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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립결단 정통성확립 계기로”/민자 당무회의 토론내용

    ◎“김영삼후보 당선에 당력 총집결/민자·정부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민자당은 21일 당무회의를 열고 노태우대통령의 당적이탈이후 당결속방안과 진로를 논의했다.1시간50여분에 걸친 이날 회의에서는 노대통령의 당적포기에 따른 위기감이 반영된 듯 대선승리를 위한 당의 결속과 단합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주조를 이루었다. ▲김종필대표=지난번 대표취임 때도 얘기했던 것처럼 이 시점에서 자기현시를 하지 말자.모든 일에 후보가 돋보이도록 도와주고 어떻게 하면 김총재가 국민의 신뢰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게 하느냐에 초점을 맞춰 언행을 해야 한다. 의견 있으면 당내에서 얘기해야지 당밖에서 이런저런 얘기하는 것은 당원된 도리가 아니다. ▲박정수의원=지금 우리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여론이 있으나 심기일전하여 이 위기를 떳떳한 승리의 기회로 만들어 정통성 시비를 없애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당의 흔들림이나 동요가 절대 없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오는 대통령선거에서의 패배는 명확하다. ▲정석모의원=오늘 아침 신문에 당적을 가진장관·비서들은 당적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직해야 한다는 보도를 읽고 우리당의 현상황을 실감했다.노대통령이 지금까지 3당합당을 역사적 순리이고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해 오다 갑자기 선거를 앞두고 공명선거를 한다며 중립내각·당적포시선언한 이유를 모르겠다.선거관리중립내각을 출범시키면 선거문화를 개선하는 장점이 있겠지만 정권 재창출을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춘구의원=사태가 이렇게 된데대한 지도부의 해명이 있어야한다.중립내각은 당이 먼저 주장한것이고 중립의지를 반영하기위해선 노대통령의 당적포기는 당연한 것이다.우리가 먼저 요구해놓고 이제와서 이런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않다. ▲정재철의원=단 한사람도 당을 이탈해서는 안된다.지난 8월 당총재직 이양땐 두분이 청와대에서 정답게 악수하는 모습을 보여 좋았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아 국민들이 당이 와해될까 걱정하고 있다.노대통령이 유엔·중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 청와대든 어디서든 김총재와 만나 정다운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것이 정국주도를 위해 필요하다. ▲최운지의원=우리 모두에게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우리들은 대통령과 총재를 잘못 보필한데 대해 뼈속 깊이 반성해야한다.당무위원들이 사퇴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당이 자멸의 길로 빠져드는 모습만을 국민에게 보여줄 뿐이다. ▲박명근의원=일사불란한 단합된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한다.중립선거관리내각이란 선거관리의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지 모든 정책에서의 중립을 뜻하는건 아니다. ▲이도선당무위원=선거대책기구를 빨리 발족시켜 이를 중심으로 대선에 대비해야 한다. ▲남재희당무위원=당선거기구 구성은 노대통령이 귀국한뒤 김총재와 논의한뒤에 하는게 좋겠다.지금은 아직 이르다. ▲김수한당무위원=노대통령의 당적포기는 김총재가 중립내각을 건의한데서 비롯된 것이다.두분이 구체적 이야기는 없었을지라도 충분한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민자당과 정부는 동전의 앞·뒤와 같다.당정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할수 밖에 없다. ▲박태준최고위원=나도 책임을 통감한다.평소 내말에 별로 무게를 싣지않던 사람들이 이제는『말하길 바란다』며 무게를 실으려한다.내가 어떤 위치에 서있느냐를 내가 잘알고 있기때문에 내가 받은 충격을 정돈하고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데도 내가 나서야하고 말을 해야한다는데 이해하기 어렵다. ◎김 총재 당무회의 인사말/“우리당이 흔들리면 국가도 표류”/“당내 잡음 공식기구 통해 수렴을” 중요한 시점을 맞아 임시당무회의를 소집한 것이다.노대통령이 살신성인의 결단으로 당적이탈을 선언,6·29선언 이상의 의미있는 결단을 내렸다.노대통령의 결단은 헌정사상 유례없는 일이다.이는 공명정대한 선거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역사상 획기적인 일이며 새로운 선거문화를 창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개인보다는 대의를 바탕으로 단호한 행동을 보여야 한다.민자당의 책임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우리가 중심을 잃으면 이 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르며 우리나라가 불행해 질 수도 있다.우리당은 비바람이 불어도 자생적으로 일어서야하며 제2의 창당으로 돌아가야 한다.민자당이 흔들리면 정치가표류하고 경제사회가 혼란해져 누구도 감당키 어려운 상황을 맞게될 것이다. 우리당은 앞으로 첫째도 단합,둘째도 단결을 해야하며 단결을 이룰 때만이 국민과 국가에 보답케 될 것이다.우리 모두 공동운명체라는 인식하에 노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어려움에 직면하면 단호한 결심을 해야하며 이번 일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우리는 이제 용기있고 대의있는 사람만이 승리할 수 있는 시대를 맞았다.대선에서 공명정대하고 당당한 선거를 통해 이겨야하고 이길 수 있다.그래야만 정통성있는 정부가 수립될 수 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법이다.이를 계기로 당의 체질도 강화하고 단합을 해 어려움을 감당해 나가자.역사와 국민앞에 보답하고 모든 지혜를 모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기탄없는 의견과 중지를 모아달라.이제 명분은 우리에게 있다.공명정대한 선거를 해야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요 소신이다. 빠른 시일내에 선거대책기구를 구성하는 등 당체제정비 방안을 강구하겠다.당전체가 하나가 되어 대선을 치르기 위한 기구를 발족시키겠다. 일부 잡음이 있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러한 것들을 당공식기구를 통해 철저히 수렴,당의 중지를 모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12월 대선승리는 우리의 것인 만큼 애국심을 가지고 노력해 달라.
  • 광복군창설 기념비/52년만에 돌아왔다

    ◎중경 임정서 제작… 수집가가 입수 【청주】 상해 임시정부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중국 중경에서 김구선생 등 임정 요인들에 의해 제작된 「조선광복성립대회 기념비」가 민간인 문화재수집가 오성환씨(65·청·노유적사적발굴연구회 부회장·청주시 사직2동 7)에 의해 52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오씨는 19일 최근 자신이 독립국가연합(CIS)의 하바로프스크에 거주하는 한 중국인 소장가로부터 구입해온 중경임시정부가 조선광복군 창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대리석 기념비를 공개했다. 이 기념비는 현판형태로 된 가로 36.8㎝,세로 52.5㎝,무게 12.5㎏의 직사각형 모양이며 지난 1940년 9월17일 중경에 있는 가릉빈관에서 열린 조선광복군 창립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중경 임정이 제작한 것이다. 이 기념비의 내용중 1∼7행까지 조선광복군 창립대회에 임정 대표로는 김구 등 임정 요인이,중국측에서는 손과 등 주요인사가,조선광복군 대표로는 이청천·오광선·이범석장군이 각각 참석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기념비의 내용 13행중 10∼13행엔 『조국처상위급관두/진정적애국자응당/분기극구조국/일본제국주의/진향투쟁』이라고 씌어있어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나 일본 제국주의와 나가 싸우자』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 박준규의장 1백59회 정기국회 개회사/요지

