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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신의주 대홍수/김정일,육·해·공군 동원 복구 지휘

    북한은 18일 관영 중앙통신을 통해 이달초 압록강 연안 국경도시인 신의주 일대에 큰 홍수가 발생,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냈으며 김정일이 육·해·공군을 동원,「구조전투」를 직접 지휘한 사실을 뒤늦게 보도함으로써 엄청난 수재피해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북한의 이같은 재해보도는 사고나 재해 등 부정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그동안 일체 언급하지 않았던 북한언론들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 장백진과 혜산시(압록강 2천리:2)

    ◎장백진에 조선족 2∼4세대 1만3천명/다리하나 건너 혜산시,북한철도 종착점/“못가는 고향땅”… 가슴엔 증오의 그리움만 일제치하에 우리민족이 무리지어 건넜다가 8·15 감격속에 다시 우르르 몰려 고국땅으로 넘어갔던 국경의 강.백두산기슭 장백조선족자치현 탑산에서 내려다본 국경의 강 압록수는 올해 8월 아침에도 유유했다.그러나 역사는 의구한 산하와는 달리 운명이 바뀌어 강건너 고국은 분단된 지 50년이 되었다. 그 강건너 지척에다 고국을 두고 중국에 눌러앉은 조선족은 백두산 아래 장백현에도 보금자리를 이루었다.장백조선족자치현이라는 행정구역상의 명칭처럼 장백현에는 조선족이 많이 산다.최근 통계에 따르면 장백현의 조선족 이주민 후손들은 1만3천1백명으로 전체인구의 17.1%를 차지하고 있다.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았던 1929년에는 4천2백57가구 2만4천3백49명이나 되었다. ○전체 인구의 17% 차지 장백진 조선족에게 고향을 물어보면 모두가 고국의 고향을 댄다.이주민 1세들이야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2세는 물론 4세들 까지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대단했다.그러나 강건너 북한 땅에 고향을 둔 사람은 여권이나 통행증이 없어서 못 가고,한국에 고향이 있는 사람은 혈육이 없거나 연령제한으로 선뜻 귀향길이 열리지 않고 있다.이래저래 애만 태우는 조선족은 고향이 원수 같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장백진에 사는 이태원(80·강원도 회양군 태생)노인은 갈래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증오 섞인 말로 표현했다. 『누군들 고향 떠나기가 소원이겠수.등 따뜻하고 배 고프지 않으면 안 떠났을 거우다.그래도 고향은 핏줄 같아서 가보고 싶을 때가 많수다.나이들면 새록새록 더 생각이 나디만 맘대로 갈 수가 없다우다.어려서 떠나서리 잊을 만한 나이도 되았는데….어떻게 고쳐 맘먹으면 가지도 못하는 고향이 고향이가 하고 단념할 때도 있수다.그런데 그 맘이 오래가지 않으니 어찌하갔수.그놈의 고향이 뭔디…』 이태원노인은 13살 나던 정월 열엿새날 고향을 떠난 것으로 정확히 기억했다.헐벗고 굶주려도 고향과 선산을 지키겠노라던 아버지도 더 버티지 못하고 짐을 꾸렸다.만주를 목적지로 하고 떠났지만 함흥에 이르러 생각이 달라졌다.조선땅을 떠나기가 싫었을 뿐 아니라 신흥군 발전소공사장에 가면 돈을 번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신흥군 장진에 막상 들어갔더니 발전소 일이라는 것이 도수로터널공사여서 하루에도 수십명씩이 죽어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정신이 퍼뜩 들어 삼수 개원을 찾아나섰다.그런데 길에서 일곱식구가 개원에 들어갔다가 다 죽고 혼자 살아온다는 사람을 만났다.거기도 살곳이 못된다 싶어 결국은 조선땅을 떠나기로 하고 6식구가 혜산을 거쳐 장백현으로 들어와 눌러앉았다.조선족이면 그만한 사연은 다 가지고 있다.그럼에도 지지리도 못 살아 버리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까닭은 동물적 귀소본능에서일까. ○한족도 망향탑 세워 탑산에는 망향봉이라고 이름한 산봉우리가 있다.그리로 발길을 옮겨보았다.조선족이 그런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 아닌가 했지만 사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족이 모이는 곳이라 했다.웬 한족의 실향인가 하겠지만,장백현에는 하북성이나 산동성 사람들이 많다.그들은 중양절이면 망향봉에 올라 서남쪽을 향해 꿇어앉아 절을 올리며 고향과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는 것이다. 이 망향봉에는 비석 하나가 서 있다.거기에 「그제날 고향이 그리워 눈물 짓더니 오늘은 고향을 바라보며 환히 웃네」라는 한시가 보였다.「고향을 바라보며 환히 웃는다」는 한족의 그 마음과 우리 조선족의 마음은 사뭇 달랐다.조선족의 심사를 읊조리라면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 짓는다」라고 했을 것이다.손을 뻗으면 닿을듯 가까운 강건너 혜산시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처지고 보면 조선족의 망향의 한은 뼈에 사무치고 있다. 혜산시는 지난 1954년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일부를 합해 신설한 양강도의 중심 도시다.삼수와 갑산을 이웃한 이 국경도시의 인구는 약 22만명이라고 한다.이른바 백두산청년선(길주∼혜산간),삼지연선(혜산∼삼지연간),북부내륙선(혜산∼운봉간)등의 철도 시발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하다.특히 삼지연선은 백두산의 그림자가 수면 위에 일렁이는 삼지연이웃에 닿는 철길인데,삼지연 일대는 북한이 자랑하는 혁명 사적지라고한다. 혜산시는 조선전쟁(한국전쟁)때 운명이 바뀔뻔했다.장백진의 노인들은 19 50년11월께 혜산에 들어왔던 미군들을 먼 발치로 보았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노인들 뿐아니라 50대들도 강건너에 온 미군들을 기억해냈다. ○미군기 폭격도 받아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난 뒤에 미군들은 없어졌으나 장백진 사람들은 혜산쪽을 향해 곤두박질하면서 폭격을 해대고 다시 치솟는 미군 비행기 꼬리를 전쟁 내내 목격했다.장백진 조선족 중에는 연변조선족처럼 조선의용군 자격으로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도 더러 있다. 어떻든 조선전쟁을 피부로 느꼈을 만큼 혜산과 장백진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다.장백진 사람들은 모진 사람 곁에 있다 벼락 맞는 꼴로 전쟁을 간접적으로 치른 셈이다.돌 팔매질은 아니나 혜산의 돌이 장백현으로 날아올 때도 있다.지난 1971년 혜산시에서 도로공사를 하느라고 터뜨린 다이너마이트가 폭파하면서 돌멩이가 압록강을 넘어 장백현 마록구로 날아들었다.이 때에 호옥방이란 중국사람이 돌에 맞아 불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반대로 지난 1977년 4월25일 장백현 마록구 도로공사 현장에서 폭파작업을 할때 날아간 돌이 강을 넘어 혜산시 청동고등중학교 학생 김경옥양을 때렸다.그 학생은 아예 생명을 빼앗겨 버렸다.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면 가해자 쪽에서 으레 위문대표단을 피해자 쪽에 보냈다.그러나 어디까지나 압록강은 국경이어서 사사로운 도강은 어림없는 일이다. 이 팔월 무더운 날에 옛 함경도 땅 양강도 냉면 한 그릇을 맛보는 것도 좋으련만 생각으로 그쳐야했다.함께 동행한 서울신문 김명국기자도 함경도 냉면 이야기를 했더니 침을 삼켰다.김기자는 아마도 통일이 되어야 함경도 냉면을 제바닥에서 맛볼 수 있을 것이다.서글픈 감회가 들었다.
  • 휴정협정 서명(6·25 내막/모스크바 새 증언:30)

    ◎중국,휴전 앞두고 “마지막 진격” 주장/소선 “미군 상륙작전 감행 두렵다” 반대/해리슨 중장­남일,7월27일 역사적 조인 중국당국은 스탈린앞으로 휴전협상 진행에 관한 상세한 현황보고를 하면서 그에 덧붙여 협상대책까지 건의했다.즉 협상속도를 싸고 미국과 이승만정부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앞으로 미국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이승만에게 더 큰 압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에 휴전성사 가능성은 높다는 게 중국당국의 기본 시각이었다.53년 7월3일자 북경주재 소련대사관이 모스크바에 보고한 전문에 나타난 중국의 협상대책은 다음과 같다.(N17286) ○“미­이승만 불화 조장을” 『이같은 상황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하는 바임.이는 휴전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는 미·이승만간의 불화를 더 조장하고,미국의 내외여론을 분열시키고 미국으로 하여금 이승만정권에 더 많은 압력을 행사토록 하기 위함임. (1)7월5일자로 클라크앞으로 김일성·팽덕회동지의 답신을 보낼 것.협상재개에 앞서 미국의 입장을 비난하고 앞으로 미국의 유화정책이다시 바뀔 가능성에 대해 경고할 것. (2)휴전협정 서명 전 작전을 전개해 이승만 괴뢰군에게 일격을 가할 것.이는 전선을 조금이라도 더 남쪽으로 내려보내기 위함임.그뒤 휴전협상이 재개되면 이승만정권의 잘못으로 협정체결이 지연됐다고 비난할 것.그리고 상황이 바뀌었으니 휴전개시점을 재조정하자고 요구할 것.미국도 이 요구에 응할 것임.왜냐하면 현재 미국과 이정권과의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임.반대로 상대가 양보 대신 새로운 선전차원의 술책을 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음.그럴 경우에는 우리가 적당한 시기를 택해 양보하고 현전선에서 휴전하는 데 동의할 것. ○“최후가지 투쟁은 엄포” …중략…휴전협정체결은 7월15일에 해야한다고 생각함.중국대표단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추가로 밝힐 것.즉,중국정부는 최근 이승만정권의 잦은 도발이 한편으로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용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함.이런 이유로 이승만은 미국과 상호원조조약 체결을 고집하고 있음.이는 만약 미국이 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전병력이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말하나 우리는 이것이 엄포라고 생각함. 중국정부는 미국의 이승만정권에 대한 지원이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생각함.미국은 이에게 대규모 지원을 할 경우 그가 심각한 모험을 전개해 미국을 끌어들이려할 것을 우려함.미국은 극동지역에서 더이상 대규모 모험에 끌려들려 하지 않고있음. 앞으로 개최될 정치협상 대책에서도 미·이승만간 이견이 있음.이는 이 정치협상 대신 북한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전개,중·조 국경인 압록강까지 진격하려고 함.위 상황을 종합할 때 중국정부는 휴전협정 조인이 평화에 유익하다고 판단함. 당시 중국외무차관은 이 말을 듣고 농담조로 「중국과 미국이 이승만에 반대해 공동전선을 펴고있다」고 말했음.그는 또한 중국정부는 이가 소규모 발악적인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심각한 도발을 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음』 한편 소련측은 휴전협정 서명을 눈앞에 두고 공산군측 서명당사자의 인선에까지 일일이 간섭했다.유엔군 대표단의 김일성직접서명 요구에 절대 응하지 말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남한정부가 김일성의 신변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53년 7월24일 소련공산당중앙위 간부회의는 김일성의 서명식 참석여부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해 직접 김일성 앞으로 내려보냈다.(소련공산당중앙위 간부회의 결의안 NP19/9) 『김일성을 위시한 조선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함.소련공산당 중앙위는 판문점 휴전협정서명에 북조선대표로 부수상 1명이,중국대표로는 팽덕회동지가 참석할 것을 권고함.누가 참석할지 여부의 결정은 전적으로 중·조 정부에 속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절대 미국의 압력에 이끌려가서는 안됨. 현상황에서 김일성의 판문점 여행은 위험부담이 큼.이승만 진영이 김일성에게 어떤 종류의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미국의 김일성 참석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휴전협정일정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임.팽덕회장군이 참석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임.만약 미국이 김의 불참을 이유로 협정서명을 거부한다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을 것임』 ○김일성 위해 우려 이유 북한측 대표는 이렇게 해서 부수상 남일로 결정됐다.53년 7월27일 남일은 유엔군 대표인 해리슨중장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휴전협정이 정식조인되기 불과 하루 전인 53년 7월26일 북경주재 소련대사는 모스크바로 다음과 같이 휴전협상 관련 보고서를 보냈다.모스크바에서 7월3일자로 보낸 중국정부의 한국전 상황평가에 대한 답신이었다.(N8019) 『본인은 모택동에게 소련정부가 한국전 상황평가에 대한 중국정부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음.이제 한국에서 적대행위를 끝낼 시기가 됐다는데 상호동의한다고 말했음.적도 군사적 이유로 전쟁을 계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말했음.모택동은 이와 관련,깊은 사의를 소련정부에 보낸다고 말했음.그러면서 모는 적이 군사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도 휴전협정체결에 동의했다고 말했음. 군사적으로 볼때 적은 지난해동안 지상에서 진격은 물론 전선사수조차 여의치 않았다고 모는 말했음.반면 중국군은 현위치 사수는 물론 진격작전 수행에도 자신을 가졌다고 했음.정치적인 면에서는 적들이 제국주의 진영내 내분을 겪고있고 전세계 여론이 전쟁에 반대하고있기 때문에 휴전에 동의한 것으로 모택동은 설명했음.경제적으로도 제국주의진영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모는 말했음.즉 전쟁초기 2년간 미국의 독점 군수업체들이 엄청난 수입을 올렸지만 이후 휴전협상이 시작되고 반전여론이 강화되면서 이들의 수익이 격감했다는 것임』 이 보고서 내용중 흥미있는 것은 모택동이 순수 군사적인 면에서 볼때 적이 수세에 있기 때문에 군사작전을 1년 정도 더 계속해 한강주변에 보다 많은 전략거점을 확보하는게 협상에 유리하다고 주장한 점이다.반면 이 보고서를 보낸 중국 주재 소련대사는 남쪽으로의 추가진격이 매우 위험하다는 견해를 덧붙였다.추가 진격을 감행할 경우 동서 해안에까지 전력을 배치해야하는데,그러면 중·조군 후방에 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전후복구 소도움 요청 이렇게 해서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정식조인됐다.휴전이 성사되자 김일성은 즉각 전후복구작업에 들어갔다.김일성은 전후복구 역시 소련의 지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협정조인 며칠 뒤인 8월5일 김일성은 소련지도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친서전문을 보냈다.(N2060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후 복구·건설계획과 관련 소련 전문가 여단을 초빙키로 결정했음.이들이 조선의 기간 산업체들의 복구,건설에 관한 계획을 수립해주기를 원함』 이틀 뒤인 8월7일 평양주재 소련대사는 다음과 같이 본부에 보고했다.(N20779) 『우리는 소련 전문가들에게 조선의 복구계획을 짜면서 가장 긴급한 문제부터 시작하되 가능한한 조선국내의 자원을 활용토록 지시했음.…중략…그러나 이미 입안된 계획을 보니 조선내부 자원활용에 큰 역점이 주어져있지 않고 대신 소련을 비롯한 여타 인민민주주의국가들로부터의 원조를 극대화하는 데 주관심을 두고있음. ○김일성 다시 모스크바로 또한 경제복구계획의 주안점이 경공업·농업부문 대신 중공업 분야에 주어져있음.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북조선 정부는 정부부처에서 우리 전문가들을 활용치 않고 대신 산업체에다 이들의 파견수자를 늘리고있음.이런 제문제를 협의키 위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함』 이같은 소련의 요청에 따라 김일성은 53년 9월초 전후복구문제를 협의키 위해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했다. ◎연재를 마치면서/관련문서 계속 발굴… 속편 준비 이번 30회를 끝으로 「모스크바 새증언」 연재를 일단 마무리합니다.이번 시리즈는 주로 6·25를 둘러싼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인의 행적,협조관계등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밖에도 전쟁기간중 중·소·북한 정권 내부의 주요정책 결정과정등 밝혀져야할 「연결고리」는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게 사실입니다.앞으로 관련문서를 더 찾아내 추가집필의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장백현의 아침(압록강 2천리:1)

