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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1)중국인 술사 두사총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1)중국인 술사 두사총과 ‘정감록’

    ‘정감록’엔 중국인 술사 두사총(杜師聰)이 썼다는 ‘두사총비결’(杜師聰秘訣)이 포함돼 있다. 외국인의 이름을 빌린 예언서란 점에서 이채를 띤다. 자세히 알고 보면, 때로 중국 술사들이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없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를 따라 중국의 술사들이 많이 왔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조정의 후대를 받았다. 위세를 부리다 못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조선왕조실록’에 그런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다. 뒷날 한국 민중은 그런 몹쓸 중국 술사들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민중들이 칭찬하는 중국 술사도 없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두사총이다. 이상하게도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에는 그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두사총은 민간설화와 함께 민중의 기억 속에 길이 간직되었다. 그가 저술했다는 ‘두사총비결’은 늦어도 19세기 말부터는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에 가면 묘라리(妙羅里)란 마을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이 마을 이름을 처음 지은 이가 바로 두사총이었다고 기억한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온 두사총은 중국 군대를 따라 전국 각지를 누볐다. 한 번은 이곳을 지나게 됐다. 두사총은 이곳의 지세를 자세히 살핀 다음 ‘풍취라대’(風吹羅帶)라고 결론지었다. ●술사 두사총은 명나라군대의 일원 비단 허리띠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이란 이야기다. 비단 띠는 고관대작이나 두르는 귀한 물건이라, 장차 이 마을 사람들은 부귀를 누리게 된다는 풍수예언이었다. 그런 뜻을 새겨 두사총은 마을 이름을 ‘묘라’(妙羅 매우 고운 비단)라고 했다. 훗날 묘라리는 번영을 누렸고, 묘라, 후리, 두무동 등 3개 마을로 발전했다. 따지고 보면, 두사총은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의 일원이었다. 그에겐 조선의 지세를 자세히 염탐해 중국에 보고할 사명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조선에 어마어마한 명당이 있다면 그 맥을 끊어 땅 기운을 약화시킬 임무를 띠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두사총은 그런 일에 종사한 흔적이 없다. 그는 전국을 유람하다 좋은 자리가 나오면 스스럼없이 조선 사람들에게 알려줬다. 조선에 명당이 있다면 그 복은 당연히 조선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이런 두사총의 마음은 한국 민중에게 전해졌고, 민중은 그를 자기들 편으로 믿게 됐다. 두사총의 행적에 관해 많은 설화가 남아 있는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생달리란 마을 입구에 ‘마총’(馬塚)이란 비석이 서 있고, 깊은 곡절이 있는 말 무덤이 있다. 경상도까지 살펴보게 된 두사총은 이곳에서 ‘연주패옥(連珠佩玉)’이라 불리는 대명당을 발견했다. 구슬을 꿰고 옥을 단다는 뜻의 이런 명당에 묘를 두면, 그 집안에 금관자·옥관자를 단 정승 판서 벼슬이 수없이 나온다고 한다. 이 천하제일의 명당을 두사총은 정탁(鄭琢·1526~1605)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정탁은 지조 높은 선비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및 김덕령(金德齡)과 같은 명장을 발탁해 나라를 구하려고 애쓴 문신이었다. 정탁은 자기 한 몸의 안락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두사총은 정탁이야말로 장차 이런 명당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몰래 정탁의 하인에게 그 명당 터를 일러줬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정탁이 세상을 떴다. 정탁의 아들은 아버지가 묻힐 명당을 찾아 하인과 함께 생달리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그들 일행이 생달리 동구 밖에 도착했을 때 불행히도 그 하인은 말 뒷발에 차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아들은 몹시 억울하고 분심이 치밀어 올라 그 자리에서 말을 칼로 베어 죽였다. 생달리의 마총에 관한 전설에서 거듭 확인되듯 중국 술사 두사총은 ‘우리 편’으로 기억되었다. 전설 속의 그는 정탁과 같은 충신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조선 최고의 명당을 조선 최고의 신하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이었는지 누구도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다. 민중은 중국인 술사 두사총을 의리 있고 믿을 만한 지관으로 손꼽았다는 점이다. 두사총은 국적을 떠나 도선 및 무학대사 등과 더불어 한국 민중이 가장 존경하는 풍수의 대가였다. 사실 임진왜란 때는 다수의 중국인 술사들이 전국을 훑고 다녔다. 명나라 군대가 가는 곳마다 그들이 보였고 그 기세도 높았다. 조선 사람들은 중국 술사들에 대해 깊은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들 술사는 아무래도 중국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인 술사들에 대한 불신이 깊어가는 가운데 민중은 그 반대편에 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민중이 보기에 진정 훌륭한 지관이라면 조선의 길지를 조선인들에게 돌려줘야 마땅했다. 위에서 살핀 두사총과 정탁에 관한 설화는 이런 민중의 바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호종단이란 나쁜 중국인 술사 두사총과는 영 딴판인 중국인 술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기억되는 이가 호종단(胡宗旦)이다. 그는 멀리 중국 송나라 때 인물로 제주도에 파견돼 명당기운을 해칠 사명을 띠었다 한다. 당시 세상엔 한 가지 소문이 횡행했다. 제주도엔 13개의 명당이 있어 천하제일의 인재들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주도하리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중국 황제는 무척 당황했다. 황제는 압승지술(壓勝之術 명당기운을 억누르는 기술)의 대가 호종단을 제주도로 보내 13혈(穴)을 찾아 침질을 하게 했다. 비밀리에 호종단은 북제주군 표선면 의귀리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이어 서귀읍 서홍리로 옮겨 혈을 죽이려 했다. 이렇게 13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기(地氣)를 억눌렀다. 제주도 동부지방에는 샘이 별로 없고 서쪽에는 샘물이 많은 편인데, 그것은 호종단의 소행과 관련이 있다 한다. 더러 호종단의 뜻대로 된 곳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개는 천지신명의 방해로 호종단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둘러 일을 끝낸 호종단은 중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가 탄 배가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앞바다의 한 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한 마리 날쌘 매가 배 위로 날아왔고 그러자 사나운 폭풍이 일어나 배를 물속에 가라앉혔다. 호종단은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다. 제주도 사람들의 해석이 재미있다. 호종단의 횡포에 분노한 한라산신이 매로 변해 복수했다는 것이다. 호종단의 귀로를 차단했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고산리 앞바다의 그 섬을 차귀섬(遮歸島)이라 부른다. 호종단의 활동과 죽음에 관한 설화는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 역사상 제주의 풍수지리를 염탐할 목적으로 외부에서 술사들을 파견했을 법은 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제주도의 어느 지역에선 샘물이 메마르고 인재의 배출이 멎었을 리는 없다. 도리어 사태는 그와 반대로 진행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정 지역에서 샘과 인재가 메마르자 그것을 호종단과 같은 악질적인 술사들의 행위 탓으로 돌렸다고 생각된다. 때로 민중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두려움의 근본적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호종단은 민중이 공동의 기억 속에 불러들인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그 점은 민중의 희망을 대변하는 두사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히 선한 것과 극히 악한 것은 역사적 실체가 없는 기억의 창조물일 가능성이 많다. ●망각된 중국 술사 섭정국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당시 국왕 선조는 명나라에 술사의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특별히 방술에 정통한 사람을 보내 주시어 지리를 명백히 살피게 하여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실록, 선조 26년8월8일 기축) 조선 측은 왜란이 터지자 수도 이전을 비롯해 궁궐과 능묘의 이전을 검토 중이었다. 국내엔 이처럼 큰일을 감당할 마땅한 전문 인력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중국 측에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명나라 군대를 따라 조선에 들어온 술사들이 여러 명이었다. 김상(金上), 풍중영(馮仲纓), 왕종성(王宗盛), 양문성(楊文成), 이문통(李文通), 유원외(劉員外 이름은 미상)가 이를테면 그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들 가운데 풍중영과 왕종성은 수도 한양의 풍수를 논하기도 했다.“건국된 지 2백년 만에 재액(災厄)이 있겠으나 그 뒤로는 무사하다.”(선조 26년8월10일 신묘)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1592년 임진년에만 한 차례 난리를 겪을 뿐 운수가 무궁하다는 일종의 덕담이었다. 선조는 그 말에 무척 감격해했다. 중국의 여러 술사들 가운데서 가장 각광을 받은 이는 섭정국(葉靖國)이었다. 그는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와 가까워 왕실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풍수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관여했다. 선조비(宣祖妃)의 능을 정하는 문제에도 깊이 간여했다. 외국인이 조선 왕비의 능묘를 정하는 일에 뛰어들자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설사 섭정국 같은 이가 풍수에 능해 길지를 얻는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쓰는 격국(格局)과는 다르다. 그는 심지어 길가의 낮은 지역과 집 뒤의 조그마한 동산을 가리키며 가장 좋은 곳이라 하니, 무슨 증거로 그 말을 믿겠는가?”(선조33년7월14일 을묘) 본래 풍수지리에 관한 이론은 고대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한·중(韓·中) 두 나라의 풍수 보는 법은 상당히 달랐다. 각 시대마다 새로운 풍수지리설이 등장하기도 했고, 지역마다 유행하는 이론도 달라 서로 일정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김여견(金汝堅), 김덕원(金德元), 송건(宋健) 및 이의신(李懿信), 박상의 등이 술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조선인 술사들의 능력을 불신했다. 결과적으로 섭정국의 활동영역은 하루가 다르게 확대되었다. 서울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는 것까지도 그의 견해를 참고할 정도였다(선조32년4월29일 무인).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게 된 섭정국은 남대문에 벽보를 붙여 명나라의 도망병들을 불러 모아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조선 측에 물자 공급을 독촉하면서 관리를 구타하고, 도망병들을 거느리고 못할 짓이 없었다 한다. 선조는 풍수설(風水說)에 현혹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은 섭정국의 터무니없고 괴이한 주장을 맹신해 왕비를 장사지내는 일정을 몇 달씩이나 지연할 정도였다. 그러나 섭정국은 거만을 피우며 도리어 조선왕조의 관리와 백성들을 마음대로 때리고 짓밟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얼마 후 섭정국은 명나라로 송환되었으며 한국 민중은 그를 깡그리 잊었다. 민중은 사기꾼 같은 섭정국이란 존재를 오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두사총비결’에 담긴 뜻 두사총은 조선의 중앙 정치무대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민중은 그를 무척 친근하게 여겼으므로, 예언서의 저자로 둔갑시켰다. 섭정국의 경우와는 확연히 달랐다. 크게 보아 ‘두사총비결’의 요지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어떤 곳이 길지며, 어느 곳이 흉한 땅인가를 밝혀 놓은 것이다. 이런 논의는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공통되는 점이 대부분이다. 물론 ‘두사총’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주장도 전혀 없지 않다. 길지에 관한 ‘두사총’의 견해를 살펴보면 우선 “태백산과 소백산은 백두산에서 갈려 내려와서 산맥이 나뉘었는데 본래부터 왕성한 기상이 있어 화기(和氣)가 넘쳐흐른다.”고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영천의 백운산, 동주, 용해를 먹을 것이 풍족해 대를 이어 길이 보존할 땅으로 보았다.‘정감록’은 어느 것이나 태백산과 소백산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두사총’ 역시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좀 더 부연하면 ‘정감록’은 백두산에서 시작돼 지리산까지 뻗어나간 백두대간의 주요 명당을 무척 중시한다.‘두사총’도 그런 입장이다.“화산, 가야산, 지리산, 두류산과 삼풍의 네 평야는 곧 어진 정승이나 좋은 장수가 계속해서 나올 곳으로서 땅은 기름지고 풍속은 순후해서 오래 갈수록 더 좋으나 누가 주인이 되겠는가?” 그밖에 영가의 백운산, 화약산, 대아산, 도성산, 명주(강릉), 소양의 기린산과 낭읍의 대미산을 길지로 손꼽은 것도 백두대간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두사총’은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명산을 꽤 중시하는 편이다. 오서산과 성주산, 강화의 마니산, 약수산을 “병화(兵火)가 들어가지 않고, 간사한 것이 침입하지 않는다”고 했다.“태령의 수양산과 곡산의 밝고 아름다움은 재앙과 어지러움이 이르지 않아서 길이 복된 땅이 될 것이오”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 여러 산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에 속하지 않으며 ‘두사총’에만 길지로 나와 있다. 그런데 누구나 길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한다.“덕을 쌓고 오랫동안 어진 일을 한 집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살 수가 있겠는가?” ‘두사총’은 이렇게 반문한다. 이런 자격 검토도 실은 ‘정감록’ 요소요소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메시지다. ‘두사총’의 개성은 흉한 땅에 대한 주장에서 좀더 뚜렷이 부각된다.“호남의 산은 등을 돌리고 달아난 것이 많아서 좋지 못한 일이 많이 생긴다. 이것은 내버려두고 말할 것이 없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호남의 지세를 배역(背逆)으로 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례로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가 그렇다. 그와는 달리 ‘정감록’에는 부안 변산, 무주, 운봉, 해남 등지를 길지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웬일인지 이런 전통을 ‘두사총’은 따르지 않는다. 그 대신 “신안 몇 고을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고 하여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어쨌거나 호남을 푸대접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흔히 길지로 취급하는 경기도 양근의 용문산 등에 대해서도 ‘두사총’의 평가는 몹시 부정적이다.“양근 용문산과 유양산은 안으로 세 가지 안목의 정교한 것이 없으면서도 오로지 깊고 궁벽한 것을 숭상하여, 이 때문에 사람들이 다투어 여기에 산다. 그러나 용문산 기운은 삼각산에 빼앗겼으니 이는 아마도 헛된 꽃이요 죽은 굴혈일 것이다. 게다가 산 안의 형세도 돌아서서 버리고 끌고 나갔다. 지각 있는 군자라면 내 말이 없더라도 알 것인즉 삼가고 삼가라.” 인용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용문산으로 들어와 피란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것은 19세기 말의 사정이었다. 앞에서 말하기를,‘두사총’은 충청도와 경기도 일원의 새 길지를 언급한 점에 한 가지 특색이 발견된다고 했다. 그에 덧붙여 19세기 말 경기도 용문산 일대의 형편도 사실적으로 기술돼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두사총’은 19세기 말 경기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서 저술되고 읽혔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것도 임진강 동쪽, 철령 이남을 이상향으로 상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으로 봐야 옳겠다.“임진강 서쪽과 철령 북쪽은 무엇을 족히 의논하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서북 지역은 극히 흉한 땅이란 얘기다. 굳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주장이다. 어찌 보면 새로운 듯하면서도 ‘두사총’은 ‘정감록’의 상궤를 그리 멀리 이탈하지는 못한 것이 틀림없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관광객 때문에 못살겠소”

