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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약돌] “바이코리아는 매국적”취소 소송 원고패소 판결

    서울고법 특별11부(부장 禹義亨)는 1일 “매국적이고 반국가적인 ‘바이 코리아(BUY KOREA)’를 펀드상품 명칭으로 승인해준 것은 부당하다”며 천안민족정신선양회가 금융감독원장을 상대로 낸 펀드상품명칭 승인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명칭 승인 여부에 관한 현행 법률은 애국정서 함양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충남 천안 출신 순국선열에 대한 선양사업을 목적으로 발족한 천안민족정신선양회는 지난해 2월 금융감독원이 현대투자신탁운용의 ‘바이코리아’ 주식투자신탁 수익증권 발행 신고를 받아들이자 “‘한국을 사라’는 뜻의 펀드상품 명칭 승인으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봤다”며 소송을 냈다. 이상록기자
  • “이선희” 감격의 순간 스케치

    ■치열한 접전 끝에 군데르센을 꺾고 금메달을 딴 이선희는 경기가끝난 뒤 환한 표정으로 두팔을 번쩍 들어올려 승리의 기쁨을 만끽. 이어 이선희는 김종기 코치가 응원석에서 가져다 건네준 대형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한바퀴 돌며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답례.그러나 이선희는 경기장을 빠져 나가면서 감격에 겨운 듯 남몰래 눈물을글썽이기도. ■이선희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 100여명의 한국 응원단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이선희를 열렬히 성원.일부 관중들은 태권도복을 입고나와 태권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이선희는 경기전 상대인 트루데 군더젠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시상식에서 이선희는 은·동메달 리스트가 메달을 받을 때 박수를치며 축하해 주는 등 여유있는 모습. 그러나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쏟아내며 눈물을 닦으며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
  • 中 동북3성 항일유적지 답사기 낸 박도씨

    이대부속고등학교 국어교사이자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인 소설가 박도(朴鍍·55)씨가 최근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우리문화사 펴냄)를 출간했다. 이 책은 박씨가 지난해 8월 초순 10여일동안 중국 동북3성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후 여행기 형식으로 펴낸 것.답사에 쏟은 열정과 애국선열에 대한 박씨의 추모의 정이 책 곳곳에 흠씬 담겨 있다. 박씨는 답사에 앞서 동작동과 대전 국립묘지내 애국선열들의 묘소를찾아 “선열들의 발자취를 백분의 일이나마 제대로 보고 바로 쓸 수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고 한다. 박씨의 답사길에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증손 이항증(李恒曾)씨와 일송 김동삼(金東三)선생의 손자 김중생(金中生)씨가 동행했다.박씨는 “중국에서 활동한 애국선열 가운데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거나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린 분이 많아 가슴아팠다”며 “반면 친일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 역사가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이 책은 박씨가 쉬운 작가적인 필치로 쓴 것으로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는 추천사에서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독립운동 관련 서적이 드문 현실에서 중국 일대의 항일투쟁사를 쉽고도 재미있게 접근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썼다. 책속에는 저자가 직접 찍은 100여 장의 현장사진과 현지에서 만난관계자들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있어 자료가치도 우수하다. 박씨는 내년쯤 책 한 권을 더 낼 계획이다.새 책에서는 자신과 같은경북 구미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을 한 허형식(許亨植,일명 許克)과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근무한 박정희 전대통령의 일제 하의 대비된 삶을 다룰 예정이다. 금년 여름 박씨는 두 사람의 활동무대였던 만주 일대의 답사를 마쳤다. 정운현기자 jwh59@
  • [네티즌 이슈] 올림픽

    *'평화·단결' 이념 되살리자. 나는 올림픽을 무조건 폄하할 생각은 없다.다만 올림픽의 이면에 도사린 상업적이고 속물적인 것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말하고글쓰는 사람의 할 일이 아닐까 싶다.특히 올림픽 주변의 대형 마케터들의 놀음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 내내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스포츠 귀족들의상혼을 살펴봐야 한다.인류의 평화와 단결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지만,실제로는 민주주의를 묵살하고 인종차별을 수시로 감행하며 환경을 짓밟는 열강들은 시시각각으로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오로지 맹목적인 애국심과 선정주의가 세계의 모든 중심으로 떠오를 뿐이다. 사실 올림픽은 선수 자신과의 경쟁이지 타국과의 경쟁이 주요 관전포인트는 아니다.한 인간이 자신을 이겨가면서 보여주는 휴먼 드라마는 오늘 각박한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새로운 안식처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금메달 개수니 금메달 포상이니 하며 과시하고 선전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이러한 분위기에는 당면 현안들도 바깥으로 밀쳐지게마련이다.올림픽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엔 환호와 박수,웃음과 행복이펼쳐질뿐이다.우리가 올림픽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것은 그야말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확립되고 평화와 인간존중의 가치가 속속들이 확장되기 위함이다. 벌써 세계는 ‘오일쇼크’에 약소국들이 다시 벼랑끝 경제파탄으로몰리고 있다.언제까지 축제로만 세계의 관심을 모아갈 것인가.올림픽에는 왜 소외받는 이웃들에 대한 구호가 주목되지 못하는가.세계인류가 가난과 질병,억압과 폭정으로부터 시달리는 인류들에 대한 푸른신호를 가질수 있도록 올림픽은 진정으로 재탄생해야 한다.거대 스포츠 마케터들과 강대국들의 입김,IOC 등 스포츠 귀족들의 독점적 권력과 부패의혹,승리만을 강조하는 언론들의 과열경쟁 등으로 올림픽은이미 하나의 시장이 됐다. 누가 이런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올림픽의 진정한 참뜻을 복원시키는 일을 할 것인가.우선 엘리트체육 위주의 올림픽을 개선해야 할 것이다.나는 그때만이 국가이기주의의 장으로 변질한 올림픽이 제대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동렬 ㈜심플렉스인터넷 고문 drkim@simplexi.com. *남북한 감격적 동시입장. 이번 올림픽은 뭐니뭐니 해도 남북한의 ‘맞잡은 손’이 한 축을 이룬 것 같다.미국의 ‘USA Today’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의 하이라이트는 남북한이 한반도의 깃발아래 동시입장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이것은 남북의 통합이나 대화나 이해에 관한 문제가남의 문제에서 나의,우리의 문제로 인식시켜주는 중요한 계기로도 볼수 있다. 이건 우리가 어림잡아 재기 힘든 가장 큰 소득 중의 하나에해당한다. ‘쉬운 것은 한없이 좋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험난한 통일의 문제도 쉬운 문제부터 풀면 서로 웃으며 산적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특히 남의 문제로 보아왔던 통일과 관련,엉터리 문제의식(Pseudo-problem)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그러한 예의 하나가 남북정상회담이요 동시입장이요 남북선수단이 가진 화합주건배 등이다. 우리의 독특한 문화적 성향을 볼 때 분명 남북한 동시입장이라는 세레모니가 가지는 대내외적 의미는 지대하다.이제껏 착각한 남북문제 해법은 문제를 푸는 방법에 있었다.즉 기존의 남북해법은 그 궁극적 통일과제에 대한 이해나 실마리를 굉장히어려운 데서부터 찾고,서로에게 양보를 주장한 데서 헝클어졌었다.하지만 지난 남북정상회담 이후 통일의 문제를 바로 나의 문제로 전환했다.이와 같이 문제의식의 원형만 굳건하다면 ‘일치일란(一治一亂)’식의 우리 모습도 개조될 것이다. 지나온 세월 남북간 문제제기 방식에는 본질(통합,자신의 문제)보다는 형식(정치적,강대국 의존지향)에 전적으로 활용되어 왔음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이번에 올림픽은 세계 60억 인류가 지켜보는 잔치마당에서 동일깃발 아래 남북한이 동시입장을 보여줌으로써 남북통일의 문제는 우리가 해낸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남북통합의 문제는 성급할 것도 미적거릴 것도 없다.진정한 의미에서 남의 문제에서 나,우리의 문제로 국민들이나 정상들이 실질적으로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다음을 기약 할 일이다. 올림픽에서 우리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모습,해결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는 일이 절대 필요하다. △박종환 GTV네트워크 대표이사 fredbach@gtvnet.co.kr
  • [김삼웅 칼럼] 重慶에서 맞은 광복군 창설60년

