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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양천, 철새 안식처로

    물 맑히기 및 공원화 사업이 계속되고 있는 안양천이 철새들의 안식처로 자리잡고 있다. 23일 서울 구로구에 따르면 안양천 구일역∼안양교 구간에 최근들어 매일철새와 텃새 50여마리가 찾고 있다는 것. 구로구의 의뢰를 받은 서울대 산림자원학과 이우신 교수팀의 관찰 결과 쇠오리·흰뺨검둥오리·흰죽지 등 철새 3종과 참새·집비둘기·까치·알락할미새 등 텃새 4종이 카메라에 잡혔다. 구로구 관계자는 “그동안 꾸준히 벌여온 안양천변 정화작업이 효과를 거두는 것같다”고 말했다. 김재순기자 fidelis@
  • [외언내언] ‘쪽방’

    ‘쪽’이란 단어는 물건의 쪼개진 한 부분을 일컫는다.그래서‘쪽’은 작고 불완전하다는 의미로 쓰이며 작은 바가지가‘쪽박’이고,대문에 딸린 문이‘쪽문’이다.‘쪽방’도 예외가 아니어서 1평 내외 작은 거주공간을 가리킨다.주거환경이 넓어지는 추세이나 현재 서울에만 길이 150㎝,폭 50㎝,높이 100㎝ 정도의 쪽방 3,800여개가 저소득층 생활 터전으로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 쪽방 이용자는 주로 주거가 마땅치 않은 독신 또는 타향살이 일용근로자들이며 몇천원으로 하룻밤 안식처를 마련한다는 이점이 있다.노숙자와는 달리식당,행상,건설현장 종사자이며 30·40대가 대부분이다.수입이 일정치 않은고달픈 생활을 하지만 땀의 의미를 아는 우리의 이웃이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이다. 이들은 인력시장 진출이 용이한 서울 회현동·영등포·동자동·창신동에 밀집되어 있으며 이용자는 하루 평균 2,556명.이밖에 여인숙·만화방·사우나탕 이용자도 상당수인 것으로 추정되며,이들은 생활형편이 악화될 경우 노숙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큰 사회 취약계층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의 직접 희생자인 이들은 근로의욕은 높으나 아직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이 시대의 성실한 소외계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의 원룸,독일의 아인첼치머,일본의 캡슐룸 이용자가 사회적으로 안정된봉급자들이라면 우리나라 쪽방은 하루살이에 급급한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TV 등 문화·휴식시설이 전혀 없는 데다 화장실·세면장을 공동 사용하기 때문에 원하는 때에 이용할 수가 없다.밤 이슬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가 서글프다. 지난 성탄절 불우이웃돕기 TV프로에 방영된 쪽방 생활자 한이슬양의 어려운 생활을 담은 영상물은 많은 시청자에게 감명을 주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 내외도 당시‘옥중서신’등의 인세와 강연료 4,654만원을 성금으로 전달하며“지금까지는 경제회복에 돈을 썼으나 이제는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돈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정부가 3일 쪽방 밀집지역에 간이화장실과 샤워시설,상담실 등을 설치하는등 복지서비스를 지원키로 한 것은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IMF위기는 넘겼다고 하나 쪽방 생활자가 적지않은 한 위기가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생산적 복지정책은 쪽방 생활자 같은 성실한 일용근로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지표(指標)가 되어야 하겠다.이들의 홀로서기에 앞장서고 있는 성공회‘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02­777­5217)의 활동이흐뭇하다. 李基伯 논설위원 kbl@
  • [연극 리뷰] ‘백댄서’ ‘99 교실이데아’

    ‘학급붕괴’를 남의 나라 일로만 치부해버릴 수 없게 된 요즘,우리 청소년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어떤 꿈을 꾸는 지를 보여주는 두편의 연극이 대학로에서 공연중이다. 극단 말죽거리가 인켈아트홀에서 공연중인 힙합뮤지컬 ‘백댄서’는 요즘 청소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라는 백댄서와 가수 지망생들을 주인공으로하고 있다.춤과 음악에 대한 열정,그리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갈망하는이들은 불나방처럼 기획사에 모여들고,철저하게 자본의 법칙이 적용되는 이곳에서 꿈의 허상을 깨닫는다.무리한 기획사 스케줄을 맞추느라 처음 가졌던 목표따위는 까맣게 잊고 기계적으로 춤추고 노래하던 이들은 기획사에서 쫓겨나면서 오히려 진정한 댄서와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코믹한 대사와 ‘청소년의 언어’인 힙합과 테크노의 강렬한 비트로 표현됨으로써 주관객층인 청소년들의 공감을 끌어들이고 있다. 주제의식이 극에 스며들지 못하고 겉도는 듯해 아쉽지만 모처럼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춘 뮤지컬이란 점에서 점수를 줄 만하다.2000년1월23일까지(02)529-4769극단 한강의 ‘99교실이데아’는 ‘청소년의 꿈’이란 주제를 독특한 형식으로 펼쳐낸다.‘나’라는 개별성은 사라지고 모두 똑같은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교육,꿈꾸게 하기보다는 경쟁을 부추기는 이그러진 학교의 모습이 아이들의 시각으로 그려진다. 수험생을 찍어내는 공장같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자유를 찾아 서성이지만 아무데도 갈곳이 없는 아이들은 스스로에게 ‘넌 누구니’라고 자문하며 절망에 빠진다.이들이 지친 영혼을 위안받는 안식처는 젝스키스,HOT 등 그들의 꿈을 대신 눈앞에 펼쳐보이는 대중스타들뿐. 기존 청소년극과 달리 대사는 가급적 배제하고 힙합과 랩,반복적인 움직임이 이를 대신하는데 이같은 극적 구성은 청소년 관객으로 하여금 능동적으로극에 몰입하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기성세대에게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깊은 동감을 이끌어 낼 만한 무대이다.31일까지.소극장 오늘한강마녀(02)762-6036이순녀기자
  • [의열 독립투쟁] (10)田明雲·張仁煥 의사

