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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王의 힘/한종태 논설위원

    태국을 여행하다 보면 중요한 장소에는 언제나 푸미폰 아둔야뎃(78) 국왕의 초상화가 걸려 있거나 관련 조형물이 설치돼 있는 것을 쉬이 알게 된다. 태국민들은 외국인들에게 통상 두 가지를 자랑한다. 하나는 1900년대 초반 서구열강의 아시아 침략때 태국은 한번도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온 국민의 추앙을 받는 국왕의 존재다. 입헌군주제에 따라 군림은 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국왕에 대한 태국민들의 존경심과 신뢰는 상상을 초월한다. 영향력 측면에선 왕정시대의 전제군주에 버금갈 정도로 푸미폰 국왕의 말 한마디는 법 이상의 효력을 발휘한다.2달여의 퇴진 시위와 정국 불안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던 탁신 치나왓 총리가 지난 4일 항복 선언을 한 것도 푸미폰 국왕을 알현한 직후였다. 그야말로 ‘왕(王)의 힘’이 발현된 것이다. 물론 푸미폰 국왕도 국민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게끔 행동해왔다. 오는 6월 재위 60주년을 맞는 그이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부정부패나 스캔들과 연관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국왕뿐 아니라 왕실 가족 누구도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하니 푸미폰 국왕의 높은 도덕성과 철저한 자기관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자신의 일가가 19억달러어치의 주식을 팔면서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은 탁신과는 크게 대비된다 하겠다. 국민을 끔찍이 생각하는 푸미폰 국왕의 ‘위민부모(爲民父母)’ 사례는 숱하게 많다고 한다. 왕궁에서 각계각층 국민들을 두루 만나 어려움을 청취하는 것은 기본이고, 나라에 가뭄이 들면 백성과 고통을 함께한다며 아예 식음까지 전폐한다고 하니, 한 나라의 군주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엄청난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지난날 절대권력자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힘깨나 쓴다는 인물치고 ‘내가 그런 도덕성을 가졌소.’라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불행히도 없는 것 같다. 여전히 브로커와 ‘게이트’가 난무하고 학연·지연과 같은 연줄이면 안 통하는 게 없는 사회….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스스로 모든 국민의 좌표가 될 만한 ‘큰 어른’을 모시려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게 아닐까 싶다. 한종태 논설위원 jthan@seoul.co.kr
  • 한국 순례객들 태극기 흔들며 정추기경 연호

    한국 순례객들 태극기 흔들며 정추기경 연호

    정진석(74) 추기경이 24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의 서임 예식에서 한국인 두번째로 가톨릭 추기경에 공식 임명됐다. 추기경을 배출한 65개국 가운데 2명 이상의 추기경이 나온 곳은 30개국뿐이다. 정 추기경은 이날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부터 추기경을 상징하는 진홍색 주케토(성직자가 쓰는 작은 모자)와 비레타(주케토 위에 쓴 세 개의 각이 있는 모자)를 수여받았다. 추기경으로 공식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서임식은 교황이 15명의 신임 추기경 임명장을 낭독하면서 시작됐다. 새 추기경들의 이름이 차례로 선포됐고 대표자가 감사 인사를 올렸다. 교황은 “추기경을 상징하는 진홍색은 추기경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평화, 가톨릭 교회의 자유와 복음 선포,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고 강론했다. 새 추기경들은 교황의 강론 후 신앙고백과 교회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다. 정 추기경은 25일 교황과 함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서임 축하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추기경 반지를 받는다.27일 교황을 다시 알현한 뒤 30일 서임 축하 순례단과 귀국한다. 베네딕토 16세는 정 추기경의 이름을 8번째로 선포했다. 교황이 ‘니콜라스 정진석’을 부르자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정 추기경은 주케토와 비레타를 수여받기 위해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추기경의 상징 복제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성 베드로 광장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평신도협의회 한홍순 회장 등 한국 순례객 300여명이 단상 우측 아래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정 추기경의 이름을 불렀다. 일부 순례객은 한복을 차려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정 추기경은 23일 한국 취재진과의 기자회견을 갖고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발전했다는 표지이며 국민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국민 전체가 가정의 행복을 누리며 모두가 생명을 존중하며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생명 존중이야말로 인권의 첫째”라고 지적했다. 그는 낙태와 저출산을 주요 문제로 들었다. 평양 교구장을 겸직하고 있는 정 추기경은 또 “남북한이 서로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이 열려야 화해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교황의 북한 방문과 관련,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다. 정 추기경은 “해방 후 공산주의 치하에서 천주교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행방불명돼 현재까지 생사를 알 수 없다.”면서 “북한에 성직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교황이 북한을 방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바티칸 연합뉴스
  • 탁신 泰총리의 ‘승부수’

    부패와 권력남용 의혹으로 퇴진 압력을 받아온 탁신 치나왓 태국 총리가 24일 의회(하원)를 해산하고 오는 4월2일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로 했다.●4월2일 조기총선 실시 탁신 총리는 이날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을 알현하고 나와 기자들과 만나 “국왕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태국 헌법에는 국왕이 총리의 요청을 받아 의회를 해산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왕실은 이어 국영 TV를 통해 총선 날짜가 4월2일로 잡혔다고 발표했다. 탁신 총리는 퇴진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권좌에 오른 지 꼭 1년 만이다.2001년 취임한 그는 지난해 2월 총선 압승을 통해 재선됐다. 탁신 총리는 전날에는 푸미폰 국왕의 수석 고문격인 프렘 틴술라논 왕실 추밀원장과 면담했다. 프렘 추밀원장은 “여론에 더욱 귀를 기울여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탁신은 그의 가족들이 소유한 이동통신 재벌 ‘친 코퍼레이션’의 주식을 싱가포르 회사에 19억달러(약 1조 9000억원)에 팔아 엄청난 차익을 챙기고도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의 정치적 스승으로 불리는 잠롱 스리무엉 전 방콕시장도 퇴진을 요구해 왔다.●내일 대규모 反정부집회 탁신 총리는 또 비현실적인 의료보험과 주택정책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지난해 태국의 무역적자가 사상 최대에 이르는 등 경제가 좋지 않은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마약과의 전쟁과 남부 이슬람 3개주의 분리독립 운동에 강경 대응해 최근 수년간 수천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조기 총선이 실시되면 탁신의 지지 기반인 저소득층과 농촌 지역의 표를 바탕으로 재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현재 하원 500석 중 124석을 갖고 있는 반대파가 이번 총선을 통해 총리 불신임안을 상정하는 데 필요한 200석 이상을 확보할 수 있을지가 관심이다.한편 일요일인 26일 방콕의 왕궁 사원 옆 ‘사남 루엉’ 공원에서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학생과 교사, 노동자, 중산층 등 10만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北선교 염두 정대주교 낙점한듯

