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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 北 기업 3곳 추가제재

    유엔이 2일(현지시간) 이란에 대해 미사일 프로그램과 재래식 무기개발 지원 혐의가 있는 북한 금융회사와 기업 등 3곳을 추가 제재하기로 결정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는 이날 낮 12시부터 압록강개발은행과 청송연합(생필연합), 조선흥진무역회사 등 3곳을 새로운 제재 대상으로 확정, 기존 제재 명단에 포함시켰다고 유엔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했다. 이에 따라 안보리 제재를 받는 북한 금융회사 및 기업은 모두 11개로 늘어났으며, 지난달 13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관련된 대응조치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제재위의 추가 제재대상이 한국 정부와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이 요청한 40여곳보다 대폭 줄어들었다. 거부권이 있는 중국은 당초 2곳을 추가하는 데 찬성했으나, 미국 등의 압박에 못 이겨 막판에 1곳을 더 양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제재위의 추가 제재 대상에 포함되면 해당 기업은 자산이 동결되고 유엔 회원국들과의 거래도 전면 금지된다. 앞서 안보리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하자 이를 규탄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하면서 대북 제재위에 제재대상 기업을 15일 안에 추가하라고 지시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인간’ 허균의 기개와 번뇌

    허균(1569~1618) 하면 떠오르는 것은 소설 ‘홍길동전’이고, 더 나간다면 시문집 ‘성소부부고’에 수록된 ‘한정록’ 정도일 터. 늘 그의 작품이 먼저이지 정치와 사상에서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이자 최고의 시인, 문장가, 파직과 재기용을 되풀이한 관리로서의 모습은 쉽사리 언급되지 않는다. 선조~광해군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가졌던 고민이나 ‘점잖은’ 사대부 사회에서 아연실색할 돌출행동 때문에 파직이 거듭되면서도 문학적 역량과 방대한 지식으로 재기용될 수밖에 없던 인물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허균의 기개가 한껏 드러나는 듯한 제목을 달고 나온 신간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지음, 정길수 편역, 돌베개 펴냄)는 그의 면모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시집이자 정치철학서이며 문학평론이고 자서전이다. 허균에게는 명예와 이익을 향한 욕망을 벗고 은거하고픈 마음이 일생 내내 교차했다고 한다. 해서인지 ‘압록강을 건너며’, ‘진상강에서’, ‘수레 위에서’ 등 많은 시에서 ‘어디로 돌아갈까’ 하는 고민이 가득하다. ‘이대로 떠나 산방 주인 되면 어떨까/내 책 일만 권을 차례대로 꽂아 놓고’(‘설날’ 중에서)라는 소망을 가졌던 허균은 ‘어떡하면 만년에 내 마음 지킬까/옛사람의 책 읽고 또 읽으리라.’(‘읽고 또 읽으리라’ 중에서) 바랐지만 2년 후 역모죄를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허균은 신랄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고, 그중에서도 호걸스러운 백성(豪民)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이지 한 사람이 윗자리에서 오만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심을 채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수령 노릇을 하는 자는 호민이 출현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따끔한 충고를 했다. 유명한 ‘호민론’이다. 대단한 독서광인 허균은 평론도 명쾌하다. ‘양한연의’는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고, ‘제위’는 졸렬하고, ‘수호전’은 속임수가 교묘하니 모두 교훈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당대 문인들 사이에서 호평받은 ‘수호전’을 박하게 평가한 것은 오늘날 수호전을 재평가하는 목소리와 맞닿아 있어 흥미롭다. 이 책 한 권으로 당대의 천재든 혁명가든 반항아든, 허균을 두고 적확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어떤 삶의 결을 가졌는지, 어떤 사상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95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6) 최우와 하급무사들

