협연을, 26일에는 서울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단독 공연을 갖는다. 2008년 통영국제음악제에 모습을 비친 적은 있지만 자신들의 이름을 건 공연은 처음인 셈. 유일한 외국인인 제시카에게 이번 방문은 더 특별하다. 그는 “공연 때는 다니엘과 부부가 돼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로 6월 초 결혼할 계획이다. 예비 시어머니에게 가끔 한국요리를 배운다는 제시카는 “그동안 젓가락질이 일취월장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쇠젓가락에 도전할 것”이라며 의욕을 불태웠다. 이어 “한국말도 빨리 배워야 한다.”면서 “‘난 채식주의자예요’를 한국말로 하는 것부터 배워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카렌은 “통영에 갔을 때 관객과 자석에 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6월에는 더 재밌을 것 같다.”고 내한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한국에서 중·고교를 다녀 ‘금의환향’하는 셈인 김씨는 “떠날 때는 학생이었지만 이젠 프로페셔널로 연주할 생각을 하니 짜릿하다.”면서 “예원학교·서울예고 은사와 친구들, 사사했던 정명화(첼리스트)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국내 음반시장 日대지진 ‘여진’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국내 음반시장이 찬바람을 맞고 있다. 일본 관광객 특수로 호황을 맞던 음반판매점 매출이 평소보다 80~90% 가까이 급감했다. 그간 국내 음반판매점은 동방신기, JYJ, 소녀시대, 카라, 2PM 등 이른바 한류 가수들의 앨범을 일본에서보다 2.5배가량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 한국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필수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아 왔다. 18일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등 국내 서점가에 따르면 동일본 대지진 이후 1일 음반 매출이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80~90%까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교보문고 핫트랙스 광화문점 관계자는 “평소 오전에 찾는 손님 99%가 일본인들이고, 규모도 보통 20~30명씩은 됐는데, 지금은 한두명에 불과하다.”면서 “1일 평균 200만~300만원이던 매출액이 지금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한 점원은 “평일에는 일본어를 더 많이 썼는데, 지금은 한국어를 더 많이 쓴다.”고 상황을 전했다. 권정숙 부루의뜨락 대표 역시 “일본인의 구매가 매출의 80% 정도를 차지했는데, 지금은 평소의 3분의1도 안 찾아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송인호 서울음악사 대표도 “침체된 국내 음반시장을 살려준 사람들이 일본인 관광객들이었는데…”라면서 “일본 지진으로 국내 음반시장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 센다이의 서적 물류센터가 지진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일본서적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영풍문고 등 각 서점 관계자는 “일본 패션 잡지가 못 들어온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반면 각 서점마다 ‘요미우리’, ‘아사히’, ‘니혼게이자이’ 등 일본 신문 판매량은 30% 정도 늘어나 일부 서점에서는 구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일본인 관광객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든 서울 명동의 화장품 거리에도 지진 여파가 없지는 않았지만 음반 판매점만큼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준·최두희기자 dh0226@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이 세상에서 고독이라는 말보다 더 고독한 단어가 있을까. 어느 날 한 남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다에 ‘풍덩’ 빠진다. 그러고는 고독하게 헤엄을 친다. 왜 그랬을까. 노래로 답한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디에선가 있는 꿈과 사랑을 찾아서~/하얀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다시 까닭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너는 아는지~’라는 진한 너울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의 꿈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텄다. 어린 나이 때부터 겪은 쓰디쓴 인종차별과 이방인의 외로움이 우선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착해지는 자신이 나쁘다며 ‘오늘 단 하루만 착하지 말자.’고 외쳤을까. 그런 처절함에서 스스로 험한 바다를 택했고 한 마리의 ‘파랑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큰 고래가 됐다. 하여 아픔이 있어도, 그 어떤 고통이 가로막아도 ‘편히 쉬게 할 꿈’을 향해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지금도 그렇게 ‘고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바비 킴(38). 그는 요즘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면 대개 ‘고독과 처절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창법이 심금을 울린다.’고 답한다. 특히 대표곡인 ‘파랑새’와 ‘고래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바비 킴의 음악적 향기에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명세월 11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다 2004년에 발표된 앨범 ‘고래의 꿈’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일 만큼 계속됐다. 