    北선교 염두 정대주교 낙점한듯

    정진석(75) 대주교의 추기경 임명은 지난해 새 교황 즉위 이후 로마교황청 주변과 국내 천주교계에서 꾸준히 거론돼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는 지난해 서거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시절 추기경 임명 때마다 번번이 고배를 들었던 것에 비춰 새 교황 즉위 이후 첫 추기경 인사인 이번 발표에 특별히 주목했으며 마침내 ‘37년 만의 새 추기경 탄생’이란 낭보를 들을 수 있었다. 천주교계는 당초 새 추기경단 발표 시기를 겨울 절기를 피해 여름 휴가 이전인 6월쯤으로 관측했으나 이날 교황청의 발표로 미루어 볼 때 그동안 새 정책집행을 미뤄오던 교황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한다. 추기경 임명은 철저하게 교황의 재량에 달려 있는 만큼 이날 정 대주교의 낙점은 전적으로 교황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해 성탄절 메시지에서 ‘한반도에 대화의 분위기가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특별히 담을 만큼 한국과 한국의 천주교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공산권 사목에 대한 기대가 커 분단상황에 있는 한국 천주교에 기대가 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평양교구장을 겸하는 정 대주교를 낙점했을 것으로 천주교계는 보고 있다. 국내 천주교계와 정부 당국의 노력도 한국 추기경 추가 탄생에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나와 있는 역대 주한 교황청 대사들은 줄곧 한국 천주교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추기경 추가 임명의 필요성을 교황청에 건의해 왔다. 여기에 새 교황 즉위 이후 수차례에 걸친 김수환 추기경의 추가 임명 탄원, 지난해 4월 정동채 문화관광부장관의 교황 알현, 최근의 노무현 대통령 친서 등이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천주교계는 정진석 대주교의 추기경 임명이 나라 안팎으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선 천주교계는 현재 한국 유일의 추기경인 김수환(84) 추기경이 80세를 넘어 교황 선출권이 없고 서울대교구장 은퇴 이후 활동 폭이 좁아진 상황에 주목한다. 이와는 다른 입장에 있는 정진석 새 추기경의 경우 추기경회의에서 활발하게 의견을 낼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을 바탕으로 퇴조 분위기의 교세확장에도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다. 한국 천주교는 450만명에 이르는 신도들을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새 추기경 탄생을 애타게 기다려 왔다. 여기에 한반도의 통일과 북한 선교를 위해서도 평양교구장을 겸한 새 추기경의 역할이 크며 한국 정부도 새 추기경을 통해 국제사회의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정진석 대주교는 올해 말로 정년 퇴임이 예정돼 있으나 추기경 임명에 따라 교구장 임기가 3∼4년가량 연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교황 한국 방문·새추기경 임명 긍정적”

    “교황 한국 방문·새추기경 임명 긍정적”

    지난해 요한 바오로2세 서거후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에 취임한 지 10개월여가 지났지만 로마교황청은 눈에 띌 만한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례적으로 행정체제와 교시 등에 있어서 전 교황때의 것을 그대로 유지한 채 추기경을 비롯한 요직 인사도 미루고 있어 세계 천주교계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의 고위 인사들은 한국의 천주교를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으며 세계, 특히 아시아권에서 한국 천주교의 역할에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외공관장회의 참석차 일시 귀국한 성염(64) 주(駐)로마교황청 대사를 만나 바티칸 분위기와 한국천주교에 대한 로마교황청의 입장을 들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체제의 교황청 분위기와 한국 천주교에 대한 입장변화가 있다면. -예전 같으면 벌써 새 교황의 통치철학이나 기조정책 발표가 나왔어야 한다. 교황이 지난달 25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제목으로 가톨릭의 일반적인 원칙을 담은 첫 회칙을 낸 게 전부일 만큼 전 교황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교황이 성탄절 메시지에 “한반도에 대화의 분위기가 지속되길 바란다.”는 내용을 포함시킨 것은 한국과 한국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큼을 보여준 것이다. ▶교황청이 이처럼 한국에 대해 갖는 각별한 관심과 기대는 무엇 때문인가. -우선 신자 수를 볼 때 다종교국가인 한국에서 천주교의 위상은 바티칸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각계각층에서 신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고, 인권 등 사회발전 측면에서 한국천주교가 해온 역할에 특히 주목한다. ▶교황의 한국 방문과 한국에서의 새 추기경 임명이 자주 거론되는데. -세계 30여개국에서 새 교황을 초청해놓고 있지만 금년 상반기 핀란드와 올해말 터키 방문 정도만 확정되었다. 지난해 11월 바티칸에서 열린 각국 주교 대표들의 모임인 주교 시노드 폐막때 노무현 대통령이 친서를 전달, 교황의 한국 방문 요청과 새 추기경 임명에 대한 희망의 뜻을 밝혔지만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없다. 하지만 고위 인사들의 우호적인 발언과 관심으로 미루어 볼 때 양쪽 모두 낙관적이다. ▶바티칸에서 대사로 재임하면서 바라본 한국 천주교는 어떤 모습인가. -전통적으로 한국 천주교와 바티칸의 관계는 아주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 지난 30∼40년간 한국 천주교가 우리 사회에서 앞장서온 진보적 노력을 바티칸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어 흐뭇하다. 천주교 신자가 전체 인구의 9∼10%를 차지하는 한편 불교·개신교세가 만만치 않게 강한 다종교국가인데도 불구하고 종교분쟁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한마디로 신기한 나라다. ▶황우석 교수 파문에 대한 교황청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공식 논평은 없었지만 지난해말 수요알현 때 교황이 광장에 모인 신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면서 “배아가 생명으로 발전한다.”고 언급한 것은 바로 황 교수 사태에 대한 윤리적 차원의 발언으로 해석된다. 바티칸은 “과학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에서 풀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을 갖고 있고 한국의 과학자들이 자체검증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풀어 나가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독교 퇴조는 일반적인 흐름으로 한국에서도 냉담자가 증가하는 등 크게 다르지 않은데. -국내외 모두 ‘신앙의 사사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성당이나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과, 평소 정치·경제논리에 지배받지만 신앙은 나름대로 유지하는 이원화의 문제랄 수 있다. 현대의 바쁜 삶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신앙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공동사회의 것이라는 전통의 공동체적 신앙생활을 무시할 수 없다. 바티칸에서도 신앙생활이 삶의 원동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신앙과 삶의 통합 사목을 강조하고 있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녹색공간] ‘국민 총행복’의 기수 부탄 王/박은경 환경과 문화 연구소 소장

