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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전향 장기수 13명 인도적 석방/3·13 대사면­화제의 인물

    ◎진관스님 잔형면제·황인오 형제 감형/외설시비로 곤욕 마광수 교수도 복권/안두희씨 살해범 박기서씨 잔형면제 3·13 특별사면에는 밀입북하거나 친북활동을 했던 공안사범들이 대거 포함됐다. ‘장길산’‘객지’ 등을 쓴 소설가 황석영씨(54)는 2년2개월의 형기를 남기고 공주교도소에서 가석방으로 풀려났다.황씨는 89∼91년에 4차례에 걸쳐 밀입북,김일성과 만나거나 ‘범민족대회’ 등에 참가한 혐의로 94년 징역 7년을 선고받고 4년10개월째 복역해왔다.그동안 문단과 종교계 중진 인사들로 구성된 ‘황석영 석방대책위원회’가 꾸준히 석방을 탄원했다.국제펜클럽도 ‘박해받는 작가 7인’ 가운데 한명으로 선정,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민당 총재 시절 검찰의 조사를 받도록 빌미를 제공한 전 평민당 의원 서경원씨(60)도 잔형집행면제로 석방됐다.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88년 8월 북한을 3일동안 방문하고 돌아온 혐의로 구속된 뒤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서 8년6개월여를 복역했다.김수환 추기경 등 천주교 인사들은 카톨릭 농민회장을 지낸 서씨에 대해 문민정부 출범 때부터 여러차례 사면을 건의했으나 번번이 무산됐었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의장으로 있으면서 96년 북경에서 열린 ‘범민련대회’에 참석,국가보안법의 이적·동조 혐의로 구속돼 지난 해 9월 징역 3년6월을 선고받은 진관 스님(50)도 잔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의 황인오(41)·인욱(31)형제도 감형됐다.90년 간첩 이선실에게 포섭돼 밀입북한 뒤 국내서 간첩활동을 한 인오씨는 무기징역에서 징역 20년으로,형에게 포섭돼 군사기밀을 탐지한 혐의 등으로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6년여를 복역한 인욱씨는 잔여형기의 반을 감형받았다.서울대 서양사학과 대학원에 다니다 구속된 인욱씨는 동문들의 구제활동이 감안됐다는 후문이다. 남파간첩으로 30년 이상 복역 중인 미전향 장기수 22명 가운데 윤용기씨(73·40년 복역)등 70세 이상의 고령자 6명과 골수암을 앓고 있는 신인영씨(68·31년 복역)등 7명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석방했다. 공안사범 외에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씨를 살해한 혐의로 지난 해 징역 3년의 확정판결을 받은 박기서씨(47)도 남은 형을 면제 받았다.소설 ‘즐거운 사라’로 외설 시비를 불러 일으켰던 연세대 전 교수 마광수씨(46)도 문화계의 지속적인 건의가 받아들여져 복권됐다.
  • 앤드류 잭슨(미국의 대통령 문화:14)

    ◎미 영토 확장 크게 기여한 전쟁영웅/개척농민 유복자로 변호사·의원·대법판사도/귀족정치서 대중정치시대 연 첫 서민대통령 【내슈빌(미테네시주)=나윤도 특파원】 미국의 7대 대통령(1829­1837) 앤드류 잭슨은 미합중국 정치문화에 ‘대중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이른바 ‘잭소니안시대’을 전개시킨 대통령으로 전 미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 6명의 전직 대통령이 버지니아,매사추세츠 등 동부 출신의 대농장주 후손으로 좋은 정규교육을 받은 ‘신흥귀족’ 출신이었던데 반해,그는 가난한 개척농민의 유복자로 통나무집(log cabin)에서 태어났으며 정규학교라고는 문턱도 밟아본적이 없었다.그 때문에 첫 ‘서민대통령’으로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전쟁 영웅으로 추앙되어 대통령에 오른 잭슨은 대통령직 자체를 ‘최고의 지위’라기 보다는 ‘일할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그는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으며 미국 정치사에서 현대적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시킨 대통령으로남아 있다.그래서 그는 강인함 또는 단단함의 상징인 히커리나무에 비유되어 ‘올드히커리’(Old Hickery)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올드 히커리’ 애칭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67년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노스 캐롤라이나의 시골에서 태어난 잭슨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의 병사로 홀어머니에 의해 양육됐다.성질이 급하고 거친 그는 싸움질을 일삼아 아들을 목사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할 정도 였다. 장로교 목사로부터 가까스로 글을 깨친 그는 14세때 독립군 민병대에 가담,소년병으로 영국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잭슨은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이듬해 영국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그러나 적개심에 불타던 그는 구두를 닦으라는 영국군 장교의 명령에 불복,그로부터 칼로 머리를 맞아 깊은 상처를 얻게 됐다.그는 평생동안 그 상처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다녔다. 포로교환으로 풀려나온 그는 솔리스베리의 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공부를 시작,20세때인 178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이후 테네시주 내슈빌로 옮겨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96년에는 새로 주로 승격된 테네시주의 연방하원의원에 선출됐으며 이어 상원의원,테네시 대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그의 호전적인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1812년 미합중국의 선전포고로 영국과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였다.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병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 잭슨은 인디안과의 전투에서 연승,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군 중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서남부 전체 미군의 지휘권을 얻게 됐다. 잭슨은 플로리다 펜사콜라 전투에서 승리,플로리다를 장악했으며 15년 겨울,뉴올리언스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영국군과 미군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사령관을 포함한 2천600명의 사망자를 낸 반면,미군은 단지 8명의 사망자만 냈을 뿐이었다. ○영군과 전투서 대승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방적 승리로 기록된 뉴올리언스의 승전은 영국민에게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줬다.그동안 군사력 열세에서 유럽 강대국들에 소극적 대응을 해오던 미국은 자신감을 갖게 됐으며 국제사회에 독립국가로서의 위력을 과시하게 됐던 것이다.지금도 뉴올리언스 시가지 한복판에는 포효하는 말에 탄 그의 동상이 높이 서있다. 이같은 그의 업적은 그를 자연스레 1824년 새로 태어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부상시켰다.잭슨은 1차투표에서 승리했으나 과반수에 미달했고,2차투표에서 정치적 흥정에 의해 존 퀸시 아담스에게 고배를 들고 말았다.그러나 잭슨은 4년후 다시 도전,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됐다. ○첫 암살대상자 기록도 잭슨은 작은 정부를 강조하면서 정부와 국민이 어떻게 하면 가까와질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고율의 관세제도를 개혁,관세율을 낮추었으며 예산절감을 통해 연방예산의 잉여분을 주정부에 골고루 이월할 것을 제안했다.따라서 그는 연방정부가 공공복지사업이나 건설사업 등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반대했다.정부의 지나친 부채는 국민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까지 주장했다.이같은 국민편에 선 통치는 그의 재선을 무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잭슨은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많은 시행착오도 일으켰다.친구들을 요직에 등용,‘주방내각’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인사행정의 난맥상을 보인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특히 그는 이혼녀인 부인 레이첼을 따라다니는 악의적 소문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그 문제로 대통령이 되기전까지 많은 사람들과 결투를 벌이곤 했다.그는 또 1935년 실패로 돌아갔지만 암살기도가 발생,역대 미대통령 가운데 처음 암살대상이 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영토의 확장 ▲귀족정치에서 대중정치로의 전환 ▲연방정부의 부채청산으로 건전재정 확립 ▲부패한 연방은행의 규제제도 확립 등이 꼽히고 있다.대중정치의 확립은 라이딩스의 미대통령 랭킹에서 잭슨은 42명 가운데 비교적 높은 8위에 랭크되고 있다.그는 69세 대통령을 퇴임하여 자신의 농장인 내슈빌 교외의 허미티지에서 78세로 숨을 거둘때까지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잭슨 유적지 ‘허미티지’/평생 가꿔온 사저… 테네시주 내슈빌 위치/55만평에 정원·교회·농장·후손들의 집도 【내슈빌(미테네시주)=나윤도 특파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유적지로 지정된 ‘허미티지(Hermitage)’는 잭슨이 평생을 가꿔온 사저로 컨트리뮤직으로 유명한 테네시주의 주도,내슈빌에 위치해 있다. 외딴집이라는 의미의 허미티지는 55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에 잭슨과 그 가족이 기거하던 맨션을 중심으로 부인 레이첼을 위해 만든 정원과 교회,후손들의 집 등 각종 부속건물과 농장으로 돼있다.비지터센터 뒤에 위치한 맨션에는 잭슨 생존 당시의 실내장식과 함께 가재도구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18세기말∼19세기 중반에 이르는 당시 미국 상류사회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이 터는 잭슨이 내슈빌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며 1804년부터 조금씩 구입해 모은 것으로 오늘날의 형태가 갖춰진 것은 대통령 재임중인 1833년 무렵이며 37년 대통령 퇴임후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허미티지는 워싱턴 교외에 위치한 조지 워싱턴 사저인 마운트버논과 함께 미국내 대통령문화 보존의 한 본보기로 유명하다.1889년 애미 잭슨에 의해 창립된 허미티지부인회에 의해 보존되고 운영되고 있으며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이 부인회는 내년 2월 창립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애미 잭슨은 자식이 없던 잭슨 대통령 양아들의 아들인 잭슨3세의 부인이다.그녀는 45년 잭슨 사망후,수십년 동안 역사적 장소가 일부는 팔려나가고 퇴락해가는데 안타까움을 느낀 끝에 허미티지부인회를 결성,유적지키기에 나섰던 것이다. 30년 앞서 결성된 마운트버논부인회와 함께 허미티지부인회는 남자들이 남북전쟁의 와중에서 전쟁에 휩쓸려 있는 동안 부인들의 힘으로 문화유적을 지켜낸 훌륭한 본보기로 남아 있다.
  • 그루지야,러군기지 봉쇄 요청

