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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산 암매장 부녀자 화성 실종자로 확인

    화성 부녀자 연쇄실종사건의 피해자 4명중 한 명이 피살된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경찰 수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 313번 지방도 인근 주민 상대 목격자 탐문수사경기지방경찰청 형사과는 10일 “지난 8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사사동 구반월사거리 인근 야산에서 암매장된 채 알몸으로 발견된 여성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DNA 대조 결과 화성 부녀자 연쇄실종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인 박모(36)씨로 최종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경찰은 암매장 장소 일대에서 대대적인 수색작업과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박씨는 목에 검정색 팬티 스타킹이 묶여 있는 점으로 미뤄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래방 도우미 박씨는 지난해 12월24일 오전 2시25분쯤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화성시장 김밥집 앞에서 목격된 뒤 실종됐다. 휴대전화 전원이 오전 4시25분쯤 화성시 비봉면 비봉IC 인근에서 끊겨 경찰이 공개수사에 착수했다. 암매장 지점은 313번 지방도에서 100여m 거리이며, 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비봉IC와는 직선거리로 7㎞ 떨어졌다. 경찰은 이에 따라 10개 중대 1000여명을 동원, 암매장 지점을 중심으로 313번 지방도 5∼6㎞ 구간에서 집중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다. 또 박씨의 휴대전화가 마지막으로 끊긴 비봉IC(비봉면 구포리)에서 암매장 지점으로 향할 수 있는 98번 지방도와 313번 지방도 등 도로에 설치된 폐쇄회로(CC) TV 5대에서 실종 당일 녹화기록을 발췌, 용의 차량을 쫓고 있다.●범인 안산·군포 거주자 추정 경찰은 이밖에 사사동과 313번 지방도 인근 주민과 공장 직원들을 상대로 목격자 탐문수사에 들어가는 한편 사사동의 이동통신 기지국을 통해 사건 당일 통화기록을 확보해 용의점이 있는 통화자를 분석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박씨의 시신이 발견됨에 따라 범인의 동선(動線·화성시 비봉면∼화송시 매송면∼안산시 사사동)이 확인돼 수사의 폭을 상당히 좁히게 됐다.”며 “범인이 인적이 드문 313번 지방도를 새벽 시간대에 이용한 것으로 미뤄 이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안산 암매장 여성 화성 연쇄실종자인 듯

    8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사사동 야산에서 암매장된 채 발견된 여성이 화성 부녀자 연쇄실종사건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됐다. 경기지방경찰청 형사과는 9일 “암매장 여성의 오른손 손가락 지문 3개를 채취해 대조한 결과 화성 부녀자 연쇄실종사건의 피해 여성 중 1명인 노래방 도우미 박모(37·수원시 화서동)씨의 것과 유사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국과수의 부검결과에서도 암매장된 여성은 25∼35세(치아 배열 및 마모도 분석)의 나이에 키 155∼160㎝, 몸무게 53㎏으로 추정돼 키 158㎝에 통통한 체격의 박씨와 흡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암매장 여성은 임신 경험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는데, 박씨도 자녀들을 두고 있다. 이 여성의 목에는 검정색 팬티 스타킹이 묶여 있어 경찰은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DNA대조 결과는 10일 오전 발표된다. 노래방 도우미 박씨는 지난해 12월24일 오전 2시25분쯤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김밥집 앞에서 목격된 뒤 실종돼 화성시 비봉면 비봉TG 인근(구포리 기지국)에서 휴대전화 전원이 끊겼다. 암매장된 장소는 안산시 사사동과 화성시 매송면을 잇는 306번 지방도에서 100여m 떨어진 지점이고 산길로 이어져 차량으로 이동하면 암매장이 용이하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또 박씨의 휴대전화 전원이 끊긴 비봉TG와는 직선거리로 5∼6㎞ 정도다. 나옥주 형사과장은 “암매장된 여성이 박씨일 가능성이 80% 정도” 라며 “박씨로 확인되면 해당 지역에 대해 굴착기와 수색견을 동원해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노래방 도우미 박씨 등 4명의 여성이 수원과 화성에서 잇따라 실종되자 이들이 범죄피해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1월9일 군포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차린 뒤 연인원 5만여명을 동원, 수사를 펼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단서와 제보는 없는 상태다.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혹시…경기 안산서 여성 시신 발견 화성 연쇄 살인 연관성 수사

    경기도 안산시 사사동 야산에서 암매장된 여성의 알몸 시신이 발견돼 경찰이 화성 부녀자 연쇄실종 사건과의 연관성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8일 “사사동 야산 정상 부근에서 간벌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오늘 오전 11시쯤 땅속에 파묻힌 여성의 알몸 시신을 발견했다.”면서 “다리 부위가 노출돼 인부들이 사람 시신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시신이 많이 훼손돼 육안으로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며 부패 정도로 미뤄 숨진 지 2개월 이상 지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은 “암매장된 여성의 키는 160∼164㎝로 연쇄실종사건 피해 여성들의 키(153∼158㎝)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안산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사회플러스] 제주 4·3희생자 유해 3구 발굴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군사재판을 거치지 않고 불법으로 처형된 군인들의 암매장 유해 3구가 추가 발굴됐다. 제주도로부터 4·3희생자 유해발굴 업무를 위탁받은 제주대학교와 사단법인 제주 4·3연구소는 21일 화북1동 4757의1 무너진 일본군 진지동굴 입구에서 유해 3구를 추가 발굴했다고 밝혔다.
  • 보험금노린 70대 ‘저승사자’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친구와 공모해 부인을 교통사고로 위장, 살해한 뒤 금품을 요구하는 친구마저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70대 노인이 사건발생 1년여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 해운대경찰서는 16일 중학교 동창생을 살해해 암매장한 혐의(살인 및 사체유기)로 손모(74)씨를 구속했다. 손씨는 지난해 1월 부산 연제구 거제동 자신의 집에서 중학교 동창생인 박모(70·택시기사)씨가 금품을 요구하는 등 괴롭힌다는 이유로 둔기로 살해한 뒤 시신을 부산 기장군 기장읍 한 야산아래 밭에 암매장했다. 그는 시신이 비에 떠내려갈 것을 우려해 암매장한 곳에 흙을 덮고 쇠막대기를 박는 등 범행후 여러 차례 암매장 현장을 찾았다. 손씨는 지난 11일 오후 쇠막대기를 박아 시체를 땅에 고정시키러 암매장 현장에 나갔다가 이를 목격한 밭주인(63)이 경찰에 신고, 탐문 수사끝에 붙잡혔다. 손씨는 부인이 숨진 뒤 교통상해보험금 2억여원과 택시공제조합으로부터 피해합의금 5000여만원을 받았다. 자녀(1남 4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전세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손씨는 젊었을 때 체신공무원과 외항선을 탔으며 한 때 목욕탕을 운영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씨는 경찰 진술에서 2005년 10월2일 부인 강모(당시 68세)씨와 함께 숨진 박씨가 운전하던 택시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가 나 부인이 숨졌고 이 사고로 박씨가 과실치사로 구속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박씨가 출소한 뒤 면회 한번 오지 않았다며 수시로 금품을 요구해 소개받은 30대 중반의 남자에게 300만원을 주고 청부살인을 의뢰했다.”며 친구와 부인을 살해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손씨가 중학교 동창생인 박씨와 공모해 부인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숨지게 한 뒤 보험금을 타내고, 공범인 박씨의 입을 막기 위해 추가 살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어린 소녀 성폭행·살인범 8년만에 자수 왜?