    [선택! 역사를 갈랐다] (6) 최우와 하급무사들

    고종 18년(1231) 음력 8월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략했다. 이에 고려의 재상은 9월에 무인정권의 집권자 최우(최이)의 집에서 의논해 삼군(三軍)을 출동시켰다. 삼군은 중군, 우군, 후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0월에 고려의 삼군이 북상해 청천강 하안의 안북성(안주)에 주둔했다. 몽골군이 도전해도 삼군은 성 밖으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후군 지휘자 대집성이 나가서 싸우기를 강력히 요구하니 삼군이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쳤다. 하지만 정작 중군과 우군 지휘자는 나가지 않고 성에 올라 관망하다 대집성 역시 성으로 도로 들어왔다. 고려의 삼군은 고위급 지휘자도 없이 성 밖에 진을 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몽골군이 고려군을 추격해 무찌르자 고려군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대집성이 삼군을 안북성 밖으로 나가게 해 싸우도록 만든 행위는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몽골군은 기마병이 세계 역사상 가장 강했으니 그러한 몽골군의 주력과 성 밖의 벌판에서 전면전을 벌인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다. 안북성을 지키면서 몽골군의 배후를 치거나 몰래 기습하는 전법을 구사했어야 했다. 대집성은 과부가 된 미모의 딸을 최우에게 보내 패배의 책임에서 벗어난다. 몽골군이 물밀듯이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11월에 몽골군이 개경의 길목인 평주성을 도륙하더니 개경성의 서문인 선의문 밖에 주둔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자 개경이 흉흉했다. 최우와 사위 김약선이 사병으로 자신을 지킨 반면 개경성을 지킨 자는 대개 노약 남녀였다. 12월에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최우가 몽골군에 화친을 요청했다. 몽골 사절단이 개경성으로 들어와 고려 임금 고종을 만나 화친이 성립되었는데 고려가 항복을 한 모양새였다. 고려의 재상이 고종 19년(1232) 2월 20일에 모여 도읍 옮기기를 의논했다. 5월 21일에 재상이 몽골 방어를 의논했고, 23일에도 재상과 4품 이상이 몽골방어 책략을 의논했다. 거의 모두가 개경성을 지켜 적을 막아야 한다고 했는데, 오직 재상 정무(鄭畝)와 대집성이 도읍을 옮겨 난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 고종 19년 6월에 최우가 재상을 그 집에 모아 천도를 의논했다. 당시 고려는 오랫동안 태평을 누려 개경은 호(戶)가 10만에 이르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집이 서로 바라볼 정도로 번성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정서가 이 편안한 곳에 살고 싶어 천도를 어렵게 여겼지만 최우를 두려워해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이때 재상 유승단이 나서서 이의를 제기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은 이치이니 예(禮)로써 섬기고 신(信)으로써 외교하면 저(몽골) 역시 무슨 명분으로 매번 우리를 곤란하게 하리오. 성곽을 포기하고 종묘사직을 버리고 섬에 달아나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함으로써 장정을 적의 무기에 모조리 죽게 하고 노약자를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좋은 계책이 아니오.” 유승단이 이처럼 과감하게 발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고종 임금의 사부이기 때문이었다. 천도 예정지는 섬이 언급된 것을 보면 강화로 정해져 있었다. 고려 정부가 백성을 버리고 섬으로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유승단의 발언은 가슴을 울리지만 예의와 믿음으로 몽골을 사대(事大)하면 몽골이 고려를 괴롭히지 않으리라는 해결책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 ●최우, 천도 반대 무관 베고 임금 협박… 수레 100개로 재산 운반 유승단의 발언으로 회의장이 술렁이는 사이에 야별초지유 김세충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최우에게 따졌다. “송경(개경)은 태조 이래로 지켜온 지 무릇 200여 년이라, 성(城)은 견고하고 무기와 식량은 풍족하니 힘을 다해 지켜 사직을 보위해야 마땅한데, 이를 포기하고 떠나 장차 어디에 도읍하려 하시오.” 야별초는 최우가 치안을 위해 만든 부대로 훗날 삼별초의 모태인데 그 중간급 지휘자가 용감하게 최우를 윽박지른 것이었다. 최우가 개경성을 지키는 책략을 묻자 김세충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집성이 최우에게 김세충이 감히 큰 의논을 저지하니 베어서 내외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고 요청했다. 무반을 대표하는 상장군도 대집성의 뜻에 맞추어 그렇게 하기를 요청했다. 이에 최우가 김세충을 끌어내 베게 했다. 김세충의 발언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개경성 방어책을 대답하지 못한 데에서 드러나듯이 구체적이지 못했다. 개경성의 무기와 식량은 풍족했을지라도 개경성이 견고했는지는 따져볼 문제이다. 개경 나성(외성)은 현종 때 거란의 침략으로 개경이 불탄 다음에 축조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때때로 수리하기는 했지만 훼손이 진행되어 여기저기 허물어져 있었다. ●당시 수도 개경 성곽, 거란침입에 이미 훼손된 상태 인종 초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의 서긍은 여행기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왕성(도성)이 지형을 따라 모래와 자갈을 섞어 축조되었는데 호참(壕塹·해자)과 여장(女牆·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없고 그리 견고하지 않아 성의 낮은 곳은 적을 감당할 수 없어 지키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로 보아 개경 나성은 그리 견고하지 않았다. 또한 개경 나성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성곽이라 수리하기도 벅찼고 병력이 많지 않으면 지키기도 어려웠다. 최우는 김세충을 죽이면서 강화로의 천도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최우가 그날에 고종에게 아뢰어 속히 강화로 행차하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임금은 미적거리며 결정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고종이 임금으로서 백성을 육지에 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작용했겠지만, 왕권을 무력화시켜 권력을 행사해 온 무인정권을 몽골군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너뜨려 왕권을 회복하고 싶은 속내도 작용했을 것이다. 최우는 천도를 강행하고 수레 100개 정도를 동원해 자신의 재산을 강화로 운반하니 개경이 흉흉했다. 최우는 담당관청에 명령해 개경성 안에 방을 게시해 기한 내에 강화로 출발하지 못한 자는 군법으로 논한다고 했다. 또한 관원을 여러 도(道)에 파견해 백성을 산성과 섬으로 이사시키도록 했다. 최우는 6월 16일에 임금에게 강화로 천도하도록 위협했고, 다음날에 2000명의 군인을 동원해 강화에 궁궐을 조영하도록 했다. 7월 6일에 임금도 어쩔 수 없이 개경을 출발해 승천부(강화도 북쪽 맞은편 고을)에 머물렀다가 다음 날인 7일에 바다를 건너 강화 객관에 들어갔다. 고려 임금과 정부가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7월 7석에 강화로 들어온 것이었다. 비가 열흘 넘게 내렸기 때문에 개경에서 강화로 가는 동안 사람과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지곤 했다. 높은 벼슬아치와 양가집 부녀 중에도 맨발에 짐을 이고 멘 자도 있었다.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홀몸 노인이 길을 잃어 울부짖었다. 이렇게 강화 천도가 마무리됨으로써 약 38년 동안의 강도(江都) 시대가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이를 빌미로 고려에 대한 제2차 침략을 단행했는데, 이것은 몽골과의 전쟁 재개를 의미했다. 강화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강화도의 동쪽과 동북쪽 해안을 따라 외성을 쌓았다. 그리고 아들 최항은 도성인 중성을 쌓아 방위를 더욱 강화했다. 당시 강화도 일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이 거세고 갯벌이 발달해 배를 댈 만한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다. 그러니 몽골군은 김포반도에 와서 강화도를 향해 소리만 지를 뿐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약 몽골군이 고려군의 화살을 뚫고 강화도 연안에 진입한다고 해도 외성과 중성을 넘어야 하고 고려 최고 정예부대와 싸워야 했다. 강화도는 세계 최강의 몽골군에게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고려는 몽골과 30년 동안이나 싸울 수 있었다. ●강화 거친 물살 덕에 ‘난공불락’… 방치된 육지 백성 삶은 참혹 대신에 본토에 남겨진 고려 백성은 무인정권이 간간이 보낸 지휘자와 병력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거의 자신의 힘으로 고향을 지켜야 했다. 광주산성(남한산성) 전투, 용인 처인성 전투, 충주성 전투, 죽주(안성 죽산) 전투 등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며, 특히 처인성 전투에서는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를 화살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몽골군은 30년 동안 6차례에 걸쳐 집요하고 빈번하게 고려를 침략해 강산을 유린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끌어갔다. 최우는 한편으로는 몽골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몽골과의 전쟁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자신은 강화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 반면 백성을 육지에 방치해 온갖 참상을 겪게 만든 악당으로 비난받는다. 최우의 강화 천도는 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임은 분명하지만,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 글렀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강화로 천도했기 때문에 몽골과 오랫동안 싸울 수 있었고 그 항쟁을 인정받아 몽골에 항복한 이후에도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강화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오래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랬다면 고려 백성의 고통은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고려국이 망해 몽골인이나 중국인으로 살아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몽골족 원과 만주족 청의 판도가 오늘날 중국의 판도에 거의 계승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최우의 선택에 대한 가치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김창현 연구교수(고려대 한국사연구소)
  • [선택! 역사를 갈랐다] (5) 이규보와 유승단

