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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천, 보훈회관 개관… 7개 유관 단체 입주 ‘신바람’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서울 금천구가 ‘금천구 보훈회관’을 개관했다고 30일 밝혔다. 국가 유공자와 보훈가족의 오랜 염원이 담긴 금천구 보훈회관은 전날인 29일 개관식을 개최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려해 최소인원이 참여하는 소규모 행사로 진행됐다. 금천구 보훈회관은 민선 7기 유성훈 구청장의 주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생활 사회간접자본(SOC) 확보 사업의 하나로 시흥4동에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로 조성됐다. 사무실과 회의실을 비롯해 체력단련실, 다목적쉼터, 온돌사랑방 등 편의시설을 갖췄다. 상이군경회, 전몰군경유족회, 전몰군경미망인회, 무공수훈자회, 6·25참전유공자회, 월남참전유공자회, 특수임무유공자회 등 7개 보훈단체가 입주했다. 유 구청장은 “조국을 위해 순국한 애국지사들과 보훈가족들의 오랜 염원이 깃든 보훈회관을 중심으로 효율적인 보훈행정 지원과 보훈 가족들의 복지향상에 힘써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6·25 때 첫 여군 생겨… 당시엔 오히려 차별 없었다”

    “6·25 때 첫 여군 생겨… 당시엔 오히려 차별 없었다”

    “지금 세대는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해 그 참담함을 알지 못하지요. 당시 여군이 처음 생겨서 차별이 오히려 없었어요. 여성용 군복이 없어 남성용 군복과 군화 중 가장 작은 사이즈를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6·25전쟁 당시 대구에서 여자의용군 1기생으로 입대했던 김명자(89)씨는 동기 200명과 함께 부산에서 한 달간 훈련을 받고 정훈장교로 편성돼 최전방 심리전에 투입됐다.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은 2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6·25전쟁 및 여군 창설 70주년을 맞아 여성 참전용사 및 육·해·공군 사관학교 1, 2기 여군 장교와 함께 자리를 가졌다. 참전용사는 보병장교로 전방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임동순(90) 대령,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조종사인 김경오(91) 대위, 최근 코로나19 극복 공익 캠페인에 출연해 화제가 된 김명자 대위, 간호장교이자 애국지사 이상설·이충구 선생의 손녀이기도 한 이현원(89) 중위, 여자의용군으로 참전해 활약한 최선분(85) 중령, 손태순(89) 대위 등이 참석했다. 이 장관이 “어린 나이에 전쟁에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느냐”고 말문을 열자 임 대령은 당시의 참혹함을 떠올리며 “여기저기 죽은 사람들로 너무 처참해 볼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최 중령도 “6·25전쟁이 터졌을 때 여학교 3학년이었는데 학교에서 여성 장교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았다. 인민군이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발포하는 장면을 보며 치를 떨었다”고 말했다. 첫 여성비행사인 김 대위는 “당시 전국의 각 도를 대표해 여고생 한 명씩 추천받아 15명이 공사 1기생들과 함께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기억했다. 이 장관은 간담회를 마치면서 “6·25전쟁 당시 구국의 일념으로 젊음을 바친 여성 참전용사의 용기와 헌신에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투철한 사명감으로 국가 안보와 평화 유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여군 장교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현역 장교로는 공군 최초 여성 전투대대 비행대장이 된 박지원(43) 중령, 첫 여군 중령으로 성폭력·인권침해범죄수사대장을 맡고 있는 노현주(40) 중령, 해군 최초 여군 함장이 된 안희현(41) 소령이 참석했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신흥무관학교 재원 조달, 독립군 양성… 만주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

    신흥무관학교 재원 조달, 독립군 양성… 만주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며 근대교육자인 임면수는 이회영이나 이상룡과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전 재산을 털어 수원 삼일학교를 설립했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재원 조달에 몸바치는 등 만주독립운동을 뒤에서 도운 숨은 조력자이기도 하다. 신흥무관학교 분교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결사대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가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돼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기거할 방 한 칸도 없었다. 임면수 선생은 1874년 6월 13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매향리(현 화성시)에서 아버지 임진엽과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2남으로 출생했다. 삼일학교 설립에 기부한 재산을 보면 그의 가계는 중농 이상의 부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는 필동(必東) 또는 필동(弼東)을 사용했다. 임면수는 19세 때 나중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돌본 전현석과 결혼했다.선생은 어려서는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했지만 늦은 나이에 근대 교육을 받았다. 수원양잠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화성학교에 진학, 2년 동안 공부했다. 당시 화성학교 학생들은 일본군 군자금을 기부하는 등 일본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러일전쟁에 통역으로 참가하는가 하면 각종 기관의 일어 통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은 항일투쟁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주시경·이동휘 등 애국지사들과 교류 선생은 1905년 서울로 와서 한국사와 한국지리 등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던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선생은 국어강습회를 열었던 주시경과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을 그곳에서 만나 교류했다. 경기 강화에서 사학을 30여곳 설립해 교육 사업을 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는 선생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생은 수원에서 이하영, 김태제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뛰어들었다. 국한문 취지서를 자비로 발간해 동참을 호소하고 경기도 각 지역에 배포했다. 반향은 컸다. 수원에서는 취지서 발표 2~3일 만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여원이 모금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1903년 29세의 선생은 젊은 동지들과 함께 유명한 신여성 화가 나혜석이 졸업한 수원 삼일여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는 북감리교회로 운영권이 넘어가면서 설립 후 3년이 지나자 재정난을 겪게 됐다. 부호 강석호는 1906년 5월 거금을 기부했고 나중석도 부지 900여평을 기증했다. 선생도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내놓았다. 현 매향정보중고등학교가 자리잡은 곳이 그가 희사한 땅이다. 1909년 선생은 삼일학교 교장이 됐고 다른 사립학교 설립도 도왔다. 선생은 1907년 기호지방 출신 인사들이 조직한 기호흥학회에서도 활동했다. 서우학회, 교남교육회, 호남학회와 같은 교육진흥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지역마다 학회가 조직됐는데 기호흥학회도 그중 하나였다. 광주와 수원 등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19개 지부가 있었고 수원 지역 교육자로서 선생은 교육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신민회에 가입하고 양기탁의 집에서 열렸던 구국운동회의에 참여했다.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모국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심했다. 삼일학교 운영은 나홍석에게 위탁했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초 선생은 극비리에 가족을 이끌고 만주 봉천성 환인현 횡도촌으로 망명했다. 그곳에 먼저 정착한 이회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1911년 6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농가 2칸을 빌려서 신흥강습소를 개설했고 1912년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 신흥중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신흥중학은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데 수만 평의 연병장과 수십 칸의 내무실은 생도들이 합심해 만들었다. 통화현 합니하는 독립군 무관 양성의 본영이 됐다. 선생의 역할은 재원 조달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유지비와 군사훈련비를 조달하고자 영하 40도의 한파와 폭설을 무릅쓰고 썩은 좁쌀, 강냉이, 풀나무 죽으로 연명하면서 동포들의 도움을 구하러 다녔다. 선생 부부는 객주업에 종사했는데 독립군의 연락소, 휴식소, 무기보관소, 회의실 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독립운동의 아지트였던 셈이다. 부인 전 여사는 수시로 방문하는 별동대, 특파대 등의 식사를 하루에 대여섯 번이나 내놓았고, 그들의 보따리와 총기를 맡아 챙겨 주는 등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독립군으로서 전 여사의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전 여사의 인내심과 온순함, 예의 바른 행동에 누구나 머리를 숙였고 ‘독립의 어머니’로 칭송을 받았다. 선생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 당시 독립운동가로 선생댁에서 잠을 안 잔 이가 별로 없고, 그 부인 전현석 여사의 손수 지은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으니 실로 선생댁은 독립군 본영의 중계 연락소이며 독립운동객의 휴식처요, 무기보관소요, 회의실이며 참모실이며 기밀 산실이었으니….” 만주의 한인자치기관 부민단에서는 1916년 3월 16일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를 위협할 일본영사관 분관 설치를 제지할 방안을 논의했다. 그 방책으로 결사대 200명을 편성했고 7~8명은 통화현 시가에 잠입했는데 선생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1916년 9월 9일 안동 주재 일본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재만 조선인 비밀결사 취조의 건에 대한 회답’ 등에 선생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지(통화현)의 배일자 중 유력자인 결사대원 임필동”이란 표현에서 당시 만주 독립운동계에서의 선생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양성중학교 교장 일하며 제2 신흥무관학교로 선생은 1910년대 중반 통화현 합니하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는데 이 학교는 제2 신흥무관학교 격이었다. 교수로 재직한 이세영과 재무감독 이동녕 등은 신흥무관학교의 실질적인 중심인물이었다. 3·1운동 이후 일본군들은 1920년 간도로 출병해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체포·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선생은 1920년 6월 12일 밤 해룡현 북산성자 삼도가 김강의 집에서 체포됐다. 일본 경찰관과 친일 조선인을 암살하고 동지들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려 한 혐의였다. 선생은 압송돼 가던 중 한국인 경찰 유태철의 도움으로 여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선생은 낮에는 숨고 밤이 되면 걸어서 14일 만에 길림성 이통현 고유수 한인 농촌마을에 도착해 동포 박씨 집에 은둔했다. 그곳에 머물다 장춘을 거쳐 부여현에 도착해 안승식의 도움을 받았고 그의 집에서 겨울을 보냈다.●아담스기념관 건축 감독… 고문 후유증에 타계 그러나 1921년 2월쯤 길림시내에 잠입해 활동하다 밀정의 고발로 길림영사관에 체포된 뒤 평양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전신이 마비될 정도의 위중한 상태가 되자 일제는 선생을 석방했고 수원으로 귀향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의 가족사도 불운했다. 만주에서 20세가 돼 독립운동에 가담한 장남 우상이 1919년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마련하고 만주로 돌아가다 동상을 입어 객사한 것이다. 선생은 1923년 삼일학교 아담스기념관 건축 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1930년 11월 29일 5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64년 세류동 공동묘지에 안장됐던 선생의 유골은 삼일상고 동산으로 옮겨졌고 기념비도 세워졌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묘소는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졌다. 2015년 기념사업회가 발족했으며 손자 임병무씨도 유품을 수원박물관에 기증하고 조부의 업적을 기리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In&Out] 독립과 호국, 게다가 민주까지/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In&Out] 독립과 호국, 게다가 민주까지/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한국의 보훈은 6·25전쟁 희생자와 그 유족·가족을 돌보는 정책에서 시작됐다. 점차 독립운동 애국지사 및 4·19혁명 희생자, 나아가 베트남전 참전용사에 대한 지원 정책 등으로 확대됐다. 한국 보훈 정신의 근간이 ‘독립’과 ‘호국’인 셈이다. 그런데 독립과 호국은 적을 전제한 언어다. 보훈이 일본, 북한, 베트남 등의 ‘적’과 싸우다 생긴 희생에 대한 보답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러한 보답은 국내적 차원에서는 사회와 국가의 통합에 기여한다.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지구화 시대에는 이런 보훈 정책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일본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좁은 의미에서는 일본을 위한 호국적 행위지만 그것이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을 불쾌하게 만들고, 동아시아 정치적 긴장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도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 한편에서는 고엽제 피해자를 중심으로 베트남전 참전용사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고 예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 당시 상대방에게, 특히 무고한 민간인에게까지 피해를 준 사례도 적지 않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국내외의 목소리도 계속 나오고 있다. 특정 국가의 보훈 대상자가 상대국에 대해 가해자일 수도 있을 가능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더욱이 한국과 베트남 간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증폭되고 있는 만큼 베트남에 대해 적대적인 듯한 정책이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보훈이 전쟁 희생자에 대한 지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전쟁 자체가 사라진 세계, 서로에게 상생이 될 수 있는 문화의 건설까지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북 적대성을 전제로 하는 보훈으로는 통일과 평화 시대를 열 수 없다. 한국은 물론 북한의 보훈 정책(유자녀 정책)도 궁극적으로는 서로를 품을 수 있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독립과 호국은 오늘의 한국을 설명하는 명백한 근간이지만, 결국은 일본이나 북한도 품을 수 있는 보훈으로 확장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때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지원하기 위한 법률(5·18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2002)이 주는 보훈적 함축성은 작지 않다. 여기서는 독립과 호국에 비해 ‘민주’를 강조하고 있다. 독립과 호국이 주로 국경 중심의 민족국가 체제 안에서 유의미한 데 비해 민주라는 가치는 종종 국경을 넘어 적용된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지 않으려는 세력도 여전할 만큼 독립과 호국에 민주적 가치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키는 건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수해야 하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독립, 호국, 민주라는 세 축 간 균형을 잡아 나가야 한다. 독립과 호국 유공자를 지속 발굴하고 지원하면서 초연결 시대 민주적 가치를 화학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 남북, 아시아, 나아가 세계가 상생적으로 연결되는 보훈의 미래를 꿈꿔 본다.
  • 애국지사 기리며 걸어보세요… 역사·문화 숨쉬는 망우리공원

