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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주한인 독립운동자료 한자리에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는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안창호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의록,뉴욕 대한인독립단의 ‘독립단 통고문’ 등 식민지 시기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관련자료 1500여점을 공개했다. 각종 문헌 자료를 비롯,도산이 손수 짠 책장과 대한인국민회 의장 시절 사용한 의사봉 등 도산의 체취가 담긴 유물도 포함됐다. 이 자료들은 기념사업회측이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아 LA 제퍼슨가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회관 복원사업을 추진하던 중 도산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고(故) 김형순선생의 손자 김운하(66·LA거주)씨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 이세영기자 sylee@
  • 행사/ ‘현대사회 노인차별’ 학술대회 外

    ◆‘현대사회 노인차별' 학술대회 한국노년학회(회장 金東一)는 8일 오후 2시 서울 공덕동 한국사회복지회관 6층에서 ‘현대사회의 노인차별’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갖는다.(02)3277-2248. ◆도산의 밤 행사·도산특별상 시상 도산(島山)아카데미연구원(이사장 金泰麟)은 도산 안창호 선생 탄신 124주년을 맞아 8일 오후 7시 서울 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도산의 밤’ 행사 및 ‘도산 특별상’ 시상식을 갖는다.수상자로는 도재원(都在元·도산 교육상) 거창고 교장과 정학(鄭鶴·도산 봉사상)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가 선정됐다.(02)741-7591.
  • LA 프리웨이에 ‘島山 IC’, 美 캘리포니아 의회 결정

    (로스앤젤레스 연합)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고속도로)에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가 생긴다. 캘리포니아주 하원은 LA 남부지역을 관통하는 110번 프리웨이와 샌타 모니카 방면 10번 프리웨이가 만나는 지점을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로 하고 발의한 결의안을 주 상원이 지난 26일 찬성 39대 반대 0으로 통과시킴에 따라 교통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30일 본 회의에서 확정하게 된다. LA 다운타운 남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10번 도로는 도산 안창호의 주 활동무대였던 리버사이드까지 연결된다.
  • 통일플라자/ 한평생 독립·통일운동 구익균翁 ‘한반도 영세중립’ 꿈꾸는 老사상가

    “백범이 존경하는 사람은 도산뿐이었어요.상하이 임시정부의 정책,활동 방향,경제 등 모든 것의 중심에는 도산 선생이 있었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비서실장으로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구익균(具益均·95)옹은 20일 기자와의 회견에서 그동안 도산 선생이 ‘온건한 계몽주의자’ 정도로 잘못 알려졌다고 말했다. 구옹은 “이상 사회를 꿈꿨던 혁명가 도산 선생은 민족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자유민주주의자는 물론 사회주의자,테러리스트까지 포괄했던 큰 인품을 갖춘 지도자”라고 말했다. 도산의 사상을 고스란히 체현한 ‘95세의 노(老) 독립운동가’ 구옹이 요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활동은 바로 ‘한반도 영세중립화 통일운동’이다. 지난 83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91년 뉴욕에서 ‘코리아 영세중립화 추진본부’를 꾸린 뒤 국제사회에 한반도 영세중립국 보장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였다.지난해에는 한국에서 ‘영세중립통일협의회’의 공동대표를 맡는 등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한반도 영세중립화 통일운동’을벌이고 있다. 현재 스위스·벨기에·오스트리아 등이 영세중립국을 표방하고 있다.한반도 영세중립화는 미·중·일·러 한반도 주변 4강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를 이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또 국제사회는 이를 위해 지구상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인 한반도를 영세중립국으로 인정하고 보장해야 한다. 구옹은 이에 앞서 남과 북이 서로의 체제와 이념의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영세중립화가 남과 북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외국의 도움이나 개입없이 통일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통일의 방법”이라고 역설했다.구옹은 이어 “한반도가 영세중립국이 되면 남북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외교와 국방은 동시에 추구하는 형태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회주의자도,자유민주주의자도 아니다.그저 같은 민족의 북쪽에 사회주의가 있고,남쪽에 자유민주주의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며 남북이 평화롭게 함께 어울려 지내며 전쟁과 대결을 거부하기를 바라는 평화주의자일 뿐이다.이와 더불어 지구상 어디에서도 대결과 전쟁도 없이 평화롭게 어울려지내야 한다는 확신과 철학을 지닌 순수한 평화주의자다. 그는 한반도의 영세중립화 통일운동은 도산 선생의 사상과 맥이 맞닿았다고 주장한다. “도산의 사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잃어버린 옛 나라를 찾아서 복스러운 새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지요. ‘대공주의(大公主義)라고 불렀는데 이건 중국 쑨원(孫文)의 삼민주의처럼혼돈된 나라에서 모두가 공생할 수 있는 사상이었어요.” 구옹은 “혁명가로서 도산 선생의 사상이 한국내 흥사단의 친일이나 제자춘원 이광수의 친일 행적 등에 의해 왜곡된 점이 너무 안타깝다.”면서 “혁명적 이상사회를 꿈꾸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했던 사상가이자 모든 사람들을 독립운동의 대열에 세우려 노력했던 품이 넓은 혁명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벌써 잊은 듯 그가 세상을 향해 지르는 외침에도 별울림이 없다. 하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요즘도 그는 통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한민족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영세중립화밖에 없어요.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4강의 틈바구니에 있는 한반도를 어느 특정 외세가 주도한다면 한반도는 항상 분열과 전쟁의 장으로 전락할 위협에 놓이는 거지요.” 박록삼기자 youngtan@ ■구익균옹은 누구 구익균옹은 상하이 임시정부 활동을 생생히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다.구옹은 1908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1928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시절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는 ‘신의주고보 학생사건’을 주도했고,일제의 검거령이 떨어지자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안창호 선생이 일제에 검거되기 전까지 비서실장을 지냈고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을 모시는 등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두 차례나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또한 중국 광둥 중산(中山)대학에서 조교수를 하며 민족에 힘이 되는 인재를 양성했다. 구옹은 1945년 해방이 된 뒤 1947년 서울로 들어와 남북이통일될 수 있는현실적 방안을 추구하는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념과 다른 체제로 갈라진 한반도 현실에서 구옹은 ‘이방인이자 범법자’일 수밖에 없었다. 광복 이후 영세중립화 통일 및 평화를 주된 가치로 하는 혁신정당 운동에 힘쓰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의해 다시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박록삼기자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7)불꽃튀는 러,日 첩보전

