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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그 별 헤는 밤

    독립운동가, 그 별 헤는 밤

    지상파 3사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광복절을 기념해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항일 역사를 되짚고, 극우 성향이 짙어지는 일본의 행태를 분석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KBS1은 일본 현지에서 단독 발굴한 공문서를 토대로 밀정들의 활동상과 이들에게 배신당한 독립운동가들의 시련을 재현한 ‘시사기획 창-밀정’ 1부를 지난 13일 방송한 데 이어 오는 20일 2부를 방송한다. 광복절인 15일에는 쿠바혁명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은퇴 후 한인사회 재건을 위해 헌신한 헤르니모 임(한국명 임은조)을 조명한 ‘KBS스페셜-헤르니모를 찾아서’를 비롯해 우리 식물 학명에 숨은 일제 잔재를 밝힌 특집 다큐 ‘우리 들꽃의 독립’, 독립운동가들의 밥상을 재현해본 ‘한국인의 밥상’ 등을 편성했다. 같은 날 KBS2 ‘3·1운동 100주년 기획 윤동주 콘서트 별 헤는 밤’에서는 가수 이적, 윤형주, 스윗소로우, 다이나믹 듀오, YB, 최백호, 포레스텔라, 백지영 등이 무대를 꾸민다. MBC는 올 초부터 방송한 미니 다큐 ‘1919~2019, 기억록’의 이번 주 방송에서는 손정은 아나운서가 서울 혜화동 교차로에서 여운형 선생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스트리트 댄서 제이블랙이 광복의 역사를 음악과 춤으로 기록한다. ‘기억록’과 제이블랙이 공동제작한 배경음악 ‘웬 더 데이 컴스’ 음원이 광복절 당일 공개된다. 이날 특선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도 볼 수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일본 우익세력의 신친일파 양성 계획을 심층 취재해 이달 중 내보낸다. 광복절 당일에 영화 ‘암살’과 최재형, 이범진, 이위종 등 선열들의 길을 직접 걸어본 특집 다큐 ‘연해주에 남겨진 별들’을 편성했다. ‘좋은 아침’은 특별기획으로 ‘100년 만에 찾아온 영웅들의 한 끼’를 방송한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명동성당 앞에서 비수로 거사… 공범 묻자 “2000만 동포가 도왔다”

    명동성당 앞에서 비수로 거사… 공범 묻자 “2000만 동포가 도왔다”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알아도 이재명 의사(李在明 義士)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한 독립운동가 정도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이 지사는 우연히도 의사의 의거일이 자신의 생일과 같은 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매국노를 죽이려다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의사에 대한 인식과 대접이 이렇다.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직계 후손이 없어 훈장을 국가보훈처가 보관하고 있었다. 고향도 평북 선천이라 생가나 일가붙이를 찾을 수도 없다. 형이 집행된 후 시신도 수습되지 않아 유골의 행방도 묘연하니 묘소도 있을 리 없다.잊혀진 의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은 종친회였다. 이 의사의 본관은 진안인데 진안 이씨는 전북 진안을 비롯해 의사의 고향인 평북 등지에 집성촌이 있다. 또한, 진안 마이산은 1907년 이석용이 조직한 호남 의병 창의동맹단의 집결지였다. 진안에는 1925년 유림들이 일제에 항거해 순국한 의사와 열사 등 79위를 배향한 사당인 이산묘(耳山廟)도 있다.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 두 봉우리의 서쪽이다. 이산묘 영광사(永光祠)에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과 더불어 이 의사도 모셔져 있다.그런 인연으로 의사의 동상과 기념관이 고향에서 천 리 길이 넘는 먼 곳 진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진안군청에서 마이산도립공원으로 들어가다 보면 도로 오른쪽에 이재명 의사 기념관이 있다. 2001년 종친회와 정치인들이 이재명 의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진안읍 군하리 6500여㎡ 부지에 조성한 시설이다. 그러나 금요일에 찾아간 기념관과 사업회의 문은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관람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홍살문은 나무가 삭아 홍살이 떨어져 뒹굴고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이러니 방문객은 있을 리도 없고 간혹 지나가다 들러도 관람을 할 수 없다. 몇 해 전 수리를 요청하는 민원이 제기됐지만, 군청에서는 토지보상금 사용 승인이 나지 않았다고 답했다. 뜻을 모아 거액을 들여 지은 기념관이 보상금 갈등과 무관심, 예산 부족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기념관 옆 타향 땅에 세워진 의사의 동상은 더 쓸쓸해 보였다. 이 의사는 1887년 10월 16일 선천에서 태어나 8살 때 평양으로 이사 가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의사는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해 미국 하와이로 갔다. 1906년 3월에는 공부를 더 할 목적으로 미국 본토로 옮겨가 안창호가 중심이 돼 창립한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이듬해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공립협회는 매국노 처단을 결의하고 실행자를 선발했는데 거기에 지원한 사람이 바로 이 의사다.●이토 암살 실행 무산되자 이완용 죽이기로 의사는 그해 10월 9일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때를 엿보던 의사는 1909년 1월 평안도 순시를 떠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평양역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하지 못했다. 안창호가 이토와 함께 다니던 순종 황제의 안전을 위해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이토는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역에서 사살됐다. 의사는 원래 목표대로 을사 5적을 비롯한 매국노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여러 동지와 야학당에 모여 이완용은 이 의사와 김병록· 이동수가, 이용구는 김정익이 죽이기로 했다. 그러던 중 이완용이 12월 22일 종현 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 양심여학교 학생이던 아내 오인성씨와 마지막 작별의 밤을 지냈다. 오씨는 울지 않았고 남편의 거사를 만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날이 새자 김병록, 이동수와 함께 의사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날 오전 11시 30분쯤 의사는 성당 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갔다. 의사는 비수를 들고 달려들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제지하려 하자 그를 찔러 숨지게 하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 쪽을 공격했다. 혼비백산한 이완용이 달아나려 하자 다시 3곳을 더 찔렀다. 거사 직후 의사는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됐다. “오늘 우리의 공적(公敵)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고 통쾌하다”고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이완용은 치명상을 입지는 않고 목숨을 건졌다. 이완용은 자신의 집으로 가서 의사를 불러 응급 치료를 받았다. 일본 경찰은 이 의사를 이완용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와 있던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네가 흉행(兇行)을 한 자냐”고 물었다. 이에 의사는 눈을 치켜 뜨며 “너 조중응은 귀중한 인사를 이 모양으로 하대하느냐”며 오히려 추상과 같이 꾸짖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일경에게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르니 권연초 한 개를 가져오라”고 하여 유유히 피웠다.●“내 목숨 빼앗을 수 있으나 충혼은 못 빼앗아” 경시청에서 조사를 받은 의사는 일경이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이러한 큰 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고 말했다. 이듬해 4월 열린 재판에서도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재판장 스가하라에게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000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거론하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의사는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 꼿꼿한 자세로 재판장을 꾸짖으며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다. 부인 오씨는 ‘국적 이완용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 가부(家夫)는 왜 사형에 처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의사는 총독부 체제 발족 바로 전날인 1910년 9월 30일 순국했다. 의사는 의거를 공모한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호하면서 끝까지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병록 등 동지 10여명도 최고 징역 15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부인 오씨를 성모여학교 교사인 함마리아의 소개로 만나 1907년 겨울 부부의 연을 맺었다. 오씨도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변호인을 선임하는 등 남편 뒷바라지에 열성을 다했다. 남편이 죽은 뒤 오씨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중국 길림성과 상해 등지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오씨는 귀국했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증거와 단서가 없어 석방되었지만, 미행과 감시를 받았다. 오씨는 다시 망명을 도모하다 병을 얻어 29세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 외과 의사의 집도로 수술을 받은 이완용은 53일 동안 입원했다. 순종과 고종은 이완용이 퇴원하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종을 보내 안부를 묻고 거액의 위로금을 보냈다. 전국의 관찰사와 군수들로부터도 위로금이 답지했다고 한다. 퇴원 후 충남 온양에서 휴양을 한 이완용은 총리직으로 복귀해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했다. 그 4일 후 순종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최고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받았다. 이완용은 일제의 보호 속에 백작 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1926년 68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의사의 칼을 맞아 폐를 다친 후유증이었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맥도날드, 버거킹 유럽서 수모

    미국 대형 햄버거 브랜드가 유럽에서 잇달아 수모를 당하고 있다. 1일 CNN 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 문화부는 로마 카라칼라 욕장 옆 건물에 계획된 맥도날드 매장의 입점을 불허했다. 알베르토 보니솔리 문화부 장관은 페이스북에 “나는 이미 패스트푸드가 카라칼라 고고학 유적 지역에 들어서는 데 대해 반대한 바 있다”면서 “문화부가 허가를 취소했음을 알린다”고 썼다. 버지니아 라기 시장도 이에 동의하며 트위터에 “우리는 문화부 장관에 동의한다”면서 “로마의 경이로움은 보존돼야 한다”고 썼다. 카라칼라 황제의 욕장은 시내 중심부에 있어, 콜로세움 등과 매우 가깝다. 카라칼라는 198년부터 211년까지 아버지와 로마를 공동 통치하다, 217년 암살될 때까지 혼자 통치했다. 하지만 CNN은 이날 결정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은 어렵지 않게 빅맥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이미 로마엔 맥도날드 매장이 40개나 있기 때문이다. 이날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 카탈로니아 당국은 자사 직원이 수염을 기르지 못하도록 한 버거킹의 규정이 헌법으로 보장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도 판결했다. 앞서 노동위원회 지역지부는 남성 근로자에게 넥타이와 여성 근로자에게 리본을 매도록 하는 등 여러 규정에 대해 버거킹 측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회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당국에 개입을 요청했다. 지방정부 노동검사 위원회 노동조사관들은 판결문에서 “점검 결과 내부 규정으로 정해진 특정 기업 관행이 노동자의 헌법적 권리, 즉 자신의 이미지와 성에 따라 동등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맥도널드와 버거킹은 각각 외신의 취재에 응답하지 않았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우상’ 요시다 정한론 가슴에 품고…아베의 21세기판 침탈 야욕