    동화 속의 왕 같이 빼어나게 잘 생긴 지그메 싱예 왕추크왕은 우리 일행을 따뜻이 맞아 주었다. 갈색과 겨자색이 어울린 세련된 디자인으로 단장한 부탄 왕의 집정실에서 만난 국왕은 50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30대 청년같은 젊음과 정기가 있었다. 소왕국 부탄은 중국의 티베트자치국과 인도 국경사이 히말라야 대간에 자리잡았고, 수도 팀부는 해발 2500m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작은 계곡에 위치하였다. 방콕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 6시부터 서둘러 부탄 국적기 두르크 항공 비행기를 타고, 인도의 콜카타를 거쳐 파로공항에 도착하였다. 골짜기 작은 강가에 위치한 이 공항은 100여명의 승객이 내리기에 적합하였다. 지난 10월초 유엔 환경프로그램(유네프)의 퉤퍼 사무총장과 관련인사 7명은 초청자인 왕을 알현할 기회가 있었다. 예정된 30분의 시간이 1시간으로 길어진 대담시간 동안 왕추크 왕은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정책적 소신을 찬찬히 밝혔다. 이미 전 지구적 관심이 된 ‘국민총생산’이 아닌 ‘국민총행복’에 대하여 왕으로부터 직접 듣는 영광의 자리였다. 특히 동·서남아시아에 대한 왕의 소상한 이해는 방문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필리핀의 환경장관 출신 하비토 교수가 자국으로 돌아가 칼럼을 쓰겠다고 하자 왕은 “당신국가 지도자가 불행해할 걸요?”라고 방문자들을 웃게 하는 재치까지 보였다. 10월4일 뉴욕타임스에 ‘행복한 작은 왕국의 새 행복척도’라는 기사가 실린 후 한국의 일간지들에도 부탄에 대한 기사가 실리면서 부탄의 행복척도에 대하여 묻는 이가 부쩍 많아졌다.3만 8394㎢, 인구 70만명의 소국 부탄은 30여년전부터 왕추크 왕의 영도아래 국가 발전의 철학과 정책을 국민들의 행복에 맞추어 왔다.‘국민총행복’의 개념은 4개 영역을 균형되게 유지하려는 정책으로 실현되고 있다. 즉 부탄의 문화적 전통의 유지, 교육과 건강에 대한 복지, 친 환경적 노력 및 투명하고 책임있는 거버넌스를 ‘행복만들기’ 정책의 기본으로 잡고 있다. 경제적 발전보다 국민들의 정신적 삶에 초점을 맞추어서 국민들의 행복을 최대화하려는 독특한 의지가 반영된 정책이다. 아시아 태평양지역 환경저명인사 7명만이 참여한 2일간의 유엔환경프로그램 정책 지역협의회는 개회식 의장 틴리 총리가 환경부장관, 문화부장관을 배석하고 스님 세명과 함께 주관하였다. 회의 개회식에 신을 부르는 부탄의 전통의례는 국민 총행복의 문화전통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목축국가의 표상인 우유를 가득 담은 함지박을 가운데 놓고 스님들의 찬송 속에 의례 주례자가 회의장 밖에 우유를 담은 국자 같은 기구를 들고 들락거리며 정중하게 진행하였다. 한국 전통사회의 굿의례에서 첫거리에 등장하는 청신의례와 의미가 같았다. 길에 걸어다니는 부탄인은 누구나 부탄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무릎길이의 ‘고’라고 하는 남자들의 허리를 묶은 간단한 옷과 ‘기라’라고 하는 여자들의 긴치마이다. 내 평생에 길거리에서 남자들의 다양한 다리를 가장 많이 본 사흘간이었다. 반면에 여성들은 긴치마로 몸을 가리고 있다. 부탄의 모든 교육은 무상이다. 하나밖에 없는 대학까지도 무상교육으로 이루어진다. 병원비도 무료라서 우리 같은 여행객도 부탄에서는 무료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하루에 한두편의 두르크항공기만으로 제한하는 정책은, 물론 파로공항의 자연적 입지로 인한 운항의 난점도 있겠지만 자신들의 환경을 인간들의 무차별관광으로 망가뜨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비행기 트랩을 내리는 순간 느꼈던 그 짜릿한 강한 햇살과 맑디맑은 공기 속에 순간적으로 지구가 아닌 다른 위성에 온 것 같던 느낌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감각속에 살아 있어 다시 맛보고 싶은 강한 열망을 유발한다. ‘국민총행복’의 네 번째 요소인 투명하고 책임있는 거버넌스는 지난 30여년간 왕추크왕이 키워 온 국민총행복의 개념과 정책은 물론 2008년에 의회민주주의를 실현시켜서 왕의 자리를 명예직으로 바꾸려는 왕추크왕의 집념속에 잘 녹아 있다. 네 명의 여자형제를 왕비로 거느린 동화 속 왕추크왕의 모습에 알현 인사하였던 필자는 1시간의 대담 후 부탄사회의 현명한 영도자의 모습에 작별 인사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박은경 환경과 문화 연구소 소장
  • [유림 속 한자이야기] 封建(봉건)

