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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도특설부대(압록강 2천리:25)

    ◎만주 군관출신 한인배치… 일제,대륙침략 악용/열하·하북 지역 팔로군 소탕이 주임무/해방후 귀국인사들 장군으로 출세가도/당시 소대장 마쓰모토소위는 박 전 대통령 설도 중국 동북지방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었을 뿐 한반도와 연결되었다.그래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특히 일제는 그 강점기에 중국 동북지방에 허수아비격의 만주국을 세워 통치수단으로 한국인까지 끌어들였다.그런 연유로 만주국 군부에도 한국인이 대거 참여했다. 그 만군군사조직에는 간도특설부대가 있었는데 목단강성 제6군관구의 지휘를 받았다.처음에는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1939년 조선인특설부대로 창설했다가 그 뒤에 간도특설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이 부대는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활동지역을 오늘의 길림성 일부지역인 간도 일대에서 열하와 하북지방으로 확대했다.전쟁말기의 주임무는 공산당의 팔로군 소탕이었다. 그러니까 만군에 들어간 한국인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해 싸운 셈이다.요령성의 성도심양에서 만난 주재덕(76)선생은 간도특설부대에서 근무한 조선족이다.1943년말부터 특설부대에서 정보를 담당했던 그는 지금 중국해방군 동북관리국 요령성 경제개발합작총공사 부총리로 일하고 있다.일본의 침략을 위해 그것도 공산당의 팔로군 소탕 일선에 섰던 인물이 요직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것이다. ○제6관구의 지휘 받아 그러나 이면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깔려있다.그가 털어놓는 인생역정은 파란만장했다.간도특설부대 정보요원에서 팔로군으로 투항,공산당 입당,전범으로 체포,석방이라는 명암의 세월을 살았다.이제야 양지로 돌아온 그는 간도특설부대 시절을 회상했다. 『특설부대는 대대병력을 가지고 있었디오.대대장은 중좌나 소좌였는데 보직은 일본인에게 돌아갔습네다.소대장은 준위에서부터 소위·중위들이 맡았댔디요.그 하위지휘관인 소대장만큼은 조선사람에게 줬지 뭡네까.모두가 창씨 개명을 해서 조선사람일지라도 일본식 성으로 불렀습네다.해방이 되고나서 한국에 돌아가 모두 장군이 됐다고 기래요.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고…』 대통령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그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키가 작고 야무지게 생겼던 마츠모토 소위였다고 말했다.소대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한국에서 나온 박정희관계 책들을 보면 그가 간도특설부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다는 기록은 없었기 때문이다.그가 만주군관학교 시절 창씨개명을 했을 때도 마츠모토가 아니라 다카시라는 성씨에 마사오라는 이름을 써서 한문으로 고목정웅이었다.그래서 일단 아귀가 맞지 않는 다고 생각하면서 주선생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특설부대에 들어가서 반년쯤 훈련을 받자 부대가 열하성으로 들어갑데다.조선말은 물론이고 중국말에 일본말까지 잘 하는 날 더러 정보반에 근무하라고 기래요.거기 근무하면서 가는 곳마다 대동아공영권건설을 역설해댔디요.포로를 심문할 때면 매도 대고….내손으로 사람도 죽였수다.한번은 팔로군과 접전이 붙어 멀리서 총을 쏘았더니 하나가 고꾸라집데다.그리고 심문하던 포로가 도망을 치길래 권총으로명중을 시켰디요.팔로군 정찰원 사광화·장립귀·등우룡은 총살 직전 정보반에 쓰겠다고 살려주기도 했디요.나쁜 일만 한 것은 아닙네다』 ○43년 열하성으로 이동 간도특설부대가 활동무대를 간도에서 열하성으로 옮긴 것은 1943년말의 일이다.그 무렵에는 목단강성에서 이동해온 만주군 보병 제8단 본부가 역시 열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다.한국에서 나온 여러 저술을 보면 당시 만군 소위였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만군 보병 제8단에 배속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만군 제8단도 간도특설부대 처럼 모택동휘하의 팔로군 토벌이 주임무였다.그러나 간도특설부대와 임무가 같았을 뿐 박정희소위가 특설부대에 근무했다는 대목은 없다. 그러면 주재덕 선생의 증언에 착오가 있는 것일까,아니면 한국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가려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어떻든 주재덕 선생이 들려주는 만군시절 박정희소위 행적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심지어는 박정희소위가 한때는 팔로군으로 투항할 뜻까지 품었다는 것이다. 『팔로군 포로를 오래 심문하다 보니 내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한다는 생각이 듭데다.그래서 포로로 잡힌 팔로군 정찰원을 통해 하북성 팔로군 이운창 사령한테 투항할 뜻을 전하는 편지를 몰래 보냈디요.그리고 나서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회신이 팔로군 정보망을 돌아서 왔디요.혼자 고민하다 조선사람인 가네카와 중대장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더니 동의하더란 말입네다.중대장 말이 내가 내부는 책임질테니 계속 팔로군과 접촉하라고 명령합데다.그러나 집단투항은 일본 헌병이 방해가 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네다.다만 나는 1944년 8월 하북성에서 혼자 투항할 수 있었디요.마츠모토 소위는 단기교육을 가서 부대에 없었던가 기래요』 ○팔로군으로 투항 속출 그래서 특설부대요원 주재덕은 1944년말에 팔로군이 되었다.팔로군에 겨누었던 총부리를 일제쪽으로 돌린 그는 해방을 맞고서 팔로군 이홍광지대 중대장으로 올랐다.그리고 공산당에 가입해 많은 공을 세웠다.1949년 모택동과 주재덕의 명령에 따라 이홍광지대가 북한으로 건너갈때 그는 심양에 그냥 남았다.심양에서 대퇴(제대)한 이후 요령성 본계로 들어가 화학공장을 맡아 경영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하더니 그에게 곧 불행이 닥쳐왔다.연변 공안당국에서 경찰을 보내 그를 체포해버린 것이다.1958년 연변법정이 내린 판결서는 어마어마한 벌을 내렸다. 「죄범 주재덕은 1943년 4월10일 만주국 간도특설부대에 들어가 정보반에서 1년4개월 근무하는 동안 하북성 팔로군을 토벌하는 등 일제의 주구로 갖은 악한 죄를 범하여 법에 의해 총살한다」는 것이었다.그는 25년간 전범으로 감옥에 살다가 문화대혁명 이후 탄원서를 내어 1983년 무죄석방되었다. 『사형판결은 청천병력 같은 것이었디요.죄를 졌다해도 투항해서 혁명을 위해 숱한 공을 세웠으니끼리 지난 일은 묵과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석방되어 나왔을 때 내 나이 예순세살이었수다.만약 내가 팔로군에 투항하지 않고 특설부대 요원들과 어울려 한국에 갔더라면 별 하나는 달았디 않겠습네까』 한국으로 간 특설부대 요원들은 출세가도를 달렸다.제1중대장 가네카와라는 김 아무개는 한국군 중장까지 올라갔고,경찰출신이었던 기포중대장 히로카와는 소장이 되었다는 것이다.특히 소대장으로 가장 유명했던 마츠모토 소위는 바로 박정희대통령이었다는 고집을 그는 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 하나를 더 곁들였다.간도특설부대는 해방소식도 모르고 팔로군과 접전을 벌였다는 것이다.특설부대 요원들은 뒤늦게 무기를 버리고 동북으로 가는 길에 조선의용군부대를 만나 의용군에 가담하려다 심사가 두려워 개별적 고향에 돌아갔다고 했다.
  • 철령의 성주 이씨들(압록강 2천리:24)

    ◎임란때 출병한 이여송은 성주 이씨 후손/부친 이성량은 요동일대 최고 군수권자/15세손 이영 홍무때 망명,철령에 터잡아/1994년 한국종친회서 소둔촌에 비석 세워 우리는 이여송(?∼1598년)이라는 역사인물을 기억하고 있다.명나라 제독으로 방해어왜총병관이 되어 군사 4만을 이끌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무장이다.그런데 왜 이여송을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려는지 더러 의문을 가질 것이다.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조선의 성씨인 성주이씨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성주 이씨들은 지금 요령성 철령시소둔촌에 많이 몰려 살고 있다.그리고 해마다 조상의 묘역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추모 대상은 이여송과 그의 아버지 이성량(1526∼1615년)등이다.한반도에서 대대로 살아온 성주 이씨의 한 갈래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 온 것은 명나라 연호로 홍무(1368∼1398년)연간이었다.성주 이씨 15대손 이영이 죄를 짓고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철령으로 피신해왔다는 것이다. ○소둔촌 주민 거의 이씨 이영의 망명 이후 제5대손이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이다.이성량은 집안이 가난하여 선조들이 세운 군공을 계승하지 못한 채 한 시절을 백면서생으로 살았다.그러다 입신의 기회를 얻어 요동 험산참장이 되었다.또 융경원년(1567년)에는 한 난리를 평정한 공으로 요동부총병의 자리에 올랐다.그 후에 몽골과 여진족을 쳐서 승진을 거듭한 끝에 만력2년(1574년)에는 요동 최고 군사지휘자인 요동총병 지위를 차지했다. 이성량 사후에는 여송,여백,여정,여장,여매등 네 아들이 총병관을 지냈고 다른 네 아들은 참장에 이르렀다.이 가운데 여백과 여매는 임진왜란 때 여송과 함게 조선에 출병하여 전공을 세웠다.그렇듯 이씨 가문이 거머쥔 병권은 대단하여 그들을 모함하는 글발이 황제에게 전해지기도 했다.그들은 실제 도읍의 한 변방을 호령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틀림 없었다. 이씨 가문의 권세가 당시 어떠했는가는 요령성 철령시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에서 확인되었다.소둔촌에서 약간 떨어진 산기슭 그의 묘소 입구에는 돌조각 사자상이며 석인상이 두 줄로 가지런히 늘어섰다.규모는 비록 작아도 북경 팔달령에서 정릉으로 가는 사이에 자리한 선도를 연상케 했다.선도처럼 보이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 비석이 있다. 이성량을 기린 대리석 비석은 지난 1994년 한국의 이씨종친회가 세운 것이다.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지위가 오늘날 같이 높지 않았더라면 과연 비석을 세우도록 허락했을까.여기 사는 이씨들도 한국이 보잘것 없는 나라였다면 조상에 대해 별 집착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백여 가구 1천여명의 주민들 가운데 70∼80%가 이씨라는 이 소둔촌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가 성주 이씨를 자청했다.그러면서 비록 한족으로 살아가지만 한국의 발전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철령현 당시 부현장 자리에 있다가 퇴직한 이유한(67)노인도 성주 이씨라고 했다.그래서 철령 이씨종친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떳떳하게 성주 이씨를 내세울 수 있게 된 오늘의 처지를 고맙게 여겼다. ○누루하치와 사돈지간 『나 자신도 그동안 뿌리를 숨기고 살았습네다.그저 한족으로 행세한 거디요.집안 노인들이 가끔 이성량을 이야기하면서 성주가 본이라고떠들면 핀잔을 줬지 뭡네까.그러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부터는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절로 한국과 성주란 말이 튀어나옵데다.그 전엔 창피스럽던 것이 자랑스러워지더란 말입네다.그래서리 퇴직하고 나서 좌상들과 상의해서 종친회를 꾸몃디요』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는 어엿했다.봉분도 제법 커서 이성량이 묻혀있는 무덤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그런데 선뜻 납득할 수 없는 몇가지 의문점이 머리를 스쳤다.이씨들이 조상에 관심을 둔 것도 근간의 일이고 역사적으로 청나라를 일으킨 누루하치가 이성량의 무덤을 파엎었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량은 살아 생전에 누루하치와 떨쳐버릴 수 없는 악연을 맺었다.이성량이 요동총병관으로 제수되었을 때 누루하치는 15세 소년이었다.그런데 이성량은 자신의 수하장군이었던 누루하치의 할아버지 창안과 아버지 타거를 부하의 밀고로 죽여버렸던 것이다.그 해가만력11년(1583년),누루하치는 21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있었다.천명3년(1618년)반기를 들고 마침내 명나라를 뒤엎은 누루하치는 「7대 원한」을 갚겠노라 선언했다.이성량이 첫째로 꼽힌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씨 가문과 누루하치는 사돈간이었다.이성량의 둘째아들 여백이 바로 누루하치의 조카딸을 첩으로 들였던 것이다.그러나 원한이 사무친 누루하치는 천명4년 철령성을 함락하고 이성량 일가를 붙잡아들였다.당시 해를 당한 이씨들 가운데 역사에 기록된 인물만도 24명에 이른다.누루하치 복수의 그물에 든 사람들은 죽고 더러는 도망쳤다.그래서 산동성 임저지구와 광동성 번우지구,사천성,북경 등지에도 성주 이씨들이 지금 살고있다. ○상당수 요직에도 진출 누루하치는 오늘의 중국 동북지방 쪽을 우선 통일하고 나서 수단을 바꾸었다.성주 이씨들을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다.그 결과 강희(1662∼1722년)말년 청나라 왕조에서 7품 이상 벼슬을 한 성주 이씨는 자그마치 1백여명이나 되었다.요동시단의 삼노의 한 사람인 이개는 많은 시를 썼고 「상서」등의 역사책을 편찬했다.그의 저서들은 강희말년에 나온 거서「사고전서」에 수록되었다.그리고 태원지사를 지낸 이청서는 서예에 조예가 깊어 그의 「고보현당법서」네권은 지금도 중국 서법의 모범이 되고 있다. 성주 이씨들은 수 백년이 흐른 지금도 만만치 않은 존재이다.철령지구의 경우 현급 간부 14명,국급 간부 13명,과급 간부 18명이 성주 이씨로 되어있다.이들은 지난 1991년에 성주이씨 종친회를 조직하고 한국의 성주이씨 대종회와 정상적인 교류를 해왔다.그리고 「철령성주이씨보계」,「이성량종족역사기년」,「한국성주이씨중국파굴기」등을 펴냈다. 그래서인지 요령성 북령시에는 중국에서 성주 이씨를 명문으로 일으킨 이성량의 흔적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이성량과 같은 봉건 착취계급의 유산이 문화혁명과 같은 난세를 견디어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정도였다.그 하나가 명나라 신종이 명하여 만력8년(1580년)에 세운 공적비 석방이다.높이 9m,너비 13m의 누각형인데 「진수요동총병겸 태자태보령원백 이성량」이라는 글발 등이 들어있다.그리고 용문을 뛰어넘는 잉어,여의주를 굴리는 용,사슴과 꽃 등을 새겨 석방은 호화롭기 그지 없다.명나라 때 중국대륙 동북방에는 분명히 「이성령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적이기도 했다.
  • 단동시 영화산기슭 항미원조기념관(압록강 2천리:23)