    ◎백두산 병사봉 아래서 압록강 발원…/백두산 자락 오솔길엔 아픔드리 나무숲/상류에 163개 작은 섬… 92개는 북한 소유 서울신문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압록강유역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민족의 삶을 진솔하게 그린 「압록강 2천리」를 중국 연변 조선족 작가 유연산씨의 집필로 주 1회씩 연재합니다.서울신문 사진부 김명국기자와 동행한 작가는 민족의 개척정신이 면면히 이어진 이른바 서간도땅 압록강유역을 굽이굽이 누비면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동포들의 애환을 소설보다 흥미롭게 엮어나갈 것입니다.그리고 압록강의 대안북한땅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가지 못하는 산하의 모습과 북녘 사람들의 근황을 듣고 본대로 전할 예정입니다.특히 압록강유역은 고구려가 발흥한데 이어 발해가 기상을 떨친 우리 고대국가의 강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기행 성격도 지닌 시리즈가 될 것입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정부 소재지 연길에서 장백현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중국 동북의 대지를 박차고 막 솟아오른 8월의 태양과 동행한 버스가 백두산 자락이 드리우기 시작한 안도현 이도백하에 이르자 벌써 한낮이 기울었다.갑자기 해를 가린 아름드리 나무그늘로 하여 길은 저녁나절 처럼 어둠침침했다.백두산의 그 많은 나무 가운데 미인이라는 홍송과 백송,사시나무가 어우러진 산자락에는 만화방초가 피어났다. 여름날 백두산 숲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얼마를 달렸을까,종종걸음을 치듯 골짜기를 흘러내려온 물이 신작로 곁을 따라 철철 넘치듯 모여들었다.압록강 윗물을 만난 것이다.불타는 석양이 미인송의 아름다운 자태를 그림자로 만들어 버린 해거름녘이었다.터덜거리는 버스가 달려 내려갈수록 물빛깔은 푸르름을 더했다.녹음이 짙을대로 한창 짙게 물들어버린 나무 그림자가 수면과 기묘하게 조화되었다. ○홍·백송 어우러 장관 그제서야 압록이라는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수색여압연)란 말을….「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그리고 「사기」나 「한서를 보면 압록강을 패수,염난수,청수라고 불렀다.고구려에서는 청하라고도 했고 중국에선 얄루장으로 부른다.어떻든 이 국경의 강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장백조선족자치현의 현정부 소재지 장백진에는 좀 늦은 저녁시간에 도착했다.여관에서 저녁밥상을 물리고 미리 약속한 김학현(60)선생을 만났다.그는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문화관장으로 근무중인데 변계조사조의 일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그러니까 김선생은 중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한 변계조약(변계조약·국경조약)에 따라 1963년에 실시한 경계조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국경에 관한 이야기를 밤이 늦도록 나누었다.그러나 백두산 천지 아래서부터 시작된 국경조사와 거기에 얽힌 사연은 다음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그 이유는 김선생의 말을 들어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여름 장마로 길 끊겨 『백두산 국경비는 천지서남쪽 바로 아래에 있디요.맨 위에서 부터 일련번호를 매겨 내려오는데,1호가 3개,2호가 2개고 나머지 5호까지는 각각 1개씩을 세웠댔습니다.그러니끼리 모두 8개의 국경비가 있다 이 말입네다.그 국경비가 있는 백두산을 가자면 중국쪽 초소는 물론 조선(북한)쪽 초소도 지나가야 하디요.그런데 올 여름 장마에 길이 다가 떠내려가서리 지금은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이요.도로가 복구되면 안내할테니 좀 기다리시라요.실사구시라고 현장을 안보고 백두산 국경을 어떻게 쓰겠습네까?』 그래서 백두산 국경선 답사는 일단 뒤로 미루었다.자동차를 타지않고 높디높은 백두산,그것도 국경 고산지대를 도보로 등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김선생에게 뒷날 백두산 국경비답사에 동행해줄 것을 부탁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물길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장백진에 기왕 도착했으니 이곳에 우선 관심을 두기로 작정을 댄 것이다.올라가지 못할 나무 바라보지도 말라고 했던가.길이 떠내려가 못 오를 산을 포기하고 우선 이곳의 압록강 답사에 신경을 쏟기로 했다. 압록강은 널리 알려진대로 백두산 최고봉인 병사봉아래 남동쪽에서 발원한다.처음에는 작은 시냇물을 형성하여 흐르다가 가림천과 오시천이 합수하면서 물길이 넓어진다.그러니까 장백진은 물길이 넓어진 압록강변에 자리했다.압록강은 장백진을 지나면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버린다.그러면서 얼마를 흐르면 수력발전으로 유명한 장진강과 허천강을 만나는 것이다. ○강넘어 북한땅 함남 장백진을 지나가는 압록강 길이는 2백57㎞에 이른다.6백리가 좀 넘는 길이인데,압록강 전체 길이의 3분의1에 약간 못미친다.변계조사에 참여한 김선생에 따르면 장백현을 통과하는 압록강 상류 수계에는 섬과 사주가 1백63개나 된다고 한다.그 가운데 중국에 들어온 것이 71개이고 나머지 92개는 북한에 귀속되었다는 것이다.이렇듯 수계를 통한 국경개념이 뚜렷해지면서 웃어넘길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난다는 것이 김선생의 귀띔이다. 『강에 있는 섬들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때가 더러 있습네다.자기 나라 땅이거니 하고 무심히 발을 디뎠다가 기절초풍을 하는 수가 있디요.내 한족 친구 한 사람은 일생에 딱 한번 외국땅을 밟았는데 그것이 압록강 조선(북한)수계에 들어간 섬이었댔습니다.무심히 섬에 올랐더니 옥수수를 따던 조선사람들이 어서 돌아가라고 손짓발짓을 해서 도망쳐 나왔다고 합데다.국경은 그만큼 무서울 때가 있고,자칫 잘못하면 죄인이 되기도 하디요』 김선생과 밤 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그런데도 새벽에 해발 2백80m가 되는 탑산에 오를 요량으로 일찍 일어났다.탑산에 오르고 나서 장백현에서,아니 좀 더 시야를 넓히면 백두산에서 뜨는 아침해를 맞았다.새벽 어스름이 걷힌 압록강이 확연하게 시야로 들어왔다.그리고 강 건너로 옛 함경남도 땅인 북한의 양강도 혜산진시가지와 그 뒷산 멀리에 펼쳐진 개마고원의 옹기종기한 묏부리들이 보였다.
  • 스탈린·주은래 회담(모스크바 새 증언:26)

    ◎모,주은래 모스크바 파견… “휴전하자” 설득/“인명손실 막대… 김일성이 전쟁 원치 않는다”­주은래/“전쟁 끌면 끌수록 미에 불리” 강경입장 고수­스탈린 스탈린이 모택동,김일성 두사람의 거듭된 휴전 조기타결 요청을 묵살하자 모택동은 주은래를 모스크바로 보내 담판을 짓게했다.물론 이 노력도 스탈린의 마음을 돌려놓지는 못했다.다음은 A.비신스키와 N.페데렝코 두사람이 기록한 메모랜덤으로 52년 8월20일 스탈린·주은래 두사람의 회담내용이다.(러시아 국립문서소 관련 메모랜덤중 54∼72쪽) 스탈린의 입장을 잘 아는 주은래가 먼저 전쟁 옹호론부터 개진했다. 『주은래는 전쟁을 계속하는 게 유익하다는 모택동동지의 뜻을 전했음.왜냐하면 그럼으로써 미국이 새로운 세계대전을 준비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음.주는 그러나 김일성이 매일 당하는 인력손실이 우리가 미군으로부터 송환받으려는 포로숫자보다도 더 크기 때문에 전쟁계속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음. ○식량·무기 원조 약속 이 말을 들은 스탈린은 「모동지의 말이 옳다.이 전쟁은 미국에 큰 곤란을 안겨주고 있다.북한은 인명손실 외에는 잃는 것이 없다」고 답했음.특히 미국은 중국군이 조선에 참전한 뒤부터 이 전쟁을 서둘러 끝내고 싶어한다고 스탈린은 말했음.필요한 것은 인내라고 강조하며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계속했음.물론 많은 인명을 잃은 조선의 입장을 이해함.하지만 이 전쟁은 명분이 큰 전쟁임을 이해해야함.이번 전쟁으로 미군의 약점이 들어났음.24개국 군대가 전쟁을 오래 지탱할 수는 없음.조선동지들을 계속 도와주어야함. 주은래가 조선에 식량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하자 스탈린은 빵 원조를 늘릴 준비가 돼있다고 강조.주은래는 식량,의복등은 중국이 조선을 도와줄수 있지만 무기는 중국이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음.그러자 스탈린은 추가무기원조를 해줄 수 있다고 확답했음.스탈린은 「조선에 대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음』 이 메모랜덤은 이어서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주은래=우리는 협상에서 미국에 어떤 양보도 하지 않겠음. 스탈린=만약 미국이조금이라도 양보하면 받아들이고,그리고는 다른 문제를 계속 다룰 것. 주은래=적어도 1∼2년은 전쟁을 계속할 준비를 갖추어야함. 스탈린=동의함. 주은래=미국이 전쟁으로 곤란을 겪고 있다는 동지의 분석은 전적으로 옳음.이 전쟁에 전위역할을 함으로써 중국은 세계대전을 방지하고 있음.만약 우리가 조선에서 미국을 저지하면 최소한 15∼20년을 세계대전을 연기시키는 것임.그 다음 미국은 3차대전을 일으킬 힘을 영원히 잃게될 것임. 스탈린=옳은 말임.미국은 조선전쟁 이후 큰 전쟁을 일으킬 능력을 잃게 됨.그들의 힘은 공군력,원자탄에 있음.영국이 미국을 위해 싸우지는 않을 것임.미국이 만약 이번 전쟁에서 패하지 않으면 중국은 절대로 대만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할 것.미국인들은 모두 장사꾼이고 미군들은 모두 투기꾼들임.전쟁에서도 그들은 사고파는 일을 함.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하는 데 30일이 걸렸음.미국은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작은 조선땅을 점령치 못하고 있음.미국의 무기는 스타킹,담배 따위의 물건임.미국은 세계를 점령하겠다고 하면서 작은 조선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음.원자탄,공습에 의존할 수 있겠으나 그런 방식으로 전쟁을 이길 수는 없음.지상군이 필요한데 미군은 지상군 숫자도 적고 허약함. 주은래=조선동지들은 남조선을 공습하는 방안을 생각중이나 옳은 일인지 확신치 못하고 있음. ○공군력 사용엔 반대 스탈린=공군은 국가의 것임.중국의용군이 국가 소유인 공군력을 사용해선 안됨』 주은래는 이어 북한의 입장이라며 새로운 공세작전을 시작하는 방안을 스탈린에게 타진했다.그러면서 중국은 김일성에게 새로운 공세작전 개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스탈린에게 밝혔다. 『스탈린=협상진행중 전략,전술을 막론하고 공격작전을 시작해서는 안됨. 주은래=중국정부는 판문점의 협상을 계속해야한다고 생각함.아울러 중국은 2∼3년 더 전쟁을 계속할 준비를 하고 있음.중국은 소련이 비행기,포,탄약을 추가지원해 주기를 바람. 스탈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겠음.조선내 사기는 저조한지. 주은래=매우 저조함.압록강의 발전소가 폭격당한 뒤 특히 나빠졌음.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휴전을 하고 싶어함』 스탈린은 미국이 제일 즐겨하는 전략이 위협이라고 밝히고 그러나 미국은 중국에 위협을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조선동지들은 겁을 먹었는지 물었다.주은래는 조선동지들이 조금 불안해하고 있다고 답했다.그는 『일부 조선지도자들이 겁에 질려 있다』고 말했다.스탈린은 자기도 김일성이 모택동 앞으로 보낸 전문을 읽어 그런 사실을 잘알고 있다고 했다.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스탈린의 주도로 끝났다. 사실 스탈린은 1년 전 전황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던 때부터 이같은 입장을 주장했다.51년 8월29일에도 그는 모택동앞으로 전문을 보내 휴전회담에 중립국 대표를 감독으로 참여시키자는 모의 제의를 일축한바 있다.(전문번호N49 54). 『협상성사를 더 원하는 쪽은 미국임.따라서 감독자격으로 중립국 대표들을 협상에 참여시키는 동지의 제의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함.그런 제의를 하면 자칫 우리가 협상타결을 더 원하는 것으로 미국에 비쳐져 협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있음』 당시 이 전문을받은 모택동은 바로 이튿날 답전을 보내 중립국 감독대표 참여방안을 철회한다고 밝혔다.이후에도 스탈린은 기회만 닿으면 전쟁을 끌수록 미국에 불리해진다는 논리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다시 52년 상황으로 돌아가보자.9월14일에는 유엔기들의 평양시 공습이 있었고 협상교착으로 인한 무고한 인명피해는 날로 늘어만 갔다.그러나 스탈린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52년 11월2일 소련은 당정치국 결의문을 채택,전쟁계속을 거듭 천명했다.(정치국결의안NBP2/19N2) ○전쟁계속 거듭 밝혀 『소련과 미국이 비밀협상을 진행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함.미국은 세계 여론에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이 소문을 굳이 부인하려하지 않음.우리는 공개적으로 이 소문을 부인해야함.왜냐하면 조선에서 적대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유익하기 때문임』 반면 직접 의용군을 직접 참전시킨 모택동은 스탈린과 달리 1년전부터 휴전의 필요성을 완곡하게 내비쳤다.51년 11월11일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N25 902) 『지난 2개월간 전선에서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고 미국내에서 군사행동을 중지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어 미국이 휴전조건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아졌음.그럼에도 미국정부는 아직 국제상황을 긴장상태로 유지하려고 함.미국은 적극적인 정보활동과 유화 제스처를 병행하면서 실제로는 회담을 지연시키려하고 있음.…중략…적은 현전선을 휴전선으로 만들자고 요구하고 우리는 이에 반대하고 있음.다만 우리는 38도선 휴전문제를 정치협상 개시 때까지 유보할 의향은 있음.왜냐하면 현재 38도선 이남에 우리가 점령중인 서해안의 강 하구 구릉지대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임.이곳은 농업생산량이 풍부할뿐 아니라 서울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기 때문임.…중략… 우리는 금년중 군사행동 중단을 성사시키고자 함.또한 적이 휴전회담을 지연시키고 결렬시킬 경우에 대비하고 있음.또한 휴전회담이 반년 내지 1년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현위치를 고수하기 위한 인적,물적 자원을 비축하고 있음.협상을 통한 평화달성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사실임.하지만 우리가 협상지연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님』 모택동이 보낸 전문에서 알 수 있듯 휴전협상과 관련,모택동과 스탈린 두사람은 분명히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있었다.모택동이 현상황에서 휴전이 유익하다고 솔직히 말한 반면 스탈린은 휴전을 더 바라는 쪽은 미국이니 협상에서 절대 양보하지 말고 밀어부치라는 강경입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새로 밝혀진 사실/스탈린,종전요청 끝까지 거절/한국전쟁 이용 미에 대응 속셈 이번 회에는 전쟁중인 52년 8월 주은래가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는 사실이 나온다.물론 최초로 공개되는 사실이다. 주은래의 갑작스런 모스크바 방문은 중소간에 커다란 견해차가 있었음을 의미한다.그것은 전쟁의 계속 여부 문제였다.주은래는 중국의 의견은 일단 접어둔 채 김일성과 북한의 입장을 들어 완곡하게 전쟁의 종결을 건의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은 잃는 것이 인명 뿐』이라며 이 전쟁이 미국에게 끼치는 큰 곤란을 들어 북한(과 중국)의 종전의사를 한마디로 거절하고 있다.스탈린의 의도와 차가운 성품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결국 주은래도 『이 전쟁에 전위역할을 함으로써 중국은 세계대전을 방지하고 있다』고 동의하고 있다.그러나 51년 11월11일 모택동의 전문은 『금년중 군사행동을 중단시키고자 한다』는 강한 종전의사가 분명하게 들어 있다.중국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스탈린의 강한 전쟁지속 의도로 인해 어쩔 수없이 계속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스탈린은 교묘하게도 중국의 대만통일 의지를 이용하여 이번 한국전쟁에서 미국을 패배시켜야만 중국의 통일이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기까지 하고 있음도 밝혀졌다. 스탈린의 모든 전략전술의 초점은 한반도 통일이나 동북아 정세가 아니라 오직 미국에 대한 대응과 세계적 규모의 대립의 방지를 위해 한국전쟁을 이용하는데 놓여 있었다.이 문제와 관련,52년 11월2일의 소련공산당 정치국 결의는 충격적이다.『조선에서 적대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 한­미 새출발 할때다(지구촌 칼럼)

