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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오 “동북아평화 번영공동체 만들고 싶다”

    이재오 “동북아평화 번영공동체 만들고 싶다”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19일 중국 베이징대에서 ‘동북아 평화번영과 한국의 미래’란 주제의 강연을 마치고 21일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이 전 최고위원이 지난 해 5월부터 시작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3월초 귀국길에 오르면 여권 등의 정치 구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한 측근은 20일 그의 귀국과 관련, “3월1일 귀국하겠다고 전화가 왔었는데 미국에서의 특강 등 일정이 고려되면 변수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전 최고위원은 현재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한미연구원 객원교수로 있으며 지난 17일부터 ‘한반도 통일문제와 동북아 평화번영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베이징대 국제전략연구중심 방문교수로 와있었다.   그는 이날 세미나에서 “베이징에 온 것은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의 미래에 관한 중국의 입장을 연구하고 현장학습을 하기 위해서 였다.”고 설명했다.이와 관련, “동북아의 평화정착 등을 위한 비정치적 ‘동북아평화 번영공동체(Northeast Asia Community for Peace and Prosperity:NCPP)’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남북간의 통일을 위한 협력 관계가 이뤄지면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동북 3성과 북한간에 경제·문화교류가 활성화되고 두 지역간에 역동성(dynamism)이 급증해 북한을 개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어 “1월말 동북 3성을 가 보았고,설날 새벽 영하 40도 추위 속에서 백두산에 올랐다.”고 소개하고 “단동·심양·연길·도문·권하·방촌을 거쳐 중국·러시아·북한이 국경으로 만나는 곳까지 가면서 동북 3성이 지니고 있는 지정학적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동북 3성의 지정학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동북 3성을 포함한 동북아는 한반도 통일이란 변수로 인해 다시 한번 불안과 혼란이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 전 최고위원은 “따라서 동북아 지역에 한국,중국,러시아,일본,북한,미국 등 국가간에 공유할 수 있는 중장기적 비전이 있어야 평화가 보장되고 바람직한 통일한국의 입지가 이뤄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세계는 지금 지역별 경제협력과 통합으로 EU,북아메리카,동아시아라는 3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한국의 미래는 통일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와 한국·중국·일본간의 3국 정립, 한국에서 아시아·유럽·아프리카로 연결되는 아시아 지역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 등이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인터넷서울신문 정기홍기자 hong@seoul.co.kr
  • 박철민, ‘일지매’서 최초 노출 연기 선보여

    박철민, ‘일지매’서 최초 노출 연기 선보여

    배우 박철민이 오늘(29일) 방송되는 MBC 수목드라마 ‘돌아온 일지매’에서 연기 생활 최초로 과감한 노출 연기를 감행한다. 박철민은 MBC ‘돌아온 일지매’(극본 김광식,도영명 연출 황인뢰,김수영)에서 청나라 첩자 왕횡보로 분해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지난주 단 한회 등장만으로 시청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박철민은 “질문이를 하지 마라. 입은 먹는 데만 써라해.” “생각이를 깊게 해라.” 등의 왕횡보 어록으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박철민은 그의 연기 인생 최초의 파격적인 노출연기로 ‘탄력받은’ 인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오늘(29일) 방영되는 ‘돌아온 일지매’4회분에서 왕횡보(박철민 분)는 갖은 모략으로 탈옥해 압록강까지 도망치는데 성공하지만 조선의 도적들에게 속아 말과 소지품을 뺏겨 속옷만 입고 도주를 한다. 하지만 구자명(김민종 분)의 끈질긴 추격으로 천 오백리에 걸친 왕횡보의 탈옥극은 팬티 바람으로 낚시줄에 걸려 끝을 맺고 만다. 박철민의 과감한 노출 연기가 촬영된 시기는 작년 10월로 아직 가을이었지만 매서운 강바람으로 인해 쉽지 않은 촬영이었다고. 끈질기게 쫓아오는 포도청 부장 구자명을 피하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어 청나라로 헤엄쳐 건너가려고 한 왕횡보를 연기하면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후문이다. 차가운 강물 때문에 오랜만에 기억에 깊게 남은 인상적인 촬영이었다고 밝힌 박철민 은 고생스러운 상황 때문에 “조선 강물 왜이리 차나 이거” 등의 자연스러운 애드리브로 촬영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된 MBC 수목드라마 ‘돌아온 일지매’의 4화는 29일 오후 10시 방송된다. (사진제공 = 비단) 서울신문NTN 김예나 기자 yeah@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3일 TV 하이라이트]

    ●그것이 알고싶다(SBS 오후 11시10분) 지난 8월14일 이후 한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정일.정권 수립 60주년 기념일인 9·9절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자 김정일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설이 퍼지기 시작했다.실제 김정일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일까? 김정일을 둘러싼 의혹들을 하나하나 파헤쳐 본다. ●2009 인사이트 온 아시아 누들로드 2편 ‘미라의 만찬’(KBS1 오후 8시) 국수의 탄생과 국수의 전파 경로를 통해 음식이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취재한 음식 문화사.제2편 ‘미라의 만찬’에서는 국수의 탄생 과정을 재현하고 국수가 소스 등과 결합하면서 맛깔스럽게 변화되는지 보여준다. ●내사랑 금지옥엽(KBS2 오후 7시55분) 신호는 그동안 도시락을 배달했던 사람이 세라가 아니라 사장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리고 그 사람이 혹시 자신의 엄마,송인순이 아닐까 의심하고 보육원에 확인한다.한편,편곡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전설은 일남에게 정식으로 결혼허락을 받기 위해 인호의 집을 찾는데…. ●천추태후(KBS2 오후 10시15분) 99 3년 겨울,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향하고 있다.태조왕건의 손녀이자 현 왕인 성종의 누이동생인 황보수는 가병 백여명을 이끌고 압록강으로 가,부교를 불태워 거란의 진군을 늦춘다.고려 조정에서는 안북부에 사령부를 설치하고,중군사 서희에게 봉산으로 가 거란군을 막도록 명한다. ●내인생의 황금기(MBC 오후 7시55분) 만세는 인식과 희경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효은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꼭 찾아와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만세는 효은이를 돌려 달려고 부탁한다.태일은 희경과 인식에게 자신이 벌인 일이라며 그저 황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고 말한다. ●유리의 성(SBS 오후 8시50분) 준성은 힘들어하는 민주를 위해 어머니 인경에게 민주가 방송사에 복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거나 분가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인경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이에 준성은 옷가방을 싸들고 처가로 가버린다.양숙은 짐을 싸들고 나타난 사위 준성을 보고 불안해 어쩔 줄 몰라한다. ●토론광장(EBS 오후 10시10분) 200 8년 교육계는 역사교과서 좌·우편향 논란,전국 단위 학업성취도 평가 시행,교육감 불법선거 논란,7명의 교사 파면 및 해임 등의 문제들을 남기는 갈등과 반목의 한해였다.2008년 주요 이슈들의 성공과 실패를 점검해보고, 2009년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교육정책들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다.
  • [씨줄날줄] 세종대왕함/황진선 논설위원