    어린 소녀를 겁탈하고 산채로 파묻어 죽인 뒤 도망다닌 천하의 몹쓸 놈이 갑작스레 자수를 한 까닭은? 중국 대륙에 한 30대 남성이 나이 어린 소녀를 성폭행한 뒤 멸구(滅口)를 하기 위해 암매장한 뒤 수년동안 도망다니다 자수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경악케 하고 있다. 2일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에 따르면 한 30대 남성은 8년전 5살된 어린 소녀를 성폭행을 자행한 것도 모자라 입을 막기 위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를 구덩이에 파묻어 살해한 다음,중국 남부 지방을 전전하며 도망다니다 8년여가 지난 2월14일 공안당국에 자수했다. 이같이 잔인무도한 사건의 장본인은 쉬톈구이(徐天貴·30).지난 1975년 중국 남서부 윈난(雲南)성 화닝(華寧)현 닝저우(寧州)진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키 1m70㎝에 약간 홀쭉한 몸매인 쉬는 인물이 개자한 덕분에 첫인상이 깔끔해 많은 여성들로부터 ‘호감형’이라는 말을 들어왔다.그러나 해사한 모색과는 달리 행동은 완전히 개차반이다. 사건 발생은 99년 3월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23살로 혈기방장한 쉬는 윈난성 화닝현 닝저우진 시산(西山)촌의 자기 집에서 핀둥거리는 것이 지겨워 무슨 좋은 일이 없을까하고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이때 이제 겨우 5살된 소녀 리아이메이(李愛妹·가명)양을 만난 순간 쉬는 갑자기 샅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아 자제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충동을 느꼈다.주위를 휙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먹이를 낚아채려는 하이에나처럼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쉬는 리양에게 돈을 내보이며 “맛있는 과자를 사주겠다.”고 꾀어 그녀를 데리고 산속 깊은 곳으로 갔다.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는 아무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잡기까지 했다.산속 수풀이 울창한 곳에 들어간 쉬는 다시 한번 주위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갑자기 한 마리의 야수로 돌변,성폭행을 무람없이 자행했다. 이때 리양이 크게 울며 소리치자 그는 어린 소녀를 마구 때리며 “집에가서 부모님께 말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욱대겼다.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멸구하기 위해 조그마한 구덩이를 판 뒤 어린 소녀를 그대로 묻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쉬는 그러나 리양이 자꾸 생각나 불안하고 무서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해서 이튿날 간단한 행탁을 꾸려 멀리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갔다. 사건 발생이 3일 후 공안당국은 리양의 실종신고를 받고 수사에 착수했다.곧 쉬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한 공안당국은 사건이 너무 잔인하고 흉포한 탓에 고대 전국 곳곳에 쉬의 체포령을 내렸다. 쉬는 중국 남부 지역을 발섭하며 요리조리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남부 하이난다오(海南島)로 도망한 그는 뜬벌이 생활을 하며 숨어지냈다.3개월쯤 지나 고향 윈난성 화닝현 친구를 만난 쉬는 자시의 범죄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광둥(廣東)성으로 달아났다.이렇게 도망다니기를 무려 8년여…. 8년이 지나자,더이상 도망갈 곳을 찾기가 어려워졌다.공안당국의 수사망이 시시각각 자신을 조여오는 것 같았고 고향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도 들킬까봐 일절 연락을 하지 못했다.특히 매번 춘제(春節·설날)연휴가 되면 고향과 가족이 너무너무 그리워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그러던중 춘제를 나흘 앞둔 지난달 14일,쉬는 ‘용감하게’ 하이난성 둔창(屯昌)현 공안 당국에 전화를 걸었다.“나는 살인범입니다.자수를 하려고 합니다.8년전 5살 소녀를 죽인 나쁜 놈입니다.현재 둔창 농마오(農貿)센터 시먼(西門)앞에 있습니다.” 둔창현 공안당국은 곧바로 기동대를 보내 현장서 그를 체포했다.쉬는 “자수를 하는데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을 한 뒤 결정했다.”며 “막상 자수를 하고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고 고개를 떨궜다. 현재 그는 고향인 윈난성 화닝현으로 돌아왔으나 따뜻한 고향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차디찬 철창 속에 수감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이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탈북 前아이스하키 대표선수 남편에 피살 암매장

    북한 출신의 전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가 남편에게 살해돼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광주 동부경찰서는 26일 탈북자 출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살인 등)로 김모(37)씨를 붙잡아 조사를 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3일 새벽 4시쯤 광주 광산구 신가동 자신의 집에서 아내인 이모(27)씨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극락강 주변에 암매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아내 이씨가 술집에 일하러 다니면서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이날 다투다가 이씨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5일 동안 시체를 벽장에 뒀다가 지난 18일 새벽 1시쯤 여행용 가방에 담아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25일 경찰에 자수,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살해된 이씨는 2004년 7월 한국에 입국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담력 키우려” 살인한 어이없는 엽기 10대들