    지난 17일 낮 중국 중경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경(重慶)청사 재복원 개막식과 광복군 창설 60주년 기념행사가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청사 2층에 마련된 항일군사활동자료전시관도 개막되었다.해방후 처음으로 광복군 창설 기념행사가 중경 현지에서 거행된 것이다. 60년전인 1940년 바로 이날 중경에서는 한국광복군 창군식이 거행되었다. 한민족은 나라를 잃고 세계각지를 유랑하면서 산발적으로 의열투쟁과 독립군의 항전을 계속하였지만 임시정부 산하에 ‘국군’인 광복군이 창설되기는 처음이다. 남의 나라에서 군대를 양성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임정의 지도자들은 중국정부의 협력과 미주 동포들의 성금으로광복군을 창설했다. 비록 창군날에는 병력이 30여명에 불과한 초라한모습이었지만 광복군의 사기는 충천하고 독립운동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광복군 창군의 날 중경의 날씨는 쾌청했다.행사장 가릉빈관(嘉陵賓館)에는 임정 국무위원을 비롯,내외귀빈 20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식장 중앙에는 대형 태극기가 게양되고“초나라는비록 세집만으로도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나무를 베히고 뿌리를 말리는 각오라면 끝내 우리는 고국에 돌아갈 날이 있을 것이다”는 등의표어가 식장을 자못 숭엄하게 하였다(조소앙,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기록’). 나라 잃은지 30년만에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되찾고자광복군을 창설한 임정의 애국지사들과 대부분 일본군을 탈출하여 참여한 젊은 군인들의 감격과 전의로 대회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김구 주석은 “광복군은 1919년 임시정부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국 총통 장개석의 특별허락을 받아 조직되었으며 중화민국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저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임정의 광복군 창군은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다. 당시 만주지역에 120만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과 중국대륙 각지에 살고 있는 동포청년들,그리고 당시 중국관내 일본 육군 26개 보병사단과 20개 독립혼성여단의 병력 중에는 강제징집된 한인청년이20만여명에 이르는데 이들을 모아서 국토 수복작전으로 빼앗긴 조국을 무력탈환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출범한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작전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했다.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하여 대일전쟁을 수행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위해 미국과 OSS특수훈련을 실시하였다. 시련도 많았다. 우선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 행동 9개준승’이란것을 만들어 중국 군사위원회가 통할지휘토록 하였다. 광복군은 중국군의 통제와 간섭을 받게 된 것이다. 나라없는 군대의 한계일 수밖에없었다. 그러나 끈질긴 교섭으로 4년만에 군 통수권을 회복하였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반세기가 지나도록 작전지휘권이 외국에 넘겨진것과 크게 비교된다.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김구 주석이 통탄한 대로 임정은 발언권을 잃고 건국과정은 물론 그이후 군의 핵심은 일군과 만군출신들이 차지했다. 임정과 광복군은‘개인자격’으로 귀국하여 소외의 대상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어 일본과 나치독일에 선전을포고하면서 일군과 싸우고 중국 국부군과 협동하여 각처에서 항일전을 전개했으면서도 광복후에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자리에 일군·만군출신이 올라섰다. 건국사의 첫자리가 이렇게 왜곡되었다. 임정 중경청사 재복원 행사에는 윤경빈 광복회장을 비롯,김우전 광복군동지회장, 박유철 독립기념관장, 홍순영 주중대사와 중국측에서는 진근은(陳根銀) 중경시 외사부주임등 관계자가 참석하고 행사후에는 광복군총사령부 유적지와 백범선생의 망명지 등을 돌아봤다. 대부분 20대 학도병으로 일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제백발이 성성한 80고령의 ‘노병’으로 변했지만 나라사랑의 열정은여전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1940년 9월17일 임시정부의 국군으로광복군이 창군한 날을 국군의 기념일로 지정하여 통일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면서 60년전 그날의 감격을 되새겼다.광복군 회갑날의 중경하늘도 맑고 깨끗했다. ■중국 중경에서 김삼웅 주필kimsu@
  • [외언내언] 무대에 되살아난 丹齋

    지난달 12일 KBS-TV의 인기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이 ‘발굴!스티코프의 비밀수첩,김구는 왜 북으로 갔나’를 방영했다.백범(白凡)김구(金九)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전말과 그의 자주통일 의지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이후 KBS 홈 페이지의 프로그램 시청평 난에는 “김구선생이 그처럼 훌륭한 분일 줄 미처 몰랐다.정말 존경한다”는 글이 수십건 올랐다.대부분 중고생과 20대가 쓴 글이었다.시청평들을 읽으면서 씁쓰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우리 사회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백범선생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일제에게 35년간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역사를 갖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그 역사가 마냥 부끄럽지만은 않은 까닭은 치열하게 항일독립투쟁을 벌인 선열들의 존재가 워낙 뚜렷하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아이들에게 독립운동가 열 사람만 꼽으라고 주문하면 대체로 “이승만(李承晩)·김구·유관순(柳寬順)·안중근(安重根)·이준(李儁)”정도를 들고는 머뭇거린다.독립운동가 이름을열 손가락에 꼽지 못할만큼 우리 사회는 애국 선열들을 대중화해 친숙하게 만드는 일에 소홀했다. 지금 서울 종로5가 연강홀에서는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 ‘꽃뫼연’공연이 한창이다.추석날 시작해 오는 17일까지 매일 오후 4시30분·7시30분 두차례 무대에 오르는 이 연극은사실 제목 자체가 생소하다.‘꽃뫼’는 단재가 태어난 충북 청원군낭성면 화산(花山=꽃뫼)마을이니,꽃뫼 연(鳶)은 결국 창공을 누비는연과 같은 선생의 높은 뜻과 쾌활한 기상을 상징한다. 단재가 역사를 “아(我=나)와 비아(非我=내가 아닌 것)의 투쟁”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연극도 단재와 ‘미리(미르)’의 대립구도로 진행된다.미리는 용(龍)의 옛말이지만 선생은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미리를 민중을 억압하는 상징물로 형상화한 바 있다.따라서연극에서의 미리는 단재 내부의 욕망·나약함 같은 인간적 약점이자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같은 침략의 원흉,또 일본제국주의 그 자체로 변신을 거듭하며 사사건건 대치한다.아울러 을사조약·한일병합·고종황제 독살 등의 역사적 사건과 단재의 개인사가 씨줄·날줄로 얽혀 전개된다. 단재가 누구인가.그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일제의 침략 야욕을 앞장서 파헤친 당대의 논객이요,민족주의사관을 정립한 역사학의 거목이자,1936년 여순감옥에서 숨지기까지 26년동안 이역을 떠돌며 온몸으로 광복을 추구한 애국지사이다.그 단재를 추석연휴 마지막 날연극무대에서 만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선생을 가르쳤는가”라고자문했다.그리고 부끄러웠다. 이용원 논설위원
  • 시드니 소식 D-5/ “일부종목 선수 90% 금지약물 사용”