    러시아 문서보관소 서고속에 묻혀있다 100년만에 햇빛을본 제정 러시아시대의 비밀문서중에는 군사첩보와 관련된전문이나 보고서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제국과 만주에서의 주도권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던 러시아와 일본은 외교라인과 군부를 총동원,첩보전을 전개한 것이다.러시아는 모든 면에서 불리했지만 연해주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들을 첩보요원으로 활용하는 이점이 있었다.러시아의 대일(對日) 첩보전은 러·일전쟁(1904∼1905)을 전후한 시기에 가장 첨예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한 이후 일본군의 동향 관찰과 대한제국군의 개편 상황을 감지하기 위한 상주 군사첩보원의 필요성이 긴박해지고 있다.이 비밀첩보 임무로 제2시베리아 보병사단 포병여단의 비류코프 대위를 일본주재 군사무관의 부관으로 임명하여 보내기로 되어 있다.비류코프는 10년간 대한제국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다.(1906년 2월13일 러시아군 총참모부장이 외무장관에게 보낸 공문) 비류코프가 군사무관 사모일오프의 부관으로 부임하게 되면 일본이 바로 의심하게 되어 첩보활동이 어렵게 될 것이다.(1906년 7월14일 도쿄주재 바흐메티예프 공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두 건의 비밀문서에 등장하는 비류코프는 대표적인 군사첩보원이었다.1907년 그가 서울로 오자 당시 서울주재 총영사였던 플란손은 이토(伊藤博文) 통감에게 “서울에서러시아학교교사로 일하던중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에 소집돼 근무했으며 포츠머스 평화회담후 다시 예비역으로 편입돼 정들었던 서울에 다시 와 교사직을 알아보려고 왔다.”고 소개했다.이토는 비류코프에게 동정적으로 대해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비류코프는 서울의 러시아학교 교사 신분으로 국내에서 10년동안 암약하면서 알게된 한인학생 10여명을 러시아의하사관학교 등에 국비유학생으로 입교시켰고 전쟁이 나자소집해 예하의 비밀첩보원으로 활용했다.이후 1911년까지4년동안 원산주재 영사로 근무하면서 첩보수집활동을 했다.그는 1904년 1월 “한국어를 말하고 한복으로 변장한 일본인은 전쟁이 나면 러시아군을 감시할 것이며 또 통역이나 안내원으로 봉사하겠다고 자청할 수 있다.일본인은 용모 등이 한인과 비슷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그러나 걷는 모습을 잘 관찰하면 한인은 성큼성큼 걷는 반면 일본인은 촘촘히 걷는다.”는 첩보를 공사관에 올릴 정도로 한국과 한국인에 정통했다.또 러시아군이 만주와남우수리지방에서 대한제국으로 진격할 수 있는 3개의 길과 그에 관련된 상세한 정보를 보고하기도 했다. 그는 한인생도 출신들의 첩보활동에 대해 “생도들은 고종황제와 조국을 위해 열심히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한군과 강군은 나와 함께 활동하고 있고 이군은 북청에서,현군은 노보키예프스크,구군은 경성(鏡城)에서 각각 정찰임무를 맡고 있다.”고 1904년 10월19일 보고했다. 서울 불어학교교사로 고종의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러시아 극동총독부에 알렸던 프랑스인 마르텔과 프랑스 신문‘저널’지의 도쿄특파원 발레,블라디보스토크주재 프랑스상무관 플라르 등 프랑스인들이 러시아의 비밀첩보원으로활약했던 사실도 흥미롭다. 발레가 페테르부르크에 왔다.그는 전쟁중의 일본의 정세에 관해 흥미있는 정보를 러시아에 전해 주었으며 이제 외무부에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1905년 5월22일외무부에서 육군장관에게).발레의 정보제공 제의는 수락되었다.정보비로 그에게 매월 600루블이 책정되었다.(1905년 6월15일 육군장관이 외무장관에게). 러시아는 일본과의 첩보전에서 대단히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첩보의 통로인 우편 및 전신시설과 전달수단인 철도등 교통시설을 일본이 선점,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2년 니콜라이2세가 외무장관 람즈도르프에게 “서울주재 파블로프 대리공사의 보고서가 늦게 상신되는 이유가무엇이냐.”고 묻자 람즈도르프는 “파블로프의 보고는 비밀스런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일반 우편시설을 이용하지 않고 믿을 만한 기회(인편)나 아니면 가끔 대한제국 항구에입항하는 러시아 선박을 통해 발송해 오기 때문”이라고해명하기도 했다.다음 문건은 러시아측의 애로사항을 잘보여준다. 고종황제가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외무부와의 연락용 암호 통신문이 궁정(덕수궁)화재로소실됐다.혹시 일본이 훔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방비하라.(1904년 5월16일 서울주재 파블로프 공사가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 서울에서 파블로프 공사가 보낸 전문을 받았지만 내용이훼손돼 읽을 수가 없다.일본전신국이 조직적으로 교묘하게 비밀전문을 파손시켜 배달하고 있으며 이는 우연한 왜곡이라고 볼 수 없다.일본은 통신문을 제때에 배달도 하지않는다.모든 우편,전신국은 러시아에 적대적인 일본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제국과의 교신도 불가능하다.배달과정에서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손상시켜 놓은 몇통의 전보문을 첨부한다(1903년 12월7일 일본 나가사키 주재 가가린영사가 도쿄주재 공사에게 보낸 보고문) 대한제국의 우편시설을 장악한 일본이 서울의 러시아공사관에서 보내는 외교행낭을 손상시키거나 배달을 지연시키는 일이 잦아지자 러시아는 임시방편으로 제물포에서 상하이노선을 운항중인 동청철도(東靑鐵道) 소속 여객선을 이용해 외교문서를 발송하고 수신하기도 했다.2주에 1회 왕복운항하는 이 여객선도 비밀문서 수발에는 지장이 많았다.두만강 인접 도시 노보키옙스크지역과 한국간의 전신선을 육상으로 연결하려고 계획했으나 일본의 끈질긴 방해로실패했다.러·일전쟁 이후 한-러간의 통신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해저선을 통했다.러·일전쟁의승패는 통신을 장악한 일본쪽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앞으로 러·일간에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대한제국에서 러·일은 사활을 건 혈전을 벌일 것이며 영국이 가담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대한제국이 전쟁터가 될 경우 러시아의 남우수리지방은 후방작전 기지가 될 것이다.일본의 병력을 고려할 때 러시아는 10만명이상의 병력과 2만명분 이상의 식량을 확보,비축해야 한다.연해주,아무르주,자바이칼주에는 1년간 공급할 식량을 비축해야 한다.일본군의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1899년 3월9일 알프탄 대령이 ‘러·일충돌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작성,보고한 문서) 이 보고서는 4년후 러·일전쟁 발발을 이미 예측하는 등러시아측 정보의 정확성과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준다.