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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상진 의쟁투위장 검거

    의료계 폐업을 주도한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대한의사협회의권쟁취투쟁위원회 신상진(申相珍·44) 위원장이 수배 44일만인 17일 오후 경찰에 붙잡혔다. 신씨는 이날 오후 6시40분쯤 서울 송파구 신천동 속칭 ‘먹자골목’에서 잠복중이던 경찰 차량에 쫓겨 차를 몰고 2㎞쯤 골목안으로 달아나다 검거됐다.신씨는 혼자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지하철 2호선 삼성역을 지나고 있었다. 신씨는 서울 용산경찰서에서 1차 조사를 받은 뒤 검찰로 압송됐다. 신씨의 신병을 넘겨 받은 서울지검 공안2부(부장 千成寬)는 신씨를상대로 지난 6월 의료계 1차 집단 폐업을 주도한 경위와 이날초 재폐업을 배후에서 주도했는지 여부 등에 대해 밤샘 조사를 벌였다.검찰은 이르면 18일중 신씨에 대해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다. 신씨는 지난 6월 수배를 받아 오면서도 의료계 집회등에서 ‘육성 메시지’를 통해 투쟁을 독려해 왔으나,이날 검거됨에따라 의료계의 재폐업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송한수 박홍환기자 stinger@
  • 광복55주년 학술행사

    광복 55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마련한 항일독립운동 관련 학술심포지엄이 눈길을 끈다.문화관광부가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백야 김좌진(金佐鎭)장군의 항일투쟁사를 재조명한 학술회의(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주최)를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와 항일운동사 심포지엄(서대문구청 주최),그리고 개항 이후 ‘한국 민족주의의 변천과 향후 전망’주제의 학술행사(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가 그것.앞의 두 행사는 10일,마지막 행사는 11일 각각 마련됐다.각 학술행사마다 4건 정도의 학술논문 주제발표와 토론이 마련돼 있다.여러 논문 가운데 일부를 발췌,소개한다. 金佐鎭장군의 항일운동 노선과 정치이념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은 대종교(大倧敎)적 민족주의와대종교적 공화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추구하였으며,구체적으로는 단군(檀君)을 정점으로 한 ‘민주적 이상국가 건설’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아울러 김좌진은 대종교인으로 민족주의를 강조하여 국제성을 강조한 사회주의에는 반대했으며,그의 피살은 양대 세력의 분열을 책동한 일본의 계책에 의한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환(수원대) 교수는 10일 개최된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주최 ‘김좌진 장군의 항일운동’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북만주에서의 김좌진의 항일독립운동-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제하의 논문에서 이같은 주장을 폈다. 박 교수에 따르면,백야는 철저한 대종교주의자였다.1925년 그가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한 북만주지역은 대종교 신자가 많이 사는 곳으로 그는 대종교를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같은 전통은 북로군정서 시절부터 계속 이어져온 것이었다.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1926년 화요회파 중심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북만지역 영안현(寧安縣)에 설치되자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던 대종교 계열은 국제성을 강조한 공산주의 계열과 대결양상을 빚게 되었다. 한편 1925년 중국 군벌과 일본군간에 소위 ‘삼시(三矢)협정’이 체결된 후 대종교에 대한 포교금지령과 함께 대종교 세력이 약화되면서 이를 틈타 공산주의자들의 침투가 우려되자 대비책으로 무정부주의이념을 수용했다. 신민부의 후신으로 1929년 결성된 한족총연합회는 권력의 중앙집중을 부정하고 자주적 조직의 연합체를 지향하는 아나키즘 조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했다.백야는 독립운동과 반공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무정부주의사회를 건설한 것이다.결국 그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에서 대종교적 무정부주의로 이념과 체제를 전환하였다.그의 죽음은 이같은 ‘노선변화’에서 이미에고된 것이었다. 구한말부터 1930년 그가 피살될 때까지 일생을 항일투쟁에 바친 그를 암살한 사람은 조선인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이었다.박 교수는 그의 피살은“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의 한족총연합화의 대종교적 민족주의 세력과 무정부주의 세력간의 분열 및 한족총연합회와 공산주의 세력 간의 분열책”이라고추정했다.즉 일제는 북만주지역 한인독립세력을 전멸시키기 위해 화요파의간부 김봉환(金鳳煥)을 사주,하수인 박상실을 이용해 백야를 살해했다는 것. 이를 두고 박 교수는 “일제는 화요파를 이용,백야를 처단함으로써 화요파와 한족총연합회를 이간시키고 아울러 한족총연합회의 무정부주의자와 대종교적 민족주의자의 분열도 촉진시키는 ‘이중효과’를 노린 계책을 꾸몄는데화요파 공산당이 바로 여기에 넘어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h59@. *국제화시대 한국 민족주의. 국제화·세계화시대에서 자칫 편협한 국수주의 정도로 몰리기 십상인 ‘민족주의’.근대이후 우리역사에서 민족주의는 어떻게 변전(變轉)돼 왔고,또앞날은 어떤 모습일까.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11일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국제화시대 한국 민족주의의 성찰과 전망’이란 주제로 학술행사를 가진다. 이날 행사에서 첫 주제발표자인 김도형(연세대) 교수는 미리 배포한 논문(‘개항 이후 세계관의 변화와 민족문제’)에서 “우리 근대사에서 민족문제는 봉건체제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유지하는 과정,즉 한국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싹텄다”고 밝혔다.김 교수는 민족문제 인식의 논리를 주로 대외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검토하면서,지배층 내부에서 전개된 근대변혁론을 흔히 척사론(斥邪論),양무론(洋務論),문명개화론,변법론(變法論)으로 구분하였다. 김 교수는 이 가운데서 척사론자·개화론자는 민족문제 인식에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척사론자의 경우 세계화를 거부한 한계,개화론자의 경우 사회진화론의 패배주의에 흘러 외세 의존적인 형태를 띠거나 계몽운동에서 동양주의에 함몰되는 위험성을 가졌다고 지적했다.반면에 변법론적 민족주의는유교를 개혁하고 서양의 신학문을 수용,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점에서 가장바람직한 모델이었다고 주장하고 대표적 인물로 단재 신채호를 들었다. ‘일제 지배하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분화’라는 논문에서 박찬승(목포대) 교수는 “한국 민족주의는 초기 사회진화론·근대주의 등과 결합,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론을 주된 담론으로 시작하였으며 1910년대 들어 민족평등주의 사상이 싹텄고,이는 3·1운동기 민족자결론과 연결돼 확산됐다”고 주장했다.이어 “20년대 자치운동론을 놓고 찬반론이 난무한 가운데 좌우로 분열된 후 결국은 제국주의의 식민주의 논리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채 변질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특히 박교수는 “식민지하의 한국의 근대민족주의는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제대로 결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 속성을강하게 띠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전제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민족주의가 이용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강조했다. 해방후 민족주의와 관련,서중석(성균관대)교수는 ‘냉전체제와 한국 민족주의의 위상’이란 논문에서 “일제하 민족주의의 과제가 반제민족해방이었다면,해방후 민족주의의 주된 과제는 민족국가 형성과 식민체제 청산,즉 탈식민화에 있었다”며 “국가주의라고도 불리는 분단국가 의식이나 냉전이데올로기에 매몰된 것은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주장했다.따라서 미국의 군사력에 전적으로 의존한 이승만정권의 반통일적 ‘통일론’은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아울러 서 교수는 “민족 고유문화의 강조는 민족주의 현상으로 이해될수 있으나 1970년대 이후 유행된 대단군주의는 민족주의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한편 김영한(서강대) 교수는 ‘국제화시대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나아갈 진로·방향은 ‘통일지향의 민족주의’가 돼야 한다”며 “통일은 민족과 국가가 하나됨과 동시에 냉전체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에 내포된 통합과 해방의 논리를 모두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소재 구 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는 한국감옥사의 대명사이자 한국 근현대사에서 우리 민족 수난사의 대명사이기도하다.일제 하에는 숱한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으며,해방후에는반독재 민주투사들이 투혼을 삭여야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대문구청(구청장 이정규)은 10일 오후 2시 독립공원내 독립관 지하강당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라는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이번 학술행사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학술적 조명이 전무한 상황에서 처음 열린 행사로 의미있는 행사였다. 이날행사에서 남도영 동국대 명예교수는 ‘서대문형무소의 민족사적 의의’라는 기조발제 논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우리민족의 수난과 저항이 집약된 곳이자,일제의 잔학상을 세계만방에 고발한현장이며 민족정기를 보여준 성전,민족문화 수호의 생생한 현장”이라고 주장했다.남 교수는 1908년 서대문형무소가 이곳에 설치된 이후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되기까지 80년동안의 역사적 성격을 정리하면서 우리 근현대사에서 서대문형무소가 차지하는 의미를 재조명하였다. 순국선열유족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순국’에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를장기연재한 후 지난해 이를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한 바 있는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은 ‘3·1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라는 논문에서 “3·1항쟁으로구속자만 1만8,000여명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서대문감옥에만 3,000여명이수감됐었다”고 밝혔다.김 주필은 3·1항쟁으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거나 이곳에서 순국한 애국선열들을 중심으로 살핀 뒤 “이곳이 일제하 항일운동의 성지”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김 주필은 3·1항쟁 직후 서대문감옥의 간수를 지낸 권영준의 회고록 ‘형정(刑政)반세기’를 비롯하여 손병희 등 수감 애국지사들의 자서전,서대문형무소 전옥(典獄,교도소장)을 지낸 일본인의 회고기 등을 참고로 당시 수형자들의 참담한 감옥생활을 생생히 복원하였다. 이어 성신여대 이현희 교수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독립투쟁과 서대문형무소’라는 논문을 통해 임시정부 이후 8·15 해방까지 이곳에 투옥돼 옥고를 치른 애국선열들을 집중 조명하였다.이 교수는 “임정요인을 비롯해 독립군,6·10만세의거 주동자,수원고농학생항일운동 주동자,신간회사건 관련자,수양동우회사건,조선어학회사건,단파방송사건 등 국내외에서 전개된 항일투쟁 관련인사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며 “서대문형무소는 비탄의 역사로 얼룩진 현장”이라고 말했다. 애국지사로서 이날 학술행사에 참가한 이규창 선생은 ‘나의 서대문형무소옥중체험기’를 통해 자신의 옥중체험을 생생히 증언하였다.우당 이회영 선생의 자제인 이 선생은 1935년 3월 상해에서 친일파 이용로를 총살,처단한뒤 일경에 피체,본국으로 압송돼 1936년 4월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마포형무소로 이감돼 복역중 8·15해방으로 출옥했다.이 선생은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 복역중 벽을 사이에 두고 옆방의 애국지사와의 통방(通房)통신법 소개를 비롯해 감방내에서의 애국지사와의 교류,재판과정 등 수형생활 전반을 증언했다. 정운현기자
  • “베트남전때 국군 포로 北에 끌려간 9명 생존”