    ◎한국전 유물 1천여점 10곳에 전시/부지 18만㎡에 연건평 1만2천㎡… 58년 건립/김일선·모택동 친필서한·명령서등도 전시/영웅실엔 전사한 모택동 맏아들 석고상도 중국과 북한이 손을 잡고 치른 한국전쟁을 통해 오늘의 단동시인 당시 안동은 영웅도시가 되었다.그로 인해 1958년 9월 중앙문화부의 비준을 거쳐 안동에 이른바 항미원조기념관이 세워졌다.이 기념관이 오늘의 모습으로 확장된 것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 93년의 일이다.기념관의 확장은 19 83년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단동(안동)에 들른 중앙군사위 부비서장 홍학지의 주선으로 실현되었다. ○등소평 친필 든 탑 세워 항미원조기념관은 단동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영화산기슭에 있다.글자 그대로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북한)을 원조한 전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의 현판은 당시 중국인민항미원조총회 곽말약(곽말약)이 썼다고 한다.18만㎡나 되는 부지에 1만2천㎡에 이르는 건물을 지었다.그리고 지난 1953년에는 등소평동지의 친필이 든 높이 53m의 탑을 세웠다.탑높이 53m는 1953년의 정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기념관에는 10개의 전시실을 두어 한국전쟁에 관한 1천1백8건의 문물이 전시되었다.이 가운데 주목을 끈 자료는 김일성이 모택동주석에게 보낸 친필서한이다..연합군의 반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중국의 지원을 간곡히 요청한 김일성의 친필서한은 여러 자료 가운데 백미인지도 모른다.김일성 서한 옆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조직을 채근한 모택동의 친필 명령서가 나란히 진열되었다. 그러니까 대륙의 거인이던 모택동의 휘필 한점은 결과적으로 중국을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작한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그 명령에 따라 1백만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화속으로 뛰어든 것이다.장백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한 조선족 서군(65)선생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당시 중국지원군 참전상황이 잘 드러난다.19 50년 당시 장백현 공청단위원회 선전부장이던 그는 한달 훈련을 받고 중국지원군 고사포부대 제1사 제1탄소속 부중대장으로 참전했다. 『가을이 깊을대로 깊은 10월19일로 기억하지비.그날밤에 안동을 떠나 장전하구로 와서 이내 압록강철교를 건넜수다.극비의 행동이라 중국말도 못하게 했고 중국을 떠날 때 글이 있는 물건은 못 지니게 했구마.삭주를 거쳐 평안남도 북진에 도착한 것이 10월28일인가,그렇지비.그날밤 거기서 5리쯤 떨어진 영봉에서 우리 지원군과 미군이 첫접전을 붙지 않았겠슴둥.그게 운산전투였지지비』 그 운산전투에서 미군은 3일간 포위되었다.11월1일 미군이 포위망을 뚫었으나 지원군은 미군 2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그 무렵에 지원군을 「38군」이라고 불렀는데 모택동이 「만세 38군」이라는 친필까지 내려 전공을 치하했다.그러나 지원군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특히 서군선생이 소속된 고사포부대는 박살이 났다.장비가 일본군이 쓰던 것이라 포탄이 포신에서 발사되어도 12초가 지나야 터졌다.그런 상황이어서 미군의 포격과 공습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서군선생이 소속한 고사포부대는 12월25일 압록강을 다시 건너 요령성 금주시로 철수했다.거기서 소련제37.85포로 재무장하고 이듬해 3월18일 집안을 거쳐 만포로 건너갔다는 것이다.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 비해 모든 장비가 열세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에서도 확인되었다.기념관내 공군진열실에서 본 쌍방의 공군장비에서는 너무 엄청난 차이가 났다.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전체 전투기가 2백대도 안되었지만,연합군비행기는 1천2백대였다는 것이다. ○연합군 비해 장비 열세 1951년 3월15일 지원군 공군사령부가 안동에 창설되었다.사령원은 유진이었는데,더러 미그15기가 F84 미군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그러나 공중전 전과는 미미한 것이어서 조선인민군과 함께 대공포화에 중점을 두었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에 사는 김창권(66)씨는 전쟁 때 고사기관총소대에 복무했다.방호산이 사령으로 있던 조선인민군 제5군단 12사 1연대 1중대 고사기관총소대 사수이던 그는 당시 활동상을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고사기관총소대는 대우가 달랐디요.일반전투원은 하루 배식량이 8백g이었는데 우리는 1천g이었단 말입네다.12.7㎜ 소련제 고사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재수가 좋으면 적기를 명중시켰디요.함경남도 함주군에 주둔할 때니끼리 1951년 1월18일 오전쯤 됐을 겁네다.미군기 한대가 저공으로 공격해와서리 갈겼디요.그거이 명중되어 처음 한대를 잡고서리 뒤에 두대를 더 잡았디 뭡니까.그래서리 전사영예훈장 2급을 받았댔습네다』 그에게는 일생동안 무료치료에 자식의 대학진학특전 등이 돌아왔다.그러나 중국으로 오는 바람에 한때 무효가 되었으나,지난 1987년 전공을 다시 인정받아 지금은 매달 3백원씩 연금을 받는다는 것이다.그는 전쟁을 회고하기를 떴다하면 미군 비행기고,아군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말로 대신했다.그렇듯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북한은 물론 중국쪽 국경지대에도 낙하산부대들이 투하되었다. 1952년 11월15일 백두산일대에 낙하산병이 투하되자 장백·임강·무송현이 발칵 뒤집혔다.경찰과 민병대가 동원되어 5주야를 산을 수색했다.이들에 의해 1명이 사살되고 15명을 포로로 잡았다.「장백현지」를 보면 이보다 앞서 1951년 6월29일 낙하산 침투병을 잡는 데 공헌한 장백현 12도구 사람 채후남(1888∼1974년)이야기가 인물록에 나온다.채후남은 마을에 살다 행방불명된 김형길이라는 청년이 낙하산으로 떨어져 이미 이사한 어머니를 찾아 숨어든 것을 신고했다는 것이다. ○관광·참배객 줄이어 항미원조기념관 맨 위층에 마련한 전쟁묘사공간 「청천강전역」은 스케일이 엄청 컸다.그림과 실물조각,조명과 음향이 한데 어울린 이 공간은 높이 17m,너비 1백32m나 되었다.마치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그 공간을 넋잃은 듯 바라보는 노인이 있어서 말을 걸어보았다.아니나다를까,전쟁에 참가했다는 노인이었다.자신을 평안북도 창성 태생으로 지금은 단동시에 사는 조선족 최정근(69)이라고 소개했다. 『은산전투를 마치고 청천강으로 나갔다.나는 포병이라 부근부대를 뒤따라 조을리에 이르니 전투가 끝났다고 그라데…,시체가 즐비해서 밤이면 얼어서 뻣뻣한 미군시체를 바람막이로 쌓아놓고 잠을 잤디 않았갔수.죽은 미군 신발을 벗겨 신는 것은 약과고 속옷까지 벗겨 입었으니 원….손을 옷속에 넣으면 이가 한줌씩 잡혔으니 별도리가 없었디』 전쟁은 가혹한 것이었다.항미원조기념관 영웅모범열사실에는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의 석고상이 전시되었다.지원군사령부 근무중 미공군 폭격에 사망한 그의 유해는 북한에 묻혀 있다.어떻든 전쟁은 비극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항미원조기념관은 전쟁예찬이 아닌 전쟁억제에 더 큰 비중이 깔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 6·25와 단동시(압록강 2천리:22)

    ◎폭격에 끊긴 신의주행 철교는 관광명소로/전쟁발발 2개월 뒤부터 미군기 공습피해/중국지원군으로 참전… 눌러앉은 한인 많아/저목장에 화재잦아 일명 “화도”… 한국전으로 “이름값” 압록강 우안에 자리한 요령성 단동시는 중국에서 제일 큰 인구 70만의 변경도시다.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장장 7백90㎞를 흘러 내려온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금강산을 등지고 있다.단동시는 이름 그대로 「붉은 동방」이라는 뜻을 지녔거니와 중국 변경의 사회주의 혁명화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당나라 때 안동도호부관할지역이었다는 점과 연관시켜 1965년까지는 안동으로 불렀다. 단동에서 압록강 건너를 바라보면 북한땅 신의주다.「모진 사람 곁에 있다 벼락 맞는다」는 속담처럼 신의주를 가까이 한 탓에 한국전쟁 당시 피해도 꽤 입었다. 예부터 저목장에 불이 자주 나 「불의 도시」(화도)라고도 했는데 특히 한국전쟁 때 그 이름이 적중한 셈이다.그리고 19 50년이 저물면서 한국전쟁에 참가한 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도시여서 「영웅도시」라는 칭호도 가지고있다. ○30년전 지명은 안동 단동은 어떻든 간에 한국전쟁에 피해를 입어 그 전쟁의 흔적이 아직도 멀리 보였다.당시의 안동∼신의주를 잇는 철교가 신의주쪽으로 절반은 교각만 앙상하게 남게 된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다.단동시에서 펴낸 「단동시정」을 보면 한국전쟁에서 입은 피해기록이 나온다.「1950년 9월22일 미군 비행기 1백여대가 신의주를 폭격,압록강대교를 끊었으나 안동철도분국에서 그날 밤 10시에 복구했다.그러나 1951년 2월 폭격에 너무 심한 손상을 입어 운수가 중단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국전쟁 때 미군기의 단동시 첫 폭격은 전쟁발발 2개월 뒤인 1950년 8월27일에 있었던 것으로 「단동시정」은 기록했다.이날 하오 4시40분 B­52폭격기 두대가 시내 랑두비행장 상공에 날아와 약 2분여 동안 기총소사 하는 것으로 시작된 첫 공습의 피해는 노동자 3명 사망과 19명 부상,자동차 2대 파손으로 집계되었다.또 같은해 9월22일 두번째 공습에는 B­29 중폭경기 한대가 떠서 12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이 공습으로 2명이 죽고 28채의 집이 무너졌으며 폭음으로 파손된 집도 3백여채를 헤아렸다는 것이다. 오늘 날의 단동은 평화도시다.북한의 국경도시 신의주와는 사뭇 다른 도시인 것이다.그래서 전쟁으로 끊어지고 기관포탄이 무수히 박힌 단동쪽 압록강철교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광명소가 되었다.특히 몰골사납게 교각만 앙상한 신의주쪽의 전흔은 전쟁이 남긴 교훈을 보여준다.10원씩을 주고 절반쯤 건너간 철교 위에서 한국전쟁 당시 중국 지원군 번역관으로 일했다는 김인형(69)선생을 우연히 만났다. ○요양원서 만나 화촉 그는 경북 의성 태생이었는데 전쟁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전쟁이 나면서 인차 남한 전체를 점령하는 줄 알았지.그런데 시월 잡아서 부터 조선 피란민과 군인들이 중국으로 물밀듯 들어오는기라.그해 5월 성간부학교에 들어가 다섯 달을 공부한 나는 지원군 번역관으로 일했지.통화에서 겨우내내 조선인민군과 피란민속에 묻혀 살다 보이 눈코 뜰새가 없데. 중국 변경이 전쟁에 시달리는 판이었으니 강 건너 북한땅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장백·임강·집안·관전·안동(단동)지역 맞은편 북한땅 혜산·중강·만포·삭주는 미군기폭격에 불바다를 면할 날이 없었다.임진왜란 때 의주에 통곡동이라는 동네가 하나 생겼다고 하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압록강유역 북한땅 모두가 통곡동이 되었다. 단동에 살고 있는 윤옥순(65)씨는 전쟁이 나던 해 겨울 안동의 중국지원군병원에 근무했다.함북 무순 태생으로 16살부터 동북해방군에 참전한바도 있는 그녀는 당시의 참상을 몸서리치듯 털어놓았다. 『부상병들이 들것에 실려 매일 쏟아져 들어왔지비.팔다리가 끊어지고 코가 떨어진 사람,사지가 다 날라가 덩그러니 몸뚱이만 남은 부상자들도 있었구마.몸뚱아리나마 남은 부상자들은 애기 눕히듯 보자기에 싸서 한 침대에 넷씩을 눕히기도 했슴매.새파란 나이에 죽기가 원통해 발악하는 걸 보면 불쌍해서 같이 울기도 했지비.공습경보가 울리면 부상병을 업고 방공호로 뛰어가는 일을 얼마나 했는지….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원망스럽더구마』 안동은 한국전쟁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얼떨결에 북으로 올라온 남쪽의 사람들이안동에 들어왔다가 주저앉기도 했다.북으로 가기도 싫고,그렇다고 남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이방인들이었다.단동에 머무는 동안 그런 처지의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경북 영천군 고경면이 고향인 최정순(64)씨도 그런 사람이다.지원군병원 간호원이었던 그녀는 한국군과 미군포로 부상자에게 까지 남다른 애정을 쏟은 것 같았다. 『인민군과 중국지원군 뿐 아니라 국군과 미군 부상병까지 들이닥쳤지예.인민군 부상자들은 포로들을 보면 때려 죽인다고 날뛰어 병동을 구분했십니더.미군에게는 빵과 같은 음식을 주었는데,처음에는 독이 들었는 가봐 안먹데예.그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가 먹어야 그제사 입을 댔십니더.어떤 한국군은 우리 병원에서 다리 절단수술을 했는데 수혈할데가 없다 아닙니꺼.그래서 내가 두 번이나 피를 주고 대소변도 받아내고….업고 다니며 영화도 구경시키곤 했십니더.상처가 아물어 포로수용소로 가는 날 그렇게 울더니…』 단동시 오룡배 영예군인 요양소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박명심(66)씨도 남한 출신이다.전쟁전까지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살았다.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군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2학년 때 6·25를 맞았어요.전쟁전에 이미 지하혁명조직에 가담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요.인민군에 있다가 후에 중국지원군 20병퇀 67군 정치부로 전속되어 전선으로 갔어요.선전방송 임무를 맡고 일하는데 참호에 포탄이 날아들어 그만 허리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지 뭡니까.53년 7월21일 안동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지금까지 요양원에 살고 있습니다』 ○44년째 이산의 아픔 박씨의 남편도 두 다리를 잃은 불구자다.남편 위덕렴(65)은 한족으로 중국지원군 116사 346퇀 통신병으로 전쟁에 참가해서 큰 부상을 입었다.그가 1954년 안동요양원에 들어와서 서로 만난 이들은 이듬해 10월 결혼했다.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다.박씨는 지난 94년 서울에 편지를 해서 조카들이 다녀갔다고 무척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한국이 놀랍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이야기로 들었다면서 날보고 서울에 가보았느냐고 물었다. 단동에서 만난 또 다른 여인 전명옥(67)씨는44년째 가족소식을 모르는 이산의 아픔을 갖고 있었다.당시 북한땅이었던 강원도 화천 태생인 그녀는 집 근처 임시 인민군병원에서 간호일을 돕다가 후퇴명령이 급히 내려 2백m 밖에 안되는 집에도 못 들르고 떠나왔다.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화천이 남한땅이 되고,가족소식을 모르는 채 살고 있는 것이다.
  • 지도층인사 망명 최대한 수용/북 민간인 「엑소더스」 우리 대책은

    ◎“정권 이반현상 표현”… 거취곤란 없도록 처리/「무더기 탈출」 주민은 유엔 등 거쳐 받아들일것 북한을 탈출,망명을 요청하는 북한인에 대한 우리정부의 대책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지도층인사의 망명에 대한 대응책이고 또 하나는 일반주민의 탈북러시에 대한 대비책이다. 정부가 이처럼 이중적인 분류를 하는 것은 지도층인사와 일반주민의 지위를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다.그들의 망명동기와 그에 따른 파장이 다르기 때문에 대응책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선 지도층인사의 망명은 정치적인 이유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이들은 북한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거기에서 불만이 나온다.이번에 망명한 차성근씨나 최수봉씨도 『자유로운 남한에서 살고 싶어서 왔다』고 밝혔다.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의 최고권력자들로서는 이같은 고위층의 이반현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일일이 처형할 수도,내버려 둘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정부는 북한지도부의 망명요청이오면 적법한 절차를 통해 최대한 수용한다는 방침이다. 일반주민의 북한탈출은 대부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촉발된다.「배고픔」은 이들의 움직임을 집단적이고 맹목적인 성격을 갖게 한다.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시베리아벌목장을 탈출한 북한노동자 수백명이 옛 소련지역을 헤매며 서울로 가는 통로를 찾고 있고,중국과 국경을 접한 북한지역의 주민은 집단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일단 정부로서는 한꺼번에 이들 모두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북한정권을 크게 자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밖으로 드러나지 않게,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등의 필요한 절차를 거쳐 차근차근 받아들인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남한으로 온 북한동포를 지원하는 법체계도 정비중이다. 그러나 북한주민의 대규모 탈북이 일어나 북한당국이나 우리정부로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따라서 정부는 대규모 탈북자를 한꺼번에 수용해야 하는 상황까지도 대비하고 있다.
  •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기구한 삶 오학증씨(압록강 2천리:21)

