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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동·서양의 사자는 ‘용’의 형상화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동·서양의 사자는 ‘용’의 형상화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지금까지 동양 용의 갖가지 모습과 조형적 본질을 추구해 왔는데, 사람들은 서양에 그런 용이 있는지 의심할 것이다. 아무도 동양 용의 모습과 성격을 가진 용을 보지도 못했고 따라서 언급한 것을 보지 못했다. 실제로 서양 미술품 모두 찾아보아도 없다. 그런데 ‘세계의 조형예술품, 용으로 읽다’라고 서두에 감히 말했는데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고려청자 가운데 뚜껑에 사자를 조각한 걸작품 향로가 있다. ① 두 앞무릎을 세우고 앉은 사자가 오른손으로 오른발 위에 큰 보주를 짚고 있다. 필자의 눈에는 곧 그 사자가 현실에서 보는 사자가 아님을 직감한다.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은 명나라 때 호승지(胡承之)가 지은 ‘진주선’(眞珠船)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용의 아홉 아들은 각각 나온 순서에 따라 그 이름을 비희(贔屓), 이문(螭吻), 포뢰(浦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하(蚣蝦),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라고 한다. 산예는 그 모습이 사자를 닮았다. 이름부터가 ‘사자 산(狻)’에 ‘사자 예(猊)’다. 앉는 것을 좋아하고 등에 태우는 것도 좋아하여 그런 도상의 산예를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 예가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사자가 바로 이 산예이며, 불화에서 여래의 대좌에서 흔히 나오기도 한다. 이름은 산예이나 바로 용이다. 이 ‘용생구자설’은 후대에 지은 기록치고는 우리에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바가 많은, 뜻밖으로 유용한 보기 드문 기록이다. ‘용은 길어서 앉거나 여래나 보살을 등에 태울 수 없어서 용을 변용시킨 모습이 바로 영화(靈化)시킨 사자 모양이다.’ 용에서처럼 모든 갈기는 부처님 머리처럼 모두 제1영기싹이다. 따라서 고려청자 사자향로는 용 향로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이래 모두가 사자라고 부르는 것이 용이라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는 바로 꼬리다. 우리는 흔히 동물의 꼬리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조형들을 분석하면서 오히려 꼬리가 시작이고, 영기문으로 된 꼬리에서 영수와 영조가 탄생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고려청자 향로의 영화된 사자의 꼬리를 보면 만물 생성의 근원인 제1영기싹들이 전개한 모양이다. ② 큰 보주를 자세히 보면 음각으로 무량보주를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수없이 봐 왔지만 작년에 처음으로 알아보았다. 특히 무량보주는 용만이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용 향로가 틀림없다. ③ 하나의 보주도 ‘무량한 보주’이지만 이렇게 보주를 무량하게 음각선(陰刻線)으로 겹치면서 표현한 ‘절대적 보주’를 필자가 ‘무량보주’로 이름 지은 것이다. 보주는 용, 봉황, 기린, 선학, 해태, 여래, 관음보살 등 즉 영수(靈獸)나 영조(靈鳥), 그리고 신적(神的) 존재, 즉 영기화생된 특별한 존재만이 보주를 지닐 수 있다. 현실의 사자는 보주를 지닐 자격이 없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용성(龍性)을 지닌 다양한 영화된 동물 혹은 식물모양들이 있듯이 서양에도 같은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리스 신전 폐허에서 사자를 보았을 때 처음부터 사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용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용성(龍性)과 불성(佛性)을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충분히 이 문제는 논의할 수 없는 큰 주제다. 필자는 그리스 코린트의 아폴로 신전에서 영화된 사자의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을 보고 놀랐다. 동서양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던 영기문을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에서 처음 보았던 그 순간은, 필자에게 ‘세계미술사’를 가능케 하리라는 확신을 준 순간이었다. 용의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신전의 홈통으로 만든 영화된 사자의 입을 통해 지붕에서 내려오는 물이 쏟아져 나오니 용성을 지녔다 할 것이다. 서양 학자들은 현실의 사자를 이용해 홈통으로 삼았다고 생각하니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이 보일 리가 없다. 동서양 미술사학계가 마찬가지 상태였다. 옛 예술가들은 기능과 함께 고도의 상징을 부여해 왔다는 것을 필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기능만 보이므로 상징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용의 갈기를 보고 갈기라고 부르며, 마찬가지로 사자의 갈기도 갈기로 알고 있다. 비록 현실의 사물과 똑같다고 해도 조형예술의 세계에서는 일체가 영화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필자가 지적한 그 수많은 용어의 오류의 근원은, 영화시킨 세계를 현실적 기능의 면에서 바라보거나 비슷한 현실의 사물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데 있다. 기원전 338년에 세워진 코린트의 아폴로신전의 지붕 코니스(cornice)의 사자와 그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을 채색 분석해 보면우리나라 통일신라의 사찰이나 궁궐터에서 출토하는 기와의 도상과 똑같지 않은가. ④ 둥근 수막새의 용이나 연꽃의 양쪽으로 긴 암막새의 영기문이 발산하는 광경과 같다. 무릇 모든 넝쿨모양 영기문은 일체가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라는 것을 앞 회에서 보았다. 바로 똑같은 영기문을 그리스 첫 여행에서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너무 커서 거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갈래 사이에서 무엇인가 나오고 있는데 만물을 상징한다. 그 영기문을 더 전개시켜 보았더니 동서양이 더욱 같음을 절감한다. ⑤ 넝쿨모양 영기문은 물론 보주는 가장 강력한 용성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아래 부분에 직선으로 교차하는 연이은 태극의 순환무늬가 있고 그 밑에 크고 작은 타원체 혹은 구형의 보주가 줄 서 있지 않은가! 영화된 사자와 보주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⑥ 대지의 옴팔로스(배꼽)가 있는 델피의 아폴로 신전, 그 유명한 신탁이 이루어졌던 ‘신전 가운데 대표적 신전’, ‘너 자신을 알라’가 새겨진 신전에서도 지붕 끝에 같은 코니스의 조형을 보았다. 영화된 사자로부터 양쪽으로 제1영기싹 영기문이 전개되어 가다가 중앙에서 아크로테리온을 이룬다. ⑦, ⑧ 그리스·로마 등의 건축에서, 지붕 맨 위를 장식하는 여러 가지 조각상들이 있는데 팔메트라고 부르는 것도 그 하나다. 그러나 이렇게 영기문 절반이 만나 영기문을 이루게 되는 과정을 이 지붕에서 처음 보면서 팔메트란 용어가 틀린 것을 알았다. 즉 두 영화된 사자로부터 발산하는 영기문이 만나 가장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영기문의 발산이 아름다운 곡선들로 매듭을 짓는다. 아폴로신전은 기원전 330년에 재건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기문이다. 그런데 영기문은 용으로부터만 발산하는 것이 아니다. 봉황이나 해치, 그리고 연꽃이나 아칸서스에서도 발산한다. 그러한 영수, 영조, 영수(靈樹) 등 영성(靈性)을 지닌 것에서는 영기가 발산한다. 영성은 곧 용성이다. 서양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 수많은 사자는 현실의 사자가 아니라 동물모양으로 만든 강력한 영기문이기 때문에 갖가지 넝쿨모양 영기문을 발산하는 것이다. 주체들이 중요하지만 세계의 조형을 풀어내는 열쇠는 용성을 지닌 존재로부터 발산하는 갖가지 영기문이다. 그 영기문에서 만물이 화생하는 광경을 머지않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영적인 존재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존재들이 있지만 그 대표적 가시화가 바로 동양의 용임을 깨달았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경복궁 근정전 천장의 용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경복궁 근정전 천장의 용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용의 본질을 모르는 것은 물론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지 않았고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기와 연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관련된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여서 미술사학 연구는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술사학은 주로 역사적 접근만 했지 조형 원리나 사상사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런데 필자가 조형언어를 처음으로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사와 종교학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사와 종교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조형예술을 잘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관심 갖는 분은 거의 없었다. 