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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치단체장 25시] 김수영 서울 양천구청장

    [자치단체장 25시] 김수영 서울 양천구청장

    “목동 어머니들이 이렇게 혁신교육지구에 열정적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이미 주민들은 지금의 삶의 방식이 행복한가 고민하고 있었던 거죠. 변화의 주체요? 요즘 주민들이 구청장이나 공무원이 뭘 하자고 끌고 가면 그대로 가나요. 변화의 주체는 주민입니다. 제 역할은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같이 이야기하고 대안을 찾는 소통의 물꼬를 트는 거죠.” 서울 양천구 목동은 강남구 대치동, 노원구 중계동과 함께 한국 대표 3대 학군이다. 그래서 유난히 치맛바람도 세고 학원도 많다. 이런 양천에서 지난해 연말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1년 넘게 노력한 끝에 양천구가 서울형 혁신교육지구 사업에 선정됐는데 예산이 구의회를 통과하지 못하자 목동 학부모들이 의원들을 직접 압박한 것이다. 입시 교육이라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 있는 목동에서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18일 “오히려 우리가 너무 늦은 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면서 “혁신교육 하자고 옆구리만 쿡 찔렀는데 생각지도 않은 동력이 주민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명품 학군’으로 불리는 양천구의 교육 방식을 어떻게 바꾸자는 생각을 했을까? 김 구청장은 “대입과 관련한 수많은 성공 신화 뒤에는 더 많은 실패라는 현실이 있다”면서 “나도 다른 엄마와 똑같이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 공부를 제대로 못 봐 준다는 죄책감 때문에 학원 뺑뺑이를 돌렸지만 우리 아이도 나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대학을 잘 가고 못 가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삶 속에서 느낀 것을 정책으로 만든다’는 구정 철학대로 행정을 펼쳤다. 그래서일까. 김 구청장이 내놓은 정책 대부분은 교육, 경력단절여성, 대안적 경제, 육아 등 생활에 발을 ‘착’ 붙인 것들이다. 곱상한 얼굴에 전 구청장의 부인. 겉보기로 등급을 매기면 김 구청장은 영락없는 ‘금수저’급이다. 그런 그가 엄마들의 고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까? 김 구청장은 “남편을 잘 만나서”라며 호탕하게 웃더니 “처음에는 나도 금수저 인생을 살 줄 알았는데, 살다 보니 수저 자체가 없더라. 그러는 새 두 살배기 애를 업고 회사도 나가 보고, 우리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은 학교 보낼까 학원 뺑뺑이도 돌려 봤다. 내가 잘나서 현실을 아는 게 아니라 살아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이거 좀 바꿔 보자고 내놓는 것들이 (정책의)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학원 원장부터 벤처회사 임원까지 생활인으로서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사실 흙수저 인생은 그가 알아서 찾아간 길이다. 문학평론가를 꿈꾸며 1983년 이화여대 국문과에 입학했던 김 구청장은 소위 운동권 학생이 됐다. 김 구청장은 “1학년 때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 문학학회를 들어갔는데 김수영, 정지용 등 생전 처음 듣는 시인들의 작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참여주의 문학작품을 읽다가 사회과학 , 한국 근현대사, 서양 경제사 등으로 범위가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회문제로 시선이 옮겨 갔다”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뜰 때 군부 독재라는 현실이 들어왔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돌아봤다. 초·중·고교 12년을 개근했던 그는 학생운동도 참 근면 성실(?)하게 했다. 김 구청장은 “다른 사람은 몰래 연애도 하고 그랬는데 바보처럼 남자 한명 제대로 만나보지 못했다”며 웃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당선되는 순간 수배자가 된다는 총학생회장 자리에 올랐다. 김 구청장은 “내가 요령이 없어서 총학생회장이 됐다”면서 “당시에는 총학생회장을 하려면 학점이 어느 정도 돼야 했는데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 중에 성적이 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내가 공부를 잘했다기보다 수업을 빼먹지 않아서, 그리고 당시만 해도 교수님들이 데모하는 학생들 점수를 박하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김 구청장은 학생·노동운동으로 3번이나 옥살이를 했다. 김 구청장은 “많은 이들에게 배웠던 시기다. 심지어 공장과 교도소에서도 배울 게 많았다”면서 “1986년 서강대 총학생회장을 했던 남편 이제학을 만난 것도 이 당시”라고 전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한 김 구청장은 이후 여성정치운동에 뛰어들었다. 본격적인 ‘엄마 정치’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국회의원 사무실, 여성희망일터지원본부장, 민주당 여성리더십센터 부소장 등을 맡으며 조금씩 내공을 쌓아 갔다. 여의도로 무혈입성할 기회도 있었지만 정치인의 필수 조건(?)이라는 ‘뻔뻔함’이 부족해 양보만 하고 지냈다. 그러던 중 남편 이제학 전 구청장이 2011년 선거법 위반으로 낙마하자 “내가 구청장이 되겠다”고 나서 재수 끝에 2014년 양천구청장이 됐다. 이 때문에 김 구청장을 이 전 구청장의 ‘정치적 아바타’라고 공격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오랫동안 김 구청장 부부를 봐 온 손모(44)씨는 “김 구청장은 내조자라기보다 자기 정치를 해 온 사람”이라면서 “굳이 따지자면 내조형인 바버라 부시(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아내)보다 힐러리 클린턴 같은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김 구청장은 “남편이 구청장을 먼저 지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오해”라며 웃어넘겼다. “떠드는 것보다 일하는 게 좋다”는 김 구청장이 들어온 뒤 양천구는 허황된 개발 청사진 대신 생활을 바꾸는 정책을 중심으로 구정을 바꾸고 있다. 김 구청장은 “올해 서울형 혁신교육지구로 선정돼 서울시와 교육청으로부터 10억원의 예산을 받은 것에 5억원을 더해 마을방과후 강사 양성과 진로직업교육 등 5개 분야 23개 사업을 진행한다”면서 “이 과정에서 방과후학교 등을 연계한 사회적기업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 엄마들이 교육을 받은 뒤 아이들 방과후 교사가 되는 시스템을 마련해 혁신교육과 일자리 창출 사이에 선순환 구조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을 사회적기업과 청년 창업의 허브로 만들기 위한 작업도 하고 있다. 김 구청장은 “올해 목5동 주민센터를 리모델링해 ‘사회적기업 허브센터’를 만드는 사업을 할 것”이라면서 “우리 지역을 청년 기업가들의 요람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프라 구축도 삶의 수준을 높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대표적인 게 지역의 산과 길, 하천과 공원을 연계하는 총연장 24.5㎞를 잇는 ‘양천 둘레길’ 사업이다. 김 구청장은 “현재 3단계 사업 중 1단계 사업인 산지형 코스 7.2㎞(지양산~매봉산~신정산)를 지난해 12월 완료했다. 올해는 용왕산에서 갈산, 안양천까지 이어지는 2단계(7.9㎞) 사업과 목동 중심축 걷고 싶은 거리에서 근린공원까지 이어지는 3단계(9.4㎞) 사업을 동시에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김 구청장은 “가족이 행복한 정치, 엄마가 행복한 정치를 하고 싶다”면서 “그런데 이런 일은 혼자 못 한다. 주민들과 진짜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찬찬히 고민하면서 실행하고 싶다”고 답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단독] “위안부 할머니 분향시설이 혐오스럽다?” 경찰, 철거 요구 논란

