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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회창총재 서신 요약

    지금 이 나라는 애국의 길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심히 혼돈스러운 상황속으로 빠져 들고 있습니다.목숨 걸고 간첩을 쫓던 사람이 그 간첩에 의해서 백주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고,전방의 군인들은 무엇을 위해서,누구를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인지 혼란을 느낄 정도입니다. 방첩의 최일선에 있는 사람들도 간첩을 잡는 것이 혹시나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은 아닌지 갈등에 빠져 있습니다.국가안보의 최후 보루인 국가보안법에 대해 정부여당이 전면 개정이나 폐지를 논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포용도 좋고,햇볕정책도 좋지만,나라의 안보를 이렇게 위태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우려의 소리들이 높아가고 있습니다.이 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개탄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통일도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통일이 되고 난 뒤에도 안보는 세계전략의 일환으로서,변함없이 국가 제 일위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공기가 희박해지기 전에는 산소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처럼,전쟁이 나기 전에는 국가안보가 얼마나 소중한지,그 일선에 선 분들의 역할이 얼마나 고마운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 하와이 이민 100주년 학술대회

    미국 하와이대 부설 한국학연구소(소장 에드워드 슐츠)는 하와이 한국인 이민 100주년을 맞아 14∼15일 이틀간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에서 기념학술대회를 가졌다.행사에서는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가 ‘교회와 하와이 이민자들’을 발제하는 등 하와이 한인들의 삶과 기독교계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등을 다룬 다양한 주제의 논문이 발표됐다.
  • [지구촌의 밀레니엄 공판장 리포트] 아일랜드

    아일랜드 하면 우리에게 목가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아 목동의 노래’가 떠오른다. 지리적으로 멀지만 평화롭고 작은 꿈의 나라,그러나 실제로는 이웃 강대국인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로 한때 기근으로 온 국민이 굶주렸던 불행한 시절을 겪은 나라였다.정치적으로 독립을 위한 저항과 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된나라로 기억되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걸리버 여행기’를 저술한 아일랜드 출신의 조너선 스위프트 후예들이 세계 문학사에서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다.조지 버나드쇼,버틀러 예이츠,사뮈엘 베케트,쉐므스 히니 등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줄을 이었고 오스카 와일드,‘율리시스’의 제임스 조이스 등 대문호를 배출해 세계 문학에서 아일랜드의 지위를 우뚝 솟아오르게 했다. 경제 분야에서의 성공도 대단하다.엄청난 부채로 1986년의 국가 파산위기상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지금은 외국인 투자유치에 성공,지난 5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연평균 8.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켈트족의 호랑이’로 불리고 있다.98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2,500달러에 이른다. 투자유치 정책은 ▲컴퓨터 전자 ▲통신 ▲보건 ▲금융서비스 등 네가지 분야에 집중됐다.이 분야의 우수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투자는 2000년에도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법인세는 영국 등 선진국의 30∼40%보다 낮은 10%에 불과하다.이 때문에 미국의 대유럽 투자 50% 이상이 아일랜드에 몰렸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산업은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강국이다.전세계 판매량의 40%가 아일랜드에서 생산되고 있을 정도다.특유의 목가적 전원풍경과 문화적 배경으로 관광객이 연 600만명이 넘는 관광대국으로 성장했고,2000년엔 800만명의 관광객 유치가 목표다. 메리 매켈리스 대통령이 최근 새천년 맞이 연설에서 아일랜드의 끊임없는번영을 위해 외국인 투자유치 정책의 계속적 추진과 아일랜드의 젊은 세대들을 위한 교육투자가 계속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아일랜드의 경제 성공 비결은 크게 세 가지다.첫째,정권 교체에 관계없이경제정책의 일관성(Consistency)을 유지했고 둘째,일관성을 토대로 외국인투자환경을 개선,외국 기업가들의 신뢰성(Confidence)을 높였다.또 국가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과도한 임금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노사정 협력(Cooperation)을 고양시켰다.소위 3C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아일랜드의 새천년 맞이도 독특하다.총리실에 설치된 새천년준비위원회에서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정부가 주도권을 갖고 각종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고 국민들 각자가 주제별로 아이디어를 내어 새천년위원회에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면 이를 검토,선정하는 방식이다. 한때 “석탄을 제외하고 영국적인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려라”고 외쳤던 애국자 조너선 스위프트의 망령이 지금은 “이제는 영국적인 것에 구애받지 말고 무엇이든 새로운 최첨단 기술을 배우라”고 이야기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장기호 주아일랜드 대사
  • [대한시론] 카오스와 창조적 개혁

    정보화시대는 곧 복잡계(카오스)의 시대이다.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고진은복잡계의 과학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골을 메우고,21세기에는 새로운 지(知)의 패러다임이 형성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실제로 그가 주장한 내용이 속속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빌 게이츠는 자신의 윈도와 매킨토시의 시장점유율이 거의 같을 때 거액을 투자해 자신의 소프트웨어의 시장점유율을 높임으로써 업계를 석권했다.복잡계의 경제학에서는 이 사실을 ‘록인(lock in)의 성공’으로 표현한다.복잡계의 경제학은 기존의 경제학이 ‘수확체감의법칙’에 중심을 둔 것과는 정반대로,일단 록인된 상품이 시장을 싹쓸이하며,투자와 노력을 높일수록 이익이 증가한다는 ‘수확체증의 법칙’이 작용됨을 보여준다. 또 재일교포 실업가 손정의는 자신의 성공비결이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3개씩 생각해낼 것을 스스로에게 가한 결과라고 한다.그러나 일단 록인된 것이라 해도 끊임없이 차세대와 차차세대의 제품을 준비해야 하며,그것이 성공의 필수조건이다.그런 면에서 이 두 사람은카오스시대가 낳은 경제영웅이라 할 수 있다.록인과 창조적 개혁(break through)이 카오스시대의 생존과 번영의 지혜인 것이다. 경제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것은 모두 복잡계이며,복잡계 과학의 대상이 된다.카오스적인 현상에서는 ‘처음 출발할 때의 조건(초기조건)’의 사소한차이가 그 후의 결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이 사실을 “오늘 서울 거리를 날던 나비의 날개짓이 며칠 뒤 뉴욕에 큰 폭풍우를 일으킬 수 있다”라는비유로 설명하며,‘나비효과’라 한다. 사회현상에도 미미한 일로 여겼던 것이 후일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프리고진은 복잡계 중 가장 미묘한 카오스의 생명력과 자기조직의구조를 밝혔다.카오스는 난잡(Randam)과는 다르다.무질서와 질서가 공존하는 미묘한 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질서가 자기조직화되며,길고 긴 생물의 진화와 인류사의 발전에도 수없이 많은 자기조직의 과정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민족사와 사회 변동과정에도 카오스는 그대로 적용된다.조선왕조 500년사는 카오스를 거부한 결과가 비극적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장장 518년간같은 체제로 지속되었던 것은 ‘용의 눈물’로 상징되는 왕실의 영속화라는초기조건에서 출발하여,사대와 쇄국의 올가미 속에서의 사문난적 시비,온갖차별과 오기 등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왕조 초기에 록인된 풍조가 생명력이 있는 카오스의 발생을 억압함으로써 결국엔 식민지화라는 결과로 이어진것이다. A 토인비는 일본에 들렀을 때 “가까운 한국에 들르지 않겠느냐”는 건의를 받고 “한 왕조가 500년 이상이나 지탱한 나라에 볼 것이 뭐가 있겠는가”며 그대로 떠났다고 한다.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처음 록인되었을 당시에는 긍정적이었던 것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정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따라서 내일을 위한 이상(理想)의 설정과 착실한 계획으로 뒷받침되는 새로운 창조적 변혁이 요청된다. 애국시인 한용운은 “당신은 해당화 필 때 돌아오신다고 하였습니다.봄이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랬더니 봄이 오고 보니,너무 일찍 왔는가 싶습니다”라고 노래했다.우리는 여러 차례 좌절의 봄을 맞이해 왔다.해방의 봄은남북 분단을 가져왔다.4.19의 봄은 군사쿠데타,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군화,그리고 문민정부의 봄은 IMF의 한파에 쓰러졌다.평화적 정권교체도 오늘의 정치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다.준비없는 변혁이 몰고온 비극들이다.통일 또한,확고한 준비가 없다면 더욱 고통스러운 봄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새로운 21세기,밀레니엄,이런 화려한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될 것이다.개혁적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구체적인 계획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긍정적인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강령이 절실하다. 金容雲 한양대 명예교수 한국창의기획학회장
  • 푸틴,옐친노선 이어갈듯

