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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미국인 스티븐슨 저격/전명운의사 유해 봉환

    【로스앤젤레스=홍윤기특파원】 지난 1908년 발생한 친일파 미국 정치인 스티븐슨 저격사건의 주인공으로 애국지사 1호인 전명운의사(1884∼1947)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만에 LA의 묘소를 떠나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12일 LA총영사관에 따르면 정부가 95년 광복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추진중인 해외독립유공자 유해봉환사업에 따라 총영사관이 유족들과 협의,전의사의 유해송환계획을 이미 통보했으며 정부의 이장시기결정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전의사는 『일본의 한국통치는 한국국민들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라는 망언을 한 당시의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슨을 1908년3월23일 샌프란시스코의 페리정거장에서 저격했으나 불발로 그치고 뒤이어 장인환의사가 스티븐슨을 저격했다. 전의사는 97일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뒤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살다 1929년 LA로 이주,1947년 63세를 일기로 숨졌으며 이스트LA 갈보리 천주교묘원에 안장돼왔다.
  • 서울 천도교 대교당(한국의 종교성지:6)

    ◎1921년 완공… 민족문화의 산실 역할 천도교 제3세교조 의암 손병희선생이 포덕59년(1918년)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윤치오 소유 대지 1천8백24평을 매입,그해 현도기념일인 12월1일 기공하여 3년만인 1921년 2월에 완공하였다. 총공사비 30만원은 전국 교인에게서 10원이상씩을 거출하여 충당하였다.그러나 공사 중간에 3·1독립운동이 발발,그때까지 모아진 성금은 거사 자금으로 전용됐고 재차 모금을 시도하는등 파란을 겪은끝에 완공되었다.건평 2백12평에 4층 바로크풍으로 총2백80평 규모.일제는 성금모금을 중단시키고 받은것은 돌려주라는등 압력을 가했으나 교인들이 그 돈을 돌려받은듯 가짜영수증을 써보내 위기를 모면했다. 천도교대교당은 20년대 서울3대건물(명동성당·중앙청)의 하나로 순수한 민족의 힘으로 지은 가장 큰 건물.일제때는 각기념식마다 많은 교인들이 참석,인산인해를 이뤘으며 해방후에는 해외망명 애국지사들의 강연회 장소로 민족문화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또 의암성사 딸과 결혼한 소파 방정환선생이 어린이 운동을 이곳에서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 임정­우리의 첫 문민정부(일요일 아침에)

    1919년 4월13일 중국 상해 프랑스조계 내에서 정식으로 수립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5)는 전통적인 군주제를 청산하고 민주공화제를 채택,민간인이 대통령이된 최초의 문민정부였다.그것은 3·1혁명(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난지 45일만의 일로서 민족 최대의 경사요 쾌거로 기록될 일이다.임정은 27년간 중국대륙을 누비면서 하루도 그 간판을 내리지 않고 비록 일제에 의한 단절의 역사를 강요받았으나 계속성의 민족사로 전환,5천년의 정통성을 잇는 임무를 확실히 수행하였다. 국내에서의 3·1혁명은 곧 해외및 국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의욕에 넘친 민족지사를 활동하기 편리한 교통의 요지요,국제도시로서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중국 상해로 집결케 하였다.이동령·신규식·이시영·조소앙·김구·노백린·박은식·여운형·조용구·조동우·이유필·안창호·김인전·신익희·박찬익·최창식·윤현진·김규식·남형우등 20대로부터 50대까지 40여명이 이곳에 와서 정통민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마침내 역사적인 3권분립형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김신부로22호(현 서금2로)에서 수립,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전통 민간정부 표방 임시의정원의장 이동령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했고 연호를 「민국」으로 했다.1919년을 민국1연으로 호칭해서 단기와 병기,공식문서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이들은 임시정부청사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회의때 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며 환희의 눈물 속에서 조국을 향해 묵도를 올리곤 했다. 이틀에 세끼를 때울 때가 한두번이 아닌 이들의 모습은 초췌하기 이를데 없었다.중국인이 먹다버린 배추를 다시 집어다가 씻어서 허기를 채우면서도 정통정부의 각원(장관)으로서의 품위와 질서를 유지하는등 근엄성과 애국열의를 잃지 않았다. 이들은 내정교통·외교군사·교육문화·재정사법 등에 걸친 민간정통 정부로서의 광복정책을 펴나가면서 대표성과 대본영으로서의 통제적 사명을 가슴깊이 자긍심으로 여기고 세계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중국·프랑스·폴란드·소련의 승인을 받으면서 상해로부터 중경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자존심은 드높았고 선비로서의 지조나 기품을 의연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27년간 율사를 동원,5번의 개헌과정을 통해서 지도원리를 광복정책에 맞게 적응시키느라 의회에서 사심없는 열변의 토론과정을 거친 것이다.이들이 만든 헌법은 대개 10개조에서 많을 때는 70여조에 이를 때도 있었다.그 제1조의 내용은 오늘날 1백30여조,부칙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헌법제1조와 동일하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군주제의 양반체제로부터 결별인 동시에 문민공화정치의 입문이었다.이것 하나만으로도 대한민국의 법통성이 임정으로부터 기연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광복군은 곧 의병과 독립군을 이은 우리 군의 정통성을 더해 준다.그러나 8·15는 이들의 법통성을 외면케하여 충격을 주었다.그뒤 1988년 제9차 개헌 전문에 비로소 대한민국의 법통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하게 됐다.8·15광복 이래(1945)정통성을 찾는데 43년(1988)이 걸린 셈이다. ○43년 걸린 법통회복 그동안 정통성의 기반이 미약했던 군사정부나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자유당정부는 임정의 법통성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기피하거나 평가하려 들지 않았다.모두 밀착되게 관련이 있으면서도 자신감이 없어서인지 회피했던 것이 사실이다.북한 당국도 오랫동안 임정의 정통성을 외면한 채 비방·폄하·성토·질책일변도로 달려왔다. 일부 운동권 시각도 임정을 성토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문민공화정부를 맞아 임정의 법통성문제가 거론될 때 30년간 임정을 연구한 보잘 것 없는 필자는 감격의 뜨거운 낙루를 금치 못하면서 오랜만의 법통성을 올바르게 찾았구나 싶어서 현대사의 정당한 인식이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임정의 법통성이 공식 인정되었으면서 아직도 그에 따른 후속법제조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임정27년사가 대한민국의 제1공화정이 되어야 함은 물론 「민국」의 연호 또한 단기와 병기되어야 한다.그리고 임정의 대통령(국무령·주석등)·국무위원의 예우 역시 소급적용 되어야 문민정부로서 뒷날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민국」 연호 병용을 임정의주석이었던 이동령의 천안 생가는 비가 새고 도로도 협소한데다가 표지판마저 불분명한 채 방치되어 있는게 작금의 실정이다.8·15이후 대통령을 역임한 분의 유적이 늘 관심속에 손질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비교가 되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이번 8월5일에 돌아오는 박은식씨등 임정요인 5위의 유해 봉송과 때를 맞추어 흩어져 있는 임정요인의 묘역이 국립묘지에 다듬어지고 있는 2천평 위에 가지런히 함께 모셔지길 바란다. 상해임정청사의 복원전시에 이어 중경임정청사의 복원작업도 이미 시작되었다.속히 임정의 법통성이 원만히 지켜져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는 절차와 순서가 이어지길 빈다.
  • 김성수·이은상·이갑성·윤익선씨등 8명/친일행적 논란…서훈취소 심의

