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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완다 반군/“새정부 곧 출범”/미선 대사관 폐쇄

    【키갈리·유엔본부 AFP 로이터 연합】 르완다애국전선(RFP)은 정부군과의 내전승리에 따라 오는 18일 새 정부를 출범시키기로 했으며 미국은 워싱턴주재 르완다대사관 폐쇄와 외교관들의 출국을 명령했다. RPF는 기존 르완다잠정정부 지도자들이 수도 키갈리를 RPF에 빼앗긴 후 프랑스군 경비구역으로 패주함으로써 르완다의 정권을 장악했다. RFP는 이에 따라 다수 후투족의 대대적인 국외탈출을 막기 위해 곧 일방적 휴전을 선언하고 RFP측에서 총리로 지명한 파우스틴 트와기라뭉구를 행정수반으로 광범위한 정파를 망라한 새 통일국민정부를 오는 18일 정오 출범시킬 계획이다.
  • “김일성망령 몰아내자”/우익노병들 나섰다

    ◎「민족회의」 결성… “대한민국 정통성 수호” 결의/국론분열 좌익책동 배격 다짐/“김일성의 반민족적 죄과 단죄해야 한국전쟁의 장본인 김일성조문파문이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해방후 좌익들과 싸웠던 「우익노병」과 각계 원로인사들이 16일 「자유민주민족회의(민족회의)」를 결성,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기폭제로 나섰다. 이 모임은 김일성사망과 관련,일부 야당 국회의원의 조문발언과 한총련 대학생들의 분향소 설치등으로 물의가 빚어지면서 자유·민주수호애국연합,한국기독교교회청년협의회등 80여개 민간 단체및 정치·법조·언론·학계·종교계등 저명인사들이 기존의 관변 반공단체들과 달리 자발적으로 대거참여해 구성한 것으로 특히 관심을 끌고 있다. 이철승반탁·반공 건국학생운동기념사업회장과 김점곤평화연구원장·장지양전공군참모총장·오제도변호사등 원로인사 5백50여명은 이날 상오 10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민주평화통일등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민주민족회의」결성대회를 열었다. 대회에는 채명신예비역중장·김재춘전중앙정보부장·박용만민자당고문·이도형한국논단발행인·양동안교수·정재호전국회의원등과 함께 육사8기를 비롯,원로 반공인사들이 참석했다. 상임공동의장을 맡은 이철승씨는 대회사에서 『최근 김일성 사망과 함께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국론분열양상이 나타나는등 해방 이후 최대의 체제 위기에 직면해 있다』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애국단체와 자유민주주의 인사들이 힘을 모아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이 모임체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6·25 전범 김일성은 비록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반민족적 죄악은 반드시 민족과 역사가 단죄할 것』이라면서 『김일성 독재체제와 반민족 노선을 계승하는 자와의 남북정상회담을 엄중 경계한다』고 선언했다. 참석자들은 또 『북한의 통일전선 동조세력들의 작태를 우리 주변에서 단호히 배격한다』면서 『북한 동포들이 반세기에 걸친 조선노동당의 일당 독재에서 해방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민족회의는 이날 김일성 사망에 애도를 운운하며 반민족적인 망언을 한 국회의원은 즉각 사과하고 의원직을 사퇴할 것과 일본 무라야마총리의 김에 대한 조의 표명은 우리 국민을 모독한 것으로 납득할 만한 해명이 없을 경우 오는 23일 방한을 저지하겠다는 장수동통일정책개발원장이 내놓은 긴급동의안을 채택,시행하기로 했다. 한편 이들은 이날 이찬혁전노총위원장등 12명을 상임공동의장으로 선출하고 오는 8월12일까지 체제를 완전히 정비,본격적으로 민주평화통일운동을 비롯해 북한 민주화촉진과 자유인권회복·해외동포의 평화통일 역량강화·이산가족 재회및 북한과의 다각적 교류추진 등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북5도민,조문 규탄대회 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는 16일 하오2시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내 통일회관에서 실향민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일성 죄상 규탄및 친북 용공분자 분쇄 궐기대회」를 갖고 김일성에 대한 조문을 주장하는 세력에 대해 엄중처벌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참가자들은 대회를 마친뒤 하오 3시쯤 이북5도청 광장에서 친북 용공세력을상징하는 허수아비 화형식을 갖고 구기삼거리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이날 결의문을 통해 『김일성 사망으로 남한에서 「주사파」를 비롯한 친북 회색분자들이 김일성 빈소를 마련하고 조문하는 등 반민족적·반민주적 망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면서 『국토분단 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실향민들로서는 김일성사망으로 빚어진 국민의식의 혼란을 좌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의문은 또 『김일성의 죄상을 규탄함으로써 국론분열을 불러 일으키는 친북 용공분자들의 정체와 책동을 단호히 분쇄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 이부영의원 사무실 상이군경 20명 농성

    15일 하오2시쯤 서울 강동구 명일동 민주당 강동갑지구당 이부영의원사무실에 6·25참전 상이군경 20여명이 몰려와 이의원의 「김일성주석조문발언」에 항의하는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이의원의 조문주장발언은 6·25를 일으킨 김일성의 죄과를 무시한 반애국적 주장』이라며 『이의원은 즉각 이 발언을 취소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 전남대에 「김일성 분향소」

    ◎학생회관에/초상화·촛대·검은 리본도 발견/「사망 애도」 유인물 4종 압수/경찰,주동자·배후 검거 나서 【광주=남기창기자】 김일성사망과 관련한 「조문발언」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대학교 안에 김의 사망을 추도하기 위한 분향소가 설치되고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유인물등이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전남지방경찰청은 15일 상오 4시 (주)금호노조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전남대에 10개중대 1천2백명의 정·사복경찰을 투입,농성근로자들의 해산과 압수수색을 하던중 제1학생회관 2층의 한 사무실에서 김일성을 추도하기 위한 분향소가 설치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분향소에서 검은테가 둘러진 김일성초상화(가로25㎝×세로30㎝)와 제단으로 사용된 널빤지(가로60㎝×세로50㎝)1개,받침대로 사용된 널빤지(가로80㎝×세로30㎝) 3개,향로용 물컵 1개,향촉 2갑,촛대 2개,국화 20송이,검은 리본 20개등을 증거물로 수거했다고 말했다.이 사무실은 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연합(남총련)산하 조국통일위원회사무실로 사용돼 왔으나 올해초 남총련본부가 조선대로 옮겨가면서 비어있었다.경찰은 또 이 대학 총학생회사무실에서 「주체의 기치따라 참된 삶을 지향하는 한국민중」명의의 애도문,김사망 발표문,「남한 애국민중」의 애도행동강령등 다수의 불온유인물과 책자등을 수거,공개했다.경찰은 『분향소에는 촛대등이 놓여 있었으나 불이 켜져있지는 않았고 분향소를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전남대총학생회는 『남총련은 그동안 김일성 사망과 관련해 어떠한 입장도 밝힌 적이 없다』면서 『대학구내에서 김일성 초상화와 촛대등이 발견됐다는 경찰의 주장은 남총련을 이적단체로 만들려는 비열한 음모』라고 밝혔다. 한편 전남대생 1백여명은 이날 경찰의 학내진입이 학교측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며 총장실과 교무처장실에 난입,유리창 수백장을 깨고 집기를 부수는등 난동을 부렸다. ◎보안법 적용키로 경찰청은 15일 앞으로 학생들이 대학에 김일성의 분향소를 설치하거나 애도하는 유인물 및 추모행사를 가질 경우 즉시 공권력을 투입,주동자와 배후세력을 검거해 국가보안법위반혐의를 적용할 방침이다. 경찰은 전남대 교내 김일성분향소 설치에 참여한 학생들을 모두 검거,사법처리하기로 했다.
  • 「애도 수위」 고심하는 한총련/김학준 전국부기자(오늘의 눈)

