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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개월간 전투기335대 잃었다”/(구소의 한국전개입 비사:하)

    ◎당시 비행단 정보장교 올로프전사특별기고/조종사 1백20명·장교 2백29명 전사/64비행단선 미군기 1,097대 격추/미선 978대 격추 1,041대 피해 집계 F­86 세이버기의 출현은 미그­15기에 있어 최대의 위협이었다.물론 미공군측도 미그­ 15기를 최고의 제트기로 평가했고 「피코트」란 암호명을 붙여놓고 있었다. 1950년 12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양측간 공중전은 잠시 멎었다.세이버기 대부분이 예비점검을 받기 위해 기지에서 쉬었기 때문이다.그러나 51년 봄 재개된 미그기와 F­86기간의 치열한 접전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엄청난 피해◁ 그런데 F­86기들은 기지인 김포·수원에서 「미그 앨리」까지의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약간의 문제점이 드러났다.F­86기의 전투비행거리는 약 9백30㎞였다.따라서 이들이 「미그 앨리」에 도달한 뒤 그곳을 초계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15∼16분에 불과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세이버기들은 먼저 최대경제속도(M=0·62)를 유지했다.그러나 이 경우 미그기가 접근해올 때의 가속이 문제였다.그래서 미군측은 작전을 변경,4∼8대가 M=0·85(시간당 1천㎞)로 편대비행해 15∼20분간 「미그 앨리」를 선회했다. ○변화작전 간파 총력 우리 레이더 정보망은 이러한 작전변화를 간파해 역전술을 펼쳤다.F­86기가 「미그 앨리」에 들어와 떠나기 10분 전에 아군기가 출동하는 것이다.그때 쯤이면 F­86기는 연료가 얼마 남지않아 아군기와 전투를 벌일 수가 없어 도망가기 일쑤였다.이밖에도 한국에 주둔중인 미공군의 조직,기지위치 등에 대해서도 정보를 갖고 있었다.그러나 F­86세이버기에 대해서 우리는 성능·장비·전투능력 등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예를 들어 F­86기에는 조종사가 적기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레이더가늠장치가 장치돼 있었다.미군기 조종사들은 공중전중 급강하,급상승시 의식을 잃지 않도록 특수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반면 소군 조종사들은 산소 마스크 착용이 고작이었다. 64비행단측은 마침내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미공군조종사들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기로 결정했다.그러나 이들은 북한영토내 포로수용소에 억류돼 있어 소련장교들이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한가지 방법은 소련군장교를 북한군 참모부에 파견시켜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51년 5월 나는 김일성참모부소속으로 평양부근의 북한군사령부에 파견됐다.임지로 갈때는 미군기의 공습이 두려워 밤에만 이동했다.그래서 도로는 야간에 전선으로 오가는 트럭,보병부대로 크게 붐볐다.야간에도 B­29 초계기는 아래쪽에 불빛만 보였다하면 무차별 폭탄을 쏟아 부었다.나도 이동중 두번 폭탄세례를 받았다. 소련군사고문단의 일원인 알렉산더 페트라체프 대령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사령부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영어로 작성했다.북한군측은 이 문서를 포로수용소에 보냈고 며칠 뒤 답장이 왔다.우리는 같은 질문을 여러 다른 수용소에 보내는 방식으로 답장내용을 확인했다.우리 나름대로 일차분석,확인작업을 거친 뒤에는 이 정보들을 페트라체프대령과 64비행단측에 전달했다. ○“레이다망 포착” 인지 51년말에 접어들면서 64비행단도 전투경험을 많이 쌓게 되었다.미군도 마찬가지였다.그래서 양측의 공중전은 시종 접전을 유지했다.적기가 안동으로 2백㎞거리까지 접근해오는 시점에서는 아군기의 출격이 이루어져야 했다.그러면 압록강으로부터 40∼45㎞ 떨어진 지점의 8천∼9천m 상공에서 적기와의 조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52∼53년 사이에 미군측이 변형된 전투요격기 F­86E를 한국전에 들여오면서 미그기는 전투수행에 더 큰 지장을 받게 됐다.이 신예기는 보다 강력한 엔진에다 조종사에게 자신이 적 화기의 레이더망에 포착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특수장치인 「시레나」를 장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2년초 북한이 중국군과 합동공군을 창설하면서 상황은 다소 호전됐다. 공중전은 종전 마지막날까지 계속됐다.종전 뒤 소련공군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64비행단 참모부는 가장 효과적인 공중전이 50년∼51년 사이에 수행됐다고 보고했다.러시아총참모부가 공식발표한 한국전 피해상황은 64비행단이 비행기 3백35대와 조종사 1백20명을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그리고 장교 2백29명이 전사했다. ○휴전당일도 공중전 물론 이 수치는 미군측 자료와 차이가 나는 것이다.여기에는 이유가 있다.미군측은 격추한 적기를 소련기,중국,북한기 구분않고 계산했다.소련군사문서국 자료에는 64비행단 조종사들이 적기 1천97대를 격추한 것으로 나타나있다(일부 자료에는 1천3백38대로 적혀있기도 하다).참고로 미군측 자료를 보면 미군기들이 적기 9백78대를 격추하고 반면 1천41대를 잃은 것으로 돼있다.그리고 공중전에서 장교·사병 합쳐서 1천1백44명을 잃었다.그중 미그­15기 7백92대가 격추됐고 미군은 F­86기 78대를 포함,1백39대를 미그기와의 전투에서 잃었다. 한국전은 소련공군기와 미군기가 전투를 벌인 최초의 전쟁이었다.그러나 소련당국은 오랜 세월 소련공군의 참전사실을 감추었다.80년대 후반에 들어 비로소 소련공군의 참전사실이 소련 국내언론에 조금씩 보도되기 시작했다. 슬픈 일이지만 엄청난 희생을 치른 이 한국전을 통해서도 소비예트 진영과 서방 민주진영간의 대결은 끝나지가 않았다.양진영이 냉전대립을 청산하기까지 그뒤 또 40년의 세월이 소요됐다.전쟁의 당사자인 남북한은 아직도 이 대결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 구소의 한국전개입 비사:중

    ◎당시 비행단 정보장교 올로프박사특별기고/“압록강 교량 폭격 막아라” 총력전/미 B29 요격위해 미그15기 총출격/51년10월30일 호위기 F84 12대 격추/미군 새항법체계 개발 촉발… 전세 악화 ▷검은 화요일◁ 소공군기가 증파됨에 따라 북한상공에서의 공중전 양상은 급변했다.연합군은 11월 6일 압록강 교량에 대한 중폭격을 개시,첫번째 공습때부터 미그 15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치열한 공중전이 전개된 것이다.11월 8일 B­29 70대가 5백84t의 폭탄을 신의주에 쏟아부었다.공습은 F­80의 지원하에 이루어졌고 여기에 미그기가 출동,역사상 제트기간 최초의 공중전이 벌어진 것이다. ○사상최초 공중 대결 그 와중에 9대의 B­29기가 안동으로 날아가 1천t의 폭탄을 퍼부었다.B­29는 너무 빨리,높이 날아 중국군의 대공포는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그러나 B­29의 폭격은 정확도가 극히 낮았다.2개의 교량은 약간의 손상만 입은채 금방 복구됐다.11월 19일부터 21일,24일부터 26일 두차례의 공습에서 홍선진 부근의 교량 교각 2개를 파괴하는데 그쳤을 뿐이다. 당시 미그 15는 최신예 전투기였다.성능상 미군의 F­86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23㎜나 37㎜의 강력한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었다.그러나 F­86은 수평비행시 속도가 훨씬 더 빨라 공격속도가 앞섰다. 그러나 F­80,84기는 B­29의 안전을 지키는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그들은 공중전시 스피드면에서 미그기에 뒤졌다.미그기가 편대비행을 해 공격할 경우 F전투기들은 당해내지 못했다.그래서 미그기들은 편대공격을 폈다.그해 11,12월 공중전을 겪은뒤 미군 파일럿들은 미그기에 대한 공포심을 가져 제대로 폭격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공습시 명중률이 낮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편대공격에 맥못춰 그래서 미군측은 보다 신예기인 F­88기를 한국전에 투입키로 결정,12월 제4전투비행단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미그기와 F­86간의 첫번째 조우는 안동 부근 압록강 상공에서 이루어졌다.4개의 손가락 형태로 편대비행을 하던 F­86 세이버 4대가 미그기 4대를 만나 잠깐동안의 공중전을 벌여 그중 한대를 격추시켰다. 소공군사령부에서는 이 F­86의 성능을 미그 15와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했다.미공군은 한국에 2천4백대의 폭격기,전투기 2천4백대를 대기시킨 반면 제64비행단은 50∼60대의 미그기만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소공군조종사들은 하루에 2∼3회 출격하기가 예사였다. 51년 봄 코제두프사단이 안동에 도착한뒤 공중전은 더 치열해졌다.아울러 미군측은 전술을 다소 수정,B­29기가 폭격임무에 나서면 전투기 편대 수개가 동해에서 갑자기 출현해 안동비행장으로 접근,미그기의 출격을 저지시켜버렸다.그틈에 B­29는 수월하게 폭격임무를 수행했다. 그래서 소련측으로서는 F기의 출격에서부터 「미그 앨리」로의 접근까지 미리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그러나 당시 소련군은 반경 1백80∼2백㎞를 커버할 수 있는 불과 몇대의 레이더만 보유하고 있었다.그것으로는 제때에 적기의 동향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미측의 암호 거의 파악 당시 내가 소속된 정보부대의 임무는 이 미군기의 조직·위치·전투능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우리는 미군조종사들이 사용하는 특수암호·속어를 다수 알았고 미공군 레이더망의 전파탐지가 가능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폭격기·전투기의 출격을 포착,이를 64비행단 사령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가 제대로 이루어져 미그기들이 즉각 적기에 대응하는 것이 가능했다. 교량 하나를 파괴하는데 레이존 4발이 소모됐다.1951년에 들어서는 레이더 유도탄 변형종인 1만2천t 폭탄 「타르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B­29는 이 타르존 폭탄 1발만 적재할수 있었다.미그 15의 주임무는 공중에서 이 타르존 적재 B­29기를 발견,격추시키는 것이었다.이들은 전투기의 엄중한 호위를 받고있었다. 51년 4월 코제두프가 이끄는 제324비행사단은 압록강 철교를 사수하기 위해 미군기와 치열한 공중전을 전개했다.한번은 50,60대의 미그기가 58대의 B­29폭격기를 압록강 부근에서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B­29기 18대가 이 공중전 저지망을 뚫고 교량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한대는 교량 부근에서 격추됐다.며칠뒤에도 48대의 B­29기가 전투기 80대의 호위를 받으며 교량공격에 나섰다.미그기들이 필사저지에 나서 미군기들은 38선까지 후퇴했다.당시 우리 공군기는 38도선 이남으로 적기추격을 못하게 돼있었다. 51년 10월로 들어서면서 공중전은 최악으로 치달았다.거의 매일 8∼9대의 B­29기가 전투기의 엄중한 호위속에 북한 영토내 비행장들을 폭격했다.북한이 중국군의 도움을 받아 남시와 태천시 외곽에 건설하던 비행장들이었다.쌍방이 큰 피해를 입었다. ○소군 역사상 최대전과 10월 16일 미그기 9대가 격추됐다.23일에는 B­29기 3대가 아군기에 의해 격추됐다.이튿날 미그기 40대가 미군기 34대와 맞서 B­29 1대와 F­84기 1대를 격추했다. 아군은 10월 27일 30일간의 공중전끝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30일 하룻동안 B­29 4대를 격추하고 12대의 F­84를 격추했다.아군 피해는 미상이다.소공군 역사상 최대의 전과였다.미군측은 이 날을 「블랙 튜즈데이」(화요일)」라고 불렀다. 이날 이후 미공군의 작전은 야간에만 이루어졌다. 결국 이날의 승리는 아군측에 불리한 영향을 미쳤다.51년 여름부터 B­29는 「쇼란(슛 레인지 내비게이션)」이라는 이름의 항법체계를 개발해 놓고 있었는데 미그기는 「쇼란」을 이용한 미군의 작전에 전혀 대비가 안돼 있었다.
  • 구소의 한국전개입 비사:상