사상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종교란 무엇인가 생각해 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들을 관찰-기록-스케치-촬영-논문 작성 등의 과정을 열심히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조형예술이 오히려 사상사와 종교학을 도울 수 있거나 보완하거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미술사학은 기록의 오류에 일그러진 사상사와 종교학의 원형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으므로 이 연재는 미술사학은 물론 문화사와 사상사와 종교학을 함께 다루고 있는 셈이다. 기와에 조각된 용의 입에서 영기문이 나온다고 앞의 글에서 밝혔고, 영기문이란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조형’이라고 말했다. 인류의 학문에서 여러 가지 주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즉 이 연재에서 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생명을 다루고 있다는 말과 같다. 물은 만물생성의 근원이고 철학의 시작이다. 물은 문명은 물론 사상도 낳는다. 탈레스처럼 물이 모든 물질의 본질이라는 데 기초한 우주론과 노자(子)처럼 물의 속성이 도(道)이고 만물생성의 근원이라는 우주관은 서양의 그리스와 동양의 중국에서 기원전 5~6세기에 이미 제기됐다. 바로 그 우주생성론의 중심에 용이 있다. 그러면 용의 입에서 나오는 영기문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로 ‘물’이다. 물을 간단히 가시화한 것이 제1영기싹이고 물이 흐르는(전개하는) 모양이 연이은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이다. 둥근 수막새에는 본질이 같은 연꽃과 용이 새겨질 수 있고, 곡선을 지은 긴 암막새에는 갖가지 긴 영기문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연화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따로 다루기로 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의 입에서 물이 나온다는 조형을 좀 더 다루어 보기로 한다. 제1영기싹이 물을 상징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필자다. 끝이 도르르 말린 조형은 식물에도 있고 동물에도 있지만, 그 조형에 ‘제1영기싹’이란 명칭을 부여한 것은 형이상학적인 조형이기 때문이다. ‘대생명의 싹’이라는 차원 높은 상태에서 말한 것이다. 즉 물을 조형화한 것이 제1영기싹이며, 용은 다양한 보주와 제1영기싹으로 구성돼 있다는 진리는 이미 증명했지만 깨닫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린다. 공주 주미사 출토 암막새 영기문을 다시 확대해 보기로 한다 ①. 용의 입에서 이렇게 제1영기싹들이 연이어 다발로 나온다는 것은 용의 입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상징한다. 귀면이라든가 당초문이라 알고 있으면 엄청난 진리를 보지 못하니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허상이라 부른다. 잘못 보면 허상이 되고 올바로 보면 실상이 된다. 우리는 교육을 평생 받으며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만을 보고 성장해 왔다. 아직도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다른 예를 보여 드린다. 항상 주미사 기와에 보이는 조형을 조각으로 만들 수는 없을지 생각해 왔다. 10년 전 매일 궁궐 건축을 열심히 조사하던 중 사진기로 경복궁 근정전 천장을 찍는데, 아득히 높은 중층(重層) 궁전의 높은 천장이어서 두 용이 회전하는 조형, 즉 우주에 대생명력이 순환하는 조형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②. 곧 망원렌즈를 사서 다시 찍어 보니 여전히 입에서 하얀 것이 나오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③. 그래서 얼굴 부분을 잘라 크게 확대해 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옥으로 만든 것인데 끝이 제1영기싹 세 가닥 다발이 아닌가. 용의 입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④⑤. 그날은 너무 기쁘고 흥분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백제 제석사 암막새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백제 제석사 암막새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지금까지도 동양 3국의 미술사학자는 용의 입에서 무엇이 나온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의 실체에 조금도 다가갈 수 없었으며 용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었다. 필자의 체험으로는 사람들이 용의 실체를 모르므로 입에서 무엇이 나온다는 것을 반복해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았다. 그러니 그 ‘무엇’이 무엇인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용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영기문, 즉 ‘만물을 생성시키는 영기문’이라고 앞서 말했다. 영기문이란 덩굴무늬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적인 조형’임을 발견했다. 따라서 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형이상학적 조형이다. 우주에 충만한 보이지 않는 영기를 시각화한 것인데 무슨 식물과 동물이 있겠는가. 원래 여러 단계지만 이 글에서는 마지막 단계만 보여드릴 수밖에 없다. 단계적 전개과정을 보고 싶으신 분은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홈페이지(www.kangwoobang.or.kr)로 들어가시면 여러 가지 영기문의 채색분석 과정을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추녀마루기와와 망와를 창안했으며 힘찬 조형의 와당이 많고, 백제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격조 높은 와당을 만들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백제는 가장 위대한 기와를 창안했다. 바로 암막새기와의 창조다. 용의 입에서 양쪽으로 영기문이 발산하는 조형이다. 그 중앙의 정면용이 통일신라시대에 수막새에 자리 잡으며 양쪽으로 영기문이 발산한다. 따라서 제석사 암막새 형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새로이 암막새와 수막새의 결합에서 가장 쉽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법당이나 궁궐터에서 많이 보이는 수막새와 암막새는 고대 조형예술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동경(銅鏡)처럼 작은 원 안에 우주의 기운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와를 가장 많이 만든 동양 삼국은 연구자들이 아직도 형식의 분류와 제작기법에만 치중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르러 암막새·수막새 결합 익산 제석사(帝釋寺)에서는 백제시대 후기의 영기문 암막새와 연화문 수막새가 짝으로 출토되고 있는데, 한국과 일본의 전공자들은 수막새는 백제 것으로, 암막새는 통일신라 것으로 다루고 있다. 용과 영기문이 뚜렷한 암막새가 바로 백제의 위대한 창작품이다 ①. 암막새 중앙에 용의 정면상을 돋을새김하고 양쪽으로 제1, 제2, 제3영기싹 영기문이 뻗쳐나가고 있으나, 아직도 우리 학계에서는 모두 그릇된 용어들, 귀면과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영기문은 매우 복잡한 듯하지만, 간략화하면 결국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다 ②-1. 최초로 창안한 암막새인데 극히 추상화시킨 정면용의 얼굴은 좌우 영기문의 전개가 완벽하고 절묘하다. 연꽃도 물을 상징하므로 영기문이 발산할 수 있는데, 후에 다루겠지만 귀면처럼 연꽃도 현실의 연꽃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조형들을 만날 때가 올 것이다. 제석사 암막새와 수막새를 채색분석하여 결합시키면 연꽃 양쪽으로 암막새의 영기문이 발산하는 형국이다 ②-2.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같은 시대의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암막새를 만들지 않았다. 본격적인 암막새를 세계에서 백제가 처음으로 창안했다는 논문을 필자가 쓴 이래, 지금은 ‘익산 왕궁리 전시관’에 가면 10년 만에 설명 카드에 백제라고 고쳐 쓰고는 있지만 ‘인동당초문’이란 용어는 그대로니 조형해석이 불가능하다. 백제가 암막새를 처음으로 창안했다는 것은 미술사학에서 큰 사건이다. 그런데 단지 용의 얼굴이라고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자가 용의 속성으로 기와의 많은 진실을 밝힌 것은 기와 연구사의 전환점을 이루어 기와공예를 미술사학의 다른 장르만큼 승격시켰다고 생각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암막새와 수막새가 아름다운 조형을 이루어 기와 예술의 절정기에 다다랐는데, 중국에서는 기와 예술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현재 기와 연구자가 3000명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 와당에서는 수막새에 연꽃이나 정면 용 얼굴을 새기면서, ‘암막새에는 좌우대칭의 영기문을 새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용과 연꽃 본질 같아… 용의 조형적 확산 시작 통일신라 때의 공주 주미사(舟尾寺) 출토 기와는 뚜렷이 그런 원칙을 보여 주고 있어서, 수막새의 용이나 연꽃에서 양쪽으로 뻗어나가서 영기문이 중앙에서 서로 만나도록 했다 ③ ④. 그러니 우리나라는 암막새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창안했으며, 이에 따라 통일신라시대에 온갖 아름다운 조형으로 창작하되 영기문 전개 원리를 정확히 파악하여 만들었으니 얼마나 위대한 일을 백제의 장인들과 통일신라의 장인들은 해냈는가! 그러면 용의 입에서 나오는 연이은 제1영기싹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리고 용 대신 연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용과 연꽃의 본질이 같다는 뜻이며 바야흐로 용의 조형적 확산이 시작되고 있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회색도시에 색 입히는 신촌 거리 위 스튜디오