    베트남전쟁 당시 월맹군 포로가 돼 북한으로 압송된 한국군 참전용사 가운데 9명이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박정환(朴定煥·58·미국 플로리다 한인회장)씨는 13일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월남전 참전수기인 ‘느시’(전2권·문예당) 출판에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혔다. 박씨는 “포로가 된 참전용사 가운데 9명이 지금도 북한에 살고 있다는 미국 국방부의 사실 확인이 있었다”면서 “오는 9월초 북한측과 비전향 장기수 및 국군포로 맞송환을 논의할 때 북한에 억류된 월남전 포로 문제도 함께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지난 67년 육군 소위로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68년 1월 월맹군 포로가 돼 2개월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캄보디아 국경 근처에서 극적으로 탈출했으나 다시 붙잡혀 6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 한 미국인의 도움으로석방됐다.박씨는 “수감생활을 할 때 월맹군 장교로부터 ‘너도 북으로 가라.이미 북한에는 많은 국군 포로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한편 국방부는 박씨의 주장에 대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김경운기자 kkwoon@
  • 안중근의사 순국의 현장

    *뤼순감옥의 안중근과 신채호. 안중근의사 순국일인 3월 26일 중국 요령성 뤼순시 향양가 139호 원호방에자리한 뤼순감옥은 90년전 동양천지를 진동한 의사(義士)의 죽음을 아는지모르는지 이날따라 많은 중국인 참관자들로 하루종일 붐볐다. 봄기운 완연한 따사한 햇살아래 사위가 붉은 벽돌 담벽으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뤼순감옥은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중국애국자들의 수난의 장소지만지금은 역사관광지가 되고있다. 워낙 큰사건 큰인물이라 안의사가 순국한 날까지 갇혀있던 ‘특설감방’은의사가 5개월동안 머물면서 사용했던 지필묵과 몇가지 유품이 전시되고 벽에는 휘호 두점이 걸려있었다. 의사 순국 90주년을 맞아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박보희)간부들이 안의사의 흔적이 깃든 감방에서 간소한 추념식을 갖고 서울에서 만들어온안내판 현판식을 거행했다. 뤼순감옥은 중국정부가 국가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진열관’이다. 50여만명의 중국 항일정치범과 사상범그리고 일부 한국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옥살이를 하고 상당수는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일제는 ‘국사범’또는 ‘회유’의 차원에서 일반 재소자의 감방이 아닌 간수사무실 바로 옆에 특별감방을 만들어 안의사를 수감했다. 이것을 근년에복원하여 요즘 ‘특별관리’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안의사의 인격과 거사를높이 평가하여 외국인 중에는 유일하게 ‘안의사감방’을 보존·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선생도 이곳에서 옥사 뤼순감옥은 뤼순시의 역사와 함께 제국주의 침탈의 고난의 사력(史歷)을 간직한 곳이다. 원래 러시아제국이 1902년 동북3성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양민들을 수감하고자 신식감옥을 신축한 것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확장공사를 하여 1907년에는 감방 253칸, 중벌수형자용 독감방4칸 등 2천여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감옥을 만든것이 오늘에 이른다. 우리가 뤼순감옥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안의사의 순국과 함께 신채호선생이 이곳에서 8년 옥고끝에 옥사당한 사유때문이다. 단재는 안의사가 순국한지 18년이 지난 1928년 5월 대만 기륭항에서 일본 수상서원에게 체포되어 이곳에 수감되었다. 대련(大連)법정에서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으로 압송되어 복역한 것이다. 단재는 죄수번호 411번으로 붉은 수의를 입고한많은 옥살이를 이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이른바 위채(爲채)사건으로 그와함께 수감된 임병문은 26세로 재판과정에 고문으로 숨지고 이지영 ·이종원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살이 8년만에 단재는 건강이 심히 악화되었다. 형무소측의 병보석 출감회유에도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단호히 거절하다가 1936년 2월 18일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옥사한 것이다. 유해는 곡절끝에 충북 청원군 향리에 모셔졌다. 애국자들의 혼령 깃든 곳 뤼순감옥 수인묘지 어딘가에 묻혀있을 안의사의 유해는 순국 90주년이 지난지금까지도 찾을 길이 막막하다. 1986년 7월 북한에서 유해발굴단이 수인묘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채호선생이 8년동안 옥고를 치룬 감방은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제가 쫓겨가면서 모든 자료를 불사른 때문이다. 다행이 진열관의 낡은 서류철에서 찾은 뤼순감옥에 입감할 때 찍은 퇴색한 한장의 사진이 그나마 ‘존재증명’이랄까.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인 뤼순의 언덕받이에 자리한 감방에서 남다른애국심과 역사의식이 투철했던 안의사와 단재 선생 그리고 무명지사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이역에서 몸을 불살랐을까. 안의사의 유해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현지에서 새삼 절감했다. 중국측의 태도도 아직은 미지수다. 그렇지만 더 늦기전에 남북이 협력하여 중국정부를 설득해서라도 반드시 유해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단재 선생이 옥고를 치룬 감방의 위치라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뤼순에서. kimsu@. *인근 거주 중국인 증언.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유해는 뤼순감옥에서 동쪽방향으로 500∼600m 지점에 있습니다, 최근 일본전문가들이 발견한 지도에 나온 뤼순감옥 동남쪽 300m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200~300m 더 가야 합니다” . 중국인 탄충쿠이(潭忠魁·79)씨는 “안의사께선 순국당시여순 고등법원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800m 지점에 묻히셨다”고 증언했다. 안의사의 순국추모식이 열렸던 지난 26일.기자는 뤼순감옥 부근에 살고있는탄 노인을 만나 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그는 일제(日帝)때부터 뤼순감옥 주변 마을인 위엔바오지에(元寶街) 56호에 살아온 이곳 토박이.그 역시안의사의 순국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감옥 관계자,당시 지역 노인,일본인관계자들로부터 안 의사의 묘지 위치를 여러차례 확인해 지금까지 기억하고있다고 밝혔다. □45년 당시 상황은. 일제가 패망하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감옥과 일반 묘지에 대한 파괴행위는없었다.다만 일본인 납골당과 군인 묘지는 폭파시키고 떠났다.한국인과 중국인 수감자들의 유해는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안의사의 유해도 마찬가지다. □이후 훼손됐을 가능성은. 일제 패망직후 소련군이 진주해 점령했지만 훼손 행위는 없었다.1970년이후이 지역의 개발이 가속화됐지만 유해가 묻혀있는 지역은 포함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다렌(大連)의 일본학교를 졸업한뒤 지난 1942년부터 조선은행에서 일하면서 많은 조선사람들과 접촉하며 친분을 쌓으면서 안중근을 존경해 왔다.일본패망전에 일본인들로부터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묘소와 관련한 다른 정보는. 지난 85년 판우충(潘茂忠)뤼순감옥 전시관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를 표시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당시 미국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손자들이 감옥전시관에 전달해온 자료였다.판 연구원의 일본어 선생인 나는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많은 토론을 나눌 수 있었다. □안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지난 86년 북한의 당정(黨政)대표단이 방문,안의사의 유해의 위치를 확인한적이 있다. 판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 표시도를 근거로 북측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유해발굴에 북측도 높은 관심을 밝혔었다. 뤼순 김삼웅 주필@kdaily.com. *뤼순감옥은 어떤곳. 한민족의 비통과 투쟁의 숨결이 담긴 뤼순(旅順)감옥.50여년의 풍상속에서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뤼순시 외곽 위안바오방(元寶房)지역에서 지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민족의 스승인 단재 신채호(申采浩)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총 면적 22만6,000㎡.감옥주위에는 높이 4m ,둘레 725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회색 벽돌건물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붉은 벽돌건물은 일제가건축했다.감방수는 253칸.한 칸이 가로 5.6,폭 2.7m였다.일제말기 감독원만120명 가량됐다. 각종 고문도구와 고문실,햇볕이 통하지 않는 암실 등도 발견됐다.교수형을 집행하는 곳도 그대로 남아있다. 1939년부터 일제에 의해 ‘여순 형무소’라고 불렸다. 제정러시아가 얼지않는 항구를 찾아 남하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말부터의 역사를 담고 있다. 1898년 3월 차르 황제의 러시아제국이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조차한뒤 이곳에 관동주(關東州)총독부를 설치했다.그뒤 1902년 식민지배를 위한감옥을 건설한다. 러·일전쟁이후 이곳을 점령한 일제는 러시아가 지어놓은 85칸의 감옥을 257칸으로 늘리고 ‘관동도감부 감옥서’(關東都督府 監獄署)라고 불렀다.그뒤1920년에는 관동청 감옥(關東廳 監獄)으로,1926년에는 ‘關東廳 형무소’ 로,1934년 ‘관동 형무소’로 개칭한다.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될수록 형무소가 커지고 수형자에 대한 탄압도 강화됐다.
  • [김삼웅 칼럼] 일제시대 三節士