    ◎북한으로 피신… 강제송환돼 감옥생활 11년/79년 출옥후 개가한 아내 수소문해 재결합/독립군 출신 부친도 반동으로 몰려 개죽음 요령성 단동시 조선족소학교 아파트에서 신경질환으로 만년을 보내고 있는 오학증(64)선생은 기구한 운명을 산 사람이다.그 격변의 대륙에서 조선족 누구인들 정치이데올로기에 휘말려 모진 삶을 살지 않았을까만,그의 인생역정은 남달리 불행했다.그의 일생은 대륙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극의 드라마 그것이었다. 『제 아내와는 두 번을 장가 든 셈이디요.그래서리 아이들도 제대로 못 키우고….이자 나같이 사는 사람들이 다시 없도록 평안한 세상이 돼야 합네다.지난일들을 생각하면 다가 악몽이야요』 한 아내에게 두 번을 장가갔다는 말이 의아스러웠다.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는데,자신이 반우파로 몰려 감옥살이 하는 동안 아내가 살길이 없어서 한족 홀아비한테 개가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그가 1979년 1월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내는 이미 남이 되어 있었다.개가한 아내가 사는 곳을 수소문해서 한족영감에게 애걸복걸했다.그렇게 찾아온 아내다.그는 우파누명이 벗겨져 본래의 자리인 소학교로 돌아와 정년을 넘기고 지금은 학교가 내준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다시 살고 있다. 그는 요령성 환인현 사전자 태생이다.부친은 평북 구성 사람인 오성오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1930년대 독립군 해산과 더불어 관전현 보달원에서 교편을 잡았다.해방이 되자 부친은 교장 자격으로 손수 학교를 꾸리면서 일본 메이지대 출신 전봉천을 초빙해와 같이 일했다.그무렵 팔로군이 보달원에 들이닥쳤다.그리고 나서 이내 미국식 현대무장을 갖춘 국민당 군대가 밀고 들어왔다.부친이 교사로 초빙한 전봉천은 국민당 편에 서서 한국교민회를 조직했다. 『제 부친께서는 장래의 시국을 예견하신 것 같았습네다.국민당에 붙어서 보달원에 출장온 전봉천선생에게 이런 말을 했디요.이 사람아 자중하게.국민당이 기세당당하게 왔디만 조만간 팔로군이 또 올 것이라고….아니나 다를까 1947년이 되면서 국민당이 꺾이고서리 농촌 전체가 공산당 일색이 되고 토지개혁을 착수했디요.나도 당시 아동단에 참가하지 않았겠습네까.팔에 빨간천을 두르고 목창 개지고 보초도 서고…』 ○통화사범학교 진학 오씨네 일가의 비극은 이 때에 닥쳐왔다.공산당은 국민당과 가까운 사이였던 부친의 독립군 경력과 반동 전봉천과의 관계를 문제삼았던 것이다.『아무개가 반동이다.죽이는 것을 동의하는?』라고 물으면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슬 시퍼런 시대였다.부친은 공산당에 체포되어 몽둥이를 맞고 세상을 떴다.마을사람 김희묵은 빈농이었지만 억울하게 죽었다.옷을 깨끗이 차려입고 나온 통에 그를 부농으로 착각한 공산당이 조리질을 돌려 죽여버렸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오학증선생의 어린시절은 불우할 수밖에 없었다.중학교 입학자격마저 잃었다.철저하게 계급을 따진 공산주의사회는 가갸 뒷다리도 모르는 빈농의 자식들 위주로 신입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그러니 학교 꼴이 말이 아니었다.공산당도 할 수 없이 중학교 시험제를 채택하게 되어 어린 오학증에게도 중학입학의 길이 열렸다.밭에서 가을일을 하다 학교로 달려가 시험을 치러 홍광중학에 들어갔다.한국전쟁이 터져 거의가 지원군으로 나갔지만 나이가 어려 면제를 받고 통화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사범학교 졸업이후 첫 부임지는 지금의 단동인 안동시 북광소학교.학교 당조직에서 자신이 중점 육성대상자가 될만큼 열심히 일했다.그러다가 1957년 반우파투쟁이 일어났다.교육정책을 바꾸어 한족과 조선족의 연합교육을 실시하는 바람에 교육의 질이 형편없게 떨어졌다.곧은 성질을 가진 오학증선생은 이를 시정해야 된다고 건의했다.그 건의가 화근이 되어 우파로 낙인찍힌 것은 물론 부친의 청산을 암암리에 보복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라는 모략까지 따라 붙었다. ○당국에서 이혼 강요 그에게 내려진 일종의 형벌은 혹사를 통해 정신을 바로잡게 하는 이른바 노동개조.월급은 취소되고 하루 1원57전을 받는 건축공사장에 끌려다녔다.1957년 1월에 결혼하고 신접살림을 차린 지 다섯달이 안되어서 일이다.비단공장에 들어가기로 되어있던 아내의 일자리도 취소되고 말았다.죽지못해 살기를 4년여 성상,1961년 우파 너울이 벗겨져 교사로 다시 복직되었다.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고 1966년 문화혁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그해가 중반에 접어든 6월22일 출근길에 자신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보았다.그러지 않아도 신경쇠약에 걸려있던 터라 병원진단서를 붙이고 학교를 쉬었다.그런 어느날 학교에 들어온 군대표로부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다음날 학교에 꼭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아무래도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날 관전현으로 올라가 압록강을 건넜다.북한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가 북한으로 도망친 것을 눈치챈 학교는 이를 당국에 고발했다.곧 북한당국에 연락되어 1주일간 신의주에서 구류를 살았다.그리고나서 중국으로 강제송환된 그는 15년형을 받았다. 『아내가 감옥으로 면회를 왔습데다.아들 둘 하고 세 돌이 난 딸애를 업고 왔디요.철딱서니없는 어린 딸이 제가 먹던 싸구려 과자를 쥐고 쇠창살 사이로 넣어주는데 고만 눈물이 쏟아집데다.두번째 면회때는 아내가 혼자와서 이혼을 제기하길래 거절했더니 대성통곡을 하고 애들의 앞날을 봐서리 이혼해달라는 것이었디요.그후에 감옥소 소장이 저를 대신해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강제 이혼하고 말았수다』 아내 김성란(61)씨도 평북 벽동 사람이다.시집을 가면 죽어도 그 집에서 귀신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터라 도리를 모를 까닭이 없었다.아이가 학교에 가면 새끼반동이라고 따돌리고 당국에서도 이혼을 강요해 별 도리가 없었다.막상 이혼을 하고 났더니 문화혁명 이후의 관행대로 산골로 내몰았다. 열세살과 일곱살짜리 아들.세살짜리 딸과 함께 내팽개쳐진 곳은 한족들만이 우글거리는 봉성현 백기공사산하 지리대대.살길이 아득했다. 그의 아내는 고생으로 살아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늙었다.남편옆에 앉아 훌쩍훌쩍 울기를 여러차례하고 나서 겨우 말문을 열었다.그 표정은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신경질환으로 고생 『제가 못된 여편네디요.아이들 하고 죽지 못해 한 일이디만….기래도 두 해를 버티다 한족 홀애비 백국영을 만나 재혼했습네다.저녁이면 아이들을 재워놓고 한참씩 울다가는 한족 영감옆에 누어잤디요.그런데 11년만에 무죄석방된 저 양반이 그 산골을 찾아왔디 뭡네까.저는 간염에 걸려 다 죽어가는 터디였디요.저 양반이 하루를 살더라도 복혼하자고 그럽데다.저도 한 마음이었수다.한족 영감도 인생들이 가여웠던지 저를 놔 주었디요』 그들이 재결합한 지도 어언 19년이 되었다.이산부부의 후유증은 아물지 않아 자신은 신경질환을 앓고 큰아들은 뇌종양으로 병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대륙의 몇차례 큰 바람은 이들 가족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른다.
  • 영원한 의병장 의암 유인석(압록강 2천리:20)

    ◎을미항일투쟁 실패 후 보달원에 은거/제천서 궐기… 한때 원주·단양일대 석권/청·러시아 방해로 의병활동 재기 좌절/한족들이 기념비·허묘세워 충절의 넋기려 요령성 관전현일대에는 19세기말부터 조산팔도의 의병들이 몰려들었다.이른바 서간도로 불리는 이 압록강유역은 일찍 항일의병은 동의 요람을 이루었다.그 지도자는 의암 유인석(1842∼1915)이었는데,1896년에는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 땅을 밟았다.1895년의 을미의병운동이 국내에서 실패하자 부득이 서간도로 들어온 것이다. ○작년 정부서 건립 그가 오래도록 살았다는 관전현 보달원은 이름그대로 가는 길이 멀었다.관전현 현성에서 80㎞나 되었으니,걸어가자면 먼 길이었을 것이다.지금도 승용차로 4시간이 걸린다.막상 보달원에 도착하고 나서 그가 숙영지로 삼았다는 고령지를 찾아가는 길은 더욱 멀었다.자동차로 고개를 넘어 혼하를 건넌 뒤 환인현 사첨자향으로 들어가 또 강을 따라 올라갔다.그리고나서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천신만고 끝에 고령지에 도착했다.유인석선생이 인솔한 의병들이 처음 자리를 붙이고 가솔들을 데려와 살았다는 고려구 골짜기가 동쪽 먼 발치로 보였다.의암 유인석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해 마을사람들을 따라 좁은 골짜기를 한참 올라갔을때 평평한 산언덕이 나왔다.거기서 천연의 바위를 기석으로 삼아 세운 의암기념비를 만났다.지난해 95년 5월 관전현 현정부에서 세운 이 비석은 너비 1m,높이 70㎝로 그리 크지는 않았다. 유인석선생은 본래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지만 18 95년 학맥을 따라 충북 제천 장담으로 거처를 옮겨 활약한 조선의 거유다.18 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그해 을미년 12월24일 제천에서 3천의병을 일으킨 그는 한때 제천·충주·원주·단양지역을 석권했다.그러나 관군에 밀려 서북지방인 황해도·평안도로 이동했다.서북지방에서 재기활동도 결국 실패하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숨어든 곳이 만주땅 서간도에 해당하는 요녕성 관전현 보달원이었다. 유인석선생과 보달원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그의 의병부대가 환인현 현재 서본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이후 오랜 유랑과망명생활을 하고 다시 돌아온 곳이 부달현이었기 때문이다.의병운동이 청국정부와 러시아정부의 방해로 좌절되자 보달원 방취동에 물러앉아 있었던 것이다.의병활동의 기회를 눈여겨보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한 그는 방취동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춘천 태생 조선의 묘비 그가 말년을 살았던 방취동은 비석이 서 있는 자리에서 서쪽으로 2∼3㎞정도 떨어졌다.지금은 인가가 없고 인적도 끊겼는데,그가 「우주문답」을 저술했다는 산굴과 집터만이 남아있었다.그리고 보달원 사람들이 아직도 유인석묘소로 고집하는 무덤 하나가 자리잡았다.19 30년대 유인석선생의 증손이 유해를 고향땅 강원도 춘천으로 이장했는데 무덤이라니….당시 후손이나 독립운동가들이 여기 살아 잘못 옮겨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보달원의 한족들이 유인석선생의 허묘를 실제의 묘소로 우기는 까닭을 늦게야 터득했다.허묘를 모를까 만은 그를 오래 우러러 추모하기 위한 고집이라는 것을….평안도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도의 아내 최씨가 일본 영사관원에 능욕을 당하고 자결했을 때 그가 글을 지어서 써 준 묘비까지 문물(문화재)로 지정할 정도였다.그 묘비 「조선열부해주최씨표적비」는 지금 환인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지난해 6월29일 관전현 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는 유인석학술사상연구소를 세웠다.평북 벽동군 태생인 최신화(67)선생을 소장으로 한 이 연구소에는 13명의 연구원을 두었다.그리고 유인석선생의 사촌형 유홍석선생 증손이자,현재 한국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인 유연익씨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이밖에 관전현 역사지명지판공실 상진생주임과 같은 한족 학자들도 연구소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유인석사상학술연구소는 중국 당대 역사상 첫 한국인 대상의 연구기관이다.연구소는 관전현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유역에 남아있을 유인석선생 반일활동사료를 발굴하고 있다.그러나 연구에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그의 문집을 아직 입수하지 못했다.그래서 연구소장 최신화선생은 그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유인석선생의 필적과 주석하셨던 고장은 국가 문물이 되었습니다.그런데 문집은 우리가 못 구했디요.선생께서 별세하신 뒤 문하생들이 문집을 정리해서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고 기래요.어떤 경로를 통해 그리 갔는지 몰라도 그 문집을 지금은 절강성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습네다.「의암문집」은 54권 29책이나 되디요.절강성도서관에 연락했더니 복사나 해가라고 기래요.부끄러운 말입네다만,복사비 5천불을 마련할 길이 없습네다』 지난해 5월 세번째 중국을 찾아온 광복회 강원도지부장 유연익선생이 기념사업에 써 달라고 노자에서 1천2백달러를 내놓았다.그도 1934년 요령성 무순시에서 태어나 무척이나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이다.사촌동생 유인석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와 항일운동에 참가한 유홍석의 증손인지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증조부로부터 부모까지를 일제의 손에 잃었다.기구한 운명을 산 독립운동가 후손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한국인 대상 첫 연구소 그는 지난 1994년 중국 방문길에 부친 유돈상의 묘소를 찾아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독립군으로 싸우다 일제에 체포되어 무순감옥에서 숨진 부친의 시신을 할머니 윤희순이 거두어 묻었다는 무순시 용봉 남산이 도시로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다행히 할머니 윤희순의 묘소는 당시 장례에 참석했다는 한족 영덕수(87)노인의 도움으로 찾아냈다.그리하여 남편과 자식을 중국땅에서 다 잃은 할머니의 골회는 고향 춘천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어떻든 강원도 춘천 가정리 유씨 일가들은 항일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걸었다.그런 가운데도 유인석선생은 충절을 지키면서 학덕을 쌓았다.오늘날 중국에서 그를 기리는 것을 보면 유인석선생이야말로 죽어서도 살아있는 불멸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 조선성씨 집성촌(압록강 2천리:19)