    ■일부 올림픽 종목의 선수들 90% 가 금지약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9일 백악관의 연구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또 “일부 국가에서는 애국심과 명예를 의식해 이같은사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와 함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감시 부재도 지적했다. 이에 대해 IOC측은 “우리가 약물과의 전쟁에서 이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향후 2년간 2,500만달러를 투입해 모든 종류의 약물 사용을 금지시킬 수 있는 기술과 감시체계를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트라이애슬론 수영경기를 치르게 될 시드니항에 상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주최측이 적극 진화에 나섰다. 경기진행의 총책임자인 데이비드 한센은 9일 “경기장 주변에 전류장치를 설치해 상어의 접근을 원천봉쇄했다”고 말했다. 시드니항에서 가장 최근 발생한 상어떼의 공격은 2년전에 있었고 마지막으로 상어에 의해 인명피해를 낸 것은 1963년 이었다. ■시드니로 향하던 유람선 승객중에 폐렴환자가 발생해 보건당국에비상이 걸렸다. 뉴사우스웨일즈 보건당국은 시드니로 입항하던 프린세스호 승객 가운데 폐렴증세를 보인 환자가 발생해 보호수용하는 등 조치를 내렸다고 발표했다. 시드니 보건당국은 이 유람선이 10일 시드니에 도착하는 즉시 역학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시드니에 도착한 선수 가운데 140명에 대한 무작위 도핑테스트를실시한 결과 전원 음성반응이 나와 IOC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IOC는 그러나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4월부터 1,811명의 선수들에대해 실시한 검사결과 10명이 양성반응을 나타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헝가리육상 400m의 주디트 세케레스와 단거리선수 가보도보스의 선수자격을 2년간 박탈하기로 했고 체코 역도선수 지네크바큐라에게 대회참가 불허를 통보했다.
  • YS 사실상 정치재개 선언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 수호 국민총궐기 대회’를개최키로 한 것은 본격적인 정치 재개 의사를 밝힌 신호탄으로 해석된다.사태 추이에 따라서는 여야 정치구도나 한나라당 내부 역학관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이다. ■정치재개 시동 김 전 대통령이 8일 기자회견 일문일답 과정에서 “이미 대단한 지도층과 의논해 궐기대회를 준비 중”이라고 공공연히밝힌 대목은 이번 궐기대회가 일회성 ‘세 과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특히 “김정일(金正日)을 규탄·고발하는 서명운동에 민주산악회가 1차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공언한점에서 김 전 대통령의 정치 복귀 의지를 읽을 수 있다.다음달 민산회원 1,000여명이 참석하는 대구 팔공산 등산을 계획하고 있는 것도예사롭지 않다. 물론 김 전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정치세력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애국 구국운동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복귀가 현실화된다면,강도(强度)야 어떻든 한나라당 내부 동요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최근 한나라당의 투쟁방식과 관련,“논평할 가치조차 없다.김대중(金大中)정권이 야당의원 36명을 빼앗아갔을 때 등원을 거부했어야 했다”고 ‘과소평가’한 것은 한나라당내 민주계 출신을 겨냥한 메시지 성격이 짙다.그러나 ‘경제환란 장본인’으로 거론되는 김 전 대통령이 남북문제를 거론하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명분도 없는데다 거센 비난여론에 맞닥뜨릴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여야 반응 민주당과 한나라당 모두 김 전 대통령의 정치재개 의사에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민주당은 현 정권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남북문제를 물고 늘어진점에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장전형(張全亨)부대변인은 논평에서 “국민 가슴에 IMF의 멍에를 씌운 사람이 민족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덕담은 못할 망정 추태를 부린 데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김 전대통령의 대여 공세에는 “옳은 얘기”라고 맞장구를 쳤다.그러나 그의 정치복귀 움직임이 야당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곤혹스런 표정 속에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박찬구기자 ckpark@
  • 항일애국지사 임영선옹 별세

    항일애국지사 임영선(林永善·81)옹이 6일 오전 7시30분 서울 강동구 둔촌동 서울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일제 때 함흥학병 의거를 주도해 일본 소창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을 인정해 지난 77년 대통령표창을,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은 부인 오화영씨와 승현(임승현비뇨기과원장)씨 등 1남3녀.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8일 오전 7시30분이며,장지는 대전국립현충원 제2애국지사 묘역.(02)760-2011
  • [오늘의 눈] 권희로씨 사건이 남긴것

    최근 일어난 권희로씨의 살인미수 사건은 여러모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국민들 가슴에 일본의 차별대우에 항거한 ‘애국지사’로 아로새겨진 그가 하루아침에 내연의 처와 살인을 공모한 ‘현행범’으로 전락했다. 99년 9월,그의 석방을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많은 국민들,한국 생활정착을 위해 물심 양면으로 도왔던 지인들 역시 이번 일이 생기자 허탈한 마음을 가눌길 없을 것이다. 현해탄 너머 일본에서도 이번 권씨 사건은 화제가 되고 있다.대부분신문들은 서울 발 주요 기사로 실었고 산케이 신문은 사회면 톱으로사건 전말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의 이런 반응 행간에는 그동안 ‘살인자 권씨를 애국지사로 부각시켰던 한국 보도행태’에 대한 불만이 쉽게 감지된다.일부일본 언론들이 ‘거 봐라, 우리 말이 맞지 않았느냐’는 식의 쾌재도부르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권씨 사건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처리할 문제는 아닌 듯하다. 권씨 석방 와중에서 벌어졌던 한일 양국의 신경전이 다시 재현되지나않을까 우려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씨 석방과정을 통해 우리 언론이 지나치게 ‘애국지사’로 부각시켜 일본인의 혐한(嫌韓) 감정을 부추겼던 점은 분명 반성할 대목이다. ‘권씨를 반일(反日)의 영웅으로 무비판적으로 미화’함으로써 그의불미스런 일부 행적을 고의로 외면하지나 않았나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 사건이 국민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도 한쪽으로만 치닫는 한국 매스미디어의 특유의 ‘냄비식 보도’,균형감을 잃은 한국의 언론때문이라는 지적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일본 언론 역시 해방 후 켜켜이 쌓여 온 ‘민족차별 문제’를 애써외면,권씨를 단순한 ‘범죄자’로 취급하려했던 ‘축소지향의 보도’를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권씨를 반일감정을 부채질하기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일본의 과잉반응 역시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남게하는요인이 될수 있다. 껄끄러운 한·일 관계를 온몸으로 상징했던 권희로씨.30여년의 감옥생활로 희박해진 현실 감각과 믿었던 사람(옥중 결혼했던 돈모씨)의배신, 그리고 이번의 철창행….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한 인간의굴곡된 삶이 안타까울 뿐이다. 오일만 정치팀 기자 oilman@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 (8)美洲 독립운동 전초기지 하와이