    회색도시에 색 입히는 신촌 거리 위 스튜디오

    ‘회색빛 도로 위가 팝업 스튜디오로 변신합니다.’ 서대문구는 16일 신촌 연세로에서 ‘2015 신촌대학문화축제-아스팔트 스튜디오’를 연다고 13일 밝혔다. 예술로 소통하고 체험하는 거리 예술 축제다. 낮 12시부터 오후 8시까지 청년 아마추어 예술가들의 실험이 펼쳐진다. 이날 오전 4시부터는 차량 통행이 제한된다. 축제는 전시, 참여예술, 공연, 암막 속 빛 체험, 머리 위 예술 등 5가지 주제로 진행된다. 전시 구간에서는 청년 작가 22개 팀(개인)이 예술 작품을 선보인다. 일러스트, 팝아트, 펜화, 멋글씨, 도자기공예, 인테리어, 섬유디자인, 판화, 목공예, 캐리커처 등 분야도 다양하다. 참여예술 구간에서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잔디 패치를 아스팔트 위에 조성하고 그 위에 정원 틀을 만들어 시민들이 모빌과 같은 장식을 할 수 있다. 신촌 머리글자인 ‘ㅅ’과 ‘ㅊ’ 모양 대평 스티로폼 조형물에 직접 색을 입힐 수 있다. 공연장은 독수리약국 앞과 유플렉스 앞 횡단보도 등 두 곳이다. 20여개 청년 팀이 무용, 힙합, 어쿠스틱, 국악, 디제잉, 오케스트라 플래시몹 등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 특히 행사장에 설치되는 암막 컨테이너에서는 이색 체험을 할 수 있다. 빛의 궤적을 사진으로 담아내거나 빔프로젝터를 통해 입체영상을 피사체에 투영하는 등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문석진 구청장은 “올해 5회째를 맞은 축제는 2013년 3회부터 아스팔트 스튜디오 콘셉트로 이어져 오고 있다”며 “청년이 주체가 되고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어우러지는 특색 있는 거리 예술 축제에 많은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씨줄날줄] 혜음령/서동철 논설위원

    혜음령은 경기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의주를 잇는 의주대로의 일부였다. 혜음령은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임진각으로 달리다 보면 나타나는 벽제에서 의정부 쪽으로 길을 갈아탄 뒤 고양향교가 있는 고양동에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만날 수 있다. 고개를 넘으면 서울시립 용미리공원묘원이다. 의주대로는 지금 고양시와 파주시의 협력으로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정비되어 있다. 삼송동에서 임진강과 만나는 임진나루까지 걸어서 탐방할 수 있다. 조선 왕조는 개성에서 개창해 한양으로 천도했으니 혜음령은 ‘두 서울을 잇는 고개’였다. 고려 왕조도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을 새로운 수도로 삼을 것을 고민했다. 고려가 혜음령 일대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는 용미4리의 혜음원(惠陰院) 터에서도 드러난다. 혜음원은 개성과 남경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1122년(고려 예종 17) 세운 국립 숙박시설이다. 왕의 행차를 위한 별원(別院)과 사찰도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출토됐고, 27개에 이르는 건물터, 연못터, 배수로 등 대규모 유구가 확인됐다. 고려시대 혜음원과 이웃한 장지산 기슭에 높이 17.4m의 용미리석불입상이 세워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거대한 석불은 의주대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위세를 보여 주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먼 길에 나선 사람들도 두 분 부처의 자비에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혜음령은 중요한 간선도로였지만 도적이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세기가 목전이었던 1891년(고종 28)에도 ‘도적의 무리가 자주 출몰해 백성이 안심하고 터 잡을 수 없으니 특별 대책이 필요하다’는 장계(狀啓)가 경기감사로부터 올라오기도 했다. 값나가는 물건이 아무래도 많았을 여행자는 더욱 도적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과 의주를 잇는 길은 일제강점기 벽제에서 금촌과 문산을 거치도록 바뀌었다. 이후 이 길을 넓힌 것이 통일로, 조선시대에는 완전치 않았을 한강과 임진강의 강둑을 이은 길이 자유로다. 과거 혜음령처럼 높은 고개를 지나는 길을 이용한 것은 하천 때문이다. 광탄(廣灘)이라는 땅 이름부터가 ‘넓은 여울’이라는 뜻이다. 양주에서 흘러내려온 두 개의 물길이 합류해 넒어진 문산천은 난코스였다. 의주대로가 임진나루로 이어지는 것도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기 때문이다. 산과 하천은 이제 터널과 교량으로 극복한다. 통일로와 자유로도 수많은 다리로 이어졌다. 혜음령에서도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745m짜리 터널이 올해 완공되면 희미해진 옛 의주대로의 존재도 다시 부각될 것이다. 주변에 ‘혜음원 박물관’이나 ‘의주대로 박물관’이라도 세운다면 그 효과는 더욱 뚜렷해질 수 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오늘의 눈]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의 ‘길’/안동환 정치부 기자

    [오늘의 눈]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의 ‘길’/안동환 정치부 기자

    두 달 전 한·일 관계 포럼 참석차 일본 도쿄를 방문했을 때다. 나흘간 일정 중 귀국 이후에도 떠오르는 것은 일본 외무성 외교관과 나눈 대화다. 한국의 폭탄주 얘기로 말문을 튼 우리는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기소 문제, 아베 신조 총리가 주변국과의 불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한국 내 시각까지 일본 외교관으로서는 자못 불편한 내용도 도마에 올렸다. 그가 박근혜 대통령 얘기를 꺼내면서 대화는 묘하게 흘렀다. “박 대통령이 장관, 수석들을 잘 만나지 않고 외교 현안도 서면보고를 받는다고 들었다. 기자들은 그런 (박 대통령) 스타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그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그 부분에 관심 갖는 이유가 뭐냐”고 반문하자 생각지 못한 답을 내놓았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강경한 대일 외교 기조가 대면보고도 하기 어려운 (외교) 장관 라인보다는 박 대통령 의중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외무성은) 분석하고 있다”였다. 그 외교관은 (그러니까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먼저 정상회담부터 해야 양국 관계가 풀리지 않겠느냐는 논리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의 스타일이 나라 밖에서 여러 해석과 억측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은 연말 정국을 흔들고 있는 비선 실세 의혹과도 맞닿아 있다. 청와대 비선 실세의 국정개입 문건 유출 수사는 종착점을 향하고 있다. 온 국민이 사실인 양 믿게 된 ‘임금님 귀가 정말 당나귀 귀인지’는 관심 밖일지도 모른다. 검찰이 서슬 퍼런 임금님 귀(비선 실세 의혹)의 실체적 진실을 확인할 배짱이 있다고 믿는 이는 많지 않다. 비선 의혹의 본질은 ‘소통 부재’다. 더불어 박근혜 정부의 거듭된 ‘인사 실패’는 정치권 루머의 근원이 됐다. 박 대통령이 주로 문서로 보고받고 장관, 수석과 전화로만 대화하는, 그리하여 전화기 너머로 ‘대통령님 아닙니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구조적 불통이 비선 풍문의 배출구가 아닐까.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내부 행위자 간의 게임은 잉여 권력으로, 정상적 의사결정 과정을 왜곡할 위험이 크다. 불통은 불투명한 권력 행위의 ‘암막 커튼’이 된다. 역대 정부에서 되풀이된 현상이다. 차제에 문고리를 쥔 누군가가 대통령 뜻을 이상하게 전달하지 않았는지 분명히 짚어 봐야 한다. ‘일개 내 비서관으로 심부름하는 사람들(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그 직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정윤회)’, ‘청와대에 얼씬도 못 하는 사람(박지만)’이라는 박 대통령의 확신과 달리 세간이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이유다. 박 대통령이 수시로 장관, 수석, 여야 정치인들을 만나고 국민과 대화하면 대통령 주변의 풍문은 잦아들 것이다. 국민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데 대통령이 구름 속에 있으면 안 된다. 새 피를 수혈하고 시스템을 정비하는 단호한 국정 쇄신은 미생(未生)의 정치가 완생(完生)으로 가는 길이다. 정권 피로감이 짙어지는 시점, 무엇보다 할 일 많은 3년차 대통령의 새해 행보이길 기대한다. 그런데 말이다. 청와대 문고리는 정말 문에만 붙어 있었을까. ipsofacto@seoul.co.kr
  • 지나송 ‘웨딩암막커튼’ CJ오쇼핑서 론칭 방송