그의 노래가 듣는 이에게 위안이 된다는 이유로 세대를 뛰어넘어 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2009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면서 인기스타로서 바비 킴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해 3월부터 지난해까지 그는 30개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공연으로 9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는 불과 2년 만에 이룬 성과로 최고의 티켓 파워는 물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임을 입증한 셈이다. 팬들은 바비 킴을 가리켜 ‘솔의 대부’ ‘힙합의 대부’라고 칭한다. 그는 오는 26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또 한번의 전국 투어 공연에 돌입한다. 상반기에 4개 도시, 하반기에 10여개 도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5월 중에는 누적 관객 1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객석 수가 한정된 공간에서 콘서트 3년차 만에 10만 관객을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는 트로트를 ‘바비 킴’적으로 해석해 불러 볼 예정이어서 또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동 한 카페에서 바비 킴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이날도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속으로 ‘그래서 팬들이 힙합의 할아버지라고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먼저 이번 공연의 의미와 공연을 앞둔 소감을 물었다. “올해로 단독 콘서트는 3년째입니다. 그 중간에 조인트 콘서트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동안의 콘서트가 바비 킴이 살아온 인생을 담았다면, 올해 콘서트는 바비 킴이 할 수 있는 음악과 바비 킴이 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팬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음악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팬들과 함께하는 ‘솔 투게더(Soul Together)’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좀 더 다양해진 콘서트 무대가 될 듯싶다. 어떻게 달라질까. “트로트곡을 제 스타일로 한번 소화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험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트로트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트로트곡 10여곡을 선정해 하나 둘씩 들어가면서 선별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이거다 하는 것이 없지만 공연 때 2~3곡 정도 불러 볼 생각입니다. 제가 트로트를 부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런 시도는 그를 좋아하는 마니아 계층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연의 맛깔’을 더할 것으로 보여진다. 본인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말은 어떻게 익혔을까. 두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국내 모대학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배웠습니다. ‘가, 나, 다’부터 배웠죠. 한국인이면서도 한국말을 몰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상당히 컸죠. 한국어로 된 노래는 가사에 영어발음을 일일이 적어가면서 익히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어 테이프 녹음, TV드라마 엑스트라, 유아 TV프로그램 영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울러 힙합 음악을 고집하면서 그룹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적응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 김영근씨가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비 킴은 초등학교 때부터 적지 않은 따돌림을 당했다. 미국 아이들에게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때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동양인들은 다들 똑같지 않으냐.’는 대답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필리핀과 중국인들이 살았어요. 또 백인과 흑인들도 많이 살았고요. 한국인은 별로 없었는데 어릴 때 미국인은 물론 똑같은 동양인 아이들에게도 왕따를 많이 당했지요. 화가 날 때에는 덩치 큰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패배의식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바비 킴은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중학교 때 트럼펫을 몰래 배웠다. 또 학교 노래 발표회에도 솔로로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때마다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고 혹시 음악 하는 것이 직업이 될까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음악적 자질도 타고났지만 운동신경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방망이를 잡기 시작해 고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1번 타자와 포수를 맡았다. 