    |베를린 연합|교황 베네딕토 16세가 태어난 집에 살고 있는 주인이 관광객들의 등쌀로 정상 생활이 불가능하다며 교황 생가를 매물로 내놓았다고 23일 독일 언론이 보도했다. 6년 전 이 집을 사서 보수한 뒤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집주인 클라우디아 단들은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에 오른 뒤 연일 낯선 사람들이 초인종을 누르거나 창문 너머로 집안을 유심히 엿본다고 말했다.단들은 교황의 생가를 직접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신앙심과 호기심은 이해하지만 늘 집안을 관찰하는 관광객들 때문에 아이들이 밖에 나가기를 부담스러워 한다고 호소했다.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인근 작은 마을인 마르크틀 암 인 중심가에 있는 이 집은 교황이 1927년 4월16일 태어나서 2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단들은 매물 가격에 대해서 밝히기를 거부했으나 인근의 시세에 따르면 이집은 16만유로 정도라고 독일 언론은 전했다. 교황이 추기경 시절 타던 폴크스바겐 골프 중고차는 시세가 1만유로 이하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경매에서 19만유로에 팔린 바 있다.
  • “고참 물푸는데 그냥 가냐”에 앙심

    “고참 물푸는데 그냥 가냐”에 앙심

    경기도 연천 최전방 경계초소(GP) 총기 난사사건의 재수사를 담당해 온 ‘전방 GP 총기사고 수사본부’가 23일 ‘속성으로’ 최종 결과물을 내놓았다. 큰 틀에서는 종전과 큰 차이가 없지만, 김모 일병이 범행을 결심한 시점과 범행에 걸린 시간 등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9시간전 범행 최종결심…수류탄 투척·난사에 2~3분 수사 결과에 따르면 김 일병은 범행 6일 전인 지난 13일 “GP 소대원들을 모두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범행 전날인 18일 저녁 5시쯤 취사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신모 상병으로부터 “고참이 물을 푸는데 그냥 가냐.”며 질책을 받자 범행을 실행에 옮기게 됐다. 군 당국은 2차 합동조사단 발표 때는 범행 이틀 전 최종 결심을 했다고 발표했다. 수류탄 투척부터 소총 난사까지 실질적인 ‘범행’에 걸린 시간은 7분이 아니라 2∼3분에 불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 일병은 GP장을 포함해 모든 부대원을 살해한 뒤 수류탄과 유류 등을 이용해 GP 시설물을 폭파한 뒤 민통선 이남으로 도주해 은둔생활을 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월북은 고려하지 않았다. 평소 자신에게 잘해 준 선임병까지 살해하려 했던 것도 증거 인멸과 도주를 위해서였다. 수사본부는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선임병들의 욕설이 있긴 했지만 김 일병의 성격에 큰 무게를 뒀다. 보통 사람들은 친근감 등의 표시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내성적 성격인 김 일병은 심각하고 충격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소대원들도 나름대로 대응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류탄이 폭발한 뒤 내무반에 있던 병력 중 5명은 내무반과 붙어 있는 부소초장 방으로 은신했지만 12명은 사상자에 대한 응급조치와 함께 나름대로 대응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특히 상병 등 선임병들은 다급한 목소리로 ‘침착’을 외치는 등 상황 파악과 대응을 위해 불을 켠 것으로 조사됐다. 내무반 복도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이모 상병과 차모 상병도 대응에 나섰다가 총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수사본부측은 밝혔다. ●GP 모든부대원 살해뒤 은둔 계획 군 당국의 이날 발표는 재수사 차원의 수사본부가 꾸려진 지 불과 이틀 만에 나온 ‘속성’ 결과물이다. 군 당국은 그동안 수사를 대부분 마치고도 유가족들의 반발이 워낙 커지자, 발표 시점과 형식을 놓고 고심을 계속해 왔다. 사실상 재수사를 한다며 종전 수사진을 확대 개편한 ‘전방 GP 총기사고 수사본부’를 발족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분위기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특히 군 당국은 이날 수사 발표도 이번 사건의 수사본부장(대령)보다 상급자이자 육군의 수사 책임자인 헌병감(준장)을 내세웠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총기난사 사건 시간대별 재구성