    지나송 ‘웨딩암막커튼’ CJ오쇼핑서 론칭 방송

    올 봄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실내 인테리어로 집을 변신시키고 싶다면 지나송의 웨딩암막커튼에 주목하길 바란다. 디자이너 브랜드 ‘지나송’이 오는 9일 오전 11시 30분 CJ오쇼핑서 웨딩드레스 암막 이중 커튼 ‘작품1.순수’를 선보인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아름다운 커튼인 만큼 웨딩암막커튼 하나로 거실을 당장이라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 지나송의 암막커튼은 이중커튼으로 만들어져 활용도가 높다. 앞쪽은 레이스망사, 뒤쪽은 암막지의 형태로 이중커튼의 형식으로 완성, 암막커튼의 답답함을 해결하고, 내츄럴 커튼의 기능성을 보완한 인테리어 커튼이다. 앞면은 하늘하늘하게 떨어지는 가벼운 소재의 레이스원단을 채택, 여성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상단에는 쉬폰원단을 꽃모양으로 자수처리한 후 진주장식을 포인트로 넣어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다. 뒷면의 암막 원단은 빛의 투과를 막아주는 최고급 암막 원사로 제작해 암막, 방한, 방풍의 기능성을 갖추고 있고, 사계절 모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모두 웨딩드레스에서 활용되는 원단을 사용했기 때문에 화사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CJ오쇼핑을 통해 소개되는 지나송의 암막커튼은 중형(360x230), 대형(450x230), 특대형(540x230)의 크기로 구성돼 있고, 크리스탈 화이트, 내츄럴 베이지, 러블리 핑크의 세 가지 색상으로 나눠져 선택의 폭이 다양하다. 커튼과 함께 커튼, 커튼봉, 설치부자재를 풀세트로 제공해 구성품을 따로 구매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였다. 관계자는 “지나송의 웨딩암막커튼은 봄을 맞아 드라마틱한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활용하기에 최적의 커튼”이라면서 “CJ오쇼핑에서 최고의 디자인의 커튼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만나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어벤져스 뜬 강남대로 1000명 북적… 일부 “골목까지 왜 막나”

    6일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어벤져스 2)의 촬영이 진행된 서울 강남대로에는 아침부터 1000여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이른 시간에 촬영이 이뤄져 우려와 달리 교통대란은 없었다. 오전 4시 30분부터 낮 12시까지 강남대로 강남역 사거리부터 교보타워 사거리 방향으로 5차로 730m가량이 통제됐다. 경찰 관계자는 “촬영이 오전에 끝나 우회도로를 이용하는 차량들도 40~50㎞의 속도를 내며 평소 주말과 큰 차이는 없었다”고 밝혔다. 강남역 인근 커피 전문점들은 ‘특수’를 노리고 영업시간을 앞당겨 오전 4시부터 문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사전 통보 없이 인근 골목에서 오후 2시 30분까지 촬영 및 통제가 이어지자 일부 상인들은 “주말 영업에 방해를 받는다”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촬영팀은 이면도로 입구에 암막(暗幕)과 펜스를 치는가 하면 행인들에게 “거리에 서 있지 말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달라”고 외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대는 더욱 혼잡해졌다. 인근 어학원에서 진행된 토익 시험을 치고 나온 한 수험자는 “강남대로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인파를 헤치고 오다가 늦어 시험을 보지 못한 수험생도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에는 서초·강남·수서경찰서 등 3개 경찰서의 경찰관 400여명이 나와 교통을 정리하고 돌발상황에 대비했다. 일각에서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칫 치안에 소홀해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다. 촬영 현장은 영화사 측에 의해 철저히 통제됐다. 아이언맨 로봇 의상을 입고 나와 플래시 세례를 받은 이승기(19·경기 성남시)씨는 “아이언맨을 가장 좋아해 두 달 동안 직접 만들어 입고 나왔다”며 기대를 드러냈다. 반면 김현중(34)씨는 “서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면 좋을 텐데, 대부분 폭파하고 부수는 장면들이라 홍보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날 강남대로에서는 대역 배우들의 촬영만 진행됐으며, 주연 배우 크리스 에번스는 용산구 후암동에서 실내 촬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경주서 통일신라시대 마을 유적 발굴

    경북 경주시 방내리와 모량리 일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대규모 도시유적이 발굴됐다. 영남문화재연구원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경주 동해남부선 연결선 건설공사 구간인 이 일대를 조사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도로, 우물, 담장, 집터, 제방시설 등을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연구원에 따르면 도로는 폭이 5∼8m로 10여곳에서 확인됐다. 남과 북, 동과 서를 축으로 이뤄져 있으며 도로에 의해 구분된 하나의 방(坊)은 가로, 세로 각각 120m 규모였다. 각각의 방 내에는 담장과 우물, 적심 건물지로 구성된 가옥터가 있었다. 또 하천인 대천(大川)과 인접한 북쪽 경계 지점에서는 동서로 연결된 길이 30m, 폭 5m의 석축제방이 발견돼 도시의 경계가 확인됐다. 유물로는 다수의 수막새, 암막새를 비롯해 고배(高杯), 인화문(印花文) 토기, 청동접시, 수레굴대, 탑상전(塔像塼), 치미(용마루 장식기와), 청동거울 등이 출토됐다. 우물 주변에서는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하에 묻는 매장품인 진단구(鎭壇具)가 발견됐다. 진단구의 일종인 청동접시의 바닥에는 왕(王)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발굴 지역 일대는 신라 6부의 하나인 모량부(牟梁部)의 옛 지역으로 추정된다. 신라 왕경으로 진입하는 서북 방면의 주요 교통로로, 사적 제43호인 ‘경주 금척리 고분군’이 인접해 있다. 연구원 관계자는 “도로와 건물지의 중복이 많고, 건물 조성 시 이용된 축성토에서 5세기 유물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5세기쯤부터 마을이 조성돼 8세기쯤 경주 왕경과 같은 도심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숭례문 5월 4일 공개] 숫자로 본 5년 3개월의 복구

    숭례문은 2008년 2월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2층으로 된 문루가 불타 내렸다. 이후 5년 2개월 20일간의 복구가 진행됐다. 당시 국민은 숭례문이 모두 소실됐다고 절망했지만 1층은 멀쩡했다. 2층 문루도 일부는 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복원이 아니라 복구공사가 된다. 불에 그슬린 통나무를 적심으로 사용하는 등 숭례문 부자재로 활용했다. 투입된 총비용은 245억원으로 문화재청 숭례문 자체복구 비용 147억원과 기탁금 7억 5000만원, 신한은행 12억원, 포스코 3억원, 서울시의 관리동 건립비 9억 2000만원 등이 포함됐다. 신응수 대목장과 이재순·이의상 석장, 홍창원 단청장, 한형준 제와장, 이근복 번와장, 신인영 대장장 등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참여했다. 복구에 동원된 인원은 총 3만 5000명이다. 신응수 대목장이 주도한 목공사에는 3968명이 참여했다. 목재는 국내산 육송 15만 1369재가 사용됐다. 25t 트럭 28대분이다. 화마를 피한 목재 6만 47재는 재활용했다. 국민들이 1만 855재를 기증했다. 복원에 사용된 목재는 문루 아래층(1층)의 경우 90% 이상이 기존 부재다. 2층 문루는 4개 고주(중심기둥)를 최대한 살렸고, 그 위에 새 나무를 덧대 화재의 흔적이 보인다. 단청 작업에는 1541명이 동원됐다. 안료는 12종 1332㎏이 사용됐다. 석간주(82㎏)와 호분(80㎏)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수입했다. 기와는 이근복 번와장 감독 아래 284명이 참여해 전통기와 2만 3369장을 지붕에 이었다. 암키와 1만 4991장, 수키와 7284장, 암막새 488장, 수막새 519장, 특수기와 96장 등을 사용했다. 대장장 신인영의 주도하에 251명이 철물을 생산했다. 못 등 31종 3만 7563개가 사용됐으며, 총무게는 6.3t이다. 방재 장치도 강화했다. 건물 안에는 스프링클러 장치, 건물 밖에는 소화전과 방수총을 북동, 북서, 남동, 남서 귀퉁이에 각 1개씩 총 4개 설치했다. 지붕 적심과 개판 사이에 방염천을 설치해 섭씨 1000도 이상 고온에서도 10분 이상 견딜 수 있게 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동서 69m 성곽 되살려… 외적 방어 숭례문 위용 드러내다

