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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기 탈취범은 특수부대 출신 “사업실패로 한탕하려 범행”

    동해안 총기 탈취사건 용의자 3명이 사건발생 17일만인 5일 오전 서울과 경기도에서 모두 검거됐다. 이들이 탈취했던 총기 2정과 실탄 30발, 무전기 등도 이날 경기도 하남시 모 낚시터 인근에서 모두 회수했다. 군·경합동수사본부는 이날 오전 8시30분∼9시 사이 경기 하남시에서 2명, 서울 송파지역에서 1명 등 용의자 3명을 각각 검거해 수사본부인 강원도 동해경찰서로 압송,1차 조사를 벌인 결과 용의자중 한명이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고 밝혔다. 용의자 박모(35·서울 송파구 오륜동), 원모(35·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김모(27)씨 3명은 특수부대 선후배 사이인 것으로 파악됐다. 합동수사본부는 박씨가 친구 원모씨와 후배 김모씨를 끌어들여 총기탈취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수사본부는 범행동기에 대해 박씨는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친구 원씨가 “박씨가 사업실패 등으로 돈이 필요해 총기를 탈취하기로 했다.”고 진술하고, 김씨도 “형(박씨)이 총이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해 범행을 하게 됐다.”고 말한 점으로 미뤄 사전에 준비해 저지른 것으로 보고 집중 조사 중이다. 특히 박씨는 사건 당일 약 5시간30분 가량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범행을 사전에 준비했다는 의혹을 갖게 했다. 또 이들은 지난달 17일 오후 8시쯤 서울 강동구 모 아파트 주차장에서 서울34허 호 승용차의 앞·뒤 번호판을 절취해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들중 박씨의 그랜저 승용차(서울 54러 )와 원씨의 소렌토 차량이 범행추정 시간대인 지난달 20일 오후 10시20분쯤 동해요금소를 빠져나와 서울 방향으로 간 것이 고속도로 CCTV에 포착된 점에 착안, 동해요금소에서 낸 통행권의 지문감식을 벌여 이들의 신원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팀은 사건발생 시간대에 맞춰 강릉·동해·서울요금소를 빠져 나간 차량의 통행권을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 정밀감식, 서울요금소 통행권에서 박씨의 지문을 채취하고 박씨가 그랜저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용의자들은 사건 직후 모두 중국으로 잠시 도피했다 지난 1일 귀국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이들은 지난달 20일 오후 10시10분쯤 동해시 천곡동 해안초소 순찰을 하던 육군 모부대 소초장 권모 중위와 통신병 이모 상병에게 접근, 흉기를 휘둘러 부상을 입히고 K-1 소총 1정과 K-2 소총 1정,15발들이 탄창 2개, 무전기 1대 등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동해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검찰 “김우중 로비 단서있다”

    검찰 “김우중 로비 단서있다”

    정부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국내외에 타인 명의로 숨겨놓은 은닉재산을 끝까지 추적, 환수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친지나 측근들이 보유한 재산에 대해 ‘소유권 확인소송’도 제기할 방침이다. 14일 재정경제부와 예금보험공사에 따르면 정부는 검찰 조사와는 별개로 김 전 회장의 은닉재산을 추적, 과거 분식회계로 금융기관이 입은 피해를 최대한 만회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날 대검찰청 1층 조사실로 압송된 김 전 회장은 조사에 앞서 “1999년 1월 당시 채권단과 임직원들은 총수가 국내에 있으면 그룹을 정리하는 데 곤란하니 잠깐 나가달라며 해외도피를 권유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2003년 포천지와의 인터뷰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정부 고위관리가 설득,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재경부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의 재산을 추적했으나 1999년 10월 이후 해외도피 중이어서 실체를 밝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검찰 조사가 진행되면 국내외로 빼돌린 은닉재산의 전모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대검 중앙수사부(부장 박영수)는 김 전 회장을 상대로 41조원의 분식회계와 9조 2000억원의 사기대출,25조원의 외화밀반출 등의 혐의와 정·관계로비 의혹을 캐물었다.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 혐의를 대체로 시인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을 상대로 정·관계 로비와 관련해 몇가지 추궁할 단서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르면 15일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예보는 김 전 회장의 가족이나 친지, 대우그룹의 전 임직원과 비서진 등 측근 명의로 된 재산과 영국금융센터(BFC)나 폴란드, 우즈베키스탄의 해외지사를 통해 김 전 회장이 빼돌렸을 자금에 대해서도 조사에 나설 방침이다. 예보 관계자는 “친지나 측근 명의의 재산 가운데 상당수는 김 전 회장의 소유일 가능성이 높다.”며 “검찰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의심가는 재산이 나타나면 ‘소유권 확인소송’부터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우그룹의 분식회계와 관련해 금융기관이 입은 피해액은 3조 8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공적자금 16조 6000억원이 투입된 10개 금융기관과 (주)대우는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 전 임직원을 상대로 23건에 249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예보는 그동안 포천 아도니스골프장 등 가족들이 보유한 재산 600억원을 포함해 김 전 회장이 갚을 수 있는 ‘책임재산’을 1600억원, 대우 전 임직원의 보유재산을 900억원으로 평가해 소송규모를 정했다. 예보 관계자는 “손해배상 청구액이 금융기관 피해액의 10%도 안되는 이유는 피해액 전체를 상정했을 때 소송비용이 워낙 커 일단 승소시 받아낼 수 있는 한도만 상정했기 때문”이라며 “검찰수사에서 은닉재산이 드러나면 추가로 소송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과 관련된 소송은 12건으로 청구금액은 1611억원이다. 백문일 안미현 박경호기자 mip@seoul.co.kr
  • [사설] ‘책임지러 귀국했다, 죄송하다’

    어제 새벽 귀국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이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또 대검찰청에 압송된 직후 “책임지러 귀국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사죄의 글’에서도 “이제 실패한 기업인으로서 과거의 문제들을 정리하고자 수구초심의 심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밝혔다. 우리는 이같은 사죄의 변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김 전 회장에게 몇가지 주문을 하고자 한다. 김 전 회장은 그의 귀국을 맞이하는 상반된 두가지 분위기를 실감했을 것이다. 특히 대우피해자대책위원회와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를 비롯해 민주노동당·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즉각 처벌’‘사면 불가’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인 데 대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본인으로서는 섭섭하고 억울했을지 모르지만 이같은 분위기에서 스스로 말한 ‘책임’의 무게를 다시금 절감했으리라 믿는다. 대우그룹이 무너진 과정과 그 자신의 처신에 관해 김 전 회장이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 부분은 적지 않다. 먼저 분식회계가 41조원, 사기대출이 9조원, 외환유출이 25조원에 이른다는 혐의에 대해 실상을 밝혀야 한다. 비자금 수조원을 조성, 지난 1997년 대선에서 정치자금을 뿌리고 그후 대우 퇴출을 막기 위한 로비 자금으로 썼다는 의혹도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아울러 본인이 해외로 빼돌렸거나 국내에 은닉한 재산이 있다면 이를 공개하고 국고에 반환해야 한다. 이같은 일이 실행된 다음에야 우리 사회는 김 전 회장이 쌓은 공에 관해서도 새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김 전 회장이 ‘사죄의 글’에 담은 뜻을 그대로 실천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 [김우중 ‘판도라 상자’ 열리나] 김前회장 “채권단이 해외도피 권유”

    14일 귀국하자마자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로 압송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이날 밤 10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밤은 새우지 않더라도 자정 가까이까지 조사하던 관례를 깬 것은 김 전 회장의 건강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이 심근경색 수술을 받은 데다 장협착 증세까지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를 지시한 혐의를 인정했다. 김 전 회장은 이날 북어국과 된장찌개, 김치찌개로 식사를 하고, 조사가 끝난 뒤 대검 조사실에서 잠을 청했다.●‘김우중 리스트’ 단서 있다 검찰은 구속기간인 20일 동안은 김 전 회장의 혐의인 41조원 분식회계 및 9조 2000억원 사기대출,25조원의 외환밀반출 등 주요 혐의사실을 규명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의 재판과 수사기록만 1t트럭 한 대 분량으로 목록 작성만 3일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후 검찰의 수사는 ‘김우중 리스트’로 향할 것으로 보인다.2002년 공적자금비리 특별수사 본부장으로 대우비자금을 수사했던 김종빈 검찰총장은 이날 “김 전 회장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해 조사하지 못했던 부분을 집중적으로 수사하겠다.”고 밝혔다.김 전 회장은 해외 비밀 금융조직(BFC)과 계열사 매각을 통해 5조∼10조원의 비자금을 조성, 대우그룹 퇴출저지 등에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뇌물 혐의가 한두개 남아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의혹과 관련해 추궁할 단서가 몇 개 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이 해외로 도피하게 된 배경에도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이날 검찰에서 1999년 10월 중국 옌타이 대우자동차 중국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뒤 종적을 감출 당시 “채권단과 임직원의 권유를 받아 도피생활을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검찰은 김 전 회장이 2003년 1월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천과 인터뷰에서 “도피를 권유한 것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고위 관리들”이라고 밝힌 내용은 별도로 확인하지 않아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김 전 회장은 또 1987년 4월 ‘세계경영’의 일환으로 동구권 진출을 위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그동안 독일과 수단, 프랑스, 베트남 등지를 왕래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 전 회장은 “다른 재판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귀국을 미뤄왔으며 대우사태에 최종 책임을 지기 위해 귀국했다.”고 말했다.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김우중씨 “책임지기 위해 귀국”

    김우중씨 “책임지기 위해 귀국”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김우중(69) 전 대우그룹 회장이 14일 오전 5시 50분 베트남 하노이 발 아시아나항공 OZ734편으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해외도피 5년 8개월 만이다. 김 전 회장은 법무대리인과 아주대 의료진 2명 등과 동행했다. 대검 중앙수사부(부장 박영수)는 인천공항에 도착한 김씨에 대해 바로 체포영장을 집행해 대검찰청으로 이송,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분식회계 사건과 아울러 1999년 대우그룹 퇴출저지 과정에서 제기된 각종 정·관계 로비의혹과 함께 김 전 회장 개인의 회사자금 유용 등 개인비리도 조사할 방침이다. 박 중앙수사부장은 13일 “김씨의 변호인 측에서 자수서와 수사재기 신청서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검찰 고위관계자는 “김씨에 대한 질문사항만 A4용지 100장에 이른다.”면서 “지난번 대우그룹 수사에서 비자금 사용처 등 대부분의 사항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김씨를 상대로 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일단 15일 밤늦게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신병을 확보한 뒤 수사를 계속할 계획이다. 김씨는 41조원의 분식회계를 하고 9조 2000억원의 사기대출을 받는 한편 25조원의 외화를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지난 2002년 공적자금비리 수사 당시 대우자동차판매 등을 통해 송영길 열린우리당 의원, 최기선 전 인천시장, 이재명 전 민주당 의원 등에게 정치자금과 뇌물을 제공한 혐의도 밝혀졌지만 해외 도피 중이어서 기소중지됐다. 아울러 검찰은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 때 독점규제법 위반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고발한 사안도 수사할 계획이다. 그러나 인천지검의 근로기준법 위반, 서울중앙지검의 1999년 이후 분식회계에 대한 고소·고발 사건 등 김 전 회장을 상대로 한 다른 형사사건의 경우 대검의 1차 수사가 끝난 뒤 수사할 계획이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긴장의 EEZ’ 재발 가능성