    ◎보훈처 8일 국가보훈처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부통령인 인촌 김성수씨(62년 대통령장)를 비롯한 8명의 독립유공자들이 친일행각 혐의를 받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김성수씨외에 3·1운동 당시 33인중 한명으로 광복회장을 지낸 이갑성씨(62년 대통령표창),시조시인 이은상씨(77년 애국장),그리고 윤익선(62년 독립장)·윤치영(82년 건국포장)·서춘(63년 대통령표창)·이종욱(77년 독립장)·전협씨(82년 애국장)등이다. 보훈처가 민주당의 김병오·이해찬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김성수씨는 친일단체인 총력연맹이사로 재직하며 학병을 권유한 혐의를 받고있다. 또 시조시인 이은상씨는 친일지인 만선일보에 재직했으며 임시정부 구미위원회위원을 역임한 윤치영씨는 41년 미영타도간담회 연사로 참석,대동아공영권 논리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이갑성씨는 일제때 밀정혐의를 받고있으며 3·1운동을 주도,1년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윤익선씨는 친일단체인 서울 원서정 총대와 북부정회 총대회간사를 역임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서춘씨는 친일지인 매일신보주간을 지내면서 조선임정보국단에 간여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종욱씨는 총력연맹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전협씨(대동단 결성)는 일진회 평의원과 부평군수를 지낸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는 이들의 친일혐의가 드러남에 따라 독립유공자 재심사위원회를 구성,상훈법등 관련법령을 개정해 친일독립유공자 서훈취소등의 근거조항을 신설해 처리할 방침이다. 정부는 그러나 이들에 대한 소명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내년 1·4분기까지 본인이나 유족들에게 소명자료를 제출토록할 계획이다. 보훈처의 한 관계자는 『이는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친일인사 14∼15명중 보훈처가 파악한 명단』이라고 밝혔다.
  • 「조선노동당 중부당」인정/서울고법/“이선화­이선실은 동일인”

    ◎황인오 피고에 무기선고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이융웅부장판사)는 5일 지난해 10월 안기부에 의해 적발된 간첩단 사건의 총책 황인오 피고인(37)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간첩단의 명칭을 「민족해방 애국전선」(민애전)으로 규정한 원심의 결정을 뒤집고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의 명칭및 이선실의 실체를 모두 인정,황피고인에게 원심대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황피고인 등은 자신들이 조직한 지하당의 명칭을 「민족해방 애국전선」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북한의 지령전문등 여러 증거등을 종합해 볼 때 이는 대외보안상의 위장명칭일 뿐 수사당국의 발표대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임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황피고인을 포섭하기 위해 함께 월북한 이선화도 북한 노동당 서열 22위인 정치국후보 이선실과 동일인임이 인정된다』며 이선화를 이선실로 인정하지 않은 원심결정을 뒤집었다. 이에 앞서 이 사건의 1심 재판부인 서울형사지법 합의22부(재판장 김명길부장판사)는 지난2월 황피고인의 간첩혐의는 인정했으나 증거부족의 이유를 들어 지하조직의 명칭을 수사당국이 밝힌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 아닌 민족해방애국전선」으로 이선화를 단순한 대남공작원으로만 인정했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철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을사5적 처단 실패후 대종교 창시/32세때 관직 버리고 유신회 조직… 항일/합방후 “민족정기수호” 단군신앙 포교/“암흑시대 겨레의 횃불”…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로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낙안현 남상면 금곡리(현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에서 부친 나용집씨와 모친 송씨 사이에서 3형제중 둘째아들로 출생했다.족보명은 두영이었으나 인영으로 개명한뒤 대종교 창교후 철로 바꿨다. ○전남 보성서 출생 1902년 29세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선생은 32세때 징세서장으로 있다가 일제의 침략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자 1905년 5월 일제부패관리의 실상을 좌시할 수 없다며 관직을 사임했다.그뒤 강진출신 오기호지사등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구국운동에 앞장선다.그해 미국 포츠마츠에서 노일전쟁의 종전을 위한 강화회담이 열리게 되자 우리의 입장을 미국조야에 호소하기 위해 도미할 것을 결심,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유람을 빙자,일본 도쿄에 가게 된다.거기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조선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특별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진정한 평화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자 일왕궁성 앞에서 3일동안 단식하며 항쟁하기도 했다. 선생은 우여곡절 끝에 을사5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기호와 함께 『매국노를 모두 죽이면 국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며 칼 2자루를 행낭에 감추어 11월30일 귀국한다.이듬해 1월 선생과 오기호는 학부대신리완용 외부대신박재순 군부대신리근택 내부대신리지용 농상공부대신권중현등 세칭 「5적대신」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획했다.동지들을 규합,자금도 모으고 권총 8정도 구입했다.각국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도 작성했다.첫번째 거사일을 음력 정월 초하루(2월13일)로 정하고 5적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하는 기회를 이용,처단하려 했으나 결사대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했다.이후 4차례에 걸친 처단시도는 이런저런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체포된 동지 한명이 고문에 못이겨 거사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가자 선생은 제발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1907년 7월3일 유배 10년형을 받는다.그는 지도로 유배지가 결정돼 헌병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29일 인천을 출발했다.그러나 운이 좋았던지 유배 4개월여만에 오기호등과 함께 특사로 풀려난다. 1910년 8월 경술7조약 체결로 일제는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았다.너무도 치욕적인 조약이어서 선생은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사대사상에서 비롯된 교육의 잘못에 있음을 깨닫게 됐다.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전통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단군의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역사를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여 보국안민과 제인구세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선생은 1909년 정월 15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오기호등 수십명과 함께 서울 제동 취운정에서 제천의식을 갖추고 단군교를공식 종교로 공표하고 통상의 건국기원에 1백24년이 앞선 4366년을 개천의 기념으로 삼았다. ○초대교주로 추대 모든 교인들로부터 교주인 도사교로 추대된 선생은 1910년 7월30일 칙령을 발표,그때까지 한얼교 또는 천신교로 불리던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가 된다.대종교는 이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구심점이 돼 급속도로 발전한다.선생은 대종교의 도사교가 되면서 이름을 인영에서 철로 바꾼다. 선생은 경술7조약이후 일제침략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어렵게 되자 성지순례의 길을 나서게 된다.그 옛날 단군이 남긴 손길과 발자취를 몸소 알고 역사와 교훈을 깨달아 겨레의 나아갈 길을 믿아보려고 한 것이다.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아래의 중국 동삼성에 이르러서는 대종교의 확대포교를 구상하게 된다.이 곳이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살던 곳이었고 수많은 애국독립지사가 정착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선생의 노력으로 대종교는 이 곳에서 크게 번창했다.선생은 한편으로 교인과 교포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도마련,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선생의 이같은 행동은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국내에서는 탄압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선생은 총본사가 있던 화룡면 청파호에서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당시 일제는 신포교규칙에 의한 종교등록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대종교에서는 완벽한 서류를 냈으나 군소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주면서도 대종교의 등록서류는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송했다.가증스런 종교탄압이었다.선생의 신변도 위협해왔다.창교이래의 최대의 시련이었다. ○구월산에서 순교 선생은 순교와 수도의 길중 택일을 위해 매일을 기원했다.이윽고 구월산 삼성사 참배계획을 공지하는데 이는 단군 성적지를 믿아 순교하려는 결단이었다.1916년 음력 8월4일 참배길을 떠나 이틀뒤 삼성사에 도착한다.8월 한가위 동네 교인들과 제례를 올린 선생은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방문을 봉하게 하고는 순교의 길을 택한다.다음날 제자들이 선생을 믿았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여러 유서들이 나왔으나 모두 죽음으로써 침략자들에게 항쟁한다는 뜻이었다.선생의 나이 54세. 정부는 이같은 선생의 항일공훈을 추앙하여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동족이몽(통화통합3년­그 뒤의 독일:중)