이후 육군장관에 오르는 사하로프 중장이 1902년에 작성한 보고서도 일본 수비대의 주둔지와 규모,철도 및 전신성 공사 현황,저탄장,거주자들의 취득부동산 등 세세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보고하고 있다. 무기도입 및 밀수와 관련된 첩보도 자주 등장한다.일본이 대한제국을 경유해 만주로 무기를 밀수출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이 고물 함정을 거액에 대한제국에 팔았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일본은 사용하지 않는 구형 총기를 만주로 수출하고 있다.어느 지방을 통해 어디로 보내고 있는지 추적하라.청국에무기를 공급해 주는 사람에게서 받은 정보에 의하면 일본이 청국의 여러 성(省)에 18만정의 구식 소총을 매입하라고 제의했다고 한다.(1902년 3월29일 하바로프스크의 그로드스키 장군이 서울공사관에 보낸 비밀전문) 주한공사관 쉬테인 공사의 보고에 의하면 미쓰비시사는 8문의 함포가 장착되고 200명의 해군을 태울 수 있는 순양함을 대한제국 정부에 납품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1903년 2월3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도쿄주재 이즈볼스키 공사에게 보낸 전문). 순양함은 오는 4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때 축포를 발사할 목적으로 석탄선을 개조해 함포만 탑재시킨 것으로 외형만 해군함정으로 보일 뿐이라고 한다.일본의 고무라(小村) 외무상은 고종황제의 순양함 도입계획이 일본에 유익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같은해 2월9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서울공사관에 보낸 전문) 모스크바와 서울,도쿄를 오간 이들 비밀전문을 보면 순양함을 도입하려던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국제무기거래 사기극에 속은 것을 알 수 있다.당시 자료에 따르면 이 순양함의 가격은 55만엔이었고 3년 분할상환 조건이었다.대구경 대포 4문과 소구경 대포 4문이 장착되고 장교 25명과해군 200명이 승선하게 돼 있었다. 일본의 첩보망도 만만찮았다.1903년 제물포 부영사 팔야오프스키의 서북지역 출장보고서에는 “평양에는 일본의첩보기관이 있다.일본인들은 시내의 모든 약국을 운영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피고 있다.이곳에는 약 3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지방행정권은 일본영사의 수중에 있다.”고 보고하는 등 일본첩보조직의 촉수가 대한제국의 정부는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거미줄처럼 뻗어있음을 알리고 있다. 간도의 일본 총영사관에는 비밀첩보과가 있다.그 과에는일본인,청국인,그리고 한인이 암약할 것이다.통감부와 헌병사령부 소속의 밀정만도 약 760명에 이른다.이들의 주요 임무는 의병을 추적하는 것이다.밀정중에는 여성도 있는데 대부분 기생이다.벌써 많은 의병을 경찰에 밀고하였다.(1909년 10월23일 소모프 총영사가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보고서) 새로 발굴된 문서에는 이밖에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일본비밀첩보원으로 활동한 한인 명단(1898년),대한제국내 비밀첩보망 구축안(1905년),흑룡강지방의 조선인 첩보원 명단(1912년) 등도 들어있다. 대한제국을 독식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스파이전쟁에 이용당하거나 희생된 한국사람들의 이름이다. 노주석기자 joo@ ■러 문서에 나타난 대한매일 보도 인용 전 서울 불어학교 교사 마르텔을 비밀첩보원으로 대한제국에 파견했다.그는 일어에도 능통하다.그에게 첩보임무와개인암호를 주었다.그에게 The Korea Daily News(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 제호)를 늘 잘 살피라고 지시했다.(1904년12월4일 중국 상하이에서 파블로프 서울주재 대리공사가그루세스키장군에게 보낸 보고서) 러·일전쟁(1904∼1905)의 패배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러시아는 이후 2∼3년동안은 그동안 심어놓았던 첩보망과 청,일주재 외교라인 등을 통해 극동정세를 그럭저럭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하지만 한일합병시기를 전후해서는 ‘정보부족증’에 걸렸다.그래서인지 1908년 이후에는 국내 언론과 일본 신문 기사를 발췌해 본국에 보고하고 있었다. ‘00년 00일부터 00년 00일까지의 일지’‘대한제국내 폭동에 대한 신문스크랩’ 등 러시아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수백건의 정보보고가 그것이다.이중 80% 이상 인용된 신문이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1904년 발간)였다. 서울주재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만주로 건너가 극동지역첩보수집총책임자로 일한 파블로프가 프랑스인 비밀첩보원 마르텔에게 “대한매일신보를 잘 살피라.”고 지시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26일 하얼빈역에서 5명의 한인이 이토에게 권총을 발사,이토는 곧 절명했다.전 고종황제는 식사중에 이 소식을 듣고 수저를 상에 떨어뜨렸다.(1909년 10월28일자).안응칠(안중근의사의 아호)은 항일운동을 하며 이강,유동설 그리고안창호와 비밀연락을 했다.(1909년 10월30일자).오늘 관보에 지난 9월4일 청·일이 간도에 대해 체결한 조약문이 발표됐다.(1909년 11월9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러시아와 중국,그리고 일본인의 간담을서늘하게 한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사건을 “고종이 수저를 떨어뜨렸다.”는 촌철살인의 한 문장으로 전달하고있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 간도를 청국에 통째로 넘긴일본의 외교술책도 간도협약 체결 기사를 통해 짚어내고있다.무엇보다 대한매일신보의 의병활동 보도는 러시아문서가 인용하고 있는 국내외 신문의 보도를 내용이나 횟수,정확도 면에서 압도하고 있다. 경기도에 군사훈련을 받은 2000명이상의 의병이 집결해 있다.(1908년 2월19일자).대한제국에는 모두 5만명의 의병이 있다고 한다.결정적인 의병소탕을 위해 일본군이 또다시상륙한다고 한다.(1909년 7월29일자).이토가 사살된 이후러시아로 한인이주가 급증하고 있다.(1909년 11월27일). 대한매일신보 1911년 2월15일자와 2월21일자에는 의병장강기동(姜基東)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기사 2건이 실려있다. 지난 2월12일 원산의 한 일본식당에서 의병대장 강기동이체포됐다.(1911년2월15일자)그는 4년동안 경기도에서 의병 200명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다.강기동은 여객선편으로 서울로 이송된 이후 지금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체포당시 주머니에는 일본돈 2엔 밖에 없었으며 손과 발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1911년2월21일자) 노주석기자
  • 이광정 원불교 종법사 “온 국민이 마음공부 충실히 해야”