    ◎봉성­본계현일대 서·문씨들 “오순도순”/이주후 300여년 걸려 서가보·박보촌 등 형성/동성동본 혼인기피… 다른민족 아내로 맞아/조상숭배 대단… 혼례전 선조묘소 절하고 예식치러 요령성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왕래하자면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회랑이다.그래서 오가는 길에 주저앉아 눌러살기도 하고 일부러 찾아와 자리를 잡기도 했다.동아시아 역사와 무관치 않은 요령성 이유민은 대를 두고 많은 후손을 남겼다.오늘의 조선족과 크게 구별되는 이유민의 역사는 꽤 오래되어 요령성에는 조선 성씨를 가진 유명한 집성촌이 더러 있다. 서씨와 문씨가 많이 사는 요령성 봉성현의 서가보,박씨의 못자리판인 본계현 산성자향의 박보촌이 대표적 집성촌이다.박씨의 경우는 박보촌 말고도 개현 진둔향의 박가구가 또 있다.이들이 집성촌을 이룬 것은 약 3백∼3백50여년이 된다고 한다.그러니까 이유민으로 들어온 선조로부터 약10∼11대손이 조선 성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봉성현 서가보의 문씨 선조가 요령성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17세기 중엽이었다.서가보의 문씨가 현재 보존하고 있는 「문가씨보서」의 머릿말을 보면 내력을 잘 밝혔다.시조는 문서였는데 본래 조선인이었다는 것과 압록강에서 1백20리 떨어진 옥상좌동(평안북도 땅)에서 세세대대를 살았다고 기록했다.그리고 문씨 시조 문서가 청나라 순치연간(1644∼61년)에 시험을 치러 역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적었다. ○청나라 역관신분 정착 문서는 역관이 되었을 때 나이는 30살이었고 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요령성 봉성현 봉황성에 배치받았다.6품 통역관 직책으로 조선사절의 신분을 조사하는 일을 담당했던 그는 늘 후덕한 인상을 풍겼다.그리고 김씨와 나씨,박씨 등 세 부인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두었다.그 후손들은 1911년 신해혁명까지 한 자리에서 세습 통역관의 대를 이었다.이들이 봉성일대에 여러 문가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봉성현에서 진장을 지낸 윤희봉(35)씨 이야기에 의하면 문씨와 서씨 말고도 여러 조선 성씨를 가진 만족(만주)이 요령성에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현재 단동시 조선족문화관장인 그는 조선 성씨를 가진 민족의 생활상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만족들 중에는 최씨와 김씨,백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디요.집성촌은 아닙네다만,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네다.술자리에서 더러 자리를 같이 하면 자기 조상이 아무개 누구라면서 조선족 만난 것이 반갑다고 난리를 칩데다.그들 조상도 대개 문씨네 조상과 같은 시기에 건너온 사람들이디요.그러나 문씨와 서씨네 만큼은 조선의 냄새가 덜 합네다.문씨네는 초상을 당하면 흰상복에 삼띠를 두르고 여자들은 머리를 풀어 흰댕기를 매더란 말입네다』 그리고 본계현 삼성자향 박보촌에는 40가구가 박씨들이었는데 전체주민의 40%를 차지했다.박보촌은 만족어로 쌍하스마후다.17 25년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3백년의 이주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청나라 초에 박대와 박오가 땅을 부친 것이 동기가 되어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박보촌의 맥을 잇고 있다.지금 박보촌에 자리잡은 박씨네는 박오의 후손이라고 한다. 청나라 가경연간(1796∼1821년)에 만든 「박씨족보」는 박씨 자신들이 조상신을 모신다는 사실을 기록했다.이는 한족이나 만족이 모시는 신보다 하나가 더 많은 것이다.이 마을 박문수(89)노인은 어렸을 때 자신이 실제로 본 조상신을 기억해냈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통 넓은 바지차림을 한 노인이었다고 했다.노인이 기억한 조상신상이라는 것은 아마도 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보촌 박씨네들의 조상숭배 의식은 혼인풍속에도 나타났다.그들은 혼례를 올리기 이전에 먼저 고구려 고분에 재배분향하고 이어 박씨 조상묘소에 절을 올리고 내려와 예식을 치른다.혼례 전에 찾는 고구려 고분은 박보촌에서 3백여m 떨어진 산성유적 꼬우리광즈(고려방자)안에 있다.박씨의 조상들이 이주해온 이역타국에서 민족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한 흔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김·백씨 만족도많아 박보촌 박씨들은 장례식 축문에서도 고구려를 떠받들었다.첫 구절에 「당나라 백만 대군이 침입하매 연개소문이 이를 무찔러 쫓아버렸도다」(당국백만대군입침 연개소문격이지퇴)라는 말이 나온다.고구려의 영광을 예찬한 이 글은 후손들에게어떤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족보에는 동성동본끼리의 혼인 흔적이 전혀 없다.한족과 만족의 잡거지역에 살았던 터라 다른 민족을 아내로 맞았다.그럼에도 조선족 전통음식인 된장과 간장을 집집마다 담갔다.또 옷과 이불 호청에 풀을 빳빳하게 먹이는 습속도 그대로 간직했다.어른을 공경하는 전통예절 역시 철저히 지켜 집안 어른의 밥상은 작은 소반에 따로 차렸다. 조선의 성씨인 박씨가 많기로는 개현 진둔향 박가구가 단연 으뜸이다.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89가구 2백87명을 헤아렸다.심양∼대련을 잇는 일망무애한 요동평원에 자리한 이 마을 이웃에도 고려산성과 같은 고구려유적이 있다.조선의 글과 그림이 있는 옹기와 조선의 낫과 호미,3백근짜리 동종이 마을에 전해내려왔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지금은 돌절구 방아확 하나가 남아있다.그 절구마저도 깨진채 절반쯤 땅속에 묻혔는데,무심한 빗물이 확을 가득 채웠다. 마을 어귀에는 화강함 비석 하나가 서 있다.청나라 연호로 가경14년(1809년)에 박씨 가문의 6대손 박동국을 기리기 위해 아들 4형제가 세운 것이다.박경청이 보존하고 있는 족보를 훑어보았더니 모계도 4대까지는 조선족 이름을 적었다.그후로는 한족이나 만족의 이름이 섞여 나왔다.마을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면 한어로 『나도 조선족』이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을어귀에 박씨 비석 중화민국시기에 이 마을에 사는 형씨들이 마을 이름을 박가구 대신 형가구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있다.박씨들은 현에 진정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여 마을 이름을 지켰다는 것이다.한번은 좀 떨어진 다른 조선족 마을에서 안노인 둘이서 고사리를 꺾으러 박가구까지 갔는데 마을 박씨들이 집으로 불러들여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그리고 조선족 안노인들이 꺾어온 고사리나물 보따리를 10여리나 되는 정거장까지 등짐으로 날라다 주는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요령성 조선 성씨들의 집성촌에서는 지난 1982년 중국 총인구조사 당시 조선족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벌였다.그 결과 서가보,박보촌,박가구에 사는 조선 성씨를 가진 사람들 모두가 정부의 비준으로 조선족 대열로 들어왔다.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이 우러났다.
  • 부자마을 영수촌(압록강 2천리:18)

    ◎「인민공사」 설립… 제철 등 20개 공장 직영/이익금 주민복지에… 식량­주택 싼값 공급/병원·유치원 무료… 농민에 퇴직금 실시/340 가구 “한가족”… 범죄자엔 촌민자격 박탈 요령성 심양시 우홍구 조화향 영수촌.그 전설적인 인물 황용세가 살았다는 20간 벽돌 기와집은 폐허의 기념물마냥 간신히 몸꼴을 지탱하고 서 있다.이에 비해 길을 마주하고 자리한 5채의 아파트는 마냥 산뜻했다.그리고 가로수가 늘어선 아스팔트길 한 가운데를 분리선 대신 화단으로 꾸며 마을 인상은 정갈했다. ○1인당 연소득 5천원 영수촌은 하남성 탑하시 임경향 남가촌과 더불어 중국에서 소문난 공산주의 마을이다.남가촌처럼 「모택동 사상으로 모든 것을 통솔하자」는 따위의 요란한 표어가 내걸리지 않았을뿐 영수촌은 인민공사중심으로 뭉쳐있다.중국대륙전체가 모택동의 극단적 사회주의는 멀리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나가는 마당에 웬 인민공사란 말인가.신기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을 3백40호 1천3백여명의 인구 가운데 조선족은 1백50호 6백여명이고 나머지는 시버족과 몽골족이 차지했다.인민공사 자산은 논 7백무(2만1천평),양어장 5백무(1만5천평),양식장 3군데,양계장과 양돈장이 각각1군데로 되어있다.이밖에 전구공장,신발공장,강철제련공장등 20개 기업을 운영중인 인민공사는 특수전구공장 하나만을 한국기업과 합작했다.그러니까 개인소유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영수촌청사는 제법규모가 컸다.장백현이나 관전현 청사와못지 않은 5층건물이었는데,촌지부 당무실에는 가죽소파까지 갖추었다.벽에는 심양시에서 내어준 「모범촌」이니 「문명촌」이니하는 따위의 인정서와 부유한 마을이라는 뜻의 「소강촌」이라는 증서가 붙어있다.평안북도가 선대의 고향인 촌 당지부 김광일서기가 마을을 찾아온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난 78년 개혁개방정책이 나와서리 82년까지 심양시 모든 농촌에서도 개체화를 실시했디요.그런데 영수촌은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것입네다.지금 우홍구 양식국장으로 가 있는 한족인 서정봉서기가 위에서 지시한 도급제를 마다하고 인민공사를 지켰디요.그 무렵에 마을 소득은한사람 연평균 1백80원밖에 안됐댔습네다』 중국 전역에 개혁개방이 한창일 때 삼양시에 건축붐이 일었다.서정봉서기는 이른바 사원(모택동시대에 농촌을 인민공사화 하고 농민을 사원이라고 불렀음)들을 이끌고 사방에 널린 모래를 파서 외지에 팔았다.1982년 한해에 모래를 판 돈 30만원을 들여 인철공장을 세웠다.공장을 가동한 첫 해에 1백30만원의 이윤을 올려 그 돈으로 주물공장,육식품 가공공장 등을 세우는데 재투자했다. ○대학생 전원이 조선족 그리고 공업수익을 농업분야에도 투자하여 볍씨 발아실,육모실,이앙기,수확기,탈곡기를 갖추는 등 영농기계화를 서둘렀다.지난해 영수촌의 농공업 총생산량은 8천여만원으로 1인당 연간 5천원꼴의 소득을 올렸다.현재 농업에 종사하는 사원은 전체 노동력의 6%를 웃도는 30명이다.80년대 까지만해도 공장일을 선호했으나 기계화영농을 실현한 이후는 사정이 달라졌다.어디서일을 하든 매달 4백∼5백원꼴의 노임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들에 비해 돈쓸 이유가 별로 없다.식량의 경우 탈곡이 끝나면 국가 수매량을 팔고나서 나머지는 창고에 입고한 뒤 가공비나 보관비 없이 일정한 분량을 싼값에 배급받는다.또 주택은 아파트를 지어 시가의 33%를 쳐서 사원들에게 분양했다.본래살던 단층집들은 1간당 3천원을 보상해준 터라 오히려 아파트에 입주하고도 돈이 남았다.아파트도 여유가 많아 3개씩 가진사원도 여럿 있다. 겨울 난방비는 올해부터 1㎡당 4원을 책정했다.지난해 2원 보다는 비싸다고 하나 도시지역 18원에 비하면 거저다.그리고 병원도 공사에서 직영,치료비가 없는데다 소학교는 물론 탁아소와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 있다.다만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있다.다만 유치원에서는 식비 10원을 받는다.마을에 사는 학생들이 대학을 가는 경우는 연간 5백원의 장학금을 주는데,대학진학생 15명은 모두가 조선족이라 조선족들의 긍지가 대단했다. 중국에서 보기가 드문 농민퇴직금제를 도입한 이 마을은 촌에 호적을 둔 주민들이 나이만 차면 퇴직금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현재 퇴직인원은 1백20명으로 한해에 지급되는 퇴직금은 7만∼8만원에 이른다.그리고 지난 91년도에 18∼45살에 이르는 주민들을 모두 양로보험에 가입시키고 촌에서 보험금 40%를 보조해오고 있다.또 위지할곳이 없는 노인들에게는 돈을 대어 유료양로원에 보내는 것도 이 마을의 자랑이다. 토지나 기업을 집체화한 것은 물론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모델로 한 것이다.다만 영수촌의 집체화는 모택동이 계급투쟁을 앞세워 경제를 소홀히 한데서 온 총제적 빈곤에서 탈피했다는 점이 다르다.그러니까 튼튼한 경제기초 위에서 촌민의 복리를 우선하고 있는 영수촌은 모택동시대와 등소평시대의 장점을 혼합한 제도적 창신을 실현한 것이다.시장경제를 전적으로 배척한 전통사회주의도,그렇다고 몇몇이 기업을 독점한 전통자본주의도 아니었다. 김서기는 뼈 있는 말을 던졌다.『세상의 길은 많디요.부득부득 외통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없습네』라고….그러면서 자신의 마을을 자랑이라도 하듯 육유의 시 한구절을 읊조렸다. 「산이 첩첩/물이겹겹/길 없나했더니/버드나무 우거지고 매화만발한 곳에/또 마을이 있네」 영수촌의 여러민족은 한집안처럼 화목하다.절도나 도박등 나쁜 풍속은 물론 다른 형사범죄가 없는 마을이다.하남성 탑하시 임경향의 공산당마을 남가촌은 모택동 저서를 한달에 한번씩 학습하면서 자아비평을 통해 마을을 정화한다고 하나 영수촌은 그런 일을 하지않았다.영수촌에서는 다만 마을 기풍을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리고 연속적으로 못된일을 저지르거나 형사처벌을 받는 사람은 촌민자격을 박탈하고 있다. ○개인도 승용차 소유 김서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심시간이 기울었다.김서기와 함께 당서기와 촌장의 정용차인 일제 도요타 승용차에 올랐다.이 마을에는 80여대의 자동차와 트랙터를 가지고 기동운수대를 운영하고 있다.그리고 공장마다 몇대씩의 트럭과 승용차를 보유한 이외에 10여가구의 촌민들은 개인소유 승용차를 굴린다는 것이다.외길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향수촌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았다.
  • 「벼농사의 대부」 황용세(압록강 2천리:17)

    ◎황무지 수십만평 논으로 개간/중국 장작림 군벌 정부의 수리국장 설득/수로공사 지원받아 혼하물길 끌어들여/장작림 위기때 군량미 500가마 보내 보답 「만주땅 넓은 들에/벼가 자라네 벼가 자라/우리 가는 곳에 벼가 있고/벼 자라는 곳에 우리가 있네/우리가 가진 것 그 무엇이냐/호미 바가지 더 있는가/호미로 파고 바가지로 담아/만주벌 거친 땅에 볍씨 뿌려/우리네 살림 이룩해 보세」 중국 조선족에게 유전되던 1920년대 민요다.이 노랫말처럼 중국 동북땅 어디를 가나 논이 있는 마을을 들어서면 조선족이 살았다.그러니까 중국의 동북지역인 만주의 벼농사 효시는 조선족인 것이다.방죽 만들어놓으면 물고기 생긴다고 물이 있는 황무지에는 으레 조선족이 몰려들어 벼농사를 지었다. 압록강유역의 벼농사도 역사가 꽤 오래되어 거의 한 세기에 이르고 있다.18 95년 요령성 집안 팔왕조촌에서 처음 시작했다.이어 무순일대에서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포가둔에 자리잡은 송병주·김만리가 처음 논에 볍씨를 뿌렸다.19 06년에는 평안북도 벽동사람인 김시정이 시작한 이래 19 23년에는 심양일대로 벼농사가 번져 5천ha의 개간답에서 해마다 15만섬의 벼를 거두었다. ○연간 순수익 6∼7만원 오늘날 요령성에서도 벼농사 하면 조선족이 꼽힌다.요령성 안산시의 삼대자조선족진 형양기조선족진에 사는 박행관(37)씨는 소문난 벼농사꾼이다.자그마치 5백무(약 1만5천평)나 되는 논을 빌려 광작을 하고 있는 그는 요령성의 우수한 청년농민 10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해마다 비료값과 품삯이 뛰어오르고 국가의 수매가격이 보잘 것 없는데도 불구하고 연간 6만∼7만원의 순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요령성의 조선족 농촌을 도는 동안 새로운 인물 한분을 주목하게 되었다.벼농사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황용세라는 인물이다.해방 이태전에 작고했는데,그의 아들인 수복(수복·63)노인이 심양시 우홍구 조화향의 영수촌에 살고 있다.수복노인은 황용세의 넷째아들이다.맏이와 둘째는 중국에 살다가 고인이 되었고 서울에 살던 셋째는 영수촌을 다녀간 이후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수복노인은 유일하게 남은 황용세의 아들인 셈이다.영수촌에서 처음 만난 수복노인은 거두절미하고 아버지 황용세의 마지막 죽음부터 장황하게 털어놓았다.아버지의 죽음이 원통하다는 이야기였다. 『이 마을에서 십여리 떨어진 마전자마을에 수레거(차)자를 쓰는 차씨네가 살았다.그런데 논물을 가지고서리 우리집과 그집이 크게 다툰 적이 있었습네다.마침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일군 헌병대에 근무하는 차씨네 아들이 있어서리 우리를 걸고 넘어졌습네다.우리 아버지가 팔로군이었다는 것이었디요.그래서 아버지는 감옥에 들어가 숱한 매를 맞고 석달만에 나왔디만 곧 돌아가셨지 뭡네까.차씨네는 광복이 나자 한국으로 들어갔디요.헌병대에 있던 아들은 한국에서 장관을 지냈다고 기래요』 황용세는 드라마틱한 일생을 살았다.1990년 평북 벽동에서 태어나 한일합병 이듬해 부친을 따라 요령성 홍경헌 홍묘자로 이주했다.이후 봉천(오늘의 심양)교외로 이사했다가 농사를 짓기 위해 아주 눌러앉은 지역이 조화향 영수촌.개간할 황무지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주위 늪지대 물을 끌어올릴 재간은 없었다.그래서 수십리 밖 훈하(혼하)의 물을 끌어오기로 결심했다.그러나 수로를 내는 데 필요한 자금은 막상 한푼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중국 동북지방을 장악한 봉천의 군벌인 장작림(18 73∼1928년)정부 수리국에 「수전개발에 관한 청구서」를 냈다.수리국장은 성공이 불투명한지라 깔아뭉갰다.황용세는 수리국장을 직접 찾아나섰다.보잘 것 없는 조선족 농사꾼을 만나줄 리 만무했다.황용세는 생각다 못해 화려한 마차를 타고 집에서 나서는 수리국장의 출근길을 네활개를 펴고 누워서 막았다. ○수리국장 출근길 막아 그의 생떼질은 주효했다.수리국장은 황용세를 자기 사무실에서 만나준 것이다.수전개발의 타당성을 인정한 수리국장은 그 자리에서 서류를 작성했다.자금은 수리국에서 대고 공사를 실패할 경우 황용세가 죽음까지도 감수한다는 서약서를 붙였다.공사를 착공했을 때 한족지주들이 봇도랑을 낼 땅을 내주지 않는등 방해했으나 장작림 군벌정부에서 군대를 풀어 결국 완공했다.깊이 2m,너비 10m의 봇도랑으로 물이 흘러들어 영수촌일대 황무지는 옥토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1924년 북경의 군벌 오패부(오패부·1872∼1939년)가 3개군단을 풀어 장작림을 치는 사건이 일어났다.황용세는 조선족이 만주에서 살려면 장작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군량미 5백가마를 장작림군벌에 보냈다.중국인 지주와 자본가가 두 군벌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을 때여서 황용세의 군량미 기부는 장작림의 환심을 샀다.감동한 장작림은 『그 고려인 대표를 만나야겠다』고 해서 황용세를 불러들였다. 황용세는 회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차림으로 장작림을 만났다.훤칠한 체구의 황용세는 당당했다.그가 황씨라는 것과 요령성 홍경현 산골에 살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장작림은 더욱 감격하고 말았다.왜냐하면 장작림이 비적 두목시절 다른 패거리에 쫓겨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밭에서 들일을 하던 황용세 부자가 감춰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그이후 중국 동북3성 도독이 된 장작림은 홍경현을 참빗질하듯 황씨 부자를 찾았지만 찾아내지 못했다.그런 판에 황용세를 만났으니 장작림의 기쁨이 컸다. 장작림은 황용세에게 소원을 물었다.황용세는 의형제를 맺는 것이라고 했더니 장작림은 껄껄 웃었다. 『내,자네 나이 보다 열여덟이 많으니 아버지뻘이 아니겠는가.내 큰아들 학량과 의형제를 맺도록 하세』 장작림이 아들 학량과 황용세의 결의형제의식은 대단했다.당시 「성경일보」도 이를 크게 실었다.황용세의 세력도 막강해져 동북3성 실력자가 되었다.1928년 장작림이 일본군 소행으로 폭사하고 나서 학량이 동북군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다.그리고 1936년 장개석을 서안에서 감금하는 서안사변을 일으킨 학량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붙잡혔다.그런 와중에 몰락한 황용세는 친일파 차씨네와의 불화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새옹지마라고나 할까.황용세의 몰락은 공산당이 심양을 해방한 1948년 이전에 가문을 알거지로 만들었다.그래서 성분을 해방전 3년까지 본다는 공산당도 황용세의 아들들을 빈농으로 분류했다.
  • 중국화 되는 한인촌(압록강 2천리:15)