    요즘 한총련 관계자들은 8일 사망한 김일성에 대한 애도 표현의 수위및 방법등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다.개인적으로는 「통분」에 가까운 슬픔을 표시하면서도 정작 공식적인 애도는 자제하고 있다.한총련은 김의 사망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연일 회의를 열어 추모의 형식과 수위를 논의했지만 아직 공식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각 대학 총학생회별로 분향소설치등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국민정서를 감안할때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라는 신중론이 우세하다. 이같은 현상은 과거 각종 집회때 김의 사진을 걸어놓고 흠모에 가까운 정을 표시해온 운동권의 행태로 보아 이례적이다.학생들이 「낮은 수준」의 애도조차 망설이고 있는 것은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이 우려되기때문이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만고의 애국자 김일성」과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동족상잔의 원흉 김일성」 사이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또한 일반 학생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없는데 일반학생들 사이에 전혀 김일성추도 분위기가 형성돼 있지 않는 것도 자제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에대해 운동권 학생들은 정부의 정보통제와 언론의 극우적인 편향보도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한총련관계자들은 『다양한 정보를 접해보면 김주석이 독립운동과 조국통일에 헌신해온 뛰어난 선각자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면서 냉전논리속에 여론이 조작돼 일반인들의 김일성에대한 인식이 잘못돼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내세우는 김에대한 객관적인 평가자료라는 것이 대부분 북측의 선전용자료의 수준에 그치지 못한다는데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대남방송에서나 들을 수있는 김일성우상화나 신격화의 자료를 앵무새처럼 반복해온 이들의 「객관성」운운은 아무래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의 전파를 내세워 수백만 동족의 살상을 서슴지않은 전쟁을 감행한 그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나 평가없이 「통일의 화신」「만고의 애국자」등의 찬양은 어떤 부연설명이 추가되더라도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없다는 건 뻔한 이치다. 보다 균형감각이 있는 역사의식을 갖고 북한을 바라보는 성숙한 지성이 아쉬운 순간이다.
  • 미국 기업들/북진출 채비/미·북 3단계회담 기대감 반영

    ◎7개사 우회상륙… 전신사 등 관심/외국업체 1백44개사 이미 영업/코카콜라도 준비… 백악관,민간 「이익대표부」 검토 북·미 고위회담 재개를 계기로 양측간 관계개선 가능성이 전례없이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에 대한 미경제계의 관심도 부쩍 높아지고 있다.이와 관련해 워싱턴의 한미 경제 소식통들은 코카콜라가 중국 현지법인을 발판으로 북한에 진출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며 특히 지난해부터 재미교포 자본이 우회투자 방식으로 북한에 들어가는 케이스가 눈에띄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대북 비즈니스문제에 밝은 이들 소식통은 지난해 현재 북한에 진출 해 있는 외국기업이 모두 약 1백44개로 이중 일본이 1백27개로 단연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경우 재미교포 자본이 홍콩 등 제3국을 통해 우회 진출한 케이스가 의류부문 3개를 포함,모두 7개업체인 것으로 전해졌다.미국은 대북한 투자 및 무역을 극히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지난 92년 북한에 진출한 회사는 평양 소재 삼방연합합영회사와같은해 청진에서 문을 연 청진합영회사 및 조선삼방연합합영회사등으로 이들은 의류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추가 진출한 회사로는 애국텔레비전조립회사와 함흥 소재 애국접착체회사 및 흑연을 생산하는 명심합영회사가 있으며 92년부터 가동된 조선샘물주식회사도 미국계 자본이라고 이들은 덧붙였다. 미국의 유명한 경영 컨설팅 전문회사인 매킨지도 공식적으로는 북한 진출을 부인하고 있으나 실상 북한 비즈니스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 소식통의 귀띔이다. 또 미최대 전신전화회사인 AT&T가 북한 진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세계적인 국제우편물 탁송업체인 페더럴 익스프레스 역시 지난달 베트남에 대한 서비스를시작한데 이어 북한에도 들어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으나 확인 되지는 않고 있다. 일본과 미국에 이어 북한에 많이 들어가 있는 회사는 독립국가연합(CIS)소속으로 회천고리키합영회사 및 조·소해운회사 등 4개이며 중국이 청진동함합작건설등 3개사를 진출시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중국의 경우 올초 몇억달러 규모의 남·북한간 대규모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 문제도 적극 검토했으나 당시 핵문제로 한반도 상황이 좋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해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이밖에 프랑스가 양강도호텔,호주가 평양에 국제우편물 탁송회사인 TNT 사무소를,덴마크가 조·덴마크 국제회사를 각각 열고 있다고 이들 소식통은 덧붙였다. 이들은 미국이 3단계 고위회담에서 핵문제 타결을 전제로 북·미간 연락사무소 교환을 제의할 것이라는 관측이 미일각에서 나오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미 북한에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진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이들 미국계 자본이 그 발판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해 미일각에서는 백악관이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전초 단계로 무역대표부 등 공적인 성격이 강한 조직을 설치하는 대신 현지 진출 미업체를 이를테면 「이익대표부」로 활용함으로써 「정치적 부담」을 줄이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 이준열사/“을사조약 무효”외친 헤이그밀사(이달의 독립운동가)

    ◎만민공동회·신민회서 항일운동/고종친서 갖고 네덜란드로… 병사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으면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이면 모두 다 아는 일성 이준열사(1859년12월18∼1907년7월4일)가 남긴 어록이다. 이준열사는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위대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말대로 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든 애국선열이다. 함남 북청출신으로 소년기 최익현등 거유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은 열사는 30세때인 1888년 고향에서 가산을 털어 경학원을 설립,인재양성에 나서는 것으로 애국운동을 시작했다. 일본 조도전대에서 신식학문을 배운 열사는 이승만·이동령·민영환·이상재·이상설·이동휘·양기탁·남궁억·노백린·장지연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만민공동회 활동을 폈으며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당시 선생은 안창호·이상재와 함께 웅변의 대가로 장안에서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열사는 이후 안병준등 친일파 반대운동과 신민회조직 참여,국채보상운동전개등에 나섰다. 이처럼 쉴틈없이 구국운동에 헌신하던 열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비밀리에 광무황제를 접견,「을사조약은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됐으므로 무효」라는 내용의 황제친서를 건네받고 1907년 4월 밀사의 길을 떠났다. 2개월여만에 헤이그에 도착한 선생은 현지에서 일제의 폭압성을 알리기 위해 각국대표들을 만나려 했으나 이들이 거절하고 만나주지 않자 연일 통곡하다 마침내 병을 얻어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의 유해는 헤이그 에이켄무이넬묘지에 매장됐다가 순국 55년만인 지난 63년 조국의 품안으로 돌아와 국민장으로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으며 64년 서울 장충단공원에 열사의 동상을,72년 헤이그묘소에 흉상과 기념비를 건립했었다.
  • 르완다 불군/반군과 무력충돌 고조/「안전지대」 주변 병력대치