    [단독] “위안부 할머니 분향시설이 혐오스럽다?” 경찰, 철거 요구 논란

    지난 15일 지병으로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최모 할머니에 대한 분향시설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혐오감을 줄 수 있다”면서 철거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경찰은 “위안부 할머니 분향소를 특정한 게 아니다”라고 해명했다.18일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를 위한 대학생대책위에 따르면 지난 16일 ‘소녀상’이 있는 서울 종로구 전 일본대사관 앞에 최 할머니에 대한 분향소를 마련하려고 하자 경찰이 “혐오감을 줄 수 있다”며 철거를 요구했다. 이같은 사실은 17일 열린 제1218차 정기 수요집회에서 대책위 학생의 자유발언으로 알려졌고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확산됐다. 대책위 관계자는 18일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현장에 있던 경찰이 ‘누군가에겐 혐오감을 줄 수 있고 불편함을 줄 수 있다’, ‘혐오시설로 비쳐질 수 있다’고 말하며 분향소 철거를 요구해 논쟁을 빚었다”면서 “일단은 설치를 한 뒤에 대책위 측에서 더 논의를 하기로 하고 상황이 일단락 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초와 향이 없으면 괜찮다고 했다”고 말한 것으로도 전해졌다.대책위는 우선 48시간 동안 분향시설을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뒤 분향소를 설치했다. 대책위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소녀상을 지켜주세요’에도 “소녀상을 지키고 있는 대학생들이 소녀상 옆에 간소한 분향시설을 마련했지만 경찰에서 분향소가 ‘혐오시설’이라며 철거할 예정이라고 한다”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삶을 다시 생각하며 애도를 표하고 명복을 비는 것이 어찌 혐오가 된단 말이냐”는 항의글이 게재됐다. 네티즌들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추모하는 공간에 대해 어떻게 ‘혐오스럽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분향소가 혐오시설이냐”며 반발했다.논란이 불거지자 다음날인 17일 오전 대책위 측은 서울시경찰청 관계자로부터 “철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혐오시설’이라고 언급된 데 대해 경찰 내부에서도 적절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이와 관련, 당시 현장에 있던 담당 형사는 ”도로에 탁자를 이용해 분향시설을 무단 설치하려고 하길래 도로법 위반이라고 설명을 했다“면서 ”특히 일부 집회 현장에 종종 등장하는 상여나 관 같은 것처럼 보는 사람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혐오감이나 불쾌함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아무리 ‘관혼상제’의 한 부분일지라도 일부에게는 혐오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상여나 관, 분향소 등에 대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도로를 점거하는 자체가 불법이라는 얘기다. 특히 경찰은 오히려 학생들의 농성과 추모시설 운영이 ”엄연한 불법“인데 ”많이 신경쓰고 있다, 봐주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서울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인도나 도로를 차지하는 ‘시설’을 설치하려면 관할 구청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분향용품 뿐 아니라 일반적인 천막 등도 모두 허가 대상“이라면서 ”학생들이 전혀 허가를 받지 않은 상황이라 ‘불법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설치를 했고, 오히려 우리가 구청에 (철거) 협조를 구하지 않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공감대가 많이 형성된 ‘국민적 부분’이 있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아들 잃은 엄마에게 다가가는 풍선, 혹시 죽은 아들이?

    아들 잃은 엄마에게 다가가는 풍선, 혹시 죽은 아들이?

    “엄마 울지 마세요~!” 죽은 아들이 풍선이 되어 엄마를 위로하는 감동적이 모습이 포착됐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지난해 2월 필리핀 알베이의 한 작은 교회 장례식에서 아들 잃은 엄마를 위로하는 흰색 풍선의 모습이 포착된 영상을 기사와 함께 소개했다. 영상에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7살 소년 트레비(Trebby)를 애도하기 위해 교회 장례식이 치뤄지고 있다. 때마침 관 주변의 흰색 풍선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풍선은 마치 자식을 잃고 슬픔에 빠져있던 엄마 바이바 알라마레스(Vibar-Alamares)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그녀 곁을 맴돈다. 죽은 아들 생각에 그녀가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이후 풍선은 계속 가족들 곁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바는 페이스북을 통해 “풍선이 내게 다가와서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난 이것이 아들의 마지막 임무였다고 생각한다”는 글을 남겼다. 사진·영상= Todays Salt youtube 영상팀 seoultv@seoul.co.kr
  • 부트로스 갈리 제6대 유엔 사무총장 별세

    부트로스 갈리 제6대 유엔 사무총장 별세

     제6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사진?) 전 사무총장이 숨졌다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16일(현지시간) 발표했다. 94세.  안보리 2월 의장국인 베네수엘라의 라파엘 라미레즈 유엔 주재 대사는 이날 안보리 회의에서 “부트로스 갈리 전 사무총장이 별세했다는 부고를 통지받았다”고 발표했고, 이에 안보리 15개 이사국 대표들은 1분 동안 묵념하며 고인을 애도했다.  사인은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부트로스 갈리 전 사무총장은 이집트 출신으로 1992년 1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유엔을 이끌었다.  이집트 외교관이자 정치인 출신으로 아프리카 출신 첫 유엔 사무총장이었다.  그가 당시 선출된 데에는 아프리카 국가이면서도 아랍 국가인 이집트 출신으로서 중동 사태를 해결하는 적임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했다.  14년 동안 이집트 외무 담당 국무장관을 역임했고, 1977년 안와르 사다트 당시 대통령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을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도 수행했다. 이집트 대표단을 이끌고 이스라엘과의 실무협상을 벌여 이듬해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이끌어내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부트로스 갈리 전 사무총장은 아랍어는 물론 영어,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미국 유학파로 카이로대학에서 국제법과 정치학을 가르쳤던 서방통이기도 했다.  친한파 인사로, 재임 기간 중인 1993년 12월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는 재임 기간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대규모 기아 사태에 대한 해결에 나섰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1994년 르완다 대학살에 대한 유엔의 역할과 관련해서도 비판을 받았다.  또 1990년대 앙골라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도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임기 막바지인 1996년 11월 재임에 나섰으나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됐다.  당시 안보리의 투표에 부쳐진 그의 재임명 결의안은 찬성 14표, 반대 1표를 얻었으나 상임 이사국인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해 결의안을 채택하지 못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 “답답한 숨·불편한 몸…그래도 꿈”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 “답답한 숨·불편한 몸…그래도 꿈”

    ‘호킹과 같은 병’ 두 돌 지나 알아 “책 한장 넘기는 것도 힘들지만 대학 못 간다 생각한 적 없어 내 병 생명공학으로 더 공부할 것” “제가 앓고 있는 희귀병인 ‘척수성 근위축증’에 대해 어릴 적부터 무척 궁금했어요. 대학에서 생명과학을 공부하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16일 오후 3시 서울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김명지(19)양은 “병 때문에 한 번도 두 발로 서 보지 못했고 호흡장애도 있지만 희귀병 때문에 대학에 못 간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며 “병은 단지 불편할 뿐 불가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양은 오는 3월 연세대 원주캠퍼스 생명과학기술학부에 입학한다. 척수성 근위축증은 근육 손상이 진행되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희귀병이다. 나중에는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진다. 세계적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이 앓아 알려졌다. 이날 병원에서는 ‘한국의 호킹들, 축하합니다’라는 행사가 열렸다. 희귀병으로 호흡장애를 앓는 고등학생, 대학생 20명이 참석했고 이 중 김양을 포함해 5명은 대학 입학을 기다리고 있다. “첫돌이 되기 전 선반을 잡고 일어서다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일어나지 않자 가족들이 처음에는 겁이 많다고 생각했대요. 하지만 두 돌이 지나도 못 걸으니 이상하게 생각한 거죠.” 김양은 곧 조직검사를 받았고 척수성 근위축증이라는 날벼락 같은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2년도 못 살 것”이라고 했다. 척수성 근위축증은 치료약이 없다. 꾸준한 재활치료로 근육의 퇴화를 늦추는 것밖에는 방도가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숨 쉬는 것도 힘들어져 병원에서 호흡재활 치료까지 했다. “끔찍하게 힘든 상황도 있었죠. 하지만 부모님이 전폭적으로 믿어 주셨고 언제나 재활을 함께해 주셨어요.” 김양은 5살 때 장애인 유치원을 다녔지만 초등학교부터 일반학교로 진학했다. 처음에는 근육의 힘이 약하니 책 한 장을 넘기는 것도, 필기를 하는 것도 힘들었다. 쉬는 시간은 오롯이 친구의 노트를 베끼는 데 사용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눕지 못하고 하루 12시간씩 휠체어에 앉아 있다 보니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가 짓눌렸다. 그러나 밝은 성격으로 최선을 다하는 김양의 모습에 많은 친구가 도와주었다. 어머니 김경희(45)씨는 “딸의 친구들에게 딸의 병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니까 많이 도와줘 고마울 따름”이라며 “지금은 일어서는 것만 못할 뿐 친구들처럼 말하고 활동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밝혔다. 김양은 대학에서 자신의 병에 대해 연구한 후 화장품 연구원이 되고 싶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화장품을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건강한 화장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저 때문에 고생한 가족에게도 꼭 보답하고 싶어요.”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美대법 ‘보수파 상징’ 떠나… 대선정국 출렁