    ◎동·서의 벽 엄존… 사고 행동 판이/사회복지비 부담 늘어 못마땅/서독출신/“입지 없는 2등국민” 피해의식/동독출신 현재 독일이 안고있는 문제는 크게 ▲끝없이 소요되는 통일비용의 조달 ▲외국난민의 유입 억제 ▲국민들의 근로의욕저하 등을 들 수 있다.앞의 두가지가 당장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가시적 문제라면 세번째 것은 눈에 잘 띄진 않지만 독일사회를 내부로부터 좀먹는 보다 근원적 문제라 할 수 있다. 콜총리를 비롯한 정부지도자들은 동독지역 경제재건에 쓰일 자금조달을 위해 모든 주·국민들이 애국심을 발휘,고통을 분담할 것을 호소하고 있지만 자기중심적 사고에 젖어있는 독일(특히 서독)국민들로부터 별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서독인들은 통일로 갑자기 늘어난 부담에 신경질을 내고 있으며 동독인들은 통일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불만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경제통합후 3년이 지났지만 독일은 아직까지 진정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통일에도 불구,동서독간 생활습관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서독인과 동독인이란 출신이 이들로 하여금 하나의 「독일인」으로 융합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실업수당 등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에나 의존하려는 동독인을 위해 자신들이 희생을 강요받는다는 생각으로 서독인들은 못마땅해 하고 있다.동독인들은 자신들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독인보다 한단계 낮은 2등국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이처럼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는 속에서 동독경제재건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이 제대로 염출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연방정부의 부채(재정적자)는 계속 늘어나지만 이를 통한 통일비용조달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통일비용이 제때에 조달되지 못하면 경제는 또 타격을 받게 되고 이는 다시 대립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될 소지를 안고있다. 콜총리는 최근 한 TV인터뷰에서 『통일이 빠른 시일내에 완결되지 못하면 독일도 중부유럽이나 구유고에서와 같이 민족주의 쇼비니즘,외국인 배척감정 등에 따른 쓴 경험을 맛볼 것』이라고 경고했다.그가 말한 「통일의 완결」이란 독일사회가 동서독출신의 두개로 갈라져 각기 겉돌지 않고 하나로 융합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콜총리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독일사회는 지금 외국인에 대한 그칠줄 모르는 극우테러사건으로 중병을 앓고 있다. 독일인들은 테러를 저지르는 「소수」보다는 외국인배척을 반대하는 훨씬 더 많은 「다수」가 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독일사회상황이 경제난 가중,외국난민 유입문제 해결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부의 비능률적 대처,이에 따른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확산 등 극우주의가 발호하기에 더없이 좋은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는데 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낸 독일의 전세대는 이제 무대 뒤편으로 물러났다.그 뒤를 이어 새 주역이 된 독일의 새세대는 그들의 전세대가 갖고 있던 왕성한 근로의욕을 물려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이들은 전세대가 이룩한 경제기적 속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성장한 탓에 처음으로 맞이한 경제난을 앞에 놓고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 부전전투 영웅 이병형씨(예비역 육군중장 전쟁기념사업회장)는 말한다

    ◎“6·25 끝난줄 아는 착각 안타깝다”/안이한 안보관으론 나라지탱 못해/우방지도층 자제의 한국전 희생 본받아야 전선에서 산화한 전우와 두고온 산하를 못잊는 노병 이병형씨(67·예비역 육군중장·전쟁기념사업회장)에게는 아직 6·25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사에 길이 남을 전과를 세운 전쟁영웅이기도 한 이씨는 『지금 모든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지난76년 2군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한 이씨는 30년 가까이 군에 있으면서 참군인의 면모를 과시,칭송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다.그의 군인 됨됨이를 높이 산 노태우전대통령도 88년 취임초 그에게 전쟁기념사업회 일을 맡겼으며 장태완전수경사령관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군인의 한 사람으로 그를 꼽았을 정도. ­다른 사람들 하고는 달리 6·25를 맞는 소감이 각별하다고 봅니다만.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합니다.6·25 발발소식을 듣고는 마치 댐밑에 서 있다 댐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에는 뚜렷한 승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승패없는 전쟁에서는 전쟁을 치른 대가를 보상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6·25전쟁의 승패가 나지 않았다고 보시는 겁니까. ▲전혀 결정이 안났다고 봅니다.이질적인 집단간의 투쟁에서 아직 가부간의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김일성이 엄연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6·25는 어디서 맞았으며 그때 얘기를 좀 들려주시죠. ▲당시 수도사단 18연대 인사참모로 대위였습니다.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원산탈환후 북진할 때는 18연대 1대대장으로 참가 했습니다.전쟁얘기를 다 할수는 없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몇 개 있지요.50년 12월초로 기억되는데 두만강을 90리 정도 앞둔 함북 부령까지 북진해 갔을때 갑자기 연대에서 대대장회의를 소집하더니 철수한다고 하더라고요.중공군 때문이었지만 그날 새벽 이미 2대대 6중대는 선발대로 두만강 쪽으로 출동한 상황이었지요 6중대에는 통신이 안닿아 할 수 없이 남아있는 병력만 철수했습니다.6중대를 먼저 보낸 것은 적의 급속한 진격을 막기 위한 일종의 작전이었지요.당시 6중대장인 이원개소령은 그 사실을 몰랐고…. 고향이 부령인 이소령은 얼마전에 소령으로 진급했음에도 부령전투에 참가하겠다고 고집,중대장으로 남아 있었습니다.나중에 들은 소문에 따르면 6중대 1백60명은 고립돼 유격전을 펼쳤다고 합니다만 이처럼 알려지지 않은 고귀한 희생들로 인해 이 나라를 이만큼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함남 북청출신으로 실향민인 이씨는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작전시 동부전선에서 안강→청송→평창을 거쳐 서림(양양군)지역의 38도선을 돌파한 후 북진의 선봉대열에 서서 간성→양구→화천→신고산을 경유,원산까지 진격한다.원산탈환후 18연대 1대대장이 된 이씨는 대대를 이끌고 함흥을 공격,점령하고 50년10월 하순에는 함흥 북방 신흥지역의 백암산에서 부전호를 따라 남하하는 중공군 5명을 최초로 생포한다.곧이어 1개 중대의 중공군을 기습,매복으로 전멸시켰다. ­최근 탈냉전분위기등 주변상황변화로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많이 해이해진 것 같습니다.국민들이 안보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6·25는 종전된 것이 아닙니다.휴전상태가 너무 오래되다 보니 모두들 전쟁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남북이 유엔에 가입하고 남북협상등이 있고 보니 그렇게들 보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안보관을 개혁하지 못하고서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특히 권력층·지도층·부유층에 문제가 있습니다.나서야 할 사람들은 항상 뒤로 빠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이익의 방패로 썼기 때문에 망국의 설움과 6·25를 겪었던 것입니다.군대가는 문제만 해도 지금도 큰 변화가 없습니다.권력층·지식층·부유층자제들이 나라를 지키는 데 소극적입니다. 이게 고쳐지지 않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외국의 지도급 자제들이 6·25에 참전,많이 전사했다는 점을 거울삼아야 합니다.우리의 안보의식을 혁신해야 할 것 입니다. ­6·25때 생명을 내던져 쌓은 군의 신뢰가 최근 많이 실추된 듯 합니다. 군원로로서의 견해는. ▲군은 특별한 조직이 아닙니다.군도 국민의 일부입니다.국민이 합쳐서 군을 이루는 것입니다.국민들 이익에 반대되는 일이 있어선 안될 겁니다.군과 민이 별도라는 개념은 바람직하지 않아요.최근 군내에 「하나회」등 사조직이 문제가 됐다고 들었습니다.군내에선 사조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물론 일부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국민들도 전체 군과 관련지어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는 요즘 전쟁기념관건립에 몰두해 있다.6·25를 경험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을 똑바로 알려주고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헌신함으로써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노병의 한을 달래고 있다.
  • 임정요인 유해5위 8월5일 봉환