    ◎셰바르드나제 암살 모면… 양국 외교 문제화 【트빌리시 AFP DPA 연합】 그루지야 의회가 10일 내무부에 대해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70) 암살미수사건의 원활한 수사를 위해 그루지야 주둔 러시아군 기지를 봉쇄하도록 요청함으로써 이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될 조짐이다. 국회의원들은 전날 발생한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의 배후단체가 러시아로부터 파견됐으며 사건 직후 수도 트빌리시에서 30㎞ 떨어진 바지아니의 한 러시아 기지를 통해 그루지야를 떠났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표결로 기지 봉쇄를 결정했다. 셰바르드나제는 9일 하오 자동차편으로 트빌리시 남쪽에 위치한 관저로 돌아가던 중 무장괴한들로부터 수류탄과 기관총 공격을 받았으나 무사했다.
  • 미 케네디 센터 설립자/로저 L 스티븐스 사망

    미국 케네디 센터의 설립자이자 유명 연극 연출가인 로저 L 스티븐스가 지난 2일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스티븐스는 현재의 케네디 센터를 세계 최고의 문화공연장으로 우뚝 서게 한 주역이다.지난 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미 국립문화센터(NCC)의 이사장에 임명된 뒤 71년 케네디가 암살되자 NCC를 케네디 센터로 개명했다. 27년 이사장 재임기간 동안 그는 정부 및 개인기부금을 끌어내 센터의 탄탄한 재정을 마련하는 한편,세계 최고의 예술인과 작품들을 무대에 유치했다.그가 연출한 작품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애니’ 등 연극 및 뮤지컬 250여편.
  • 창작악극 ‘눈물젖은 두만강’/일제시대 비극의 한 가족사

    악극의 대명사 극단 가교가 다섯번째 창작악극 ‘눈물젖은 두만강’을 15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 일제하인 1930년대 두만강과 만주,상해 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항일 독립운동과 이에 연루되는 한 일가의 비극의 가족사를 눈물과 진한 감동으로 그린 작품.두만강 백사공의 딸 정애는 독립군 승빈이 총상을 입은채 일경에 쫓겨 집으로 찾아들면서 역사의 격랑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어간다.독립군의 정인이 된 관계로 일제의 갖은 박해를 받다 화류계 여성으로 전락,일본 현병대장을 암살하고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는 정애의 인생유전을 중심으로 그녀의 부모,승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민우,일경의 앞잡이로 승빈을 밀고 하는 오빠 등 두만강변 한 가족이 겪어가는 불행한 민족사가 구슬픈 노래와 대사로 전개된다. ‘홍도야 울지마라’ ‘울고넘는 박달재’ 등 다수의 악극에서 기량을 쌓은 권소정이 주인공 정애역을 맡았으며 박인환 최주봉 윤문식 김진태 태민영 박승태 등 TV를 통해 낯이 익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눈물젖은두만강’ ‘물새야 왜 우느냐’ ‘청춘 블루스’ 등 흘러간 우리 옛노래와 ‘카르멘 조곡’ ‘인 더 무드’ 등 외국곡을 합해 총 35곡의 노래를 들려준다. 김상열 작·연출.하오 4시·7시30분(월요일은 쉼).369­2911.
  • 초대 대선과 첫 조각(대한민국 50년:5)

    ◎하지 사령관 서재필 대통령 꿈꿨다/암살 겁내 출마거부… 결국 국회 간선서 이승만 당선/초대총리 이윤영 제청,인준 부결 수모… 이범석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지도력과 개성에 관해서는 평판이 극명하게 엇갈렸다.“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운산광산을 팔아먹은 매국노”“프린스톤 사람”(무초) “×자식”(하지)….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J.R.하지 중장은 애초부터 서재필을 귀국시켜 대통령에 입후보시키려 했다. 그것은 다분히 이승만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했다.당시 하지의 개인고문으로 일하던 서재필은 이미 암에 걸려 있었다.그는 자신이 살해될 것이라는 피해의식 때문에 입후보를 거절,미국에 돌아간 직후 운명했다. 19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치러진 초대 대통령선거에는 결국 이승만과 김구,안재홍 등 3인이 나섰다.이미 예견된 대로 이승만은 196명의 재석의원 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김구는 겨우 13표를 얻었다.그리고 안재홍은 2표,무효가 1표였는데 무효는 미국 국적의 서재필에 투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7월24일 중앙청서 취임식 압도적인 다수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7월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졌다.“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그는 독립의 공을 연합군측에도,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독립운동파에도,국내의 항일투쟁 세력 어느 곳에도 돌리지 않았다.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다. 이승만은 취임후 곧바로 이화장에서 조각에 착수했다.‘조각의 산실’로 등장한 이화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73세의 이승만은 철저하게 자신이 신뢰하는 측근만을 각료에 임명했다.그러나 그의 건국 내각은 국무총리 인준을 놓고 출발부터 상처를 입었다.이승만은 북한의 조선민주당 위원장인 조만식의 후광을 내세워 부위원장인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제청했다.하지만 이윤영 총리안은 제헌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는 수모를 겪었다. 지면이 거의 없는 이윤영을 내세운 것 자체가 당시 정황으로 볼때 무리였다.한민당의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회의 공론이었다.그러나 이승만은 자칫 한민당에 업힐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를 애써 무시했다.국회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발판을 국회에 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초대내각은 결국 항일독립운동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실마리를 풀었다.그리고 내무 윤치영,외무 장택상,국방 이범석,재무 김도연,법무 이인,문교 안호상,농림 조봉암,상공 임영신,사회 전진한,체신 윤석구,교통 민희식,법제처 유진오,공보처 김동성,무임소 이윤영 등으로 조각을 마무리했다.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인선은 국회에서 친일논쟁이 가열되면서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1948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은 출범했다.이와 함께 이날 상오 0시를 기해 미 군정은 폐지됐다. 이승만은 모든 관리들을 하향식으로 통제하려고 했다.이와 관련,미 중앙정보부(CIA)는 “이승만은 국무총리를 마치 ‘행정보좌관’처럼 부리고 있다”고 혹평했다.또한 미대사관은 상공부 장관 임영신을 “2다스의 속옷만으로도 매수당하는” 인물로 파악했다.그는 부패로 쫓겨난 최초의 각료라는 오명을 남겼다. 이같은 이승만 정권의 최고 통치방침 가운데 하나는 유엔에서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새롭게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계속 의존했던 만큼 합법정부로서의 국제적 승인을 즉각 얻어내지 못했다.1948년 10월19일 재일조선청년단체의 암살 위협 속에 이승만은 일본을 방문했다.목적은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를 만나 대한민국의 방위와 국제적 승인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주한미국대사 무초에 의하면 이승만은 맥아더를 특별히 존중했다고 한다.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질 때마다 맥아더를 찾았다.1945년 10월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은 환국과 더불어 그를 만났다.1948년 10월 회담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미국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계획을 이승만으로 하여금 내외에 공표토록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역을 맡았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은 1948년 10월8일 유엔에 제출할 최종 보고서를 채택했다.이 보고서에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성립된 한국정부는 정부의 기능이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모든 유엔 가맹국들은 한반도 전체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한다는 권고 내용도 포함시켰다.이 보고서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심의에 부쳐졌다.1948년 12월12일 마침내 대한민국은 유엔 총회에서 46대 6으로 승인됐다.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된 것이다.그 후 대한민국은 소련과 그 동맹국가들을 제외한,50여개국의 자유진영 국가들로부터 개별적인 승인을 받았다. ○임정 세력 반대속 출범 대한민국의 출범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진정한 의미의 민족국가가 비로소 출범한 것이다.우리 민족이 주권확보를 위해 장기간 노력해온 결과로,그 자체가 민족 숙원사업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남북에서는 상이한 정권이 출범했다.그것은 무엇보다 미·소 강대국의 서로 다른 한반도 정책에 기인한다.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정책에 있다.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반소·반공정책에 의한 남한지역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유엔이 결정한 데서 비롯됐다.당시 유엔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그대로 추수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제헌국회가 남북통일특별대책위 설립안을 부결시켰다는 사실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이는 국회가 남북통일문제를 도외시한 뚜렷한 징표라는 점에서 그렇다.국회소집 무렵 김구·김규식 등은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했다.통일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하려고 한 이들을 이승만은 공산당으로 몰아부쳤다.그렇듯 대한민국 정부는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의 반대 속에서 출범했던 것이다. ◎미,이승만 신뢰하지 않았다/본사특별취재반,미 CIA 작성 비밀보고서 입수/“독립위해 최선 다했지만 재난 불러올 행동 가능”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참된 애국자였다.그러나 그는 독립한국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최선을 다했다.……위험이 도사리고 있다.이승만은 증폭된 자아의식 때문에 재난을 불러올 행동을 하거나 적어도 신생 한국정부와 미국의 이해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직설적인 평가를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의 국립공문서보존기록관리청에서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1948년 10월28일에 작성한 2급비밀보고서 ‘대한민국의 생존전망(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을 찾아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워싱턴 정책담당자들의 상황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자료다.이 문건에 의하면 미국은 결국 이승만을 옹립했지만 결코 신뢰하지는 않았다.따라서 미국은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계속했다.또한 미국은 군정이 끝난 후에도 CIC나 G­2,CIA 등을 통해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이 행한 부정축재 사실과 같은 부정적인 정보를 모았다. 또 방위와 재원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했다. 이 보고서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승만은 개인적인 이익과 로비활동도 들추어냈다. 워싱턴 임시정부 한국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그 지위를 상당히 이용했다고 밝힌다.사적인 로비활동이야말로 이승만에게는 전쟁이 끝난뒤의 소중한 정치적 밑천이 되었다는 것이 보고서의 시각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자연보호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미국의 대통령 문화:9)