    태평양 전쟁이 끝난지 50주년을 맞는 해에 한 중요한 행사가 며칠뒤 워싱턴에서 거행된다.한국의 김영삼대통령이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용감한 병사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는 참전비를 봉헌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한국전참전비는 미국과 한국 간의 보다 새롭고 성숙된 관계설정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보다 성숙한 관계로 1950년 6월25일부터 53년 7월27일까지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지금까지 두나라 사이의 관계에 있어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이다.평양의 독재정권으로부터 계속되는 위협은 소련과 미국 사이의 대립의 결과로 초래된 냉전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양국관계를 확장시켜 왔다. 그러나 옛 정책들의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이미 실패한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대대적인 선동 노력에 의해,또 바깥세계로부터의 뉴스 차단과 거대한 보안군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평양정부는 오래 지탱할수가 없다.결국 우리가 과거의 희생들을 명예롭게 할때 현재보다는미래를 위한 계획을 시작하기에 좋은 시간이 되고 있다. 장차 상황은 두단계로 나뉘어지게 될것이 분명하다.첫단계는 한국이 다시 통일국가가 되는 통합의 시기다.분명히 이는 남북간 경제적 불균형을 감소시키고,방위병력을 7천6백만 국민을 지키는데 적당한 규모로 조정케하고,동북아의 새로운 환경변화에 따른 외교정책및 통상정책의 조정등 다소간 혼란의 시기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모든 이러한 과정에서 지도적인 역할은 서울의 새로운 통일정부에 맡겨지게 되고 미국은 이에 대한 중요한 지원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한 미 기업 혁력 필수 경제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새로운 투자가 이전의 북한지역에 필요하게 될것이다.서울측에서 취하고 있는 대북투자를 더욱 보강시키는 기반 위에서 미국기업들의 북한진출이 촉진될 것이다. 방위협력도 급격하게 변화된 안보환경에 따라 재조정될 필요가 생길 것이다.정치적 압력이 급속한 변화를 위해 강화될 것이다.적당한 준비와 적절한 설명 없이는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대외관계들은 보다 강력해진 위치에서 중국의 재등장과 일본과의 조화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려움이 있는 반면에 통일에 수반되는 중간 정책들은 두개의 한국과 미국 사이의 협력을 위한,가능하고 이로운 장기적인 정책들이 직면하게 될 문제들과 비교해 볼 때 단순해질 것이다.그것은 두나라의 장기적 이익을 지속시키고 그들의 관계를 확대시키는 방향에서 광범위하게 채택될 것이다.그러나 그 이행은 결국엔 환상으로 판명될는지 모른다. 현재 미국기업들은 한국에 있어서 가장 큰 투자자들이다.그러나 미국내의 한 평가보고는 한국정부가 외국인 투자의 수용을 꺼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만일 한국이 첨단기술시대에 빠른 성장을 계속하고 싶다면 미국기업과 한국기업간의 상호협력은 필수적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얘기하자면 한국은 아시아의 일반적 국가들이나 특히 중국·러시아·일본과의 관계를 두고 볼 때 보다 다각적인 고려속에 미국과의 관계를 보게 될 것이다.안보적 측면에서 서울측의 견해는 일단 국경이 압록강으로 올라가면 매우 달라질 것이다.워싱턴의 견해도 마찬가지라할수 있다.상황은 매우 빠르게 변해가고 빠른 결정이 필요하게 된다. ○미래 함께 준비해야 양국의 시민들은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그러한 변화는 면밀한 연구와 계획의 결과로 이뤄질 것이다. 우리가 태평양전쟁 종식 5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싸운 사람들을 추모하는 이 시점은 바로 미래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시점이다.변화의 시기에 우호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미국과 한국은 그들 관계의 첫시발부터 밀접한 우호를 보여왔다.다행하게도 이 우호를 위해 그들의 이익은 앞으로도 계속 일치될 것이다. 김대통령의 방미 시점은 바로 두나라가 강력한 과거의 기반위에서 굳건한 구조를 세울수 있도록 새로운 계획을 시작하려는 때인 것이다.
  • 줄어드는 조선족(두만강 7백리:20)

    ◎연변자치주에 85만… 주인구의 39% 차지/20년대엔 80.5%선… 광복이후 급격히 감소/60년대 한족들 대거 이주… 조선족마을 “점령”/인구증가율 가장 낮아 소수민족 전락… 한족동화 가속 백두산 줄기의 푸쿠리산에서 발원하여 먼 물길을 달려온 두만강.중국 길림성 훈춘시 경신향 방천촌을 왼쪽에 끼고 막 돌아내려오면 러시아 땅에 이른다.그 두만강 하류 오른쪽은 북한의 함북 은덕군 두만강시다.그러니까 두만강물이 하구로 흘러흘러 내려와 3국 국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 두만강물이 하구를 벗어나면 동해를 만나고,이내 염분 섞인 바닷물에 동화되어 버린다.나는 중국쪽 국경지대이자 두만강 하구 방천촌 국경초소에서 저 멀리의 동해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연변의 조선족 미래를 생각했다.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조선족은 넓은 바다에 버려진 좁쌀 한알에 불과한 창해일속이라는 생각을….조선족이 비록 연변땅에 못자리판을 이루었을 지라도 어디까지나 소수민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껴야 했다. ○한족인구 1천여명 오늘날 연변 자치주의 조선족 숫자는 85만4천4백68명으로 집계되어 있다.이는 전체인구의 2백13만8천3백97명과 대비하면 고작 39.5%에 지나지 않는다.조선족의 비율이 한껏 높았던 지난 1926년 80.5%와 비교하면 천양지판이다.조선족의 비율은 광복과 더불어 급격히 떨어져 1948년 63.3%,19 79년 40.6%를 기록했다.지난 70년대까지 한족이 단 1가구도 살지 않았던 숭선진에 지금은 1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이는 한족의 번창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 마을이 한족마을로 뒤바뀐 사례도 허다하다.화룡시 숭선진 하천과 원봉,노과진 치마대,닥화진 차창고산과 차창,용정시 평정 등은 조선족 마을이었다.그런데 지금은 한족들이 주인으로 들어앉았다.그 속에는 쌀의 뉘처럼 조선족들이 더러 끼어있지만,자식들을 한족학교에 보낼 정도로 동화하고 있는 것이다.말이 연변조선족자치주일 뿐 주내에서도 조선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한족마을을 지나다 보면 한뼘은 내려온 듯 싶은 코를 훌쩍훌쩍 들어마시는 아이들이 버글대고 있다.그러나 조선족마을에서는 아이들 울음소리 마저거의 뚝 그쳐버릴 정도가 되었다.왜 그런고 하면 조선족에게는 아이를 둘씩 낳아도 좋다는 생육우대정책을 거들떠 보지도 않기 때문이다.그저 아이 하나면 만족하는 경향이다.오히려 하나밖에 낳지 못하도록 정책으로 묶여있는 한족들은 아이들을 무 뽑듯이 쑥쑥 낳아 슬하에 자녀들이 주렁주렁하다. 한족들에게 아이 하나를 낳도록하는 산아제한을 중국에서는 계획생육이라고 부른다.이 제도는 도시에서 강력하게 적용되어 혼쭐이 날 때가 많다.지난해 요령성 단동시(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한 옛 안동)정부의 한 고위간부가 아이 하나를 더 낳았다가 큰 피해를 당한 일이있다.그는 10만원의 벌금을 물고 부부의 공직은 물론 당원자격까지 박탈당했다.그러나 연변 산골에서는 계획생육제도를 무시하기 일쑤다.따라서 아이를 낳고도 호적에 올리지 않은 이른바 망류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다산하는 조선족 줄어 연변에서 한족이 늘어나는 또 다른 요인은 외부인구의 유입이다.지난 1960∼63년까지 북경의 중앙정부 정책에 따라 산동성에서 지변청년(변방에 나가 살기를 지원한 젊은이 그룹)들이 대거 연변에 들어왔다.그들은 자리를 잡고 친척은 물론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들여 화룡시 장살령의 경우 한 마을에 1백가구나 되는 산동사람들이 살고 있다.또 문화대혁명시기에 장춘과 같은 대도시에서 하방한 지식청년들도 아예 연변에 자리를 잡고 눌러산다.그들도 물론 가족들을 연변땅으로 데려왔다. 조선족들의 한족화는 옛날에도 있었다.화룡시 덕화진 용연촌 허치영은 일찍 상투를 자르고 호복을 입어 10㏊의 밭을 얻었다고 한다.광복전에 화룡의 이영춘은 한족의 양아들로 들어가 부자가 되었다.그러나 일제통치하에서는 한족이 조선족에 동화되는 사람이 많았고 조선말도 열심히 배웠다. 조선말을 잘못 배워 망신한 호족의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재미있다.왕수찬이라는 지주가 살았다.그는 조선족 소작인에게 돈 많고 위풍당당한 사람이 자기자신을 남에게 소개할 때 조선말로 무엇인가를 물었다.소작인은 『고토리 올시다』라고 가르쳐주었다.그 한족은 조선족 소작인을 만나면 의레 『고토리올시다』라는말로 거드름을 피웠다.그래서 조선족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왜냐하면 「고토리」는 함경도 방언으로 어른의 성기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족들이 많다.조선족들이 모여사는 백금촌이나 삼합등지의 한족들은 말 뿐 아니라 집과 음식까지도 조선족 풍습을 따르고 있다.하지만 조선족들이 한족에 동화될 차례가 되었다.한족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그 동화속도가 빠르고 해괴망측한 꼴도 종종 보게되었다. ○한족학교에 자식 보내 평정촌에 사는 곽해부(51)라는 한족의 형은 장춘에서 돈으로 여자를 사와서 아내로 맞았다.그 이후 형이 죽자 곽해부는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한족들에게 형수를 아내로 품에 끼고 사는 것은 별 흉이 아니다.그런데 요즘 조선족 사회에도 사촌형수 정도를 아내로 맞는 일이 가끔 있는 모양이다.몇년전 백금촌의 이종혁(45)은 친구와 아내를 맞바꾸는 새 풍속을 만들어냈다.두 집이 지금은 연길에서 사는데,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서로 친하게 내왕한다는 것이다. 조선족과 한족 사이의 통혼은 아직 흔치 않다.특히 한족처녀와 결혼하는 조선족총각은 손을 꼽을 만큼 적다.용케도 조선족이 한족 며느리를 본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그런데 일상의 풍습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심했다.이를테면 시아버지가 낮잠 잘 요량으로 목침을 베고 누워있노라면 그 위를 한족 며느리가 예사로 넘어다닌다는 것이다.처녀들은 심심찮게 한족 총각들과 짝을 짓는다.조선족 처녀들의 변명을 들어보면 허풍은 떨고 까닭없이 여자를 깔보는 조선족 남자들보다 한족남자가 더 좋아서라고 말한다. 어떻든 연변의 조선족들은 줄어들고 자아의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다.어느 나라에 살든,또 환경이 열악하든 간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세계각지의 중국화교들과 비교하면 부끄러운 마음이다.특히 인구증가율은 중국 전체의 각 민족 가운데 가장 낮다.다음 세기의 연변은 요령성이나 흑룡강성처럼 잡거구가 될 것이다.?
  • 막오른 휴전협상(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21)