    우리는 오늘 제14대 국회의 첫 정기국회를 개회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는 또한 국회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었던 지난 9개월간의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아 줄 것을 온 국민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간 9개월여 동안 회의다운 회의를 하지 못한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국민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국회란 어느 특정정당의 전유물이 될 수 없는 것이고 그 구성과 활동은 어느 특정정당에만 이익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이 어렵고 당파적인 이해관계가 더 첨예하게 대립될수록 국회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고 회의는 무조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6월말이래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3당 대표회담이 있었고 그 결과 국회내에 정치관계특위가 설치되어 대통령선거법,정치자금법,지방자치단체장선거법 등 현안에 대하여 심도있는 논의를 거듭해 왔고 몇가지 사항에서만 중요한 합의가 있었으며,많은 부분에서 의견접근이 있었다고 보고받았습니다.이러한 특위의 활동에 격려를 받아 본인은 우리 국회안에 장기적인 안목에서국회운영 관례와 법규 그리고 국회의원선거제도 등을 역사적·세계적인 시야에서 연구하고 그 개혁방안을 건의할 수 있는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객관성 있는 기구를 만들 것을 제의합니다. 특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우리 국회에 가장 어려운 문제를 안겨주고 있는 몇가지 예민한 현안에 대해서는 여야간의 용기있는 지도자 정신과 관용있는 타협정신을 기대합니다. 지금 우리 국회는 명분과 원칙만을 앞세웠던 지난 날의 숱한 애국자보다는 이 나라의 민주화와 겨레의 번영을 위해서 촛불을 하나라도 더 밝히고 인내와 식견을 갖고 새로운 발상의 변환을 할 줄 아는 참된 의회인을 더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 장개석총통 동상/독립기념관 이전/건국애국단체 추진

    자유민주총연맹(총재 이철승)등 5개단체로 구성된 「건국애국단체총연합」은 9일 한중수교에 따른 대만대사관의 중국이관과 관련한 성명을 통해 대사관내의 고 장개석총통 동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옮기는 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했다. 건국애국단체총연합은 성명에서 『국제정치의 비정한 논리로 볼 때 한중수교는 일단 기정사실로 인정한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임시정부와 광복선열들의 후원자였고 카이로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약속한 은인인 장개석총통의 동상을 대만이나 화교학교로 옮기는 것은 섭섭한 일』이라며 이 운동의 취지를 설명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예관(예관) 신규식선생이 선정됐다.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신규식선생이 한·중수교 시점에서 재조명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선생은 단순한 독립운동가로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을 접목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력배양·민중계몽운동·경제적 자립기반 확충등 총체적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신규식선생의 43세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상해 임정수립 주역… 중국승인 얻어내/한·일 합방 직후 망명… 12년간 항일운동 매진/신해혁명 참여… 손문정부와 연계투쟁 길터/22년 임정분열에 통분,병석에서 25일간 단식… 43세로 생 마감 신규식선생이 남긴 명저 「한국혼」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망국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 글에 담긴 선생의 철학은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소신찬 행동으로 이어진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사이 망국의 한을 온몸과 마음 바쳐 투쟁으로 승화시킨 신규식선생의 웅변이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우리의 독립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라 할지라도,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충북 문의서 출생 신규식선생은 1880년 1월13일 충북 문의군(현재 청원군)에서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채호 신백우와 함께 「산동삼재」라고 불렸다. 17세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관립한어학교를 거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덕을 쌓게 되었다.신동으로 불리며 한학등 구학문에 능통하고 문학에도 탁월한 자질을 지녔지만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국력배양에 있다고 생각했다. ○을사년 순국기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로서 지방군대와 연계,대일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장지연은 황성신문에 피를 토하듯 「시일야 방성대곡」을 썼다.민영환 조병세 홍만식등은 자결했다.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였다.청년장교 신규식은 계동·가회동·운니동등의 솟을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듯 소리 질렀다.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 신규식은 호랑이라도 잡을 듯 거리를 쏘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운니동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그는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흘을 문걸어 잠그고 굶었다.그리고 결론을 내렸다.민영환등의 순국은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내한몸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한국혼」 참조·26살 신규식의 이같은 생각은 그러나 후일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죽음을 할 수 있고,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한다」는 투쟁적 신념으로 바뀐다) 신규식은 독약을 마셨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다.그러나 약기운이 번진 오른쪽 눈은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되었다.거울을 들여다 본 신규식은 냉소를 지었다. 『애꾸,그렇다.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어찌 나 한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우리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 이때부터 청년 신규식은 흘겨볼 예(예)자,볼 관(관)자­예관으로 자호를 삼아 끝까지 사용했다. 문동학원·덕남사숙의 설립 또는 지원,중동학교장 취임,공업전습소생들을 중심으로한 「공업연구회」조직,월간 「공업계」창간,윤치성 민대식등 퇴역장교를 규합한 황성광업주식회사 설립·운영,민족종교인 대종교에의 입교,분원자기공장의 설립과 고려자기 재현운동…등등이 선생의 무서운 행동력을 입증한다. 그러나 1910년 「보호」라는 양의 탈을 쓰고있던 일제는 본색을 드러냈다.경술국치가 그것이다.우리나라는 통째로 그들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선생은 다시한번 자결을 생각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1911년 상해로 망명,운명할 때까지 12년여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첫째는 당시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면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다는 점이다.혁명가적 열정과 선각자적 혜안을 함께 갖춘 선생은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송교인 진기미 손문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하여 나중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1년 여름 어느날 선생은 손문과 함께 자리를 했다. 『예관선생이 우리 동맹회를 도와주시니 참으로 장한 일이십니다』 『바로 중국혁명운동이 한국독립에 직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양국 사이는 순치(순치)의 관계였습니다만 중국은 우리를 속국시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혁명이념으로 볼 때 과거 우리에게 진 묵은 빚을 청산해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훌륭한 논객이요.애국자이십니다』 선생과 손문의 혁명적 동지애는 변함없이 지속됐다.이 우정을 바탕으로 선생은 손문의 도움을 얻어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적성에 따라 교육시켰다. ○3·1운동을 점화 둘째는 3·1독립운동과 상해임정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선생은 1917년 조소앙 박용만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핀란드 폴란드등 당시 피압박민족의 독립을 열거하며 이는 좋은 징조이므로 우리나라도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조직필요성을 역설했다.또 국내와 일본등에 동지들을 밀파,2·8독립선언에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1운동이 터졌고 상해에서 선생은 프랑스 조계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정부수립을 추진했다.(언론인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오세창은 『3·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고 단언하고 있으며 당시 일경비밀정보도 『…이 소요를 유발시킨 데에는 상해거주 불령선인들의 선동에 크게 힘입었다』고 쓰고 있다) 상해임정도 수립되었고 5월에는 손문등 중국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부수립후 고질적 파벌의식과 지방색·출세욕 등이 뒤엉켜 1921년4월 이후 임정은 혼란에 빠져들었다.선생은 병원에 누워 의정원 회의참석을 거부했다.4월10일 소위 「재미파」이승만이 내각수반이 되었다. 이듬해까지 병석에 누운 선생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동안이나 불식·불언·불약을 고집했다. 이튿날인 1922년9월25일.선생은 마지막 남은 숨을 호흡단절법으로 끊고 이승을 버렸다. 『정부…정부…』 희미한 소리가 숨을 거두는 그의 목에서 새어나왔다.단식 25일만에 처음 나온 말은 선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그 말은 7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도 남아있을 유언이 아닐는지…. ◎독립운동에 외교적으로 크게 공헌/역사적 평가/신승하 고려대교수·동양사 예관 신규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알려져있는 것보다 숨겨져있는 공이 많은 분이다.특히 중국에서 한국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고 또한 중국정부나 중국인들로부터 중국에서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분이다.그런데 불행하게도 1922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분이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때부터 구국자강을 위하여 실업과 교육밖에 없다는 신념아래 학교를 세우고 또한 우리나라에선 제일 먼저 실업전문잡지인 「공업계」를 발간하였다.그러나 나라를 잃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중국혁명당 인사들과 접촉하고 동맹회에 가입하였다.그리고 중국이 잘되어야만 우리나라도 잘될수 있다는 생각아래 그들과 함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이후 중국 혁명당인들과의 교류가 더욱 밀접하게 될 수 있었다. 그는 인재의 양성이 절실하다 보고 우리 젊은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웠으며 또한 중국인의 무관학교는 물론 일반 학교에도 입학을 주선하고 심지어 외국유학까지 보냈다.그리고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고 선전하기 위하여 진단이란 잡지를 상해에서 발간하였다. 1921년에 손문이 광주에서 광동호법정부를 수립하자 한국임시정부 의정원은 그를 전권사절로 파견하였다.그리하여 한국임시정부가 호법정부의 승인을 받고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서 한국학생의 수용을 허가받아 이후 황포군관학교 광동대학 등에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입학되었으며 이들은 독립운동의 기간이 되었다. 따라서 신규식의 평가는 단순한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 한걸음 앞서 독립운동을 위한 또 이를 전개하는 과정가운데 중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과 공헌이 있었음을 높게 사야 할 것이다.
  • 외언내언