    “마음은 길흉화복을 빚어내는 주체적 존재입니다.온 국민이 교과서 공부를 하듯 끊임없이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창시일인 대각개교절(28일)을 앞두고 지난 15일 원불교 좌산(左山) 이광정(李廣淨·66) 종법사가 전남 영광 원불교 영산성지에서 기자들과 만났다.좌산 종법사는 이번 대각개교절을 계기로 모든 종도는 물론 국민들이 진실성의 회복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로 삼자고 당부했다. “옛날 희랍의 디오게네스는 참된 사람을 찾으려고 대낮에도 횃불을 갖고 다녔다고 합니다.요즘 포장만 잘된 채 진실성이 가려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 나라가 쇠망한 원인이 거짓에 있다고 했습니다.이 세상 모든 일을 해나가는 데 기초는 진실입니다.진실이 무너지면 일체가 다 무너집니다.” “요즘 흔히 보는 유명인사들의 비극적 종말도 모두 진실이 허물어진 탓”이라는 종법사는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좌산 종법사는 언론에 대해 “언론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은 사회의향도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할 때”라며 “특히 통일문제에 대해 보다 차원 높은 경지를 개척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보수 진보의시각차가 현격한만큼 언론이 이 시각차를 좁히고 국민들의 의식을 높여야 하는데 거꾸로 찬물을 끼얹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언론이 본연의 역할에 더욱 충실했으면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의 행각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이 국가 대의에 입각하지 못하면 연쇄소아주의로 흐르고 결국 국민들은갈등과 곤혹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정치인들이 진실에 바탕한 투철한 무아봉공적 자세를 지킬 것을 당부했다.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싸움에 대해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운 일”이라는 그는 “싸워서 문제를 해결하려 함은 어리석은 짓이고 남북문제도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요즘 다양한 수행이 유행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수행의 원리를 무시한 채 효과만 의식하는 욕심 탓에 오히려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내는 경우가많다.”며 “무엇보다 제 마음을 다스릴줄 아는 마음공부부터 충실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광 김성호기자 kimus@
  • 안창호선생 64주기 추모식