    애국지사 기리며 걸어보세요… 역사·문화 숨쉬는 망우리공원

    ‘기억봉사단’ 모집해 공원 내 묘소 관리도 방정환·한용운 등 잠든 5.2㎞ ‘사색의 길’ 문학제·시낭송대회 등 인문학 행사 확대서울 중랑구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민선 7기 공약인 망우리공원 역사문화명소화 사업에 박차를 가한다. 웰컴센터 건립을 마무리하고 각종 역사문화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는 등 서울의 대표 역사문화공원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다는 목표다.22일 중랑구에 따르면 구는 약 55억원의 사업비가 들어가는 웰컴센터를 오는 10월 완공을 목표로 상반기에 착공한다는 계획이다. 공원 방문객 응대 및 콘텐츠 운영의 거점 역할을 할 웰컴센터에는 교육실, 카페 등을 마련해 역사교육 및 구민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인근에 위치한 중랑캠핑숲, 용마테마공원과 연계한 프로그램을 발굴해 숲과 산책로, 애국지사 묘역이 공존하는 복합 역사문화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방침이다. 망우리공원에 잠든 유명 인사 60명의 묘소를 봉사단체 및 개인과 일대일로 결연해 집중 관리하고 뜻을 기릴 수 있도록 하는 ‘영원한 기억봉사단’도 지난달 24일부터 지난 20일까지 추가 모집에 나섰다. 지난해 4월 출범한 영원한 기억봉사단은 모두 74개의 팀이 꾸려져 지난 1년간 공원 진입로 정비, 잡풀 제거, 묘비 관리, 헌화 등의 활동을 했다. 망우리공원 명소화 사업에는 류경기 중랑구청장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앞서 중랑구는 2018년 8월 민선 7기 출범 직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한 데 이어 역사·문화, 교육, 공원 등 각 분야 전문가 28명을 위원으로 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공원을 관통하는 약 5.2㎞ 산책로인 ‘사색의 길’을 중심으로 이곳에 잠든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에 대한 연보비를 세워 역사 교육의 장으로 조성했다. 망우리공원 문학제와 시낭송대회 개최, 유명인사 및 애국지사 등 탐방 코스 발굴, 기억저장소(아카이브) 구축 추진 등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구는 올해도 인물 업적 및 생애 등 특성에 따라 연보비를 다양화하는 묘역의 기억공간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유명 인사의 묘역을 추가로 발굴하고 이와 연계한 스토리텔링 탐방코스도 확대해 나간다. 구는 1992년 2월 망우리공원에 안장돼 있는 방정환(1899~1931), 한용운(1879~1944) 등 7명의 연보비를 조성한 데 이어 1998년 2월 박인환(1926∼1956) 등 8명의 연보비를 추가로 조성해 공동묘지를 시민 휴식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류 구청장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역사의 증언이자 축소판인 망우리공원을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해 그곳에 잠든 선조의 뜻을 후대에 바르게 알릴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씨줄날줄] 116년 서울신문과 조선일보/문소영 논설실장