    “아니 이럴수가! 겨우 그같은 이유 때문에 고귀한 인간의 생명을 무참히 빼앗아버리다니” 중국 대륙에 10대 후반의 소년들이 에멜무지로 택시 운전사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어처구니 없는 강력 범죄사건이 발생,충격을 주고 있다. 화서도시보(華西都市報)는 중부 쓰촨(四川)성 다주(大竹)현 공안 당국이 지난 10월3일 발생한 택시 운전기사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잡고보니 10대 소년 2명이었는데,이들 용의자가 운전기사를 잔인하게 살인한 이유가 단지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진술하는 바람에 인명 경시풍조의 만연에 충격을 받았다고 27일 보도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강력사건의 용의자는 10대 후반의 고등학교 2년생 펑화(馮華·가명)과 백수건달 펑빈(馮賓·가명) 등 2명.‘재미삼아’ 학교에 다니는 펑화가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건달 펑빈과 통을 짜고 시내 곳곳을 쏘아다니며 온갖 나쁜 짓만 저지르는 ‘인간 쓰레기’들이다. 살인 사건은 지난 10월 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국경절(國慶節) 연휴기간(1∼7일)이어서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생활의 피로를 풀기 위해 여행을 떠날 때였지만,‘집에서 내놓은 자식들’인 이들은 할일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머니 속에 샐닢 한푼도 남아 있지 않은 적수광권이어서,즐거운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로부터 상대적 박탈감만 느끼며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이들 두 사람은 유흥비를 마련,재미있게 즐기기 위해 크게 한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이날 저녁 펑화와 펑빈 두사람은 현금을 비교적 많이 갖고 다니는 택시 운전사를 타겟으로 삼았다.해서 무작정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탄 이들은 한탕하기 쉬운 한적한 시외곽으로 가자고 말했다.2㎞쯤 갔을 때 택시의 뒷좌석에 있던 이들은 갑자기 강도로 돌변,돈을 내놓으라고 운전사를 욱대겼다. 당시 운전기사가 갖고 있던 780위안(약 9만 3600원)을 턴 이들은 또다른 생각이 떠올랐다.어차피 살려두면 신고를 해 철창신세를 지는 후환이 있을 수 있고,앞으로 ‘큰 일’을 하려면 이 참에 담력을 키워야 된다고 판단해 택시 운전기사를 살해해 내다버리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됐음을 확인한 순간,곧바로 실행해 옮겨 운전기사를 잔인하게 살해한 뒤 실체를 인근 야산으로 싣고 가 그대로 암매장해버렸다. 하지만 이들의 ‘시체처리 솜씨’가 별로 좋지 않았던지,다음날 오전 9시쯤 밭일을 나가던 농부가 이를 발견해 공안(경찰)당국에 신고하는 바람에 이들은 공개수배당하는 처지가 됐다. 수배된지 3개월여가 지난 이달 18일,펑화는 학교에서 붙잡히고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둥관(東莞)시로 달아났던 펑빈도 연락받은 현지 공안에 덜미를 잡혔다. 공안 당국의 조사결과 이들은 처음에는 택시 운전사를 죽이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후환도 두렵고 ‘앞으로 큰 일을 하려면 담이 커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담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일부러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해 문초하던 공안을 경악케 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세상에 이 X보다 더 나쁜 XX는 있을 수 없다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친딸을 성폭행하고…” 중국 대륙에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친딸을 성폭행하는 희대의 나쁜 XX가 등장,경악케 하고 있다. 중국 안휘상보(安徽商報)는 친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피소된 30대 중반의 범인이 15년전 자신의 아버지를 때려죽인 사실까지 있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이 희대의 악한(惡漢)은 중국 중동부 안후이(安徽)성 제서우(界首)시에 사는 올해 36살의 가오(高)모.몇년 전까지 상하이(上海)등 대도시로 나가 뜬벌이 생활을 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고향인 제서우로 돌아와 아내 리(李)모씨가 매달 타는 보조금으로 근근히 생활하는 백수건달이다. 이처럼 가장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 쓰레기’가오는 지난해부터 자신의 열등감을 이상한 방향으로 풀기 시작했다.남도 아닌 자신이 낳은 친딸에게 마수를 뻗치는 희대의 나쁜 X로 변한 것이다. 지난해 9월 20일,가오의 아내 리씨는 낮에 힘든 농삿일이 시달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잠을 자다가 밤 11시 쯤 요기(尿氣)를 느껴 깨어났다.무심코 화장실로 가던 도중 남편이 딸의 방을 기웃거리며 안절부절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왜 그러냐?”며 묻자 남편 가오는 “아,그냥,어서 볼일보고 잠이나 자.”라고 말하며 애써 얼버무렸다.이를 수상히 여긴 리씨는 그 이튿날 딸을 불러 어젯밤 일을 얘기하며 집중적으로 따졌다.하지만 딸은 도무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욱대기고 달래는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 겨우 딸의 입을 열었다.그런데 딸이 입을 여는 순간 리씨는 완전히 기절을 하고 말았다.아버지가 여러차례 자신을 성폭행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것이다. 한동안 까무라쳤다가 깨어난 리씨는 고대 제서우시 공안국으로 달려가 남편을 고발했다.그런데 공안국에서 조사받던 남편 가오는 15년전 자신의 아버지를 무참히 살해한 범인인 것으로 밝혀져 그녀는 또다시 억장이 무너져 기절하고 말았다. 당시 가오는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돈도 못벌면서 자신과 어머니에게 욕을 하며 때리는 아버지가 너무나 미웠다.그와 그의 어머니 가슴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켜켜이 쌓여 갔다.그러던중 1991년 3월 14일밤,그의 아버지가 술을 억병으로 취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방에서 곯아떨어졌다. 그때 방에서 핀둥거리던 가오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득달 같이 달려가 통잠을 자고 있던 아버지를 발견했다.곧바로 방을 나오는 그는 각목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무차별 난타,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이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시체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암매장해버렸다. 안후이성 푸양(阜陽)시 중급인민법원은 최근 가오에게 살인죄와 성폭행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딸을 성폭행하고 때려죽인 게 아버지? 악마?

    “친딸을 성폭행하고 때려죽여 암매장한 아버지를 어떻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중국 동북부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시 루위안(綠園)구에서 살고 있는 왕잉(王英·여)씨는 평생 씻을 수 없는 크나큰 한을 오롯이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남편이 친딸을 성폭행하고 그것도 모자라,무려 6시간 동안 몽둥이·전선줄·경운기 삼각대 등으로 마구 때려 죽인 뒤 암매장하는 것을 보고도 겁이 나서 수수방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겁을 내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겁도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없어지게 마련이다.딸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도 말 못하던 그녀는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하루내내 고민하던 왕씨가 남편을 체포하라고 경찰에 신고했다.천인공노한 만행 사건의 전모는 이렇게 해서 드러났다. 지난 7월 25일 오후 6시쯤,왕씨는 루위안구 공안분국에 남편 류창(劉强)이 작은 딸 훙훙(紅紅·가명)을 성폭행한 뒤 때려죽여 암매장한 혐의로 체포하라고 신고했다고 성시만보(城市晩報)가 최근 보도했다. 왕씨에 따르면 훙훙양은 15살 밖에 안된 꿈많은 소녀였다.하지만 그녀는 친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해 아이를 임신하는 바람에 강제로 낙태수술을 받았고,결국에는 아버지 손에 맞아죽은 뒤 암매장까지 당했다. 그녀의 불행한 사건은 지난 7월 24일 오후 발생했다.남편 류가 집에 돌아온 뒤 왕씨에게 “훙훙이 남자친구와 손잡고 다니는 것을 봤다.”며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겠다.”고 분을 삭이지 못하며 식식거렸다.오후 5시쯤,훙훙양이 돌아오자마자,류는 몽둥이로 딸을 사정없이 두둘겨 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몽둥이가 부러지자 경운기의 삼각대로 마구 때렸다.훙훙양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삼각대를 손으로 잡자,궐자는 전선줄을 가지고 와서 또 때렸다.훙훙양이 도망다니자,이번에는 칼을 들고 와 다리·등짝 등을 가리지 않고 찔렀다. 이것도 모자라,류는 또다시 삼각대로 두둘겨 팼다.왕씨는 더이상 두고볼 수가 없었지만 제지하지도 못했다.큰딸 화화(花花·가명)와 함께 집을 나와버렸다.너무나 겁을 먹어서…. 류는 딸이 “살려달라.”는 애원소리도 무시하고 얼굴 등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리고 발로 차고,짓밟았다.이렇게 하기를 무려 6시간.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계속됐으니,어떻게 사람이 살아 날 수가 있겠는가? 25일 아침,훙훙양은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 아프다고 소리쳤으나 아무도 와서 보지 않았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훙훙양은 끝내 한 많은 이승을 떠났다. 훙훙양이 죽은 것을 확인한 류와 왕씨는 그녀의 시신에 옷을 새로 갈아입힌 뒤 뒷산으로 메고 가서 암매장해버렸다.왕씨는 그때까지 류를 말리기는 커녕 한마디 말도 못하고 눈 뜨고 지켜보기만 했다.류가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한 까닭이다. 그러나 왕씨는 결국 경찰에 신고했다.하루종일 죄책감에 시달린 왕씨는 오후 6시쯤 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겁이 없어졌다.딸을 죽인 것만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인데,살인자를 더이상 그대로 두고볼 수만 없었다.그리고 조용히 떨리는 손으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남긴 밥 탓에…” 저승길에 오른 소년의 사연