    ◎도약의 20세기 연 ‘공익의 조정자’/트러스트 해체 등 대기업 부당행위에 철퇴/포츠머스 조약 중재… 미 최초의 노벨상 수상/역사·자연·여행·정책관련 등 저서 38권 남겨 【메도라(미 노스다코타주)=나윤도 특파원】 ‘컬러드(colored canyon) 캐년’.미중부 대평원 북단 노스다코타주의 서쪽끝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국립공원 초입에 위치한 이 거대한 골짜기는 이름 그대로 형형색색의 띠를 두른 바위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신비의 조화를 이룬다. 남북 다코타주의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는 미주리강의 지류인 리틀미주리강을 따라 색동 바위의 군무를 연상케 하는 비경이 루즈벨트 컨트리가 된 내역은 이 공원의 입구에 해당하는 인구 100명의 소읍 메도라에 들어서면 이내 알 수 있다. 루즈벨트가 3년간 머무르던 ‘말티즈크로스’통나무집 앞에 세워진 그의 기념관에는 자연보호 대통령인 그의 생활에 관한 자료들과 함께 미국의 자연보호역사가 다양하게 전시돼 있어 다코타의 황량한 벌판을 달려온 여행객들에 컬러드 캐년의장관과 함께 위대한 대통령과의 만남이라는 기쁨을 선사해 주고 있다. 미 26대 태통령으로 미 역사상 도약의 시대인 20세기를 연 그는 저술가,언론인,등산가,카우보이,전쟁영웅,노벨 첫 수상자 등 미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은 타이들을 보존하고 있을만큼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그같은 루즈벨트의 업적에 대한 설명이 다코타에서 시작하는 것은 젊은 시절 이곳에서의 경험이 그의 정치철학이던 ‘공익정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튼 출신인 루즈벨트는 1884년 2월14일 발렌타인데이에 23세의 젊은 부인 앨리스와 부친을 한날 병으로 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컬러드 캐년으로 훌쩍 떠나 왔다.이곳 목장에서 카우보이 생활을 하며 갖게 된 자연의 애착과 그것들이 방치된 채 손상돼가는 안타까움이 후에 그가 대통령이 된 후 국립공원 시스템을 창안하게 했다는 것이다.이는 오늘날 미국이 많은 자연을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고 또 엄청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큰 업적으로 꼽힌다. 그의 공익정신이 유명해진 원인은 취임후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대기업 조정정책 때문이었다.남북전쟁이후 급격한 산업발전은 미국의 경제를 과거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팽창시켰고 문명기기의 발달로 국민생활을 몰라보게 바꿔놓았지만 그 발전의 뒤안길에 만연돼 가는 각종 병폐는 미국 사회를 엄청난 불평등의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당시 가장 크게 대두된 문제는 대기업들의 횡포였다.철도 철강 석유 등 분야에서 통합과 독점을 통해 경제권을 장악한 기업인들은 정치인들과 언론까지 돈의 힘으로 매수,자신들에 유리하게 이끄는 등 국민 전체의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심각한 위협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말 20세기초 미국내에는 사회 도처에 만연된 부정부패 일소와 진정한 민주사회로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지고 있었다.루즈벨트의 공익정신은 이같은 시대적 요구와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당시 부통령으로 있다가 1901년 9월14일 대통령의 암살로 예기치 않게 대통령이 된 그는 “연방정부는 어떤 특별한 세력의 대변자가 아니다.바로 공익의 조정자가 돼야만 한다.또한 대통령은 바로 이같은 조정자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강조,대기업 병폐의 치유에 대통령이 직접 개입할 것을 천명했다. 루즈벨트의 정책 핵심은 대기업들의 부당행위를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그 결과를 국민들에게 공개할 수 있는 힘을 정부가 갖도록 하는 것으로,우선 악명높은 몇몇 기업의 통합을 해체시키는데 주력했다. 그 첫대상은 철도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던 북부증권회사였다.당시 미 최대의 금융가 J.P 모건과 철도업자 제임스 힐이 공동으로 만든 막강한 파워를 가진 이 회사에 대해 손을 댄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그러나 루즈벨트는 과감하게 법무부에 이 회사에 대한 셔먼 트러스트 금지법위반 여부 조사를 명령했다.모건과 힐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으나 루즈벨트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결국 2년후 대법원의 판결로 해산명령이 내려지게 됐다.그는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트러스트 해체에 나섰으며 반발하는 기업인들에게 “만일 대기업들이 정부가 불법이라고 간주한 무엇인가를 행해 왔다면나는 그것을 끝까지 척결해 버릴 것이다”,“부패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부패기업들에도 칼이 필요하다”는 등 강경입장을 고수했다. 또한 노동문제에 있어서도 그동안 노사분규시 일방적으로 고용주 편을 드는 것으로 돼 있던 정부의 입장을 노동자의 입장도 동동하게 고려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이같은 그의 온건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는 과격한 변화를 반대하는 대다수의 미국인들을 만족시켰으며 1904년 압도적 지지로 재선 대통령이 되었다. 루즈벨트는 대외적으로 미국의 위상을 제고,국제사회의 지도국으로 부상케 했다.파나마를 콜롬비아에서 분리독립시키고 파나마 운하를 완성시킨 것은 중요한 그의 업적의 하나로 지적되며 1905년에는 러·일 전쟁 당시 양국 대표를 뉴햄프셔의 포츠머스로 불러 평화조약을 중재하기도 했다.이같은 그의 국제평화 노력은 이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미국에 첫 노벨상 수여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1858년 뉴욕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수학한 루즈벨트는 24세때 뉴욕주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뉴욕경찰국장,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했다.또 1898년 미·스페인 전쟁 발발시에는 의용기병대 대장으로 참전,산 후안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후 뉴욕주지사에 당선됐으며 1900년 선거에서 매킨리 공화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부통령이 된 후 8개월 만에 42세의 나이로 미국 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취임했다.그는 21세때 첫 저서인 ‘1812년 해전’을 발간한 이래 역사,자연,여행,정책관련책 등 38권을 펴내 미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다.또 대통령 퇴임후 10년간 ‘The Out look’이라는 잡지의 편집자 등 언론인 생활도 하고 아프리카 사냥여행,브라질,정글 탐험을 했으며 새로운 정당을 결성,정치적 재기를 꿈꾸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도을 하다가 1919년 60세의 나이로 롱 아일랜드의 자택에서 생을 마쳤다.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는 종합순위 5위를 나타내 2위를 기록한 제 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12촌간)와 함께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수잔 사르나 루즈벨트박물관 큐레이터/백악관 역사상 첫 흑인 초청/애칭 딴 ‘테디 베어’ 곰인형 인기/미국 이상적 남편·아버지의 전형 【오이스터베이(미 뉴욕주)=나윤도 특파원】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적지인 사가모어 힐은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사저와 박물관,당시 농장건물 등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이곳 박물의 수잔 사르나 큐레이터는 “아직까지 그가 대통령같다”며 설명에 들어갔다. ­루즈벨트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남북전쟁 이후 19세기말 30여년 대통령들이 지나치게 무능했고 기업들에 매수되다시피해 땅에 떨어졌던 대통령직의 권위를 되살렸기 때문이다.그리고 부통령에서 승계한 대통령의 경우 그때까지는 대부분 잔여임기만 때우는 식이었는데 그는 그같은 관행을 종식시켰다. ­그가 애칭으로 많이 불리는 이유. ▲미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었고 또 최초의 현대적 대통령으로 친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래서 TR이라는 이니셜도 처음으로 사용됐다.또 애칭 테디(Teddy)가 광범위하게 불렸으며 그를 딴‘테디 베어’라는 곰인형은 지금까지도 어린이들에게 유명하다. ­루즈벨트의 가족관계는. ▲첫 부인 앨리스와 1녀,소꿉친구로 두번째 부인이 된 에디트와 4남 1녀를 두었다.무척 자상한 성격으로 미국의 이상적 남편,이상적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특히 전투기 조종사이던 막내아들이 1918년 프랑스 공중전에서 전사해 슬픔을 안겨 주었으며 그후 큰 아들이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전사,1,2차 대전에 아들 하나씩을 잃은 아버지가 됐다. ­그의 성품은 어떠했는가.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대통령 취임직후 백악관 첫 손님으로 흑인 지도자였던 부커 워싱턴을 초청했던 것은 유명하다.백악관 역사상 첫 흑인 초청을 놓고 남부 정치가들로부터 반감을 사 고전하기도 했다.그는 사냥 등산 등 야외생활을 좋아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책을 읽었으며 6천여권의 장서를 남겼다.
  • 이라크 외교관 등 8명 피살/요르단서… 이집트인 2명 포함

    【바그다드·암만 외신 종합】 이라크의 고위 외교관과 백만장자 사업가 등 이라크인 6명과 이집트인 2명 등 8명이 17일 밤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숨졌다. 이라크 외무부 대변인은 18일 헤크마트 알­헤주 암만 주재 이라크 전권공사와 그의 부인이 ‘비겁한’ 행동에 의해 암살됐다고 발표하고 사건의 배후를 밝혀줄 것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현재 바레인에 머물고 있는 사드 압델 마지드 이라크 외무차관이 조사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요르단으로 갈 예정이다. 요르단과 이라크의 관계는 이라크가 지난해 12월 4명의 요르단인 학생들을 자동차 부품 밀수 혐의로 처형하면서 악화됐다. 요르단 경찰은 그러나 이날 헤주 전권공사와 함께 있다가 괴한의 공격을 받고 중태에 빠진 한 여성은 이라크 억양을 쓰는 4­5명의 전문살인자 처럼 보이는 괴한들이 공격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헤주 전권공사는 이라크의 부호인 사미 조지의 집에 있다가 변을 당했으며 조지와 네미르 오지 등 백만장자 사업가들도 숨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괴한들이 이라크 백만장자 나흐미 아우지의 형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해 이번 살인 사건이 돈 문제와 관련된 것임을 시사했다.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그러나 암만에 부임한 지 4년 된 헤주 전권공사에 대한 공격에는 ‘정치적인 동기’가 있다고 말했다.
  • ‘고졸 대통령’ 해리 트루먼(미국의 대통령 문화:8)