    구랍 31일 블라디미르 푸틴이 새 조타수로 등장한 러시아는 일단 별다른 변화없이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노선을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푸틴 대통령 직무대행은 1일 신년사에서 “옐친 대통령 통치하의 러시아가 민주주의와 개혁의 길을 채택함으로써 강력하고 독립된 국가로 부상했다”고 강력한 지지를 뜻을 밝힌 데다,국제 원유가의 상승으로 경제위기도 어느정도 해소돼안정을 되찾아가고 때문이다. 이에 따라 푸틴 직무대행은 우선 오는 3월27일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에서 친(親)옐친정권의 창출에 총력을 기울일 전망이다.크렘린 전문가들은 현재 푸틴의 지지율이 50%를 넘는 데다 1999년 12월19일 실시된 총선에서 개혁세력및 친 크렘린 지지정당의 비율이 40%선까지 육박해 이변이 없는 한 친 옐친정권이 재창출될 공산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최대의 현안인 체첸사태와 관련해서는 화전(和戰) 양면전략을 적절히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푸틴 대행이 1일 새벽 체첸 제2의 도시 구데르메스를 전격 방문,연방정부는 체첸 반군과 평화회담을 개최할 준비가있다고 발표한 이후에도 저공비행 전투기를 동원,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에 수십차례 폭격을 가하는 등 유례없는 맹공을 퍼붓고 있다. 대외관계에서도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이다.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새천년 첫날인 1일 푸틴 직무대행과 통화를 갖고 “미국과 러시아의 두나라관계는 좋은 출발을 했으며,이는 러시아 민주주의 장래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덕담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푸틴의 가장 큰 과제는 지금의 인기를 어떻게 ‘현실화’시키느냐는 점이다.푸틴이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국가경영에 대한 비전제시가 아니라,체첸전에서 보여준 강경책이 경제위기 등으로 좌절감에 빠진 러시아인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점이 작용한 탓이다.러시아의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능력있는 지도자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얘기다. 김규환기자 khkim@
  • [의열 독립투쟁](18)김상옥 의사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이 날아들어 일경과 신문기자 등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당시 종로경찰서는 조선인 탄압의 대표적 기관으로 이곳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사건직후 일경은 총동원령을 내려 범인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10일만에 일경은 겨우 단서를 잡고 범인검거에 나섰는데 검거과정에서 일경측은 간부 등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범인은 자결로 최후를 장식하였다.일제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당시 33세의 조선인 청년김상옥이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태어난 김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세때부터 낮에는 대장간에서 말 발굽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러일전쟁후 동대문교회에 나가 기독교에 입교한 김 의사는 1906년 동대문 교회안의 신군(信軍)야학교를 다니며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시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배움의 의지를 불태운 김 의사는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이곳에서 손정도,이종소,임용호 등을 만나 시국을 토로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1912년 김 의사는 동대문밖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설립,경영하였다.철물상회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김 의사는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특히 삼남지방의 장터를 다니면서 약을 팔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상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19년 3·1의거가 발발하자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김 의사는 이 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파에 대한응징과 숙청을 기도했고 이듬해 4월에는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유장렬 등과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파수 명을 총살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김의사는 이 해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양 각 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5월부터 미국의원단 환영행사에 참석하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함께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한편 상하이로 건너간 김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김 의사는 1923년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총독을 처단키로 하였다.권총 4정과 실탄 수 백발,대형폭탄을 가지고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김 의사는 야음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주재 일본영사관의 통보로 조선총독부에서 엄중한 경계를 편 데다 상하이로부터 들여온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우석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그러던 중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으로 종로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행인 7명이 크게 다쳤다. 거사후 김 의사는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형(고봉근)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을 벌이던 일경은 폭탄 투척 후 5일만인 1월 17일 새벽김 의사의 은신처를 급습하였다.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警部)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가 사살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쪽으로 은신한 김 의사는 왕십리의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승복으로 변장한 후 일경을 기만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왔다.무내미(현수유리) 이모집을 거쳐 19일 새벽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73번지 이혜수(李惠受·여)의 집에 은신,동상을 치료하는 한편 앞으로의거사를 구상하였다.그러나 거사 10일만인 1월 22일 새벽 이곳 은신처도 일경에발각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 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채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들이닥쳤다.이후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경 10여 명을 살상한 김 의사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집 화장실로 피신하였다가 단한 발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가족들이 김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은 무려 열 한 군데였다고 한다.김 의사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해방전에 요절하였고 조카 태운(泰運·72·경기도 수원 거주)씨가 양자로 입적돼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 연재를 마치며지난 8월부터 시작된 본 연재는 이번 회로 막을 내린다.8월 13일자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시작으로 그간 의·열사 열여덟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일황을 처단하려 했던 이봉창·박열·김지섭 의사,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강우규·송학선 의사,일제 침략자를 처단(모의 포함)한 안중근·윤봉길·백정기·전명운·장인환·조명하 의사,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장진홍·김상옥·곽재기·박재혁·나석주 의사,친일파를 처단한 이재명 의사,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일곱 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16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김시현 의사 등등.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공적을 남긴 의·열사는 이 분들 외에도 무수히많다.그 분들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키로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삶이다.연재 중 확인결과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동안의 소문대로 생활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대개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특히 몇몇 후손들의 경우 현행 관계법의 문제로 인해 연금수혜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안타까움을 더했다.최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가 받은 건국훈장을 당국에 반납,사회적 논란을 야기시킨 바 있다.관계당국은 그들을 외면만 할 것이아니라 관계법령을 개정해서라도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국가에 바친 의·열사들의 애국적 삶은 한민족과 더불어 유방백세(遺芳百世)할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17)박재혁 의사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지도자들은 중국 상해와 남·북만주,노령(露領)의 연해주,미주 등 해외로 이주 혹은 망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독립투쟁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이들은 자신들이 근거한 지역의 특성과 평소 신조에 따라 외교·의열투쟁·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 방략을모색,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기관이나 총독부의 일본인 고관,혹은 친일파에 대해 폭탄·총기 등으로 파괴와 암살을 통해 응징한 것으로 의열투쟁은 그 규모나 성패 여부를 떠나 독립운동 선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이는 의열투쟁을 통해 잔혹한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전체 한민족의 항일의지의 표출임과 동시에 일제 관리 및 친일 주구배 등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11월 결성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결성 직후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와 일본인 요인·친일주구배 처단을 위한 거사에 착수하였다.1920년 4월중순부터 진행된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그것이다.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직전에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돼 거사를 며칠 앞둔 6월 하순 관련자 20여명이검거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이로부터 3개월 뒤에 발생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의거’는 의열단에서 추진한 거사 가운데 최초로 성공한 거사였다. 박재혁(朴載赫·1895∼1921) 의사는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났다.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부산가스전기회사의 전차 종업원을 거쳐 한때 경상북도 왜관 소재 무역상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1917년 6월에는 무역상 주인에게 부탁하여 700여원을 얻어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돈을 벌지 못한 채 1918년 6월 귀국한 박 의사는 3·1의거 직후다시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박 의사는 남양무역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지사들과 교류를 시작하였다.1920년 3월 일시 귀국한 박 의사는 7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다.그러나 당시 박 의사는 가정형편과 외아들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노년을지내고 있던 노모 때문에 고민하다가 끝내 김원봉의 권유를 거절하였다.그러나 8월 김원봉으로부터 재차 입단권유를 받자 박 의사는 결국 입단을 수락하였다. 1920년 8월 상해로 건너간 박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파괴하라는 밀명과 함께 거사자금 300원,폭탄 1개를 전달받았다.박 의사는 폭탄과거사자금을 중국 고서적으로 위장한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6일 부산으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나가사키를 떠나기 직전 박 의사가 상해의 동지들에게 보낸 엽서(1920년 9월 4일자)에는 상황(商況),상로(商路),수익 등의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암호였다.그리고 ‘다른 길이 있는데,이익이 전에 비해 좋다’는 글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부산으로 가려고 했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겠다는 내용을 알린 것이다.그러나 이 엽서에서 ‘많은 이익을 볼 수있으나 다시는 동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구절은 박 의사가부산경찰서 폭파의거를결행하면서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하겠다. 한편 부산에 도착한 박 의사는 먼저 부산상업학교 동창인 최천택(崔天澤)과 김영주(金永柱·부산진상업학교,25세),오재영(吳載泳·부산상업학교 중퇴,25세)등을 만나 자신의 임무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이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최천택 등의 도움을 받아 박 의사는 곧 거사를 준비하였다.마침내 9월 14일 오후 2시경 중국인 고서적상인으로 변장한 박 의사는 고서적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짊어지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찾아갔다.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시모토에게 고서적을 구경시켜 주고 있던 박 의사는 고서적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하시모토에게 의열단의 전단,즉 하시모토를 처단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적은 전단을 내보임과 동시에고서적 보따리에 감춘 폭탄을 터뜨렸다.순간 굉음과 함께 하시모토와 그의옆에 서있던 일경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 졌다.하시모토는 중상을 입고병원으로 긴급히 호송되었으나 이송중 절명하였다.인명피해는 물론 경찰서건물 역시 대파되었다. 박 의사는 폭탄을 터뜨린 직후 혼란을 틈타 탈출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부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박 의사는 응급치료만 받은 채 구금돼 온갖고문과 심문에 시달리며 재판을 받았다.부산지방법원은 폭발물단속벌칙위반및 살인미수 등의 죄목을 들어 박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대구복심법원에서는 1921년 2월 박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그러나 경성고등법원에서 최종 사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채 일제의 계속된 잔악한 고문에 시달리던 박 의사는의거 당시의 부상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폐결핵까지 겹치게 되자,‘왜놈들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수모를 당하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결심하고는 단식을 계속하였다.일제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단식을 계속하던 박 의사는 결국 1921년 5월 11일옥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그때 박 의사의 나이 27세였다. 1962년 정부는 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조범래 독립기념관 연구원] ** 박재혁 의사, 유족 근황과 기념사업 27세로 순국한 박재혁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는데 두 자녀 역시 모두 작고했다.장남 기동(基東·76년 작고)씨는 부산 부평동에서 상업을 하다가 30여년전 상경,말년에는 서울서 거주하였는데 생활은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기동씨의 장남 정평(正平·52)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현재 서울 미아3동 소재 신일중학교 경비원으로 21년째 근무하고 있다.정평씨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무석(務石·32)씨는 상업을 하고 있다. 박 의사의 기념사업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박 의사 장녀의 후손들이 중심이 돼 의거현장인 부산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박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롯데그룹과 3·1운동동지회측의 지원을 받아 부산 연지동 소재 성지곡수원지 내에 동상을 건립한 바 있다.박 의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78번)에 있다. 장손 정평씨에 따르면 박 의사의 유품은 별로 전해오는 것은 없고 사진 한두장이 전부라고 한다.이는 박 의사가 독립투쟁에 참여한지 얼마 안돼 일경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시작했고 또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운현기자 jwh59@
  • [외언내언] 독과점과 국가이익