    “아무리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도 체면이 좀 깎인 것 가지고 때려죽이기까지 하다니!” 중국 대륙에 한 초등학생이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학교 선생님의 남긴 밥을 몰래 먹었다가 열명길에 오르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벌어져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중국 중북부 간쑤(甘肅)성 징위안(靖遠)현 류촨(劉川)향에 살고 있는 한 초등학교 소년은 선생님이 남긴 대궁밥을 몰래 훔쳐먹다가 난장을 맞아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난주신보(蘭州晨報)가 최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소년을 때려죽인 장본인은 다름아닌 계모인 자오(趙)모고,불행히 사망한 당사자는 초등학교 5학년인 12살의 장둥둥(張東東)군. 사건은 지난해 11월 30일로 거슬러 올라간다.둥둥군은 이날 오후 수업을 마친 뒤 우연히 선생님의 사택 앞을 지나가다 선생님이 먹다남긴 대궁밥을 보는 순간,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허겁지겁 집어 먹었다.이 모습을 보고 화가 난 선생님은 둥둥군의 집으로 가 의붓어머니 자오를 만나 대궁을 훔쳐 먹은 사실을 털어놨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자오는 둥둥군 탓에 그녀의 체면이 깎였다며 둥둥군에게 몽둥이로 머리 등 온 몸에 난장질을 했다.이 때문에 둥둥군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 온몸이 피로 흠뻑 물들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오는 한참이나 더 두들겨 팬 뒤에야 화가 풀렸는지 멈췄다.병원에 갈 생각을 조차하지 않은 그녀는 단지 둥둥군의 피흘린 상처에 형식적으로 연고만 발라줬을 뿐,그대로 방치했다.이미 둥둥군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음날 점심때가 돼도 둥둥군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덜컥 겁이 난 자오는 곧바로 외지에 나가 돈을 벌고 있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후 6시쯤 전화를 받고 달려온 아버지 장씨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둥둥군을 안고 곧장 인근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 둥둥군은 이미 저승길로 떠난 뒤였다.이에 겁이 난 자오는 남편에게 어젯밤 둥둥군이 화장실에 갔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이런 변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했다.그녀는 남편과 함께 둥둥군의 시체를 산으로 끌고가 불에 태운 뒤 암매장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아버지 장씨는 둥둥군이 죽은 만큼 공안(경찰)에 신고했다.신고를 받고 도착한 공안당국은 현장조사를 실시했다.이상했다.둥둥군이 화장실에서 넘어져 다쳤다고 보기에는 뭔가 미심쩍었다. 며칠 뒤 법의학자의 검시결과가 나왔다.하지만 전문가도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지 못했다.공안당국은 DNA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검사결과 둥둥군의 DNA와 자오의 몸에 뭍은 피의 DNA가 일치했다. 자오에게 의혹을 품고 있던 공안당국은 그녀를 불러 사건 일체를 자백받고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공안 조사결과 전처와의 사이에 둥둥군을 두고 있는 장씨는 이미 아이 두명이 있는 자오와 결혼했다.뜬벌이인 장씨는 돈을 벌기 위해 외지에 나가 돈을 벌어 부치고 자오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냉혹하고 악랄한 자오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둥둥군에게 욕을 하고 때리는 것은 다반사고,제대로 먹이지를 않아 둥둥군은 항상 배가 고픈 상태였다.이러다 보니 둥둥군은 선생님이 남긴 대궁을 보고 참지 못해 몇 숟가락을 먹다가 결국 저승길로 떠난 것이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막가는 ‘악플러’ 고삐가 없다

    지난 15일 국내 최대 포털인 네이버에 한 50대 남성이 귀갓길 여고생을 강간한 뒤 살인·암매장했다는 기사가 뉴스사이트 첫머리에 올랐다. 경악할 만한 반인륜적 사건이었는데도 지역감정을 조장하거나 피해자를 욕하는 어처구니없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강제로 하니까 그랬지…ㅉㅉ. 돈 줘가면서 살살 꼬셨으면 저랬겠어?(아이디 a모)’‘저놈 부럽네…. 아 나도 어떻게 한번?(n모)’‘얼마나 못생겼기에 그 놈 차에 탔지?(r모)’‘남자가 여자를 원했고, 그것은 음양의 이치와 같죠.(b모)’‘이게 다 전라도사람들 때문임(b모)’●지역감정 조장·악의적 인신 모욕도 하루 수십∼수백만명이 보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상식 이하의 악플(악의적 댓글)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지만 포털과 정부가 미온적인 대처로 문제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신고제도’를 도입했지만 신고 뒤에도 방치되고 처리 기준도 들쭉날쭉해 네티즌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 실제로 기자가 직접 ‘얼마나 못생겼으면 그놈 차에 탔냐.’는 등 피해자를 모욕하는 내용을 두 차례에 걸쳐 올린 아이디 r모를 신고했지만 12시간 동안 아무 변화가 없었다. 네이버는 “운영원칙에 어긋나는 댓글이라면 모니터링단의 신고가 들어오는 즉시 삭제한다.”고 주장했다. 네이버의 운영원칙에는 ‘타인을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글’은 삭제한다고 나와 있다. 미디어 다음도 사정은 비슷하다. 다음은 ‘개인정보 유포로 명예훼손 및 초상권을 침해하는 내용’을 올리면 삭제와 함께 아이디의 제한, 정지, 박탈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 글을 올릴 수 있어 유명무실하다. 정부는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보통신부 산하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불법 정보를 발견하거나 신고가 들어오면 그때그때 사업자에게 조치 명령을 내릴 뿐 운영 제도는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최근 국회에서 ‘인터넷실명제법안’이 발의됐지만 실효성은 미지수다. 네이버의 경우 로그인 때 실명을 확인하고 글쓴이의 블로그를 공개하는 ‘반실명제’가 실시되고 있지만 문제는 여전하다.●일관성있는 리플 관리기준 마련해야 전문가들은 인터넷 게시판에 일관성있는 관리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민경배(경희사이버대 교수)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보인권위원은 “악플 판단 기준이 제각각이어서 합리적인 게시판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부와 포털사업자들이 함께 게시판 운영 기준 및 리플 관리기준을 마련해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털이 ‘인기를 위해 악플러를 방치한다.’는 비난을 피하려면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안진걸 희망제작소 연구원은 “포털측에서 네티즌들에게 악플의 불법성과 폐해를 ‘안내’ 수준에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문제가 심각해진 만큼 담배 경고문구처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겨우 7살밖에 안된 어린소녀가 뭘 안다고…”