    ◎“소 2개비행사단 50년11월 첫 참전”/극비특명… “계급장없이 중공군 위장”/당시 비행단 정보장교 올로프전사특별기고/중국 안동에 본부… 총병력 2만6천명 투입/51년3월 증파… 미기와 북 상공서 공중전/스탈린,해군출전도 계획… 미 자극 우려 포기 ▷남침 초기◁ 러시아가 개방·개혁정책추진으로 철의 장막을 걷고 한국과의 교류를 확대함에 따라 한국전쟁관련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6·25발발 43주년을 맞아 당시 소련군 정보장교(대위)로 9개월동안 소련의 제64비행단에 근무했으며 현재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세묘노비치 올로프박사(69)의 증언을 3횡에 걸쳐 게재, 구소련의 한국전 참전비밀을 파헤쳐본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3월 초순 어느 날 모스크바 군사영어학교에 근무하던 나는 새 임지로 전출명령을 받았다.그렇게 해서 그해 10월까지 8개월여동안 한국전에 참전하게 됐다.근무지는 한국전 지원임무를 맡은 소련공군 제64비행단이 주둔하던 중국의 안동. 정보장교로 참모본부에 근무한 덕에 나는 당시 비행단의 병력규모,위치등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다.우선 참모본부 아래 미그 15기 3개사단이 있었다.제1,2사단은 1950년 11월 최초로 안동에 자리를 잡았고 제3사단은 이듬해 3월 배치됐다.그외 구경 85㎜,37㎜로 무장한 대공포 2개사단이 별도로 있었다. ○미그­15 3개사단 병력수는 참전초기부터 종전을 맞아 철수할 때까지 2만6천명선이 계속 유지됐다.이는 조종사 3백명이 포함된 숫자이다.보유무기로는 주력기종인 미그­15기가 1백80∼2백대,야간전투기인 LA­11(재래기종)25∼30대,대공포구경85㎜가 1백40∼1백60문,37㎜포가 1백30∼1백50문이 있었다. 당시 소련당국은 이 전쟁에 불개입을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그래서 여러가지 비상수단이 취해졌다.모든 병력이 기장,계급장이 없는 중국군복을 입었고 조종사들은 비행중 무선교신시 절대 러시아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물론 이런 지시들은 애당초 지켜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조종사들이 초기에 조종간옆에다 간단한 교신어를 한국어나 중국어로 음을 적어놓고 발음만 흉내내기도 했으나 작전시 이로 인한 혼란이 커서 대부분 러시아어로 교신을 했던게 사실이다.물론 전투기들도 모두 중국·북한표지를 했다. ○중국·북한기 표지 보다 중요한 점은 혹시 격추돼 참전사실이 탄로날 것에 대비해 작전지역이 철저히 제한됐다는 사실이다. 이 원칙은 종전때까지 지켜졌다.동으로 동해,남으로는 전선에서 1백80㎞ 떨어진 39도선이 우리의 작전한계선이었다.즉 북한영토내에서는 압록강을 끼고 청진과 신안주사이가 우리의 작전지역이었다.미군측은 이 지역을 「미그앨리(소로)」라고 불렀다. 전쟁개시 2개월 전인 1950년 4월 김일성이 당시 외교부장 박헌영과 함께 극비에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가 전쟁지원을 요청한 이래 스탈린은 참전에 끝까지 적극적인 태도롤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의 직접무력대결을 원치않았기 때문이다.마지막에 스탈린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리게 만든 것은 모택동의 참전결정이었다.김일성은 전쟁준비를 착실히 진행시켜왔고 특히 중국내전에 참여해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 1만4천명의 북한출신 공산주의자들이 50년초 귀국,정규군에 합세한 것을 계기로 북한군의 사기는 상당히 드높았다. 이런 여러 고무적인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했다.개전 이튿날인 6월26일 대련항을 떠난 소련군함들이 참전의혹을 받지 않도록 즉시 귀항명령을 받았고 이후 전쟁기간 내내 소해군은 한국전에 개입치 않았다. ○중 개입 영향받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을 때도 스탈린은 크게 낙담하면서도 무력개입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당시 정치국원으로서 모스크바 시 당제1서기였던 흐루시초프가 무력개입을 의미하는 「즉각적인 방어정책수립」을 강력히 권유했으나 스탈린은 이도 묵살했다.스탈린의 마음을 돌리게 한 것은 결국 중국군의 개입이었다. 모택동은 중국의용군의 한국파병을 결정하며 스탈린에게 병력이송과 물자보급을 위해 압록강 교량6곳의 안전이 긴요하고 이를 위해 소공군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차강조했다. 1950년 11월 말 소공군 2개 전투비행사단이 실전에 투입되자 미군의 B­29기들이 압록강 철교들에 엄청난 폭격을 가했다.주 목표는 안동과 신의주를 잇는 교량 2곳이었다.하나는 복선철교였고 또 하나는 자동차·철도 겸용 다리였다. 당시 북한은 임시수도를 신의주에 두고 있었고 김일성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중국군·북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B­29기 폭격이었다.그래서 그 해 11월 12월 사이 미그­15기의 최대공격목표도 이 B­29였다.안동에서는 40∼50대의 미그­15기가 당시 압록강을 넘어 출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50년말 소련군지도부는 제공권을 되찾기 위해 64비행단의 보강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그 결과 이듬해 3월 소련공군의 영웅 이반 코제두프 대령이 이끄는 새 비행사단이 안동에 도착했다.이렇게 해서 그해 봄 북한상공에서는 보강된 소군기와 미군기 사이에 전례없이 치열한 공중전이 전개됐다. ▷필자 약력◁ ▲1924년생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역사학박사) ▲소공군 64비행단 정보장교로 한국전참전 예비역대령 ▲저서 「절대무기의 개랍」(1988)「제3제국과 제3의 법칙」(1993)
  • “북핵 당사국대화로 해결돼야”/전기침,한국특파원들과 일문일답

    ◎평양 핵개발동기·능력 감지못해/한중간 항공협정 조속체결 희망 ­핵확산금지조약 복귀를 촉구한 유엔의 결의에도 불구,북한이 끝내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아 국제적인 제재문제가 나올때 중국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해당 당사국들이 접촉을 통해 이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스럽다.모두들 아다시피 미국과 북한은 이미 접촉을 시작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접촉을 계속하고 있으며 한국도 북한과의 고위급회담을 제의했다.이것들은 모두 바람직스런 동향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핵개발 수준에 대해 중국은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솔직히 말해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개발 능력과 이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핵분야에서 우리는 북한과의 협력이 전혀 없었으며 평화적 이용분야마저도 마찬가지이다. ­한중항공협정문제와 관련,한국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규정에 따라 관제이양점을 동경 1백24도로 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1백25도를 주장해 서로 맞서 있는데 이에대한 견해는. ▲중한 양국은 지리적으로가깝지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어서 편리한 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다.우리는 언제나 이 항공협정을 빨리 체결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항공관제이양점문제는 쌍방이 담판을 통해 쉽게 양해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강택민국가주석의 한국방문 시기는 언제이며 이번에 김영삼대통령의 중국방문문제도 논의할 계획인지. ▲본인의 이번 방한중에 우리 쌍방은 관계발전문제를 논의할 것이다.그리고 김영삼대통령을 만나뵙게 될 것이다.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쌍방은 고위급 방문에 대해 결정하지 않았다.그리고 강택민국가주석은 올해 외국 방문계획이 없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참전결정을 했다.당시 한국은 중국에 대해 어떤 적대행위도 한적이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중국군에 의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처음으로 한국을 공식방문하는 중국부총리로서 당시 희생된 한국인들과 그 유족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이 문제는 역사적인 사건이다.역사적인 문제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2차대전후 당시 한반도에는대국간의 군사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물론 그 원인은 복잡하고 여러가지가 있다.당시 압록강변에서 발생한 상황을 보면 이 전쟁을 완전히 알 수 있다. 우리 중한 양국은 지리적으로 접근되어 있고 닭 우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까지 한다.그리고 양국 역사에도 오랜 왕래의 역사를 갖고 있다.하지만 최근 역사발전의 원인으로 1세기정도의 기간동안 우리 양국간에 왕래가 없었다.그것도 끝내 깨뜨려졌다. 한국에서는 선거를 거쳐 김영삼대통령이 새로 취임했다.본인의 한국방문은 바로 김영삼대통령의 당선이후에 있은 양국간 첫 고위회담이 된다.이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나는 이번 방문이 순조롭게 성공하기를 바란다.
  • “신의주 등서 3만명 유혈폭동”/재일교포 북 전문가