    1866년 10월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 7척과 해군 600명을 이끌고 교전 끝에 강화성을 점령했다(병인양요).1871년 6월 미군은 군함 2척과 전투대원 644명을 앞세워 강화도의 초지진,덕진진,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했다(신미양요).두 양요(洋擾)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조선침탈의 서곡이었다.당시 강화도 수비진은 함포사격 몇방에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해양을 제패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다.19세기의 영국,20세기와 21세기의 미국이 그렇다.현재 미국은 글로벌 경찰이다.좋든 싫든 어느 나라도 미국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우리나라에도 한때 해상제국의 시대가 있었다.1200년 전 신라시대의 장보고는 동북아의 해상왕국을 건설해 멀리 아라비아까지 이름을 떨쳤다. 세계의 열강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다.중국 인민해방군은 지난달 2010년까지는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러시아 태평양함대 역시 지난 10월 10년 안에 새 항공모함을 태평양에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가 미국,일본,스페인,노르웨이에 이어 5번째 이지스함 보유국이 됐다.해군은 어제 우리 손으로 만든 7600t급 이지스구축함 세종대왕함을 작전에 배치했다.이지스함은 강력한 레이더로 수백㎞ 떨어진 적의 유도탄과 항공기를 요격할 수 있는 현대전의 총아다.세종대왕함은 1000여개 표적을 동시에 탐지해 그중 20개 표적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고 한다.미국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나라의 이지스함보다 더 강력한 전력을 갖췄다.이제 우리도 연안해군에서 명실공히 대양(大洋)해군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해군은 이미 한국형 구축함으로 3100t급 광개토대왕함,을지문덕함,양만춘함 등 3척과 4300t급 충무공이순신함, 문무대왕함,대조영함,왕건함,강감찬함,최영함 등 6척을 갖고 있다.2012년까지는‘율곡 이이함’을 포함해 이지스함 2척을 더 작전에 배치한다는 계획이다.세종대왕은 북방의 4군6진을 개척해 조선의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장했다.우리 구축함들도 자주국방과 21세기 해양국가시대의 첨병이 되었으면 한다. 황진선 논설위원 jshwang@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읽기] (103) 환향녀의 슬픔,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병자호란 다시읽기] (103) 환향녀의 슬픔,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속환이나 도망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여인들(還鄕女) 앞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사족(士族) 부녀자들은 ‘오랑캐에게 실절(失節)한 여자’라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다.일부 신료들은 ‘속환되어온 며느리에게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는 없다.’며 이혼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출가했던 딸이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 친정 부모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이혼을 섣불리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론도 있었지만,대부분의 사족 환향녀들은 본래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다.피로(被擄)로 말미암은 슬픔과 비극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환향녀의 이혼 문제를 둘러싼 논란 1638년(인조 16) 3월 조정에는 상반된 내용을 담은 두 개의 호소문이 올라왔다.억울한 사연을 인조에게 호소했던 주인공은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와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이었다.그들의 호소는 모두 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장유는 자신의 외아들 장선징(張善徵)과 속환되어 돌아온 며느리가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실절한 며느리에게 선조의 제사를 계속 맡길 수 없으니 아들이 새 장가를 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요지였다.한이겸의 사연은 장유의 호소 내용과는 정반대였다.그는 ‘자신의 딸이 속환되어 왔는데,사위가 딸을 버리고 새 장가를 들려고 하는 것이 원통하다.’며 인조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한 사람은 시아버지의 입장에서,다른 한 사람은 친정아버지의 입장에서 전혀 상반된 호소를 하고 있는 셈이다.입장이 난처해진 예조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은 뒤 결정해야 한다고 물러섰다. 좌의정 최명길이 나섰다.그는 먼저 임진왜란 이후의 고사를 떠올렸다.‘제가 고로(故老)들에게 들었는데,왜란 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당시 어떤 종실(宗室)이,송환된 아내와의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또 어떤 벼슬아치가 새장가를 든 뒤,본래의 아내가 쇄환(刷還)되자 선조께서는 후취(後娶)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시고 본처가 죽은 뒤에야 후취 여인을 비로소 정실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그밖에 재상이나 고관들 가운데 쇄환되어 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손을 낳아 명문 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예(禮)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한 가지에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명길은 단호했다.이혼을 허락하면 안 된다고 했다.이혼을 허락할 경우,수많은 부녀자들이 속환을 포기하고 이역에서 원귀(寃鬼)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조, 훈신(勳臣)의 독자 장선징에게만 특별히 이혼 허락 최명길은 또한 ‘속환을 통해 돌아온 부녀자들 모두가 실절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그는 끌려간 조선 여인들 가운데 청인의 회유와 협박에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또 청인들 중에도 그런 조선 여인들의 절조에 감명 받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례를 들었다.최명길은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고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들어 환향녀들을 무조건 ‘실절한 여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장유와 한이겸의 상반된 호소 내용에 대해 최명길 이외의 다른 대신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하지만 최명길의 주장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그것은 ‘인조실록’의 사신(史臣)이 최명길의 주장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던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최명길을 비판했던 사평(史評)의 핵심은 이렇다.‘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포로가 된 부녀자들은,비록 본심은 아니었지만,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사평에 따르면 환향녀들이 포로가 되면서 죽지 않았던 것 자체가 이미 허물이 되고 죄가 되는 셈이다. 사평은 다시 최명길에게 화살을 돌린다.‘실절한 여자를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최명길은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이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최명길의 주장은 철저히 매도되었다. 장유 집안의 ‘이혼 문제’는 이후에도 다시 논란이 되었다.1640년(인조 18) 9월에는 장유의 아내가 예조에 다시 호소문을 올렸다.이번에는 호소문 속에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으니 이혼시켜 주기를 청한다.’는 내용이 있었다.당시 장유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번에도 대신들의 의견은 일단 신중했다.‘섣불리 이혼을 허락하면,부부 사이에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너도나도 이혼하겠다고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인조는 고육책을 내놓았다.‘이혼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장선징이 훈신(勳臣)의 독자임을 고려하여 특별히 그에게만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그 파장은 컸다.대부분의 사대부 집안들은,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며느리들을 내쳤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아들였다.사족 출신 환향녀들은 대부분 버림받고 말았다.사책(史冊)에도 이 여인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이 가엾은 희생자들의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끌려가던 안단 “나를 죽을 곳에 빠트린다” 울부짖어 환향녀들의 운명은 가혹했지만,포로들 가운데는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속환해 줄 가족도 없고,가족은 있어도 경제적 능력이 없고,또 도망쳐 돌아올 여건도 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청에 그대로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속환의 가능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던 와중에도 귀향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현종대에 도망쳐 온 안추원(安秋元)과 숙종대에 도망쳐 온 안단(安端)의 사연이 주목된다. 개성 부근에 살다가 1637년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던 안추원은 심양으로 끌려갔다.1644년 청이 입관(入關)에 성공하자 안추원은 주인을 따라 북경으로 흘러들어 갔다.그는 1662년(현종 3) 탈출을 시도했다가 한 번 실패한 뒤 1664년 다시 시도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산해관을 통과하고 만주를 가로지르는 대모험이었다. 조선 조정은 28년 만에 탈출한 안추원을 고향인 개성으로 보냈다.하지만 개성에는 그를 품어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조정 또한 그에게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혈혈단신의 처지에 생계마저 막막해진 안추원은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하지만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책문(柵門)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안단의 사연은 더 기막히다.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되었던 그 또한 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가 사역되었다.안단은 1674년(숙종 즉위년) 자신의 주인이 행방불명되자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포로로 붙잡혀 끌려간 지 물경 37년 만이었다.안단은 산해관을 통과하여 봉황성(鳳凰城)을 거쳐 압록강의 중강(中江)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의주부윤은 그를 결박하여 봉황성으로 압송했다.청의 힐문을 의식한 조처였다.입국을 거부당하고 봉황성으로 끌려가던 안단은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며 울부짖었다. 안추원과 안단의 사연은 처절하다.각각 28년,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둘 모두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지만,한 사람은 고국에서 결국 적응하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끝내 압록강을 건너지도 못했다.이들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전란의 비극에 휘말렸던 수많은 생령들의 처참한 고통을 생각하면서 오늘 이 전쟁을 다시 성찰해야 할 필연성을 새삼 절감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2)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2)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③