    서울 강남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순국 64주기를 맞아 9일 도산선생의 묘소가 있는 도산공원에서 추모행사와 함께 공원앞 도로 150m를 '리버사이드길'로 부르는 명명식을 갖는다. 이번 추모식에는 미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시 관계자들도 참석해 양 도시간의 우호를 다진다. 리버사이드시는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리버사이드시에 180m의 강남로드를 만들었으며 시청 앞 광장에 도산선생의 동상을 건립, 지난해 8월11일 제막식과 함께 이날은 '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었다. 조덕현기자
  • 독립운동 일가의 투쟁 수난기

    ♣사슬이 풀린뒤(오기영 지음/성균관대 출판부 펴냄). “우리는 당대 뿐이 아니라 길이 자손에게까지 이 피묻은기록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이것으로써 우리의 자손이그들의 자유를 영원히 지켜나가는 노력의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3.1절 여든세 돌의 날,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뜨거운 해방투쟁의 역정을 생생히 기록한 수기가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일제하 동아일보 기자 등으로 활동한 동전 오기영이 1948년 성각사를 통해 발간한 ‘사슬이 풀린 뒤’(성균관대학교 출판부,9500원)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초판이 발견돼재출간된 것이다. 오기영은 해방후 좌우사상 대립에서 철저하게 민족통합의중도노선을 고수한 자유주의 지식인으로 평가된다.그는 일제 강점기에 네 차례에 걸쳐 철창에 갇혔고 미국에 본부를 둔 흥사단의 국내 활동 조직인 수양동우회 회원으로 도산 안창호선생이 숨질 때까지 그 옆을 지켰다.하지만 공산주의자였던 형과 매부의 혁명 정신을 진정 이해하였고 치과의사였던 아내와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혁명운동을 도왔던 독립된 지성이었다. ‘사슬이 풀린 뒤’는 3.1만세운동을 주도해 감옥에 간 아버지를 비롯해 일찌기 중국에서 공산당원이 돼 국내에서검거된 다섯살 위의 형,막내 누이와 매제,아우까지 한가족 모두가 독립투쟁에 가담해 겪게 되는 고통과 수난의 험준한 행로를 기록한다.오기영은 해방된 이튿날 옥에서 풀려난 아우와 조카를 맞고 그 1주일 뒤 죽은 친형의 7주기일을 맞아 앞서간 이들을 추모하며 걷잡을 수 없는 눈물로써 이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수기는 83년 전의 만세함성과 함께 시작된다.1919년3월30일 황해도 배천읍에서 장날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주모자의 한사람이었던 아버지가 포승줄에 묶여서 해주 감옥으로이송되는 광경을 지켜보던 저자는 열 한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이후 소년은 만세를 부르면 감옥에 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학교에서 만세를 부르다 유치장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아우에게 ‘선수’를 빼앗긴 형은서둘러 만세운동을 조직하다 발각돼 끌려가는 등 파란만장한 가족사가 시작된다. 언론인답게 치밀하고 현장감 넘치는 필치가 독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울분을 생생하게 전달한다.오기영은“해방은 왔지만 인민에겐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고 해방후 정국을 비판하며 뒷날 정말 해방이 오거든 또한번 ‘사슬이 풀린뒤’를 쓰겠다고 다짐한다.그러나 49년 월북한 그는 끝내 이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는 1962년 북한 과학원 ‘연구사’란 직함 이후 공식기록에서 사라졌으며 남한에는 딸 둘과 두번째 부인이 살고있다. 이번 책은 해방후 3년간 쓴 사회시평을 모은 ‘진짜무궁화-해방 경성의 풍자와 기개’(원제 ‘삼면불’,1만2000원)과 함께 출간되었다. 신연숙기자 yshin@
  •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재명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이재명(李在明)선생을 선정,발표했다. 1886년 평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9년 1월 평양에서 이토 이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려 했으나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융희황제의 안전을 내세워 만류,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을사오적 처단으로 계획을 바꾼 선생은 1909년 12월22일 명동성당 입구에서 군밤장사로 변장해 있다 인력거를타고 지나는 이완용을 비수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일경에체포된 선생은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국가를 위한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빼앗지 못할것이다”는 최후 법정진술을 남겼다.선생은 1910년 9월30일 형 집행으로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정부는 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 ‘도산연구상’ 독립기념관 이명화씨