    ▲2005.1.21∼3.31. 전 근무지인 ○○○GP 근무 김 일병, 정 모·김 모 상병으로부터 멱살을 잡힌 채 “개새끼”라는 욕설 들음.▲5.11.○○○GP투입 이후 김 일병, 신 모 상병 등으로부터 사사건건 질책과 “미쳤냐, 돌았냐, 개새끼”라는 욕설을 듣는 등 선임병 10여명으로부터 잦은 질책당함.▲6.13 김 일병, 선임병들로부터 잦은 질책 및 욕설 등 인격모욕에 앙심 품고 “GP소대원들 모두 죽여야겠다.”고 결심.▲6.18.15:00께 농구시합시 “응원을 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 상병으로부터 질책.▲17:00께 취사장 청소시 또 다시 질책당하자 범행 결심.▲18:00시께 동료 천 모 일병에게 “수류탄 까고 총으로 쏴죽이고 싶다.”고 말함.▲6.19.02:30 김 일병, 후방초소 근무 중 후번 근무자를 깨운다는 명분으로 이병삼 상병에게 보고 뒤 내무실 이동(수류탄 1발 및 각각 25발들이 탄창 2개 휴대).▲02:33 김 일병, 내무실 도착, 근거리 관물대에 있는 정모 상병의 K-1 소총을 절취해 화장실로 잠입.▲02:34 김 일병, 화장실에서 소총에 탄창 장전, 조정간을 연발로 위치, 수류탄은 방탄복 좌측 주머니에 휴대 후 내무실로 이동.▲02:36 김 일병, 수류탄을 이모 상병을 향해 투척 후 내무실을 이탈해 상황 근무자를 살해할 목적으로 상황실로 이동.▲02:39 김 일병, 체력단련장에서 나오는 소초장 김종명 중위에게 난사, 사살 후 상황실로 이동, 상황실에서 나오는 신임소대장 이모 중위를 향해 난사. 이 중위는 상황실로 다시 들어가 화를 면함. 후임 GP장 이 중위, 상황 확인 차 상황실 이탈시 피격(피해 없음). 상황실 복귀 후 연대 상황실에 “나도 공격을 받음. 피ㆍ아 구분 불가” 보고.▲02:41 김 일병, 취사장에서 조정웅 상병 다리를 난사하고 쓰러진 피해자를 확인 사살.▲02:43 김 일병, 피격으로 소란한 내무실로 이동. 병력들을 향해 25발 전량을 난사한 뒤 전방 초소로 이동. 같은 시각,1대대 인사장교,1대대 의무지대 상황병에게 출동 지시.▲02:45 김 일병, 전방초소 이강찬 상병과 마주쳐 사격했으나 실탄 고갈로 미수, 이 상병이 “너 왜 여기 왔느냐.”고 묻자 “이병삼 상병이 가 있으라 해서 왔다.”고 허위 답변 후 원위치 하라는 지시에 근무지였던 초소로 복귀.▲02:50 신임소대장이 “전투복 입은 사람을 봤다.”며 전투복 입은 병사 5명을 집합시킨 후 무장해제해 관측장교실로 집결조치. 이후 이들 5명이 대기하던 중 이강찬 상병과 이병삼 상병의 상황 설명이 모순되자 김 일병을 추궁해 자백받고 체포.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4) ‘원조’ 예언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4) ‘원조’ 예언자들

    언제 누가 무슨 예언으로 세상을 움직였을까.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예언자의 계보도 많이 달라졌다.20세기 초엔 손병희를 비롯한 신종교단체 지도자들이 ‘정감록’을 근거로 ‘후천개벽’을 예언했다. 그에 앞서 조선 후기에는 풍수지리와 점술에 밝은 ‘술사(術士)’들이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들은 정권에서 소외된 이른바 ‘원국지사(怨國之士)’들과 연합해 새 왕조의 창립을 꿈꾸었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언서 ‘정감록’을 민간에 유포시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좀더 다양한 부류의 예언자들이 발견된다. 우선 고려 후기에는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다가 사기꾼으로 단죄된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고려시대만 해도 국가는 정치적 예언을 독점 관리하였으며, 이를 위해 천문과 지리 등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술관(術官)을 따로 설치했다. 국가가 예언을 제도적으로 독점하는 경향은 이미 고대로부터 비롯됐다. 우리와 이웃한 고대 중국은 물론, 서양문명의 뿌리로 알려진 로마제국에서도 정치적 예언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정치적 예언은 허가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만큼 고대사회에서 예언의 역할은 중요했다. 한국 고대의 예언자들은 크게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왕, 무당, 일관 및 승려가 그들인데, 이들은 예언의 원조였다.‘정감록’의 가장 깊숙한 뿌리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성한 왕들의 예언능력 고대엔 왕들이 직접 예언자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신라 선덕여왕이 그랬다.‘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인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줄거리만 간단히 언급하겠다.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 떼가 모여 여러 날 동안 울어댔다. 이것을 보고 여왕은 여근곡이란 곳에 백제 군사가 잠복해 있는 줄을 알아냈다. 개구리는 눈이 툭 불거져 있어 성난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병사로 해석했다. 개구리가 울던 옥문은 곧 여자의 생식기인데 여자는 음이요, 빛깔로 말하면 흰색, 방향으로는 서쪽이다. 여왕은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짐작했다. 그런데 남근이란 여근 속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라 여근곡의 적군은 물리치기가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선덕여왕의 예언은 사물의 형태, 이름, 빛깔이 당시 사람들이 공유한 상징체계의 틀 안에서 이뤄졌단 점이 주목된다. 역사가들은 이 설화를 예로 들어 선덕여왕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든가, 또는 여왕의 권위가 만만치 않았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고대의 왕은 신성시 됐는데, 왕의 초월적 능력에 대한 기대가 그 이면에 자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 고대의 진시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신성한 능력의 소유자로 간주돼, 사시사철 천지의 순조로운 운행을 알리는 달력을 공포할 권리가 있었다. 심지어 고대 동양에서는 신기한 동식물의 출현, 별자리의 움직임을 비롯해 갖가지 천문 현상, 바람과 비 등 일체의 자연 현상에서 하늘의 뜻을 발견하고자 했다. 자연환경의 사소한 변화에도 한 나라의 정치적 공과가 반영되어 있다고 믿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에 관한 기사가 수없이 많다. 왕은 이 모든 현상의 이면에 암시된 하늘의 뜻을 정확히 읽고 적절히 대응해야만 됐다. 그것이 하늘과 백성에 대한 왕의 의무였다. 이런 점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한국 고대엔 왕이 흉년이나 자연재해에 대해 직접 책임을 져야 됐다. 부여에선 여차하면 왕을 바꾸기까지 했다고 한다. 부여 왕은 정치적 수장이자 최고의 사제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부여 사람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하늘의 의지가 절대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 모양으로 길흉을 점칠 정도였다. 일종의 동물 점(占)이 애용되었던 것인데, 그 방법이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갑골점(甲骨占)과 비슷해 보인다. 고대에는 아직 세속적인 지식과 종교적인 신앙심이나, 정치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왕은 최고 권력자이자 종교적으로 신성한 존재로서 하늘의 뜻을 정확히 읽어내야 된다는 사명을 떠안게 됐다. 심한 경우, 예언과 주술의 능력이 부족한 왕은 퇴출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상적인 왕은 선덕여왕처럼 예지 능력을 구비했어야 됐다. ●궁중의 무당 또는 일관들, 예언 전문가로 국정에 간여해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정치와 종교는 점차 분리되었고, 정치권력이 종교적 권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왕 노릇을 하는 데는 여전히 정치적 예언능력이 요구되었지만, 왕이 직접 예언자여야 할 필요는 사라졌다. 왕은 궁궐 안에 예언자들을 고용했고, 그것으로 족했다.‘삼국사기’에 보면 이미 백제의 초창기인 온조왕 때,‘일관(日官)’이란 전문가가 측근으로 기용돼 있었다. 어느 한 해엔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도성에 사는 어떤 백성의 집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 머리는 하나였으나 몸은 둘이었다. 이런 변고(?)에 대해 일관이 해석을 내놨다.“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크게 세력을 일으키게 될 징조입니다. 소가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하게 될 징조입니다.” 예언은 맞아들었다. 얼마 후 온조왕은 진한과 마한을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일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다. 고구려에서는 일자(日者)라고도 하였다. 그는 천체의 이상현상을 예언으로 풀이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예컨대 149년(고구려 차대왕 4년) 5월에 다섯 별(歲星 또는 木星,熒惑 또는 火星,太白 또는 金星,辰星 또는 水星 그리고 鎭星 또는 土星)이 동쪽 하늘에 모였다. 일자가 보기에 흉한 조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의 마음에 거슬리면 공연히 화를 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임금의 덕”이 있다는 증거라고 거짓으로 둘러댔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늦어도 2세기에는 천문에 정통한 직업적인 예언자들이 고구려 왕실에 존재했다. 일자는 이를테면 전문직 관리로 왕을 보좌했다. 고구려 왕실에는 또 다른 부류의 예언자들도 있었다. 역시 고구려 차대왕 때의 기록이 참고가 된다.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마침 하얀 여우가 보이기에 활을 쏘았다. 그러나 맞히지 못해 떨떠름해했다. 왕은 ‘무사(巫師)’에게 이 일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스승 사(師)’ 자를 붙여 무사라 일컫는 데서 짐작되듯, 최상급의 무당이었다. 무사는 그 일이 아주 나쁜 징조라고 말했다. 여우는 요사스러운 짐승인데 하물며 그 빛깔이 하얗다면 더욱 괴이한 일이라 했다.“임금님은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여 덕을 닦고 잘못을 반성하십시오. 만일 임금님이 덕을 닦으시면, 화가 변하여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렇게 간언하는 무사를 죽여 버렸다. 나라 안의 최고 무당으로서 예언자는 자연 현상에 은밀하게 담긴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알아맞혀야 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돼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무당은 자연 현상의 예언적 의미를 캐낼 때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의 정치적 개입은 위의 이야기가 상징하듯 상당한 위험이 뒤따랐다. 우리에게 삼국통일의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유신만 해도 본래는 고구려의 무당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전생에 고구려의 무당 추남이었다 한다. 추남은 천지자연의 여러 현상을 예언으로 풀이하는데 능했다. 뿐만 아니라 점술에도 밝았다. 하지만 고구려 왕비의 뜻을 거스른 바람에 무고하게 죽음을 당했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적국 신라의 귀족 가문에 환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삼국유사’에 보면, 고구려의 연개소문 역시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적국의 장수로 환생하였다고 했다. 환생에 얽힌 전설이 사실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점은 추남이든 또는 차대왕 때의 무사든 국가의 운명을 바로 예언해야 될 사명을 띤 무당들이 왕의 곁에 포진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과 별도로 천문에 밝은 일자들 역시 예언을 임무로 삼았다. ●명산대천과 시조 사당의 제관들, 국운을 예언하다 7세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얼핏 무당과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한 의미로는 구별되는 새로운 부류의 예언자들이 등장했다. 사제 또는 제관(祭官) 즉, 나라의 중요한 제사를 담당하던 종교인들이 예언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고구려 말기인 보장왕 때 일이다.654년(보장왕 13년) 4월, 마령 고개 위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했다. 마령의 신인이란 산신령을 가리킨 것이 거의 틀림없다. 신라의 경우 김유신의 전기를 읽어보면 삼산(三山)의 여신들이 국운을 수호하는 신으로 언급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마령도 국가적으로 중시되던 명산이며, 그 곳의 산신이라면 특별한 신앙대상이 아닐까 한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마령 산신의 예언을 청취한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일 수가 없다. 그는 산신령의 제사를 전담하는 사제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딱히 고구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삼국에는 저마다 국가적인 제사의 대상이 정해져 있었다. 유명한 산천과 국가의 시조묘(始祖廟) 등이 신앙 대상이었다. 이들 종교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따로 있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만 해도 시조 주몽(朱蒙)의 사당이 설치돼 있었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는 마침 예언자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 도움이 된다. 보장왕 때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이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 아래까지 쳐들어 왔다. 당나라 군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달아 성을 공격했다. 당 태종까지 친히 합세해 요동성을 수십 겹으로 에워싸 북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요동성 주민들의 사기는 저하됐고 성은 함락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주몽 사당을 관리하는 사람이 나섰다.“우리가 모시는 주몽 사당에는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 있고 날카로운 창이 있다. 전해오는 말로 이것은 전연(前燕·249∼370) 때 하늘이 내려 보냈다고 한다. 지금 적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위급하다. 미녀를 단장하여 주몽 신에게 아내(‘婦神’)로 바치자.” 그의 제안대로 미녀를 바친 다음 제관이 다시 말했다. 주몽이 기뻐하시므로 성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란 이야기였다. 그러나 요동성은 바로 함락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는 주몽 사당의 제관을 단순히 무당(‘巫’)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닐 성싶다. 요동성의 함락에 관한 내용은 고구려의 적국인 당나라 측의 사료를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 사당을 보호하고 관리할 ‘사제’ 또는 ‘제관’이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쯤에서 요점을 간추려보자. 첫째,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은 사후에 국방의 요충인 요동성을 수호하는 신으로 간주돼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비슷한 예로 신라의 문무왕도 죽어 국가의 수호신이 되었다. 문무왕과는 달리 주몽은 성곽의 수호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주몽 사당은 후대 중국 성황(城隍)의 원형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주몽 신에게 젊은 여성이 희생으로 바쳐졌다는 점이다. 사람을 산 채로 무덤에 부장품으로 삼는 순장(殉葬) 풍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종교적 희생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인용한 사료에서 확인되듯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 사당을 관리하는 제관이 있었고, 그는 수호신 주몽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바로 이 점이 지금 우리에겐 가장 중요하다. 백제의 경우에도 명산대천은 국가적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중요했던 만큼 국가의 멸망을 예언하는 징조가 가장 분명하게 포착된 장소이기도 했다. 백제가 멸망하기 몇 해 전부터 기이한 현상들이 자주 목격됐다. 빨간 말이 북악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와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은 사찰을 여러 날 동안 맴돌다 죽었다는 것이다. 북악이라는 명칭에서도 짐작되듯 그 산은 백제의 오악 가운데 하나였다. 명산 중의 명산으로 백제가 국가적 신앙대상으로 삼았던 북악 산신이 나라의 멸망을 알리는 징조였다면 의미심장하다. 하필 ‘말’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상징적이다. 앞서 예로 든 고구려의 산신도 마령 즉 ‘말 고개’에 출현했던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에 말은 전쟁 또는 군신(軍神)의 상징이었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 백제의 우물, 강물 그리고 바다에도 재앙의 조짐이 역력했다. 서해안 해변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어찌나 많던지 백성들이 아무리 먹어도 남았다고 했다. 생초진(生草津)엔 거대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됐다고 한다. 수도 사비성의 서남쪽으로 흐르는 사비하(금강)에는 큰 물고기가 죽어 떠올랐는데, 길이가 3척이나 됐다. 이어서,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게 물들었다. 도성의 우물물도 핏빛으로 변했다. 모두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따져보면 우물물이나 강물이 붉게 변했다는 이야기는 큰 물고기나 거대한 여성이 폐사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대 한국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물속에는 물의 신이든가 아니면 용이 살고 있었다. 그 형상은 특출한 사람의 모습일 수도 있었고 물고기 또는 지렁이와 같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물의 신은 우선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등장한다. 주몽의 외할아버지 하백이 바로 그렇다. 작은 물고기들은 물의 신(水神,河伯)의 신하로 인식됐다. 적에게 쫓기던 주몽이 무사히 강물을 건너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물고기와 자라들 덕분이었다. 만일 주몽이 수신의 외손이 아니었더라면, 수중 생물들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웠다는 것이 신화의 논리다. 백제 왕실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였던 만큼 명산 못지않게 대천(大川)도 중요했다. 수도 사비성을 감싸 흐르던 사비하, 생초진 그리고 서해 바다의 수신은 모두 백제의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물론 수호신들의 죽음에 대한 관찰은 비현실적이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현상을 목격하고 보고하고 기록한 것은 보통사람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언자인 제관들의 고유한 권리요, 또한 의무였다. ●호국사찰의 승려들, 불안한 미래를 보다 삼국에 불교가 전파된 뒤로 각 나라엔 호국사찰(護國寺刹)이 들어섰다. 기존의 산신과 수신에 더하여 부처님의 가호가 나라의 융성을 보장해주리란 믿음이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 조짐이 호국사찰에도 나타났다. 백제의 경우,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의 탑이 벼락을 맞는가 하면,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왕흥사(王興寺)에선 배의 돛과 같이 생긴 것이 강물을 따라 절간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목격됐다. 왕흥사 승려들은 이런 모습을 함께 지켜봤다 한다. 정치적 예언은 본래 신성한 왕과 무당들의 독점적 영역이었으나, 역사 속에 새로 등장한 일관(日官)들, 불가(佛家)의 스님들에게도 예언의 권능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런 고대 예언자들의 직업적 계보가 이어져, 조선후기엔 술사(術士)와 스님들이 정감록의 생산과 유통을 주로 담당하게 된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사설] 軍 기강·병영문화 총체적 점검하라