    당시 포로들을 속환해 오는 방식은 몸값을 누가 마련하느냐에 따라 크게 사속(私贖)과 공속(公贖)으로 나눠지고 있었다.사속이란 일반 사민(士民)들이 스스로 마련한 몸값을 갖고 심양에 들어가 혈육을 데려오는 방식이었다.공속은 국가가 몸값을 대고 포로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어느 경우든 포로를 팔아 한 밑천 챙기려는 청인들의 탐욕,조선의 고관들이나 재력을 갖춘 사람들의 무절제 때문에 속환가(贖還價)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거기에 속환 과정에서 부정과 비리까지 더해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환은 그저 ‘남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또 속환을 통해 돌아오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해야 했다.이래저래 포로들의 고통은 끝이 없었다. ●속환의 문제점과 허박(許博)의 절규 몸값을 마련할 수 없는 사민들의 입장에서는 공속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었다.하지만 공속의 대상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전란 직후,국가의 재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서 조정은 공속의 대상자를 종실(宗室),인조를 호종(扈從)했거나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로 제한했다.종실은 왕실의 피붙이이기에 가장 우선적인 속환 대상이 되었고,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국가 유공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국가가 몸값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공속의 대상자도 아니고,비싼 속환가를 마련하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은 결국 속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심양으로 달려갔지만 폭등해 버린 속환가 때문에 혈육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야 했던 사람들,아예 속환가를 마련할 방도가 없어 압록강 너머의 만주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처참한 장면이었다. 속환 자체가 사실상 무역으로 변질되면서 갖은 부작용과 부정 행위도 같이 일어났다.상인들 가운데는 심양을 왕래하며 ‘사람 장사’를 하는 자들이 있었다.청인으로부터 포로를 싼값에 사서 조선에 돌아온 뒤,포로의 연고자에게 비싼 값으로 되파는 방식이었다. 실종된 혈육을 가진 사람들의 애끓는 심정을 악용하여 뇌물을 챙기는 관원들도 나타났다.당시 조정은 심양에 억류된 포로들의 명단을 청 측으로부터 넘겨받아 이른바 ‘피로인성책(被擄人成冊)’을 만들었다.실종된 가족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발을 구르던 사람들에게는 ‘성책’을 열람하는 것이야말로 속환을 위한 첫걸음인 셈이었다.하지만 당시 비변사에 보관되어 있던 ‘성책’을 열람하는 과정에서 관련 당상(堂上)이나 서리들이 뇌물을 받아 문제가 되었다.곤경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을 등치는 파렴치한 행위였다. 이런저런 요인들 때문에 속환을 통해 포로들을 데려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누구보다 속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예조좌랑 허박(許博)은 1637년 9월,인조에게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글자 수가 1만자에 이르는 장문의 상소였다.그는 인조에게 속환을 전담하는 기구와 관원으로 속환도감(贖還都監)과 속환사(贖還使)를 설치하라고 촉구했다.그는 몸값 마련을 위한 방책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속환가로 충당되는 은을 마련하기 위해 은광(銀鑛)을 개발하고,벼슬아치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속환의 절박성을 설명하여 성금을 거두라고 건의했다.허박은 또한 왕실과 조정이 절용(節用)에 솔선하고,속환 과정의 부정과 비리를 제거하고,속환가를 엄격히 제한하라고 촉구했다.그는 나라의 가용 재원을 총동원하여 속환에 나서라고 촉구하고,그렇지 않을 경우 백성들의 원망이 극에 이르고 그것이 궁극에는 조정을 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하지만 허박이 제시한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은 수용되지 못했다. ●속환은 시들해지고,청의 압박은 강화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의 속환 대책은 점차 흐지부지되어 갔다.속환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되었다.조선 조정이 속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오히려 청 측에서 먼저 속환을 종용하는 경우도 나타났다.1641년(인조 19) 6월,용골대(龍骨大)는 심관(瀋館)의 조선 관리들에게 자신의 곤궁한 경제적 사정을 이야기한 뒤,자신이 데리고 있던 열 살 아이를 속환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속환 문제를 포함하여 포로들에 대한 조선 조정의 관심이 점차 시들해지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은 도망해 온 포로(주회인)들을 송환하라는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병자호란 당시 워낙 많은 수의 포로가 잡혀갔기 때문에 주회인의 수도 크게 증가해 있는 상태였다.청은 때로는 심양의 소현세자에게,때로는 직접 서울로 사신을 보내 주회인들을 잡아 보내라고 협박했다. 정묘호란 무렵,조선 조정은 ‘부모 된 자로서 고향을 찾아 도망쳐 온 자를 차마 잡아 보낼 수 없다.’는 인정론(人情論)을 들어 청측의 요구를 무마하고자 했다.하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이 같은 인정론이 통하지 않았다.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인조를 입조(入朝)시킨다.’고 하거나 ‘애초 산성에서 나올 때 왕을 교체하려 했는데,그러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는 등의 풍문을 흘려 인조를 직접 압박했다. 인조와 조정은 청의 압박에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각 지방의 수령들에게 주회인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부작용이 속출했다.수령들 가운데는 책임을 때우기 위해 주회인이 아닌 사람까지 마구잡이로 붙잡아들이는 자가 있었다.도망친 주회인 대신 가족을 잡아들이기도 했다.붙잡힌 주회인들 가운데는 청으로의 압송을 기다리며 몇 년씩 감옥에서 고통을 겪는 자들도 있었다. 당연히 민심이 흉흉해졌다.1641년(인조 19),유례 없는 대한재(大旱災)가 일어나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포로들을 도로 붙잡아 보내 하늘이 노했다.’는 수군거림이 나타나고 있었다. ●귀환 과정의 고통 청으로 끌려간 포로들 가운데 속환 또는 도망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 행운아였다.하지만 그 ‘행운’도 잠시일 뿐 그들의 고통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우선 도망이나 속환을 통해 조선으로 귀환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었다.도망자들은 낮에는 산 속 등지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을 이용하여 이동했다.당장 이동하는 도중에 굶어 죽을 위험성이 대단히 높았다.또 산 속에서 맹수를 만나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렵사리 심양부터 진강(鎭江-오늘날의 단둥·丹東)에 이르는 만주 지역을 통과하더라도,압록강변에 이르면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변방 관리들은 청의 힐책을 우려하여 주회인들의 도강을 허용하지 않았다. 입국이 막힌 주회인들이 강물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어 죽는 경우가 속출했다.1642년 2월,정언(正言) 하진(河?)은 ‘창성(昌城)과 삭주(朔州)의 압록강 줄기 위아래에 백골이 널려 있고,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들이 없다.’며 참혹한 실상을 증언한 바 있다. ‘합법적인’ 속환인들의 사정도 주회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들 또한 만주를 통과하고,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오는 도중 아사할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었다.이동하는 도중 식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1637년 윤4월,조정에서는 미곡을 통원보(通遠堡) 서편으로 운송하여 속환인들에게 공급하자는 대책이 제시된 바 있다.또 조선에서도 속환인들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따져 적당한 곳에 진제장(賑濟場)을 세워 구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여성 포로들 가운데는 귀환 도중 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그 때문에 조정은 1637년 2월,포로들이 지나는 연로와 나루터 등지에 병력을 배치하고,사족 부녀들을 잡아가는 자들을 붙잡아 효시(梟示)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하지만 아사와 납치의 위험성 등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귀향에 성공한 여성 포로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실절(失節)한 여자’라는 비판과 매도였다.병자호란 당시 포로들의 삶은 시종일관 참혹한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하재봉의 영화읽기]신기전