    국권이 이미 기울 대로 기운 1908년 3월23일 이른 아침.미국 샌프란시스코페어몬트호텔 앞에서 한 한국 청년이 몸을 숨기고 호텔 안의 동정을 살피고있었다.이 시각 한 대의 승용차가 호텔 정문에 정차하자 일본인 관리로 보이는,실크 모자를 쓴 두 사나이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더니 트렁크 몇개를 들고나와 승용차에 싣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무언가를 직감한 이 한국인 청년은 급히 인근 페리 정거장으로 향하였다.그는 오전 9시30분 정각에 발차하는 미국 대륙횡단열차와 관련해 ‘볼 일’이 있는 듯했다.이윽고 9시 15분경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서자 역 구내 한 쪽에 모인 일본인 무리에서 ‘반자이(만세)’ ‘반자이’하는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그들은 한 미국인의 전송차 나온 일행들이었다. 함성소리에 싸여 한 미국인이 탄 승용차가 정거장 앞에 멈추어서자 샌프란시스토 주재 일본총영사 고이게 조소(小池張造)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뒤따라 내린 미국인은 얼굴에 상처투성이였다.9시20분 개찰이 시작되자 승객들이역사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미국인도 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나서자 이때 철탑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국인 청년이 품에서 권총을 빼들고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첫 발은 불발이었다.다시 두번째 방아쇠를 당겼으나 이 역시 ‘찰칵’소리만 날 뿐 불발이었다.자신의 권총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한국인 청년은 권총을 거꾸로 고쳐잡고 차에 오르려는 미국인을 맹타하기 시작했다. 급습을 당한 미국인이 몸을 피해 도망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첫 발은 한국인 청년의 오른쪽 어깨를 빗맞고 지나갔고 두번째,세번째 탄환은 미국인의 등과 허리에 명중했다.두 사람은 땅바닥에 쓰러졌다.쓰러진 미국인은 친일파 스티븐스과 한국 청년 전명운(田明雲·1884∼1947)의사였다.총을 쏜 사람은 또다른 한국 청년 장인환(張仁煥·1876∼1930)의사였다.이른바 ‘스티븐스 처단의거’로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의 애국청년들이이국 땅에서 이룩한 쾌거였다. 전명운 의사는 서울 출신으로 일찍 양친을 여의고 불운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가업인 포목전을경영하던 장형의 도움을 받아 성장한 전 의사는 약관 20세인 1904년 2년제 신식학교인 한성학원을 수료하면서 시국과 개화에 눈뜨기 시작했다.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맹투사로 소문나 있던 전 의사는노상에서 한국인 부녀자를 희롱·모욕하는 일본인들을 응징한 뒤 신변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신부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다시 신부의 주선으로 미국 화물선 스타피시호의 취사장 인부로 고용된 전 의사는 대만·일본 등을 거쳐 그해 9월 하와이에 도착했다.이곳에서 1년간 농장 인부로 일하던 전 의사는 이듬해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부두노동자,철로공사장 노동자,채소 행상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민노동자와 몇몇 유학생,우국 망명가들이 모여 1905년 4월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기관지 ‘공립신보’를 통해 교민들의 세력을 규합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전 의사 역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1908년 3월 한국통감부의 외교고문이자 친일파인 미국인 스티븐스가워싱턴을 방문하는 길에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한다는 정보가 교민사회에 입수되었다.스티븐스의 귀국은 대외적으로는 일제가 다년간의 공로를 인정,특별휴가를 준 것으로 돼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명을 띤 귀국이었다.당시 미국 내에서 일본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격운동이격화돼 미 의회에서 관련 법 제정을 추진하자 일제가 그를 긴급 파견,미 국회의원과 유력자들을 만나 법안 제출·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3월3일 요코하마를 출발해 귀국 길에 오른 스티븐스는 선상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항구적인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국은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 그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으며 3월20일 샌프란시스코 도착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리하다”는 등 친일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내용은 미국 신문에 보도돼 재미교포 독립운동가들의 격분을 샀다. 공립협회 회원들은 스티븐스가 머문 페어몬트호텔로 찾아가 발언내용 취소를 요구하며항의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응징했다.이날 저녁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은 스티븐스 구타 경과보고를 겸한 모임을 갖고 대책을 숙의했는데 이자리에서 전 의사는 자신이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장인환 의사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전·장 두 의사는 23일 아침 일찍 워싱턴으로 가는 대륙철도를 타려던 스티븐스에게 세 발의 탄환을 날렸다.피격 후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긴급 치료를 받았으나이틀 뒤인 25일 복부 탄환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3월27일 전 의사는 병상에 누운 채 살인미수 혐의로,장 의사는 계획에 의한 일급 모살 혐의로 각각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다.교민사회에서는 두 의사의 무죄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호소하는 한편 변호사 비용 등 경비 모금에 나섰다.공립협회 회원이자 두 의사 후원회 임시서기인 송종익(宋鍾翊)은 현지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두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은 한국의 독립 쟁취를 위한 투쟁이라고 밝히고 재판 과정을 독립전쟁의과정으로 인식해줄 것을재판부에 호소하였다. 3차에 걸친 예심을 마치고 6월27일 전 의사는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나장 의사는 8개월 동안의 재판 끝에 12월23일 ‘애국적인 발광(發狂) 환상에의한 2급 살인죄’로 판정,극형은 면하고 이듬해 1월2일 열린 언도공판에서금고 25년형을 선고받았다.장 의사는 1919년 1월17일 가출옥으로 석방됐으며1924년에는 자유의 몸이 됐다. 전 의사보다 8세 연상인 장인환 의사는 1876년 평양 출신으로 장 의사 역시 조실부모하고 청소년기를 불우하게 보냈다.각지를 전전하며 상점점원 노릇을 하기도 하고 잡화상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평양에 살면서 청일전쟁을직접 체험하였다.1904년 하와이로 이민,사탕수수 농장에서 2년간 일하다 1906년 캘리포니아로 옮겨 노동자생활을 하던 장 의사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국권을 박탈하자 ‘대동보국회’ 가입을 계기로 항일 대열에동참하였다. 한편 전·장 두 의사의 의거는 항일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의미의 성과로기록되고 있다.우선 두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은 국내 민족진영에활기를 불어넣어 일시 수세에 있던 의병투쟁을 공세로 전환시켰다.또 두 의사의 의거·재판을 모두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국내외에 인식시켰다는 점이다. 의거 이후 전 의사는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현지에서 안중근(安重根)의사와 교유한 적이 있는데 전 의사의 의거 이듬해인 1909년 안 의사의 이토(伊藤博文) 처단은 전 의사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미국인 친일파를 처단,한국 청년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드날린 두 의사는 모두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의거 후 재판에서 무죄 석방된 전 의사는 일제의 감시와 암살 위협 등의 압박감에서 이름마저 ‘맥 필드’로 바꾸고 9월 연해주로 일시 망명했다가 1919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그때 부인과 양자로 입양한 조카를 만났으나 두 사람 모두 1927년 사망해 두 딸을 어렵게 길렀다.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노년까지 항일활동을 하던 전 의사는 해방 이듬해인 1947년 11월18일 63세로 LA 노인아파트에서 타계해 갤버리 천주교묘지에묻혔다. 94년 전 의사의 유해는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장 의사는 전 의사보다 비극적인 노년을 보냈다.1919년 1월 가석방된 후 실의와 병고를 이기지 못한 장 의사는 1930년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샌프란시스코 공동묘지에 묻혔던 장 의사의 유해는 75년 국립묘지로 이장돼 사후 45년 만에 영원한 안식처를 갖게 됐다.두 의사는 모두 지난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田·張의사가 처단 스티븐스는... 전명운·장인환 두 한국 청년이 처단한 미국인 스티븐스는 어떤 인물인가. 처단될 당시 일제 한국통감부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는 1852년 미국 오하이오 태생으로 19세때 오버린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학 법리과·외교학과를 졸업했다.처음 미 국무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1882년 주일 미국공사관에서 1년간 근무한 것이 인연이 돼 일본과 인연을맺게 됐다. 이듬해 이곳을 사직한 그는 주미 일본영사관의 서기관으로 변신하였고 이듬해 다시 일본 외무성고문으로 채용되어 본격적인 일제의 침략외교를 자문하기 시작했다.그가 한·일 외교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82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 체결때이다.일본측 전권대사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따라 내한한 그는 이노우에를 뒤에서 자문한 공로로 욱일장(旭日章)을 받았다. 스티븐스는 이후에도 영·일동맹과 뒤이은 포츠머드 강화조약에서 일본이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기여했다.이같은 공로로 그는 1904년 한·일간 체결된 ‘외국인 고문에 관한 규정’에 근거,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고문(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한국통감부 외교고문)으로 초빙됐다. 그는 ‘몸’은 미국인이었지만 ‘마음’은 일본을 위하는 자였다.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는 물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 체결때도 그는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이후 그는 한국의 민족진영으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고 전·장 두 의사에게 처단될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샌프란시스코 성프란시스병원에서 수술 도중 사망한 그의 사체는 4월2일 이 병원을 출발,6일 워싱턴에 도착됐다.장례는 8일 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으며 워싱턴 온비루묘지에 묻혔다.이튿날 거행된 추도식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조화와 일황의 조전 및 조화,그리고 200여명의 조문객이 참여한가운데 거행됐다. 일본 정부는 장례식에서 스티븐스에게 훈1등 훈장을 추서했으며 유족에게조의금으로 15만원을 전달했다.사후 발견된 그의 예금통장에는 2만6,000여원의 거금이 입금돼 있었는데 이 돈은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친일 대가로 받은것이었다. [정운현기자]
  • [대한시론] 安重根 의사 의거 90주년