    동서 69m 성곽 되살려… 외적 방어 숭례문 위용 드러내다

    ‘국보 1호’ 숭례문이 96% 복구됐다. 준공식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4월쯤 한다는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화재(2008년 2월 10일) 5주년에 즈음한 14일 숭례문 복구 마무리 현장설명회를 열었다. 지난해 3월 8일 숭례문 복원 상량식을 마친 뒤 1년여 만이다. 숭례문 복원은 당초 지난해 12월 말 마무리할 계획이었으나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춥고 폭설이 잦은 데다 관리동 건립이 예정보다 지연되면서 4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잔디와 수목 심기, 박석(바닥돌) 깔기, 광장 조성 등을 남겨 두고 있다. 복구 작업이 거의 끝난 숭례문은 동편 성곽을 53m, 서편 성곽을 16m 각각 새로 복원해 숭례문이 당초 한성을 수비하던 군사시설의 일부였던 점을 명확하게 했다. 성곽이 없을 때는 2층의 관상용 누각처럼 보였다. 복구에는 총 247억원(관리동 8억 7000만원 제외)이 투입됐고, 목공사-석공사-기와공사-단청공사-철물제작 등에 각각 수천명이 동원됐다. 단청을 곱게 입힌 숭례문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진중한 느낌이다. 조선 전기의 단청 문양과 청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룬 단청색을 복원한 덕분이다. 사찰의 화려한 금단청을 기대하고 숭례문을 보면 너무 수수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수한 것 같다고 해서 단청 문양이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게 단청을 입힌 홍창원 단청장의 설명이다. 단청 작업에는 모두 1541명이 동원돼 12종의 천연안료 1332㎏을 썼다. 석간주와 호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일본에서 수입했다. 기와공사는 이근복 번와장의 감독으로 284명이 참여해 전통기와 2만 3369장을 지붕에 이었다. 암키와 1만 4991장, 수키와 7284장, 암막새 488장, 수막새 519장, 특수기와 96장 등을 사용했다. 목공사는 신응수 대목장이 주도했고 모두 3968명이 참여했다. 목재는 15만 1369재로 26t이 사용됐다. 화를 피한 목재 6만 47재를 재활용했고, 기증목은 1만 855재이다. 목공사 중 문루는 2010년 2월부터 2012년 5월에 대부분 끝났다. 숭례문 복구공사는 전통기와와 철물을 사용하는 등 전통기법을 활용했다. 1961~1963년 해체수리과정에서 잘못 고증한 부분을 바로잡았다. 예를 들어 군사시설에 주로 깔았던 1층 누각의 장마루를 우물마루로 바꿨던 것을 이번에 다시 장마루로 교체했다. 지붕 속을 채운 나무(적심)와 흙(보토)도 이번에 복원했다. 용마루를 90㎝ 줄이고 추녀마루를 길게 했던 것을 원상복구해 용마루가 16.6m로 늘었다. 관리권은 문화재청으로 이관됐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캬~ 우리 술맛이 최고여!

    캬~ 우리 술맛이 최고여!

    ‘막걸리의 날’인 27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공원에서 농림수산식품부와 농수산물유통공사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이 주관하는 ‘2011 우리술 대축제’가 화려하게 막이 올랐다. 나흘 동안 계속될 축제 개막식에는 이동화 서울신문 사장을 비롯해 오정규 농식품부 제2차관 등이 참석했다. 개막행사로 칵테일 경연과 ‘뿌리패 타악’, ‘대금산조 이생강’ 우리술 세계화 콘서트 등 다양한 이벤트도 함께 펼쳐졌다. 98개 업체 300여개 제품을 선보인 이번 행사에는 이날만 관람객 2만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전국 광역시·도에서도 지역의 명품 우리술을 출시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남은 순천 팔마탁주 ‘생막걸리’, 담양 추성고을 ‘타미앙스’, 함평 천지복분자영농조합의 ‘레드마운틴’ 등 제품을 출시했다. 경북도 청송 구암막걸리와 안동소주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막걸리와 과실주, 증류주 등 명품 전통주 60여점을 선보였다. 경기는 조술당의 산삼막걸리와 한성양조의 ‘길따라 벗따라’, 산머루농원의 ‘머르드서’ 등 17개 제품을 출시했다. 경기도는 또 팔도명품관에 파주 장단콩 제품, 가평잣 등 특산품과 함께 자색고구마 막걸리, 안성맞춤 헛개 막걸리 등 특산주도 공개했다. 이 축제는 막걸리 등 우리 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축제와 별도로 이날부터 전국 대형마트 및 편의점 등 2만여 유통매장에서는 60여개 양조장에서 생산한 2011년산 햅쌀막걸리도 일제히 출시됐다. 전통주인 막걸리를 웰빙주로 특화해 소비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별도의 태그와 스티커가 부착돼 유통된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국가대표 막걸리 탄생

    다음달부터 국가가 품질을 인증한 막걸리 제품이 시중에 첫 선을 보인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올해 도입된 술 품질 인증제에 따라 지난 1월 품질인증을 신청한 막걸리 업체 및 제품을 대상으로 한국식품연구원에서 심의한 결과, 5개 제조장에서 생산되는 6개 제품에 대해 처음으로 품질인증을 승인했다고 17일 밝혔다. 이번에 품질인증을 받은 제품은 국순당(횡성공장)의 ‘우국생’, 국순당(옥천공장)의 ‘국순당쌀막걸리’, 전주주조(전주공장)의 ‘전주생막걸리’, 서울장수(진천공장)의 ‘서울장수’와 ‘월매’, 구암농산(청송공장)의 ‘구암막걸리’ 등이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도시와 길] 청주 성안길