특히 어깨 힘이 좋아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상대방 선수들을 거의 다 아웃시켰을 정도였다. 타격면에서는 3할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던 중 고 3때 한 스카우트로부터 ‘너는 동양인이어서 체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3배 이상 훈련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 야구도 그만두고 좋아하던 미식축구도 그만두었습니다. 몇날 며칠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진짜 인생의 승부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미국에는 클럽 바에 가면 오픈 마이크라고 해서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주 갔지요. 또 원맨쇼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트클럽 래퍼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1992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자 바비 킴 가족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한국에 온 바비 킴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하에 음반사 여러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이때 단골로 부른 노래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리듬은 잘 타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바비 킴은 이에 대해 “어릴 때 흑인들과 자주 지내서 그런지 리듬을 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며 웃는다. 1994년 ‘닥터 레게’로 첫 앨범을 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터보,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코러스와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저는 무명 11년 세월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공했더라면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지요. 이제는 공연 때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또 관객들과의 공감을 통해 하나하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음악의 색깔도 다르고 창법도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바비 킴의 본명은 김도균이다. ‘바비’라는 이름은 세살 때 누나가 미국 TV시트콤을 보다가 바비라는 등장인물을 보고 그렇게 정했단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 그는 “음악을 하다 보니 취미가 없어졌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쪽 분야로 연구를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팬들과 함께하는 창조적 음악을 위해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는 현재 없지만 나이 마흔이 되면 할 생각”이라며 웃는다. 중절모와 콧수염의 바비 킴. 특유의 애달프고 처절하고 고독한 창법이 앞으로 어떻게 깊어질지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바비 킴은 누구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살 때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음악과 운동을 병행한다. 음악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트럼펫을 배웠고 노래도 했다. 학교 발표회 때마다 우수한 성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야구와 미식 축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특히 야구는 포수와 1번 타자를 맡았는데 고교 때는 학교 대표로 출전해 3할대의 타율을 자랑했다. 고교 졸업 무렵 클럽 바에 가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고 래퍼로 활동했다. 1993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음반사에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1994년 앨범 ‘닥터 레게’로 데뷔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후 터보, 젝스키스 등을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쌓아 나갔다. 1999년 룰라 이상민의 14인 프로젝트 그룹 브로스의 멤버, 2000년에는 무브먼트 크루의 멤버, 다음 해 부가 킹즈를 조직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혔다. 그러던 중 2004년 8월에 발표한 새 앨범 ‘고래의 꿈’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독특한 창법이 SBS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의 ‘나몰라 패밀리’를 통해 패러디되기도 했다. 지난해 세 번째 정규 앨범 ‘하트 앤드 솔(Heart & Soul)’을 발표했으며 ‘쩐의 전쟁’ ‘하얀 거탑’ 등 드라마 OST에도 참여했다. 2009년부터 전국 투어 공연에 나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 LG U+ 디지털잡지 광고시장 진출