    이달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伊藤博文)를 ‘포살’한지 꼭 90년이 되는 날이다.그의 의거는 당시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세계를긴장시켰다. 안 의사의 의거는 20세기 초,동아시아가 일제의 침략적 야욕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전개되었다.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지배하려던 야욕을 노골화하였다.1907년부터 일본과 러시아는 한국만주 외몽고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는데,그 일괄타결을 위해 1909년 10월말하얼빈에서 이토와 러시아 재무상 코코후초프 사이에 회담이 계획돼 있었다. 이 회담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분할을 논의할 참이었다.또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그간 한일간에 맺은 제반협약을 확인시켜 기정사실화하려 했고,러시아는 일본으로부터 외몽고에 대한 러시아의 복수이권을 보장받으려 했다. 이런 시점에서 10월 26일 아침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는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을 받다가 안 의사에게 포살된 것이다.안 의사는 곧 체포돼 적법하지 못한 재판에서 사형에 언도되고 여순감옥에서 복역중 1910년 3월26일,거사한지 꼭 5개월만에 순국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의연한 자세로 의거의 사상적 배경이라 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그러나 일제가 사형을 조기집행하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다.안 의사는 이 글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일제의 침략논리를 반박하였다. 올해로 안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대의를 결행한 지 꼭 90년이 되지만,의거지를 돌아보는 이들은 아직 그곳에 기념표지 하나 세우지 않은 후예들의무성의를 부끄러워 한다.일제하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를 되찾은지 50년이 넘었건만 남북의 정권들은 이제껏 그 역사적인 유적지에 한 점의 표지도 남기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이 자기의 영토 안에 그런 기념물을 남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변명되지 않는다.안의사의 의거가 한국인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중국의 반제운동사에도 큰 충격과 파장을 미쳤던 만큼 항일 반제의연대를 굳건히 한다는 점에서 중국정부를 설득,기념물을 건립했어야 했다.이런 점에서 북한이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있을 때 왜 그런 기념물 하나를 남길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럽다. 그 뿐인가.내년 3월 26일이면 안 의사가 순국한지 꼭 90년이 된다.그는 순국하기에 앞서 그의 두 동생에게 조국광복이 이루어질 때 유해를 고국으로옮기라는 유언을 남겼다.그런데도 아직 그의 무덤이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남북 당국은 중국의 비협조를 핑계대면서 자신들의 무성의를 합리화했고,상대방이 안 의사의 유해를 어떻게 하지 않나,서로 의심만 하면서 중국정부를상대로 남북한이 합의된 의견을 제시한 적이 없다.정말 부끄럽고 한심한 작태다.국권이 회복됐으면 가장 먼저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의 유해를찾아 정중하게 모시는 것이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이거늘,남북은 자신들의 정권유지와 정통성 과시에 도움이 되는데만 선열의 유해를 이용하고 있다. 이제 남북은 안 의사 의거지 기념사업과 그의 유해발굴을 위해서라도 함께의논하여 합의된 의견을 가지고 중국정부를 상대로 교섭해야 한다.이것은 중국이 안 의사의 의거지 기념사업과 유해발굴 문제를 두고 더이상 남북한의눈치를 보거나 저울질하는 자세를 갖지 않도록 하자는 의미도 있다.남북한이 안 의사 문제를 두고 의견을 수렴할 수 있다면,중국과의 교섭통로를 단일화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이 일이 실마리가 되어 남북의 논의구조가 해외에있는 다른 많은 독립운동 사적지와 선열들의 유해발굴 보존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면,아직도 조국의 안식처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땅을 헤매는 선열의혼령들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안 의사는 우리 민족 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인들도 숭모하고 있다.안 의사의거지에 기념물을 세우고 그의 유해를 찾아내는 데에 남북한 당국이 계속무성의하게 대처한다면,중국이나 일본의 민중들과 연대하는 운동을 벌이는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이런 연대는 20세기 초반 동아시아에서 풍미했던 침략주의 강권주의가 더이상 기를 펴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안 의사가 주장했던 한중일 3국이 평등과 호혜를 기초로 한 진정한 ‘동양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본다. [李萬烈 숙명여대 교수·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 [김삼웅 칼럼] 다른 양민학살도 밝히자