    ◎군 4만·전차동원 진압… 3천명 피체/김 부자세습 반발 첫 대규모 시위 【도쿄=이창순특파원】 북한의 신의주를 비롯한 압록강 주변 5∼6개 지역에서 지난달 20일부터 25일까지 약 3만명에 이르는 노동자,농·어민 등이 김일성세습체제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고 일본에 있는 북한 전문가가 14일 말했다. 도쿄에서 활약하고 있는 반북한단체인 민주통일연맹의 관계자는 연변의 지하조직과 중국 소식통 등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번 폭동은 지금까지 식량부족 등으로 일어난 수백명 규모의 폭동과는 달리 김일성체제전복을 시도한 최초의 대규모 유혈폭동이라고 밝혔다. 그는 폭동이 일어나자 군통수권을 지닌 김정일은 일부 외신보도대로 평양에서 대규모 전차부대와 4만명에 이르는 병력을 급파했으며 진압과정에서 3천여명이 체포되고 1만여명은 산속으로 도주했다고 말했다. 민주통일연맹 관계자는 3만여명의 대규모 인원이 행동을 같이했다는 점에서 이번 폭동에는 조직적인 통솔체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이 관계자는 또지난 4월말 북한과 중국 국경지대에서 발생했던 총격전도 이 폭동을 살피러 출동한 중국군인을 북한측이 확인하지 않고 발포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며 총격전때 중국군인 4명이 숨졌다고 말했다.
  • 라운드걸 스커트대신 한복차림/평양TV가 보도한 프로복싱대회장

    ◎17체급에 9개 선수단 67명 경기 출전/결승전 8회로… 포상내용은 발표안해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독자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북한에 대표적 자본주의 스포츠의 하나인 프로복싱이 도입돼 이달초 첫대회가 열린 것으로 보도돼 관심을 끌고 있다. 북한의 중앙TV는 최근 평양시내 청춘거리에 있는 「중경기장」에서 93공화국 프로권투대회가 진행됐다고 보도했다.이번 대회에는 「4·25선수단」「압록강선수단」을 비롯한 9개 선수단에서 67명의 프로복싱선수들이 참가했는데 경기는 예선 4회전,준결승 6회전,결승 8회전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경기는 또 17체급으로 나뉘어 우리의 「신인왕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열렸는데 우승자에 대한 상금등 포상내용에 대해서는 보도되지 않았다. 중앙TV는 그러나 이번대회를 보도하면서 링아나운서의 채점발표장면과 함께 라운드걸이 매회가 시작되기전 피켓을 들고 링을 도는 장면을 보여줘 눈길을 끌었는데 라운드걸의 복장은 우리와 같은 짧은 스커트차림이 아닌 한복차림이었다. 중앙TV는 또 프로복싱게임이국내선수권대회의 경우 10회전,아시아선수권대회는 12회전,세계선수권대회는 12회전과 15회전으로 각각 치러진다고 소개했다. 북한이 프로권투대회를 연 것은 잘 알려졌듯이 이번이 처음인데 북한은 종래 「프로스포츠」를 『직업적인 선수들이 돈벌이수단으로 하는 경기』라고 비난해왔다. 북한은 그러나 동구권 붕괴이후 러시아가 지난해 11월 프로스포츠 육성정책을 발표하고 중국에서도 프로권투대회를 개최하는등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프로스포츠를 도입함에 따라 지난해 말 프로권투의 도입을 결정하고 조총련을 통해 프로선수훈련에 필요한 기자재를 반입하는 한편 「4·25선수단」등 9개 체육단에서 본격적으로 선수를 육성해 왔다. 북한이 이처럼 프로스포츠 도입을 추진하고 이중 프로복싱에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것은 프로복싱이 국제적으로 인기가 있고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특히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한개씩 획득하고 지난달 개최된 아시아선수권대회 5체급에서우승·준우승을 휩쓴 사실에 비춰 국제대회 입상경력의 수준있는 선수들을 선발,집중 육성해 세계적인 프로무대에 진출시킴으로써 돈도 벌고 개방이미지도 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려는 것으로 보인다.
  • 평양서 사상처음 프로권투대회(북한 이모저모)

    ◎국내외 천도교인 통일투재 촉구 ○…북한은 지난 5일 평양서 천도교창도 1백33주기념식을 갖고 남북한·해외 전체 천도교인들의 통일투쟁을 촉구했다. 이날 기념식에서 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장 정신혁은 보고를 통해 천도교인들은 천도교가 창도된후 민족자주와 민중복락을 위해 투쟁해왔다고 지적하고 특히 북한의 천도교인들은 『김일성·김정일이 펴는 올바른 정치를 받들어 나가야 인내천 이념이 구현된 후천개벽을 이룩하고 지상천국 건설의 최고목적도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고 북한방송이 7일 보도했다. 정신혁은 이어 통일문제에 언급,김일성이 올해 신년사에서 밝힌 민족자주의 통일사상과 통일원칙·통일방도가 『조선문제를 시대의 흐름과 국제적 정의의 원칙에 맞게 공정하게 해결될 수 있는 길을 밝힌 정당한 방침』이라고 주장하고 남북한 및 해외의 전체 천도교인들은 『미제와 그 추종세력의 반평화적이고 반통일적인 책동을 저지·파탄시키기 위한 투쟁에 동참할것』을 호소했다고 북한방송은 전했다. ○…최근 북한에서 사상 처음 프로권투경기가 진행됐다. 이와관련 북한의 중앙TV는 최근 평양 청춘거리 중경기관에서 93공화국 프로권투선수권대회가 진행됐다고 4일 보도했다. 이번 대회에는 「4·25선수단」·「압록강선수단」을 비롯한 9개선수단 67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는데 경기는 예선 4회전,준결승 6회전,결승 8회전을 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중앙TV는 전했다. 중앙tv는 대회보도와 함께 화면으로 라운드 걸이 피켓을 들고 도는 장면과 링 아나운서의 채점발표 장면을 짤막하게 보여주었는데 라운드 걸이 한복차림이라서 눈길을 끌었다. ○…북한은 최근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모든 학교들에서 댕기(리본)·륜(루프)·곤봉운동 등 예술(리듬)체조운동을 일반화하고 있다고 당기관지 노동신문 최근호가 보도했다. 김일성은 최근 『학생들이(특히 여학생) 예술체조와 체육무용을 많이 하여야 키가 후리후리해지고 몸매도 고와진다』고 지적했으며 이에따라 전국의 모든 학교들에서 이 세가지 운동의 보급을 확대,실시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북한은 학생들의과외체육활동을 통해 댕기·륜·곤봉운동을 보급하는 한편 토요일이나 「체육의 날」(매월 둘째일요일)에는 모든 학생들이 참가하는 집단체조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최근 평양 남서부 대동강의 쑥섬주변에 대규모 물놀이장을 건설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발간되는 조총련기관지 조선신보 최신호에 따르면 이 물놀이장은 총면적이 3만5천㎡로 어린이물놀이장,미끄럼물놀이장,파도물놀이자 등으로 나뉘어 건설된다. 어린이물놀이장은 면적 3백30㎡에 수심 0.8m이며,미끄럼물놀이장은 원형으로 면적은 1천2백50㎡,수심 1.2m이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5)