    ◎6일간 분양소 설치… 10일 국립묘지 안장/국무회의 의결 정부는 23일 중국 상해의 만국공원에 안장돼있는 임시정부요인 5명의 유해를 오는 8월5일 봉환,국립묘지에 안장키로 하고 봉환행사는 국민장수준으로 치르기로 했다. 정부는 이날 황인성국무총리주재로 제30회 국무회의를 열어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상해임시정부선열5위봉환 국민제전계획안」을 의결했다. 이번에 유해가 봉환되는 선열은 박은식(임정 국무총리·2대대통령),노백린(임정 군무총장·국무총리),김인전(임시의정원 부원장),신규식(임정 법무총장·국무총리),안태국(데라우치총독 암살로 6년복역)등 5위로 김포국제공항에서 봉영식을 거행한 뒤 차량으로 국립묘지까지 운구돼 영현봉안관에 안치된다. 이어 6일동안 조문객들의 분향을 받은 뒤 10일 상오 3부요인과 각계 대표 6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을 갖고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다.
  • “노사 다함께 고통 분담을”

    김영삼대통령은 19일 『새정부의 최우선과제가 경제회생에 있는만큼 앞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이경식부총리로부터 경제동향에 관한 정례보고를 받겠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 과천정부종합청사 경제기획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경제장관회의에 참석,이같이 밝히고 『각 경제부처는 이기주의에 빠져 협의도 하지않은 정책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지 말고 이부총리를 중심으로 경제회생에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촉구했다. 김대통령은 『대기업의 노사분규로 많은 협력업체가 도산위기에 빠지는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제하고 『고통을 분담하는 일에 근로자와 사용자가 따로 있을수 없으며,대통령으로서 누가 더 애국심을 발휘하는지를 지켜보겠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경제회생을 위해서는 물가안정이 중요하며 특히 서비스요금과 농산물가격이 물가안정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지적,『각 부처 장관은 이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대처해 나가라』고 지시했다. 경제장관회의가 끝난뒤 김대통령은 과천청사내 구내식당에서 8개부처 5급이하직원 6백40명과 오찬을 함께 했다. 이자리에서 김대통령은 『올해 공무원의 임금을 동결한데 대해 가슴아프게 생각한다』며 『내년에는 반드시 대폭적인 처우개선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김대통령은 『경제를 살리고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공무원들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며 『청와대도 예산을 10%절감하는등 앞장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와 자신,그리고 경제회생에 대한 신념』이라며 『나는 우리의 우수한 공무원들이 나라를 지키는 기둥임을 굳게 믿고 있다』고 역설했다.
  • 교포들의 영어실력/뉴욕에서(임춘웅칼럼)

    미국에 살고있는 우리 교포들의 영어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더없이 흥미로운 의문이 아닐 수 없다.재미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실력을 평가할 방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조사를 할만큼 한가한 사람도 흔치는 않을 터여서 이런 조사가 있었다는 얘기를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다.아마도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일부 노인네들을 제외하면 미국교포들의 대부분은 영어를 「유창」하게 할 것으로 믿고 있을 것이고 미국에 사는 교포들은 교포의 90%는 영어를 못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한국사람들은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그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보고듣는 것이 영어뿐인 세상에 살면서 영어를 어떻게 못할 수 있다는 말인가고 가볍게 생각해 버린다.그래서 미국에 몇년 살다가 모처럼 서울을 방문한 사람은 으레 영어가 우리말 보다 편한 사람,용케도 한국말을 잊지 않고 돌아온 「애국자」취급을 받는다.방문객은 방문객대로 굳이 부인할 처지도 아니어서 졸지에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 돼 버린다.반면에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오래오래 살아도 영어가 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다 비슷하겠거니 해 한국사람 영어실력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미상무부가 최근 한국교포들의 영어능력과 관련된 한 자료를 내놓았다.이 자료를 보면 교포의 38.8%가 「아주 잘한다」로,31.1%는 「잘한다」로,24.7%는 「못한다」로,5.4%는 「전혀 못한다」로 분류돼 있다.상무부는 이 조사를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는데 인구조사를 하면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의 영어해득력을 물어 모은 자료가 아닌가 여겨진다.그러니까 교포들의 자평인 셈이다. 자평의 객관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도 교포의 30.1%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로 돼있다.이는 미국내 인종별 영어장애율 50개 순위중 3위에 해당하는 높은 수치이다.중국계(4위) 베트남계(5위)일본계(12위) 보다도 영어를 못한다는 얘기가 된다.미인구통계국 조사에서도 한국계는 영어를 일상 쓰지 않는 민족순위8위를 차지하고 있다.그러나실제는 30.1%가 아니라 대부분의 교포가 엄청난 영어장애속에 살고 있다는게 정직한 평가일 것이다. 어째서 가장 고학력이민자들로 알려진 한국계가 영어를 특별히 못하는 편에 속하는 것일까.첫째는 한국인들이 끼리끼리 몰려 살기 때문에 영어의 필요성을 덜 절감하고 있을 것이란 점이 지적되고 있다.둘째로는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일을 하기 때문에 영어를 배울 시간이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그밖에도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영어는 쉽게되는게 아니고 당장 절실한 것도 아니니 이민1세는 애써 배울 필요가 없다고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혐의가 있다. 부모 자식간 대화의 단절,미국사회로부터의 고립,지금 교포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이런 문제들이 바로 1세들의 성급한 오판의 결과가 아닐지 모르겠다.언어는 직업상의 필요,신분상승의 수단 이상의 것인 것이다.
  • 임정요인 5위의 환국을 반기며/최창규 독립기념관장(일요일 아침에)