    [선택! 역사를 갈랐다] (5) 이규보와 유승단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이(崔怡·최우의 다른 이름;?~1249)는 1232년(고종19) 6월 마침내 200년 도읍지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강화도는 수도 개경에서 가까운 거리지만,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세계 최강 몽골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군사·지리적인 이점에다 바닷길을 통해 개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어, 개경으로 운반되는 지방의 조세와 공물을 바로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이점까지 갖추고 있었다. 몽골군의 세찬 공격을 완전하게 막을 수 없지만, 그런대로 버티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었다. ●천도의 노림수 전쟁은 군사력만으로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고 권력자 최이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강화도를 거점으로 몽골군의 공세를 버티면서, 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 우선 필요했다. 그 사이 고려 왕조의 장기인 외교력을 발휘하여 아직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송나라, 금나라, 일본 등 주변국과의 협력외교를 통해 반몽골 전선을 형성하여 몽골의 야욕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몽골군이 처음 침입한 것은 천도 한 해 전인 1231년 8월이다. 압록강을 건넌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석달 만인 11월에 수도 개경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 고려정부는 항복을 요청하고, 몽골군은 1232년 1월 압록강에서 개경에 이르는 40여 성에 72명의 몽골인 감독관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거란, 여진 등의 이민족으로 구성된 탐마치군(探馬赤軍)을 주둔시키는 조건으로 철군한다. 그러나 철군 이후가 더 고통스러웠다. 철군 직후 몽골은 고려정부에 말 1만~2만 마리의 가격에 해당하는 금·은·동 등의 물품, 100만 대군의 군복, 대마 1만 마리, 소마 1만 마리, 고위 관료의 아들과 딸 각 1000명을 요구했다. 요구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나라 재정은 거덜날 것이 뻔했다. 요구를 거부할 정도로 군사력도 강하지 않았다.몽골의 거센 물자 요구와 군사공세를 회피하는 데 수도 천도야 말로 가장 적절한 카드가 아니었을까? 몽골군을 압도할 수 없는 취약한 군사력은 천도 외의 다른 수단을 선택할 여지를 그만큼 줄여 버린 측면이 없지 않았다. ●민심은 천도에 반대했다 몽골군이 1232년 1월 11일 철군하자, 2월 20일 고려정부는 수도 천도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이해 6월 최고 권력자 최이는 고위 관료들의 회의체인 재추회의에서 천도 논의를 공론화한다. 천도를 추인받기 위한 형식적 절차였지만, 반대론이 예상 외로 거셌다. 반대론의 선봉자는 유승단(兪升旦;?~1232)이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섬김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귀면, 저들은 무슨 명분으로 매양 우리를 괴롭히겠습니까? 성곽을 버리고 종묘와 사직을 돌보지 않은 채 섬으로 도망하여 구차스럽게 세월을 끄는 동안, 변방의 백성과 장정들은 적의 칼날에 다 죽고 노약자들은 노예와 포로가 될 것이니, 천도는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고려사’ 유승단 열전) 당시의 민심도 천도에 대해 냉담했다. 당시 역사가는 그때의 민심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때 국가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되어 개경은 10만호나 되었고, 단청한 좋은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사람들도 자신의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고 천도를 곤란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최이를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다.”(‘고려사절요’ 권18 고종 19년 6월조) 강압적인 최씨 정권에 맞설 수 없어 반대론은 다만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주눅들지 않고, 유승단은 당당하게 반대론을 제기했다. 반면에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최씨 정권의 천도에 적극 찬성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하늘로 오르기만큼 어려운 일, 마치 공을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 천도 계획을 서두르지 않았으면, 우리 삼한은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일세. 쇠로 만든 듯이 크고 단단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물결, 그 공력을 비교하자면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천만의 오랑캐 기마병이 새처럼 날아온다 해도, 눈앞의 푸른 물결을 건널 수 없으리.”(‘동국이상국집’ 권18) 이규보는 바다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삼한은 벌써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 했다. ●절친한 우정을 갈라놓은 천도 논의 이규보와 유승단은 이같이 다른 입장이었지만, 둘은 1190년(명종 20) 함께 과거에 합격한 동기생이자 당시 고려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인지식인이었다. 유명한 고려가요 ‘한림별곡’에 무신정권 당시 최고의 문장가를 품평한 기사가 있는데, 고문(古文)은 유승단, 빨리 글을 짓는 주필(走筆)은 이규보가 각각 최고라 했다. 이규보는 자신이 지은 시 뭉치를 유승단에 보내 윤문을 부탁할 정도로 둘 사이는 절친한 문우(文友)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두 사람은 천도 문제를 두고 이렇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까? 두 사람은 관료로서 대조적인 길을 걸어왔다. 유승단은 과거에 합격한 후 강종과 고종이 태자일 때 그들을 가르치는 직책에 임명된다. 국왕으로 모두 즉위하면서 유승단은 순탄하게 관료생활을 한다. 승진도 빨라 천도 2년 전인 1230년 재상이 된다. 비록 무신의 시대이지만, 국왕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가 현실의 권력인 무신보다 왕권을 옹호하는 정치이념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천도를 결정한 최이가 즉시 강화도로 갔으나, 고종은 한 달이 지나서야 강화도로 갈 정도로 천도에 반대했다. 그를 보좌한 문신 관료집단도 고종과 같은 생각이었다. 유승단이 천도에 반대한 것은 고종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도는 강행되었고, 그해 8월 그는 사망한다. 천도가 단행된 직후 사망한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이규보의 관료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과거에 합격했으나, 18년 만인 1208년에야 정식 관원이 된다. 그의 나이 41세 때이다. 최씨 정권에서 과거 합격이 관료가 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았다. 천거제가 관료가 되는 첩경이었다. 이규보 역시 권력자 최이의 천거가 없었다면 관료가 될 수 없었다. 천거제는 최씨 정권에 철저하게 충성하는 자를 가려내는 통로였다. 그의 후견인 최이는 그의 글재주를 높이 평가해서 여러 차례 최고 권력자이자 아버지인 최충헌에게 그를 추천했다. 그 결과 겨우 관료가 되었다. 그는 천도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1232년 9월 후견인 최이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규보는 고속으로 승진한다. 1233년 그는 재상이 된다. 천도에 찬성한 점도 고속 승진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서 몽골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직접 작성한다. 그가 작성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제후국 고려는 천자국 몽골에 사대를 하기 위해 사직을 보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천도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무신정권의 입장을 대변한 글이지만, 그의 입장도 반영된 것이다. ●항전론과 강화(講和)론으로 발전 이규보와 유승단은 강화 천도에 다른 입장이지만, 그들이 제기한 찬반 양론은 당시 두 개의 권력 축인 무신 권력자와 그를 보좌한 무신집단, 국왕과 그를 보좌한 문신 관료집단의 입장을 각각 대변하고 있다. 무신집단은 천도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면서 장기전으로 몽골의 침입에 저항하려 했다. 국왕과 관료집단은 몽골과의 저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사대관계를 맺어 왕조를 보전하면서, 한편으로 무신정권의 붕괴와 왕권의 회복을 노렸다. 무신의 의도대로 천도는 성사되어 반대론은 힘을 상실한다. 그러나 약 30년간의 전쟁으로 한반도 전역은 몽골의 말발굽 아래 철저하게 유린되었다. 무신정권에 대해 악화된 민심은 몽골에 대한 저항의 동력을 상실할 정도였다. 그 틈새로 국왕과 관료집단의 강화론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천도를 강행한 무신권력자들은 몽골과의 항전을 끝까지 주장했다. 강화 천도를 둘러싼 찬반 양론은 한 세대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꺼지지 않는 불씨가 돼 전쟁 말기에 항전론(천도론)과 강화론(천도반대론)으로 재점화된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천도론에서 제기돼 항전론과 강화론으로 갈라진 두 개의 상반된 정치사상은 어느 것이 더 옳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무신정권의 항전론이나 강화론은 모두 13세기 세계 최강의 군사력 앞에서 굴하지 않은 고려인들의 자존심을 지탱해준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박종기(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 크고 시원하게 그린 우리 민족의 신바람

    크고 시원하게 그린 우리 민족의 신바람

    “이렇게 그리기 시작한 지 한 4~5년 됐을 겁니다. 주변의 젊은 친구들에게 보여주니 아주 좋다고 그래요. 저로서는 더 좋지요. 허허허.” 이태길(71) 작가는 오는 1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작가의 작품 주제는 ‘축제’다. 다 함께 어울려 몸짓을 풀어내는 장면을 담았다. 1990년대에 만주와 압록강을 더듬어본 것이 계기가 됐다. “1990년 초부터였을 거예요. 중국 창바이현에서 단둥을 거쳐 만주와 압록강변을 따라 고구려와 발해 문화를 탐방한 적이 있어요. 한 열 번은 다녀온 것 같아요. 그때 고구려벽화를 통해서 우리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알 수 있었지요.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가 ‘축제’를 화두로 잡은 겁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동작은 강강술래와 농악의 군무를 닮아 있다. 우리 민족의 신명을, 신바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주로 대작으로 시원하게 그려냈다. 전통적이고 민족적이다. 그런데 최근 작에서는 작품 경향상의 변화가 눈에 띈다. 예전에는 뚜렷한 구상의 느낌이 강했다면 최근 작들은 조금 더 추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물은 추상에 가까울 정도로 간략해지고 동작도 단순해지는 대신 등장하는 숫자는 무척 많이 늘었다. 추상성으로 극대화한 작품의 경우에는 사람이 아니라 문자들이 춤추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둥그렇게 모여 춤을 추던 구도 역시 유지되고는 있지만 많이 흐트러졌다. 작가는 “우리 겨레가 겪어온 고통과 고독, 갈등과 좌절을 이런 작품들을 통해 씻겨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02)720-511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서울광장] 진보도 탈북자 ‘불편한 진실’ 직시해야/구본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진보도 탈북자 ‘불편한 진실’ 직시해야/구본영 논설위원