    『…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하고 읊는 청마 유치환의 시 「기ㅅ빨」.청마의 깃발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며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기도 하다.◆우리는 청마의 이 시정신을 노상 경험한다.얼마전의 올림픽 때도 그랬다.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태극기가 올라가면 시상대 위의 금메달리스트만 눈물 흘리는 것은 아니었다.텔레비전을 통해 그를 지켜보는 국민들도 「소리없는 아우성」속에 눈시울을 붉혔던 것.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은 그렇게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되어준다.엊그제 서울 명동의 「주한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있은 청천백일만지홍기의 하기식.「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헤아리게 한다.◆1927년 이후 중화민국의 국기로 되어온 청천백일만지홍기.같은 해 국민당의 당기로 된 청천백일기를 오른쪽위 4분의1에다 박아놓고 있다.이 기의 남백홍 3색은 손문의 삼민주의(민족·민권·민생주의)에 유래한다.남지의 하얀 태양은 12개의 3각형 광휘를 뿜는데 그것이 의광.십이지이며 십이궁이고 십이각을 나타낸다고도 한다.◆그동안 우리와 친숙했던 깃발이 이 청천백일만지홍기.국권을 침탈당했을 때도 이 깃발은 우리의 힘이었고 광복후 역시 줄곧 친근한 벗임을 상징하는 깃발로 되어 왔다.따라서 하기식에 화교들이 느끼는 심정 못잖게 한국민으로서도 만감이 교차한다.하지만 지구촌의 새로운 질서가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는것.「망은부의」라면서 너무 타매하지만 말길 바란다.그대신 우의 이어갈 길을 서로 진지하게 찾는게 진취적 자세 아닐지.◆청천백일만지홍기에 갈음하는 기는 오색홍기.큰별은 공산당의 영도를,4개의 작은별은 노동자·농민·지식계급·애국적 자본가를 상징한다.서릿발 같은 역사의 흐름을 다시한번 본다.
  • 독립유공자 1백95명 포상/임정의원 현정건선생등 4명 독립장

    ◎47돌 광복절 맞아 정부는 오는 15일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공을 세운유공자 1백95명에게 건국훈장등 정부포상을 실시한다. 이번 정부포상에서는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돼 독립운동을 한 현정건선생등 4명이 건국훈장 독립장을,중국 만주에서 정의부대표로서 신민부·참의부 등과의 통합을 추진하고 조선독립촉진회의 조직활동을 벌인 이규동선생등 17명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는다. 또 일본 동경 정칙학원 중학교 야간부 재학중 일본의 패망과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시국담을 발표해 징역 3년의 옥고를 치른 강덕재선생(72·생존)등 43명이 건국훈장 애족장을,강재호선생등 1백5명이 대통령표창등을 각각 받는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정부포상을 받은 유공자는 모두 6천84명으로 늘어났다. 이번에 포상을 받게 되는 유공자들 가운데는 상해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선생의 어머니 곽락원여사(39년 작고·건국훈장 애국장)와 조부,부친에 이어 3대째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게 된 임수명선생(건국포장·서울신문 8월13일자 17면 보도),여성으로서 3·1독립만세시위 등에 참가하다 옥고를 치른 최은희여사 등도 포함돼 있다. ◆DB편집자주:명단생략
  • 우리 함께 승리하기 위하여(사설)

    올림픽 영웅들이 돌아왔다.거듭해서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올림픽 승리의 장면 주인공들이다.그중의 어떤 승리도 그것에 합당한 노력이 모자란 것이 없고 그중의 어느 경기도 자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그들의 각고가 응고되어 쌓인 금자탑들이 오늘 우리에게 이토록 화려한 기쁨을 맛보여준 것에 감사하며 다시 한번 그 노고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바르셀로나올림픽은 88서울올림픽에 이은 인류평화의 상징처럼 성공적으로 치러졌다.올림픽을 통한 우리의 공헌이 매우 높다는 것이 이번 바르셀로나로 다시 확인되었다.우리의 역양은 이제 이만큼 단단해진 것이다.우리에게 남은 일은 우리의 이같은 능력을 모두 함께 승리하는 일에 확대해야 한다는 데 있다. 바르셀로나스타디움에 태극기를 올리고 애국가가 울려퍼지게 하여 십여만 관중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기쁨에 취하게한 마라톤을 위시하여,세계가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게 만든 경기내용을 보며 우리가 조심스럽게 실감한 것은 우리의 국운은 아직도 충분할만큼 융성하다는 것이었다.올림픽만이 아니다.이제 방금 우리도 지구 궤도에 위성을 띄웠다.남이 할수 있는 일은 모두 할수 있는 나라가 우리임을 우리 스스로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정치적 민주화를 이루면서 경제성장도 성공시킨 거의 유일한 나라가 우리라는 것은 세계가 이미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동안 침체의 국면을 맞고 있었던 우리의 상황은 극복하기 어려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한때의 비틀거림이었음을 올림픽승리와 과학위성성공은 보여주고 있다.역량도 있고 의지도 시들지 않아 국력과 국운이 다함께 건재한 나라라는 사실을 매우 소중하게 갈무리해야 한다.거기에 민족의 재도약을 위한 명운이 걸려 있다. 기회란 그렇게 여러번 다시 와주지 않는다.한번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우리에게 지금 온 기회는 이제 잃으면 다시는 오지 못할 기회일수도 있음을 각성해야한다.국민적인 합의가 이미 그곳에 모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다.그것 또한 우리를 위한 상서로운 기운의 하나다.어려운 때 각성한 민족의 힘만큼 결정적인 것은 없다.시민의감시가 부정과 퇴폐를 지키고 청소년의 일탈을 예방하는데 모아지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고,그것이 공무원을 비롯한 직장사회에 건전풍조가 되어 번져가고 있어서 다시 일어서자는 각오가 사회전반에 확산중이다. 국내정국의 상황이,이런 현명한 국민 합의의 기운에 다소 미치지 못하고 있는 일이 유감스럽지만 성숙한 국민의 눈을 의식한 각성의 움직임도 일고 있으므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날도 멀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침체 국면에서 좀 심각하던 경제도 거품을 거두고 착실한 재도전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이런 모든 기운을 몰고 오는 일에 올림픽이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에 다시 한번 대견함을 느낀다.이제는 열광에 취하여 샴페인만을 즐기는 일은 삼가자.서울올림픽이 바르셀로나의 영광으로 이어졌듯이 바르셀로나의 영광이 우리의 미래로 결실되기까지 축제의 열기를 식히고,자 이제부터 우리 다시 뛰기 시작하자.
  • 옐친,공직자휴가 취소령/「8월쿠데타」 1주 앞두고

    ◎러시아 보수파 대반격설 【모스크바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실패로 끝난 쿠데타 발발 1주년을 며칠 앞두고 주요 공직자들에게 휴가중단및 예정취소를 전격 지시한 것으로 12일 전해져 주목된다. 모스크바의 서방 외교 소식통들은 옐친이 이와 함께 오는 17일부터 정상 근무체제를 강화토록 지시했다면서 이번 조치가 보수파의 대대적인 공세가 임박했다는 소문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들은 옐친 대통령의 돌연한 휴가취소 지시가 왜 나왔는지에 대해 더이상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성향인 일간 소비에츠카야 로시야는 11일자 논평에서 『순진한 인민이 잠에서 깼다』면서 『우리에게는 이미 불굴의 애국적인 재야 세력이 있다』고 논평했다.또한 이즈베스티야지도 지난주 러시아인의 고통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조만간 개선책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누적된 불만이 폭발할 것』임을 경고하는 등 최근 보수세의 반동조짐이 거듭 우려돼왔다. 한편 루슬란 하스불라로프 러시아최고회의 의장도 옐친의 지시에 호응,휴가중인 대의원 전원에게 17일까지 모스크바로 귀환토록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 리복·나이키의 타협/최재필 명지대교수·건축학(굄돌)