    美대법 ‘보수파 상징’ 떠나… 대선정국 출렁

    보수·진보 5대4 → 4대4로… 대법관 이념 지형 변화 예고 민주 “즉각 인선” 공화 “대선 후” 미국 연방대법원의 최장기 대법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미 대선 정국이 출렁이고 있다. 보수파 대법관의 상징으로 꼽히는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13일(현지시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후임이 대법원의 ‘이념 지형’을 바꿀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자 백악관과 공화당, 민주당이 치열한 기싸움을 시작했다. 미 언론은 대법원 스캘리아 대법관이 텍사스의 한 리조트를 방문,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날 오전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전했다. 그는 전날 밤 친구에게 몸이 좋지 않다고 밝혀,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직접 애도 성명을 발표, “그는 대법원에서 가장 중요한 대법관이자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그는 우리 민주주의 초석인 법치주의를 위해 인생을 바쳤다. 우리는 국가를 위한 그의 탁월한 봉사를 존경하며,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법조계 상징인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등 공공건물의 조기 게양을 선포했으며,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이날 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린 TV토론에서 그를 기리며 묵념을 하는 등 정치권은 일제히 그의 사망을 애도했다. 그러나 그의 후임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는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현재 그의 사망으로 대법관 이념 지형이 보수와 진보가 4대4로 균형이 맞춰졌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재임 기간에 대법관으로 임명된 스캘리아 대법관은 첫 이탈리아계 대법관으로 약 30년간 재직했다. 헌법 ‘원본주의’를 표방했으며 줄곧 보수적 목소리를 내 왔다. 낙태와 동성애 문제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오바마 대통령의 핵심 정책인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법)에도 위헌 쪽에 표를 던졌다. 또 총기 소지, 사형제도 존치, 기업의 정치자금 상한 제한 철폐를 옹호했다. 지난해 대학 소수인종 우대 정책 위헌 여부를 심의하면서 흑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캘리아 대법관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대법관 임명을 공화당은 대선 이후로 미뤄야 한다며 오바마 대통령을 압박했다. 테드 크루즈, 마코 루비오 등 공화당 대선 주자들은 이날 TV토론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아니라, 차기 대통령과 국민이 대법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루즈는 “지난 80년간 대선이 치러지는 해에는 대법관에 대한 (상원) 인준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도 “대법관 공석은 다음 대통령이 나올 때까지 채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반면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대법원에 중요한 안건들이 많이 걸려 있다”며 후임 대법관 임명을 촉구한 뒤 “상원은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빨리 공석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도 “오바마 대통령이 후임 인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소니아 소토마이요와 엘레나 케이건을 대법관을 임명했다. 정치권의 논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에서 “머지않아 후임자를 지명하는 헌법상 주어진 내 책임을 완수할 계획”이라며 임기 내 후임 지명을 못박은 뒤 “내가 그렇게 할 시간이 충분히 있으며,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도 지명자에게 공정한 청문회와 시기적절한 표결을 할 책임을 이행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90년간 12개 기업만 시총 1위… 알파벳, 12번째 왕좌 등극

    90년간 12개 기업만 시총 1위… 알파벳, 12번째 왕좌 등극

    지난주 구글의 지주회사 알파벳이 미국 나스닥 시장에서 애플을 끌어내리고 시가총액 1위 기업에 등극하자 전 세계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새로운 ‘대장주’ 탄생을 반겼다. 1년 전만 해도 애플 시총의 절반에 불과했던 구글이 어떻게 대장주로 발돋움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쏟아졌고 구글의 ‘열린 경영’은 찬사의 대상이 됐다. 반면 몇 달 전까지 21세기 최고 혁신기업으로 추앙받은 애플은 아이폰에 집착하다 몰락했다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오로지 가치로만 평가받고 영원한 승자는 없는 ‘대장주의 세계’를 살펴봤다. 세계 자본시장의 중심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글로벌 벤처기업의 요람 나스닥에는 6000개 이상의 기업이 상장돼 있다. 이 중 대장주의 자리를 꿰찬 기업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미국 금융투자자문회사 ‘모틀리 풀’의 분석을 보면 1926년 이후 시총 1위를 차지한 기업은 12개에 불과하다. 구글·애플·마이크로소프트·IBM·시스코 등 정보통신(IT) 기업, 발명왕 에디슨이 세운 가전업체 제너럴 일렉트릭, 자동차 제조사 제너럴 모터스, 세계 최대 석유회사 엑손모빌, 유통업체 월마트, 통신회사 AT&T, 담배 필립 모리스의 모기업 알트리아, 화학회사 듀폰이 그 주인공이다. 미국 상장지수펀드(ETF) 통계사이트인 ETF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80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대장주는 IBM과 제너럴 일렉트릭, 엑손모빌 등 전통 기업이 돌아가며 차지했다. IBM은 1982~88년 7년간 패권을 거머쥐었고 1993~97년은 제너럴 일렉트릭이 독주했다. 그러나 1998년 혁명이 일어났다. 소프트웨어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마이크로소프트가 시총 3458억 달러로 6년 연속 대장주에 도전한 제너럴 일렉트릭(3342억 달러)을 꺾고 새로운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하버드대 중퇴생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1975년 설립한 마이크로소프트는 1986년 나스닥에 상장됐고 1995년 시총 519억 달러로 톱 10에 진입했다. 이듬해에는 2배 가까이 늘어난 987억 달러로 5위, 1997년에는 1559억 달러로 3위까지 뛰어오르더니 마침내 왕좌에 앉았다. 자본금 1500달러로 시작한 마이크로소프트가 창립 20여년 만에 시총 1위에 오른 건 기회의 땅 미국에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특히 컴퓨터 산업의 ‘공룡’ IBM이 이 시기 몰락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신화는 더욱 부각됐다. 1990년을 끝으로 대장주 자리에서 내려온 IBM은 1992~93년에는 시총 톱 10에도 들지 못했고 이후에도 간신히 턱걸이하는 등 어둠의 터널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시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IT 거품이 꺼진 2000년 시총의 3분의2 가까이가 허공에 사라지면서 제너럴 일렉트릭에 다시 대장주 자리를 내줬다. 2002년 되찾았으나 그때가 마지막으로 왕좌에 앉은 해였다. 2000년대 중반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요 증가로 고유가 시대가 도래하자 엑손모빌이 다시 패권을 잡았다. 2006년 4469억 달러의 시총으로 제너럴 일렉트릭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선 엑손모빌의 시대는 2011년까지 이어졌다. 엑손모빌의 독주를 저지한 기업이 스마트폰의 시대를 열어젖힌 애플이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다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복귀로 부활한 애플은 2007년 아이폰을 세상에 내놨고 2009년 1898억 달러의 시총으로 5위에 올랐다. 2011년 잡스가 전 세계인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듬해 애플 시총은 4982억 달러를 기록해 엑손모빌(4038억 달러)을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이후 애플은 지난 2일 구글에 밀려나기 전까지 글로벌 대장주로 군림했다. 지난해 2월 애플의 시총은 미국 기업 사상 처음으로 7000억 달러를 돌파했고 조만간 1조 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꺼지기 직전 환하게 타오른 마지막 불꽃이었다. 꼭 1년 만에 애플의 시총은 무려 2400억 달러나 증발했다. 우리나라 1년 예산(약 400조원)의 4분의3에 이르는 돈이 사라진 것이다. 애플은 대장주에서 밀려난 지 하루 만인 지난 3일 자리를 되찾았으나 구글의 치솟는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역대 가장 압도적인 대장주의 위용을 과시한 기업으로는 1967년 IBM이 꼽힌다. 당시 IBM의 시총은 1930억 달러였는데, 모틀리 풀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가치로 1조 3500억 달러에 이른다. 전성기 애플 시총의 2배 규모다. 1985년 IBM도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대장주다. 당시 IBM 시총(956억 달러)은 S&P500 전체의 6.37%에 이르렀다는 게 하워드 실버블래트 S&P 수석 애널리스트의 분석이다. 애플은 4.05%까지 시장을 장악한 적이 있다. 중국 석유기업 페트로차이나는 2007년 11월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상장되자마자 시총 1조 달러를 넘겨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미국 대장주 엑손모빌(4880억 달러)조차 페트로차이나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월가는 폐쇄적인 중국 시장을 믿을 수 없다며 페트로차이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페트로차이나는 4개월 만에 시총이 반 토막 나 황제로 등극하는 데는 실패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시총 기준으로 세계 기업 순위를 매기는 ‘FT 글로벌 500’을 보면 지난해 페트로차이나는 3297억 달러로 애플, 엑손모빌, 버크셔헤서웨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에 이어 6위에 머물렀다. 국내 증시의 대장주는 단연 삼성전자다. 1999년 7월 29조원으로 한국전력을 끌어내리고 처음으로 시총 1위에 등극한 삼성전자는 2000년부터 독주 체제에 돌입해 16년째 왕좌를 지키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의 시총은 170조원에 육박해 유가증권시장의 15%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2위 한전(34조원)의 5배에 이른다. 그러나 지금 삼성전자는 위기다. 2012년 시총 200조원을 돌파하며 축포를 쐈지만 4년이 채 지나지 않은 현재 온갖 비관론에 휩싸여 있다. 소니와 노키아 등 글로벌 기업이 불과 몇 년 만에 몰락한 것은 삼성전자의 위기의식을 더 키운다. 라이벌이자 동반자인 애플의 부진도 삼성전자에 기쁨보다 걱정을 안긴다. 김용구 삼성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대장주와 함께 시총 상위 10개 기업의 변천 과정을 자세히 분석하면 세계 경제 성장 구도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김현회의 축구싶냐] ‘영원한 청룡의 주장’ 故정병탁을 기리며