    6·25한국전쟁 발발 다음날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이 저지른 양민학살만행이 반세기 만에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나는 1995년 이맘 때 ‘해방후 양민학살사’란 책을 쓰면서 현지를 취재한적이 있다.50년 6월 25일 영동군 일대와 대전지역에서 피란온 많은 사람이노근리 부근 금광굴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있었다.26일 한낮이 되자 미군이일본인 통역을 대동하고 나타나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하여 주민들은 내키지 않는 피란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피란민이 경부선 열차의 철길을 따라 노근리에 당도했을 때 미군들의 무전연락을 받은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피란민들을 향해 무차별 기총사격을 가하는가 하면 인근의 미군들도 일제히 총을 쏘아댔다는 것이 생존 주민들의 증언이었다.4월혁명이 나던해 11월 유족들은 미국정부가 피해보상을 해준다고하여 서울에 개설한 소청사무소에 배상을 청구했다.그러나 소청사무소는 “법정기한이 경과한 후 제출한 것이기 때문에 심의할 권한이 없다”는 답변으로 유족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곧 5·16쿠데타가 일어나 이 사건 역시 다른 양민학살사건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졌다. 불행한 한국 현대사는 수많은 양민학살의 비극을 겪어왔다.양민학살은 우리시대의 아물기 어려운 비극이고 상처이다.결코 덮어둔다고 아물 수 없는 상처인 것이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인민군이나 외국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심했지만 우리군과 경찰, 우익단체들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도 수없이 많았다.학계는 45년 해방에서 공비토벌이 끝나는 10여년 동안에 6·25전쟁으로 인한 군인·군속 등 전쟁 관련 희생자를 제외하고도 줄잡아 100만 명으로 추산한다.희생자대부분이 이데올로기 문제로 죽어갔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고한 양민들이었다. 이들은 좌익척결의 이름으로,공비토벌의 명분으로,통비분자라는 혐의로,용공이적·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어갔다.6·25전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으로는 남원·문경·부산·해남·완도·고양·함평·임실·고창·순창·무주·산청·함양·거창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제14대 국회는 ‘거창 양민학살사건 관계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제정한 바 있고 현 국회는 ‘제주 4·3양민학살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활동중이다. 또 고양시 금정굴 양민학살과 전북 함평지역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가 활동한 바 있다. 우리 민족처럼 망자(亡者)에 대해 정성을 다하는 민족도 흔치 않다.그런데무고하게 죽은 100만 혼령의 대부분이 유골 수습도 제대로 안되고 진상규명도 안된 가운데 반세기를 보내고 있다.이것은 사자에 대한 도리가 아닐 뿐더러 문명국가의 수치스런 일이다. 양민학살 실태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더 이상 미루다가는학살실태를 밝혀줄 공공기관의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당시의 참상을 증언할 목격자들이 급격히 줄어들어 영구미제로 남게 된다.행자부에 따르면 거창사건은 위령비 건립 등이 추진중이며 함양·산청사건도 진상규명이 끝나명예회복이 추진중이라 한다.여타지역의 사건도 조사에 나서야 한다.4월혁명후 세상이 바뀌면서 진상규명 작업이 봇물처럼 터져나왔지만 군사정권은 유가족과 사회단체들이 유골을 찾고 위령비를 세우고 진상을 청원하는 행위를‘용공’으로 몰아 탄압했다. ‘국민의 정부’는 과거 정권과 달라야 한다.국회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전국적 조사에 착수하고 정부가 뒷받침해야 한다.그리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영원한 안식처를 만들고 위령탑을 건립하고,명예회복과 위령제를 지내용서와 화해의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미국 남북전쟁때 남·북군 4만여명이 숨진 게티스버그에 링컨이 세운 국립군사공원,프랑코가 스페인 내전때 ‘전몰자의 계곡’에서 사망한 수십만명장병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대사원을 세운 것에서 우리는 배울 바가 있어야한다.양민학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미래에 그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못하도록 하는 역사 교훈으로서도 중요한 것이다. 김삼웅 주필
  • 질곡의 역사 담긴 우리 옛건축 얘기