    ◎애국전선,거국정부 구성뒤 휴전선포/내전사망자 1백50만·난민 4백만명 【키갈리·파리 AFP 로이터 연합】 르완다에 파병된 프랑스군이 르완다 남서부에 「안전지대」를 설치,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경우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경고한 가운데 5일 르완다반군인 르완다애국전선(RPF) 병력이 안전지대로 접근해 들어감에 따라 프랑스군과 반군간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르완다애국전선은 이날 프랑스군이 설치한 안전지대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군이 반군의 르완다남서부 진격을 방해하도록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르완다 수도 키갈리와 제2의 도시 부타레를 장악한 반군은 현재 안전지대에서 20㎞이내의 지점에 주둔해 있으며 프랑스군은 반군의 진격에 대비,안전지대주변에 대한 순찰활동을 강화했다. 【키갈리 로이터 연합】 수도 키갈리를 점령한 반군단체인 르완다애국전선(RPF)은 5일 앞으로 수일안에 광범한 국민적 기반을 가진 거국정부를 구성한 뒤 휴전을 선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장 드 듀 하비네자 르완다노동사회부장관은 이날르완다내전으로 지금까지 1백50만명이 숨지고 난민 4백만명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하비네자장관은 제네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사망자중 다수종족인 후투족과 소수인 투치족의 사망자 수를 구별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르완다정부가 통제권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삼원평원과 고구려 땅/최두삼 북경특파원(오늘의 눈)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삼강평원에 한국인의 숨결이 스며들기 시작했다.한중합작으로 3년여의 준비끝에 드디어 흑용강성 삼강평원 두흥지주 1억평에 대한 농업개발 기공식이 현지에서 5일 성대하게 치러진 것이다. 기공식 참석자들에게 배포된 설명서가 요란하다.『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발원지이자 고구려 융성의 현지이며…영웅 안중근의사가 애국의 혼으로 거사를 이룩하신 하얼빈에서 멀지 않은 이곳…』 이 농업개발 사업을 주도해온 한국의 대륙 연구소(회장 장덕진)측은 『삼강평원 농장 개발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만주 진출의 꿈을 이룩하는 역사적인 과업』이라고 강조한다.그래서 이곳 농장 이름도 장차 「안중근 농장」으로 명명할 것이며 자라나는 한국 청소년들에게 조상들의 넋과 지혜를 배우게 하기 위해 「청소년 수련도장」까지 건립한다는 것이다. 장덕진회장이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해온 이 개발 사업은 백번 찬양해도 부족하다.한국인이 중국 땅까지 찾아와 서울 전체 면적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해 먼 장래의 식량 문제까지대비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다만 한번 더 되짚어 생각해 볼 일은 이곳 삼강평원이 남의 나라 땅이라는 사실이다.과거 우리 조상들이 살긴 했으나 현재는 엄연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다.남의 나라에 들어왔을 땐 그 나라 사람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헤아려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서울이나 경기도 어느 지역에 중국인이 찾아와 『여기는 원나라 때 우리 선조들이 1백년간이나 지배했던 곳이니 언젠가는 중국 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자.또 부산 일대에 일본인이 찾아와 『여기는 우리 국력이 융성했던 몇 십년 전만해도 일본 땅이었고 우리 부모 형제들이 36년간이나 땀 흘려 가꿔온 땅』이라며 되찾고 싶다는 내색이라도 비쳤다고 하자.모르면 몰라도 그들은 한국인들의 몽둥이 세례 때문에 한국 땅에서 단 하루도 버텨 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중국땅에 와서까지 『우리 조상의 숨결…』등의 얘기로 중국인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그동안 중국에 체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불평을 너무 자주 들어왔기에 하는 말이다. 『한국인들은 요즘 고구려 옛 땅을 되찾겠다고 야단들이데요.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얘기지요』
  • 김공집선생 유해 환국/러서 67년만에… 국립묘지 안장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27년 8월 러시아에서 비행훈련중 순국한 애국지사 김공집선생의 유해가 4일 하오 1시25분 대한항공 924편기로 모스크바에서 환국했다. 이날 김포공항에는 선생의 손자인 종근씨(62·미국LA거주)등 유족들과 광복회원등 50여명이 나와 고인의 유해를 봉영했다. 선생의 유해는 이날 하오 곧바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옮겨져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 선생의 유해봉환은 46년 윤봉길의사등 3분의 애국지사가 환국한 이후 33번째이며 러시아에서 봉환되기는 처음이다.
  • 르완다반군 수도 키갈리 점령/국방부 청사 접수… 주민탈출 사태

    ◎불군,반군 서부총공세 저지 태세/전략요충 부타레도 장악 【키갈리·브뤼셀 로이터 AFP 연합】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가 4일 상오(현지시간)반군인 르완다애국전선(RPF)에 함락됐다고 목격자들과 RPF 지휘관들이 말했다. RPF반군들은 또 정부군과 치열한 격전끝에 르완다 제2의 도시이며 전략요충인 부타레를 장악했다고 프랑스 관리들이 전했다. 투치주인 RPF반군들은 그동안 포위망을 좁혀온 수도 키갈리에 박격포와 소화기공격을 펼친끝에 키갈리에 입성,정부군의 마지막 저항거점인 국방부 청사를 장악했다고 유엔감시단 대변인이 밝혔다. 현지 목격자들도 RPF가 지난 이틀간 키갈리의 정부군 진지에 대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한데 이어 4일 새벽 지상군을 동원한 총공격에 나서 키갈리 중심가를 점령했다고 확인했다. 르완다 정부군은 반군들이 입성하자 수도를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르완다 현지에 파견된 프랑스군의 장 클로드 장군은 이와 관련,『카갈리 함락과 함께 대규모 종족학살이 발생할 것이며,이에따라 난민들이 서부지역으로 이동할것』이라고 우려했다. 벨기에의 RTBF방송도 RPF의 수도 점령으로 주민들의 대량탈출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키갈리를 장악한 RPF반군들은 현재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는 친정부군 민병대병력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벌아고 있다고 현지 목격자들은 전했다. 수도 키갈리가 마침내 함락됨에 따라 RPF 반군들은 정부군의 마지막 저항거점인 서부지역에 병력을 집중,총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됐다. 한편 르완다 서남부에 진주한 프랑스군은 4일 RPF군의 서방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오늘 남북실무접촉… 정부 움직임

    ◎“북측요구 가능한하 수용” 방침/선전 이용될 옥외행사는 거부 1일 판문점에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을 하루 앞둔 30일 청와대·통일원 등은 바쁜 움직임을 보였다. ○…청와대는 외교안보수석실을 중심으로 사실상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가는등 실무및 정상회담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 청와대는 이날 상오 박관용비서실장과 정종욱외교안보수석이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하느라 박실장 주재의 수석비서관회의도 취소했으나 정상회담준비에 있어 실무적 총괄기능을 맡고 있는 통일관련 비서관실은 사무실에 회의용 탁자를 들여놓고 야전침대까지 갖추는등 24시간 근무체제에 돌입. 청와대는 정상회담 대표단의 규모및 일정,의전·경호등 회담준비에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은 1일 실무접촉에서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고 실무접촉결과에 따라 보다 구체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간다는 방침. 청와대는 이에따라 실무접촉 결과가 끝나는대로 현재 가동중인 경호및 의전대책반을 확대하는 한편 홍보등 각 분야별로 별도의 대책반을 만들어 회담준비에 들어갈 예정. ○…남북정상회담의 실무업무를 맡고 있는 통일원은 이날 이홍구통일부총리 주재의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가진데 이어 통일고문회의등 내부대책회의를 잇따라 갖고 남북실무접촉에서 제시할 우리측 안을 마지막 손질. 통일원은 1일의 실무접촉에서 되도록 북한측과 타협하는 태도를 보이기로 내부방침을 정해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은 예상보다 일찍 끝날 전망. 정부는 이날 대책회의에서 정상회담대표단의 규모,회담의 형식,체류일정,선발대의 인원및 출발시기,왕래절차,편의 제공,신변안전보장등에 관한 우리측의 구체적 안을 확정했으나 협상을 앞둔 탓인지 대체적 윤곽만을 보도진에게 브리핑. 정부는 또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정상회담기간동안 평양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상황은 미리 요구하지 않기로 했으나 금수산의사당(일명 주석궁)에서 열리는 환영만찬등 옥내행사 말고 선전에 이용될 수 있는 외부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또 혁명열사탑 참배등 우리측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사전에 봉쇄하는 방안도 수립.따라서 김영삼대통령이 북한이 자랑하는 집단체조를 구경하기 위해 5·1 경기장을 방문하거나 인민문화궁전등을 돌아보는 기회는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민족의 명산인 김강산 관광은 우리측도 검토할수 있다는 생각.
  • 정상회담/최고위급회담/명칭따라 의전 큰 차이