    儒林 (438)에는 ‘封建’(봉할 봉/세울 건)이 나오는데, 이 말은 ‘천자가 나라의 토지를 나누어주고 제후를 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던 일’을 가리킨다. 封자의 왼쪽은 한 그루 나무의 상형과 흙이 결합된 형태로 ‘나라끼리 영토를 구분하기 위해 경계선에 심은 나무’를 뜻한다. 여기에 손의 상형인 ‘又’(또 우)에 점을 찍은 ‘寸’(마디 촌)을 덧붙여 지금의 ‘封’자가 되었다.用例(용례)에는 ‘開封(개봉:봉하여 두었던 것을 떼거나 엶),封鎖(봉쇄:굳게 막아 버리거나 잠금)’ 등이 있다. 建자는 원래 ‘도로를 설계하다’란 뜻을 나타냈다.‘세우다’‘일으키다’ 등은 여기서 派生(파생)했다.‘建設(건설:새로 만들어 세움),建議(건의:개인이나 단체가 의견이나 희망을 내놓음, 또는 그 의견이나 희망)에 쓰인다. 흔히 ‘封建’이라 하면 우선 봉건 사회의 성립과 존속의 바탕이 되었던 因襲的(인습적)이고 專制的(전제적)인 前近代的(전근대적) 思想(사상)을 연상한다. 봉건 체계 내에서는 체제 유지를 위하여 主從關係(주종관계)나 忠孝(충효)를 중시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봉건제도의 근본취지에 부합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異論(이론)이 분분하다. 중국을 통일한 周(주) 나라의 天子(천자)는 일정한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諸侯(제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冊封(책봉)이라 하고, 그 의식 절차를 책명(策命)이라 한다.冊封을 받은 제후는 정기 또는 부정기적으로 천자를 謁見(알현)하고 자신이 遂行(수행)한 任務(임무)를 報告(보고)한다. 이에 대응하여 천자는 定期(정기) 또는 不定期的(부정기적)으로 제후들이 자신이 管掌(관장)하는 地域(지역)을 잘 다스리고 있는지 돌아보는데 이러한 천자의 방문을 巡狩(순수)라고 한다. 이때 천자는 동행한 太師(태사)에게 명하여 민간의 詩歌(시가)를 採錄(채록)하여 올리게 하고, 저자의 관리자에게 物價(물가) 動向(동향)을 보고토록 하여 민정을 살핀다. 또한 제후는 정기적으로 천자의 조정에 使臣(사신)을 보내는데 이를 聘門(빙문)이라 한다. 제후가 천자를 알현할 때는 자기 관할 지역에서 생산한 特産物(특산물) 등을 禮物(예물)로 가지고 가는데 이를 朝貢(조공)이라 한다. 조공품을 받은 천자는 제후가 돌아갈 때 答禮(답례)로 많은 선물을 주었다. 이것이 回賜(회사)이다. 주나라의 封建의 근본 취지는 결코 물리적 힘으로 천하를 통치하는 覇道(패도)가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윤리적 정신문화의 敎化(교화)를 통해 그들을 지도하여 “천하가 한 가정이고 온 나라 안이 한 몸”(天下一家 中國一人:천하일가 중국일인)인 상태를 이루는 王道(왕도)인 것이다 이처럼 봉건제도에서는 혈연적으로 친한 사람을 친하게 대하는 태도인 ‘親親’(친친)과 어진 이를 존경하는 태도인 ‘賢賢’(현현)이 배합되어 존경할 대상에 대하여 마땅히 존경을 표하는 ‘尊尊’(존존)의 태도를 숭상하였다. 혹자들은 孔子(공자)를 소수에 의한 다수의 세습적 지배를 정당화한 體制(체제) 擁護論者(옹호론자)라고 批判(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孔子를 힘의 논리에 의한 패권주의적인 체제 옹호론자라고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 (철학박사)
  • 교황 선종전 마지막 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지난 4월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마지막 남긴 말은 “하느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소서.”였던 것으로 바티칸 당국이 최근 발간한 문건에서 나타났다. 바티칸 출판부는 교황의 감기 증세로 일반인 알현이 중단된 지난 1월31일부터 선종 때까지 교황 말씀을 날짜와 시간별로 기록한 220쪽 분량의 공식 문건을 발간, 교황청에서 판매하고 있다고 17일 밝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선종 6시간 전(혼수 상태에 빠지기 3시간30분 전) 작고 희미한 목소리로 “하느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폴란드어로 말했다고 이 문건은 적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지막 말씀 등을 담은 대부분의 기록은 그동안 바티칸 당국에 의해 발표된 바 있으나 이번에 발간된 문건은 더 세세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문건은 요한 바오로 2세 선종과 관련해 모든 것이 공개되었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앞으로 불거질 의혹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세간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전임으로 1978년 즉위 33일 만에 사망한 요한 바오로 1세를 포함해 전임 교황의 최후에 관한 추측과 의혹이 난무했었다. 이번 문건은 두 차례에 걸쳐 입원했던 요한 바오로 2세의 증세와 간호, 치료 과정,84세 일기로 지난 4월2일 오후 9시37분(한국시간 3일 오전 4시37분) 서거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담고 있다. 바티칸시티 AP 연합뉴스
  • “교황, 남북 동시방문 긍정적”