    ◎모,김일성에 「화·전 2중전략」 제시/공산측,회담초 위약한 공군력 보강에 안간힘/스탈린,부담 피하려 모의 「협상지휘」요청 거절 전쟁이 계속되는 내내 마찬가지였지만 휴전협상에 임하는 마당에서도 김일성은 스탈린·모택동 두 사람의 뜻에 철저히 모든 것을 맡겼다.김일성으로부터 긴급히 휴전협상 전략을 마련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모택동은 일단 두가지 기본전략을 마련해 주었다.한편으로 전투상황을 예의주시하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협상제의를 해올 경우 대표를 보내 협상에 임하라는 이중전략이었다. 그리고 모택동은 이 기본전략을 즉시 스탈린에게 보고해 그의 의중을 물었다.김일성이 협상자문을 구하며 보내온 전문 등을 첨부한 이 전문에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6월30일자 전문.전문번호 N21334). 『리지웨이가 제시한 협상조건이 입수되면 그 내용을 검토한 뒤 우리의 입장을 정해야함.일단 협상이 시작되면 스탈린동지께서 직접 나서서 우리가 난처한 입장에 빠지지 않도록 협상 전과정을 총지휘해 주시기 바람』. ○“김에 회담 직접 지시” 같은날 6월30일 리지웨이 장군이 휴전협상을 제의했다.모택동은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문을 띄어 구체적인 협상전략을 새로 제시했다.모는 이 전문에서 협상장소·시기·구체적인 방안등을 조목별로 열거했다(전문번호 N 21340). 『리지웨이가 협상제안을 해왔음. 본인의 의견은 다음과 같음. 1.김일성동지는 7월2일 혹은 3일중에 리지웨이의 휴전제의에 응하는 답을 보낼 것.그리고 시간·장소·대표자 수를 제시할 것. 2.협상장소로 리지웨이는 원산을 제시했으나 이곳이 북조선의 군기지가 있는 곳이므로 응하지 말것.38도선 부근의 개성을 제의하는 것이 어떨지. 3.협상개시 시기는 7월15일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됨. 4.시간이 촉박하고 회담의 중요성에 비추어 스탈린동지께서 직접 김일성과 연락을 취하고,회담을 직접 지시해 줄 것을 요청함.동시에 본인과도 연락을 유지해 주기 바람』. 그러나 협상 전과정을 총지휘해달라는 모택동의 이 요청을 스탈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대신 협상의 모든 책임을 맡으라고 요구했다.그러면서도 회담 장소·시간·기본전략에 대해 스탈린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다음은 6월30일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답전(전문번호 N 3917). 『리지웨이의 휴전제의에 대해서는 이를 받아들인다는 답을 라디오방송을 통해 즉시 내보낼 것.이 답신은 김일성과 팽덕회의 이름으로 내보낼 것.만약 중국 의용군 사령관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으면 미군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임.회담장소는 38도선 개성을 절대 고수할 것. 귀하는 전문을 통해 모스크바가 휴전협상을 지도토록 요청했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필요한 일도 아님.협상을 지도할 사람은 바로 모택동동지 당신임.우리는 기껏해야 몇가지 사안에 대해 조언이나 해줄수 있음.김일성과는 직접통신도 안됨.동지가 김일성과 직접 통신을 유지하기 바람』. 이어서 모택동은 7월2일 전선의 팽덕회·고강·김일성 3인에게 전문을 보내 협상시작 전 전선에서의 주의사항을 단단히 주지시켰다.그 주의사항은 첫째로 제1차 방어선 병력을 증강배치시키고 무기·탄약을 충분히 확보할 것.둘째,최상급 비상경계령을 발동할 것.제1차 방어선 부대들은 적의 대규모 공격과 협상을 전후해서 아군 후방에서 있을지 모를 적 공군기들의 치열한 공습에 대비할 것.셋째,서해안에 적이 상륙작전을 벌일 가능성에 대비,이를 격퇴할 준비를 갖출 것등이었다. 모택동은 이 지시문을 이튿날인 7월3일 스탈린에게 그대로 보고했다(전문번호 N 21412). 1951년7월10일 개성에서 마침내 휴전회담이 시작됐다.그러나 협상에 임하면서도 중국·북한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유엔군에 대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협상 시작 뒤 군사력강화방안에 대해 모택동은 7월18일 스탈린에게 다음과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 21646). ○대공포망 강화 제의 『전선에서 적극공격을 펴지 않고 방어전략만 계속하면 적은 우리에게 군사적 압력을 넣기 위해 계속 엄청난 공습을 해댈 것임.따라서 다음 사항을 제의함. 1.대공포 망을 강화할 것.2.공중전 강화.3.공군 지휘부 강화.4.공군기 작전반경을 압록강에 국한시키지 말고 평양까지 남진시킬 것.5.잘 훈련된 폭격기 편대를 적의 후방에 침투시킬 것,적극적인 공중전을 펼 것,여러 공항·군수창고·적군 막사를 적극적으로 공습할 것. 6.지상에서도 적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국지전 성격의 공격작전을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감행할 것』. 그러나 이같은 적극적인 군사작전 구상은 오히려 강화된 유엔군의 공습 때문에 큰 차질을 빚었다. 51년 8월11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사정이 매우 어려워진다고 호소하고 세만회를 위해 평양북쪽에 비행장 건설과 소련의 추가지원을 긴급요청했다(전문번호 N 22764). 『현재 활주로를 건설하고 있으나 밤낮으로 계속되는 적의 공습 때문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가 없음.우리의 대공포는 8천m 상공에 있는 적 폭격기에 미치지 못함.공습을 받아 새로 보수해 놓으면 또 폭격을 받고…이런 식으로 계속 되풀이되고 있음.따라서 중국·조선군 비행단과 소련항공여단 4개 여단을 동시에 조선으로 이동시키기로 한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음.9월로 예정됐던 이들 비행단의 적전계획은 연기돼야함. 우리는 중·조선군 항공단의 조선진출 전초기지로 평양 북쪽에 비행장건설을 제안 함.이곳은 적공군 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적 폭격기가 접근해도 쉽게 격퇴할 수 있음.소련정부에 대해 중국 안동에 주둔하고 있는 3개 대공포 여단을 조선으로 이동시키는 방안을 검토해 줄 것을 요청 함.이는 중국국경 지역 안수에 건설중인 비행장 방어를 위해서 임.동지의 지시를 기다림』. 이 요청을 받은 스탈린은 8월17일 모택동에게 답전을 띄웠다(전문번호 N 4757.대통령문서보관소).스탈린은 이 전문에서 안수지역 비행장건설을 10월20일까지 완공해 늦어도 11월 이전에 중·조 공군이 이곳으로 이동해 작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스탈린은 이를 위해 소련의 2개 대공포 여단을 안수지역으로 보내 비행장 건설을 방어케 하겠다고 약속했다.스탈린은 이 대공포 여단은 안동지역에 배치돼 있는 병력을 빼내오겠다고 밝혔다. 이 무렵 모택동은 미군의 공습에 거의 속수무책이었다.모는 이밖에도 소련군사고문단의 추가파견을 줄기차게 스탈린에게 요구했다.그러나 스탈린은 고문단파견에 동의하면서도 가능한한 숫자를 줄이려고 해 두사람간 줄다리기가 계속됐다.다음은 9월8일 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소련군총참모부 제2총국.전문번호 N 23703). 『51년 7월27일자 전문에서 본인은 스탈린동지께 조선에서 싸우는 중국의용군부대에 소련군사고문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음.이 문제와 관련,소련군사고문단장 크라소프스키동지와 협의한 결과,83명의 군사고문관이 필요 함. 1.의용군사령부에 10명의 고문관이 필요.인원내역=고문단장(1)참모총장고문관(1)작전분야(1)정보분야(1)통신분야(1)후방(1)탄약(1)포(1)탱크(1)엔지니어고문(1).이밖에 5개군에 각2명씩 총10명.그리고 21개 병단에 모두 63명. 이들 고문관들은 51년9∼10월 사이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보내주면 좋겠음』. ○「고문관 파견」 실랑이 9월12일 스탈린은 모택동의 군사고문단 파견요청을 숫자를 줄여 일부만 충족시켜 주었다.6억 루블의 추가군사차관 요청은 그대로 집행해주었다.스탈린은 중국의용군 사령부에 고문관 5명만 파견하겠다고답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9월20일 스탈린앞으로 전문을 보내 5개군에 각각1명씩 모두 5명의 고문관을 보내달라고 재차 요청했다.당초에는 각2명씩 모두 10명의 고문관 파견을 요청했다.모택동은 이들을 9월말 혹은 10월초순까지 북경에 도착토록 해주면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하겠다고 말했다.군사지원을 둘러싼 두 사람간의 줄다리기는 휴전협상 내내 이런 식으로 계속됐다. ◎새로 밝혀진 사실/중·소 협상장소·날짜까지 지시/김일성에 명령조로 전문 보내 19회에 나간 전쟁중의 김일성의 모스크바·북경방문 사실부터의 내용은 사실상 거의 전부가 새로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새로운 발견사실의 의미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검토해 나가보자.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도 김일성은 주요전략을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자문하였고 모택동은 항상 스탈린과 상의하였다.따라서 한국전쟁에서의 휴전협상은 사실상 자본주의 최고 지도부와 사회주의 최고 지도부와의 전체 대 전체식의 협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사실상의 주도자였으면서도 모택동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였다.그는 상세한 사항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도 구체적인 협상의 과정에서 오는 책임과 부담을 지지않으려 하였던 것이다.스탈린은 또한 전쟁 진행중 모택동이 요구하는 군사고문단의 배치에 계속 신중하였다. 김일성에 대한 모택동이나 스탈린의 권고사항은 주권국가에서 제안하는 권고사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철저하고 구체적이고 명령적인 것이었다.즉 그들의 지시는 김일성이 움직이거나 변경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휴전협상의 응답 날짜,장소,개시시점까지 지시,마치 군대의 상관이 부하에게 내리는 지시와 같았다.(실제로 그들의 용어 역시 「지시」였다)이점에서 오늘에 반추컨대 미국과 유엔의 협상전략이 모스크바와 북경을 향했던 것은 틀린 전략이 아니었다.종전후 김일성이 주창한 주체사상과 제제는 사실상 이러한 극단적인 반주권성과 종속성의 역설적 반발이었다.
  • 국경지역 북 경비병 대폭 증강/중국서 본 북한의 움직임