    “이렇게 머리숙여 부탁드립니다.미·일(美日)자동차협상이 결렬되면 양국간 최악의 무역전쟁이 초래됩니다”80년4월,일본 도쿄의 최고급 요정.일본통산성의 아마야 심의관이 다다미 위에 머리를 조아렸다.상대는 일본자동차공업협회의 이시하라(石原俊)회장(닛산자동차 사장)과 도요다(豊田英二)도요타 회장. 일본 자동차회사들이 미국시장을 적극 공략할 때 ‘제발 정부 입장을 봐달라’고 일본 정부가 통사정한 것이다..결국 ‘다다미’사건으로 업계가 마지못해 수용,일본의 대미(對美)자동차수출 ‘자율규제’가 시작된다. 이 사건은 급성장한 일본 자동차의 이익이 국익과 충돌한 사례로 꼽힌다. 지난 11월 초 미국 연방법원은 미국기업으로 세계시장을 제패한 마이크로소프트(MS)의 행동을 ‘독점’으로 규정,MS신화를 단번에 깨버렸다.‘막강한지배력으로 경쟁자를 눌러 소비자들에게 해를 끼쳤다’는 간단한 논리이다. 독과점 기업은 어떻게 봐주어야 할까.외국업체에 맞서는 ‘잔다르크’형의국내 전사(戰士)인가,아니면 소비자들로부터 독과점이익을 챙기는 ‘불공정사업자’로 봐야 할까.독과점기업인 현대자동차,독과점을 굳히려는 SK텔레콤의 행동을 보면서 떠오르는 의문이다. 국내 자동차 시장의 58%,밴을 사실상 독점 생산하는 현대(기아 포함)가 세계최대 자동차회사인 GM의 대우자동차 인수에 반대했다.‘GM은 수출도 하지않을 것이고 기술이전도 게을리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는 국내시장의 아성을 GM에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듯 싶다.초거인 GM 매출액의 10%,종업원 13.7%에 불과한 현대자동차가 위기를 느낄만 하다. 국내 최대의 이동통신 사업자인 SK텔레콤이 신세기통신을 인수,시장점유율을 43.2%에서 57%로 높이는 것을 놓고 공정위가 “공정거래법 위반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나머지 3개 개인휴대통신 사업자의 힘은 빈약하다. 생산 규모를 키워야 가격 인하와 세계 경쟁이 가능하다.다만 국익과 애국심의 눈가리개식 커튼을 친 뒤에서 벌어지는 가격 인상,품질 저하 등의 독과점 폐해도 적지 않게 봐왔다. 거대화,세계화되는 기업의 이익은 일정 단계에이르면 국익이나 국민이익과 충돌하기 마련이다.가치관 혼란을 줄이려면 ‘외국에 적극 수출하는 기업’,‘소비자에게 이익이 되는 기업’이 최고라는 단일 잣대가 바람직할 것같다. 정부도 그러한 기준으로 대우차나 SK텔레콤 문제를 처리하면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상일 논설위원
  • [金대통령 당선2주년 KBS특별대담]이모저모

    19일 밤 방영된 KBS 특별기획 ‘거실에서 만나는 대통령’ 대담프로는 지난 17일 출입기자 부부 초청 오찬과 더불어 당선 2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중 하나였다.당선 축하연 등이 열리던 지난해와 비교할 때 조촐하고 소박했다.정국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전 10시부터 64분 동안 녹화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이날 대담은 KBS 1 TV를 통해 밤 10시30분부터 11시40분까지 70분 동안 방영됐다.청와대관계자는 “대담 도입부의 인사가 중복돼 4분 분량을 압축했다”며 “김 대통령의 진솔한 심경을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다른 부분은 일체의 편집없이 방영했다”고 설명했다. 김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이날 자유복장 차림에 사적 공간인 관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눴다.김 대통령은 베이지색 T셔츠에 감색 가디건 복장이었다.3명의 대담자 가운데 정신과 의사인 이나미(李那美)씨 역시 자유복장이었으나 KBS 홍성규(洪性奎)보도국장과 소설가 김주영(金周榮)씨는 정장차림이었다. 김 대통령은 편안한 질문에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답변했으나,“국민에게송구스럽다.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나도 답답하다”며 무거운 대답을 할때는 정색을 하면서 자세를 꼿꼿이 바로 세워 답변했다. ■이날 대담에서 김 대통령은 간간히 특유의 유머를 섞어가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도했다. 소설가 김씨가 대담 서두에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산골 출신 아들이 대통령과 대담을 하는 것을 보면 놀랄 것 같다”고 말하자 김 대통령도 “하의도섬 사람이 대통령을 한 것도 놀랄운 것”이라고 답변, 첫 웃음을 자아냈다. ‘대선때 개표결과를 TV로 봤느냐’는 질문에 “보다 안보다를 반복했다.특히 잘 되어가고 있다고 하면 나와서 봤다”라며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을 때도 웃음꽃이 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이날 옷로비사건에 관한 질문에 “국민에게 송구스럽다”고 세차례나 말했다.질문자가 ‘청와대 보좌관들이 잘못한 것 아니냐’고묻자 “나도 참 답답하다”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청와대 공보수석실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의 사적 공간이어서 시청자들과마주 앉아 있는 듯한 친근한분위기로 대담을 풀어나갔다”며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경륜과 사심 없는 애국심,공명정대함 등 통치철학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덧붙였다. 양승현기자 yangbak@
  • 臨政 對日선전포고 58주년 기념강연 요지

    한국독립유공자협회(회장 閔泳秀)와 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金祐銓)는 9일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 성명서’ 선포 58주년을 맞아 오전 9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기념식을 가졌다.이어 평택대 조항래(趙恒來)교수와 대한매일 김삼웅(金三雄)주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활동’‘대일선전포고의 배경과 광복군의 위상‘이라는 주제로 각각 기념강연을 하였다.강연내용을 요약,정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조항래·평택대 교수) 임시정부는 초창기 군무부장 산하에 참모부를 두어 군사지휘체계를 확립하였다.1920년 임정은 이 해를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국민개병제’를 통해 독립전쟁이 임정의 기본 실천목표임을 천명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를 전후로 임정은 극도로 약화되어 직속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지만 당시 임정은 이같은 여건이 조성돼 있지 않았다.결국임정은 다른 항일단체들이 애국청년들의 군관학교 입교를 주선,독립군 군관양성에 주력하였다.게다가 1932년 이봉창·윤봉길 양 의사의 의거로 한중간에 군사합작의 기틀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한국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임정의 주도로 자주적으로 창설되었으나 초창기 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가 제시한 ‘한국광복군 9개항 행동준승’때문에 한동안 중국군에 예속돼 있었다. 1941년 12월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 개전을 선포하자 중국정부에 이어 ‘대일선전포고문’을 선포하였는데 이는 광복군의 자주성을 천명한 것이다.중국대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해오던 광복군은 인도·버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영국군과 공동으로 대일투쟁을 벌였으며,또 미국 전략첩보처인 OSS와 군사합작을 이루어 공동작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대일선전포고의 배경과 광복군의 위상’(김삼웅·대한매일 주필) 1941년 12월9일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는 임시정부 26년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임정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군이라는 무장병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광복군은 멀리 한말의 의병투쟁에 뿌리를 둔 것으로 ‘우리민족의 국수(國粹)’로 조직된 것이다.1940년 9월17일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군된 광복군은 1946년 5월 환국할때까지 5년 8개월여간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참여,마침내 조국독립을 쟁취하였다. 건국후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소외정책으로 국군 창군과정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다.그러나 의병·독립군의 맥을 이어온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정신적·사상적 모태와 이념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국군의 날’은 6·25전쟁때 국군이 38선을 반격한 ‘10월1일’이아니라 광복군 창군일인 ‘9월17일’로 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 (15)이봉창 의사