    ◎냉전속 국제질서 이끈 위대한 지도자/전후 서유럽 부흥위해 ‘마샬 플랜’ 강력 추진/일에 원폭 투하·맥아더 해임 등 결단력 돋보여/한국에선 “한반도 분단 책임자” 시선 곱지 않아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그는 보통사람이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그리고 대통령도 일반 시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1972년 12월26일 88세를 일기로 서거한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만의 조사(조사) 마지막 부분을 컬럼니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이렇게 끝 맺었다. 원폭투하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고 2차대전후 극렬한 대립을 보인 민주진영과 공산진영 양극의 한 정점에서 냉전의 국제질서를 강력하게 이끌었던 트루만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와 대통력직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결단력을 보여준 지도자란 평가를 받고있다.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서민적인 ‘보통사람’대통령으로 꼽힌다. 45년 4월12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취임 80여일만에 숙환으로 급서,당시 부통령으로서 트루만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됐을 때 미 언론들 대부분은 루즈벨트의 큰 자리를 트루만이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우려했다.왜냐하면 트루만은 당초 민주당내 부통령 지명과정에서 최적의 인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좌파 헨리 월리스와 보수파 제임스 번즈의 각축 중에 중도파로 있다 어부지리로 부통령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두차례의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2차대전중 수십억달러의 국방예산낭비 조사를 위한 소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을 당시 차분하고 공정한 업무처리로 인정받았던 그는 3차투표까지 간 부통령 지명전에서 막판에 루즈벨트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 정중히 사양했으나 거듭된 간곡한 부탁에 가까스로 응했다. 국민들이 우려를 나타낸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20세기 미대통령 가운데 유일한 ‘고졸대통령’이라는 점이었다.과거 무학 대통령들의 입지전적인 스토리들이 있기는 했으나 20세기들어서는 직전의 루즈벨트가 하버드 출신인 것을 비롯,스탠퍼드 출신의 후버,프린스턴의 윌슨,예일의 태프트 등과 같이 최고의 학력이 대통령의 필수조건처럼 돼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으로서의 트루만은 어떤 명문대학 출신 못지 않은 업무수행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차대전 이후 새로운 전후질서 형성과정에서 미국을 부동의 지도국 위치에 올려놓았고 국내적인 안정도 가져와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조사 각분야에서 상위를 기록,41명중 종합 7위로 나타났다. 2차대전 막바지 대통령직에 오른 그에게는 전쟁의 마무리가 가장 큰 임무였다.독일은 5월초 무조건 항복을 했으나 일본이 문제였다.45년 2월 맥아더 장군의 마닐라점령을 계기로 연합군이 승기는 잡았으나 일본군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상륙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100만명의 인명손실이 예상되고 있었다.따라서 때마침 실험에 성공한 원자탄이 자연스레 그 대안으로 부상했으며 트루만은 그해 8월6일과 9일 두차례에 걸쳐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라는 가장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우기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야욕에 맞서 그는 외교안보적으로는 공산세력의 침투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했다는 평가를 받는 ‘트루만독트린’을,경제적으로는 전후 피폐해진 서부유럽국가들의 부흥을 위한 대대적 경제원조인 ‘마샬플랜’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같은 그의 강공은 소련의 베를린봉쇄를 가져왔고,유엔 설립을 위한 대서양헌장 채택,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탄생 등 냉전체제의 골격을 완성시켰다.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해 국방부와 CIA를 창설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취임초기 물가상승과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높아져 46년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여소야대 정국이 초래됐다.48년 마샬플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내 반대세력이 늘어갔으며 또한 민주당내 분열이 심화돼 언론들 대부분은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후보가 당선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그러나 트루만은 유명한 3만마일 역전유세를 통해 유권자에 직접 호소,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후 트루만은 농민보조금 제공,의무적 건강보험 실시 등 새로운 사회개혁정책을 시도했다.이 정책은 “모든 집단과 모든 개인은 정부로부터 공정한 대우(Fair Deal)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그의 연설에서 ‘페어 딜’정책으로 명명됐다.그러나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의회내 보수파들에 의해 대부분 묵살돼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당시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중국군대의 개입을 저지하고자 만주에 원폭투하를 요청하면서 트루만과 공공연히 맞섰는데,이에 그는 맥아더 사령관을 전격 해임해 대통령직 권위에 대한 도전에 단호히 대처했다.한국쪽에서 볼 때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라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던 맥아더의 해임은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미국민들에게 남아 있는 트루만은 정치적 업적보다도 그의 인간됨이다.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소읍을 둘러싸고 청년농부 트루만과 후에 퍼스트레디가 된 읍내 소녀 엘리자베스 월리스(베스라는 애칭으로 불렀음)와의 사랑이야기는 ‘아메리칸 러브스토리’로 남아 있다.그가 그녀에게평생을 쓴 1천600통의 사랑의 편지는 지금도 젊은이들의 연애편지로 읽히고 있다. 그는 52년 퇴임후 20년 동안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보여준 보통사람으로서의 삶 때문에 후세에 더욱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고 있다.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는 1마일쯤 떨어진 트루만도서관의 사무실로 매일 걸어서 출근했으며 강의와 회고록 집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특히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동네사람들,옛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생을 보내던 그가 가장 불편해 했던 것은 63년 케네디 암살 이후 통과된 전직대통령 경호법에 의해 경호팀이 집부근에 상주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게된 일일 정도로 그는 완벽하게 보통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디펜던스의 그의 사저 일대는 역사공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인근의 언덕위에 높게 자리잡은 트루만도서관과 함께 보통사람 대통령의 체취를 느끼려는 관광객과 학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랜드 스웰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자료담당관/퇴임후 평범한 삶 후세에 귀감/한국 좋아해 고려청자 현관에 보관/어머니에 배운 피아노 연주 수준급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옆의 소읍인 인디펜던스시 북부의 언덕위에 넓게 위치한 트루만도서관은 냉전 초기의 역사에 관한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이 도서관의 랜드 스웰 자료담당관은 “트루만대통령은 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루만 대통령이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서 결단력과 대통령직을 마친 후 평범한 이웃으로 다시 돌아온 점이다.대통령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그 집에서 살다 죽은 예는 흔치 않다. ­대통령 퇴임후의 생활은 어땠는가. ▲인디펜던스 읍내 노스 델라웨어 스트리트 219번지 자택은 원래 트루만의 부인 베스 트루만의 집으로 1919년 결혼후 줄곧 이 집에서 살아왔다.그는 퇴임후 강연과 저술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59년 입법 후에야 전직대통령에 대한 연금이 지급됐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도서관의 특별한 활동은. ▲95년부터 그의 ‘50주년 행사’를 계속해오고 있다.지난해는 트루만독트린 50주년 세미나및 전시회를 가졌고 올해는 이스라엘 건국 50주년,99년에는 NATO 50주년,2000년에는 한국전쟁 50주년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한국인들은 트루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그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나. ▲공산주의 저지의 최후 보루로 인식했기 때문에 남침 즉시 유엔 결의를 기다릴 것 없이 미군의 참전을 명했다.다만 한국전쟁때 마샬플랜에 더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개인적으로 한국을 좋아했다.46년 한국 교육계대표 장이욱 박사로부터 선사받은 고려청자가 현관에 보관돼 있는데 의 위치는 그가 잡은 것이다. ­그의 피아노를 잘 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 수준급에 달해 45년 포츠담회담때 처칠과 스탈린 앞에서 연주했고 케네디 취임식때도 연주했다.트루만이 백악관 당시 즐겨 치던 피아노가 닉슨 대통령의 기증으로 전시관에 진열돼 있다.
  • 가상의 역사/영 역사학자 10명 공저(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역사적사건 반대 시각 재조명/영국 명예혁명·고르비와 구소 붕괴 등 다뤄/지식과 상상과 세계 똑같은 비중 접근 시도 ‘가상의 역사’는 학술적인 용어다.역사를 전공하는 모든 학생들과 역사가들이 생각해보는 것이다.이를테면,만일 고대 그리스 마라톤전쟁에서 페르시아인들이 이겼다면,러시아 혁명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볼셰비키들을 쫓아냈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가정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역사적 사건들이 실제 어떻게 일어났는 가를 알아보는데 매우 좋은 수단이 아닐 수 없다.이 질문들은 또 역사연구가들이 흔히 갈팡질팡하는 문제,즉 어떤 현상을 반드시 인과관계에 따른 법칙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하는 기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 때 무척 유용한 도구가 된다.결정론자와 비결정론자 사이에 때때로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학자들사이에 ‘가상의 역사’라는 장르는 역사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단순히 전문가의 의견에 빠져들지 않게하는 마력을 지닌다.‘진실추구’를 하지 않는다면 해당역사가나 그 역사서는 권위를 그만큼 떨어뜨리는 것이 될 것이며 때때로 독자가 작자들과 영합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할 것이다. 역사해석에 대한 이같은 ‘함정’을 메우기 위해 나온 책이 ‘가상의 역사’라는 책이다.‘대안과 가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책은 영국의 소장 역사학자 10명의 글을 모았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정확히 반대되는 사실에 입각한 가정들,즉 ‘영국의 명예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에서부터 ‘고르바초프가 소련에 없었더라면’까지 큰 줄기의 역사사건을 반대로 가정해봄으로써 역사적 사건의 진실에 보다 가까와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단편 논문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너선 클라크의 ‘미국혁명이 없었다면’부분이다.미국 독자들은 클라크가 미국을 세운 이들을 ‘원칙주의자’보다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화잘내는 문제아’로 묘사한 사실에 놀랄 것이다.하지만 건국이후 미국을 끊임없이 괴롭혔거나 지금까지 괴롭히고 있는 노예문제,인종문제,일부 인디언들의 처리문제 등은 “만일 미국이 제국으로 남아있었다면”모두 해결되었을 것으로 결론지은 클라크의 혜안에 감탄할 것이다. 마크 알몬드의 ‘고르바초프가 없는 1989년’도 현대 역사학자들에 매우 유용한 테마였다고 본다.그의 말을 빌리면 최근세사에서 공산주의 붕괴만큼 필연적인 사건은 없다고 결론 짓는다.물론 공산주의 경제체제와 정치적모순에 고르비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이라는 지적이다.알몬드는 그러나 공산주의 붕괴같은 역사상 획을 긋는 현대의 어떤 빅이벤트도 예견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예를 들면 소련연구가인 미국의 제리 휴조차도 1990년에 “소련정권은 지구상 가장 안정된 다국적국가”로 묘사하기도 했다. 알몬드는 소련내 어떤 정치·경제·사회세력도 소련을 무너뜨리지 못했으며 서방의 대처나 레이건같은 인물이 소련에 있었다 하더라도 소련의 붕괴를 가져오게 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단정한다.유럽의 정치인들도 당시 동방의 핍박받는 사람들의 자유보다는 소련의 안정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알몬드는 특히 소련의 반체제인사 작품들 조차도 프라하의 지하철역이나 라이프치히의 전차역에서보다는 미국의 ‘뉴욕타임스 북리뷰’에서 오히려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그 정도로 소련의 붕괴는 예견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의 붕괴는 어떻게 온 것인가.알몬드는 바로 고르바초프의 ‘순진한 노력’이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고르바초프가 사회주의 블럭을 서방과 연결시키려 한 노력이 결국 소련을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서방과의 관계강화가 소련의 정치·경제시스템을 해치리라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조종간을 잡고 바위를 향해 힘찬 행진을 한 사람­고르비­때문에 소련은 무너졌다”는 것이 알몬드의 주장이다. 위 두 사람과 형식은 달리하지만 다이언 쿤츠의 역사해석도 재미있다.쿤츠는 케네디를 헐뜯는데 초점을 맞추지만 흥미진지함도 가져다 준다.이 책은 앵글로 색슨족 중심주의가 어렴풋히 베어있고 논문들의 이슈도 방만하게 선택된 감이 없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그러나 대체적으로 우리가 이전에 해왔던 역사에 대한 의미부여를 아주 새로운 각도에서 접하도록 해줌으로써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이 1차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유럽대륙이 유럽연합과 같은 기구를 일찌감치 탄생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지금도 인기가 여전한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암살사건이 결국 존슨대통령의 ‘위대한 사회’캐치프레이즈 아래에서 시민권의 신장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누가했겠느냐는 것이다.‘가상의 역사’가 밀리언셀러가 될 가능성이 큰 것도 이같은 이유때문이다. 옥스퍼드대학 출판사를 책임지고 있는 퍼거슨씨는 “다소 인위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실에 반대되는 각도에서 역사를 조명,가정적인 역사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역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실제로 이 책의 편집자이기도 한 퍼거슨은 “영국 찰스1세가 1639년 6월 스코틀랜드 반군과 전쟁을 하고 또 승리했다면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났겠는가”하는 가정을 예로 든다.1939년의 ‘스코틀랜드 반란’은 찰스가 군사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영국의 명예혁명을 앞당긴 일련의 사건이다. 이 책은또 미국과 프랑스,러시아에서 혁명이 없었을 경우,아일랜드의 분리가 없었을 경우,1929년 세계적인 대공황이 없었을 경우의 여러세계를 재조명함으로써 많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지식과 상상의 세계를 똑같은 비중으로 접근하는 이같은 역사의 지혜에 놀라울 수 밖에 없다.역사는 사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원제 Virtual History:Alternatives and Counterfactuals.Niall Ferguson,Picador.548쪽.32달러
  • 케네디가 끊이지 않는 비운/마이클 케네디 스키타다 사고사