    역사나 민족문제에 무관심하다가도 3월이면 숙연해지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아직 봄이기에는 바람결 매운 이계절에 우리는 조국해방을 위해 일제와싸우다 가신 선열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의 지도자들을 돌아본다. 참혹했던 일제시대에도 자랑스런 한국인이 많았다. 그들의 희생으로 해방을맞았고 망국사를 독립운동사로 고쳐쓸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는 변혁기나 국난기에 의롭게 희생된 지사들을 묶어 시대정신으로 받드는 전통을 갖고있다. 백제말 성충·흥수·계백의 삼충(三忠), 고려말 정몽주·이색·길재의 삼은(三隱), 청국에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다가 척화신으로 청나라에 붙잡혀가 살해당한 삼학사(三學士), 온몸을 던져 일제와 싸운 삼의사(三義士)가 대표적이다. 이런 전통으로 식민지시대 돈독한 학문적 바탕에서 절개를 지키면서 끝까지일제와 싸운 단재(丹齋)신채호, 만해(萬海)한용운, 심산(心山) 김창숙선생을삼절사(三節士)로 부르면 어떨까. ‘절개가 있는 사람’을 일컫는 ‘절사’가 어찌 이들 뿐이랴만 세분은 출생연도나 옥고·활동·업적에서 유사한 부분이 너무 많고, 생존시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단재 탄생 120주년이고 만해와 심산은 119주년이다. 왜 삼절사일까. 본래 ‘삼절(三節)’은 공자가 주역을 너무 여러번 읽어서‘위편(韋編)’이 세차례나 떨어졌다는 ‘위편삼절’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또다른 의미는 “세가지의 뛰어난 일”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사나 사전적의미보다 ‘절개를 지키면서 싸운 선비’의 뜻에서 3절사로 부르고자 한다. 단재는 한말과 일제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언론·역사·독립운동을 한 흔치않은 인물이다.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권업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항일구국의 필봉을 날린, 언론의 한 분야만으로도 독보적 역할을 했다. 조선상고사·독사신론·조선사연구초 등 사학자로서도 독보적 업적을 남기고‘조선혁명선언’집필 등 독립운동과 중국의 일제감옥에서 옥사당한 것만으로도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대접 받는다. 만해는 동학운동에 뛰어들고 불교계 대표로 33인에 선정되어 3·1운동을 주도하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쓰고, 신간회를 지도하고 불교관계항일단체인 만당사건으로 구속되고 시문학과 불교개혁의 기념비적인 ‘님의 침묵’과 ‘불교유신론’을 쓰고 국내에서 끝까지 버티면서 창시개명을 거부하는 등 비타협 노선을 견지했다. 독립운동·시문학·불교재건 등 각분야에서 독보적 역할을 했다. 심산은 매국노의 목을 베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고 파리강화회의 ‘파리장서’를 주도하고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 의정원부의장을맡고 북경에서 단재와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고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14년형을 선고받고 앉은뱅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고 건국동맹남조선 책임을 맡고 ‘자서종요(字書綜要)’‘벽옹70년회상기’등의 저술을 남겼다. 세분은 고결한 인품과 불굴의 독립정신,극심한 고문과 옥고를 겪으면서도 신념을 지킨 한국선비의 사표가 되었다. ‘곧지 않으면 바르지 못한다’는 동양의 전형적 지식인상이다. “아! 과거 수십년 역사야말로 용자(勇者)는 침을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인자(仁者)로 보면 상심할역사가 될 뿐이다.”(단재‘조선혁명선언’)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못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논개의 이름은 못씻는다.”(만해 ‘출옥 후 연설’)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세상을 구제하던 성인의 뜻에 깨우침이 없으면 이것은 거짓 선비다.”(심산‘벽옹73년회상기’) 단재는 추운 겨울에도 꼿꼿이 서서 세수를 했다. 일본놈 천지에 동서남북어느쪽으로도 허리를 굽힐 수 없다는 오기였다. 만해는 주위에서 성북동에 심우당이란 거처를 마련해주자 동남향 창문을 손수 뜯어 북향으로 고쳤다. 총독부가 보이는 쪽에 창문을 낼 수 없다는 독기였다. 심산은 모진 고문 끝에 앉은뱅이까지 되어 평생을 병 속에 살아왔다하여 누군가 그를 벽옹이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농을 한즉 그는 그후 자기를‘벽옹’으로 불렀다. 앉은뱅이도 자랑스럽다는 결기였다. 김삼웅 주필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38) 한수산’욕망의 거리’