    소설 ‘생의 한가운데’를 쓴 루이제 린저는 독일의 유명 여류 작가였다. 나중에 나치 전력이 밝혀져 스타일을 구기긴 했지만. 1970년대 전후 한국에서도 꽤 사랑받았다. 적어도 북한에 관한 그의 무비판적 찬양이 ‘허무 개그’로 판가름되기 전까지는. 린저는 10여 차례나 평양을 찾아 김일성 주석과 교분을 텄다. 김일성이 생일상을 차려준 적도 있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또 하나의 조국’을 썼다. 1980년대 국내 운동권의 ‘필수 교재’였던 북한 기행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북한엔 감옥이 없다.”, “북한의 노동자·농민은 과로하지 않는다.”는 등 북한 당국의 선전을 앵무새처럼 전했다. 하지만 “김일성을 만나고 인류의 미래를 믿게 됐다.”는 식의 그의 어처구니없는 안목은 유럽에서도 머잖아 웃음거리가 된다. 김일성 사후 헐벗은 북한의 실상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다. 린저가 지상낙원이기를 바랐던 북한을 이탈한 탈북자 인권 문제가 국제적 이슈가 되고 있다. 기아와 폭정을 피해 북한체제를 벗어난 이들을 중국이 강제 북송하면서다. 차인표씨 등 연예인들이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북송 중지 캠페인에 불을 붙였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11일째 단식 농성을 벌이다 병원으로 실려갔다. “안보엔 보수, 경제엔 진보”라던 ‘대권 잠룡’ 안철수 교수도 지난 주말 북송 반대 집회를 찾아 탈북자들과 공감했다. 그러나 야권은 탈북자 문제의 이슈화에 극히 소극적인 분위기다. 특히 진보적 성향일수록 문제를 거론하는 것조차 꺼리는 기미다. 민주통합당도, 통합진보당도 묵묵부답이다. 우리 야권이 이러니 정부의 대중 외교인들 무슨 힘을 받겠는가. 정부는 얼마 전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의 반인권성을 거론했다. 하지만 중국은 “탈북자 문제의 국제화·난민화를 반대한다.”며 오불관언이다. 우리 내부가 일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판에 무슨 수로 주요 2개국(G2)의 반열에 오른 중국을 설득해 내겠는가. 북한 세습체제의 3대 상속자 김정은은 탈북 기도자를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두만강·압록강을 건너다 총에 맞아 죽는 마당에 용케 탈북한 주민을 다시 북송한다고? 탈북자를 사지(死地)로 내모는 강제 북송을 막는 일은 차인표씨의 표현처럼 “인간의 도리”일 뿐이다. 좌우 이념을 초월한, 인간 생존권이 걸린 사안이란 얘기다. 간혹 탈북자 문제에 입을 다물면서 “남북 관계를 감안해서….”라고 핑계를 대기도 한다. 하지만 비겁한 허위의식일 뿐이다. 치부를 덮어준다고 해서 북한이 긍정적으로 변화한다는 보장은 없다. 외부에서 지원하든 비판하든 달라지지 않은 것은 세습체제를 지켜내는 일이 ‘김씨 조선’의 지상목표란 점이다. 그러기에 다수 보통 주민들이 배를 곯아도 핵게임을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탈북자들이 양산되고 있지 않은가. 린저도 김일성 체제의 그늘엔 눈 감고 양지만 바라보았지만,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주민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그는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 기간 북한에서 수백만명이 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02년 그가 작고할 때까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참혹한 진상에 대해 입을 닫았지만, 어디 북한주민의 인권이 개선되었던가. 보수·진보 어느 쪽이든 유·불리 기준에 따른 진영 논리에 갇혀서는 안 될 것이다. 북한정권이 아닌, 북한주민을 돕는 일에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이제 진보 진영도 하나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즉, 북한 인권이나 탈북자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게 진보의 가치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누이와 딸들이 운 좋게 북·중 국경을 넘은 뒤 중국 내 성매매 조직에 팔려가거나, 강제 북송되는 비극 앞에 침묵하겠다고? 참진보라면 그럴 순 없다. 진보적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진실을 대면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결국엔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맞닥뜨릴 환멸을 막아준다.”고 했다. kby7@seoul.co.kr
  • [커버스토리-위기의 탈북자] “도와주세요” 13살의 호소

    [커버스토리-위기의 탈북자] “도와주세요” 13살의 호소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 북송 방침에 맞서 한국 정부는 탈북자 구조에 앞장서고 있는 민간단체와 공조를 강화해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취약한 탈북 어린이 구조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된다.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는 24일 “김정은 체제 이후 탈북자 사살 지침이 내려진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탈북자 현황 파악조차 못해 중국 내 수많은 탈북자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서 “정부가 중국 현지에서 탈북자를 보호하고 구출하는 민간단체들을 통해 구체적인 사례와 현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탈북자의 체포장소, 인원, 성별 등 구체적인 상황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녹취록 등까지 수집해 중국에 제시해야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국제 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차원에서도 정부가 직접 탈북자들의 구체적인 사례와 증언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미국 버지니아주에 본부를 둔 미주탈북자선교회 마영애 회장은 “지금까지 우리 단체에서 한국이나 미국, 제3국으로 구출하는 데 성공한 탈북자는 363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마 회장은 특히 “중국을 떠도는 탈북 어린이는 2만여명으로 추산된다.”면서 “혹한의 날씨에 생사의 갈림길에 방치된 아이들이 안전한 나라로 보내져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국제 사회가 적극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홀로 중국으로 탈북했다가 두 발이 절단된 ‘정○○’(13)군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정군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최대한 빨리 중국을 탈출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마 회장에 따르면, 지난달 25일 북한 혜산에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몰래 건너 중국 장백현으로 탈북한 정군은 산속에 헌 옷가지로 어설픈 움막을 만들고 숨어 지내다 영하 40도의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발에 동상을 입었다. 정군은 마을에서 가스버너를 훔쳐와 발을 녹이다 깜빡 잠이 들었고 그새 발이 타버렸다. 동상으로 발이 무감각해져 신발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잠을 잔 것이다. 발가락 뼈가 다 드러나고 진물이 나올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은 정군의 비극은 중국에서 활동 중인 미주탈북자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에게 알려졌고, 이들의 도움으로 지난주 발목 절단 수술을 받았다. 정군은 아버지가 6년 전 북한에서 굶어 죽었고 어머니는 형만 데리고 집을 나가면서 졸지에 고아가 됐다고 한다. 마 회장은 “정군이 오늘 선교사들을 통해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며 편지를 공개했다. 정군은 서툰 글씨로 ‘선생님들이 도와 발을 고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는 ‘선생님들 도와주세요.’라며 구출을 호소했다. 마 회장은 “수술 부위가 아무는 대로 최대한 빨리 구출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신진호기자 carlos@seoul.co.kr
  • [기고] 백두혈통이 아니라 백수혈통이다/림일 탈북작가· ‘소설 김정일’ 저자