    ◎존 F 케네디 조카… 부친도 피살 【애스핀·보스턴외신 종합】 암살당한 존 F.케네디 미대통령의 조카이자, 68년 대선 유세중 역시 암살된 로버트 F.케네디 전 미법무장관의 아들인 마이클 케네디(39)가 구랍 31일 콜로라도주 애스핀의 스키장에서 가족과 함께 스키를 타다가 나무에 부딪쳐 사망했다. 이로써 미국제일의 명문가이면서도 끊임 없는 비극에 시달려온 케네디가에 또 한차례의 비극이 재연됐다. 케네디가를 덮친 첫번째 비극은 조지프 2세가 2차대전 당시 29살에 자신이 몰던 비행기 폭발사고로 숨진 것.이어 딸 캐슬린도 28살때인 48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자식들중 미국 대통령이라는 최대의 숙원을 이룬 존 F.케네디 대통령은 63년 46세에 암살됐으며 그해 조산아로 태어난 그의 아들도 2년후에 숨졌다. 존의 사망 5년후 로버트 F.케네디 상원의원 역시 저격으로 사망했다.이번에 죽은 마이클은 케네디가의 명망을 뒤이을 촉망받는 젊은이로 평가돼 왔다. 그는 그러나 지난해초 자신의 자녀를 돌보던 보모와의 추문으로 기소된후 공석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 민주주의 전도사 에이브러햄 링컨:상(미국의 대통령 문화:6)

    ◎노예 사슬 풀고 갈라진 연방 재통합/노예제 폐지 강력 주장 대통령 당선/취임전 남부6개주 연방 이탈 ‘시련’/전쟁초기 북­23 남­11주 절대 우세/해방선선임 영·불 불개입 끌어내 승기/연임 취임 40일만에 흉탄에 쓰러져 【게티즈버그(미펜실베이니아)〓나윤도 특파원】 “87년전 우리의 조상들은 이 대륙에,자유를 숭상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전제를 신봉하는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이같은 건국의 신조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우리 병사들은 위대하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헌신할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래서 이 나라가 자유의 새탄생을 맛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민의,인민에 의한,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사라져 없어지지 않도록해야 합니다.” 1863년 11월19일,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게티즈버그 벌판의 골짝 골짝으로 퍼져나간 링컨 대통령의 이 짧은 연설은 모든 청중들을 사로 잡았다. 펜실베이니아주 남쪽 메릴랜드와의 점경에 위치한 게티즈버그는 미남북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그해 7월1일부터 3일까지 사흘 동안의 전투에서 5만1천여명의 사상자를 기록하며 남부군의 기세를 꺾고 북부군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곳이다. 이날 링컨이 게티즈버그의 전투지 일대를 국립묘지로 지정하는 봉헌식을 올리면서 강조한 이 연설은 미국 민주주의 정신을 가장 잘 요약한 명연설로 오늘날까지 미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모여드는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안에는 링컨의 연설장소에 세워진 링컨 스피치 메모리얼을 비롯,전몰병사기념탑 등 많은 남북전쟁 기념물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게티즈버그 시가지에는 링컨이 연설 전날 묵으며 연설문을 가다듬었던 링컨 스퀘어의 호텔방을 그대로 보존,‘링컨 룸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또한 역대 대통령들의 밀랍인형으로 꾸며진 ‘프레지던트 홀’,링컨 열차 박물관 등 링컨의 체취가 그득하다. 분지형태로 된 격전지는 투어버스로 사흘동안의 전쟁상황을 상세히 안내해 주고 있다. 켄터키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채 독학으로 28세때 변호사 자격을 획득,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또 주의원을 거쳐 연방하원 의원을 지내는 등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을 키워온 링컨은 당시 미전역에 걸쳐 가장 큰 이슈로 돼있던 노예문제에 있어 강력한 반대 입장에 섰고,1860년에는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54년 창설된 공화당으로서는 6년만에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11월 링컨의 대통령 당선으로부터 이듬해 3월초 취임때까지 4개월간 미연방은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북 주들간의 첨예한 이해대립으로 극심한 혼란기에 빠졌으며,당시의 상황은 대공황 탈피의 책임을 지고 취임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보다도 더 심각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40%에 불과한 지지도 역시 링컨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당시 심각한 레임덕현상을 겪고 있던 무능한 뷰캐넌 대통령은 이같은 분열상황에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링컨의 취임전인 2월,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남부 6개주가 ‘남부연합’을 결성,연방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새정부를 앨라배마의 몽고메리에 두고 미시시피 출신 상원의원인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따라서 그가 취임할 때는 남부의 분리독립 선언으로 그는‘반쪽대통령’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의 취임 이후에도 연방탈퇴 행렬은 계속돼 4월초 본격적인 남북전쟁 발발 당시 북부와 남부의 세력 차이는 북부가 23개주에 2천2백만명,남부가 11개주에 9백만명으로 남부가 열세였다. 남북전쟁은 1861년 4월12일, 피에르 뷰리가드 장군이 이끄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국민군 부대가 찰스턴 항구 앞의 연방군 요새 섬터를 포격하면서 시작됐다. 링컨은 즉시 반란사태를 선포하고 3개월간 복무를 조건으로 7만5천명의 지원병을 모집,전선에 투입했다. 초기에는 남부군의 맹렬한 기세에 북부군이 밀리는듯 했다. 그러나 1862년 9월 앤티담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전투는 서서히 북부군측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약간 상황이 유리해지자 링컨은 힘을 배경으로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실제로 당장의 노예해방에는 기여를 못했지만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두가지의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는 북부군에 유리한 것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그때까지의 양다리 외교를 끝내고 마침내 남부연합불승인 방침을 확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남부연합을 승인하면 정치적으로 인기없는 노예제를 지지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남부군에 유리한 것으로 북부 백인노동자들의 전쟁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당초에는 연방의 보전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자원했던 것이나 노에해방으로 해방된 노예들이 장차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였다.어쨌든 전쟁은 계속됐고 게티즈버그전투를 계기로 전황은 완전히 북부군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군의 저항이 좀처럼 수그러들줄 몰라 많은 전투들이 도처에서 계속됐다. 이같이 극심한 남북전쟁의 와중에서도 1864년 미국은 총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선거 연기주장도 있었지만 링컨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선거를 행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자유스런 정치를 해나갈수 없다. 만약 반란을 이유로 총선거를 중지하거나 연기해야 한다면 반란자는 그때 이미 우리를 정복하고 파괴했다고 서슴없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링컨은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 관문을 통과했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그는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싸매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2기 취임 1개월 열흘만에 그는 남부지지자의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하면서 미역사상 최초로 재임중 암살당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됐다. 비록 링컨은 남북전쟁의 완전한 종전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미연방의 분열을 막고 재통합시킨 것과 노예를 해방시킨 그의 업적은 그를 미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랭크시키고 있다. 라이딩스의 미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업적 및 위기관리와 개성 및 집중력이 각각 1위,지도력과 정치력이 각각 2위,용인술 3위로 종합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링컨 연설모음 발췌/“우리는 적이 되어선 안됩니다”/“악의는버리고 모든 사람을 관용하며 정의로운 평화 보전위해 할일 다하자” 링컨대통령은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설로 유명했다. 다음은 그의 중요연설 가운데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스프링필드 연설 ‘분열된 집안’(1858. 6.17)=이 정부가 영구히 반쪽은 노예주의 이고 반쪽은 자유주의라면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연방이 와해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의회가 넘어가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분열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찬성쪽에 서든지 그렇지 못하면 모두 반대쪽에 서야 합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노예제가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막고,종국적인 근절을 위하여 국민을 계도해야 할것입니다. 그것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가서 새 주 묵은 주 할것 없이,남부 북부 할것 없이모든 주에서 똑같이 합법화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첫 대통령 취임사(1861. 3.4)=나는 모든 것을 끝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고 친구입니다. 우리는 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감정은 비록 긴장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사랑의 유대가 끊겨서는 안됩니다. 모든 싸움터와 애국투사들의 묘지에서부터 지금 이 넓은 대륙에 흩어져 삶을 누리는 우리들의 가슴과 대대로 이어 내려온 신비스런 화음의 기억은 우리들의 천사같은 성품의 숨결을 타고 다시 한번 미합중국의 대합창으로 우렁차게 울려퍼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두번째 대통령 취임사(1865. 3.4)=악의는 버리고 모든 사람을 관용하며,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리를 굳게 지키면서,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과업을 마무리 짓는 일과 나라의 상처를 싸매는 일,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미망인·유자녀들을 보살피는 일,그리고 우리들 안에서뿐 아니라 다른모든 나라들과 더불어 정의로운 평화를 성취하고 그것을 영구히 보전하는 일,이런 모든 일들을 위하여 우리 모두 분발합시다.
  • 한국 정권교체는 신뢰회복 전기(해외사설)