    ◎김 대통령의 「평양2박3일」 예상 일정/단독회담 2회­확대·실무회담 1회씩/회담장 주석궁·대동강요트 유력 평양에서의 2박3일.그 역사적인 시간들은 어떤 일정으로 채워질 것인가.28일 예비접촉에서 합의된 사항이라고는 시기와 장소뿐.장소도 막연하게 그저 평양이다.김영삼대통령의 평양 체류일정과 의전·경호등 구체적인 절차는 7월1일 남북실무자들의 접촉에서 결정된다.예비접촉의 분위기로 미루어 볼때 실무접촉 역시 순조롭게 진행될 전망이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회담의 성격을 정하는 일.정상회담으로 하느냐 아니면 최고위급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다.정상회담과 최고위급회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정상회담은 문자 그대로 정상간의 회담이다.회담의 파트너를 일국의 원수로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다시 말해 남한과 북한이 공식적으로 상대방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북한은 자기 나라를 방문하는 남한의 대통령을 위한 공식환영행사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해야한다.회담장과 남­북한의 회담 관계자들이 타고 다니는 승용차에도 인공기와 함께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김대통령의 숙소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민족문제를 외교적 문제로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하는 일을 북한이 할 리가 없다.여러차례 진행된 고위급회담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주민들에게 남한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북한은 회담의 명칭을 정상회담이 아닌 최고위급회담이라고 부르고 있다.명칭을 최고위급회담으로 하면 이런 고민들이 없어진다. 그러나 양쪽 실무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할 것 같지는 않다.상대방을 자극할지 모르는 워낙 미묘한 사안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정상회담과 같은 의전절차는 생략될 가능성이 크다.결국 의전과 경호는 고위급회담의 수준을 좀더 높이는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우리쪽의 의견도 반영되기는 하겠지만 회담이 북쪽에서 열리는 만큼 의전과 경호,그리고 일정을 짜는 일은 대부분 북한의 몫이 될전망이다. 예상대로라면 김대통령은 평양에서 매우 빠듯한 일정을 보내야 할 것 같다.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대체적인 일정은 단독 정상회담 2차례,그리고 확대정상회담과 공동성명 작성을 위한 실무회담 한차례씩.물론 첫번째 단독 정상회담에서 원칙이 합의될 때 그렇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여기에 북한측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곳의 방문등이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은 북한의 영빈관인 백화원초대소 또는 흥부초대소에 머물면서 흔히 「주석궁」으로 불리는 금수산의사당과 대동강 요트위에서 회담을 가질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확대정상회담과 만찬장으로도 역시 금수산의사당이 유력하다.금수산의사당은 지난 90년 10월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때 강영훈전총리가 김주석을 만났던 곳.또 흥부초대소는 72년 밀사로 방북했던 이후락전중앙정보부장이 묵었던 곳이다. 김대통령은 또 북한을 방문하는 외빈이 그래왔던 것처럼 평양시내에 있는 인민문화궁전·소년궁전·평양산원·평양교예극장·김일성대학,그리고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평양근교의단군왕릉도 돌아보게 될 것 같다.평양에서 자동차로 5시간 걸리는 금강산에까지 다녀올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하지만 귀로에 짬을 내 개성에 있는 고려 태조릉을 방문할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 양기탁선생 묘소를 찾기까지/백범이 남긴 약도로 사후56년만에 확인

    ◎유족들,제자와 함께 정확한 위치 찾아/“유해봉환위해 정부차원 지원 있어야” 『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산과 골이야 아무리 깁허도 우리마음은 당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물과 불이야 아무리 겁나도 우리마음은 해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달과 놀이야 아무리 발거도 우리마음은 빗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총과 칼이야 아무리 무셔도 우리마음은 뚜룰수 없누나/…』(양기탁 「아해들 노래」 중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자 언론선각자로 평생을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한 우강 양기탁선생(1871∼1938)의 묘소가 중국 강소성 율양현의 한 시골마을에서 후손들에 의해 발견됐다. 상해에서 내륙쪽으로 7시간 이상 버스로 달려가는 강소성 남부의 작은 마을 대부진 남문두에는 아직도 우강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생존하고 있어 그들의 증언을 통해 우강이 기거하던 고당암터와 묘소터를 확인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해서 7기간 거리 우강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를 창간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행동하는 필봉」으로 민족자존의 횃불을 드높였다.또 일제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무대로 민족적 자각과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이번에 그의 묘소가 사후 56년만에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오는 7월18일 대한매일신보 창간 90주년을 앞두고 더욱 뜻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우강의 묘소는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가족들은 물론 애국선열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해오고 있는 정부와 뜻있는 이들의 애를 태워왔다. 우강의 묘소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후 유족들에게 건네주었던 묘소의 약도였다.백범은 우강과는 5년 연하로 신민회 활동에 이어 상해 임시정부등에서 함께 활동해와 남다른 교분을 갖고 있었으며 해방후 우강의 유족인 장남 효손(6·25때 납북)에게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라며 현장의 위치를 그려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이 약도는 우강이 말년에 기거하던 고당암과 주변의 뽕나무밭,묘소위치등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3월 이 약도를 들고 묘소를 찾아나섰던 우강의 자부 최선옥씨(76)는 『납북된 남편의 뜻을 40여년만에 이루게돼 여한이 없지만 어서 유해를 모셔와 고국에서 편안하게 영원히 쉬시게 하는 일이 남아있다』며 울먹였다. ○농지개선작업때 이장 우강의 묘소를 찾는 작업은 독립운동가 박은식선생의 손자이자 최씨의 사위인 박유철씨(56·건설공무원교육원장)가 4∼5년전부터 모친(최윤신·77)의 중국에 사는 친척들을 통해 수소문하면서 시작됐다.그 결과 대략적인 위치가 파악됐으며 이번에 박씨가 모친·장모와 함께 현장을 답사,백범의 약도와 비교해보고 생존한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게 된것이다. 우강의 묘소는 원래 고당암 앞의 뽕나무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60년대 모택동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농지개선작업때 4∼50ⓜ 남쪽으로 이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밭 한가운데 거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게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이 마을에서 만난 제자이자 이장을 역임했던 번정재씨(79·농업)는 『선생은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학문이 높고 기공의 경지가 높아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선생이 기거하시던 고당암에는 늘 기공을 연마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덧붙였다. 우강의 유족측은 올 가을쯤 다시한번 강소성의 묘소를 방문,구체적인 유해봉환을 위한 절차를 현지정부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까지는 반드시 유해봉환이 이뤄질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줄것을 강력히 촉구했다.◎양기택선생의 항일 족적/대한매일신문 창간… 국권회복 앞장/신민회 결성… 독립군 양성 등 무장투쟁 말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돼가던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태어난 우강은 소년시절 한학을 배운뒤 15세때 상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25세때 부친과 함께 미국인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그 과정에서 일본 미국등을 다니며 선진문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어서 1898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개혁당 당원으로 활약하는등 활발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을 맡기도 했다. 우강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관할권을 내세우는등 침략을 노골화하자 이를 견제하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따라서 당시 영국 데일리뉴스의 임시특파원으로 서울에 와있던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을 사장으로 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아 새신문을 창간했던 것. 국한문 혼용의 국내용 신문과 별도의 영문판도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잔혹한 통감정치 하에서도 전국각지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다루고 국채보상운동을 펴는등 국운이 쇠하여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끝까지 민족에게 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심어 국권회복운동의 불씨를 재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강은 또 안창호·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대한매일신보 사무실내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벌이던 신민회는 1909년 전국대회를 열고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어서 한일합방을 앞둔 1910년 3월에는 신민회가 만주 망명을 결정하고 서간도에 기지를 마련,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치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이같이 신민회의 활동이 해외거점을 확보하자 일제는 1911년 7월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날조,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하고 신민회를 해체해버렸다.이어 13년에는 총독암살사건(일명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4년만에 감형으로 출소한 우강은 16년 주거제한지인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를 탈출,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했다.그러나 2년뒤 18년에 천진에서 일본경찰에게 다시 체포돼 국내로 압송,전남 거금도로 유배됐다. 20년 4월 유배를 끝나고 서울에 와있던 우강에게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가 고문및 편집감독으로 추대를 제의해 왔지만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는 거절했다. 34년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 우강은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그러나 그는 주석직도 얼마 가지 않아 사임했으며 모든 관직을 떠나 강소성 율양현으로 들어가 선도에 몰입하다 38년 4월,67세로 이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우강은 이같은 공로로 62년 독립유공자중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았으며 86년 독립기념관의 독립유공자 임정위원 42인에 추대됐다. ▷연보◁ △1871 평남 평양 소천출생 △1885 한성외국어학교 영어수학 △1895 게일의 영어사전편찬 도움 △1900 나가사키 유학 △1904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 신민회 조직 △1913­5 「양기탁 보안법 위반사건」 및 「105 사건」등으로 투옥 △1916 만주로 탈출 △1918 전남 거금도 유배 △1922 만주에서 의성단 조직 △1926 임정 국무령 추대,거절 △1934 임정 주석 선출 △1938 강소성 담양현 고당암에서 선도연구중 사망
  • 승용차 함께 타고 국립묘지 나란히 참배/전·노전대통령 화해하던 날