    [김현회의 축구싶냐] ‘영원한 청룡의 주장’ 故정병탁을 기리며

    한 명의 위대한 축구인이 세상을 떠났다. 故정병탁 감독이 지난 10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하늘로 간 것이다. 어린 세대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일수도 있지만 고인이 가는 길에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한국 축구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던 故정병탁 감독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고인이 걸어온 발자취가 곧 한국 축구의 발자취였다. ‘축구판 실미도 부대’ 양지에 간 정병탁정병탁은 1942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빠른 발을 앞세워 축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축구 명문인 배재고를 거쳐 연세대학교 1학년인 1964년부터는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이후 정병탁은 한국 축구의 역사와 같이 하기 시작했다. 군팀이 상한가를 쳤던 1960년대 해병대에 입대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간 정병탁은 대표팀에서도 주축 레프트윙으로 활약했다. 그런데 이때 정병탁을 비롯한 한국 축구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북한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의 주목을 받자 체제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축구팀을 결성했기 때문이다. 바로 ‘축구판 실미도 부대’였다. 정권 실세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나선 창단한 이 팀은 강제로 각 팀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이들을 뽑아 들였다. 국가대표팀도 아닌 곳에서 강제로 선수를 빼가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 누구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중앙정보부의 지시였기 때문이다. 팀 이름도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 슬로건에서 ‘양지’를 따 왔다. 물론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정병탁도 해병대에서 양지로 옮겨야 했다. 정병탁을 비롯해 김호, 김정남, 조정수, 서윤찬, 허윤정, 김삼락, 이회택, 임국찬, 이세연 등 쟁쟁한 선수들이 이렇게 양지라는 한 팀에 모였다. 쌀 한 가마니에 4000원 하던 시절에 무려 매달 2만 5000원이라는 엄청난 급여가 제공됐고 선수단 전원이 중앙정보부가 위치한 서울시 이문동에서 숙소 생활을 하며 천연 잔디 구장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양지축구단 활동을 군 복무로 인정, 병역 혜택까지 부여했다. 식탁에는 매일 고기 반찬이 올랐다. 심지어 서독과 프랑스, 스위스, 그리스 등을 도는 105일의 유럽 전지훈련도 떠났다. 물론 이 대단한 팀의 중심에는 정병탁이 있었다. 메르데카컵을 품은 청룡팀의 주장 정병탁은 소속팀 양지의 주축으로 활약하면서 1970년에 출범한 국가대표 1진 청룡의 주장까지도 맡고 있었다. 당시 대표팀은 1진 청룡과 2진 백호로 나뉘어 운영 중이었는데 청룡에 직면한 과제는 바로 메르데카컵 우승이었다. 지금은 그 권위가 떨어졌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메르데카컵은 아시아 최강을 가리는 최고의 대회였다. 1970년 당시 한국의 청룡을 비롯해 태국, 싱가포르, 일본, 인도네시아, 홍콩 등 만만치 않은 상대 12개 나라가 치르는 이 대회에는 전국민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1차전 태국과의 경기에서 0-0으로 비긴 한국은 두 번째 홍콩과의 경기에서도 비기며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3차전 인도와의 경기 역시 흐름이 좋지 않았다. 먼저 두 골이나 내주며 끌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청룡의 주장인 정병탁이 나섰다. 한 골을 따라간 한국은 후반 25분 정병탁의 크로스를 박이천이 동점골로 기록했고 10분 뒤에 마침내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정병탁이 왼쪽 구석에서 올린 크로스를 이회택이 헤딩골로 연결, 극적인 3-2 역전승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정병탁은 이날만 두 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한국 축구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 결승 상대는 버마였는데 버마는 예선에서 인도를 2-0으로 완파한 강호였다. 한국으로서는 메르데카컵을 가져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전까지 공동 우승을 한 적은 있어도 단독 우승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한국은 부담감을 안고 경기에 나서야 했다. 3만 5000여 명이 들어찬 가운데 버마와의 결승전이 시작되자 두 팀은 팽팽하게 맞섰다. 0-0의 균형이 이어지던 전반 33분 마침내 이 경기의 유일한 골이 정병탁의 발을 통해 시작됐다. 박이천에게서 패스를 이어받은 정병탁이 이 공을 완벽하게 이회택에게 넘겨줬고 이회택이 날린 슈팅이 버마 골문을 가른 것이었다. 후반 막판 정병탁은 중앙선을 돌파하면서 노마크 찬스를 만들어 슈팅으로 버마 골망을 한 번 더 출렁였지만 아쉽게도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았다. 득점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정병탁은 이날 경기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감격적인 우승을 확정지었다. 12번이나 메르데카컵에 나서고도 1960년 말레이시아와 공동 우승, 1965년 중국과 자유 중국과 공동 우승, 1968년 버마와 공동 우승을 차지한 게 전부였던 한국의 첫 단독 우승이었다. 그의 충격적인 대표팀 은퇴 발표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기뻐했다. 그리고 시상식이 열리는 순간 ‘청룡’의 주장 정병탁이 말레이시아 라만 수상으로부터 메르데카컵을 건네받더니 번쩍 들어올렸다. 한국이 그토록 염원하던 메르데카컵을 단독으로 품는 순간이었다. 귀국 길에도 수많은 환영 인파가 몰릴 만큼 국민들의 성원 또한 대단했다. 팀의 주장 정병탁은 모든 국민이 바랐던 메르데카컵을 들고 당당히 귀국했다. 지금이야 메르데카컵 우승에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메르데카컵 우승은 아시아 정복을 뜻할 만큼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대회였으니 국민들의 함성이야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세 개나 기록한 주장 정병탁의 인기 역시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소속팀이었던 양지는 김형욱이 1970년 실각하면서 입지가 줄어 들었고 결국 흐지부지 흩어졌다. 정병탁도 양지를 떠나 신탁은행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무려 8년 동안 대표팀 생활을 했고 메르데카컵에만 6번을 출전했던 이 대단한 선수의 미래에 많은 이들이 희망을 안고 있었다. 해외 원정 경기만 18번을 치르면서 경험도 많이 쌓은 정병탁은 한국 축구를 계속 짊어지고 갈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때 정병탁이 한국 축구계가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했다. “이제 대표팀에서 은퇴하겠습니다.” 아무리 선수 생명이 짧았던 1970년대라고 하더라도 28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그의 대표팀 은퇴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메르데카컵을 들고 금의환향하던 정병탁에게 대표팀 은퇴를 번복해달라고 매달렸다. 고별전 보기 위해 모여든 1만여 팬들그래도 정병탁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대표팀 은퇴 이유를 묻는 질문에 정병탁은 이렇게 답했다. “이제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싶습니다. 또한 가정과 직장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정병탁의 말을 그대로 믿는 이들은 없었다. 김용식이 43세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갔고 당시 청룡팀 트레이너를 맡은 우상권 또한 36세까지 현역으로 뛰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28세의 창창한 선수가 체력의 한계를 느껴 대표팀을 떠난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의 추측이었지만 정병탁이 한창의 나이에 대표팀을 박차고 나온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청룡팀이 선수들에 대한 기본적인 대우도 해주지 않았던 데 따른 불만 때문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정병탁은 메르데카컵에서 단독 우승을 차지하고 1970년 8월 19일 귀국한 뒤 닷새만을 쉬고 또 다시 청룡팀 합숙훈련에 들어가야 했다.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다 양지 시절 받던 월급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훈련에만 전념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표 선수 생활이 끝나면 미래에 대해 그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았고 가정 생활도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당시 상황상 애국심만을 강요하며 나머지 모두를 포기해야 하는 분위기에 정병탁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 정병탁은 그렇게 28세의 이른 나이에 대표팀에서 물러났고 주장 완장을 김정남에게 넘겼다. 그가 애국심이 없어 대표선수 자격을 일찌감치 반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병탁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 축구를 위해 양지에 묶여 있고 청룡에 묶인 채 모든 걸 포기해야 했었다. 그는 A매치 통산 39경기 출전에 11골의 기록을 남겼다. 1970년 9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국가대표 상비군 간의 평가전이 펼쳐졌다. 그런데 이 비공식 경기에 모인 관중수만 해도 무려 1만여 명이 훌쩍 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청룡팀을 떠나는 정병탁이 마지막으로 청룡의 유니폼을 입고 고별전을 치렀기 때문이다. “정병탁 보러 가자.” 