    [씨줄날줄] 116년 서울신문과 조선일보/문소영 논설실장

    “100년이 넘은 기업은 두산과 조흥은행, 그리고 서울신문뿐입니다.” 대한상의 박용성 회장은 2004년 7월 18일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 행사에서 이렇게 축하했다. 당시 한국신문협회장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도 “현존 언론사 가운데 100년의 전통을 기념하는 신문사가 출현한 그 하나만으로 우리 언론계 전체의 큰 경사”라고 했다. 서울신문은 그 자체로 영욕의 한국 근현대사다. 1904년 7월 18일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전신이다. 첫 발행인·편집인은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E T Bethell)이었다. 창간에 참여한 애국지사 양기탁과 신채호, 박은식 등은 “일본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은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길뿐”이라고 인식했다. 독립운동 등을 알리려 국문·영문판을 발행했고, 발행부수도 1만 부로 파격적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대한매일신보를 두고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라며 눈엣가시로 여겼다. 회유와 매수로도 논조를 꺾지 못한 일제는 뒤에 영국과 외교적 마찰을 감수해 가며 베델을 쫓아냈고,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 강제 매수했다. 이후 ‘대한’을 떼어낸 ‘매일신보’(每日申報)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활용됐다.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은 수행했다. 1915년 처음으로 신춘문예를 시행했고 1920년 한국 언론 최초로 여기자 채용을 공고해 ‘한국 언론 1호 여기자’ 이각경 기자도 탄생시켰다. 해방 후 1945년 11월 10일 미군정으로부터 매일신보는 정간처분을 받았다. 이에 ‘민족대표 33인’이던 오세창 등은 새 경영진을 구성해 ‘서울신문’을 창간하는데 이때 서울신문의 지령(紙齡ㆍ신문의 나이)을 신생 신문처럼 1호가 아니라 ‘대한매일신보’부터 ‘매일신보’로 내려온 지령을 계승한 1만 3738호로 시작한다. 이 출발선으로 서울신문은 1904년에 창간해 116년이 된, 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문이라 할 수 있다. 언론학 전공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이를 확인해 한국 언론사에도 기록해놓았다. 1920년 3월 5일 창간한 조선일보가 ‘한국 언론 역사상 첫 창간 100년’이라며 선전한다. 팩트체크를 하자면, 1904년 7월 18일 창간한 서울신문(대한매일신보의 후신)보다 16년 4개월 13일이나 늦은 창간이다. ‘장수기업’이 드문 한국에서 조선일보의 100번째 생일맞이는 기념할 만하지만, 자신을 돋보이고자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야 되겠나. 이는 조선일보가 지난 4일 ‘1986년 김일성 사망보도’, ‘2013년 현송월 총살보도’ 등의 오보를 시인하고 사과하면서 “사실보도만 하겠다”고 한 약속의 위반이다. symun@seoul.co.kr
  • 코로나 시련 뚫고, 또다시 봄이 왔네

    코로나 시련 뚫고, 또다시 봄이 왔네

    나라 전체가 멈춰 선 듯하다. 바이러스 탓이다. 사람들은 나들이를 꺼리고, 여행지는 얼어붙었다. 빼앗긴 들에도 왔던 봄인데, 한국인의 가슴엔 봄이 내려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막아서도 봄은 온다. 매화가 팝콘처럼 터지기 시작했고 들꽃들도 시나브로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있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찾았다. 늙은 매화가 필 때면 늘 뭇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절집이다. 절집 뜨락의 수백년 묵은 자장매가 붉은 꽃술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행장 꾸려 내려갔다.●부처님 진신사리 모신 사찰… 370년 ‘자장매’ 인기 통도사는 선원과 강원, 율원을 모두 갖춘 대가람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어 불보 사찰이라고도 한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봄의 통도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이른바 ‘자장매’(慈臧梅)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법명을 딴 매화다. 영각(影閣) 처마 아래 있다. 수령은 370년쯤 됐다고 한다. 2월 하순쯤 꽃이 피기 시작하면 분홍빛 매화를 보려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다. 극락보전 옆에도 이름난 홍매 두 그루가 있다. 각각 만첩홍매와 분홍매로 불린다. 한데 ‘꽃보다 절집’이었다. 자장매의 자태도 명불허전이었지만 절집의 웅숭깊은 아름다움은 그보다 몇 배 뛰어났다. 다른 여행지를 둘러볼 생각은 못하고 절집에서 ‘혼자놀기의 진수’를 선보인 건 그 때문이다. ●법당 중심으로 상로전·중로전·하로전으로 나뉘어 통도사는 가람 배치가 독특하다. 법당을 중심으로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 등 세 구역으로 나뉜다. 이는 통도사가 조성 시기가 다른 3개의 가람이 합해진 복합사찰이라는 뜻이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곧 하로전이다. 영산전(보물 제1826호)과 극락보전, 범종루 등의 당우가 밀집돼 있다. 극락보전 외벽의 ‘반야용선도’가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용선을 타고 피안의 세계로 가는 중생들의 모습을 담았다. 삼층석탑(보물 제1471호) 맞은편은 영산전이다. 하로전 구역의 중심 건물이다. 영산전은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다보탑을 그린 ‘견보탑품도’ 등 진귀한 벽화들(보물 제1711호)이 즐비하다. 중로전 구역에는 고려 말 건물인 대광명전을 비롯해 용화전, 개산조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 구역에서 가장 독특한 건 봉발탑(보물 471호)이다. 부처님의 발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밥그릇에 뚜껑이 덮인 형상을 하고 있다. 발우는 스님들이 밥을 먹을 때 쓰는 그릇이다. 봉발이란 발우를 모셨다는 뜻이다. 용화전 안에는 중국 소설인 서유기의 내용 일부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절집 벽화로는 매우 이례적인 그림이다. 이제 상로전으로 간다. 가장 중요한 건물은 ‘대웅전 및 금강계단’(국보 제290호)이다. 대웅전은 사면이 한 건물을 이루는 독특한 구조다. 면마다 출입문이 있고, 현판도 달려 있다. 동쪽은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이는 모두 대웅전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대웅전 안에는 불상이 없다. 건물 뒤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으므로 불상이 따로 필요 없다는 의미다. 금강계단은 납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을 벌이는 곳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건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납자들 모두가 이 계단을 통해 득도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통도사란 이름도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대웅전 지붕 위에도 볼거리가 많다. 가로 지붕과 세로 지붕이 만나는 정점에 철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석탑의 찰주(꼭대기에 있는 원기둥 모양의 중심 기둥)와 불가에서 보배로 여기는 보주(둥근 구슬)를 형상화한 것이다. 사파이어빛 조형물이 아름다우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 모습 못 봤으면 후회가 막심할 뻔했다. 대웅전 주변에서는 찰주의 일부만 보인다. 통도천 건너편의 사자목 오층석탑에 오르면 전체를 살필 수 있다. 찰주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기와 끝자락에 하얀 연꽃봉오리 같은 것들이 늘어서 있다. 이른바 백자연봉이다. 기와 끝의 숫막새에는 와정이라는 못이 박혀 있다. 기와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박아 놓은 것이다. 못을 가리고 조형미를 더하기 위해 와정 위에 연꽃 모양의 백자를 얹는데, 이게 바로 백자연봉이다. 대방광전 앞의 구룡지(九龍池)는 통도사의 창건 설화가 담긴 작은 연못이다. 자장율사가 구룡소에 사는 용들을 승천시키고 못을 메워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응진전 앞 바닥에는 호혈석(虎血石)이라 불리는 붉은 돌이 있다. 호랑이의 기를 누르기 위해 호랑이 피를 발랐다는 반석이다. 물을 부으면 붉은 빛을 띤다. 극락전 앞에도 또 하나의 호혈석이 있다. 아울러 대웅전 계단에 새겨진 용의 비늘, 계단 옆에 마련해둔 아귀밥통 등 재밌는 이야기를 담은 유물들을 찬찬히 찾는 재미가 각별하다.●벽화부터 명필 글씨까지… ‘불화의 보고’로 유명 통도사는 흔히 ‘불화의 보고’라고 불린다. 그만큼 벽화가 많다는 뜻이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볼 수는 있으니 최대한 많이 눈에 담아가는 게 좋겠다. 명필들의 글씨도 많다. 일주문 현판의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관음전 맞은편의 ‘원통소’(圓通所) 현판, 대웅전의 네 개 현판 중 ‘대방광전’과 ‘금강계단’ 등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다. ‘일로향각’(一爐香閣) 현판과 주지실 앞의 ‘탑광실’(塔光室) 등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알려졌다. 추사의 ‘성담상게’(聖覃像偈)라는 서예작품은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춘풍에 세상 시름 씻겨 보내리●1㎞ 솔숲 걷노라면 업장이 벗겨지는 듯 통도사 입구를 넘어서면 곧바로 솔숲이 펼쳐진다. 이른바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다. 무풍교에서 일주문 사이 솔숲에 조성된 보행로다. 솔숲에 들면 늙은 소나무들이 춤을 추듯 늘어서 있다. 통도사 일대의 빼어난 풍경을 일컫는 이른바 ‘통도8경’ 가운데 1경인 ‘무풍한송’이 바로 여기다. 솔숲의 길이는 1㎞ 정도다. 천리길을 걷듯 느릿느릿 걷는 게 솔숲의 정수를 만끽하는 방법이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솔향이 코를 간질이고, 솔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영혼이 씻기고 업장이 벗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하마비가 세워진 산자락엔 큰 암벽이 있다. 부채를 펼친 듯하다는 선자바위다. 바위 여기저기에 선인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조선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 일제강점기 박영효, 종두법의 지석영, 애국지사 의암 손병희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데,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껄렁한 여행자 눈엔 그저 우수마발들의 이름만 들어찰 뿐이다. 부도탑에 이르면 무풍한송로는 끝이 난다. 곧장 들어가면 통도사 중심 영역이고, 주변으로 실핏줄처럼 이어진 소로를 따라 가면 부속 암자들이 나온다. 통도사의 부속 암자는 모두 19곳이다. 불심이 깊은 이들은 암자를 모두 둘러보는 ‘19암자 순례’에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 일정으로는 어려워 일반 관광객들은 유명한 암자 서너 곳을 둘러보는 게 보통이다. 19암자 가운데 영축산 중턱의 백운암을 제외하면 모두 차로 접근할 수 있다. 서운암은 장독대로 유명하다. 그 숫자가 무려 5000개에 이른다고 한다. 원래 야생차로 유명했던 곳인데 요즘은 장독대를 보기 위해 찾는 이들이 더 많다. 옹기들은 대부분 최소 50년이 넘었고 200~300년 된 것도 섞여 있다. 장독 안에서는 된장이 익어간다. 운이 좋으면 서운암에서 키우는 공작새가 꼬리깃을 활짝 펼친 장면과 마주할 수도 있다.●영축산 능선 품은 16만 도자대장경의 장경각 서운암 위는 장경각이다. 16만 도자대장경을 모신 곳이다. 도자대장경은 도자에 새긴 불경을 일컫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8만 1528장의 목판 양면에 법문을 새긴 까닭에 견줘 도자대장경은 한 면에 새긴 탓에 전체 도판 수가 그 두 배인 16만 3056장에 이른다. 도자대장경을 완성하기까지 준비기간 5년을 포함해 무려 15년이 소요됐다고 한다. 이웃한 곳에 삼천불전도 있다. 역시 도자로 만든 3000개 불상을 모시고 있다. 장경각 앞 뜨락에 서면 영축산과 멀리 양산 시가지가 한눈에 담긴다. 가장 볼거리가 많은 곳은 자장암이다. 첫손 꼽히는 건 마애아미타삼존상(등록문화재 제617호)이다. 전체 높이가 4.54m에 이르는 대형 마애불이다. 1896년(고종 33년) 조성됐다. 다른 곳과 달리 자장암의 마애상은 바위에 얕게 새겨진 편이다. 이 덕에 조각이 아닌 불화(佛畵)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애상 뒤편 바위엔 금와보살이 산다. 거대한 바위 중심부에 작은 구멍이 뚫렸고, 종종 이 구멍 밖으로 황금빛 개구리가 출현한다고 한다. 불심 깊은 이들 눈에만 보인다고 하니 한번 도전해 보시길.●빼어난 경관에 왜구들도 활을 놨던 안양암 암자의 마루에 걸터앉으면 ‘악’ 소리나는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뜨락 위의 키 낮은 담장 너머로 영축산 능선이 얹혀져 있다. 늙은 소나무들은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자태로 추임새를 넣고 있다. 단정하고 소박한 풍경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발품 판 노고는 보상받고도 남는다. 원래 통도사 암자 가운데 전망 좋기로 명자깨나 날리던 곳은 안양암이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활을 쏘려다 눈앞에 펼쳐진 경관이 너무 빼어나 활을 놓고 말았다던가. 통도8경 중 제3경인 안양동대(安養東臺)가 바로 이 절집이 앉은 자리를 일컫는 말이다. 한데 시원한 맛으로는 자장암에 한 수 접어줘야 할 듯하다. 극락암은 극락영지(極樂影池)라는 작은 연못과 그 위에 놓인 어여쁜 홍교로 유명한 암자다. 통도8경 중 제5경이 바로 여기다. 연못엔 영축산 풍경이 그대로 담긴다. 연못 위 홍교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꼽히는 경봉 스님이 1962년 조성했다. 극락영지와 나란히 선 늙은 벚꽃이 개화하면 그야말로 선경이 펼쳐질 듯하다. 글 사진 양산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대중법회 일시 중단… 공양간도 폐쇄 -금강계단은 상시 개방됐던 예전과 달리 일정 기간에만 공개된다. 매달 음력 1~3일, 보름 등의 특정 시기 오전 11시~오후 2시에 개방한다. 통도사 홈페이지에 자세한 개방일자가 나와 있다. 평시에는 대광방전 쪽 담장 너머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대중법회 등은 취소됐지만 다행히 산문은 폐쇄되지 않았다. 다만 내방객 모두 발열 체크를 해야 하는 등 다소간의 불편은 예상된다. 코로나19 확산세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방문 전 확인하는 게 좋겠다. -공양간도 폐쇄됐다. 3월 초까지는 절밥을 먹을 수 없다. 산문 앞에 산채비빔밥 등 맛집들이 즐비하다. 삼정메밀소바, 금호정 등은 메밀국수로 유명한 집이다. 통도사 입구에서 멀지 않다. -통도사는 울산 울주군과 인접해 있다. 양산 시내보다는 석남사, 반구대암각화 등 울주 쪽 명소들을 묶어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 ‘초교 만세시위’ 박망아 선생 독립유공자 포상