    최근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알현한 성염 주 로마교황청 한국대사는 13일 “남북한 동시방문 요청에 대해 교황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다. 성염 대사는 이날 평화방송 시사프로 ‘열린 세상 오늘, 장성민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주 교황청 외교사절단이 12일(현지시간)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교황과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성염 대사는 인터뷰에서 “제가 ‘현재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에서 왔다.’고 소개했더니 교황께서 제가 한국에서 온 것을 즉시 알고 상당히 반가워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마치 억지로 두 몸으로 갈라진 샴쌍둥이 같은 처지다. 남북 화해를 위해 교황님의 축복이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교황님이 남북한을 동시에 방문하시면 한반도 긴장완화에 큰 도움이 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교황께서 ‘제발 그 말씀대로 제게 이뤄지길 바란다.’며 긍정적인 뜻을 담아 답변하셨다.”고 덧붙였다. 성염 대사는 “면담 당시 교황께서 의외로 상당히 밝은 표정으로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유일하게 분단을 겪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적극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 같다.”고 해석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정동채장관 “교황 방한 추진”

    새로 즉위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한국방문이 추진된다. 경축 사절단을 이끌고 베네딕토 16세 즉위 미사에 참석한 뒤 26일 오전 귀국한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은 평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전화인터뷰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한국에 공식 초청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정부 차원에서 외교적 예의를 갖춰 초청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혀 노무현 대통령이 교황을 공식 초청하는 형식이 될 것임을 시사했다. 정 장관은 또 “교황을 알현할 때 한국에 새 추기경을 서임해줄 것을 요청하자 활짝 웃으며 ‘물론 그래야지.’하는 뜻으로 화답했다.”며 “머지않아 새 추기경이 탄생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플라시도 도밍고 “교황의 詩 노래로”

    |마드리드 AFP 연합|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서거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생전에 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스페인 일간 ABC가 12일 보도했다. 도밍고는 “작곡가인 아들에게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를 가사로 곡을 써달라고 부탁했다.”면서 “시들을 조만간 사용할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도밍고는 자신이 교황의 열렬한 숭배자였다면서 교황을 세 번 알현한 적이 있으며 교황을 위해 공연한 적도 세 번 있다고 전했다. 그는 교황이 빠른 시일 내에 성인(聖人)으로 추대됐으면 한다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위대한 교황이었기 때문에 그 후임자가 자신을 요한 바오로 3세로 명명한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기고] 인권의 사도 요한 바오로 2세/이동익 신부·가톨릭대 교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처음 알현한 때는 1985년 가을이었다. 당시 로마 유학 초창기에 교황님의 숙소 경당에서 교황께서 집전하시는 미사에 참여하면서 가까이에서 뵐 수가 있었고, 그 이후 7∼8차례 직접 알현하는 행운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미사를 위해 한국말 발음을 연습하실 때의 끈기와 열정이라든가, 알현시 필자가 한국 사제라는 것을 아시고는 한국말 인사와 당신이 기억하시는 몇몇 한국 단어로 답해주시는 교황님의 모습에서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과 한국민 전체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1984년 교황님께서 한국을 처음 방문하시고 난 후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 신자가 세배로 늘어난 것도 그 분의 한국 사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따라다니는 별칭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인권의 사도, 평화의 사도, 진리의 사도, 희망의 사도 등등…. 필자는 이 중 인권의 사도에 대해서만 잠시 회상하려고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에 선출되고 이틀 후 교황직 수락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순간, 경제, 사회, 정치, 종교적인 모든 불의와 차별로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낼 것입니다.” ‘인권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취임 첫 연설에서 강하게 피력하셨고, 이러한 의지는 교황직 수행 전체에 걸쳐 잘 드러난다.200만㎞를 넘는 130여개 나라의 사목방문은 인권의 사도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러 형태의 억압과 폭정이 있는 나라들을 방문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고 빈부의 격차와 사회 불의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시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가는 수많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교회와 국가는 늘 깨어있을 것을 촉구하셨다. 인권의 사도로서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는 단연 1989년부터 시작된 소련과 중·동부 유럽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공산권의 붕괴 뒤에는 교황과 미국의 동맹이 있었다고도 말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의 관심은 권력의 붕괴보다는 권력 때문에 희생되는 가난한 사람, 생존권을 위협받는 사람, 양심과 자유를 제한당하는 사람들이었다. 1991년에 반포한 회칙(回勅)‘백주년’에서 교황은 1989년을 회상하면서 여러 나라의 독재와 압제정권이 붕괴된 원인으로 교회가 지난 100년간 자신의 직무로서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는 것을 피력함으로써 소련을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변화에 당신께서 모종의 역할을 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41년 사랑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형님이 묻혀있던 가족묘에 시신을 안치하면서 극도의 고통과 외로움, 절망 속에 그 무덤에서 무려 12시간이나 기도했다고 한다. 이 때 고통받고 외로움에 힘들어하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전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고, 사제의 길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사제가 된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이 된 후에도 아버지의 죽음 당시에 느꼈던 비참한 현실을 세계 각처에서 보게 되었고, 구체적인 현실의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희망이라고 여기면서 그 희망을 온 삶으로 보여주신 ‘인권의 사도’로서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권의 사도’로서의 삶이 주는 메시지는 “인간, 교회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난한 인간, 고통받는 현실의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추구해야 할 길이며, 그 이유는 이 세상과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이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도 생전에 그리스도께서 가신 이 길을 걸어가셨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이동익 신부·가톨릭대 교수
  • [교황 서거] 교황 어록 “전쟁은 인류의 패배”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 또한 행복하시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상태가 악화되기 전 자신을 알현한 폴란드 신부와 수녀들에게 남긴 작별 메모의 내용이다. 서민적이고 겸손하면서도 용기있는 지도자로 평가받았던 교황의 면면은 그의 발언을 통해 나타나곤 했다. ●“전쟁은 항상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인류의 패배다.” 2003년 1월13일 이라크 개전 직전에 외교관들에게 이같이 말하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다. 이후 바티칸과 미국은 불편한 관계가 됐다. ●“두려워 마라. 그리스도에게로 문들을 활짝 열어라.” 1978년 10월16일 교황선출 뒤 첫 대중연설서. ●“기독교도와 무슬림은 과거에 서로를 비난하며 전쟁 지경까지 갔었다. 이같은 습관을 고치라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다고 나는 믿는다.” 1985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종교간 대화를 강조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1986년 인도 방문 중. ●“여러분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이다.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은 우리의 형이다.” 1986년 로마 시나고그를 방문한 자리에서 유대교도들에게 한 말. ●“나는 83세의 젊은이” 2003년 5월 마드리드에서 젊은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교황은 “젊은 교황을 원한다고요. 사실 나도 젊은 교황이라고 생각하는데.”라고 농담을 던졌다. ●“오늘날까지 유대인 대학살 사건은 반유대주의가 인류에 큰 죄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1994년 출간한 저서 ‘희망의 문지방을 넘어’에서 ●“교황은 바티칸 안에 갇혀 있어선 안 된다. 초원의 유목민들로부터 수도원 수사, 수녀들까지 만나고 싶다. 또 모든 가정을 방문하고 싶다.” 취임 초기 기자들에게. ●“모든 종교가 지구촌에 정의, 평화, 용서 그리고 생명을 가져 올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미국의 9·11테러 이후 2002년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열린 종교지도자 회의 연설.
  • 배양일 전 駐교황청대사 ‘내가 만난 교황’