    [하재봉의 영화읽기]신기전

    역사적 고증과 과학적 합리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는 하나, 의심할 바 없이 <신기전>의 영화적 위치는 고양된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하는 데 우뚝 서 있다. 설계도가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로켓 <신기전>의 흥분된 이야기는, 조선 건국 초인 1448년, 세종 30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고려조의 유민이 아직 잔존해 있던 건국 초기의 불안한 정세 속에서, 조공을 바치던 강대국 중국의 눈치를 보며 조선이 명나라 몰래 놀라운 병기, 세계 최초의 로켓포를 계발하려고 했다는 가설을 <신기전>의 내러티브는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물론 <신기전>의 근거는 지금도 문헌으로 남아 있는 《총통도감》에 기초해 있지만, <신기전>의 피와 살을 형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인물이나 내러티브는 모두 허구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신기전>의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30년 9월 13일, 세종은 총통등록을 각 도에 전달하며 ‘화기를 개발하고 쏘는 연습을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지금도 남아 있는 《총통등록》은 최무선에 의해 화약이 계발된 이후 화기인 주화로부터 시작된 신기전, 그리고 화기를 나르는 화차 개발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세종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과 싸우며 4군 6진을 만들고 영토확장을 이루는데 신기전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기전은 소·중·대 3가지 종류가 있는데 화살 끝에 화약이 장착되어 있으며 대신기전의 경우 화차에서 발사되면 약 2km 이상을 날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서양의 로켓 개발보다 무려 300여 년 앞선 과학적 쾌거였다. 임진왜란을 거쳐 영조 4년(1728년) 안성에서 반군을 제압하는데 신기전이 사용되었다는 문헌 이후 우리 역사 속에서 실종된 신기전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은, 1975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채연석 박사에 의해서였다. 채 박사에 의해 다시 발견된 신기전의 설계도는 세계우주항공학회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로켓 설계도로 인정받았다. 왜 조선 역사 속에서 신기전의 존재가 희미하게 남아 있고 나중에는 실종되어 버린 것일까? 중국이나 일본 등 신기전 개발을 달가워하지 않던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부국강병의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신기전>은 사료에 기초해서 신기전 개발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국제역학관계를 현실에 빗대어 생각할 수 있게끔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다. 영화 <신기전> 속 꿈같은 이야기는 상당 부분 역사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이만희는 이러한 사료를 기초로 작가적 상상력을 작동시켜, 고려 유민의 후손으로 반역죄로 처형당한 아버지의 한을 품고 상인으로 살아가는 설주(정재영 분), 최무선의 손녀딸로 신기전 계발의 핵심 역할을 하는 홍기(한은정 분), 세종의 밀명을 받고 명의 감시를 피해 신기전 개발에 힘을 보태는 호위무사 창강(허준호 분), 명나라의 감시를 피해 학계의 응축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민간차원에서 신기전이 개발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세종(안성기 분) 같은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었고, 현실적으로 수긍할만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신기전>의 드라마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분위기로 시작된다. 창강은 신분을 알 수 없는 홍리의 신변보호를 상인 설주에게 의뢰한다. 물론 거액의 보수가 따르지만, 창강이 특별히 설주에게 홍리를 부탁한데는 이유가 있다. 홍리는 고려 말 화약 제조자 최무선의 딸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홍리와 함께 신무기 개발을 하던 중 명나라 자객단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조선이 로켓포를 만드는 것을 경계해 왔던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세종과 궁궐 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세종은 명나라의 감시망을 피해 은밀히 신기전이 완성될 수 있도록 창강에게 명하고 창강은 신기전 개발의 키를 쥐고 있는 홍리를 설주에게 맡긴 것이다. 지금은 상인이지만 그 역시 역모혐의로 처형당한 아버지와 함께 화약 개발에 참여했던 경력이 있다. <신기전>은 크게 명나라의 감시를 피해 설주-홍리 커플이 신기전을 개발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미묘한 감정이 싹트는 두 사람의 사랑, 명나라와 여진의 10만 연합군에 맞서 신기전을 이용해 조선군이 승리를 거두는 피날레로 이루어져 있다. <신기전>에는 상투적인 로맨스, 신파에 가까운 사랑 장면이 들어 있고, 국수주의적 시각도 있지만, 강대국 아래서 자주국방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세종의 신기전 개발 이야기가 현재 우리 상황과 맞물려 많은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 <신기전>을 볼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이만희 작가의 튼튼한 극본 때문이다. 이만희 작가는 “침대에 누워 졸린 눈을 달래가며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꾸역꾸역 읽어 내려가다 나는 어느 대목에서 벌떡 일어나 고쳐 앉았다. 그것은 ‘발칙한 조선은 듣거라’ 라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왕에게 칙서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 말이었다.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발칙한 조선이라니…, 이런 저급한 말은 하인에게도 아니 쓴다. 아, 조선은 이랬구나.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초라하게 당했구나. <신기전>은 울분으로 쓴 작품이다. 이런 굴욕과 울분은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 난 신기전을 통해 선조들이 이 강산을 어떻게 지켜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약속>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스케일을 가진 <신기전>을 만들면서 김유진 감독은,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짜임새 있는 연출 감각을 보여준다. 웃음을 줄 때와, 긴장감을 지속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할 때의 완급조절을 부드럽게 이끌면서 결과적으로 긴장과 이완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대중적 재미와 흥행력을 갖춘 영화를 만들었다. 이 감독은 “신기전은 우리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아주 명쾌하고 유쾌한 영화다. 웃음, 슬픔, 액션,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까지… 복합적인 재미를 주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서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김유진 감독은 기대하고 있었다. “온 가족이 볼 수 있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영화를 생각하고 만들었다. 신기전은 그렇게 오락영화를 추구하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면서 사실과 허구의 차이점에 대해 묻는 질문에 핵심을 피해나갔다. “신기전은 사극이지만 코미디와 멜로 요소가 많이 들어 있으며, 처음부터 액션, 사랑, 웃음, 슬픔을 한 구조 속에 녹여서 가려고 생각했다. 흥행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도 당연히 코미디와 멜로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기전>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와의 경계를 교묘하게 흔들면서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하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흥행력과 영화적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야사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허구적 상상력의 소산인 종반부 명나라와의 대결에서, 조선의 비정규군이 사용하는 신기전 발사 장면은 통쾌함을 안겨준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 그때 만약 우리가 신기전을 진짜 개발했고 그것을 이용해서 만주 땅을 되찾았다면, 혹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초토화시키고 대마도까지 정벌해 버렸다면. 이런 가정은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런 가정이 지금의 현재적 역사에 주는 교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의 국수주의적 정서를 자극하며 민족적 자긍심에 기대어 흥행 홈런을 노리는 <신기전>이지만, 그 이유만으로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미래의 역사라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며, 과거의 역사가 새로운 현실인식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부여한다면 충분한 의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글 하재봉 시인, 영화평론가, 동서대 교수
  • KBS, 사극 사상 첫 ‘곰 전투’ 촬영 성공

    KBS, 사극 사상 첫 ‘곰 전투’ 촬영 성공

    국내 사극 사상 최초로 ‘곰 전투’ 장면이 선보여 진다. KBS 2TV는 7일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연출 신창석·극본 손영목)’를 통해 드라마 사상 최초로 실제 곰을 투입한 전투 장면을 방송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KBS 2TV 대하 사극 ‘천추태후’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계속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대 고려의 이상을 품고 거란의 침략에 맞섰던 여걸 천추태후(채시라 분)의 전투 활약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을 높이고자 기획된 작품. ’천추태후’ 제작진은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할 당시를 그려내면서 ‘요나라, 송나라가 맹수를 풀어 전쟁에 사용했다’는 역시기록을 재연해 내기 위해 실제 곰을 촬영에 투입, 최근 곰 전투 장면을 성공적으로 담아냈다.”고 알렸다. 제작진은 “당초 생생한 곰 촬영을 위해 중국 로케이션에서 대규모 촬영도 계획됐으나 제작비 부담이 워낙 커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며 “대신 차선책으로 국내 촬영에 특수 효과 삽입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남 합천 황매산에서 대규모 전투장면을 촬영 한 뒤 실제 곰의 움직임을 촬영했다.”며 “약 두달 동안 특수영상을 입히는 작업을 거치면서 완성도 높은 곰 전투장면을 완성하게 됐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천추태후’ 연출을 맡고 있는 신창석 PD는 “역사기록에 근거한 재미있는 스토리와 영상을 많이 준비했는데 ‘곰 전투 장면’은 그 중 하나”라며 “2009년 새해에는 ‘천추태후’를 통해 시청자들과 함께 고려시대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천추태후’는 고려 시대 ‘잔다르크’로 불리는 천추태후의 파라만장한 일생을 다룬 사극이다. 태조왕건의 손녀딸인 천추태후는 극 중 강감찬 장군과 함께 거란의 침략에 맞서 싸워 세 차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여걸이자 대립과 정쟁의 고려 초를 진취적으로 돌파한 여태후로 그려진다.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0)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0)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①