     LG유플러스가 자사 모바일 광고 플랫폼인 ‘유플러스 애드’와 연계해 시사, 경제, 패션, 영화 등 다양한 부문의 디지털 잡지 광고 시장에 진출한다.  LG유플러스는 17일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와 애플 OS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태블릿PC 전용의 잡지 편집 솔루션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잡지를 사기 위해 서점에 가지 않고도 자사 OZ스토어에서 태블릿PC용으로 구매할 수 있게 된다. 일반 잡지에서는 구현되지 않았던 영상 앨범 등 디지털 콘텐츠도 제공한다.  특히 잡지 편집 솔루션을 적용하면 OS별로 제작 비용이 들지 않고, 태블릿PC 전용 광고를 구현해 디지털 잡지의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LG유플러스는 현재 디지털 잡지 출간에 소극적이던 출판사들도 태블릿PC 시장에 적극 참여할 것으로 전망했다.  LG유플러스는 등산 전문지 ‘월간 산’ 스페셜 에디션 애플리케이션을 OZ스토어와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이코노미플러스’, ‘아레나’ 등 패션 및 전문잡지 등과 협의해 모바일 광고가 연계된 디지털 잡지를 선보일 예정이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문화마당] 가온 차트와 빌보드 차트/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문화마당] 가온 차트와 빌보드 차트/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이번 주 1위 노래가 무엇입니까?” 누군가 물어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방송이나 인터넷 음악 사이트 등 여러 차트마다 1위곡이 다르고 순위가 제각각인데…. 이쯤 되면 차트의 공정성을 담보할 신뢰가 흔들리게 마련이다. 그리고는 왜 우리나라에는 대표성을 가진 공인 차트가 없는 것일까 하고 한숨을 쉬게 된다. 그렇다. 1위를 선뜻 인정할 수 없다.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다. 좋아하는 음악 장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노래가 1위라니. 그것도 나온 지 하루 만에 1위라니. 무슨 근거로? 도무지 수긍할 수 없다. 30, 40대 이상의 대중에게 ‘당신이 아는, 인정할 만한 가요 차트’를 말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아마도 KBS의 ‘가요 톱 10’을 떠올릴 것이다. 1980~90년대 대중음악을 아우르는 ‘공룡’차트였다. 하지만 1998년 ‘가요 톱 10’이 폐지된 이후 사실상 우리는 가요 차트를 잃어버렸다. 10여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음악차트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 사이 귀가 따갑도록 다른 나라의 음악차트와 비교당했다. 우리는 왜 그런 신뢰와 권위 있는 전통적 차트가 없는지를 비관했다. 미국의 ‘빌보드차트’나 일본의 ‘오리콘차트’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의미 있는 음악차트가 탄생했다. 음악매출 중심의 순위 집계방식으로 이뤄진 ‘가온차트’가 그것이다. 한국 음악콘텐츠산업협회가 만든 가온차트는 대한민국 음악 콘텐츠 매출의 97%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온·오프라인 유통 사업자가 모두 참여했다. 해방 이후 한국의 모든 음악 사업자들이 매출 정보를 제공하는 전무후무한 새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가온차트는 모든 음악 콘텐츠의 성적표를 그대로 반영한다. 음악팬이 음반을 구입하거나 유료로 음원을 사용하는 모든 자료가 집계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대중음악계의 혁명’이라 부를 만하다. 가온차트가 미국의 ‘빌보드차트’와 달리 방송횟수 집계를 포기한 것은 국내 방송환경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미국과 같이 수천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가지고 있는 음악시장과 달리 몇몇 주요 매체(공중파 및 케이블)에서 거의 대부분의 음악방송을 하고 있는 국내 실정은 공정한 차트 선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비틀스, 롤링 스톤스, 마이클 잭슨 등 세계 음악사에 길이 남을 슈퍼스타들 중 음악 판매 매출 규모가 작았던 아티스트가 있었는가? ‘음악을 소비하는 행위’를 단순히 ‘음악성을 포괄할 수 없는 단편적 수치’라고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대중의 인기도 및 이에 따른 콘텐츠 판매량이 ‘음악성’을 대변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빌보드차트를 보면 알 수 있듯, 음악차트가 주는 산업적·역사적 가치는 단순히 ‘계량화된 통계 수치’ 이상이다. 음악차트는 그 시대의 음악 트렌드와 소비자 성향, 그리고 음악 산업의 규모와 흐름에 대해서 차트 순위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음악 역사책과 같은 역할을 한다. 공신력 있는 차트의 탄생은 반드시 음악 산업에서 이루어야 할 과제다. 빌보드차트에서 발행하는 매거진 독자들의 70% 이상이 실제 음반이나 앨범 구입 결정과정에서 빌보드 차트 성적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음악차트의 공정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결국 이러한 공정성 있는 차트에서 실력 있는 뮤지션의 배출도 기대할 수 있다. 인터넷 음악 사이트의 차트가 자사 중심적이라는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가온차트의 객관적 시각은 음악계가 거두게 될 성과의 출발을 알렸다. 머지않아 타국의 음악차트를 운운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아울러 이제 갓 두돌이 지난 가온차트지만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가장 공정한 음악차트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바로 그게 우리 음악 산업이 이루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 10만 관객 앞둔 힙합의 대부 바비킴

    10만 관객 앞둔 힙합의 대부 바비킴