    한수산 필화사건의 전말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이문재 시인의 글(레이디경향 1988년 11월)은 이렇게 시작된다.“1981년 5월28일 오후 3시,중앙일보사 편집국 문화부.문화부장을 찾는 직통전화가 걸려온다.‘보안사령부 X소령입니다.제주에 살고 있는 한수산씨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정중했지만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였다.이 한 통의 전화로 이튿날부터 끔찍한 사건이 저질러진다.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문학평론가 정규웅 (당시)문화부장은 좋잖은 예감으로 즉각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를 검토하기 시작했다.이미 1980년 5월1일부터 시작된 이 장편은미모의 30대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도심 속의 욕망을 추적하는중이었는데,아무리 뒤져도 관계 당국의 비위를 거슬릴만한 구절이나 반정부적인 요소는 없었으나 다만 아래 구절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텔리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하는 경우,그 관리는돌아가는 차 속에서면 다 잊을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보고 들어 주는 게 황공스럽기만 해서,그 관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수줍게 웃는 얼굴,바로 그 얼굴들은 언제나 그렇게 닮아 있어서 그것이 모내기 하는 논둑이든,산동네 빈민촌이든,탄광촌이든 항시 같은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317회)박회장과 함께 잠자리에 들면서 세희는 박회장 집에서 보았던 죽은 부인의사진을 떠올렸는데,그 ‘부자 사모님 얼굴에서 탄광촌 여인의 모습’을 왜떠올렸는지 자신도 모른다고 소설은 서술하고 있다.그리고 다음 장면을 또보자. “월남전 참전 용사라는 걸 언제나 황금빛 훈장처럼 닦으며 사는 수위는 키가 크고 건장했다.그는 지금도 그 수위 복장에 대해서 남모를 긍지를 가지고 있는 듯 싶었다.내가 월남에 있을 때 말이야,그러니까 그때가 서기 일천구백 몇 년인가 하면…그렇게 그는 시간 나는대로 자서전을 썼었다.그리고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의 그 꼴같지않게 교통순경의 제복을 닮은 수위제복을 여간 자랑스러워 하지않는 눈치였다.하옇든 세상에 남자놈 치고 시원치 않은게 몇 종류가 있지.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324회)세희의 남동생 경태는 사장이 유일하게 애첩의 집에까지 데려갈 정도로 신임을 받는데,다른 회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여 사직원을 냈건만,사장은 일을 다 배운 뒤에는 도로 자기 회사로 오라고 간단히 잘라버린다.화가 난 경태가 사무실을 나오며 수위를 보고 떠오르는 잡념들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나마 문제가 된다면 이 구절이겠거니 예견하고 있던 차에 드디어 사건은터졌다.5월29일 오전 10시 경,언제나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반복되듯이낯선 중년들에 의하여 정규웅부장은 검은 세단에 태워져 끌려갔다.중앙일보에서는 손기상(당시 편집국장대리,현 삼성문화재단 상무),권영빈(당시 문예중앙 주간,현 중앙일보 주간),허술(당시 출판국 부장)이 연행 당했고,엇비슷한 시각에 한수산은 제주에서 항공편으로 압송 당했으며,박정만 시인(당시고려원 편집부장) 역시 끌려 들어갔다.빙고동 보안사 대공분실이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대한광장] 탈북 난민의 생존권

    ‘도움을 기다리다가 뜻밖의 사정으로 중국 공안에 죄가 없이 체포되어 저는 양 손과 두 발에 족쇄를 채우고 북한에 압송되어 가던 도중 극적으로 유언장을 씁니다.안기고 싶던 남조선에 가지 못하고 탈북죄로 며칠 후면 사형장의 이슬이 됩니다.총살 이유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탈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얼마전 북한을 탈출하다가 사형을 당한 손모씨의 참담한 사연의 일부이다.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굶겨 죽이기 싫어 탈북했다는 것이다.왜 한 강산인데 백성이 사는 처지가 남북이 다르냐고 처절히 외치고 있다.통일의 그날이 오면 굶어 죽은 많은 동포의 소원이 풀린다는 것이다.아내와 두 아이는잡히지 않고 남조선으로 무사히 탈출해 사람 대우를 받게 도와달라는 눈물겨운 울부짖음이다.그는 배고픈 슬픔보다 자기가 의지하고 안겨야 할 조국이없는 슬픔이 더 크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이런 사실은 탈북자 손모씨의 경우만이 아니다.벌써 30만∼40만명의 탈북동포들이 자유의 땅을 찾아 나선 지가 언제였던가.그러나 그들은 국경선에서 잡히거나 중국 공안에 인계되어 되돌려지기 일쑤이고 즉결처분당한다는 살벌한 소식을 자주 듣는다. 이들을 도울 자는 한 겨레,한 핏줄인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세계는코소보난민이나 터키지진 재난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탈북난민들에 대해서는 반성적 지각반응만 보인다.오늘날 북한동포보다 더 참혹한 죽음 직전에 당면한 민족이 어디에 있을까.김정일은 300만명을 굶어 죽게 해 세계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받고 있다.북한동포들이 이를 피해 탈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그 숫자가 점차 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북한은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지옥’과 ‘아사의 광장’이 아닌가. 우리민족은 서로 돕고 이끌어주며 고통을 함께 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북한동포의 쓰라림에 냉담하거나 무관심하다면 이는 한 겨레의 도리가 아니다.율곡은 “같은 백성이 어려움을 당할 때 방치하는 것은 우리 겨레의 본분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우리 헌법은 북한동포도 한국민임을 명시하고 있다.박해와 생존권의 위협을 피해 탈출했으나 이국에서 강제소환에 떨고 있는 동포를 이곳에 와 살게 시설해주고 보호해주는 것은 나라의 기본도리인 것이다.이런 당연지사를 외면한다면 국가가 세금을 내라고 국민에게 고지서를 돌릴 명분이 없는 것이다. 통일 전 서독은 동독사람들이 독일민족이라고 보호를 요청하면 독일국민에준하여 보호조치를 취한 바 있다.이 소식이 전해지자 이웃나라에 거주하던독일국민이 줄줄이 서독의 해외공관을 노크했으며 이것이 ‘통일독일’의 실마리가 되었다. 미국시민권 소지자가 외국에서 호언하고 활보하는 것은 그들의 신변을 미국정부가 책임지고 적극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우리도 탈북동포가 원하는 곳에서 생존권을 부지할 수 있도록 보호조치를 취해 주어야 하며 동시에 비인도적인 탈북난민의 처형 학살을 전 세계의 자유민들 앞에 낱낱이 알려지게 해야 한다. 금년이 안중근의사 의거 90년이 된다.얼마전 필자는 중국 하얼빈공업대에서 안의사의 애국행적에 관해 주제발표를 한 바 있다.그 자리에서 ‘탈북난민보호를 위한 UN청원서‘를 보여주고 취지와 함께 천만명 서명운동을 벌이고있으니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그곳에 참석한 한국인들은 거의 동참했으나중국인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물론 서명한 중국교수도 몇몇 있었으나 그 숫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 여론을 일으켜 중국정부를 설득해야 한다.이 운동은 종교계에서앞장서고 있다.탈북동포의 난민으로서 법적지위를 보장받게 하고 보호시설을 마련해 생존권을 지켜줘야 한다. 그곳에서 만난 어떤 탈북청년은 “나는 배가 고파 여기에 왔다.그러나 병이 낫고 건강해지면 다시 조선으로 간다”고 내뱉듯이 한마디 던지고 자리를떴다.그 말을 들으면서 북한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남한 증오교육을 시키는지 소름이 끼쳤다.인권이 보장되는 자유민주국가에 살고 있음이 새삼스럽게따뜻하게 느껴졌다. [李炫熙 성신여대교수·현대사]
  • 교도관테러 유력용의자 검거