    [호놀룰루(하와이)김삼웅 주필] 지금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민 100주년(2003년)을 앞두고 행사준비에 바쁘다.하와이 이민 100년사는 바로한민족 이민사와 같고 미주지역 독립운동사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1903년 1월 13일 대한제국 수민원(綏民院)총재 민영환이 발행한 여권을 소지한 노동이민 97명이 미국상선 갤릭호를 타고 23일 간의 긴항해 끝에 호놀룰루항에 상륙한지 100년이 다가오는 것이다.하와이이민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전까지 65척의 선박편으로 7,200여명의한인이 하와이섬으로 이민,오아후섬 등 농장에서 사탕수수 재배와 관개사업에 종사했다. 일제시대 미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민동포들의 힘으로가능했다.그러나 을사조약과 함께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한국인의 해외이민을 봉쇄함으로써 하와이 이민도 중단되었다. 하와이이민 한인들은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근면성을 발휘해 몇년이지나면서부터 일부는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본토로 건너가기도 했다.그러나 대부분이 현지에 정착하면서 역량을모았다. 현지 석간신문 Evening Bulletin지 1903년 2월 26일자에는 “지난 1월 31일 이곳 와이아루아 농장에 도착한 한인들은 몸이 건강하며 농업에 익숙한 사람들이다.그들은 모두 만족해 하며 농장노동일에 힘쓰고 있다.그러나 그들의 임금은 저렴한 것이 현실이다”라고 보도했다.한인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10시간 이상의 노동에 하루품삯이 남자는 69센트,여자는 50센트에 불과했다.교민들은 이렇게 열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중 일부를 떼어 독립운동자금으로 헌금했다.중국에 세워진 임시정부 운영자금의 상당액이 하와이 한인들이 보낸 돈이었다. 한편 교민들은 1905년 하와이 에바농장에 한인감리교회를 세워서 정신적인 유대를 나누는 한편 애국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인 항일운동에나섰다.1907년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어 있던 24개 단체대표 30여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하와이 한인단체를 총망라하는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고 1909년 2월 1일에 ‘국민회’를 창립했다.국민회는 1910년 명칭을 ‘대한인국민회’로 고치고 조직 강화와 조국해방 사업에 필요한 외교·교육·출판사업 등을 관장할 인재의 필요성을 실감하여 1912년 네브라스카대학 정치학과를 수학한 박용만(朴容萬)선생을 초청했다. 박용만의 출현으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주정부로부터 경찰권을 부여받는 등 크게 신뢰를 받게 되었다.한인국민회는 1914년 호놀룰루시의 중심가인 밀러 스트리트 1306번지에 회관을 마련했다.초기에는 월세집을 얻어서 사용하다가 김종학 총회장때 회원들의 성금 7,250달러를 들여 목조 2층 양옥을 건축해 1948년현재의 회관으로 이전할 때까지 전후 30여년동안 독립운동과 한인사회 발전의 모태가 되었다. 1층은 상점,2층 회의실,그리고 2층 뒷편의 일부는 국민회 노인들의편의시설로 이용된 회관은 그러나 아쉽게도 하와이 주정부의 토지수용령으로 철거되었다.하와이대학 최영호교수는 국민회관 자리는 현재밀러스트리트의 하와이 주청사와 주지사 관저 사이에 위치한 국기게양대 앞이라고 지목한다. 하와이 지역의 독립운동은 박용만 선생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되었다.박용만을 중심으로한 지도급 인사들은 1914년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를 세우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 준비에 나섰다.교포들로 부터의연금을 받아 군용지를 마련하고 대한제국 광무군인 출신의 노동이민을 중심으로 사관학교 간부와 학도 124명으로 ‘조선국민군단’을창설한 것이다. 한인사회에서 ‘산너머 병학교’로 불린 사관학교의 교장은 박용만이었다.그는 조선국민군단 단장도 겸했으며 대대장에 박종수,중대장심세권,소대장 박충식 등의 간부진으로 편성되었다.지금은 주택지로변한 이곳은 호놀룰루시에서 63번 도로를 따라 동북쪽으로 10마일쯤떨어진 해안을 낀 아후이마누언덕에 위치해있다.박용만은 이곳에 조선국민군단 본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한때는 311명의 병력을 훈련시켰다.그리고 1909년 헤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우고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國民報)’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박용만 중심의 하와이 독립운동은 국제정세(1차세계대전)의변화와 이승만과의 노선갈등(박용만은 무력독립투쟁,이승만은 외교노선)으로 사관학교도 20마일쯤 떨어진 카후구 사탕수수 농장으로 옮겨졌다가 얼마 안있어 해산되고,박용만은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암살됐다. 현재의 대한인국민회 회관은 호놀룰루시 북쪽 룩 애비뉴 2600번지푸노이계곡 언덕위 아담한 스페인풍 2층건물로 자리잡고 있다.1946년현 위치로 이전한 이 건물이 독립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하와이 한인사회를 발전시켜온 상징적 건물이다.300여평의 부지에 2층콘크리트 벽돌 건물의 전시장에는 지금도 국민회의 역사를 입증해주는 각종 문건과 자료가 많이 있다.1910년대에 제작된 태극기와 성조기,국민회 회원들이 납부한 독립운동자금 기록부,독립운동기금을 넣어두었던 두개의 대형금고,1922년 제작되어 각급 회의때 사용한 의사봉 등이 보존되어 있다.그러나 기관지 ‘국민보(國民報)’를 찍었던인쇄기는 본국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1918년 12월 이승만 박사와 30여명의 이민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호놀룰루시 리리하 스트리트 1832번지의 한인기독교회는 이박사가 하와이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다.1938년에 4만달러를 들여 신축해 지금까지 사용해온 것을 최근 교회당 재건축을 위해 주정부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교회사무실과 교회예배당,이박사 동상 등은 보존되고 이박사 기념관이 새로 건립중이다.현재 300만 달러의 예산으로1층의 교회당과 2,3층의 광화문 누각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이승만박사와 이민 초기 하와이 한인들이 주축이 되어 1903년에 세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는 그동안 이전을 거듭하여 1948년에 케아우모쿠 1639번지의 현 위치에 2년전 신축돼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와이 항일운동사적지를 살피면서 아쉬웠던 대목은 이승만 전대통령과 관련해서는 상당한 규모로 신축중인 기념관을 비롯해 많은 유적이보존되고 있는데 비해 박용만선생의 사적은 거의 찾아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하와이 독립운동의 양 날개의 한쪽인 박용만 선생이 너무잊혀지고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박용만선생의 독립운동 역할을상기한다면 지나친 불균형이 아닐 수 없다. 한인회장의 거취를 둘러싸고 교민사회가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것을 빼고는 이민 100주년기념사업을 준비중인 하와이 한인사회는 국권침탈기 하와이 이민 동포들의 고난의 이민사와 독립운동사 발굴·조사·정리에 열정을 모으고 있다.어떤 사람은 이승만-박용만의 뿌리깊은 노선갈등의 잔재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kimsu@
  • 비전향 장기수 맞는 북한 이모저모

    2일 오전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맞은 북측은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는 비교적 차분하게,그러나 평양에서는 대대적으로 환영행사를 가졌다.93년 이인모(李仁模)씨 북송 때와는 달리 남측을 자극하지않으려고 고심한 북측의 배려가 엿보였다. ■판문점 통일각 43년 10개월 수감으로 세계 최장기 복역 기록을 가진 김선명씨가 중립국감독위 북쪽 출구를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북측 관계자는 김씨를 껴안고 감격적인 인사를 나누었다.빨치산 출신 김국홍씨는 휠체어를 타고 중감위 회의실을 통과하자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통일각 건물 벽에는 ‘백절불굴 통일애국 투사들에게 영광 있으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한편 이들이 북으로 보낸 화물은 세탁기,냉장고,TV 등 가전제품과여행용 가방 등으로 한 관계자는 “한 사람이 많게는 15개 박스,적게는 가방만 2개 보낸 이도 있다”고 설명했다.장기수들은 최고 예우를상징하는 붉은 색 벤츠 승용차에 나눠타고 평양으로 이동했다. ■북측 반응 및 평양 환영행사 평양 거리에는 이들을 환영하기 위한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김일성광장에서는 4,000여명의 예술인들이 화려한 환영행사를 진행하는 가운데 조명록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홍성남 내각 총리,전병호ㆍ계응태 당중앙위원회 비서 등이 이들과 일일이 포옹하며 송환을 축하했다. 이들은 이어 김일철 인민무력상,최태복 당중앙위 비서,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의 안내로 김일성 주석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했다.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은 판문점을 출발,개성과 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도착한 비전향장기수의 동정을 상세히 실황 중계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이석우기자 swlee@
  • 카자흐스탄 봉사단 활동후 귀국 김끝숙씨