    ◎오찬뒤 어깨동무·포옹… “우정 복원” 과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이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두사람의 정권 인수인계후 벌어진 이른바 「5공청산」 작업에 따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던 대립과 반목을 극복하고 6·25 44주년을 맞은 25일 실로 6년4개월만에 처음으로 함께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오찬을 나누며 화해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날 만남에서 두 전직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두 사람이 완전히 화해했다』고 선언하고 『앞으로도 자주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5공」과 「6공」의 화합이고 그 세력의 결집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여러가지 각도에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전·노전대통령은 이날 상오 10시57분쯤 각자의 승용차로 거의 동시에 현충문 앞에 도착,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현충탑과 애국지사 묘역,이승만·박정희전대통령의 묘역,임정 묘역,경찰충혼탑등에 차례로 헌화,분향. 두 사람은 우의를 과시하듯 줄곧 전전대통령의 포텐샤승용차를 함께 타고 움직였으며 전임자이자 차주인 전전대통령이 상석을 차지. ○…국립묘지 참배를 마친 두 사람은 서울 역삼동의 음식점으로 이동,갈비에 술을 곁들여 1시간30분동안 오찬.두 전직대통령은 이날 오찬에 앞서 기자들에게 회동의 의미와 심경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 전전대통령은 『사람이 살다보면 싸울 수도 있는 것인데 두 사람이 대통령을 지내다 보니 쉽게 만나지는 못했다』면서 『이제 지난 문제는 역사에 맡기기로 하고 여생을 미래지향적이고 보람있게 사는 문제를 얘기할 것』이라고 피력. 노전대통령도 『부부지간에도 싸우고 화해하고 하는데 60평생을 살아오면서 꼭 같을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둘 사이가 나쁜 것으로 생각,국민들이 걱정하고 있으니 국립묘지에 묻힌 선열 앞에서 흔쾌히 씻어버리고 잘 지내기로 했다』고 설명. 전전대통령은 두 사람의 회동에 대한 정치권의 심상치 않은 눈초리도 의식한듯 『색다른 눈으로 보지 말아달라』고 특별히 당부하기도. ○…이어 시작된 오찬에서 전전대통령은 장세동전안기부장과 박영수전비서실장을,노전대통령은 정해창전비서실장과이현우전안기부장을 배석시키고 오찬을 시작.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맥주와 포도주에 국산양주까지 섞어 마시며 그동안 쌓였던 앙금을 해소.특히 전전대통령은 오찬중에 술을 많이 마셔 금세 취기가 오르자 왼손을 들어 노전대통령과 배석한 이현우·정해창전실장등을 가리키며 큰 목소리로 그동안의 섭섭한 심경을 숨김없이 표출하기도.그러나 이날 오찬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고 참석자들은 전했고 식사중 4∼5차례에 걸쳐 박수가 터져나왔으며 밖에서 기다리던 안현태·최석립전경호실장도 불러 두 전대통령이 술을 한 잔씩 따라주며 단합을 강조. 오찬이 끝난 뒤 전·노 두 전대통령은 다정스레 어깨동무를 하고 오찬장에서 나와 음식점 앞에서 포옹을 하며 우정의 복원을 과시하기도. 전전대통령이 먼저 연희동으로 출발한뒤 노전대통령은 『모든 게 다 풀렸다』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만족. ○…이날 회동의 산파역은 안현태·최석립전경호실장.육사 17기로 전전대통령을 섬겼던 안씨와 육사 19기로 노전대통령을 보좌했던 최씨는 평소부터자주 만나면서 두 전대통령이 만나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으며 6·25에 국립묘지를 참배한다는 일정이 맞아떨어지자 전·노 두 전대통령에게 이같은 뜻을 상신,승낙을 받고 회동을 추진했다는 것.
  • 6·25 44돌… 학도병 참전 용사들의 회고 특별대담