    그토록 바라시던 북한방문의 꿈을 못 이루신 당신을 그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로서 첫 임무를 받으시고 지구상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25년 6개월간의 재위를 마치신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서거를 한없는 슬픔 속에서 추도드립니다. 2002년 2월말 주교황청 대사의 임기를 마치면서 이임인사차 마지막 알현했을 때 3년간 정든 저를 보내는 아쉬움으로 묵주를 건네면서 손을 꼭 잡고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 칭찬하시던 그 체온과 음성이 아직 제 곁에 머물고 있기에 슬픔은 더욱 강하게 느껴옵니다. 교황께서는 폴란드 출신으로서 조실부모하고, 성장기에 조국이 위기에 처하였던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시대의 비극을 경험했고 소비에트 공화국 침공의 쓰라림을 이겨내면서 조국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위하여 살아오셨기에 강인함 속에서도 인자로운 풍모를 지녀 역대 교황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면서 서민적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셨기에 주재국 대사들에게도 남다른 인기를 보여주셨습니다. 1978년 10월22일 264대 교황에 즉위,2년반 만인 81년 5월 베드로광장에서 터키 청년으로부터 피격당해 최대의 위기를 맞은 교황께서 그 청년을 만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형제로서 만났으며 오늘에 사는 나는 그를 용서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라고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세계 평화, 사랑, 일치, 용서를 표명하신 평화의 사도, 당신에게 전 세계가 호응을 보내고 종교를 초월한 일치운동에서도 진전의 계기가 되고 있음을 우리 주변에서 보고 있습니다. 교황께서는 한국천주교 200주년인 1984년 5월3일 가톨릭 신자와 한국민 모두를 위해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한국에 오셔서 미사를 비롯한 전례를 집전하시고,103위 한국 순교복자의 시성을 거행하셨습니다. 이는 시성식이 바티칸에서 거행되는 전례를 깨고 파격적인 해외에서의 대규모 시성식이었습니다. 당시 공군장교였던 저는 헬기로 교황님을 모시면서 지방행사를 수행했습니다. 광주, 소록도, 대구, 부산을 거쳤고 특히 소록도에서 나병환자를 직접 위로, 기도하시는 당신의 모습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또한 당신께서는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도 한국을 방문하시어 한국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보여주셨습니다. 해외 순방 일정상 두 번이나 같은 곳을 방문한 것은 조국 폴란드 외에는 드문 일이기에 한국 사랑이 남다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군 예편 후 한국을 대표하는 주바티칸(교황청)대사로 보임되어 1999년 3월 교황께 신임장을 증정할 때 사실 기쁨과 걱정이 교차되었습니다. 그 기쁨은 1984년 한국방문 때 헬기로 수차례 모신 인연을 가진 제가 주재국 대사가 되어 대희년(2000년)의 가장 영광된 기간에 당신을 모시면서 대한민국의 대사로 보임된 것이었습니다. 반면, 걱정은 방한 때의 건강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반가워하시며 우리 국민의 IMF 극복 노력을 칭찬하시는 모습을 통해 정신적으로 건강하심에 감사했습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교황청을 국빈방문했을 때 영국여왕에게도 부여되지 않은 방문의 격을 통상 공식방문에서 국빈방문으로 상향해 맞아주셨고 베드로성당의 순시 때에도 교황 특별통로로 승용차를 사용케 하신 것은 한국에 대한 배려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한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정상회담 때 “북한방문은 기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에서 남북화합을 바라는 높은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토록 바라시던 북한방문의 꿈을 못 이루신 당신을 그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습니다.
  • [국제플러스] 교황, 독감으로 또 입원

    |바티칸시티 AFP 연합|교황 요한 바오로 2세(84)가 24일(현지시간) 퇴원한 지 2주 만에 독감이 재발해 로마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됐다고 교황청이 밝혔다. 교황청은 이날 성명을 통해 “교황의 독감 증세가 전날부터 악화돼 오전 10시45분께 ‘전문적인 치료와 추가 검사’를 위해 교황을 게멜리 폴리클리니코 병원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교황은 독감과 후두경련으로 지난 1일 입원했다가 10일 퇴원한 뒤 23일 수요 정례 일반 알현을 갖는 등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날 오전 새 성인(聖人) 후보자들을 접견하는 자리에 참석하기로 했다가 뚜렷한 설명없이 불참했다.
  • 표해록/최부 지음