    ◎보산촌 1백여가구중 초가는 1채뿐/높은담·철대문·온돌방 없는 벽돌집으로/닭장·돼지우리까지 복 비는 주련 써 붙여/설 인사조차 재물일기 바라는 “공희발재”로 변해 압록강유역의 중국땅에서 조선식 초가를 만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연변 조선족 마을에서 보는 풍경과 사뭇 달라 조선족 제2의 개척지 보산촌도 예외가 아니었다.조선족 1백27가구가 사는 못자리판속에 조선식 초가집은 단 1채에 불과했다.평안도 초가였는데,중국식 가옥으로 짓기 위해 자재를 다 준비한 터여서 그나마 없어질 운명을 맞고 있다. 보산촌에 와서 며칠을 묵은 문영빈 당서기의 집은 전형적인 중국식 벽돌집이라서 담이 유난히 높았다.그리고 철판으로 대문을 달아 열릴 때마다 요란한 쇳소리가 났다.온돌방도 둘이었지만 방에 봉당이 달려있기 때문에 신발을 신고 드나들었다.조선족 생활 흔적이라고는 부엌에 걸어놓은 수입품 알루미늄 솥 하나 뿐이었다.그러나 옆에 걸린 철갑모처럼 생긴 중국식 솥들이 조선식 알루미늄 솥을 압도해버렸다. 문영빈 서기의 부인 최철순씨는 중국식 집에 사는 것이 그리 탐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조선족의 주거문화를 소에 비유한 그녀는 연변 조선족 토박이로 살다가 압록강쪽으로 시집을 와서인지 중국식 집에 불편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이었다는 것이다. ○공중변소서 신년인사 『처음 시집 왔을 때는 중국집이 안좋더구마.온돌이 봉당에 빼앗겨 좁으니까 추워서 솜옷을 입었지비.신발을 신고 드나들어 위생이 말도 아니고….친정 어머니가 딸네집에 왔다가 춥다고 이내 돌아갔지 믿둥.조선사람은 소마냥 쉴라면 앉고 누워야 편한데 중국식 온돌은 앉아도 걸터 앉지비』 사람들의 심성도 변하는 것일까.문영빈서기의 집에는 길하고 복되기를 기원하는 온갖 주련이 대문으로 부터 집안까지 가득 붙어있다.그것은 중국의 풍속인데,닭장과 돼지우리에도 주련을 써서 붙였다.주련은 한족의 음력 정월풍속으로 붉은색 종이에 금색 글씨를 가로 넉자,세로로 일곱자씩 대련으로 써 넣었다.주거용도에 따라 주련의 뜻도 물론 달라 별별 내용이 다 들어 있다. 대문에 가로 글씨는 부자로일어나 재물이 생기라고 「발부생재를 적었다.그리고 침실문의 대련 한 줄을 들여다 보았더니 재물을 불러들여와 더욱 늘어나라는 내용의 「영재내재가재보」라고 되어있다.더욱 웃으운 것은 닭장이나 돼지우리의 주련이다.돼지우리에 써 붙인 주련은 작은 돼지가 달마다 늘고(소저월월증),큰 돼지는 해마다 새끼를 나라(대저년년생)는 내용이다. 이 주련을 보고 상을 찌푸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모두가 박장대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 주련은 다 재물과 연계되었다.옛날 중국에서 식탁이 비었던 시절 설날에 함께 변을 보는 사람과 나눈 인사는 『식사를 했는가?』였다.왜 하필이면 변소가 신년인사 자리가 되느냐고 의아하게 여길지 모르나,중국에서는 거의가 칸막이 없는 대형 공중변소를 사용하고 있다.어떻든 중국 12억인구를 먹여살리자면 한국돈으로 하루 3조원이 필요했으니까,먹고 살기가 어려운 시대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가 풀렸다.중국에서는 지금 돈이 많고 적다는 사실을 근거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절이 되어설인사가 「삼가 재물이 일어 기쁘기를 바란다」(공희발재)는 식의 내용으로 바뀌었다.그러고 보면 중국식 주련은 멋이 아니다.한 푼의 돈이라도 모아 담장안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이 들어있을 것이다.실제 그런 생활로 돈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이 한족이다. ○푼돈벌이도 마다 않아 단동시에서 만난 중년의 한족은 압록강 건너 북한 땅을 자주 드나든다고 했다.북한에 사는 한족 화교들에게 장사물건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다.별 스러운 돈도 안되고 양쪽의 까다로운 해관(세관)검사가 번거롭지만,한 푼이라고 더 벌어보겠다는 생각에서 부부가 함께 다닌다는 것이다.혼자 가면 35원을 받는데,아내를 데리고 가면 두 몫을 운반해서 70원을 받는다고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나라의 땅덩이를 솥에 비유한다면 구 소련 다음으로 중국처럼 큰 가마솥은 없다.그만큼 담을 것도 많고 끓는 속도도 더디다.그래서 푼돈 벌이도 마다하지 않는 한족은 그렇다고 솥을 서둘러 채우는 일도 없다.솥을 채우지 않고 불을 지피는 일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임어당이 일찍 중국문화를 가리켜 「울타리문화」라고 한 까닭이 바로 여기 있지않나 하는 것이다. 나라는 장성을 쌓고 집은 담장을 높였다.그속에 사는 사람들도 역시 마음을 쉽사리 열지않는 가운데 나름대고 문을 닫았다.중국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엉큼하다」는 말을 서슴지않지만 사실은 「웅숭깊다」는 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높은 담벼락안에서 하는 일을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는 한족을 재평가하면 경망스럽지 않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령성 단동시 관전민족자치현 석호구향의 보산촌 사람들은 중국의 발전모델을 채택한 조선족이다. 요령성에 흩어져 사는 25만 조선족 가운데 극소수인 5백여명이 모여 잘사는 마을을 이룩했음에도 지금까지 소리소문을 내지 않았다.15년이나 바깥 세상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원인은 매스컴의 무관심에도 있다.그러나 더큰 원인은 먼저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조선족 습성에서 해탈한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5백여명이 부촌 일궈 한족의 심성을 헤아릴 만한 글귀는 닭장에도 있다.금닭이 가득한 우리라는 뜻의 「금계만권」이라는 주련은 그저 그러려니 했으나,「은단송국가」라는 주련을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은빛의 달걀을 나라에 바친다는 뜻을 담은 이 주련은 얼핏 허풍스러운 애국표어 처럼 보인다.그러나 한족의 깊은 속마음을 알고보면 누구나 수궁할 것이다. 한족은 전통적으로 나라와 집은 조화로운 관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해왔다.나라(국)와 가정(가)을 합쳐 국가라는 말을 만들어 낸 속뜻도 헤아릴만하다. 이는 집이 잘되면 나라가 부강해질 뿐 아니라 따라서 집도 넉넉해진다는 것이다.그래서 보산촌 사람들이 닭장에 붙여놓은 주련내용을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맛이났다.
  • 제2개척지 보산촌(압록강 2천리:14)

    ◎1인당 연소득 8백원… “조선족 부자마을”/20년간 65만평 개간… 곡물 연32만근 수확/137가구 482명 거주,교육열 높아 석학 많아/노인퉁소대 등 문화예술단 조직… 민속전통 보존 압록강유역의 길림성과 요령성에는 조선족자치현이 1군데,자치향이나 진이 16군데가 있다.자치현은 길림성 장백현이 유일하고 진은 길림성 집안시에 1곳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요령성에 분포돼 있다.그렇다고 해서 자치지역에 조선족만 사는 것은 아니다.한족과 만족·몽골족이 함께 살아가는 잡거지인 것이다. 그런데 요령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에 속하는 석호구향의 보산촌은 조선족 못자리판이다.비록 만족의 자치현이기는 하나 보산촌에 사는 한족과 만족은 「쌀의 뉘」와 같은 미미한 존재다.조선족이 1백37가구 4백82명인 데 비해 한족과 만족은 10가구 39명에 불과했다.모두가 파란데 하나가 붉다는 만록청중일점홍과 같은 조선족 마을이라고나 할까.보기드문 현상이었다. 보산촌은 망보산 자락 비산비야 지대에 자리잡은 오붓한 마을이다.관전만족자치현성과는 10리가채 못되었다.보산촌 당서기 문영빈(47)씨 집에 짐을 풀고 촌장 배일명(47)씨를 만났다.탱크부대 훈련단장을 지낸 그는 마을현황을 자세히 들려주었다.경작면적이 1.5㎦라는 것과 지난 1981년 현정부가 각지의 조선족을 이주시켜 마을을 만들었다는 사연 등을 이야기했다. ○평야지대의 보금자리 조선족의 마을 보산촌을 일구어낸 주인공 김창영(66)선생은 지금 요령성 단동시에 살고 있다.단동시 조선족노인협 부회장직을 맡아 만년을 보내고 있는 그는 1975년부터 관전만족자치현 상무(상임)현장을 역임하는 동안 보산촌을 세웠다.그는 일찍 보산촌지역에 욕심을 냈다.당시 보산촌일대는 군의 훈련장과 군량미 자급을 위해 개간한 수전지대가 있는 군사지역이었다. 그러나 논농사경험이 없는 군이 더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고 버려둔 상태였기 때문에 눈독을 들일 만했다.김부현장(김창영)은 부대장을 찾아가 훈련장과 논을 지방정부에 돌려줄 것을 요구한 끝에 이를 실현시켰다.중국인민해방군 건군절 8월1일을 상징한 8·1저수지라는 용수원까지 갖춘 군사지역은심양군구의 비준을 받아 결국 지방정부에 이양되었던 것이다. ○군지역 불하받이 정착 이에 따라 단동시는 1981년 봄 군사지역의 논을 조선족에게 풀어주는 일을 착수했다.조선족에게 땅이 돌아가기까지는 조선족의 벼농사기술과 소수민족 우대정책이 맞물렸다.보산으로 이주하는 조선족은 의무적으로 국가에 바치는 징구량을 3년간 면제받는 한편 농업세 역시 면제되었다.그리고 1무(3백평)를 개간하면 50원의 장려금을 대주었다.그리고 성정부에서 2년에 걸쳐 27만원을 들여 도로와 전기·수도 등을 건설했다. 그러니까 보산촌은 선조들의 서북간도 개척에 이은 제2의 개척지다.그 개척의 기수는 물론 당시 부현장이었던 김창영선생이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도 조선족이지만 조선족에게 남다른 애정을 기울였다. 『저는 세살을 먹던 해에 부친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왔디요.고향은 평안북도 초산입네다.관전에 사는 조선족들은 거개가 평북 초산·벽동·창성에서 이주한 사람들였디요.50년대말까지도 많이들 모여 살아서리 그런대로 생활이 편리했댔는데 지금은 그렇디가 않아요.문화혁명 이후 한 마을에 몇 가구씩 끼어사는 신세가 되어 한족에게 급속히 동화하고 말았다 이 말입네다.조선족학교가 엉망이라 말과 글을 제대로 못 배우고,짝 찾아 시집·장가가기도 어려워졌디요.그래서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방법을 강구했댔습네다』 지금 보산촌에 사는 한족과 만족은 군훈련장에 붙어살던 사람들이다.조선족의 이주는 1981년 31가구가 보산촌에 자리를 잡는 것으로 시작되었다.요령성과 관전현 이외지역 거주자는 이주할 수 없도록 원칙을 세웠으나 연줄을 대고 찾아와 죽치는 바람에 외지인 13가구도 결국 받아들였다.조선족끼리 살고 싶어서 찾아온 핏줄을 문전박대하지 못한 인심이 가상스러웠다. 내가 보산촌에 와서 머무르던 집주인인 당서기 문영빈씨는 조선족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보산촌으로 이주하기 이전에는 조선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는 것이다.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한량 없다는 이야기를 후회삼아 슬슬 풀어놓았다. 『한국과 민족만 사는 태평소현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조선말을 할 턱이 없었디요.1971년 연변 안도현 북흥촌으로 선보러 갔을 때 중매쟁이가 통역을 했디 뭡네까.나는 한족말만 하고 처가식구들은 조선말 말고는 못하니까 별도리가 없데요.우리 애들도 여기 오기 전에는 조선말 못했디요.이자 나나 애들이나 조선말 유창한 걸 보면 보산촌은 그 자체가 커다란 조선족 학교입네다』 ○비닐공장 등 개설 운영 고생인들 오죽했을까만 보산촌 사람은 모두가 잘 살고 있다.농토가 2천1백73무에 곡물수확량이 32만근에 이르는 부자마을이다.그리고 비닐제공장을 포함한 2개의 공장을 경영하여 36만원의 농공업총생산량을 기록했다.1인당 연간소득이 8백원(한화8만원)이고 학교경영비와 각종 세금을 공장경영이익에서 충당하고 있다.보산촌 소학교 출신 10명이 대학과 전문학교를 나와 2명이 석사학위를 받았다.현재 대학생도 6명이나 된다. 보산촌은 현이 지정한 조선족민족문화촌이다.조선족 고유민속 발굴과 보존은 물론 노인퉁소대와 같은 문화예술공연단체도 조직되었다.요즘은 연변을 통해 백두산을 구경한 한국의 관광단이 압록강을 따라 보산촌을찾고 있다. 그래서 보산촌 사람의 춤과 소리를 구경하고 함께 어울려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는 한국관광객을 곧잘 만나게 되었다. 지난 6월20일에는 보산촌을 들른 한국평생교육회가 보산촌노인협회에 중국 인민폐 1만원을 내놓았다.그 돈으로 노인들은 사과나무를 심고 밭머리에 「중·한노인친선사과원」이라는 푯말을 세웠다.사과나무는 3년이 지나면 혈육의 정이 담긴 꽃을 피울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나서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열매를 맺으며 보산촌 노인퉁소대가 「우리의 소원」을 또 연주할 것이다.
  • 「민주평통 통일강좌」댄 샌포드·미국 위트워스대학 국제경영대학원장