    6·25때 홍안의 미소년으로 전장을 누볐던 학도병들은 몇차례 강산이 바뀌는 세월속에서 이제 이순을 넘긴 노년의 옛전사로 변했다.하지만 이들의 가슴속에는 동족상잔의 아픔이 지금도 어제일처럼 살아있다.포연의 전장에서 불퇴전의 용기로 살아남은 유성덕 서울대광고교장(63)과 정년탁대한학도의용군회 총본부 전회장(63)의 대담을 통해 그날을 되새기고 오늘날 젊은이들이 가져야할 자세등을 되짚어본다. ◎“펜대신 총으로…” 5만여명 구국전선에/조국사수 일념에 사격훈련만 받고 전투/곳곳서 맹활약… 포항선 71명 장렬한 산화/“자유만끽” 요즘 젊은이들,기성세대의 체험 곱씹어 보아야 ▲유교장=사실 저는 의식적으로 6·25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하지만 또 한시도 기억에서 떨쳐버리지 못하는게 바로 6·25지요.중학6년(18세)때 학도병으로 자원해 나갔다가 온 몸을 크게 다쳐(왼쪽 손가락 4개와 오른 손가락 2개,양쪽 발가락절단,발뒤꿈치 골수염) 지금도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하는 불편한 상태입니다.하지만 해방이후 북쪽의공산당이 싫어 평양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학도의용병으로 참전해 죽을 고비를 넘긴끝에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교육자로 평생을 지내고 있으니 그래도 행복한 편이라 생각합니다. 6·25발발 직후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할 당시를 생각하면 우리 남쪽은 정말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지요.북한군에 밀려 대구와 부산만 겨우 남아 있었으니까요.피란지인 부산에서 중학교 영어 실력이지만 미군부대에서 일하다 학도의용군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50년 8월 초쯤으로 기억됩니다.어린 나이였지만 「펜대신 총을 들어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자」고 모두들 나서는 분위기였습니다.전투에 나가 더이상의 북한의 공세를 막아야한다는 생각에 미군부대에 보고도 않고 곧바로 의용병모집 장소로 달려갔습니다.함께 지원한 2백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경주에서 3일동안 사격훈련을 받고 안강전투에 참가했지요.갑자기 모집한 학도병이고 보니 복장도 교복차림에 군복,미군작업복등 각양각색이었어요.우리가 배속된 부대가 김석원준장(작고)이 이끄는 수도사단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당시 학도병들은 일정지역에 모아 부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모이는대로 그때 그때 전투지역으로 보냈지요.그만큼 병력은 부족하고 전황은 다급했다는 이야기지요.정회장도 학도병에 자원할 당시 중학생이셨지요. ▲정전회장=저는 중3때 광주지역에서 학도병으로 참가했어요.사실 호남지역에는 6·25이전에 이미 빨치산등 좌익세력이 적지않았어요.학교에도 좌익에 물든 사람이 꽤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학생은 물론 선생까지 좌우로 갈라져 있었어요.어린 눈에 좌익분자들이 사람을 백주에 죽이는것을 보고 까무러쳤습니다.좌익학생들의 연대파업등을 수없이 보았습니다.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고 학도병을 모집한다고 하니까 공산당의 폐해를 피부로 경험한 학생들이 너나없이 몰려나갔지요.4일동안 간단한 사격훈련등을 받고 12사단에서 배속돼 주로 태백산과 노령산 일대에서 전투를 했었죠.훈련받을 때 총이 모자라 인민군의 딱총도 함께 사용했던 기억이 납니다.어릴때 공산당의 잔학상을 보아왔던 때문인지 사람이 죽는다는걸 별로 무섭게 느끼지도 않았던것 같아요.안강전투는 대단했다면서요. ▲유교장=지금생각해도 정말 대단했습니다.우리로서는 더이상 밀리면 부산·대구까지 내주어야 하니까 몸으로라도 끝까지 사수해야하는 마지노선이었어요.죽거나 부상당해 후송되는 학생들 말고는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당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학도의용병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지요.학도병들의 용기는 현역병을 훨씬 능가했습니다.살아남겠다는 생각없이 그야말로 물불을 가라지 않고 싸웠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을 겁니다.지금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나 싶어요.형산강을 피로 물들이고 일주일여 사투를 벌이니까 북한군이 물러서기 시작하더군요.이후 포항탈환작전에 참가,시가전을 벌였고 고성,함흥등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포항 시가전에 참가했을때 어느 중학교에는 인민군과 우리 군과 학도병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기도 했습니다.결국 그들을 포항에서 물리친 것이지요.북진이 계속되고 김일성이 다급해지니까 중공군에 도움을 요청,이른바 중공군의인해전술이 시작돼 우리는 다시 남으로 밀리게 됐지요. ▲정전회장=교장선생님도 지적하셨지만 당시 학생들의 전의는 대단했습니다.군대 안가려고 일부러 손가락까지 자르던 일부 징집대상 젊은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피끓는 울분을 토로했던 기억이 납니다.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한마디로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지요.죽음을 초월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런일도 있었어요.태백산자락 어느 전투에서 북한군과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였어요.어느 지점을 며칠만에 지나는데 태극기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 반듯이 누운 한 젊은이를 발견했어요.죽은 줄알고 다다가 보니 목숨이 붙어있더군요.전투중에 실종된 학도병이었습니다.이 친구는 부상을 당해 낙오가 되고 기력이 떨어져 움직일 수 없게되자 가지고 있던 총을 인민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완전히 분해해 버리고 태극기로 얼굴을 가리고 죽음을 기다린 것이지요. ▲유교장=당시 학병들의 참전은 아군의 전투력증강에 상당한 보탬이 된것으로 압니다.정회장은학병모임일도 보신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전회장=대한 학도의용군회 회장을 여러해 맡았습니다.학도의용군은 50년 6월 전쟁발발때부터 51년 4월 이승만대통령이 복교령을 내리기 직전까지 전쟁에 참여했던 학생들로 중학생과 대학생들로 구성됐었습니다.50년 6월28일에 피란가던 서울시내 각대학 학도호국단 간부 2백여명이 수원에서 합동비상학도대를 조직한 것이 시발이었습니다.이후 각 군소재지 학교에서까지 이들이 결성돼 눈부신 활약을 벌였어요.군번도 없고 계급도 없이 말입니다.5만여명 정도가 참전했고 7천여명이 전사했습니다.당시 정규군병력이 15만에도 못미치는 상황이었으니 규모면에서도 대단한 것이지요.그중에서도 중학생이 가장 많았습니다.1·4후퇴때는 북한에서 2천여명의 학생들이 넘어와 참전했었고 부산지역의 학생 7백여명은 유엔군에 편입돼 일본에서 훈련을 받은뒤 다시 돌아와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었죠.가장 비참했던 전투는 포항전투로 1기로 참전했던 3사단 학도의용군 71명 전원이 이름없는 고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역사적으로 학생들의 애국심이 이처럼 높았던 나라는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외에는 없다고 외국전문가들도 이야기합디다. ▲유교장=학병들의 정신은 지금도 면면이 내려온다고 생각됩니다. ▲정전회장=그렇습니다.지금도 국립묘지에 가보면 6·25당시 어린 나이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학도의용군들의 묘역이 있습니다.지금도 당시 같이 전투에 참가했던 동료들을 만나면 그때의 이야기들을 하곤 합니다.당시 장성들을 만나도 학도병들의 애국심과 용기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제가 보기에 학생운동의 맥은 일제시대의 광주학생운동과 해방직후 반탁반공운동,4·19의거,그리고 6·25때의 바로 이 학도의용군으로 이어지지않았나 생각합니다.역사속에 면면이 흐르고 있는 피끓는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당시 절박했던 상황이나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선배들의 정신을 너무 모르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세계적인 변화속에서 반공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고요. ▲유교장=독사에게 물려본 사람만이 독사가 무서운 줄 알듯 전쟁을 겪은 사람만이 전쟁의 고통과 공포를 알 수 있지요.자유역시 마찬가집니다.자유를 빼앗겨본 사람만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요즘 젊은이들은 민주화 민주화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진정 자유가 박탈된 상태,전쟁이 주는 공포는 체험해 보지 못했습니다.기성세대의 뼈아픈 체험을 한번쯤은 곱씹어 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기성세대를 무조건 이해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가슴에 담고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자신들의 포부를 펴나가라는 것이지요.일제와 6·25를 겪으며 고난의 역정을 걸어온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부인의 대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열어나가는 좌표로 인식돼야합니다. 학생들이 사회의 모든 일에대해 지나치게 간여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정치는 정치인에게 국방은 군에 맡기고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주길 바랍니다.또 국민역시 각성해야 할 부분이 적지않다고 봅니다.지난 현충일 연휴때 나들이 인파로 주요도로가 모두 만원을 이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날의 어려움을 모두 잊지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전회장=지금 북한의 변화는 김일성의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들의 정세에 맞춰 겉모습만을 바꾼 것뿐입니다.그런데도 학생들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 폭력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나름대로 애국심을 가진 행동이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북한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학생운동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시대에 맞게 어른들과 선배들의 충고에도 귀기울일줄 알아야죠.통일에 대한 문제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고루 반영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6·25전 좌익활동 학계의견 정리