    경기도 연천 최전방 초소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은 범인인 김 일병이 선임병들의 언어폭력에 앙심을 품고 저지른 계획적인 범행이라고 육군 합동조사단이 밝혔다.8명이나 되는 목숨을 앗아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정상상태가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원인이 단순히 언어폭력에 의한 계획적 살인이라고 보기는 석연치 않다. 더욱이 총기를 휴대하고 근무하는 특수상황에서 사병관리나 근무관리가 오죽 허술했으면 이런 사건이 벌어졌겠는가. 이번 사건은 군이 총체적 부실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근무기강해이는 물론 병영문화의 문제점, 사병관리의 허술함 등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군은 인분사건이나 총기사고, 자살사건 등이 발생할 때마다 대책을 세운다고 부산을 떨었지만 결국은 또 이런 대형사고를 방치하고 말았다. 그동안 군이 도대체 뭘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도 재발대책을 마련한다고 군 수뇌부들이 나서 요란만 떨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면 또다시 이런 참극이 빚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사병이나 부모들이 안심할 수 있는 병영문화 개선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 먼저 군은 신세대 사병들의 문화에 걸맞은 병영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군내 열악한 인권상황이나 언어폭력, 왕따를 예방하는 제도적 장치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지금도 복무부적격 사병들은 월 2회 심사해서 격리하는 제도가 있지만 이번 사건으로 볼 때 제대로 심사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여느 때처럼 책임을 묻는다, 대책을 세운다며 호들갑만 떨 것이 아니다. 사병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상황에서 근무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는 현장위주의 근본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3~5차례 범행 암시했다”

    “3~5차례 범행 암시했다”

    지난 19일 새벽 경기도 연천군 최전방 경계초소(GP)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사건은 사전에 막거나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지만 군 당국의 미숙한 대응으로 화를 키운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조사해온 육군 총기사고 합동조사단은 20일 “평소 선임병들로부터 언어폭력에 시달려온 김 일병이 최근 초·중학교 동창이자 같은 부대 동기인 천모 일병에게 ‘수류탄을 까고, 총으로 (부대원을) 쏴 죽이고 싶다.’는 얘기를 3∼5차례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일병의 이같은 얘기는 상부에는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푸념이나 장난으로 흘려들었기 때문이다. 군 당국이 김 일병의 범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기회를 놓친 셈이 됐다. 부대측은 김 일병이 전입 시부터 소심한 성격으로 동료간 화합을 이루지 못해 GP 근무를 제외시키거나 이른바 ‘관심사병’으로 분류해 특별관리했어야 했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말만 듣고 관심사병으로 분류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김 일병의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당시 상황실에는 후임 GP장 이모 중위와 상황병, 야간 열상관측장비(TOD) 운용병 등 모두 4명이 소총을 갖고 있었으나 김 일병의 총격을 받은 뒤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상황 발생부터 20여분 가까이 아군에 의한 총격인지 아니면 북한군의 소행인지도 분간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시간적인 여유를 갖게 된 김 일병이 내무반에 다시 찾아가 난사를 하는 바람에 피해자가 더욱 늘어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박철수(준장) 합동조사단장도 “상황실에 있던 후임 GP장이 좀더 적극적으로 초동조치를 취했다면 피해가 줄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합조단은 이날 발표에서 김 일병이 범행 이틀 전인 지난 17일 평소 선임병들로부터 잦은 질책과 욕설 등 인격 모독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선임병을 살해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특히 김 일병은 범행 당일 내무반에서 수류탄을 던진 뒤 취사장에서 마주친 조모 상병에게 총기를 난사했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자 다시 찾아가 확인사살하기도 했다고 발표했다. 합조단은 이번 조사에서 해당 부대측이 GP 경계지침서를 임의로 변경하고 탄약지급 절차 등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등 경계근무가 문란한 사실도 찾아냈다. 육군은 지휘책임을 물어 해당 부대 및 상급 부대 관련자들을 관련 규정에 따라 엄중 문책할 방침이다. 육군은 이번 사건으로 해당 부대원들의 GP 근무가 어렵다고 판단, 이날 병력을 전원 교체 투입했다. 한편 이날 사고 현장을 방문한 희생장병 유족들은 이번 총기 난사가 선임병들의 언어폭력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장병들 면담 과정에서 확인했다고 주장, 범행 동기를 둘러싸고 향후 논란도 예상된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캄보디아 인질극주범 “한국인 폭행때문”