    ◎길림시절:4/「공산서적 탐독」의 허구/“「국가와 혁명」 「자본론」 등 27년초 탐독” 주장/중국어번역판 29년께야 나온 사실과 상반/「타고난 공산주의자」 행세하려 날조 『길림에서의 나의 활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더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보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의 저작들을 탐독하는데 더 열중하였다.당시의 중국은 대혁명기여서 소련이나 일본에서 발간되는 좋은 책들을 많이 번역출판하였다』 ○만주반입 시일 걸려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의 길림시절이 이상과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다.그는 이 시기 「공산당선언」 「자본론」 「국가와 혁명」 「임금노동과 자본」등 고전과 그 해설서,그리고 고리키의 「어머니」 로신의 「축복」 「아Q정전」 기타 「철의 흐름」「압록강가에서」 「소년방랑자」같은 혁명적인 소설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물론 중학생시절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책 읽는데에 눈을 뜨는 시절이므로 김일성도 책은 일정하게 읽었을 것이다.그러나 적어도 이상의 책들은 거의 읽지 않았다.이러한 책은 길림에서는 구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시 중국은 대혁명기여서 번역물이 많았다고 쓰고 있지만 중국혁명은 먼저 화남에서 시작되고 그것이 화중·화북으로 번졌다.따라서 좌익출판물도 맨처음은 광동,그 다음에 상해,그리고 북경과 같은 순서로 출판되어 나갔다.그러한 출판물이 만주에 반입되더라도 그것은 심양,하얼빈에 먼저 들어가고 이보다 오지인 길림에는 그후에야 반입되었다. 이러한 상식을 안 다음에 회고록의 선전을 분석해 보자. ㈀김일성은 길림에 온 27년에 「공산당선언」 「자본론」 「국가와 혁명」 그리고 「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즉 「제국주의론」을 읽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78년의 「불멸의 자욱을 따라」부터 그렇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육문중학교에서 그가 직접 배웠던 공산주의자 상월은 상해에서 길림에 온 것이 29년 초였고 그가 휴대한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영문판이었다는 것,이 영문판을 중학생용으로 쉽게 풀어서 비밀소조에서 강의한 인물은 김일성이 아니라 상월 자신이었다는 것을 밝힌 바 있었다. ○상해서만 부분 출판 그런데 이번에는 레닌의 이 책을 일부러 그의 「독서목록」에서 빼고 있다.그 이유는 여러가지 추측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겟다. ㈁필자는 앞에서 화성의숙 시절에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는 회고록의 주장에 대하여 이 시절 화전에서는 그러한 책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을 들어 그것이 헛된 주장임을 밝혔다.그런데 상월은 길림에 올 때 「제국주의론」이외에 다른 공산주의 서적을 가져온 흔적이 없다.이 점을 보면 김일성은 29년에 가서도 이 책은 읽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크게 된다. ㄷ)필자는 일찍이 중국에서 자본론이 부분적으로나마 번역출판된 것은 1930년 상해에서 있은 일이었고 따라서 26년의 화전이나 27년의 길림에서 김일성이 이 책을 읽었다는 말은 성립이 안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은 이번에는 이러한 자기 주장을 대폭적으로 바꾸어 버렸다.자기가 동대탄에 숙소를 정하고 있을 때,와서 같이 생활한 박소심이 일본어판 자본론을 읽고 있다가 자기에게 해설해 주었다고 변경한 것이다. 일본문헌에서는 박소심은 조선공산당 재건파의 하나였던 서울­상해파의 중진으로 되어 있다.김일성으로 보면 「종파」였던 박소심이 과연 그와 동숙하고 있었겠는가부터가 의문이 되지만,하여간 그는 이런 말을 끄집어 냄으로써 오히려 자본론을 자기가 읽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한 셈이 되었다. ㄹ)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27년,광동의 영동민국일보 부간 「혁명」에 이춘번(가백년)이 번역,연재하기 시작하였고 그 단행본은 29년에 출판되었다.김일성은 고리키의 「어머니」도 읽었다고 하는데 이 책 역시 29년 10월에 심단선(하연)이 「모친」이란 이름으로 번역하여 상해에서 출판하고 있다. 이런 책을 길림에서 27년에 읽어치웠다는 주장은 무식한 김일성이나 그의 아첨꾼인 어용작가들 이외는 아무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ㅁ)이 밖에 이번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읽었다고 새로 선보인 책이 있다.「임금노동과 자본」「철의 흐름」「축복」「아큐정전」「압록강가에서」「소년방랑자」 등등이 그것인데 일일이 고증하지 않더라도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았던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재경분자이었을뿐 김일성은 이상과 같이 당시 중국에서는 번역되지도 않았던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을 러시아어나 일본어가 아닌 「중국어 번역본으로 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것도 그가 길림에 있지도 않았던 27년 상반기,「길림에서 혁명활동을 벌이는 첫 사업」으로 이러한 독서를 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조작을 일삼는 것은 그 이유가 뻔하다.그는 당시 좌경화되어 있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그런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는 지금 자기가 타고난 공산주의자처럼 행세하고 있다.이 때문에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읽었다고 내세움으로써 당시의 자기를 「공산주의자」로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1」207면 ②평전 131면 ③평전 129면 ④평전 217면 ⑤평전 135면
  • 압록강 발원지는 백두산 「부석돌짬」(북한 이모저모)

    ◎“병사봉 남서쪽 수백m”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인 압록강의 정확한 발원지는 백두산 병사봉에서 남서쪽으로 수백m 아래에 있는 「부석돌짬」이라고 평양에서 발간되는 화보 「조선」최근호가 밝혔다. 「조선」지는 「압록강의 시원」제목의 특집 탐방기사에서 『백두산의 장군봉(병사봉)에서 남서쪽으로 수백m 내려가면 부석돌짬에서 천지의 맑은 물이 새어 나오는 곳이 있다.이곳이 바로 압록강의 시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화보는 이어 압록강은 그 길이가 8백여㎞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으로 중국과 국경을 이루면서 북부지역 양강도 자강도 평안북도를 거쳐 서해로 흘러든다고 소개했다. 압록강은 또한 하천강 장진강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만 9백여개의 크고 작은 지류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어족자원과 수력자원이 풍부하며 강의 유역일대에는 지하자원이 많고 산림이 울창하다고 전했다. 압록강의 유역면적은 6만4천7백39.8㎦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강을 사이에 둔 북­중간에는 3개 다리가 부설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한민족 탄압에 앞장/일제 「조선군」연구 아쉽다

    ◎독립운동사연 채영국연구원 논문서 지적/1904년 러·일전쟁초 무단통치위해 주둔/3·1운동 폭력진압… 한인 405명 살해/편제·역할·탄압실상 등 체계적으로 규명돼야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한국침략에 있어서 3대지주 역할을 했던 기관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그리고 조선군(주한일본군).이 가운데 3·1운동을 전후한 일제의 무단통치및 민족탄압의 실상을 규명하기 위하여는 당시 실질적 폭력 행사 기관이었던 조선군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채영국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논문 「3·1운동전후 일제 조선군의 동향」에서 일제통치하에서의 조선군의 편제와 배치,조선군의 역할,조선군의 한민족 탄압실상등 조선군의 군국주의적 활동 실체를 체계적으로 구명했다.이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이 한반도에 처음 파견된 것은 한국주차군(주차군)이라는 이름으로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였다.증강된 정규1개사단 규모의 주차군은 초기에는 일제의 한국병탄(병탄)과 무단정치 수행에 전위역할을 했다. 1918년 5월에는 2개사단으로 증강되면서 그 명칭도 조선군으로 바꾸고 산하에 국경수비대(19사단­두만강,20사단­압록강)·헌병사령부·요새사령부(해안경비)등의 새편제로 한반도 전역을 완전히 장악했다.체제를 정비한 조선군은 이듬해 비폭력 평화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만주지역을 근거로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한국독립군의 소탕에도 앞장섰던 것으로 돼있다. 1919년 3월1일부터 6월1일까지 3개월동안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1백여회의 시위에서 조선군의 진압내용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사망자는 모두 4백5명.이에비해 조선군의 사망자는 2명에 불과해 당시의 시위가 비폭력적이었으나 진압은 폭력적이었음을 입증했다.특히 일제가 3·1운동 이후 표방한 이른바 문화통치는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시킨후 한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이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제시한 또하나의 무력진압책이라고 평가했다. 또 조선군 국경수비대는 간도일대를 침입,독립군의 소탕을 기도했으며 나아가 독립군의배후세력으로 있던 간도의 한인사회 붕괴를 위해 경신참변을 야기시켰다.이 참변은 1920년 10월초∼11월말 사이 2개월동안 간도의 훈춘·연길·화룡현등 8개현에서 발생,3천7백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피살되었다.그리고 3천2백채의 가옥과 41개의 학교,16개의 교회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국경수비대는 또 만주의 관동군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륙침략의 첨병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그것은 ▲장작림폭살사건(1928.6) ▲만주사변(1931.9) ▲중일전쟁(1937.7) ▲장고봉사건(19 38.7)등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요약됐다.조선군은 19 45년 2월11일 「제17방면군」및 「조선군관구사령부」로 명칭이 바뀌어 해방때까지 한반도에 주둔했다. 따라서 한국과 만주침략등 일제의 동북아 지배를 위한 침략야전군으로 그 활동이 두드러졌던 조선군은 특히 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 과정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연구대상.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채연구원은 『일제 식민통치의 폭력정치화를 주도한 조선군의 활동은 일제식민지배의 새로운 성격규정과 한국민족운동의 새조명을 위해 활발한 연구가 전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 북한,외국인에 1천불씩 관광료/스페인 신문 단동∼평양 취재기

    ◎열차난방 영점… 화장실도 얼어붙어/중국 핸드볼팀까지 자유행동 제한 스페인의 최고 권위지인 일간 엘 파이스지는 16일 최근 평양을 방문한 후안 헤수스 아스나레스 특파원이 중국 여자핸드볼선수단에 끼어 중국과의 접경도시 단동에서 평양에 도착할때까지 보고 느낀 것들을 「북한,창살없는 감옥」이라는 제목아래 평양발로 전했다.요지를 간추려본다. 중국 여자핸드볼선수들은 북경역에서 음식물이 가득찬 가방을 휴대하고 평양행 열차에 올랐다.북한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이들 여자선수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억압받는 나라에서 경기를 갖는 것이 처음으로 여행자들이 전해준 북한의 궁핍과 불행이 사실인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한 여자선수는 『우리는 평양에서 경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나 다른 방도가 없다』고 털어 놓았다.선수단과 함께 비교적 편안한 1등칸을 타고 가던 러시아인 감독은 창문 밖으로 자주 보이는 꽃다발 든 화동들을 보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저주하고 공산주의를 버린 옐친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찬양했다.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은 취재비자를 내주지 않았다.구세주인 척 하는 한 통치자가 창살없는 감옥으로 만들어버린 인구 2천만의 북한을 2주일 동안 돌아보기 위해서는 관광비자를 얻어 중국 여자핸드볼선수단의 일행이 되어야만 했다. 북경에서 하오에 출발,남만주의 얼어붙은 논과 강을 지나 국경에서 열차를 갈아 탄 일행은 24시간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국경도시 단동에서 김일성배지를 단 북한세관원들이 올라와 찌푸린 표정으로 여권제시를 요구했다. 한 세관원은 러시아인 감독 이외에 유일하게 타고 있던 서양인인 우리 기자 2명과 우호적인 대화를 주고 받았다.『한국에 가 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읍니까?』 『당신 회사는 어떤 일을 합니까?』등을 물었으나 강압적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어느때보다도 고립되어 있는 이 나라는 러시아로부터의 원유 수입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 관광객들로부터 받는 1인당 1천달러의 외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또한 「침입자」일 수도 있는 두명의 기자도언론의 취재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안내원의 감시가 심해 활동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가능성 때문에 쫓아낼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자연의 힘 까지도 그 능력을 부러워한다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과 그의 아들인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은 반세기 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 가장 심한 타격을 받고있다.구소련이 사라진 후 러시아는 북한과의 교역을 달러화로 결제키로 했으며 자본주의화한 공산 중국도 이제는 경화결제를 요구하고 있다. 열차가 한국전 당시 중공군과 미군이 교전했던 압록강을 건널 때 열차내 화장실이 추위로 얼어 붙었고 출입문도 열리지 않았다.또 열차가 정지해도 아무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싱가포르 관광객들중 일부는 자유가 없는 여행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무장한 순찰병이 수없이 많다. 그보다는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교량과 도로는 더 많이 눈에 띈다. 군인들이 민간인들의 도움을 받아 야포를 밀고 가는 모습도 보인다.한 무리의 농부들이 버들가지로 만든 지게에 땔감을 지고가는 농촌 풍경은 이나라의 원시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열차는 평양역에 도착했다.중국 핸드볼 선수단 일행은 자유스런 행동을 할 수없는 상태에서 음식물을 챙겨들고 열차에서 내렸다.깨끗하고 조용하며 한쪽에는 남자,다른 쪽에는 여자들이 줄을 선 출구에서 혼잡은 찾아 볼 수 없다.또 항의하는 사람도 없다.항의는 약50년 전에 잊혀진 행위이다.
  • 휴전40돌… 6·25의 배경∼결과 총체적 조명