    ‘우상’ 요시다 정한론 가슴에 품고…아베의 21세기판 침탈 야욕

    1910년 8월 29일 밤 서울 남산 기슭 통감관저.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자축하는 연회가 열렸다. 첫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경복궁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 어줍잖은 하이쿠(일본의 단형시) 한 줄이 흘러나왔다. “고바야카와 다타카케,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오늘 저녁 저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 1592년 조선을 정복하려다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수들이었다. 전임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이 하이쿠를 이어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땅속에서 깨워 보이리라, 조선 산 높이 오르는 일본 국기를.” 데라우치는 도요토미와 그 장수들 그리고 이토에게 ‘조선 병탄’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역사는 한 번도 끊이지 않았다. 기록된 것만 조선조까지 무려 1000회 이상이다. 663년 4만여 명 이상을 동원해 신라와 전투를 벌였고, 760년에는 발해에 신라 침공을 유혹하기도 했다. 고려 실록엔 600여건의 왜구 침략 기사가 실려 있고, 조선왕조실록엔 312건이 올라 있다. 침탈의 주력은 일본의 서남단 지금의 야마구치현(옛 지명 조슈번)이거나 구마모토, 가고시마현(옛 지명 사쓰마번)이었다. 이 중에서도 조슈번은 특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물론 1, 2대 조선 총독이 모두 조슈번 출신이었다. 조슈번은 외지고 작았지만, 특유의 공격성으로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에 성공했다. 유신 이후 총리만 무려 8명이나 배출해 하나의 벌(閥)족을 이뤘다. 두 번째로 많은 도쿄는 4명뿐이다. 한국에서 대통령 12명 중 5명을 배출하고, 정부 수립 후 70년 가운데 40여년을 집권한 ‘TK’(대구·경북)와 비슷하다. 군벌이 주력이었다는 점도 같다. 다만 조슈번 벌은, 무작정 권력만 추구한 ‘TK 벌’과 달리 나름의 이념과 책략이 있었다. 그 스승은 요시다 쇼인. 지난 17일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우호적으로 인용했다가 망신을 당한 인물이다. 지금도 야마구치현에선 그에게 ‘선생님’이란 경칭을 쓰지 않으면 바로 외면당한다. 그가 제시하고 가르친 책략이 바로 정한론(征韓論·조선정복론)과 ‘일본 굴기’다. 조슈번에는 사이코데이(채향정)라는 130년 전통의 요정이 있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100여년간 일본 요정 정치의 꽃이었다. 거기엔 박정희 군사정권 실세들을 불러들여 한일협정을 성사시킨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의 별실도 있다. 채향정의 대연회장인 오히로마에는 좌우 벽을 따라 묵서가 20여점 걸려 있다.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모토, 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 등 ‘정한’(征韓)의 주역과 현대의 기시 노부스케와 그의 동생 사토 그리고 아베 신조 등이 그 필자다. 아베의 묵서 내용은 “적연부동”(寂然不動).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해 불과 1년 만에 총리직을 내려놓은 아베 신조는 자신의 지역구(시모노세키)에 머물며 채향정을 드나들었다. 숭배하는 인물의 신조가 빼곡하니, 권토중래를 꿈꾸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아베가 묵서를 가져온 것은 2009년 9월. 다시 출사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마음은 조용하고 편안하고,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곧 도쿄로 올라간다. 아베는 2012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두 번째로 총리가 된다. 그때 내건 슬로건이 ‘강한 일본’, 현재 한일 관계를 흔드는 책략이다. 아베는 총리가 되고 전격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1차 집권 때 참배하지 않은 것을 두고 ‘통한의 극치’라고 했다. 이어 평화헌법 개정 추진과 전쟁 가능한 국가 만들기, 역사 왜곡, 도덕 교과서 부활 그리고 지금의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탈이 뒤따랐다. 그런 아베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다. 그는 외조부 기시로부터 요시다 쇼인과 그의 수제자 다카스기 신사쿠의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성장했다고 자랑처럼 말하곤 했다. 아베 할머니의 할아버지(외고조부)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 오시마 요시사마다. 1894년 일본군 8000명을 이끌고 경복궁을 점령한 자다. 이토와 오시마가 조선 정벌에 앞장섰다면, 기시는 일제의 괴뢰 만주국 창설의 주역이었다. 기시는 A급 전범으로 체포됐지만, 재판도 받지 않고 3년 만에 출소해 ‘쇼와의 요괴’로 불리며 일본 정계를 주물렀다. 아베의 할아버지 아베 칸은 조슈번 향리에서 ‘현세의 요시다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베의 이름 신조(晉三) 가운데 ‘신’, 아버지 이름 신타로 가운데 ‘신’은 요시다의 수제자 신사쿠에서 따왔다. 요시다의 ‘지성’(至誠)은 아베의 정치적 신념이 됐다. 아베는 “지성이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2006년 8월 자민당 총재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했던 “사무라이 된 자, 그 뜻(志)을 세워야 그 뜻한 바, 기(氣) 또한 따른다”는 말도 요시다의 말이다. 새로 출간된 도덕 교과서엔 요시다의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2013년 8월 총리가 된 뒤 현역으로는 처음으로 요시다 묘소를 참배했다. 무릎을 꿇고는 이렇게 다짐했다. “올바른 판단을 하겠다.” 요시다는 1830년 조슈번의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존왕양이’를 위한 과격한 행동으로 수감된다. 금고 상태에서 송하촌숙(쇼카손주쿠)이라는 학당을 만들어 인근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그때 지은 ‘유수록’엔 그 내용이 잘 담겨 있다. ‘왕조가 바뀌는 중국과 달리 황손이 만세일계를 이루는 일본이 우월하다.’ ‘신성이 있은 연후에 창생이 있다.’ ‘조선의 나라들은 덴노(일왕)의 속국이었으나 국체(덴노 중심체제)의 쇠퇴와 함께 교만해졌다.’ 요시다의 몽상적 역사 인식은 이런 결론에 이른다. “국체가 손상된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 신성의 도에 부합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신공황후(3한을 정벌했다는 신화 속 인물)나 히데요시야말로 황도를 밝게 하고 국위를 신장한 것으로서, ‘신주의 광휘’다.” 요시다가 수감됐을 때 미국와 프랑스가 함포를 앞세워 개항을 압박했고, 막부는 이에 굴복했다. 요시다는 ‘국난 극복’의 책략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疆域(강역)을 소중히 하고 조약을 엄히 지켜 二虜(이로·미국과 러시아)를 제어하고, …쉬운 조선을 취(取)하고, 만주를 꺾고, 지나(支那)를 누르고, 인도에 臨(임)함으로써 진취(進取)의 세를 펴고, 이로써 退守(퇴수)의 기반을 굳히고, 신공과 히데요시의 나라가 달성하지 못한 바를 이룩해야 한다.” 그 세례를 받은 자들의 면면은 이렇다. 다가스키 신사쿠는 자타가 인정하는 수제자로 막부 타도의 1등공신이다. 이토는 그를 “동하면 우레 같고, 발하면 풍우 같았다”고 평가했다. 기도 다카요시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메이지유신의 3걸. 조슈 군벌의 수장으로 ‘일본 육군의 교황’이었던 야마가타 아리모토는 청일전쟁 때 조선군 사령관이었다. 아베의 외고조부 오시마는 청일전쟁 전날 경복궁을 점령해 조선을 청일전쟁의 교두보로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총리대신을 2차례 역임하고, 조선에 을사늑약을 강제한 뒤 초대 통감이 됐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불평등조약을 강제한 뒤 주한 공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후임 미우라 고로는 부임하고 불과 한 달 뒤 명성황후 살해를 지휘했다. 가쓰라 다로는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병탄을 묵계받은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주역이었으며, 다나카 기이치는 총리 시절 중국 침략을 기획했고, 데라우치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1, 2대 조선 총독이었다.요시다는 1858년 막부의 2인자 마노베의 암살계획을 추진하다가 체포돼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편지를 보낸다. “민초들을 산처럼 일으켜 체제를 바꾸라.” 이른바 ‘초망굴기’(草莽起)다. 유신을 주도하고, 힘을 길러 조선부터 인도차이나까지 집어삼킨 뒤 미국과 맞붙고, …제자들은 그 길을 갔다. 아베의 ‘강한 국가’도 그 연장이다. (평화헌법) 체제를 뒤엎어, 쉬운 나라부터 취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경제적 침략을 앞세워 우리 정부를 친일 정권으로 바꾸려는 것은 1894년 외고조부 오시마가 군대를 앞세워 했던 짓과 다르지 않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메르켈, 극단주의와 싸운 전범 거론한 히틀러 암살 미수 슈타우펜베르크