    국가보훈처는 27일 제101주년 3·1절을 맞아 경북 의성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늦깎이 초등생’ 박망아 선생 등 10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건국포장이 추서된 박 선생은 18살이었던 1919년 의성 비안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하던 중 150명의 전교생을 교정에 집결시켜 3월 11일 비안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경계를 강화해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무산됐다. 박 선생은 굴하지 않고 이튿날인 12일 동료 학생들을 학교 뒷산에 집결시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박 선생은 징역 8개월이 선고돼 옥고를 치른 뒤 22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박 선생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은 현재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항쟁으로 의미가 크다. 을사늑약 후 의병활동을 벌이다 순국한 이강복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이 선생은 1905년 일사늑약이 체결되자 1907년 전남 담양에서 의병활동에 참여해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했다. 이 선생은 전주 이씨 가문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적극적 의병활동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번에 포상받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23명(애국장 9, 애족장 14), 건국포장 14명, 대통령표창 69명이다. 포상자 중 여성은 5명이고, 생존 애국지사는 없다.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자는 총 1만 5931명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애국지사 잠든 터, 주민 손길로 기린다

    애국지사 잠든 터, 주민 손길로 기린다

    서울 중랑구가 망우리공원에 잠든 역사적 인물의 묘역을 1대 1 맞춤 관리하는 결연 활동 ‘영원한 기억봉사단’의 올해 참가자를 모집한다.중랑구는 유관순(1902~1920) 열사,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 등 한국 근현대사 주요 인물 60명의 묘역과 1대 1 결연을 맺을 영원한 기억봉사단 참가 신청을 받는다고 22일 밝혔다. 봉사단은 약 1년 동안 망우리공원의 진입로 정비, 잡풀 제거, 묘비 관리, 헌화 등 묘소 관리 활동을 하게 된다. 지난해에도 74개의 개인 및 가족, 단체 봉사단이 서병호(1885~1972), 문일평(1888~1939), 안창호(1878~1938) 선생 등의 묘소를 돌봤다.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오는 24일부터 다음달 20일까지 구청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구는 우선 신청자로부터 결연을 맺고 싶은 묘소의 우선순위를 3지망까지 지원받아 연결할 예정이다.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유족이 없어 방치돼온 애국지사들을 이제라도 주민들의 손길로 보살펴드릴 수 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면서 “중랑구의 소중한 문화자산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증거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공간을 가꿔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경제정책·노사문제 전문가 역량 펼칠 기회달라” 호소