    ◎6권짜리 「한국전쟁사」 나왔다/전쟁기념사업회,3억여원 들여 4년만에 마무리/최근까지 공개된 자료·전문가 총동원/「한민족역대전쟁사」 1권도 함께 발간 한국전쟁을 분단으로 마무리한 휴전협정조인과 2만5천명에 이르는 반공포로들이 석방된지 올해로 40주년을 맞는다.오늘의 한반도를 남·북한으로 고착시킨 이 전쟁은 우리에게 여전히 미완의 장으로 남아있기도하다.이런 상황에서 최근 출간된 「한국전쟁사」(행림출판사)는 역사의 미완에 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답변이다. 이 대저작물은 총집필인원 49명을 동원,원고집필서부터 발간까지 무려 4년의 공이 기울여졌다.제작비용으로 따져도 원고료 2억원,제작비 1억3천만원등 총 3억3천만원이라는 유례없는 거액이 투입됐다. 「한국전쟁사」6권과 「한민족역대전쟁사」1권등 모두 7권에 5천85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그 방대한 분량못지 않게 내용및 관련사진,전쟁관련참고문헌,부도등 자료로서도 종래의 전쟁사와 구별된다. 「한국전쟁사」의 구성은 한국전쟁의 진행과정을 개략적으로 소개한제1권「요약통사」로 시작된다.제2권「전쟁의 기원」은 전쟁의 기원에 관한 좌·우익학자의 시각과 민족분단의 대내외적 원인및 한국전쟁발발직전의 미국·소련·중공등의 대한반도정책을 개관했다.「북한군침공과 한국군방어」「낙동강에서 압록강으로」「중공군개입과 새로운 전쟁」등 3·4·5권은 전쟁의 진행과 휴전에 이르기까지를 사건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제6권「한국전쟁의 영향」에서는 전쟁결과를 경제·사회·국제관계속에서 분석해 냈다.이밖에 각권은 서론과 각 세부항목·결론·부록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이 전집의 총결편을 이루는 「한민족역대전쟁사」는 종래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한국역대전쟁의 시대별개관을 통해 대외전쟁의 교훈과 역사적 의의를 한눈에 고찰할 수 있도록 엮었다.전쟁의 개념과 정의를 살펴본 총설,고대·고려·조선시대의 전쟁,결론부문으로 구성돼 있다.1백94쪽에 달하는 연표는 자체로 한권의 역사서적이자 자료가 된다. 이 책에 담긴 의미는 40년동안 미뤄온 한국전쟁의 배경과 원인,결과를 국내전문학자들이최근까지 공개된 이용가능한 모든 최신자료를 이용해 객관적으로 종합화한데 있다.지금까지 한국전쟁에 대한 나름대로의 많은 국내외학자들의 연구결과가 발표돼 왔지만 모든 분야를 망라해 종합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한국전쟁사발간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병형)의 이번 발간작업에는 국방군사연구소 장창호부소장,이은봉책임연구원,차성환선임연구원등 3명이 편집·기획작업을 맡았다.집필진으로는 김학준청와대대변인,김점곤경희대교수,유석열외교안보연구원,유재갑국방대학원교수,최병옥전전사편찬위원회수석편찬위원,온창일육사교수,김종기해사교수,전인영서울대교수,김양명정신문화연구원교수등 각전공분야의 권위진들이 전공별로 항목을 분담해 대거 참여했다. 한국전쟁의 산증인인 백선엽예비역육군대장은 『전쟁당시 북한의 배후세력이었던 중국·소련등이 아직까지 관련자료를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아 이 전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학자들이 자료빈곤에 허덕여 왔다』고 말한다.그래서 이번 저술을 최근까지 공개된 모든 자료와 권위있는 군사전문학자들이 총동원된 한국전쟁에 관한 완결편으로 평가했다.
  • “천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은 호수”

    ◎1886년 영인이 쓴 「장백산­만주기행」에 묘사/삿갓쓰고 한가로이 낚시하는 조선인 모습 그려/백두산 정상 관목지대는 “에덴의 동산”으로 표현/문도이주 조선인의 생활상 등 상세히 기술 만주 간도지역에 이주한 우리 민족의 삶과 민족성을 상세히 묘사한 가운데 민족이 우러러보는 성산 백두산을 기록한 19세기 후반의 자료가 발견됐다.서울대 도서관에서 송기호교수(한국사)가 찾아낸 이 자료는 18 88년 롱맨출판사가 영국 런던에서 간행한 「장백산­만주 기행」(The Long White Mountain).특히 이 책속의 백두산 천지 풍경은 가장 오래된 백두산 실사 컬러스케치로 추정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영령인도제국의 봄베이 사무소에 근무하던 영국인 공무원 H E M 제임스.그는 2년간 휴가를 얻어 중국여행을 계획하던중 우연히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영국왕립근위대의 F E 영허즈밴드 중위를 만나 함께 1886년 3월부터 2년동안 요령성 길림성 흑용강성등 중국 동북부 3성과 러시아의 연해주지방을 여행했다.그 과정에서 그는 백두산을 등정,천지의 신비로움을 감탄했으며 도중에 만난 조선인 이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5백쪽에 달하는 여행기에 상세히 기록했다.특히 동행했던 영허즈밴드는 그림에 솜씨가 있어 많은 삽화를 그렸는데 그 가운데 백두산 천지와 낚시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눈길을 끈다. 제임스 일행이 인도의 캘커타항을 떠난것은 1886년3월19일.말레이시아의 페낭과 싱가포르를 거쳐 홍콩에 도착한뒤 바로 광동 상해 북경 천진을 거쳐 요령성의 잉커우(영구)항에 도착했다.그곳에서 준비를 완료,만주여행에 돌입한 것은 2개월후인 5월19일 이었다. 그들이 만주지방을 택한 이유는 남부나 동부보다 기후가 좋고,비옥한 땅에 자원이 풍부하고,인구가 적은데 비해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특히 장백산맥 일대에는 호랑이·곰·사슴등 산짐승이 풍부하여 사냥의 천국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요령성의 수도인 목단(오늘날의 심양)을 거쳐 길림성으로 들어온 그들이 조선인을 만난 것은 압록강 부근에 다다라서 이다.압록강의 굽이굽이 완만한 흐름과 풍광은 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제임스는 개척민으로서의 조선인들의 삶을 정확히 살피고 있다.『상당수의 조선인들이 강을 건너와 살고 있었으며 낚시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크리스천이 많았는데 그들은 1882년 로스라는 선교사가 조선어로 번역한 성경책을 지녔으며 자신들의 교회를 갖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만주식 집을 자신들에게 편리하도록 개량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또 조선인들이 농업노동자로 많이 와있는 한 마을의 규약중 조선인들에게는 낚시를 금한다는 내용을 소개했다.이는 낚시의 풍류를 즐기다 보면 농사일이 뒷전이 될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였다.그는 등산 도중 많은 지명들이 조선어로 돼있었다면서 그 산을 조선인들은 백두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도 들추어냈다. 천지에 다다를수록 그들이 느끼는 외경감은 더 컸다는 제임스는 정상의 관목지대에 올라서는 「에덴의 동산」을 옮겨온듯 하다고 찬탄했다.정상에서 천지를 대했을때의 감격은 「이 세상에서 가장 투명하고 아름다운 호수」라고 표현하면서 그잔잔함은 마치 스위스의 레만호수같다고 표현했다.그들은 중국인들이 「바다의 눈」이라고 부른다는 천지에서 1주일을 머물면서 각종 조사와 더불어 비경을 즐긴 것으로 돼있다. 이어서 그들은 치치하르와 훈춘을 거쳐 연해주의 노보­키예프스키지방을 여행,그곳에서도 많은 조선인을 만났으며 러시아인들이 조선인들의 근면성과 학덕을 칭찬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술했다.이 여행기는 이렇게 연해주를 끝으로 다시 역순으로 남하,상해에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 청소년탐험대 백두산서 통일기원