    메르켈, 극단주의와 싸운 전범 거론한 히틀러 암살 미수 슈타우펜베르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영화 ‘작전명 발키리’의 실제 주인공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처형자들을 추모하며 극단주의와 맞서 싸울 것을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는 20일(현지시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이 70년 전에 처형당한 장소인 한 베를린의 ‘벤들러 블록’에서 열린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식에 참석해 “희생자들은 우리가 극우 극단주의, 반(反)유대주의, 인종주의와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한다”면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억을 보존하고 이어가야 한다. 역사적 교훈이 잊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이들은 200명이 넘었다. 당시 36세 젊은 장교였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발키리’라고 명명한 이 실패한 작전 얘기는 2008년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폭탄을 넣은 서류 가방을 동프러시아의 숲 속에 마련된 나치 장교들의 비밀 작전 회의 ‘늑대굴’에 들여보냈는데 누군가 가방을 옮긴 데다 테이블 다리가 너무 견고해 폭탄 파편 여러 발이 비껴나가는 바람에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히틀러를 암살한 뒤 나치 정권을 장악해 연합군과 전쟁 종식 협상을 벌일 계획이었다. 이들의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다지 많은 조명을 받지 못하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비로소 조명받았고 영국 BBC는 전했다. 메르켈 총리는 “불복종이 의무가 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서 “2차 세계대전 후 (기본법에) 저항권이 명시됐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권리”라고 강조했다. 지난 5월 반(反) 이민과 민족주의 구호로 무장한 우익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제1 야당으로 부상하고 정치인 살해에 신나치 극단주의자와 연결된 고리가 발견되는 등 극우 진영의 공격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우려가 많아지고 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독일의 우익 극단주의자들 2만 4000명으로 집계되는데 그 가운데 1만 3000명은 폭력을 서슴치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美법원 北대사관 습격 크리스토퍼 안 보석 허가, 곧바로 풀어주진 않아

    美법원 北대사관 습격 크리스토퍼 안 보석 허가, 곧바로 풀어주진 않아

    지난 2월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에 가담한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38)의 보석 요청이 미국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곧바로 풀려나지는 않았다. 로스앤젤레스(LA) 연방지방법원의 진 로젠블루스 판사는 2일(현지시간) 100만 달러(약 11억원)의 보석금을 내면 크리스토퍼 안이 풀려날 수 있다고 조건부 허용했다. 로젠블루스 판사는 스페인에 그를 인도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또 그가 법정에 출석하지 않으면 그와 가까운 3명을 형사기소할 수 있다는 조건도 붙였다. 로젠블루스 판사는 “북한 정부가 크리스토퍼 안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연방수사국(FBI)이 확인했다. 그는 독재정권의 명백한 살해 표적”이라며 보석 허가 이유를 밝혔다. 이어 그가 스페인으로 송환되면 “북한 측의 암살이나 상해 위협을 느낄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미국 폭스뉴스는 크리스토퍼 안이 소속된 반북단체 ‘자유조선’이 북한 고위급 인사의 망명을 돕고 임시정부를 자처해 왔기 때문에 북한 정권으로부터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전직 미국 해병대원인 크리스토퍼 안은 북한대사관 습격 사건에 가담한 7명의 용의자 중 한 명으로 지난 4월 LA에서 체포됐다. 그의 변호인인 임나은 변호사는 “실제 석방까지 거쳐야 할 단계가 많이 남았지만, 법원의 조건부 석방 결정이 아주 기쁘다”면서 “앞으로 열릴 신병 인도 공판에서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스페인의 인도 요청 문서는 크리스토퍼 안의 혐의 대부분이 북한 고위 당국자의 입증되지 않은 진술에 근거한다”며 “(습격 당시) 누가 묶여 있었으며, 어떻게 (대사관 직원들이) 전부 풀려났는지 등 많은 모순점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자유조선의 변호인단도 북한 외교관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크리스토퍼 안과 습격 주도자로 알려진 에이드리언 홍 창의 폭력 혐의를 꾸며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순종 조문 온 총독 노렸던 ‘금호문 의거’… 6·10 만세 자극제로

    순종 조문 온 총독 노렸던 ‘금호문 의거’… 6·10 만세 자극제로

    1926년 4월 28일 오후 1시 10분쯤 서울 창덕궁 금호문 앞. 사람 무리 속에서 건장한 청년이 자동차 한 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동차에는 일본인 3명이 타고 있었다. 금호문을 빠져나온 자동차는 돈화문 쪽으로 갔다가 길이 막혀 다시 금호문 쪽으로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사이토 총독이다”라고 수군거렸다. 청년은 비호처럼 뛰어올라 왼손으로 자동차 창을 잡고 날카로운 칼로 가운데 앉은 사람을 찌르려 했다. 왼쪽 사람이 저지하기에 그 사람을 공격하고 다시 가운데 사람을 찔렀다. 빠르기가 전광석화와 같았다. 총독 처단에 나선 주인공은 평범한 조선 청년 송학선이었다.불행히도 가운데 사람은 일본 총독 사이토가 아니었다. 송학선 의사(義士)가 사이토로 오인하고 처단한 사람은 생김새가 비슷한 일본인민회 이사 사토였다. 왼쪽 사람은 경성부협의원(국수회조선본부이사) 다카야마였다. 이들은 순종 황제 빈소에 조문하고 나오던 길이었다. 송 의사는 재동 쪽으로 달아났다. 휘문고보 교문 앞까지 달아나자 경찰 수십명이 추격했다. 일경들은 칼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면서도 감히 근접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헌병 두 명이 권총탄을 서너발 쏘았다. 하지만 의사는 “오냐, 쏘아 죽여라”라고 하면서 두 팔을 떡 벌렸다. 결국 의사는 머리에 상처를 입고 일경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의사는 구경하던 학생들에게 “만세를 불러라, 만세를 불러”라고 소리쳤다. 다카야마는 사망했고 총독으로 오인받은 사토는 중상을 입었다. 송 의사가 활극 배우처럼 거사를 일으킨 날은 순종 황제가 굴욕적인 삶을 이어 가다 승하한 13일 후로 백성이 비탄에 빠졌을 때였다. 일제는 송 의사 의거 직후에는 보도를 통제해 5일 후에야 언론을 통해 의거가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송 의사의 의거는 ‘금호문(金虎門) 사건’이라 이름 붙여졌다. 비록 오인으로 실패했지만 순수한 청년의 단독 의거는 6·10 만세운동을 일으킨 자극제가 되었다.의사는 1897년 2월 19일 서울 천연동에서 태어났다. 아우들의 이름도 우학선(又學善·또학선), 삼학선(三學善)이었다. 의사가 보통학교 1학년에 다닐 때 아버지의 사업 파산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의사도 떠돌이 생활을 했고 16세 때 장사를 하러 갔던 아버지가 돌아와서 가족이 다시 모였다. 19세 때 서울 남대문에 있는 농구(農具) 회사에 취직했다. 집안 살림이 조금씩 나아졌고, 1922년 2월 애오개(아현) 마루턱 북아현동에 오막살이 같은 작은 집을 마련해 이사했다. 그러나 의사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급성 각기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는데 치료를 한 끝에 1925년 봄에 완쾌했다. 송 의사는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외유내강의 강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한다. 의사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 송상도의 ‘기려수필’에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과묵하여 일생을 두고 남과 언쟁을 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의사가 반일 감정을 느낀 것은 어렸을 때부터였다고 한다. 어느 날 진고개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았고 본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일본인 회사에 다니며 차별을 받았고, 병으로 강제 해고당하면서 그런 의식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 후 의사는 조선 총독을 목표로 삼아 거사를 계획했다. 의사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사이토 총독의 사진을 보고 용모를 머리에 담아 두었다. 틈만 나면 집 뒷산에 올라 칼 꽂는 연습을 했다. 막내아우 송삼학선씨는 월간지를 통해 이렇게 회고했다. “형님은 평소에 남한테 싫은 얘기 한마디 않고 지내던 양순한 사람이다. 내가 놀란 것은 형님이 날카로운 비수를 꼬나쥐고 나무 앞에서 찌르는 연습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형님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형님의 칼 쓰는 솜씨는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칼은 집수리를 하던 사진관 부엌에서 주운 서양식 고급 과도였다. 의사는 그때 미장이 일을 하고 있었다. 의사는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기뻐하며 예리하게 갈아 놓았다. 기회가 오자 순하고 불우했던 청년은 단호하게 칼을 휘둘렀다.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그해 7월 15일 의사의 제1차 공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법정에는 방청객 500여명이 몰려 재판을 지켜봤다. 의사는 재판장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강경한 태도로 진술했다. 일제는 의거를 궁박한 생활을 못 이긴 강도질로 깎아내리려 했다. 재판장이 강도질을 하려고 칼을 주워다 둔 것 아니냐고 묻자 송 의사는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지고 왔었소. 내가 밥을 굶소? 왜 강도질을 하겠소?”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무료로 변론했던 고 이인 변호사는 “의사의 얼굴에는 의연한 태도, 긍지가 보였다. 조국을 위해서 할 일을 했다는 말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제는 처음에 중국에서 온 독립단원일 것으로 추측하고 배후를 캐려고 했지만,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도 몰랐던 일이었다. 1심에 이어 1926년 11월 10일 2심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은 의사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나를 사형에 처해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북아현동 집에서 서대문형무소를 오가며 옥바라지를 하던 모친과 동생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1927년 5월 19일 오후, 비밀리에 사형이 집행됐다. 의사는 교수대에 오를 때도 태연했다.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고 체포된 지 1년 만에 송 의사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시신은 화장했다. 몸져누운 모친에게는 사형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사후 92년이 지난 지금, 창덕궁 금호문으로 관광객들이 무심히 드나들고 있지만 의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거 터 표지석도 주변 공사로 어디로 치워 버렸는지 찾을 수 없었다. 북아현동 의사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5층짜리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다. 의사의 집터라는 표식도 없다. 송 의사의 유골은 서울 봉원사에 안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묘소는 가묘다. 장남이던 의사의 사형 집행 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송 의사는 결혼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동생들과 그 후손들의 행방도 찾지 못하고 있다. 잊힌 의사의 충혼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03년 ‘송학선 의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됐고 송주섭(88)씨가 지금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송 회장은 송 의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송 의사는 은진 송씨인데 송 회장은 근원이 같은 여산 송씨 종중 대표라는 인연뿐이다. 그러면서도 사재를 털어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다. 김정배 전 고려대 총장이 명예회장, 송정호 전 법무부 장관이 법률고문을 맡아 송 회장을 돕고 있다. 사업회는 서울 세검정 상명대 아래에 기념관과 동상을 세울 부지 660여㎡를 마련했고 내년 6월 착공할 계획이다. 시가 6억원가량의 부지는 송 회장이 개인 땅을 기부한 것이며 사업비 10억여원도 지방의 송 회장 개인 토지를 처분해 충당할 계획이라고 한다. 송 회장은 “정부에서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 안중근, 김구 선생 같은 분만 지원하려 하지 송 의사 같은 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며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글·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고대 로마시대에도 브렉시트 있었다…비화 얽힌 금화, 8억원에 낙찰