    “성폭행·살해·암매장….아무리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고 말다툼을 했다고 하더라도 겨우 7살짜리 소녀에게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중국 대륙에 사소한 일로 말다툼한 상대방의 손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시체까지 암매장하는 천인공노할 흉악범이 붙잡혀 충격을 주고 있다. 중국 동북부 랴오닝(遼寧)성 번시(本溪)시 번시 만족(滿族)자치현에 살고 있는 한 30대 남성은 함께 술을 잔뜩 먹고 말다툼을 벌인 숫막 주인의 손녀를 성폭행한 뒤 살해한 다음 시체를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렸다가 붙잡혀 주변 사람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고 시대상보(時代商報)가 4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잔인·악랄한 사건의 장본인은 피해자의 인근 마을에 사는 허(何·30)모씨.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동네 숫막 주인의 손녀를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살해한 뒤 시체를 암매장까지 하는 등 인간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사건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비롯됐다.같이 술을 먹다가 취중에 말다툼한데 대해 앙심을 품고 화풀이 대상으로 이같이 일을 저지른 까닭이다. 지난 1일 오후 2시20분쯤,허씨는 런(任)모씨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숫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혼자 마시는 것이 심심했던지,주인 런씨를 불러 함께 술을 들이켰다. 인근 마을에 사는 지라,서로 잘알고 있는 처지였지만 이들 두 사람은 그러나 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지난 2월 17일 두사람은 시비가 붙어 서로 치고받아 허씨가 다쳐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로 다쳐 감정이 나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허씨는 이날 주인 런씨와 같이 기분좋게 술을 좀 마시는가 싶었더니 잔이 오가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또다시 말다툼이 일어났다.화가 잔뜩 나 숫막을 나선 위인은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우연히 숫막 주인의 7살짜리 손녀 런모양을 만났다. 그녀를 보자마자,허씨는 숫막 주인의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떠오르며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그때는 단순히 숫막 주인 런씨에게 복수해야 겠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래서 위인은 런양을 슬슬 구슬려 옥수수밭 속으로 끌고가 성폭행을 자행한 뒤 목졸라 살해하고 옥수수밭에 구덩이를 판 다음 묻어버렸다. 마을에 놀러나간 런양이 점심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그녀의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다.1일 오후 4시쯤,그녀의 집안은 동네 주민들에게 런양이 실종됐다며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다음날인 2일 11시쯤,한 이웃 주민이 런양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옥수수 밭을 지나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구덩이에 있던 그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런양의 부모는 득달같이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는 한편 공안(경찰)에 신고했다.공안은 하루가 지난 3일 오후 3시30분쯤 유력한 용의자 허씨를 붙잡았다.허씨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죽였다고 자백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부녀자 연쇄살인범 2명 붙잡아

    최근 2주 동안 여성 3명을 납치,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한 연쇄 살인범이 경찰에 붙잡혔다. 전주 덕진경찰서와 강원 춘천경찰서는 8일 강원도 춘천시와 광주 등지에서 귀가 중인 부녀자 3명을 납치 살해한 김모(39·전북 전주시)씨와 조모(30·강원 춘천시)씨를 붙잡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청송교도소 동기인 이들은 지난달 21일 오후 4시50분쯤 춘천시 서면 서상리 한 불한증막에서 나와 승용차를 타고 가던 주부 김모(43·강원 춘천시)씨와 곽모(46·강원 춘천시)씨를 승합차로 가로막고 납치했다. 이어 각각 300만원과 90만원을 빼앗은 뒤 옷을 벗기고 목졸라 살해한 후 춘천시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다. 또 지난 3일에는 광주 서구 치평동 리오테라페 호프집 여주인 김모(51)씨를 살해, 남자화장실에 버리고 도주했다. 이들은 20대 피해여성 박모(29·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씨의 침착한 대응으로 꼬리가 잡혔다. 박씨는 지난달 29일 0시10분쯤 전북 임실군 운암면 하운암대교 부근에서 승용차를 몰고 가다 이들에게 납치됐다. 박씨는 편의점에서 “돈을 빼오라.”는 범인들의 요구에 현금지급기에서 소액으로 돈을 인출하며 30여분간 시간을 끌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본 뒤 주변사람에게 도움을 요청, 탈출했다. 경찰은 피해자 박씨가 봉고차 번호 가운데 3개를 기억해낸 것을 토대로 추적작업을 벌여 지난 6일 김씨를 경기도 수원에서 검거했고, 이어 8일 조씨를 강원도 춘천에서 붙잡았다.전주 임송학·강원 조한종기자 shlim@seoul.co.kr
  • 獨법원,10년간 신생아 9명 암매장 엄마 징역 15년형

    자신이 낳은 신생아 9명을 숨지게 한 뒤 시신을 암매장한 독일인 여성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법원은 1일(현지시간) 옛 동독 지역인 브란덴부르크주에 사는 사빈 힐셴츠(40)에게 살인과 시체유기 혐의로 징역 최고형인 15년형을 선고했다고 영국 BBC가 보도했다. 피고가 알코올 중독이란 이유로 고의살인이 아닌 단순살인죄를 적용했다. 신생아 1명에 대해선 공소시효가 지났다. 앞서 독일 경찰은 지난해 8월 사빈 부모의 집 정원에서 신생아 시체 9구를 찾아냈다. 당시 시체들은 어항이나 꽃병 등에 담겨져 있었으며, 한 이웃이 이 집의 창고를 치우다가 사람의 뼈를 발견하면서 꼬리가 잡혔다. 경찰은 유전자(DNA) 검사 결과 사빈과 그녀의 전 남편 올리버 힐셴츠의 자식이 분명하며,1988년부터 10년여에 걸쳐 차례로 암매장됐다고 밝혔다. 부부에겐 현재 3명의 자녀가 있다. 사빈은 경찰에 “종교적 이유로 피임을 못했으나 남편은 네 번째 아기를 원치 않았다.”면서 “이 아기는 변기에서 낳다 익사했고 그 이후의 아기들은 술에 너무 취해 출산과정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기들을 해치지는 않았으며 태어난 뒤 그냥 내버려뒀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일제 한센인핍박 치떨려 광복후에도 편견 여전해”

    “일제 한센인핍박 치떨려 광복후에도 편견 여전해”

    “사람 대접도 못 받던 우리를 위해 시대가 나섰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세요.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지난 24일 오후 한센인 요양시설인 경북 안동시 성자원 성당. 인근 칠곡농장과 삼애농원(김천) 등지에서 온 한센인 5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이크를 쥔 한센인 인권단체 ‘한빛복지협회’ 임두성 회장의 목소리가 본당 내부를 울렸다. 이들은 1917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에 의해 소록도에 강제로 수용됐던 사람들. 이날 자리는 앞으로 이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할 한센인 2차 보상소송을 설명하기 위해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주관으로 마련됐다. ●“이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맞아, 저기가 감금실이었어. 겨울에 저기 갇혔다가 죽은 사람들이 많았지.” 납골당·중앙공원 등 소록도를 담은 영상이 방영되자 곳곳에서 아픈 기억이 탄성으로 터져나왔다. 지난해 10월25일 한센인 117명은 일제의 소록도 격리수용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일본 정부에 첫 소송을 냈다. 일본 정부가 2001년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과거에 강제수용됐던 자국 한센인에게는 보상을 했지만 소록도 피해자들에게는 보상을 거부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 선고재판이 정확히 1년 만인 다음 달 25일 열린다. ●소록도 삶 증명해야…1차소송보다 힘겨울 듯 지난해 1차 소송의 원고는 광복 후에도 계속 소록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 곧 제기될 2차 소송의 원고는 광복 후 소록도를 떠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아온 280여명이다. 변협은 소송 원고인단 모집을 위해 이날 성자원과 익산농원(전북 익산)을 시작으로 주말마다 전국 순회설명회를 연다. 익산농원에서도 첫날 78명에 대한 상담이 마무리됐다. 변협은 다음 달 17일까지 소송준비를 마칠 계획이다. 2차 소송은 피해자들이 일제 강점기에 소록도에 수용됐던 사실을 증명할 만한 문서가 거의 없어 1차 때보다 더 힘겨운 싸움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음지에 숨어살던 한센인들은 소송을 통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자체로 기쁘다고 한다. 한빛복지협회 임 회장은 “세월과 고통 앞에 노쇠해진 한센인들이 소송을 내면서 더욱 건강해졌다.”면서 “이번 소송이 한센인에 대한 편견과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변호인단 단장을 맡은 박영립 변호사는 “1차 소송 선고와 2차 소송 제기는 시작에 불과하다.”면서 “일본 정부에 대한 소송에 이어 국내 한센인 인권침해에 대한 실태조사 등을 통해 보상특별법 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록도 나와서도 힘겨운 삶…관심 광복 이후까지 이어져야 1차 소송으로 사회적 관심이 모아지면서 한센인들은 한층 자신감을 얻었다. 피하고 숨어만 지내던 이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삼애농장에서 살고 있는 박모(81)씨가 대표적이다. 23세에 손톱과 눈썹이 빠지면서 한센병 발병 사실을 알게 된 박씨는 경찰서 창고에 3일간 갇혀 있다 소록도로 갔다. 광복이 되면서 고향인 경북 김천으로 돌아왔지만 이웃의 횡포에 다시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마을 외곽까지 쫓아와 다른 곳으로 가버리라며 천막에 불을 지르고 폭력을 가하던 동네사람들을 피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군수에게 청원해 국유지에 겨우 터를 잡았다. 하지만 ‘정상인’들의 마을에서 아이라도 한명 없어지면 마을에는 어김없이 경찰이 닥쳤다. 한센병 환자가 아이들을 잡아먹고 묻었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박씨는 “그때도 우리 마을엔 한센병을 겪은 병력자만 있었을 뿐 환자는 없었다.”면서 “말문이 막힌 우리에게 경찰은 ‘신고가 들어왔으니 수색 안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경상도 지역 한센인들에게 1991년의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남모르는 상처로 남아 있다. 소년들을 납치해 약으로 쓰고 암매장한 것으로 지목된 칠곡농원은 공권력과 언론에 의해 마구 헤집어졌다. 박씨는 “이제라도 우리의 무죄가 밝혀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글 사진 안동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지리산 방사 반달곰 1마리 올무에 비명횡사