    20세기 전반기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일제의 침략을받았다.일제의 침략을 받은 각 민족은 국가와 민족을 보존하기 위해 일본에저항해 싸웠다.그러나 한국민족만큼 강인하고 격렬하게 일제와 싸운 민족은드물었다.그 중에서도 침략의 괴수인 일왕 처단을 시도한 민족은 우리민족뿐이었다. 1932년 1월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이 타고 가던 마차에 폭탄이 날아들었다.일왕을 처단하려는 조선인 애국지사가 던진 세번째 폭탄이었다.1924년 박열(朴烈) 의사가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다 사전에발각되었고,1925년엔 김지섭(金祉燮) 의사가 일본궁성으로 들어가는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한 바 있었다.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한국인 청년은 이봉창(李奉昌) 의사였다.이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수원의 철로부근에 있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탓으로 그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랐다.소년시절에는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고용살이와 용산역에서 기차운전 연습생으로일하기도 했다.그리고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뒤 6년여동안 나고야 등지를 떠돌며 노동으로 삶을 꾸려갔다.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이 의사는 일본인과 분간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일본말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습속도 잘알고 있어 겉모습은 일본인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일본인의 고용살이를 하면서,또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민족의 피가 끓고 있었다.스무살때 경험한 3·1의거를 계기로 그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있었다. 1931년 1월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 의사는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라고 일왕의 처단을 촉구했다.일왕을 손쉽게 죽일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를 임시정부에선 의심스럽게 여겼다.그의 행색이나 말투가 일본인과 흡사하였기 때문에수상히 여긴 것이다.김구(金九)는 직원을 시켜 이 의사를 은밀히 떠보도록하였다.어느 술자리에서 이 의사는 “작년에 도쿄에서 일왕이 능행(陵行)한다고 행인들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생각하기를 지금 나에게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라며 자신이 일왕을 죽일수 있다는 얘기를 또다시 꺼냈다. 그를 은밀히 살피던 김구가 이 의사를 직접 만났다.그는 “제 나이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을 대강 맛보았습니다.이제부턴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몸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라며 자신의 진심을 김구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의열투쟁을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일왕을 죽일 수 있다는 것과 독립사업에 몸바치겠다는 이 의사의 각오는 김구를 감복케 하였다.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마침내 일왕을 폭살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준비는 김구가 맡았다.김구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상해 병공창에서 폭탄을만들었다.준비한 폭탄은 두 개였다.하나는 일왕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이 의사 자신의 자결용 폭탄이었다. 1931년 12월 13일 이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단장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의사는 “나는 참된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국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살(屠殺)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했다.적국의 괴수,그것은 일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가장한 이 의사는 이 해 12월말경 일본 도쿄로 향했다.그는 일왕이 1932년 1월 8일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김구에게는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 거사일을 알렸다.이 의사는 거사장소로 일본궁성 근처에 있는 경시청 앞을 택하였다.일왕은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櫻田門)을 통해 궁성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예정대로 신년 관병식이 거행되었다.이 의사는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왕을 기다리고 있었다.일왕이 탄 마차행렬이 앞을 지나자 이 의사는 뛰쳐나가며 손에 든 폭탄을 일왕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탄 말 두필이 거꾸러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은 ‘회고’에서 군중과 일왕의 거리가 100미터 되는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질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 의사의 일왕 저격의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그중에서도 중국의 반응은 남달랐다.중국의 각 신문은 이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적중하지 못하였다”고 하며,일왕을 폭살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해 했다.일제는 이러한 중국의 보도에 반발,1932년 1월 상해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놓은 일왕을 폭살시키려 했다는점에서,그리고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순국하였다. 해방후 김구는 일본에 있던 이 의사의 유해를 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효창원에 안장하였다.정부는 62년 이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이봉창의사 주변 일본제국주의의 총수격인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자신은 적지 일본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봉창 의사.순국 당시 이 의사는 32세로 미혼이었다.그런 이 의사에게 직계후손이 있을 리 없다.이 의사와 가장 가까운 혈손으로는 이복형의 딸인 질녀 은임씨가 유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은임씨는 이 의사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전 일본서 노동자생활을 할 때 이 의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거사를 앞두고 이 의사는 백범에게 질녀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해방후 환국한 백범은 은임씨에게 집을 사주는 등 이 의사와의 약속을 지켰다.은임씨도 이미 수 년전 작고했다.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 중에서도 번듯한 후손을 둔 경우는 그래도 낫다.기념관이나기념사업회를 운영하기도 하고 묘소를 돌보기도 한다.그러나 이 의사처럼 후사가 없는 선열들의 경우는 죽어서도 외롭다. 현재 이 의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나 추모단체는 없는 실정이다.다만 효창원순국선열추모회가 4월 13일 합동추모제를 지내고 있을 따름이다.동상 역시 지난 95년에야 겨우 효창원에 건립됐다.이 의사처럼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한채 청춘에 간 애국선열은 이래저래 마음이 아프다.당국이나 종친에서 ‘외로운 영혼’을 위해 양자라도 한 사람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다. 정운현기자
  • [특별기고] 守舊엔 미래가 없다

    동학농민전쟁과 그 뒤를 이은 갑오경장,그리고 그 자체가 희극이었던 ‘대한제국’의 건설. 이것이 20세기를 맞던 전야의 우리 모습이었다.500년을 간신히 버텨온 조선왕조의 변혁을 위한 위로부터의(갑신정변) 또는 밑으로부터의(동학농민전쟁) 시도들이 완고한 수구세력의 저항으로 모두 실패하고 궁중은 친청파니 친러파 또는 친일파니 하는 사대 수구세력간의 각축장이 되어있었다.세계의 흐름이 어떻고,어떤 새로운 과학적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따위의 것은 당시 지배층의 관심 밖이었다.다가오는 20세기를 어떻게맞이할 것인가 하는 논의는 아예 사치스러웠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0년 후 지금 우리는 새 천년을 이야기하고 있다.‘산업화엔 늦었지만 정보화엔 늦지 않겠다’는 식의 다짐 정도로 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미국 중심의 초국적 자본들이 지배하는 세계화시대가 이미 오고 있고,세계화란 실제로 미국적 ‘삶의 양식(way of life)’의 세계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도 우리 현실은 이 세계화의 본질을 ‘Segyehwa(세계화)’식의 우물 안 개구리 논리로 받아들이던 김영삼시대의 상황 인식으로부터 크게 발전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국내에서는 그 놈의 ‘문건시리즈’에 이어 나온 ‘옷로비 의혹시리즈’가국민의 정신적 수준을 몇십년 후퇴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주요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모여 ‘21세기의 진보적 정치’에 대해 논의하고있다.일각이 바쁜 미,영,불,독,이탈리아의 정치지도자들이 주말을 이용해 당장의 현안도 아닌 ‘21세기 진보정치’에 대해 점잖게 토론을 즐기고 있는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회의장소로 선택한 곳은 바로 인류진보의 새 시대를 열었던르네상스의 발흥지가 아닌가.미켈란젤로,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인물들을배출한 유서 깊은 도시에 모여 세계를 향해 21세기를 향한 논의를 펼쳐 보이는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제스처는 확실히 우리 현실과는 너무 먼 거리를 느끼게 한다.한 사회의 발전방향을 두고 신사회주의가 옳으니,신자유주의가 옳으니 또는 ‘제3의 길’이란 허구적인 것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무슨 학자들의학술 모임에서가 아니라 이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지도자들의 입에서나오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니 진보정치니 하는 한가한 소리는 그만 하고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왕조 시대의 ‘대역죄’를 연상시키는 ‘국가보안법’이 반세기 이상을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나라,그래서 그 법을 위반하면 ‘주리를 트는’ 고문까지 ‘애국’의 이름으로 자행했던 나라,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자식을 잃은 많은 어버이들이 1년이 넘게 여의도 길바닥에서 농성을 하고 있지만 그 시절 고문과 사건 조작을 진두지휘했다는 인물은 금배지를 달고 여전히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 나라.‘총론적인’ 개혁에는 ‘예’ 하지만 그 개혁의 칼날이 자신을 향하면 결사적으로 ‘아니오’ 하는 나라.대통령은 변화와 개혁을 강조하지만 이를 현실로 변환시키는 정치,관료조직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나라.이 나라를 ‘새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제 ‘어제의 논리’가 아니라 냉엄한 ‘오늘의 논리’가 필요하다.새 천년을 빙자해 ‘내일의 논리’까지 끌어대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외쳐대던 ‘새 천년’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새 옷을 걸치기전에 먼저 방 한가운데 가득히 널려 있는 낡은 ‘빨랫감’들부터 해결해야한다.국회는 당장 현재 계류되어 있는 각종 개혁입법들을 통과시켜야 한다. 여당은 보다 확실한 의지로 개혁 노선을 분명히 하고 이를 관철해야 한다.야당의 반대를 핑계 삼아서는 안된다.수구세력이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는것을 우리는 당장 100년 전의 역사에서 배우고 있지 않는가. [정범구 방송인·시사평론가]
  • [기고] 인간 白凡의 못다 한 사랑과 소망