     이 세상에서 고독이라는 말보다 더 고독한 단어가 있을까. 어느날 한 남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다에 ‘풍덩’ 빠진다. 그리고는 고독하게 헤엄을 친다. 왜 그랬을까? 노래로 답한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디에선가 있는 꿈과 사랑을 찾아서~/하얀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다시 까닭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너는 아는지~’라는 진한 너울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의 꿈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텄다. 어린 나이때부터 겪은 쓰디 쓴 인종차별과 이방인의 외로움이 우선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착해지는 자신이 나쁘다며 ‘오늘 단 하루만 착하지 말자.’고 외쳤을까. 그런 처절함에서 스스로 험한 바다를 택했고 한 마리의 ‘파랑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큰 고래가 됐다. 하여 아픔이 있어도, 그 어떤 고통이 가로 막아도 ‘편히 쉬게 할 꿈’을 향해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지금도 그렇게 ‘고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바비 킴(38). 그는 요즘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 ‘고독과 처절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창법이 심금을 울린다.’고 답한다. 특히 대표곡인 ‘파랑새’와 ‘고래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바비 킴의 음악적 향기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명세월 11년 설움을 견디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2004년에 발표된 앨범 ‘고래의 꿈’으로 비로소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일 만큼 계속됐다. 노래를 듣는 이에게 묘한 위안을 준다는 공통분모로 세대를 뛰어 넘어 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2009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면서 인기스타로서 바비 킴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해 3월부터 지난 해까지 그는 30개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공연으로 9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는 불과 2년만에 이룬 성과로 최고의 티켓 파워는 물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임을 입증한 셈이다. 팬들은 바비 킴을 가리켜 ‘소울의 대부’ ‘힙합의 대부’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오는 26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또 한번의 전국 투어 공연에 돌입한다. 상반기에 4개 도시, 하반기에 10여개 도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5월 중에는 누적 관객 1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객석 수가 한정된 공간에서 콘서트 3년차만에 10만관객을 채우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는 트로트를 ‘바비 킴’적으로 해석해 불러볼 예정이어서 또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바비 킴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이날도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속으로 ‘그래서 팬들이 힙합의 할아버지라고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먼저 이번 공연을 갖는 의미와 소감이 어떠한지 물었다.  “올해로 단독 콘서트는 3년째입니다. 그 중간에 조인트 콘서트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동안의 콘서트가 바비 킴이 살아온 인생을 담았다면, 올해 콘서트는 바비 킴이 할 수 있는 음악과 바비 킴이 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팬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음악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팬들과 함께 하는 ‘소울 투게더(Soul Together)’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좀 더 다양해진 콘서트 무대가 될 듯 싶다. 어떻게 달라질까.  “트로트곡을 제 스타일로 한번 소화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험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트로트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트로트곡 10여곡을 선정해 하나 둘씩 들어가면서 선별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이거다 하는 것이 없지만 공연때 2~3곡정도 불러볼 생각입니다. 제가 트로트를 부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런 시도는 그를 좋아하는 마니아 계층들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연의 맛깔’을 더할 것으로 보여진다. 본인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말은 어떻게 익혔을까. 두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국내 모대학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배웠습니다. ‘가,나,다’부터 배웠죠. 한국인이면서 한국말을 몰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상당히 컸죠. 