    ◎초중고생 10명,지난달 25일 국토사랑·극기정신 체험/연초 마라도서 천지까지 국토종단 성공/영하 30도속 썩은 감자로 허기 달래기도/백록담 물과 흙 백두산에 흩뿌리며 통일노래 불러 어른들조차 오르기 힘든 겨울 백두산을 우리 어린이들이 등정하고 최근 귀국했다.통일대행진에 나선 한국소년탐험대(대장 강원규)가 국토사랑과 극기정신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낸것이다. 『백두산 오르는 길이 너무 힘들었지만 정상에서 천지를 보고 힘든것도 다 잊어버렸어요』 한국소년탐험대 대원으로 이번 백두산 등정에 참여한 안지원군(서울 은평구 신사국교 6년)의 감개어린 소감이다. 통일대행진은 마라도에서 백두산까지 우리의 국토를 걸어서 체험하며 국토사랑과 극기정신을 기르는 프로그램으로 이번 백두산 등정에는 초·중·고등학생 10명과 2명의 어린이지도자가 참가했다.올해 1월1일 국토 최남단 마라도를 출발하여 예정(본지 92년12월24일자 참조)대로 1월18일 임진각까지의 국토종단을 무사히 마쳤던 통일대행진팀은 20일 비행기편으로 중국 북경을 거쳐서구정인 23일 백두산 초입에 다달았다. 겨울 백두산 등정은 중국정부의 통제와 2∼3m의 눈이 쌓여있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탐험대는 중국인 안내운전사를 따돌리고 얼어붙은 눈위을 디디며 24일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다.눈으로 유실된 길을 찾아 3분의 1쯤 올랐을때 탐험대는 첫 어려움에 봉착했다.식량이 담긴 배낭을 빼놓고 온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것. 『산행을 지휘하는 강서구대장과 함께 등정포기를 결정했으나 아이들의 성화로 등정을 강행할수 밖에 없었다』고 통일대행진을 주관한 강원규대장은 밝혔다.영하 30도이하로 내려가는 기온으로 오줌을 누면 바로 얼 정도이고 뱉은 침이 얼어서 구르는 추위 속에서도 아이들은 가끔 눈구덩에 빠지기도 하면서 정상을 향해 꿋꿋이 나아갔다.그러나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해가 지는 바람에 탐험대는 사람이 철수한 중국기상대 건물에 간신히 다달아 둥지를 틀었다.땔감을 구해 3시간만에 불을 피우고 썩은 감자더미를 찾아내 허기를 달랬으며 눈덩이로 물을 대신했다. 이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탐험대는 다음날 아침인 1월25일 상오7시 드디어 백두산 정상에 올라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며 한라산 백록담에서 가져간 물과 흙 돌 등을 백두산에 흩뿌려 합치는 조촐한 통일기원의식을 거행했다.『애국가와 통일노래를 부르면서 모두들 통일돼서 마라도부터 백두산까지 걸어갈수 있길 기원했다』고 안군은 밝혔다. 하산한 탐험대는 중국에서 화제가 되어 연변TV방송에 출연하고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압록강국경의 집안과 두만강국경인 훈춘을 방문하기도 했다.또 연변 조선족어린이의 집을 방문하고 훈춘제5소학교 어린이들과 자매결연을 맺는등 어린이문화교류에도 힘썼다.탐험대는 올 5월 연변 조선족어린이들을 한국에 초청하기로 했다. 강대장은 『통일대행진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참아내어 대견스럽다』면서 『어린이들이 이같은 나라사랑 체험을 바탕으로 일상에서도 모범적인 생활을 해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5)

    ◎우상화 제1호 「광복의 천리길」/“14살때 독립안되면 안올 결심… 도강”/45년 수행기자 한재덕이 기사로 “창작”/「압록강의 노래」도 그이후에 만들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25년 1월22일에 만경대를 떠나 만주로 갔다고 하고 있다.졸업식을 몇달 앞두고 창덕학교를 중퇴했다는 것이다. ○김형직 테러사망 이런 엄동설한에 떠난 것을 김일성은 일제에 체포되었다는 부친의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필자가 이전에 지적한 바와 같이 만주 팔도구의 대안인 포평에서 김형직이 탈주했다든가,그 과정에서 그가 심한 동상을 입었다든가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김형직은 26년 6월에 갑자기 테러를 당해 죽었는데 그 때까지는 건강하였다.따라서 김일성이 일부러 가장 추운 1월 하순에 가야할 이유란 믿기가 어려워진다. 또 25년 당시 부친이 건강했더라면 김일성이 혼자서 만주로 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실제로 1960년까지의 북한기록은 52년 전기의 기술대로 김형직이 그를 「데리고」만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그가 단독으로 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여간 만경대를 떠나 13일째 되는 날 포평에 도착한 김일성은 여기서 부모가 있는 팔도구를 향하여 압록강을 건너가게 된다. 그런데 이 김일성의 도강에 관하여서는 종래의 전기들이 판에 박은 듯이 사용하여 온 문장이 있다.그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명문장은 이번 「세기와 더불어」에서 「압록강의 노래」가사까지 덧붙여졌다.그러나 그 표현은 종래와 다름이 없으므로 이 비장감이 넘치는 문장은 김일성이 실지로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도 오해할 수가 있다.그러나 이 문장은 25년의 도강 당시에 김일성이 한 생각은 아니다.이것은사실은 해방직후 작가가 만들어 낸 우상화를 위한 창작물인 것이다. 1945년 10월 한재덕씨는 김일성을 수행하여 만경대를 방문하였는데 그 2∼3일후 한씨는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장군과 그 가족환영 및 위안회」에 초대되었다.신문기자였던 한씨는 거기서 김일성이 하는 연설을 받아 썼다.그러나 한씨는 김일성의 서툴고 갈팔질팡하는 연설을 듣고서는 연필을 집어치우고 술만 마시게 되었다.한씨는 이튿날 연회의 기사를 써야했는데 이 때 무리를 알면서도 이상과 같은 명문장을 만들어 신문에 실었다는 것이다. 한재덕씨는 「평양민보」창간호에 김일성이 개선한 「군중환영대회」기사를 썼고 또 거기서 소좌에 지나지 않았던 김일성을 「장군」이라고 불러주어 일약 그의 마음에 들게 되었다.그러나 한씨는 우여곡절 끝에 1959년에 한국에 귀순하였다. ○한 기자 한국귀순 한씨는 또 이 기사를 쓴 당시는 「압록강의 노래」가 없었는데 그 후에 이러한 노래도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압록강상에서 비분강개하는 김일성,이 영웅적 장면은 역사적사실이 아니라 한재덕씨가 써 준 미사여구였다.그리고 「광복의 천리길」이란 부친을 따라 갔건 혼자 갔건 간에 그의 이 심정토로 부분을 빼버리면 사람들을 울리는 장면이 없는 한갓 평범한 이민의 이동로정에 불과하게 된다. 지금 북한에서는 매년 1월 전국에서 청소년이 선발되어 이 「광복의 천리길」을 행진하고 있다.김일성 우상화작품 제1호인 한재덕씨의 이 문장은 지금도 북한 청소년이 집단주의를 익히는 세뇌용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광복의 천리길」의 종점은 만주 팔도구에 있는 부모의 집이다.북한에서는 그가 여기에 25년2월3일에 도착한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앞에서 그가 1월 하순에 창덕학교를 그만둘 이유는 없다고 말하였다.또 필자는 이 만주행은 창덕학교가 졸업생을 내는 3월 하순이라고 추정한 바도 있었다.그러나 졸업식에 참가하지 않은 것 같으면 2월말이나 3월중에 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전기에서 만주행을 적어도 1개월이상 앞당기고 있다.그리하여 이러한 날짜조작으로 비운 자리를 그는 이른바 「혁명활동」으로 메우게 되는 것이다.「세기와 더불어」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달이상 앞당겨 『팔도구의 집에서 나를 맞이한 모친은 저녁밥을 차려주고는 여기는 놈들의 감시가 심하니 동생들을 데리고 곧 떠나라고 하였다.그래서 우리는 발구를 타고 팔도구를 떠나 눈보라가 이는 압록강가로 오구비라는 조선쪽에 가서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임강으로 갔다.우리는 거기에서 한달 가까이 객주집에서 숨어 살았다.모친이 삼촌 김형권과 임강으로 온 후 부친의 전화를 받고 비로소 우리는 무송으로 가게 되었다』 전기에서는 김일성 가족의 이러한 무송행은 1925년3월로 되어 있다. ①김일성저작집1 361면 ②「김일성을 고발한다」 1965년 내외문화사 간 96면 ③평전 61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3)