    “경제정책·노사문제 전문가 역량 펼칠 기회달라” 호소

    이회수 더불어민주당 김포을 21대총선 예비후보 출판기념식이 정치·경제·사회단체장 및 지역주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이뤄졌다. 출간한 저서 “이회수에게 묻는다- 김포시민 행복의 길” 출판기념식은 지난 12일 김포시 양촌읍 양곡중학교의 ‘양촌 다목적체육관’에서 치러졌다. 양곡중학교는 이 부의장 모교이며 양곡(오라니장터)은 김포항일독립운동의 매카로 유서깊은 역사문화지대여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날 출판회에는 이해찬 당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지사, 김부겸 국회의원 등이 축하메시지와 동영상을 보내 왔다. 민주당 이수진 최고위원과 이해식 대변인, 정하영 김포시장, 김두관 의원, 전 유영록 김포시장, 박채순 민주평화당 김포을 지역위원장, 고진 경제산업혁신위원장, 김준묵 혁신경제 이사장, 김재구 전 사회적기업연구원장, 신광철 전 김포시 의원, 김옥균 시의원, 민간단체 대표 및 지역주민들도 대거 참석해 축하했다. 저자 이 예비후보는 양촌읍 구래리에서 항일의병독립투사인 이종근 애국지사 후손으로 태어났다. 양곡초를 나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와 고려대 노동대학원(노동법학과)을 졸업했다. 이후 민주노총 대외협력실장과 사회연대은행 상임이사를 거쳐 신계륜 의원 정책보좌관, 대통령직속 일자리위원회 전문위원을 거쳐 현재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과 전국사회적경제위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인 국내 대표적인 경제정책 전문가이자 노사문제 전문가다.이 예비후보는 저서에서 대한민국과 김포에서 경험했던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삶의 여정을 회고하고 있다. 불꽃같은 정열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민생경제와 사회적경제, 포용성장과 혁신경제 정책전문가로 우리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일해 왔다. 저자의 출판기념회에는 30여년간 사회운동을 해 온 저자 이회수의 폭넓은 대인관계를 증명하듯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사들과 김포의 많은 인사들과 지역 주민들이 대거 운집해 대성황을 이뤘다. 특히 저자가 제21대 국회의원 예비후보로 출마한 지역구 김포을 지역(구래 장기 마산 운양 양촌 통진 하성 대곶 월곶)은 그가 태어난 고향이다. 지역주민들과 초중고 선후배 동문들, 지역 민간단체 대표들과 재령이씨 김포종친회 회원들도 대거 찾아와 축하해줬다. 이 예비후보의 출판을 축하하는 동영상에도 다양한 인사들이 보였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설훈·박광온·남인순 최고위원, 윤호중 사무총장, 경기도당위원장 김경협 의원, 이용득·위성권·김병관 의원 등이 축하 동영상과 축하메시지를 보내왔다. 이해찬 당대표는 축하메시지를 통해 “이회수 후보는 현장에서 노동문제와 사회적경제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민생경제의 새로운 기반을 닦았던 우리 당의 소중한 일꾼”이라고 평가하고 “앞으로 이회수 후보의 새로운 시작에 아낌없는 응원과 성원을 보내 주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박원순 시장은 “이회수의 대한민국과 김포발전에 대한 비전이 비전으로 끝나고, 책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현돼서 김포가 발전하고 김포 주민이 행복하게 되길 바란다. 저도 함께 하겠다”고 연대감을 표했다. 또 이재명 지사는 “애국지사 이종근 선생의 후손답게 앞으로 책에 담은 훌륭한 제안을 김포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열심히 뛰어주실 것을 믿는다”고 격려했다. 특히 김부겸 의원은 축하 동영상에서 “이회수 부의장은 더불어민주당에 들어와서는 사회경제정책을 당의 정강정책으로 격상시켜서 자치분권과 지역균형발전 정책에 이바지한 우리 당의 정책 일꾼”이라면서 “오랜 세월 다듬어 온 이 부의장의 경험과 정책 비전이 김포지역과 나라를 위해 크게 쓰이길 바란다”고 전했다. 출판회 말미에 이회수 예비후보는 “오래 중앙에서 쌓아온 경륜과 네트워크를 내 고향인 김포에 크게 쓰여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린다”면서 “앞으로 국회에 가서 ‘함께 잘사는 행복도시 김포, 꽃피는 평화번영도시 김포, 살맛나는 꿈의 도시 김포’를 창출하고 공정하고 새로운 김포를 만들어가는 데 모든 역량을 바쳐 헌신하겠다”고 역설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독립유공자 집안도 ‘병역명문가’ 포함

    올해부터 일제강점기 독립군 등 독립유공자 집안도 ‘병역명문가’ 선정 대상에 포함된다. 8일 병무청에 따르면 올해 봉오동·청산리전투 승전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모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가문을 새롭게 병역명문가 선정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병역명문가 제도는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 가족 모두가 현역 복무를 마친 가문 중에서 선정한다. 또 학도병 등 정규군이 아닌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가문도 병역명문가로 인정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근현대사 명소 많은 강북…역사교육 나눔·체험 강점