    각종 여론조사에 의하면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으로 단연 최선두에 서 있는 백범 김구 주석.그의 74년 인생은 파란만장했던 한국현대사의 압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년 백범은 동학·유교·불교의 노정을 걸으며 자신을 가다듬어가다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29세 되던 해에 같은 기독교인이던 최준례씨와 결혼한 뒤 황해도의 저명한 교육가로 변신해 이준·이동녕·최재학 등과 교제하며구국운동의 대열에 서게 된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서거한지 1년 뒤인 1911년 백범은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수감생활을 하던 중 동학거사 실패 후부터 사용하던 김구(龜)라는 본명을 김구(九)로 바꾸고 호도 백범(白凡)으로 고친 뒤 일단의 명상을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마다 나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이때 그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백범은 1919년 ‘3·1 저항권운동’이 전개된 후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를찾아 망명을 하여 경무국장(1919)·내무총장(1922)·국무령(1926)·단일지도체제하의 주석(1940∼45)직 등을 수행하였으니 그의 망명생활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해방후 순탄치 못했던백범의 인생역정은 익히 알려진 바 있다. 백범서거 1년 뒤 이 민족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러야 했다.남북한이 단일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체제유지를 위해 양측 모두 군대가 구성되게 되고,군대가 존재하면 동족간의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통일정부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백범이 절규하였던 것은 6·25의 비극적 참상을 미리 예견한 데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게 한다. 백범의 일생을 돌이켜보건대 그의 사상은 ‘자주독립’과 ‘민족통합’사상으로 응축된다.분단조국의 대통령보다는 통일조국의 문지기를 소원했던 그는 서거하기 3년 전인 1946년 부활절을 맞아 암살을 예측이라도 하듯 자신의‘통합사상’의 핵심을 담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미리 공표한 바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 고로 거짓없는 내 양심은 죽음을 초월하여 나라를 사랑하였다…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없겠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같이 내가 죽은 후 나이상의 많은 애국자들이 많이 나겠는 고로다”.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 알의밀알이 되어 자신을 낮추고 희생시킬 줄 아는 사상! 이것이 곧 백범사상(白凡思想)이요,이 사상이야말로 민족통합을 위한 생명선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백범 서거 반세기에 들어선 금년,늦게나마 백범사상을 재조명하는 가극 ‘못다한 사랑’이 우여곡절 끝에 막을 올리게 되었다.이 공연이 갖는 역사적책무는 참으로 크다.천부적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분단의 장벽을 녹이는 마그마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산은 산으로,물은 물로 하나되어 만나듯 갈라짐보다는 하나됨이 자연의 섭리요,하늘의 뜻임을 알리는 국민계몽단이어야 한다. 경제난 속에 국민의 피와 땀인 국민세금으로 시작 할 수있었던 만큼 상업적 성격을 철저히 배격해야 하며,6억원이나 되는 지원금은 향후 공연 준비기금으로 일부를 필히 적립해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원하는 국민이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국민적 공연’이어야 할 것이며,목적과 수단 일체가 백범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홍원식 백범서거 반세기 특별공연준비위 대변인]
  • [의열독립투쟁] (14)김시현 의사

    살아 생전 24년을 감옥살이한 투사가 있다.36세에 독립운동에 발을 디딘 후,광복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일곱 차례나 일제 경찰에 붙잡혀 16년을 감옥에서 보냈고,광복 이후 20년동안 8년을 또 투옥된 것이다. 독립운동에 첫 발을디딘 후,47년의 절반을 넘는 24년을 감옥에서 보낸 인물이 있으니,그가 바로김시현(金始顯)의사다. 김 의사는 188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김 의사를 기억하는 안동 사람들은 먼저 그의 혀짧은 연설을 알아듣느라 애쓴 이야기를 떠올리는데,이는 김의사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며 투쟁한 데서 비롯된 일이다. 처음 김 의사의 호는 학우(鶴右)였는데 검사가 “도대체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 그렇게 바꾸어썼다고 한다.29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한 김 의사는 경북 상주에서 3·1의거 와중에일경에 체포된 후 본격적인 항일역정에 접어들었다. 이 사건 직후 상하이로망명했다가 지린(吉林)으로 가서 의열단에 참여해 자금과 단원모집을 위해국내로 침투하였다.이로부터 그의 국내 침투와 피체,망명은 쉼없이 반복되었다. 거사를 벌이고, 체포되고, 출옥하면 곧바로 망명하여 다시 의거를 일으키는 연속된 행위를 해방을 맞는 날까지 마치 시계바늘 돌듯 계속한 것이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의 제1차 국내폭탄반입에 가담했다가 대구에서 체포된그는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이 회의장에서 김 의사는 평생의 동지요,부부가 될신여성 권애라(權愛羅·73년 작고·건국훈장 애국장)를 만났다. 그의 본부인이 고향의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본부인은 1930년 사망) 상하이로 돌아온 뒤14살 연하의 권애라와 결혼했다. 1897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한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면서 3·1의거에 참가,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그후 이화학당을 졸업한 권애라는 상하이 애국부인회에서 활약하는 등끊임없이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다가 신징(新京)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1923년 2월 독립운동사상 최대 대규모의 무기밀반입 거사가 있었다.의열단이 국내에 아지트를 만든 뒤 대규모 투쟁을 벌이기 위해 많은 양의 폭탄과무기를 국내로 수송한 공작이었다.1923년 2월초 김 의사는 중국 톈진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다량의 폭탄과 무기 및 ‘조선혁명선언’,‘조선관공리에게’라는 선전문서를 인수했다.“동포들에게 설날 떡을 선물한다”고 표현한 그는 평소 포섭해둔 황옥(黃鈺) 경부(警部)를 동반,안동현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뒤 밀고자가 생겨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었고 김 의사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1930년대 김 의사의 활동은 군사간부학교 학생모집과 배신자 처단,투옥생활의 연속이었다.1929년 출옥후 곧바로 지린으로 망명한 김 의사는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하다가 중국관헌에게 체포돼 3개월 동안 고초를 겪고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1932년 의열단지도부와 재결합하였다. 마침 의열단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초급장교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는 베이징지역에서 학생모집 활동을 하는 한편 노을룡(盧乙龍)과 함께 한삭평(韓朔平)이라는 배신자를 처단하러 나섰다.이 의거로 체포된 그는 살인미수혐의로 1935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9년 9월 출옥후 이듬해 4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에도 그는 역시 항일투쟁과 옥중생활로 보냈다.1941년에 국내와 베이징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약 1년간 미결수로 생활했다.경성헌병대로 이감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또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그러다가1944년 베이징헌병대에 다시 체포당한 그는 1년간 수감생활을 보내다가 1945년 서울로 이송되었고,해방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50년 5·10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안동 갑구)되어 정치활동을 펴면서 혁명가로서 그의 면모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새롭게 타올랐다.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그러나 1952년 1월 절대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민족자결단·백골단 등 폭력조직과 관제 데모대를 동원,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7월에 국회의원을 연금시키고 테러를 벌이면서 이미 부결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끝내 통과시켰다.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전개되는 와중에 김 의사는 동지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이승만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 거사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4·19혁명으로 석방되었으나 1966년에 서거,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김 의사는 ‘3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자는 포상받을 수 없다’는규정 때문에 독립유공 공적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김 의사는 아내 권애라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마지막 가는 길에도 그는 아내에게 “권 동지,미안하오.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주오”라는 말을 남겼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 *김시현 의사 후손근황과 기념사업 김시현 의사는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김 의사의 부친은 구한말의병활동을 하였으며, 둘째 동생 정현(禎顯·건국훈장 애족장)씨는 중국에서독립운동을 하다가 관동군에게 처형돼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김 의사는 항일동지이자부인인 권애라 여사 사이에서 일점 혈육을 남겼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살고 있는 김 의사의 외아들 봉년(峯年·77)씨는 192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중국 옌지(延吉)에서 농업학교를,옌안(延安)에서 항일정치군사학교를 졸업한 봉년씨는 해방후 고향에서 면의원을 역임하였으며,대한중석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지금은 은퇴했다.2남2녀.장남 우일(宇鎰·40),차남 홍일(弘鎰)씨는 모두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편 김 의사는 경북 예천 선영에 묘소가 마련돼 있을 뿐 뚜렷한 독립운동공적에도 불구하고 서훈은 물론 추모단체나 기념물 하나 없다. 이는 김 의사가 1954년 1월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탓이다. 봉년씨는 “부친의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 관련부분은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받은 만큼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며 “그동안 보훈처·청와대 등에 진정해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어 현재 서울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해놓은상태”라고 밝혔다. 봉년씨는 또 “1923년 봄 의열단원들이 일제통치기관 폭파,일본인 요인처단을 목적으로 폭탄을 밀반입하다 적발된, 소위 ‘황옥 경부사건’은 주모자가부친이므로 ‘김시현의사사건’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2000년 1월1일 다양한 새천년 일몰·일출 이벤트 안내