    지리산 방사 반달곰 1마리 올무에 비명횡사

    지리산에 풀어 놓은 천연기념물(329호)인 반달가슴곰 13마리 가운데 한마리인 ‘랑림32호’가 한 농부가 놓은 덫에 걸려 죽은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4월 北서 들여온 ‘랑림32호´ 지리산 자락에서 밤나무 농사를 짓는 양모(58·경남 하동군 화개면)씨는 자신의 밤나무 농장에 둔 벌통 6통이 뒤집어지고 꿀이 사라지자 멧돼지 등 야생동물의 소행으로 간주했다. 지난해 이 맘때도 벌통이 난장판이 되는 등 피해를 봤다. 그래서 지난해 9월 양씨는 밤나무 농장 안에 철사로 만든 올무 3개를 설치했다. 양씨는 지난 7일 놀라 기절할 뻔했다. 시커먼 동물이 자신이 쳐놓은 올무에 걸려 죽어 있었다. 멧돼지인 줄 알고 갔으나 텔레비전으로 보던 반달가슴곰이었다. 두렵던 양씨는 처벌이 무서워 농장에서 500m쯤 떨어진 화개면 범왕리 먹통골 쪽으로 사체를 옮긴 뒤 대충 흙을 파고 묻은 뒤 솔가지 등으로 덮어 버렸다. ●올무 설치 농부가 암매장 국립공원관리공단 반달가슴곰 관리팀은 지난 7일부터 ‘랑림32호’에 부착해 둔 발신추적장치에서 이상 신호음을 포착했다.‘랑림’이 활동할 때는 신호음이 분당 40번이 수신되지만 분당 20번만 잡혔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관리팀은 경찰과 함께 곰 추적에 나서 7일 만인 지난 14일 곰의 사체를 먹통골에서 발견했다. 이 반달가슴곰은 지난 4월14일 북한에서 들여온 8마리 가운데 한마리로,1년 6개월 된 암컷이다. 당시 몸무게는 56㎏에 달했으며 7월2일 지리산 남부자락인 화엄사 계곡에 방사됐다. 관리팀 관계자는 “양봉은 고열량인데다 손쉽게 먹이를 찾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곰이 특히 좋아한다.”며 “요즘처럼 산에 열매가 익기 전에는 먹이가 부족해서인지 양봉 농가의 야생조수 피해 신고도 10건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양씨가 곰의 웅담을 가져갔다면 야생동식물 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겠지만 단지 농작물 피해 예방차원에서 올무를 설치했다면 처벌에 어려움이 있어 검찰 지휘를 받을 계획이다. 구례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서울광장] 드라마 ‘제5공화국’과 5·18/이용원 논설위원