    울산앞 바다에서 이틀 동안 벌어졌던 사상 초유의 한·일 경비정 해상 대치사태는 앞으로 한국과 일본 어선들의 EEZ 침범 사례에 교훈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해사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어선의 일본구역 EEZ 침범논란에서 비롯된 이번 한·일 해상대치는 한·일사이 최근 불편한 외교상황과 맞물리면서 자존심 겨루기로 비화되는 바람에 현장에서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으로 풀이했다. 사태 발단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리나라 어선이 잘못했다는 의견이다. EEZ를 넘어 항해는 자유롭게 할 수 있으나 어업이나 자원채취를 해서는 안되며 당사국이 EEZ 침범을 이유로 검문을 요구하면 응해야하는데 신풍호가 불응한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더구나 신풍호가 일본 보안관 2명을 태운 채 우리나라 쪽으로 달아나는 바람에 일본 순시선이 끝까지 따라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측 순시선도 단속과정에서 과잉행위를 해 사태를 확대시켰다. EEZ구역 안에서 조업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은 상황에서 어선에 보안관이 강제로 올라타 시설물을 부수고 어민을 폭행까지 한 행위는 분명히 잘못됐다는 것이다. 해경 외사계 관계자는 다른 나라 어선이 EEZ를 침범했을 경우 추격하다 자기나라 해역으로 달아나 버리거나 현장에서 검문을 해 조업증거가 드러나지 않으면 주의를 촉구하고 마무리하는게 통상적인 관례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경우 일본 보안관이 어선에 강제로 올라타 폭행을 하고 우리나라 어선도 보안관을 태운 채 우리나라쪽 해역으로 도망오는 바람에 사태가 커졌다는 해석이다. 해경측은 신풍호가 필사적으로 도주하게 된 데는 최근 일본이 EEZ 침범행위에 대해 강경대응키로 내부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져 어민들이 나포되면 조업여부와 상관없이 일본으로 압송돼 담보금을 내고 풀려나야 하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판단했다. 해양대학 법학부 이경호 교수는 “이번 사태의 경우 국제관례로 볼 때 양측관련자가 잘못된 부분을 서로 사과하고 우리나라 어선과 선원은 당사국인 우리나라가 데려와 법에 따라 처리한 뒤 결과를 일본측에 통고해 주는 게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으로 판단된다.”면서 “두 나라가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원만한 방향으로 해결한 것은 앞으로 한·일관계를 위해서도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EEZ침범여부로 검문에 응하지 않고 달아나다 붙잡히면 ‘배타적경제수역에서의 외국인 어업 등에 대한 주권적 권리행사에 관한 법’에 따라 벌금형 처벌을 받게 된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朴정권 ‘3대 미스터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은 김대중 납치사건, 정인숙 피살사건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3대 미스터리 사건’으로 꼽힌다. 김 전 부장은 1963년부터 6년 3개월간 역대 최장수 중정부장 자리를 지키다 경질된 뒤 1973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1977년 6월 22일 박동선 로비 사건을 조사 중이던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 증언대에 서면서 정권의 표적이 됐다. 김 전 부장은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를 나선 이후 실종됐다. 그동안 국가기관과 마피아 등 조직범죄집단의 개입설과 북한의 배후설 등 논란만 무성했다. “파리에서 중앙정보부원에게 살해돼 무거운 추에 매달려 센강에 던져졌다.”“비밀리에 청와대로 압송돼 청와대 지하실에서 사살당했다.”“프랑스의 한 양계장 분쇄기에 갈려 숨졌다.”는 식의 억측만 나돌았다. 26일 진실위의 발표대로라면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여부는 사실상 영원히 풀리지 않을 미제로 남게 됐다. 김 전 부장은 1991년 서울가정법원에서 ‘84년 10월 8일 사망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실종선고 판결을 받았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2)제주·전라 잇는 42개섬 ‘추자군도’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2)제주·전라 잇는 42개섬 ‘추자군도’

    행정구역명은 북제주군 추자면이다. 그런데 추자도에서 제주도 토박이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대개 호남 말씨다. 남도 사투리의 ‘징함’이 빠진 채 표준화되어 조금은 무미건조하다. 공무원들을 만나 보면 조금 달라 제주도 말투가 엿보인다. 자연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간지대라고나 할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전라남도 영암·완도군 등에 딸린 섬이었다.1946년 북제주군에 편입됐으니 불과 60여년 전이다. 재미있는 것은 1831년에 잠시 제주목에 이속됐다가 1891년에 완도군이 창설되면서 이곳으로 되넘어간 기록이 나온다. 좀 왔다갔다 했지만 그러나 추자도는 틀림없는 호남문화권이다. 뱃길은 여전히 목포로 열려져 있어 농산물 공급은 물론이고 상급학교도 대부분 이곳에서 다녔다. 덕분에 추자도 1세대들은 ‘전라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근래 20여년 전부터 젊은이들이 제주도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 덕분에 그들은 비교적 ‘제주도적’이다. 이곳 공무원들이 대개 제주도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그런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추자도 토박이로 제주도에서 교육받고, 집안에서는 전라도 말을 쓰는 사람의 경우, 그 문화적 정체성은 대단히 복잡하다. 제사나 장례, 세시풍속 등은 확실히 전라도적이다. 반면 제주도 출가 잠녀가 아니라 토박이 잠녀들이 물질하는 형태는 ‘제주도적’이며, 전복이나 소라맛 역시 ‘제주도적’이다. 그러나 묵리의 처녀당에서 해마다 올리는 당제의 명칭과 이때 걸궁이란 풍물굿을 동원하는 것은 ‘전라도적’이다. 풍물굿이 없던 제주도에 ‘걸궁’이 전파된 것이니, 추자도 걸궁은 본디 한반도 최남단의 풍물굿이 아니었던가 싶다. 흥미로운 연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추자도의 이런 중간자적 성격은 예로부터 육지와 제주도의 징검다리였다는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지어졌다. 제주행 비행기에서는 망망한 바다 위에 떠있는 추자군도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가다가 바람을 피해 머물렀다는 곳이 바로 추자도다. 지금도 상추자항의 봉줄리산 기슭에는 최영 장군 사당이 위엄있게 포구를 굽어보고 있다. 옛날에는 추자도를 징검다리 삼아 제주도로 향하였다. 예전에는 추자를 주자(舟子)로 불렀으니, 영암·무안·나주·진도 등 전라남도 남서해안으로 가는 뱃길이었다. 제주도는 애월이나 조천으로 드나들었다. 당연히 이름난 유배지였다. 유배객 중에는 해배 후 되돌아간 이도 있었으나 아예 섬사람이 된 이도 많았다. 정조 때 안조환은 유배 당시 천신만고의 생활상을 이렇게 노래했다.‘출몰사생 삼주야에 노 지우고 닻을 지니 수로천리 다 지내어 추저섬이 여기로다. 도중으로 들어가니 적막하기 태심하다. 사면으로 돌아보니 날 아는 이 뉘 있으리. 보이나니 바다이요 들리나니 물소리라….” 상추자, 하추자로 위·아래 섬이 갈리는데 추자교로 이어져서 이제는 상하 구분이 의미가 없다. 상추자항은 대서·영흥리, 하추자항은 신양리 소속이며, 그밖에 예초·묵리 같은 아름다운 포구들이 흩어져 있다. 단단한 바위밭에 해류가 거칠게 흘러 흐리멍텅한 고기들은 살 수가 없는 곳이다. 참돔이나 감성돔·우럭·농어 같은 고급 어종이 바위밭에서 물살과 씨름하면서 육질을 키우는 까닭에 그야말로 ‘바다낚시의 천국’이다. 도처에 보이느니 낚시꾼들이다. 추자도는 끊임없이 왜구에게 시달렸다. 왜구들은 제 집 드나들 듯 추자군도를 드나들었으며 심지어 20세기 초반까지도 수적(水賊)이란 이름의 바다도둑이 설쳐댔다. 일제시대, 이곳 수산자원에 눈독을 들인 일인들은 대서리에 진을 쳤다. 학교와 조합을 만들고 삼치어업에 매달렸다. 기선급 선박이 엄청난 양의 삼치를 잡아 그대로 상고선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른바 추자도 삼치파시는 이들 일본배들 때문에 이뤄졌다.1000여명이 넘는 ‘뱃동서’들이 일시에 포구로 쏟아져 들어왔으니 술집과 여관이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덩달아 일본 기생도 들어오고, 술꾼들은 취하여 쌈박질을 일삼아 이래저래 ‘난장’이었다. 당시의 여관 흔적 등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일본인이 물러간 다음에도 삼치어업은 이어졌다. 삼치는 예전 방식대로 잡는 즉시 일본으로 수출했으며, 덕분에 파시도 70년대까지 명맥이 이어졌다. 이곳에는 ‘시와다 그물사건’이라는 전설 같은 일제하 어민항쟁이 전해진다.1926년 5월14일, 추자면민들이 대거 운집해 면장과 추자어업조합에 대한 불편과 불만을 토로했다. 형세가 대단히 격렬해 목포와 제주에서 경찰이 들이닥치고, 주동자 21명이 검거, 압송되기에 이르렀다. 어업조합과 면장 등이 공모, 은행 빚으로 어구를 사들인 뒤 2배나 비싸게 팔았는가 하면, 주민 의견을 무시하고 우뭇가사리를 강제 매입해 빚어진 사건이었다. 낌새를 알아 챈 조합장이 주재소와 결탁해 어민들을 억압하려 하자 예초리 남녀 700여명이 함께 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본디 이곳 사람들은 외줄낚시로 필요한 만큼의 고기만 낚았으나 일본인들이 대형 그물로 싹쓸이하듯 고기를 잡아가자 이에 반발한 사건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곳 노인들은 “물반 고기반이었는데 왜놈들이 싹쓸이해 가 그걸 못 보겠어서 다들 일어선 게지.”라고 말한다. 일제의 수탈적 약탈어업이 빚은 필연적 결과였다. 추자도에는 딸린 섬들이 42개나 된다. 돈대산에 올라서니 완도군 청산도가 한눈에 들어 온다. 청산도 삼치파시가 추자도 삼치파시와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구로시오 해류가 흐르는 청산도와 나로도, 추자도 남쪽에 삼치떼가 몰려든 것이다. 추자도 최남단에는 관탈도가 있다. 옛적 귀양객들이 이곳에 이르러 다왔다는 생각에 갓을 벗었다 해서 ‘관탈’이라는 지명이 붙었단다. 관탈도에서는 불과 30분이면 제주항에 닿는다. 그러니 완도-청산도-추자도-관탈도 등이 징검다리처럼 일렬로 늘어서 육지와 제주도를 연결하고 있는 셈이다. 그 옛날 설문대 할망이 제주도와 남해 바다를 만들 때 징검다리는 박아놓은 섬들은 아닐는지. 이곳 토박이인 황필운(38) 선장과의 약속에 맞춰 선착장으로 나갔다. 매일 아침 9시면 정확하게 행정선 추자호가 바다로 떠난다. 횡견도와 추포도를 들러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길게 누워 있는 횡견도의 바람막이 돌담이 이곳의 모진 삶을 웅변해 준다.13가구가 사는 이곳에서 여자들은 물질로 전복·소라 등을 잡고, 남자들은 톳·가사리·미역 등 해초를 뜯어 생활한다. 한때 횡견분교까지 있었으나 잡초만 무성하고, 보리농사로 자족자급이 가능했던 섬이 지금은 인적이 끊겨 한적하다. 추포도는 2가구가 등록돼 있으나 실제로는 1가구만 산다. 낚시꾼들 뒷바라지로 생계를 잇는다. 고도에서 사는 1가구, 결코 쉽지 않은 삶일 것이다. 정 다산이 ‘남도경영’을 부르짖으며 경세유표에서 ‘남도의 섬을 잘 다스려야 재물이 숲처럼 일어서리라.’라고 했건만, 이들 낙도는 오로지 낙도라는 오명만 뒤집어쓰고 파도 아래 잠들어 있을 뿐이다. 요트처럼 빠른 배라면 뭍에서 불과 1시간도 채 안돼 당도할 수 있는 이 ‘보물섬들’이 오로지 ‘떠나가는 섬’으로만 인식되고 있으니 이곳에서도 우리 바다의 미래는 아득하다. 추자군도의 최대 문제는 역시 물이다. 횡견도 같은 섬에서는 아예 빗물을 받아 쓴다.‘물 쓰듯’이라는 말은 이곳에서는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추자 본도에는 담수화공장이 있어 바닷물로 만든 비싼 물을 먹고 산다. 그래서 집집마다 거대한 물탱크 한두 개쯤은 갖추고 있다. 추자도는 아름다운 풍광에 비해 너무나 덜 알려진 섬이다. 강태석 면장은 “청정해역일 뿐 아니라 천혜의 어족자원을 갖고 있어 21세기형 관광에 적합한 곳인데, 문제는 뱃길이지요.” 무인도를 이용한 청소년 자연생태체험학습장과 유료 유어장 등이 면에서 꿈꾸는 올 여름 사업들이다. 제주항에서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아 1일 관광도 가능하지만 배편이 하루에 편도 1회뿐이라 잠을 자고 나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하추자의 돈대산을 오르자 눈 아래 신양항이 굽어보이고, 멀리 전라도 바닷가가 한눈에 잡힌다. 날씨가 맑으면 한라산도 보인단다. 해양성 기후라 바람 심한 것을 빼면 아열대식물도 생존 가능한 곳이다. 그래선지 곳곳에 동백이 유난히 많다. 추자도에 딸린 사수도는 상록활엽수림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져 있고, 여기에 흑비둘기와 슴새들이 번식해 1982년 천연기념물(333호)로 지정되었다. 전복, 소라, 미역, 톳, 천초가 지천인 곳이 이곳 말고 또 어딨겠는가. 아, 그런데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상식이 하나 있다. 추자도 특산품하면 대개 멸치젓을 꼽곤 한다. 지금도 멸젓이 팔리고는 있지만 오늘날 추자도의 최고 특산은 ‘추자굴비’다. “어획량은 최고지만 문제는 덜 알려졌다는 점”이라는 김금충 수협 상무의 말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조기들이 동중국해에서 추자도 근해로 몰려오기 때문에 해마다 엄청난 양이 잡힌다. 예전에는 그대로 영광 등지에 생조기로 출하했으나 이제는 아예 굴비로 말리고 있다. 어족이란 참으로 묘한 것, 칠산바다를 떠돌던 조기들 간 곳 몰라 했더니 추자도에 운집했었나 보다. 지금 추세라면 법성포 굴비 못지 않아 ‘추자굴비’ 없으면 차례도 지내지 못할 날이 다가오지나 않을까. 실제로 추자군도에서 최대의 주력품으로 굴비를 키우고 있으니 곳곳에 조기잡이 안강망 어선들이 눈에 뜨인다. 조기를 잡지 않는 비수기에는 돔이나 고등어 낚시로 살아간다. 떠나 오면서, 추자도가 ‘오지’란 생각을 싹 잊어버렸다. 제주항에 1시간 만에 도착했고, 곧장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오는 데 고작 1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스티로폼 박스에 횟감과 함께 넣어 온 얼음이 서울에 도착해서도 그대로이니 ‘멀고도 가깝다.’거나 ‘가깝고도 멀다.’는 야누스적 표현이 모두 맞는 곳이다.
  • 중랑천 갈수기 악취 언제까지…