    ◎탈북자 검거·밀수단속 강화 추측/이달들어 중­북 인·물적 교류 감소/북 “김 추모위해 7월엔 관광객 안받아” 김일성사망 1주기를 맞는 요즘 중국·북한 국경지역은 평온속에 여름을 맞고 있다. 6월부터 시작된 「백두산참관」길에 나선 한국관광객들이 단동과 도문시등 중·조 접경지대에 몰려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7월들어 두나라간 인적 왕래는 크게 줄고 있다.중국인 대상의 북한관광이 중단됐고 국경무역에 대해서도 북한세관의 조사가 엄격해져 외면적으론 인적·물적왕래가 급격히 줄고 있다는 것이다. 북경·심양·단동등의 여행사들은 요즘 북한사정을 묻는 전화에 『북한측이 8일 김일성주석 1주기 추모를 위해 7월 한달동안은 여행객을 받지 않겠다고 전해왔다』고 밝혔다.단동시 관광국의 한 관계자는 『지난달 단동을 통해 3천여명에 가까운 중국인들이 신의주를 거쳐 평양∼개성∼묘향산∼판문점등을 여행하고 왔지만 이번 달에는 단체관광이 없다』고 말했다. 3박4일에 2천1백위안(20여만원상당),6박7일에 3천4백위안(32만원상당)의 비용중 상당부분을 얻는 북한이지만 아직은 외화보다는 추도행사가 더 중요한 것 같다고 이 관계자는 토를 달았다. 단동시 보산촌 조선족 집성촌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은 『북조선에서 오는 친척방문은 거의 끊어졌다』고 지적했다.조선족 자치주 주도인 연길시 주민들도 『최근 북에서 오는 친척방문은 찾아볼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대신 국경지역에 북한 경비병의 수가 부쩍 증가했으며 대규모 군대이동도 눈에 띄고 있다고 한다.중국으로 넘어오는 북한탈출자들이 끊이지 않은데다 밀수 단속을 위해 이같이 경비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이들 주민들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북경과 동북지역 조선족 사회가 북한과 멀어졌냐하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현재 연길에는 평양 만수대 예술단이 와 있고 인민예술가들의 작품이 연길시 하남지역 문연 미술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다.또 지난 6월에는 중앙음악가동맹위원회가 발표회를 갖는 등 외면적인 왕래감소에도 불구,실제적인 교류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면적인 한국열풍에도 불구,북한에 대한 정서적인 친근감과 연대의식도 여전한 모습이다.중국의 조선족사회는 일부 친한·친북의 편이 갈리면서도 대부분은 무역·교류의 거간꾼 역할을 하기위해 양쪽을 오가며 남북의 화해물결을 기다리면서 한 건을 준비하고 있다.이들 조선족기업들은 김일성사망 1주기를 맞아 기업및 개인이름으로 된 화환을 준비해 북경의 북한대사관과 심양영사관등에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유례없이 활발한 남북「무역일꾼」들의 물밑접촉도 「중·조」국경지역의 외면적인 왕래 감소와는 또다른 김일성사후 1년간의 남북관계의 진전으로 평할 수 있다.북한의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물론 각 지방 무역총국의 무역일꾼들도 예전과 달리 중국내 「남조선」기업사무실에 먼저 전화를 하거나 찾아와 임가공이야기와 투자문제등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지난해 등 예전과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이같은 접촉을 통해 요즘 평양에서는 주택난등을 이유로 직장별로 10만명가량이 평양밖으로 이주됐고 앞으로도 대대적인 이주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아 평양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단동시의 한 관계자는 『신의주를 바라보고 있는 압록강변 개발구에 최근 아파트단지가 세워지고 급속히 개발되고 있는 것도 올 7월이 지나면 북한이 많이 변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측과 무관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 김만철 여만철 대담/서울신문사 통일안보연구소 주선

    ◎“지하철로 출퇴근… 이젠 서울사람 다됐지요”/일가 이끌고 귀순한 두 만철씨 자유의 삶을 말한다/김/“탈출때 11명이던 가족이 18명으로 늘어”/여/“서울생활 1년만에 체중 13㎏ 붙었어요”/북 주민 개방에 눈뜬 것은 남쪽방송 많이 듣기때문/최근엔 지도원까지 북체제 비판… 변화 실감/남한사람 씀씀이 헤프고 낭비많아 안타까워 『형님,오랜 만입니다.혈색 좋습니다』 『만철씨 얼굴에도 희색이 도는데…』 지난 87년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 소형선박에 10명의 대가족을 태우고 복합을 탈출했던 김만철씨(55). 그리고 지난해 처자 4명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죽음의 땅」을 빠져나온 여만철씨(49). 풍요로운 자유대한에 새 보금자리를 튼 두 귀순가장이 1일 서울신문이 언론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마련한 특별대담에 건강한 모습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여씨의 귀순 1돌(30일)을 하루 앞두고 이뤄진 이날 대담에서 여섯살 아래인 작은 만철씨는 김씨를 깍듯이 형님이라고 불렀고,큰 만철씨는 반말을 곁들여 가며 여씨를그냥 만철씨라 불렀다. 추운 겨울에 가족들을 이끌고 한 사람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며,또 한 사람은 가슴을 죈채 두만강을 건너 동토를 탈출했던 두 만철씨의 만남은 「운명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귀순이 인연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생면부지의 남남이,잡고 잡히는 사이가 될 뻔했던 사람들이 만나 형제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귀순 가장은 형·아우가 되어 가족들과 정착해서 오붓하게 살아가는 얘기며 서로의 북한 체험담으로 장장 4시간동안 훈훈한 얘기꽃을 피우면서 7년에 이르는 간극을 좁혔다. 『형님,그동안 몸무게가 13㎏나 늘었습니다.살찌기운동을 했지요』 작은 만철씨가 불어난 체중을 자랑하자 큰 만철씨도 최근에 몸무게가 5㎏이나 늘었다면서 고개를 내젓는다.귀순초기와는 달리 이제는 체중이 느는 것이 반갑지 않다는 표정이다.북한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삐삐 말랐다가 이제서야 살이 올라 보기 좋을 정도의 체격이 됐다고 마냥 좋아하는 여씨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 뿐인줄 아세요,형님,막내 은룡(17)이는 키가 1년새 12㎝나 자랐습니다』 여씨는 아이들이 북한에서 제대로 먹지못해 키가 크지 않았는데 여기와서 몰라보게 자랐다고 계속 자랑이다.이에 김씨가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뼈만 앙상해 그당시 쉰이 안됐는 데도 예순이 넘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지금은 그 당시보다 훨씬 젊어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아마 만철씨도 젊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거요』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만철씨 아이들은 어느 학교 다니나요』 『큰 딸(금주)은 중앙대학에 다니고 금룡이와 은룡이는 우신고등학교에 다닙니다.그런데 얘들이 얼마나 적응이 빠른지 막내아이는 남녀공학이 아닌 학교를 다니는 데도 벌써 여자친구를 사귀었다고 합니다.나 참…』 작은 만철씨는 신바람이 났는지 묻지도 않은 아이들의 이성교제 얘기까지 했다. 『형님은 어떻습니까.자녀들과 처남들은 결혼했지요』『큰 애 광규는 홍대 미대를 나와 토지개발공사에 다니고 있는데 장가들어 손녀가 둘이나 생겼지.이젠 나도 할아버지가 됐어요.함께 온 두 처남들도 결혼해 애들을 다섯이나 낳아 탈출 당시 11명이던 가족이 18명으로 늘었지』 김씨도 가족들의 근황을 전하면서 뿌듯해 한다. ○손녀 둘이나 생겨 『만철씨는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그리 크지 않은 종합병원의 총무과에서 주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봉급은 1백10만원 받고있는데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지하철로 출퇴근도 하고 이젠 서울사람 다 됐지요』 비교적 적응을 잘 하고 있다는 여씨 말에 귀순 선배인 김씨는 자못 안도하는 표정이다. 『형님,나는 이곳에서 새 사람 됐습니다.중국으로 탈출할 때 도와준 사람의 인도로 천주교회에 다녔는데 지난 16일 부활절때 영세까지 받았습니다』 『축하합니다.나도 김신조씨의 전도로 하느님을 믿게 돼 벌써 오래전에 집사가 됐지.요즈음은 경남 남해군 미조면에 세운 기도원을 관리하면서 이곳저곳 간증하러 다니느라 바쁜 편이지』 큰 만철씨는 신앙생활에 대해 얘기하면서 자신이 북한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종교를 이곳에서 접하게 된 것은 자신을 구해준 것이 사람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그러자 작은 만철씨도 아직 큰 만철씨 정도로 깊은 믿음생활은 못하고 있지만 교회는 일요일마다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다고 화답한다. 여기까지 우스갯소리를 곁들여 가며 자유대한에서 살아가는 얘기를 주고 받던 두 귀순자는 끔찍스러운 지난날의 북한생활로 화제가 옮겨가자 얼굴색이 굳어진다. 『만철씨,내가 탈출한 이후 북한 사회는 얼마나 변했습니까』 김씨가 그간의 북한소식을 무척 궁금해하자 입담좋은 여씨가 술술 얘기를 이어간다. ○집사로 간증에 바빠 『북한의 유일체제는 변함이 없지만 형님이 탈출한 이후 북한에서는 식량난이 갈수록 악화되고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참,형님 탈출얘기를 하다보니까,내가 형님을 체포하러 강추위 속에 청진 바닷가로 작전 나갔던 생각이 납니다.그당시 육해공군과 노농적위대까지 동원돼 동해안 바닷가를 사흘동안 샅샅이 뒤졌는데 배가 도망 못가고 표류하다 잡히면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그래요? 당신이 나를 잡는데 동원됐었단말이지. 내가 그당시 3년동안 얼마나 세밀하게 연구한 끝에 탈출했는데…,어림없는 소리지』김씨는 여씨의 작전참가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그 당시 풍향에 대한 면밀한 관찰 끝에 탈출했기 때문에 표류하더라도 해안으로 떼밀려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밝힌다. 『형님이 탈출했을 때 나는 청진에 있었는 데 이미 이 때 일반인들에 대한 배급량이 줄고 군인들마저 잘 먹지 못해 영양실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그런대로 곡물배급은 되는데 부식이 형편 없었어요.훈련도 심하고 중노동을 하는데 육류섭취를 제대로 못하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요』 『내가 탈출할 당시에도 15일치 배급에서 이틀분이 공제되기 시작했었지.하루 7백g이 정량인 데 5백80g밖에 안나왔거든.그나마 배급시기가 하루 이틀 밀리더니 보름씩 늦어지더라구』 『그 때만해도 괜찮은 편이었어요.종전까지 30%였던 쌀 혼합비율이 89년 들어 10%로 낮아지고 한 두달 밀리더니만 90년엔 석달씩 지체됐고 93년 2월엔 양강도와 강원도 등지에서는 배급이 아예 중단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작은 만철씨는 북한물정을 잘 아는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답게 식량배급제의 문제점까지 짚어나간다.『동해안 쪽에는 냉해로 흉작이 들어 실제 1개 협동농장의 생산량이 3∼4t에 불과한데도 이곳에 나와있는 3대혁명소조원들이 어떻게 보고한 줄 압니까.불켜서(늘려서) 5∼6t 된다고 보고하는데,탈곡하고 보관하고 운반하면서 이놈저놈이 빼가는 바람에 1∼2t 밖에 안남게 되지요.그런데 계획에는 5∼6t으로 잡아놓고 배급하니 어떻게 되겠어요.배급체계가 마비될 수 밖에』 이 때쯤 점심식사를 하는데 큰 만철씨가 밥 한그릇을 추가 주문한다.『북한에서는 쌀밥을 곡상(고봉)으로 주면 제일 좋아하지.나는 여기서도 밥을 많이 주면 아직도 기분이 좋아.만철씨는 어때?』 『나는 된장국 같은 것에 쌀밥 한 그릇이면 족해요.북한에선 얼마나 먹고 싶은 것이었습니까.북한의 식량난은 정말 최악의 상태입니다.허리띠 졸라매기,한끼 절약운동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어요.93년 12월엔 김일성이가 직접 텔레비전에 나와 하루 두끼만 먹고 죽을 쑤어먹자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직장에서는 쌀을 구하러 가겠다고 하면 아무나 허가가 납니다.못먹으면 일 못하니까 쌀 사오라고 여행허가증을 떼줍니다』 『그래요,내가 있었을 때는 어림 없었지』 ○북 군인들 영양실조 『다른 것도 변한게 많습니다.청소년들의 행태를 보면 머리는 길게 기르고 미니 스커트가 등장했어요.남한노래를 많이 부르고 디스코 춤도 춥니다』『내가 있을 때는 미니 스커트는 구경조차 못했는데…』 7년간의 시차이지만 세대차를 느낀다고 할 정도로 북한의 사회풍조가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김씨는 계속 놀란다. 『이런 것들은 김정일의 승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김정일이 인민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이만큼 개방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요.지금 북한 주민들의 견해는 우리가 중국처럼 개방해야 잘 살 수 있고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땅의 사적소유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씨는 주민들이 개방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남한방송을 많이 듣기 때문이라고 전한다.『예전에는 남한방송을 듣지 못하게 라디오에서채널을 통째로 빼내 고정시켰는데 요즈음은 납땜만 합니다.그래 놓으니 땜질한 곳만 적당히 손질해 대낮에 남한방송을 몰래 듣는 사람이 많아요.들키면 호기심으로 그랬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재수없이 안전부에 붙들려 가면 서너달 혼좀나지요』 이에 큰 만철씨는 그당시 남한방송 청취란 생각할 수도 없었고 탈출때 남한이 이처럼 살기 좋은 곳인지도 전혀 모르고 무조건 따뜻한 남쪽나라만을 찾아 뱃머리를 돌렸다고 회상한다. 김씨가 여씨의 얘기에 더욱 놀란 것은 체제비판에 관한 것이었다.『김부자의 유일체제가 변함이 없자 밑에서는 냉가슴 앓는 불만의 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노동자나 지도원 가릴 것 없이 같은 급이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먹을 걱정 얘기라도 나오면 공공연하게 체제를 비판하고 나옵니다』『아무리 끼리끼리라지만 그렇게 비판하고 나오다니 많이 변했네』김씨는 새로운 사실들에 연신 놀라는 표정이다. 『형님이 있을 때도 그랬겠지만 요즈음은 으레 뇌물이 오가고 뇌물로 안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뇌물이 횡행합니다.아이들을좋은 대학에 보내거나 벌목공으로 나가려면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안됩니다.요즈음은 젊은 애들이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신체검사 때는 떨어지기 위해 별별짓을 다합니다.정말 많이 달라졌지요』 『왜 그렇지? 그전에는 군에 가면 잘 먹을 수 있고 당원이 되려면 복무를 해야하기 때문에 모두들 입대하려고 야단들이었는데….군에 가기 위해 뇌물도 바쳤지 않아요』 김씨가 잘 이해가 안간다는 반응을 보이자 여씨가 설명을 덧붙인다.『앞서도 얘기했지만 군에 들어가도 먹는 것이 시원찮아 영양실조에 걸리는 상태에서 핵문제로 국제적인 제재가 있게되면 군인들은 전장에서 모두 죽는다는 소문들이 나도는데 누가 가려고 하겠습니까.또 뇌물로 젊은이나 늙은이나 돈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달려졌습니다』 『내가 있을 때는 돈을 많이 벌어봤자 쓸 데가 없었지.어쩌다가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은밀하게 열리는 암시장에 가보면 쌀 한되에 20원씩 했는데…』『그 때만 해도 옛날 얘기입니다.지금은 쌀 한 되에 60원씩 합니다.그리고요즈음은 돈이 없으면 살 지를 못합니다.모두들 돈 맛을 알아 금전제일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요.암시장은 이제 공공연하게 열리고 당국도 묵인하고 있습니다.모든 물자가 모자라니까 사람들이 암시장을 찾게 되고 암시장에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습니다.암시장엔 중국등에 나가 싼 물건을 사다파는 보따리장수들이 많습니다』 ○중국마저 돕지않아 두 귀순자는 대담 후반부에 오늘의 북한문제를 얘기할 땐 강경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이들은 현재 북한에서 권력의 공식 승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음에도 김정일체제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나 혈맹인 중국마저 돕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이 지원하지 않으면 경제가 파탄돼 그냥 무너지게 돼있다고 단언했다. 두 만철씨는 이어 우리가 인도적 차원에서 양곡을 지원하게 될 경우 양곡은 우리가 보낸 것이 아니라 김정일의 선물로 둔갑하고 미국이 대주는 중유도 군수용으로 전용될 것이 뻔하다면서 절대로 지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 수용을 계속 거부한채 전쟁운운하며 위협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대해서도 몹시 못마땅하다는 반응이다. 『북한이 어디 사람이 살 곳입니까.지구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습니까』 두 만철씨는 생지옥 탈출이 아직도 꿈만 같다고 회상하면서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주민들을 생각할 때 남한사람들이 너무 풍족한 나머지 씀씀이가 헤프고 낭비가 많아 안타깝다며 대담을 마쳤다.
  • “죽음의 향연”… 6·25(두만강 7백리:8)