한국어로 된 노래가사에는 영어발음으로 일일이 적어가면서 익히고 부르고 그랬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어 테이프 녹음, TV드라마 엑스트라, 유아 TV프로그램 영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울러 힙합 음악을 고집하면서 그룹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국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적응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 김영근씨가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비 킴은 초등학교때부터 적지 않은 따돌림을 당했다. 미국 아이들에게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때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동양인들은 다들 똑같지 않느냐.’는 대답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필리핀과 중국인들이 살았어요. 또 백인과 흑인들도 많이 살았구요. 한국인은 별로 없었는데 어릴 때 미국인은 물론 똑같은 동양인 아이들에게도 왕따를 많이 당했지요. 화가 날 때에는 덩치 큰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패배의식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바비 킴은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중학교때 트럼펫을 몰래 배웠다. 또 학교에서 솔로로 노래 발표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때마다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고 혹시 음악하는 것이 직업이 될까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음악적 자질도 타고 났지만 운동신경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때 야구방망이 잡기 시작해 고등학교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1번타자와 포수를 맡았다. 특히 어깨힘이 좋아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상대방 선수들은 거의 다 아웃시켰을 정도였다. 타격면에서는 3할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던 고 3때 한 스카우터로부터 ‘너는 동양인이어서 체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3배 이상 훈련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 야구도 그만 두고 좋아하던 미식축구도 그만 두었습니다. 몇날 며칠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진짜 인생의 승부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구요. 미국에는 클럽 바에 가면 오픈 마이크라고 해서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주 갔지요. 또 원맨쇼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트클럽 래퍼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1992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자 바비 킴 가족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한국에 온 바비 킴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하에 음반사 여러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이때 단골로 부른 노래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리듬은 잘 타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바비 킴은 이에 대해 “어릴 때 흑인들과 자주 지내서 그런지 리듬을 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며 웃는다.  그러던 1994년 ‘닥터 레게’로 첫 앨범을 냈지만 인기를 못얻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터보,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코러스와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저에게는 무명 11년 세월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공했더라면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지요. 이제는 공연때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또 관객들과의 진실한 공감을 통해 하나 하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음악의 색깔도 다르고 창법도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바비 킴의 본명은 김도균이다. ‘바비’(Boby)라는 이름은 세살 때 친누나가 미국 TV시트콤을 보다가 바비라는 등장인물을 보고 그렇게 정했단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 그는 “음악을 하다보니 취미가 없어졌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쪽 분야로 연구를 많이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팬들과 함께 하는 창조적 음악을 위해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는 현재 없지만 나이 마흔이 되면 할 생각.”이라면 웃는다. 중절모와 콧수염의 바비 킴. 특유의 애닯고 처절하고 고독한 창법이 앞으로 어떻게 더욱 깊어질지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박경림 “가수데뷔? 성대결절들에게 희망 줬다”

    박경림 “가수데뷔? 성대결절들에게 희망 줬다”