    경기도 의정부시가 중랑천 건천화에 따른 악취 방지 등을 위해 시작한 ‘중랑천 건천화 예방사업’이 1년여 중단돼 장암·호원동 일대 주민 불편이 계속되고 있다. 중랑천 건천화 예방사업은 지난 2003년초부터 오는 2009년까지 중랑천 서울시계∼양주시계 9㎞ 구간에 3단계로 나눠 송수관을 매설, 하수처리시설을 거친 방류수를 상류로 끌어올려 흘려보냄으로써 악취 방지와 미관·생태복원효과를 거두려는 것으로 10억여원을 들여 2003년말 1단계 사업을 완료했다. 이에 따라 장암동 하수처리장∼동막교 0.9㎞ 구간에 송수관과 압송 펌프 2대가 설치돼 전체 방류수 18만t 가운데 2만 5000t이 동막교로 보내지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동막교∼양주시계 8.1㎞ 구간은 2007년말까지 한시적으로 사용되는 자동차전용도로 아래에 송수관을 묻어야 하기 때문에 공사를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로인해 중랑천은 해마다 갈수기가 되면 부영양화로 모기 등 해충의 개체수가 크게 늘고 심한 악취가 발생, 인근 주민들의 피해가 되풀이되고 있다. 특히 중랑천은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항상 수량이 부족해 1단계 사업후 인근 상류로 보내지는 적은 양의 방류수로는 악취개선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는 악취예방을 위해 우선 내년 초 300억원(국비 70%, 시비 30%)을 들여 악취유발 성분인 질소와 인을 줄이는 고도처리시설을 하수처리장내에 설치하고,2008년 나머지 공정을 재개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고도처리시설이 완료되면 악취로 고생하는 주민들의 불편이 다소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의정부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儒林(341)-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1)-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의 이러한 태도는 집안의 가풍이었다. 퇴계의 아버지 이식도 퇴계가 쓴 묘갈문의 내용처럼 ‘세상의 뜻을 얻기보다 학도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가르쳐 주는 뜻’을 가졌던 초야의 선비였다. 퇴계는 조광조처럼 과격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썩은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사림파’의 정신은 높이 존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퇴계는 과감히 조광조의 행장을 지어 그의 공을 기렸으며, 뿐만 아니라 시강(侍講)을 통하여 왕에게까지 조광조의 인품과 학행의 비범함을 알려 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가 처음으로 성균관에 유학하고 있을 무렵에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직후였으므로 유생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퇴계의 아버지 이식이 연산군의 폭정에 실망하여 과거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처럼 퇴계 역시 어지러운 정치에는 애초부터 마음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퇴계는 4년 전인 45세 때 직접 사화에 연루되어 혹독한 체험까지 하게 된다. 을사사화는 명종 원년(1545년)에 일어난 권력쟁탈전으로 퇴계 역시 사림파로 몰려 주동인물인 이기(李 ) 등에 의해서 삭직되었다. 그러나 퇴계의 형 대헌공(大憲公)은 을사사화의 중핵에 말려들어 매를 맞고 갑산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다가 세상을 떠나는 참극을 맞게 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은 이기의 조카인 이원록(李元祿)의 역간(力諫)에 의해서 환직되었으나 형의 참혹한 죽음은 퇴계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으며, 퇴계로서는 그 참극의 현장에서 벗어나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대로 학문의 길을 정진하고 싶은 결심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퇴계가 형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였던가는 ‘언행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제자 우성전(禹性傳)으로 그의 아버지는 우언겸(禹彦謙)이었다. 우언겸은 금부도사가 되어 퇴계의 형 해를 갑산까지 압송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의 사정을 우성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생의 넷째 형인 대헌공이 죄를 입음으로 갑산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성을 나서자 곧 세상을 떠났다. 이때 아버지가 금오랑(金吾郞)이 되어 대헌공을 호위하여 가게 되었다. 그런데 대헌공의 매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중도에서 그치어 편히 쉬려고 하였으나 아전들이 화를 미칠까 두려워 몇 번이나 간하였으나 듣지 않아서 거의 간사한 무리들에게 해를 입을 뻔하였다. 훗날 이 이야기를 알고 있던 선생은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내 형 대헌공이 성주(城主:성전의 아버지 우언겸이 안동판서로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었다)에게 본래부터 크게 은혜를 입은 일이 있었으나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일이라 이때까지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하고 곧 흐느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초상(初喪)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퇴계는 억울하게 죽은 형의 죽음을 항상 처음인 것처럼 슬퍼하고 이를 생각할 때마다 통곡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불과 4년 전. 퇴계를 태운 말은 우쭐우쭐 죽령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고개를 오를수록 늦서리를 맞은 만추의 단풍이 꽃보다 더 붉어 피를 토하는 듯하였다. 순간 퇴계의 가슴으로 어머니와 억울하게 죽은 형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들어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특히 해는 퇴계와 더불어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항상 함께 다녀 금과 같은 형제이자 옥 같은 벗이었던 각별한 존재였다.
  • “중정에서 고문 받을때도 ‘인혁당’ 한마디도 안나와”