    |시엠레압 연합|16일 캄보디아 국제학교에서 발생한 인질극은 주범이 자신을 폭행한 한국인 고용주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의된 것으로 밝혀졌다. 시엠 레압주 헌병 부사령관인 프락 칸톤은 17일 23살의 주범은 두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 위해 자신을 고용한 한국인 고용주로부터 폭행당한 데 앙심을 품고 범행을 모의했다고 밝혔다. 칸톤 부사령관의 말에 따르면 이 범인은 한국인 고용주가 최근 화를 내면서 얼굴을 때리고 해고해 칸달주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진술했다. 범인은 매일 한국인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권총을 구입, 고향 친구 3명에게 외국인들과 캄보디아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국제학교를 급습해 돈을 탈취하자고 범행을 제의했다. 사건 당일 범인은 국제학교로 가 2명의 한국인 어린이들을 찾아 살해하려 했으나 찾지 못해 당초 의도는 물거품이 됐다. 범인으로부터 인질극은 캐나다 국적의 두살난 사내아이 1명이 울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지고 6시간 만에 종료됐다.
  • 파월 100m 9.77 세계新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자메이카의 신예 스프린터 아사파 파월(22)이 9초77의 질주로 3년 만에 육상 남자 100m 세계신기록을 갈아 치웠다. 파월은 15일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아테네 치클리티리아 슈퍼그랑프리대회 남자부 100m에서 9초77에 결승선을 끊어 팀 몽고메리(미국)가 보유한 세계기록(9초78)을 0.01초 앞당겼다. 몽고메리의 기록은 지난 2002년 9월14일 프랑스 파리에서 세운 것으로,2년9개월 만에 세계기록이 경신됐다. 파월은 이날 레이스에서 스타트부터 경쟁자들에 앞서 뛰쳐 나간 뒤 쾌속질주로 2위 아지즈 자카리(9초99)를 여유있게 제치고 우승했다. 스타트 반응 시간은 0.150초. 레이스 순간 바람은 기록 인증 범위(초속 2m) 내인 초속 1.6m였다. 파월의 기록은 레이스 직후에는 몽고메리의 기록과 같은 9초78로 계측됐지만 몇분 뒤 공식기록으로 계시판에 9초77이 찍혔고 곧바로 세계신기록으로 인정됐다. 이로써 파월은 모리스 그린, 팀 몽고메리(이상 미국)를 뒷전으로 밀어내며 전 세계에 새로운 ‘인간탄환’이 등장했음을 알렸다. 파월은 지난해 아테네올림픽 직전 레이스에서 그린을 잇따라 제압하고 그랑프리대회에서 3연속 우승을 이뤄내며 국제 육상계에 혜성처럼 등장했지만 정작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딴 저스틴 게이틀린(미국)에 밀려 5위에 그쳤다. 하지만 올들어서 시즌 최고인 9초84,9초85를 연달아 찍어 기록경신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목사의 아들로 “아버지의 신앙심이 나를 이끌었다.”고 말하는 그는 형제 5명이 모두 육상 선수일 정도로 스피드를 타고 난 스프린터다. 형 도노반 파월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400m 계주팀에서 뛰었다. 파월은 지난 99년 형을 따라 미국 텍사스로 건너와 훈련을 받았고, 자메이카 출신 코치 스티븐 프랜시스의 조련을 받으며 최고의 스프린터로 성장했다. 그의 우상은 ‘캔자스시티의 혜성’ 그린. 파월은 “언제나 그린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운동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 주는 스승이었다.”고 말할 정도. 국제육상연맹(IAAF)의 전체 세계랭킹에서 1위에 오른 파월은 나이로 볼 때 당분간 전성기를 구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꼭꼭 숨어라 과학 보인다”

    ‘극과 극은 통한다.’미술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온 계기로는 16세기 원근법 도입,19세기 카메라 발명,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 과학이론의 발달,20세기 후반 컴퓨터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즉 인간 감성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미술작품이 이성의 산물인 과학기술과 맞물려 진보를 거듭한 셈이다. 세계적인 명작 속에 녹아있는 과학을 들여다본다. ●기하학을 모르면 화가도 아니다 15∼16세기 르네상스시대 초기에 활동한 화가 지오토의 ‘죄없는 학살’은 3차원적 깊이감, 즉 원근법을 살린 최초의 작품이다. 기존의 미술작품은 대다수 문맹자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돼 오로지 신에 대한 신앙심을 표현했을 뿐, 사실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오토의 원근법은 초보적인 수준이었으며 자로 잰 듯한 수학적 원근법은 마사초에 의해 제시됐다. 이후 르네상스시대에는 원근법이나 비례법 등 기하학의 원리를 모르고는 화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크게 미쳤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이같은 기하학적 원리를 절묘하게 활용, 예수와 12명의 제자를 효과적으로 배치해 구성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또 ‘모나리자’에서는 기존의 정밀한 선을 활용한 원근법 대신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처리해 원근감을 표현하는 공기원근법이 처음으로 사용됐다. 이 때문에 모나리자의 신비감이 더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원리가 미술작품 전체를 지배한 것은 아니다. 수학적 원근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프란체스카의 ‘성스러운 대화’의 경우 그림 중간에 위치한 달걀이 원근법에 맞지 않게 크게 그려졌다. 이는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됐다는 성스러운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뜻으로 풀이된다. 즉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때론 과학을 희생시키기도 한 것이다. ●미술가의 눈은 곧 과학자의 눈 17세기 바로크시대에 접어들면서 화가들은 선과 색채 대신 빛과 어둠이 주는 광학적 효과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바로크의 거장 카라바조는 ‘의심하는 도마’ 등에서 빛을 극적으로 활용해 인간의 심리상태까지 묘사했다. 이어 램브란트의 ‘야간순찰’도 작품에 역동감을 불러오는 매개체로 빛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은 이 작품이 명작으로 손꼽히지만 당시에는 작품 외적인 요소 때문에 램브란트가 곤란을 겪기도 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순찰대원들의 얼굴은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한 후원자들이었으나 그림이 완성된 후 얼굴이 어둠에 가려 제대로 드러나지 않자 후원금을 돌려달라는 소동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모나리자’라는 평가를 받는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 소녀’도 빛이 들어오면서 뺨과 콧날의 선을 투명하게 처리해 해체함으로써 특별한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이처럼 빛을 포함한 외부세계에 대한 세심한 관찰은 18세기말 영국 풍경화에서 꽃을 피운다. 자연의 현장감을 살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과학자의 눈을 빌려 대기의 흐름까지 그림에 표현했다. 영국 풍경화의 대부 컨스터블과 영국 최고의 국민화가로 추앙받는 터너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과학이 어려워지면 미술도 어려워진다 그러나 19세기 카메라의 발명은 이같은 화풍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며 동시에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현대미술을 낳는 씨앗이 됐다. 마네의 ‘오페라 홀에서의 가면무도회’에서는 16세기 이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던 원근법이 파괴됐다. 이는 2차원적인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표현할 수 없다는 회의에서 출발, 미술의 본질을 추구하겠다는 의도였다. 모네는 ‘노적가리 연작’ 등의 작품을 통해 빛에 의해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모습을 그려냈다. 모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태와 색채가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한 장소에 14개의 캔버스를 놓고 동시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 세잔의 ‘생 박토아르 산’에서는 한쪽에서만 들어오는 빛, 한 지점에서만 바라보는 시점 등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미술에서 고정관념에 대한 의문과 파괴 현상은 20세기 초반 각종 과학이론이 발표되면서 더욱 증가했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달리의 ‘기억의 고집’에서 등장하는 늘어진 모양의 시계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영향을 미쳤다. 즉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시간의 속성을 보다 유연하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또 입체주의 화가인 파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X-레이의 등장으로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해지자 사물을 기하학적으로 해체, 표현한 것이다. 특히 이처럼 과학의 영향을 받는 미술은 20세기 후반 컴퓨터 등 이미지를 시각화할 수 있는 기술이 보급되면서 과학과 미술의 경계가 사라지기도 했다. 광학적인 착시효과를 이용한 옵티컬아트의 경우 과학이 곧 미술이라는 사조도 만들어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보면 아인슈타인처럼 새로운 과학적 비전을 제시하는 과학자나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이 앞으로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 도움말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국민대 미술학부 겸임교수)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세상에 이런일이] 해GO? 앙심품GO 가스틀GO

    대전 동부경찰서는 10일 해고를 한 데 앙심을 품고 자신이 일했던 카센터를 찾아가 LP가스를 몰래 틀어놓고 달아난 윤모(31)씨에 대해 가스 전기 등 방류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윤씨는 지난 7일 오후 8시30분쯤 대전 동구 용운동 자신이 종업원으로 일했던 박모(45)씨의 카센터를 찾아가 내실 주방에 연결돼 있던 LP가스 호스를 뽑고 밸브를 열어 가스를 틀어놓고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업주 박씨와 다른 종업원들이 가스 냄새가 심하게 나자 신고했다.”면서 “카센터 옆에는 주유소가 있어 누군가 담배를 피우거나 형광등을 켰더라면 대형 폭발사고가 날 뻔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경찰에서 “일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주인이 해고한 뒤 나 때문에 숙소를 새로 고친 비용 70만원을 물라고 했다.”면서 “짐을 찾으러 왔다가 홧김에 가스를 틀어 놓았다.”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당신이 美대통령이면 어떻게 하겠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북한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담은 수기의 저자이며 탈북 후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는 강철환(37)씨를 백악관 집무실로 초청,40분간 환담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은 강씨의 책 ‘평양의 수족관-북한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10년’을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말했으며 이 책을 읽으면서 북한의 인권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초청 배경을 설명했다. 당초 일본에서 살던 강씨 가족은 북한으로 이주했다가 할아버지가 정치범으로 몰려 9세때부터 함께 10년간 강제수용소에서 살아야 했다. 이후 부인, 딸과 함께 북한을 탈출해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강씨는 부시 대통령이 “당신이 미국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첫질문을 해서 “중국을 설득해 탈북자들의 강제북송을 막고 두번째로 북한의 수용소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핵문제는 이 문제가 풀린 뒤 해결하겠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은 “공감한다.”며 “북한인권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주변사람들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강씨는 부시 대통령이 상당히 신앙심이 깊고, 굶주리는 북한주민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연합
  • 심야의 수류탄 소동 14시간