    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농구 결승전에서 있었던 일이다.누구나 예측했던 대로 프로선수들이 등장한 미국팀이 크로아티아팀을 큰 점수차로 누르고 금메달을 획득했다.너무 일방적인 경기여서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그런데 정작 경기가 끝난 후 시상식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미국 프로농구 최고의 스타인 마이클 조던이라는 선수가 동료선수들과는 달리 혼자 성조기를 어깨에 두르고 시상대에 오른 것이다.그가 유달리 애국자여서 그랬을까.아니다.여기에는 속사정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종주국 사람들답게 미국 올림픽위원회는 「리복」이라는 운동용품 업자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았다.물론 그 대가로 메달을 따는 모든 미국선수들이 시상식에서 「리복」이라는 글자가 표시된 운동복을 입기로 소위 독점계약을 했다.그런데 마이클 조던은 벌써 몇해 전부터 많은 돈을 받고 「나이키」업자와 계약을 맺어 항상 「나이키」운동복을 입기로 했던 것이다.그래서 한때 조던은 미국팀이 올리픽에서 금메달을 따더라도 시상식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결과적으로 조던은 「리복」과 「나이키」의 이중계약에 묶인 셈이고 계약은 지켜야 했으니까.조던은 영광의 올림픽 금메달 시상식에 떳떳이 나설 수 없는 매우 불행한 선수가 되는 듯했다. 그런 조던이 시상식에 나타났다.「리복」운동복을 입었으되 어깨에 두른 성조기 덕분에 「리복」글자는 TV화면에 나타나지 않았다.물론 조던의 발에는 「나이키」농구화가 신겨져 있었겠지만 이것 역시 TV에 보이지 않았다.조던을 가운데 두고 「리복」과 「나이키」는 멋진 타협을 이루어 낸 것이다.이렇게해서 이들 삼자와 TV를 통해 조던의 어깨에 걸린 성조기를 지켜보는 미국 국민들까지 모두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었다. 이런 뒷얘기를 AFKN의 미국방송 해설자로부터 들으면서 지방단체장 선거를 놓고 국민을 볼모삼아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타협을 거부하는 우리의 두 「민주투사」들의 생각이 났다.민주주의는 이해가 상충되는 집단간의 타협이 가능할 때 비로소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대전 엑스포 홍보사절 임수지양(맹렬여성)

    ◎4개국어 능통… “박람회 PR 자신감” 『국가적 큰 행사인 대전 EXPO의 홍보사절로 뽑혀 영광입니다.앞으로 작은 힘이나마 우리나라를 알리고 외국관람객을 유치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지난달 27일 열린 EXPO홍보사절 선발 최종심사에서 뽑힌 3명 가운데 특히 외국어에 발군의 실력을 보인 임수지양(22·미국스미드대학4년)은 홍보사절로서의 포부를 다부지게 밝힌다. 오랜 외국생활로 서구적 체취가 물씬 풍기면서도 우아한 한국인의 미까지 겸비한 임양은 우선 태도부터 매우 당당하다. 본선 사회자와의 인터뷰에서는 다른 후보들이 겸손(?)하게 대답한 반면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제가 뽑혀야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해 심사위원을 놀라게 했을 정도다. 홍보사절로 뽑힌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EXPO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연구한 것처럼 자세히 설명한다. 『EXPO가 중요한 행사임에 틀림없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너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아요.그래서 특히 청소년을 비롯한 국민들에데 EXPO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고 앞으로 이 행사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 집중 홍보할 작정입니다. 지난달 22일부터 28일까지의 합숙기간중 대전은 EXPO현장을 둘러봤다는 임양은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지만 규모의 방대함에 감탄했으며 홍보사절요원으로 애국심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솟아나더라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도 이제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만큼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여지고 책임감이 무거워진다며 예의 겸손함을 잊지는 않았다.
  • 개선하는 사람들(사설)

    꿈같은 일이다.저 한맺힌 「일장기 사건」의 손기정 마라톤 이후 실로 56년만에 우리는 마라톤 금메달의 위업을 달성했다.이것으로 열전16일의 막을 내리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끝났다.다른 금메달 열개보다도 값진 마라톤 금메달을 포함하여 금메달을 12개씩이나 목에 걸어,백여개 참가국들 가운데서 열번 안에 드는 나라가 된 우리는 참으로 대단하고 능력이 있다.그것을 확인해준 젊은이들이 고맙고 대견하다.밤을 지새며 성원을 보낸 국민들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힘찼는가.올림픽은 그렇게 온 국민이 함께 치렀다. 이번보다 메달수도 많았고 순위도 훨씬 앞섰던 88서울올림픽을 생각하면 별로 발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는 누가 뭐래도 주최국의 이점이라는 것이 있었다.이번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힘만으로 따낸 성과들이다. 올림픽에 우리는 평소에 잊고 지내던 일들의 소중함을 되새기기도 한다.육상에 승리한 영국의 선수가 「대영제국」이라는 다소 거만한 느낌을 주는 국호에 유니온잭국기를 잔등에 휘감고 트랙을 돌며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그 모습에서 우리는 지극한 아름다움을 보았다.얼굴에 여드름 기운이 가시지 않은 어린 10대가 옛 카타리나지방의 창공에 태극기를 올리고 『우리나라 만세』로 끝나는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감격으로 울먹이는 광경은,온밤을 다 빼앗기고도 피로한 줄 모르게 하는 보상을 우리에게 주었다.어느새 나라가 이만해졌는지 꿈꾸고 있는 것같다. 우리가 가진 메달들에는 각각 그것에마다 극적 요소가 깃들였다.올림픽을 여는 첫 경기에서 서광처럼 빛나는 금메달을 따냈고,처음으로 올림픽종목에 든 배드민턴 단체전에서 남녀를 석권해 버렸다.아직은 솜털이 가시지 않은 어린 숙녀들이 올림픽 2연패의 기록을 새워 세계의 이목을 붙잡아 두기도 하고,정글 속의 맹수들처럼 거세고 체격이 우수한 선수들 틈에서 요정의 신화를 창조하기도 했다.이런 일은 예사로 되는 일이 아니다.피가 나는 노력을 기울이고도 겸허하게 임하는 인간정신의 세련이 따르지 않고는 이뤄지지않는다.그 기량의 축적이 우리의 잠재력으로 발휘될 것이다. 전쟁과 가난과 분단으로 상처입은 나라로만 알아온 한국이 이미 세계사의 주변국을 벗어나 태평양문화권의 중심이 되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세계안에 유감없이 보여준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이만큼 성과있게 치를 수 있었던 것은 메달리스트들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메달에서 탈락하여 일찌감치 풀이 죽어 돌아온 선수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힘이 모아져서 가능한 일이었다.그들의 감투에도 박수를 보낸다. 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아무 흠도 남기지 않고 성공적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다.우승이나 승리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않고 선수들에게 마음으로 중압감만 느끼게 한 운영이라든지 마음이 콩밭에만 가있는 임원들의 무성의 따위가 예년처럼 드러났다.경기장 메너가 시원찮아서 국제사회에서 부끄러움을 맛보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초의 유일한 금메달을 따고 무개차를 동원하여 선수의 개선을 감격해하던 시대에 비하면 지금은 눈부시다고 밖에 할수 없다.이것이 우리의 국제적 위치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오림픽에서 창출된 활력을 되살려 침체된 우리의 오늘을 되살릴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수확이다.이제 그것을 찾을 시기이다.
  • 여자팀 서울올림픽영광 재현하던 날