    “10만 동포들의 모국에 대한 자부심을 생각하니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 하겠습니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 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으로 활약하다 최근 귀국한 김끝숙씨(40·여·성균관대 교육대학원 영어교육과 재학)는 2년 동안의 체험에서 느낀 각오를 이같이 밝혔다. 지난 98년 7월 현지로 떠나 카자흐스탄 국립대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 등을 지도해 온 김씨는 “고려인들을 위한 일요 한글학교 강의 때마다 4세 아이부터 70세 노인까지 교실을 가득가득 메워 감동을 받았다”면서 자신도 영어표기 이름인 ‘굿 숙(Good Sook)’으로 현지 주민들과 가까이 지내 카자흐스탄 특유의 문화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그곳 동포들이 현지인들로부터 근면과 성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했다”며 “특히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전 국민이 펼친 금모으기운동은 ‘고려인은 애국자’라는 평을 듣게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어 방송국과 한국교육원에서 현지출신인 한글 교사들을 지도하기도 했던 김씨는 대학원을 마친 뒤 기회가 닿으면 러시아로 건너가 우리 글과 말을 가르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송한수기자 onekor@
  • [대한시론] 민족, 그리고 민족통일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붙은 말들이 언론계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민족이라는 용어는 ‘보수’와 ‘폐쇄’,‘배타성’이라는 이미지와연결돼 있어,특별한 경우에만 쓰이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지난 6월의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공동선언 발표,그리고 8·15남북이산가족 상봉,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서울공연 등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와 인적·문화적 교류의 전개에 힘입어,민족이라는 용어에 대한 종래의 부정적 이미지가 사라지고 있다.즉 ‘민족의 화해’,‘민족성’,‘민족의 정통성’,‘민족의 번영’,‘민족적 선율과 장단’ 등의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가 단일 민족국가로서 긴 역사적전통을 이어왔으며,민족의 통일이 당위에서 현실문제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 등과 관련이 있다.민족분열과 남북간의 불신 및 갈등으로 점철된 55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강산이 다섯번 변했고 두세대가 지나가는 긴 세월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 두달 사이에 ‘우리는 하나’,‘같은 핏줄의 형제자매’라는 동족과 애족의식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제수용품 판매에서 북한산이 중국산을 압도하고 있다는 TV뉴스를 보았다.한 주부는 기자가 “왜 북한산을 사느냐”고 묻자 “조상님이 차례상에 중국산보다 북한산이 오르는 걸 더 좋아하지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이 답변에서 우리는 소박하고 순수한 동족·애족의식을 찾아볼 수 있다.시장에 온 모든 주부들의 심정이 그러할 것이 분명하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애족과 애국이 합쳐 있는 100%의 단일 민족국가이다.지구상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하고 귀중한 특성을 갖고있는 것이다.이 귀중한 특성이 일제와,8·15 이후 찾아든 외세에 의해 무참히 훼손된 것이다.훼손된 특성을 회복하고 계속 이어나가게하는 것이 바로 통일과업이다.이처럼 사회적으로 잠재해 있던 민족감정,민족의식이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상대적으로 이념과 제도문제가뒤로 밀려나는 분위기다.즉 이념과 제도보다는 민족을 중시하고 민족문제를 우선시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이다. 민족통일이라는 것은 그 내용에 있어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민족이대단결하여 민족의 생명인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남과 북의 이념과 제도를 초월해서 온 민족이 하나의 모습으로 단합이되면 그것이 바로 민족통일인 것이다.통일된 단일 민족국가의 틀 속에서 남과 북의 상이한 제도는 얼마든지 공존공영할 수 있다.이러한측면에서 볼 때 우리사회의 애족과 민족 중시사상은 매우 바람직한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지난 역사적 경험에서 민족문제에 대한 두 가지 편향에 대해주목하고 경계해야 할 것같다.본래 민족운동은 봉건전제를 반대하는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전개됐는데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자 정권을 장악한 부르조아지는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와 계급의이익을 위해서 민족문제를 그릇되게 활용했던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는 인류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면서 민족문제를 계급투쟁의 종속물로 전락시켰다.다시 말해 계급이라는 집단보다도 포괄성을 갖는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에 관해 그가 차지하는 특출한 지위와 역사창조의 역할을 무시한 것이다.이 두가지 편향으로 인해 그동안 민족과 민족주의 문제가 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설명되어 왔다. 우리의 통일문제는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는 것으로서 계급문제가 아니라 민족문제이다.따라서 통일의 주체는 남과 북의 민족성이며 계급주의가 아닌 민족주의로 풀어나가야 한다.6·15남북공동선언은 민족논리에 입각한 통일강령이다.그러므로정권차원이 아니라 민족차원에서 이를 바라보며 지지해야 한다.정파를 초월해서 당국으로 하여금 공동선언을 차질없이 이행토록 뒷받침해줘야 한다. 우리사회에서는 여러 이익집단들이 모순극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 역시 민족문제 해결에 초연할 수는 없으며 공동선언 실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 우선 자기집단의 성원들에게반세기 만에 활력을 되찾은 민족과 애족,그리고 통일의식을 심어주는사업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김남식 경실련 통일협회 고문
  • 국회 본회의 표정

    1일 열린 국회 본회의는 여야 의원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식만 마치고 15분여만에 산회했다. 미국 유엔본부에서 열린 국제의원연맹(IPU)에 참석한 뒤 이날 새벽귀국한 이만섭(李萬燮) 국회의장은 개회사를 통해 국회정상화와 민생현안 처리를 위해 뜻있는 의원들의 ‘궐기’를 촉구해 눈길을 끌었다. 이 의장은 국회파행에 따른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 뒤 “언제까지 국회가 사생결단식 당론정치와 정당이기주의의 볼모가 되어 민생을 외면하고 역사와 국민 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야 하느냐”고 읍소와질타를 쏟아내자 여야 의원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의장은 특히 “16대 국회에는 어느 때보다 정의감과 애국심에 불타는 의원들이 많다”고 전제한뒤 “정의롭고 양심적인 의원들이 용기를 가져야 할때”라며 소신 의원들의 ‘궐기’를 호소했다.그러면서 “국회가 더이상 편협하고 무책임한 소수강경파에 끌려 다닐 것이아니라 국민의 뜻을 받드는 합리적 목소리가 의사당 안에서 살아 숨쉴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개회사 도중 이 의장은 한나라당 의석을 향해 “양심과 명예를 걸고 국회를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겠다”고 다짐하는 등 국회 참여를 통한 민생문제 처리를 간곡하게 호소했다. 박찬구기자 ckpark@
  • 새출발 민주 ‘黨 중심정치’ 시동