    도산아카데미연구원(원장 金在淳 전 국회의장)은 6일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 연구에 탁월한 업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도산 연구상’수상자로 독립기념관 연구원인 이명화(李明花·43)박사를 선정했다.이 박사는 독립기념관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도산 선생에 관한 자료발굴과 함께 ‘도산 안창호 전집’(전14권)과 도산의 생애를 사진으로 엮은 ‘수난의 민족을위하여’ 편찬에 참여하였다.시상식은 9일 오후 7시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2001년 도산의 밤’ 행사 때 함께 갖는다.
  • “안중근의사 주 활동무대는 연해주”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92주년.최근 몇년 새 안 의사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는데 올해는 러시아 학자들의 관심이 특히 돋보이고 있다.이같은 경향과 관련,안 의사가 일제의 한반도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의거지는 중국 하얼빈이지만 안 의사가 항일의식을 고양·성숙시킨 곳은 러시아 연해주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한국과 러시아 학자들은 의거 기념일에 앞서 의사가 동지들과 ‘단지(斷指)동맹’을 맺은 연해주 현지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운 데 이어 국제학술회의를 개최,안 의사의 항일투쟁운동을 재조명했다.한국민족운동사학회(회장 서굉일)가 국가보훈처·고려학술문화재단 후원으로 지난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교 한국학대학에서 서굉일(한신대)·오영섭(연세대)·박환(수원대)교수 등 한국측 교수 8명과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 연구원 등 러시아측 연구자 7명등이 참가한 가운데 ‘안중근과 러시아지역 항일민족운동’을 주제로 학술행사를 가진 것. 이 행사에서 한러 양측의 학자 12명이 총12편의 안 의사및당시 극동의 정세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특히 수원대의 박환 교수는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안중근’이라는 논문발표를 통해 안중근 의사에 대해 색다른 주장을 폈다.흔히 안 의사는 의거 장소가 만주의 하벌빈이고,순국 장소가뤼순인 점을 들어 만주지역 항일그룹의 일원으로 분류돼 왔다.그러나 박 교수는 안 의사가 연해주지역 의병의 일원임을 강조하고 나섰다.박 교수는 “안 의사는 극동 크라스키노 카리에서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블라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에서 의거를 최종결심했으며,블라디보스토크 역사(驛舍)에서 권총을 받아 하얼빈으로 떠났다”며“안 의사의 의거와 러시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안 의사는 1907년 군대해산 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여동의회(同義會),단지동맹,대동공보 등 러시아지역 민족운동진영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안 의사가 주도한 소위 ‘단지동맹’ 역시 ‘동의단지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의회의 산하조직이었는데 안 의사는 동의회에 발기인으로참여하였다.박 교수는 “결국 안의사의 의거는 동의회의‘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박 교수는 연해주 현지에서 안 의사가 1908년 러시아지역 최초의 의병조직인 동의회가 결성된 상(上)얀치혜 마을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박 교수는 “안 의사가 단지동맹을 결성한 크라스키노 쥬카노프카 마을 위쪽12km 떨어진 곳에서 흔적을 확인했다”며 “현지 주민들의증언에 따르면 1937년 조선족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후 60년대까지 러시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폐허가 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안중근의사 남·북 스크린 조명 색깔차?.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통해 남북한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시각을 비교한 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끈다. 한신대 신광철 교수(종교문화학과)는 남한의 ‘의사 안중근’(1972년,주동진 감독)과 북한의 ‘안중근 이등박문을쏘다’(1979년,엄길선 감독) 등 두 편의 영화를 분석해 최근 종교사연구소 연구발표회에서 ‘남북한의 안중근관’으로 내놓았다. 신 교수는 논문에서 남북한 영화는 모두 안 의사의 구국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남한이 안 의사를 민족사적 영웅으로 부각시킨 것과는 달리,북한영화는 안 의사의 투쟁을미완의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두 영화에 나타난 시대적 배경,안 의사가 독립투쟁을 결심하게 된 동기,독립 투쟁과 이등박문 사살 과정,재판과정에 나타난 안 의사의 독립 사상,안 의사의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등을 비교한 결과 이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북한영화가 안 의사의 투쟁을 미완으로 규정한것은 이른바 ‘지도 사상’이 부재했다는 관점에 기인한 것임을 밝히면서 이는 김일성의 지도 체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안 의사의 독백을 통해 안 의사가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 점이 주목된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안 의사가 구국 투쟁에 나서게 된 동기에 관한영화적 장치도 남북간에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고 말하고있다.남한 영화는 안창호 선생의 연설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구국 투쟁에 나섰다고 묘사하고 있으나,북한영화에서는 민중적 저항에 의한 결의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논문은 또 남한영화가 ‘계몽’ 쪽에 무게 중심을 실었다면,북한영화는 ‘투쟁’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남한영화가 빌렘 신부와의 관계,안 의사의 기도 등을통해 천주교 신앙 관련성을 암시하는 데 비해 북한영화는김일성 지도 체계를 전제하는 관점에서 안 의사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이같은 차이는 스토리·주제 중심으로 설명적인 북한영화,이미지·빠른 템포를 앞세운 오락적 가치에 익숙한 남한영화가 갖는 현실적 거리 탓”이라며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고 환경의 차이인 만큼 영화분야의 학술적교류나 공동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호기자 kimus@
  • 광복절 ‘유관순’ 가장 떠올라

    충북지역 고교생들은 광복절에 가장 기억나는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를 꼽았다. 충북도교육청이 광복절을 앞두고 도내 고교생 1,6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15일 공개한 바에 따르면 전체의 41%인 662명이 가장 기억나는 독립운동가로 ‘유관순’을 꼽았다. 다음으로는 안중근(307명),김구(214명),윤봉길(110명),안창호(85명),신채호(68명),손병희(37명),기타(123명)의 순이었다. 또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아는가’란 질문에는 ‘아주 잘 알고 있다’(66%),‘들은 것같기는 하다’(32%),‘모른다’(2%),‘알고 싶지 않다’(2%) 순으로 답했다. 이밖에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에 동참할 의향이 있는가’란 물음에는 85% 가량이 ‘당연히 참여하거나 상황을 보며참여하겠다’고 답했다. 청주 김동진기자 kdj@
  • 美LA 리버사이드시에 안창호 동상

    [로스앤젤레스 연합] 미국 로스앤젤레스 동부 리버사이드시는 오는 11일 도산 안창호 동상 제막식에 맞춰 이 날을‘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포한다. 리버사이드 도산기념사업회(회장 홍명기)는 9일 로널드 러브리지 시장과 시의원들이 도산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동상제막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정했으며 시장이 도산의 업적 등이 담긴 선언문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리버사이드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높이 2.2m의 동상 제막식엔 강영훈(姜英勳) 한국도산기념사업회장(전 국무총리),이재달(李在達) 국가보훈처장,양성철(梁性喆) 주미대사,권문용(權文勇)서울강남구청장(리버사이드시와 자매결연),도산의 장녀 안수산(85)씨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로 도미한 도산(1878∼1938)은 1903년 리버사이드로 이주,8년간 오렌지 농장의 한인들과 생활하며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 부 음/ 독립운동가 정영국 선생. 박병배 전 국회의원