    지난 30년간 동북아가 그리고 최근에는 동남아가 경제비약의 모델로 인용되어왔다.그러나 민주주의는 그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독재체제,계엄령,부패와 압제가 상처를 남겼으며 나라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 그러한 상처는 아직도 잔존하고 있다.민주주의는 아직도 생동하는 아시아의 속성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한국 유권자들의 투표는 주목할만 한 것이었다.그들은 반체제인사인 김대중씨를 권력의 대안으로 선택함으로써 진정한 정치성숙의 실례를 제시했다.오랜기간 독재정권을 거쳐 경제적 파산으로 끝난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경험한 다음 민주주의 투쟁의 상징인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권좌에 오른 이 어제의 반체제 인사는 한국이 큰 사회적 문제에 봉착할 위험성이 있는 재정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데 적절한 인물일까.16년간의 가택연금과 투옥,두번의 암살기도에 맞서 싸웠다는 점은 적어도 역사적 정당성을 갖게 하며 40년간 한국을 통치해온 정당과 엘리트층과의 필요한 단절을 구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 단절은 한국이 신뢰의 위기에서 탈출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신뢰의 위기는 재정적 부도보다도 장래의 더 큰 장애다.국제사회는 현재 한국을 믿지 않는다.갚지 못할 빚을 가지고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확장한 재벌들의 허세가 한국의 신용에 타격을 입혔다.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한국의 경험과 경제적 잠재력은 번영의 후신인 젊은 세대들이 덜 희생적이라 해도 국민들의 결집력과 함께 재건의 담보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당선됐다면 해외에서 한국의 참담한 이미지가 계속된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그러나 변화를 선택함으로써 한국인들은 유익한 정치적 분발을 보여주었다.이는 전제주의가 흔히 부패와 결탁하는 소위 아시아적 발전 모델의 종말를 상징할 수 있을 것이다.아시아의 경제위기는 실업으로 귀착될 가능성이 크다.이는 인기에 영합하는 민족주의적 발작을 일으키게 하거나 전제주의적 수단방법을 선동함으로써 발전에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그런점에서 한국의 선택은 본받을 만큼 매우 모범적이다.
  • 성탄절·연말연시 TV영화나 보며 보낼까

    ◎외식 자제 알뜰시청자 겨냥 ‘풍성’/KBS­‘벙어리 삼룡이’ ‘JFK’ ‘벤허’/MBC­‘데드맨 위컹’ ‘나홀로 집에’/SBS­‘성의’ ‘모세’ ‘사랑의 용기’ 올해 성탄절과 연말연시에는 안방극장 관객들이 크게 늘어날 것 같다.경제한파를 맞아 각 방송사들이 마련한 특집영화를 보며 외식이나나들이 비용을 줄이려는 알뜰 시청자들이 많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 KBS·MBC·SBS 등 공중파TV 3사는 이같은 사회분위기를 감안,비교적 다양한 외화 및 방화를 편성했다. KBS의 경우 외화절약과 우수 한국영화 소개라는 명분아래 21일부터 매주 일요일 ‘명화극장’(1TV·하오10시35분) 시간을 통해 작품성 뛰어난 방화를 내보낼 예정.21일에는 신영균·최은희·김희갑 주연의 ‘쌀’을 방영하며,28일은 김진규·최은희·박노식 주연의 ‘벙어리 삼룡이’가 나간다.이어 내년 1월4일에는 주요섭 원작·신상옥 감독으로 제9회 아시아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방영될 예정. 이와 함께 볼만한 외화도 선보인다.2TV는 22일부터 잇따라 명화들을 내보낸다.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사건을 다룬 ‘JFK’(올리버 스톤 감독,케빈 코스트너·토미 리 존스 주연)가 22일 하오 9시50분부터 방영되며,23일에는 스티브 맥퀸·폴 뉴먼 등 호화배역이 빛나는 70년대 최고의 영화 ‘타워링’(하오9시50분)이 나간다.이어 24일에는 오드리 헵번·헨리 폰다 주연의 명화 ‘전쟁과 평화’(하오9시50분)가 다시 안방을 찾으며,25일 상오 10시부터는 ‘십계’를 감상할 수 있다. 1TV에서는 25일 하오 9시50분부터 윌리엄 와일러 감독,찰톤 헤스톤·캐시오드웰 주연의 ‘벤허’를 내보내며,만화영화 ‘아나스타시아’도 같은날 낮 12시10분부터 방영된다. MBC 역시 10여편의 특선영화를 마련했다.20일에는 카프카 탄생 100주년 기념영화 ‘카프카의 심판’(낮12시10분)에 이어 사형집행에 대한 미국인들의 복잡한 태도를 조명한 ‘데드 맨 워킹’(하오10시30분)이 방영된다.성탄절 단골손님인 ‘나홀로 집에’도 1·2편이 24·25일 연속 방영될 예정.또 27일에는 크리스마스 휴가중에 일어난 환상같은 시간을 그린 ‘크리스마스의 추억’(낮12시10분)과 남편·아이를 잃은 여인이 벌이는 복수극을 다룬 ‘요람을 흔드는 손’(하오10시35분)이 선보인다. SBS는 22일 프랭크 허버트의 공상과학소설을 원작으로 한 ‘데이빗 린치의 모래행성’(하오10시55분)을 내보내며,24일에는 성탄특선 성서영화 ‘모세’(하오11시45분)를 방영한다.이어 25일에는 어린이용 만화영화 ‘왕자님의 하얀 낙타’(상오9시30분)와 리처드 버튼·진 시몬즈·빅터 머추어 주연의 ‘성의(상오10시20분)’를 선보이고,29일에는 멜라니 그리피스·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사랑의 용기’(하오11시)를 내보낼 예정이다.
  • 멕시코위기 이렇게 극복했다/이삭 카츠(특별기고)