    민주당이 새 지도부 구성을 계기로 활기를 띠고 있다.청와대의 눈치를 살피는 집권당이 아닌,스스로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는 ‘당 중심’,‘국회 중심의 정치’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복안이다.먼저 대야(對野)관계 개선에 힘을 쏟겠다는 구상을 밝히고 있다. ■청와대의 힘 실어주기 청와대도 새 면모를 갖춘 당에 상당한 재량권을 줄 분위기다.당 총재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1일 청와대에서최고위원회의를 주재,‘당 중심의 정치’를 강조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최고위원들에게 당 운영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정국운영의 주도권 회복 및 당정협의 활성화 등을 통한 강력한여당을 주문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당이 활력을 갖고 적극적으로국정 2기를 뒷받침하는 진용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어 “당의 전열을 재정비한다는 차원에서 시스템과 의식을 새롭게정비해 나가야 할 것”이라며 김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식사 자리에서 ‘제2의 창당’선언이 나올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최고위원회의 강화 31일 첫 소집된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이같은 기류를 엿볼 수 있다.서영훈(徐英勳)대표 주재로 열린 이날 회의의 주제는 국회 정상화 및 정국 정상화였다. 박병석(朴炳錫)대변인은 “최고위원들은 당이 정부와 협력하고 정부를 리드하는 강력한 여당이 되기 위해 모두 힘을 합치기로 했다”고전했다.이어 정국 정상화와 관련,“모든 것을 국회에서 토론하고 타협한 뒤,표결로 결정해야 한다”면서 “최고위원들은 국민의 신뢰를받는 ‘상생의 정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당 중심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최고위원 회의는 월요일과목요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필요할 경우 수시로 소집할 방침이다. 당이 활성화되면서 막혀있던 야당과의 대화 채널도 다양해질 전망이다.당직자간 공식 채널뿐만 아니라 비공식 채널이 가동될 것이라는설명이다.민주당의 새 지도부가 정기국회 개회를 못할 정도로 꼬여있는 정국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주목된다. 강동형기자 yunbin@. *韓和甲 최고위원 제목소리 분명히. 경선에서 1위를 한 민주당 한화갑(韓和甲)최고위원이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다.공식 회의석상,강연,인터뷰 등 방법은 다양하다. 한 최고위원은 31일 C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임기가 2년반이나 남았는데 차기를 논의하는 것은 국정운영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도 “차기 후보는 당원들의 결정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덧붙여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당내 계보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지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행보를 같이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해 이 또한 여러 해석을 낳게 했다. 여야 관계와 관련해서는 “비공식 채널을 활용하고 다각적인 대화와접촉을 통해 야당을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할 것”이라고 자신감을나타냈다. 이어 연세대 국제학연구소에서 개최한 ‘21세기 분쟁환경과 한국군의 역할’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 참석,안보론을 역설했다. 군 관계자와 국내외 교수들을 상대로 “튼튼한 방어적 군사력을 구축해야 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도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편으론 몸을 낮추면서 “경선 결과는 당권·대권과 무관하다”고 말한다.그러나 경선 후 힘이 붙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주현진기자. *최고위원회의 안팎. 31일 민주당 신임 최고위원 12명의 첫 상견례는 해프닝성 ‘자리다툼’으로 시작됐다.치열한 경쟁을 한 직후여서인지 어색한 분위기가연출되기도 했다. ■좌석 배치 신경전 최고위원들은 좌석배치 문제를 놓고 보이지 않는신경전을 펼쳤다. 원탁에는 최고위원 12명과 당 3역을 고려,15개의자리가 마련돼 있었다.서영훈(徐英勳)대표가 먼저 자리를 잡자 맨 먼저 들어온 한화갑(韓和甲)최고위원이 대표 바로 왼쪽 좌석으로 안내됐다.이어 김중권(金重權)최고위원이 서대표 오른쪽에 앉았고,늦게들어온 이인제(李仁濟)최고위원은 다른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신실세’들의 포진으로 비춰졌다. 권노갑(權魯甲)최고위원이 한 최고위원보다 조금 늦게 한최고위원뒤쪽으로 회의장에 들어오자 미리 앉아 있던 박상천(朴相千)최고위원이 반쯤 일어나며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다.이 순간 정대철(鄭大哲)최고위원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비켜줬다.그러나 김중권(金重權)최고위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한 최고위원은 권 최고위원이 회의장에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약간의 신경전 분위기가 느껴졌다. 서 대표는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오늘부터는 경선해서 된 분이나 지명된 분이나 모두 똑같다.좌석에는 순위가 없다”면서 “여성이 1명뿐인데 되도록 여성이 내옆에 앉아달라”고 농담을던졌고,한 최고위원은 “당직자가 앉으라고 해서 앉았다”며 분위기전환을 시도했다.한의원을 안내했던 당직자는 회의장이 혼란스러워먼저 들어오는대로 앉게했다고 말했다. 한편 앞으로 당의 좌석배치는 31일 청와대 최고위원회의에서의 좌석배치가 준용될 것으로 보인다. ■뼈있는 농담 이런 과정에서 박 최고위원이 맞은 편에 앉은 신낙균(申樂均) 최고위원을 가리키며 “죽어라고 뛰어다닌 추미애(秋美愛)·김희선(金希宣)의원은 어디 가고 없고,조용히 들어오셨다”며 뼈있는말을 던지기도 했다. 이어 애연가인 박최고위원이 사무처 직원에게 큰 목소리로 재떨이를요청하면서 회의장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러나 담배연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권 최고위원은 박최고위원에게 “회의장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고 부드러운 톤으로 제지했다.그러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이인제 최고위원은 “담배는 지방재정에 크게 도움이된다.‘흡연은 애국’”이라며 박최고위원을 엄호했다.그러자 박 최고위원은 “총재님도 안 계시고 무서운 사람도 없는데…”라며 담배를 꺼내들자,권 최고위원이 “피우려면 나가서 피우라”고 재차 ‘군기’를 잡아 박 최고위원의 ‘회의장 흡연’은 무산됐다. 강동형기자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7)丹東 臨政 교통국과 쇼우의‘이륭양행’

    일제하 항일투쟁 대열에 섰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국내외에 거주하던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구한말 항일 필봉을 드날린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베델(한국명 裵說·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이었고,영국인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3·1의거와 일제의 ‘제암리만행’을 전세계에 폭로했다. 또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한국명 訖法·5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지원한 주인공이다.베델과 헐버트 박사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스코필드 박사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헐버트 박사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박사의 유언이 적혀 있다. 한편 한국독립을 도운 외국인 가운데 G.L 쇼우(1880∼1943·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라는 인물이 있다.그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이유는 해방 전에 사망한데다 그의 후손도 한국과 왕래가별로 없었으며,또 그동안 그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부족했던 탓으로생각된다.그가 활동했던 1920년대초 당시 국내 일간신문을 펼치면 그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그러나 국내에선 그의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그를 만나려면 지금은 중국땅이 된 남만주로 찾아가야 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해 중국과 국경을 이루며 황해로 흐르는 압록강 하류의 신의주땅 건너편에는 단동(丹東,옛 지명은 安東)이라는 도시가있다.심양(沈陽)에서 아침 7시45분발 기차를 타면 점심때인 낮 12시10분에 도착하는 거리다.취재팀은 일행의 안내차 역으로 마중을 나오신 박문호(朴文鎬·65)선생과 먼저 점심식사를 한 뒤 답사에 나서기로 했다.취재팀이 첫 답사대상으로 삼은 곳은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었다.이 건물은 쇼우가 경영하던 무역회사 겸 중국의 태고선복공사(太古船輻公司) 대리점이었다.70년 세월이 지났건만 놀랍게도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채 취재팀을 반겼다. 단동시내 육도구(六道口) 흥륭가(興隆街)25번지에 위치한 이 건물은 현재 단동시 건강교육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세월의 풍상을 겪은낡은 모습이었다.겉에서 보면 2층 건물처럼 보이나 실지로는 3층 건물로,현재 이 건물은 1층만 건축 당시 그대로이며 나머지는 신축됐다고 한다.주민들에 따르면,인근에 헌 건물들이 많아서 이 건물도 곧헐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건물의 주인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이방인 쇼우는 어떤 인물인가? 영국인들의 생몰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영국의 ‘제너럴 레지스터 오피스’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쇼우는 1880년 1월 25일 파고다 아일랜드에서 해양조사원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908년 부친사망 당시 그는 중국 남동부의 항구도시 복주(福州)에 살고 있었다. 1912년 당시 상업에 종사하고 있던 그는 단동에서 일본여인 후미 사이토(당시 28세)와 결혼하였는데 이듬해 장남이 태어날 당시 그는 일본 고베에 머물고 있었다.그가 한국의 독립을 돕기로 결심한 것은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쇼우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기로 한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첫째는 그의 출신과 가족구성.그는 영국 식민지인 아일랜드태생으로 자신의 고국이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처지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을 잘이해하고 있었다.특히 모친과 부인이 모두 일본인이라 일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더욱이 그의 사무실(이륭양행)은 안동(현 단동)구시가지에 위치해 있어서 일본영사관의 영향이 미치지 않아 한국인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바로 이곳 2층에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안동(安東)교통국사무국’이 들어있었다.교통국은 임정초기 정보수집과 재정모금,인물소개 등을 담당하였는데 국경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교통부 산하 7개 교통국 가운데서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그는 단순히 장소만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기도 하고,상해를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배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1920년 그가 소위 ‘이륭양행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었을 때 일본 외무성에서 작성한 그의 행적자료에 의하면,그는 봉천(奉天) 주재영국 총영사가 일본당국의 요청으로 수차례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대동단사건 지원 ▲독립군 무기수송 ▲독립운동 근거지 제공 ▲임정 비밀문서 전달 등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20년 7월 오학수(吳學洙) 등이 국내로 무기를 들여오기 위해 그가 소유한 계림환(桂林丸)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자 그도 이들과 함께일경에 구속되었다.1924년 단동을 떠나는 조건으로 영국 측의 도움을 받아 석방된 그는 복주(福州)로 거주를 옮겼는데,그해 11월30일 63세로 타계하였다.그의 사후 57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그에게 건국훈장 추서한 것이 전부일 뿐 그의 묘소에 꽃 한송이 바치지 못했다. 항일투쟁 끝에 단동에서 최후를 마쳤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쇼우처럼거의 무명(無名)에 가까운 독립투사 한 분이 있다.바로 편강렬(片康烈·1892∼1929) 의사다.17세때인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이듬해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한 편 의사는 이후 1911년 ‘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여,1919년‘구월산주비단사건’으로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출옥후만주로 건너가 양기탁(梁起鐸)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결성,단장에취임한 편 의사는 이듬해 3월 장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으며,다시1개월 뒤에는 봉천(현 심양)에서 일경과 백주에 시가전을 벌여 적 다수를 사살하였다. 1924년 길림과 하얼빈에서 각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편 의사는 국내로 압송돼 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척추염이 발병,안동 적십자병원에서 순국하였다.불과 37세였다.구한말 의병전쟁에서 부터 독립군 투쟁에 이르기까지 청춘을 항일투쟁에 몸바쳤으나 이름을 아는 이가 적음은 물론 그의 묘소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생전에 편 의사는 ‘나라가 광복되기 전에는 내 유체를 고국에 이장하지 말라’고 유언했다.지금도 단동 진강산(鎭江山) 기슭 공동묘지 어디엔가 누워있을 편 의사를 생각하면 후손된 자로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단동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압록강이 마지막 모습을 감추는 곳이자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과 마주하고 있어 우리 민족에겐 ‘비원의 땅’이라고 할수 있다.또애국선열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의탁하던 곳이자,살 길을 찾아 만주땅으로 향하던 유민들의 한숨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錦江山)공원(구 진강산공원) 옆에 있는 안동주재 일본영사관 건물은 아직도 그 화려한 건축미를 간직한 채 지금은 단동 경비사령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두 철교 가운데 6·25때 끊어진 철교를 중국의 모 회사가 매입,관광용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단동은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중국의 경제개방 열풍속에서 나날이 변모하고 있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김삼웅 칼럼] 분단사의 한 매듭 비전향장기수