    서울 영등포교도소 교도관 연쇄 손도끼 피습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 구로경찰서는 3일 유력한 용의자 최모씨(34·전과 7범·대구 동구 방촌동)를붙잡아 조사 중이다. 경찰은 지난 6월15일 영등포교도소 교도관 아파트 앞에서 발견된 가스분사기가 최씨 아버지의 것으로 확인,지난 2일 오후 대구로 수사대를 보내 최씨를 붙잡았다.경찰은 대마초를 피워 환각상태에 있던 최씨를 대마관리법 위반 혐의로 긴급체포,서울 구로경찰서로 압송했다. 경찰은 탐문수사를 통해 범행에 쓰인 손도끼가 대구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했다.최씨가 사는 동네 주민들로부터도 ‘최씨가 손도끼를 들고 다니는 것을 봤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경찰은 최씨가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동안 재소자와 싸움을 벌여 두번이나징벌을 받아 교도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재소자들의말에 따라 출소 이후 행적과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를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최씨는 “가스총은 도둑을 맞은 것”이라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최씨는 지난 94년 2월 살인미수 혐의로 영등포교도소에서 1년여동안 복역한뒤 청송교도소로 이감돼 2년을 더 복역하고 지난해 11월 출소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 신창원 도피기간…열흘에 한번꼴 절도

    신창원은 도피기간 동안 어디서 얼마를 훔쳤을까. 경찰 특별조사팀장인 김명수(金明洙) 경기지방경찰청 2차장은 지난 17일 “신창원은 2년6개월간의 도피생활 중 평균 10일에 한 번꼴인 88건의 절도를저질렀으며,피해액은 5억4,000여만원에 이른다”고 말했다.또 “신의 절도행각은 서울·경기·충남·전북·대구와 칠곡·구미를 포함한 경북 등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으며,현금 귀금속 차량 등을 가리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뒤늦게 “김차장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추정만으로 보기는 어렵다.피해자 가운데 상당수는 신고하지 않은 점을감안하면 신의 범행은 100건이 넘고 훔친 돈도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신은 지난 16일 순천에서 부산으로 압송되는 차량 안에서 “지난달 서울 주택가에서 일가족 3명을 흉기로 위협해 2억9,000만원을 뜯었다”고 진술했다고 경찰은 밝혔다.경찰에 따르면 신은 서울에 80억원을 차명 계좌로 관리중인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 침입해 20억원을 요구했으나 ‘그 돈은양도성 예금증서여서 안되고 대신 현금 2억5,000만원을 주겠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을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부인을 시켜 은행에서 1만원권으로 돈을 찾아오도록 했다.집에 있던 4,000만원도 빼앗았다.그러나 신은 돈을 빼앗을 때 피해자와 서로 신상에 대해 보안을 지키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신원과자세한 범행 경위 등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경찰도 이 사건과 관련한피해신고는 없었다고 밝혔다. 신은 지난해 7월에도 서울 강남 일대에서 거액을 훔쳤다.당시 강남구 포이동에서 경찰과 격투를 벌이고 달아나면서 버리고 간 엔터프라이즈 승용차 안에서는 현금 900만원과 미화 6,900달러가 발견됐었다. 신은 지난해 2월과 12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H아파트를 털 때는 한꺼번에 몇 집을 돌기도 했다.2월에는 3가구에서 현금과 귀금속 600만원어치,12월에는 6가구에서 1,000여만원을 턴 뒤 지하 주차장에서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몰고 달아났다.신이 타고 다니던 차 안에서 발견된 수표를 추적한 결과,한때은거했던 경기도 평택 등지에서도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신은 주로가스 배관을 타고 침입했으며 사람은 해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신은 떳떳치 못한 돈의 출처 때문에 피해를 보고도 신고하지 못하는 부자들을 주된 범행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신은 지난해 7월 포이동에서 버리고 달아난 승용차 안에서 발견된 수기에 “그동안 나는 남의 돈을 훔쳤다. 70평 이상 되는 빌라들…”이라고 썼다. 따라서 신에 대한 수사 결과,거액의 현금과 귀금속 등을 도난당한 피해자가확인되면 그 출처 등을 놓고 또 한번 사회적 파문이 일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신이 어떻게 현금이 많은 부유층만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는지,정보를 넘겨준 비호세력은 없었는지 등도 주요 수사 대상일 수밖에 없다. 조현석기자 hyun68@
  • 탈주범 申昌源 검거

    탈옥수 신창원(申昌源·32)이 16일 오후 경찰에 붙잡혔다.탈옥한 지 2년 6개월 만이다. 경찰은 이날 오후 5시20분쯤 전남 순천시 조례동 대주파크빌 4동 205호에서신창원을 검거했다. 경찰은 이날 오후 3시40분쯤 김모씨(전자제품 수리공)의 112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1시간20분 동안의 대치 끝에 검거했다. 김씨는 “순천의 아파트로 전자제품을 수리하러 갔더니 신창원과 비슷한 남자가 여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고 제보를 했다. 순천경찰서는 무장경찰 50여명을 현장에 출동시켜 아파트를 에워싼 뒤 신창원과 대치하다가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 형사 3명을 들여보내 신을 붙잡았다. 신은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검거에 응했다. 경찰은 지문과 문신 등을 확인,탈옥수 신창원임을 확인했다. 경찰은 신창원을 부산으로 압송,부산교도소를 탈출한 경위 등을 조사한 뒤재수감할 방침이다. 신창원은 지난달 29일 이 아파트로 이사온 뒤 동거녀와 생활해 온 것으로드러났다. 신창원은 지난 89년 부산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하다 97년 1월20일 교도소를 탈출,그동안 6차례에 걸쳐 경찰의 추적을 따돌렸다. 순천 남기창기자 kcnam@
  • 5월 문화인물 김창숙선생 학술발표회

    문화관광부가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유학자인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선생을 기리는 학술발표회가 지난14일 오후 1시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성균관대와 심산사상연구회가 공동주최한 이날 행사엔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등이 발표자로 참여,심산의 생애를 재조명하였다. 첫 발표자로 나선 조동걸교수는 ‘심산 김창숙의 독립운동과 유지(遺志)’라는 논문에서 임정에서의 활동 등 심산의 독립운동 활동을 재평가했다.보수적인 유림출신인 심산은 3·1의거 직후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주도,유림을 민족진영으로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그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한 심산은 쑨원(孫文)을 비롯한 중국 국민당간부들과 접촉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20년대 중반들어서는 새로운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이회영(李會榮)과 내몽고지역 황무지개간사업을 추진하며 자금마련을 위해 국내로 잠입해 모금활동을 펼치는 한편 26년말 ‘나석주의거’를 주도했다. 강만길 교수는 ‘심산 김창숙의 해방후 정치활동’이라는 발표문에서 “해방후 정당활동을 하지 않은 심산의 행적을 정치활동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있을 수 있다”고 전제했지만 “독립운동이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활동이라고 볼때 심산의 해방후 건국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행해진 것으로 정치활동으로 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강교수는 “심산은 27년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기 때문에 임정시절 정당정치에 참가할 기회가 없었다”면서 “같은 임정세력이었던 백범 김구 등과 정치관이 다른 것은 이 때문”이라고 주장했다.해방후 심산이 정당보다는 정부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나 한독당 가입요청을 거부한 것도 이같은 이유때문이다.
  • 태백 황지∼부산 금정산 ‘낙동正脈’이 죽어간다

    강원도 남부와 경북 북부지역의 산림훼손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녹색연합은 23일 기자회견을 갖고 산림청이 이들 지역에 임업도로(林道)와산불방화선 등을 건설하고 수종갱신사업을 하면서 산림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 생태계를 파괴한 것은 물론 국고를 낭비했다고 주장했다. 녹색연합은 지난 1월15일부터 2월말까지 40여일동안 낙동강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금정산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낙동정맥’ 410㎞의 자연생태계를 탐사했다.특히 이들 지역에 개설된 26개의 임도가 심각한 환경파괴의 주요 요인인 것으로 지적됐다. 경북 봉화군 석포리∼울진군 전곡리∼울진군 소광리에 이르는 임도는 이 일대에 흐르는 대광천 골짜기를 크게 훼손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임도 건설과정에서 흙더미가 곳곳에서 100m아래까지 쓸려 내려가면서 산림이 절단된 채 버려져 있다고 녹색연합은 주장했다. 98년말 현재 전국에 1만3,500㎞의 임도가 개설되어 있고 2007년까지 1만7,000㎞의 임도가 추가로 건설될 예정이다. 태백산 인근 백병산 등이 일대에 마구잡이로 세워지고 있는 고압송전탑도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미국과 영국 스웨덴 등은 이미 70년대부터 고압송전탑이 야생동물 서식처및 생태계 파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지적에 따라 설치 장소를 결정하는데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녹색연합은 설명했다.
  • 롯데그룹 辛회장 부친유골 도굴범검거 이모저모