    [도시와 길] 청주 성안길

    2006년 지방선거 한나라당 합동유세. 2009년 청주·청원 상생발전위원회 주민서명운동 발대식. 2010년 2월 중학생들의 졸업식 뒤풀이 스트리킹.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이들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모두 청주시 상당구에 위치한 성안길에서 이뤄졌다는 것. 정치인이나 시민단체, 청소년 등 계층을 불문하고 청주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 바로 성안길이다. 유동인구가 청주지역에서 가장 많은 곳으로, 청주지역 최대 상권, 최대 번화가 등이 성안길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지금은 젊은이들의 문화·패션1번지가 됐지만 주변에는 청주의 유일한 국보인 용두사지 철당간 등 많은 문화유적이 자리잡고 있어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곳으로 불러도 될 듯싶다. 문화와 삶의 치열함이 함께 숨쉬는 청주의 심장이기도 하다. ●일제 이후 한동안 ‘본정통’으로 불려 성안길은 지금은 해체되고 없어진 옛 청주읍성의 북문자리에서 남문 자리에 이르는 큰 길을 말한다. 이 때문에 청주읍성의 역사가 곧 성안길의 역사가 된다. 청주읍성은 예로부터 청주의 사회, 경제, 문화,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런 청주읍성 안쪽에 있던 길이었으니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과 함께 호흡하며 살았을 것이다. 청주문화사랑방을 운영하는 이철희(50) 청주시 문화관광과장은 “성안길은 천년 전에도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주읍성은 임진왜란시 최초로 승전고를 울린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곳이지만 일본에는 치욕적인 곳이다. 이 때문에 일제 침략기인 1920년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청주읍성은 완전히 파괴됐다. 당시 청주읍성 안에는 청주목과 충청병영 등 수많은 집무청과 객사가 있었는데 대부분 헐렸다. 이때부터 청주읍성의 가운데 큰길을 일본식 지명인 ‘본정통(本町通)’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광복이 됐지만 1990년대 초까지 많은 사람들이 ‘본정통’이라는 명칭에 숨겨진 아픈 역사를 모른 채 지금의 성안길을 ‘본정통’으로 불렀다. 본정통은 ‘한 도시의 중앙에 있어 중심이 되는 거리’라는 뜻으로 지금의 ‘중심가’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다행히도 1993년 청주문화사랑모임이 청주시민을 대상으로 좋은 이름을 공모해 ‘청주읍성 안쪽길’ 이라는 뜻의 성안길을 채택, 1994년부터 공식 이름이 됐다. ●유동인구 시간당 2000여명 달해 성안길은 ‘본정통’이라는 옛 이름답게 현재 청주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거리다. 시간당 2000여명이 유동하면서 청주 최대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서울 명동, 대구 동성로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가두 상권으로 불린다. 핵심부에 해당하는 로드상권 거리만 600m에 달한다. 은행, 우체국, 패션전문점, 백화점, 극장, 분식점, 고급레스토랑, 커피숍, 보석가게, 미용실, 병원, 헌혈의 집 등 없는 게 없다. 상권 점포수는 대략 2200여개다. 종사자만 6000여명에 달한다. 이 때문에 성안길에 오면 화려함과 함께 삶의 치열함을 동시에 느낄수 있다. 성안길 상가는 청주 경제의 뿌리이기도 하다. 올해 창립 91주년을 맞는 청주상공회의소의 시발점이 바로 일본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1919년 성안길 상인들이 구성한 청주상무연구회였다. 성안길은 1960년대 말 청주시가 도시정비사업을 하면서 차량이 다니던 도로에 보도블록을 깔아 차없는 거리를 조성하면서 상권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로드상권이 좌우로 흩어지지 않고 한줄로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동선이 끊기지 않는 상권의 이상적인 조건을 갖춰 최대 상권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안길이 젊은이들에게 열정을 토해내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라면 중·장년층들에게는 추억이 숨쉬는 곳이다. 장현석(62) 청주문화원장은 “청주인구가 15만명에 불과했던 1970년대 젊은이들이 갈 만한 다방, 극장, 제과점 등이 모두 성안길에 있었다.”며 “당시 성안길 뒷골목에 있던 돌체다방에는 청주지역 유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에 있었던 현대극장과 청주극장은 서점과 백화점으로 변했고, 순두부와 우동으로 유명한 그집식당과 공원제과는 지금도 성안길에서 맛과 추억을 함께 판다. 약속장소 1순위였던 중앙공원도 그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장 원장은 “성안길은 청주를 상징하는 길”이라며 “성안길에 속해 있는 가구점골목 같은 특색있는 거리를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는 방안이 추진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글 사진 청주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문화유적 즐비한 성안길 國寶 용두사지 철당간… 700년된 망선루… 성안길 곳곳에는 많은 문화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상점들의 화려한 네온사인 속에 역사가 함께 살아숨쉬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문화유적은 청주의 유일한 국보(41호)인 용두사지 철당간이다. 962년에 만들어진 용두사지 철당간은 신라말 고려초 사찰로 추정되는 용두사라는 절 앞에 있던 불기(佛旗) 게양대다. 당시 절들은 부처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기 위해 ‘당’이라는 깃발을 걸었다고 한다. 번화가의 높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즐비한 가운데 고고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는 철당간의 원래 높이는 18m였다고 한다. 고층건물이 흔하지 않던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위용이었을 것이다. 요즘 7층빌딩 높이 정도 되니 청주로 오는 사람들이 이 당간이 보이면 ‘청주에 다 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등대와 같은 구실을 했다고 한다. 철당간은 쇳물을 틀에 부어 찍어낸 원기둥을 쌓아올려 만들었다. 다행히도 세번째 원기둥에 ‘준풍(峻豊) 3년에 용두사에 철당간을 지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오랜 역사성을 알 수 있다. ‘준풍’은 고려 광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시기를 스스로 만들어 쓴 연호다. 성안길 인근에 위치한 중앙공원에 들어서면 지방유형문화재 110호인 망선루를 볼 수 있다. 망선루는 고려시대 청주목 관아의 부속 누정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7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충북도가 발간한 문화재지에 따르면 이 건물은 한때 ‘취경루’로 불렸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난으로 개성이 함락되자 왕은 공주와 더불어 남으로 피천해 안동으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를 행하고 방(榜)을 취경루상에 게재했다고 한다. 전란 중에도 청주에 머물며 과거를 행했으니 교육의 도시인 청주의 역사적 정체성에 일조를 한 건축물이라고 할까. 성안길에 있는 청원군청 내에는 고을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던 관아의 중심건물인 동헌이 있다. 이 건물의 처마 끝에 장식된 암막새기와에는 ‘조선 순주25년(1825)에 관아를 전면적으로 개축했다.’고 적혀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구조로 1982년 충북도 유형문화재 109호로 지정됐다. 이 밖에도 충청도 전체 방어를 맡았던 병마절도사의 출입문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충북도유형문화재51호),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 등이 ‘이초의 난’에 연루돼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대홍수가 나서 옥이 파손되자 이 나무위로 올라가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압각수(충북도 기념물 제5호), 임진왜란 때 청주성 탈환에 앞장선 조헌선생, 박춘무선생, 영규대사의 추모비 등도 성안길에 오면 만날 수 있다. 청주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이평주 성안길 번영회장 - 한복·영화 특화거리로 260m 인공수로 추진 “상인들이 똘똘 뭉쳐 성안길의 옛 명성을 되찾겠습니다.” 성안길은 아직도 청주 최대의 번화가이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상업지역이다. 하지만 청주 외곽지역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면서 신흥 상권이 형성돼 경기가 예전같지 않다. 성안길 번영회 이평주회장은 올해 지자체 도움 등을 받아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우선 6000만원을 들여 성안길 활성화 연구용역을 의뢰할 예정이다. 시민들을 성안길로 끌어들일 수 있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다. 또 20억원을 들여 성안길 상점들을 찾는 소비자들을 위해 주차장을 조성할 예정이다. 현재 부지를 물색중이다. 지난해 신종인플루엔자 때문에 열지 못했던 성안길 페스티벌을 오는 10월 초에 3일 일정으로 개최할 계획이다. 성안길 곳곳에서 펼쳐지는 페스티벌은 패션쇼, 인기가수 축하공연, 노래자랑 , 무료시식행사 등 다양한 행사로 꾸며질 예정이다. 성안길 페스티벌은 올해로 13회째다. 성안길 상점들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성안길 곳곳에 CCTV 40대도 설치하기로 했다. 이 회장과 상인들은 성안길만의 특색을 살린 문화의 거리 조성 계획도 갖고 있다. 성안길 내 남문로의 한복전문점 밀집지역에 한복의 아름다움과 전통문화를 적극 알릴 수 있는 한복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고,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 4곳이 자리잡고 있는 산업은행 주변에는 한류스타들의 동상을 세워 영화의 거리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이 회장은 “성안길은 전국 모든 상권에서 접근이 용이한 충북의 중심상권”이라면서 “청주를 대표하는 곳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성안길을 건강하고 유익한 곳으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청주시는 올해 30억원을 들여 성안길 260m에 인공수로를 설치할 예정이다. 도심물길창조사업의 일환으로 차없는 거리와 연계해 휴식공간과 특화거리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청주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고려시대 초대형 집터 발굴

    대전에서 고려시대의 초대형 집터 2곳이 발굴됐다.고려 중기 귀족의 장원(莊園)이나 대저택으로 추정되어 당시 고려 사회의 구조와 생활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백강문화재연구원은 “한국토지공사가 대전 서남부지구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유성구 상대동 일원 20만 7000㎡를 발굴조사한 결과,동서로 96m,남북으로 110~120m에 이르는 대규모 시설을 확인했다.”고 8일 밝혔다. 이 집터에는 외곽에 담을 둘렀고, 각종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2m에 이르는 두꺼운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내부에서는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큰 도로와 샛길이 확인됐고 저수시설,배수로 등이 드러나는 12세기 무렵 고려 귀족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시설이 다수 발굴됐다. 80㎝ 깊이까지 파고 돌을 쌓아 담장의 기초를 삼은 것으로 미루어 담장의 높이는 2~3m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담장의 높이와 두께 등이 모두 경복궁과 거의 비슷하다. 또 집터 내부에서는 누문지,행랑채 등 10여 채의 건물터가 확인됐다.또 ‘전창정○○’(前倉正○○),‘전부호장○○’(前副戶長○○),‘대장승○○’(大匠僧○○)와 같은 글자가 적힌 명문 기와들과 연화문와당,암막새 등도 함께 출토됐다. 이 집터로부터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동서 44m,남북 71m의 대형 집터도 발견됐다.아직 조사 초기 상황이지만,최근까지 민가가 들어서 있어 훼손 정도는 앞의 초대형 집터보다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서도 남북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그 곁에 40~120㎝ 폭의 배수로가 발굴됐다.또 주변에 가로수로 보이는 고사목 2그루가 확인됐다. 책임조사원인 박태우 연구실장은 “초대형 집터는 기존에 논밭이 있던 지역이라 보존이 상당히 잘돼 있는 것 같다.”면서 “건축 당시 상당한 노동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돼 조사 초반에는 사찰 또는 관청으로도 예상했으나,지역적 특성상 당시 중앙정권의 영향력이 미치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귀족의 대저택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실장은 또한 “근처에서 청동기시대와 백제,고려,조선의 분묘 밀집지역이 확인됐지만 이처럼 고려시대 대형 유구를 확보한 것은 의외의 성과”라면서 “12세기 고려 무인정권 당시 귀족들의 거주 공간에 대한 1차 자료를 확보했다는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 (16)‘천불천탑’의 야외 법당 화순 운주사