    고난의 한국현대사는 남의 나라에서는 쓰이지 않는(생기지 않는) 용어가 다수 사용된다.‘비전향장기수’도 그중의 하나이다.이 용어의‘비전향’에는 강고한 이데올로기의 갑골(甲骨)이,‘장기수’에는반인권·비인도주의의 야만성이 배인다. “지면에 옥(獄)을 그려놓아도 사람은 그것을 피하고 나무를 깎아형리(刑吏)를 만들어도 사람은 그것과 면대하기를 싫어한다”고 사마천은 ‘임안(任安)에게 드리는 글’에서 말했다.감옥을 말하는 ‘옥(獄)’자는, 사나운 개 두마리가 사람의 입(言)을 지키는 모양을 하고있다. 자유를 구속하는 형상인 것이다.감옥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속박하고 자유를 박탈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기피한다. 며칠후(9월2일)면 ‘비전향장기수’63명이 북한으로 간다.70세 이상이 대부분으로 평균 32년6개월씩을 0.75평의 감방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사람들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이들은 남한체제를 부정하고 전복하려던 간첩과 빨치산출신이고,에돌아 보면 분단시대의 희생양이다.어찌됐건 그들의 개인이나 가족사는 통한의아픔이고 민족사적으로는 ‘콩깍지로콩 삶는’ 비극이다.무엇보다 짧게는 15년,길게는 45년을 복역한 이들의 짓밟힌 삶은 누가,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이데올로기? 신념?분단시대? 이들을 보내면서 지금이 과연 2000년대의 문명사회인가,문명은 이데올로기의 상위개념인가,하위체계인가를 묻게 한다.그리고 여전히 병들고 늙어서 폐인이 되다시피한 노인들을 이념과 거래의 장삿속으로만 인식하려는 색맹(色盲)의 군상을 지켜본다. 중세의 혼돈을 즐기는 군상은 근세의 여명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오랜 독점지배로 굳혀진 기득권의 철옹성에서 밝아오는 여명도 마녀의 눈빛으로 보이고,지구는 여전히 평면일 뿐이었다.“지구가 돌다니,마녀다! 화형에 처해라”던 중세의 도그마가 이 땅의 논리로 대변된다. “을지훈련을 축소한 것은 북쪽 주장을 추종한 것이다” “경의선이 복원되면 주한미군의 철수론에 악용될 수 있다” “정상회담 합의(제2항)는 헌법위반이다” 따위의 시대착오적,뒤틀린 도그마는 오늘을 중세와 21세기의 시공(時空)을 착각하게 만든다.언제까지 분단의 철옹성에서 이념의 색안경을 쓰고 동족끼리 광란의 칼춤을 추자는 것인가.탈냉전시대에도 ‘민족’이라는 노적가리에 불지르고 싸라기 주워먹자는 것인가. 비전향장기수들의 북송을 지켜보면서 진심으로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납북자’와 ‘국군포로’를 둔 가족이다.이들의 서운함(정부에)과 원망(북쪽에)은 당연하다.남북 당국은 대화를 통해 시급히풀어야 한다.이 문제가 비전향장기수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분단의아픔이고 반인도주의적이기는 마찬가지다.또한 틈새만 보이면 화해협력을 적대관계로 되돌리려는 냉전세력에게 빌미를 주게 된다. 사실 ‘납북자’와는 별개로 ‘국군포로’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문제다.말하기 쉽게 ‘비전향장기수와 맞교환’ ‘상호주의 원칙’이제기되지만 정서적인 호소력은 지닐지 몰라도 문제의 해법은 아니다. 휴전협정에 따른 남북한 포로교환으로 국제법상 종결된 사안인데다가남쪽에서 파견한 북파요원문제, 휴전협정 직전 이승만 정부가 석방한2만5,000명의 반공포로문제 등과 연계시키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꼬이면 지금의 작은 가능성마저 물거품이 되고 남북은다시 양쪽의 극우·극좌세력의 뜻대로 대결과 적대관계로 되돌아간다.그러한 ‘닫힘’보다 작은 ‘열림’을 확대하면서 순차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보다 빠르고 쉬운 길이다. 이쯤에서 함께 주의해야 할 것은 돌출행동을 자제하는 일이다.50년이상 순치된 국민의 냉전의식이 하루아침에 씻기기는 쉽지 않다.북송비전향장기수들을 ‘애국투사’로 치켜세우거나 지나친 환송식 등은국민의 정서와는 걸맞지 않는다. 당사자들도 조신해야 한다.“조국이 나를 42년 동안 옥살이를 시켰지만 원망하지 않습니다.분단된 조국의 비극일 뿐이지요”(이종환)란자세를 북한에 가서도 지켜주길 바란다.그래야 화해협력이 지속되고통일의 길이 열린다. 김삼웅 주필 kimsu@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6) 孫貞道목사 활동지 吉林