사람들은 청룡팀의 최초 주장인 정병탁의 모습을 보기 위해 비공식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운동장으로 몰렸다. 이 정도로 정병탁은 현역 생활 내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 축구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렇게 정병탁은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대표팀을 떠났고 이후 신탁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뒤 오랜 시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됐다. 사람들은 새로운 스타들의 등장이 이어지자 정병탁이라는 이름은 서서히 잊어갔다. 지도자가 돼 돌아온 정병탁의 성공시대그런 정병탁이 다시 축구계로 돌아온 건 1984년이었다. 모교인 연세대 축구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병탁 감독은 연세대에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일을 냈다. 부임 후 5개월 만에 치른 제29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파죽지세로 결승에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결승 상대인 중앙대의 수장이 바로 김기복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40대 초반인 정병탁 감독과 김기복 감독은 양지와 청룡에서 3년 가까이 활약했던 둘도 없는 선후배 사이였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정병탁 감독이 이끄는 연세대는 중앙대를 가볍게 2-0으로 제압하고 무려 36년 만의 감격적인 우승을 확정지었다. 대학 무대에 첫발을 내딛은 정병탁 감독은 5개월 만에 지도자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누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잊혀졌던 정병탁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정병탁 감독도 연세대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김봉길 스카우트 작전’이었다. 1984년 첫 우승을 경험한 정병탁 감독은 곧바로 고교 최대어인 부평고 김봉길 잡기에 나섰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팀들의 스카우트 표적이 됐던 김봉길은 사실 고려대행이 점쳐지고 있었다. 부평고 고명수 코치와 고려대 남대식 코치의 사이가 돈독해 김봉길은 당연히 고려대행이 점쳐졌다. 그런데 정병탁 감독이 나섰다. 사실상 김봉길의 고려대행이 유력한 상황에서 정병탁 감독이 김봉길과 그의 부모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김봉길과 그의 부모 역시 고려대로 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정병탁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에 대해 김봉길은 이런 기억을 떠올렸다. “연세대 훈련이 저녁 6시에 끝나면 저녁 8시쯤 감독님께서 꼭 저희 집 앞으로 오셨어요.” 그렇게 무려 한 달 동안 정병탁 감독은 매일 저녁 김봉길의 집 앞으로 가 그의 부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선수층이 두터운 고려대보다는 아들이 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연세대를 선택해 달라”는 진심을 전했다. 그리고 김봉길은 닫혀 있던 마음을 열고 결국 연세대를 선택했고 연세대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정병탁 감독은 아주대 행이 유력했던 거제고의 최청일 또한 이런 식으로 설득해 연세대로 데려올 수 있었다. 김봉길은 정병탁 감독을 이렇게 기억했다. “옷도 잘 입는 멋쟁이셨고 굉장히 화끈하면서 남자다우셨어요. 한 번은 우리가 우승을 한 뒤 뒷풀이를 한다고 선수단 전체를 나이트클럽을 데려가기도 하셨죠. ‘오늘은 내가 쏠 테니 마음껏 놀아라’ 이 말에 다들 반했다니까요. 감독님 모시고 나이트클럽에 갔던 건 참 독특한 추억이죠.” 가족과의 이별, 그리고 전남과의 만남정병탁 감독은 연세대에서 지도 능력을 인정받고 이듬해에는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 감독까지도 겸하기 시작했다. 정병탁 감독의 지도자 인생도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이때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1987년 1월 개인적인 일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강릉을 떠나 서울로 오던 정병탁 감독의 승용차가 마주오던 고속버스와 정면충돌하는 큰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정병탁 감독은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을 차린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내가 그 자리에서 바로 숨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가정 생활을 위해 이른 나이에 대표팀까지 포기해야 했던 정병탁 감독에게는 아내의 죽음이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곧바로 일어섰다. 그를 기다리는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털고 일어난 정병탁 감독은 1989년 또 다시 정상에 섰다. 제37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1학년생 김도훈과 강철 등을 앞세워 이뤄낸 대단한 성과였다. 특히나 서울 대신고에서 공격수로 활약했던 강철을 대학 진학 후 정병탁 감독이 수비수로 전환시킨 게 ‘신의 한 수’였다. 아마도 정병탁 감독이 없었더라면 강철이라는 훌륭한 수비수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철 스스로도 “처음에는 달갑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할 정도다. 결승에서는 프로선수 네 명이 포함된 포철 아마팀을 4-1로 꺾는 등 7경기에서 20득점하는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렇게 연세대를 아마추어 최강으로 이끈 정병탁 감독은 1992년 연세대 감독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숱한 스타 플레이어들을 배출해냈다. 그가 다시 돌아온 건 1994년이었다. 당시 전남 지역을 연고로 하는 프로팀 제8구단 창단을 앞두고 초대 사령탑으로 정병탁 감독의 이름이 거론된 것이다. 전남 여수 출신인 그가 고향팀 지휘봉을 잡는 모습이 조금씩 그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연고내에는 차경복 전 경희대 감독과 정태훈 한양공고 감독, 남대식 고려대 감독, 서현옥 중앙대 감독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남 진도 출신 허정무 감독이 가장 강력한 경쟁 후보였고 연고는 없지만 지명도가 워낙 높은 이회택 전 포철 감독 또한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넘게 긴 토론이 이어진 후 최종 선택은 정병탁 감독이었다. 허정무 감독이 포철 감독으로 부임하고 있어 빼오는 게 무리가 있었고 나머지 후보군 중에는 정병탁 감독이 가장 적임자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청룡팀 최초의 주장’ 故정병탁을 기리며청룡의 초대 주장이던 그가 이번에는 전남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길조를 상징하는 용을 의인화한 전남의 마스코트가 모습을 드러냈고 팀 이름은 전남드래곤즈로 명명됐다. 전남의 초대 사령탑으로 부임한 정병탁 감독은 박경훈 코치와 여범규 코치를 선임한 뒤 곧바로 선수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드래프트를 통해 대졸 신인 9명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훗날 전남의 상징이 된 김도근(한양대)도 포함돼 있었다. 이뿐 아니라 실업팀에서 뛰던 선수들을 대거 발탁했다. 전남의 전설적인 존재인 노상래와 김태영 등도 이때 정병탁 감독이 선택한 작품이었고 기존 프로팀에서 활약하던 김봉길(유공)과 박창현(포철) 등도 데려왔다. 정병탁 감독이 선택이 아니었더라면 노상래와 김태영, 김도근 등 ‘전남맨’들은 역사에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광양전용구장이 광양시민뿐 아니라 여수와 순천 지역 주민들까지 몰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정병탁 감독 때문이었다. 여수 출신인 그가 고향에 내려와 프로팀 감독이 되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전남은 1995년 5월 7일 역사적인 K리그 데뷔전에서 전북을 상대로 김봉길의 두 골과 노상래의 한 골을 앞세워 3-1 승리를 따내는 등 신생팀답지 않은 선전을 이어나갔고 결국 8개 팀 중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비록 엄청난 성과는 아니었지만 현재 전남의 토대를 만든 건 정병탁 감독의 공이 컸다. 하지만 정병탁 감독은 1996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며 이 자리를 허정무 감독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정병탁 감독은 이해 마라도나가 소속된 보카주니어스의 방한 경기 때 잠시나마 한국 대표팀을 지휘한 뒤 주무대에서 쓸쓸히 사라졌다. 이후 정병탁 감독은 과거 양지팀 시절 동료들과 서울시 실버축구단에 속해 사회 공헌 활동을 하기도 했고 경기도 고양시에 ‘정병탁 어린이축구교실’을 창단해 유소년 선수 육성에 힘쓰기도 했지만 축구계 주류 무대에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저께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정병탁 감독이 향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청룡팀 최초의 주장이자 연세대를 아마추어 최정상을 이끈 지도자이면서 전남의 초대 감독을 맡았던 그는 늘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빛이 날 때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故정병탁 감독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고인이 한국 축구를 위해 보여줬던 헌신을 잊지 않겠다. 이제는 故정병탁 감독이 먼저 하늘로 보낸 사모님과 행복하셨으면 한다. 청룡팀 최초의 주장으로 한국 축구를 이끌었던 故정병탁 감독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축구 칼럼니스트 김현회 footballavenue@nate.com
  • 中서도 지카 첫 확진… “신생아 시력장애도 유발”