    [기고] 백두혈통이 아니라 백수혈통이다/림일 탈북작가· ‘소설 김정일’ 저자

    16일은 고 김정일의 70번째 생일이다. 필자가 평양에서 해마다 2월이면 집중적으로 받았던 김정일 우상화 교육의 한 대목이다. “항일의 영웅 김일성 동지께서 험산 준령의 백두산에서 강도 일제와 맞서 싸우시던 1942년 2월 16일, 조선혁명의 광명한 미래로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 탄생하시었다.” 소가 웃다 꾸러미 터질 소리다. 평양 태생의 김일성은 대부분 만주와 연해주 부근에서 활동했다. 북한에서의 활동은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90명의 빨치산 대원이 습격한 사건)가 유일한데 이것도 전설 속의 김일성(동북 항일연군 제2군6사 백두산지구장으로 당시 나이가 60대 정도인 노장군)과 엇갈리는 황당한 부분이다.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빨치산 소부대가 만주에서 일제 공격을 피해 1941년 초 연해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2월 16일 김정일(당시 이름 김유라)이 태어났다. 당시 소련 극동군정찰부대 88여단이 주둔하기도 했던 이곳에서 김정일은 5살까지 살았고, 해방이 된 1945년 11월 생모 김정숙의 손을 잡고 함경북도 웅기로 배를 타고 북한에 들어왔다. 1960년 8월 평양 남산 고급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김정일’로 개명하고 ‘수령의 아들’이라는 절대 특권을 누렸다. 1987년 2월 그가 실제 수장인 조선노동당의 결정으로 백두산을 혁명성지로 꾸렸고 그곳이 곧 자기 고향이 되었다. 인민이 우러르는 수령의 고향이 외국이면, 우상화 교육에 걸림돌이 되었기에 엄청난 거짓말도 뻔뻔하게 했던 김정일이다. 북한의 초대 수령 김일성과 2대 수령 김정일에 이어 3대 수령 김정은에 대한 노동당 선전도 기가 막히다. 출생지와 생일이 불분명한 김정은을 “백두혈통을 이어받으신 또 한 분의 위대한 수령,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 강철의 영장”이라고 역설하는 노동당이다. 정말 강철판을 얼굴에 깔았다. 백두산에서 한 번도 항일운동을 한 사실이 없는 할아버지 김일성과, 절대군주가 되어 백두산으로 한가한 산행을 자주 갔던 아버지 김정일이 백두산과의 인연이 전부라면 전부이다. 그런데 어떻게 김정은을 백두혈통이라고 하겠는가? 김정은 일가가 할아버지부터 지금껏 북한에 어떤 공적을 쌓았는가? 전국 곳곳에 자신들의 동상과 기념비를 수천개 세웠고, 생가를 비롯한 혁명사적지를 수백개 건립했다. 모든 가정에 저들의 사진과 어록패를 걸었고, 죽어서도 호화궁전에 들어가 있는 그들이다. 인민이 노동당과 정부를 비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체포돼 갇히는 비밀수용소가 20여개 있으며 그 속에 30만명의 정치범이 갇혀 있다. 자칭 인민의 어버이라는 그들이 과연 그 인민을 위해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시장에서 쓰레기를 뒤지는 아이들과 굶어 죽는 노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배고픈 창자를 끌어안고 살벌한 압록강을 넘는 인민들의 기막힌 참상은 과연 뭐란 말인가?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에는 출생신고가 안 된다. 그의 사진만 구겨도 정치범이 되는 잔인한 정권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대대손손 독재와 부귀영화를 위해 살아온 그들은 인민들의 삶과 인권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백수들이었다. 김씨 일가는 백두혈통이 아니라 백수혈통이다.
  • [저자와 차 한 잔] ‘명대(明代)의 운하길을 걷다’ 펴낸 서인범 교수

    [저자와 차 한 잔] ‘명대(明代)의 운하길을 걷다’ 펴낸 서인범 교수

    ●‘표해록’ 저자… 해로·기후·민속 등 담아 조선시대의 최부(崔溥)를 아시나요. ‘표해록’의 저자이다. 최부는 1487년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나라에서 시키는 노동이나 병역을 거부하고 도망간 사람을 찾아내 잡아오는 관리)으로 임명돼 제주에 갔다. 하지만 다음 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14일동안 표류한 끝에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에 도착했다. 그러는 동안 도적을 만나고 왜구로 오인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고초를 겪었고 관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 북경으로 호송됐다. 이후 귀국길에 올라 압록강을 거쳐 한양 청파역에 도착한 뒤 성종 임금의 명을 받아 ‘금남표해록’(3권)을 기록했다. 금남은 자신의 호이며 ‘표해록’에는 중국 연안의 해로와 기후, 산천, 도로, 관부, 풍속, 민요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하여 최부를 가리켜 ‘조선의 마르코폴로’라고 한다. 동국대 사학과 서인범(52) 교수는 2009년 연구년을 맞아 최부의 ‘표해록’을 고스란히 답사했다. 중국 유학생 곽로씨와 함께 항주에서 최부가 표착했던 태주 삼문만 쪽으로 내려가, 다시 항주로 거슬러 올라오는 당시의 루트를 그대로 따랐다. ●꼬박 한 달간 700만원으로 답사 서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최근 ‘명대(明代)의 운하길을 걷다’라는 제목으로 한길사에서 책을 펴냈다. 부제 ‘항주에서 북경 2500㎞ 최부의 표해록 답사기’에서 보듯 항주에서 명대의 조운로(漕運路)를 따라 북경의 적수담(積水潭)까지 총 30박 31일의 일정으로 도보, 인력거, 고철덩어리 버스, 택시, 기차 등을 이용해 총 경비 700만원으로 답사했다. 최부와 조운로에 집중시켜 서술하고 있지만 역사성과 여러 유적지의 문화, 인물, 음식, 현대 중국인의 일상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최부가 호송당한 경로는 사람과 곡물을 운반하며 내륙을 종(縱)으로 관통하던 이른바 조운로였습니다. 최부는 폭풍우를 만나 중국 남쪽 절강성 태주부에 표착하게 됐고 조선인이라는 신분이 밝혀져 명나라 장교의 보호를 받으며 조운로를 따라 북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뒤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게 됩니다. 이번에 낸 책은 북경까지의 루트를 직접 답사한 것이지요.” 그가 최부와 만난 것은 1999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은사 조영록 선생이 한 권의 책을 건네주었고 대학원생들과 3년반에 걸친 역주 작업을 거쳐 ‘표해록’을 펴내면서였다. ●내년 2차 ‘최부의 길’ 떠나 “명대를 전공하는 저에게 ‘표해록’은 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중국 어느 사료보다도 당대의 시대 상황과 조운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가 없기 때문이죠. 어느 순간 이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욕망이 솟구쳐 올랐지요.” 520여 년 전의 최부로 변신한 그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를 직접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최부의 숨결이 배어 있는 조운로나 그가 견문한 곳을 온전히 더듬어 이번에 또 다른 기록의 결실을 맺었다. 내년에는 북경에서 압록강으로 이어지는 2차 ‘최부의 길’을 떠날 예정이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백두산 화산 폭발땐 北권력층 대량 탈북”

    대규모 화산 폭발이 백두산에서 발생하면 동·서해상을 통한 남한으로의 직접 입국이 북한 주민의 주된 탈북 경로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추이와 달리 남성과 북한 권력층의 탈출이 많을 것으로 전망됐다. 26일 국방부 산하 국방대학교가 최근 발간한 ‘국방연구’(54권 제3호)에 게재된 ‘백두산 화산 폭발에 의한 탈북: 향방과 대비’(수정·보완본) 보고서에 따르면 백두산 분화 직후 북한 양강도와 함경도 주민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어 대거 탈북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됐다. 보고서는 “2008년 기준으로 양강도와 함경도 인구는 각각 71만 9000명과 530만 9300명으로, 이 가운데 1%만 가정해도 6만여명이 북한을 탈출할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탈북 경로는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분화 직후 천지의 물이 솟구쳐 쓰나미가 발생하면 압록강과 두만강이 범람해 중국 쪽으로 탈북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다. 때문에 북한 이탈 주민들이 선박을 타고 동해와 서해상의 해류를 이용해 남한으로 향하는 탈북 시도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서울광장] 420년 전 유성룡이 있었다면 지금은?/최광숙 논설위원