    ◎소년시절:4/“중국소학교서 애국작문 썼다” 선전/“중국에 충성” 의미… 주체사상에 정면배치/82년 전기부터 「임강시절 우상화」 본격화/김일성,“어릴때 또래애들 많이 때렸다” 인정 김일성이 임강소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똑똑하게 말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8월에 발간된 「무지개 비낀 만경대」이후이다.그래서 임강소학교 시절의 우상화작업도 이 책부터 본격화 되었다. 이 책에서는 김일성이 만경대에 있었던 5살때부터 불학이문장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한문글에 뛰어났었다는 말이 나온다. ○새 내용 별로 없어 필자는 세종때 매월당 김시습이 거세문장이란 평판이 났다는 일화를 어디에서 본 일이 있다.그런데 「기는 놈이 있으면 나는 놈이 있다」는 격으로 김일성은 「5세때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대문장가가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임강에서는 친구들이 놀자고 하면 「오늘 배운 글을 다 외우고 놀자」라고 하며 책을 외우기 전에는 놀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82년부터 시작된 우상화작업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인지 이상의 이야기 이외에는 모친에 대한 「효성」정도밖에 새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이 때문에 1년반이나 있었던 임강시절의 이야기가 20일정도밖에 있지 않았던 중강진때 이야기보다 그 양이 적다는 기묘한 현상이 생겼다. 다만 김형직이 백산무사단의 사업을 하고 있을 때인 어느날,김일성이 부친으로부터 과업을 받아 중강진에 가서 「탄알과 화약」을 운반해 왔다는 이야기가 「세기와 더불어」에 실리고 있다.경찰들이 세관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는데 그는 가방안에 탄알과 화약을 넣어가지고 태연하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무지개 비낀 만경대」에 실려있지만 「세기와 더불어」는 그 이야기의 세부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그러나 만8세의 어린아이에게 김형직이 이런 일을 시켰겠는가라는 의문부터 먼저 생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팔도구일화 많아 팔도구시절은 임강시절과는 달리 「일화」투성이로 되어있다.1960년때부터 팔도구소학교에 다녔다고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작물도 그만큼 많아진 결과이다.그중 주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⑴소학교에서 김일성이 지었다는 작문은 이렇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나가자면 많은 일을 하게 된다.그 가운데서도 가장 고귀한 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다.예로부터 전하는 말이 나라없는 백성은 금수보다도 못하다고 하였다.그러므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은 우리들의 영광이며 의무로 된다…」 무책임한 어용작가들은 애국이란 제목으로 이상과 같은 작문을 김일성에게 써 주었다.그리하여 소학교 2학년짜리 김일성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복무한다」라는 개념어만으로 된 작품을 썼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그들은 중국학교에서 「애국」이란 작문을 쓰면 그것은 「중국나라와 중국백성에게 복무한다」라는 뜻으로 되어 「주체사상」과 정반대의 작문으로 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런 글을 쓰고 있다. ⑵김일성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도중 「장키다리」라는 중국아이가 조선학생을 「망국노」라고 놀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 학생의 부친은 관청에 다니었으나김일성은 그를 혼내주었다. ⑶압록강 얼음판에 너비가 1m도 넘는 큼직한 구멍을 뚫어 놓고 그 구멍을 뛰어넘는 내기를 하였다. 보폭이 작거나 겁이 많은 아이들은 얼음구멍을 뛰어넘지 못하고 물속에 풍덩 빠지기도 하였다.그런 날이면 물에 옷을 적신 아이들의 집에서는 화로불에 옷을 말리며 저 평양집 성주때문에 온동네 아이들이 동태가 되겠다고 우는 소리를 하였다. ⑷어떤 날은 밤늦게까지 팔도구 뒷산에서 아이들과 함께 군대놀이를 하느라고 어른들의 속을 까맣게 태운 적도 있었다.그럴때면 팔도구사람들이 온밤 잠자지 못하고 우리를 찾아다녔다. ⑸한번은 그때 나하고 같이 공부하던 김종항이 자기 집 창고에서 뇌관 하나를 꺼내가지고 우리한테 자랑하였다.우리는 그날 화로불 곁에서 호박씨를 까먹으며 놀았는데 김종항이 그 뇌관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자꾸 불었다.그러다가 뇌관에 불씨가 닿아 그만 폭발하였다.그바람에 그는 여러군데 상처를 입었다. 김일성은 어릴때부터 유·소년들을 가차없이 다루어 패거리를 데리고는 다른 아이들 두들겨 패거나 못살게 구는데 유별났던 모양이다.「세기와 더불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선천적인 폭학성 「돌이켜보면 내가 어려서 장난을 제일 많이 한 때가 팔도구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어떤 날은 어른들이 혀를 찰 정도로 험한 장난을 할 때도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되풀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들은 아이들에 대한 단속을 무섭게 하였다.그러나 만리대공으로 날아 다니는 자유분방한 동심을 자물쇠로 잠그어둘 수는 없었다」 현재 북한에서 당원들이나 민중을 사정없이 다루는 김일성의 행패와 이 「동심」을 연관시켜 보면 그의 폭학성은 천부적인 것이었다.김일성이 본래 이런 인물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유일독재」가 가능한 것이다. ①1982년 전기 14면 ②같은 책 15면 ③같은책 같은면 ④「세기와 더불어 1」73면 ⑤같은책 73∼74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1)

    ◎소년시절:2/“김형직에 워싱턴행적 배웠다”/82년엔 없던 “가정교육” 이번전기 삽입/“중국귀화 교육” 팔도구소학교에 편입/김일성 “공부잘했다” 회고록서 자랑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진석이 1921년 4월에 평양에서 체포된 후 더 이상 임강에 살 수 없게 된 김형직이 장일현팔도구로 이사하셨다고 쓰고 있다. 임강은 독립운동단체들의 활약이 맹렬한 지방으로 1920년 7월에는 봉천군벌 고문으로 있었던 판본준마(사카모토)의 사간도탐사반이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하는 「모예산사건」이 있었다.김형직과 같은 자산가였던 이두희,그리고 정단등 10명이 체포되었는데 모두 유하현삼원포의 독립군중앙총단장 조맹희계통이었다. ○친지 검거로 이사 사카모토 수사반은 백산무사단 계통인 팔도구소학교 교사 김관계(김보안)는 체포하지 못하였다.그러나 같은 백산무사단 계통인 김형직이 수사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독립운동에 관여한 혐의가 그에게는 그만큼 적었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강진석이 체포되면서 김형직도 임강을 떠나지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팔도구까지 2백50리를 이사 갈 때는 전도사 방사현이 동행했는데 압록강과 팔도구하의 합수목에 있는 마을에 광제의원을 차리게 되었다.김일성은 21년 여름에 이곳 팔도구소학교 2학년에 전학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 말하는 임강소학교의 정식명칭이 모예산현립소학교였던 것과 같이 팔도구 소학교도 그 정식명칭은 장백현립제칠분교이다.장백현의 동남단에 현치인 장일부가 있는데 거기에 현립제1분교가 있었고 거기에서 압록강을 따라 대체로 서쪽 하류로 나가면서 제3·제4 등 분교가 설치되어 임강현경인 팔도구에 제7분교가 있었던 것이다.중국측에서는 이 학교들을 정몽학교로도 불러 팔도구소학교는 제칠정몽학교라 하였다. 팔도구의 제7정몽학교는 1917년에 설치되었다.그 12년 후가 되는 1929년의 통계에 의하면 귀화한인인 교원이 1명만 있었고 아동은 8명 밖에 되지 않았다.당시는 4년제 소학교였으므로 단순계산으로는 한 학년에 2명 꼴이었다.너무 학생수가 적어서 새삼스럽게 놀랄 정도이다. 1927년 일제가 영사분관을 모예산에 설치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임강현 지사장극상은 이를 재만한인의 탓으로 돌리고 임강현에 거주하는 한인에게 퇴거를 강요하였다.이러한 압박으로 당시 임강현에서는 한인 5백∼6백명이 현경 밖으로 도피했다. 팔도구는 임강현 바로 동쪽에 있는 한인촌락이므로 이러한 영향을 받아 1929년에는 그곳의 주민들이 아주 적었던 모양이다.이것이 팔도구소학교의 학생수 8명이란 통계에 반영되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의 영사분관 설치책동이 없었던 1925년의 인구통계를 보더라도 팔도구의 인구는 4백명,호구는 75호였다. ○학생 겨우 15∼16명 당시의 취학률은 인구의 4%정도로 추정되므로 김일성이 있었던 1921∼2년 께의 팔도구소학교는 학생수 15∼16명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이 학생수로는 4개 학년으로 나누어 1개 학년에 각각 4명 정도인데 이 4개 학년을 교원 1∼2명이 복식수업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당시 공부를 잘 했다고 자랑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쓰고있다. 「내가 다니는 팔도구소학교는4년제 중국인학교였는데 수업도 중국말로 하고 취급하는 과목도 중국의 것이었다.시내에는 조선학교가 없었다」. 장백현은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빠져 나온 한인이 거의 전부였으므로 소학교에는 중국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러나 이 학교는 한인을 귀화시켜 중국에 정착하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이 있었던 1921년 당시 이 학교의 주된 교과목은 수신·국문·사회·산술 등이었는데 수신이란 유교사상이며 국문이란 한문이었다.당시는 아직 백화문(보통 중국말)은 가르치지 않았다. 필자는 평전에서 이 학교에서는 한국어도 약간 가르친 것이 아닌가고 추측했지만 김일성은 이상의 글에서 이 학교에서는 한글교육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한글과목은 없어 그 대신 그는 김형직으로부터 개별교육을 받았다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우리 글과 지리,조선역사를 배워주고 레닌·손문·워싱턴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이름난 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다… 그 덕으로 나는 그 때 「조선문위인」「조선영웅전」「노국혁명사와 레닌」같은 좋은 책들과 신문·잡지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의 말은 북한의 이전 전기에는 없었던 말들이다.8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임강에서 가정교육에 열심이었다는 말이 나오지만 팔도구에서까지 그랬다는 말은 없다. 팔도구소학교 시절 그가 레닌·손문·워싱턴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의 위인이나 영웅,그리고 노국혁명사와 레닌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다. 강진석이 체포되자 같은 우익단체인 백산무사단에 관계하였던 김형직은 겁을 먹고 팔도구에 피난하였다.그러나 김형직이 「노국혁명사와 레닌」같은 책을 자식에게 가르쳤다는 선전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1990년대가 되어도 이런 식의 날조가 진행중이다. ①「세기와 더불어Ⅰ」72면 ②같은 책 72면
  • 평양에도 청소년대상 노래방(북한 이모저모)

    ◎「금」 획득선수 인민체육인 칭호 ○청년회관에 250석 규모 ○…최근 평양에 「화면반주 음악실」로 불리는 「노래방」이 등장했다고 평양신문이 보도했다.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평양 청년중앙회관에 2백50석 규모로 만들어진 이 노래방은 청년중앙회관 대중정치교양과에서 운영하며 근로청년,대학·전문학교 학생 및 청년들은 대상으로 매주 월 화 수 토 일요일 상오 9∼12시,하오 2∼6시에 문을 연다. 이곳에는 보천보전자악단이 취입한 수십곡의 노래가 준비되어 있어 가창자들이 자신의 키이에 맞게 음정과 박자·음색을 자유롭게 조절해 가며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2중창으로도 부를 수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최철수 등 7명에 수여 ○…북한은 최근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전원과 코치들에게 「인민체육인」칭호를 수여했다고 중앙방송이 보도했다. 북한은 지난달 25일자로 된 「중앙인민위 정령」을 발표,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최철수(권투·김일성대학) 배길수(체조·조선체육대학) 김일 이학선(이상 레슬링·압록강체육선수단) 등 4명과 국가종합체육선수단 책임지도원 염동찬을 비롯한 3명의 경기지도원(코치)들에게 「인민체육인」칭호와 함께 국기훈장1급을 수여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대학수 280개 주장/종합대규모는 2곳뿐 ○…북한은 「전국 지식인대회」를 앞두고 지난 5일 「중앙통신사 보도」를 발표,현재 북한에는 김일성대학을 비롯해 단과대학과 공장·농장·어장대학등을 포함,모두 2백80여개의 대학이 있으며 이를 통해 약 1백60만명의 인텔리들이 배출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은 2백80여개의 대학중에서 종합대학·단과대학·전문대학과 공장·농장·어장대학등 산업체대학의 구성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치 않았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종합대 규모의 대학은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 두곳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단과대학·전문대학이며 그밖에 부설대학이 1백여개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내외】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0)