    대구판 김희로(金嬉老) 사건의 도화선은? 푼푼이 모은 돈 8만원 양공주된 누이에 주고 아버지와 이복형제들이 자기와 한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단 하나뿐인 사랑하는 누이동생을 학대 끝에 미군 위안부로 전락시켰다고 앙심을 품은 사나이. 이 파월병사는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은 채 전 가족을 몰살시키고 자신도 폭사하겠다고 약 14시간 동안 버텨 50여 명의 군경이 출동하고 인근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등 큰 소동이 대구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67년 10월 군에 입대, 지난 2월 파월된 김용태(金龍泰)(25)상병은 8개월만인 지난 10월 2일 휴가로 귀국, 대구시 서구 비산동 2구 19 아버지 김점준(金点俊)(63)씨를 찾았다. 가족 모두가 무사한데 서울로 식모살이간 누이동생 옥선(玉仙)(22)양이 보이질 않아 서자의 설움이 복받쳐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이 무슨 변일까? 식모살이 하는 줄만 알았던 누이동생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외인주택에서 미군 위안부 노릇을 하지 않는가. 두 남매는 부둥켜 안고 자신들의 신세를 이렇게 모질게 꺾어버린 이복형제들을 원망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누이동생 결혼 때 값진 혼수감을 사주려고 푼푼이 모아 갖고 온 10여만원 중 푼돈 쓸 2만여원만 남기고 몽땅 털어주었다. 좋은 신랑감 만나서 호강하며 잘 살려니 생각했던 부푼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김상병은 치솟아 오르는「복수심」을 억누를 길 없어 발길을 대구로 돌렸다. 생모는 25년 전 이웃 과부 6세 때부터 집떠나 유랑 김상병과 옥선양은 아버지 김씨와 지금 군위군 효령면으로 개가한 것으로 알려진 이모(55)여인 사이에 태어났다. 25년 전 김씨가 대구시 태평로3가(당시 금정2정목)에 살 때 이웃 과부 이여인과 눈이 맞아 동거생활을 시작, 두 남매를 낳고 19년 전 헤어져 세 살 난 옥선양만 데리고 떠났다. 여섯 살 난 김상병은 어머니 품을 떠나 큰 엄마 안학봉(安學鳳)씨와 이복 네 형과 함께 살아왔다. 8세 때 인지국민학교에 입학, 2학년 때 중퇴, 충북 영동군 상촌면 유곡리 아들 없는 고모부 허달(許達)씨 집으로 옮겨 살았다. 거기서 18세 때 귀가, 멍게장수, 품팔이 등을 하다가 군에 입대. 김상병은 이복형들 밑에서 기가 꺾여 남과 다툴 줄 모르나 어딘가 야무진 데가 있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이웃 사람들은 얘기한다. 세 살 때 어머니 따라 떠났던 옥선양은 7년 전 15세 때 귀가, 완대동 모 직조공장에 취직하여 한 달 일하고 월급을 받아 아버지 김씨에게 몽땅 넘겨주곤 서울에서 금은방을 경영한다는 이부동복(異父同腹) 오빠인 강씨에게 간다고 집을 나간 후 이때까지 소식이 없다가 지난 9월 30일께 이복맏오빠 영조(永祚)씨에게 부탁, 호적초본 2통을 서울로 부쳐달라 하며 떠났다는 것. 대구에 되돌아온 김상병은 가족몰살과 함께 자폭한다는 끔찍한 결심을 간직한 채 기회를 노렸다. 설움과 울분이 뒤범벅된 착잡한 심정으로 기회를 잡을 때까지 매일 술로 지새워 지에서는 이틀 밤 밖에 자지 않았다. 기회는 좀처럼 잡히질 않았다. 월남으로 떠날 13일이 다가와 마음이 초조해졌다. 10월 11일 밤 8시쯤 시장에서 오징어, 무, 술 등을 사서 짐꾼을 시켜 집으로 보냈다. 짐꾼편으로 가족「파티」를 열겠으니 전 가족을 모아달라고 아버지에게 전했다. 떠나기에 앞서 가족「파티」를 열고 일을 저지를 계획이었다. 이날 밤 12시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갔다. 결혼 후 달성동에서 별거하는 맏형을 제외하고는 아버지를 비롯, 큰어머니, 둘째형, 셋째형, 넷째형, 이복누이동생 등 6명의 가족이 모여 있었다. 술을 한 잔씩 나눈 뒤 김상병은『우리 형제끼리 의논할 일이 있으니 아버지 어머니는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구했다. 김상병의 심상찮은 태도를 눈치챈 아버지 김씨는『내가 있는 데서 할 말 못할 것 있느냐』하며 비켜주지 않고『너 태도가 이상한데 그러면 못쓴다』고 꾸짖었다. 그러자 갑자기 왼쪽 안주머니 속에서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고『터뜨리면 3초만에 끝장난다』고 소리쳤다. 『왜? 내 동생을 공부 안시키고 양공주로 만들었느냐? 다같이 죽자』고 소리소리 질렀다. 이때가 상오 1시쯤. 이러한 위협 속에 아버지 김씨는 빠져나와 관할 북비산 파출소에 신고했다. 그동안 방안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던 이복형제들은『술 받으러 간다』『변소에 간다』『물 떠온다』등 핑계로 간신히 빠져나와 위기를 모면. 신고에 접한 경찰은 16헌병대로 연락, 출동한 헌병들과 함께 김상병의 자폭을 우려, 접근하지 않고 날이 밝을 때까지 집을 포위, 집 주위 모든 골목길을 차단, 통행을 막았다. 사타구니에 낀 수류탄은 2차 수면제작전에 뺏어 아침 6시쯤 김일수 2군헌병부장, 김덕희 대구경찰서장 등이 김상병과 접선,『수류탄을 터뜨리지 않고 나오면 처벌하지 않을 것은 물론 모든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김상병은『가족을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터뜨린다』고 위협, 계속 수류탄을 수건에 싼 채 사타구니에 끼고 버티었다. 아침 7시쯤 세든 옆방 정순자 아주머니가 사다 준「사이다」한 병을 이불을 덮어쓰고 그 속에서 마셨다. 왼쪽 손에 수류탄을 쥐고 안전「핀」에 엄지손가락을 낀 채, 상오 10시 30분이 좀 지나 김상병과 가장 친하다는 이웃 김종성(金鍾聲)씨와 이부동복형 강씨가 설득을 위해 위협을 무릅쓰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이때 김상병은 큰방에서 건넌방으로 자리를 옮기고 막걸리를 사달라고 요구했다. 김·강양씨는 기지를 써 막걸리 한 사발에다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하루치를 넣어 갖다 주었다. 잠들게 한 뒤 수류탄을 뺏을 계획이었다. 1차 계획은 실패, 하오 1시쯤 2차 계획이 진행, 조금 뒤 김상병은 졸기 시작, 때를 놓칠세라 김·강양씨와 16헌병대 송윤호 중위가 숨을 죽여가며 방안으로 들어가 잠든 것을 확인, 김씨는 수류탄을 쥔 김상병의 왼쪽 손목 맥을 힘껏 쥐고 강씨는 사타구니 속에 넣은 수류탄 쥔 주먹을 살며시 끌어냈다. 한편 송중위는 김상병의 뒤로 돌아 양팔을 요동 못하게 힘껏 안았다. 위기일발 - 이 긴장된 순간 용감한 세 사람은 김상병의 손가락 하나 하나를 제쳐 안전「핀」이 빠진 수류탄을 탈취, 잡는데 성공했다. 이때가 약 14시간만인 하오 1시 50분, 인산 인해를 이룬 군중 속에서 함성이 터져나오고 모든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대구 = 최종하(崔鍾夏) 기자> [ 선데이서울 68년 10/20 제1권 제5호 ]
  • [한국을 빛낼 중견기업] 풍성주택 고담일 회장