    [서울광장] 420년 전 유성룡이 있었다면 지금은?/최광숙 논설위원

    임진년(壬辰年) 새해에 임진왜란을 되돌아보게 된다. 작금의 국내 정치 상황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보면 그때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왜군이 부산을 침략해온 1592년 4월,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 그해도 임진년이었다. 16세기 말 동북아가 격동의 시대였다면, 아시아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 간에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지금의 정세도 긴박하긴 마찬가지다. 과거 동인·서인 간 당쟁으로 국가 재정과 민심이 피폐해진 것도 오늘과 닮았다. 선진국으로 가느냐 못 가느냐 기로에 서 있지만 국가의 미래는 안중에 없고, 정치권은 여야 모두 포퓰리즘이 난무한다. 국가 중대사도 사사건건 보수·진보로 나뉘면서 국론이 분열돼 있다. 임란 당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조총을 갖고 싸웠지만 조선은 변변한 무기도 없는 병졸을 데리고 7년을 싸웠다. 오죽하면 임란에 개입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도망 잘 치는 군대’라고 비웃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어렵사리 이겼다. 조선 최고 재상으로 일컫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임진왜란이 얼마나 힘든 싸움이었는지를 ‘징비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오호라 임진의 화는 참혹하도다. 20여일 사이에 국도(國都)가 떨어지고 8도(八道)가 무너져 임금이 파천(播遷)의 길에 올랐다.” 흔히들 임란 하면 이순신을 떠올리지만 백척간두에 섰던 조선의 운명을 다잡은 이는 다름 아닌 유성룡이었다. 그는 임란 1년 전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말직에 있던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한 인물로만 알려졌지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기 바빴던 선조 대신 정치·군사 등에서 뛰어난 지략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이었고, 경제·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한 탁월한 리더였다.(이덕일의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무엇보다 유성룡은 국혼(國魂)을 지닌 지도자였다. 서울 도성을 버리고 평양성에서 머물던 선조가 명으로 피신하려 하자 “한 발자국이라도 (국경을) 나가면 조선은 내 땅이 아닙니다. 지방의 지사들이 며칠 안으로 크게 일어날 텐데 어찌 경솔히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넙니까.”라며 겁에 질린 임금을 붙잡는다. 만약 선조가 도망치듯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땅으로 도망갔다면 조선은 없어지고,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체(國體)를 오늘날까지 온전히 이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전세가 힘에 부치자 명을 끌어들여 반격의 기선을 잡은 인물이기도 하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저서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에서 “뛰어난 통찰력과 능수능란한 외교력으로 명과 왜가 조선을 분할 통치하려는 것을 막았다.”고 적고 있다. 임란이 한·중·일 3국의 국제전임을 처음 인식하고, 명이 조선에서 철수하면 위협받을 것이라는 ‘후퇴불가론’을 내세워 명으로 하여금 계속 조선과 연합전선을 펴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약 서애가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도 모르게 조선이 분단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니 참으로 아찔한 역사의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다. 밖으로는 미국과 중국 등 세계 주요 국가들의 지도자 교체가 이뤄진다. 동북아 질서 새판짜기가 시도될 가능성이 높다. 그 어느 때보다 요동치는 시기다. 하지만 난세에는 영웅이 나온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긴박한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와 백성을 지켜냈던 서애 같은 영웅 말이다. 지금도 난세라면 난세다. 흩어진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국제 정세를 훤히 꿰뚫어 그 속에서 국가의 미래 좌표를 제시하며 국정을 제대로 이끌 리더가 필요하다. 서애가 죽자 백성들은 선조가 명한 ‘3일장’을 치르고도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찌 살아 남았겠는가.”라며 하루를 더 애도했다고 한다.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우리도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갖고 싶다면 무리한 욕심일까. bori@seoul.co.kr
  • 北 정은父子 생일 앞두고 국경 전면봉쇄·연일 충성맹세

    北 정은父子 생일 앞두고 국경 전면봉쇄·연일 충성맹세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밖으로는 중국과의 국경 지대를 봉쇄하고 안으로는 대규모 군중대회를 열어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등 체제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 4일 대북소식통 등에 따르면 북한이 중국과의 접경 지역을 전면 봉쇄하고 정보 통제 강화에 나선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한 소식통은 북한이 최근 국경경비대 병력과 암호 체계, 매복 시간대를 변경한 후 대대적인 탈북자 색출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김 부위원장 생일(1월 8일), 김 위원장 생일(2월 16일)을 앞둔 시점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도 이날 김 부위원장이 부친의 사망 발표 시점인 지난달 19일을 전후해 특수치안기관인 조선인민군 내무군에 “탈북자를 저지하라.”는 지침을 하달했다고 보도했다. 김 부위원장의 직할 병력으로 알려진 내무군은 탈북 시도자에 대한 발포 및 사살 허가를 재확인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말 압록강을 건너던 탈북자 3명이 사살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대대적인 충성 경쟁을 통한 내부 결속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지난 2일 함경남도 함흥광장에서 노동당 정치국 결정서와 신년공동사설 관철을 위한 군중대회를 시작했다. 북한 수뇌부가 참석해 “김정은 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어 나가자.”며 후계 체제의 결속을 다지는 등 유훈 통치를 전파하고 있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도 3일 주민 10만명이 참여해 김 부위원장에 대한 충성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조선중앙TV도 김 부위원장의 신년 첫 공식활동인 ‘근위서울류경수 제105탱크사단’ 방문 장면을 담은 13분짜리 기록영화를 이틀 만에 제작해 발빠르게 방송하는 등 ‘김정은 알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김정은, 애도기간 탈북 주민에 ‘3족을 멸하라’”

    “김정은, 애도기간 탈북 주민에 ‘3족을 멸하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후계자인 김정은이 김 위원장의 사망 애도기간에 탈북을 시도한 주민들에 대해 “3대를 멸족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23일 양강도 지방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특별 경비령이 내린 19일 저녁, 압록강을 건너려던 한 가족이 통째로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면서 “이들 가족은 한국행을 목적으로 강을 건너려다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들은 혜산시 혜탄동에 사는 고씨 성의 부부로 19일 밤 11시30분께 10세 미만의 두 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려다 국경경비대에 체포당했다.  소식통은 이들이 굳이 특별경비가 선포된 19일 탈북하려 했던 것은 이미 김 위원장의 사망 보도 이전에 이날 탈북하기로 계획하고 중국쪽 안내인들에게 미리 돈을 줬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RFA는 또 양강도 보위부 간부들과 연계가 있다는 또 다른 혜산시 주민이 “이번 사건이 애도기간에 일어난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김정은에게 직접 보고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이 주민은 “보위부 간부들은 사건보고를 받은 김정은이 ‘이런 때에 월경하는 자들은 모두 역적이’라고 크게 화를 냈다고 말했다.”면서 “김정은은 또 ‘고씨 일가의 3족을 멸족해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덧붙였다.  RFA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던 1994년 당시 이런 일로 숙청됐다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소식통들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김정일 사망 이후] 건설자재 등 北·中무역 활기… “내주 식료품도 정상화”