    ◎“조국위해 몸바쳐라” 조선족 징집/인민군에 편입… 2달 훈련받고 출전/연합군 폭격에 화룡시 일대 “쑥대밭”/돌아온 포로들 “차라리 남쪽에 남았더라면” 중국에 사는 전 북한의 인민군 부소대장이상 퇴역 군인들이 불합리한 대우에 항의하여 서명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오늘 중국에 자리잡은 인민군 퇴역 군인들은 거의 모두 중국 인민 해방군 출신이다.이들은 본래 중국 내전의 공로자들인데 1949년 모택동과 주덕의 명령에 좇아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였다.이들은 6·25전쟁에서 주역 노릇을 했지만 퇴역하여 중국으로 돌아온 후 농민이 아니면 공장 노동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이에 비해 중국 지원군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은 간부대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자연 분통이 터질 일이기도 했다. ○두달간 훈련받다 출전 이들은 연변 자치주 정부의 지지를 받아 대표를 파견하여 중앙에 신소,끝내 승소하였다.모든 조선인민군 부소대장이상 퇴역 군인들은 현재 간부대우를 받고 있고 자식들도 취직시켰다. 화룡시 승선진 고성리촌의 김성묵(70)은 1947년 중국 내전에 참전,1950년 4월 조선으로 나가 인민군 7사단에 편입되었던 사람이다.중국군의 군사민주에 젖어 있던 그들은 인민군 명령제에 잘 습관이 되지 않았다.소련군인식으로 다리를 꼿꼿이 펴고 행군하고 총도 왼쪽에 메야 했다.돌격시에는 꼿꼿이 서서 달렸다.두달동안 훈련을 받다가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고 한다. 『6월25일 새벽 맹렬한 포사격을 끝내고 국군진지로 돌격해보니 여자 방송원 한사람만 남았습데다.참말로 포탄 값도 못한 셈이디요.인민군들이 물밀듯 탕크를 몰고 서울에 들어가니끼리 우리를 소련군인줄로 알았다고 기래요.인민군이 탕크에서 나오자 깜작 놀라는 눈치였읍네다.내가 소속된 사단은 이천에서 국군의 반격을 받아 쌍방이 숱한 사망자를 냈수다.국군 포탄이 대피호에 떨어지면서 부상을 당했는데 팔이 끊어지고 다리를 상했디요.평양 웽그리아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다가 매일 20리씩을 걸어서리 평양에서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넜지 뭡네까.유수현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이듬해 3월에 전쟁에 참가했디요.그 전쟁 말도 말라우요』 연합군의 인천상륙으로 후퇴한 북한 인민군은 중국경내로 전이했다.겨울에 두만강을 건너 온 인민군은 연변의 화룡·용정 등에 집중하여 사민들 집에 10여명씩 거주했다.중국에 친척이 있는 백성들도 강을 건너 피란을 했고 그외는 산속에 땅굴을 파고 살았다.그해 음력 10월1일(상사날)미군 비행기가 무산을 처음으로 폭격했고 이틀 후에 두번째로 폭탄을 내리부었다.화룡시 덕화진 천증백노인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상황이 잘 떠오른다. 『첫 폭격을 당한 무산에서는 17살 최호림학생이 죽었디요.비행기는 중국쪽에서 선회하여 조선쪽으로 꽂히면서 대두병같은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포를 갈겨댔지 뭡네까.비행기가 어찌도 낮게 떴던지 자루 긴 올개미로 잡아댕기면 떨어질것 같습데다.조선쪽에서 폭파하는 진동에 중국쪽 마을 유리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디요.공습 사이렝이 울리면 조선 사람들이 새까맣게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왔는데 그러면 중국 쪽에서는 못오게 막더라 이 말입네다.사람들은 울면서 같이 삽시다고 손이 발이되게 빌어댔디요』 ○온마을 온통 울음바다 화룡시 승선진 고성리와 조선의 삼장은 한 마을이나 다름없어 폭탄세례를 당했다.한족 한사람이 수레를 몰고 가다가 폭탄에 맞아 죽었는데 유일하게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승선진 소학교 운동장에는 땅에 박힌 불발탄이 70년대에까지 있었다.그것은 반미 교육의 증거로 오래오래 써먹었다.천증백노인의 회고담을 계속 들어보면 연변의 조선족들도 6·25전쟁에 많이 시달렸다. 당시 민심은 황황하기 짝이 없었다.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식구들이 살아 있을 때 먹는다고 가축들을 잡아 얼려두고 먹어댔다.군인 모집이 나오면 적령 청년들은 물론 온집안이 숨이 후줄근했다.참전하면 영광이라고 온마을이 나서서 환송했지만 참전당사자와 가족들은 상사가 난 집 모양으로 울음바다였다.용정시 백금향의 박창묵(67)은 당시 6·25전쟁에 참전한 조선족의 한 사람이다.『나는 국민당군과 싸우다 47년에 부상을 입고 대퇴했수다.그후에 연변 통역학교를 다닐 때에 조선전쟁이 터졌디요.하루는 주장이자 우리 학교 교장인 주덕해동지가 와서 조선전쟁의 준엄한 형세를 이야기하면서 청년들은 국가를 위해 몸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동원을 하데요.총알에 죽을 팔자거니 생각하니 눈앞에 아뜩합데다.우리 학급은 33명인데 여성 6명을 빼고 몽땅 잡혀갔디요.결국 절반이 죽었디만….다행이 지원군에 편입되어 통역을 맡는 통에 살아왔디요.물론 싸움판이었습네다만,안전지대에서는 남한 구경을 하고다녔디요. 마을에 열사증이 내려오면 군인가속들은 잔뜩 긴장해서 촌장과 말다툼하기 일쑤였다.국가를 위해 죽는 것은 영광이요 뭐요 하고 말꼭지를 떼면 개나발을 불지 말고 이름부터 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일단 희생자를 알게 되면 가속들은 기절해 버리고 다른 가속들도 자기의 불행처럼 여겨 통곡을 했다.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에서만도 한국전쟁에 나갔다가 12명이 목숨을 잃었다.이번에 찾아온 화룡시 노과진 노과촌의 김진수(65)는 동해바다 함포사격에 부상을 입고 1952년 9월23일에 붙잡혀 거제도에서 포로로 있다가 정전후 1954년 8월5일 포로 교환에 넘어왔다.포로병을 반역자처럼 대했던만큼 문화대혁명시기까지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고 살아왔다.지금은 매달 소대장급으로 3백50원의 연금을 받고있지만 알코올중독으로 흐리멍텅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남에 떨어져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괜히 돌아와서 고생을 했수다.부암에서 나와 같이 참전했다가 포로되었던 남원준과 이동준은 한국에 남았었는데 지금 꽤 잘 사는가 봅데다.나한테 편지가 왔댔소.보고 싶다면 보여주갔수다』 ○약혼녀… 다른데 시집가 화룡시 노과진 노과촌의 조창렬(84)노인의 둘째 동생 봉룡(1926년생)은 1945년 중국내전에 참군했다가 용케 살아났으나 한국전쟁에 나가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전사했다.그는 결혼날까지 받아놓고 미처 성례를 이루지 못하고 군에 갔었다.매년 두번씩 오던 편지가 한 이년 끊기더니만 하루는 문득 열사증이 왔다.약혼자가 돌아와 머리를 얹어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미혼녀는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열사증과 함께 무흘금 2백80원을 줍데다.지금은 매달 45원씩의 돈을 부모 대신내가 받고 있디요.동생 목숨 값이라 생각하니 돈을 받아 쥘 때마다 가슴이 미여집네다』 벌써 미수를 바라보는 조창렬노인은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동생의 열사증 앞에서 한숨을 지었다.
  • “재일교포 「반쪽발이」라며 멸시”/귀순 오씨가족 일문일답

    ◎탈북자 늘자 감시·통제 심해져/북 선전에 회의… 아들이 탈출 권유 ­귀순동기는. ▲명선씨=북한에서의 생활은 더이상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특히 자본주의 국가에서 생활해 온 부모들의 영향도 컸으며 남한방송을 듣고 북한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점을 알았다.북송교포라는 신분도 동기로 작용했다. ­탈출을 언제 결심했나. ▲명선씨=탈출은 지난해 8월쯤으로 군생활하다 만난 친구 철만이에게 더 추워지기 전에 가자고 말했다.그러다 그해 9월5일 함경남도 금야로 출장간다며 철만이를 만나 최종결심했다. ­탈출에 어려움은 없었나. ▲오씨=아들이 함경남도로 출장간다고 집을 비운뒤 한달간 나타나지 않자 안전부 보위부등에서 아들의 행방을 조사했으나 평소 내가 당에 열성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러다 아들이 탈출을 권유해 주저하지 않고 감행했다. ­고향출신인 여만철씨의 탈출소식은 알고 있었나. ▲명선씨=보위부등에서 흘러나와 알았다.고향의 대부분 사람들은 여씨가 남한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에 잘됐다는 반응이었다.그러나 그후부터 주민을 감시하는 인민반등을 통해 감시가 철저해 졌고 규율도 엄격했다. ­김일성의 사망때 주민들이 정말 슬퍼했나. ▲명선씨=북한에서는 자기감정을 제대로 표현할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마음속을 알수 없다.개인적으로는 죽었다는 말이 정말인지,거짓인지도 모르겠고 슬픈지 기쁜지도 몰랐다.다만 공장에서는 집단적으로 꽃다발을 준비해 동상앞에 찾아가 시키는대로 엎드려 절한 것으로 안다. ­북한에도 세대차이가 있나. ▲철만씨=큰 차이는 잘 모르겠다.다만 늙은이들은 일제시대를 거쳐 자본주의를 알고 있어 인생에 대한 회의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이었다. ­탈출 소감은. ▲초미씨=땅에 떨어져도 흙이 묻지 않는다고 거짓선전에 속아 살아온 북한생활은 다시 떠올리기 싫다.탈출한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다. ◎작년 12월29일 새벽 압록강 도착/기다리던 밀항 나타나자 “살았다”/긴장의 탈출 순간 『걸리면 마지막이다』 가난과 굶주림,「반쪽발이(재일교포출신)」라는 멸시속에서 삶을 연명하다 북을 탈출한오수룡씨 가족들은 탈출을 감행하던 순간의 긴장감을 이 한마디로 대신했다. 지난해 12월29일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인 새벽 5시50분쯤 오씨 일가족 5명은 평북 신의주시 압록강변 갈대숲을 숨을 죽이며 헤쳐나갔다. 오씨 아들 명선씨는 큰딸 인화(4)를 업고 둘째 딸 수화(2)를 안은 아버지와 어머니 김초미씨를 인도했다. 명선씨는 이미 3개월전인 9월17일 친구 박철만씨와 함께 압록강을 자동차 튜브를 이용,압록강을 건너갔다가 부모님을 모시러 3개월여만에 죽음의 땅을 다시 넘었던 것이다. 명선씨는 북의 생활은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품어오다 군대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철만씨가 같은해 9월5일 함남에서 장사차 자기 집에 들르자 탈출 결심을 털어놓았다. 철만씨는 명선씨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함남에 있는 부모와 처자식 걱정에 명선씨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민하다 다음날 꿈도 희망도 없는 북한땅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 명선씨는 함흥으로 출장간다는 핑계를 대고 철만씨와 함께 같은달 17일 어둠을 틈타 내의와 양복·구두를비닐봉투에 넣고 자동차튜브를 이용,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동에 이르렀다. 『중국말도 못하는데다 수상한 사람으로 오인받을 것을 우려,잠도 자지않고 거닐었지요』 그후 명선씨는 하얼빈·대련등을 전전하다 친절한 조선족 사람을 만나 그 의 도움으로 생활하다 부모님을 자유의 품으로 모셔올 계획을 세웠다고 회상했다. 명선씨는 밀선을 타고 부모님이 계시는 신의주 집에 몰래 숨어들어 『고향으로 가고픈 한을 풀자』면서 부모님과 떠날 시각을 정한뒤 이웃들의 눈을 피해 다른 곳에서 쉬다 부모와 합류,목숨을 건 탈출길에 나선 것이다. 이때 오씨의 가족들은 산책하듯이 집을 나섰다. 막상 명선씨가 가족을 데리고 약속장소에 도착했을때 기다려야 했던 밀선은 보이지 않았다.명선씨는 강으로 뛰어들어 배를 찾았다.10분쯤 지나자 밀선이 나타났다. 『밀선이 우리쪽으로 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군요.그때 다 죽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명선씨는 방향을 틀어 오던 배를 오해한 것이었다. 명선씨 일행을 태운 배에 지옥의 땅을 뒤로하고 살을 에는듯한 추위속에서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져 나갔다.
  • 북송교포 일가 5명 첫 귀순/주민 1명도 함께