    7일 롯데그룹 辛格浩 회장 부친의 유골을 훔쳐간 범인 1명이 검거되자 辛회장의 가족과 롯데그룹의 관계자들은 모두 출근,유골의 수습문제 등을 논의하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이날 오후 1시20분쯤 대전 동부경찰서로 압송된 任鍾淳씨는 검은 색 점퍼와 밤색 바지 차림에 하늘색 모자를 눌러쓴 채 시종 얼굴을 떨구었다. 경찰은 이날 오전 8시30분쯤 任씨를 붙잡았으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서 근처 여관에서 5시간여 동안 任씨를 조사했다. 任씨는 형사계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으나 차츰 입을 열기 시작했다.그러나 범행 모의나 협박 경위 등은수배중인 공범 鄭金溶에게 모두 떠넘겼다. ◆일본에 머물고 있는 辛회장은 범인이 잡혔다는 보고를 받고 “사건이 해결돼 다행이다.수사당국과 염려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롯데그룹 비서실 관계자는 전했다. 辛회장은 이날 낮 12시30분 일본항공(JAL)편으로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하루전 항공편 예약을취소했다. 비서실 관계자는 “辛회장이 77세의 고령인데다 비행기를 타지 못할 정도로 충격이 심해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들은 任씨에 대한 경찰조사 결과,달아난 공범인 鄭씨가 지난해 7월 지구촌출판사(대표 徐동진)가 펴낸 ‘辛格浩의 비밀’이라는 책을읽고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룹 관계자는 “지난해 7월 출판사측이 사전협의도 없이 책을 출판했을 때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辛회장이 노발대발한 적이 있었다”면서 “이 책이 결국 범행의 참고서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울산시 울주구 삼동면 둔기리 辛회장의 고향 주민들은 범인이 잡히고 없어진 유골 일부를 되찾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신들의 일인 양 기뻐했다. 辛회장의 8촌동생 正浩씨(73)는 “그동안 고인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아마음을 졸였다”면서 “짐승만도 못한 죄악을 저지른 범인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대전l姜忠植chungsik@
  • [정직한 역사 되찾기] (26)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

    올해로 ‘3·1 만세의거’ 80주년이다.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민족 차원의독립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는 ‘3·1의거’는 4월 하순까지 조선 8도에서 모두 1,214건의 시위에 참가자는 110만명에 달했다.또 당시 만세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자가 7,500여명,검거된 자는 4만7,000여명에달했다. 구한말 의병항쟁 이후 일제말기의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항일대열에 참가한애국지사는 수십만을 헤아린다.그러나 이들 가운데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받은 사람은 99년 2월 현재 8,524명이다.아직도 상당수 애국지사들이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보훈당국이 야박해서만은 아니다.독립운동 공적은 인정되나 훈장급에는 미치지 못하거나 독립운동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거증자료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독립진영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경우 증거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자료찾기가 어려운 것은 일제의 비밀요원인 ‘밀정’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3년 5월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사 대상자 8명의명단을 국회 비공개회으에서 공개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3·1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갑성이 포함돼 있었다.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밀정’으로 요샛말로 하면 일제의 스파이노릇을 했다는 것이다.광복회장까지 역임하면서 81년 사망 당시 사회장이 치러졌던 그가 ‘변절자’였다는 의혹은 62년 이래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그동안 제기된 의혹과 논란을 통해 그의 친일혐의를 추적해보자.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은 1889년(명치 2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대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세브란스의전(醫專) 약학과 3학년 재학중 중퇴하였다.이 해부터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권유로 기독교계 대표로 3·1의거에 참여하였다.당시 민족대표중 가장 어린 나이였던 그는 외국인및 학생측과의 연락,독립선언서 배부,해외연락 업무를 맡아 의거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의거 당일 태화관에서 일경에 체포된 그는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않았다고 한다.또 감옥안에서도 3·1의거 기념 만세를 주동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이 가출옥한 뒤인 22년 5월 뒤늦게 출옥했다.출옥후 이듬해 세브란스 의약회사 지배인으로 재직하던 그는 그 해 11월 ‘민립대학 기성발기총회’에서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전국을 돌며 민립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선전·강연하다가 체포돼 다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24년 11월 이승만이 주도한 ‘동지회’의 서울지부격인 ‘흥업구락부’의간사로 피선된 그는 2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현 YMCA) 이사로 피선돼 활동했다.그는 또 좌우(左右) 민족운동세력의 통합체인 ‘신간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 직후 ‘신간회사건’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다.출옥후 30년경 경성공업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있다가 이듬해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그를 둘러싼 친일의혹은 그가 상해행에 오른 후 37년 일경에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7년간의 행적이다.생전에 그는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편 이갑성에 대한‘친일논쟁’은 62년 그가 건국훈장을 수훈할 무렵 불거져 나와 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한 직후,그리고 81년 그의 사망직후 한 잡지에서 그가 일제때 사용하였던 명함을 공개하면서 다시 논란이 됐었다.그의친일경력을 처음으로 공식 거론한 사람은 임시정부 서무국장 출신의 임의탁(林義鐸·건국훈장 독립장)씨.그는 ‘대한일보’(67.5.11)에 게재한 광복회비상총회 명의의 ‘성명서’에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으로 솔선하여창씨개명을 한 점 ▒상해에서 임정에는 출입을 못하고 상해 조선인거류민회회장이자 유명한 친일파인 이갑녕(李甲寧)만 접촉한 사실 ▒총독부 산업국장의 주선으로 일본 미쯔비시(三菱)회사 신경(新京)출장소장으로 임명된 사실▒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촉탁을 지냈다는 주장 등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하였다. 또 유관순(柳寬順)열사의 오빠로 3·1의거에 참여했던 유우석(柳愚錫·건국훈장 애국장)씨는 이갑성이 “일제말기 일본인도 하기 어려운 경성공업사(군사공업)의 중역을 지냈다”고 증언하였다.두 사람 모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들로 이갑성의 친일문제와 관련,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독립유공자 가운데는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의 증언만으로도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다.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은 사료(史料)가치를 인정받고있다. 한편 임·유씨의 증언에 대해 이갑성은 반박성명을 통해 두 사람의 증언내용을 모두 부인하였다.그러나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해보면 이갑성의 반박은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선 창씨문제.이갑성은 자신이 이와모토(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한 사실(호적서류 참조)을 두고 당시 자신은 해외에 있어서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창씨는 호주(戶主)만이 할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호주였던 그가 자신의 창씨 사실을 몰랐다는 얘기는 말이안된다.33인 가운데 그를 포함해 정춘수(鄭春洙,禾谷春洙),최린(崔麟,佳山麟)등 3명이 창씨개명을 했다. 다음으로 이갑성이 미쯔비시회사의 신경출장소장을 지냈다는 주장.현재로서는 확인된 바는 없다.그러나 그가 ‘주식회사 일만산업공사(日滿産業公司)전무취체역’을 지낸 사실은 확인됐다.(명함사진 참조) 또 이갑성이 상해 임정에 출입을 못했다는 주장.이에 대해 임정 총무과장 출신 K씨는 “당시 이갑성은 임정요인과 교류가 없었으며 임정 청사에 출입을 못했다”고 증언한바 있다. 독립운동가 김성수(金聖壽·건국훈장 독립장)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 이갑성이 상해에서 제중(濟衆)약국을 경영하면서 밀정행위를 했다고 사망직전에증언한 바 있는데 이갑성이 약국을 했을 가능성은 크다.우선 그가 약학을 공부했고,서대문형무소 수감시절 일경이 작성한 자료에 그가 상해로 도피하여약종상(藥種商)을 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그가 경무국장 마루야마의촉탁을 지냈다는 주장도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이밖에도 그가 친일을 했다는 증언은 수없이 많다.독립운동가 사회에서는 그의 ‘친일’이 공공연한 비밀로 돼 있다.다만 그가 생전에 역대 정치권력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독립운동가 사회의 상징적인 인물로 행세해왔기 때문에 나서서 언급하기를 꺼려왔을 뿐이라는 것.해방 직후부터 정치권에서 활동하면서 한때 이승만을 추종하던 그는 1961년 5·16이 발생하자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크게염려하던 군인들에 의한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은 다행한 일로…군사혁명 정부가 완전히 성공하도록 물심양면으로 깊이 협조해 주기를…’ 호소하였다. 이듬해 62년 그는 해방후 첫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으며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발기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65년에는 초대 광복회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3·1동지회 고문,이준열사기념사업회총재 등 민족단체의 대표적 인물로 활동하였다.또 63년 그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도 참여하였는데 당시 이름만 써내면 훈장을 주었다는,소위 ‘백지사건(白紙事件)’에 그가 깊이 관련돼 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이갑성의 일제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 있다.33인 출신으로 일제당국에 신분이 노출된 상태에서 어떻게 상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또 거기서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37년 국내에 압송돼 와서 1년만에 가출옥한 배경이나 이후로도 수 차례 투옥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33인중 최후의 생존자로 매년 3·1절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이갑성은 81년 3월 타계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그의 공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진실규명 차원에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조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鄭雲鉉 jwh59@
  • 쿠르드족 유혈시위 사흘째…美등 각국공관 테러 비상