    새 천년의 아침해.그 장엄한 일출을 보고 싶은 욕망이 지구촌을 들뜨게 하고 있다.세계곳곳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밀레니엄의 일몰과 새로운 밀레니엄 해맞이를 위한 다양한 이벤트가 준비되고 있다.우리나라에서도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울릉도를 비롯 전국에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새천년준비위원회는 독도,강릉 정동진,울산 간절곶,포항 호미곶,부산 해운대,제주 성산일출봉,서울 남산 등에서의 해맞이 행사와 변산반도에서의 일몰 행사를 지방자치단체와 공동으로 펼친다.각 지방자치단체들도 여러가지 자체 밀레니엄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다.관광업계도 밀레니엄 행사와 관련,다양한 관광상품을선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새 천년 아침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은 울릉도 성인봉(984m).성인봉 일출 예정시간은 오전 7시24분48초로 가장 동쪽에 있는 독도의 7시26분19초 보다 1분31초 빠르다고 한국천문연구원은 밝혔다.육지에서는경남 양산군 가지산(1,240m)으로 오전 7시26분16초. 울릉도의 밀레니엄 축제는 12월31일의 전야제로부터 시작된다.전야제는 서면 남양리 해변에서 오후 4시25분부터 열린다.해맞이 축제는 2000년 1월1일오전 6시40분 울릉읍 저동3리 내수전 해변에서 시작.어선 해상 퍼레이드,장작불 놀이,대합창,새천년 알림 축포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울릉도 밀레니엄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는 성인봉 해맞이 축제.오전 7시20분 부터오전 11시까지 열린다.참가자들은 가장 먼저 동해에서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합창한다.시산제와 해맞이 기념촬영도 한다.울릉도 해맞이축제 여행상품은 대아 여행사에서 판매하고 있다(02-514-6766). 울릉도를 밝힌 새 천년의 아침해는 정동진의 아침도 찬란하게 밝힐 것이다. 강릉시 강동면에 있는 정동진에서는 ‘새천년의 해오름-그 위대한 꿈과 희망’이라는 타이틀로 가장 화려한 밀레니엄 해맞이 행사가 12월31일 오후 11시 전야제로부터 시작된다.11시55분에는 새 천년 카운트다운이 시작.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장엄한 선율 속에 2,000발의 불꽃놀이가 천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을 여는 대전환의 밤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새해맞이 행사는 2000년 1월1일 오전 6시30분에 시작된다.해가 뜰 때는 애국가를 합창하는 ‘코리아 환타지’ 행사가 열린다.오전 8시에 새천년 첫 햇빛으로 불을 점화한후 합창단의 축하 공연과 함께 밀레니엄 행사는 막을 내린다.정동진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할 것으로 예상되어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바란다고 강릉시 관계자는 말한다. 정동진 보다 6분30초 정도 먼저 해를 볼 수 있는 경북 포항시 영일만 호미곶에서도 ‘한민족 해맞이 축전’이 펼쳐진다.호미곶 해맞이 광장에서 열릴밀레니엄 해맞이 행사는 전야축제,자정축원,해맞이 축제로 구성된다.12월31일 오후 5시에 시작되는 전야제에는 길놀이 고성오광대탈춤 등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1일 오전 6시30분에 시작되는 해맞이 축전에는 첫 햇빛 채화식,해병대 태권무,테크노댄스·민속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호미곶 해맞이 광장 성화대에는 변산 반도 일몰의 마지막 햇빛과 호미곶의 새천년 첫 햇빛을 합친 ‘영원의 불’이 영·호남 화합과 국민대통합을 위한 희망의 빛으로 보존된다. 이창순기자 cslee@ * 새천년 맞이 이벤트에 홍콩 “들썩” 홍콩의 화려한 밀레니엄 이벤트는 12월부터 2000년 2월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홍콩관광협회는 음식·쇼핑·관광·축제·문화유산 등 주제별로 여러가지 밀레니엄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축제 행사는 세계 최대의 중국 차 파티,조명쇼,나이트 향연 등 여러가지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다. ‘쇼핑의 도시’라는 명성을 더욱 높일 ‘세기의 세일’ 행사도 열린다.밀레니엄 특별세일(12월부터 2000년 1월까지),겨울·크리스마스·구정 세일(12월부터 2월까지) 행사중에는 쇼핑센터와 백화점은 물론이고 일반 상점에서도 VIP카드를 가진 사람들은 최대 70% 할인된 가격으로 각종 상품을 살 수 있다.VIP카드는 홍콩관광협회 한국사무소나 홍콩 공항에서 무료로 배포한다. 홍콩에 있는 8,700여개의 레스토랑에서는 동서양의 다양한 요리를 즐길 수있다.주요 레스토랑에서는 특별히 ‘밀레니엄 메뉴’도 개발,미식가들을 초대한다.1인당 200 홍콩달러(약3만원). 동양과 서양,고대와 현대의 절묘한 조화를이루는 홍콩의 명소를 성인 한사람 요금으로 두 사람이 관광할 수 있는 ‘하나로 둘이서’ 프로그램도 있다.홍콩관광협회 한국사무소 (02)778-4403.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도시중의 하나인 뉴질랜드의 기스본에서도다양한 밀레니엄 행사가 펼쳐진다.현대드림투어는 휴양의 도시 기스본을 포함 시드니,오클랜드 등 뉴질랜드의 주요 관광지를 9일동안 여행하는 상품을판매하고 있다.12월부터 내년 1월 까지 2달동안 매주 월·목요일날 출발.1∼19일까지 1인당 179만원,20∼1월31일까지 199만원.(02)3702-2233.
  • [발언대] 제주특산 감귤 품질높일 지원방안 절실

    농산물 시장의 전면개방이 임박해오면서 보다 고품질의 농산물을 개발해 세계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다양한 대응이 있어야겠다는 각오는 되어있다.그러나 값싸고 질좋은 외국산 농산물이 밀어닥칠 때 우리 농산물이 국민의 애국심에만 의존해 얼마나 버텨나갈 수 있을까 의문이다.얼마전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그런 위기감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제주도의 주요농산물은 감귤과 감자,양파 등이다.그중 감귤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만의 특산물이다.그래서 우리는 상당한 자긍심을 갖고 열대성 과일시장을 지켜가고 있다. 그런데 제주도 토양의 대부분인 화산회토는 유기물 함량은 높으나 유효유기물이 적고 양분보존능력은 높으나 흡착력이 약해 용탈유실량이 매우 높다.그래서 토양 관리에 어려움이 많다.그동안 제주도 토양은 흙살리기 운동에 걸맞게 B.B비료 사용으로 토양 산성화를 방지하는 데는 효과를 거뒀으나 퇴비와 석회고토를 동시에 시비하는 방법은 너무 복잡하고,이에 따른 인건비부담 등으로 대부분의 농가가 B.B비료의 사용을 기피하는 실정이다. 제주도에 적합한 비료로 제주도 농민들이 선호하는 유기배합비료는 DAP비료에 요소,황산가리,씨앗박,골분,게껍질,어분 등 작물의 생육에 맞도록 적절하게 배합한 것이다.그동안 사용실적이 많아 농민의 선호품이 되었으며 친환경적인 것으로 알려져 큰 호응을 얻고 있다.화학비료와 B.B비료는 정부로부터비료가격의 약 30%정도를 농협을 통해 보조받고 있다.그러나 제주의 유기배합비료는 규격 요건인 입자형태가 아닌 분상이라는 이유로 보조혜택에서 제외된 상황이다. 제주도는 세계적 관광지로 발전해나가고 있다.제주도 관광에서 감귤농장 방문과 감귤선물은 빼놓을수 없는 대상이다.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경쟁을 하고 있는 품종이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필요로 한다. 유기배합비료에 대한 정부지원이 이루어져 본격적으로 유기배합비료를 부담없이 사용할 경우 그 당도를 13.7%로 끌어올려 거의 세계적 수준에 육박하게 될 것이다.정부지원으로 비료원가에 여유가 생겨 황산가리고토(Sulpomag)같은 고가원료를 첨가한다면 세계적인 고품질의 감귤을 경쟁력있는 가격으로 상품화할 수 있을 것이다.내륙에서 화학비료와 B.B비료에 대한 지원이 절실한 것처럼 제주에서 유기배합비료 지원이 절실하다.국민적 관심과 당국의 지원이 있기를 바란다. 송선근(남해화학 상임감사)
  • [특별기고] 국민적 일체감 절실