    ‘3·1운동의 발상지 봉황각, 국립4·19민주묘지, 순국선열·애국지사 묘역, 근현대사기념관….’ 서울 강북구에 자리잡은 역사적 명소들이다. 구 혁신교육지구 학부모회는 이들 명소를 방문해 익힌 생생한 역사를 아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학부모 창의 한마당이나 마을학교 등 혁신교육지구 사업 기획에 대한민국 근현대사 지식을 활용한다. 교육의 한 주체인 학부모로서 스스로 역량 강화를 통해 보다 건강한 마을교육공동체 일원으로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구 관계자는 “지역에서 습득한 재능을 아이들과 나누고 소통하며 자아를 실현하자는 의미도 있다”고 전했다. 구는 마을 자원과의 연계 교육을 목표로 ‘학교 관계자와 함께하는 너랑나랑우리랑 스탬프 힐링 투어’도 진행한다. 북한산 숲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너랑나랑우리랑’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숨결이 깃든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다. 올해 진행된 투어에 지역 내 학교 교장·교감, 교육지원청 직원 등 50여명이 참여했다. 마을과 함께하는 학교교육과정에는 역사탐방 프로그램이 편성돼 있다. 아이들의 근현대사 지식 함양을 돕고 우리 동네에 대한 자부심도 높여 주자는 의도다. 학생들은 교과서에서 벗어나 살아 숨 쉬는 역사 현장을 체험한다. 우선 근현대사기념관을 방문해 구한말 동학혁명에서부터 4·19에 이르기까지 독립·민주의 가치를 되새긴다. 우리나라 ‘최초’라는 상징성을 가진 선열들의 묘역 초대(初代)길에선 우리 역사의 튼튼한 뿌리를 보다 세세하게 짚고, 봉황각에 들러 독립에 대한 선열들의 굳건한 의지를 공유한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조선의 독립, 자유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최후 성공이 있을 때까지 왜적과 계속 투쟁하라! ” 만주를 호령하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거둬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지만 양세봉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양세봉은 1896년 7월 15일 평북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마을 서당 문지기로 일하며 귀동냥으로 천자문과 논어, 명심보감 등을 익힌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훈장의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양세봉은 죽음을 앞둔 안 의사가 남긴 “슬퍼하지 마라. 대장부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1912년 아버지가 갑자기 병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양세봉은 겨우 16세에 가장이 됐고 임재순과 결혼했다.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양세봉은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흥경현(현 신빈현) 영릉가를 거쳐 한인 집단 거주지인 홍묘자 사도구에 정착했다. 1919년 4월 홍묘자에 있던 홍동학교 교장 이세일은 3·1운동 지지 시위를 주도했는데 양세봉도 동참했다. 이후 양세봉은 천마산대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 12월 최시흥이 청장년 500여명으로 조직한 천마산대는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밀정과 일경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던 항일 유격대였다.●“중국인, 관운장보다 유능한 장군으로 흠모” 천마산대는 일제의 공격을 받자 만주 유하현으로 가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양세봉은 군기 검사관이 됐다. 그 뒤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한통의부로 통합, 무력 부대를 설치했는데 오동진이 사령장이었고 양세봉도 두령이라는 작은 자리를 맡았다. 1923년 5월 양세봉은 평북 창성을 습격하고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등 전투에 참여했다. 그 후 새로 출범한 참의부 소대장이 돼 압록강을 건너가 유격 투쟁을 이어 갔다.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경 수명을 사살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을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해 일제가 간담을 쓸어내리게 했다. 1924년부터 남만주에는 정의부가, 북만주에는 신민부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체제가 됐다. 양세봉은 참의부 중대장으로 승진한 뒤 정의부로 옮겨 갔다. 3부는 1929년 4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국민부로 통합됐다.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다. 국민부는 선민부 토벌에 나섰다. 조선민회라고도 불렸던 선민부는 한인 변절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가족을 살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은 부사령을 맡아 선민부 지휘부와 지부를 습격해 우두머리와 일당을 모조리 죽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1년 9·18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듬해 1월 조선혁명당과 군 간부 10여명이 회의 도중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이후 두 달 동안 간부 83명이 붙잡혀 혁명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지역 부대장들의 추천으로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양세봉 장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속성군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직적인 항일 투쟁에 나섰다. 또한 왕동헌, 이춘윤, 양희부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력해 ‘요령농민자위단’을 결성했다. 당취오가 총사령인 ‘요령민중자위군’과도 힘을 합쳐 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서 대일 연합작전을 벌였다. 괴뢰정부인 만주국 군대가 흥경현을 점령하자 연합부대는 20여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환했다. 일본군은 400여명의 사상자와 500명 가까운 실종자를 냈다. ‘제1차 흥경혈전’이다. 그 중심에 양세봉 장군이 있었다. 다음달 일본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흥경으로 돌진해 왔다. 2차 혈전에서도 연합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연합부대는 1932년 8월 청원현을, 다음달에는 석탄 탄광이 있는 무순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연합부대가 지나갔던 평정산 마을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32년까지 한중 연합부대는 일만 연합군과 200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장군은 그때마다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한편으로 멀리 경상도까지 소부대를 보내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악질 경찰을 살해했다. 1932~1933년 압록강 주변에서만 26차례 파괴 공작을 벌였고 일본 군경 243명을 사살했다. 1933년 5월 서원준을 황해도에 밀파해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한 것은 신문이 호외로 다룰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럴수록 일제의 추격은 집요해졌다. 조선인 변절자를 이용해 혁명군을 체포하고 가족과 친구까지 살해했다. 혁명군 수백명을 처형해 머리를 매달았다. 장군의 체포에도 혈안이 돼 현상금을 걸었다. 1934년 3월 장군은 중국 동북인민혁명군 사령관 양정우와 연합했다. 장군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항일을 위해 신념도 버렸다. 조선혁명군과 인민혁명군은 진주령 일본군 기차 습격, 노구대 격전, 쾌대무자 전투 등 연합작전에서 연전연승, 일본군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 그해 9월 18일 일제의 지시를 받던 박창해는 장군과 면식이 있던 압동양을 보내 “저희 부대가 양 사령관께 오려고 합니다. 함께 가서 무기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유인했다. 장군은 경호대원만 데리고 따라나섰고 일행이 소황구에 이르렀을 때 어둠 속에서 압동양이 옥수수밭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매복하고 있던 일군들이 기습 사격을 가했고 장군은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장군은 “조선독립혁명을 완성하고 가지 못하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고 자책하며 20일 오후 1시쯤 숨을 거뒀다. 15년 동안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웠던 영웅은 이렇게 희생됐다. 한인들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며 슬퍼했다. 장군의 나이 38세였다.한인들은 시신을 위치가 드러나지 않게 평장(平葬)했다. 같은 달 26일 양세봉의 죽음을 알고 향수하자촌에 일군이 몰려와 한인 70여명을 모아 놓고 시신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둔장(屯長)이 묘의 위치를 말하자 일군은 시신을 파내 놓고 마을 노인 김도선에게 작두로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 김 노인은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어찌 자기 사령관의 머리를 자를 수 있단 말이냐”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의 머리를 베고 장군의 머리를 가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 없는 장군의 시신을 다시 고구려산성 아래에 묻었다. 장군은 전투에선 호랑이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했다. 계급을 불문하고 대원들을 평등하게 대했고 거친 밥을 똑같이 나눠 먹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 배움이 부족한 ‘소작농 장군’이었지만 인격으로 감동시켰다. 장군의 비서였던 박윤걸(중국에서 작고)씨는 “중국인 이춘윤은 관운장보다 더 유능한 장군이라며 흠모했다”고 말했다.●김일성 아버지와 의형제… 가족들 평양에 정착 광복 후 북한은 장군의 가족을 평양으로 데려가 정착시켰다. 장군은 김일성의 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61년 후손들이 유골을 북한으로 이장했고 장군은 애국열사릉에 옮겨져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이회영 선생 묘소의 바로 왼쪽에 장군의 가묘가 있다. 남북 양쪽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독립투사는 장군이 유일하다. 우리 정부는 1962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조선의 독립, 자유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최후 성공이 있을 때까지 왜적과 계속 투쟁하라! ” 만주를 호령하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거둬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지만 양세봉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양세봉은 1896년 7월 15일 평북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마을 서당 문지기로 일하며 귀동냥으로 천자문과 논어, 명심보감 등을 익힌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훈장의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양세봉은 죽음을 앞둔 안 의사가 남긴 “슬퍼하지 마라. 대장부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1912년 아버지가 갑자기 병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양세봉은 겨우 16세에 가장이 됐고 임재순과 결혼했다.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양세봉은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흥경현(현 신빈현) 영릉가를 거쳐 한인 집단 거주지인 홍묘자 사도구에 정착했다. 1919년 4월 홍묘자에 있던 홍동학교 교장 이세일은 3·1운동 지지 시위를 주도했는데 양세봉도 동참했다. 이후 양세봉은 천마산대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 12월 최시흥이 청장년 500여명으로 조직한 천마산대는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밀정과 일경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던 항일 유격대였다.●“중국인, 관운장보다 유능한 장군으로 흠모” 천마산대는 일제의 공격을 받자 만주 유하현으로 가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양세봉은 군기 검사관이 됐다. 그 뒤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한통의부로 통합, 무력 부대를 설치했는데 오동진이 사령장이었고 양세봉도 두령이라는 작은 자리를 맡았다. 1923년 5월 양세봉은 평북 창성을 습격하고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등 전투에 참여했다. 그 후 새로 출범한 참의부 소대장이 돼 압록강을 건너가 유격 투쟁을 이어 갔다.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경 수명을 사살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을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해 일제가 간담을 쓸어내리게 했다. 1924년부터 남만주에는 정의부가, 북만주에는 신민부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체제가 됐다. 양세봉은 참의부 중대장으로 승진한 뒤 정의부로 옮겨 갔다. 3부는 1929년 4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국민부로 통합됐다.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다. 국민부는 선민부 토벌에 나섰다. 조선민회라고도 불렸던 선민부는 한인 변절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가족을 살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은 부사령을 맡아 선민부 지휘부와 지부를 습격해 우두머리와 일당을 모조리 죽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1년 9·18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듬해 1월 조선혁명당과 군 간부 10여명이 회의 도중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이후 두 달 동안 간부 83명이 붙잡혀 혁명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지역 부대장들의 추천으로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양세봉 장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속성군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직적인 항일 투쟁에 나섰다. 또한 왕동헌, 이춘윤, 양희부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력해 ‘요령농민자위단’을 결성했다. 당취오가 총사령인 ‘요령민중자위군’과도 힘을 합쳐 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서 대일 연합작전을 벌였다. 괴뢰정부인 만주국 군대가 흥경현을 점령하자 연합부대는 20여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환했다. 일본군은 400여명의 사상자와 500명 가까운 실종자를 냈다. ‘제1차 흥경혈전’이다. 그 중심에 양세봉 장군이 있었다. 다음달 일본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흥경으로 돌진해 왔다. 2차 혈전에서도 연합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연합부대는 1932년 8월 청원현을, 다음달에는 석탄 탄광이 있는 무순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연합부대가 지나갔던 평정산 마을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32년까지 한중 연합부대는 일만 연합군과 200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장군은 그때마다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한편으로 멀리 경상도까지 소부대를 보내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악질 경찰을 살해했다. 1932~1933년 압록강 주변에서만 26차례 파괴 공작을 벌였고 일본 군경 243명을 사살했다. 1933년 5월 서원준을 황해도에 밀파해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한 것은 신문이 호외로 다룰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럴수록 일제의 추격은 집요해졌다. 조선인 변절자를 이용해 혁명군을 체포하고 가족과 친구까지 살해했다. 혁명군 수백명을 처형해 머리를 매달았다. 장군의 체포에도 혈안이 돼 현상금을 걸었다. 1934년 3월 장군은 중국 동북인민혁명군 사령관 양정우와 연합했다. 장군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항일을 위해 신념도 버렸다. 조선혁명군과 인민혁명군은 진주령 일본군 기차 습격, 노구대 격전, 쾌대무자 전투 등 연합작전에서 연전연승, 일본군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그해 9월 18일 일제의 지시를 받던 박창해는 장군과 면식이 있던 압동양을 보내 “저희 부대가 양 사령관께 오려고 합니다. 함께 가서 무기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유인했다. 장군은 경호대원만 데리고 따라나섰고 일행이 소황구에 이르렀을 때 어둠 속에서 압동양이 옥수수밭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매복하고 있던 일군들이 기습 사격을 가했고 장군은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장군은 “조선독립혁명을 완성하고 가지 못하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고 자책하며 20일 오후 1시쯤 숨을 거뒀다. 15년 동안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웠던 영웅은 이렇게 희생됐다. 한인들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며 슬퍼했다. 장군의 나이 38세였다. 한인들은 시신을 위치가 드러나지 않게 평장(平葬)했다. 같은 달 26일 양세봉의 죽음을 알고 향수하자촌에 일군이 몰려와 한인 70여명을 모아 놓고 시신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둔장(屯長)이 묘의 위치를 말하자 일군은 시신을 파내 놓고 마을 노인 김도선에게 작두로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 김 노인은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어찌 자기 사령관의 머리를 자를 수 있단 말이냐”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의 머리를 베고 장군의 머리를 가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 없는 장군의 시신을 다시 고구려산성 아래에 묻었다. 장군은 전투에선 호랑이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했다. 계급을 불문하고 대원들을 평등하게 대했고 거친 밥을 똑같이 나눠 먹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 배움이 부족한 ‘소작농 장군’이었지만 인격으로 감동시켰다. 장군의 비서였던 박윤걸(중국에서 작고)씨는 “중국인 이춘윤은 관운장보다 더 유능한 장군이라며 흠모했다”고 말했다. ●김일성 아버지와 의형제… 가족들 평양에 정착 광복 후 북한은 장군의 가족을 평양으로 데려가 정착시켰다. 장군은 김일성의 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61년 후손들이 유골을 북한으로 이장했고 장군은 애국열사릉에 옮겨져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이회영 선생 묘소의 바로 왼쪽에 장군의 가묘가 있다. 남북 양쪽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독립투사는 장군이 유일하다. 우리 정부는 1962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흥미진진 견문기] 대통령과 무명 용사들 같은 애국 다른 묘역… 죽어서까지 다른 삶의 무게