    ┑베를린 런던 AP AFP 연합┑터키의 쿠르드족 반군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의체포에 항의하는 쿠르드인의 격렬시위가 18일 세계 주요 도시에서 사흘째 계속됐다. 터키군은 이에 맞서 17일 북부 이라크에 거주하는 쿠르드족들에 대해 대규모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쿠르드족 시위대는 오잘란이 체포된 16일 이후 런던,베를린,제네바,헤이그등 적어도 21개 유럽 도시의 그리스 대사관 및 영사관을 점거했으며 캐나다밴쿠버와 호주 시드니 등지에서도 한때 영사관 점거농성을 벌였다. 쿠르드족 시위대는 오잘란이 터키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모사드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보도에 자극받아 이스라엘 총영사관을 점거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은 오잘란 체포 사건 이후 유럽 전역의 자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다른 지역의 외교공관에 대해서는 1급 경계령을 내렸다. 미국무부는 17일 “외국을 여행하는 미국인들이 오잘란의 터키 압송에 항의하는 쿠르드인들의 보복대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미국무부는 미국의 재외공관과인력에 대해서는 이미 적절한 보안강화 조치를 취했다고 덧붙였다.
  • 항의 점거

    16일 쿠르드 반군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 체포에 항의 하는 쿠르드인들이 헤이그에서 네덜란드 주재 그리스 대사관저를 점거,대사부인과 아들 등 3명을인질로 잡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이에 앞서 불렌트 에체비트 터키 총리는 오잘란을 케냐에서 체포,터키로 압송했다고 발표했다. ┑헤이그(네덜란드) AP 연합┑
  • 해방후 첫 사형수 시인 兪鎭五(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

    ◎詩 낭독 탁월한 분단시대 최고 저항시인/중학생때 일본아이 자주 때려 형사 등살에 渡日/1946년 ‘국제청년데이’ 축시 낭독 10만 군중 갈채/지리산 문화공작대장 활약중 압송돼 사형 언도/‘아내와 월북했다’ 가설 바로잡는일 ‘국민의 몫’ 변혁기 문학은 사회와 역사 발전의 거울로서의 역할을 맡아왔다.해방의 공간에서 또 독재와 민주화의 공간에서 우리 문학이 줄곧 본연의 자리를 지켜왔느냐에는 많은 평가들이 엇갈리고 있다.그 가운데 새로운 세기는 다가오고 이제 우리 문학의 새좌표 설정이 요구되고 있다.이를 위해 그동안 우리 문학에 새겨져온 숱한 갈등과 번뇌의 흔적들을 문학평론가 任軒永 교수를 통해 재조명한다.주1회씩 연재될 任교수의 글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문단의 비사들이 많이 포함될 예정이어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 시인이,“아아,사랑은/가고 돌아오지 않네!… 허공으로 사라졌네”라고 애절하게 노래하던 한 시인이 총탄의 이슬로 사라졌다.때는 1936년 8월19일,무대는 스페인 그라나다 근교 어느 과수원이었다. ○‘한국판 로르카’ 시인 투사 ‘1927세대의 샛별’이란 별명을 가진 민요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 내전중 38세의 젊음을 피살로 마감했다.이 비참한 최후는 그의 시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 일약 세계적인 서정시인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노도 같았던,광풍 같았던,홍역 같았던 우리의 해방 공간과 분단의 틈새에는 ‘한국판 로르카’가 없었을까.독특하고도 마력을 지닌 시 낭독으로 청중을 열광시켰다는 그 로르카에 못지 않게 10만 참석자들을 뜨겁게 달궜던 한 시인이 있었다.바로 유진오(兪鎭五)였다. 활동으로 본다면 유진오가 ‘한국의 로르카’가 아니라 로르카가 도리어 ‘스페인의 유진오’가 됨직할 만큼 28세에 문학적 생명을 총살당한 이 시인은 세계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투사였다. 이제 통일을 향한 민족문학사는 분단의 장막에 가려졌던 문학인과 문학적 사건들을 21세기적 가치관으로 재조명할 처지에 있다 바로 그 첫 대상이 1950년 6월29일 긴급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분단시대 최고의 저항시인 유진오이다. 이 시인의 생애에 대한 연구자료는 문학사가 정영진의 ‘육탄시인 유진오의 비극’(저서 [통한의 실종문인] 게재)과 작가 강준식의 중편소설 ‘어둠을 찾아서’(문학사상 1990.3)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 어딘지 조차도 미궁에 있었는데,이 두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유진오는 서울사람이라고 보는게 옳을 것 같다.아버지 유치구(兪致九)와 어머니 양만선행(梁萬善行·전주 출신)의 4남중 막내로 논산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노량진에서 서울시내 전체를 공급지로할 규모의 지물포 도매점을 경영했었는데 사업차 잠시 논산에 가있을 때 유진오가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넉넉한 집안으로 맏형은 검사,둘째는 외교관,셋째는 일본에 귀화,그리고 막내가 시인인데,그는 겉보기에는 얌전했으나 중동중학 시절 음악 미술 스포츠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가졌으며 특히 기타를 잘 쳐 부민관의 어떤 음악회에 찬조출연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업가 집안의 서울사람 큰 키에 좋은 체격이었던 그는 중학생 때부터 일본사람들을 너무나 증오하여 일본아이들을 때리다가 경찰서에들락날락 했었다고 전한다.이런 행동 때문에 계속 고등계형사의 시달림으로 국내에서의 진학이 어려워 1941년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에 입학했으나 역시 형사의 등살에 못이겨 메이지(明治)로 옮겼지만 여전해 일본의 저명한 국수주의자가 만든 분카가쿠인(文化學院)에 들어가 동양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제 말엽 징병기피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해방직전에 밀입국했다.1945년 9월 그는 오장환의 추천으로 등단,당시 패기있는 젊은 시인들(金光現 金尙勳 李秉哲 朴山雲 兪鎭五)과 ‘전위시인집’(노농사 1946.10)을 내 화제를 일으켰다. 1946년 9월1일,국제청년데이(International youth day) 기념행사가 훈련원 (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1915년 10월3일에 제1회 대회를 가진 국제청년데이란 진보적인 청소년들의 세계적 조직으로 이듬해부터는 9월 첫 일요일에 하던 행사를 1932년 이후 9월1일로 바꿔 실시했다. 한국에서는 해방후 처음 열린 이 청년축제에 10만명이 운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날 식전에서는 평론가김오성(金午星)이 구속되는 등 이미 파란이 예상되었는데,시인 유진오는 축시낭독을 위해 특별초청을 받았다.문장 한토막씩을 띄어가며 격정적으로 특유의 몸짓을 해가며 청중을 사로잡는 것으로 이미 명성이 나있던 유진오로서는 가장 많은 독자 앞에 서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 ○친일파를 ‘망령영감’ 야유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두 팔에 힘을 주어 버티는 것은/누구를 위한 붉은 마음이냐?”고 서두를 꺼낸 유시인은 “왜놈의 씨를 받아/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머리를 숙여/생명과 재산과 명예의/적선을 빌고 있다/누구를 위한/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고 포효하면서 “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뿌우연 밀가루에 부풀어 오르고도/삼천오백만불의 빚을 걸머지고”있다면서 미군정을 정면으로 매도함과 동시에 보수세력(친일파)을 “망령한 영감님”이라 야유하면서 “지옥으로 쫓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여 참석자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그의 시낭독 기교가 탁월하다는 말은 곧 미군정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여,행사 이틀뒤인 9월3일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피검,분단문학사의 첫 필화사건의 주인공으로 부각된다.이 낭송의 투사시인에게 문학가동맹측은 ‘인민의 계관시인’이란 찬사를 보내면서 석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나 10월 군사재판에서 이 시인은 1년 징역형을 선고 받아 약 9개월 복역한 뒤 석방(1947.5)되었다. 문학가동맹의 문화공작대 제1대 소속으로 경남지방을 순회(47.7)하고 돌아온 이듬해 그는 행운의 해를 맞는다.시집 ‘창’(정음사,48.1)을 낸데 이어 5월,창경국민교 여교사 김금남(金今男)과 결혼,1년 뒤 딸(香濬)을 얻는다.겉보기로는 이 시인에게 가장 행복했던 이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는 조직으로부터 지리산 문화공작대장 파견 지령을 받고 입산(49.2.28), 여순병란(麗順兵亂)사건의 주모자 김지회(金智會)부대에 합세하나 ‘싸우다 쓰러진 용사’란 시를 낭독하는 등 한달간 머물다가 하산명령으로 내려오던 중 남원지역 민보단(民保團)에 피체(49.3.29)돼 서울로 압송,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49.9.30)를 받는다. 집안 어른이 앞장서 안재홍 신익희 등 정계 거물들의 탄원 서명과,시인과 이름은 같으나 전혀 다른 유명한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를 동원하여 무기감형(49.11.7)에 성공,서대문교도소에 복역 중 그는 운명적인 전주로 이감된다(50.3).그 석달 뒤 일어난 6·25는 서울의 모든 죄수들이 석방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대전 이남지역 교도소 수감자들 중 특수한 사람들은 ‘긴급처형’ 되었는데,유진오는 6월29일 새벽 30여명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아,솔직히 말하면 나는 살고 싶다.살아서 내 생존의 확인인 시를 쓰고싶은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사시나무 떨리듯 엄습해 오는 이 공포는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째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얼굴이 보고 싶으냐? 어째서 밤이면 두고 온 아내와 딸아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지는 것이냐?” ○신익희 등 거물 탄원 서명 논픽션에 가까운 강준식의 소설 ‘어둠을 찾아서’에서 인용한 유진오의 옥중수기중 한 부분이다.이렇게 해서 한 시인,민주주의와 자유를 사랑하던 한 시인은 사라졌고,분단체제는 그의 모든 미학과 사랑까지 불온시해 버렸다. 참고로 그의 작품은 평론가 오성호의 노력으로 ‘창’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음을 덧붙인다. “시인이 되는 것은 급하지 않다.먼저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겠다”던 이 시인의 불온성은 해방공간의 홍역이었을 따름이지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로 전이될 성질은 아니다.지금은 오히려 역사적 진실의 복원이 절실한 시기가 아닌가.여기까지가 문학평론가의 몫이다.왜냐 하면 아직도 유진오의 이야기는 끝이 안났기 때문이다. 그와 약간의 인척관계에 얽혀있는 작가 강준식의 소설에 따르면 유진오는 처형의 순간을 교묘히 넘겨 살아남아 어린 딸을 형수에게 맡기고 아내와 월북했을 수도 있다는 설득력있는 가설을 제공하고 있다.이쯤되면 대체 비평가의 글이란게 하잘 것 없는 거짓부렁이일 수도 있음을 통감한다.누가 문학사를 바로 잡을수 있는가.국민과 정부와 연구자 모두의 협력이 절실하다면 과장일까.
  • 高大 석좌교수된 朴銖吉 前 유엔대사(인터뷰)