    “조사과정에서 ‘인혁당’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대표적인 반유신운동의 제물이자 광복 이후 최대 ‘사법살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던 인혁당 사건. 당시 대구·경북지역에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소속으로 반독재 운동을 벌였던 강창덕(77·대구시 북구 동변동)씨는 2일 “인혁당 사건은 명백한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고 단언했다. 야당과 언론계(그는 영남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이다)를 중심으로 유신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강씨는 1974년 5월6일 체포된 뒤 다음날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로 압송됐다. 강씨는 “남대구경찰서로 끌려가 밤새도록 자행된 구타와 물고문을 이기지 못해 조서에 도장을 찍었다.”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경찰·검찰 조사를 거치고 중정 지하 고문실에서 조사받을 때도 수사관 어느 누구로부터도 ‘인혁당’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고 강씨는 항변했다. 강씨는 “중정에서 조사받을 때 차출된 경찰관들이 원고를 갖고 들어와 그 내용대로 신문했다.”며 조작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강씨는 긴급조치 1호(유신헌법에 대한 부정적 논의금지)와 긴급조치 4호(민청학련 관련활동 금지) 위반, 국가보안법(반국가단체 조직)·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의 중죄가 씌워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1차 인혁당 사건과 같은 목적의 반국가단체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공소장을 보고 나서야 강씨는 어마어마한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공소장도 2시간여 만에 뺏겼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 학원강사로 일하며 반유신운동을 벌이다 15년형을 구형받았던 임구호(57·대구)씨는 “공소장에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적혀 있었다.”며 인혁당 사건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수사당국의 발표를 부인했다. 임씨는 “서대문구치소 부소장실에서 조사받을 때 검찰 수사관이 책상 밑의 종이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읽고 서기가 받아 썼다.”며 짜맞추기식 수사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수사 총책임자였던 이용택(74·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장) 당시 중정 6국장은 “수사당국이 고문에 의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려고 작정했다면 북한과의 관계를 왜 못 캐냈겠냐.”며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반박했다. 그러나 이 전 국장은 대법원 선고 20여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사실에 대해 “1차 인혁당 사건 뒤 간첩 3명이 잡혔는데도 10년 후 다시 불법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박 전 대통령이 인혁당 관련자들을 좋지 않게 봤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고성&아산, 충무공 구령맞춰 야야호호

    고성&아산, 충무공 구령맞춰 야야호호

    변함없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존경받는 위인이다. 온갖 시련을 겪고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고안한 발명가로, 어린이들의 영원한 우상이자 어른들도 전략가로서 공의 리더십을 본받고자 한다. 독도와 역사왜곡 등 일본의 도발로 민족의 감정이 상한 요즘, 공의 나라사랑에 새삼스럽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28일은 충무공 탄신 460주년 기념일. 충남 아산과 경남 고성의 당항포 등 전국에서는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했다. 어린이에겐 역사체험과 한민족 자긍심을 심어주기에도 좋다. 왜적을 수장시킨 공의 발자취를 따라 아산과 당항포로 떠나보자. 고성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아산 글 사진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고성 고성읍에서 14번 국도를 따라 10여분 가면 나오는 곳이 배둔. 여기서 오른쪽으로 4㎞쯤 가면 당항포가 나온다. 현지 노인들은 당항포보다 ‘속싯개’로 더 많이 부른다. 꼬불꼬불한 들길과 야트막한 산을 넘어 언뜻언뜻 파란 바다가 길게 보인다. 국민관광지란 이정표가 잘 돼 있어 길 잃을 염려는 없다. 마산에서 같은 국도로 오면 30여분 걸린다. 햇살에 힘이 느껴질 만큼 봄볕이 짙다.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강인듯 싶은 좁고 긴 S자형 해안선이 따라온다. 차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청량감이 든다. 바다와 거의 같은 높이의 도로여서 찰랑거리는 물살소리도 들린다. 건너편의 거류산도 녹음이 벌써 짙어진다. 겨울철이면 ‘국민마라토너’ 이봉주가 내려와 훈련하는 곳도 보인다. 당항포 드라이브 코스가 절경이다. 4월 중순 어느날, 마침 고성 은혜어린이집 어린이 40여명이 실물 크기의 거북선에서 현장체험 학습 중이었다. 인솔 교사 황실씨가 “이게 뭐예요?”라고 묻자 어린이들은 “거북선요.”라고 일제히 답한다.“누가 만들었죠?”,“이신순장군요.” 어린이들이 거북선 안으로 들어가 노를 젓는가 하면 함포를 발사하기도 했다.“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왜 만들었죠?”라고 묻자 “나쁜 사람들 혼내주려고요, 일본을 무찌르려고요.”라고 병아리처럼 입을 모았다.“심심해서요”라는 엉뚱한 답도 나왔다. 충무공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숭충사와 함께 전승기념탑도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에서 왜적을 2차례 격파,57척을 수장시킨 곳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엔 26척 가운데 25척을 격파했다. 왜적들이 상륙해 민간인을 해칠 것을 우려해 1척을 남겨두고 철수하는 척했다. 다음날 왜적 100여명을 싣고 철수하는 마지막 왜선마저 수장시켰다.2년 뒤인 1594년에도 도망치던 왜선 31척을 격파했다. 충무공이 유일하게 2차례 출전, 크게 이긴 대첩지이다. 당항포 해전의 승리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전한다.‘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전하는 기생 월이의 설화다. 대대적인 침공을 앞두고 일본은 밀정을 급파, 조선의 지도를 그려 오게 했다. 이를 눈치챈 무기정의 기생 월이가 밀정을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게 한 다음 당항만이 바다로 연결되는 것처럼 지도를 조작했다는 것. 실제로 진해만쪽에서 보면 바다로 연결될 것처럼 길게 이어졌다. 이후 왜군을 속였다 해서 당항포를 ‘속싯개’로 부른다. 관과 민이 혼연일체가 된 셈이다. 해전관에는 이같은 설화와 해전 당시의 전략 등을 영상을 소개하고 있다. 또 지구의 역사와 생명의 진화, 조류 및 파충류 등의 자료 1700여점을 전시한 자연사관도 어린이들의 학습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가장 특이한 것은 국내 유일의 자연석 조각공원인 수석 전시관. 세계에서 수집한 자연석이 모두 630여점이 있지만 현재 28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이런 만큼 주민들이 먼저 기념사업회를 결성하는 등 당항포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긍지가 생길 일이 하나 더 있다. 내년 4월14일부터 6월4일까지 고성공룡엑스포가 열리기 때문이다. 당항포는 상족암만큼은 아니지만 공룡발자국 화석이 심심찮게 발견된 곳이다. 인구 5만∼6만의 조그만한 군단위에서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여 자부심이 더욱 높다. 당항포의 입장료 어른 4000원, 어린이 1000원, 주차료 별도. 고성군관광지관리사업소(055-670-2801). 이밖에도 와룡산 향로봉 중턱의 운흥사는 충무공이 승병을 지휘하던 사명대사와 수륙 양동작전 논의차 세번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055)835-8656. 경남 삼천포항에서 77번 지방도를 따라 10여분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빠지면 상족암이다. 현지에선 ‘쌍발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항포가 비교적 최근의 역사현장이라면 상족암은 ‘하늘이 열리’던 까마득한 선사 이전의 유적지다. 꼬불꼬불한 도로를 내려가면 바닷가 제전마을에 닿는다. 바닷가 자갈밭에 파도가 살랑거린다. 옆쪽에는 소나무 분재를 이고 있는 바위층이다. 바위층을 자세히 보니 모두 가로로 일정한 층을 이루고 있었다. 시대별로 형성된 흔적이다. 서재에 책이 켜켜이 쌓인 듯 지구의 역사를 기록한 지층이다. 공달용 공룡박물관 학예사는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인데 여기는 1억년 전의 지구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자연사박물관’”이라고 설명했다. 나무를 만든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저게, 공룡 발자국 화석”이라며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돌덩이가 둥글면서 움푹 꺼졌다. 조금 더 가니 마치 두 발로 걸은 듯이 발자국 화석이 길게 늘어섰다. 서울에서 새벽에 나섰다는 김상국(강남 청탑학원장)씨가 같이 온 자녀에게 “이게 공룡 발자국이야.”라며 설명했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자신의 발과 맞춰보다 공룡들의 이름을 들먹이곤 했다. 상족암 일대에는 이렇게 산재한 공룡 발자국 화석이 2100여개가 있다. 대표적인 공룡은 이구아노돈과 같은 조각류(발톱이 삼지창처럼 갈라진 공룡)와 브라키오사우루스와 같이 네 발로 걷는 용각류(목이 긴 초식공룡)다.2억∼6500만년 전에 지구를 지배했던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 공룡들이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공룡박물관에 들어갔다. 지붕 모양이 특이해서 물어보니 가장 많이 나타났던 공룡 이구아노돈의 몸체를 본떴단다. 진품 공룡 화석 4점을 비롯해 공룡화석 복제품 41점이 있다. 또 삼엽충, 물고기, 상어이빨 등 일반화석도 55종이 전시돼 있다. 공 학예사는 “지금부터 1억년 전인 공룡시대에는 지금은 바다와 산인 이곳이 거대한 호수였으며 공룡의 수도”라고 설명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니 상족암의 진면목은 공룡발자국 화석도, 기암절벽도 아닌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어린이 1500원. 고성공룡박물관(www.goseong.go.kr·055-670-2825). 공룡화석지에서 40여분이면 남해안 천혜의 조망지 문수암이다. 작은 사찰이지만 1400여년 전 의상대사가 세운 고찰이다. 절집은 볼품없다. 하지만 청담 대선사가 수도했던 도량으로 청담스님 사리탑이 안치돼 있다. 꼬불꼬불 산길을 오른 진짜 이유는 조망. 고성 토박이 이경균(42)씨는 “문수암은 남해안 최고의 조망지”라고 추켜세웠다. 왼쪽으론 통영까지 이어지는 고성반도의 산들이 첩첩이 겹쳤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오른쪽은 사량도·연화도·욕지도 등 큰 섬 사이에 올망졸망한 섬들, 징검다리같다. 쪽빛 바다가 호수인양 잠잠하다. 오가는 어선들도 한가하다. 문수암(055-672-0877). 이밖에도 울창한 숲과 계곡,10여개의 산봉우리가 연이은 연화산과 옥천사(055-670-2551), 소가야 왕릉인 송학동 고분군(055-670-2221) 등이 있다. ■ 여기도 가보세요 ●부안 ‘불멸의 이순신’ 세트 전북 부안 변산반도에 있는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은 최근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전라좌수영은 궁항, 왜군진지는 성천, 명군진지는 죽막, 조선군 진지는 위도 논금해수욕장, 선박들은 격포항에 각각 자리해 있다. 바다에는 판옥선과 거북선, 왜선, 명나라함 등 6척의 배를 볼 수 있다. 부안군 홈페이지(www.buan.go.kr)에서 드라마 촬영지 안내지도를 프린트해서 갖고 다니면 야외촬영장을 놓치지 않고 둘러볼 수 있다. 부안군청 문화관광과(063-580-4449). ●통영 한산도 ‘한산섬 달밝은 밤에/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깊은 시름 하는 차에/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경남 통영 한산도는 충무공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곳. 충무공 유적지(사적 113호)는 제승당 일원의 15만 9000평에 조성된 건물, 비석, 문화재, 광장, 조경물이 있다. 충렬사, 제승당, 수루, 한산정을 비롯하여 유허비 2기, 한글 유허비 1기, 통제사 송덕비 7기, 비각 5동과 5개문 등이 있다. 통영시 문화관광과(055-645-0101). ●남해 ‘노량해전승첩제’ 경남 남해군에서는 매년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 승첩을 기원하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충무공 노량해전승첩제를 연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남해대교 등 남해의 경치를 감상하며 충무공의 얼을 기릴 수 있다. 남해대교를 건너 노량마을로 내려오면 충무공 이순신이 관음포에서 전사한 후 시신을 잠시 모셨던 충렬사와 바로 앞 바다에 떠 있는 실물 크기의 거북선이 있다. 남해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이 3개월간 묻혔던 자리에 아직도 가묘가 남아 있다. 남해군청 문화관광과(055-860-3228). ■ 아산 ●거북선 타고 왜군 격파 현장으로 ‘둥둥둥∼’ 힘찬 북소리가 울리자 충남 아산시 현충사 앞을 흐르는 곡교천에 400여년 전 이순신 장군이 왜군 적선 70여척을 격파했던 그 거북선이 힘찬 물살을 가르며 출현했다. 크기는 길이 4.5m, 너비 2m, 높이 1.8m로 실물의 7분의1로 축소됐지만 당시와 같은 위용을 뿜어냈다. 거북등 위로 뾰족하게 솟아난 창이며, 위용 넘치는 용머리는 주변 분위기를 압도했다.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제 44회 성웅 이순신 축제’를 위해 모두 5척이 건조됐으며, 거북선에는 등에 만들어진 출입구를 통해 6명이 승선할 수 있다. 28일부터 충남중소기업센터 앞 곡교천에서 승선 체험이 가능하며, 곡교천 일대를 한 바퀴 도는 승선 체험료는 5000원이다. 축소 모형이어서 다소 비좁지만 직접 노를 저어 나아가는 승선 체험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강 주변에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병, 왜군 장수 복장을 한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벌여 왜군을 무찔렀던 전란 당시로 돌아간 듯 실감나게 만든다. 오디션을 통해 선출돼 축제기간 중 이순신 장군의 역할을 맡은 김한백(26·순천향대 연극영화과 4년)씨는 “최근 독도 영유권 문제와 역사왜곡 등 시기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 거북선에 승선하면 전란 당시 승전의 쾌감을 다시 한번 맛볼 수 있다.”고 추천했다. 축제기간 저녁 7시부터 곡교천변 무대에서는 순천향대 학생들이 준비한 ‘한산섬 달밝은 밤에’라는 마당극이 열려 당시 군영 내 훈련과 순찰내용, 임진왜란 전투장면, 모함을 당하고 압송되는 광경 등이 연출된다. 인근에는 군영이 조성돼 당시 군영막사 내부를 볼 수 있으며, 거북선 조립체험과 탁본뜨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곡교천변에 조성된 수천평의 유채꽃밭이 조성돼 강변을 따라 산책을 하면 봄기운도 흠뻑 느낄 수 있다. ●충무공의 발자취를 가슴에 담고 곡교천에서 10여분쯤 걸어 올라가면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현충사를 만나게 된다. 개나리와 벚꽃 등 봄꽃이 활짝 피어 평일에도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현충사는 충무공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한지 108년이 지난 숙종 32년 사당을 세우고 현충사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만들어졌다. 현충사 본전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유물관에는 일생기록인 십경도와 국보 76호인 난중일기, 보물 326호 장검 등이 전시돼 있으며, 활터와 정려등, 경내등을 볼 수 있다. 유치원생인 아들과 현충사를 찾은 박상원(35·서울 영등포구)씨는 “충무공의 당시 활약상을 보고 나니 일본의 망언으로 쌓인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관람요금은 500원. 현충사 관리소(041-539-4600).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은 어라산에 있는 충무공 묘소(사적 112호). 현충사에서 서북쪽으로 9㎞ 거리에 있으며, 아산온천 방향으로 승용차로 10여분을 달리면 음봉면 삼거리에 위치해 있다. ■ 여기도 가보세요 아산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의 휴양을 겸한 나들이에도 손색이 없다. 세계 꽃식물원과 실내외 수영장을 갖춘 테마온천 아산 스파비스, 함상카페와 삽교호 놀이동산 등 놀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다. 지난해 문을 연 도고면 봉농리의 세계 꽃식물원(544-0746)은 사시사철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한다. 관람요금은 어른 6000원, 초등학생 4000원. 아산은 또 온양온천과 도고온천, 아산온천 등 온천 휴양도시로 유명하다. 이 가운데 최근 개발된 온천단지 아산온천 단지 내 아산 스파비스(539-2000)는 수영장 등 실내외 온천풀, 인삼탕 등 20여종의 이벤트 탕이 있다. 인근의 삽교천에는 또다른 재미가 있다. 밤이면 환하게 불을 밝히는 서해대교와 아산방조제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최근 문을 연 함상공원(363-6960)과 놀이공원(363-4589) 등은 한껏 재미를 북돋워준다. 함상공원에는 동양최대 군함테마파크로 상륙함과 구축함, 입체영상관이 있다. 어른 5000원, 초등생 4000원이다. ●여행정보 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천안IC에서 나와 1번 국도와 21번 국도를 번갈아 타면 시내로 들어갈 수 있으며,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서평택IC에서 아산호를 건너 39번 국도를 타면 된다. 버스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아산방면 버스가 있다. 아산시청 540-2221. 여행상품으로는 테마21(www.theme21.net)이 이순신 축제가 열리는 아산 당일 여행상품을 내놓았다.27일부터 5월1일까지 서울 덕수궁(시청 전철역 2번출구), 양재역 7번출구(서초구민회관앞)에서 매일 출발하며 도고세계꽃식물원과 아산 현충사의 행사를 관람하고, 아산 스파비스에서 온천욕을 한 후 서울로 돌아온다. 참가비 1인당 3만 9000원.549-9889.
  • 日외상 “시베리아 억류 한인피해자 지원 검토”