    ◎“핸드볼 코리아 새 신화… 온국민 열광/세계 정상확정되자 “만세” 환호/역·터미널서도 TV보며 응원/친지와 어울려 밤새워 웃음꽃/“와병 아버지에 큰선물” 눈물도/선수가족들 우리 여자핸드볼선수들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또다시 우승,한국에 열한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8일 저녁 선수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물론 전국에서 TV와 라디오를 통해 승전보를 전해들은 국민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환호성을 올렸다. 이날 여자핸드볼팀의 금메달 획득은 서울올림픽에 이어 구기단체종목으로는 첫 올림픽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것으로 우리팀이 그야말로 세계 최강임을 웅변해주는 것이어서 국민들을 더욱 흐뭇하게 했다. 특히 선수단의 가족들은 갖가지 어려움을 딛고 세계정상에 우뚝 올라선 선수들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벅찬 감격에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 여자 핸드볼이 올림픽 2연패의 신화을 이룩한 8일 하오 광주·전남전역에서도 일제히 환호성. 특히 여자 핸드볼 팀에는 이 지역 출신 선수들이 많이 포함돼 있어 이지역민들이 여자 핸드볼에 걸었던 기대가 더욱 컸다. 선수들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이지역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날 TV앞에 앉아 우리선수들이 탁월한 기량으로 초반부터 좋은 경기를 펼치자 모두가 한마음이 돼 우리선수들을 응원하다 기어코 금메달을 따내자 손뼉을 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갑숙선수집◁ ○…『부산시 해운대구 우2동 1063의13 여자 핸드볼 주장 박갑숙선수의 집에서 TV를 통해 선전을 지켜보던 아버지 박정환씨(45)와 어머니유월임씨(38)등 가족과 이웃 50여명은 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의 함성을 올렸다. 어머니 유씨는 지난 7일 독일과의 경기에서 박선수가 부딪쳐 쓰러질땐 심한 부상으로 더 이상 뛰지 못하지나 않을까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고. 아버지 박씨는 『갑숙이가 주장을 맡아 선전하는 것을 보니 대견하다』면서 『이 영광은 모든 선수들의 일치된 전력의 결과』라고 촌평. 특히 어머니 유씨는 박선수가 바르셀로나로 떠나기 앞서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 『선배 언니들의 88위업을 계승하겠다고 말해 믿음직스러웠다』고 말했다. ▷장리라선수집◁ ○…88년 서울의 영광을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연출한 한국여자 핸드볼팀의 철벽 수문장 장리라(23·조폐공사) 선수의 집인 광주시 북구 신안동 343에는 아버지 장백렬(57),어머니 박공순씨(52)와 가족,친지등 10여명이 TV를 지켜보며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리라만세』를 연호. 아버지 장씨는 『막내인 리라가 집안에서 곧잘 어리광을 부렸으나 경기내내 침착해 대견스럽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어머니 박씨는 『리라의 건강을 위해 매일 새벽기도를 했다』고 말했다. ▷남은영선수집◁ ○…우리나라 여자 핸드볼팀이 난적 노르웨이를 꺾고 우승하는 순간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남은영선수(22·초당약품)의 할아버지 남정호씨(75·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장암주공아파트 101동1202호)의 두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금메달 획득 소식과 함께 남선수의 집으로 몰려온 주민들도 남선수의 인간승리에 환호를 보냈다. ▷이미영선수집◁ ○…8일 하오 한국여자핸드볼팀이 노르웨이를 누르고 구기종목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2연패의 신화를 창조하면서 금메달을 확정짓는 순간 전북 이리시 월성동 536 세계 최고의 사이드 공격수인 이미영선수(22·광주시청)의 집에서는 TV를 지켜보던 가족들과 이웃 친지등 20여명이 일제히 『와!』하는 탄성을 울리며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날 가족들과 함께 TV를 지켜보던 이웃 주민들은 태극기가 올라가면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대한민국만세!장하다.대한의 딸 미영이 만세!』를 외치며 즉석에서 돈을 모아 수박과 음료수등을 사 놓고 올림픽이야기로 밤을 지새면서 잔치집분위기를 연출. ▷오성옥선수집◁ ○…『성옥아 장하다.드디어 해냈구나』 올림픽 핸드볼 여자 결승에서 한국이 노르웨이를 누르고 올림픽 핸드볼 2연패의 쾌거를 이룩하는 순간 우리나라의 주공격수인 청주시 북문로2가 오성옥선수(21)의 집은 기쁨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이날 오선수의 집에는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오선수의 아버지 재균씨(53.여관업) 등 가족들과 이웃 주민 20여명이 시종 애타는모습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다 한국의 승리가 확정되자 일제히 『성옥이 만세』를 부르며 감격해 했다. 어머니 이재순씨(54)는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 금메달을 따내 딸이 한없이자랑스럽다』며 『성옥이가 목에 건 금메달은 지난해 8월 중풍으로 쓰러진뒤 현재까지 말을 더듬는 등 고생을 하는 남편에게 크나 큰 선물이 될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 배드민턴 남녀복식­여양궁단체 세계정상 서던날

    ◎눈부신 금빛드라마… 온 국민 열광/땀쥔 시소게임… 가슴조인 성원/TV앞서 “파이팅” 목메인 합창 참으로 기분좋은 한 밤이었다. 황금의 화요일.이역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우리 선수들의 메달획득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전국은 온통 승리의 환호로 뒤덮혔다. 바르셀로나의 하늘에 태극기가 잇따라 게양될때는 모든 국민들이 하나같이 우리 선수들의 선전에 아낌없는 박수와 갈채를 보냈고 애국가를 목청높여 합창하기도 했다. 특히 양국여자 단체전과 배드민턴 여자복식경기가 아슬아슬하게 진행 될때는 TV화면을 향해 손에 땀을 쥐면서도 「파이팅」을 외쳐대기도 했다. ○…금메달이 무더기로 쏟아질 것이라는 「슈퍼화요일」인 이날 하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서둘러 귀가한 탓인지 서울시내는 한산한 모습. 도심의 주요 도로는 평소보다 차량의 통행이 뜸한 것은 물론 무교동·역삼동등 유흥가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기자 종업원들은 TV시청에 열중. ○…서울의 강남 목동 상계동등 대단위 아파트단지에는 밤 늦도록 불이 환하게 커져 있어 온통 금메달열기에 휩싸인 모습. 아파트 곳곳에서는 우리선수들이 금메달을 딸때마다 환호성이 터져나오기도. ○휴대용TV 한몫 ○…이날 한강시민공원에서는 휴대용TV를 들고 나온 시민이 곳곳에서 눈에 띄어 금메달 열기를 실감. ○…슈퍼 화요일을 맞아 전국이 올림픽 열기가 가득한 가운데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서도 승객들이 출·입국의 설레임을 누르고 연이어 터지는 메달소식에 공항청사 TV 앞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환호성. 이날 출장차 하오7시30분발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방콕으로 가려던 김종천씨(34·회사원)는 하오 6시30분쯤 마지막 탑승 수속을 재촉하는 두번째 안내 방송이 잇따라 나옴에도 불구하고 TV에서 우리나라 신궁 3총사가 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장면이 나오자 출국 수속도 미룬채 이를 지켜보느라 뒤늦게 출국. 한편 이날 하오9시쯤 유나이티드 항공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귀국한 김주승씨(49·사업)부부는 마침 청사 TV에서 황혜영·정소영선수가 배드민턴 여자복식에서 금메달에 도전하는 장면이 방영되자 귀가도 잊은채열띤 응원을 벌이기도. ○초저녁 거리한산 ○…여자 양궁단체전을 시작으로 바르셀로나 각종 경기장에서 금메달이 쏟아지자 대전의 최고 번화가인 중앙로를 비롯 은행동·대전극장골목등 상점밀집지역에서는 우리 선수들의 경기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문을 닫고 일찍 귀가하는등 중심거리마다 한산한 모습이 역력. 또 본격적인 피서철을 맞아 대전역과 고속버스터미널등지에 모여든 여행객들도 대합실에 마련된 TV를 지켜보며 우리 선수들이 선전할때마다 힘찬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지르는등 축제분위기를 연출. ○…피서객이 많이 몰려있는 강릉경포대 해수욕장에서도 양궁여자단체전에서 우리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순간 피서객들의 환호소리가 파도소리를 압도하는 듯했다. 이날 하오4시쯤부터 경포대 백사장 관리본부와 여름경찰서에 설치된 TV 앞에는 1백여명씩의 피서객이 모여 화살이 한발한발 과녁을 명중할때마다 파이팅을 외쳤고 마지막 화살이 시위를 떠나 금메달을 따낼때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피서지·터미널에선 즉석 축하파티 열고 ○…서울역·청량리역등 주요 역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등에는 휴가를 맞은 시민들이 열차·고속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대합실에 마련된 TV 앞에서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의 한국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손에 땀을 쥐는 모습.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은 물론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도 밤늦게까지 TV를 지켜보며 배드민턴·탁구·양궁등 결승전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이 선전할 때마다 박수와 환호성을 지르는등 들뜬 분위기. ○…태풍 어빙호가 북상해옴에 따라 입욕금지조치가 내려진 부산해운대해수욕장에는 텅빈 백사장과는 대조적으로 인근 호텔,여관등에는 이날 밤늦게까지 방마다 불이 켜진채 우리 선수들이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때마다 환호성 소리가 메아리. ○…제9호 태풍 「어빙」의 영향으로 4일하오 1시부터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제주지방 피서객과 관광객들은 일찍부터 귀가를 서둘러 호텔이나 여관방 등지에서 TV를 보며 한국의 금메달 레이스가 펼쳐진 슈퍼 화요일의 기쁨을 만끽했다. 숙박업소 밀집지역인 신제주의 경우 여자 양궁 단체전을 시작으로 시시각각 금메달의 행진이 계속될때마다 『코리아 만세』『또 이겼다』는 함성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져나왔고 일부 술집등 유흥업소들은 손님이 없자 아예 일찍부터 문을 닫는 모습이 보였다. 휴가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서울서 피서왔다는 오명철씨(40·회사원)는 해수욕대신 『한국의 연속 우승장면을 즐긴 피서야말로 금메달감 피서』라며 좋아했다.
  • 잇단 승전보… 메달 가족들 감격의 밤샘