    中서도 지카 첫 확진… “신생아 시력장애도 유발”

    베네수엘라 여행 34세男 양성, 병원 격리 치료… 상태는 양호 중국에서 중남미 여행을 다녀온 30대 남성이 소두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의심받는 지카바이러스의 첫 확진 환자로 보고됐다. 중국 국가위생계획생육위원회(NHFPC)는 중남부 장시성 간저우시 간현에 사는 남성(34)이 지카바이러스 확산 지역인 베네수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 지카바이러스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지난 9일 발표했다. 이 남성은 지난달 28일 베네수엘라에서 발열, 두통 등의 감염 증세를 보여 진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홍콩과 광둥성 선전을 거쳐 이달 5일 장시성으로 돌아왔다. 이 남성은 현재 간현 인민병원으로 옮겨져 격리돼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상 체온을 유지하고 피부 발진도 가라앉는 등 상태가 양호하다고 중국 보건당국이 밝혔다. 중국 질병예방통제센터와 장시성 보건당국은 이 환자의 사례를 세계보건기구(WHO)와 홍콩 정부에도 통보했다. 중국 보건당국은 “장시성은 지카바이러스 매개체인 이집트숲모기의 주요 분포 지역이 아니고 이곳에서 모기가 활동하는 시기도 아니다”라며 “외부에서 유입된 감염자를 통해 지카바이러스가 확산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설명했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지카바이러스가 신생아의 시력을 손상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브라질 사우바도르의 한 종합병원이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연구를 이끈 상파울루연방대학의 후벵스 벨포르트 주니어 교수는 “지카바이러스에 감염된 신생아 상당수가 시각장애인이 될 수 있다”며 “소두증을 갖고 태어난 모든 아기가 정기적으로 안과 검사를 받을 것”을 권고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5·18 알린 獨기자, 유언대로 광주에 잠들까

    5·18 알린 獨기자, 유언대로 광주에 잠들까

    가족은 반대… 광주 조문단 파견 검토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79)가 지난달 25일 숨지면서 “광주에 묻히고 싶다”던 그의 유언이 실현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광주시는 유가족으로부터 그의 사망 소식을 확인했으며 오는 5일(현지시간) 오전 열리는 영결식에 조문단을 파견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2일 밝혔다. 그는 심장마비 후유증 등으로 투병 생활을 해 오다 독일 북부의 휴양도시인 라체부르크에서 숨졌다. 힌츠페터는 2005년 5·18민주화운동 25주년 때 광주를 방문해 자신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5·18기념재단에 맡겼다. 그가 “가족이 반대해 유해의 광주 안장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며 당시 신체의 일부를 맡긴 것이다. 그는 앞서 2004년 심장마비로 쓰러져 생사의 기로에 놓였을 때 “광주 망월 묘역에 묻히고 싶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시는 유족이 동의하면 유해를 옮겨 오거나 그 당시 기증한 신체 일부를 망월 묘역에 안장하는 방안을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 독일 제1공영방송(ARD TV) 촬영기자였던 힌츠페터는 일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1980년 5월 당시 광주의 현장을 영상으로 촬영한 뒤 독일로 보내 5·18의 참상을 가장 먼저 세계에 알렸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상을 세계에 알렸고 1986년 서울 광화문 시위 현장을 취재하다가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었다. 불의에 맞서 진실을 알린 기자정신을 높이 평가받아 2003년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다. 윤장현 시장은 이날 애도 성명을 내고 “그가 5·18을 불의에 저항하는 민주항쟁으로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며 “150만 시민과 함께 깊이 애도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힌츠페터 “광주에 묻히고 싶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힌츠페터 “광주에 묻히고 싶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79) 씨가 지난달 25일 숨지면서, 고인이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 생전에 남긴 유언이 실현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광주시는 유가족으로부터 그의 사망 소식을 확인했으며, 오는 5일(현지시각) 오전 열리는 영결식에 조문단 파견을 검토하고 있다고 2일 밝혔다. 그는 심장마비 후유증 등으로 투병생활을 해오다가 독일 북부의 휴양도시인 라체부르크에서 숨졌다. 시 조문단은 이번 영결식에 참석, 유가족의 의견을 들은 뒤 5·18 망월 묘역 안장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힌츠페터씨는 2005년 5·18 민주화 운동 25주년 때 광주를 방문해 자신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5·18 기념재단에 맡겼다. 그는 “가족이 반대해 유해의 광주 안장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며 당시 신체의 일부를 맡긴 것이다. 그는 앞서 2004년 심장마비로 쓰러져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광주 망월 묘역에 묻히고 싶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광주시는 유족이 동의하면 유해를 옮겨오거나 그 당시 기증한 신체 일부를 망월 묘역에 안장하는 방안을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 유해가 아니면 안장기준 조례에 구애받지 않고, 시와 5·18 기념사업회·5월 단체 등의 협의를 통해 망월 묘역에 묘지를 조성할 수 있다. 시는 또 그에게 명예시민증을 추증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독일 제1공영방송(ARD TV)의 촬영기자였던 고 힌츠페터씨는 일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1980년 5월 당시 광주의 현장을 영상으로 촬영한 뒤 독일로 보내 5·18의 참상을 가장 먼저 세계에 알렸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상을 세계에 알렸고, 1986년 서울 광화문 시위 현장을 취재하다가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었다. 불의에 맞서 진실을 알린 기자정신을 높이 평가받아 2003년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이날 애도성명을 내고 “그가 5·18을 불의에 저항하는 민주항쟁으로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며 “150만 시민과 함께 깊이 애도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아키히토 일왕 “일본인들, 전쟁때 필리핀인 희생 절대 잊지 않아”

    베그니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의 초청으로 일본 군주로선 처음으로 필리핀을 방문 중인 아키히토 일왕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필린핀인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닷새간 이어질 이번 방문은 일본과 필리핀의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성사됐으며, 일본과 필리핀의 외교적 밀월 관계를 상징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7일 NHK 등 외신들에 따르면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저녁 마닐라에서 열린 아키노 대통령 주최의 환영 만찬에서 “지난해 우리는 2차대전이 끝난지 70주년을 맞이했다”며 이 같이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그는 “전쟁 중 필리핀에서 일·미 양국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많은 필리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면서 “우리 일본인은 이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되며, 이번 방문에서도 이것을 깊이 마음에 두고 하루하루 여정을 보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일왕 내외는 이날 ‘무명 전사의 묘’를 찾아 전쟁 당시 숨진 필리핀인들을 추모했다. 오는 29일에는 현지의 일본인 전몰자비를 찾을 예정이다. 2차대전때 전쟁에 휘말린 필리핀인 희생자는 100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일왕의 방문으로 필리핀 국내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죄 요구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FP 등은 필리핀인 위안부 피해자들이 방문에 맞춰 일본 정부에 보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시위를 열 계획이지만 일본 정부를 의식한 필리핀 당국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시위에는 생존 필리핀인 위안부 중 최고령인 힐아리아 부스타멘테(90) 할머니도 참여할 예정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테러에 맞선 ‘의로운 죽음’

    테러에 맞선 ‘의로운 죽음’