    [흥미진진 견문기] 대통령과 무명 용사들 같은 애국 다른 묘역… 죽어서까지 다른 삶의 무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생전에 살았던 가옥에서 전 대통령들이 묻혀 있는 국립서울현충원까지 낙엽이 가득한 가을을 걷는 투어였다. ‘삶과 죽음의 길이 여기에 있으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천년 전의 향가 제망매가의 구절이 저절로 읊어졌다. 처음 방문한 김영삼 기념도서관은 아직 개관하지 않았는데, 길게 뻗은 곡선 위에 뚫린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직사각형 외양이 멋들어진 건물이었다. 다가구주택이 즐비한 언덕길을 올라 김영삼 전 대통령 가옥에 도착했다. 주인은 없었지만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은 물청소가 돼 있었고 거실에는 따뜻한 차가 주전자 가득 담겨 있었다. 1941년 강남심상소학교로 개교해 ‘강남’이란 이름이 처음 붙은 서울강남초등학교를 지나 서달산 자락길로 진입했다. 서달산은 단풍 세상이었다.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았고 바닥 가득 깔린 낙엽에는 이슬의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하늘의 해조차 구름 사이에 붉게 물들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가지런히 하늘로 곧게 솟은 잣나무 피톤치드 숲길을 지나 멀리 한강을 보고 통통 소리를 내는 다리 길을 걸어 숲속도서관에 도착했다. 한가로이 숲 내음을 맡으며 책이라도 읽고 싶었지만 시간에 쫓겨 다시 걸었다. 30분 넘게 걸어 호국지장사를 거쳐 국립서울현충원에 들어섰다. 지장사는 9세기 후반 창건됐는데 1983년 현충원이 들어서면서 호국이란 낱말을 붙여 호국지장사라 불린다고 한다. 한강에서 건져 모셔졌다는 철불좌상을 보고,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 묘역,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임시정부 및 애국지사 묘역 등을 둘러봤다. 죽어서도 그 무게가 다른 걸까.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이름조차 찾기 힘든 수많은 묘비와 높은 위치에 커다란 공간을 차지하는 대통령의 묘역이 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지나치게 대조적이었다. 이소영 동화작가
  • 민족민주 영령의 성지… 산 자에겐 치열한 정치공간

    민족민주 영령의 성지… 산 자에겐 치열한 정치공간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2차 국립서울현충원’ 편이 지난달 30일 동작구 상도동과 동작동 일대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7호선 상도역 4번 출구를 출발했다. 구립 김영삼도서관을 거쳐 김영삼 전 대통령 가옥에 방문했다. 김영삼 기념도서관은 내년 3월쯤 개관할 예정이어서 외관을 살펴보고 경과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현대정치사에 ‘상도동’이라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 김 전 대통령 가옥 응접실에서 차를 대접받으며 김상학 비서관으로부터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과 연금생활 등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듣고 눈에 익은 사진과 기념품, 휘호, 단풍나무를 즐겼다. 가옥에는 손명순(92) 여사가 기거하고 있다.서달산 명물로 떠오른 숲속도서관 가는 길은 11월의 마지막 단풍으로 불타고 있었다. 현충원에서 호국지장사(옛 화장사)~박정희~김대중~임시정부 및 애국지사 묘역 순으로 둘러봤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 앞에 화환이 즐비했는데 마침 전날이 고 육영수 여사의 94번째 생일이었다고 한다. 상도동에서 이동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현충원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 다들 아쉬워했다. 묘역 곳곳에 깃든 숱한 사연들이 저마다 앞다퉈 얘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이날의 서울미래유산은 김 전 대통령 가옥과 국립서울현충원이었다. 해설을 맡은 엄태호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원은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의 만추 속으로 참가자들을 안내했다.동작은 서울과 과천을 연결하는 한강 남쪽의 중요 나루였다. 사람과 물자가 드나들던 동작진(銅雀津)이자 병선 6척이 주둔하던 군사기지 동작진(銅雀鎭)이기도 했다. 우리말로는 동재기나루라고 불렀다. 1954년 이곳에 국군묘지가 세워졌다. 풍수지리상 장군대좌형의 명당이므로 군인과 인연이 있는 땅이다. 본래 동작이란 무덤을 장식한 구리봉황을 뜻하므로 땅 이름과 땅 주인이 서로 들어맞았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성이자 무덤이던 동작대에서 딴 동작이라는 지명이 조선 한양의 한강변 나루터 마을에 붙고 그곳이 현대 서울의 동작구와 동작동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졌다가 결국 국립묘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국군묘지에서 1965년 동작동 국립묘지로 승격됐다가 1996년부터 국립현충원이 됐다. 국립묘지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되 묘역 관리기관의 명칭만 바꿨다.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 등과 구별하기 위해 국립서울현충원이 됐다. 144만㎡의 부지에 무명용사 11만여위를 비롯해 모두 17만 9000여기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다. 신라를 통일한 문무대왕이 “아! 산천은 변천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저 오왕 합려의 북산 무덤에 색칠한 금오리가 남아 있지 않고, 위왕 조조 서릉의 망지는 동작이라는 명칭만 남았을 뿐이다…”라며 “내가 죽으면 동해바다에 장사 지내라”고 유언했다. 이 세상 영웅과 화려한 무덤이 다 사라지고 결국 ‘동작’이라는 이름만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조의 무덤에 구리로 만든 거대한 새를 세운 동작대에서 이름을 이어받은 동작구와 동작동에 국군묘지와 국립묘지가 세워지고 독립지사와 임정요인, 전직 대통령 등을 모신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장소인문학에서 말하는 땅의 내력이다.조선시대 한강이 오늘의 철도와 고속도로를 합친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할 때 왼쪽 서빙고나루, 오른쪽 노량나루의 중앙에 놓인 동작나루는 남대문을 나서서 용산 청파역을 거쳐 경기도 과천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중 ‘경조오부도’에 이 길을 과천로라고 이름 붙였다. 청파역에서 노량나루를 건너면 시흥으로 향했다. 동작진을 건너 과천으로 가거나 노량진을 건너 시흥으로 가는 두 길은 수원에서 만나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지방으로 이어졌다. 1899년 노량진~제물포 간 경인선과 1900년 노량진~용산 간 제1한강교(한강대교)가 놓이면서 동작진은 노량진에 밀렸다. 조선시대 가리기 힘들었던 두 나루의 우열은 근대기 들어 노량진이 앞섰다. 그 덕분에 비어 있던 동작진에 국립묘지가 깃들 수 있었다.옛 동작나루를 그린 실경산수화 2점이 전한다. 겸재 정선(1676~1759)의 ‘동작진’과 장시흥(1714~1789)의 ‘동작촌’이다. 동작진이 나루터를 포함한 마을 전체를 그렸다면 동작촌은 동작나루의 솟은 암산과 나루에서 사당, 과천으로 이어지는 길가에 즐비한 기와집을 클로즈업했다. 정선이 1744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작진’은 오늘의 현충원을 중심에 두고 멀리 관악산과 청계산을 배경 삼았다. 동작나루 일대 한강을 동작강이라고 불렀다. 권문세가의 별서(별장)가 자리잡았다. 인조반정의 공신 이귀가 세운 창회정이 정선의 그림에 엿보인다. 광해군 때의 권신 박승종의 별서 퇴우정이 이름을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인조의 동생 능봉군이나 남용익, 이세필, 윤두수 등 문신의 별서도 상지동에 있었다. 조선시대 현충원 일대를 상지동이라고 했다. 현충원의 터줏대감 호국지장사는 신라 고찰 화장사다. 삼성동 대부분이 봉은사 땅이었듯 현충원 대부분이 화장사 소유였다. 선조의 조모 창빈 안씨 묘도 널찍하게 자리를 잡았다.동작나루에는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은 31세 때 ‘동작나루에서 진주로 가시는 부친을 송별하며’란 제목의 시를 남겼다. “나루터에 저 멀리 떠나가는 배/모래밭에 말 세우고 바라본다네…”로 시작하는 효심 어린 시를 썼다. 그러나 이 시를 쓴 해 부친이 진주에서 숨졌으니 마지막 이별 인사가 된 셈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도 동작나루 풍경을 그린 ‘동작진’이라는 시가 전한다. 동작나루는 정치의 공간이기도 했다. 숙종 때 남인의 영수 윤휴는 왕의 부름을 받자 “신의 애초의 뜻은 전하가 계시는 궁전의 뜰에 나아가 하직하려는 것이었습니다…”라면서 동작나루의 숙소에 3달을 머물며 출사 거부의 사직상소를 올렸다. ‘정치 쇼’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세상이 바뀌고, 남인이 제거되면서 윤휴는 죄인이 돼 국문을 당한 뒤 사약을 받았다. 동작나루에서 여유작작하며 석 달을 버티다 동작강을 건넌 뒤 한 달 만에 저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은 민족민주영령들의 성지이자 국가 정통성의 뿌리다. 죽은 자의 공간이지만 산 사람들을 위한 정치공간이기도 하다. 혁명이나 변환의 시기나 행사 때마다 주요 인사들이 얼굴을 내미는 정치무대이기 때문이다. 246만명의 전사자와 전범자를 합사한 일본 야스쿠니신사가 국립묘지로 성지화되면서 참배 여부를 놓고 나라 안팎에서 논란이 빚어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조조의 무덤 동작대에서 전래된 동작나루의 전설이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어진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땅의 숙명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제33회 양천고성 ■집결 장소:12월 7일(토) 오전 10시 양천향교역 2번 출구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흥미진진 견문기] 행촌동·백양로·외솔관… 독립문 앞 숙연해지는 시간