    ◎“기어이 해냈구나” 눈물의 만세/“우리동네 최고의 날” 한바탕 잔치/줄잇는 축하전화에 즐거운 표정 ○인근 절서 밤새 불공 ○…양궁의 이은경선수(20·고려대 1년)가 예상했던 것처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내자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49의5 경남연립 207호 이선수의 집은 빽빽히 들어선 이웃사람들과 친지들의 함성으로 온통 잔치 분위기. 아버지 이원일씨(53·토건업)와 할머니 박봉순씨(73)는 『은경이가 큰 일을 해냈다』고 기뻐했으며 지난달 23일부터 대구 팔공산 암자에 내려가 불공을 드리다 이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 김경애씨(50)는 곳곳에서 걸려온 축하전화를 받느라 바쁜 모습. ○가족들 애국가 합창 ○…여자양궁단체전 올림픽 2연패의 주역인 김수녕선수의 고향집이 있는 충북 청주시 운천동은 온통 축하 분위기속에 술렁. 『금덩어리 딸을 둬 얼마나 좋으나』는 이웃 아주머니의 말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박장대소하기도. ○…여자양궁 개인전에 이어 4일 단체전에서도 금과녁을 쏘아 2관왕에 오른 서울 도봉구 미아7동 852 산중턱 조윤정선수의 집에서는 또 다시 축제분위기. 이날 하오6시쯤 조선수의 두칸짜리 전셋방에는 작은아버지 조명호씨(40)부부와 외삼촌 박순재씨(58)등 가족·친지 20여명과 이웃주민들이 빼곡이 모여앉아 활시위를 떠나는 화살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손에 땀을 쥐었고 시상식때에는 약속이나 한듯 애국가를 합창. ○밤늦도록 얘기꽃 ○…배드민턴여자복식결승전에서 금맥을 캐내는 순간 충북 청주시 서문동69의2 황혜영선수(26·대전 동구청)의 집에서는 한자리에 모인 가족·친지들이 모두 『혜영이 만세』를 외쳐대며 환호. 매일 새벽 인근 절에서 딸의 승리를 위해 불공을 드려왔다는 황선수의 어머니 임봉녀씨(50)는 두손에 들고 있던 염주에 더욱 힘을 주고는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잊은채 자신을 둘러싼 이웃주민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감격스러워하는 모습. 아버지 황보현씨(54)는 『이번에 처음 올림픽 종목에 포함된 베드민턴 단체전에서 원년 참피언이 됐으니 앞으로 다른 선수들도 모두 운동에 열심히임해 우리나라가 배드민턴 강국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선수집에는 동네주민 30여명이 미리 준비한 음료수와 수박·참외등으로 즉석 잔치를 벌이며 밤늦도록 황선수에 대한 얘기꽃을 피웠다. ○얼싸안고 만세… 만세 ○…이번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배드민턴 여자복식부문 결승전에서 정소영·황혜영조가 중국의 관웨이첸·농춘화조를 누르고 「금」이 확정되는 순간 전북 김제시 신풍동 정선수(26·호남식품소속)의 고향집에서는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 마침 TV방송 출연문제로 정선수의 부모인 정인수(55·회사원)·김은순씨(51)부부가 모두 상경해 이 시간 정선수의 고향집은 오빠 정철씨(30·건축업)와 올케 배은숙씨(30)부부가 동네 주민 20명과 숨을 죽여가며 TV중계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가 정선수조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서로 얼싸안으며 『정소영만세』를 외쳤다. ○“역시 박주봉” 탄성 ○…『역시 박주봉이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배드민턴남자 복식부문의 금메달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던 박주봉(28·한국체대조교)김문수(29·부산진구청)조가 절묘한 강스매싱으로 경기를 마무리짓자 전주시 완산구 인후1동 현대아파트 101동 501호 박선수집에 모여있던 가족및 친지들은 기쁨의 환호성. 전주풍남국교에 재직할때인 지난 70년 학교배드민턴부는 창단하고 박선수를 직접 지도했던 아버지 박명수씨(60·임실서국교교장)는 『주봉이의 최대 라이벌인 중국의 리용보·티안빙이조가 준결승에서 탈락해 금메달을 목에 걸 것으로 확신했다』면서 『주봉이에게 배드민턴을 가르친 보람을 느낀다』며 기뻐하는 모습. 박씨는 그러나 『언론매체에서 미리부터 주봉이의 금메달은 확실하다는 식으로 보도를 해 크게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가족·친지 덩실덩실 ○…배드민턴 남자복식 김문수(29)­박주봉(28)조의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부산시 북구 덕천2동 323의12 김선수의 집에선 TV를 지켜보던 아버지 김금석(51)어머니 이봉순씨(51)등 가족과 친지들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췄다. 매일 새벽 인근 절에서 아들의 선전을 기원해왔다는 어머니 이씨는『다른세계대회를 석권하고 귀국한 아들을 마중나가보면 협회관계자 몇명만 나와 썰렁했던 분위기가 무척 서운했는데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응달의 챔피언」이란 서러움을 씻게 됐다』며 눈물을 글썽. 배드민턴 전 국가대표를 지낸 김선수의 부인 유상희씨(29)는 이날 아들 경원군(4)과 함께 TV방송관계로 상경,집에 없었다.
  • 외언내언

    금메달이 확정될 때 우리 선수들은 대체로 운다.시상식에서 애국가를 들으면서도.요즘 선수들은 옛날 선수들에 비해 덜하는 편이라고는 한다.그래도 외국선수들의 웃는 모습과는 대조가 된다.◆『행복이 더할 나위 없이 클 때는 미소와 함께 눈물이 난다』고 스탕달은 말한다.금메달 그것을 위해 피말리고 살깎는 생활을 해온 선수들이고 보면 금메달 확정은 「행복이 더할 나위 없이 클 때」.평탄치 않았던 지난 세월이 한꺼번에 오버랩되면서 기쁨의 눈물은 복받친다고 하겠다.해냈다는 기쁨이다.농축된 감정의 폭발이다.◆이젠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 선수들 가운데는 어려운 환경의 경우가 많다.지금까지의 이번 올림픽메달리스트들만 봐도 그렇다.농촌이 고향이거나 홀어머니 아래살고 있는 경우들.운전기사를 아버지로 둔 경우도 그렇게 유족한 생활일 수는 없다.조윤정궁사의 경우는 달동네의 두칸짜리 전세방살이.노동하는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머니는 파출부로 가계를 꾸려왔다.금메달 확정의 순간 그 달동네방이 떠올랐을 것.그래서의 눈물 아니었을까.◆66년레슬링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 장창선선수의 콩나물 장수 어머니 말은 온 국민을 울렸다.『콩나물밖에 못먹였는데…』.그후로도 신문·방송은 기계적으로 메달리스트 집을 찾는다.싶으면서도 이런저런 얘기에는 눈시울을 붉힌다.절에 가서 십자가 앞에서 「효자·효녀」의 메달 따기를 빈 부정·모정.자신이 어려운 삶을 살아온 사람일수록 이같은 남의 일을 들으면서 더 코끝을 시큰거린다.국란많았던 겨레의 심성인지도 모르겠지만.◆사실은 감정의 절제도 배워야 할 대목.눈물은 또 그렇다 치자.지나간 올림픽 때는 승리확정 순간 매트 위를 펄쩍펄쩍 뛰며 갈고다닌 선수도 있었다.승패 선언도 있기전에 감독·코치가 매트위로 뛰어올라 흥분하는 꼴 또한 보기좋은 건 아니고.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일선생