    |도쿄 이춘규특파원·서울 구혜영기자|독도 및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로 한·일 양국이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최근 일본 정부의 고위인사가 ‘시베리아 억류 한국 피해자’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자발적인 지원의사를 언급한 것으로 26일 확인됐다. 한국과 일본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22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마치무라 외무상이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와 피해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들의 지원 문제를 관계 부처와 협의해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언급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의 공조 분위기 확산으로 번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마치무라 외무상의 언급은 이날 외무위원회에서 곤노 아즈마(일본 미야기 1구 소속) 중의원이 지난 1945년 종전 이후 시베리아에 억류된 한국인 피해자의 지원요청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나왔다. 이에 따라 한·일협정 당시 제외됐던 전후 한국인 피해자 지원 문제도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곤노 의원은 이와 관련,“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큰 진전”이라면서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치무라 외무상의 발언은) 향후 사태해결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의원 회의 당시 한국에 대한 전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곤노 의원의 질의에 대해 마치무라 외무상은 한·일협정 당시 청구권 문제는 해결됐고 법조문에도 전·후 관련 별도 조항은 없다는 식으로 일단 단호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 이병주 회장은 “향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 병사 유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인 전몰자 참배와 위령비 건립, 피해자 보상 등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을 세우고 한국 정부도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일본 정부에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문제는 지난 1945년 8월 종전 이후 60여만명의 한·일 양국 출신 징용자들이 4년여 동안 시베리아 지역으로 압송,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제징집과 강제노역 등에 따르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koohy@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5)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下)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5)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下)