    ◎“중­대만관계 악화는 한반도통일 악영향”/전쟁나면 아태편가르기 초래… 지역냉전 심화 중국·대만 관계의 악화는 한반도의 평화통일 노력에도 커다란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됐다.중국문제 전문가인 댄 샌포드 미국 위트워스대 국제경영대학원장은 23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사무총장 박상범) 기관지인 「민주평통」 2백호 기념 통일강좌에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어떠한 통일모형을 제시할 것인지는 중국과 대만·홍콩 간의 관계설정 방식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중국·대만 관계의 냉기류와 한국에의 암시」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그의 강좌내용을 간추린다. 중국이 현재 홍콩 반환과 대만의 독립요구에 대해 강력한 수단들을 택하고 있는 것은 보다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와 자신감을 얻기 위한 정책이다.권력기반이 취약한 시기에 강택민국가주석이 군부와 같은 보수파들을 안심시키고,높은 실업률과 인플레 및 부패만연 등 국내문제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좌절을 전환하기 위해 대만·홍콩에 대해 사뭇 강경하게 나오는 셈이다. 때문에 중국문제의 냉기류는 장기적 정책방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다만 강택민이 심각한 권력투쟁에 처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중국 공산당내에 분파적 불협화음이 격화되면 아·태지역의 평화정착에 위협적인 「긴 겨울」이 될 것이다. 물론 중국은 북한 지도자들에 대한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하지만 중국은 어떤 이웃 국가보다도 한국의 통일에 반대한다.중국은 한반도통일의 유일한 방법은 북한의 붕괴임을 확신하는 데다 통일이 되면 미국이 바로 압록강까지 진출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우려는 최근 대만을 사이에 둔 중국과 미국의 대결 이후 더욱 고조됐다. 반면 북한은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을 고치는데 아직도 「철권방법」이 성공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북한은 남한과의 대화에 의한 통일에는 앞으로도 그다지 몰두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이 대만·홍콩문제와 관련,타협과 국민의사를 수렴해 풀어나감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얻는 길을 선택하면 주변국가에도 고무적인 일이 될 것이다.이를테면 중국이 대만을 회원국으로 포함하는 새로운 안보장치의 창출을 촉진하고 아시아에서의 영토변경은 무력보다는 투표로써 결정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할 경우 북한의 지도자들도 불가피하게 북한의 현상황을 헤쳐나가는 협상에 응하게 될 것이다.또 중국은 한반도통일을 위한 행보가 좌절되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시나리오로 대만이 「독립」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면 중국은 전쟁을 시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대만전쟁은 북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악영향을 끼쳐 편가르기를 초래할 것이고 새로운 지역적 냉전을 유발시킬 것이고 남북한간의 계획된 관계증진도 다시 궤도에서 이탈될 것이다.
  • 특별정담 오늘의 서울신문을 말한다(서울신문 50돌 특집)

    ◎증면경쟁 탁류속 「소신의 질경쟁」 호감/정보 홍수시대의 「알짜정보지」로 “우뚝”/상업성­선정성 배격… 「건강한 신문」 특화/“연재소설 등 작가 창작정신 존중” 정평/1950년대부터 한글신문­가로짜기 실험 선도 서울신문은 창간 5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세계화를 선도하는 초일류 고급정론지로의 제2창간을 선언,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오직 독자를 주인으로 일체의 상업주의와 선정주의를 배격한채 언론의 정도를 걸어온 서울신문의 50년 역사는 그대로 현대사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시대의 영욕을 국민과 함께 나누며 성장해온 서울신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21세기에의 비전을 그려보기 위한 특별좌담회를 마련했다.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이연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소설가 김주영씨가 자리를 같이 했다. ▲정진석 교수=서울신문은 구한말인 1904년 러일전쟁 특파원으로 와 있던 영국인 베델이 만든 대한매일신보가 그 전신입니다.대한매일신보는 한글과 영문판으로 제작돼 당시 최대의 독자층을 향유한 대표적인항일민족지였고 일본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지요.그러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총독부는 이 신문을 매입해 「대한」이라는 제호를 떼고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습니다.1910년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논조가 1백80도 달라졌지만 지령만큼은 계속 잇게 했습니다. 또 서울신문은 일제 전 기간동안 한글로 발행된 유일한 신문이었습니다.해방직후 명칭을 서울신문으로 변경했는데 정부·여당을 대변하는 쪽이었어요.물론 신문이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일방적인 비판 또한 경계해야될 일이죠. ○항일민족지가 전신 ▲김주영씨=서울신문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시대를 앞서간 신문이었습니다.지난 54년부터 7개월여 연재된 정비석씨의 「자유부인」은 장안의 화제가 됐었지요.또 60년에는 현상공모 사상 처음으로 5백만환이라는 파격적 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해 문단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죠.저의 대표작 「객주」를 탄생케한 신문도 바로 서울신문입니다.79년 6월부터 84년 2월까지 1천4백65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그당시 서울신문은 작가들의 창작정신을 최대한 존중해 「작품」이 잉태될 토양을 마련해주는 신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하나의 예로 저는 「객주」를 쓰면서 『신문사쪽에서 언제쯤 주문이나 간섭을 해올까』했지만 5년동안 단 한번도 클레임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경영진의 판단보다 담당 데스크의 재량에 맡기는 문화풍토였죠.독자의 말초적 구미에 맞춰 일회용 흥미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매회 간섭을 일삼았던 타 신문에 비해 서울신문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곳이란 인식이 우리 작가들에겐 강했습니다.이는 여타 상업지들이 따라올 수 없는 서울신문만의 독보적인 영역이었다고 봅니다. ▲이연숙 회장=우리 여성단체협의회의 경우 넉넉치않은 재정형편에도 불구,지금까지 서울신문을 한번도 끊지않고 구독해오고 있습니다.소비자문제나 여성문제를 일관성 있고 성의있게 다루어주는 신문이기 때문이죠. ○서울만의 독보영역 ▲정교수=서울신문은 56년부터 4·19때까지 한글판 신문을 따로 낸 적이 있습니다.68년엔 한글전용으로 하고 글씨체와 편집방법에도 변화를 주는 등 선도적인 신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최근 한글전용이나 가로짜기를 시도하고 있는 신문들의 실험적 모델이었던 셈이죠. ▲이회장=저도 어릴때 서울신문이 한글신문이어서 굉장히 친근감을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또 미국대사관에 근무할때 보니까 외국인들이 서울신문으로 우리말을 공부하기도 하더군요. ▲김씨=잃어버린 우리말 찾기운동을 지면을 통해 벌이기도 했습니다.지금도 박갑천씨의 컬럼은 시사문제에 대한 안목을 넓혀줄뿐 아니라 우리말의 맛깔스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독특한 컬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교수=사실 서울신문은 해방직후까지만 해도 인적 자원과 시설등의 면에서 가장 뛰어난 언론사였습니다.또 김진섭,김동리,장만영씨 등 유명문인들이 편집책임자로 있던 종합잡지「신천지」는 50년 「사상계」가 나올때까지 당시 지식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교양지였지요.「자유부인」같은 연재소설로 문학계에 더할나위없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4·19이전까지는 정치적인 영향력도 막강했습니다.그동안 역사적 격랑에 따라 시련을 겪으며 때로 침체되기도 했지만요. ▲김씨=역사도 역사이지만 우리의 의식과 감정도 지나치게 흑백논리에 감염되어 있는게 오늘의 현실입니다.요즘은 상업주의를 지향하는 신문들이 정부의 대변지 역할을 하는 측면이 더 강해요.서울신문은 오히려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회장=서울신문은 산간벽지 등 어느 지역 가지않는 곳이 없다는 점이 장점이지요.또 요즘 신문들 가운데 면수가 가장 적습니다.증면경쟁으로 페이지가 늘어난 신문들을 보면 광고일색이에요.정보홍수시대에 알짜배기 정보를 섭렵하는데 편한 신문이 바로 서울신문입니다. ▲정교수=손주환 서울신문 사장은 올해 제2창간을 선언하면서 『물량경쟁을 지양하고 오로지 질적인 경쟁만을 벌이겠다』고 선언하고 증면경쟁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젊은 기자나 언론학교수가 아닌 신문사의 최고 책임자가 이같은 한국신문의 「반사회성」을 과감하게 지적한 것을 두고 학계에서는 커다란 화제가 됐습니다. ▲김씨=굳이 신문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최근 신문들의 증면경쟁과 부수경쟁에 따라 지국으로 배달되는 신문이 곧바로 폐기장으로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국내 용지값을 기준으로해 1년에 무려 1천1백억원 이상의 돈이 낭비되는 이같은 폐단에 모두 비분강개하고 있지만 우리 언론은 스스로에 대해 비판을 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회장=그런 점에서 서울신문이 신문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희망입니다.민간단체들은 비판을 하려고 해도 언론의 막강한 힘앞에 지레 겁을 먹고 독자들에겐 조직된 힘이 없고하니 이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정교수=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역사를 통해 민족사의 험난한 굽이마다 이정표 역할을 해온 서울신문이 문민시대를 맞아 무한 물량경쟁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김씨=잘 알다시피 다른 신문은 모두 상업지입니다.그 틀에서 과감하게 탈피할 수 있다는 것은 서울신문만이 가질 수 있는 크나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 한글 교과서 ▲이회장=저는 서울신문이 정부만 의식하지 말고 정부의 주인인 국민의 입장을 보다 많이 생각하는 신문이 되었으면 합니다.이제까지는 다분히 오해받을 만한 역사도 없지 않았습니다.그런만큼 창간 50돌을 맞은 이 시점에서 대대적인 환골탈태의 노력은 한층 절실한 것이라고 봐요. ▲김씨=요즘 신문사간의 보도경쟁의식은 뉴스가치 여부를 떠나 거짓정보를 양산하는데까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일례로 최근 미국흑인남성대회를 주도한 인물이 유태인과 한국사람은 돈만 아는 민족이라고 말한 것으로 우리 각 신문이 보도했는데 실제로는 미국에 이민온 모든 이민족들을 향해 한 소리였어요.정확한 사실확인없이 일단 신문을 팔고 보겠다는 상업지들의 선정적 보도태도가 낳은 해프닝이었죠.상업주의를 배제하는 서울신문만은 이같은 폐해에서 벗어나 제대로된 정보를 취사선택해 독자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회장=신문들이 국민의 세계관을 오도하는 경우도 많아요.언론인이 올바른 시각과 균형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교수=한국언론은 한미관계나 한일관계 특히 대일문제에 있어서는 이성적이고 진지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맹목적인 애국심에 호소하려는 성숙되지 못한 보도자세를 보이고 있어요.이 역시 국익과 공익을 앞서 생각하는 서울신문이 주도적으로 개선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이회장=언론사간의 무분별한 보도경쟁에서 탈피,서울신문만이라도 반듯한 생각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할 것입니다. ▲김씨=요사이 신문은 여배우의 아슬아슬한 사진을 실어대는 등 선정적이고 충동적으로 흘러 「읽는 신문」이 아니라 「보는 신문」이라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그런 맥락에서 볼때 서울신문은 어느 신문보다 「정독하는 신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예를 들어 「두만강 7백리」「압록강 2천리」같은 기획시리즈를 들 수 있습니다.특히 이 기사는 그동안 접했던 단편적인 주마간산식 리포트가 아니라 현지 연변 조선족 작가의 눈을 통해 그려진 한폭의 세밀화라고도 할 수 있어요.저는 스크랩까지 해가며 읽고 있습니다. ▲정교수=「보는 신문」의 역할은 TV로 족합니다.신문성이 강화되어야해요.언젠가부터 각 신문들이 해외토픽란을 통해 지나치게 노출된 여성의 사진을 크게 다룸으로써 여성을 상품화하고 있는데 서울신문은 그렇지 않더군요.특별히 재미있고 눈길을 끌진 않지만 비교적 건강한 신문으로 온 가족이 함께 돌려 볼 수 있는 신문이라는 느낌이에요. ○딱한 이웃에 애정을 ▲이회장=요즘 신문들은 하지말아야할 일들은 하고 정작 해야할 일은 하지않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민간단체들이 주최하고 언론이 소개·지원해야 마땅할 행사를 신문사가 직접 나서서 벌이고 있어요.사세과시적 행사보다는 애정어린 보도정신이 중요합니다.AIDS문제나 가족파괴 등 절실한 현안을 유야무야 지나쳐선 안되죠.여성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언론이 좀더 충실히 보도해주었으면 합니다.서울신문은 반세기의 연륜이 있으니 타 신문보다 한발 앞서 갈 수 있으리라 여겨져요. ▲정교수=그렇습니다.영국의 「더 타임스」가 보수 대변지이고 그 독자가 따로 있듯이 서울신문도 그 색깔을 살리면서 타 신문과의 차별화를 이루어 나가야할 것입니다. ▲이회장=서울신문이 위치한 프레스센터는 모든 다양한 여론이 모아지는 자리입니다.그같은 의견들을 걸러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해주었으면 합니다.특히 서울신문의 「입법예고」라든가 「법령공포」같은 란은 정부와 국민의 가교역할을 자임하는 서울신문만의 특화지면이라고 할만해요.좀 더 알기쉽고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서울신문 이렇게 꾸민다(서울신문 50돌 특집)