    누군가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가.600년이 넘는역사를 가진 고도(古都) 서울은 말 그대로 ‘역사의 현장’이다.그리고 그현장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곳곳에 말없이 서 있는 건축물들이다.고궁의추녀 끝에서는 왕조시대의 권위주의 문화가 묻어나고 남산 자락의 왜색 민가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애환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 근대건축사의 독보적 연구자인 김정동(金晶東) 목원대 건축도시공학부교수가 펴낸 ‘김정동 교수의 근대 건축기행’은 이러한 건축과 우리 근대사를 아우르는, ‘발로 쓴 문화사’라 할만 하다. 김 교수는 평소 사료 조사와함께 ‘발품팔기’를 아끼지 않는 연구자로도 유명하다. 이번에 출간한 책은그가 지난 20여년간 수도 없이‘가고 또가고’해서 눈에 익힌 근대 건축물들의 ‘애환사’를 건축사가의 눈으로 쓴 글들의 엮음이다. 도시화와 재개발 열기에 밀려 지금은 흔적마저 사라진 옛 건축물들.새 것만을 추구하는 세태에 ‘오래된 것이 아름답다’는 반기를 들고나선 김 교수는종로의 화신백화점,정동(貞洞)의 손탁호텔, 옛 경기도청 청사, 동양극장 등유서깊은 건축물이 사라진데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한 때 ‘조선인의 자부심’으로 불렸던 화신백화점은 주인의 영욕과 함께이미 자취를 감췄다.또 한말 각국 외교사절과 개화파들의 사교장으로 유명했고 국내 최초의 양식호텔로 우리 건축사에 기록될만한 건축물인 손탁호텔 역시 몇번 주인이 갈리면서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형해(形骸)를 전해주고있다.시인 이상(李箱)이 몇 푼의 커피값이 없어 발길을 돌렸던 경성역(현 서울역) 2층 그릴 역시 지금은 전시관으로 변해 그 시절 경성 멋쟁이들의 얘기는 이제 더이상 들을 수가 없다. 지난 역사 속에서 외세,식민화,전쟁,그리고 파괴로 우리 건축사는 질곡의역사를 기록해 왔다.지난 87년 서울지역에서만도 80여채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이 무단철거,혹은 훼손됐다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50대 초반의 김교수는 명동 국립극장 건물을 그리며 ‘명동 국립극장사(史)는 명동사(史)이며,명동애사(哀史)’라는 말로 감정을 대변한다. “1960년대까지 명동이 문화인의 서식처로 절정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명동에 국립극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명동 국립극장은 명동의 한 복판에서 있으며 미도파백화점으로부터 명동성당까지를 한 축으로 묶는 서울 유일의 문화지대였다.…안수길의 ‘학마을 사람들’이나 이어령의 ‘무익조(無翼鳥)’,폴 뉴먼의 영화도 그 때 거기서 보았다.첫사랑의 여인도 명동에서 만나 헤어졌고,지금의 아내도 거기서 만났다”. 바로 그 명동 언덕배기에 서있는 ‘고단한 자의 안식처’ 명동성당.원래 그 자리는 순교자 김범우의 집터였다.일제 때는 이 일대 명례동(明禮洞)을 일황의 호칭을 따서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렀는데 이는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땅이라는 의미였다.지난 1세기 동안 우리 근·현대사를 지켜본 명동성당은종교적 의미를 넘어 시대의 조감자(鳥瞰者)로 자리매김되고 있다.김 교수는“건축물은 역사·인간·문화 이 모든 것을 담고 ‘무언의 기호’로 우리에게 그때의 일들을 말해주고 있다”고 설명한다.푸른역사 9,000원정운현기자 jwh59@
  • 박복규 개인전

    중견 화가 박복규(54·성신여대 미대 학장)에게 바닷 속은 마음을 비춰주는 내성(內性)의 공간이다.또한 곤비한 영혼이 언덕을 삼을 만한 넉넉한 안식처이기도 하다.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생명의 모태인 바다,그 헤아릴 길 없는 바다 밑바닥까지 깊숙이 자맥질해 들어가 건져올린 이미지들이 27점의 작품으로 알알이 엮여 나왔다. 서울 갤러리 퓨전에서 열리고 있는 박복규 개인전은 ‘바닷 속 열어보기’라고 이름 붙여질 만하다.그가 펼쳐 보이는 바닷 속 풍경은 한마디로 이미지의 덩어리다.온갖 해초와 원형질의 미생물들이 뒤엉켜 있고 끝없는 세포 분열과 생성이 이뤄지는 수중세계에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해저영상은 프랑스 화가 이브 클라인의 청색 모노크롬(단색화)을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최근 작품들을 보면 조형정신의 변화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그는 이번 전시에서 화면 중심부에 사각의 작은 공간을 두고 그 안에 지상의 해변풍경이나 연꽃 등을 세밀묘법으로 그려 넣는 식의 색다른 그림들을 보여주고 있다.이처럼 액센트를 준 ‘그림 속 그림’의 방식을 통해 작가는 화면전체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미지 연작의 하나로 평면회화와 함께 입체작품도 선보인다.테라코타로 뜬 물안경을 쓴 해녀의 안면상은 눈길을 끌만한 작품.제주 비바리의 숨비소리가 들리는 듯,그 얼굴 표정이 살아 있다. 8일까지 (02)518-3631김종면기자
  • [金三雄칼럼] 이땅 어머니들에 헌사

    인간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대상 가운데 한가지만 고른다면 무엇일까. 자유·평등·박애·정의·진리·평화·인권·행복·종교·조국…? 모두 좋은언어이고 문자다.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이고 소중한 가치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어머니’란 말(문자)만큼 인간의 원초적이고 불변의사랑과 가치는 다시 없을 것이다.“인간의 출생에 있어서 지리적 장소가 고향이라면 생명적 정신적 고향은 어머니의 뱃속·젖가슴·그 품이라 할 수 있다.이곳은 모든 이의 영원한 고향일 뿐만 아니라 안식처요,낙원이다.”(김진섭·母頌論) 가정의 달 5월에 이 땅의 어머니들을 생각한다.고난의 역사와 함께 여성이란 이유로 겹고통을 겪으며 이 핏줄,이 겨레를 지켜온 어머니들이다.국난에처할 때마다 여성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고려시대에는 원(元)나라의 침략으로 ‘사위국’이 되어 2,000여명의 여성이 공녀(貢女)로 끌려가고,조선시대에는 청(淸)나라에 굴복하면서 수천명 여성이 잡혀가고 귀환해서는 ‘화냥년’ 소리를 들어야 했다.일제시대 일본군강제위안부로 끌려가 성노리개가 된 우리 여성은 무릇 기하뇨. 보리도 익어야 거두지 어두운 밤에 처녀를 찾으니 나비도 잘 보는데 봉오리 앉기도 전에 나무가지 꺾네. 고려시대 몽고군이 어린 소녀들까지 공녀로 끌어간 데 대한 민요의 하나다. 조선조와 일제시대에도 비슷한 민요가 회자됐다.시대마다 굽이마다 이 땅의여성들은 그렇게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식을 키우고 가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궈 오늘에 이르렀다.지금은 또 IMF 환란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이,어머니들이고통을 겪고 있는가. 빈말이 아니다.단군의 어머니 웅녀,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신라시조 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가락국 시조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 등 개국시조에서부터 여성(어머니)은 이 땅을 열고 지키는 모태가 됐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수의(壽衣)를 만들며 “우리 모자의 상면은 이승에서는 없기로 하자.네가 혹시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훈계’했다. 치하포에서 일본 중위 쓰치타를 죽이고 15년형을 선고받은 아들 김구를 서대문감옥으로 면회 간 곽낙원 여사는 “이야!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아들을 격려하며 옥바라지를 했다.어찌‘그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가벼운 한마디로 그치랴.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달라졌다.독립국가·민주화가 되면서 여권도 크게 신장됐다.가족법 개정으로 재산분할권이 인정되고 ‘성희롱’이 범죄로 다스려진다. 남편에 대한 가부장적 권위나 종속적 위치가 인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가정’으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도 용납되지 않는다. 사회적·경제적 능력을 갖춘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현격하다.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나 하며 사는 전통적 어머니가 아닌 직업인·사회인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IMF시대를 맞아 많은 어머니들이 모성을 포기하는 극단의 행태를 보인다.가난을 견디지 못해서,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가정을 포기하거나 이혼과 가출이 급증한다.어린 자식,병든 남편을 버린 여성이 많으며 환락에 빠져 가정을 파탄시킨 어머니들도 적지 않다.‘맞고 사는 남편들의 모임’(맞사모)이 구성될 만큼 여권이 신장된 반면 성적타락·가정해체·모성상실이라는 ‘21세기 한국사회의 비극’적 현상이 급증하고 있다.물론 아직도 수많은 여성·어머니들이 남성들의 권위주의,폭력·생활고와 낡은 인습,범죄와 유혹에 시달린다.‘빗나간 자식사랑’‘일류병’‘과보호’ 현상도 뒤따른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라도 모성만은 포기하지 말았으면 한다.양처는 아니라도현모의 전통을 이으면서 ‘원초적이고 불변의 가치’인 영원한 고향 ‘어머니’라는 언어와 그 존재의 자리만은 지켰으면 한다.겹고통 속에서도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가정의 달에 드리는 헌사다.
  • [외언내언] 가정의 달