    ◎“아들·손녀 장래위해 탈북” 북송교포 오수용(61)씨 일가족 5명과 북한주민 박철만(28)씨 등 6명이 26일 상오8시 제3국을 거쳐 김포공항을 통해 귀순했다. 북송교포 일가족이 귀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귀순한 사람은 오씨를 비롯,오씨의 부인 김초미(54)씨,외아들 명선(31)씨,손녀 인화(4)·수화(2)양 등 5명이다. 오씨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자유가 전혀 없어 아들과 손녀들의 장래를 생각하던중 아들이 북한에서 탈출하자고 해 목숨을 걸고 탈북을 결심했다』면서 『아들이 94년9월17일 먼저 압록강을 건너 탈출한 뒤 3개월후인 12월29일 하오5시50분쯤 나머지 일가족이 압록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오씨는 며느리가 함께 오지 못한 이유에 대해 『아들이 먼저 탈출한 뒤 며느리가 신분의 위협을 느껴 도망치는 바람에 함께 오지 못했다』고 밝혔다. 오씨는 북송경위에 대해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조총련의 한덕수의장이 일본에서의 헐벗고 굶주린 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자고 속여 이를 믿고 62년2월 귀국선을 타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에 귀순한 오씨는 일본 효고현 출신으로 62년2월 북송된 후 압록강화학공장 자재지도원,신의주 채하철제품 창고장 등으로 일해왔다. 오씨의 아들 명선씨는 북한군에 복무하다 89년10월 흥남 소재 7군단에서 제대한 뒤 신의주시 일용품 생산협동조합 인수원으로 종사했다.
  • “두만·압록강 오염 심각/산업폐수로 5급수이하 상태”

    ◎배달녹색연합 세미나 북한의 두만강과 압록강의 수질이 산업폐수로 심하게 오염돼 있는 등 북한도 환경오염이 심각한 상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환경기술개발원의 남영숙 연구위원은 13일 배달녹색연합 주최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남북한 환경협력과 환경정책 통합방안 연구」라는 주제발표을 통해 『두만강은 상류 1백㎞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남양·회령·무산시 등과 중국의 도문시 등에서 나오는 산업 및 도시폐수로 오염돼 식수는 물론 공업용수로도 사용할 수 없는 5급수이하의 상태』라고 밝혔다. 남위원은 이어 『압록강은 두만강처럼 물색깔이 시꺼멓지는 않으나 오염이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로 식수로 사용할 수 없는 3급수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 청·일 전쟁 선전포고문 국내 첫 공개

    ◎국경연구단체 토문회 양태진 박사 입수/전쟁 발발 1백돌… 관련 논문·자료도 선보여 올해는 청·일전쟁(1894∼95)1백년이 되는 해.청일전쟁은 그 무대가 주로 한반도라는 점에서 우리 근대사의 큰 사건으로 기록된다.특히 이를 구실로 일본이 한국침략을 굳혔기 때문에 더욱 주목되는 전쟁이기도 하다.그럼에도 이 분야의 연구는 아주 부진한 상태.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청·일전쟁을 구체적으로 짚어보는 논문과 함께 희귀한 관련자료가 공개되었다. 화제의 논문은 국경연구단체 토문회 회장 양태진 박사가 내놓은 「청일전쟁과 한반도」.국방연구소 학술지 「군사」 제29호를 통해 발표한 이 논문은 전쟁 발전과정과 한반도 피해에 초점을 맞추었다.청·일전쟁은 18 94년 7월25일 상오7시 충남 아산군 풍도 앞바다에서 요시노호(길야호)등 일본함대가 광을호 등의 청국함대를 만나 포문을 연 것으로 시작되었다.18 95년4월까지 싸운 이 전쟁은 한국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양박사는 이 논문에서 충남 성환과 평양등의 내륙전,압록강 도강등의 일본군 작전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입은 피해상황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본군 제10여단장 다츠미(입견상문)가 황해도 신계 일대에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린 자료 「일청전쟁실기」(1895년 발행)도 발견한 양박사는 특히 평양 약탈에 주목했다. 청국과 일본이 한반도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출병한데서 비롯된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실리를 강제로 챙겼다.경부선 철도부설권 장악,통신수단의 일본군 전용화,개항장을 통한 경제수탈등이 그것이다.이는 결국 일본의 정한론이 시행된 것으로 우리나라가 주권상실국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박사는 최근 휘귀자료인 일본의 청·일전쟁 선전포고문을 일본으로부터 입수,공개했다.「조선국의 안녕질서가 필요하여 청의 독선적 태도를 묵과할 수 없다」는 내용의 이 선전포고문 표제는 「선전조칙」.메이지(명치)의 초상도 들어있는 인쇄본 두루마리(가로 27.5㎝·세로 48㎝)의 선전포고문은 당시 도쿄 외교가에 돌렸던 자료.먼저 전쟁을 벌이고 난 다음에 국제여론을 못이겨 8월 1일자로 선전포고했다는 사실을 뚜렷이 입증하고 있다.
  • 항일투쟁 본거지(연변 조선족 1백년:12)

    ◎독립군 사기 높인 봉오동­청산리 전투/삼둔자 첫교전 대승… 독립운동 본격화 계기로 연변이라는 곳이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이중에 한국독립군전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세곳 있는데 삼둔자전투,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가 그것이다.이 3개지역은 우리의 피를 말리던 당시의 일본측으로 보면 몹시도 상처 받은 아픈 상흔으로 남을 것이고,우리 입장으로서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고 울부짖음이었다. ○한인이 개척한 신천지 당시 한국이주정착민들의 거주지역은 크게 서간도와 북간도로 나누는데 서간도는 백두산서남과 압록강대안의 남만주를 일컬으며 북간도는 서간도를 제외한 나머지지역을 말한다.이밖에 두만강 하류에서 우수리강 동쪽의 러시아땅에도 이주민들이 살던 곳으로 이곳을 연해주라고 불렀다.해도간이란 연해주의 「해」와 간도의 「도」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이를테면 한국이주민들이 구한말 이래 새로 개척한 신천지를 총칭하는 말이다. 삼둔자는 현재 연변 제2의 도시인 도문시 월청향 간평이란 마을이다.이지역 일대가 산악이며 일본수비대의 눈을 피해 국내로 잠입할 중요거점으로 알려진 곳이다.삼둔자사건의 전말은 이렇다.1920년6월4일 새벽이었다.30여명의 독립군이 국내로 진입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종성 북방 2㎞지점의 강양동으로 진격하여 일본헌병 후쿠가와 조장이 인솔하는 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귀환하는 임무였다.이날도 여느 때처럼 성공리에 무사 귀환했다. 그러나 왜군은 참패의 복수를 위해 니이미중위로 하여금 남양수비대 병력 1개중대와 헌병경찰중대를 인솔하게 하여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낌새를 챈 독립군은 요소에 잠복하고 있었다.삼둔자에 이르러 뜻을 이루지 못한 일본군은 억울한 양민만 대량 학살하고 퇴각하는 길이었다.이 때 놓칠세라 독립군이 일시에 습격하여 섬멸시켰다.소수의 병력으로 왜군을 섬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곳 지형에 익숙한 독립군이 협곡으로 왜군을 몰아 일시에 포위하여 공격한 탓이었다.이 사건은 일본군이 강을 건너 중국땅에서 독립군과 싸운 처음 기록이 되었으며다음 봉오동승첩의 서전이 되었다. 1920년 6월7일 봉오동승첩의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두만강 국경수비대는 국내 진입작전의 독립군 본영이 있는 봉오동을 일격에 섬멸하여 그 기능을 봉쇄하려고 공격부대를 편성했다.결국 야스카와 소좌는 보병2개중대,기관총소대,헌병경찰대를 합친 혼성대대로 편성했다.그리고 며칠전 삼둔자에서 패전한 니이미 중대가 가세하여 신예무기로 무장한 전투대대병력으로 공격이 시작되었다.새벽3시가 지나 해란강이 두만강과 합류하는 온성 하탄동 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을 향해 진격해 온 것이다.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길쭉한 삿갓을 뒤집어 놓은 지형의 요새라 할 수 있다.남쪽 입구로부터 북쪽까지는 25리가 넘는 골짜기로 되어 있고 두 세곳의 한국인 이주민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한편 봉오동 독립군을 지휘하던 사령관은 홍범도였으며 왜군을 대치한 아군작전은 치밀했다.마을 주민들은 모두 대피시켰고 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2개중대는 서산남단에 자리잡고 그밖의 중대들은 사방으로 매복시켰다. ○홍범도장군 맹활약 아침8시가 지나 일본군은 봉오동 초입에 당도했다.마을을 습격하면서 미처 피하지 못한 노약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점차 깊이 수색해 들어온 일본군은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도주한 줄만 알았다.때가 왔을 때 홍범도사령관의 신호로 삼면으로부터 일제히 공격이 시작되었다.일본군은 결사 반격을 했으나 워낙 갑자기 당한 습격이라 수습할 길이 없었다.결국 패퇴하고 말았다.이 전투의 개선은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조금은 위로해 주었다.그리고 중국조선족의 정신적 힘이 되어 주었다. ○위군 1천2백명 궤멸 청산리대첩은 1920년10월 김좌진·나중소·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합세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로 진격한 일본군을 맞아 청산리일대에서 싸워 일본군을 대파시킨 것을 말한다.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25㎞나 되며 교통이 거의 불가능한 지세였다.10월21일 상오9시경 야스카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이곳에 당도했을 때 이범석의 지휘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일제히 엄습하여 전멸시켰다. 이어 야마타가 이끄는 본대가 당도했지만 아군에게 유리한 지형과 매복작전에 속수무책,2백여명의 일본군이 사살되고 패퇴했다.한편 홍범도부대는 완루구에서 일본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끝에 4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혔다.22일에는 김좌진부대가 마을주민의 제보를 받아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던 기병대를 습격했다.청산리전투는 10월21일부터 시작되어 26일까지 약10여회 전투를 한 끝에 일본군 1천2백여명을 사살한데 비해 독립군은 1백여명이 전사했을 뿐이었다. 삼둔자전투는 일본군이 중국땅에서 독립군과 최초로 싸운 기록이 되었으며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주력부대를 파멸시키려는 일본군의 복수전이었으나 결국 패퇴했고 청산리전투는 규모면에서는 가장 큰 전투였다.군인의 수나 무기의 수등 병력이 약세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것은 유리한 지형과 치밀한 전략 때문이라는 점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조국 독립을 위한 정신력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 즐겨 부른 노래(연변 조선족 1백년:11)