    [종교건축 이야기] (16)‘천불천탑’의 야외 법당 화순 운주사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인 운주사(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사적 312호)는 말 그대로 ‘신비의 땅’이다. 무등산 자락인 영귀산 아래 대초리·용강리 일대 길 옆이며 산자락에 수많은 불상과 불탑이 늘어서 있어 ‘천불천탑’사찰로 불리는 명소. 창건 시기나 가람과 관련된 정확한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아 숱한 설화들이 전해지며 지금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횡행하고 있다. 번듯한 전각은커녕 사찰에선 반드시 갖춰야 할 천왕문·사천왕상조차 없는 파격의 절집. 전통의 양식에선 한참 비켜 선 채 불탑·불상의 야외전시장쯤으로 비쳐지지만 사찰 곳곳에 서린 민중의 소박한 염원이며 도공들의 애틋한 정성 때문에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사찰의 이름대로라면 ‘구름이 머물다 가는 절’. 먼 옛날부터 運舟,運柱,雲柱,雲住 등 다양하게 불려왔지만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전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雲住寺’라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확인되면서 ‘구름이 머물다 가는 절’이란 ‘雲住寺’가 일반화됐다. 여러 이름만큼 누가 어떤 이유로 세웠는지에 얽힌 이야기도 가지가지다. 인근 마을에 중국설화에 전하는 선녀 마고할미의 이름을 딴 폭포와 손가락자국, 지팡이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고할머니 전설’, 신라 고승 운주화상이 신령스러운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창건했다는 이야기, 미래불 미륵의 혁명사상을 믿는 천민과 노비들이 모여 세웠다는 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선국사 창건설이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한반도를 배의 형국으로 보고 동쪽엔 산이 많지만 서쪽엔 산이 없어 나라의 운세가 일본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기 위해 배의 명치 부분인 운주사를 조성해 균형을 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한낱 ‘설’일 뿐 역사적 근거가 없다. 중종25년(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홍언필 편찬) ‘능성현조’의 “사찰 좌우 산등성이에 천불천탑과 석조 불감이 있는 운주사가 있다.”는 기록과 전남대박물관이 발굴한 암막새 기와와 ‘옴마니반메훔-밀교사원’이라 새겨진 수막새기와 등에 ‘운주사´란 이름이 등장한다. 이것 말고도 ‘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 사찰지 ‘범우고’,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도 이름이 들어있지만 모두 “천불천탑이 있다.”“폐사되었다.”는 정도의 단순한 내용이 고작이다. 학계에선 불상과 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대체로 11세기에 창건,12세기에 천불천탑이 조성됐고 13세기에 백제탑 등 다른 석탑이 추가 제작됐으며 정유재란 때 폐사된 것으로 본다.1942년까지 사찰 안팎에 석불 213기와 석탑 30기가 있었으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석불 70기와 석탑 12기가 전부. 하지만 최근까지도 곳곳에서 불상과 불탑의 조각과 흔적들이 발굴되고 있는 만큼 실제로 천불천탑이 있었을 것이란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평지와 야산 측면의 암벽 위아래에 무리지어 서있는 석불들은 대부분 큰 돌의 앞면만 조각한 평판상인데 기법이 아주 치졸하다. 정통적인 양식에선 한참 동떨어진 채 한결같이 못생겼다. 불상의 이목구비 생김새나 비례, 조형미가 엉성해 부처의 위엄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할머니 부처, 아빠엄마 부처, 아들딸 부처, 아기부처처럼 친숙한 우리 이웃들의 애환과, 구원을 바라는 민중의 표정을 사실적으로 다듬어내려 애쓴 석공들의 토속적인 심성엔 깊은 정이 절로 느껴진다. 고은 시인은 그래서인지 “지지리도 못나 말 한마디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56억 7000만년 후에 올 후천개벽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죽어버린 운주 천탑”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운주사는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통한의 땅”으로 그려진다. 다른 고찰들에서 보이는 번듯한 전각도 찾아볼 수 없다. 도선국사가 사찰을 지을 당시 공사를 총지휘했다고 전해지는 공사바위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웅전이며 지장전, 산신각, 일주문은 모두 1990년대 이후 만들어진 것. 허술한 가람과는 달리 사찰 중심의 석조불감(보물 797호)과 원형다층석탑(보물 798호), 일주문 안쪽의 구층석탑(보물 796호)은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석조불감은 판석으로 만든 감실 안에 두 개의 불상을 꽉 차게 봉안한 게 인상적이다. 불상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은 형식인데 사찰 한가운데 본존을 모신 것으로 보아 바로 이곳이 야외법당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석조불감 바로 북편의 원형다층석탑도 이색적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을 모두 원반형으로 꾸민 이 석탑은 6층이 남아있지만 전통적으로 홀수 탑을 세웠던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7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층석탑은 운주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탑. 큰 자연석 기단 위에 9층을 올렸는데 탑신의 각 면에 새긴 마름모꼴이나 그 안의 꽃문양은 이곳에서만 보여지는 특이한 것이다. kimus@seoul.co.kr ■ 무게 250t 자연석에 새긴 세계유일의 석조 ‘부부와불’ 운주사의 석불·석탑들을 만드는 데 썼던 응회암 채석장이 있는 서쪽 야산 정상엔 세계 유일의 거대한 돌(石) 와불이 있다. 신도들이 탑돌이하듯 이 와불 주위를 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만큼 운주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유적이다. 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형태의 일반적인 열반상과는 달리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길이 12.7m, 무게 150t 추정)과 선 모습의 석가모니불 입상(길이 10.26m, 무게 100t 추정)이 자연석에 나란히 조각된 형태. 두 불상이 나란히 누웠다 해서 ‘부부와불’로 통한다. 도선국사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천불 천탑을 하루 낮밤에 세운 뒤 맨 마지막에 두 부처를 세우려 했으나 공사 말미에 일을 싫어한 동자승이 일부러 “꼬끼오” 닭소리를 내자 석공들이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와불로 남게 됐다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와불 바로 아래엔 그 동자승이 벌을 받아 시위불(머슴미륵)로 변했다는 석불입상이 서있어 전설에 흥미를 더한다. 와불과 관련해 오래 전부터 “와불이 일어나는 날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말이 떠돌았으며 일제강점기에 이 속설을 믿은 일본인들이 불상을 훼손했다는,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도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석불의 북쪽 다리 부분이 남향의 머리 부분에 비해 5도가량 경사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상·입상 다리 부분과 좌상·입상 사이에 떼어내려 했던 흔적처럼 보이는 틈도 있다. 결국 산 꼭대기에 있던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긴 했지만 떼어내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보여진다. 전문가들은 “일으켜 세울 수 없는 돌부처를 암반에 조각했을 리 없고,250t은 충분히 됨 직한 거대한 석불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작정으로 암반에 조각했는 지를 고려할 때 설계 잘못으로 인한 공사중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 고대 ‘숟가락 거푸집’ 등 분황사 출토유물 첫 공개

    고대 ‘숟가락 거푸집’ 등 분황사 출토유물 첫 공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숟가락 주물용 거푸집(틀 위)과 가로·세로 15줄짜리 바둑판 전돌(벽돌 아래)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윤근일)는 11일 개막하는 ‘분황사 출토유물’특별전을 앞둔 10일 1990년 이후 분황사에서 출토된 전시유물 250여점에 포함된 이들 유물을 공개했다. 2004년 출토된 숟가락 거푸집은 길이 13.5㎝, 너비 16㎝이며, 숟가락을 주물한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2004∼2005년에 걸쳐 출토된 바둑판 모양 전돌은 길이 42㎝, 너비 43㎝에 이르는 대형으로, 일부분이 파손됐으나 원형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복원이 완료됐다. 숟가락 거푸집과 바둑판 전돌은 국내 유일하게 출토된 귀중한 유물로, 제작기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특히 바둑판 전돌은 중국 한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가로·세로 17줄짜리 전돌과 달리 15줄이 새겨진 유일한 전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신라 고찰로, 창건 초기에는 자장·원효 등 역대 고승이 활동하면서 왕실 원찰로서 번성을 거듭했다.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이뤄진 1차 중건 때는 금당을 건립하면서 사찰 자체로도 전성기를 누렸다.1990년부터 지금까지 8차에 걸쳐 이뤄진 발굴조사에서 ‘品’자형 금당 3채를 비롯,1차 중건 때 금당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화문수막새·쌍조문암막새 기와 세트 등이 발굴됐다. 이번 특별전에는 1915년 분황사 석탑 해체 보수작업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국립경주박물관 소장)와 기와세트 등도 전시된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기와집과 제와장(製瓦匠)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기와집과 제와장(製瓦匠)