    고대 로마시대에도 브렉시트 있었다…비화 얽힌 금화, 8억원에 낙찰

    석 달 전 영국에서 발견된 고대 로마시대의 금화 한 닢이 경매에서 우리 돈으로 8억 원이 넘는 거액에 팔렸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 등 현지매체 보도에 따르면, 6일(현지시간) 런던 메이페어의 한 경매소에서 진행된 한 경매에서 고대 로마시대의 한 금화가 55만2000파운드(약 8억27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10만 파운드(약 1억5000만 원)라는 원래 낙찰 예상가보다 5배 이상 높은 가격이라서 전문가들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이번 금화는 이른바 아우레우스로 불리는 당시 금화 중에서도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왜냐하면 금화 전면에 새겨진 인물이 오늘날 영국의 땅인 브리타니아 지역에 잠시 세워졌던 브리타니아 제국을 서기 293년부터 296년까지 잠시 통치한 알렉투스 황제이기 때문이다. 알렉투스는 오늘날 많은 영국인으로부터 ‘당대의 브렉시터’라고도 불린다. 브렉시터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의 찬성자를 일컫는다. 당시 유럽 전역을 장악한 로마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방대한 제국을 네 등분해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정제(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부제(카이사르)를 배치하는 4두 정치를 시행했고, 286년 비리가 드러나 브리타니아로 달아나 스스로 황위에 오른 로마 장군 출신 카라우시우스를 눈엣가시로 봤다. 알렉투스는 그런 카라우시우스의 부하로 오늘날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수세관이었다. 하지만 292년 로마제국의 서방 부제이자 오늘날 프랑스와 벨기에 등 인접 국가에 해당하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지역을 담당하게 된 지휘관 콘스탄티우스 1세가 카라우시우스군의 요충지 볼로뉴항을 공략했다. 로마제국군은 당장 함대가 없어 브리타니아로 진군할 수 없었지만, 카라우시우스의 권력은 치명적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당시 부하였던 알렉투스가 카라우시우스를 암살하고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알렉투스의 브리타니아 제국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3년 만에 브리타니아로 건너온 로마제국군에 의해 알렉투스가 전사하면서 브리타니아 제국은 1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그때 만들어진 금화들 중 하나가 바로 이번 경매에 나온 것이다. 50년 만에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 카운티 도버의 한 들판에서 한 남성이 금속탐지기로 찾아낸 이 금화는 1페니짜리 동전 크기로 중량은 4.31g이다. 금화 후면부에는 아폴로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있는 두명의 포로가 새겨져있다. 금화 상태가 매우 양호해 이를 발견한 남성은 처음에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대영박물관 전문가의 감정으로 진품으로 확인됐다. 이번 경매를 주관한 런던 경매업체 딕스누넌웹(DNW)의 주화 전문가인 나이절 마일스도 “이는 경매 시장에 나온 금화 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양호한 것 중 하나”라면서 “내 40년 경력 가운데 이만큼 온전하게 보존된 금화를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현재 법령에 따라 단일 금화는 보물로 간주되지 않아 검시관에 통지할 필요 없이 경매에 내놓을 수 있지만, 정부에서는 금화 1개도 보물로 정의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개정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DNW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독립운동단체들 “김원봉 서훈, 서명운동할 것”

    독립운동단체들 “김원봉 서훈, 서명운동할 것”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역사가 재평가”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적’을 거론하면서 ‘서훈 논란’이 재점화된 가운데 주요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조만간 대대적인‘김원봉 서훈 서명운동’에 들어간다. 8일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등에 따르면, 이 단체를 포함해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와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등 국내 7개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올해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11월 9∼10일)을 맞아 이달부터 연말까지 다양한 기념사업을추진한다. 조선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이 단장(의백·義伯)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 단체다. 1919년 11월 중국 만주 길림성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1920년대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관 파괴 등 각종 의거를 이끈 주요 비밀결사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김지섭의 동경 니주바시 폭탄투척 의거,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은 익히 알려진 의열단의 활동들이다. 중국 시인 궈모뤄(郭沫若)는 ‘항일투쟁의 가장 용감한 전사’라고 평하기도 했다.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돼 조직됐던 이 독립무장단체의 단장이 바로 ‘서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김원봉으로, 이번 기념사업은 김원봉과 함께 역사에서 잊혔던 많은 조선의열단원들의 활약상을 재조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들 단체는 특히 오는 8월부터 11월까지 광주·대구·대전·부산을 순회하며 ‘약산 김원봉 서훈 대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한다. 국내 학술대회와 한중 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학술대회도 계획하고 있다. 민성진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장은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당시 김원봉 선생이 왜 월북할 수밖에 없었는지 등도 다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 후 미군정체제의 남한으로 귀국한 김원봉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함께 좌우합작을 추진했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시 남북 좌우합작을 위해 활동한 여운형의 암살을 목격하고,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던 노덕술에게 검거돼 모욕을 당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 기념사업회장은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하지만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이기도 하다. 조선의열단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데도, 이념 대립 문제 때문에 묻혀왔다”고 말했다. 이번 기념사업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 및 국민참여 문화행사’는 11월 9∼10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최근 신임 광복회장에 취임한 김원웅 전 의원은 “조선의열단에 몸담은 사람들은 약산(김원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채호, 이육사, 정율성, 윤세주 등 여기 몸담았던 사람들은 정말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며 “이제 역사가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英 보물사냥꾼 발견한 고대 로마 금화 한 닢, 8억원에 낙찰

    英 보물사냥꾼 발견한 고대 로마 금화 한 닢, 8억원에 낙찰

    석 달 전 영국에서 발견된 고대 로마시대의 금화 한 닢이 경매에서 우리 돈으로 8억 원이 넘는 거액에 팔렸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 등 현지매체 보도에 따르면, 6일(현지시간) 런던 메이페어의 한 경매소에서 진행된 한 경매에서 고대 로마시대의 한 금화가 55만2000파운드(약 8억27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10만 파운드(약 1억5000만 원)라는 원래 낙찰 예상가보다 5배 이상 높은 가격이라서 전문가들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이번 금화는 이른바 아우레우스로 불리는 당시 금화 중에서도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왜냐하면 금화 전면에 새겨진 인물이 오늘날 영국의 땅인 브리타니아 지역에 잠시 세워졌던 브리타니아 제국을 서기 293년부터 296년까지 잠시 통치한 알렉투스 황제이기 때문이다. 알렉투스는 오늘날 많은 영국인으로부터 ‘당대의 브렉시터’라고도 불린다. 브렉시터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의 찬성자를 일컫는다. 당시 유럽 전역을 장악한 로마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방대한 제국을 네 등분해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정제(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부제(카이사르)를 배치하는 4두 정치를 시행했고, 286년 비리가 드러나 브리타니아로 달아나 스스로 황위에 오른 로마 장군 출신 카라우시우스를 눈엣가시로 봤다. 알렉투스는 그런 카라우시우스의 부하로 오늘날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수세관이었다. 하지만 292년 로마제국의 서방 부제이자 오늘날 프랑스와 벨기에 등 인접 국가에 해당하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지역을 담당하게 된 지휘관 콘스탄티우스 1세가 카라우시우스군의 요충지 볼로뉴항을 공략했다. 로마제국군은 당장 함대가 없어 브리타니아로 진군할 수 없었지만, 카라우시우스의 권력은 치명적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당시 부하였던 알렉투스가 카라우시우스를 암살하고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알렉투스의 브리타니아 제국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3년 만에 브리타니아로 건너온 로마제국군에 의해 알렉투스가 전사하면서 브리타니아 제국은 1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그때 만들어진 금화들 중 하나가 바로 이번 경매에 나온 것이다. 50년 만에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 카운티 도버의 한 들판에서 한 남성이 금속탐지기로 찾아낸 이 금화는 1페니짜리 동전 크기로 중량은 4.31g이다. 금화 후면부에는 아폴로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있는 두명의 포로가 새겨져있다. 금화 상태가 매우 양호해 이를 발견한 남성은 처음에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대영박물관 전문가의 감정으로 진품으로 확인됐다. 이번 경매를 주관한 런던 경매업체 딕스누넌웹(DNW)의 주화 전문가인 나이절 마일스도 “이는 경매 시장에 나온 금화 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양호한 것 중 하나”라면서 “내 40년 경력 가운데 이만큼 온전하게 보존된 금화를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현재 법령에 따라 단일 금화는 보물로 간주되지 않아 검시관에 통지할 필요 없이 경매에 내놓을 수 있지만, 정부에서는 금화 1개도 보물로 정의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개정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DNW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왕좌의 게임] 여주 분석 4-아리아와 리야나, 브리엔, 그리고 멜리산드레