    ◎“대구폭동­제주 4·3사건 항쟁일수 없다”/박헌영의 「미군정 타도」 폭력 노선이 원인/민중사관 주장 극복… “분명한 폭동” 결론 「대구폭동」인가 「10월항쟁」인가,「제주도 4·3사건」인가 「제주도 4·3항쟁」인가.지난 봄 교과서의 역사용어 변경을 위한 시안을 놓고 벌어졌던 이같은 논란은 과거와 같은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비록 논의 차원이기는 했지만 새 정부가 그처럼 진보적인 사관을 교과서개편 문제에까지 개방했기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그만큼 정부의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들썩거렸을 만큼 파문이 길었던 것은 이 시비가 대한민국의 정통성 시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6·25 44주년을 앞두고 이 문제가 다시 기억되어야 하는 것도 「10월 항쟁」「4·3항쟁」이라는 시각이 수용된다면 6·25 또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는 『「10월항쟁」이나 「4·3항쟁」이라는 표기는 첫째 국내의 민중사관,둘째 북한의조선전사,셋째 중국의 혁명사관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단언했다.그들의 시각에 따르면 일제하의 독립운동은 이른바 「민족해방투쟁」인 만큼 8·15는 광복이 아닌 「민족해방」이다.또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은 8·15이후 미군정 치하 남한에서 「민중항쟁」이라는 형태로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이같은 논리에 따라 그들은 「민족의 통일염원을 저버린 대한민국의 건국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징벌을 받게되며 6·25는 북침이었을지도 모르는 단지 한국전쟁일 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현강연세대교수는 『그같은 민중사관을 그동안 적지않은 학자들이 편향적이 아닌가 우려하면서도 용인해 온 것은 학문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이라면서 『학계를 벗어나면 용인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학자들은 「폭동」과 「사건」이라는 단어의 차이만큼 현재 국사 교과서의 표기대로 「대구폭동」과 「4·3사건」을 차별화한다. 이현희성신여대교수는 먼저 『「대구폭동」은 폭동일 뿐』이라고 말했다.아무리 진보적인 연구성과가 나와 있다고 해도 그 때를 체험·목격한 격앙의 세대가 악의적의 공산 파괴공작의 맥락에서 비롯된 당시 상황을 증언·열변하고 있는 한 달리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덕규이화여대교수는 『1948년 대구에서 일어난 사건을 폭동으로 보느냐 항쟁으로 보느냐는 문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면서 『이는 우리 국가의 이념까지 연결되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현희교수는 그러나 『과거 일반화된 표기였던 「4·3제주폭동」은 그 간의 연구와 지역적 특수성으로 볼 때 「폭동」이라 표기하기에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 학계 대다수의 시각』이라고 전하고 『이같은 시각은 교과서에 「4·3사건」이라고 표기됨으로써 이미 수용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승조고려대교수는 이 두 사건을 남로당 총책 박헌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남로당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1946년 가을부터 폭력투쟁 노선으로 전술을 바꿨으며 이는 좌익세력에 대한 과신과 우익 세력에 대한 과소평가에서 비롯된 과오로「대구폭동」과 「4·3사건」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한교수에 따르면 박헌영이 보기에는 미군정이 국민적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고 보수세력도 한줌 밖에 안되므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계산했다.한편으로는 북한 인민군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해 3만명의 경찰과 5만명의 국방경비대를 상대로 폭력과 무장투쟁을 하다 좌익세력은 모두 소진됐다.또 박헌영은 남로당 조직에게 모두 총탄이 되어서 「5·10총선거」를 저지할 것을 명했으나 많은 인명의 살상과 대량 구속을 초래했을 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저지하지 못했다.결론적으로 상대방의 전력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극한투쟁을 벌이다 좌익세력의 총 붕괴를 재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정통주의적 입장에 서는 학자들 사이에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좌익·혁신적인 학자들에 비해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기회주의적인 경향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좌파학자들에게 보수·반동·어용으로 낙인찍히며 공격당할까 두려워 사실과 다른 억지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이의나 반론을 제기하기를 꺼려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려 속에서도 이제 폭동을 폭동이라고 제목소리를 내는 학자가 많아졌다는 것은 폭동이냐 항쟁이냐의 논쟁을 계기로 우리 학계가 한부분의 건강은 되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평가이다. ◎46년10월 대구폭동/경찰서 등 방화·군수 살해/식량요구 시위가 발단… 경남북 등 확산 「대구폭동」은 1946년10월1일 상오 쌀을 나누어준다는 풍문을 듣고 대구시청 앞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가 발단이 됐다.당시는 미군정 아래 좌우대립으로 정국불안이 계속되고 물자부족과 군정당국의 식량공출로 생활고가 극심한 가운데 좌익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이른바 「9월총파업」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태는 하오 들어 시위군중이 1만여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하오7시쯤 대구역 앞에서 경찰의 사격으로 한 시민이 숨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흥분한 시민들은 이튿날인 2일 아침부터 경찰서·역·시청 앞 등에서 대규모시위를 벌였고 당초 식량배급을 요구하던 구호도 애국자석방,조선인에게 행정권이양 등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갔다.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하고 대구시청 간부의 집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이에 군정당국은 하오7시 대구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미군의 출동으로 대구의 소요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시위는 다음 날인 3일 저녁부터 영천·달성 등 주변지역으로 번져나가 11월 중순까지 경북전역과 경남·전남·강원지역에서 계속됐다.시위가 일어난 대부부의 지역은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철도가 파괴됐다.특히 시위가 극심한 영천의 경우 경찰서·군청·재판소가 불타고 군수가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48년4월 4·3사건/좌익의 지서습격이 원인/9년간 희생자 3만∼8만명 추정 「4·3사건」은 제주도에서 1948년4월부터 만9년동안 최소 3만명에서 최대 8만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를 낸 해방후 최대의 유혈사태였다. 사건은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총선을 한달남짓 앞둔 4월3일 상오2시,산중에 집결해 있던 제주도민 2천여명이 도내 15개 경찰지서 가운데 14개를 일제히 습격하면서 시작됐다.이들은 「미군철수」와 「단독선거반대」 「이승만매국도당타도」 등 구호를 외치며 일부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좌익세력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미군정은 즉각 1천7백여명의 경찰을 비롯,국방경비대와 우익인사들인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했다.이에 봉기대와 이에 동조한 도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장기적인 유격전의 성격으로 전환됐다. 이후 봉기대를 주민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근거지가 되는 마을전체를 불살라버리고 주민들을 집단이주시키는 군·경의 소개작전과 이에 맞선 봉기대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이 과정에서 양민을 포함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이 사건은 또 진압을 명령받은 군대가 이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킨 48년10월 「여순반란사건」을 촉발시키기도 했다.「4·3사건」은 1957년4월2일 마지막 「빨치산」 오완권이 생포되어서야 비로소 막을 내렸다.
  • 국군은 모두가 모범용사(사설)