    조선 성종 때인 1488년, 제주도에서 추쇄경차관이라는 관직을 맡고 있던 최부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제주를 떠나 고향 나주로 향한다. 최부를 포함한 43명의 일행은 날씨가 궂으니 배를 타지 말라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길을 나선다. 출항 이틀째, 최부 일행은 결국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뱃길을 잃고 대양을 표류하는 신세가 된다. 표류 14일째, 최부 일행은 가까스로 중국 저장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구의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중국이 최부 일행을 왜구로 간주한 것이다. 그들은 온갖 고초를 당하지만 왜구의 혐의를 벗은 뒤에는 군리(軍吏)의 인도를 받으며 항저우를 출발, 운하를 따라 베이징에 이른다. 명나라 황제까지 만난 최부 일행은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제주를 떠난 지 6개월 만에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온다. 성종을 알현한 최부가 성종의 명으로 중국여행 등에서 겪고 들은 일을 일기체로 지어 바치니 이것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다.15세기 중국 기행문학의 금자탑 ‘표해록’은 역설적이게도 이같은 불행의 결실이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만 논의되던 ‘표해록’이 도서출판 한길사가 펴내는 ‘한길그레이트북스’의 하나로 완역돼 나왔다. 서인범·주성지 두 명의 동국대 강사가 번역하고 2000여개의 방대한 각주를 달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중국 명나라의 해안방비 상황과 지리, 민속, 언어, 문화, 조선·명 관계사 등 중국 문헌에도 잘 나오지 않는 귀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표해록’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9세기 일본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3대 중국여행기의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3만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周恩來 “만주는 조선족 무대” 63년 대화록