    [흥미진진 견문기] 행촌동·백양로·외솔관… 독립문 앞 숙연해지는 시간

    3·1운동 100주년에 찾은 서대문독립공원 이곳저곳은 전날 비 온 뒤의 날씨와 맞물려 스산했다. 탑골공원에서 옮겨져 지난 8월 건립된 3·1독립선언기념탑을 기점으로 시작된 투어는 항일투쟁으로 순국한 선열들의 족적이 좌우에 배치돼 누구보다 나라를 위했던 그들의 정신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밥 먹을 때마다 나라를 생각했다’는 장병하 애국지사의 족적은 찡한 여운을 남겼다. 여운을 뒤로하고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화강석으로 건립된 독립문 앞에 섰다. 물리적 규모보다는 가슴에 크게 새겨야겠다는 해설사의 말씀을 듣고 잠시나마 초라하게 보였던 독립문이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며 절로 숙연해졌다. ‘한글이 곧 목숨이다’며 일제강점기 때 한글을 지킨 독립운동가 외솔 최현배 선생의 작품 ‘사주오 두부장수’의 배경이 된 행촌동의 자취를 따라 걸었다. 작품 속처럼 ‘생선 사려’, ‘새우젓 사오’라는 골목길의 외침 소리는 사라졌지만 대신 옛 한옥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무악동 선교본당을 볼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그들이 스스로 주인임을 알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설명으로 자주독립과 계몽을 위해 애쓴 선열들의 뼈아픈 현실과 그 현실을 해학적인 표현으로 풀어낸 최현배 선생의 ‘사주오 두부장수’의 내용이 예스러운 풍경과 겹치며 시대적 상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일행은 석교감리교회와 영천시장을 지나 연세대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은행나무잎을 사뿐히 밟으며 곧게 뻗은 백양로를 걷다 보니 연세대 초대 부총장과 30여년간 교수로 몸담았던 최현배 선생의 호를 딴 외솔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외솔관은 교정의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건물 뒤쪽으로 작은 동산이 있고 나무들이 울창했다. 민족의 정신과 얼은 곧 말에서부터 나온다는 주시경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글교육과 국어의 문법체계를 만드신 최현배 선생의 업적과 작품의 해설을 들으며 가치 있는 투어를 했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마무리했다. 김미선 책마루독서교육연구원
  • 땅 195만평 등 재산 뺏기고… 후손들은 가난의 대물림

    땅 195만평 등 재산 뺏기고… 후손들은 가난의 대물림

    후손들 문중 소유 생가 서당서 26년 살아 “의사 부인 노년에 병마와 굶주림에 신음” 형언하기 힘든 곤궁한 사정 신문에 실려 장승원 후손들은 권세 부리고 부귀 누려박상진 의사의 사망과 함께 그 많던 재산은 남의 손으로 넘어갔고 부모와 부인, 후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대대로 겪었다. 일본 밀정들은 유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의사의 아들과 손자들은 일제 치하에서 독립투사, 사상범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취업은 엄두도 내지 못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씨에 따르면 후손들은 의사의 사후 문중 소유인 울산 북구 송정동 생가 옆의 낡은 서당에서 26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가난을 견디기 어려워 1957년 부산으로 이사해 부암동의 방 세 칸짜리 집에서 12식구가 살며 닭을 길러 내다 판 돈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이후 당감동 골짜기로 옮겨 가 살았는데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멀건 죽, 우거지 밥과 개떡을 먹으며 비참하게 살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들의 고생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생존해 있는 의사의 손자며느리(박씨의 어머니) 이갑석 할머니는 “시집온 지 사흘 만에 양식이 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 의사 후손들의 어려운 사정이 부산일보 1961년 3월 5일 자에 실리기도 했다. 의사의 부인 최영백 여사가 당시 81세의 나이에 먹을 양식도 없이 냉방에서 병마와 굶주림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박씨는 날마다 먹어야 했던 죽에 질린 할머니(의사의 며느리)가 1982년 돌아가실 때까지 굶을지라도 죽은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은 박 의사처럼 극한의 가난과 싸우면서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했지만, 일제의 권력에 빌붙었던 사람들은 변함없이 권세를 부리고 부귀를 누렸다. 대한광복회가 처단한 장승원의 후손들도 그랬다. 장승원의 장남 장길상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일본인 자본가들이 은행을 설립할 때 투자해 거부가 된 친일파이자 악덕 지주였다. 둘째 장직상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 인사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셋째 아들 장택상은 미군정 수도경찰청장으로 부임해 친일 경찰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 장승원의 원한을 품고 있었다. 광복회의 재건을 두고 볼 수 없다며 경찰력을 동원해 방해했다는 것이 박씨는 주장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64년 광복회원의 후손들이 충남 천안삼거리공원에 순국한 광복회원 7인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려 했는데 모종의 방해를 받아 중단됐다고 한다. 모종의 방해라는 것이 바로 장택상 일족의 짓임을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장택상이 사망하고 두 달 후인 1969년 10월에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던 것만 봐도 그런 점은 분명해진다. 그런 장택상은 현재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박상진 의사 가문과 장승원 가문의 악연은 계속됐다. 장택상의 딸 장병혜는 1990년대 초 ‘역사를 고발한 자, 그를 고발한다’ 등의 책을 펴내면서 광복회를 떼강도 집단, 박 의사를 파렴치한 살인강도라고 썼다. “무슨 놈의 애국지사가 일본 사람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동포를 죽이는 애국투사가 있겠는가. 박상진을 애국투사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판결문에 기재된 대로 살인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살인교사를 한 일당을 독립투사로 변신시키기 위한 활동”이라고 쓰기도 했다. 뉴라이트 계열의 일부 학자가 안중근 의사 등의 독립투쟁을 테러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등의 책을 발간하기도 한 장병혜는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아시아 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포토] 초헌례 봉행하는 문희상 국회의장

    [포토] 초헌례 봉행하는 문희상 국회의장

    문희상 국회의장이 17일 오후 서울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에서 열린 제80회 순국선열·애국지사 영령 추모제에서 초헌례를 봉행하고 있다. 2019.11.17 연합뉴스
  • 국가보훈처, 김희식 선생 등 독립유공자 136명 포상

    국가보훈처는 오는 17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김희식 선생 등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김 선생은 평범한 농민으로 1919년 4월 1일 경기 안성 원곡면사무소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고초를 겪었다. 보훈처는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중형을 받은 사례”라고 했다. 현 정부 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도 이번에 재평가됐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최영보 선생은 1919년 11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고자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기독교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로 꼽힌다. 건국포장이 추서된 송계월 선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세 차례나 투옥됐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애국장 7, 애족장 24), 건국포장 9명, 대통령표창 96명 등이다.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지익표(95) 선생뿐이며, 여성 포상자는 28명이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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