    ‘우리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다음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청 태종 홍타이지가 1637년 1월,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제시했던 포로 관련 조건이었다.참으로 무서운 조건이었다.당시 서슬 퍼렇던 청의 위협 앞에서 조선 조정은 약조를 어기기 어려웠다.실제 조선으로 도망쳐 온 포로들 가운데 도로 붙잡혀 청 측에 넘겨진 사람들의 운명은 가혹했다.그들은 ‘도망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酷刑)을 받았다.끔찍한 일이었다.참혹하기 그지없는 ‘포로 문제’야말로 병자호란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이자 인조정권을 계속 고민하게 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청의 포로에 대한 집착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被擄人)은 얼마나 될까.전쟁이 끝난 뒤,최명길은 가도(椵島)의 명군 지휘부에 보낸 자문(咨文)에서 피로인의 수를 50만명으로 추정했다.쉽사리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이다.조선이 청의 침략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명 측에 강조하기 위해 포로의 수를 부풀렸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나만갑(羅萬甲)이 ‘병자록’에서 ‘청군이 철수하는 동안 매번 수백 명의 조선인들을 열을 지어 세운 뒤 감시인을 붙여 끌고 가는 것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거나 ‘뒤 시기 심양(瀋陽) 인구 60만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 사람’이라고 서술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최명길의 추정이 과장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50만명은 안 될지 몰라도 적어도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꽤 높아 보인다.  청은 어떤 배경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포로들을 끌고 갔을까.청은 일찍이 후금(後金)시절 이전부터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포로들을 획득하는 데 골몰했다.후금은 전투,납치 등을 통해 한인(漢人)과 몽골인들은 물론 조선인들을 잡아가곤 했다.그들은 후금으로 끌려가 농장 등지에서 노비로 사역되었다.신체가 건장한 자들은 군대에 편제되어 또 다른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고,여자들은 궁중에 들어가 시비(侍婢)가 되기도 했다.특히 철장(鐵匠),야장(冶匠) 등 특별한 기능을 가진 포로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우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 1627년 후금이 정묘호란을 도발했을 때,조선에 들어온 병사들 가운데는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서 포로가 되었던 조선 출신 병사들도 끼어 있었다.  영역은 날로 늘어나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후금은 이후에도 ‘포로 사냥’에 몰두했다.특히 1629년 이후 명을 수시로 공략하면서 매번 수만에서 수십 만의 한인들을 납치했다.그들은 후금의 새로운 인구가 되고,노동력이 되었다.따라서 병자호란 무렵에 오면,청은 이미 상당한 수의 한인 노동력을 확보한 상태가 되었다.이제 조선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은 단순히 노동력이라기보다는 돈을 받고 판매할 ‘무역 상품’으로서의 의미를 더 크게 지니게 되었다.   ●포로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    이미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선은 청(후금)과 ‘포로 문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특히 심각했던 것은 후금에 정착했다가 조선으로 도망쳐온 포로(走回人)들을 처리하는 문제였다.후금은 조선에 대해 주회인들을 조건 없이 돌려보내거나,아니면 그들의 몸값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조선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다.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다.  청과 조선은 포로를 바라보는 개념과 인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청은 포로를 ‘혈전(血戰)을 벌여 얻어낸 정당한 성과’로 인식했다.말하자면 피를 흘려 얻은 일종의 ‘소유물’이자 ‘재화’였던 것이다.따라서 포로들이 달아나는 것이나,달아난 포로들을 숨겨주고 송환하지 않는 조선의 행위에 대해 극도의 불만과 분노를 표시했다.  조선은 달랐다.정묘호란 직후의 기록을 보면,조선 신료들은 포로들이 도망쳐 오는 것을 ‘혈육과 고향을 간절히 그리는 마음 때문에 이루어진 부득이한 행동’으로 여겼다.따라서 주화인들을 붙잡아 후금으로 도로 넘겨주는 행위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不忍之事)’이었다.나아가 도망 포로들을 붙잡아 보내라고 독촉하는 청의 요구를 ‘짐승 같은 오랑캐들의 탐욕에서 나온 행위’로 매도했다.  조선은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일본으로부터 포로를 송환해 왔던 경험이 있었다.1607년 이른바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보내 처음으로 데려온 이후 통신사가 갈 때마다 포로들의 송환 문제를 교섭했다.당시 대마도와 막부(幕府)가 포로들을 일부 돌려준 것은,조선의 원한을 다독여 국교를 재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어쨌든 일본과의 그 같은 경험을 통해 ‘포로 문제’에 대한 조선의 생각은 나름대로 굳어졌다.‘똑같은 오랑캐임에도 일본인들은 포로 송환에 성의를 보였는데,만주족 오랑캐들은 어찌 이렇게도 잔인하단 말인가’.  자연히 조선 조정은 주회인 송환에 극히 소극적이었고,청의 압박이 몹시 강해진 상황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몇몇 주회인들을 잡아 보내 입막음을 시도하곤 했다.실제 정묘호란 무렵까지만 해도 후금 또한 ‘포로 문제’ 때문에 조선을 끝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았다.아직 명과의 대결을 위한 준비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데다,그런 상황에서 조선을 다시 공략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통해 청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던 조선은,과거처럼 ‘혈육을 찾아 도망쳐온 포로들을 차마 잡아보낼 수는 없다.’는 식의 ‘호소’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홍타이지가 제시한 조건에서도 드러나듯이 ‘포로 문제’를 둘러싼 청의 압박이 정묘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조선,속환(贖還)을 시작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의 압박 때문에 주회인들을 숨겨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이 같은 상황에서 청에 끌려간 혈육들을 데려올 수 있는 길은 속환(贖還)이 거의 유일했다.속환이란 포로의 몸값을 청 측 주인에게 치르고 데려오는 것을 말한다.포로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인간 시장’이 서게 되었고,몸값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일종의 ‘상품’이 되었다.  청의 용골대는 1637년 4월,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에게 속환에 대한 청 측의 방침을 통보했다.그들은 속환과 관련하여 ‘청군이 조선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한 뒤부터 심양에서 시작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즉 중간에서의 속환은 불가능하고,속환을 원하는 포로의 보호자가 직접 심양으로 올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소현세자는 이 내용을 4월13일 본국에 보고했고,조선 조정은 비로소 속환 준비에 나서게 되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속환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하지만 그것은,전란 시기 행방불명된 혈육을 갖고 있었던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그 단적인 사례로 대사간 전식(全湜·1563~1642)의 경우를 들 수 있다.병자호란 중에 행방불명된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를 태웠던 그는,아들이 죽은 것으로 치부하여 가짜 묘까지 만들어 장례를 치를 생각을 했다.하지만 속환이 곧 시작된다는 소식에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이 심양에 포로로 끌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전식은 1637년 4월,심양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어 있던 좌의정 이성구(李聖求)에게 아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른다.살아 있기만 하면 속환해 오는 데 드는 몸값 등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자식을 비롯하여 헤어진 혈육들이 생존해 있기를 바라고,그들을 속환해 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조선 사람들의 비원(悲願)이었다.하지만 그 비원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높은 관직에 있거나,많은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려웠다.바로 거기에 ‘포로 문제’를 둘러싼 또 다른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이용원 칼럼] 북한 붕괴, 그 최악의 시나리오

    [이용원 칼럼] 북한 붕괴, 그 최악의 시나리오

    20××년 어느날, 동해에 떠오른 태양이 만주벌의 어둠을 채 밀어내기도 전이었다. 압록강변 단둥(丹東)시에 대기하던 중국군 O사단은 우렁찬 구호와 함께 다리를 건너 북한 땅으로 진격했다. 국경 초소를 지키는 북한군 장병 중에는 진군을 가로막으려는 시늉조차 하는 자가 없었다. 중국군은 사전계획대로 북한의 주요 도시를 거점 삼아 점령했고, 평양에는 곧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괴뢰정부 수반은 취임 직후 “조선이 내부 분열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위협에 노출된 위기 상황에서 사회주의 형제국인 중국이 우리를 보호해준 데 감사한다.”는 담화를 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와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사분오열을 거듭하던 북한 권력층은 노골적인 권력투쟁에 들어갔다. 가뜩이나 어렵던 경제 사정은 더욱 악화해 굶어죽은 시신이 들판에 널렸고 탈북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국과 미국 등은 북한 사태를 예의주시했지만 중국군의 전격적인 북한 ‘진출’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10년 후, 북한 땅의 학생들은 “북한은 원래 중국 땅이며 북한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배운다. 어른들 중에도 “우리가 중국인이 되기 전에 굶어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제 어느 가정에나 보급된 대형 TV 앞에 앉은 ‘옛 조선 인민’은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초강대국인 그들의 조국 중국에 자부심을 느낀다. 지난 9월 이후 김정일 위원장의 중병설이 계속 이어지면서 김정일 사후 북한의 운명에 관한 각종 시나리오가 등장하고 있다. 그 시나리오들은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어도 큰 흐름에서는 비슷하다. 김 위원장 생전에 후계구도를 안착시킬 시간 여유가 없는 한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 발생은 불가피하며 결국 몰락의 수순을 밟으리라는 것이다. 북한은 분단 이후 60여년 동안 ‘유일한 지도자 동지’ 두 명이 대를 이어 통치해 온,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전체주의 국가이다. 그런 나라에서 지도자 동지가 사라졌는데 후계자(집단)가 전임자와 같은 권위·권한을 갖고 개혁·개방을 강력하게 추진, 부강한 국가를 재건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북한이 국가 체제를 더이상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 빠졌을 때 주민들과 권력층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한국과 손을 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 기대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 체제가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통일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은 중국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북한정권 수립 이후 가장 많이, 또 꾸준히 경제원조를 했으며 6·25때는 함께 피를 흘린 혈맹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사회주의 형제국’이다. 게다가 중국 국적을 갖고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조선족이라는 역할모델도 있다. 중국에 통합되더라도 거부감이 적을 수밖에 없다. 반면 한국은 한겨레 국가이기는 하나 여전히 주적이요, 그 배후에는 ‘원쑤’인 ‘미제’가 도사리고 있다. 앞으로 몇년이 남북이 통일될지, 북한이 중국에 넘어갈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세월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부건 민간 차원이건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동족의식을 북돋우는 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북한이 붕괴해 중국에 귀속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는 길은 그것뿐이다. 수석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압록강은흐른다’, 무난한 시청률 잔잔한 감동