    ◎“긴축정책 집행·IMF 지원 접목 주효” 서울신문은 지난 95년에 국제통화기금의 자금지원을 받아 경제회생에 성공한 멕시코의 사례를 현지 경제전문가의 기고를 통해 알아본다.멕시코는 강력한 안정화정책을 통해 2년이 안되는 짧은 기간에 경제를 회생시킴으로써 똑같은 입장에서 있는 우리경제의 타산지석이 되고 있다.글쓴이는 이삭 카츠 멕시코 테크대(ITAM) 경제학 과장(44)이다. 지난 1995년 멕시코 경제는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의 ‘대공황’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에 놓여 국내총생산은 마이너스 6.2%성장을 기록했고 인플레는 전년의 7%에서 52%로 뛰었다.이같은 위기의 가장 가까운 원인은 물론 1994년12월 실시한 멕시코 페소화의 대미국달러 평가절하이지만 그 뿌리는 당시 상업은행들의 여신방침과 정치적 불안정에 닿아있다.이 위기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만약 이에 대해 멕시코 정부가 재정 및 통화정책 조정의 거시경제 안정화대책을 실천하지 않았거나 미국정부 그리고 세계은행,아메리카 개발은행,특히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의 재정적 지원에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훨씬 더 나빴을 것이다. ◎위기/95년 성장률 ­6.2%/페소화 폭락·외환위기/섣부른 방어 국고바닥/은행민영화 실책 가세 멕시코 위기는 공식적으로 1994년 12월 정치상황이 한층 불안정해지는 가운데 실시한 페소화의 대미달러 평가절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위기를 이끈 요소들은 지난 91년 상업은행 민영화에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상업은행의 소유주가 정부에서 민간부문으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중대한 실책이 저질러졌는데 이로인해 경제전반이 점진적으로 약화됐으며 94년 국제금융시장에서 멕시코에 대한 위험도가 높아지면서 더욱 뚜렸해졌다.동시에 재정과 환율정책을 위시한 거시경제 정책 실행에서 또다른 실책이 범해졌었다. 멕시코 정부는 82년도에 공영화한 상업은행을 91년 민간에 다시 팔기로 결정했었다.이 민영화 과정에서 명백한 3가지 실책이 있었다.첫째 장부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은행을 팔았다.국제적으로 보아 은행매점의 시장가는대개 장부가의 1.5배내지 2배였는데 멕시코 은행들은 평균 장부가의 3배 값으로 팔렸다.두째 빚을 내 은행 살 돈을 마련하려는 민간인도 정부가 거래대상으로 마다하지 않은 점이다.세째 은행을 대부분 증권중개업체 소유주에게 판 것으로이들은 은행 운영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이와 동시에 정부는 은행에 관한 규제를 고쳐 예금 일정비율의 지불준비금 유지 원칙에서 신용대출의 질을 고려한 최소 자본금 유지로 바꿨다. 은행의 새 주인들은 은행매입에 소요된 투자액을 가능한 빨리 회수할 셈으로 높은 예대마진율과 함께 광란적인 신용대출 팽창에 들어갔다. 마침 당시기업과 가계들의 신용요구가 증가일로에 있었다.10년동안 제로 성장에 그친경제가 91년 모처럼 개선될 전망을 보여 가계, 기업이 내구재및 자본재 구입을 은행 신용대출로 이루려는 참이었다. 부실 채권 문제는 95년도 침체의 심각성을 설명해주는 주원인인데 93년부터 표면화하기 시작했다.이 해 경기가 후퇴하면서 가계와 기업은 대출상환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는 은행에 이자수입 감소와 함께 신용대출의 질이악화되면 준비금의무가 강화되는 규제의 부담을 안겨주었다.은행은 부실채권 손실을 만회하고자 예대마진을 더욱 높혔다. 멕시코 경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94년 1월부터 실제 가동되고 정부가 87년만해도 160%였던 인플레를 93년 10% 아래로 떨어뜨리는데 성공함에 따라 낙관시되었지만 94년 정치 불안정으로 비틀거리게 된다.94년 1월의 농민반란,3월의 대통령후보 선두주자 암살 등은 국내외적으로 멕시코 경제를한층 위험시하게 만들었다.외환보유액이 50%나 줄어들고,환율 평가절하가 이어졌고,금리는 배로 뛰었다.해외 투자자의 경계심이 고조되자 정부는 해외자본이 멕시코에서 떠나지 않도록,환율변동에 이자율을 연동시키고 미 재무부 채권보다 이자율이 배나 높은 단기채권 발행을 급증시켰다.이 조치로 국내인 및 외국인 자본을 멕시코 안에 잡아두긴 했으나 이로 인한 정부 빚은 크게 불어나 94년 11월말 200억달러였던 채무가 한달뒤 3백억달러로 늘어났다.이것은 멕시코에 엄청난 대가를 치루게 한다. ◎안정화/변동환율제 유지하며 긴축·재정조정 주력/IMF지원 요청 노력 94년 12월 멕시코에 새 정부가 들어서자 기존 경제정책의 계속 여부에 대해 투자자들은 엇갈리는 신호를 받고 있었다.중순이 되자 현 환율이 지탱하지 못하리라는 인식이 고조되었으며 3주째가 되자 정부는 별 수 없이 환율변동폭을 포기했고 이어 페소 대미달러 환율을 평가절하했다.환율을 15% 높이면 당시 국내총생산의 8%에 이른 경상수지 적자를 시정할 수 있으리라고 정부는 기대했다.그러나 이같은 페소 가치의 절하로 정부를 비롯 멕시코 경제 전체가 대외 부채의 원리금을 제때 갚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리란 걸 감안하지 못했다.특히 환율연동 정부 부채가 문제였다. 정부가 빚을 갚을수 없는 상황,즉 지불불능 신세가 되자 정부의 채무변제의무를 가능케 할 수 있는 외국환 수입이 생길 정도의 경상수지 흑자 생성을 위해서,후속 평가절하가 요구됐다.또 이 지불불능 상황은 정부가 미달러 대신 페소화로 빚을 갚는 방안을 고려케 했는데 이같은 선택은 초인플레를 유발,채무 위기를 최악의 상태로 밀어넣을 수도 있었다.그래서 정부의 안정화 대책이 성공하기 위해선 외부의 재정지원이 긴요해졌다. 이같은 연유로 정부는 환율연동 단기부채 3백억달러 및 중장기 부채를 짊어진 채 재정 조정과 긴축통화 정책으로 짜여진 안정화 프로그램의 실행에 매달렸다.이 재정,통화 정책은 모두 변동 환율제의 틀을 지녔다.그러면서 정부는 95년 1·4분기동안 미국 등 외국정부와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 재정지원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거시경제적 안정화정책의 성공이 외부의 재정지원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에도 미국 의회의 반대등으로 이같은 해외지원의 패키지가 수월하게 마련되지 않자 95년 첫 3개월간 거시경제의 각종 지표가 눈에 띄게 불안정해졌다.3월이 되자 환율은 1달러당 8페소로 올라 94년말 평가절하 직전의 125%가 됐고 페소화 표시 정부부채의 이자율은 거의 80%에 달해 94년 말보다 60% 포인트나 높아졌다. ◎IMF 지원/미 정부 신용공여 포함 5백억달러 긴급수혈/지불불능 사태 해소/재정조정 성공적 수행 마침내 95년 3월말 재정지원 패키지가 마련된다.미국정부의 2백억달러 신용공여,IMF의 3년 ‘확대기금 협정’에 따른 1백20억달러 지원,여타 국제기구 및 외국정부의 2백억달러 등으로 이뤄졌다.이같은 재원이 갖춰지자 멕시코정부는 거시경제적 안정화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었고 지불불능 상태는 소멸됐다.그러자 당장 환율이 달러당 6.50페소로 떨어졌고 이자율도 40% 포인트 가깝게 내렸다.IMF와 미국정부의 요구사항은 표준적인 것으로,멕시코는 IMF 부과 원칙과 일치되게 안정화 정책을 실행할 의무가 있으며,통화와 재정 양면을 조정한다는 것이었다.또 미 정부는 석유수출을 담보로 잡았다.이같은 긴급구제 패키지의 가장어려운 부분은 미 의회의 반대였다.재정구제 패키지가 제대로 자리를 잡자 그간 증가일로였던 멕시코의 신인도 하락이 멈췄고 안정화 정책은 실효를 얻기 시작했다. 환율을 안정시키고 인플레를 감소한다는 목표의 안정화 정책은 이 부문의 모든 성공적 프로그램처럼 재정조정이 결정적 요소였다.인플레 압력을 감소하기 위해 정부지출 축소와 세금 증액으로 이뤄진 재정조정은 꼭 실천되야 했다.물론 재정조정에 필수적인 이 두 요소의 시행에는 언제나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정부의 지출은 단기 계획에선 자르기가 어려운 만큼 지출 조정은 대부분 공공투자 프로젝트들을 자르는데서 이뤄졌다.증세에 대한 사회 일반의 저항도 컸다.멕시코는 국내총생산의 3.2%에 해당하는 95년도 재정조정을 주로 10% 부가세 요율의 15% 인상을 통해 달성했다. 미 정부와 IMF의 금융 구제가 이뤄지기 전 평가절하 그리고 95년도 첫 분기 동안의 거시경제 불안정은 이미 멕시코에 커다란 피해를 입혀놓았다.환율의 평가절하는 실질임금을 하락시켰고 이는 생산경비를 떨어뜨려 국제시장에서 멕시코 상품을 한층 싸게 만들었지만 또 한편으론 국내 수요를 크게 감소시켰다.경제활동의 위축은 은행 위기로 한층 악화됐다.아까 언급한대로 멕시코 상업은행들은 92년, 93년에 무책임하다고 밖에 평할수 없는 신용팽창 방침을 펼쳤다.94년 평가절하 및 95년 첫 분기의 불안정으로 인한 좋지 못한 거시경제 상황은 은행으로 하여금 예대마진을 늘이도록 유인했다.이런 편법은 부실채권을 계속적으로,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증가시켜 총 신용의 20%에 달하게 했다.그러고 은행이 신규 신용을 억제함에 따라 많은 기업을 압박했으며 일부는 파산하게 됐다.은행 위기에 직면에 정부는 은행 조직의 붕괴와 전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피하기 위해 은행 조직과 은행 채무자를 구제하는 방안을 시행했다. 평가절하,재정 및 통화 조정시행,그리고 은행신용 위기는 그때까지 멕시코 70년 사상 최악의 경제활동 위축으로 이어져 국내총생산이 6.2%나 하락했다.만약 멕시코 경제를 구제하려는 금융 패키지가 적당한 시기에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추락은 한층 더 심했을 것이다. ◎교훈/IMF지원 지렛대로 신용공여 문호 넓어져/해외재원 필요하다면 늦기전에 획득이 중요 미국과 IMF가 주도한 금융지원 패키지가 없었더라면 멕시코 경제는 실제겪은 것보다 강도가 훨씬 큰 중대 위기상황에 빠졌을 것이 틀림없다.멕시코정부가 연동 단기채무를 달러로 변제할 수 있도록 한 이 금융지원은 초인플레 유발의 정책을 선택토록하는 위험을 피하게 했다.더구나 IMF가 열어준 신용공여 문호는 멕시코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변동환율제 아래에서도 외환보유 면에서 위치를 강화할 수 있도록 했다.즉 상황이 불안정해지면 즉시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충분한 대외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를 낼 수 있는 것이다.이는 거시경제적 안정화 프로그램과 함께 환율에 상당한 안정을 주는 긍정적 효과를 거뒀으며 인플레를 크게 떨어뜨려 95년의 52%가 올해는 16%까지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이와 동시에 지난 2년간 경제가 비교적 빠른속도로 성장,97년도 경제성장율은 7%에 이를 것으로 기대된다. 또 IMF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결과로 멕시코 정부는 기간에서나 이자율에선 해외 채무에서 보다 나은 조건을 갖게 됐다.이는 멕시코가 채무상환을 제때에 못하는 위험을 크게 줄여주었다. 멕시코의 경험으로부터 끄집어낼수 있는 교훈은 안정화 대책이 시행에 옮겨지고 성공하는데 있어 해외의 재원이 필요하다면 이 재원을 아주 빨리 획득하는 것이 결정적이란 점이다. □이삭 카츠 약력 ▲53년 멕시코시티 출생▲77년 멕시코 ITAM대 경제학과 졸 ▲80년 시카고대 경제학 석·박사과정 수료 ▲91년 멕시코 ITAM대 경제학 과장(현) ▲주요저서 및 활동 △시장개방의 지역적 영향분석(97년) △경제적 진보주의의 개념적 기초(97년) △진보주의와 교육(96년) 등 다수 △주간 이코노미스트지(멕시코) 칼럼니스트 ◎안정화정책 요지 【재정정책】 △GDP대비 4% 재정흑자 목표 △공공재 가격인상(휘발유와 디젤유 35%,가스 와 전기요금 20% 인상) △부가가치세율 인상(10%→15%) △공공지출 감소(9.8%) △비전략부문 공기업의 민영화 지속 추진(특히 민영화는 생산성과 효율성 제고라는 명목이 따랐으며 민영화를 통해 향후 3년동안 1백20억∼1백40억달 러의 재정수입이 전망됨) 【통화정책】 △자유변동환율제 지속 △물가를 40%로 억제하기 위해 순국내여신 증가율을 최대 23%로 억제(신용 대출한도를 1백억페소로 제한) △선물시장 개장 【금융정책】 △세계은행 지원 아래 감독과 규제를 통한 금융부문 강화(은행의 자기자본 비율 강화,부실여신 보전용 준비금 확대,외국은행의 국내은행 소유한도 철폐) △은행자산의 문제해결을 위해 새로운 금융수단인 투자단위(UDI)도입 △은행예금보험기금을 통해 은행의 부실채권을 채권으로 전환 【사회정책】 △95년 사회지출(농촌 프로그램 포함),재정지출 2% 증액 △실업자 의료보험 확대 △극빈층 실업자대상 공공사업 시행(SOC 건설사업을 통한 광범위한 농촌고용 계획 실시) △근로자 재교육 프로그램 실시(95년 한해동안 70만명의 근로자들에 대한 기술훈련비용 지급,해직근로자에 대한 최고 6개월까지의 의료보험과 양육 보조 조치 실시) △농업부문에 대한 지원확대
  • 인도 정국 갈수록 혼미/구즈랄 총리 사임따라 새 연정구성 불가피