    ◎국민과 호흡하는 초일류 정론지로/오늘의 지식인들이 찾는 「지구촌 칼럼」 서울신문 이렇게 만든다.서울신문이 크게 달라졌다.창간 50주년을 맞아 연초에 「제2의 창간」을 선언한 서울신문은 2월15일자부터 지면을 대대적으로 혁신,권위있는 최고의 정론지로 거듭 태어났다.정부와 국민의 충실한 교량역할을 하고 세계화시대를 선도하며 초일류 고급지로 재탄생할 것임을 대외에 천명한 지 불과 9개월만에 서울신문은 명실상부한 「국민의 신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여타 상업지와는 달리 지면을 과감히 특화·차별화시켜 공익신문의 한 전형을 이룩했다.「제2창간선언」이후 서울신문이 얼마만큼 변모했는지를 다른 신문과 「차별화」「특화」된 지면 및 기획연재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특색있는 지면 서울신문은 「정부와 국민의 교량역활」 「세계화에 기여」 「고급지 지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부와 국민의 가교 정부가 어떤 정책을 추진·시행하고 있으며 어떤 법률이 새로 제정됐는지를 가장 정확하고 상세히 알려준다.각종 정책이나 법령은 국민이 꼭 알아야 할 생활과 직결된 중요한 사항이다.서울신문은 이러한 취지에서 「입법예고」 「법령공포」 「정부시책 이렇습니다」 「국정 어떻게 돼갑니까」 「공직자의 소리」등의 지면을 제작하고 있고 이는 다른 상업지들이 전혀 다루지 않는 독특한 것이다. ○오피니언 페이지 신설 다른 신문과의 차별화·특화를 지향하는 서울신문의 대표적인 지면이다. 오피니언니언 페이지는 양과 질의 면에서,기사의 다양성 면에서 다른 신문을 압도한다. 외국의 저명한 석학과 전문가 14명을 필진으로 선정,국제적인 이슈를 분석·논평한 기고문을 연재하고 있는 「지구촌 칼럼」은 「오피니언 페이지의 세계화」를 선도하고 있다. 또한 각국의 전문가들이 집필한 칼럼을 수시로 소개하는 「해외논단」과 권위있는 외국신문의 주요사설을 다루는 「해외사설」란도 인기를 끌고 있다. ○아태뉴스 중점 보도 지금 세계의 시선은 이시아·태평양지역에 쏠려 있다. 이 지역 국가들은 앞으로 21세기를 주도해나갈 것임이 확실시되고 있으며 아시아·태평양지역 18개국으로 구성된 아태경제협력체(APEC)는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행사할 전망이다.이에 따라 「아태뉴스페이지」는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이 지역의 움직임을 미국·일본·중국 등지에 파견된 특파원이 입체적으로 취재·보도해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인물동정 중요성 부각 서울신문의 「사람·일·사람」페이지는 양과 질의 면에서 어느 신문보다 월등하다.완전히 독립된 뉴스면으로 만들어 차별화에 성공했다. 1주일에 월요일을 제외한 6일간 매일 2페이지를 할당하고 있어 정보량이 다른 신문에 비해 2∼3배정도 많다.전체 24면을 발행하는 서울신문이 2개면을 인물·동정페이지로 만든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사람·일·사람」란에는 갖가지 모임·행사·단신·인터뷰 등의 기사가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국무위원 일정표」와 「광역단체장 일정표」까지 실어 주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지역면 대폭 확대 「지방화」는 「세계화」와 함께 우리 국정의 2대지표다. 서울신문은 지방화시대를 선도하기 위해 지역별로제작하고 있던 지방판 1개면을 2개면으로 확장시켜 「지방정부와 주민간의 교량」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지역살림의 방향을 주민에게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광역단체장을 직접 만나 시책을 알아보는 「이달의 도정」 「이달의 시정」란을 신설했다. □기획연재물 기획연재물은 두 가지 성격으로 구분된다.첫째는 우리의 새로운 역사의식과 정체성 확립을 위한 것으로 「새로 쓰는 한국현대사」 「압록강 2천리」 「한국인의 얼굴」 등이 이에 속한다.둘째는 세계를 향해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는 연재물로서 「시베리아 대탐방」 「세계의 명소와 걸작 건축감상」이 있다. ○시베리아 대탐방 서울신문 창간 50주년 기념으로 한국언론사상 최초로 기획된 특별컬러연재물이다. 이 시리즈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시베리아현장을 본사 취재팀이 종횡으로 답사해 풍물·문화·역사·경제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독자가 처음 대하는 생생한 컬러사진은 압권이다.이 기획물이 지난 3월2일 처음 연재된 이후 국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고 러시아의 중앙방송·지방방송 및 신문이 10여차례나 이를 소개할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다. ○모스크바 새 증언 5월15일자부터 시작해 3개월동안 30회가 연재된 이 시리즈는 서울신문의 고급화·차별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 기획물이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일각에서 「6·25는 북침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리즈는 한국관련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러시아의 「외무성문서소」 「대통령문서소」「당중앙위문서소」 「국방성문서소」 「KGB문서소」등 5곳에서 천신만고 끝에 6·25와 관련된 9백50여건의 극비문서를 입수,그 진상을 보도함으로써 세계언론사상 첫 쾌거를 이룩했다. ○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 금년 1월1일자부터 시작돼 현재 45회를 맞는 이 대형시리즈는 19 45년 8·15해방에서부터 70년대초 제3공화국까지의 우리 현대사를 심층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새로운 자료와 당시 관계자의 증언을 토대로 해방이후 격변기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독립국가연합·일본 등 외국에 소장돼 있던 각종 자료와 국내 학자의 최근 연구결과를 대거 발굴,보도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어떤 유사한 신문 연재물보다 깊이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압록강 2천리 8월11일부터 주1회씩 연재되고 있는 이 시리즈는 이미 연재된 20회짜리 「두만강 7백리」(2월24일∼7월14일)의 후속 컬러물이다. 대변혁의 시기를 맞고 있는 한·중국경지역 조선족의 삶을 「두만강 7백리」를 집필한 연변 동포작가 유연산씨가 심층르포형식으로 다루고 있다.한반도 최대장강인 7백90㎞의 압록강일대를 직접 답사,동포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 북한 프로복싱(외언내언)

    72년 뮌헨올림픽 사격 소구경에서 세계신기록(5백99점)을 세우며 북한에 첫 올림픽금메달을 안겨준 이호준은 이렇게 말했다.『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어 미제의 심장을 겨눈다는 마음으로 한발 한발 쏘았다』.20년 뒤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출전선수단 결단식에서 김정일은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는 돌격선에서 총을 들고선 군인과 같다』고 독려했다.북한의 스포츠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명료하게 보여준 말들이다. 북한의 「정치용어사전」은 스포츠에 대해 『신체를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키며 집단주의 정신과 혁명적 동지애를 배양함으로써 국방력을 강화하고 공산주의건설을 성과적으로 수행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따라서 북한의 스포츠는 생산력 증대·국방의 강화·김일성부자 우상화와 직결되어 있다.학교·사회·직장등 대중스포츠도 그렇지만 엘리트스포츠도 마찬가지. 그러나 근년들어 북한의 엘리트스포츠가 적잖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비생산적이고 퇴폐적인 자본주의 경기』라고 매도해왔던 프로복싱을 받아들였을뿐 아니라 세계무대로의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 92년 7월 프로권투협회를 창설한 북한은 조총련을 통해 프로선수훈련에 필요한 기자재를 반입하는 한편 「4·25선수단」「압록강선수단」등에서 본격적으로 유망선수를 발굴·양성해왔다.그리고 93년 4월 67명의 선수가 출전한 가운데 최초의 「공화국프로권투대회」를 갖기도 했다.아직 전반적인 수준은 낮은 편이지만 플라이급의 최철수,밴텀급의 이광식 등은 타이틀에 도전할만한 기량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자신을 얻었는지 최근 WBC(세계복싱위원회)에 공식가입했으며 WBA(세계복싱협회)가입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북한이 세계프로복싱에 뛰어든 것은 외화벌이 때문으로 알려졌다.별다른 투자비용이 들지않는 데다 주먹하나로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프로복싱으로 얼마나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지 알 수 없지만 참으로 궁색한 고육지책이 아닐 수 없다.
  • 백두산 산삼(압록강 2천리:13)

    너도나도 「방산」… 사라지는 산삼/“한뿌리만 캐도 가난 벗는다”… 이젠 전설로/집안 「신개하홍삼」 한때 고려인삼과 버금/인삼값 폭락… 꽃사슴 사육으로 대체 『화승총 메고 다닌 사람티고 범 잡디않은 사람 없고,홍실 가디고 산판 헤맨 사람티고 산삼 못캔 사람 없디요.그만큼 딤승이 우글대고 삼이 많았다 이겁네다』 노인들은 산 이야기만 나오면 으레 신바람이났다.얼핏 허풍스러워 보이나 백두산 자락을 깔고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의 말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깔려있을 것이다.왜냐하면 「장백현지」와 같은 기록에도 백두산 산삼이 심심치 않게 나오기 때문이다.최근 기록을 보면 지난 1979∼85년까지 국가가 장백현에서 거두어들인 산삼은 1백9·6량(5천4백80g)으로 되어있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산삼을 백초 가운데 으뜸(백초지왕)으로쳤다.그리고 만리장성 동쪽을 말하는 관동의 세가지 보물의 하나로 꼽은 명산물이 백두산 산삼이었다.질병을 없애고 노화를 방지한다는 산삼 한뿌리만 캐면 가난뱅이도 금방 부자가 되었다.청나라 연호로 함풍연간(1851∼61년)에 어떤 촌민은 산삼 여덟뿌리를 캐서 황제에게 바쳐 오품지부의 벼슬을 얻었다고 한다. ○산삼 진상… 벼슬 얻기도 산삼 캐는 일을 방산이라고 부른다.옛날에는 전적으로 삼만을 캐러다니는 직업 방산자들이 있었다.이들은 산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산삼의 생장과정까지 지켜볼 정도로 산삼에 도통한 사람들이었다.그래서 산삼이 자라는 자생지를 훤히 꿰뚫었다.산삼은 여간한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처음 산삼을 발견하면 먼저 『봉추요』라고 소리를 친다.그러면 옆에서 『뭐요?』라고 묻는다.발견자는 몇잎이라고 일러주고 즉시 홍실로 뿌리 위쪽을 묶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집안시 양수향 황차촌에 사는 송창철(36)씨는 지금 향정부에서 민족사무조리로 일하는 조선족 청년이다.그런데 부친 송병계(62)노인때부터 산삼을 캐러 다닌 터여서 한때는 방산에 나섰던 경험이 있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방산에는 삼매경같은 무아의 경지가 뒤따르는 모양이다. 『초막에서 밤새 모기에 물리는 고초를 겪지만 날이 밝아 산천을 바라보노라면 신선이 된 기분이 듭데다.시원한 실개천에 세수를 하고 그 물에 밥을 디어먹고 산을 타디요.배고픈 줄도 모르고 산을 헤매다 늦게 점심요기를 할 요량으로 자리를 잡았댔습네다.그런데 바로 맞은편에 빨간 꽃이 보이더라 이 말입네다.그거이 산삼이었디요.밥 보자기를 밀쳐놓고 봉추라는 소리를 냅다 지를 수 밖에….횡재를 만나서리 늦은 점심도 아예 굶고 정성들여 캤디요.세잎 짜리였는데,장사꾼한테 4천원을 받았습네다』 그 깊고 넓은 백두산 자락에는 산삼의 열매를 따 먹는 새가 분명히 살고 있다는 것이다.부리 아래가 빨갛고 파란털을 가진 새다.이 새를 쫓아 가면 반드시 산삼을 만난다고 해서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방초새나 산삼새라고 부르는데,백두산 인근 사람들이 흉내낸 새소리는 「왕간가­이오­」다.북송때 백두산에 산삼을 캐러갔다가 굶어죽은 산동성 기수현 사람인 왕간가와 이오의 울음이라는 전설이있다. ○초막 짓고 산에서 생활 한대의 약학서인 「신농본초경」을 보면 산삼의 약효는 대단하다.그래서 백초지왕이라 했고다른 약재에 비해 값도 엄청 높아 여늬 사람들은 먹을 수가 없었다.옛날에는 장백현이나 집안현에서 산삼을 캐면 안동이나 영구 같은 도시에 내다 약재상들에게 팔았다.요즘은 사정이 달라 중국을 찾는 한국인이 단골이 되었다.그래도 값이 싸다면서 닥치는 대로 사는 바람에 판로 걱정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두산 산삼이 도라지처럼 흔한 것은 아니다.점점 희귀해지고 있다.세월이 좀 더 흘러가면 백두산 산삼은 전설로만 남아있을지 모른다. 산삼씨앗을 따서 산에 뿌린 이산삼과 또 산삼씨를 뜰에 뿌려 재배한 원삼의 대를 이어 청나라 강희원년인 1662년에 압록강유역에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특히 집안시는 중국의 중요한 인삼재배지가 되었다. ○막차 탄 인삼농가 많아 오늘날 집안에서 가장 유명한 인삼은 「신개하홍삼」이다.그 질이나 약효가 고려인삼에 버금간다고 집안 사람들은 자랑하고 있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2만8천2백50장이었다가 1959년 집체화 시기에는 재배량이 11만2천1백8장으로 늘었다.그리고 1983년 개체화 시기로 넘어가면서는 더 늘어 57만1천1백12장이나 되었다.총 수확량은 74만2천2백88㎏으로 2천1백66만원어치를 생산했다. 그러나 요즘와서 인삼은 사양의 길에 접어들었다.양수향 황차촌에 사는 송명철(41)씨는 지난 19 88년부터 인삼을 재배했다.당시 1등품 인삼 1근에 37원8전을 홋가해서 인삼재배자들이 큰 돈을 벌 때였다.그래서 1만원을 대부받아 인삼재배를 시작했는데,재수 없는 사람 뒤로 넘어져도 코를 깨는 격이 되고 말았다.인삼값이 해마다 38%씩 내려가 4년동안 일만 죽도록 하고 대부금을 모두 날렸다. 『작년에 삼값이 얼마했는지 아십네까? 한근에 5원을 했으니 안망할 턱이 없디요.국가에서 안사니끼리 거간꾼들이 날도둑하듯 뜯어먹은 것입네다.개체사회에서 살라면 더 배와야디요.돈놓고 돈먹을 줄 알아야 농사도 짓는 세상이 됐지않나 합네다』 오랜 세월을 사회주의에 순치한 사람들인지라 시장경제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그저 국가가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일하고 입에 풀칠을 했던 사람들인 것이다.그런속에서도 시장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상황에따라 전업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벌고 있다.장백현 용강향 이도강촌의 김학준(60)씨는 시류를 잘 탄 농민이라 할 수 있다. 『인삼 경기가 좋다니까 너도나도 대들었디요.이러다는 인삼이 내리막질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네다.그동안 내래 인삼농사로 수만원 벌어놓은 처지고 해서 인삼농사에서 손을 떼었디요.대신 꽃사슴 두 마리를 샀지 않았갔시요』 그는 1만원을 들여 꽃사슴 2마리를 사서 지금은 12마리로 늘렸다.지난해 수놈 5마리의 뿔을 잘라 녹용으로 팔아 본전 1만원은 이미 건졌다.압록강 연안에도 시장경제체제에 의한 경쟁사회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 장군총과 장수왕 후손(압록강 2천리:12)