    가정의 단란은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이다. 돌아갈 집이 있고 반겨줄가족이 있다면 더이상의 행복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존재를 ‘내가 타고난 영광’이라고 표현한 시인도 있다. 밖에서 돌아왔을때 텅 빈 집안이란 사막처럼 어둡고 싸늘할 뿐이다.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타락의 늪속에 빠져들 수도 있다. 지난 1년은 개인이나 국민이나 모두가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 생각지도 못한 경제위기 앞에서 긴 시련은 된서리처럼 혹독하고 매몰찼다. 실직과 부도, 빚보증과 파산, 집을 등지고 거리로 쏟아져나온 노숙자와 길에 버려진 아이들, 편부·모자가정이 늘어났다. 경제난에 시달리다 못해 가족이 동반자살을 기도하는가 하면 이혼율은 97년 11월 472건이던 것이 98년 3월에만 66%가늘어난 780여건에 이르고 있다. 이혼사유는 주로 부부불화(81%)·돈문제(4.2%)·가족간 불화의 순으로 외국의 한 매스컴은 이를 두고 “한국은 지금 생이별의 바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신록이 푸른 5월은 어린이날·어버이날·스승의 날로 이어지는 가정의 달이다. 우리 가정은 가파른 벼랑끝에 서있었으나 경기회복의 조짐으로 어느 정도 숨을 돌리고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울 때다. 때마침 사회 각계에서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등 자녀를 지키려는 캠페인이 가정의 따뜻함을 한층 되살려내는 분위기다.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최소단위인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가정이 흔들리고 깨어지면 사회가 흔들리고 국가 전체의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여건은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시련을 주었고 용기와 힘으로 이를 극복하여 비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지듯이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게되었다. 이제는 새싹을 틔우듯이 가족과 가정의 본질인 화목을 다시 찾아야한다. 정부도 가정의 행복이 사회기반이라는 차원에서 가정의 단란을 되찾는 데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실직자에 대한 생활지원과 지속적인 실업극복으로 자활의 기회를 주는 것이 먼저다. 가정다운 가정이란 구성원 전체가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는 광장이다. 하나의 작은 싹이 큰 나무로 자랄때까지 물을 주고 가꾸면 튼튼한 나무가 되듯이 가정이 튼튼해지면 나라가 튼튼해진다. 더구나 가정은 복합적인 유혹과 숱한 타락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안식처다. 가정을 다시 세우는 일만이 무한 경쟁시대에서 이길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李世基논설위원]
  • 이경재신부 흉상제막-새달11일 성나자로마을서

    ‘나환자들의 안식처’인 성 라자로마을(원장 김화태신부)에 ‘영원한 나환자의 대부’인 이경재신부의 흉상(사진)이 세워진다.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의 라자로마을은 이경재 신부의 선종(善終) 1주기를 맞아 4월11일 오전 11시이신부의 흉상 제막식을 갖는다. 제막식에는 수원교구 김남수주교를 비롯해 라자로돕기회(회장 봉두완)와 사제마을후원회(회장 박완서)회원들,102명의 라자로마을 나환우(癩患友) 등이참석하며 27명 나환우들의 합동회갑 및 고희잔치도 열린다. 성 라자로마을은 해마다 이경재 신부가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마련해온 음악회를 올해는 이신부 추모음악회로 바꿔 오는 5월20∼23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열기로 했다. 이경재 신부는 천주교 나환자 복지시설인 성 라자로마을을 설립,나환자 돕기에 힘쓰다가 지난해 5월11일 선종했으며 지난해 8월4일부터 김화태 신부가 뒤를 이어 봉사하고 있다. 朴燦
  • 中거주 위안부할머니 64년만에 귀국

    “정말 내 나라에 왔어…” 12일 오후 3시 30분 아시아나항공 332편으로 중국에서 귀국한 일본군대 위안부 출신 文明今할머니(82)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문을 열었다. 지난 해 55년만에 고향을 찾은 캄보디아 훈할머니(본명 이남이)에 이어 해외에 거주하는 일제 치하 피해자가 고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수양딸 白玉蘭씨(56)와 동행했다. 휠체어를 탔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文할머니는 또렷한 우리말로 “너무나좋아서 자꾸만 눈물이 난다”고 소감을 밝혔다. 文할머니의 귀국은 국내에 거주하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정성으로 이루어졌다. 안식처인 ‘나눔의 집’에 사는 할머니들은 지난 5∼7일 사흘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일일찻집을 운영해 모은 돈 700여만원을 여비로 보내 文할머니의 귀국을 도왔다. 文할머니는 현재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손오현(孫吳縣)에 살고 있다.고향은 전남 광양군 진상면 구황리(현 황중리).18세 때인 1935년 “취직시켜주겠다”는 일본군의 꾐에 속아 중국으로 끌려갔다. 10년 동안 혹독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고 해방 뒤에는 수치심 때문에귀국하지 못했다.
  • 행정기구의 개혁/吳錫泓 서울대 교수 행정학(특별기고)