    새 천년이 한달여 앞으로 다가왔다.세계 각국은 무한경쟁시대의 새 생존전략 마련에 분주하다.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정치는 없고 정략만 내세워지는진흙탕 싸움에 매몰돼 있다. 각계 지도급 인사들의 기고를 통해 오늘의 자성과 21세기를 맞는 마음가짐을 가다듬어본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20세기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한민족에게 지난 100년간은 고통의 세기였다.1895년 동학운동이 발생하자이 땅은 일본과 청의 전쟁터가 되었다(청·일전쟁).동학운동은 한국인에게는민중이 주동이 된 최초의 근대화운동이었으며, 민족적 일체감만 형성되었더라면 조선을 충분히 근대화시킬 수 있었음을 감지한다.그러나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은 그 의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청·일군을 불러들여 동학운동을 좌절시켰다. 그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나락에 빠졌다.해방이 되자 곧 6·25가 터지고 남북 분단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경제성장의 기쁨도 잠시.지난 97년 IMF관리체제에 들어갔다.우리는 이대로 분단 상태를 안은 채 20세기를 마감하게 됐다. 우리가 이토록 계속 고통을 받는 이유는 국민적 일체감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당파 싸움의 와중에서 일어났다.외적에 대한 적절한 방안도 반대파에서는 망국적 정책이라고 비난했다.또 식민지화는 자기 가문을 위해 날뛰는 세도정치의 결과였다.한국이 IMF관리체제에 들어가게 되자 외국 신문에서는 지역 차별 때문이었다고 비웃었다.한국인은 민족의 영웅 이순신을 두번이나 옥에 가두어 죽이려 했다.김구 선생,김좌진 장군을 살해한 자들은 바로 한국인이었으며,애국자 장준하의 죽음에 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이들 반민족적 작태는 공통적으로 나라와 겨레를 무시하고 눈 앞의 이익만을 챙기는 기득권 세력의 이기심과 자신의 집단 이외의 것을 적대시하는 차별 의식 때문이었다. 20년대 말 경제공황이 몰아닥치자 미국 정계는 여야가 합심해서 루스벨트대통령에게 폭 넓은 재량권을 부여했다.그에 힘 입은 루스벨트는 과감한 뉴딜정책을 실시하여 국난을 수습할 수 있었다.미국이 민주주의의 본산이 된이유는 평소에는아무리 의견 대립이 있다 해도 국난에는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대처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은 식민지화 이래의 최대 국난으로 일컬어지는 IMF관리체제라는엄청난 짐을 지고 출범했다. 국민은 여야가 힘을 합쳐서 이 난국에 대처해주는 모습을 기대했다. 비록 국난이기는 하지만 IMF관리체제가 오히려 한국민족의 재생의 기회가 된다는 뜻에서 그 고통을 달게 받겠다는 각오도 했다. 그러나 새 정권 출범 이후 단 한번도 여야가 힘을 모아 대처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야당의 지도부는 오히려 IMF관리체제의 성공적인 조기 수습이 자신들의 불이익인 양 사사건건 여당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진다.외국에는 한국민의 일체화된 의지를 보여야 하는 데 미국까지 가서 11월 경제대란설을 퍼뜨리면서 외국 투자자의 대한민국 투자 심리를 위축시키기도 했다.또 걸핏하면 특정 지역에 내려가 대중집회를 개최하여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있다.700만원짜리 밍크코트 한 장이 수개월 동안 거의 매일처럼 신문의 톱기사를 장식해왔다.속 얕은 고관부인의 작태가 아니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토록 추측과 소문으로 국민의 여론을 어지럽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한편 200억원 이상의 거액을 국세청을 통해 불법으로 빼돌려진 사건에 대해서는 슬쩍 넘어갔다.이 돈의 소비처를 조사한다면 밍크코트 수천장이 오가고도 남을 정도의 부정이 밝혀질 것이다.부정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분명히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사건의 경중을 감안할 때 한국사회 전체는 제정신이아닌 듯싶다. 우리는 이런 의식 상태로 새 천년을 맞이해서는 안된다.어떤 일이 있더라도우리의 자손들에게는 보다 밝은 세기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간절하다. [金容雲 한양대 명예교수]
  • [의열 독립투쟁] (13)곽재기 의사

    곽재기(郭在驥·1893∼1952)의사는 1920년대 항일 독립투쟁사의 전설적 존재인 의열단(義烈團)의 초대 부단장으로서 창단 직후 추진된‘제1차 암살 파괴 계획’의 실행을 국내에서 지휘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7년 가까이 옥고를겪었다.흔히‘밀양폭탄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이 거사 계획은 총독부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도 남을 만큼 대담무쌍했으며,일제의‘문화정치’틀속에 안주하려던 각계 유지층에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1893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난 곽 의사는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청남학교(淸南學校) 교사로 다년간 봉직했다.곽 의사의 항일운동 이력은 1909년에 창립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3.1의거가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던 곽 의사는 1919년 7월 부인 윤씨와 두 아들(大鉉·壽鉉)을 남겨둔 채 중국 동북지방 지린(吉林)으로 망명했다.서너달 후 곽 의사는 투탄·암살 등 의열투쟁 방식으로 조국 독립을 달성코자 결성된 소년단의 지린 지부장으로 등장한다. 이 해 10월 중순곽 의사는 신흥무관학교 생도인 김원봉(金元鳳·의열단장) 등과 알게 되었는데 그 무렵 이들은 ‘의열단’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조직하고자 동지를 규합하고 있는 중이었다.소수 정예의 결사적‘직접 행동’으로 일제 침략세력을 타격하며 독립운동의 전투적 기운을 드높이려 한다는 취지에 공감한 곽 의사는 곧 그들의 동지가 되기로 맹약했다.이들은 11월9일 밤 지린성 밖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창단 회합을 갖고 10개조의 공약을 정했다.단장에는 김원봉,부단장에는 곽 의사가 추대됐다.서상락(徐相洛)·배중세(裵重世)와 함께 27세의 최연장자라는 점 이외에 교사 경력과 그동안의 항일 경력,그리고 식견과 지도력이 두루 참작된 결정이었다. 의열 단원들은 처음부터 고강도의‘암살파괴운동’을 벌여나가기로 결의했다.표적은 총독부 일본인 고관과 친일 반역자,그리고 식민지배의 정치기관·선전기관·폭압기구·수탈기구와 부속 시설물들이었다.이 계획은 테러리즘의 소치가 아니라 민족독립 투쟁의 일환으로 행해질 기습 특공작전이요,그 원초적 범례가될 것이었다. 단원들은 지체없이 국내 거사 준비에 돌입했다.경성(서울)의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매일신보사 폭파와 사이토(齋藤)를 비롯한 총독부 수뇌·요인들을 저격,포살키로 목표를 정했다.김원봉은 중국에서의 제반 준비와지원을 책임지고 국내 현지에서의 거사 추진 및 실행은 곽 의사가 전담,지휘하기로 결정하였다.창단 직후부터 추진한 무기 구입 노력은 이듬해 3월에 가서야 성과를 보았다.상하이(上海)에서 구입한 탄피 3개와 폭약을 이용하여화약 투입식,도화선 점화식,투척 즉발식 폭탄 1개씩을 각각 제조했다.4월 하순 김원봉과 이성우가 폭탄 13개(점화식 7개,투척식 6개),제조용 폭약과 탄피,권총 두 자루,탄환 100발을 중국인으로부터 추가로 구입했다. 무기를 국내로 들여오는 일은 4월 초와 5월 초 두 차례에 걸쳐 이어달리기식으로 수행되었다.1차분 폭탄 3개는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張建相)의이름을 빌려 안뚱현(安東縣)의 영국인 세관원 유스 포인에게 소포로 부친 후 곽 의사가 따렌(大連)을 거쳐 안뚱으로 가 소포를 찾아그 곳의 상주연락원 이병철(李炳喆)에게 넘겨주었다.이병철은 옥수수 스무 가마 속에 폭탄을 숨겨 포장해서 경남 밀양의 화물운송점으로 부친 후 기차편으로 밀양으로 가서 화물을 찾아 폭탄만 따로 빼내 청년회장 김환(金煥)의 집 마루 밑에 숨겨두었다. 2차분 무기 묶음은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성우가 의류상자로 위장해서 휴대하고 선편으로 안뚱까지 가서 이병철에게 건네주었다.이병철은 지난번처럼옥수수 다섯 포대 속에 무기를 넣어 포장하고 다른 열다섯 포대와 뒤섞어 화물로 위장해 부산진역의 한 운송점으로 보냈다.이것을 배중세가 수령해서 비밀표식이 된 다섯 포대만 따로 추려 창원 강산진(姜祥振)의 집 창고에 숨겨두었다.무기 반입이 완료되자 지도부는 인원 배치와 임무 분담,자금 조달 등의 후속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4월 중순 국내로 잠입한 곽 의사는 밀양으로 내려가 1차분 폭탄의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먼저 귀국한 단원들을 만나 임무를 부여하고 격려하였다.그리고는 상하이로 돌아가 김원봉에게 제반 준비작업의 진척도를 보고한뒤 이성우와 함께 다시 국내로 잠입했다.서울 공평동의 전동여관(典東旅館)에 지휘소를 두고 단원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해 가며 거사날짜만을 기다렸다.거사는원래 6월 초 이내에 결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태로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밀양에 숨겨둔 폭탄 3개가 밀정의 제보로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돼 가택수색 끝에 적발,압수되어버린 것이다.이 때문에 경성부 관내에는 경찰의 특별경계령이 내려지고 엄중한감시망이 가동되었다.게다가 이수택은 거사때 뿌릴 격문의 인쇄비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차 반입무기의 서울 이송을 누차 미루었다.자금마련을 위해 곽 의사가 대구와 청주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그래서 거사날짜는 7월8일로 잠정 연기되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잠행하며 대기중이던 단원 5명이 6월20일경 조선인경부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고 말았다.곽 의사는 무기 보관 상태 점검차 부산에 잠시 내려갔다가 김기득과 함께 부산서 체포되었다.다른 단원들과협력자들도 속속 검거되고 창원에 은닉해뒀던 무기도 모두 압수되었다. 1921년 6월21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곽 의사는 상고를 포기한 채 마포형무소 독방에서 복역 중 1927년 1월 특사조치로 1년10개월 감형돼 이 해 1월22일 만기출옥했다.출옥 후 3년 뒤 곽 의사는 다시 만주·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재투신한 것으로 전해진다.광복 후 1945년 11월 귀국한 곽 의사는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이끄는 등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에 타계했다.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곽재기 의사 후손들 근황 곽재기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애국지사에 속한다.동작동 국립묘지에 묘소가 마련된 것 외에는 기념사업회는 물론 변변한 기념물 하나 세워진 것이 없다.‘못 배우고 못 사는’ 후손 덕분(?)에 독립운동 관련 자료하나 제대로 전해오는 것이 없다.후손들 역시 곽 의사의 이름 석 자를 겨우기억하고 있을 뿐 곽 의사가 해방 후에 타계한 탓으로 연금 한 푼 주어지는것이 없다. 곽 의사의 부인 윤씨는 곽 의사보다 먼저 작고했다.두 아들 가운데 장남 대현(大鉉)씨는 일제때 작고했으며,차남 수현(壽鉉)씨는 80년대 중반 작고했다.장손 기수(琦洙·65)씨는 함북 청진 태생으로 일제때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며 일제가 국민학교 입학시험을 못 치르게 해 입학이 늦어졌다.해방 후 고아원을 전전하며 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기수씨는 62년부터 10여년 동안 교통부에서 역무원으로 종사한 바 있는데 지난 95년 부인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떠 현재 외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슬하에 2남2녀.최근 해방 후 작고한 독립운동가들의 손자들이 자신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과 관련,조상들의 건국훈장을 반납,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기수씨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조상을 팔아 잘 먹고 잘 살 생각은 없습니다.그러나 단지조부님께서 해방 후에 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손자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은 형평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정운현기자 jwh59@
  • 한국상징 홍보책자 첫 발간