    [김정일 사망 이후] 건설자재 등 北·中무역 활기… “내주 식료품도 정상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북한에서 철광석이 중국으로 들어왔어요. 아직 이쪽(중국)에서 북측으로 건너간 식품류는 없어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다소 주춤했던 북·중 무역이 활기를 띠고 있다.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중단되는 듯했던 북·중 무역이 지난 20일 일부 재개 이후 점차 회복 속도를 높여 가고 있다. 김 위원장 사망 발표 이틀째인 20일 오후부터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건설자재를 중심으로 무역이 부분 재개된 데 이어 21일부터는 북한에서도 철광석 등 물자가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둥 지역의 한 중국 무역상은 22일 “김 위원장 사망 이후 어제 북한 측으로부터 의류 공급 요청이 처음 들어왔다.”면서 “애도 기간이 끝나는 29일 이후부터는 식품 등 생필품 무역도 정상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둥은 북·중 무역의 중심지로, 북한은 단둥을 통해 주로 철강 등 건설자재를 수입하고 있다. 쌀을 비롯한 식품류와 의류, 가전제품 등도 주요 수입물품이다. 이날 오전에도 물품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들이 잇따라 단둥 해관(세관)에서 압록강철교를 넘어 신의주로 넘어갔다. 21일에는 북한이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50여대의 건설용 신형 트럭들이 줄을 지어 단둥 해관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해관 관계자는 “김 위원장 사망 발표 이후 하루이틀 정도 교역 물량이 줄었던 것이지 북·중 무역이 완전히 중단됐던 적은 없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중국에 거주하는 북한 무역상들에게도 차질 없는 업무 수행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북 무역상은 “‘조문을 위해 귀국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침이 있었다고 한다.”면서 “북·중 무역은 곧 모두 정상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21일 오후 4시 23분 단둥에 도착할 예정이던 평양발 베이징행 국제열차도 1시간가량 연착되긴 했지만 정상적으로 운행됐다. 승객들은 대부분 중국인이었지만 북한 사람들도 일부 탑승하고 있었다. 열차를 통해 단둥에 도착한 한 중국인은 “주민들이 슬픔에서 벗어나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북한 쪽 분위기를 전했다. 한편 중국은 김 위원장 장례식 이후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를 할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중국이 곧 대규모의 식량을 제공할 것”이라면서 “하지만 그간의 관례대로 이에 대해 공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에도 북한에 30여만t의 식량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 이날부터 한국과 일본 등 외신기자들의 국경지역 취재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여 주목된다. 안전부와 공안(경찰)이 합동으로 기자들의 숙소를 찾아와 취재목적 등을 꼬치꼬치 캐묻는가 하면 주민들에 대한 인터뷰나 사진촬영 등을 제한했다. 지린성 투먼 등에서는 일부 한국 기자들이 공안에 연행됐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한 소식통은 “중국 내 북한 주민들과의 충돌이나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보도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jhj@seoul.co.kr
  • [김정일 사망 이후] 新압록대교 공사 잰걸음·세관 분주… “北·中경협 차질없다”

    [김정일 사망 이후] 新압록대교 공사 잰걸음·세관 분주… “北·中경협 차질없다”

    북한과 중국 경제협력의 상징인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신압록강대교 건설 현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나흘째를 맞은 21일에도 분주한 모습이다. 칼바람 속에서도 기중기 등 건설 중장비들이 굉음을 내며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공사장 인부들도 잰걸음으로 신압록강대교 건설을 위해 마련된 부교 위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신압록강대교는 ‘혈맹관계’를 과시하는 북한과 중국이 단둥 랑터우(頭)에서 신의주 신도시까지 연결하는 다리로, 지난해 말 착공했다. 공사구간은 교량 3㎞를 포함해 양국 진입로 등 모두 12.7㎞에 이른다. 공사장 인부 추모씨는 “신압록강대교는 원래 중국이 전액을 출자해서 만드는 다리인데다 이쪽 지역은 원래부터 중국인 인부들 중심으로 공사가 이뤄져 왔다.”면서 “(김정일 위원장 사망에도 불구하고)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이 임대해 개발하기로 한 단둥 인근 황금평 가공무역지구는 여전히 논밭으로 남아 휑뎅그렁했다. 이 때문에 단둥에서는 향후 북·중 경제협력 사업에 대한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김 위원장이 사망한 만큼 더 이상 나빠질 악재는 없다는 견해와 내부 체제 안정이 가시화될 때까지는 침체에 빠질 것이란 시각이 교차한다. 그러나 북·중 경협 전망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단둥 류경(柳京)호텔 21층에 있는 북한 선양영사관 단둥지부 김정일 분향소에서 만난 한 북한 주민은 향후 ‘북·중경협도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일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다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런 때에 (북·중 간)무슨 무역이 이뤄지겠느냐. (애도기간이) 끝나야 한다.”며 현재 중단 상태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날 영사관 내 김정일 분향소에는 귀국하지 않은 북한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분향소에서는 영사관 직원 2명이 조문객들의 얼굴을 일일이 영상 카메라에 담았으며, 조문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반드시 방명록에 이름을 남길 것도 요청했다. 북한 정부가 운영하는 식당들이 영업을 중단한 가운데 이날 오전 9시쯤 평양고려식당 여성 종업원 20여명이 서로 팔짱을 낀 채 식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뒤쫓아가 보니 식당 문에는 ‘영업하지 않습니다’라는 안내글이 여전히 적혀 있었다. 식당 문 너머로 검은 목티를 입은 여종업원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29일 이후부터 정상 영업하니 그때 오라.”고 말했다. 단둥 세관은 전날보다 한결 분주해졌다. 트럭들이 줄을 이어 세관을 거쳐 속속 중조우의교를 통해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세관 측 관계자는 “일부에서 북한으로 물자가 운반되는 길이 봉쇄됐다는 말이 있다.”고 묻자 “지금 세관을 빠져 나가는 차들이 다 조선 쪽으로 가는 차들이다.”고 되받았다. 이날 새벽 5시 40분쯤에도 화물열차가 압록강을 건너 북한 신의주로 들어갔다. 일각에서는 이를 놓고 북측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신호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jhj@seoul.co.kr
  • 평양 귀국령? 단둥거주 北주민 20%도 못 돌아가