    [한국을 빛낼 중견기업] 풍성주택 고담일 회장

    “주택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입니다. 환경과 더불어 사는 가장 아름다운 집을 짓겠습니다.” 최근 수도권에서 100% 분양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풍성주택 고담일(67) 회장은 “포근하고 편안한 고향집을 짓는다는 마음으로 아파트사업을 펼칠 것”이라면서 “변화와 혁신을 통해 제2의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20년간 지어온 아파트로는 미래 수요를 따라갈 수 없다.”면서 “집은 가족들의 공동생활 터전이요, 편안한 휴식 공간이기에 쾌적하고 짜임새 있게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수도권에서 ‘신미주(新美住)’브랜드로 잇따라 100% 분양 신화를 이끌어가는 풍성주택이 업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대기업이 짓는 아파트도 아니고, 텔레비전 광고를 싹쓸이하다시피하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는 더더욱 아니라서 분양 성공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풍성주택 아파트 건설 현장을 방문해 보면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신용으로 집을 짓는다 고담일 회장은 덩치를 키우기 위해 사업을 무리하게 펼치지 않는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스타일이다. 그는 “욕심을 냈다면 아마 큰 재벌이 되었을 것”이라면서 “20여년 동안 은행 융자 연장 한번 받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은행빚이 없는 회사다. 주위에서 사업확장 권유와 유혹을 많이 받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입주자에게 내건 약속은 어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지킨다. 외환위기를 맞아 고 회장도 자금난에 빠졌지만 계약대로 말끔하게 공사를 끝냈다. 분양 당시 약속은 사운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신용을 쌓고 분수에 맞게 사업을 추진하던 그도 대기업 위주의 금융 관행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가 많았다. 은행이 작은 회사라고 무조건 돈줄을 죌 때는 원망도 많이 했다. 사업장을 담보로 제공했음에도 돈을 빌려주지 않자 은행장을 찾아가 다투기도 했다. ●돈 되는 땅을 사둬라 아파트사업의 성공 열쇠는 빼어난 입지를 고르는 일이다. 아무리 설계가 뛰어나고 분양가가 싸더라도 변두리나 접근이 어려운 곳은 분양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고 회장이 고른 땅을 가보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입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20년 동안 땅을 보고 다녔으니 이제는 ‘고수’가 됐다. 그는 땅을 살 때 맨 먼저 분양성을 따진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지도 살핀다. 쾌적한 환경을 보장할 수 없는 땅은 아예 쳐다 보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업장이 경부고속도로 동탄 오산리 아파트 현장. 경부고속도로 기흥과 오산 인터체인지 중간 서쪽에 있다. 고 회장은 직감적으로 동탄 신도시와 가까워 신도시 후광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속도로에서 환히 보이는 곳이므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미주 아파트 브랜드를 알리는데 이보다 좋은 땅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을 잠재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홍보 효과 또한 만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억원의 광고비를 쏟아부은 것보다 효과가 더 컸다. 인근 동탄 신도시에서 대기업들과 맞붙어 결코 뒤지지 않았던 것도 오산리 현장에 나부낀 신미주 아파트 브랜드 홍보효과가 크게 보탬이 됐다. 택지지구 땅이 아니고는 자체사업 부지를 마련하는데만 2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 땅을 살 때 한꺼번에 사들여야지, 시간을 끌다 보면 같은 지역 땅이라도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만약 건설업체가 땅을 사들인다는 소문이 나면 지주들이 막무가내식의 버티기 작전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풍성주택은 주택사업의 원자재인 땅을 사는데 있어 모두가 전문가이다. ●차별화된 설계가 대박신화 불러 왔다 땅을 사고 나면 자체 직원들로 구성된 1차 설계팀이 부산해진다. 상품을 어떻게 만들어야할지 고민하는 동시에 유행하는 아파트 모델을 정리하고 다른 업체 모델하우스에 나가 ‘커닝’도 한다. 설계 방향이 서면 설계사무소와 함께 본격적인 상품 만들기에 나선다. 회사와 설계사무소의 아이디어를 종합, 교감을 구한 뒤 최종 평면을 결정한다. 고 회장은 “아파트 평면 설계는 소비자 욕구와 편리함을 우선해야 한다.”면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지 못해 완성된 설계를 뜯어 고친 것이 수십 번은 된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설계비를 아끼지 않는 회사로 잘 알려졌다. 지난 3월 동탄신도시에 분양한 풍성 신미주아파트는 생활하기 편리하고 짜임새 있는 공간 구조로 모델하우스 방문객들을 홀딱 반하게 했다. 인테리어도 최고 수준급이다. 특히 소비자들이 여러 곳의 모델하우스를 둘러보기 때문에 금방 인테리어 차별화를 확인할 수 있다. 소문이 퍼져 이제는 동종 업체에서 인테리어 설계를 베껴 가기도 한다고 고 회장은 자랑한다. ●친환경 아파트로 승부건다 요즘은 소비자들의 아파트 선택 결정과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건강이다. 풍성주택이 앞으로 짓는 모든 사업에 ‘웰빙 아파트’를 접목하기로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동탄 신미주아파트의 경우 단지 앞 중앙공원 조망권을 최대한 살렸다. 전방 500m까지 센트럴파크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아파트 단지에는 자동차가 없도록 설계했다. 대신 그 자리를 공원과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확보했다. 단지 녹지율이 무려 52.7%에 이른다.1층은 필로티와 개인정원이 조성된다. 동(棟)간 거리가 최대 68m에 이른다. 빼곡한 아파트라는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다. 실내는 더욱 꼼꼼하게 설계한다. 층고를 기존 아파트보다 10∼58㎝ 높여 쾌적성을 살리고, 새 집 증후군을 없애기 위해 환경친화적인 자재를 사용한다. 습기를 빨아들이는 제오라이트 자연석 시공, 유해가스를 실외로 배출하는 인공지능 공기정화시스템 설치 등 웰빙아파트 기능을 살리도록 배려했다. 결국 수요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청약·계약 100%를 기록했다. ●현장을 지켜라 동탄신도시 아파트 분양 현장.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이 뒤섞여 아파트를 분양하는 자리였다. 마치 아파트 전시장과 흡사했다. 이 가운데 풍성주택 모델하우스도 끼여 있었다. 브랜드가 잘 알려진 대기업 모델하우스와 나란히 설치됐다. 그동안 여러 현장에서 아파트를 분양, 성공했지만 이번은 사정이 달랐다. 전반적인 주택경기 침체에 소비자들이 판교 신도시를 노리고 청약을 꺼릴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사실 몇몇 대기업조차 분양을 미룰 정도로 ‘시계’는 흐렸다. 하지만 풍성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장을 고 회장이 직접 지휘했다. 모델하우스를 찾은 주부들을 안내하고 평면을 설명했다. 모델하우스에서 소비자들에게 자사 아파트를 설명하는 그의 모습이 세련됨이나 유창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진실이 배어 있었다. 건설현장을 찾아 근로자들을 격려하고 안전을 살피는 일이 그에게는 일상 생활이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고 회장은 누구 전남 신안군 도초면 섬동네에서 태어나 20년 동안 주택건설 한 우물만 파온 주택전문업체 최고경영자.67세. 욕심을 내지 않는 사업가로 유명하다. 정작 자신은 20년이 넘은 서울 금천구 시흥동 관악산 아래 단독주택에서 산다. 쥐들이 달음박질하면서 돌아다닐 정도로 낡은 집이다. 얼마전 수리했다. 이사를 못하는 이유는 살고 있는 집이 정이 들기도 했지만 워낙 등산을 좋아해 산 아래에 그대로 눌러 살고 있다. 하루 2시간씩 꼭 등산을 한다. 목사를 꿈꾸고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을 정도로 신앙심이 돈독하다.‘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도를 밟아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누구와 대화하든지 겸손 그 자체다. 고 회장의 속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그가 줏대없다고 흉을 보기도 하지만 사실은 외유내강형이다. 지난해 대한주택건설협회 회장을 맡은 뒤 주택산업 발전에 관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6000여 회원사를 아우르며 이끌고 있다. 고영성 사장이 아들이다. 경영학을 전공했다. 경영 수업을 쌓은 뒤 고 회장의 사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며느리는 디자인을 전공한 재원. 이 회사 설계·디자인팀에서 아파트 상품 개발에 관여하고 있다. ■ 풍성주택은 어떤 기업 지난 1986년에 세워진 주택전문업체. 첫 사업으로 경기도 군포에서 90가구를 지어 팔았다. 처음에는 설움도 많았다. 중소업체들에 주택사업 면허를 내주지 않아 대기업 면허를 빌려 사업을 했다.87년 중소업체들에게도 아파트 시공권이 주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펼쳤다. 지금까지 공급한 아파트가 8000가구에 이른다. 주택산업이 호황일 때도, 다른 업체들이 발빠른 투자로 회사를 키울 때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지난해만 3000여가구를 분양했다. 연간 매출액은 1500억∼2000억원정도다. 사업장은 서울·수원 등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새로 개발한 ‘신미주’아파트 브랜드도 점차 소비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길섶에서] 효도 관광/이용원 논설위원

    내년이면 어머니가 팔순이 되신다. 팔순 생신을 어떻게 치를지 형제들이 그동안 의논해 왔다. 그 계획 가운데 하나가 ‘성지 순례’를 보내드리는 거였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두터운 분이어서,‘신앙의 동지’인 맏며느리와 함께 성지순례를 하는 게 소원이었다. 지난 어버이날 다 모인 자리에서 성지 순례를 다녀오시는 게 어떤지 여쭤 보았다. 의외로 “싫다.”는 말씀이 쉽사리 나왔다. 그동안 논의에 끼지 않은 여동생과 형수도 어머니의 성지 순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강조했다. 연세가 높아 장기간 해외여행을 하시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아들·사위들은, 어머니가 연배에 비해 활동적이신 것만 생각했지 그 연세의 활동력이 일정 기준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앙코르 와트를 취재하던 때가 생각났다. 평원 지대인 앙코르 와트의 중심부에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 하나 있다. 그런데도 백발의 서양인 부부는 현지 어린이에게 팁을 주고 등을 밀게 하며 그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효도관광에도 때가 있다. 부모님께서 너무 연세가 드셔 해외여행을 가기 어렵게 되면 그도 후회로 남을 것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세상에 이런일이]인분 뿌리니 분풀려?