    ◎“35년 외교경험 후학들에게 전수할터” “35년간의 외교관 경험을 이제는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데 남은 힘을 기울이렵니다” 지난 1일 사표를 낸 朴銖吉 전 유엔대사가 27일 작별 인사차 외교통상부에 들렀다. 제네바와 캐나다 유엔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친 朴전대사는 “고시 13회 동기인 洪淳瑛 장관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직했다”고 밝혔다. 초임 외교관 시절 사통팔달로 뻗어있는 미국 LA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국민소득 80달러의 가난한 조국 생각에 눈물 흘렸다는 그는 “재능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후배들에게 우리 외교를 물려주게 돼 마음 편하게 외교계를 떠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朴전대사는 그동안 외교관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대한항공기 폭파범 金賢姬 사건을 꼽았다. 당시 외무부 제1차관보였던 그는 金賢姬를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바레인 정부와 피말리는 줄다리기를 벌였었다. 유엔대사 시절 안보리 의장을 맡기도 했던 朴전대사는 “비록 이사국이 교대로 맡는 의장직이지만 발언권도 투표권도 없는 옵서버 시절을 돌이켜 볼 때 감회가 남달랐다”고 토로했다. 朴전대사는 이제 모교인 고려대 석좌교수로 새 인생을 설계한다.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그가 맡은 과목은 국제기구론’. 앞으로 1년 동안 유엔 안보리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 회고록을 집필할 구상도 하고 있다.
  • 음악극 ‘천명’ 국립극장 25돌 기념공연

    ◎우리가락에 실은 녹두장군 생애/동학혁명 전개과정 전봉준 인간적 모습에 초점/무거운 주제 음악으로 이해도와 현대사회에서 문화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띄고 있다.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단계에서 철학과 종교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국립중앙극장이 장충동 개관 25주년을 기념해 특별공연으로 마련중인 음악극 ‘천명(天命)’은 역사적 무게가 느껴지는,후자에 속하는 공연이다.동학혁명을 주도한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애를 토속적인 우리 가락에 실어 소개할 이번 작품은 요즘 유행하는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시간때우기용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의미있는 무대다. 김용옥 원작에,박범훈 작곡,손진책 연출로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지난 94년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된 작품을 이번에 다시 손질해 무대에 올린다.작품의 소재는 물론이고 판소리 등 우리 음악적 요소가 진하게 배어있는 무대로 출연인물만도 국립극단과 창극단,무용단,합창단,국악관현악단 등 국립극장 전속단체가 총출연하는 대규모 공연으로 300여명에 이른다. 반봉건,반외세의 기치아래 구질서를 타파하고 밀려드는 외세에 맞서 근대 사회를 이룩하려는 사회변혁운동으로,우리 현대사의 원류가 되는 동학혁명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이를 주도한 녹두장군의 삶이란 다소 버겁고 무거운 주제를 음악에 실어 좀더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꾸몄다. 전봉준을 주제로 하되 동혁,복례란 평범한 농민부부를 내세워 당시 서민들에게 전봉준과 동학사상이 어떻게 비춰졌는지를 설득력있게 그려낸다.전봉준은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 왕기석이,해월 최시형은 김종엽,동혁부부는 주호종·안숙선이 나서고 원로 연극배우 장민호 백성희도 고종과 촌로로 무대에 오른다. 연출가 손진책은 “그동안 전봉준을 다룬 공연물은 많았지만 일부분을 부각시키는데 그쳤다”면서 이번 작품은 동학혁명의 전개과정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면서도 전봉준 개인의 영웅담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또 역사적인 사실 전달과 함께 음악적 완성도로 더 큰 감동을 안겨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봉준의 압송장면으로 시작되는 ‘천명’은 농민군의 봉기와 청·일군의 가세,농민군의 제2차 봉기로 이어져 일본군의 우세한 신무기에 밀려 궤멸당하고 마는 공주성 우금치 전투장면에서 하이라이트를 이룬다.그리고 전봉준의 처형장면으로 막을 내린다.1895년 그의 나이 42세였다. 100여년전 전봉준과 농민군이 보여준 역사적 의미는 기록으로만 끝나지 않고 경제적 위기를 맞아 허둥거리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으로 다가설 것이다.10월10∼13일 국립극장 대극장.평일 오후7시30분,토·일 오후 4시.(02)274­1151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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