    케냐와 파키스탄에서 극단주의 테러에 맞서다가 희생당한 의인들의 사연이 전해져 지구촌을 숙연하게 했다. 20일(현지시간) 파키스탄 탈레반 소속 무장 괴한 4명이 이날 오전 북서부 차르사다에 있는 바차칸대학에 난입, 무차별 총격을 가해 교수와 학생 등 최소 20명이 숨지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 학교에는 학생과 교직원 등 3000명 이상이 머물고 있었다. 괴한들이 기숙사, 강의실 등을 돌며 총을 난사한 가운데 한 교수가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권총을 들고 테러범에게 맞서다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주인공은 화학을 가르치는 시에드 하미드 후사인(34) 교수. 그는 총성이 들리자마자 제자들에게 건물 안에 있으라고 당부한 뒤 권총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학생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던 그는 결국 테러범의 총격에 쓰러졌다. 현장에서 그가 테러범과 맞서던 모습을 목격한 학생들은 “후사인 교수가 총에 맞아 쓰러지자 테러범들이 행정실로 들어갔고, 그 틈을 타 우리는 달아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영국에서 유기화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사인 교수는 이 학교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파키스탄 네티즌들은 후사인 교수의 사망 소식을 트위터에 올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케냐에서는 기독교인을 골라내 살해하려던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에 맞서다 총상을 입은 무슬림이 지난 18일 한 달여 만에 사망했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북부 만데라에서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던 살라 파라는 지난해 12월 21일 수도 나이로비에서 만데라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타고 있었다. 당시 소말리아 무장단체 알샤바브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그가 탄 버스를 납치하고 60여명의 승객을 내리게 하더니 무슬림만 버스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파라는 다른 무슬림 승객들과 함께 “기독교인을 죽이려면 우리 모두 죽여라”라고 외치며 테러범들에게 저항했다. 시간이 지체될까 우려한 괴한들은 도주하려던 승객 2명만을 사살한 뒤 황급히 자리를 떴다. 파라의 용감한 행동이 더 큰 인명 피해를 막은 셈이다. 괴한들이 버스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손과 엉덩이에 총격을 입은 파라는 이튿날 나이로비의 케냐타 국립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아 왔으나 결국 생을 마감했다. 다섯 자녀의 아버지인 그는 이달 초 ‘미국의소리’(VOA) 방송과 한 병상 인터뷰에서 “무슬림 형제들에게 부탁하건대, 기독교인들을 잘 돌봐 줘라. 그래야 기독교인들도 우리를 잘 돌볼 것이다. 서로 돕고 더불어 평화롭게 살기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케냐 경찰은 그의 시신을 고향 만데라로 옮길 때 특별기를 제공하는 등 의인의 죽음에 예우를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부고] ‘호텔 캘리포니아’ 글렌 프레이 사망

    [부고] ‘호텔 캘리포니아’ 글렌 프레이 사망

    ‘호텔 캘리포니아’를 부른 미국의 전설적 록그룹 이글스의 창립 멤버이자 기타리스트인 글렌 프레이가 18일(현지시간) 뉴욕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이글스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밝혔다. 67세. 고인은 류머티즘 관절염, 궤양성 대장염, 폐렴 등을 앓아 왔다. 이글스는 “유가족은 프레이의 투병을 응원해 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면서 “어떤 말로도 우리의 슬픔과 사랑, 또 그가 우리와 전 세계 팬들에게 전한 존경을 표현할 수 없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1971년 드러머 돈 헨리, 기타리스트 버니 리던, 베이시스트 랜디 마이스너와 함께 밴드 이글스를 결성해 미국을 대표하는 록그룹으로 키웠다. 이글스 최초의 히트곡 ‘테이크 잇 이지’의 가사를 쓰고 리드 싱어를 맡았다. 선율이 강한 캘리포니아 풍의 음악을 선보였던 이글스는 호텔 캘리포니아 외에도 ‘라이프 인 더 패스트 레인’, ‘피스풀 이지 필링’, ‘올레디 곤’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총 7장의 정규 앨범은 전 세계에서 1억 20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그래미상을 6차례나 수상했다. 이글스는 1980년 해체됐다가 1994년 재결합해 왕성한 콘서트 활동을 이어왔다. 고인은 2011년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불법광고물, 돈으로 바꿔 드려요

    강서구가 거리 환경을 어지럽히는 불법 광고물을 뿌리 뽑기 위해 다음달부터 ‘불법 광고물 수거보상제’를 추진한다고 19일 밝혔다. 구는 불법 광고물 수거보상제를 추진하면서 도시 미관을 개선하고 노인 등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도 제공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불법 포스터와 전단지, 명함 등을 대상으로 수거보상제를 실시한 데 이어 올해는 불법 현수막까지로 보상 대상을 확대했다. 주택가와 도로에 있는 신호등, 전신주에 붙은 불법 게시물뿐만 아니라 유동인구가 많은 상권과 도로변, 차량 등에 무단으로 배포, 설치된 전단과 현수막도 수거해 오면 보상해 준다. 보상금은 수거 실적에 따라 다르다. 개당 20~50원씩 하루 최대 5000원, 한달 최대 10만원이다. 현수막은 개당 500~2000원으로 일 최대 10만원, 월 최대 200만원이 한도다. 이를 위해 구는 오는 29일까지 수거보상제 사업 참여자를 모집한다. 전단·벽보 60명, 현수막 18명 등 총 78명이다. 참여 연령은 전단과 벽보의 경우 65세 이상, 현수막은 20~65세로, 각각 동주민센터와 구 도시디자인과에 신청하면 된다. 구 관계자는 “수거 작업을 벌이면서 상습, 고질적인 불법 광고에 대해서는 과태료 부과 조치를 하고, 청소년 유해 광고물이 적발되면 경찰에 고발할 계획”이라면서 “주민이 함께 참여하는 거리 환경 개선 작업을 펼치면서 꾸준한 단속을 병행해 불법 광고물을 없애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호텔 캘리포니아´ 이글스 기타리스트 프레이 사망

    ´호텔 캘리포니아´ 이글스 기타리스트 프레이 사망

     이글스 프레이 사망 ‘호텔 캘리포니아’를 부른 미국의 전설적 록그룹 이글스의 창립멤버이자 기타리스트인 글렌 프레이가 18일(현지시간) 숨졌다. 67세.  이글스는 이날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프레이가 폐렴 합병증으로 뉴욕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영원한 전설’이 된 고인은 류머티즘 관절염, 궤양성 대장염, 폐렴 등을 앓아 왔다. 최근 여러 병세가 겹치면서 결국 이를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글스는 “유가족은 프레이의 투병을 응원해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면서 “어떤 말로도 우리의 슬픔과 사랑, 또 그가 우리와 전 세계 팬들에게 전한 존경을 표현할 수 없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1971년 드러머 돈 헨리, 기타리스트 버니 리던, 베이시스트 랜디 마이스너와 함께 밴드 이글스를 결성해 미국의 대표적 록그룹으로 키웠다. 이글스 최초의 히트곡 ‘테이크 잇 이지’의 가사를 쓰고 리드 싱어를 맡았다.  선율이 강한 캘리포니아 풍의 음악을 선보였던 이글스는 호텔 캘리포니아 외에도 ‘라이프 인 더 패스트 레인’, ‘테이크 잇 이지’, ‘피스풀 이지 필링’, ‘얼레디 곤’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총 7장의 정규 앨범은 전 세계에서 1억 20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그래미상을 6차례나 수상했다. 고인은 ‘더 히트 이즈 온’, ‘스머글러스 블루스‘ 등의 솔로 히트곡도 갖고 있다.  이글스는 1980년 해체됐다가 1994년 재결합해 왕성한 콘서트 활동을 이어왔다. 고인은 헨리, 조 월시, 티모시 B.슈미트 등으로 멤버를 재구성했고, 2011년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글스에 남았던 창립멤버는 고인과 드러머인 헨리 뿐이었다. 헨리는 “다툼이 있었지만 형제나 다름 없는 가족이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글스 프레이 사망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호텔 캘리포니아´ 이글스 기타리스트 프레이 사망