    ◎구성진 민요가락에 고달픈 삶 절절이/1914년께 찬송가 보급… 항일가사 붙여 불러/해방이후 대중가요 첫선… 지금은 노래방서 모국가요 판쳐 중국인들은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말을 해왔다.「조선사람 사는 마을엔 논밭이 있고,벼농사 하는 곳엔 조선사람이 있다」고….조선사람은 황무지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밭을 논으로 바꿔 벼농사를 지으니 중국인이 보기에는 영농엔 도가 튼 조선인이라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을 것이다.19세기초,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 살던 우리 민족은 봄만 되면 강을 건너 중국땅에서 황무지를 일궈 가꾸었다.그리고 가을이 되면 알곡을 잔뜩 지고 다시 강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이 무렵 중국땅에서 피땀 흘려가며 개간하던 우리 농민들 사이에선 이런 민요가 불려졌다. 「월편이 나붓기는 갈잎대 가지는/애타는 내가슴을 불러야 보건만/이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신세타령 농요 많아 이름하여 「월강곡」이다.아마도 현행법으로는 월강이 불법인 줄은 알면서도 그곳에 가서 농사를 지어오는 농민들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것 같다.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주민들은 국경 의식이 적었던 모양이다.그도 그럴것이 예로부터 강 북쪽이 어디 외국영토였던가.한때는 우리의 삶터였기도 했고,선조들이 묻힌 땅이었다.현실이 어찌 그들의 의식을 제재할 수 있었겠는가. 이 무렵 중국땅으로 건너가 개간하던 빈농들이 부른 민요는 거의 삶의 몸부림이었다.노동을 할 때 일의 능률을 위한 민요도 있고 신세타령도 있다. 농사꾼이 있는 곳엔 대장장이가 없을 수 없다.대장장이는 농사꾼을 따라다니며 농기구를 고치거나 만들어주며 목숨을 유지한다.그러나 이것도 만만치는 않다.천하디 천한 직업으로 대장장이에게 시집올 처녀가 없다. 「대장일 십년에/망치깨만 남겼네/후렴 어깨넘어 실포장도/네 날 살려주렴아/후렴 누덕저고리 진자지고름/나를 살려주렴아/후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난한 농민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월강하여 그곳에 정착을 했다.그리하여 조선족 마을을 형성했다.뒤따라 자리 잡은 것이 천주교와 기독교였다. ○우리말 찬송가 나와 중국조선족이 민요 다음으로 맞이한 노래가 신식학교 창가과에서 부른 찬송가였다.1914년이래 기독교,천주교 계통에서 간도일대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용정에 「명신여자학교」와 「은진중학교」 「해성학교」등이 생겼다.그러나 조선인 신식학교로는 1906년에 이상설선생이 세운 서전의숙이 처음이다.1892년 한글로 번역된 찬송가가 나오기 전까지는 한자발음으로 불렀다.예를들면 「예수 사랑하심」을 「주 예수 아이워」와 같은 경우다. 이렇게 창가는 찬송가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보급되면서 찬송가 곡조에 새 가사를 바꾸어 넣어 부르는 일이 많았다.그리고 나서 찬송가와 비슷한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특히 지적할 것은 중국조선족이 세운 사립학교 창가과에서의 반일사상을 담은 새창가 개발이었다.예컨대 당시 집안현의 광성학교에서 사용한 창가교재에는 「모험맹진가」 「운동가」등이 있었고 통화현의 배달학교 창가교재에는 「학도가」 「세계이주가」 「부모의 은덕」등이 있었다.전체적으로봐서 두 주류의 의도가 있었으니 하나는 반일사상을 고취시키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지식을 고취시키자는 것이었다. 용정은 나라 잃은 민족의 항일구국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중국조선족의 교육의 중심지였다.그러다보니 일본도 이곳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용정에 일본영사관을 세우고 겉으로는 중국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실제로는 독립운동을 탄압했다.1930년대로 접어들자 독립군의 조직과 활동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이 무렵 이정호가 만든 조선의용군행진곡이 불려졌다. ○작곡 정율성씨 유명 중국조선족 사회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중에 정율성(1918∼1976)이 있다.그는 40년 동안에 3백60여곡을 남겼으며 장르도 다양하여 가요·행진곡·아동요·합창곡 등으로 분류된다.1936년 중국의 남경에서 개최된 「5월문예사」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처녀작 「5월의 노래」로 데뷔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연변에도 「우리의 향토」「여성행진곡」「아침은 빛나라」등 해방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중가요가 나왔다.이어서 「토지 얻은 기쁨」「농민의 노래」「새아리랑」등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이 소작생활을 청산하는 기쁨을 노래하는 가요들이 나왔다.그리고는 한국동란으로 인해 북한에 동조하여 한국으로 진격하자는 내용의 가요들도 나왔다.그러나 1966년부터의 10년간은 문화혁명시기로 대수난기를 맞는다.대비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음악부분이 당하는 과녁은 민족전통예술분야였다.중국조선족의 예술활동이 비판을 받으면서 고난의 10년이 흘렀다.그리고 다시 원상을 회복했다. 연변을 처음 찾은 것은 1990년 7월이었는데 이 무렵은 이미 한국의 관광객이 붐비던 시기였다.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대중가요 테이프를 틀어가며 감상하고 있었다.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내게 「사랑의 종말」을 부르라고 강요받아서 모두 합창한 경험이 있다.지금은 노래방이 성시를 이루어 그 시절은 벌써 옛날이 되었다.
  • 한국전 참전용사 대표 접견/김 대통령(김대통령 순방여로)

    ◎「WTO총장」 김상공 지지확인/키딩총리 김영삼대통령은 호주 방문 사흘째인 18일 폴 키팅 총리와 정상회담및 공동기자회견을 가진데 이어 총리내외가 주최한 오찬과 하이든 총독내외가 주최한 국빈만찬에 참석하는 것을 끝으로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 참석및 아·태지역 3개국 순방 공식일정을 모두 마쳤다. ▷정상회담◁ ○…김대통령은 이날 총리 집무실이 있는 국회의사당 현관에서 키팅 총리의 영접을 받고 방명록에 서명한 뒤 응접실에서 날씨와 호주의 한국전 참전을 화제로 잠시 환담. 키팅 총리가 『대통령께서 오셔서 날씨가 맑고 화창하다』고 말하자 김대통령은 『정말 그렇다』면서 『조금전 전쟁기념관에 헌화하고 왔는데 딴 곳보다 한국전 참전용사비 앞에 꽃이 가장 많아 인상적이었다』면서 두나라의 혈맹관계를 강조. 단독회담장인 총리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두 정상은 기념촬영을 한 뒤 45분간의 단독회담을 시작. 단독회담에는 한승주 외무부장관,권병현 주호주대사,정종욱 청와대외교안보수석,유병우 외무부아태국장과 통역으로박진 청와대비서관이 배석. 단독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확대정상회담 배석자들은 회담장인 케비넷룸에서 대기하며 환담. 단독회담을 마친 두 정상은 곧바로 케비넷룸으로 이동,배석자를 소개한 뒤 60분 남짓 현안을 논의. 확대회담에는 단독회담 배석자 말고 김철수 상공자원부장관 김시중 과기처장관 이양호 합참의장 강재섭 총재비서실장과 청와대의 한이헌경제·주돈식공보수석과 김석우 의전비서관등이 배석. ▷공동기자회견◁ ○…정상회담 직후 국회의사당 회견실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는 60여명의 내외신기자들이 몰려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 우리말과 영어 동시통역으로 약 30분동안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두나라 정상은 지난 6월 서울과 보고르 APEC정상회의에서 만난 뒤 이번이 3번째 회동이라고 언급,개인적인 친근감을 강조. 특히 키팅총리는 모두발언에서 김대통령이 그동안 보여준 민주적 열정과 개혁정책에 존경심을 표시. 김대통령은 『캔버라에 오기 전에 시드니를 방문,국토가 잘 가꾸어져 있고 친절한 국민,깨끗한 도시에큰 감명을 받았다』면서 『오늘 회담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피력. 키팅 총리는 남북한관계에 대해서는 남북 당사자 사이의 대화를 통한 해결원칙을 강조.키팅 총리는 또 김철수상공자원부장관의 세계무역기구(WTO)사무총장 입후보에 대해 한국기자가 의견을 묻자 『아·태지역에서 WTO총장이 꼭 선출되길 바란다』고 지지를 표시. ▷총독주최만찬◁ ○…김대통령은 키팅 총리와의 정상회담과 공동기자회견을 마치고 휴식을 취한 뒤 숙소인 총독관저에서 하이든 호주총독 내외가 주최한 국빈만찬에 참석. 김대통령 내외는 숙소인 2층 거실에서 1층 접견부속실로 내려와 하이든 총독내외의 영접을 받고 잠시 환담을 나눈 뒤 만찬장에 입장,두나라 우호증진을 다짐하는 축배 제의로 만찬을 시작. 만찬이 끝난 뒤 김대통령은 하이든총독과 2층 거실 앞에서 작별인사를 나눴는데 김대통령이 묵은 곳은 총독내외의 거실과 복도를 사이에 둔 가까운 곳에 위치. ▷전쟁기념관 헌화◁ ○…김대통령은 한·호 정상회담에 앞서 이날 상오 켄버라시내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방문,그레이션 전쟁기념위원회 위원장및 켈슨 기념관장의 영접을 받으며 추념홀안의 무명용사비에 헌화. 김대통령은 이어 한국전 때 재3대대장을 지냈던 해셋 예비역 육군대장을 비롯한 한국전 참전용사 대표 5명을 접견하고 『한국이 가장 어려울 때 수고를 많이 해 줘 정말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시. 김대통령은 전사자 이름이 새겨진 회랑을 돌면서 특히 3백48명의 한국전 참전 전사자 비명 앞에서 해셋 예비역대장으로부터 『당시 제3대대가 가장 용감했으며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에 밀려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때 후퇴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언급.또 한국전 전시실에서 참전용사 대표들로부터 가평전투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때의 상황을 상상하고도 남는다』고 피력.
  • 대기업들/북반응 주시속 북행채비/남북경협 활성화 발표이후 동향

    ◎금강산 개발·경수로에 관심/현대/생필품분야부터 진출 전략/삼성/남포공단에 중기와 공동진출/대우/의류·전자 임가공생산 추진/럭금/북상황 감안 신중접근 태도/선경/금강산에 호텔 등 건설 협의/한화 재계의 발걸음이 바빠졌다.정부가 8일 우리 기업인들의 북한방문을 허용하는 것을 비롯한 「남북경협 활성화 1단계」 조치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현대·삼성·럭키금성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재계는 그동안 북한 핵문제로 동결됐던 남북경협 계획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대북투자,총수와 실무자의 북한방문,사무소 설치 등 경협 재개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중이다.아직 북한의 입장이 정리되지 않아,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구체화한다는 구상이다. ▷현대◁ 지난 89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 때 논의된 금강산 및 원산항 개발사업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정 명예회장은 정부의 허가를 받는대로 방북할 예정이다.지난 달 북한의 경협창구인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고민발)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정 명예회장의 방북에서는 철도 차량사업과 선박수리용조선소(원산) 건설에 대한 합작사업을 논의할 게획이다.현대건설은 북한 경수로 건설의 주간사로 참여하는 방안에 관심을 갖고 있다.지난 달에는 이춘림 현대종합상사 회장,박재면 현대건설 회장,김영일 금강개발 사장 등이 북경에서 이성록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 회장을 만나 추진중인 사업을 협의하기도 했다. ▷삼성◁ 북한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분야는 생필품을 주축으로 한 경공업 제품으로 보고 있다.경협이 본격화하면 생필품 분야의 생산 라인을 북한으로 옮긴다는 전략이다. 이건희 회장의 방북계획은 아직 없다.북한 진출에 관심을 보이는 삼성전자의 김광호 부회장과 삼성물산의 신세길 사장 등이 먼저 방북신청을 하는 수순을 고려한다. 유망 분야로는 전자부문의 경우,TV·오디오·통신망·냉장고·선풍기·히터·전화기 등을 꼽는다.섬유에서 신사복·바지·티셔츠·숙녀복 등을 임가공 방식으로 생산한다는 전략이다. ▷대우◁ 북한측과 이미 합의한 남포공단의 8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김우중 회장은 지난 92년 방북,남포공단에 와이셔츠·블라우스·재킷·가방·신발·메리야스·봉제완구·양식기 등 8개의 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했었다.이중 일부에 대해서는 국내 중소기업과 함께 진출할 생각이다. 한 관계자는 『남포공단은 이미 우리정부와 북한측 모두로부터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남북경협이 재개되면 가장 먼저 성사될 것』이라고 내다봤다.김회장의 연내 방북도 추진한다.나진·선봉지역에 전자 및 자동차 부품공장을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럭키금성◁ 서두르지 않고 실리 위주로 접근한다는 입장이다.우선 의류 및 전기·전자 분야의 임가공 생산부터 시작할 계획.북한의 생필품난이 심각하다고 보고 비누·PVC·장판·의약품 분야를 시범사업으로 선정,중소기업과 연계 진출하는 방안도 모색한다.중장기적으로는 원유정제 및 석유화학 분야에도 투자할 계획이다.아직 구자경 회장의 방북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선경◁ 정부와 대북한 관계 진척 정도를 봐가며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구상이다.최종현 회장은 물론 계열사 사장의 방북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정부의 적극적인 대북 경협방안에도 불구,북한의 대외채무 불이행,북한내 편의시설 부족 등 문제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의류·화학·직물·신발·농수산물·비철금속·건자재 분야에서 교역가능 품목을 확대할 계획이다. ▷한화◁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에 참여,호텔과 콘도·골프장·스키장 등을 건설하기로 이미 북한측과 협의를 마친 상태.나진·선봉지역에 전전자교환기,농업용 폴리에틸렌 필름,플라스틱 가공제품 분야의 투자진출을 검토중이며,비옷과 라면을 임가공 방식으로 생산할 방침이다.김승연 회장을 비롯한 20여명의 방북을 추진한다. ▷쌍용◁ 당분간은 신발 임가공에 주력하고 북한측의 반응을 봐가며 사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두산◁ 압록강변의 중국 단동지사를 대북교역 창구로 활용할 계획.단기적으로는 섬유·수산 등 경공업 제품의 임가공 생산을,장기적으로는 맥주 및 음료공장을 건설할 방침이다. 이들 대그룹은 모두 교통·통신 등 시설이 괜찮고 정보수집과 북한관계자와의 접촉도 좋은 평양에 사무소를 설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 백두산 폭발(외언내언)

    「백두산은 조선산맥의 조산이니 3층으로 된 높이가 2백리요,가로로 퍼진 거리가 1천리에 달한다.그 정수리에 못이 있어 달문이라 일컫는데 둘레가 8백리다.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이다」 조선조 철종10년(1859년) 백두산을 처음으로 오른 김정호는 대동지지 서문에서 백두산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지금의 실측과는 많이 틀리지만 그때 사람으로는 그 장대한 모습에 압도되어 그렇게 측정했을 것이다.김정호가 달문이라고 한 못은 천지를 말한다. 백두산은 원래 활화산이었다.지질학자들은 2백77만년전에 이 산이 여섯번의 지각변동에 의해 형성된 이후 모두 3백58회의 화신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것은 네번뿐이다.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13년,1597년,1668년,1702년에 대폭발이 있었고 이로 인해 오늘의 천지가 생겼다고 한다. 천지는 남북의 길이가 4.4㎞,동서의 길이가 3.37㎞,둘레가 12㎞로 세계에서도 드문 큰 분화구다.백두산에는 16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이중 가장 높은 병사봉은 2,750m다.그동안 2,744m로 알려졌으나 지난해 9월 중국 길림성 지질연구소가 다시 실측한 결과 2,750m로 확인됐다.약3백년동안 휴화산으로 휴식상태에 있었지만 완전히 활동을 중지한 것은 아니고 미세한 폭발이 가끔 일어나 연간 3㎜정도씩 높아지고 있었다는 것이 지질학자들의 주장이다. 중국의 신화사통신에 따르면 최근 미국·독일·일본·캐나다 과학자들이 백두산지질을 조사한 결과 조만간 폭발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측했으며 「잠재적이고 재앙적 위험을 지닌」휴화산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한다. 지난 6백년동안 휴화산이었던 필리핀의 피나투보산이 91년 대폭발한 것을 보면 백두산도 폭발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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