    1733년 7월 전라도 남원성벽에 괴벽보가 나붙었다. 머지않아 영조 임금이 쫓겨나고 새 세상이 열린다는 내용이었는데 벽보를 직접 작성한 사람은 남원 부자 김영건의 아들들이었다. 이 벽보에는 김씨들의 숙적인 이유성 일가의 이름이 도용돼 있어 이씨들을 모함하기 위해 그랬을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그처럼 단순하고 우발적이었을까? ●이여매와 이여진 형제의 이름으로 된 벽보 남원성벽에 내걸린 벽보는 이유성의 아버지 이여매와 숙부 이여진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이 형방은 문서를 읽고 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에 이런 흉악한 문서에 제 이름 석자를 붙여 걸어둘 바보가 과연 있겠는가? 형방은 박 호장, 최 이방 등과 이 문제를 상의한 다음 이씨 집안과 다투고 있던 김영건 부자에게 혐의를 두었다. 일차로 김영건 부자를 연행한 다음 그 집안을 수색했다. 그 과정에서 벽보의 초안이 발견돼 사건은 싱겁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김씨들이 괴문서의 말미에 이여매 형제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그러나 원수의 이름을 빌려 반역의 의지가 명백한 벽보를 붙일 만큼 김씨들은 무지몽매했을까? 벽보를 손수 쓴 김원팔로 말하면 제법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그 정도 계산도 못할 만큼 청맹과니는 결코 아니었다. 김원팔 형제가 남문 옆 성벽에 벽보를 붙여두고 집으로 돌아간 직후, 세 사람의 괴한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둘은 좌우에서 망을 보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벽보의 맨 끝에 “이여매와 이여진 씀”이란 글귀를 추가했다. 그 글씨체는 영락없이 김원팔의 것이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 보면 왼쪽으로 좀더 비스듬히 올라간 것이 눈에 띌 만도 했다. 눈썰미가 남다른 이방 최정도는 그 점을 이미 정확히 짚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필체의 미세한 차이를 말하지 않았다. “사건은 이 정도로 마무리돼야 한다. 만약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면 남원은 헤어날 길이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건의 근원적인 규명이 아니다. 확대 수사는 도리어 민심을 뒤흔들어 놓을 뿐이다. 여기서 종결시키자. 더 이상의 불필요한 잡음을 불러일으키지 말고 사적 원한에 근거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마무리하자. 그것이 모두에게 좋다. 어차피 이 세상은 그런 것이다!” 이것이 남원의 사정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던, 아니 18세기 한국사회의 물정을 정확히 파악했던 최정도 이방의 생각이었다. ●김영건 일가를 저버린 지하조직 따지고 보면 그랬다. 조직은 김원팔 일가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작정했다.18세기에는 하삼도만 해도 남원 운봉 함양의 지리산, 부안의 변산, 충청도 계룡산과 오서산, 합천의 가야산 등지를 잇는 지하조직이 결성돼 있었다. 조직원의 수가 얼마나 됐고 조직의 구성이 어땠는지 전모를 정확히 파악할 길은 없지만, 수십 수백 명이 가담한 비밀결사가 존재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런 지하조직의 최종 목표는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고 용화세계 또는 미륵세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동학에서 말하는 지상천국, 후천세계의 원형이 이미 18세기에 형성되고 있었다. 지하조직은 ‘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비결을 앞세워 민심을 선동했다. 조직은 나라를 원망하는 각양각색의 인사들을 점조직으로 편성했다. 조직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처의 부자들을 포섭하거나 도적질을 하기도 했다. 남원부자 김영건 같은 이는 지하조직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쓸모있는 인물이었다. 김영건은 천민출신이라서 기존의 사회질서를 반대했으며 자금력도 어느 정도 충분한 데다 김원팔과 같이 유능한 아들이 있어 지하조직의 한 귀퉁이를 맡길 만했다. 김영건 자신은 아마 짐작도 못했을 테지만, 지리산에 근거지를 둔 지하조직은 오래 전부터 김영건 일가를 포섭하는 데 큰 관심이 있었다. 일찌감치 지하조직의 지도부는 김영건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남원, 운봉, 함양 일대를 제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아는 탁발승들이 바로 조직의 중추였는데,17세기 후반 영건의 어머니 분금이 무작정 노씨 집을 뛰쳐 나왔을 때 지리산에서 굶어 죽지 않고 무사히 남원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 실은 어느 탁발 승려 덕택이었다. 그 인연은 영건이 모르는 사이에도 계속됐었다. 나중에 분금이 아들 영건에게 남긴 유언 가운데 부처님의 원력을 말한 것도 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나온 말이었다. 양반 정 노인의 신분시비 사건으로 김영건은 큰 충격을 받아, 현세를 지배하는 논리에 회의를 품게 된다. 하지만 그는 천품이 온화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조직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희생을 바칠 사람은 못 되었다. 지하조직은 그런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의 세 아들들에게 더더욱 큰 기대를 걸었다. 지하조직은 지도부에 속한 변산의 승려 태진과도 연줄이 있는 최봉희를 시켜 김원팔, 김원하, 김원택 3형제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최봉희는 우선 비결을 가지고 그들을 설득하려 했고, 가장 먼저 그 먹이를 문 사람은 김영건의 막내아들 김원택이었다. 그 덕분에 김원팔과 김원하를 조직에 가담시킬 수 있게 됐다. 그런데 1732년 가을부터 김원택은 조직을 이탈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김원택은 지하조직이 추구하는 목적이 지극히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고, 조직 활동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김씨 일가의 담당인 최봉희 보기를 꺼려했다. 그는 형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었다. 조직은 김원택에 대해 다각도로 회유책을 폈으나 전혀 통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됐다. 조직은 마지막 수단을 고안했다. 김영건 일가에게 괴벽보를 작성해 남원읍성에 부착하도록 지시했다.3형제가 공동으로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들을 묶어두지 않으면 장차 조직을 관리하기가 어려울 것이란 게 상부의 판단이었다. 김원팔 형제가 벽보를 붙이는 순간에도 조직은 멀리서 그 광경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 나타난 것은 약속한 3형제가 아니었다. 김원택이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 담당책 최봉희는 상부와 긴급히 상의했고, 그 처방은 간단명료했다. 김씨 일가를 희생시켜라! 그리고 최봉희 넌 멀리 도망쳐라! 우리 조직의 남원 지부는 당분간 활동중지다! 그러나 이 벽보를 계기로 민심을 한 번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김원택과 최봉희의 머리싸움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면, 남원의 일부를 담당한 최봉희는 부자 김영건이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 김원택에게 접근했었다. 최는 세상 물정에 두루 밝은데다 붙임성이 대단히 좋았다. 게다가 남원에선 손꼽히는 양반가문의 후예였다. 집이 가난한 것만 빼놓으면 도무지 나무랄 데가 없는 선비였다. 출신이 미천해 고민하고 있던 김원택 일가로선 그런 최봉희와 사귀게 된 것이 큰 영광이었다. 최봉희의 지식에 매료된 김원택은 장형 원팔과 중형 원하에게 차례로 최를 소개했다. 김원팔 등은 매일 같이 최봉희를 만났고 그 때마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후의를 베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마치 최봉희가 김원팔의 식객(食客)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처음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최봉희는 김씨 일가의 내면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시작했고, 김원택은 바로 그 점을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원택은 최가 자기 형들과 함께 만든 필묵계에도 관여하길 거부했다. 그는 두 형과 아버지 김영건에게 최를 멀리하라고 몇 차례 간청하였으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벽보를 붙이는 문제가 집안에서 거론되자 김원택은 최가 배후 인물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충직한 종 남산을 성밖으로 내보내 최봉희가 숨을 만한 곳을 미리 수소문하라고 했다. 만일의 경우 관가에 연락해 최봉희가 즉각 검거되도록 손을 써둔 것이었다. 김원택은 장차 아버지와 형들이 벽보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멸문의 화를 당할 게 너무 억울했다. 만일 집안에 화가 닥치면 최를 비롯한 지하조직도 분쇄되어야 마땅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하조직은 점조직이라 최봉희 위에 누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원택은 그동안 최봉희에게 들은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모두 정리해 보았다. 문득 변산 승려 태진의 이름이 뇌리에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할수록 태진과 최봉희의 관계는 예사롭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건이 터졌을 때 원택은 배후조종자로 태진을 고발했다. ●‘정감록’ 사건의 마무리 김영건 4부자를 비롯해 최봉희, 태진 등은 제각각 검거된 장소와 시각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창덕궁의 정문인 인정문(仁政門)에 설치된 특별수사본부에 끌려가 엄한 취조를 받았다. 때로 국왕 영조가 직접 심문에 나설 정도였다. 제1급 시국사건으로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끌려가 조사를 받은 사람이 삼사십 명이나 됐고, 전라도 각처에서 일시 검거돼 취조받은 사람은 수백을 헤아렸다. 인정문 앞에선 열흘 넘게 날마다 지독한 고문이 계속됐다. 몽둥이찜질은 기본이고, 인두로 몸 지지기, 정강이뼈 뒤틀기, 무릎 관절 부수기 등은 이를테면 선택사항이었다. 혐의자들은 차례로 단독 심리를 거쳐, 관련자와 대질 신문을 받은 뒤 다시 재심리를 받았다. 중간에 말이 바뀌면 모든 수사과정이 처음부터 되풀이됐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거듭된 고문과 그 중간에 잠깐 끼어든 달콤한 회유, 그리고 교활한 유도신문이 연달았다. 머리 좋고 경험 많은 의금부 관리들을 비롯해 조정대신들 그리고 국왕 영조까지 직접 심문에 나섰기 때문에, 그 자리에 끌려 나온 사람은 여간한 배짱과 지능으로는 조금도 숨기거나 속일 수가 없었다. 며칠만 닦달을 하면 고분고분 모든 사실을 실토하게 되었다. 특히 사건 심리의 초기 단계에는 가능한 모든 범위로 수사가 확대되었다. 털끝만큼이라도 혐의가 있어 뵈는 사람은 연일 추가로 체포돼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김원팔과 그의 아버지 김영건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판결도 내려지기 전에 형틀에서 죽고 말았다. 실상 벽보 사건에 전혀 가담하지 않는 김원택도 맞아 죽었다. 고문을 잘 견뎌 용케 살아남은 이는 김원하였다. 그는 역적의 아들이란 죄로 또다시 두들겨 맞은 다음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이럴 때도 고수는 따로 있었다. 지하조직의 하급간부 최봉희는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 있긴 했지만 그의 죄를 증명할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지 않아 외딴섬으로 귀양가는 데 그쳤다. 본래 점조직으로 운영된 조직이다 보니 김영건 부자는 최봉희의 윗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수사과정에서 최봉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지만, 특수 훈련을 받은 최봉희는 노련했다. 최는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지하조직의 비밀은 하나도 노출시키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제침으로써 수사본부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수사본부는 최봉희를 미치광이로 규정함으로써 그에 대한 수사를 매듭지었다. 조직의 거물이자 당시 전라도내에서 이름난 승려였던 변산의 태진은 자신을 변호하기에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남사고 비결’을 소장했다는 점만 인정했을 뿐, 벽보 사건과 무관하다는 점을 끝까지 주장했다. 영조는 “태진의 대답이 범행을 자백한 것이나 마찬가지구나!”라고 하여 태진이 사건에 관련돼 있다고 보았지만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다른 방법이 없어 태진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섬으로 귀양보냈다. ●조정은 지하조직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가? 당시 도승지 홍경보는 영조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지금 영남 하도(下道, 경상남도)와 호남의 인심이 매우 험악합니다. 만약 수사를 여기서 멈춘다면 괴수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각별히 헤아려서 연루자를 체포해야겠지만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런 뜻으로 공문을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영조는 홍경보의 말이 옳다며 민심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사를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수사는 불가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하조직에 음양으로 관련돼 있었던 데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사정이 조금만 더 악화되면 조직에 대거 참여할 기세였다. 이런 판국에 혐의자들을 함부로 붙들어다 고문하게 되면 조정이 정말로 우려하는 반란 또는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야말로 혹 떼려다 혹 붙인다는 말처럼 될 수도 있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관리들은 자신들의 임기에만이라도 그저 별일 없이 조용하기를 바랐다. 얼마나 애를 써서 얻은 벼슬자리인가. 아직 본전을 다 뽑지도 못했는데 만일 난리가 일어나 벼슬을 놓치게 되는 일이 생겨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 관리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뢰었다. “엄히 조사를 해봤습니다만 별탈은 없는 듯합니다. 백성들이 불안해서 생업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이제 수사를 종결해야 됩니다. 이번 사건은 배후에 무슨 특별한 조직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시골의 무식하고 못돼 먹은 반역자 김영건 4부자가 사적인 원한으로 엉뚱한 짓을 벌인 것입니다.” ●영조의 선택 영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역적 놈들은 과인의 목을 요구한다. 놈들은 이 나라가 망하기만 바라고 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건을 축소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처리하는 것이 제일이다. 이것은 일부 몰지각한 놈들의 소행이라고!” 결국 왕의 생각이나 조정대신들, 지방관들의 뜻은 남원 이방 최정도의 견해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왕의 마음은 께름칙했다. 하필 왜 남쪽 지방, 그것도 전라도에서 이런 고약한 무리들이 자꾸 나오는 것일까. 왕은 자기의 친어머니가 전라도 출신의 미천한 나인인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산란했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완전히 눅이지 못한 채 목청을 돋워 각도의 관찰사들을 독려했다. “전라도는 우리나라에서 잡술을 가장 숭상한다고 들었다. 근래 태진이란 중놈의 예언서를 보면 그 폐해의 심각성을 알만 하다. 예언서를 엄금해야 한다. 너희들 휘하의 지방관들에게 명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일체 그런 불온서적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라. 삿된 경전(邪經)을 버리고 성리학에 힘쓰게 하라.” 왕은 ‘정감록’에 대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낡은 성리학으로 ‘정감록’을 이길 수 있을까.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9일 TV 하이라이트]