    [서울광장] 드라마 ‘제5공화국’과 5·18/이용원 논설위원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봉 세례에 거꾸러지는 학생·시민들과 그 위로 다시 쏟아지는 발길질, 교련복 입은 대학생의 복부로 찔러들어가는 총검…. 지난 토·일요일 MBC드라마 ‘제5공화국’을 본 시청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봉 세례에 거꾸러지는 학생·시민들과 그 위로 다시 쏟아지는 발길질, 피투성이 몸에 팬티만 걸친 채 줄줄이 연행되는 청년들, 그리고 교련복 입은 대학생의 복부로 찔러들어가는 총검…. 1980년 5월18∼19일 전남대 앞과 금남로 등 광주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잔악한 폭력이 화면에 그대로 살아나고 있었다. 곁에서 함께 TV를 보던 딸아이가 아빠, 저 군인들 왜 저러는 거야? 어떻게 저런 일이 있어? 라고 물었지만 목이 메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만 그래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그것도 불과 25년전 우리땅 한쪽에서. 저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제 너희는 저 말도 안 되는 폭력과 결별한 새 세상에서 마음놓고 살아가는 거야 라고 되뇔 뿐이었다. ‘5·18민중항쟁’의 실상이 우리사회에 두루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중반쯤이다. 금서임에도 불구하고 알음알음 전파되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황석영 엮음)이 출간된 때가 1985년 5월이었다. 또 외국 언론과 외국인 선교사가 찍었다는 다큐멘터리 필름 몇 종류가 은밀히 떠돈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후 민주화를 이루면서 ‘5월 광주’에 관한 각종 증언·기록이 쏟아져 나왔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에 대한 내란죄 재판도 열렸다.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를 밝혀야 하는 등 몇가지 과제가 남기는 했지만 ‘5·18’의 진상은 이제 대부분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지난주 방영한 ‘제5공화국’의 ‘5·18 민중항쟁’편 1·2부가 그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걸 보면 국민 대다수는 그동안 그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만 했을 뿐 정확히 몰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제5공화국’은 ‘5·18’에 관한 최초의 대중적 보고서라 감히 평가할 만하다. 드라마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시위진압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는 한편으로,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가 정권장악의 수단으로써 이 상황을 이용하려고 음모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아울러 광주시민이건 공수부대원이건, 이름 없는 백성이 거대한 격랑에 휩쓸려 희생 당하는 시대상을 일깨워 주었다.1980년 5월 한국사회의 경험이 총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역사 드라마가 곧 역사 그 자체인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미지화한 역사가 문자화한 역사보다 역사현실을 더욱 잘 재현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자의 지적처럼, 제대로 만든 역사 드라마에는 역사책 몇권을 합친 것 이상의 미덕이 있다. 이제 젊은 세대도 그들의 부모가 그 나이때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5월 광주’는 한 TV드라마를 통해 비로소 그 전모를 국민 앞에 드러냈다. 그러나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하도록 지시한 발포명령자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공식·비공식 실종자가 400명에 가까운 것으로 집계된 가운데 계엄군이 희생자를 대거 암매장했다는 장소의 존재 여부도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 14일 처음 전체회의를 가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5·18민중항쟁’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미제로 남아 있는 광주의 진실을 밝힐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해법은 단 하나이다. 가해 당사자들이 양심고백을 해 진실을 밝히는 길뿐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정감록’ 때문에 민중이 울었다. 정감록은 민중의 희망이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감록을 이용해 자기 한 몸의 안락과 치부(致富)를 꾀하는 못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감록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배층의 평가는 늘 부정적이었다.‘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잣대로 삼은 것이었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상당수 민중이 정감록 때문에 재산을 잃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기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백백교(白白敎)의 아전인수(我田引水) 일제시대 백백교 사건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대표적인 사례다.1937년 백백교 간부 150여명이 집단살인사건으로 검거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조사 결과 핵심 간부 18명이 최소한 신도 314명을 살해한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이경득은 61회에 걸쳐 166명을 살해했고, 문봉조도 129명이나 되는 교인을 죽여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백백교는 교단 이름부터 ‘정감록’을 빌렸다. 정감록에 보면 말세에 사람이 다 죽은 뒤 “사람의 종자를 양백(兩白)에서 구한다.”고 했다.‘양백’은 곧 백백(白白)으로 풀이된다. 백백교에서는 이 구절을 끌어다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오직 백백교도뿐이라고 내세웠다. 또 한 가지. 정감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라도운봉두류산(全羅道雲峰頭流山) 성인출어함양림중(聖人出於咸陽林中)”이란 대목이 있다. 글자 그대로는 “전라도 운봉에 두류산 즉, 지리산이요, 성인은 함양 땅 수풀 속에서 나온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백백교에선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앞부분은 “전(全)씨가 도(道)를 열(라)고 운(運)을 만(逢)난다.”고 보았다. 뒷부분은 성인이 출현하기로 예정된 ‘함양림’이란 장소를 백백교가 창시된 함(咸)경도 운림(林)면 마양(陽)리로 풀이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이쯤 되고 보면 정말 기발한 해석이었다.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억지 춘향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백백교 식의 정감록 해석을 환영했다. 그들은 도리어 기상천외한 해석에서 비결의 힘과 매력을 발견했다. 그만큼 순리대로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백백’이란 “한 가지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만들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구호를 요약한 것이기도 했다.‘흰 것’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계룡산 바위가 희어진다.”는 구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흰 바위란 전통적으로 미륵을 상징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가지 흰 것”은 정씨 진인이 출현할 시기이자 미륵부처나 다름없는 백백교의 교주를 가리켰다. 요컨대, 새 종교 백백교와 더불어 이 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선동적 믿음이 구호에 담겨 있었다. 백백교의 남자 신도들은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이라는 주문을 줄곧 외워댔다. 그러면 무병장수하고 말세에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들은 말세에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한다고 했다.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본래 기독교 성경에 나와 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의 본고장 서양은 불로 망한다고 보았다. 동쪽은 서쪽의 반대라 물에 약하다고 풀이했다. 중요한 점은 백백교를 믿는 사람만이 무사히 살아 남는다는 주장이었다. 교단 측은 신도들에게 일단 한국의 53개 성지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다 말세의 심판이 닥치면 곧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라 했다. 금강산엔 ‘피수궁’(물의 재난을 피하는 궁궐)이 있고 거기서 잠시 기다리면 백백교의 교주 대원님이 하강해 신도들을 이상향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백백교의 이상향은 동해의 섬이었다. 동해 바다 한 가운데 3000리나 되는 영주란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엔 봉황과 기린이 살고 불로초도 있다. 신선처럼 살고 싶은 백백교 신도는 누구나 그리로 인도된다. 그러나 만일 부귀영화를 한껏 누려보고 싶은 이라면 계룡산으로 안내된다. 백백교의 수장인 대원님이 새 세상의 왕이 되어 교단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신도들에게 관직을 준다고 했다. 교단에 재산을 많이 헌납한 사람은 당연히 큰 벼슬을 받게 된다. 이런 감언이설로 백백교 지도층은 세상 삶에 지친 민중을 유혹했다. 백백교를 세운 이는 가난한 농부 전정운(全廷雲)이었다. 본래 동학교도였던 그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에서 백도교(白道敎)란 간판을 걸었다. 얼마 뒤 그는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교명을 백백교로 바꿨다. 그는 1904년 6월 사상 초유의 대홍수가 한국을 휩쓸어 말세가 된다면서 이상향에서 살고 싶으면 무조건 백백교에 입교하라고 선동했다. 물론 전정운의 예언은 빗나갔다. 그럼에도,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는 등 세상은 무척 어수선해졌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백백교의 거짓 예언을 뿌리치지 못했다. 교주 전정운이 늙어 죽자 아들 전해룡이 뒤를 이었다. 전해룡은 1923년 경기도 가평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교당을 지었다. 교단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높이려는 술책이었다. 그는 평소 단식을 잘했다.20일 동안 단식한 뒤에도 평소와 같은 기력을 과시해 신도들 사이에 신비감을 조장했다. 이 역시 28수라는 그의 허다한 고등 사기수법의 하나였다. 전해룡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했다. 그뿐 아니었다. 만일 신도들의 자녀 가운데 아직 미혼인 여성이 있으면 성적 노예로 삼아 착취했다. 유부녀라 해도 용모가 아름다우면 마음껏 유린했다. 전해룡은 변태성욕자가 분명해 자기의 정사(情事) 장면을 숱한 여신도들이 지켜보게 했다. 그는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신도가 있으면 이상향에 보낸다며 산으로 끌고 가 남몰래 살해했다. 살인을 담당한 간부들은 벽력사(霹靂使)라는 명칭으로 부를 만큼 백백교 지도층은 집단광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살인극은 무려 14년간 지속됐다. 만일 교주 전해룡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교단을 배신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는 경우는 물론 간부나 첩이라도 태도가 변한 기색이 보이면 즉시 살해되었다. 또한 신도들은 재산을 전액 헌금하게 돼 있었는데, 이를 조금이라도 어길 경우 생매장 당했다. 