    ◎독립군 양성… 청산리전투 대승 이끌어/31세에 만주로 망명… 한인자녀들 가르쳐/항일투쟁단체 규합,대한군정서 총재로/「김좌진전투부대」의 최고지도자… 흑하사변으로 동지 잃자 자결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포 서일선생이 선정됐다.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서일선생은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청산리전투의 실질적 주도자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교육자·종교인·언론이기도한 선생은 1921년 소위 흑하사변으로 동지들을 잃자 자결로 민족에 사죄했다.정부는 지난 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백포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서일선생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제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젊은 혁명가,그 힘은 강고한 정신력과 무장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생각한 지휘관이 서일선생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교단에서 백묵가루를 마시던 약골의 선비 서일을 무장독립운동가로 변신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는 41세의 짧은 생애 강운데 나중 10년을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그 마지막 10년동안 흘린 피와 땀과 사자후가 희미하게 역사에 남아 있다. 혁명가 서일선생에 대한 흔치않은 증언과 색깔 바랜 기록들이 아쉽긴 하지만 그의 이름은 청산리전투와 함께 우리 역사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고향과 가족을 등진채 산악과 벌판에서 풍손로숙한 이름 모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저승에서도 서일선생을 떠받들고 있을 것이다. 선생은 1881년(고종18년)2월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호는 백포. ○월북 경원서 출생 처음 이름은 기학이라 했지만 나중에 일로 바꿨다(대종교·보훈처 기록).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나중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보아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와 기를 살리는데 앞장섰으리라생각될 뿐이다. 그러나 그의 20대는 날이 갈수록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어갔다.혈기왕성했던 스물다섯에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에는 망국의 경술국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와 망명지 만주등에는 사립학교 설립이 급증했다.이는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역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그러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망명후 선생이 교육에 정신(대종교)과 힘(무장투쟁)을 융합시킨 사실이 그 증거이다. 31세때(1911년)선생은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통분해하며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동만주 왕청현으로 떠났다.만주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 10년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승점이 설립한 대종교계통의 명동학교(왕청 덕원리소재)에서 물밀듯 이주해오는 한인자녀들을 가르치며 조국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붙여 주었다(이 명동학교를 서일선생이 설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듬해 10월 선생은 대종교에 귀의한다.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된다.선생이 단순한 무장독립운동가가 아닌 교육자·종교인·언론인으로도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만강을 넘어 망명해오는 열혈청년들이 줄을 이을 때 서일선생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과 규합,중광단을 조직했다.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계승에도 몰두했다. ○대종교에 귀의 그는 대종교 입교후 포교에도 나서 3년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만의 교우를 얻어 「도력이 큰 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서일선생은 교우들중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교우에게는 군량 조달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고한 정신무장을 위해 한배검에 귀의케한 탓으로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는데 신도 1만5천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성기금으로 1인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음이 틀림없다.이 사이 선생은 「오대종지강연」「도해」「신화강의」「진이도설」「삼문일답」「회삼경」등 경전도 저술했다. 당시 선생은 중광단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문제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이에 선생은 수많은 독립군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와함께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신국보」등 신문을 발간,『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이듬해 1919년7월부터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1920년10월까지 선생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대한군정부→북로군정서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정규병력 1천5백여명을 청산리전투주역인 사관으로 양성하고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상당히 겁을 먹고 주목했는데,그들은 「북간도지방의 항일단체 상황」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제정규군 3천3백여명이 사살 당하는 청산리전투를 짐승처럼 예감하고 있었다. ○일군 3천명 사살 『…군정서는 서대파구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그들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총재는 서일,부총재 현천묵,사령관 김좌진,부사령관 김성,참모장 나중소등이다.…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 동원소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산리전투후 여러개의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영 밀산으로 이동한다.여기에서 북로군정서(서일)·대한독립단(홍범도)등 10개 부대는 전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선생이 총재로 추대되었다.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소련영토 안에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일공사 요시자와의 위협에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소위 「흑하사변」이라는 참변이 발발해 독립군은 힘을 잃었다.여기에 토비들의 습격까지 겹쳤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28일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대종교의 폐기법으로 자결순국했다.41세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차리라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역사적 평가/독립운동가·교육가로 큰 발자취/신재홍 국사편편찬위 부장 백포 서일선생은 그가 민족운동사에서 차지 하고 있는 위상에 비하여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일찍이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몸소 이를 실천한 교육자이며 또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한 대종교의 간부일뿐아니라 만주에서 일제와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군 지도자였다. 그의 학력은 함북 경성군에 위치한 성일학교 사범과를 나온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민족혼을 살리는 길은 교육에 있음을 인식하여 향리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1910년 일제가 주권을 강탈하자 북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 명동 동일 학성 동신 동화 양성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인재 양성에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강인한 민족혼의 배양에 있다고 확신하였고 이를 위하여는 국조단군을 숭상하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깨우치는데 있다 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귀의 하였다.대종교의 포교가 바로 민주운동이요 독립운동임을 믿어 교리연구과 포교에도 힘써 많은 저술을 남긴 민족종교의 지도자였다. 선생의 활동에서 특기할 것은 무엇보다 무장항일운동에 있었다.선생은 일제를 우리 국토에서 구축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로지 일제와의 혈전에 있다하여 무장항일운동 단체인 중광단 대한정의단을 조직,활동하였고 1919년에는 여러 무장단체를규합하여 북로군정서를 설립하였다.이 단체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대종교 신자가 중심이 된 단체로서 재만 독립군중 최강의 부대였다.따라서 1920년 이 부대가 이룩한 청산리전투의 위업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 지지 않았음을 인식하여야 한다.이것은 선생이 배양한 투철한 민족혼과 강인한 항일의식이 그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민족교육가이며 민족종교가로서 또한 무장항일운동의 지도자로 선생이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수가 있다.
  • 안중근의사 흉상 66년만에 환향(단신 패트롤)

    ◎상해 임정서 제작… 소장 중국인 매입 ◇상해임시정부가 제작한 안중근의사 대리석 흉상 1점이 한 민간인 문화재 수집가에 의해 6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오성환씨(65·청로유적사적발굴연구회 부회장·청주시 사직2동7가 최근 독립국가연합의 하바로프스크에 거주하는 한 중국인 소장가로부터 사들여온 이 흉상은 상해임시정부가 지난 1926년 12월 안의사를 가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이 흉상은 좌대를 포함해 높이 20㎝,폭 15㎝,두께 8㎝,무게 4㎏의 소형으로 좌대 상단에 「민족영렬 안중근」,중간부분에 「상해대한임시정부 국무령 김구 등 조」,하단엔 「천추만세」라고 각각 새겨져 이 흉상이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의사의 거사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제작됐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오씨는 지난달 초에도 하바로프스크의 중국인 소장가로부터 역시 안의사가 옥중에서 쓴 「제일강산」 휘호가 양각된 대리석 현판을 들여와 관심을 끌었었다. 오씨는 지금까지 들여온 현판과 흉상 외에 안의사등 애국열사 6명이 쓴 혈서를 새긴 반일결사대기념비,조선광복군 성립대회 기념비등 상해임시정부에 의해 제작된 독립운동 관련 유물 2점을 자신이 접촉한 하바로프스크의 중국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 “불임수술 받고 전선에 끌려 갔다”/생존자들의 생생한 체험 증언