    슈퍼스타K2로 스타덤에 오른 장재인의 스승인 정원영과 방송인 박경림이 Mnet ‘비틀즈코드‘에 출연해 특별한 이야기를 전한다. 2000년 초 가수로 전격 데뷔해 그해 골든디스크 수상까지 하는 기염을 토한 박경림은 자신이 가수 데뷔에는 박수홍의 공이 컸다고 밝혔다. 박경림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성대결절 수술을 한 뒤 관리를 잘못해 지금의 목소리가 됐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며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높았기 때문에 항상 음악을 가까이 했다.”고 말했다. 당시 박경림의 데뷔 앨범은 25만장이 팔리며 인기를 모았다. 박경림은 ““나의 가수 데뷔를 두고 일각에서는 ‘가요계의 불황이 너로 인해 시작됐다’는 다소 재미있는 말도 있었지만, 나의 가수 데뷔는 전국 성대결절들에게는 희망을 줬다”고 전해 큰 웃음을 줬다. 이밖에도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 뒤, 서툰 영어 때문에 유학생활 2년내내 재미있는 사람으로 알려진 에피소드 등을 전했다. 한편 박경림은 정원영과 매주 토요일 밤 12시에 방송하는 라이브 음악쇼 Mnet ‘엠 사운드플렉스’의 공동 진행을 맡고 있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박경림과 정원영의 특별한 평행이론은 오늘 17일 밤 12시 M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30~50대 음반시장 깨우다

    30~50대 음반시장 깨우다

    ‘세시봉’에 이어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30~50대의 문화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세시봉으로 통기타의 매력을 다시 느껴 기타학원에 등록하고 기타를 새로 잡기 시작한 이들이 늘어난 데 이어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들의 앨범은 프로그램 자체의 논란과 무관하게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교보문고 핫트랙스 측은 15일 “‘나는 가수다’에 출연 중인 가수들의 7~14일 음반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이소라 6집 ‘눈썹달’, 정엽 1집, 박정현 4집 ‘꿈에’의 판매량이 모두 지난달 대비 3~9배 늘어났다.”고 밝혔다. 핫트랙스의 3월 첫째 주 순위를 살펴보면 ‘세시봉 친구들: 40년 우정을 노래하다’ 앨범이 4위를 차지했다. 2004년 발매된 이소라 6집은 28위에 올랐고, 박정현 1~3집의 히트곡을 담아 지난해 11월 나온 ‘커버 미’는 53위를 기록했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서는 ‘세시봉 친구들’ 앨범이 가요 앨범 판매 순위 1위로 올라섰다. 앨범 구매층도 10~20대에서 30~50대 위주로 변했다. ‘세시봉과 친구들’ 앨범의 36%는 40대가 구매했으며, 11%는 50대가 샀다. 이소라 6집 ‘눈썹달’과 박정현의 베스트 앨범 ‘커버 미’는 30대의 구매율이 각각 48%와 52%에 이르렀다. 김혜란 예스24 상품 기획자는 “‘나는 가수다’에서 방송된 노래의 인기는 음원 차트 상위권을 모조리 석권한 데 이어 음원이 아닌 음반을 구매하는 데 익숙한 중년 음악팬들을 움직이고 있다.”면서 “서바이벌이란 방송 형식은 논란이 많지만 주말 예능 프로에서 보기 어려웠던 가수들의 출연으로 30~50대가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가요의 진가를 다시 느끼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전설의 록밴드 ‘이글스’ 첫 내한공연] 40년 목마른 기다림… 벅찬 감동 190분

    [전설의 록밴드 ‘이글스’ 첫 내한공연] 40년 목마른 기다림… 벅찬 감동 190분

     1971년 여가수 린다 론스태드의 반주를 담당하는 밴드가 있었다. 누구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1972년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레코드사와 정식계약을 맺고 데뷔앨범 ‘이글스’와 싱글 ‘테이크 잇 이지’를 발표했다.  꼭 40년 전, 미국이 자랑하는 명품밴드 이글스의 시작이다. 1982년 음악적 견해 차이로 깨졌지만 1994년 다시 뭉쳤다. 당시 한국 팬들도 환호했지만 먼 발치에서 바라볼 뿐. LP나 라디오, 혹은 DVD로 공연실황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호텔 캘리포니아’에 관객들 열광  1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공연시작 1시간여 전에 이미 올림픽대로부터 일대 도로까지 주차장으로 변했다. 약속된 오후 8시가 다가올수록 공연장을 촘촘하게 메운 1만 1000여명의 팬들은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글렌 프라이(63·기타), 돈 헨리(64·드럼), 조 월시(64·기타), 티머시 B 슈미트(64·베이스) 등 전성기 멤버가 고스란히 뭉친 터라 더 설렜을 것.  내한공연에서 ‘18번’은 막바지나 앙코르에 배치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이글스는 달랐다. 6번째 곡으로 대뜸 필살기를 꺼내들었다. 트럼펫 간주와 맞물려 익숙한 기타 전주가 흘러나왔다. 무대 뒤로는 석양이 질 무렵 듬성듬성 야자수가 놓인 황량한 캘리포니아의 낯익은 풍경(1976년 발표한 ‘호텔 캘리포니아’ 앨범 재킷)이 펼쳐졌다. 눈치를 챈 관객들의 함성으로 데시벨은 한껏 치솟았다. 팝 역사상 최고의 명곡 으로 꼽히는 ‘호텔 캘리포니아’. 1976년 발표됐지만 그보다는 재결성 직후인 1994년 내놓은 ‘헬 프리지스 오버’ 앨범에 삽입된 라이브가 더 유명한 곡이다.  너무 빨리 불을 붙인 건 아닐까. 기우였다. 한 호흡을 건너뛰더니 티머시 B 슈미트가 특유의 구슬픈 고음으로 또 다른 히트곡 ‘아이 캔 텔 유 와이’를 불러 들뜬 분위기를 이어갔다.  잠시 숨을 돌리고 무대에 돌아온 4명의 노병들은 어쿠스틱 기타를 메고 앉았다. 이번에는 주거니받거니 솔로 곡을 불렀다. 이글스란 밴드가 특별한 까닭은 탄탄한 연주는 기본인 데다 멤버 전원이 전혀 다른 컬러의 메인 보컬로 손색없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웠다. 웬만한 아카펠라 그룹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화음도 일품. 기타를 훑는 손놀림과 착착 감기는 드럼 연주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노장들이 27곡을 쏟아낸 뒤 무대에서 사라지자 팬들은 간절하게 기립박수로 “앙코르~”를 연호했다. 잠시 뒤 ‘테이크 잇 이지’와 ‘데스페라도’ 등 한국 팬들이 꼭 듣고 싶었던 3곡을 선물로 안기고 190분의 평생 잊지못할 무대를 끝냈다. 보통 내한공연에서 많아야 20곡 안팎임을 감안하면 40년 묵은 갈증을 풀기에 충분했다. ●무대서 사라지자 팬들 “앙코르 앙코르”  공연을 주최한 CJ E&M 관계자는 “이글스 몸값 때문에 큰 수익을 기대하는 건 애초 무리”라면서 “구매력을 가진 중장년층이 이글스처럼 차원이 다른 공연을 직접 경험토록 해 공연장을 찾는 층을 넓혀 간다는 목표는 달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나윤선 “4인 4색의 화음 비빔밥처럼 즐기세요”