    ◎조직의 폭과 높이 함께 줄여야/명분·장식용 위원회는 일 끝나면 과감히 정리/목적·기능따라 차별화된 개혁해야 성공 행정기구를 여기저기 뜯어고치는 구조적 접근방법은 아주 오래된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이다. 우리나라 행정기구의 구조적 문제들은 과다팽창된 규모,기능분립주의적 분업구조,과도한 집권성과 경직성,고층적 구조 등이다.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진행될 기구개혁의 과제를 생각해 본다. 첫째 수요에 대응해 구조를 조정하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규제개혁,정보화,국가발전단계별 행정기능변화,고객집단의 변화,일반적 환경 변화 등 여건변화에 부응한 구조조정이 촉진되어야 한다.구조조정에는 확장도 있고 감축도 있겠지만 무게중심은 감축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탈국가화, 그리고 작은 정부구현을 요구하는 압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기구감축에는 직접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부서보다는 내부관리담당부서를 더 줄여 행정농도(行政濃度)를 낮추어야 한다.그리고 조직의 폭 뿐만 아니라높이(계층수)도 함께 줄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높이를 그대로 두고 폭만 줄이면 조만간 그것을 다시 늘려놓고 마는 것이 관료제의 본성이다. 고층구조화를 억제한다는 것은 관료적 관성에 대한 끈질긴 투쟁을 의미한다.기관간의 고립적 서열관계,업무관계의 지위중심주의 등을 완화하기 위한 방책들을 강구해야 한다.조정자는 피조정자보다 언제나 상위계급을 달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해야 한다.부처간 조정자는 부총리급이라야 한다는 말은 구시대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정책·집행 혼동해선 안돼 둘째 조직간 업무배분,그리고 조직간 관계설정에서 기능분립주의를 완화하고 협동적 조정체제를 구축하도록 해야 한다.기능분립주의·할거주의는 집권주의와 부합된다.철권적 집권화가 사실상 어려워지고 분권화와 하급기관에 힘실어주기가 이념으로 되어가는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구조적 협동주의이며,이를 위해서는 기능의 동질성보다 일의 흐름을 더 강조해야 한다.생산과 관리,계선과 참모,정책과 집행을 혼동한 조직설계는 일의 흐름이라는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한 부처에 장관을 두사람 두자는 논의는 협동주의가 아닌 기능분립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며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 조직의 연성화를 촉진해야 한다.관료제 구조의 경직성을 완화하여 적응성을 높이는 것은 격동하는 시대의 필수조건이다.그러나 유기적 조정이 일어나게 하는 것과 경성조직을 경성조직으로 빈번히 개편하는 것은 구별하여야 한다.후자는 효과보다 비용을 더 크게 하고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조직의 연성화 촉진해야 넷째 한시적인 조직의 항구화를 막기 위한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개혁정책발전을 위한 비상임의 연구·자문기구 등 한시적이어야 할 기구들이 오래가면 관료적 보수성을 배우고 광범한 참여를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일몰법(日沒法)의 원리를 철저히 적용해 그런 일을 막아야 한다. 다섯째 위원회형 조직의 무분별한 설립을 경계해야 한다.계선조직의 두상구조(頭上構造)를 위원회형으로 만들 때에는 그 정당화 근거와 기능 등을 미리 엄격하게 규정해야 한다.명분쌓기나 장식용으로 만든위원회들,관변인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위원회들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최소한 잠정화해야 한다.모든 행정기관에 어떤 종류의 위원회를 획일적으로 구성하게 하는 법령의 제정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여섯째 조직구성 양태의 다원화를 용인하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행정조직의 목적과 기능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획일적으로 계층적이고 서열적인 구조를 적용하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지방화에 걸맞는 기구개편 일곱째 지방화에 대응한 기구개편을 서둘러야 한다.관치행정시대에 마련된 지방관리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편하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 여덟째 행정구조를 정보화의 요청에 대응시켜 나가야 한다.특히 통합적 정보관리체제를 조정할 기관적 기초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 서양화가 金章喜(이세기의 인물탐구:185)