    평양 귀국령? 단둥거주 北주민 20%도 못 돌아가

    “평양 귀국령이오? 북한 사람들 단둥에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공개된 지 이틀째인 20일 이른 아침부터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와 북한 신의주 경제특구를 잇는 조중우의교(朝中友宜橋) 철교 위로 열차, 승합차, 버스 등이 분주히 오갔다. 일부 차량 안에는 조문에 쓰이는 화환이 보였고, 귀국길에 오른 북한 주민들은 저마다 국화꽃을 들고 있었다. 북한과 중국을 이어주는 최대 연결 통로로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는 평상시 교역 차량과 사람들의 통행으로 분주하다. 김 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날 오후부터 세관이 이 다리를 폐쇄했다고 알려졌지만 이날 저녁까지 다리 위로 간간이 차들이 다니는 모습이 포착됐다. 단둥 세관 안에서 만난 중국인 트럭 기사 리모는 “오전만 하더라도 (세관으로) 차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대기하거나 돌아갔다.”면서 “식료품 공산품 등 생활용품을 실은 차량은 통행 금지됐지만 철판 등 주요 물자들을 실은 차들은 다닐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여전히 많은 북한 사람들이 단둥에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인회 관계자는 “단둥 지역에 북한 사람들이 최소 2500명이 상주하고 있는데 귀국한 사람은 500여명도 채 안 된다.”면서 “한꺼번에 다 돌려보낼 교통 수단이 없다.”고 말했다. 공무원과 무역상사의 간부급들과 그 가족 정도만 돌아갔지 일반 직원들은 대부분 남아 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황모씨도 “북한 쪽 이야기를 들어 보니 ‘평상시대로 하던 일을 하라’는 지령(시)이 내려왔다고 했다. 하루 일을 못하면 경제적으로 손해가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애도를 위해 소비 활동만 중단됐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 북한 사람들이 일상용품 등을 도매하러 찾는다는 단둥 얼징(二經)거리는 인적이 드물었다. 상점들은 손님이 없어 퇴근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일찍 문을 닫고 있다. 용천종합상사 이수성 사장은 “어제부터 손님이 뚝 끊겼다.”면서 “국상인 만큼 일상용품을 사러 다니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분위기를 전했다. 압록강 위로 운항하던 유람선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400m 거리에 있는 건너편 신의주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지만 역시 사람들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강변을 따라 들어선 공장의 굴뚝들에서는 연기 한 줄기 피어오르지 않았고, 낡은 중장비들만 덩그러니 멈춰서 있었다. 단둥 지역 한식당 가운데 북한 정부가 운영하는 식당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송도원이란 간판이 붙은 북한 식당에 들어서자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와 묻지도 않고 손을 저었다. 혹시나 싶어 모터보트를 타고 신의주 지역을 둘러보았다. 마을 곳곳마다 조기가 게양된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함정에서 경비 근무를 서는 북한 군인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체제 변화에 대한 불안감으로 북한 주민들이 잇따라 북한을 빠져나오는 등의 돌발상황에 대비해 중국쪽에서도 경계태세를 강화했다는 얘기가 나돌았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 지역에서 무역업을 한다는 중국인 인모는 “밖에선 안 보이지만 공안과 정보부 사람들이 건물 안에서 주시하고 있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할 때에도 공안들이 숨어서 정찰한다.”고 말했다. 압록강의 접경도시 단둥에는 정중동 속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jhj@seoul.co.kr
  • 中 지도부 ‘조용’… 병력 2000명 국경지대 배치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중국 랴오닝성 단둥(丹東) 지역은 1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에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경지역에 대한 중국이나 북한 측의 경계 강화 움직임도 없다고 한 소식통은 전했다. 하지만 홍콩의 RTHK방송은 홍콩 인권민주주의 정보센터를 인용, 북한에서 대량 탈북사태가 발생할 것에 대비해 중국 인민해방군 병력 2000여명이 지린성 훈춘(琿春)과 투먼(圖們) 등 북·중 국경지대에 배치됐다고 보도했다. 단둥의 한 교민은 “김 위원장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면서 “세관도 평상시와 똑같이 문을 열어 물건을 실은 트럭들이 드나들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20일부터 당분간 단둥 세관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중국에 대한 사전통보 여부가 주목되는 가운데 한 대북소식통은 “중국 지도부에서도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고 말해 북한이 중국에 김 위원장 사망 사실을 발표 전에 통보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발표 직전에야 통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중국의 북한인 사회는 사실상 패닉 상태에 빠졌다. 베이징 차오양구 외교단지에 있는 북한대사관은 이날 오전 11시 40분(현지시간)쯤 인공기를 한 폭 내려 조기를 게양했다. 침통한 표정의 대사관 관계자 3명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 인공기와 연결된 줄을 잡고 인공기를 천천히 끌어내렸다. 한 젊은 북한여성은 눈물을 흘리며 대사관을 나와 걸어가기도 했다. 북한 대사관 주변에는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찾아온 외신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베이징 내 10여곳의 북한식당은 이날 일제히 영업을 중단했다. 한국인들이 밀집해 생활하는 차오양구 왕징(望京)의 북한식당 ‘대성산관’은 점심영업 준비를 하다 김 위원장 사망 소식을 전달받고 내부 등을 모두 끈 채 손님들을 돌려보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북한, “김정일 기념비 철거하라” 중국 요구에…

    북한, “김정일 기념비 철거하라” 중국 요구에…

    북한과 중국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기념비 철거를 놓고 갈등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일 도쿄신문에 따르면 중국이 북한과 압록강 국경에 가로놓인 다리 확장 공사를 북한 측에 제의했지만 “다리 밑에 김 위원장의 기념비가 있어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 이 다리는 중국 지린(吉林)성 창바이(長白)조선족자치현과 북한 혜산시를 연결한다. 중국은 최근 들어 혜산 광산에서 구리의 생산이 늘자 이를 운반하는 트럭도 증가해 1차선 다리를 확장하는 계획을 세웠다. 다리 주변에 있는 기념비는 김 위원장이 부친인 고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현장을 돌아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중국 측은 다리 확장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다리 주변에 있는 김 위원장 기념비의 이동이나 철거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북한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북한은 별도의 지점에서 새로운 다리 건설을 할 것을 역제안했지만 강폭이 넓어 중국 측이 난색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북한 측은 “다리는 중국 측의 필요에 의해 건설되는 것”이라며 건설비의 전면 부담도 요구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북·중, 김정일 기념비 철거 놓고 갈등

    북·중, 김정일 기념비 철거 놓고 갈등

    북한과 중국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기념비 철거를 놓고 갈등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일 도쿄신문에 따르면 중국이 북한과 압록강 국경에 가로놓인 다리 확장 공사를 북한 측에 제의했지만 “다리 밑에 김 위원장의 기념비가 있어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 이 다리는 중국 지린(吉林)성 창바이(長白)조선족자치현과 북한 혜산시를 연결한다. 중국은 최근 들어 혜산 광산에서 구리의 생산이 늘자 이를 운반하는 트럭도 증가해 1차선 다리를 확장하는 계획을 세웠다. 다리 주변에 있는 기념비는 김 위원장이 부친인 고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현장을 돌아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중국 측은 다리 확장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다리 주변에 있는 김 위원장 기념비의 이동이나 철거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북한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북한은 별도의 지점에서 새로운 다리 건설을 할 것을 역제안했지만 강폭이 넓어 중국 측이 난색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북한 측은 “다리는 중국 측의 필요에 의해 건설되는 것”이라며 건설비의 전면 부담도 요구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씨줄날줄] 지안(集安)의 가을/이도운 논설위원

    425년 동안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국내성(현 지명 지안)은 동, 서, 북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대국의 수도가 대부분 사방 만리의 평지에 건설됐던 것에 비하면 다소 의외의 지형이었다. 지난 10월 18일 오전 10시. 지안의 가을은 봄처럼 따뜻하고 고향처럼 편안했다. 하루 전 백두산에서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를 겪고 온 탓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지안 동북부의 얕은 둔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장엄한 역사를 온몸에 새기고 1500년의 풍상을 견뎌낸 돌기둥은 이제 초라한 비각 속에 갇혀 있었다. 중국 정부에서 임명하는 별 다섯개짜리 가이드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중국이 해석하는 고구려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대왕의 능이 자리잡고 있다. 오랜 세월 방치돼 허물어져 가는 돌무덤에서 옛날 동북아를 호령하던 영웅의 기상을 짐짓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광개토대왕비와 능에서 다시 동북 방향으로 1㎞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장군총까지 관람한 뒤 기념품 센터로 들어갔다. 조선족 여인들이 광개토대왕비의 탁본과 모형품 등을 팔고 있었다. 고구려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자도 10권이 넘었다. 함께 갔던 동북아역사재단의 홍면기 박사는 “저자들이 모두 동북공정의 주인공들”이라고 설명했다. 머지않아 동북공정의 결과가 중국 역사 교과서에 반영된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지안의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그 너머가 바로 북한이다. 모터 보트를 타고 압록강으로 들어갔다. 강은 북한과 중국의 공동관리지역이다. 북한 쪽으로 가까이 가도 문제가 없었다. 압록강과 잇닿은 중국 지역은 평지고, 북한 지역은 곧바로 산이다. 원래 그랬던 것이 아니다. 중국 측에서 댐을 쌓아 물길을 북한 쪽으로 돌렸다고 한다. 북한 쪽 산 중턱에 난 도로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들이 보였다. 손을 흔들었더니 똑같이 손을 흔들며 화답한다. 그들은 우리 일행이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도로 아래로는 50~100m마다 국경을 감시하는 북한군의 초소가 보였다. 북한 쪽 산은 예외 없이 민둥산이다. 더 이상 벗겨 먹을 산도 없는 듯하다. 산 하나에 거대한 굴뚝이 솟아 있었다. 구리 제련공장이었다. 중국에서 전기를 끌어와 공장을 가동하고, 생산된 구리는 중국으로 수출한단다. 지안에는 고구려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북아 정세의 현재와 미래도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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