    ‘호텔 캘리포니아´ 이글스 기타리스트 프레이 사망

      전설적인 미국 록밴드 이글스의 창립 멤버이자 기타리스트이던 글렌 프레이가 18일(현지시간) 뉴욕에서 류머티즘 관절염, 궤양성 대장염, 폐렴에 의한 합병증으로 수주동안 싸우다 타계했다고 이글스 공식 웹사이트가 밝혔다. 67세.  이글스는 성명을 통해 “유가족은 프레이를 응원해준 모든 분에게 감사하고 있다”며 “어떤 말로도 우리의 슬픔과 사랑, 또 그가 우리와 전 세계 팬들에게 전한 존경을 표현할 수 없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1971년 드러머 돈 헨리, 기타리스트 버니 리던, 베이시스트 랜디 마이스너와 함께 밴드 이글스를 결성했다. 이글스는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 ‘라이프 인 더 패스트 레인’ (Life in the Fast Lane)과 함께 ‘테이크 잇 이지’(Take It Easy), ‘피스풀 이지 필링’(Peaceful Easy Feeling), ‘얼레디 곤’(Already Gone), ‘뉴 키드 인 타운’(New Kid in Town) 등의 수많은 히트곡을 선보였다.  이글스는 1970년대 중반 선율이 돋보이는 캘리포니아 풍의 음악을 선보이며 미국의 대표적인 록 그룹으로 성장했다.  이 록밴드는 총 7장의 정규 앨범으로 전 세계에서 1억 2000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리면서 그래미상을 6차례나 수상했다. 호텔 캘리포니아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프레이의 솔로 히트곡으로는 ‘더 히트 이즈 온’(The Heat is On), 스머글러스 블루스‘(Smuggler’s Blues) 등이 있다.  이글스는 1980년 해체했다가 1994년 재결합해 전 세계를 돌며 왕성한 콘서트 활동을 펼쳤다. 2011년 내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드러머 헨리는 “나는 운명을 확실히 믿지는 않지만 1970년대 프레이와 걷던 길들이 나의 삶을 바꿨다는 것을 안다”며 “이것은 또 지구 상 다른 수백만 명의 삶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료 가수와 작곡가들도 트위터 등을 통해 프레이의 죽음을 애도했다.  ‘소 파 어웨이’(So Far Away)로 큰 인기를 얻은 싱어송라이터 캐롤 킹, 톰 행크스의 부인이자 배우인 리타 윌슨 등이 트위터를 통해 애도를 표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이스탄불 테러 사망자 10명 모두 독일인

    이스탄불 테러 사망자 10명 모두 독일인

    독일인 관광객을 겨냥해 터키 이스탄불의 술탄아흐메트 광장에서 자행된 폭탄 테러의 범인은 사우디아라비아 태생의 시리아인 남성으로 밝혀졌다. 로이터와 AFP 등은 13일(현지시간) 아흐메트 다우토을루 터키 총리의 말을 인용해 전날 이스탄불의 대표적 관광지에서 테러를 일으킨 사람은 나빌 파들리(28)로, 이슬람국가(IS) 조직원이라고 보도했다. 파들리는 최근 시리아 국경을 넘어 터키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터키 정보기관이 관리하는 테러리스트 명단에는 이름이 없었다. 이번 자폭 테러로 사망한 외국인이 최소 10명으로, 모두 독일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독일 외무부는 전날 발생한 테러로 숨진 외국인 10명이 모두 독일 국적자라고 이날 확인했다. 부상자 15명 중 12명이 독일인인 것으로 알려져 이번 테러에서 독일인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는 이스탄불의 상징물인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를 구경하던 독일 단체 관광객 33명을 겨냥해 테러범이 자폭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테러의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매년 터키를 방문하는 자국 관광객이 500만명이 넘는 독일을 비롯해 덴마크 등 서방국들은 터키 여행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우리 정부도 이스탄불에 대해 기존 ‘여행유의(남색)’에서 ‘여행자제(황색)’로 여행경보를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타임 온라인판은 “연간 300억 달러(약 36조 1440억원) 규모의 터키 관광산업이 흔들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IS는 지난해에도 터키 수도 앙카라와 남부 수루츠에서 테러를 자행해 140여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다우토을루 총리는 이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애도의 뜻을 전달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스탄불, 파리, 앙카라, 튀니지 등에서 국제 테러리즘이 추악한 얼굴을 드러냈다”며 단호한 대응을 강조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은 “야만적 테러 행위”라며 터키 외무부와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터키 정부는 이날 앙카라 등의 대도시 및 시리아와 접경한 킬리스 등에서 동시에 작전을 펼쳐 IS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시리아인과 러시아인, 터키인 등 68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데이비드 보위 빈자리에 ‘블랙스타’

    데이비드 보위 빈자리에 ‘블랙스타’

    영국의 전설적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가 사망하기 이틀 전 자신의 69번째 생일에 발매한 앨범 ‘★’(블랙스타)가 전 세계적인 애도 물결 속에 인기를 끌고 있다. 11일(현지시간) 영국 오피셜 차트에 따르면 ‘★’는 지난 8일 출시된 이후 이날까지 4만 3000장이 판매돼 앨범 차트 비공식 1위를 달리고 있다. 경쟁작과는 2만 5000장가량 차이가 난다고 오피셜 차트는 덧붙였다. 이에 따라 ‘★’는 오는 15일 일주일 단위로 발표되는 공식 집계에서 7주 연속 정상을 지킨 영국 여성 가수 아델의 앨범 ‘25’를 밀어내고 1위로 차트에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보위의 열 번째 영국 1위 앨범이 된다. ‘★’가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도 아델의 장기 집권을 끝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는 11일 오전 미국과 영국의 애플 아이튠스,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에 올랐고 특히 미국 아이튠스에서는 2002년 나온 보위의 베스트 앨범이 ‘25’를 제치고 2위에 올랐다고 로이터가 전했다. 약 50년 동안 팝과 록, 아트 록과 사이키델릭, 포크 록, 하드 록과 글램 록, 펑크와 솔, 일렉트로닉과 포스트펑크, 뉴웨이브, 댄스, 인더스트리얼 등 다채로운 사운드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보위는 유작 앨범에서 재즈 형식을 도입하는 새로운 실험에 도전했다. 물론 특유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유지한다. 모두 7곡이 담겼다. 음반 유통사인 소니뮤직은 “데이비드 보위가 이번에 원한 것은 완전히 다른 음악”이라며 “여러 면에서 로큰롤을 피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소개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터키 정부 “이스탄불 테러 IS 소행”

     터키 이스탄불의 대표적 관광지에서 12일(현지시간)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 최소 10명이 숨지고 15명이 부상했다. 터키 정부는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조직원에 의한 테러로 규정했다. 또한, 터키 정부가 사망자는 모두 외국인이라고 밝힌 가운데 독일 dpa통신은 9명이 독일인이라고 전했다.  테러는 이날 오전 10시 20분쯤 이스탄불 도심의 대표적 관광지인 술탄아흐메트 광장에서 일어났다.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터키 총리는 사망자는 모두 외국인이라고 밝히고 부상자는 대부분 독일인이라고 덧붙였다. 터키 총리실 관계자도 “다부토글루 총리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독일인이 대부분인 사망자들에 대한 애도를 전달했다”고 터키 국영 아나돌루 통신이 보도했다.  사고 현장 근처에는 한국 단체 관광객도 있었으나 가벼운 부상으로 거의 피해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장에 있던 한국인 가이드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나와 관광객 1명이 폭발에 따른 압력으로 손가락 등에 경상을 입었지만 병원에서 치료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가이드는 “광장에서 손님들에게 설명을 하는데 엄청나게 큰 폭발음이 들렸다”며 “외국 관광객 시신들이 현장에 있었다”고 말했다.  누만 쿠르툴무시터키 터키 부총리는 범인이 28세 시리아인이라고 밝혔다. 다부토글루 총리는 “범인은 IS 조직원인 외국인”이라며 그가 최근에 시리아에서 터키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술탄아흐메트 광장은 성소피아성당과 술탄아흐메트 자미(이슬람사원) 등이 있는 관광명소여서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터키 당국은 관광산업에 타격을 주려는 테러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터키에서는 지난해 남부 수루츠와 수도 앙카라에서 IS 조직원들이 자살폭탄 테러를 저질러 140여명이 숨지기도 했다. 터키 당국은 최근 IS가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 대도시에서 외국 공관과 관광지 등에서 자폭테러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터키 정부는 이날 폭발 현장에서 촬영된 시신 사진과 영상 등의 보도를 금지했다. 독일과 덴마크 정부는 테러 발생 직후 자국민들에게 터키 여행을 자제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한국 정부도 관계부처 긴급 대책 회의를 열어 이스탄불에 대해 여행경보 상향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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