    중국 길림성의 성도(省都) 장춘(長春)에서 ‘장길(長吉)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45분쯤 달리면 길림(吉林)에 도착한다.길림은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도시 가운데 하나로 만주국 시절일본인들은 길림을 일본의 고도 경도(京都)에 빗대 ‘소경도(小京都)’라고 불렀다.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길림 도심을 ‘S자’로 휘감아 도는 송화강(松花江)은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는다.이는 근처에풍만(豊滿)발전소가 있기 때문이다.겨울철 송화강에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찬공기와 어우러져 강 주변의 나무에 은백색의 얼음꽃을 피우는데 이는 길림의 대표적인 겨울 풍물로 꼽힌다. 길림은 일제강점기 우리 항일투사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곳이기도 하다.특히 정의부 계통의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고참의부나 신민부의 거두들도 이곳에서 활약했다.독립운동가들이 길림에 운집하게 된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당시 길림은 북만주 일대에서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이었다.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국땅을 떠나 만주행에 오른 동포들은 대개 길림선을 통해 만주오지로 들어갔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길림에 주저앉았다. 또 하나는 길림이 심양,장춘,연길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면서도 남만주철도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외부의 영향이 덜미치는,소위 ‘소왕국’과 같은 곳이었다.길림이 한 때‘비적(匪賊)의 소굴’로 불린 것은 이 때문이다.게다가 이 지역의 중국 군벌들은일제에 항거하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어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천혜의 요지’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1924년 11월 만주 길림성 유하현(柳河縣)에서 조직된 정의부의 간부 가운데 상당수는 이곳 길림에서 활동하였다.집행위원회 위원장 현익철(일명 현묵관)을 비롯해 지방부 위원장 김리대,군사부 위원장 이웅,그리고 별동대 대장 이동훈,경무과장 김구(金球)등이 모두 길림에서활동하였다. 길림은 또 1919년 11월 창립된 의열단(단장 金元鳳)의 창립지이자고려혁명당 역시 1926년 4월 이곳 길림에서 창립됐다.의열단의 창립지인 길림성 파호문(把虎門)밖 중국인 농부 반(潘)씨집은 이미 헐린상태며,고려혁명당 창립지인 길림성성(城) 영남반점은 현재 길림시북경로 179번지 길림시건축설계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김이삼(金利三) 기자가 피살된 동아여관은 현재 정춘집단공사 길림시 분공사(分公司,길림시 회덕가 90호 소재)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길림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해석 손정도(孫貞道·1872∼1931) 목사를 들 수 있다.평남 강서출신인손 목사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0년 선교사로 만주에파견된 이후 1931년 길림에서 병사할 때까지 일생을 오점없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자다.1912년 선교활동을 벌이던 하얼빈에서 일제가조작한 ‘가쓰라(桂太郞)공작 암살모의사건’에 연루돼 전남 강진에서 ‘거주제한 1년’의 유배형을 산 손 목사는 1919년 3·1의거에 참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그 해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자 이동녕 초대 의장에 이어 의장에 선출되었으며,21년에는 임시정부 임시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임시정부가 여러 파벌로 나뉘어 세력다툼이 치열해지자 이듬해 임정을 박차고 나와 북만주 길림으로 향하였다. 길림시내 우마항(牛馬巷) 서광(曙光)골목에 예배당을 건립한 손 목사는교회를 거점으로 선교사업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당시 손목사는 길림지역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그의 예배당·자택은독립운동가들의 비밀 아지트나 마찬가지였다.취재팀이 손 목사의 집터와 예배당을 찾았을 때 이들은 모두 헐린 뒤였으며, 일대는 아파트단지 공사가 한창이었다.(예배당은 인근에 새로 건립돼 있음)현재의주소로는 길림시 선영구(船營區) 청도가(靑島街) 춘광호동(春光胡洞)일대로 동네이름마저 서광호동에서 춘광호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 주민에 따르면,“2년전 서광호동 골목이 헐리면서 동네이름도바뀌었다”고 했다. 손 목사의 길림 시절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북한의 김일성(본명 김성주) 주석이다.당시 손 목사는 ‘소년김성주’의 후견인이자 그를 항일운동의 길로 안내한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1926년평양의 창덕학교(소학교)를 졸업한 김성주 소년은 민족주의 단체인 정의부가 화전(樺甸)에서 설립한 화성의숙(華成義塾)에 입학했다.당시 숙장(塾長)은 천도교도이자 항일운동가인 최동오(崔東旿)선생이었는데 최 선생은 86년 월북한 최덕신(崔德新) 전외무장관의 부친이다.(금년 8·15 이산가족 상봉때 북측 단장을맡은 류미영씨는 최 전장관의 부인이다.)그러나 그해 6월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의 충격으로 학업을 중단한 그는 이듬해 길림으로 건너와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했는데 그는 당시 부친의 친구인 손 목사의지도와 후원을 받으며 생활하였다. 특히 공산주의 성향의 독서회를 이끌던 그가 중국 군벌에 체포되자손 목사는 감옥으로 사식과 침구를 제공하는 한편 군벌에게 뇌물을주면서까지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그 덕에 그는 감옥에 들어간지 7개월만인 30년 5월초에 출감했다.김 주석은 생전에 남긴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첫머리의 ‘손정도 목사’편에서 “손 목사의 도움으로 제 때에 감옥에서 석방되지 않았더라면 10년쯤 감옥생활을 더 했을 것”이라며 “손 목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회고했다. 길림시내 송화강변에 위치한 육문중학에는 그가 다닌 옛 육문중학의 구지(舊址)가 신관 뒷편에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길림시는 92년 이곳을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관리하고 있다.350평 규모의 ‘구지’에는 당시의 교사(校舍)·온실 등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마당 한가운데는 92년에 건립한 김 주석의 동상이 서 있다.동상 뒷편에 위치한 교사에는 당시 김 주석이 공부하던 교실이 ‘김일성동지독서기념실’로 꾸며져 있다.‘구지’ 관리자인 왕쑹린(王松林·52)주임은 “김일성 동지는 1927∼30년 이곳에서 공부를 했으며 당시 키가 작았던 탓인지 자리가 제일 앞줄이었다”고 말했다.왕 주임은 취재팀에게 “중국에 파견나온 북한 공직자들이 더러 방문하는 예는 있지만 남한 국적자가 방문하기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한편 손 목사의 후손들은 해방후 김 주석과는 ‘서로 다른 길’을걸었다.장남 원일씨(元一·작고)는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3녀인실씨(仁實·작고)는 YWCA 회장,통일원 고문,한국적십자사 부총재 등을 지냈다.길림시절 김 주석과 형제처럼 지낸 차남 원태씨(元泰·86)는 의대 교수출신으로 현재 미국 네브래스카주오마하에 거주하고 있는데,그는 지난 91년 방북해 김 주석과 60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바 있다. 길림(중국) 정운현기자 jwh59@
  • 새달 北送 비전향 장기수들이 남긴 바람들

    “이념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도와준 여러분들의 깊은 동포애를품고 갑니다” “남쪽 사람들의 통일 염원을 북녘에 알리는 디딤돌이돼 다시 이 땅을 밟아야지요” 다음달 2일 북송될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20명이 송환을 앞두고 이달 초 장기수 홈페이지(nadrk.org/long/)를 통해 남쪽에 남을 동포들에게 ‘통일 염원’을 담은 글을 올렸다.이 가운데 7명의 글을 요약한다(괄호 안은 나이·체포 당시의 본적 또는 주소). ●김석형씨(86·평양시 보통강구역)통일 염원으로 분투하고 있는 사회·종교단체를 비롯한 여러분에게 사랑을 보냅니다.모두 건강하고애국애족의 기치를 높이 들 것을 확신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갑니다. ●김종호씨(87·평양시 모란봉구역)비록 여러분 곁을 떠나지만 대구도 조국 땅이요,평양도 조국 땅인데 돌아간다고 변할 것이 있겠습니까?화해와 같은 은혜를 잊을 수가 없지요.곧 통일의 그날이 오리라믿으며,다시 돌아와 못다한 인사를 하겠습니다. ●손성모씨(70·전북 부안군)통일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습니다.오늘은 비록 떠나는심장과 보내는 심장이 이별 앞에서 통곡하지만 이것은 내일 영광의 통일광장에서 얼싸안고 만나기 위한 시작이며 첫 걸음입니다. ●안영기씨(71·평양시 동대원구역)가까운 날에 얼싸안고 춤추며 노래 부르는 상봉의 날이 오기를 빕니다.통일을 위해 마지막 정열을 바쳐 나갑시다.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커지는 것을 뜻합니다. ●오형식씨(68·강원도 원산시)남쪽은 ‘친북’으로,북쪽 사람들은‘친남’으로 통일을 향해 매진합시다.북남 서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꿔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실정을 정확히 알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리경구씨(70·충남 공주군)우리 서로 지난날의 잘못을 탓하지 맙시다.6·15 남북 공동선언의 옥동자를 정성껏 키워 나갑시다.65세 때첫 배우자로 맞이한 아내와 동행하지 못하게 돼 마음은 무겁지만 뜻있는 분들의 성원으로 조속한 재결합이 있기를 바라면서…. ●홍경선씨(75·충남 천안시)최근 인터넷을 시작했는데 ‘진작부터이런 게 있는 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습니다.북쪽으로 돌아가 계속 컴퓨터를 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갑니다. 송한수기자 one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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