    [왕좌의 게임] 여주 분석 4-아리아와 리야나, 브리엔, 그리고 멜리산드레

    “좋기만 한데 뭘…”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이 24일 밤 11시 국내에서 마지막 에피소드인 시즌 8의 6회가 방영되는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에 대해 내린 평가다. 그의 말은 이렇다.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평들이 많다. 그러나 내 생각에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끝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분도 알지만 그들은 ‘좋았던 일들은 말야…’라고 말을 이어간다.” 이제 가상의 대륙 웨스터로스에서 8년의 얘기를 끌어오는 동안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여자 캐릭터 분석 마지막 편이다. 아리아 스타크와 겁 없는 소녀 군주 리야나 모르몬트, 기사 브리엔, 마녀 멜리산드레다. 네 명을 ‘떨이하듯’ 정리하려 한다.아리안 스타크와 리야나 모르몬트-소녀처럼 싸워라! 남자들만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다시 생각해보라. 존 스노우가 늘 전쟁 영웅으로 꼽히지만 정작 죽은 자들과의 싸움을 끝낸 것은 막내 누이(사실은 조카) 아리아 스타크의 몫이었다. 존이 마지막 한 방을 날릴 것으로 기대했다는 에일린 응은 “소녀처럼 싸우라(는 메시지인가)? 제발 그랬으면”이라고 말한 뒤 “오랜 세월 암살자로 훈련받은 뒤 아리아가 해낸 것을 보면 여성이 얼마나 강하고 헌신적인가를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녀는 승리의 모든 순간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전장에 더 큰 남자들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여자 MVP(최우수선수)로 꼽을 만한 인물은 한 명 더 있었다. 용감한 소녀 군주 레이디 리야나 모르몬트다. 그는 자신의 몸집에 다섯 배 이상 됨직한 얼음 거인에게 달려들어 눈을 찌른다. 한 팬은 페이스북에 “가장 작은 전사가 주위의 다 큰 남자들보다 영웅이란 점을 증명해 보였다”고 적었다. 블로거 아니 분델은 리야나를 연기한 영국의 16세 여배우 벨라 램지가 곰 섬의 어린 지도자 연기를 탁월하게 해냈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녀는 “HBO의 탁월한 캐스팅이었다. 리야나는 모든 장면을 빼앗아 버렸고 출연 분량이 끝났을 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엔딩상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대표 대사는 리야나의 몫이다. “난 작을지 몰라요. 소녀에 불과할지 몰라요. 하지만 난 남자들이 날 위해 싸울 때 불가에서 뜨개질할 계획은 없어요.”브리엔-일어서라, 타스의 브리엔, 칠왕국의 기사여 칠왕국의 기사도는 우리 생각과 많이 달랐다. 여자 기사는 가부장제와 군주제가 뿌리 깊은 웨스터로스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타스의 브리엔이 왕 시해자 제이미 라니스터에게 기사 작위를 받으면서 마지막 시즌의 게임 체인저 역할을 했다. 칼럼니스트 스테파니 윌슨은 “브리엔은 늘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른 기사보다 자격이 있었지만 여자로는 이유로 작위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늘 기사 중 한 명이 될 자격을 갖고 있었으며 성별에 방해받아선 안될 일이었다”고 말했다. 블로거 클로이 케첨은 작위를 받는 장면을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그녀는 “브리엔의 여정은 늘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정직하며 한결같이 전통적인 젠더 규범에 충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처녀성 운운한 대목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또 윌슨은 “제이미와 엮이는 상황은 특히 말도 안됐다”고 짚었다. “강한 여성들도 감정에 휘둘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그녀의 취약성을 남자 중심의 플롯을 강화하는 데 철저히 이용해 먹었다”고 꼬집었다.멜리산드레-죽음의 신에게 뭐라 말할지만 기억해 모든 사람이 악동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악함에 이르면 달라진다. 멜리산드레는 악당은 아니지만 많은 팬들이 다정하게 생각하는 여성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을 산 채로 불 태워 죽인 책임이 있다. 여배우 캐리스 판후텐은 방송 직후 실제로 살해 협박을 받은 적도 있다. 싱가포르의 페미니스트 작가인 웨니 여는 “마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늘 미움을 받도록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권력에 굶주린 것이 분명했고 끔찍한 실수들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악독한 일들은 있었다”고 말했다. 이 논란 많은 캐릭터는 북부를 돕는 역할로 나오며 팬들의 눈에 다시 들게 됐다. 하지만 도트라키 군대의 불을 마술로 밝혀 성급하게 적진에 뛰어들게 만든 것이나 나무 참호에 불을 붙여 시간이 지나면 쓸모 없게 만든 일은 금세 잊혀졌다. 하지만 그녀가 아리아에게 남긴 말, 죽음의 신에게 뭐라 말할지만 기억해는 아리아에게 다시 일어서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녀가 많은 고통을 가져온 것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팬들의 변심도 문제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여주 분석 1 대너리스 보러 가기 여주 분석 2 세르세이 보러 가기 여주 분석 3 산사 스타크 보러 가기
  • “어른 말 잘 들으면 된다고? 청소년들 스스로 배우고 행동해야”

    “어른 말 잘 들으면 된다고? 청소년들 스스로 배우고 행동해야”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함께 계획한 유동하 의사는 당시 불과 17세였다. 아리랑으로 유명한 춘사 나운규는 17세 때 함경북도 회령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이광호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은 ‘청소년의 가치’를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시기라고 강조한다.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은 올해 이런 의미에서 ‘다시 청소년이다’를 추진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청소년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할 때”라면서 “우리 선조가 과거 청소년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살펴보고, 미래에 적합하도록 체계를 바꾸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 말했다. 진흥원은 청소년활동 프로그램 개발 등 관련 정책을 추진하고 국립청소년수련원, 국립청소년체험센터, 국립청소년시설 등을 운영한다. 이 이사장은 1956년 서울 출신으로 연세대 교육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경기대 휴먼서비스학부 청소년전공 교수, 국가청소년위원회 청소년정책단장 등을 지낸 청소년 전문가다.-왜 ‘다시 청소년이다’인가. “과거에 청소년을 대하는 교육 방식, 환경, 관계로는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을 중심으로 한 사회 변화는 기본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어서다. 미래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세계경제포럼에서도 현재 초등학생 중 66%가 미래에선 지금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가질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지금이 바로 청소년을 위한 미래 100년을 열어 갈 계획을 세울 때라고 판단해 ‘2019 다시 청소년이다’라고 이름 붙였다.” -미래직업군에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 했는데.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10년 동안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직업 부동의 1위는 선생님이었다. 요리사도 상위권을 차지한다. 그러나 한 조사에 따르면 요리사와 교사가 앞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으로 꼽혔다. 자연스레 지금 학생들의 이런 장래 희망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의 교육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장래 희망이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장래 희망을 물을 때 ‘넌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묻지 않는다. 단순 직업 명사로 장래 희망을 결정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게 뭐니’라는 질문으로 바꿔서 묻는다. 직업 이름보다 ‘하는 일’에 가치를 두겠다는 얘기다.” -새로운 직업을 마주할 청소년은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나.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과거의 것이다. 과거엔 정보가 유통되는 데 시간적 제한이 있었고, 오래 살았다는 것은 많이 안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것을 초월한 시대다. 변화 속도가 빨라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배우고 터득할 수 있다. 어른 말을 듣는 것 대신, ‘행동하고, 학습하고, 바꿔라’고 요구해야 한다. 교육제도 자체가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청소년의 활동에 제한이 많다. 투표 연령도 그중 하나인데, 18세 선거 연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세계적으로 봤을 때 선거 연령 18세 논의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추세다. 사회 구성원에게 부여하는 권리의 나이대를 봤을 때, 18세에게 의사 표현할 기회를 주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논의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8세 선거 연령 인하는 국민 참여권, 젊은 세대 참여권 확대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의 수익 구조는. “현재 국립 수련시설 5곳을 운영 중이다. 학교 등에서 체험 활동을 하는 게 주요 수입원이다. 공공성 강화 측면에서 사회배려대상인 청소년, 장애인 등은 무상으로 시설을 빌려주고 있다. 다만 인구가 줄다 보니 전체 수입 규모가 감소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대안은 수련시설을 창업, 창작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청소년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공간으로 되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수련시설의 안전, 위생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바로 청소년활동 안전이다. 7년 전 청소년활동안전센터를 기관 내에 만들었다. 전국 800곳 정도의 수련시설이 있는데, 한 해는 지역 수련관, 다음 해에는 유스호스텔을 점검하는 식으로 안전점검을 하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미흡’이 나온 곳은 안전고문을 파견해 점검하고 보완한다. 그 밖에도 안전캠페인을 펼치기도 하는데, 버스안전공제조합과 함께 이동 수단에서 일어나는 안전사고를 막으려는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강릉 팬션 사고처럼 안타까운 죽음은 다시는 나오지 말아야 한다.” -‘청소년특별회의’가 어떤 일을 하나. “청소년특별회의는 청소년이 직접 정책에 참여하게 하려고 15년 전에 만든 창구다. 시군구별로 청소년참여위원회를 만들어서 운영 중이다. 여성가족부 등 중앙부처에서는 중앙참여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청소년특별회의를 통해 모이는 정책 제안들은 정부에 직접 전달된다. 각 부처는 이 가운데 일부를 채택하고, 채택되지 않았다면 왜 보류됐는지를 명시한다. 일반적으로 83% 정도 채택된다. 지난해 나온 제안 중 청소년 관련 지방예산에 청소년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 채택됐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 사회의 이념 논쟁에 불을 붙인 인물이 있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학계에서는 ‘재평가와 복권이 이뤄져야 할 독립운동가 1순위’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을 복권할 수 없다’, ‘김일성도 반일투쟁을 했다는데 그에게도 훈장을 줘야 하느냐’며 극단적 거부 반응을 보인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한반도가 분단되기 전 항일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들을 평가하는 지금 우리는 분단의 결과물인 ‘이념’을 잣대로 들이댄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늘 배제돼 온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김원봉, 항일투쟁 업적에도 월북해 논란 “공산당 활동을 하고 월북한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겠다고 한다. ‘뼛속까지 빨갱이’였던 이를 서훈하겠다는 이 정부가 원하는 게 무엇이겠나.” 지난달 26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 가능성을 언급하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보인 반응이다. 피 처장은 ‘김원봉을 국가보훈 대상자로 서훈할 것인가’라는 정태옥 한국당 의원의 질문에 “의견을 수렴 중이며 (서훈 수여) 가능성은 있다”고 답했다. 이어 “지금 기준으로는 (서훈이) 되지 않는다”면서도 “우리가 (북한과) 평화와 번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북한 정권에 기여했다고 해서 (서훈 수여를) 검토하지 말라고 하는 부분은 (적절하지 않다). 북한과 6·25전쟁을 치렀지만 그런 부분은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한국당은 피 처장의 발언을 문제삼아 해임결의안을 추진 중이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꾸려 조선총독·일본군·친일파 등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영화 ‘암살’, ‘밀정’ 등에서 의열단장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일제는 김원봉을 “재외 반일 조선인의 거두”라고 표현하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그는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방 뒤 월북 행적 때문이다. 1947년 김원봉은 극우주의자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자 남조선노동당 지도자 박헌영(1900~1955)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국가검열상(검찰총장)에 임명됐고 노동상(노동부 장관)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58년 숙청될 때까지 북한에서 최고위직으로 활동했다. 사회주의자인 이동휘(1873~1935)와 한위건(1896~1937), 김두봉(1889~?)도 업적에 비해 저평가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분단 특수성 이유 사회주의자 대부분 저평가 한위건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위원과 함경도 의원을 지냈다. 1920년 일본 유학 당시 독립군 자금 모집 사건에 연루돼 검거됐고 이듬해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만세 시위 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193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독립운동사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2005년 좌파 독립운동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져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장규식 중앙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초기 학생 조직을 만드는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동휘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1907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됐고, 안창호(1878~1938) 등과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운동 전면에 나섰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1913년 시베리아·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한 무관 양성에 앞장섰고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박한용 전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이동휘는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으로 일제에 맞서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며 “그의 활동에 비해 우리 교과서에서도 언급이 적다보니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을 진행한 한글학자 김두봉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40년대 중국 옌안의 조선독립동맹 주석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이후 북한에서 조선신민당을 조직했고 북한 정권에서 최고인민회 상임위원장과 김일성대 초대 총장을 지냈다. 그는 김원봉과 마찬가지로 1958년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중노동을 하다가 1960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옥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김구나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잘 모른다.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사회주의계열 인물들이 독립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분단 상황 때문에 제대로 부각이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 주의 택한 것은 독립운동 위한 한 방법” 사회주의자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제에 맞섰지만 지금도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김원봉과 김두봉은 현행법에선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 단순히 사회주의 활동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한반도를 소위 ‘붉은 국가’로 만들고자 치밀한 계획을 갖고 항일투쟁을 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이들이 사회주의를 택한 것은 조국 독립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정확한 평가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동휘조차도 “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고백했다. 익명을 요구한 역사학자는 “일제 침략 시기에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사회주의 사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제국주의 폭압에 맞서는 대안 이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사회주의자였던 것에는 이런 사정이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연안파는 6·25전쟁 뒤 김일성이 중심인 빨치산파에 의해 북한 지도부에서 완전히 축출돼 남북한 양측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 연안파는 중국 옌안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뒤 입북한 조선의용대 출신 세력을 뜻한다. 조선의용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에서 치열하게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조직이다. 일부는 임정과 손잡고 한국광복군에 참여했고 나머지는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꿔 중국 건국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해방 뒤 남쪽에선 좌파로 몰려 박해당했고, 북쪽에선 김일성 독재에 반대하다가 사라졌다. 우리부터라도 ‘비운의 독립군’으로 불리는 이들의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광복 이전 독립운동 했다면 유공자로 봐야” 역사학계에서는 1948년 이후 남북을 가른 이념이 아니라 1945년 8월 광복 당시 행위를 기준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지난 1월 국가보훈처 자문기구로 활동한 보훈혁신위원회가 “1945년 8월 15일 이전 독립운동을 했다면 독립유공자로 봐야 한다”는 권고도 같은 맥락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념이라는 기준보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맞춰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며 “이념이나 사상에 관계없이 1945년을 기준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그에 합당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함께100년위원회’, “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를 공개 수배합니다.”