    ○마음속의 참조국 호국은 나라가 어려울때 던지는 생명이요 순국은 나라가 무너졌을때 바치는 희생이다.바로 이 희생을 통하여 어려운 나라도 지켜지고 무너진 나라도 다시 살아나게되니 이같은 희생은 희생이 아니라 그대로 오늘에 살아있는 우리들의 참 조국이다.살아있는 조국은 소중하기에 겨레는 가슴마다에 그것을 담고 받드니 여기서 조국은 다시 나의 마음속에 직접 살아있는 나의 조국으로 피어오른다.바로 보훈의 정성으로 되살아나는 혼으로서의 나의 조국이다. 이같이 소중한 살아있는 이 조국은 지금 우리들앞에 무엇이 있어 다리 놓아줄까? 그 실체가 바로 저 순국선렬·호국영령이라는 별빛같은 님들이시다.따라서 그 님들이 안계셨다면 오늘의 이 조국은 지금 여기 있을수 없다. 본래 님과 만나지 못하는 주인은 허전하기에 호국의 영령들과 만날수 없는 민주은 그래서 무력할수 밖에 없고,다시 님과 영원히 헤어진 생명은 살아갈수 없기에 순국하신 님의 혼과 만나지 못하는 주체의 생명은 끝내 소멸할 수밖에 없다. 이점은 민족의 분단으로 주체의 생명이 반신불수가 되었고 겨레의 삶에 또한 이산의 고통으로 한없이 흐트러진 오늘의 이 민족사의 현실이기에 더욱 절실하다. ○민족정기로 살아 님들이 역사의 등단앞에 붉은 피를 뿌렸을때 그 붉은 피는 민족정기로 치솟으면서 반드시 푸른빛으로 변한다.바로 민충정공의 혈죽과 같이 푸른피(벽혈)로 상징되는 이 민족의 정기이다.민족의 정기가 이처럼 푸른피로 치솟을때 거기에는 이미 목숨을 던지며 님들께서 불러일으킨 붉은 마음(단심)이 뜨겁게 함께 살아있다.그렇기에 이 호국·보훈의 달,님들의 그 붉은 마음과 푸른피가 만나 민족사의 하늘을 홍청조화로 아름답게 수놓으니 그대로 님들의 민족정기로하여 떠오르고 있는 우리들의 살아있는 태극기 바로 그것이다. 조국앞에 던져진 생명은 죽은뒤에서 혼과 백으로 갈라진다.이때 혼은 조국의 하늘위로 날고 백은 조국의 땅속으로 묻힌다.이를 박은식선생은 혈사속에서 국혼과 국백으로 강조하였다.즉 국백으로서의 역사의 힘이 일시 약하여 지금 망국의 패배를 당하였지만 국혼으로서의 정기는 우리들이 훨씬 우월하기에 민주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실 광복론 그것이었다. 이같은 확실광복론을 따라 이 보훈의 달 우리들에게는 분명하게 들려온 뜻깊은 소식이 하나 있다.바로 저 상해땅 만국공묘에 이제껏 외롭게 잠들어 있던 우리 애국지사 오위의 유해가 금년 광복절을 전후하여 고국으로 돌아오신다는 반가운 소식이다.정확히 광복48년만의 일이니 그 영명은 박은식·노백린·신규식·김인전·안태국님들….실로 눈물겹도록 반갑고도 흐뭇하다. ○완전광복의 길로 이제 오위 애국지사의 유해가 이땅에 봉환될때 그님들은 분명 이 민족사 완전광복의 소식을 함께 안고 여기 돌아오신다. 즉 분단이란 불완전한 광복때문에 이제껏 돌아오시지 못한 님들이라면 이제 그님들이 돌아오실때 그것은 가장 확실한 이 민족사 완전광복의 소식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박은식선생은 님의 혈사속에서 강조한 국혼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이나라 국혼이 되어 우리의 완전광복을 증언할 것이고 신규식선생도 저서로서의 「한국의 혼」이 아니라 이제 님이 직접 그 한국의혼이 되어 완전광복이 기뻐서 이제껏 흘겨오던 그 예관(님의 호)의 눈을 번쩍 바르게 뜨실 것이다. 이제 본국으로 봉환되는 님들의 유해는 곧 국립묘지로 안장된다.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해,즉 국백에 대한 보훈일뿐이다.여기서 님들의 국혼(영령)에 대한 보훈은 마땅히 겨레의 성전인 독립기념관에서 잘 받들어야만 한다.그래서 님들의 국혼과 국백이 조국의 품안에서 하나로 만나 완전광복의 새 생명으로 피어오르도록 하여야만 한다. 여기서 이 조국 대한에 독립기념관이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완전광복으로 가고 있는 이 민족사를 웅변한다.그동안 오위유해의 환국이 늦어진데에는 솔직히 북한이라는 변수가 있었던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오늘에 성사된 이 오위의 유해봉환이 끝내 저 북한을 패자로 만들며 우리들 대한만의 승리이어서는 결코 안된다. 그길은 한마디로 통일이라는 완전광복의 승리하나 뿐이다.한마디로 통일의 승리를 거두는 그날 여기 모셔진 오위의 영령들은 단순히 남쪽 대한땅에만 모셔진 님들이 아니라 그대로 하나로 통일된 이 조국속에 분명히 함께 계시게되기 때문이다.
  • 이병태처장에 듣는 국가보훈대책/대담=김종일사회부장(국정탐방)