    “우리나라의 국가상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국가상징인 태극기,애국가,무궁화,국새 등 상징물을 알기 쉽게 설명한 책자가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발간됐다.행정자치부는 22일 새천년을 앞두고 국가상징물에 대한 국민들의이해를 돕고 국가의 정체성과 올바른 국가관이 확립하기 위해 ‘대한민국 국가상징’을 펴냈다고 밝혔다. 책자는 태극기의 내력과 태극기를 정확하게 그리는 방법,태극기의 의미,국기에 대한 예절 등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애국가와 무궁화의 내력,국새와 나라문장의 의미와 사용처 등도 20여쪽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행자부는 국가상징 책자 10만부를 발간해 교육기관,행정기관,도서관 등 2만4,000여곳에 배포할 계획이다.행자부는 앞으로 재외동포에게 고국을 알리기위해 영문판 책자도 2만부 발간 할 계획이다. 박정현기자 jhpark@
  • [대한시론]‘밀레니엄의 꿈’ 新애국주의로부터

    새로운 천년을 40일 앞두고 지구촌 사람들은 밀레니엄 꿈에 부풀어 있다.2000년대 인류는 보다 높고 고귀한 인간 사회를 꿈꾸며 나름대로 보다 나은 세상을 꾸미겠다는 다짐이 여러가지 형태로 분출되고 있다.지난 20세기를 그들의 시대로 누렸듯이 21세기도 그들의 시대로 이어가겠다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 공업국의 야심찬 꿈이 새롭게 표출되고 있다.이를 테면 그들이 말하는 서구의 세기(웨스턴 센추리) 또는 미국의 세기(아메리칸 센추리)라는 100년의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1000년의 꿈은 우리 한국을 비롯한 중진권 국가에도 번지고 있다.중진국은지난 반세기 동안 선진국의 신중상주의 물결을 잘 헤쳐나간 덕에 절대빈곤으로부터 해방되어 상업주의적 환희와 무분별한 풍요 속에서 세계화의 바람(덩달아 들뜬 기분)이 들어 있다.이들 역시 새로운 1000년을 맞아 막연하게나마 밀레니엄의 꿈이 있고,새로운 백년(센테니얼)의 희망이 있다.또한 끼니를걱정해야 하는 제3세계 30억 인구와 정치·사회적인 혼란을 겪고 있는 구공산권 국가의 3억 인구에게도 새로운 천년의 꿈이 있다.그들에게는 21세기가편안하고 배부르게 먹고 자는 새시대의 도래라는 소박한 소망뿐일 것이다. 이렇게 1000년의 꿈은 자국이 놓인 형편에 따라 나라마다 다르며,따라서 우리는 우리한국의 밀레니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곰곰이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다가올 21세기는 지난 100년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하나 하나 고쳐나가는 개선과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밀레니엄에 담아야 할 한국의 꿈은 서구세기의 연속도아니고 제3세계와 구공산권의 기초적 삶의 기원도 아니다.즉,그것은 우리가지나온 역사로부터 찾아야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유행처럼 구가하는 밀레니엄의 꿈은 덧없이 안겨진 장미꽃 한송이가 아니라 피나는 자기반성과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잉태할 수없는 새 생명이 되고 있다.지난 100년 동안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기상도는 흐린 후에 비가 오고 폭풍과 천둥이 치며,맑고 개어 햇빛이 난 후 안개와 매연이 자욱한 날의 연속으로 가득하다.우리 국가기록은조선왕조의 쇠퇴,식민지 역사,광복의 환희,민족분단과 전쟁,근대국가 건설의 시련,민주화의 명암,남북관계 정상화 및 통일의 숙제로 장식되어 있다. 1000년의 꿈은 이런 과거사를 반추하고 반성하는 지혜로 먼 훗날이 아니라다가오는 100년을 향한 센테니얼의 희망과 이를 위한 국가지표가 확실해야할 것이다.밀레니엄의 꿈은 결국 새천년을 다가올 역사의 마디로 나눠 국가100년 대계와 10년의 국가지표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의 허황된 꿈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기 말에 세워야 할 민족적 그리고 국가적인 약속이 필요하다.그 약속은 나 자신이 보다 만족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국가사회에 더 많은 봉사와 희생을 치러야 하겠다는 자신과의약속일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해진 국민의식은 근대화와 세계화의 여파로 지나치게 개인주의적 이기주의로 쏠리게 되었다.따라서 극단적인 이익사회(게젤샤프트) 의식에 빠지게 돼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의 공동체의식이무너지고 국가사회의 기본질서를 심히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태해진 시민의식은 건강한 국가사회가 없어도 자신만은 생존할 수 있다는 착각에빠지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냉전시대의 조작된 애국주의가 지탄을 받게 되면서 탈냉전시대 애국주의가 실종한 것이다. 새로운 21세기를 맞아 한국이 당면한 위기는 이익사회의 부작용으로 등장한신애국주의의 실종에 있다. 이는 우리만 느끼는 위기가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우리의 선진우방의 지성들이 던지는 회의이며 한국을 다녀간 외국 관광객의 입에서 나오는 충고다.차제에 우리는 개인주의의 천국인 미국의 애국주의를 환기하며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연설의 한 대목을 잊을 수 없다.“친애하는 국민여러분,국가가 귀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말고,귀하가 조국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물어주시오”나라를 키워 그 속에서 개인도행복해지는 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천년의 꿈일 것이다. [金裕南 단국대 교수 한국정치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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