    ■독립운동가 정영국 선생 독립운동가 정영국(鄭永國)선생이 13일 오전 0시 5분 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향년 91세. 평북 철산 태생인 정선생은 1930년 창동(彰東)학교에서 반제동맹을 조직,책임자로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안창호 등을 만나 애국단 조직확대에도 참여했다.또 귀국후국내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동지 72명과 함께 체포돼 모진고문을 받고 척추와 팔에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됐다.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은 부인 이열자씨와 치섭(청주대 교수),경훈(재미 치과의사),예실(재미 약학의사)등 2남 1녀.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발인은 16일 오전 9시,장지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02)590-2560. ■박병배 전 국회의원. 박병배(朴炳培) 전 의원이 12일 밤 숙환으로 별세했다.향년84세.고인은 제4,5,7,8,9대 국회의원과 민주통일당 총재대행 등을 지냈으며 학교법인 돈운학원 이사장으로 육영사업을벌여왔다. 유족은 장남 선우(善宇.학교법인 장훈학원 이사장)씨 등 1남4녀.빈소는 삼성서울병원,발인 16일 오전 7시.(02)3410-6915
  • 안창호 동상 완성단계

    [로스앤젤레스 연합]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시 중심가에 세워질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선생의 동상 원형이 12일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약 2.44m의 전신상으로 약 80㎝ 높이의 좌대 위에 세워진 도산 선생의 동상 뒤편에는 도산의 생애와 업적을 새긴 부조 8판이 병풍처럼 둘러선다. 현재 동상원형 작업은 80%,전체공정은 40% 정도 진행된 상태다.도산기념사업회(회장 홍명기)는 오는 8월15일 광복절을전후 도산 선생이 1904년 오렌지 농장에서 동포들과 일하며독립의지와 정신을 몸소 실천한 리버사이드시 중심가인 시청 앞 광장에서 동상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 남가주대 미주한인사료 DB 구축

    [로스앤젤레스 연합] 도산 안창호 선생 등 초기 재미 한인들의 이민사료(史料)를 인터넷을 통해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됐다. 미국 남가주대학(USC) 동아시아도서관은 4일 캘리포니아주도서관리국의 지원을 받아 1년여간 작업한 끝에 ‘미주한인디지털자료관’(KADA)을 완성,지난 1일 일반에 공개했다. 이 도서관은 1903∼65년 사이의 한인 이민관련 사료 2,300여점을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게 했다.데이터베이스에는 LA한인연합감리교회 내 옛 국민회(1938∼60년대말 한인 사회정치조직 본부) 건물에 보관돼 있던 도산 선생 및 국민회 관련 공문서,회의록,서한,미주 최초의 한인감리교 목사인 현순 목사의 문서전집,일제 당시 다른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주고받은 서신,회원 명단 등 1만1,000여쪽과 기록사진 1,300여장이 수록돼 있다.한미박물관이 제공한 초기 이민자들의육성 인터뷰 내용도 MP3파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미주한인 디지털자료관의 웹사이트 주소는 www.usc.edu/isd/locations/cst/idala/collections/collections-kada.html.
  • 민족대표·애국지사 55인 위패 봉안

    82주년 3·1절을 맞아 기미년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과 애국지사 22인 등 모두 55인의 위패가 부산의 한 사찰에 봉안됐다. 1일 오전 부산시 동구 초량동 대한불교 원효종 금수사(주지법홍스님)에서 손병희·한용운선생 등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과 안중근의사와 김좌진장군 등 순국선열22인의 위패 봉안기념식이 열렸다.민족대표와 애국지사의 위패가 금수사에 봉안된 것은 법홍스님이 한국전쟁때 피란온 초대 부통령 이시형 박사(1869∼1953)와의 인연 때문이다. 금수사는 한국전쟁때 피란민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주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이시형 박사가 법홍스님을 만나애국지사의 위패를 모셔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또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전 국회의원이 김 장군의 제사와 위패를 모셔줄 것을 부탁했고,법홍스님은 이때부터 항일운동으로 순국한 윤봉길 안창호 안중근의사 등 애국독립지사 22인의 위패를 모시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손병희·한용운선생 등 기미년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위패까지 모시게 됐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3월의 독립운동가 이승훈선생

    국가보훈처는 27일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무역업과 운송업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으나 연이은 사업실패를 겪으며외세와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과 반일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에 감명받은 것을 계기로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됐다.이후 태극서관을 설립,민족자본 육성에 힘쓰는 한편 초등교육기관인 강명의숙과 중등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 운동을 펼쳤다. 1911년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명근의 독립자금 모금사건인안악(安岳)사건에 연류돼 제주로 유배되었다.105인 사건의주모자로 지목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했다.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천명 등으로 세계정세가 변하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일제에 체포돼옥고를 치르다 1922년 7월 출옥한 선생은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했다.1924년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다. 1930년 5월 9일 ‘내 뼈를 표본으로 만들어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매일신보‘서울기사 색인집’나와