    ‘압록강은흐른다’, 무난한 시청률 잔잔한 감동

    SBS 창사특집드라마 ‘압록강은 흐른다’(극본 이혜선ㆍ연출 이종한)가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무난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15일 시청률조사회사 TNS미디어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14일 3회 연속 방송된 ‘압록강은 흐른다’는 1부 7.1%, 2부 8.6%, 3부 7.0%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 다른 시청률 조사회사인 AGB닐슨미디어리서치 결과에서도 1부가 7.9%, 2부가 10.4%, 3부가 7.8%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방송된 다른 프로그램과 비슷한 수준으로 집계됐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ㆍ독 수교 125주년을 맞아 SBS와 독일 방송사 BR이 공동으로 제작한 드라마로, ‘압록강은 흐른다’의 동명소설 원작자인 이미륵(본명 이의경 분)의 삶을 조명했다. 이미륵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이야기는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와 속편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를 각색했고 소설로 쓰여지지 않은 그의 독일에서의 생활은 수필과 서간문, 신문기사,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픽션으로 재구성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후 나치의 탄압 속에서도 따스한 인간애로 독일인을 감동시킨 이미륵의 일대기는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방송 후 ‘압록강은 흐른다’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오랜만에 보는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자랑스런 인물의 일대기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시대의 아픔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등 호평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2부 마지막 부분에서 화면이 빨리 감기는 방송사고가 발생해 시청자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사진=sbs 서울신문NTN 정유진 기자 jung3223@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獨망명 작가 이미륵의 삶 재조명

    獨망명 작가 이미륵의 삶 재조명

    SBS는 소설가 이미륵(1899~1950)의 생애를 조명한 창사특집 드라마 ‘압록강은 흐른다’(극본 이혜선·연출 이종한)를 14일 오후 8시50분에 방송한다. 한·독 수교 125주년을 맞아 SBS와 독일 방송사 BR(Bayerischer Rundtunk)이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1946년 발표된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와 후속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를 토대로 했다. 이 작품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이미륵이 경성의전 재학시절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를 거쳐 독일까지 건너가게 된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담겨 있다. 독일로 망명한 이미륵은 소설가로 변신해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문제와 동양의 문화, 사상을 작품으로 풀어냈다. 당시 독일 평론가들은 그의 문장을 카프카나 베른하르트에 견줄 만큼 간결하면서도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총 12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드라마는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는 이미륵의 가족사와 성장기,2부에서는 그의 독일 탈출기와 정착기,3부는 독일에서 한국의 정서와 동양철학을 전파하는 원숙기를 그린다. 특히 주인공 이미륵 역을 위해 무려 4명의 배우가 출연해 눈길을 끈다.5살 미륵과 11살의 소년 미륵 역에는 SBS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린 연산군으로 출연했던 정윤석 군과 어린이드라마 ‘고스트팡팡’에서 열연한 노민우군이 각각 맡았다. 청년 미륵에는 SBS 7기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성녀와 마녀’,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그놈 목소리’등에 출연한 연기자 최성호가 캐스팅됐다. 그리고 중년 미륵에는 현재 10여년 가까이 독일에서 활동 중인 오페라가수이자 배우인 우벽송이 맡아 열연을 펼친다. 이밖에도 신구, 나문희 등 중견 연기자와 귀화 독일인 이참 등 독일 배우들이 참여했다. 드라마 제작진은 지난 7월 초 독일과 미국에 있는 배우들을 화상 오디션으로 선발한 뒤 서울과 인천, 경남 하동, 전남 구례, 전북 고창 등과 독일 현지 촬영 등 총 4개월간 촬영했다. 독일에서는 2009년 BR방송에서 전파를 탈 예정이다. 연출은 ‘관촌수필’,‘화려한 시절’,‘토지’ 등을 지휘한 이종한 PD가 맡았다. 이PD는 “이미륵이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킨 핵심을 알려주고 싶었다.”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전쟁 속에 숨은 휴머니즘 등을 조명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항일 독립군 무덤 4기 中서 발견

    일제식민지 당시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 독립운동을 벌이다 순국한 독립군의 무덤 4기가 중국 랴오닝(遼寧)성 지안(集安)에서 발견됐다.1925년 2월25일 벌어진 고마령 전투의 희생자로 추측된다. 고마령(古馬嶺) 전투는 일본의 평북 초산경찰서 경찰대가 압록강을 건너 고마령에서 독립군 참의부 2중대 본부를 급습해 벌어진 유혈 충돌이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독립군 측 간부 20여명이 희생된 ‘참극’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전투에서 순국한 주만참의부 참의장 백순(白淳), 최석순(崔碩淳) 선생은 2005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2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된 바 있다. 지금까지 희생자들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무덤을 발견한 사람은 남만주 일대 독립군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소설을 집필 중인 작가 최범산(필명·56)씨. 최씨는 지난 9월부터 고마령전투가 벌어진 지안시 고마령촌 일대를 3차례나 답사해 무덤 4개를 발견했다. 최씨는 “독립운동사료와 현지 주민의 증언, 제석이 놓인 무덤 형식으로 미뤄 고마령전투에서 희생된 참의부 독립군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가족이 없었던 무연고 전사자들의 시신은 동네 주민들이 시신을 거둬 주변 야산에 매장했다는 85세 노인의 증언도 확보했다.”고 말했다.최씨는 “아직까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남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의미에서 정부 또는 학술연구 차원의 체계적 조사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이경원기자·연합뉴스 leekw@seoul.co.kr
  • 정운택, SBS 창사특집극 ‘노개런티’ 특별출연 화제

    정운택, SBS 창사특집극 ‘노개런티’ 특별출연 화제

    배우 정운택이 SBS 창사특집극 ‘압록강은 흐른다’(극본 이혜선ㆍ연출 이종한)에 노개런티로 특별 출연해 화제다. 정운택은 출연 이유에 대해 “학창시절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감명 깊게 읽었다.”며 “언젠가는 이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님에게 출연 제의를 받고 바로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출연료에 관계 없이 출연을 결심하게 됐다.”고 전했다. 최성호ㆍ나문희 주연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독수교 125주년을 맞아 작가 이미륵(1899~1950)의 생애를 다룬 특집 드라마로 오는 11월 경 SBS에서 3부작으로 방송될 예정이다. 한편 정운택은 2001년 영화 ‘친구’로 데뷔해 2002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연기상을 수상한바 있다. 이후 영화 ‘보스 상륙 작전’ ‘두사부일체’ ‘투사부일체’ 드라마 ‘로비스트’ 등에 출연하며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JJ패밀리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NTN 정유진 기자 jung3223@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병자호란 다시읽기] (93) 파국의 전야