    『애국자중의 애국자 모범용사』.청와대서 용사들을 맞으며 대통령은 그렇게 치하했다.국가의 위란이 현실성을 띠고 우리앞에 다가오자 우리에게 먼저 떠오른 것은 국군의 위용이었다.우리도 용사들을 치하한다. 누구도 감히 도전을 못할 만큼 국군은 막강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에 동감한다.군인들의 세계에는 『전시에는 사랑을 생각하고 평화로울 때 전쟁을 생각하라』는 경구가 있다고 한다.군은 평화를 위한 보장장치이고 수단이므로 평화시에도 전략을 세워야 한다.북핵이라고 하는 민족의 명운이 볼모잡힌 상황에서 국방의 역할을 절실하게 상기하면서 지금 우리는 군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분위기에 있는데 「전쟁 대비」를 운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전략의 기본을 모르는 말이다.튼튼한 방비를 배경으로 하고서야만 적에게 오판의 모험을 안하게 할수 있다.그런 뜻에서 협상이란 또다른 전쟁이다.우리 「모범용사」들은 그 역할에 충분할 만큼 믿음직해 보인다.우리의 모든 국군은 모범용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그 모두가 한꺼번에 기회를 가질수는 없으므로 모든 국군에게 보내는 창무를 모범용사를 통해 보낼 뿐이다.서울신문의 이 행사는 국군용사들만을 위한 기회가 아니다.군의 믿음직한 위용은 후방에 보다 큰 위안이다.여유가 생기고 어려움이 멀어지니까 근신을 모르게 된 우리를 용사들은 바로세우기도 한다. 죽을 각오라야 살수 있듯이 국가의 안녕을 지키는 일에는 커다란 대가가 요구된다.그 대가를 도맡은 우리의 아들이고 오라비이고 지아비인 국군용사들.대한민국에 태어난 아들들은 모두가 군복무를 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가 국군가족이다.실제로 오늘이 아니라도 어제까지 군인가족이었거나 다가오는 내일에는 군인가족이게 마련인것이 대한민국 국민이다.그렇게 소중한 아들들을 전선에 불침번으로 세워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놓고 생업에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끔 현실을 망각하고,분수없고 사려없는 행동을 하는 국민이 더러 있다.나라가 비상한 시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런 허물을 깨닫기도 한다.최근에우리는 그런 기회를 만나기도 했다.한 집안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나라의 재목으로 고이 자랐으면서 험한 들녘의 전선에 내보내져서 온몸으로 적대세력을 막고 국민을 지켜주는 국군의 노고가 얼마나 존귀한지 다시 한번 머리숙여 치하를 보낸다.그들은 앞으로 더욱 빛나는 국가의 간성이 될 것임도 우리는 확신한다. 그들의 후방나들이를,핵으로 동족을 볼모삼아 길고 지루한 위협을 벌이는 북의 행패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올해의 나들이를 뜻깊게 환영한다.
  • 김 대통령,서울신문사 초청 모범용사 접견

    ◎“전쟁않고 이기는게 제일 잘하는 전쟁”/“민족적 비극막게 북핵개발 반드시 저지”/“평화는 힘이 있을때만 유지” 노고 당부 김영삼대통령은 20일 하오 부인손명순여사와 함께 청와대 영빈관에서 서울신문사가 초청한 국군모범용사 62명과 배우자들을 접견,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민족적 비극을 막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도 북한의 핵개발은 저지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우리는 핵개발을 저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또 『평화는 힘이 있을 때만 유지될 수 있다』면서 이들의 국토방위를 위한 배전의 노력을 당부했다. ○…40분동안 다과를 들면서 진행된 이날 접견에서 모범용사들은 김대통령의 깨끗한 정치와 개혁에 무한한 경의를 표하면서 충성을 다짐. 김대통령은 이날 하오 4시,영빈관에 도착,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고 인솔자인 이수형소령은 『군에 대한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에 대해,우리의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에서 건배코자한다』고 건배를 제의. 김대통령은 이날 참석자들을 「국군의 꽃」「애국자중의 애국자」라고 치하하면서 특히 어려운 여건에서 자녀교육과 건강한 가정관리에 노력하는 배우자들의 노고에 특별한 감사를 표시.김대통령은 부인들만을 위한 박수를 치자고 제안해 다과회장은 박수로 가득차기도. 김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군의 사기』라고 전제,『전쟁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제일 잘하는 전쟁』이라고 모범용사들의 역할을 강조.특히 『우리는 북한핵을 반드시 저지해야 하며 이를 해낼 수 있다』고 말해 북한핵문제에 대한 자신감을 과시. 김대통령은 『군이 명예롭게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통수권자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면서 『자랑스런 모범용사들이 있어 우리가 이만큼 큰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거듭 치하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모범용사들의 접견에 매우 기분이 좋은듯 치사를 예정보다 5분이상 더하는가 하면 어느때보다 연설에 힘을 주어 눈길.김대통령은 이같은 행사를 마련한 서울신문사에 대해 두차례에 걸쳐 감사를 표시. 이날 청와대가 제공한 다과는 떡과 과일,과일주스였으며 참석자 모두에게 청와대 예방기념 손목시계를 선물. 이날 접견에는 이병대국방장관,이양호합참의장,김동진육참총장,김홍렬해참총장,김홍래공참총장,이한수서울신문사장이 배석했다.
  • 간첩이 우글거린다는데(사설)

    「구국전위」라는 조선노동당 지하당을 결성,산업현장과 대학가등에 하부조직망을 구축해온 간첩망이 수사기관에 적발됐다.그중 15명은 구속되고 5명은 추적중이라고 한다. 수사당국에 따르면 그들은 북한 공작조직의 자금지원을 받아 우리사회 각 분야에서 암약하면서 혼란을 조성하고 전국규모의 고정간첩망을 구성하는 것을 첫번째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특히 그들은 학원가와 노동계에 깊숙이 침투해 학생데모나 노사분규를 배후에서 조종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은 최근 민주화·개방화 분위기를 이용해 간첩들을 일본경유로 대거 서울에 침투시키고 있으며 밤이면 저들의 무선교신이 서울하늘을 메운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사건이다.현역군인까지 포섭해 조직원으로 활용했다니 정말이지 경악할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6공때의 「노동당 중부지역당」이라는 간첩망 검거후 지금까지 간첩잡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시중에는 간첩들이 우글거린다는 풍문이 이미 요란했지만 국민들은 설마 그럴리야 있겠느냐며 믿지 않으려 했던것이사실이다.운동권 학생들이 대학가에 인공기가 걸린 조형물을 만들어 전시하고 북한을 공공연히 찬양해도,일부 재야·노동단체에서 용공성을 띤 유인물을 뿌려도 별로 대수롭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이만저만한 안보불감증이 아니었다. 북한의 흉계가 그런 틈새를 놓칠리 없다.기회만 있으면 우리 사회안에 공산지하조직을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를 하게할 계략을 세워온 것이 그들이다.우리의 안보의식이 해이해진 틈을 타 간첩을 남파하고 이를 거점으로 학생과 노동자들을 포섭해 유사시의 적화통일을 위한 조직기반을 구축해오고 있었던 것이다.이번 사건은 우리사회에 북한과 직·간접으로 연계된 세력이 상당히 퍼져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적중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당국의 대남적화통일 전략은 두가지밖에 없다.전혀 변하지도 않았다.그중 하나가 무력적 방법이다.6·25남침처럼 한국을 무력으로 침공해 적화시키는 것이다.핵개발도 그 방편의 하나다.다른 하나는 간접침략의 방법이다.이번과 같이 공작원을 남파해 지하혁명당을 구축하고 남한의 각계 각층을 포섭,「민중봉기」를 통해 적화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 우리 국민들의 안보의식이나 정부의 방첩기능은 어떤가.한마디로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심정이다.뜻있는 애국시민들의 한결같은 우려이기도 하다.간첩은 대학가나 노동계에만 있는것이 아니다.정부내나 사회핵심조직에도 도사리고 있을수 있다.하나도 놓치지말고 철저히 색출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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