    우리나라 옛집들은 자연 환경을 최대한 살려 지어졌다. 계절의 온도 변화와 일조량을 따져 터와 방향을 잡았다. 심지어 지붕의 각도와 높낮이도 자연을 고려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기와집은 선조들의 자연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와는 해마다 갈아야 하는 볏짚 등에 비하면 아주 튼튼하고 멋있는 건축 재료다. 기와를 지붕에 얹은 한옥은 정성을 들인 만큼 수명이 길고 아름답다. 지붕의 어느 부위에 쓰이느냐에 따라 각기 이름과 모양이 다르다. 처마 끝을 장식하는 막새기와를 비롯해 넓적한 모양의 암키와, 둥근 모양의 수키와가 낱낱이 정교하게 짜맞춰져서 커다란 지붕을 이룬다. 암막새란 암키와 끝에 장방형의 드림새가 있는 것이다. 수막새는 수키와 끝에 둥근 드림새(일명 와당:瓦當)가 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외에도 지붕 용마루 양끝을 높이 장식하는 치미( 尾)도 있다. 특히 살림집은 민족의 고유한 체취를 강하게 담고 있다. 이 요람 속에서 한국의 멋과 미가 오랫동안 자란 것이다. 한국의 기와집은 일본처럼 인위적인 기교를 자랑하거나 중국의 집처럼 장대한 위용을 뽐내지 않는다. 한국의 기와집은 조촐하고 의젓하다. 하늘을 향해 두 처마 끝을 사뿐히 들었지만 날아갈 듯한 경쾌함은 아니다. 단아한 추녀의 곡선에서 아낙네 저고리의 맵시가 느껴진다. 볼이 조붓하고 갸름하여 신으면 단정한 외씨버선 같은 기와지붕들이 서로 이마를 마주 비비고 모여선 곳. 여기엔 그 어떤 시새움이나 허세도 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와에는 억지로 멋을 부리는 잔재주가 담겨 있지 않다. 다만, 소박함을 따른다. 기와에는 한국인들의 온화한 미덕과 담담한 마음씨가 넉넉히 담겨 있는 것이다. 집 속에서 마음이 편하고, 멀리서 두고 바라보면 한층 정이 가는 것이 바로 기와집의 미덕이다. ■무형문화재 제와장 기능보유 한형준옹 “흙일하는 사람이 부자는 못 돼도 한때는 괜찮았지. 양철 벗기고 너도나도 기와 올렸으니깐.” 전남 장흥에서 이제는 나라 안에서 하나뿐인 기와막을 짓고 사는 한형준(78·중요무형문화재 91호 製瓦匠)옹. 그는 전통 조선기와 가마에 불을 지피며 호시절을 돌이켜본다. 세 칸짜리 홀집지붕을 덮는 데 드는 기와가 4000장. 너도나도 고래등 기와집을 올릴 때면 한씨 혼자 수만장씩 구워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으로 스레트지붕이 판을 치고 윤이 나는 기계식 기와에 시멘트 기와까지 득세하면서 한씨의 기왓장은 볼품없는 구닥다리로 전락해 갔다. 그는 그래도 “전통 기와는 매끈한 양기와가 따라오지 못할 질박하고도 은근한 멋이 있다.”며 주문을 해주는 이가 있기에 기와를 버릴수 없었단다. 지난해에는 주문이 거의 없어 가마에 딱 한번 불을 지폈다. “기와막 소는 먹을 살이 없다.”는 말처럼 일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단다. 암수 기와의 조화. 해학과 익살이 깃든 막새 문양. 자연과 이루는 소박한 화음을 어쩌면 더이상 보고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글 사진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제천 장락사 삼국시대 창건됐다

    지금까지 사찰 창건 시기가 불분명했던 제천 ‘장락사지’가 삼국시대에 처음 세워진 사찰의 터임을 입증해 주는 기와들이 쏟아져 나와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10월1일부터 충북 제천시 장락동 장락사지 발굴작업을 진행중인 충북대박물관측은 최근 “출토된 직선문기와 및 연화문기와, 무문기와 등으로 미루어볼 때 늦어도 삼국시대 말엔 장락사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장락사지엔 7층모전석탑(보물 제 459호)만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을 뿐 별다른 유물이 거의 없어 그동안 학계에선 장락사 창건 시기를 알아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 또 일부 학자들은 석탑의 형태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혹은 고려시대에 사찰이 창건됐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으나, 이번 발굴로 그 시기가 앞당겨지게 됐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장락사지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6차례에 걸쳐 중창되었음이 확인됐는데, 그때마다 토층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유물과 유구가 존재하는 지층은 표토층을 포함해서 6개 층위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3층에서 ‘長’자가 새겨진 명문기와 및 복합문기와, 청자류 등 고려시대 유구가,4층과 5층에서 직선문기와, 사선문기와 등 통일신라의 유구가 노출됐으며,5층 하부와 6층에서 무문(無紋)암막새기와, 연화문(蓮花紋)수막새새기와, 승문평기와 등 삼국시대 유구가 확인됐다. 모전7층석탑에도 접근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탑과 관련된 층위를 확인할 수 없어, 석탑 기단 하부의 층위를 조사해야만 탑이 세워진 정확한 시기 및 장락사와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양주 회암사 “옛 명성 사실이네”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에 있는 회암사의 옛터가 역사에 기록된 명성에 걸맞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원은 지난달 말 마무리한 제5차 발굴조사에서 건물터 7곳을 추가로 확인했다.이로써 1997년 이후 시굴 및 4차례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건물터는 모두 50군데가 됐다. 목은 이색이 남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따르면고려말 중창 당시 회암사 건물은 모두 262칸.현재까지 확인된 건물터가 222칸에 이르는 만큼 일부 남은 지역의 발굴이 이루어지면 목은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것이다. 지난 6월14일 시작된 제5차 발굴조사에서는 건물터 안에서 한 개의 큰 통돌로 가공한 수조가 확인됐다.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형태로 보아 욕조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절터 북동쪽 계곡에서 완벽한 형태의 집수정(集水井)을 찾아낸 것은 조경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커다란 판석으로 긴 네모꼴의 우물을 만들어,흘러내려오는 물을 채워 식수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밖에 두 점의 소조 인물두상을 비롯하여 회암사가 왕실과 깊은 연관을 맺었음을 보여주듯 용을 돋을새김한 암막새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그러나 회암사터 발굴의 가장 큰 소득은 절터 그 자체다.드러난 유구만 가지고도 절터에서는 장엄미가 느껴진다. 주말이면 찾아드는 적잖은 답사객들도 하나같이 감탄사를 토해놓는다.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회암사터는 무학대사의 부도와 쌍사자석등,선각왕사비 등 보물 셋과,지공선사·나옹화상의 부도와 석등,당간지주,거대한 맷돌 등이 있는 문화유산의 보고였다. 2005년쯤 발굴조사가 마무리되면 수도권 최대의 절터이자,경기 북부 지역에서 가장 매력있는 문화유적지로 떠오를 것이 확실해 보인다. 마침 경기도에서도 10만평에 이르는 회암사터의 종합정비 계획을 세워,경관을 해치는 이웃의 레미콘 및 섬유공장 등을 이전하고 유물전시관을 세우는등 역사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인도 고승 지공이 창건한 뒤 우왕 2년(1376년)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다시 지었으며,조선 성종 3년(1472년)세조비 정희왕후가 세번째로 크게 고쳤다.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물려준 뒤 이 곳에서 머무른 것으로 알려진다. 조사단은 그동안의 발굴에서 드러난 정청(正廳)과 동·서 방장지(方丈址)가 왕실과 관계된 건물지로 추정한다.이곳에서,경복궁 같은 궁궐지에서 주로나온 청기와가 다수 출토된 것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회암사가 폐사된 시기는,‘조선왕조실록’에 송도 유생들이 회암사를 태우려 한다는 소문에 왕이 걱정하는 내용(명종 21년,1566년)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조사단은 보고 있다. 실제로 발굴 결과 전각들은 하나같이 불에 탄 흔적이 있고,불상의 머리 부분만이 잘려진 채 몸통과 다른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기도 했다. 회암사터에는 발굴자료관(월요일은 휴관)이 마련되어 출토유물과 영상자료를 볼 수 있고,관계자들의 안내로 발굴현장도 둘러볼 수 있다.(031)865-0390. 양주 서동철기자 dc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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