    ◎소년시절:1/중국학교 입학 「지원」으로 합리화/한인탄압 앞장섰던모아산소학교 다녀/주체사상에 흠결 우려 기술 제대로 못해/“가정교사 들여 중국어공부” 70살 넘어 자인 김형직 일가가 이주한 임강은 임강현의 현소재지였는데 당시는 임강이라 하지않고 모아산이라고 불렀다.그들이 정착한 곳은 현공서에서 압록강변 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있었던 정미소 옆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70년 후반부터 언급 김형직은 여기에 순천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방안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을 걸었다.김일성은 자기 부친이 가짜 의사였던 일을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자랑하면서 그가 몇달 후 「명의」로 평판났다고 쓰고 있다. 하여간 임강에 온 김일성은 만7세였으므로 학교에 들어가야 할 연령이다.그런데 종래 북한에서는 그가 소학교에 다닌 일조차 이리저리 변경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도록 만들고 있었다. 임강에서 소학교에 다닌 것도 1949년에 발간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 「모아산의 소학교」에 다녔다고 한것이 처음일 것이다.그러나 이런 서술로써는 객관적으로 그 학교가 중국인의 학교인지 한인의 학교인지 알 수가 없다. 「장군님께서는… 부모님을 따라 압록강가의 중강진으로 가시었고 그후 임강을 거쳐 팔도구로 가시어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니시었다」 임강소학교가 북한에서 조심스럽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다.1978년에 나온 「불명의 자묵을 따라」에서 「1920년 봄,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께서는 강안촌에 있는 임강 소학교에 입학하시었다」라고 쓴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학교인 임강소학교를 전기에 내는 것은 「주체사상」에 저촉되는 일이었는지 어떤지 8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가정교육」에 열심이었다는 기술만 하고 임강소학교 입학문제는 언급을 피하였다. ○사상적 해결 시도 북한 어용학자들의 이러한 갈등은 이번 회고록에서 일단 낙착이 간 모양이다.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우리가 임강에 건너가자 아버지는 한 반년 남짓동안 중국교원을 붙여 중국말을 배우게 한 다음 나를 임강소학교 1학년에 입학시켰다. 나는이 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중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8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가정교육」에 열심이었다고 썼는데 여기서는 그가 자식에게 중국인 가정교사를 붙였다고 밝히고 있다.또 그가 정식으로 임강소학교에 입학한 것도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서술로 되고 있다. ②「어째서 아버지가 나에게 서둘러 중국말 공부를 시키고 나를 중국인학교에 다니게 하였는지 그때로서는 미처 다 깨닫지 못하였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지원」사상에 기초한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일성은 이런 말로 오랫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임강소학교 진학문제를 「사상적으로」해결하였다.아마도 김일성은 1980년대 초까지 아버지가 시킨 중국학교 입학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그는 수십년이나 이 문제를 가지고 어용학자들에게 우왕좌왕시킨 끝에 「지원」을 가져와서 합리화시켰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전기의 불명확한 기술은 북한 어용학자들 뿐 아니라 필자에게까지 판단을흐리도록 만들어 놓았다.필자는 김일성 평전에서 임강에는 당시 모예산현립소학교와 한인이 경영하는 「모예산숙」이 있었는데 그 어느 쪽에 김일성이 입학했는지 단정할 수 없다고 썼었다.이번 김일성의 회고록은 필자의 이런 궁금증도 풀어준 것으로 되어 있다. ○수십년 걸려 정리 필자가 당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모아산현립소학교가 1927년 당시 한인을 박해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반동소학교였기 때문이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만주의 봉천군벌과 「불령(불령)선인취체협정」을 체결하였다.이 협정은 「삼시(미쓰야)협정」으로도 불리는데 일제는 이 협정후 만주에 있는 한인 독립운동가와 운동단체를 마음대로 탄압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작림은 일제가 한인탄압을 구실로 1927년 안동령사관의 모예산분관을 설치할 책동을 부리게 되자 이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뒷면에서 중국의 관청과 민중을 발동시켜 반일운동을 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반일운동은 그 직접적인 대상이 한인이었다.임강의 관헌은 모아산분관 설치의 주요인이 일제에 의하여 만주로 쫓겨 나온 한인에게 있다고 단정하고 중국민중을 동원하여 한인을 박해한 것이다.김일성은 이 악명높은 소학교에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기 싫어하여 70세 생일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다. 이번에 「지원」을 내세우고 입학사실을 공개한 것은 김일성연구의 진척으로 사실을 감추지 못하게 된 그가 택한 고육지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Ⅰ」59면 ②평전 39면 ③평전 38면 ④「세기와 더불어 Ⅰ」58면 ⑤같은책 59면
  • “굶주림…절망…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요덕15호 정치범수용소:1)

    ◎북한탈출 안혁·강철환씨 수기연재 앞서 회견/5만명 가족·독신자동 나눠서 감시/탈출하다 적발되면 돌팔매질 사형/강냉이죽 연명… 사람 죽으면 옷차지 아귀다툼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죽음자체보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는 죄없는 북녘 동포들이 절망과 공포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다. 함경남도 요덕군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에 있는 12곳의 수용소 가운데 가장 크고 처참한 곳이다. 북한 주민들은 「조선인민경비대 2915부대」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이 곳을 「15호 관리소」또는 「15호」라고 부른다. 15호는 구읍리·입석리·용평리·평전리·대숙리등 5개 리(이)가 있는 요덕군전체 지역에 설치된 거대한 「수용소군도」이다. 이 수용소에는 이른바 반동분자·사상불순자라는 누명을 쓴 북한 주민과 북송교포등 5만여명이 가족세대와 독신자세대로 나뉘어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에 수용되어 있다. 이곳에 9년6개월동안 가족과 함께 수용되었던 강철환씨(24·북송교포 2세)와 1년3개월간 혼자 갇혔던 안혁씨(24·전탁구선수). 강씨는 조총련 교토(경도)본부 상공회장을 지내다 지난 61년 일가족과 함께 북송된 할아버지 강태휴씨(92·생사불명)의 손자로 북한에서 결혼한 아버지 강리명씨(89년 병사)와 어머니 신도옥씨(90년 병사)사이에서 68년 출생했다.강씨 가족들은 소문난 부자였던 할아버지 덕분에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아파트에서 자가용차와 냉장고까지 갖추고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77년 7월 강씨의 할아버지가 영문없이 행방불명된지 한달만에 할머니·삼촌·아버지·남동생등 일가족 4명은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강씨는 당시 10살이었고 성분좋은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강제로 이혼 당해 헤어졌다. 한편 안씨는 중학생 대표 탁구선수로 중앙체육학교에 다니던 중 호기심으로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의 연길등지에서 놀다 돌아온뒤 간첩으로 몰려 87년 11월부터 1년3개월간 수용되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사지에서 풀려난뒤 지난 3월 북한을 탈출,중국을 거쳐 남한에 귀순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눈에 선한 수용소의참상을 상세히 폭로하고 싶어한다.그들은 인간다운 삶을 되찾게 된 만큼이나 비인간적인 수용소 생활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 강씨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인간에게 온갖 잔인한 고통을 주어 죽어가는 과정을 처참하게 체험토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말했다. 1인당 하루 5백g의 강냉이알맹이가 주식의 전부이며 반찬은 굵은 소금.이때문에 수용소 사람들은 풀을 뜯어다 강냉이를 삶아 으깬뒤 죽을 쑤어 먹거나 풀범벅을 만들어 먹고 있다는 것이다. 강씨는 또 『흙벽돌과 나무판자로 지은 낡은 집은 흙방바닥이며 1년에 한번 지급되는 마대로 짠 겉옷이 의복의 전부여서 사람이 죽으면 서로 헌옷을 차지하려고 다투며 신발은 아예 지급되지 않아 나무껍질과 헝겊으로 감발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이들은 『수용소안의 모든 사람들이 극심한 노역과 영양실조로 펠라그라병(단백질 결핍증으로 심한 피부병·설사증세와 정신이상을 일으켜 곤충등을 잡아 먹는 병)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수용소에서는 약을 구경할 수도 없어 병에 걸리면 곧바로 죽을 수 밖에 없다』면서 『폐렴·결핵등에 걸리면 치료는 커녕 산속에 있는 격리수용건물에 넣어 죽을때까지 방치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또 가족세대인 경우에는 드물게 출산을 하는 여자들도 있으나 아이들은 모두 태어난 직후 죽거나 살아도 기형아가 된다고 말했다. 수용소 생활을 견디다 못해 가끔 작업장에 나간 틈을 이용,탈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지역이 워낙 넓은데다 제대로 걷지를 못해 모두 곧바로 붙잡히고 만다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안씨는 『탈출하다 붙잡히면 수용자들이 모두 모인 공터에서 처음에는 총살을 시켰으나 얼마전부터는 총알이 아깝다며 목을 매단뒤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도록 명령하고 있으며 부녀자들은 이같은 끔찍한 광경에충격을 받고 까무러치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수용소 사람들에게는 겨울이 시작되는 11월부터 이듬해 새풀이 돋는 3∼4월까지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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