    ‘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였다는 점에서 흔히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이 신문은 일제강점기35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발행됐다는 점에서 일제시대연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꼽힌다. 최근 서울시립대 부설 서울학연구소는 매일신보에 실린 서울 관련기사를 모아 ‘서울관련 기사색인’(1910∼1945)을펴냈다.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팀이 펴낸 이 색인집은서울학연구소에서 지난 97년 추진한 ‘매일신보 서울 관련기사 탐사’의 성과를 편집,출간한 것으로 서울을 비롯해 양천과천 시흥 광주 양주 고양 등 수도권 일대를 대상으로 했다. 크게 ▲정치·행정 ▲경제·산업 ▲사회·풍속 ▲문화·학술 ▲민족운동 ▲기타 등 6개 분야로 나누고 그 밑에 다시세목을 두었다.한 예로 ‘행정’의 경우 총독부·총독·정무총감·경기도·도지사·경성부·경성부윤·경성부회·중추원·정(町=현재의 동)·총대(總代=현 동장)·관리 등으로 세분했다.또 ‘민족운동’항목에는 공산·노동·청년·학생·여성·소년·신간회·형평사·물산·아나키즘 등의 소항목을만들었다. 특히 ‘학술·예술’의 마지막 부분에 ‘인물’을 소항목으로 다뤄 김옥균 손병희 안창호 여운형 박헌영 등 당대 인물에 관 기사색인을 담아 일제강점기 인물사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도록 했다. 연구책임자인 서중석교수는 “서울관련 핵심내용을 중심으로 기사의 경중을 감안,일부를 제외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고르게 탐사한 결과”라고 말했다.서울시청 홍보관에서 1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포럼] 한부신사태의 실천적 해법

    우리 속담에 ‘내 절 부처는 내가 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자신이 관련된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잘못된 결과를 두고책임 회피를 하지 말라는 얘기다.그러나 선인들의 가르침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 관료집단의 ‘내 절 부처를 위하지 않은’ 병폐는 여전한 것 같다. 우선 지난 1999년 1월에 열린 환란 청문회가 그랬다.당시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은 환란책임을 놓고 염치없는 ‘네탓’ 공방을 벌였다. 한은은 국제통화기금(IMF)행이 결정되기 8개월전에 이미 환란 가능성을 예견한 보고서를 정부에 건넸다고 주장했다.그러자 재경부는 이를받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맞서 실소를 자아내게 했던 적이 있다. 요즘 한국부동산신탁(한부신) 부도사태를 둘러싼 정책당국의 책임 떠넘기기가 환란 청문회의 속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가관이다. 건설업체와 금융기관이 한부신에 물린 돈이 1조1,000억원을 웃돌고분양피해가 예상되는 아파트 계약자가 7,000명에 달하는데도 관련 정책 당국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고 저마다 손을 내젓는다. 부동산신탁업 인가·감독기구인 금융감독원은 인·허가 업무를 넘겨받은 때는 이미 부실이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계약자 피해 대책은 건설교통부가 세워야 한다고 뒷짐을 지고 있다.인·허가 기관은권한만 행사하고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발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건교부의 자세도 문제다.감독권한이 없다며 부실경영 감독책임을 금감원에 떠넘기고 있지만 부동산 개발업무는 분명히 건교부 소관이다. 한부신 모회사인 한국감정원의 처사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다.감정원은 한부신이 자율 경영을 해왔다는 점을 들어 발을 빼는 형국이다. 마치 아들이 잘못되고 나니 버린자식 취급을 하는 부모를 보는 듯하다. 이쯤되면 정책 당국의 책임회피가 도덕적 해이의 극치라고 단정지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정책 당국자들의 귀에는 “17년 동안 피땀흘려 모은 돈을 정부를 믿고,공기업을 믿고 투자해 아파트 분양 받았는데…”라는 한 서민의분노 어린 E-메일 하소연이 들리지 않는 듯싶다.어느 누구 하나 지금까지 책임 인정은커녕 진솔한 사과 한마디 없으니 말이다.한부신 사태가 과거 낙하산 인사에 따른 무책임 경영의 산물이란 점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그렇다면 이제는 또 다른 부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책임소재를 가려 책임을 물어야 할 차례다.감독기관의 태만이 문제라면감독기관을,경영진에 원인이 있다면 경영진을 문책해야 할 것이다.그래서 다른 공기업으로 도덕적 해이가 확산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 도산 안창호(安昌浩)선생은 빈 말로 떠들며,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이른바 공담공론(空談空論)을 민족분열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래서참을 힘쓰고,몸소 행하고 실천함(務實力行)으로써 폐습을 제거하고자했다. 정부는 이제 한부신 사태 수습을 위해 실질적인 조치를 몸소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먼저 한시적 성격의 ‘범부동산신탁협의체(가칭)’ 같은 비상기구를조속히 발족하기 바란다.여기에는 정책당국과 채권단,입주예정자 대표가 참여해서 사태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 내야 한다.둘째,주택건설 보증제도를 대폭 확충해야 한다.연간 전국에서 공급되는 아파트 30만여가구의 절반 가량만분양보증을 받는다는 것은문제다.건설경기 침체로 부도 업체가 늘어날 경우 입주 예정자들의상당수가 내집마련의 꿈을 고스란히 빼앗기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임대주택과 재개발·재건축·주상복합아파트의 분양보증을 확대하는쪽으로 주택건설촉진법 등 관련법을 손질해야 할 것이다.셋째,정부는부동산신탁업계 전반에 대한 수술작업에 즉각 나서야 한다. 한부신부도 여파로 나머지 부동산신탁업체까지 이미 줄도산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다.소를 더 잃기 전에 서둘러 외양간을 고쳐야 할 때이다. △박건승 논설위원 k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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