    인도의 연립정부를 이끌고 있는 인데르 쿠마르 구즈랄 총리(78)가 28일 연정 제휴세력인 국민회의당이 연정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정부구성을 요구하자 전격 사임했다. 구즈랄 총리는 이날 14개 소수정당으로 구성된 연정의 제휴세력 가운데 하나인 국민회의당이 라지브 간디 전 총리 암살사건에 드라비다진보전선(DMK)이 지원했다는 혐의를 조사하지 않으면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경고하자 K.R.나라야난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으며 29일 새벽 수리됐다. 인도의 한 언론은 DMK가 지난 91년 9월 간디 전 총리를 암살한 타밀반군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는 보도를 했으며 국민회의당은 즉각 이를 조사하고 DMK를 연정에서 축출하라는 요구를 해왔었다. 이로써 인도정국은 총선이후 2년도 안돼 5번째 정부구성이 불가피해지는 등 여러가지 변수가 작용하면서 혼란이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일단은 나라야난 대통령이 새로운 연정이 구성되거나 총선이 실시되기까지 등의 일정시점까지 구즈랄 총리에게 계속 총리직을 맡아 달라고 해 구즈랄 총리는 당분간총리직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회의당은 구즈랄 총리가 사임을 한마당에 새로운 정부 구성을 요구할 가능성이 커보인다.아직 어느당도 조기총선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지금 연정에 참여한 연합전선 지도자들은 국민회의당이 포함되는 어떠한 정계 재편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바 있지만 국민회의당은 다른 일부 연합전선 참여 정당들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다.여기에는 타밀마닐라회의당,사마즈와디당,구즈랄 총리가 이끄는 자나타달당이나 최근 조직된 자나타달당 분파,텔레구 데삼당 등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인 나라야난 국민회의당 당수는 또 의회내 최대 야당인 힌두민족주의 계열인 바라티야 자나타당(BJP)에 정부를 구성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현재 인도 의회는 의석 545석 가운데 BJP가 163석,국민의회당 104석,그리고 15개 정당 연합전선이 177석 등을 나눠가지고 있어 어느 정파든 연정을 해야 하는 형국이다.
  • 인도연정 파국 위기/간디 암살 연루싸고 갈등

    【뉴델리 AP AFP 연합】 인도 연립정부가 26일 라지브 간디 전총리 암살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드라비다진보전선(DMK)을 연정에서 축출할 것인지에 관해 협상을 벌이자는 국민회의당의 완화된 요구마저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지난주부터 마비상태에 빠진 정국이 파국 직전의 위기상황에 처했다. 인데르 쿠마르 구즈랄 총리가 이끄는 연합전선의 S.자이팔 레디 대변인은 이날밤 3시간반에 걸친 장시간의 연정 지도층 회담후 “연정의 입장은 종전과 같이 확고하며 DMK를 국민회의당의 요구대로 연정에서 축출하지 않기로했다”고 발표했다.
  • 로마황제들의 눈물/라인하르트 라팔트 지음(화제의 책)

    ◎로마황제들의 업적·숨겨진 이야기 실어 카이사르의 암살과 더불어 후계자가 돼 로마의 통치권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도시국가의 질서와 평화를 회복시켰다.이어 제위는 티베리우스,네로,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를 거쳐 암살된 도미티아누스까지 이어진 후 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에 앉히면서 5현제 시대로 접어들었다.이 책은 로마황제들의 위대한 면모뿐 아니라 부정적인 이면상까지 여과없이 소개,읽는 재미를 더해준다.기원전 59년 공화정 로마 최고의 관직인 독재관의 자리에 오른 카이사르에서부터 363년 사산조 페르시아 정벌 출정중 부상을 당해 죽은 율리아누스 시대까지를 다뤘다.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평화시대를 연 위대한 황제였지만 자신이 제정한도덕률에 따라 간통한 딸 율리아를 처벌하고는 평생 회한속에서 살았다.스스로 경건한 신의 대리자로 행세했던 도미티아누스는 또 어떠한가.그는 형 티투스에 대한 시기심과 열등감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많은 사람들의원망의 대상이 됐다.마침내 그는 측근들과 황후의 손에 의해 무참히 암살됐다.시리아 출신 황제 헬리오가발루스는 태양신을 섬김으로써 뭔가 다른 종교적 구심력을 찾으려 했지만 한낱 해프닝으로 끝났다.이 책은 로마 역사 전반에 걸쳐 황제들의 가계도가 매우 특이하게 짜여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한 예로 네로 황제는 선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의 둘째 부인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의붓아들이면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된 경우다.이것은 로마에서는 아우렐리우스 황제 이전까지는 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똑똑한 젊은이를 양자로 삼아 황제자리를 물려주는 전통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김이섭 옮김 찬섬 7천500원.
  • 애 회교단체 “관광객 테러 계속”

    ◎알 지하드 “정부 맞서 과업 계속 수행” 위협 【카이로·도쿄 AFP AP 연합】 회교 무장단체 알 지하드는 다른 이슬람 과격단체의 공격으로 관광객 67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지 하룻만인 18일 이집트 관광객에 대한 후속 테러를 자행하겠다고 위협했다. 81년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을 암살했다고 자처하는 알 지하드는 한 서방통신사에 보낸 성명을 통해 “정부가 이슬람운동의 아들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한 무자헤딘도 자신들의 과업을 계속 수행할 것이므로 룩소르공격이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일본여행사들은 17일의 룩소르 테러사고로 일본인 10명이 사망하자 긴급히 이집트 여행 일정을 취소하거나 변경했다.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 일본총리는 이번 사고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에게도 위로 전문을 보냈다. 하시모토 총리는 전문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이같은 사태의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가미아 “테러 자행” 주장 【카이로 AP 연합 특약】 이집트의 회교무장단체 가미아 이슬라미아는 18일 외국관광객 58명의 목숨을 앗아간 룩소르 테러사건은 자신들이 저지른 것이라고 밝혔다. 가미아그룹은 이날 AP통신에 보낸 성명을 통해 “자신들은 본래 미국에 투옥돼 있는 지도자 오마르 압델 라만의 석방을 위해 이들 관광객들을 인질로 잡을 계획이었으나 이집트경찰이 관광객들과 민간인들의 목숨을 경시,총격전을 벌임으로써 많은 인명피해를 내게 했다”고 말했다.
  • 알 지하드·가미아 주축 10여개 활동/이슬람 무장단체 실태

    81년 사다트 대통령 암살사건에서부터 17일의 룩소르 관광객 테러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테러사건의 범인은 이슬람 과격주의단체들이다. 이집트내 25개의 이슬람정치조직 및 단체 가운데 정부전복을 목표로 한 급진과격운동단체는 10여개에 달하며 이집트를 근본주의 회교국가로 건설하려는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 ‘모자이크 형태로’ 분열상을 보이고 있는 이들 단체 가운데 테러수법과 세력면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것은 알 지하드(성전)와 가미아 이슬라미아(이슬람그룹)다.이슬람국가를 세우고 이슬람법을 집행하는 유일한 방법을 성전에서 찾는 지하드는 81년 사다트 대통령 암살 이후 몇차례 요인암살을 기도했으나 ‘근본적인 변화’의 포괄적 준비를 위해 단기 무장투쟁을 지양,최근엔 무장투쟁을 사실상 중단했다.반면 가미아는 90년대초 무바라크 대통령의 친서방정책에 정면대응을 선언,현재까지 거의 매년 발생한 테러를 주도함으로써 이집트정부로부터 이번 테러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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