    ‘함께100년위원회’, “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를 공개 수배합니다.”

    “잊혀진 우리의 독립 영웅, 여성 독립운동가를 공개 수배합니다.” 전국의 자치단체장으로 구성된 ‘함께100년위원회’는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체험교육을 위한 컬러링 키트를 제작, 배포했다고 10일 밝혔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숨겨진 이야기에 ‘컬러링’이라는 재미요소를 결합시킨 교육용 키트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3.1운동 100주년 국민인식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관순 열사 외에는 특별히 떠오르는 여성 독립운동가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함께100년위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쉽고 재미있게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미래를 함께 그려볼 수 있도록 키트를 제작했다. 그동안 남성운동가의 조력자나 지원자로 기록돼 왔던 여성 독립운동가를 현대미술로 재해석했다. 현대 미술작가들이 참여해 역사적 인물, 사건, 장소 등을 현대적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밑그림을 제작했다. 여기에 역사학 교수의 검증을 거친 이야기가 더해졌다. 61세의 나이에 일본 총독 암살을 시도한 남자현(1872~1933) 열사. 우리나라 최초 여성비행사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귄기옥(1901~1988) 지사 등 남성 못지않게 눈부신 활약을 펼친 여성독립운동가의 숨겨진 이야기를 교육키트에서 소개하고 있다. 또 임신한 몸으로 평양 평남경찰국에 폭탄을 투척한 안경신(1888-알 수 없음), 평화적 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이끈 김마리아(1892~1944), 여성으로 이뤄진 군대를 조직 일본군에 맞서 싸운 박차정(1910~1944) 등 여성 지사와 열사를 현상수배(?)하고 있다. 키트 하나당 1개 반(20명 기준)이 활용할 수 있다. 함께100인위원회는 지난 9일 경기도교육청에 컬러링 키트를 전달했다. 앞으로 전국 초종고교에 100년 컬러링 키트를 지속적으로 보급할 계획이다. 또 시민과 함께 그리는 100년 이라는 제목의 대형 컬러링 캠페인도 진행할 예정이다. 함께100년위원회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 100년을 지역자치단체장 중심으로 준비하자는 취지로 구성됐다. 김종천 과천시장, 서철모 화성시장, 염태영 수원시장 등 30여명의 지역자치단체장이 참여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 美, 사우디에 원전기술 이전 승인… 중동 핵 확산 우려

    美하원 “수출 인가 기업 실명 공개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원자력 기술을 이전하는 6건의 인가를 비밀리에 승인했다고 로이터통신이 27일(현지시간) 전했다. 미 에너지부 국가핵안보국(NNSA)은 해당 기업의 요청에 따라 승인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고 밝혔으나 미 의회에서는 사우디와의 핵 기술 공유가 결과적으로 중동 지역의 핵 군비 경쟁을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미국은 최소 2곳으로 계획 중인 사우디의 원전 건설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원자력 기술을 사우디와 공유하는 방안을 조용히 추진해 왔다. 사우디는 올해 안에 미국을 비롯한 한국, 러시아 등 가운데 최종 사업자 선정 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릭 페리 미 에너지부 장관이 승인한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 기업이 사우디와 최종적으로 원전 사업 수주 합의를 마치기 전 원자력에 관한 사전 작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원전에 들어가는 장비는 실어나를 수 없도록 했다고 익명의 소식통은 로이터통신에 밝혔다. 미 의회에서는 지난해 10월 사우디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 이후 사우디와의 핵기술 공유 문제에 대한 염려가 더 커졌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지난해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사우디도 핵무기를 만들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게다가 사우디는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등 핵무기 생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미국의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소속인 브래드 셔먼 미 하원의원은 이날 열린 청문회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다음달 중순까지 원자력 기술 수출 인가를 받은 기업의 실명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북한 대사관 침입자들, FBI와 접촉…스페인, 범죄인 인도 청구 계획”

    “북한 대사관 침입자들, FBI와 접촉…스페인, 범죄인 인도 청구 계획”