    ●불멸의 이순신(KBS1 오후 9시30분) 첩보대장 공태원은 전장에서 압송한 포로를 신문하는 중에 전혀 대답을 하지 않는 포로 때문에 격분하게 된다. 자신 또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기억이 있는 공태원. 이순신은 공태원에게 일본에서 받은 대로 돌려주어서는 우리도 그들과 같아질 뿐이라며 포로에게 술을 따라주는데…. ●그린 로즈(SBS 오후 9시45분) 현태는 의사로부터 오 회장의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을 듣고 안도한다. 서 전무는 임원회의 중 SR전자가 매우 어려운 상태라며 신현태 이사에게 책임을 물을 듯한 발언을 한다. 신 이사가 신기술 개발건을 보고하자 사태는 역전되고 수아는 현태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라이프n조이(YTN 오전 9시20분) 섬진강 줄기를 따라 산수유꽃 봄나들이에 나서보자. 섬진강 주변의 광양 매화마을과 구례 산수유마을은 매년 봄이면 화사하게 만개하는 꽃들로 장관을 이룬다. 화사한 자태로 봄을 가꾸는 매화, 소박한 자태로 봄을 수줍게 물들이는 산수유를 만나러 광양과 구례로 떠나본다. ●지금도 마로니에는(EBS 오후 10시50분) 1965년 1월11일. 전혜린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자연사니, 사고사니, 혹은 자살이라는 둥 그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것만은 확실했다. 총칼로 권력을 장악한 박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반공’이라는 칼날을 휘둘러 댔다.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MBC 오후 7시) 이번 주 즉석투표는 ‘남자는 기념일 챙기는 걸 귀찮아한다?’,‘여자는 남자가 바람둥이인 줄 알면서도 좋아한다?’라는 주제를 방청객과 출연진에 던진다. 이밖에도 방청객 남자 100명에게 ‘나는 바람둥이다.’라는 돌발 질문을 던졌을 때 나타나는 결과도 확인한다. ●부모님 전상서(KBS2 오후 7시55분) 창수를 보내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성실도 수아도 마음이 착잡하고 허전하다. 같이 살았다면 안 가셨을 거라며, 아빠가 너무 가엾다는 수아의 말은 왠지 성실을 원망하는 것처럼 들린다. 찬호가 순지 때문에 장사를 소홀히 하는 듯하자 정환은 은근히 불만이 쌓인다.
  • 국내외서 항일운동 옥고치러

    국내외서 항일운동 옥고치러

    국가보훈처가 이번 3·1절에 서훈을 추서하기로 한 독립유공자 165명 가운데 좌파 계열로 구분되는 54명의 면면과 활동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빼어난 독립운동 공적에도 불구하고 좌파 계열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서훈대상에서 제외돼 왔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하지 않았을 경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서훈을 줄 수 있도록 정부가 최근 관련규정을 변경함에 따라 이들이 6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다음은 이번에 복권된 주요 좌파 계열 독립운동가 면면과 활동상이다. ●여운형(1885∼1947) 항일 독립운동 및 공산주의 운동, 해방 후엔 정치 및 남북 합작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조선총독부, 미 군정과 소련 군정, 김일성 등과 정치적 담판도 가졌다. 몽양의 항일투쟁 사실에 대해 학계는 물론 남북 누구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좌파 계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뛰어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심사에서 ‘보류’ 판정을 받아 왔다. ●권오설(1897∼1930) 전남도청에 근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경북 안동에서 풍산소작인(小作人)회를 결성,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조선노동총동맹 집행위원(1924), 언론집회압박 탄핵위원(1924),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돼 활동했다. 학생들과 연계해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숨졌다. ●조동호(1892∼1954) 1919년 신한청년당 이사로 선출돼 조선독립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하는 데 관여하는 등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독립신문 창간 등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동아일보 선양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결성시 중앙위원으로 선출돼 일하다 옥고를 치렀으며, 조선건국동맹 조직을 결성했다. ●구연흠(1883∼1937) 구한 말 관원 출신으로 무산자 동맹회, 신사상 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며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상해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참여,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한인지부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하며 3·1운동,6·10만세운동 국치일 등을 기념하는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재봉(1891∼1944)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렀다..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전국에 세포단(細胞團)을 조직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씨줄날줄] 독일의 눈물/이용원 논설위원

    1970년 12월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옛 게토 지역을 찾아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게토란 나치정권이 유대인들을 처형하기 전에 가두어둔 집단수용지.1943년 초 게토의 유대인들은 나치군대에 대항해 봉기했다. 넉달 동안 계속된 싸움에서 전사하거나, 체포돼 수용소로 압송된 유대인 희생자는 5만 6000명에 달했다. 1975년 독일은 특별법을 제정해 게오르크 에커트 국제교과서연구소를 설립했다.1950년대에 이미 독일·프랑스 양국의 역사교과서 공동연구를 이끌어낸 사학자 에커트의 사설 연구소를 계승, 확대한 것. 이후 연구소는 제2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피해국 폴란드·이스라엘과 각각 역사교과서 공동연구를 성사시켰다. 1995년 1월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5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이는 나치정권에 대한 독일국민의 승리를 상징하기도 했다. 독일 정부는 1월27일을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는 날로 공식 지정했다. 2000년 독일은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을 발족했다.2차대전 때 나치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개개인에게 국가가 배상하는 기관이다. 앞서 독일은 이스라엘에 250억 마르크를 국가 배상금으로 지급했으며 나치의 피해자 및 희생자 유가족에게는 150억 마르크를 별도로 지급했다. 2005년 5월8일 독일의 정치 1번지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에는 대형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학살된 유대인 600만명 모두를 추모하는 기념물이다. 이날은 독일이 2차대전 패전 60돌을 맞는 날이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독일은 나치정권의 과오를 국가 차원에서 철저하게 반성했다. 배상기관의 이름에서 보듯 과거를 ‘기억’하고 ‘책임’져야 ‘미래’를 기약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과 이웃의 전쟁 피해국 사이에 ‘진정한 사과’‘교과서 왜곡’‘강제노역 배상’ 등을 둘러싼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2일 이스라엘 의회를 방문한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이 참회의 연설을 하다 끝내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60년 동안 끊임없이 과거사를 반성해온 독일인들의 마음이 응집한, 독일의 눈물인 것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7개 과거사 진상규명] 7개 과거사 개요·쟁점

    [7개 과거사 진상규명] 7개 과거사 개요·쟁점

    1. 정수장학회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온 장학회다.5·16 군사 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부산의 유력 사업가이던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를 모태로 5·16 장학회로 출범했다. 삼화고무와 부산일보를 운영하던 김지태씨는 재산해외도피 혐의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두달정도 구금생활을 했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등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쓰고 며칠뒤 풀려났다. 서류상으로는 김씨가 자진납부한 것으로 돼 있으나, 유족들은 부산군수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수갑을 찬 채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라고 도장을 찍었다면서 명백한 강탈이라고 주장해 왔다. 특히 지난해 8월에는 “서류상은 자진납부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나 실재와 다른, 물목(物目·물건의 목록)조차 보지 못하고 있다.”는 김씨의 비망록이 발견돼 이런 의혹은 증폭됐다. 군부세력이 김 사장으로부터 부일장학회를 강탈했는지, 아니면 헌납과정에서 강제력이 동원됐는지에 조사의 관건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장학회는 문화방송 주식의 30%와 부산일보 주식의 100%를 소유하고 있다. 2. 동백림 사건 1967년 7월8일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반정부 간첩단사건이라며 이른바 ‘동백림사건’을 발표했다. 고 윤이상씨와 재 프랑스화가인 이응로씨 등 194명이 동백림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이다 적발됐다는 것이다.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활동을 했고, 일부는 평양을 방문해 밀봉교육을 받았다고 발표됐다. 몇몇 독일 유학생들이 북한 또는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인 것처럼 조작됐다는 게 의혹의 골자다. 당시에는 3선 개헌을 앞두고 총선에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며 대학가 등에서는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끓어오르던 시기였다. 이런 점과의 연계성도 조사대상이 될 것 같다. 3.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1975년 4월8일 대법원이 도예종, 여정남 등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한 이후 불과 20여시간 만인 4월 9일 오전 6시에 이들의 사형은 전격적으로 집행됐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반 유신체제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 상황에서 저질러졌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며 엄중하게 항의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253명 중 유인태 의원, 이철 전 의원 등 민청학련 관계자들에게 사형, 징역 15년∼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됐지만 국내외적인 압력에 못이긴 박정희 정권은 1975년 2월 대부분을 석방했다. 사건 진실규명의 핵심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용공 조작여부에 있다.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통한 사건 조작, 군사법원 재판부의 공판조서 허위 작성 의혹 등도 진실규명이 필요한 대목들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공안부 검사들마저도 피의자들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는 ‘항명파동’이 일어났고 그 중 3명은 사표를 던졌다. 4. 김대중 납치 사건 1973년 8월8일 일본 도쿄에서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된 사건.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대중씨는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벌였다. 사건 당일 도쿄에서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 간 김씨는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됐다가 129시간 만에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여부가 가장 큰 쟁점이다. 미국이 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느냐도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또 배를 이용해 한국으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김씨를 수장시키려 했다는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5.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청와대 근처 지하실에서 사살됐는지, 센강에 던져졌는지, 아니면….’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이다. 김 전 부장은 1979년 10월 7일 파리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를 나선 이후 행방불명됐고 프랑스측이 함께 수사했음에도 아직까지 미제사건이다. 김 전 부장은 박정희 정권 역대 정보부장 중 최장수인 6년 3개월을 역임하는 등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으나 내부 권력 투쟁으로 밀려난 뒤 73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1977년 박동선 로비 사건을 조사중이던 미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 등에 나가고,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반(反)박정희’ 행보를 계속했다. 6. 대한항공(KAL) 858기 사건 1987년 11월29일 승객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KAL 858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3대 대선 투표일을 불과 하루 앞둔 12월 15일 북한 특수공작원인 ‘폭파범 김현희’가 김포공항으로 압송돼 왔다. 대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당시 정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특수공작원 김현희, 김승일이 기내에 라디오 시한폭탄을 설치, 아부다비에서 내렸으며 김승일은 체포직전 자살했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7. 중부지역당 사건 1992년 10월 대선을 두 달 남짓 앞두고 터진 ‘초대형 간첩단 사건’. 중부지역당 총책으로 지목된 황인오씨가 구속되는 등 62명이 구속되고 300여명이 수배됐다. 단순한 남한내 조직이 아니라 북한 권력서열 22위라는 ‘남파 여간첩 이선실’이 등장했고 전국적으로 노동계, 학생, 단체 등에서 300여명의 조직원을 확보한 지하조직으로 발표됐다. 이는 최근 이철우 의원의 ‘간첩 논란’을 통해 다시 한 번 부각된 사건이지만 사건 연루자들은 “안기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어 고문, 사건 조작 여부 등이 풀어야할 부분들이다.
  • ‘LCD빅2’ 삼성·LG 입지 손익