    한 성격(?)하는 남자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화풀이를 하다 쇠고랑을 찼다. 지난달 25일 광주 동부경찰서는 자신의 차에 주차금지 스티커를 붙인 데 격분해 이웃 집에 인분을 뿌린 오모(66·운전사)씨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구속입건했다. 경찰은 오씨가 지난달 24일 오전 1시쯤 광주시 동구 학동 이모(58)씨 소유의 모 원룸 건물에 들어가 건물 입구와 복도, 엘리베이터 등에 각각 인분을 뿌렸다고 밝혔다. 집주인이 전날 자신의 차량 앞 유리창에 주차금지 스티커를 붙였기 때문이었다. 오씨는 경찰에서 “주차한 지 20여분 뒤 나와 보니 강력본드로 붙인 A4용지 크기의 스티커가 차 앞 유리에 붙어 있었다.”면서 “아무리 스티커를 떼어봐도 떨어지지 않아 홧김에 인분을 뿌렸다.”고 말했다. 오씨는 원룸 입구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에 찍히는 바람에 덜미를 잡혔다. 한편 경북 포항북부경찰서는 27일 세무조사에 앙심을 품고 석유통을 들고 세무서에 찾아가 불을 지르겠다며 난동을 부린 혐의로 포항 모 식당 주인 김모(43)씨를 조사중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부처님 오신날’ 청소년 행사 풍성

    ‘불교와 문화, 젊은이가 만난다.’ 불교조계종 조계사(주지 원담 스님)가 부처님 오신날(5월15일)을 맞아 다양한 봉축행사를 마련했다. 특히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행사가 다채롭다. 먼저 청소년 불자들의 신앙심 고취를 위한 프로그램인 ‘제8회 전국 청소년 사경공모전’이 다음달 30일까지 진행된다. 지난 10일 예선을 치른 ‘제17회 어린이 연꽃노래잔치’는 다음달 1일 동국대 중강당에서 본선이 열린다. 오는 30일 불교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리는 시낭송·시화전도 가족이 함께 볼 만하다. 다음달 2∼24일에는 불교를 소재로 한 사진들이 한자리에 모인 ‘봉축기념 사진전’도 열린다. 같은달 5일에는 어린이날을 맞아 부처님 그리기를 주제로 한 ‘전국 어린이 부처님 그림그리기 대회’가 부산 범어사에서 진행된다. 같은날 서울 인사동에서는 불교퍼즐·다도체험·페이스페인팅 등을 즐길 수 있는 ‘거리포교 마당’행사가 열린다. 이어 5월8일에는 서울 우정국로 문화마당에서 ‘청소년 음악놀이 페스티벌’과 초·중·고·대학생들이 참여하는 ‘전국웅변대회’가 동시에 개최된다. 청소년들이 전통예술 실력을 뽐내는 ‘제18회 청소년 전통예술 경연대회’(5월29일)를 끝으로 청소년관련 행사는 막을 내린다. 전통적인 연례 봉축행사도 성대하게 열린다. 지난 22일 시청앞 점등식 및 연등음악회를 시작으로 전통등 전시회(5월6∼15일), 연등놀이(5월7일), 연등축제(5월8일), 봉축 법요식(5월15일) 등은 놓칠 수 없는 행사다. 특히 하루종일 축제가 열리는 5월8일에는 전통 문화공연과 먹거리장터, 나눔마당 등이 펼쳐지는 ‘불교문화마당’과 함께 10만여개의 연등불이 서울 밤거리를 아름답게 수놓는 제등행렬이 펼쳐진다. 아울러 ‘천성산 살리기’의 주역인 지율 스님이 직접 만든 자수 작품과 각종 공예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이와 함께 강원도 고성·양양지역의 산불 피해 이재민들을 위한 성금모금도 이뤄진다. 특히 이달 30일에는 이재민을 위한 ‘3000배 철야정진기도’도 열린다. 다음달 31일까지 열리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희망의 등 밝히기’행사도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군부대·교도소 등에 선물을 전달하는 ‘자비의 선물’행사도 5월 말까지 계속된다. 소년소녀 가장 및 불우청소년 지원을 위한 사랑바자회(5월1일), 북한어린이 미술용품 보내기 행사(5월9∼17일) 등도 눈길을 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21일 TV 하이라이트]

    ●어여쁜 당신(KBS1 오후 8시25분) 외출해서 돌아온 옥진은 고모가 인영 대신 김치 담그는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한다. 김치문제로 기준과 옥진이 냉전에 들어간 것 때문에 속상해하던 인영은 기준의 휴대전화에 전송된 희주의 동영상을 보게 된다. 한편 인철과 영화를 보기로 한 미정은 갑자기 나타난 선미 때문에 당황한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 오후 8시55분) 동네에서 사납기로 유명한 개 똘똘이. 그런데 똘똘이를 벌벌 떨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타조알’. 타조알을 무서워하게 된 사연은? 중국에서 머리카락을 모으는 엽기적인 여인을 만나본다. 그녀의 방에는 7년 간 모은 머리카락이 무려 17만개나 있다는데…. ●글로벌 코리안(YTN 오후 1시25분) 호주에서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채용 박람회가 열렸다. 이번 대규모 채용 박람회는 다른 이민자 사회와 비교해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과 호주 기업 등 30여개 업체가 참여한 이번 행사에서는 채용뿐만 아니라 각종 직업 훈련과 채용과정에 대한 상담도 함께 진행했다. ●EBS스페셜(EBS 오후 10시) E=mc1/3이라는 상대성이론을 우리는 자주 들어왔지만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기만 한 상대성이론을 다양한 실험을 통해 쉽고 재밌게 보여준다. 또 삶 속에 응용되고 있는 GPS보물찾기 현장을 따라가 보고, 핵융합 발전소를 찾아가 생활 주변에 숨어 있는 상대성이론을 보여준다. ●굳세어라 금순아(MBC 오후 8시20분) 시완은 가족들에게 성란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시완은 차마 성란의 이혼경력을 말하지 못한다. 은주가 우울한 모습으로 들어서자 영옥은 은주에게 재희와의 결혼을 밀어주겠다고 한다. 한편 미용실에서 퇴근하는 금순을 발견한 재희는 금순에게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한다. ●해신(KBS2 오후 9시55분) 김명이 신임시중 자리에 오르자마자 장보고를 황도로 소환한다는 명을 내리자, 장보고 일행은 김명이 지난 청해 방문중 장보고와 벌인 검투시합에서 패하고 망신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그를 소환하는 거라 짐작하고 난감해한다. 장보고는 고민 끝에 소환에 응하기로 결심하고 창겸과 함께 황도로 떠난다.
  • 법정서 고소인 둔기폭행

    딸이 구속기소된 것에 앙심을 품고 70대 아버지가 고소한 사람을 재판정에서 둔기로 때린 사건이 일어났다. 9일 오후 3시 서울중앙지법 523호 법정에서 형사12단독 김동아 판사는 1999년 자신이 일하던 출판사에서 1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지난해 10월 구속기소된 조모(34)씨의 재판을 심리하고 있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방청석에 앉아 있던 조씨의 아버지(72)는 갑자기 숨겨온 길이 20㎝의 흉기로 앞 줄에 앉아 있던 윤모(74)씨의 머리를 3차례 가격했다. 윤씨는 조씨가 일하던 출판사 사장으로 조씨를 고소한 사람이다. 머리에 상처를 입은 윤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조씨는 현장에서 체포됐으며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한다는 방침이다. 이번 사건은 법원의 방호·보안시스템이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소란이 벌어진 법원종합청사는 법정에 한 사람의 경위만 배치돼 있었다. 법원에는 금속탐지기가 설치돼 있지만 조씨는 금속탐지기가 없는 통로로 법정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청사 방호 및 보안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빠르면 올 상반기에 전자식 신분증으로 민원인이 방문하고자 하는 사무실에만 출입할 수 있도록 하고, 내년에는 흉기 소지자의 법정 출입을 막도록 검색대와 CCTV를 청사와 법정까지 확대 설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불새’ 이은주 자살…‘주홍글씨’ 촬영후 우울증

    ‘불새’ 이은주 자살…‘주홍글씨’ 촬영후 우울증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드라마 ‘불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등에 출연했던 인기 영화배우 겸 탤런트 이은주씨가 유서를 남기고 25살의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자살동기는 ‘알몸연기의 부담감, 우울증, 돈’등 명확지가 않아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영화처럼 마감한 삶 22일 오후 1시10분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모 아파트 이씨의 집 드레스룸에서 이씨가 이동식 옷걸이에 벨트로 목매 숨져 있는 것을 이씨의 오빠(28)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이씨는 이날 오전 6시까지 함께 사는 오빠, 어머니와 얘기를 하던 중 자신의 방에 들어갔으며, 오후 1시가 넘도록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긴 오빠가 이씨 방에 들어갔다가 드레스룸에서 숨진 이씨를 발견했다. 이씨의 아버지는 별거상태로 군산에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발견 당시 이씨는 운동복 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을 하고 있었고, 침대 위에서 연필깎이칼과 혈흔이 발견됐으며, 이씨의 손목에는 자살하려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씨의 시신은 분당 서울대병원에 안치됐으며 자살이 확실해 부검없이 검안만 했다. 빈소가 마련된 병원에는 이날 밤 단짝인 가수 바다가 가장 먼저 다녀갔으며 탤런트 황인성, 김소연 등 동료연예인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발인은 24일. ●왜 자살했을까 이씨는 “엄마, 미안해. 사랑해.”라는 혈서와 “일이 너무 하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돈이 있음 좋은데…돈을 벌고 싶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특히 이씨는 유서에서 “혼자 버티고 이겨보려 했는데…. 일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맨날 기도했는데 무모한 바람이었어. 일년 전이면 원래 나처럼 살 수 있는데 말야….”라며 불안전한 심리 상태를 보였다. 또 “근본적인…원인…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왜 내게 그런 책을 줬는지. 왜 강요를 했는지.”라는 원망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주변에서는 ‘책’이라는 단어는 영화계에서 시나리오를 일컫는 말로 ‘주홍글씨’출연과 이씨의 자살을 연관지었다. 또 “아빠 얼굴을 그저께 봐서 다행이야.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 때문에 참 힘든 세상이야. 나도 돈이 싫어.”라고 해 돈과 자신의 죽음이 관련이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와 관련,‘불새’의 제작사 초록뱀미디어랩의 한 관계자는 “이은주는 최근 CF도 두세편 계약해 돈도 벌 만큼 번 것으로 알고 있다.”며 “유서속 소망과 현실의 이은주가 너무 괴리감이 있어 자살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이씨가 지난해 10월 개봉된 영화 ‘주홍글씨’를 촬영하면서 알몸연기 등 노출연기를 한 것 때문에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데다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조사결과 이씨는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이달초 분당 서울대 병원을 찾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는 지난 3일 신경정신과 문진에서 “만사가 귀찮고 기억력, 집중력이 떨어지고 밥맛이 없다. 하루에 1시간밖에 못잤다.”고 상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평소 주변 사람들이 “신앙심이 두터운 배우라는 칭찬을 했는데 독실한 크리스천이 자살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며 허탈해했다. 성남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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