    나윤선 “4인 4색의 화음 비빔밥처럼 즐기세요”

    #장면 1. 의류회사 홍보실에서 카피라이터로 8개월을 보냈지만, 일이 손에 붙지 않았다. 결국 사표를 던졌다. 친구는 음악을 권했다. 건국대 불문과에 다닐 때 프랑스대사관 주최 샹송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전력’ 때문.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뮤지컬 배우인 어머니를 보며 자랐기에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데모 테이프는 김민기 학전 대표에게 전달됐고, ‘지하철 1호선’의 주인공이 됐다. #장면 2. 창작 뮤지컬 ‘번데기’와 음악극 ‘오션월드’에 출연했지만, 밑천(?)이 드러나는 기분. 이럴 거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훌쩍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의 재즈스쿨인 CIM에서 평생 관심도 없었던 재즈 보컬을 공부했다. “재즈라곤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음악하는 친구가 재즈가 음악의 뿌리이니 이걸 해야 다른 것도 쉬워질 거라고 하더라.” ‘직딩’(직장인)에서 뮤지컬 배우로, 다시 세계적인 재즈 보컬리스트로 변신을 거듭한 나윤선(42)의 얘기다.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 아프리카 음악가들이 뒷받침하는 재즈계에서 아시아 가수는 명함을 내밀기도 어렵다. 하지만, 나윤선은 예외다. 지난해 발표한 7집 ‘세임 걸’(Same Girl) 앨범으로 동양인 최초로 프랑스 재즈차트 4주 연속 1위. 1월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카데미 오브 재즈’(L’Académie du Jazz)에서 재즈 보컬 부문 최우수 아티스트(The Prix du Jazz Vocal)로 뽑혔다. 파리의 집과 연습실을 오가며 이달 말 내한공연 준비에 바쁜 나윤선을 13일 전화로 만났다.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 음반으로 뽑혔다. ‘아카데미 오브 재즈’에서는 재즈 보컬 최우수아티스트로 뽑혔다. 물이 올랐다는 생각이 들 법한데. -물론 아니다. 다만 프랑스에서 받은 상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는 콩쿠르가 아닌 다음에야 외국인에게 상을 주는 나라가 아니다. 음악 쪽에서는 ‘아카데미 오브 재즈’가 유일한데 그나마 다이애나 크롤 같은 스타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받은 건 기적이다. 갈 길은 멀지만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게 사실이다(웃음). →음악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가정환경(아버지는 나영수 국립합창단장, 어머니는 국내 뮤지컬 1세대 성악가인 김미정)이다. 어릴 땐 한 번도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을 안했나. -전혀 없었다. 부모님도 강요를 안 했다. 다른 애들 다 하는 피아노 정도. 다만 아버지가 항상 새벽 3~4시까지 연습하고 집에 늘 음악을 틀어놓으니까 따로 음악공부를 하지 않아도 귀는 트이게 된 것 같다. →이쪽 일을 시작한 건 199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인데. -김민기 선생님이 나에게 가만히 서서 노래만 하면 되는 역할을 줬다. (못 추는) 춤을 추지 않아도 됐다. 나만 1인 1역이었다. (왜 뽑으셨는지) 영원한 미스테리다(웃음). →뒤늦게 유학 가서 재즈를 하려니 힘들었겠다. -CIM을 비롯해 동시에 3곳을 다녔다. 하나만 다녀서는 도저히 못 따라가겠더라. CIM은 5년을 다녔고 재즈 보컬로 ‘디플롬’(diplôme·학위)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그 질문이 제일 어렵다. 다만 어디를 가든 ‘아리랑’을 부르는데 목청껏 따라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폴란드 사람들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폴란드인들이 유독 음악적 감각이 좋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오는 23일 서울 LG아트센터를 시작으로 광주(25일)·통영국제음악제(27일)에서 공연한다. 이전과는 무엇이 다른가. -서울·광주 공연은 울프 바케니우스(기타)와 랄스 다니엘손(베이스·첼로), 뱅상 페라니(아코디온)의 조합으로 처음 호흡을 맞춘다. 모두 정상급 솔리스트인 데다 이런 조합으로 공연하는 건 처음이라 더 설렌다. 4명의 솔리스트가 모여 화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나도 궁금하다. 비빔밥을 먹을 때 각 재료가 씹히는 맛이 모두 다르고 각각의 맛이 다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 딱 그런 경험을 할 것 같다. 한마디로 귀가 굉장히 즐겁다고 생각하면 된다. 통영에서는 울프와 듀오로만 공연한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새음반]

    ●디토 히츠(DITTO HITS) 10개 도시 투어 매진 등 아이돌 부럽지 않은 티켓 파워를 뽐내는 앙상블 디토의 첫 정규앨범. 리처드 용재 오닐(비올라), 스테판 피 재키브(바이올린), 지용(피아노), 마이클 니컬러스(첼로), 다쑨 장(더블베이스)이 참여한 실내악 프로젝트 앙상블 디토가 명 프로듀서인 스티븐 앱스타인과 미국 뉴욕에서 녹음했다. ●굿바이 럴러바이(Goodbye Lullaby) 발매와 동시에 국내외 차트를 석권한 에이브릴 라빈의 4집 앨범. 금발에 배기 팬츠를 걸친 10대 록스타쯤으로 넘기기에 라빈은 이미 거물이 돼 버렸다. 지난해 11월 남편 데릭 위블리와 4년 간의 결혼 생활을 끝내서인지 한결 성숙해진 모습. 어쿠스틱 사운드의 비중을 높였고 라빈이 모든 곡의 작사·작곡은 물론 프로듀싱에 참여했다. 소니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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