    周恩來 “만주는 조선족 무대” 63년 대화록

    중국이 최근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하는 것과는 달리 현 중국정권을 세운 1세대 지도자들은 만주(현 동북3성)를 한민족의 오랜 터전으로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공개됐다.설훈 전 의원이 중국 베이징에서 입수,1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총리의 중국·조선 관계 대화’에서 저우 총리는 랴오허(遼河)·쑹화강(松花江)·투먼강(圖們江=두만강)유역에 조선족이 오랫동안 살았음이 증명된다고 밝혔다.아울러 중국 역사학자 등이 ‘대국 쇼비니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해 한·중 고대사에 왜곡이 많다고 비판했다.저우 총리는 마오쩌둥(毛澤東)에 이은 중국 공산정권 초기의 2인자로 외교관계를 총괄했으며, 당대의 지성인이었다.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1963년 저우 총리가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과 나눈 대화 내용을 중국 당국이 정리한 것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周恩來 발언요지 중조(中朝)관계는 3000∼4000년 이상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했는데,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원인이다.그리하여 많은 문제가 불공정하게 쓰였다. ●“랴오허·쑹화강 유역서 조선족 오래 살아”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랴오허·쑹화강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이것은 세 강의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비문 등에서 증명되며 수많은 조선문헌에 흔적이 남아 있다.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 있다. 경백호 부근에는 발해의 유적이 남아 있고,또 발해의 수도였다.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중국,고대사 왜곡 인정해야” 역사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 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중국 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심지어 여러분 머리에 조선족은 “기자의 후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이것은 역사왜곡이다.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진·한(秦·漢)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금족이 발흥했다.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랴오허 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한족(漢族) 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투먼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우리 조상 대신해 사과”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이다.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만들고 우리가 사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투먼강·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중국의 이런 대국 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다.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조공이라 했고,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우호 교류할 때도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다.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스스로 천조(天朝)·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 儒林(144)-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공손접과 전개강은 자신들의 공로로 보아 죽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 됨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하였다.이에 고야자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복숭아를 차지하는 것이 무사로서 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뒤를 이어 자살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안영은 복숭아 두 개로 세 사람의 무사를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여기에서 ‘복숭아 두 개로 세 명의 무사를 죽였다.’고 하여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란 고사성어가 비롯되었으며,이 말은 ‘교묘한 음모를 꾸며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안영의 이 유명한 정치술에 대해서 공자는 다만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안자는 남의 칼을 빌려 복숭아로 차도살인(借刀殺人)하였으나 어쨌든 이는 의로운 일은 아니다.” 차도살인. 문자 그대로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제거한다.’는 공자의 말은 비록 안영이 직접 칼을 들어 적을 제거하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간접 살인의 불의는 저질렀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안영의 정치술 역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냉정하게 음미해볼 가치 있는 교훈인 것이다.오만한 힘을 가진 세 무사는 어쩌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언론일 수도 있고,막강한 힘을 가진 압력단체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결국 복숭아는 복숭아인 것이다.복숭아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세 어리석은 무사들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어리석은 공명심을 이용한 뛰어난 계책으로 손끝하나 대지 않고 화근거리를 제거한 안영.그 목적이 비록 옳다고 하더라도 그 수단에 대해서는 공자는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현실주의적 정치가인 안영과 이상주의적 사상가인 공자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안영은 공자를 ‘말만 그럴듯한 유자’로 평가하고 있음이니,이는 공자와 경공의 두 번째 만남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제나라로 망명 온 지 거의 일년 만에 경공을 두 번째로 알현하게 된 공자에게 경공은 ‘정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묻는다.논어의 ‘안연(顔淵)’편에 그 대화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께서는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이 말을 들은 경공이 말하였다. ‘정말 좋은 말이다.정말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내가 어찌 먹을 수 있겠소.(善哉 信如 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이 무렵 권신인 진씨의 세력은 임금을 넘겨볼 만큼 강해지고 있었으며,실제로 얼마 뒤엔 진씨의 후손인 전화(田和)가 제후가 되었고,이로 인해 제나라는 진씨의 나라로 변할 만큼 혼란기였으므로,공자의 대답을 들은 경공의 마음은 착잡하였던 것이다.그러나 한편 궁궐 안에 살아 있는 첩자인 생간(生間)을 두어 경공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던 진씨들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공자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심지어는 공자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우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제나라 제후들의 반발이 심해 심지어 공자를 살해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을 정도였다.”
  • 儒林(144)-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儒林(144)-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공손접과 전개강은 자신들의 공로로 보아 죽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 됨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하였다.이에 고야자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복숭아를 차지하는 것이 무사로서 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뒤를 이어 자살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안영은 복숭아 두 개로 세 사람의 무사를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여기에서 ‘복숭아 두 개로 세 명의 무사를 죽였다.’고 하여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란 고사성어가 비롯되었으며,이 말은 ‘교묘한 음모를 꾸며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안영의 이 유명한 정치술에 대해서 공자는 다만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안자는 남의 칼을 빌려 복숭아로 차도살인(借刀殺人)하였으나 어쨌든 이는 의로운 일은 아니다.” 차도살인. 문자 그대로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제거한다.’는 공자의 말은 비록 안영이 직접 칼을 들어 적을 제거하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간접 살인의 불의는 저질렀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안영의 정치술 역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냉정하게 음미해볼 가치 있는 교훈인 것이다.오만한 힘을 가진 세 무사는 어쩌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언론일 수도 있고,막강한 힘을 가진 압력단체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결국 복숭아는 복숭아인 것이다.복숭아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세 어리석은 무사들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어리석은 공명심을 이용한 뛰어난 계책으로 손끝하나 대지 않고 화근거리를 제거한 안영.그 목적이 비록 옳다고 하더라도 그 수단에 대해서는 공자는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현실주의적 정치가인 안영과 이상주의적 사상가인 공자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안영은 공자를 ‘말만 그럴듯한 유자’로 평가하고 있음이니,이는 공자와 경공의 두 번째 만남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제나라로 망명 온 지 거의 일년 만에 경공을 두 번째로 알현하게 된 공자에게 경공은 ‘정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묻는다.논어의 ‘안연(顔淵)’편에 그 대화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께서는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이 말을 들은 경공이 말하였다. ‘정말 좋은 말이다.정말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내가 어찌 먹을 수 있겠소.(善哉 信如 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이 무렵 권신인 진씨의 세력은 임금을 넘겨볼 만큼 강해지고 있었으며,실제로 얼마 뒤엔 진씨의 후손인 전화(田和)가 제후가 되었고,이로 인해 제나라는 진씨의 나라로 변할 만큼 혼란기였으므로,공자의 대답을 들은 경공의 마음은 착잡하였던 것이다.그러나 한편 궁궐 안에 살아 있는 첩자인 생간(生間)을 두어 경공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던 진씨들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공자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심지어는 공자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우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제나라 제후들의 반발이 심해 심지어 공자를 살해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을 정도였다.”
  • 儒林(139)-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어쨌든 제나라에 온 지 반년이 지나서 간신히 경공을 만난 공자는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나와 다시 유유자적할 수밖에 없었다.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제나라에 머물러 있는 1년 남짓 동안 경공을 세 번 만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첫 번째 만남부터 두 번째 만남까지에도 다시 수개월의 공백기간이 흘러간다. 이 기간 동안에 공자가 무엇을 했는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다만 ‘공자가어’에는 공자가 주나라 희왕의 묘에서 화재가 날 것을 예언하였다는 짤막한 기사가 나오고 정론(正論)편에는 공자가 제나라의 산택(山澤)을 관장하는 우인(虞人)을 칭찬하는 대목이 나오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우인. 이는 산림과 소택을 맡아 관리하던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말로 우형(虞衡)이라고도 불리었으며,때로는 짐승을 기르는 동산을 관리하는 말단 벼슬아치였다.공자가 이 우인을 칭찬한 것은 제나라의 행정이 말단에까지 미치어 구석구석 잘 관장되고 있음을 말하는데,이는 일찍이 안영이 경공에게 ‘산림,소택,바다의 소금,기타 모든 자원이 있는 곳은 국유지로 되어 있어 전하가 파견한 감독관이 백성들에게 노역을 강요하고 있습니다.’라고 극간하여 이를 바로잡은 후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영과는 달리 경공은 공자를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있었다.그로부터 수개월 뒤 공자는 경공을 두 번째로 알현하게 된다.제자들과 더불어 궁궐 안으로 들어간 공자는 수개월 전과는 다른 낯선 풍경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궁녀들이 모두 남장을 하고 있던 엽기적인 복장을 벗어던지고 이번에는 여장을 하고 있었다.불과 몇 개월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궁궐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큰 변화가 온 것 역시 안영의 간언 때문이었다.안영은 군주의 엽기적인 퇴폐 취미를 바로잡으려 하였지만 마땅한 때가 오지 않아 묵묵히 인내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내 때가 온 것이었다. 궁 안에 궁녀들이 남장을 하고 다니자 이것이 큰 유행을 보여 궁 밖의 여자들도 남장을 하기 시작하였다.경공은 이것이 사회적으로 퇴폐적인 악습이라고 생각하고 관리를 보내어 이러한 유행을 금지시키도록 하였다.남장을 한 여인들을 잡아다가 문초를 하고 벌을 주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참다못한 경공이 안영에게 물어 말하였다. “내가 관리들을 보내어 여자들의 남장을 엄금토록 하였는데도 이게 잘 지켜지지 않고 있소이다.그 까닭이 무엇이겠소.” 이에 안영은 그토록 기다리던 때가 왔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궁궐 안에서는 여자들에게 남장을 시키면서 궁 밖에서는 이를 금지시키시는데 이는 마치 문에다 소머리를 걸어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猶懸牛首于門而賣馬肉于內也).” 그러고 나서 안영은 말을 맺었다. “만약 전하께서 궁 안에서 남장을 금지시키신다면 자연히 궁 밖의 여자들도 남장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괘양두매구육(掛羊頭賣狗肉)‘양머리를 걸어두고 실제로는 개고기를 팔고 있다.’는 말은 이처럼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안영이 말하였던 ‘소머리와 말고기’는 훗날 ‘양머리와 개고기’로 바뀌어 흔히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단어로 바뀌는데,어쨌든 이 유명한 고사성어는 이처럼 뛰어난 안영의 간언술(諫言術)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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