    ◎“범국민적 보훈의식 고취에 최선”/숭고한 애국정신 예우받는 풍토 조성/명예·긍지 갖도록 연중 각종행사 추진/정부수립후 최초로 17만명에 대통령명의 「유공자 증서」 수여 문민정부 출범이후 처음으로 호국보훈의 달을 맞은 이병대국가보훈처장은 요즘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17만 국가유공자들에게는 명예를 갖고 여생을 보내도록 하고 국민들에게는 순국선열과 전몰호국용사들의 숭고한 뜻을 심어주기 위해 각종행사에 참석하느라 공휴일도 없다. ○민족 정기 되살아나 이처장은 『호국보훈의 달을 계기로 국민 모두가 나라사랑에 대한 참뜻을 깨닫고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면서 『보훈의식의 범국민적 확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처장은 모든 국민들이 참다운 보훈의식을 가질때 민족의 정기는 자연스럽게 되살아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정부 출범후 첫번째 맞는 올 6월 호국보훈의 달은 의미가 새롭고 각별하다고 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국민들에게 보훈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범국민적 행사를 추진코자 합니다.오늘날 우리가 번영을 추구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전몰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그 바탕이 된 것입니다.문민정부 출범이후 처음 맞는 호국보훈의 달에 정부수립후 최초로 국가유공자및 그 유족 17만4천8백86명에게 대통령명의의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해 긍지를 고취시키고 국민들로부터 진실로 예우받는 풍토를 조성할 수 있도록 한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가치관이 혼돈돼 가는 상황입니다.이럴 때일수록 국가유공자에 대한 이미지제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만 이에대한 방안은 있으신지요. ▲먼저 국가유공자들을 예우하는 국민적 풍토가 조성돼야 할줄 압니다.정부에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추앙의 뜻으로 국경일·기념일등 중요 행사시에 「의전상의 예우」를 하고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공훈과 희생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사망시에는 영구용 태극기를 증정하고 비석및 묘지단장을 지원하며 공헌과 희생의 정도에 따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등의 예우를 하고 있습니다.그러나 무엇보다 보훈이념이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국가유공자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국민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들이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제도적인 지원을 해나갈 방침입니다° ­최근 각 기업에서 국가유공자 법정의무고용기준을 잘 지키지 않는등 대우가 소홀한듯한 인상인데 현황은 어떤지요. ○독립운동가들 포상 ▲그동안 기업이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매년 1만여명의 보훈대상자들을 고용,올 4월말 현재 모두 7만7천9백60명이 취업하고 있습니다.취업자의 80%정도가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사무직등 우수직종에 취업을 알선하려는 보훈처와 생산·기능직종 취업을 요망하는 기업체측과 직종협의시 다소 마찰을 일으키는 사례는 있으나 기업채용의무고용인원이 18만여명이 남아있고 매년 취업을 희망하는 보훈대상자가 1만2천명 수준이어서 보훈가족 취업알선에는 문제가 없습니다.지난 5월1일부터는 기업의 고용부담을 경감시켜주기 위해 제조업체에 대한 의무고용기준을 대폭 완화시켰습니다.의무고용 제조업체를 종업원 16인이상업체에서 50인이상업체로 상향조정하고 제조업체의 고용비율을 5∼8%에서 4∼7%로 1%포인트 줄였습니다. 앞으로 전문대졸이상 고학력자에 대해서는 우수한 업체에 자력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채용시험가점(10%)취업을 적극 권장해 나가겠습니다. ­국가유공자들의 명예와 긍지를 높여주기 위한 행사가 연중 기획·추진돼야 할 것으로 봅니다.호국보훈의 달에만 하는 형식적인 행사에서 탈피,실질적인 행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만. ▲국가유공자들의 긍지를 높여준다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동감합니다.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예우나 긍지를 높이기위한 행사는 범국민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합니다.범국민적인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는 사회단체등에서도 자율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올 8·15 광복절에 상해 임시정부요인 5위의 유해가 돌아오는데 독립유공자 유해 봉환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현재 중국 상해 송경령능원에는 임시정부에서 활약하셨던 박은식 노백린선생등 5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습니다.이분들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한다는 것은 우리 정부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한 정부라는 점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헌법전문에 명시된 헌법정신을 더욱 확고히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중국 외교부장의 최근 방한시 유해봉환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실무차원의 협의가 남아있습니다.유족·광복회등 관계기관과 협의,세부계획을 수립하겠습니다. ­해외순국선열들의 유해봉환사업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앞으로의 전망은. ○유해 봉환사업 추진 ▲해외에 안장된 순국선열의 유해봉환사업은 46년부터 계속돼 온 사업으로서 그동안 13회에 걸쳐 23위의 유해를 봉환해 왔습니다.이번에 임시정부 5인의 요인 유해 봉환계획을 계기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유해봉환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가고 있습니다.앞으로도 러시아와 동남아시아등 해외에 안장된 유해가 확인되는대로 관계국과협의,봉환을 추진할 방침입니다. ­광복 50주년이 되는 오는 95년 2만여명의 국내외 독립유공자를 발굴,포상할 계획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지금까지 유공자 본인이나 유족으로부터 신청서를 받아 심사했던 방법을 개선,정부에서 직접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독립운동가를 발굴 포상할 계획입니다.특히 중국·러시아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를 중점 발굴할 계획입니다.전체 포상심사대상 인원은 약2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올 광복절에는 3백명을 포상할 방침으로 심사중에 있습니다. ­친일 행적이 있는 유공자와 공적내용이 허위라는 지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부 독립유공자의 공적내용 재심사에 착수,서훈취소 등을 검토하고 있다는데. ○4·19정신을 재조명 ▲현재 친일형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밀조사를 하고 있습니다.친일기록에 대한 각종 원전자료를 수집 조사하고 있으며 수집된 자료에 친일행위가 확인될 경우 이해관계자들에게 소명기회를 줄 예정입니다.그 결과를 별도 구성된 재심사위원회에 넘겨 신중하게 심의,오류가 없도록 철저를 기하겠습니다.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올 4·19에는 김영삼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4·19묘역을 참배하고 4·19의 역사적 재평가를 지시한 바 있는데 어떻게 진전되고 있습니까. ▲4·19정신을 재조명하고 그 개념을 재정립하기 위해 오는 7월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 근세사 전공학자들이 참여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것을 비롯,4·19 설명회와 공청회를 열 계획입니다.재정립된 4·19정신을 중·고교 교과서 등에 반영할 수 있는 방안도 강구하고 있습니다.
  • 국가유공자 생활보호대책 절실

    ◎보상금 등 최저생계비에도 미달/경제수준 맞게 연차적 지원 확대 독립유공자·상이군경등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금등 생활보호대책이 미흡하다.국력신장과 함께 국가보상정책이 양적인 확대와 질적인 발전을 계속해 왔지만 아직도 개선할 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보훈대상자들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이 도시근로자 최저생계비에 훨씬 미달할 뿐 아니라 주택지원이나 취업알선·의료보호사업도 취약한 실정이다. 현재 국가유공자는 애국지사 4천명,전상군경 4만9천명,군경유족 7만4천명,무공수훈자 4만명,기타 4·19의거 희생자,재일학도의용군,순직·공상공무원 7천명등 모두 17만4천명. 국가유공자는 지난 61년 8월 처음 대상자가 결정될때만 해도 전공상군경과 유족에 국한시켰으나 그 이후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이 본격화되면서 애국지사,4·19의거희생자,재일학도의용군등이 추가됐다.연금지급대상은 아니지만 공상·순직공무원·무공수훈자등도 국가유공자에 포함됐다.61년 당시 국가유공자는 15만명이었다. 국가유공자와 유족에게는 기본연금과 부가연금,그리고 수당형태의 보상금이 지급된다.이들은 모두 매월 28만2천2백원의 기본연금을 받고 있으며 공헌도와 희생도가 높은 애국지사,중상이자나 고령자에게는 별도의 부가연금이 차등지급되고 있다.생계곤란자에게는 생활조정수당이 지급되고 있어 수준의 적정성여부를 떠나 일견 다양한 형태의 급부가 행해지고 있다고 보인다. 올해의 경우 총 5천3백78억원의 보상금이 책정돼 1인당 평균 37만원이 지급되고 있다.국가유공자와 유족들은 보상금 이외에 의료보호및 주택지원·취업보호를 받는다. 애국지사와 상이군경 공상공무원등 장기진료가 필요한 사람들은 서울·부산·광주등 3개 보훈병원에서 국비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응급 또는 단기진료를 받는 환자로 지정된 전국 26개 병원에서 위탁가료를 받는다.그러나 병원의 병상과 진료시설이 크게 부족해 진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보훈가족에게 직장을 알선해주고 있는 취업보호사업은 84년부터 시행된 국가유공자예우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업체규모별로 4∼7%범위에서 의무고용토록 하고 있으나 인식부족등으로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기업들이 많다. 보훈예산규모는 올해 6천2백54억원으로 정부 예산의 1.6%를 점하고 있다.61년 당시 2%선이던 것이 87년에는 0.8%수준으로 격감하였다가 88년 이후 보상금수준의 개선에 힘입어 91년에 다시 2%선으로 올라선 이래 최근 다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국가유공자 및 유족의 평균 연령은 60세를 넘어서는등 전반적인 노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이들은 보상금등 직접적인 지원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높고 노후생활을 위한 복지수요를 요구하는 층이어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보훈처는 이에따라 보상금수준을 우리의 경제수준에 맞는 수준으로 연차적으로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 보상금 결정방식에 객관적인 지표를 도입,제도화 해나가는 한편 불균형한 대상별·등급간 보상금 수준을 합리적으로 개선할 방침이다. 또 노령대상자들이 보다 편리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지방보훈병원 정양및 휴양시설,시도별 복지회관 고령자 전용아파트등의 복지시설을 신설하거나 늘려나갈 계획이다. 유공자들의 공헌과희생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고 단순히 도와 주어야 할 계층으로 부담스러워 하기 보다는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하겠다.
  • “전국충혼탑 관리 철저”/김 대통령,국립묘지 참배뒤 지시