    지난달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에 침입한 괴한들이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에 스페인 당국이 이들에 대해 국제 체포영장을 발부해 범죄인 인도를 요청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괴한들은 대사관 침입 당시 북한 외교관에게 탈북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로이터는 26일(현지시간) 스페인 법조계 소식통을 인용, 현지 판사는 신원이 확인된 모든 용의자가 침입 사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범죄인 인도를 요청할 것이라고 전했다. AP통신은 스페인이 용의자들 중 최소 2명에 대해 국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고 스페인 경찰 관리를 인용해 보도했다. 그러나 이날까지 기소된 인물은 없는 상태다. 앞서 스페인 고등법원은 수사 상황을 토대로 작성한 공식 문서에서 당시 스페인 대사관에 침입한 이들은 모두 10명으로 이들은 자신들이 인권운동가라고 밝혔다고 기재했다. 또 이들 중에는 미국, 멕시코 국적자 각각 1명과 한국인들이 포함돼 있다고 했다. 이들은 북한 대사관에서 강도와 납치 등의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특히 이들 그룹의 리더인 ‘에이드리언 홍 창’이라는 이름의 멕시코 국적의 미국 거주자는 사건 발생 뒤 며칠이 지난 2월 27일 해당 사건과 관련해 정보를 넘기기 위해 미 연방수사국(FBI)과 접촉했다고 스페인 고등법원은 밝혔다. 홍 창은 스페인 당국이 국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고 적시한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대사관에 침입했다고 말했으며, 다른 동료들의 신원은 밝히지 않았다. 법원은 또 ‘샘 류’라는 이름이 미국 시민의 신원도 확인했다. AP통신은 ‘우 란 리’라는 이름이 한국 국적자의 신원도 확인됐다고 전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북한 해방’ 운동을 하는 단체 소속이라고 밝히면서 북한 대사관 관리 1명을 지하실로 데리고 가 탈북을 권유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침입자들은 대사관에서 나가기 전에 무기를 점검했고, 네 집단으로 나뉘어 포르투갈로 향했고, 멕시코 국적자는 리스본에서 뉴욕까지 비행했다. AP는 이들이 스페인에서 공인된 유일한 북한 외교관인 소윤석(So Yun Sok) 경체 참사에게 탈북을 권유했으며, 이를 거부하자 재갈을 물렸다고 전했다. 베트남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 닷새 전인 지난 2월 22일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에 괴한들이 침입, 공관 직원들을 결박하고 컴퓨터와 휴대전화, 서류 등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스페인 당국은 이후 경찰의 정보부서와 정보기관인 국가정보국(CNI)을 투입해 사건을 수사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사건이 반북단체인 ‘자유조선’에서 저지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자유조선’(옛 천리마민방위)도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며 FBI와 연계되어 있음을 스스로 확인했다. 자유조선은 26일 오후(세계표준시 UTC 기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이번 일은) 습격(attack)이 아니었다. 마드리드 (북한) 대사관 내의 긴급한 상황에 대응(responded)했던 것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FBI와 상호 비밀유지에 합의하고 막대한 잠재적 가치가 있는 특정 정보(certain information)를 공유했다”면서 “해당 정보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공유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유조선은 암살된 김정남의 장남 김한솔 등 가족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밝혔던 ‘천리마민방위’가 새롭게 바꾼 명칭이다. 로이터는 이들이 스페인에 인도될 경우 최대 28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전했다. 미 국무부는 이 보고서에 대한 즉각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열혈사제’ 김남길, 여장하니 이하늬도 울고갈 미모 “남이사~”

    ‘열혈사제’ 김남길, 여장하니 이하늬도 울고갈 미모 “남이사~”

    SBS 금토드라마 ‘열혈사제’의 김남길이 위장잠입을 위해 여장까지 불사했다. 어제(22일) 방송된 SBS ‘열혈사제’(연출 이명우, 극본 박재범) 11부에서 해일(김남길 분)은 이신부(정동환 분)의 시신이 발견된 영유산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나 입산금지에 야생동물보호구역 인데다 구담구 소유라, 철범(고준 분)쪽이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 발목을 붙잡은 것. 이에 해일은 “내가 들어가지 말라고 안 들어갈 사람이냐? 발견돼도 모르게 해야지”라며 큰소리치던 그는 긴 생머리 가발에 화려한 아이 메이크업과 립스틱, 긴 다리를 드러낸 짧은 원피스까지 완벽한 여장을 하고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산에 오는데 그런 신발을 신고 왔냐며 핀잔을 주는 관리인에게 새침하게 “남이사”라고 한마디를 남기고 뒤돌아서는 상황극은 덤. 이어 분열하기 시작하는 구담구 카르텔에서 약점이 많아 제일 털기 쉬운 박의원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은 해일은 그에 대한 암살 계획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함과 동시에 ‘박의원을 구해라’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모자와 복면, 라이더 재킷에 오토바이까지 또 한번 변신을 하고 나타난 해일. 장룡에게 목숨을 잃을뻔한 박의원을 구하고 가까스로 현장을 벗어나려던 찰나,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에게 오히려 범인으로 몰리며 위기에 처했다. 한편 철범의 별장에서 당수를 날리고 도망친 복면강도가 해일이라는 사실을 심증 100%로 확신한 경선(이하늬 분). 박의원을 구하고 달아나는 ‘복면해일’을 다시 한번 만나게 되자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쫓게 되는데. 어제 방송된 21회는 수도권 시청률 16.5%와 전국 시청률 14.6%를, 22회는 수도권 시청률 19.0%와 전국 시청률 17.2%를 기록한 가운데 쫓고 쫓기는 이 추격전이 순간 최고시청률 21%를 찍으며 화제를 모았다. 김남길이 완벽 여장으로 더욱 화제를 모은 SBS ‘열혈사제’는 매주 금,토요일 밤 10시에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日심장부에 폭탄·총성… 목숨 불사르며 ‘독립 열망’ 알린 의열단

    日심장부에 폭탄·총성… 목숨 불사르며 ‘독립 열망’ 알린 의열단

    “피고 곽재기, 이성우 두 사람은 상해, 길림, 안동현, 경성 사이를 왕래하며 동지들의 연락을 도모하고, 조선에 있는 동지로 하여금 전시 폭탄 사용의 목적을 수행할 준비를 하게 했다.”(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 형사부 재판장 이토 준키치의 판결문 일부)의열단 최초의 암살·파괴 활동 계획인 ‘밀양 폭탄 사건’은 마지막 실행 단계에서 꼬리가 잡혔다. 의열단 창단 멤버인 곽재기와 이성우는 1920년 6월 서울 인사동에서 회의를 하던 중 경찰의 급습으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당시 스무 살도 채 안 된 단원 윤세주도 함께 잡혔다. 결국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일보사 등 3곳을 폭파하려는 계획은 뒤로 미뤄야 했다. 주범으로 지목된 곽재기와 이성우는 폭발물을 반입한 혐의로 폭발물취체(단속)벌칙 3조 위반에 해당돼 1년 만에 각각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각 피고가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려 한 점은 제령 7호 위반에 해당된다고 봤지만, 폭발물취체벌칙의 형이 더 무겁다는 이유로 해당 죄만 적용하기로 했다. 윤세주(폭발물 사용 공모, 4조 위반)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의열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1920년 9월 박재혁이 고서상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을 찾아가 폭탄을 던졌다. 서장은 병원으로 이송 도중 숨졌다. 박재혁은 재판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단식 투쟁 끝에 사망했다. 같은 해 12월 최수봉도 밀양경찰서 조회 시간에 폭탄 2개를 던졌다. 이 중 폭탄 1개는 안 터지고, 나머지 1개는 위력이 크지 않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최수봉에게도 사형이 선고돼 1921년 7월 형 집행을 당했다. 목숨까지 불사르는 의열단의 기개 앞에 일제는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은 의열단의 의열 투쟁은 거사 자체만 놓고 성패를 따질 수 없다고 말한다. 거사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공판 과정을 보면 의열단 단원들은 고통스러운 신문 과정과 고문을 겪으면서도 법정에서 당당하게 ‘우리가 왜 폭탄을 던질 수밖에 없는지’를 밝히려 했다. 1921년 9월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던 김익상은 이듬해 3월 중국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붙잡혔다. 김익상은 당시 중국 순경에 쫓기는 긴박한 상황에서 중국 순경이 아닌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 살인 미수, 절도, 상해, 폭발물취체규칙 위반 등 6개가 넘는 혐의로 일본 나카사키지방재판소에 끌려와 재판을 받던 김익상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하기 위해 쏜 것이오. 하늘을 향해 쏘았던 것은 사실이다.” 의열 투쟁이 선량한 시민을 상대로 공격을 하는 테러와 분명하게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익상은 재판을 받으면서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이후로 제2·제3의 김익상이 뒤를 이어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조선 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김익상은 나카사키재판소(재판장 마츠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24년 1월 도쿄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려고 했다가 휴회 중인 사실을 알고 황궁 앞으로 가서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진 김지섭도 같은 해 11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김지섭은 공판 과정에서 재판장이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직업은 독립당원”이라고 했다. 최후 진술에서는 “우리 조선의 독립 선언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라면서 “조선 민중은 굶어 죽고 맞아 죽고 하는 가운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형이든 무죄든 둘 중에 빨리 판결을 내리라”고 했다. 김지섭의 변호인들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했을 때도 김지섭 스스로 거부했다. 김지섭은 “나는 조선사람이니 일본사람인 재판장이 어떠한 사람이 되든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 신청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검사 청구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고 말했다. 일본 사법제도의 권위와 재판관의 양심을 문제 삼으려고 했던 것으로 읽힌다. 1926년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지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나석주 의거 사건과 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검거된 김창숙은 아예 재판 자체를 거부했다. 일본인 재판장이 ‘본적이 어디냐’고 물으면 “없다”고 답하고, ‘왜 없느냐’고 또 물으면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김창숙은 법정에서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라며 변호 조력도 거부했다. 결국 김창숙은 대구지방법원에서 1928년 12월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 공소도 거부해 그대로 형이 확정됐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공주 앞세워 왕세자 구하기… 사우디, 주미대사에 여성 첫 임명

