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아이젠하워(미국의 대통령문화:10)
◎한국전 휴전 등 성사… ‘국제평화의 전도사’/후르시초프 방미 실현… 냉전해소 노력/동남아조약기구·IAEA창설 결정적 역할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1952년 34대 미 대통령선거전에 나선 공화당 후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장군의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오직 이 한마디 였다.
2차대전의 영웅으로 이미 탁월한 지도력이 입증된 아이젠하워 후보를 온국민들은 풀 네임보다도 애칭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그리고 그들은 빨강·하양·파랑 바탕에 이 글귀가 쓰인 캠페인 뱃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이같은 아이젠하워의 치솟는 국민적 인기는 일리노이 주지사 출신인 민주당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의 풍부한 행정력과 지식,재치,세련된 언변,화려한 공약 등을 두차례나 무용지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선자 신분 한국전선 시찰
선거결과는 선거인단수 442대 89라는 아이젠하워의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났다.더우기 공화당에 상하양원의 압승까지 안겨주어 루즈벨트트루만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집권20년의 종지부와 함께 새로운 공화당 시대의 개막을 가져왔다.
20세기 들어 대공황2차대전냉전한국전쟁의 사슬에 얽매여 한시도 긴장을 풀수 없던 미국민들은 하루빨리 정상상태로의 복귀를 열망했고 아이젠하워는 이같은 기대를 충족시켜줄 최적의 인물로 추대됐던 것이다.아이젠하워는 또 39세의 젊은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런닝메이트로택함으로써 62세로 상대적으로 고령이던 자신의 나이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당시 선거에서 최대의 이슈는 수많은 미군 사상자를 낸채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한국전쟁의 종식과 관련된 것이었다.아이젠하워는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선거가 끝난후 당선자 신분으로 아직 포화가 멎지 않고 있던 한국전선을 방문,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였다.
취임연설에서는 “국제평화 유지를 위해 모든 국가와 협력하겠다”고 강조,평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의 염원에 답했다.실제로 그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성사시켰으며 미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했다.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역설,국제원자력위원회(IAEA)의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소련과의 대화도 시도했으며 장차 군산복합체 대두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방만한 정부 예산의 감축을 위해 국방비의 절감,감세,정부사업의 축소,각종 규제의 완화 등 연방정부의 활동을 대폭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어갔다.그리고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대통령보좌관을 선임,그에게 상당부분의 권한을 위임하고 자신은 세세한 문제에는 관여치 않는 당파를 초월한 정치를 추구했다.
미시시피강 서부 대평원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인구3천명의 캔자스주 애빌린은 아이젠하워의 도시로 유명하다.도시 중앙에 위치한 아이젠하워센터에는 중앙에 그의 동상을 중심으로 성장기의 집과 묘소,박물관,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어 커다란 역사공원을 이루고 있다.1898년부터 46년까지 아이젠하워 패밀리가 살았던 사저는 캔자스의 평범한 시골집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
센터 입구에 ‘명산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교회형태로 생긴 그의 묘소는 경건의 장소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박물관은 2차대전및 냉전시대의 전쟁박물관으로,도서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8년간은 물론 그가 군사령관으로 남긴 것까지 모든 자료의 집대성을 이루고 있다.특히 아이젠하워와 맥아더가 주고받은 편지들도 보관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편지에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항상 ‘장군님’이라고 존경의 호칭을 사용했고 맥아더는 ‘사랑하는 아이크’라고 적고 있는등 두사람의 인간적인 관계는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대륙횡단 철도가 지나기 때문에 텍사스등지에서 동부로 수송을 위해 수백만마리의 젖소들만 몰려들던 황량한 시골마을인 이 도시는 오늘날 인구 3천명의 소도읍으로 성장했으며 아이젠하워를 키워낸 자부심에 가득차 있다.
19세기에 출생한 마지막 미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1890년 텍사스 데니슨에서 출생했으나 어려서 부친이 애빌린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초,중·고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니는 등 애빌린을 실질적인 고향으로 간주해왔다.낙농업에 종사하던 부친의 사업부진으로 대학진학은 엄두에 두지도 못하던 아이젠하워는 21세때 뒤늦게 웨스트포인트에 진학,군생활을 출발하게 됐다.
○흑백차별엔 단호한 입장
1차대전때 군훈련교관을 역임하고 파나마운하 주둔군으로 활약하던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0년초 필리핀 주둔군사령관 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부터 였다.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는 조지 마샬 참모총장에 의해 전쟁성의 태평양전략 담당관에 임명돼 탁월한 기획능력을 발휘했다.마침내 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연합군측의 승리를 이끌어낸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게 됐다.
전쟁이 끝난후 군을 떠나 콜럼비아대학 총장으로 잠시 외도한 그는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51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으로 다시 군에 복귀했다.52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때 트루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따라 공화,민주 양당에서 그에게 대통령 후보를 타진해 왔으나 그는 공화당을 택했고 압승을 거두게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재임중 사회복지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담당할 보건부,교육부,복지부 등의 부서를 창설했다.특히 흑백차별 문제에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57년 아칸사스주 리틀록의 백인 고등학교에서 흑인들의 입학을 거부하고 주지사가 민병대까지 동원,이를 옹호했다.이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천명의 낙하산부대를 투입,흑인학생들을 호위 등교케하고 한학기 동안 학교를 순시케 하는 등 단호히 맞서 마침내 차별론자들을 굴복시켰다.
대외정책은 존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위임시켜 행하게 했으며 동남아조약기구(SEATO),를 창설하는 등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또 후르시초프의 방미를 실현시키고 소련에 영공 공개와 공중 군사설비 조사에 관한협정 제안등 냉전해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는 남북전쟁의 격전지 였던 펜실바니아주 게티즈버그에 농장을 짓고 퇴임후 그림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오늘날 애빌린 못지 않게 게티즈버그의 아이젠하워 하우스에도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으며 이곳에는 링컨 워싱턴 등 인물화와 각종 풍경화 등 그가 남긴 수십점의 작품들이 진열돼 예술가대통령으로서의 푸근함 또한 느끼게 하고 있다.
◎다니엘 홀트 아이젠하워 도서관장/“정치인·군인 모두 성공적 삶”/“62년 도서관 개관… 220만점 소장 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아이젠하워 도서관의 마틴 티즐리 관장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두가지 생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친 훌륭한 대통령으로 국민적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의 하나로 소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센터 중앙에 있는 그의 동상에는 ‘평화의 챔피온’이라는 글귀가 써있다.
그는 전쟁에 피곤해있던 미국민들에게 평화를 심어주려 노력했다.
도서관의 연혁및 활동은.
▲대통령 도서관으로는 네번째로 1962년 개관됐으며 초기 120점 이던 소장 자료가 이제 220만점으로 증가됐다.주로 2차대전과 관련된 것들이 많으며 400여명의 등록 학자들을 비롯 수많은 연구자들이 찾고 있다.특히 NATO 콜렉션은 미국내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돼 있다.
지역에의 기여는 어떤 것이 있는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탄생일과 2차대전* 각종 기념일 등에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고 있으며 애빌린 주민들의 참여도는 매우 높다.특히 묘소가 있는명상의 집은 주민들의 경건의 장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국립문서보관소에서 모든 운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로서의 참여가 없다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국민들과의 관계는.
▲TV시대가 개막될 무렵이어서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들과 접촉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볼수 있다.특히 그는 골프와 낚시 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대통령과 아놀드 파머와의 골프경기는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