    ◎상대 거부·우리말 쓰면 마구 매질/안끌려가려 목맨 처녀들 수두룩/자매 한곳서 같이 위안부생활도 ▷사례1◁ 1938년 8월 위경의 놋그릇 상납요구및 창씨개명 반대이유로 가족이 경찰서로 연행됐는데 이장의 권유로 애국봉사대에 지원하면 아버지가 석방될 수 있다기에 스스로 지원했으나 그길로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위안장소(자카르타)로 연행돼가는 도중 광동에서 불임수술을 받았다.1946년 3월경 미군의 도움으로 자카르타에서 배를 타고 귀환했다. ▷사례2◁ 1943년 1월 혼자 집을 보던중 낯모르는 신체건강한 남자 2명이 찾아와 볼 일이 있으니 무조건 나오라며 강제로 끌고가 최초로 하차한 곳이 만주 하얼빈이며 그곳에서 이동해 용관현에서 계속 생활했다.도착 첫날부터 방 1칸(약 2평)당 여자 1명씩 배치돼 하루 평균 20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하며,평소 한국말을 하거나 남자받기를 거부하면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주일마다 성병검사를 실시해 감염자는 완치때까지 치료해 치료후 다시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사례3◁ 동네어귀에서 언니와 쑥을 뜯던 중 일본경찰이 강제로 차에 태워서 끌려갔으며 경찰이 군인들의 숙식및 뒷바라지 일을 하는 곳으로 간다며 기차로 부산까지 데려갔다.히로시마(광도)근처 군부대에서 하루 일본군 10∼15명 정도를 상대로 위안부생활을 했으며 언니와도 잠깐 같이 위안부생활을 하기도 했다(연행연도 미상). ▷사례4◁ 1942년 11월 16살때 만주 봉천 기차여행중 옆자리의 군인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갔다.군병영내 막사에 중국여자들을 포함해 약 20명이 수용돼 위안부생활을 했다. ▷사례5◁ 1942년 3월 처녀공출이란 명목으로 영장을 받고 일본순사한테 강제로 연행돼 끌려갔다.여러 명을 창고에 가둬놓고 1명씩 불러내 조그만 방으로 데리고 가서 말 안들으면 죽여버리겠다며 하루 3회정도 성폭행을 했다. ▷사례6◁ 1938년 4월 산에서 동생과 나물을 캐던중 일본군 2명과 한국사람 1명에 의해 강제연행됐으며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끌려갔다.오사카에 내려서 3일쯤 머무른뒤 홋카이도(북해도)로 끌려가 그곳에서 1년간 살았으며 그후 다시 오사카에서 살았다.일본 수용생활중 심한 구타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정신분열증세가 심해 일본군인들이 산에 내다버린 기억이 있다. ▷사례7◁ 1944년 9월 방직공장에서 야간조업중 무장한 일본군인 15명 정도가 들어와 『여러분은 앞으로 일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미리 눈치챈 사람들은 도망가고 나머지 49명만 연행됐다.요코하마(횡빈)과 히로시마에서 군부대 위안부로 10여년간 있었으며 1개소대 50명으로 편성된 10개소대 5백여명이 함께 생활했다. ▷사례8◁ 1941년 2월경 일본인 여자 1명과 한국인 남자 1명이 부산에 있는 공장에 취직을 권유해 나를 포함해 약 50명정도의 여자가 그곳에 갔다가 일본군에 강제징발돼 현지주둔 일본군부대에 체류했다.일본군부대에서 매일 12∼15명의 일본군을 상대(계급별 출입시간과 요금에 차등)하는 위안부생활을 한뒤 군부대 이동에 따라 싱가포르에 이송된후 중국 목단강과 빈강성·남경·도문·만주등 부대에 배속돼 일본에서와 같은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했으며 일체의 영외출입이 금지됐다.현지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반이상 사망하기도 했다. ▷사례9◁ 1942년 3월 약 14살때 부산에서 식모살이 하던중 놀러나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임시구금소(민간인 가옥)에 약 10일정도 구금된후 기차로 부산에서 만주 간도성까지 가 군부대밖에 있는 위안소(군인만 상대)에 넘겨져 해방될 때까지 생활했다.위안소에 약 20여명의 위안부가 있었으며 하루 15∼20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다. ▷사례10◁ 1938년 12월 군인 20여명이 총검을 들고 집에 난입,강제로 군용 트럭에 싣고가 영산포소재 창고에 있는 15명의 여자와 나주에서 온 15명의 여자들과 함께 열차로 신의주,만주를 거쳐 천진주둔 일본군 히노마루부대로 끌고갔다.15명씩 한 조를 이뤄 임시로 지은 여러개의 가건물에 수용됐다.가건물속에서는 가마니로 칸(간)을 만들어 한사람씩 넣는 치욕적인 생활과 고통을 참다못해 목을 매거나 도망치다 총에 맞아 죽는 여자들도 있었다.
  • 국회는 이래도 되는건가(사설)

    국회는 이래도 되는건가.14대 개원국회가 산적한 현안에 대한 심의는 물론 상임위조차 구성못한채 30일간의 회기를 허송하고 자동폐회한데 대해 국민들은 지극히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 정치인들이 국민을 중시하고 두려워하는 최소한의 양식만 가졌더라도 30일 회기중 의장단 선거를 제외하고는 단 한 차례의 회의도 열지않은 이 엄청난 직무유기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국회를 볼모로 잡아서 정략에 이용하는 시대착오적인 이 반국민적 작태를 국민들은 결코 잊지않고 오는 12월 대선에서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으로 우리는 확신한다. 세간엔 양비론,즉 여야간의 아집과 독선,그리고 대선을 의식한 양금씨의 힘겨루기와 기세싸움이 국회의 장기공전을 초래했다는 비판의 소리가 적지 않다.그러나 이번 국회공전의 원인이 된 단체장선거연기문제의 경과를 되돌아보면 비판을 받아야할 장본인이 과연 누구인지는 쉽게 판별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주지하다시피,노태우대통령이 금년6월 실시토록 돼있던 단체장선거를 연기할 것과 이의 처리를 14대국회가결정토록 요청한 것은 지난1월 연두회견에서였다.우리 경제현실에 비추어 한해에 선거를 4차례나 치른다는 것은 무리라는 이유를 내세운 노대통령의 단체장선거 연기주장은 설득력이 있었고,그래서 처음부터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야당은 정부와 여당이 6월단체장선거를 실시하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그런 상황은 야당의 정략에 의해 조성된 것이었다.정부는 법을 존중하겠다고 단체장선거연기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야당이 등원거부로 법안심의를 원천봉쇄했다면 위법의 책임이 어느쪽에 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최근 보도들은,단체장선거의 연내실시가 보장되지 않는한 등원거부를 계속하겠다던 김대중민주당대표의 자세변화를 전하고 있다.늦은감이 없지 않으나 반가운 일이다. 김대표는 『민자당측이 8월임시국회를 3당 합의없이 일방적으로 소집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김영삼민자당대표와 만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김대표의 이 발언은 종전입장,즉 『민자당의 단체장선거연기 방침에 변화가 없는한 대표회담에 응하지 않겠다』에서 크게 후퇴해 사실상 단체장선거시기와 국회정상화의 연계고리를 풀겠다는 입장을 시사한 것으로 우리는 주목하고자 한다.정국교착을 타개하기 위해선 이제 두 김씨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두 김씨는 아무 전제조건 없이 만나서 격의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고 국회운영을 정상화시켜야 한다.그렇게함으로써 두 김씨는 집권당과 제1야당의 대통령후보로서의 책임과 역량을 국민앞에 보여줄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지금 민주당은 민자·민주양당대표회담과 8월임시국회소집에 응하더라도 『연내단체장선거 관철』이라는 당론을 고수하고 있고,또한 민자당은 「연내 불가」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두 김씨가 만나더라도 정국 타개책이 마련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두 김씨가 국리민복을 중시하는 애국심과 작은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대선이후의 정국까지 내다보는 긴 안목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의외로 빠른 해답이 나올수도 있다고 우리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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