    [병자호란 다시읽기] (93) 파국의 전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가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고, 왕실과 대신의 가족들이 모두 포로가 되어버린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출성(出城)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척화신 가운데 누구를 뽑아, 몇 명을 보낼 것인지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사신을 보내 인조의 신변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으려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척화신을 ‘낙점’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다. ●出城을 결정하고 三學士를 ‘낙점’하다 1월27일 김신국과 이홍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이전에 가져갔던 국서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신(臣)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 날을 머뭇거렸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스스로 나아가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만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이 바야흐로 300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께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국서의 내용은 공순하고 처절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나가겠다고 ‘굴복 선언’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던 ‘호소’는 사라지고 대신 인조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달라는 요청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된 상황에서 출성을 거부하고 버틸 여력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인조가 출성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결을 시도하는 신료들이 나타났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을 매고, 이조참판 정온(鄭蘊)은 칼로 배를 찔렀다. 두 사람 모두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성에는 처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출성을 약속했음에도 청군은 포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라도 조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처절하고 황망한 분위기 속에서 인조와 대신들은 청군 진영으로 보낼 척화신의 숫자를 조율했다. ‘홍익한만을 보낸다고 했기 때문에 홍타이지가 강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 속에 일각에서는 열 한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묶어 보낼 대상자로 김상헌, 정온, 윤황(尹煌), 윤문거(尹文擧),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김수익(金壽翼), 김익희(金益熙), 정뇌경(鄭雷卿), 이행우(李行遇), 홍탁(洪琢) 등이 거명되었다.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고, 누구를 뺄 것인가? 이 ‘불인지사(不忍之事)’를 둘러싼 논란 끝에 오달제와 윤집 두 사람만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들 두 사람과 당시 남한산성에 없었던 홍익한을 가리켜 보통 삼학사(三學士)라고 부른다. ●홍타이지, 항복 조건을 제시하다 1월28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조유문(詔諭文)을 가지고 왔다. 조유는 ‘그대는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지 말라. 지난날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 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홍타이지는 향후 인조와 조선이 준수해야 할 조건들을 제시했다. 맨 먼저 명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명 황제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반납하고, 명의 숭정(崇禎) 연호 대신 자신들의 숭덕(崇德) 연호를 사용하라고 했다. 조선의 ‘상국(上國)’을 바꾸라는 요구였다. 이어 맏아들 소현세자와 둘째아들 봉림대군뿐 아니라 여러 대신들의 아들이나 동생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인질들을 붙잡아 놓음으로써 조선의 ‘변심’을 견제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향후 자신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도 보병, 기병, 수군을 동원하여 원조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 자신이 항복을 받고 돌아갈 때 가도( 島)를 공격할 계획임을 밝히고, 조선이 전함 50척과 수군을 내어 동참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군과 화기수(火器手)를 조선으로부터 보충하여 명을 공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요구는 계속 이어졌다. 성절(聖節), 정조(正朝), 동지(冬至), 중궁천추절(中宮千秋節), 태자천추절(太子千秋節) 등 청나라와 관련된 경조사가 있을 때는 대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심양으로 오는 사신이 지참하는 외교 문서의 형식, 조선에 오는 청 사신에 대한 의전과 접대 절차 등은 한결같이 과거 명나라에 행했던 구례(舊例)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특기할 것은 포로들과 관련된 조건이었다. 홍타이지는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토로 들어온 뒤, 조선으로 도망쳐 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청의 주인에게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포로를 ‘우리 군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얻은 성과’라고 규정한 뒤, 포로들을 데려오고 싶으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 포로와 관련된 이 조항은 훗날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남기게 된다. 홍타이지는 그 밖에 조선이 해마다 바쳐야 할 세폐(歲幣)의 수량을 제시한 뒤, ‘청의 신료들과 조선 신료들이 혼인을 맺을 것’, ‘조선의 성들을 수리하거나 다시 쌓지 말 것’, ‘조선에 사는 우량허(兀良哈) 사람들을 쇄환할 것’,‘일본과의 무역을 계속 하고 그들의 사신을 심양으로 인도해 올 것’ 등의 조건도 같이 내 걸었다. 홍타이지가 제시한 항복 조건은 조선에 대해 이중 삼중의 그물을 쳐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건’을 따를 경우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인조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유시문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인조에 대한 협박을 빼놓지 않았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려 주었다. 짐은 망해가던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까지 신의를 어기지 않도록 한다면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란 조선이 명에 대해 그토록 고마워했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 청은 조선의 항복을 코앞에 두고, 자신들이 조선에 대해 ‘재조지은’을 베풀었다고 역공을 취했던 것이다. ●오달제와 윤집을 적진으로 보내다 1월28일 저녁, 인조는 하직 인사를 하러 온 오달제와 윤집을 만났다. 인조는 두 사람을 보자 목이 메었다. ‘그대들의 본 뜻은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구나.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인조는 결국 오열했다. 임금으로서 자신의 신하를 붙잡아 적진에 보내고, 적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참담함 때문에 울고 또 울었다. 윤집은 오히려 인조를 위로했다. ‘이러한 시기에 진실로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만 번 죽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렇게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 오달제는 의연했다.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다만 전하께서 성을 나가시게 된 것이 망극합니다. 신하된 자로서 지금 죽지 않으면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인조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울음 섞인 소리로 자책과 회한,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쏟아냈다.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인조는 오달제와 윤집에게 가족 사항을 물은 뒤, 자신이 그들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윽고 술을 내렸다. 이별주였다. 술을 다 마시기도 전에 승지가 아뢰었다. 사신들이 두 사람을 빨리 내보내라고 독촉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직을 고하는 두 사람에게 인조는 울면서 꼭 살아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출성을 코앞에 둔 남한산성의 밤이 슬픔 속에 깊어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정종욱 월드포커스]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중국의 입장

    [정종욱 월드포커스]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중국의 입장

    얼마 전 베이징에서 열린 비공개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평소에 잘 아는 사이인 한국과 중국의 현직 대학 교수와 전직 정부 관리 몇 사람이 모여 북한과 한·중 관계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었지만 마침 김정일 건강 이상설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북한 급변사태가 주제가 되고 말았다. 중국에 북한은 대단히 민감한 주제이다. 북한의 급변사태는 더욱 민감하고 한국의 전문가들과 이런 주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번 회의는 달랐다. 북한의 급변사태를 주제로 하자고 제의한 것도 중국이었고 토론에 임하는 중국 참석자들의 자세나 토론 내용도 모두 놀랄 정도로 진지하고 솔직했다. 학자와 전직 관료들이긴 해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김정일의 건강에 관한 중국 측의 입장은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고비는 넘긴 것 같고 그 이상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모른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김정일의 건강이 어떤 상태이든 간에 이제는 김정일이 없는 북한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대비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입장을 강하게 개진했다. 김정일 이후의 북한 정세에 대해서는 아들이 권력을 승계하는 경우가 측근이 승계하는 경우에 비해 더 정치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고 했다. 아들에 의한 권력 승계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그 아들을 추대한 후견인 세력들이 집단 지도체제를 형성해서 후계자의 권력 기반이 굳어질 때까지 잠정적으로 북한을 통치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해 갈 수 있지만 반대로 측근이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에는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 정치적 안정 확보가 어려울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아들에 의한 권력 승계가 측근이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보다 정통성을 인정받기가 훨씬 용이한 것이 북한 정치의 특수성이라고 했다. 세 아들 중 누가 권력을 승계할 것인지 그리고 후견 세력이 누가 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세습 승계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고 그 결과 한반도에 통일 국가가 등장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반드시 중국에 나쁜 결과는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 및 투자 대상국이 될 정도로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통일 한국이 중국에 대해 적대적 정책을 선택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통일 한국이 등장한다 해도 중국에 대해 도전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일종의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미국에 대해서도 통일 이후에 미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까지 올라와서 주둔할 수도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는 태도였다. 군사 기술의 발전을 고려하면 미군이 오산에 있으나 신의주에 있으나 중국의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중국에 완충지대로서 전략적 가치가 없지는 않지만 동시에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이상한 행동을 옹호해야 하는 부담도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중국이 북한에 급변사태가 일어날 경우 무력으로 개입하고 통일에 반대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국이 역사에서 얻은 잘못된 교훈 이라는 주장이었다. 병자호란 같이 중국이 한국을 침략했던 사건은 역사일 뿐 지금의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지금은 양국이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맺을 정도로 한·중관계가 변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런 중국을 보면서 과연 중국이 이렇게 변했는지,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우리가 중국보다 더 잘 대비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의문을 금할 수 없었다. 정종욱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日언론 “北 도로보수 돈없어 트럭 통행금지”