    공주 앞세워 왕세자 구하기… 사우디, 주미대사에 여성 첫 임명

    “카슈끄지 사건 연루 왕가 이미지 쇄신 경색된 미국과의 관계 개선 노린 행보” ‘실세’ 빈살만, 中과 31조원 경협 체결사우디아라비아가 23일(현지시간) 여권 신장을 주장해온 미국 유학파 출신 리마 빈트 반다르(44) 공주를 새로운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사우디 주미대사에 여성이 임명된 것은 리마 공주가 처음으로,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으로 훼손된 개혁 이미지를 되살리기 위한 행보라는 평가가 나온다. 뉴욕타임스(NYT) 등은 이날 사우디 왕실이 리마 신임 대사를 최초의 여성 주미대사로 임명했다고 전했다. 리마 신임 대사는 1983년부터 2005년까지 주미대사를 역임한 사우디의 최고 미국통인 반다르 빈술탄(70) 왕자의 딸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자랐으며 미 조지워싱턴대에서 박물관학 학사 과정을 밟았다. 반다르 왕자는 사우디 왕가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살만(33) 왕세자의 사촌형으로 사우디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총장과 총정보국 총국장을 역임했고, ‘반다르 부시’라고 불릴만큼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 가문과 친분이 있었다고 NYT는 전했다. 귀국 후 패션 산업 등에 종사해 외교 경험이 없는 리마 신임 대사는 빈살만 왕세자가 2016년부터 여성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면서 공직에 적극 진출한다. 그해 사우디 스포츠청 여성담당 부청장에 임명된 데 이어 2017년 사우디 지역 스포츠연맹 회장을 거쳐 현재 종합스포츠기구의 개발계획 담당 부사장을 맡고 있다. 리마 신임 대사는 트위터를 통해 “신의 가호 아래 조국과 지도자들, 모든 아이들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전했다. 이처럼 파격적인 리마 대사의 임명은 카슈끄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실추된 왕가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사우디에 비판적인 미국 의회와 의원들을 겨냥한 조처로 보인다. 현 주미대사인 칼리드 빈살만 왕자는 빈살만 왕세자의 남동생으로 형과 함께 카슈끄지 암살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칼리드 왕자가 카슈끄지에게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이 ‘안전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지난해 11월 보도했다. 해당 영사관은 카슈끄지가 피살당한 장소다. 왕실의 살해 의혹이 불거지자 지난해 12월 미국 상원에서 빈살만 왕세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가디언은 “새 대사 임명이 미국 의회와의 관계에서 실효를 거둘지는 알 수 없다”고 평가했다. 한편 빈살만 왕세자는 아시아 등 인접국에 경제협력 카드를 꺼내들며 ‘오일 머니’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파키스탄, 인도 등을 거쳐 21~22일 중국을 방문한 빈살만 왕세자는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나 280억 달러(약 31조 5000억원)에 달하는 경제협력 협약을 체결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中 국민당 도움받아 충칭 정착…中 공산당, 조선의용대 탈영 부추겨 팔로군 편입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中 국민당 도움받아 충칭 정착…中 공산당, 조선의용대 탈영 부추겨 팔로군 편입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출범해 1945년 해방 때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뒤 일본의 추격을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옮겼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각지를 떠돌았다. 임정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서남부 쓰촨성의 작은 도시 충칭이었다. 임정은 1945년 11월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5년 넘게 독립을 준비했다. ●임정, 충칭서 5년 넘게 한국 독립 준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의 최종 목적지 충칭. 1937년 11월 중국이 일본에 수도 난징을 빼앗기자 임시 수도로 정한 곳이다. 주민 수가 3100만명에 달해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자 유비와 제갈량이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세력을 길렀던 촉(蜀)의 옛 땅이다. ‘안개 도시’라는 별명답게 한겨울에도 뿌연 안개가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예전에 이곳은 안개와 매연이 결합해 공기 질이 나빴다고 한다. 김구(1876~1949)의 맏아들 인(1917~1945)도 여기서 폐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임정은 중일전쟁으로 난징이 함락되자 후난성 창사로 피신했다가 1838년 7월 광둥성 광저우로 내려갔다. 국민당 정부가 충징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이곳은 인구 20만명 정도의 소도시였지만 국민당 정부가 오자 100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주택과 학교, 도로 등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해 임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결국 중국의 도움으로 류저우(1938년 10월~1939년 3월)와 치장(1939년 3월~1940년 9월)을 거쳐 2년 뒤인 1940년 9월에야 입성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임시정부에 있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이 사실을 외면하고 독립운동 성과를 우리만의 노력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국뽕 사관’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임정의 리더십 회복과 좌우합작 성사 일본은 지상군 병력이 닿지 않는 이곳을 파괴하려고 5년여간 200여 차례에 걸쳐 공습을 감행했다. 영화로도 제작돼 잘 알려진 충칭 대폭격(1938~1943)이다. 독립운동가 양우조(1897~1964)·최선화(1911~2003) 부부의 임정 기록을 외손녀 김현주(47)씨가 정리한 ‘제시의 일기’(1999)를 보면 당시의 공포가 잘 묘사돼 있다. “(공습경보를 듣고 대피소인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일본 비행기가 폭탄을 수없이 떨어뜨렸다. 석굴이 심히 흔들리며 당장 무너지는 듯했다. 동굴 안에서는 천둥·번개 치듯 불빛이 번쩍였고 천장이 내려앉는 듯 작은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폭격이 끝나고) 굴 밖으로 나왔더니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가 있었던 집의 앞과 뒤, 오른쪽, 왼쪽이 불바다였다. 참혹한 시신도 많았다.”(1938년 12월 5일) 역설적이지만 임정은 공습에 시달리던 충칭 시기에 리더십을 회복했다. 중국이 모든 독립운동 세력을 임정 중심으로 합작해 나설 것을 촉구했고, 한인 내부에서도 일본의 패망이 머지않았다고 느껴 단결에 나섰기 때문이다. 임정은 처음으로 청사에 ‘대한민국 림시정부’ 간판도 내걸었다. 독립운동 중심체로서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의미다. 1940년 5월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1887~1958), 홍면희(1877~1946)가 주도한 한국독립당, 이청천(1888~1957)이 이끈 조선혁명당은 충칭에서 우파 통합정당을 만들었다. 임 정 여당인 한국국민당의 지분이 가장 컸지만 당명은 ‘한국독립당’을 계승했다. 한독당은 해방 뒤 한국에서도 민족주의 정당으로 활동했다. 임정에 비판적이던 사회주의 계열도 태도를 바꿔 1941년부터 하나둘 합류했다. 임정이 설립 20여년 만에 제대로 된 위상과 권위를 갖추게 됐다. 승려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1942년 임정 내무차장이 된 김성숙(1898~1969)의 증언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권위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임시정부만한 것이 없었거든. 임정이 계속해서 일본하고 대립하고 싸웠기 때문에 ‘(진정성을 인정해) 임정을 중심으로 모여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지.”●조선의용대, 팔로군 주둔 화베이 이동 1939년 말 중국 후베이성 라오허커우. 중국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단체들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부대장 김학무(1912~1944)가 동료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우리 손으로 적(일본군)들을 쓰러뜨려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이런 ‘가짜 항일’ 전선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너무도 수치스럽소이다.”조선의용대는 임정이 만든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선 1938년 10월 결성됐다. 대원 상당수가 중국 군관학교나 일본의 유명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를 원했지만 중국은 인원이 많지 않은 의용대에 전투 대신 정보 수집과 선전 공작 등 보조 업무를 맡겼다. 이들은 후방에서 선전전이나 하는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전체 대원 300여명 가운데 대다수가 1941년 3~5월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있던 화베이 지역으로 떠났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이 한반도와 가까운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국내에 진격하려고 북상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충칭에서 만난 이선자(55) 전 충칭임시정부기념관 부관장은 “중국 공산당의 치밀한 계획이 숨어 있었다”고 전했다. 공산당이 조선의용대를 팔로군에 편입시키고자 의용대에 밀정을 심어 탈영 분위기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중국 공산당 출신 역사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가 홍콩에서 출간한 회고록(2004) 등에 수록돼 있다.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한국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내용”이라고 놀라워했다.조선의용대 주요 전력이 화베이로 올라가자 최고 책임자였던 김원봉(1898~1958)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따르는 대원이 100명도 남지 않았다. 이 관장은 쓰마로의 회고록을 토대로 “당시 김원봉도 남은 부대와 함께 화베이로 가려고 했지만 중국 공산당 저우언라이(1898~1976)가 이를 막았다. 화베이 부대의 새 리더로 김무정(1904~1951) 등을 세운 뒤여서 더는 김원봉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갈 곳을 잃은 그는 한국광복군 합류를 고심했다. 임정과 김원봉 간 통합 협상이 길어지자 중국군사위원회가 직접 나섰다. 1942년 5월 광복군에 부사령관 직제를 신설하고 그를 임명했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에 편제됐다. 군사 분야에서도 좌우합작이 성사됐다. 늘 대원이 부족했던 광복군으로서는 이들이 그야말로 단비 같은 존재였다. 임시정부 좌우통합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이슈가 있다. 바로 김구의 ‘백색 테러’(우익에 의한 테러) 논란이다. 그가 일본군이나 친일파를 상대로 ‘의열 투쟁’을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이념이나 성향이 다른 일부 독립운동가에게도 같은 방식의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있다. 김구가 ‘대한민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어 언급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공론화가 이뤄져야 할 부분이다. 김구는 상하이 임정에서 초대 경무국장(경찰청장)을 맡아 반민족주의자에 대한 처형을 주도했다. 1922년 2월 사회주의자 김립(1880~1922) 살해 사건이 대표적이다. 백범 자신이 “김립이 (소련이 준) 임시정부 공금을 사사로이 사용해 처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서 등에 따르면 당시 소련은 임정이 아닌 한인 사회주의 진영에 자금을 제공했다. 김구가 주장하듯 김립이 이 돈을 사적으로 썼다는 증거도 없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김립 암살 사건은 임정이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근거해 단행한 국가 폭력”이라며 “같은 독립운동가라도 정견과 조직이 다르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해 독립운동계에 큰 해를 끼쳤다”고 비판했다. 해방 뒤인 1945년 12월 말 동아일보 주필이자 한국민주당 초대 당수 송진우(1890~1945)는 김구가 살던 경교장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벌였다. 그는 우파진영이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본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반탁을 고수하던 김구를 비판했다. 송진우는 밤샘 토론을 마치고 자택에 돌아가자마자 살해됐다. 브루스 커밍스(76)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사건의 배후를 김구로 본다. 김구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1889~1939)과 안창호(1878~1938)의 후견인 옥관빈(1887~1933)의 암살에도 간여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미 군정은 친일파 출신으로 한국민주당 정치부장이던 장덕수(1894~1947)가 살해되자 김구가 개입했다고 보고 재판정에 세웠다. 좀더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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