    김영삼대통령은 제38회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상오 동작동 국립묘지에 참배하고 헌화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이해구내무 권령해국방장관과 이병대보훈처장 청와대수석비서관및 국가유공자 단체장들과 함께 국립묘지 현충탑에 헌화분향한뒤 애국지사묘역과 경찰묘열에도 들러 헌화분향하고 『지방에 있는 충혼탑의 관리실태를 일제히 점검하여 호국의 상징물로서 손색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김대통령은 국립묘지참배후 반포본동사무소와 파출소 우체국등 일선 대민기관을 방문한뒤 서울 둔촌동소재 보훈병원을 방문,입원한 국가유공자들을 위문하고 국가유공환자 9백17명 전원에게 휴대용 녹음기를 위문품으로 전달했다.
  • “출범 1백일 계기 개혁정책 가속을”/황 총리(국무회의:3일)

    ◎1백40분 동안 법률공포안 등 30건 처리 제27회 국무회의는 3일 상오 8시부터 정부종합청사 19층 회의실에서 황인성국무총리 주재로 2시간20여분동안 열렸다. 이날 국무회의는 21건의 법률공포안과 8건의 대통령령안,1건의 일반안건이 상정돼 모두 의결됐다. ○…이날 국무회의는 9시까지 안건처리를 마치고 이어 대통령의 취임 1백일 기자회견을 30인치 대형 텔레비전으로 전국무위원이 함께 시청. 국무위원들은 대통령이 어려운 질문등에 대해 답변을 잘해 감탄했으며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정부대변인인 오린환공보처장관이 전달. ○…황총리는 기자회견이 끝난 뒤 『1백일동안 모든 국무위원들이 경험을 쌓았고 업무를 파악했으며 당정협의체제도 구축된 만큼 내각과 당이 합심해 개혁을 실천에 옮기는 단계에 왔다』고 말하고 『국무위원들이 새 정부 출범 1백일을 계기로 자성하는 자세로 대통령의 개혁의지에 발맞춰 같이 뛰어야 할 것』이라고 당부. 황총리는 이어 『대통령이 내각에 신임을 표시했으니 내각이 좀 더 능률적으로대통령을 받들고 배전의 노력을 하자』고 촉구. ○…이날 회의는 교통유발부담금의 부과대상지역을 상주인구 30만명 이상의 도시에서 10만명이상의 도시로 확대하고 10만명이상 30만명 미만의 도시는 도지사의 승인을 얻어 부담금을 부과토록 하는 도시교통정비촉진법 시행령개정안을 심의,의결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또 대기환경보전법 시행령등 4건의 환경관련 대통령령 개정안이 의결됐다. 환경보전위원회 규정 개정안은 정부측위원을 5개부처 장관외에 필요할 경우 관련부처장관을 위원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고 위원수도 15인 이내에서 23인 이내로 늘렸다. 이와 함께 대기환경보전법 시행령등은 2종 사업장에 두도록 돼 있는 환경관리인을 환경기사 1급이상에서 2급이상으로 기준을 완화했다. ▷의결안건◁ ◇법률공포안 ▲공직자윤리법(개) ▲등기특별회계법(제) ▲국방·군사시설사업에 관한 법(개) ▲전쟁기념사업회법(개)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개) ▲농수산물가공산업육성 및 품질관리에 관한 법(제) ▲농수산물유통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개) ▲농어업재해대책법(개) ▲산림조합법(개) ▲축산법(개) ▲어항법(개) ▲어선법(개) ▲기업활동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제) ▲중기관리법(개) ▲건설기술관리법(개)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개) ▲한국도로공사법(개) ▲일제하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제) ▲환경영향평가법(제)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개) ◇대통령령안 ▲공업표준화법시행령(개) ▲사회복지사업법시행령(개) ▲도시교통정비촉진법시행령(개) ▲해운업법시행령(개) ▲대기환경보전법시행령(개) ▲수질환경보전법시행령(개) ▲소음·진동규제법시행령(개)▲환경보전위원회규정(개) ◇일반안건 ▲93년도 순국선열·애국지사사업기금 운용계획 변경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윤세주열사)

    ◎의용군 지휘… 중국 화북서 일군과 전투/중학때 연무단 조직,개천절시위 주도/일경수배 피해 망명… 조선의열단 결성/독립단체 규합… 40만명과 교전중 장렬한 최후 윤세주선생은 1901년 6월24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강천리에서 부친 윤희규선생과 모친 김경이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성품은 겸손했으나 일본 식민지통치에 대해서는 온 생애를 통해서 저항할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윤선생은 국민학교때 일왕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변소에 버릴만큼 일본을 증오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그는 밀양의 사립 동화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교장의 영향을 받아 항일 정신을 키워갔다. 윤선생은 김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학교내의 비밀결사인 연무단을 조직했다.연무단은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됐다.그러나 윤선생의 가슴에 반일·배일사상은 영원히 남게됐다.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13일 하오1시쯤 수천명이 모인 고향장터에서 그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동지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그를 그냥 둘리 없는 일제의 당장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해 그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은 그해 4월14일 부산지법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윤선생에게 징역1년6월을 선고했다. 만주로 망명한 그는 요령성 유하현에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결의에따라 이회영형제가 세운 독립군양성 무관학교로 그는 이곳에서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그는 11월9일 죽마고우 김원봉등 13명의 학생들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구체적인 항일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의열단은 조선총독부등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살해 하기위한 계획을 세우고 폭탄투척자를 물색하게됐다. 19세의 그는 신철휴 윤치형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했다. 그러나 윤선생일행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국내동지 50여명과 함께 체포됐다. 5년4개월의 감옥생활을하고 27년 출옥한 그는 중외일보 기자·경남주식회사사장으로 위장,독립운동에서 손을 뗀 양 조용히 지내다가 32년 여름 다시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폭탄투척자 물색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도 세련되어갔다.그는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을 갖고 싸웠으나 앞으로는 혁명적 인생관과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재무장, 정확한 혁명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그는 32년 10월20일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33년 4월21일 1기로 졸업했다.독립운동전선의 행동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였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한뒤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을 참가시켜 그해 11월10일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을 결성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안병조·김두봉·김규식·윤기섭·최동오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단체는 33년 7월5일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하던 민족혁명단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됐으며 그는 이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그는 또 민족혁명당이 일군에 무력으로 대항하기위해 만든 중국과 제휴해 만든 조선의용대에서도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 주간이 돼 선전공작 활동을 벌였다.그러나 독립운동의 효과는 호전되지 않고 일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다.독립운동을 적극 협력해주던 중국 국민당 정부도 38년 10월25일 무한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부터는 중공군과의 내전에만 심혈을 쏟았다. 그는 직접 조선의용대 지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가했다.41년 4월에 그는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갔다.그는 마침내 태행산 항일 근거지에 도착,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중공 8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했다.그는 모든 대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다.42년2월 일본군은 4만명의 군대를 동원,태행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5월에는 20개사단 40만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조선의용군은 불과 3천∼4천명에 불과했다. ○“끝까지 투쟁” 유언 일본군은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본격적인 군사작전을 폈다.5월29일 항일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대에 탈출로를 확보하고 탈출할 것을 명령했다.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전군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작전개시 5시간만에 탈출로를 확보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진 그를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6월3일 그는 석굴에서 숨을 거두었다.『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는게 동지들에게 남긴 그의 유언이었다.선생의 나이 41세였다. 선생이 전사한 뒤 1주년이된 43년 6월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군은 합동으로 윤선생의 추도회를 가졌다.대한민국정부는 80년 윤세주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6월은 호국 보훈의 달/17만명에 유공자증서 수여