    日언론 “北 도로보수 돈없어 트럭 통행금지”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이 파손된 도로를 보수할 돈이 없어 ‘트럭의 통행금지’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다고 일본 언론이 밝혔다. 일본의 유력 일간지 마이니치신문은 “북한이 지난달 말부터 도로보전을 명목으로 일부 구간에 대해 트럭 통행금지 조치를 내렸다.”고 26일 보도했다. 이번 조치는 평안남도 신의주에서 평양을 연결하는 간선도로 일대에 내려진 것으로 도로가 파손돼도 이를 보수할 돈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의주는 압록강을 사이로 중국 랴오닝성 단둥과 접한 북중무역의 거점도시이고 해당 도로는 외국에서 들어온 물자 등이 평양으로 수송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요도로이다. 이에 대해 북한의 한 관계자는 “이 도로의 경우 자연재해 등으로 많은 곳이 함몰됐지만 정부와 지방의 재정파탄으로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주행 시 매우 위험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조치에 대해 신의주를 중심으로 무역을 하고 있는 북한과 중국 관계자들은 “운송효율을 저하시키는 후진적인 경제정책이라며 비난을 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사진=tabibbs.com 서울신문 나우뉴스 김철 기자 kibou@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13일 TV 하이라이트]

    ●추석기획 과학카페(KBS1 오후 7시10분) 하와이에서 가장 높은 산 마우나케아. 해발 4200m 산 정상은 세계 천문대의 각축장이다. 이곳에는 세계 최대 구경인 ‘켁 망원경’과 일본의 ‘수바루 천문대’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미 1990년대 8m급의 망원경을 만들어낸 일본. 일본 천문과학의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실버퀴즈 노노클럽(EBS 오전 6시) 어르신들과 퀴즈도 풀고, 그들의 속내도 들어보는 본격 실버퀴즈쇼 노노클럽. 이번 주에는 충남 홍성군 금마면 월암리 봉암마을 노인들과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직접 떡메를 쳐서 떡을 만들고, 평소 하고 싶던 이야기를 맘껏 풀어놓기도 한다. 작정하고 속풀이를 하는 노인들의 모습에 유쾌함이 넘친다. ●토마토(YTN 오전 8시25분) 난치성 악성종양으로 불리는 골육종. 우리 몸을 이루는 뼈나 근육 등에 생기는 암을 말하는 육종은 남성에게 발병률이 특히 높은 데다 나이가 어린 10대에게 많이 발생하는 특징이 있다. 희귀암인 만큼 병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단순한 통증으로 오해하기 십상인데…. 골연부종양에 대해 살펴본다. ●동안 선발대회(SBS 오후 6시25분) 본선의 관문을 통과한 15명의 출연자들이 등장한다. 소녀 같은 느낌을 간직한 40대 주부, 몸짱 연예인 현영을 놀라게 한 완벽 S라인의 60대, 곧 아이엄마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는 최연소 유치원장 등이 무대에 오른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동안 비법’이 속시원히 공개된다. ●내 인생의 황금기(MBC 오후 7시55분) 이황은 자신의 첫사랑 태일을 뺏아간 데 대한 분풀이라고 생각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정윤과 설전을 벌인다. 경우는 이기에게 빨리 결혼하자며 재촉한다. 한편, 유부남을 사귀다 걸린 태일의 동생 태영은 가출한 지 이틀이 넘고, 태일은 어머니 희경과 태영을 노래방에서 찾고는 기가 막혀 하는데…. ●대하드라마 대왕세종(KBS2 오후 9시5분) 세자가 명국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사행길을 떠나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명국에서 세자의 조현을 불허한다는 칙서가 도달한다. 세종이 북방에 군사력을 강화하여 명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다는 이유인데…. 최만리는 분기를 죽이며 돌아가려는 세자의 발걸음을 도성이 아닌 여연으로 이끈다.
  • ‘펄펄’ 北 ‘쩔쩔’ 南… 본선길 대비되는 남북축구

    ‘펄펄’ 北 ‘쩔쩔’ 南… 본선길 대비되는 남북축구

    |상하이 최병규기자|‘진화하는 북한축구, 가시밭길 한국축구’ 44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한 북한의 행보가 빨라졌다. 김정훈 감독이 이끄는 북한축구대표팀은 10일 허정무호에 승리나 다름없는 무승부를 거두고 승점 4점으로 아시아 최종예선 B조 조별리그 1위를 지켰다. 주목할 것은 북한은 허정무호와 가진 두 번째 ‘상하이 대결’에서 이전에 견줘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김정훈 감독은 그동안의 ‘핵심 코드’였던 수비축구를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수비와 순간 역습이라는 그동안의 단순한 경기 패턴에서 벗어나 상대의 움직임과 경기 흐름에 따라 수·공의 강약을 조절했다. 기존 방식에만 대비했던 허정무호로서는 제대로 허를 찔린 셈. 넓어진 시야와 적절하고 빠른 침투, 과감한 2선의 공격 가담 등은 북한이 더 이상 투박한 축구를 구사하는 팀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보여줬다. 최고참 문인국(30·4.25축구단)과 홍영조(26·FK로스토프)·정대세(24·가와사키)에 이어 최금철(21·4.15)·차정혁(23·압록강) 등 세대별 주력부대가 매끄러운 조화를 이룬 덕이다. 지난 3월 첫 대결 이후 움직임을 간파당한 정대세가 최전방에서 고립됐지만 이번엔 문인국과 홍영조가 펄펄 날았다. 후반에는 젊은 피의 교체 수혈로 기복 없는 경기 흐름을 유지했다. 신·구 세대간 기량의 평준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 한국은 최종예선 첫판부터 삐걱대며 7연속 본선 진출에 큰 부담을 안게 됐다. 뒤늦은 세대 교체 시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허정무 감독에게만 책임을 돌릴 일은 아니지만, 경험만을 중시한 선수 운용은 지적받기에 충분하다. 당초 신영록(수원)을 최전방 공격수로 내정한 뒤 부상으로 빠지게 되자 여지없이 ‘조재진 카드’를 꺼내들었다. 경기 전날 “만약 안되면 서동현”이라는 차선책도 헛말이었다. 결국, 북한에 견줘 포지션별 전력이 고루 갖춰지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을 터트려줄 킬러의 부재, 사우디아라비아·이란 등 중동팀에 강하지 못한 ‘중동 징크스’라는 한국 축구의 숙제를 안고 있는 허정무호가 전열을 가다듬어 본선 진출이라는 과제를 풀어낼지 주목된다. 한편 11일 새벽(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벌어진 같은 B조 경기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홈팀 UAE에 2-1 역전승을 거두고 1승1무를 기록, 북한과 함께 공동선두에 올라섰다. cbk91065@seoul.co.kr
  • 생생히 되살려낸 북방의 삶과 정서·풍물

    압록강·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쪽과 중국 만주 일부의 공간을 일컫는 북방(北方). 우리 민족의 뿌리가 닿아 있는 이 낯설고 새로운 공간은 한국 근대시에서 어떻게 그려져 왔을까.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곽효환(40·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시인이 펴낸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서정시학)은 1920∼30년대에 활동한 김동환과 백석, 이용악의 작품을 텍스트 삼아 우리 근대시에 담긴 북방의식을 분석한 책이다. 지은이는 먼저 파인(巴人) 김동환이 쓴 한국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을 통해 북방정서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을 살핀다.“아하, 무사히 건넛슬가,/이한밤에 남편은/두만강을 탈업시 건너슬가?” 1920년대의 김동환이 남성적이고 대륙적인 북방 정서를 시 속에 처음으로 형상화했다면, 근대시의 전성기라 할 1930년대 후반에 주로 활동한 백석과 이용악은 북방이라는 공간을 우리 근대시 속에 한층 더 풍요롭게 담아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은 북방을 지향하지만 도달하기 어려운 붕괴된 이상공간으로 그린다.“산턱 원두막은 뷔엿나 불비치외롭다/헌겁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쪼는 소리가 들리는듯하다…헐리다 남은 성문이/한울빗가티 훤하다/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정주성’ 중에서) 반면 이용악은 북방을 우리 민족의 시대적 비극이 담긴 곳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김동환이나 백석의 북방의식과 차별화된다.“북쪽은 고향/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다시 풀릴 때/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북쪽’ 중에서) 지은이는 “근대 한국문학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들의 북방시편은 분단과 함께 사라진 북방의 삶과 정서, 풍속과 풍물들을 생생히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의미를 부여한다.1만 90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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