    ‘LCD빅2’ 삼성·LG 입지 손익

    LCD 세계시장의 두 공룡(恐龍)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LPL)가 각각 충남 아산 탕정과 경기 파주 월롱에서 7세대LCD 1단계 공장건설과 가동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나란히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두 기업의 TFT-LCD(초박막 액정표시장치) 매출을 합치면 세계시장의 40%를 상회하며 시장점유율도 서로 엎치락뒤치락, 각축을 벌이고 있다. 삼성은 오는 3월,LG는 내년초 각각 1단계 공장을 가동한다.7세대를 넘어 향후 8,9,10세대 이후까지 차세대 LCD의 사활을 건 기술개발과 글로벌마케팅의 전초기지가 될 아산·파주 LCD 공장의 입지여건·인재확보전과 지역경제 기여효과 등을 견줘 본다. ●‘국토의 중심’ 대(對) ‘수도권 프리미엄’ 삼성전자 관계자는 “탕정이 수도권인 파주보다 심리적으로 먼 점은 인정하지만 경부고속전철(KTX)과 수도권전철,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해 실제 접근성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 LCD가 수출되는 인천공항까지는 164㎞로 2시간 거리. 앞으로 수출물량이 늘어 배로 실어 나를 경우 이용하게 되는 평택·당진항은 직선거리 30㎞, 도로로는 35㎞로 30분 거리다. 충남도 관계자는 “휴전선에서 멀어 심리적 안정감도 파주보다 우월하다.”고 말했다.“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데다 비수도권 지역이어서 국토의 균형개발 명분에서도 앞선다.”고 덧붙였다. 파주 LG필립스는 서울 중심부에서 직선거리 35㎞, 인천공항과 인천항이 50㎞내로 인접해 있다. 서측에 자유로, 동측에 국도 1호선(통일로)과 경의선철도가 각각 3㎞ 이내에 있다. LPL은 파주에 입지를 정하면서 남북대치 상황에서 휴전선이 인접한 데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와 함께 상습수해, 중국발 황사의 주 내습지역이라는 점을 집중 검토했다. 지질·지리학적인 검토결과 파주의 타 지역과 달리 수해위험이 없으며, 황사는 크린룸과 다중 필터링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필립스와 50대50의 지분을 가진 LG는 필립스를 설득해 당초 공장부지를 100년 무상임대해 준다는 중국의 파격적인 유치 조건에도 불구, 파주를 입지로 정했다. 결과적으로 남·북한 접경지역에 글로벌 다국적기업이 진출하는 바람직한 선례를 만들었다. ●KTX로 34분 VS 전철로 40분 삼성전자 탕정공장 인근엔 천안에 단국대·호서대 등 8개 대학이, 아산지역에 순천향대 등 4개 대학이 있다.IT분야가 강점인 호서대 등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삼성전자에 들어갈 만한 인재는 많지 않을 듯하다. 삼성 관계자는 “초우량기업 삼성전자의 일원이 된다는 자긍심이 가장 큰 인재유인 요인”이라면서 “서울 등 우수 인재 확보에도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석·박사급 연구인력은 수시로 채용한다. 지난해에 1200명의 기술·연구인력을 포함,2000여명을 신규 채용했다. 올해도 이 수준을 상회할 전망이다.KTX를 이용하면 서울역에서 천안·아산역까지가 34분 걸린다. 삼성은 출·퇴근때 탕정단지와 이 역 사이 7㎞를 오가는 셔틀버스로 직원들을 수송한다. 서울시청에서 탕정까지 승용차로는 1시간30분(109㎞), 경부선 서울역∼천안역 간은 1시간5분(97㎞), 수도권 전철 서울역∼천안역은 급행으로 1시간19분 걸린다. LPL 월롱공장은 도로나 철도 어느쪽을 이용해도 서울에서 대체로 1시간 이내 거리다.2008년 경의선복선전철이 완공되면 배후도시인 운정신도시와 용산역간 전철 운행소용시간은 40분에 불과하다. 파주는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대학 설립이 규제돼 자체의 지역 인재확보는 불가능하지만, 서울 지역 대학의 화학·금속공학·전자공학·기계공학 전공자들을 인재풀로 활용할 수 있다. 내년도엔 두원공과대학이 공장 인근 월롱면 위전리에 개교한다. LPL 직원의 연봉은 LG전자보다 많아 그룹내 최고수준을 보장받고 있다. 이 회사 파주총무팀의 허만복 부장은 “서울 지역 LCD 관련학과 재학생들 사이에 ‘파주로 가자.’는 구호가 취업목표이자 유행어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LPL은 지난해 3000명을 채용했고 올해도 비슷한 수준 이상의 인력을 채용할 예정이다. 서울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과 산학지원 및 협력을 통해 우수 인재를 우선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공장 신축상황 정보전 치열 양측의 1단계 공장 신축이 진행되는 동안 서로 생산동의 배치와 신축 공정 진척상황 등 현장 정탐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LPL 관계자는 “삼성 탕정단지는 외진 곳에 위치한 반면 월롱단지는 외부에 노출된 위치여서 (현장 정보수집에)불리하다.”고 말했다.LPL의 경우 현장에 들어가려면 경기개발공사와 부지조성 공동사업시행자인 파주시청의 낯익은 담당자들도 일일이 출입증을 제시해야 하고, 단지내 외부인 사진촬영은 일절 금지시키고 있다. 삼성 탕정공장은 인구 50만명의 천안과 오는 2008년 이후 17만여명이 입주할 아산신도시를 배후도시로 두고 있다. 충남도는 국도 45호선과 연결되는 628번 지방도를 탕정단지가 완공되는 오는 2009년까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할 예정이다. 국도 45호선은 경부고속도로, 평택·당진항과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어진다. 공업용수는 대청호 광역상수도를 공급받아 충당한다. 삼성은 탕정단지에 사원아파트를 세울 계획이다. 단지내에 중학교와 고교(충남외국어고)도 1개교씩 설립된다. LPL 월롱공장의 경우 서울을 잇는 자유로(낙하 IC로 진입)의 8차선 확장과 함께 군도 3호선이 현재 2차선에서 오는 6월 말까지 4차선으로 확장된다. 또 군도 5호선도 수도권광역 교통대책사업에 포함시켜 오는 2007년 6월까지 확장된다. 접경지역지원법으로 단지내 하수종말처리장 사업비 1740억원 전액이 지원되는 혜택을 받았다. 서인천 송전로∼신파주변전소∼LPL단지간 송전선로 11.72㎞가 35기의 고압송전철탑으로 연결된다. 팔당댐∼봉암정수장∼단지간에 하루 22만 2000t의 광역상수도가 공업용수로 공급된다. 파주 LPL은 오는 2008년 이후 50만 인구가 입주할 운정택지지구와 기존 금촌·교하택지지구, 일산신도시를 배후도시로 하고 있다.LPL은 금촌 등지에 300여가구의 아파트를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30만평 이상의 첨단산업체는 사원용 공동주택지를 선분양받을 수 있도록 입법예고된 택지개발촉진법에 따라 운정지구에 사원주택단지를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지역경제 기여도 ‘괄목’ 삼성 탕정단지중 1단지는 오는 2009년 완공,2단지는 2009년까지 부지조성이 완료된다.1단지는 오는 3월 1라인 가동을 시작한다.1라인은 1870×2220㎜짜리 LCD 6만장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1·2단지 모두 가동하면 연간 200억달러, 협력업체를 합치면 모두 800억달러의 생산효과가 예상된다. 삼성 직원 2만명과 협력업체 직원 2만명 등 4만명이 고용된다. 현재는 모두 5000여명이 고용돼 있다. LPL 월롱단지는 오는 내년초 1단계 공사를 마쳐 7세대 LCD 생산을 시작한다. 내년엔 1950×2250㎜ LCD 9만장을 생산할 계획이다.2010년쯤 단지내 공장이 풀 가동하면 연간 생산량이 250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고용효과는 2만여명, 이로 인한 인구 유입은 12만 5000명에 이른다. ●주민반발 민원 삼성의 탕정2단지와 문산읍 선유리와 당동리에 들어설 LG 협력단지 주민들이 보상가 불만과 환경오염, 주거지 인접 등을 이유로 환경단체와 연계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LG 공장의 전력공급용 고압송전철탑 경유지 지역 주민의 지중화 요구도 거세지만 최근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주민이 제기한 소청을 지상설치계획의 타당성을 들어 사실상 기각한 상태다. 파주 한만교·아산 이천열기자 mghann@seoul.co.kr
  • 탈북 국군포로 中서 억류

    |베이징 오일만특파원|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간 국군포로 한만택(72)씨가 한국으로 가기 위해 북한을 탈출했다가 최근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됐다고 중국내 북한 소식통들이 10일 밝혔다. 한씨는 이달 초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延吉)에서 조카와 만나기 위해 한 호텔에 머물러 있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북한 소식통들은 “한국의 가족들이 한씨의 북한 생존 사실을 알고 수개월의 노력 끝에 기획 탈북을 결행했다.”며 “그가 북한으로 압송될 경우 극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씨는 고령에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세 때문에 수용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외교경로를 통해 중국 당국에 한씨 억류 사실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한씨 억류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중국에 신병인도와 함께 인도주의적 처분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송환되지 않은 국군포로 500여명 가운데 지금까지 42명이 북한을 탈출해 귀환했다. oilm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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