엄청난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백백교는 무사했다. 교단 간부들이 해마다 거액을 상납했기 때문에 일제 경찰은 눈을 감아준 것이었다. 그러다 1937년 우연한 일로 백백교의 비리가 세상에 폭로된다. 백백교 사건의 충격과 파장은 컸다. 소설가 박태원은 ‘금은탑(金銀塔)’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소설화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시기 한국의 민중은 정치에 실의하고 생활에 궁핍했다. 근대 한국 민중의 불안한 사회심리를 이용해 우후죽순 격으로 뻗어난 것이 바로 백백교 따위의 악질적인 사이비 종교단체였다.1930년 6월 현재 정체불명의 그런 사이비 단체가 55개, 신도 수는 10여만명을 헤아렸다(동아일보 1930년 6월16일자 사설). 백백교 같은 사이비 종교단체는 암울한 시대배경 속에서 자라난 독버섯이었다. ●정감록을 이용한 재물 뺏기 ‘정감록’을 이용한 사기행각은 식민지 시기 사회 전반에 꽤 널리 퍼진 병리현상이었다.1930년께 김창하라는 사람은 ‘천병만마’(千兵萬馬·무수한 군대)를 격퇴할 해인(海印)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병통치약이라며 가짜 약을 판매하다가 검거됐다. 비슷한 무렵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에 살던 경호창과 최성기는 태백산 기슭의 벽촌을 돌아다니면서 곧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보천교도 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입교하라고 강요했다. 물론 입교 시에는 소정의 돈을 납입하게 돼 있었다. 경호창 등은 유언비어를 살포한 죄로 20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중앙일보 1932년 3월16일자). 이런 일은 식민지 사회에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사건은 조선 후기에도 많았다.1826년(순조 26) 충청도 청주에서 정상채라는 사람이 붙들려 처벌을 받았다. 그는 여러 고장을 들락거리며 나이와 이름을 멋대로 속였다고 했다. 도술을 부린다고 거짓을 늘어놓고 ‘환묘문(幻妙門)’과 같은 도술 책을 친구에게 주어 타인의 물건을 빼앗게 했다. 마침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그것은 전주곡에 불과하며 진짜 난리는 얼마 뒤에 일어난다며 민심을 선동했다. 그러면서 정상채는 진인이 이미 섬에 와 있다고 황당한 말을 꾸미는 한편 진인의 당에 가입하려면 이름을 직접 서명하라고 사람들을 졸라댔다. 뿐만 아니라 섬에 있는 진인의 군대에 군복을 지어 입힌다며 군자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모은 돈을 그가 착복했음은 물론이다. 정상채의 동료 박형서도 비슷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 받았다. 주된 죄목은 남의 재물을 속여서 빼앗고 ‘흉언(凶言)’ 즉 거짓 소문과 예언을 지어내 인심을 소란케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전쟁이 박두했다는 둥, 해도(海島)에 진인이 있다는 둥 거짓 예언을 퍼뜨리며 자기가 살길을 아노라 했다(실록·순조 26년 10월27일 을해). 비슷한 예는 정말 많았다. 박형서나 정상채 같은 사람들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은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변호인들은 왕조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면서 ‘범인들’이야말로 실은 ‘혁명아’였다고 강변하겠지만, 과연 그랬을까? 남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군자금을 생활비와 용돈으로 소비한 사람들이 과연 혁명아일지 의문이다. 그들이 말한 진인은 결국 환상적인 존재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금품을 건네준 사람들의 기대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홍경래의 난 그런데 어떤 경우엔 도무지 이것이 ‘혹세무민’인지, 사기행각인지 또는 진정한 의미로 민중의 투쟁이었는지를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결코 백백교와 동렬에 놓일 성질은 아니지만 경계 짓기의 어려움을 확인하기 위해 홍경래의 난을 예로 들어 보겠다. 결코 홍경래 난을 매도하려는 뜻은 아니란 점을 다시 강조한다. 홍경래 난은 1811년(순조 11) 12월18일 시작됐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을 장악했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관군의 반격을 받고 곧 정주성에 갇혀 버렸다. 정주성 싸움은 이듬해 4월19일까지 제법 오래 계속됐지만, 결국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기간 싸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란군 측은 여러 차례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엔 정감록이 예언한 정진인(鄭眞人)도 언급됐다. 서북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세도정권의 가렴주구는 악행이라는 등 그 시대 서북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도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로 정감록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면 대개 이런 식이었다. “지금 나이 어린 국왕과 주위의 간악한 무리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상을 건질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성인은 나서부터 비범하신데 평안도 지역은 성인의 고향이라 직접 손을 대지 못하시고 우리들에게 명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셨다.” 정감록이 예언한 새 왕조의 창건자가 이미 홍경래의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로써 반란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격문을 짓게 한 홍경래 자신은 각종 병서(兵書)와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풍수지리에도 능통해 전국을 유람했다고도 전한다. 홍경래 일당은 정감록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그런 까닭이겠지만 난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도 사람들은 정감록과 해도 진인에 대해 더욱더 이야기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홍경래 난은 무려 10년 동안 사전에 준비됐다고 했다. 조직적인 반란이었던 셈이다. 풍수 전문가 홍경래를 비롯해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등 유랑지식인 또는 몰락 양반들이 반란군의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중국과 무역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이희저의 가산 다복동의 사저를 거점으로 삼아 평안도 각지의 부자들과 연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산에 광산을 열어 빈농과 유이민 등을 모아 훗날 군사로 동원했다. 이 당시는 청나라와 국경무역이 활발했을 때라 평안도 출신 가운데는 이희저의 경우처럼 대상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수요에 맞춰 평안도엔 유기(鍮器) 등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광산 개발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홍경래 일파는 이런 시대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이 기회에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서울로 진격해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홍경래를 지지한 계층은 민중이라기보다는 평안도 각지의 부호들이었다. 좌수와 별감을 비롯한 향임(鄕任·행정보조집단)과 별장(別將)과 천총 등 무임(武任·군사 및 치안담당자) 가운데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이 홍경래를 후원했다. 민중의 지지는 정주성을 지킬 때 엿보이는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유랑지식인이었던 홍경래나 자칭 제갈공명이라 불렀던 우군칙은 반란을 모의하는 과정에서부터 갖은 방법으로 부자인 이희저를 포섭하는 데 주력했다. 결과적으로 이희저는 반란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책임지게 됐으며, 비슷한 처지에 있던 평안도 유지들을 후원자로 끌어들인다. 그런 점에서 홍경래 난은 일부 유랑지식인과 상층부 인사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홍경래 등은 서북지방의 숙원이던 지역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고, 그 점에 있어 해당지역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만했다. 하지만 일반 민중과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평안도의 부호들이 반군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점으로 보아 실상은 평안도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를 반영하는 반란이었다. 실제로도 격문을 분석해 보면 소농과 빈농 등 하층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만일 이 점을 확대 해석한다면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지배층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경래 등이 자주 거론한 ‘정진인의 출현’은 민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홍경래 난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혹세무민’이었다. 왕조의 입장은 그렇다 해도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한때 홍경래 일파를 적극 지지했던 평안도의 부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한마디로 판단하기는 참 어려운 문제다.‘사물은 하나지만 해석은 구구하다.’라 했던 어느 역사가의 주장이 문득 뇌리에 떠오른다. 홍경래의 난은 복잡했다 해두자. 어쨌거나 틀림없는 한 가지 사실은 때로 정감록은 민중에게 고난과 아픔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다. 이 점을 인식한 듯 근세의 종교지도자 소태산은 이렇게 말했다.“근래의 인심을 보면 사술(邪術)로 대도를 조롱하는 무리와 모략으로 정의를 비방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여, 각기 제가 무슨 큰 능력이나 있는 듯이 야단을 치고 다니나니, 이것이 이른바 낮도깨비니라. 그러나 시대가 더욱 밝아짐을 따라 이러한 무리는 발 붙일 곳을 얻지 못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후배 초등생딸도 성폭행 살해

    고향 후배의 초등 5년생 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등 3개월 사이에 3명의 여자를 연쇄 살해한 뒤 암매장한 30대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충북 청주 서부경찰서는 14일 김모(39·무직·청주시 흥덕구)씨를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 5일 오후 10시쯤 충북 진천에 사는 후배 최모(31)씨의 딸(13)을 유인,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성폭행한 뒤 살해, 진천군 백곡면 베티성지내 야산에 암매장했다. 김씨는 이날 오후 6시30분쯤 최씨 집에 놀러 갔다가 가족들의 눈을 피해 딸을 납치,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 김씨는 경찰에서 “지난달 28일부터 몇 차례 성폭행했는데 딸이 ‘아빠한테 알린다.’고 해 목졸라 죽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틀 전인 지난 3일 오후 2시쯤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호프집에서 이 집 주인인 내연녀 박모(48)씨가 “웬 국제전화를 그리 많이 쓰느냐.”고 핀잔을 주자 둔기로 박씨의 머리를 내리쳐 숨지게 한 뒤 40만원을 훔쳐 달아났다. 청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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