    6월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전몰호국용사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 정부는 문민정부 출범후 처음 맞는 이번 호국보훈의 달 행사를 민족정기 선양과 국민의 나라사랑운동으로 승화 발전시킨다는 방침에 따라 대통령명의의 국가유공자증서수여,모범국가유공자포상,보훈병원 입원환자및 무의탁 노령유족위문,보훈가족돕기운동,전국 상이군경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 국가유공자 및 유족들의 명예와 긍지를 높여주기 위해 오는 4일 수여되는 대통령명의의 유공자 증서를 받을 사람은 모두 17만4천8백여명이다. 김영삼대통령은 이날 상오 가족 가운데 3인이상 전사한 유족 15명,상이군경 15명,미망인 15명,단체장 8명등 53명을 청와대로 초청,유공자증서를 직접 전달하고 위로할 예정이다. 2일에는 전국상이군경체육대회가 보훈병원에서 열리며 6일 상오10시에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대전국립묘지,전국 각지역 현충탑 등지에서 제38회 현충일 추념식이 거행되고 25일에는 6·25 43주년 기념행사가 각 시도재향군인회 주최로 개최된다.
  • 상해 임정요인 고국에 묻힌다(사설)

    상해임시정부 요인 다섯분의 유해가 마침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신규식 박은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선생등 정무원총리급 독립지사들의 유해이다.오는 광복절이전 중국상해 만국공원묘지에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할수 있게 된 것이다.광복48년만의 일이다.정말이지 다행스럽고 자랑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김영삼대통령은 전기침중국외교부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우리정부는 헌법전문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천명하고 있고 또 본인의 취임사에서도 이를 밝힌바 있으나 양국관계가 성숙치 못해 지금껏 이분들의 유해를 봉환치 못했다』며 협조를 요청했던 것이다.전부장이 귀국즉시 조치를 취하겠으며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함으로써 성사를 보게 된것이다.32년만의 문민대통령에 어울리는 요청이었으며 새로운 대한우호를 다지러온 중국의 외교부장다운 시원한 호응이었다. 상해임시정부는 우리나라가 주권국임을 세계에 선포한 3·1운동의 독립정신에 따라 내외의 애국지사들이 수립한 통합·단일의 임시정부였다.비록 영토와국민은 일제치하에 있었으나 나라를 찾기위해 해외에 세운 민주·민주이념의 우리망명정부였다.헌법전문이나 대통령의 지적이 아니라도 그임시정부의 법통을 우리정부가 계승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그 임정의 요인으로 조국광복도 보지못한 한을 안은채 눈을 감은 다섯분 지사의 유해인 것이다.그분들을 우리국립묘지에 모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다.만시지탄의 송구스러움마저 느끼는 심정이다. 다섯분 유해의 환국이 늦어진 것은 냉전의 장벽때문이었다.탈냉전후엔 북한의 정치적 방해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 방해를 극복한 이번 성사는 수교불과 1년의 한중우호협력관계 발전이 어느정도인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수 있다.상해임정의 정통성이 한국정부로 계승되고 있다는데 대한 사실상의 인정이란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정부는 지난 4월 상해임정수립 74주년을 맞아 폐허가 된 상해의 그청사도 복원한바 있다.그에 이은 지사들의 유해환국 실현인 것이다.때늦은감이 있지만 이제겨우 민주정기가 바로서기 시작하는것같아 감개가 무량하기까지하다.후손에게 할말을 찾기 시작한 느낌도 든다. 광복후 분단의 우리는 동서냉전과 남북대결의 와중에서 백년대계의 입장에서 나라와 민족의 근본을 바로세우는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조국광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애국지사분들과 그분들의 가족을 제대로 기리고 보살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바로 이점 부정비리 척결의 개혁과 함께 신한국건설의 새출발에 나선 새대통령과 정부가 제일먼저 바로잡아야 할 또하나의 가장중요한 분야가 아닌가 생각한다.
  • 심장특별시:4(영양과 인체탐험:4)

    ◎섬유소·불포화지방이 “교통경찰”/콜레스테롤 등 터널 진입땐 추방 ◇위반차량 단속강화! 심장특별시 교통경찰들의 신경을 가장 거스르게 하는 위반차량 들을 꼽으라면 바로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이다.이들은 가뜩이나 복잡한 터널내로 비집고 들어오는 「낙석주의의 대형 화물트럭들」이다.포화지방의 출신지는 주로 동물성 기름들­삼겹살,비계,유지방,버터,생크림,치즈,아이스크림(유지방으로 만든 것). 런천미트,베이컨,닭껍질 등과 소수의 식물성 기름들­팜유(라면,과자,커피,크림등의 제조에 쓰임),쇼트닝 등이다.또 콜레스테롤의 출신지는 내장류(곱창,간,천엽등)와 해산물중 오징어,새우,낙지 등,그리고 알류(계란노른자,창란젓,대구알젓등)의 식품들이다. 반면 이 진입금지 차량들을 단속하는 교통경찰들이 있다.그것은 바로 불포화지방과 섬유소인데,이들은 콜레스테롤과 화물트럭이 터널속으로 진입할 때에 경고도 하고 딱지도 발부함으로써 다시 내쫓아 교통소통을 원활히 해주는 역할을 한다.불포화지방의 출신지는 주로 식물성 기름들­들기름,옥수수기름,면실유등이다.동물성 기름중에도 예외적으로 불포화지방을 함유하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등푸른 생선(꽁치,정어리,연어,고등어등)의 기름을 들수 있다.섬유소라하면 식물체의 껍질이나 줄기부분의 거친 조직에 많이 함유된 물질로서 사람은 이 섬유소를 소화해낼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배설하게 된다.그렇다고 이들이 아무 역할도 없이 지나가는 과객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이들은 체내에서 포화지방이나 콜레스트롤을 흡착,같이 빠져나가는 「논개」와도 같은 애국자이다.섬유소의 출신지는 현미,잡곡,해조류,채소,과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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