    ◎장대석 1만개 사용… 거대한 “동양의 피라미드”/밑면 넓이 9백㎡·높이 12m… 꼭대기 돔형/광개토대왕 아들 장수왕의 무덤 추정/하얼빈 거주 고지겸씨 “내가 장수왕 후손이다”/「고씨족보」 제시… 고구려 연구 귀종한 자료 평가 집안시에는 7천8백여기에 이르는 고구려 무덤들이 있다.이들 고분을 한데 뭉뚱그린 호칭이 이른바 연구고구려고분군이다.무덤은 신분에 따라 크기나 형태가 차이를 보였다.규모가 큰 무덤으로 천추총과 태왕릉,장군총이 꼽히는 데 모두가 돌무지무덤(적석총)이다.이 가운데 장군총은 크기를 떠나 짜임새로 보아 고구려 돌무지 무덤의 백비라함이 옳을 것이다. 장군총이 누구의 무덤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대략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으로 압축해왔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장수왕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장군총 역시 집안의 다른 고구려 유적들 처럼 오랫동안 잊어버린 유적이었다.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중국 동북대륙의 주인들이 자주 바뀌고 전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집안이 봉금지로 묶인 것도그 이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돌무덤의 백미 그런데 장군총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5백여년전이라고 한다.산동성 연대에 살던 유씨 형제가 살길을 찾아 집안땅으로 왔다가 이 무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형제의 본업이 석공인지라 돌을 다듬어 가지런히 쌓은 거대한 석조 조영물에 관심이 쏠렸을 것이다.무덤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 형제는 무덤의 주인공을 놓고 서로 욱신각신 쟁론을 벌였다. 형은 무덤이 크고 돌을 쌓은 솜씨로 보아 황제가 묻힌 황릉일 것이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이에 동생은 중국의 변방에 있는 무덤이라는 이유를 들어 변방수비를 담당했던 장군의 무덤이라고 맞섰다.동생의 추리가 더 설득력이 높았다.그래서 형제는 장군의 무덤으로 결론을 내렸다.그 뒤에 장군의 무덤이라는 말이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해 내려와 무덤이름이 장군총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장군총은 통구평야를 서남향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축조되었다.무덤을 축조한 재료는 화강암이다.국내성에서 20㎞떨어진 오녀봉에서 채석한 돌이 분명하데,오녀봉은 선경을 방불케해서 고구려시대에 거선봉이라고 했다.전설에 따르면 오녀봉의 돌은 황금색을 띠어 옥황상제의 궁전을 짓는데도 사용했다는 것이다.그만큼 석질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고구려의 불가사의 장군총은 피라미드형이다.쌓아올린 돌은 화강암을 장방형 입방체 규격으로 만든 장대석이다.장대석의 표면은 일일이 갈아 매끄럽게 처리했다.장군총을 쌓는데 1만1천여개의 장대석이 들어갔다니 당대의 대역사임에 틀림이 없다.돌의 크기는 일정치는 않으나 제1층은 가급적 큰돌을 쌓았고 올라가면서 조금씩 작아졌다.제1층에는 4단의 장대석을,2∼7층까지는 각층을 모두 3단씩 쌓았다. 제1층의 평면은 각변의 길이 31.5m나 되는 정사각의 네모꼴로 그 넓이는 9백㎡에 이르고 있다.이 무덤은 특이하게도 네 모서리를 동·서·남·북 방향에 맞도록 배치했다.그리고 제1층에는 쌓아올린 장대석들이 밀려나오지 않게 각 면에 길다란 버팀돌(호분석)을 3개씩 기대어 세웠다.무덤 높이는 12.4m로 맨 꼭대기는 돔형에 가까운 기단석으로 마무리했다. ○매년 태왕릉 찾아 참배 고구려는 장수왕 때인 서기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그럼에도 장수왕이 오늘날 장군총으로 불리는 돌무지무덤에 묻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장수왕이 생전 조상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한 어떤 유언에 의해 집안(국내성)에 묻히는 꿈이 사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지금 전적으로 믿을만한 사연은 못 되지만 장군총을 발견한 유씨형제가 제5층 동남쪽 장대석을 반년에 걸쳐 징으로 쪼아 묘실에 들어갔다고 한다.그 때에 묘실안 황금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고 타더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기적이 분명한 데 근년에 또 다른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장군총에 묻힌 장수왕의 후손이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현재 흑룡강성 하얼빈에 살고 있는 고지겸(67)노인이 그 장본인이다.1948년 하얼빈 의학부를 졸업하고 1956년 대련의과대학을 거쳐 흑룡강성 의학정보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그는 어려서 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부터 고구려 왕족의 후예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1921년에 필사한 족보가 있었으나 문화혁명 때 불태워졌다. 그러나 개혁개방이 현실로 다가오자 뿌리찾기에 나섰다.요령성 해성시 대고려방진에 사는 종친을 찾아가 족보를 다시 보고 자신이 고구려 제20대왕인 장수왕 후손임을 알게되었다.이어 길림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손옥량 소장에게 족보감정을 의로한 결과 고구려왕손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는 긍정적 평가를 얻어내기도 했다.또 고씨종친들의 못자리판인 요양,대안,해성,철령 등지를 찾아다닌 끝에 「고구려 왕실후손­요양의 고씨족보」와 「명대 요양동녕위세습지휘사와 그 가족의 연구」등 설득력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요즘 「고구려사화」라는 저술의 집필을 끝냈다.생전에 조상의 뿌리를 모두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하얼빈방송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맏아들 고홍(47)을 끌어들였다.그는 1989년부터 청명절이 돌아오면 하얼빈에서 퍽이나 먼 길인데도 집안까지 와서 태왕릉과 장조묘를 배알하고있다.위대한 조상을 찾는 희열속에 살아가는 고지겸.그는 오늘 중국 동북지방에 살고 있는 대고구려인이지도 모른다. 고구려 유적들,특히장조총을 돌아보고 집안시 태왕향에 들어서고 나서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고지겸과 같은 사연을 안은 고구려인 후예라는 착각에 빠지곤했다.호태왕(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기상이 넘쳐 흘렀을 옛 고구려 도읍지 집안에서 새삼 느껴야 한 애달픈 심사가 있다면 국내성이 오간데 없다는 현실이다.국내성 성벽의 석축이 사람들 키 만큼 겨우 남아 여느집 담장처럼 되었다. 그 나지막한 성벽 아래로 고구려인을 닮아보이는 집안 사람들이 노점을 차렸다.그리고 궁궐이 서있었을 법한 성벽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실감케했다.
  • 호태왕비(압록강 2천리:11)

    ◎1천6백년전 대륙 호령하던 고구려 위엄이…/청나라 관명산이 발견… 최근 비문탁본 떠 횡재/일서 통째로 반출기도… 지난 82년 새 비각세워 오늘날 집안시는 청나라 연호로 광서 28년(1902년)부터 1965년까지는 집안현이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압록강 중류의 오른쪽 대안을 통틀어 통구라고도 한고 더 옛날에는 비류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기원전 2년부터 서기 427년가지 고구려의 도읍지 국내성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국내성 시대의 굵직굵직한 고구려유적이 많지만 그 으듬은 호태왕비일 것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서기 414년 부왕의 공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거대한 비석의 새김글씨 금석문 내용은 당시 고구려 역사이자 주변 동아시아역사다. 왕의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마지막 세 글자를 따서 호태왕비로 부르는 이 거대한 사면비는 어른 세 사람의 키를 포갠 것보다 높다. ○굵직한 고구려 유적 많아 집안시에는 태왕향이라는 구역이 있다. 향 구역내에 호태왕비(광개토왕비)와 태왕릉,장군총,통구의 옛 무덤떼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 분명했다. 압록강 건너 북한당 만포시로 가는 국제열차가 발차의 기적을 울리는 집안역도 태왕향에 속해있다. 집안해관(세관)을 비롯,변경검사장(국경검문소),대외무역운수회사,집안판사처,집안검역소 및 동식물검역소 등의 국가 주재기관이 모두 태왕향에 밀집되었다. 그리고 집안시내를 다녀보면 「태왕식당」이나 「태왕상점」이 눈에 띄고 「태왕가라오케」까지 생겼다. 1천6백여년전 대륙을 호령하던 대왕의 이름이 시장경제시대의 간판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호태왕비로부터 얼마 멀지않은 태왕릉과 마주한 자리에 태왕조선족소학교가 있어서 한결 마음이 흐뭇했다. 조선족 어린이가 대왕의 품에 안겨 공부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자긍심마저 들었다. 청나라는 백두산을 자신들의 성조발상지로 보고 1677년에 봉금지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2백1년동안 집안은 인적이 없는 불모지에 불과했다. 1877년에 접어들어 청나라는 통화현과 회인현(환인현)을 설치했다. 그 회인현 설치위원이었던 장월이라는 사람 밑에 관월산이라는 서사가 있었다. 본디 석공출신인 관월산이 바로 무인지경에 외로이 서있는 호태왕비를 찾아낸 장본인이다. 관월산은 장월의 허락을 받아 호태왕비 인근에 초가를 짓고 어렵게 사는 초천부를 고용했다. 산동성 문등현 사람은 초천부는 어린 아들 초균덕을 데리고 살았는데 비석에 덕지덕지 긴 이끼를 벗기는 일을 맡았다. 초천부는 사다리를 놓고 매일 비석에 달라붙어 일을 했으나 이끼가 너무 두꺼워 다 벗기기가 부지하 세월이었다.그래서 쇠똥을 잔뜩 발라놓고 불을 질렀다. 그래도 시원치 않아 나중에는 기름을 부어 태워버렸다. 이때에 애석하게 비석에 금이 가고 터져 어떤 글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었다. 현재 애매모호한 글씨로 남은 1백22자가 불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어떻든 비문이 나타나자 성경(심양)등지에서 곡학자와 금석문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초천부가 명을 받아 탁본을 떴다. 현아문과 학자들에 바치고 더러는 성경과 안동(단동) 사람들에게 팔아 초천부가 돈을 챙겼다. 초천부한테 사간 탁본은 외국인들에게 되팔려 나가기도 했다. ○탁본 외국학자에 인기 1902년 집안현이 생기면서 현은 초천부에게 탁본업 허가증을 내주고 일정한 수량만 바치고 나머지는 사사로이 팔도록 했다. 30여년전 호태왕비에 매달려 살던 초천부가 세상을 뜨자 아들 초균덕이 탁본업을 이어받았다. 빨리는 하루에 1장,늦으면 사흘에 1장식을 찍어내어 민국연간돈으로 1장에 10∼12원씩 받았다. 탁본으로 이름이 나서 그를 초대비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70살에 탁분일을 놓고 청석진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946년에 세상을 떠났다. 1907년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 육군 제57연대장 소택덜평이 압록강을 건너와 호태왕비를 둘러보았다. 고구려와 왜구간의 전쟁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당시 행정책임자인 집안임지현 오광국을 만나 호태왕비를 팔라고 졸랐다. 진사출신으로 해박한 학식을 갖추었던 오광국은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담은 국보를 판다는 것은 천주에 용서받지 못할 죄악임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국보는 팔 수 없다” 거절 그 때에 오광국과 소택덕평과의 대화내용을 사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비석은 대단히 무거워 일본까지 운반할 수가 없습니다.』 『그거야 쉽지요. 우리 병선이 이 비석보다 훨씬 더 무겁지 않습니까? 병선으로 옮기려 합니다.』 『이 비석은 비록 지방에 있지만 국보입니다. 나는 지방에 있는 보잘것 없는 관리인데 내 어찌 국보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교양이 깊으신 분이니 나의 고충을 이해하시리라 믿겠습니다.』 『저는 사실 문물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값은 부르는대로 드릴테니 양도해 주시지요.』 『그처럼 흥미가 있으시면 내가 가진 탁본 몇 점을 선물로 드리지요.』 소택덕평은 그냥 돌아갔다. 만주사변 이후 동북을 강점한 일제가 어이하여 호태왕비를 그대로 두었는지가 의심스럽다. 만주지역은 물론 아시아가 저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 탓이었을까. 그런 와중에 호태왕비는 제자리에 지금 남아있다. 밑부분 너비 1.34∼1.97m,윗 부분 너비 1∼1.6m,높이 6.39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은 비각에 안치되었다. 비각은 당초 집안임지현 유천성이 1925년 모금을 해서 지었는데 너무 낡아 1982년 집안현 문물관리소가 다시 지었다. 중국사회과락원 부원장겸 고고연구소 소장 하내가 「호태왕비」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 피납북자들의 비극(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42)

    ◎총 8만여명… 김규식·안재홍 등 각계 명사 다수/귀향길 막혀 고난의 세월… 대부분 비참한 최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한국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무리가 있다.그들은 바로 납북인사들이다.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끌려가 휴전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에트랑제였다.그래서 더욱더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만 2만여명 한국전쟁 기간중 북한군에 납치당한 사람들은 서울 2만7백38명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8만4천5백32명이나 됐다.이 납북자들은 대부분 북에서의 삶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소외된채 베일에 싸인 이들이 만난 비극적인 운명은 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한강철교 폭파로 미처 피란을 못했던 요인들이 북한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우선 포섭대상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7월4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후 피란하지 못한서울과 점령지역의 주요 정치·종교·경제·문화인 등 각계 인사를 찾아내 포섭하려는 것이었다.군사위원회는 이 결정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를 친·반공의 정도에 따라 5개 부류로 분류했다. 북한은 7월4일부터 김응기 이주상 방학세 김창주 김춘삼 등 실무 집행자들로 하여금 이를 추진시켰다.이에따라 서울시 인민위원회(서울시청)와 성남호텔(서울 광교부근)에 납북 대상자 심사장이 설치됐다.국회의원과 정당·사회단체의 저명인사,임정요인에 대한 심사를 거쳐 이들을 북으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이들 중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류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 임정요인이 들어있었다.안재홍 박열 백관수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 방응모 등 전현직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문단 인사들이 포함됐다.납북 인사들은 대부분 평양을 거쳐 만포로 들어갔다.도중에 정인보와 이광수,최규동,방응모,김붕준,류동열이 미공군의 폭격과 지병으로 숨졌다. 해방정국에서 미국이 장래의 한국 지도자로 꼽았던 김규식은 만포에서 16㎞ 정도가 떨어진 별오동이라는 마을에서 1950년 12월10일 세상을 떠났다.납북인사들과 당시 함께 생활했던 북한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의 최후는 너무 비참했다.별오동에는 유엔군에게 쫓겨온 북한의 주요기관이 모두 있었는데,김규식은 지병인 해소와 노환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날 때 지니고 간 약이 모두 거덜났다.당시 상황으로 약을 구할 수 없어 해소에 좋다는 토끼똥까지 달여 먹였다는 것이다.주변의 강력한 요구로 별오동에서 8㎞를 더 들어간 군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홍명희를 만나 중국에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그날 압록강변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꽃다발이 개인 이름으로 도착했다.추도사를 맡은 조소앙은 날씨가 하도 추워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김규식의 시신은 상여에도 오르지 못하고 군 트럭에 실려 장지에 갔다.땅이 얼어붙어 내려놓은 관을 땅에 제대로 묻지못하고 가장을 하다시피 장례절차를 마쳤다.김규식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렇게 한만국경에서 막을 내렸다. ○독자 휴전운동 불발 납북자들의 일관된 관심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철저하게 정보가 차단됐던 납북자들은 전쟁이 끝나 남한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이들의 환향의지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1951년 6월23일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사가 휴전과 관련한 토의를 제의한후 시작된 휴전회담은 납북인사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납북자 대표들은 휴전회담이 답보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독자적인 휴전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한 적도 있다.북한측 연락장교들의 인솔로 안재홍 조소앙 김약수 원세훈 윤기섭은 51년 1월25일 판문점까지 오기도 했다.그러나 북한의 조종을 받은 이들은 유엔군측 연락장교 키니대령을 만나는 선에서 활동을 끝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됐지만 납북자들은 여전히 환향의 길이 막힌채 감금에 가까운 상태로 북에서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휴전협정 체결 90일만인 19 53년 10월26일 판문점에서 정치회의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회의 초반부터 미국측과 북측이 회담방법 등 정치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그러나 미·영·소·불 등 4개국이 1954년 4월부터 제네바에서 정치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납북자들은 조소앙이 주창한 「중립화 통일론」을 제네바회의에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북한당국에 건의했다.북한은 납북자들의 의도가 자신들의 통치속셈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표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54년 4월 중순 엄항섭과 권태양 등 납북자 대표는 제네바로 들어가기 위한 입국사증을 받기 위해 소련 외무성의 안내를 받아 모스크바로 떠났다.그러나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결국 이들을 제네바 국제회의에 보내지 않았다.스위스 정부가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처음부터 북한당국이 납북자들을 제네바 회담에 참가시킬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제네바회담 참가 무산 1955년부터 김일성은 평화통일과 평화이미지 선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를 계기로 북한은 납북인사들에게 자신이 내세운 평화통일 방안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이용을 서둘렀다.그래서 1955년 11월13일 납북요인들의 첫 공동성명으로 알려진 11·13성명을 발표하는데 납북자들이 실제 이용됐다.이 성명에는 납북인사들의 주장은 철저히 배제된채 전쟁 직전까지 북한이 내세운 정치적 허구라 할 수 있는 선전문구만 나열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납북자들은 이후 북한에서의 독립적인 정치활동 보장을 위한 조직체 구성을 시도했다.1956년 7월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결성대회가 그것이다.각지에서 모인 납북 및 월북 인사 4백여명 등 7백여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합법적 통일정부 구성과 국제적 중립화 선언,남북의 자유로운 내왕 등을 내용으로 하는 7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협의회에는 북한의 노동당 등 친공세력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또 분열이 이미 고질화돼 있었던 만큼 납북자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이 협의회는 1958년 9월9일 지도자인 조소앙이 숨을 거둔후 본래의 취지와는 멀어진채 북측의 대남 위장 정치선전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쿄대 「납북자 행적」 단행본/“북,납북 인사들 협박… 대남공세 악용”/56년 조국 통일전선 중앙위에 “동원”/“총일 앞장” 조소앙 등 강요된 맹세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연구소에서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끌려간 인사들의 족적을 기록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란 단행본 책자를 입수했다.이 단행본은 1956년 5월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의 주요문헌과 참가자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납북 임정요인과 인사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들 재북인사들은 1956년 4월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돼있다.특히 당대회 직후인 같은해 5월24∼25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를 준비하고 있던 재북인사들을 대부분 초청한 것으로 밝혀져 이들을 여러 수단으로 회유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홍명희의 보고와 토론으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 남한출신 정치인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 윤기섭 엄항섭 송호성 김약수,국회의원 출신 노일환 김병회 황윤호 박윤원 이구수 강욱중 최태규 김옥주 배중혁 구덕환 이문원 신성균이 참석했다.이밖에 남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남한 정치인을 대표해 토론에 나선 송호성 조소앙 안재홍 등의 토론 내용을 소개했다.이들은 분단의 원인과 평화통일의 방책에 대해 토론한후 자신들이 앞장설 것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이 자료는 납북인사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됐음을 보여 주었다.더구나 휴전 이후 정치공세를 강화한 폐쇄사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 자료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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