    ◎기하학적 선에 엮어낸 ‘고요한 공허’/끝없는 그림에의 열정… 40나이에 미 유학/뉴욕 한복판서 처절하고 외로운 창조작업/그의 격자무늬속엔 ‘우주’가 들어있다. 金章喜의 화면은 ‘기하학적인 선(線)추구’로 표현된다. 100호 이상의 대형화면에 비단실을 드리운 듯한 섬세한 직선의 집합은 어느 때는 악보와도 같고 어느 때는 질서정연하게 창공을 가르는 새들의 편대와도 같다.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생 역정에서 파란과 곡절,희비가 파닥이다가 태양이 빛을 바래게 하듯이 정적(靜寂)으로 가라앉는 침묵의 뉘앙스다.도저하게 펼쳐진 구도 속에서 처음에는 질서파괴와 자유분방이 교차되지만 마침내 모든 번뇌를 씻은 무상무념의 이미지가 그것이다.미술평론가 김홍희는 이를 가리켜 ‘김장희 기하추상의 미학적인 절대성은 인간적 정취와 섬뜩한 창조적 전율’이라고 평한 바 있다.한 올도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선의 모습은 ‘무엇에도 구속당하지 않는 푸른 영혼의 안식처’라고 했다.또 그가 긋는 선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위적인 선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긋는 드로잉적인 선이 특징이다.물론 그것은 자를 대고 그었을 때보다 더 치밀하고 날카롭다.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가운데 손에서의 힘의 강약이나 리듬이 되살아나는 것은 내면에 뿌리박혀 있는 강인한 작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이른바 김장희의 격자무늬는 기하학적 수직과 수평을 짜면서 속세적인 잡다한 상념을 제거하고 있다는 의미다.이와 같은 은밀한 반란은 미술사에서 이미 수립된 기존 양식에 대한 안티테제의 선언일 수도 있다.또는 캐나디안­아메리칸 여성화가 아그네스 마틴이 그런 것처럼 미니멀 추상 속에 그물망같은 선묘의 영역을 확대해 나간다고도 할 수 있다.화면의 가장자리까지도 그림의 일부이며 사방의 여백을 넉넉한 여유로움으로 남기는 것 등이 그렇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미술평론가 홍가이는 ‘그의 캔버스의 창은 사각의 틀로 짜여진 것이 아님을 정확하게 묘사하거나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주공간의 영역을 깊이 바라볼수록 ‘공허와 무의미’만이 남듯이 그의 그림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는 새 ‘고요한 공허’의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김장희는 지금 뉴욕 소호 한복판 커다란 스튜디오에서 혼자 살고 있다.두꺼운 시멘트 벽과 높은 천장,오래 된 건물의 2층 화실은 300호에서 1,000호에 이르는 대형 캔버스들이 여기저기 누워있거나 세워져 있다.그는 아침마다 음악을 들으면서 이 캔버스들이 도열된 사이를 한동안 서성거린다.어제 한 일을 돌아보고 오늘의 작업에 연결시키려는 의도다.그리고 연필과 색연필·유화물감으로 극치의 극치로 치닫는 고달픈 작업에 매달린다.그러다가 며칠 만에 거리로 나와 화랑들을 순례하고 연극 영화 무용 등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예술을 토론한다.그의 예술론은 때묻지 않은 눈부신 투명성을 지녔고 그의 명상이 심오하다는 것은 그의 주변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다.실제로 그는 하르트만에서 비트겐슈타인·푸코와 에코에 심취하고 수많은 예술서적을 탐독한다.그리고 내부에 축적된 다양한 감동을 가늘고 굵고 여리고 짙은 선으로 끝없이 풀어낸다. 김장희는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다. 화장기 없는 신선한 얼굴에페이더너웨이를 풍기는 세련된 차림,깡마른 체격이 신경질적으로 보이기 쉽지만 남을 포용하고 스케일이 크고 대범한 일면이 그의 성격이다.원로 서예가로서 플루트를 연주하던 心堂 金濟仁씨와 李再淳씨 사이의 2남1녀중 가운데.바이올리니스트 金旻이 그의 오빠이고 그래픽 디자이너인 金椿이 남동생.서울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이재현씨에게 바이올린을 사사했으나 손가락이 짧다는 스승의 충고에 따라 이대미대 동양학과에 진학했고 결혼과 함께 68년에 도일, 교토에 머무는 동안 교토대와 도지샤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일본에서는 주로 모더니즘 판화그룹에 속해 있었다. 8년 만에 서울에 돌아와 한때 슬럼프를 겪다가 그림을 위해 결혼을 정리하고 40이 넘은 나이인 지난 86년 뉴욕행을 감행했다.아들 경준(도쿄대 재학중)이 있다. 그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컨템포러리 웨스턴아트의 배경이 무엇인가를 보았고 웨스턴아트의 뿌리를 찾아 최근에는 1년의 한 계절을 유럽에서 보내고 있다.그곳에서 유럽의 아이디얼리즘(觀念)과 동양의 선적(禪的)인 것,메타피지컬이 아닌,피지컬을 수용하고 자신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하나의 ‘빛’인 ‘선(線)’을 찾아내자 화가로서의 길을 확신하게 됐다고 말한다.그리고 그가 찾아낸 ‘선’위에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압축하고 정예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그의 미니멀리즘은 언제부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선에까지 도전하여 이제는 마음속으로 ‘심상(心狀)’을 그려내게 된 경지다.그러나 그의 작업은 하나의 극단에 다다를 수 없고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도 없는 무한대의 우주공간임을 그는 알고 있다.그래서인지 그가 태어난 환경과 서양의 문화가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만나고 변화하는가를 추적하겠다는 집념에 차있다. 해마다 서울과 유럽,일본의 초청전시에 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기회도 남용하지 않는다.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예술가가 자신의 세계에 도취하고 있을 때의 아름다움이 교교히 배어나온다.그런 김장희와 그의 그림을 보고 시인 김화영은 ‘향기가 우러나오는 시정’이라는 글을 쓴 적도 있다.그는 스스로 천재임을 결단코 부인하지만 그의 노력과 절제와 단호한 결단은 눈부신 미래를 예고하는 ‘범상치 않은 예술가의 한 사람’임을 그의 주변과 유럽의 화단은 일률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의 길 1944년 서울 출생 1966년 이화여대 미대 졸업 1968­74년 일본 교토대 졸업 1974년 일본 젊은 아티스트 10인전 1974­76년 일본 도시샤대 대학원 미학과 졸업 1975년 교토 아메리칸센터그룹전 1988년 도미, 뉴욕체류 1994년 서울개인전(인공갤러리) 1995년 이탈리아 파도바 ‘25X25’전,베네치아 개인전 및 트라게토 ‘30X30’전 출품 1996년 서울개인전(갤러리서미) 1999년 3월 일본개인전(도쿄 쇼게츠갤러리)서울개인전예정(인갤러리) 현재 뉴욕거주,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활동
  • 덕수궁 석조전 미술관으로 부활/국립현대미술관 분관 새단장

    ◎근대미술 상설전시관 역할 기대 덕수궁 석조전이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난다.국립현대미술관은 덕수궁의 석조전 서관을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새 단장,다음달 1일 선보인다. 석조전 서관은 지난 8월 문화재관리국의 대전 이전과 함께 본격적인 내부공사에 들어갔으며 400평 규모에 6개 전시실을 갖추었다. 1938년 3월31일 완공된 석조전 서관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현대미술품을 전시하고자 지은 건물로 창경궁의 이왕가(李王家)박물관에서 미술품만 골라 이곳으로 옮겨 전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지난 73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석조전 서관은 86년 경기도 과천에 새 현대미술관이 들어설 때까지 명실상부한 현대미술의 산실이자 미술애호가들의 안식처 구실을 했다.덕수궁미술관은 과천의 본관과 역할을 분담,근대미술 상설전시와 중소규모의 기획전시로 국민과 친화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한편 주변 문화시설과 연계, 외국관광객 유치에도 한몫하겠다는 것이 현대미술관의 계획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덕수궁분관 개관기념특별전으로 내년 3월까지‘다시 찾은 근대미술’이란 제목으로 그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유화,수묵,채색화,스케치 등 구한말에서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작품 100여점을 전시한다. 특별전 전시작품 중에는 19세기의 천재화가 장승업의‘화조영모 10폭 병풍’을 비롯,김은호의 ‘노안도’와 ‘학’,이도영의 ‘기명절지’ 등 전통화법을 이어받은 작품과 이중섭의 ‘북한산이 있는 풍경’,길진섭의 ‘모란’,김재선의 ‘소년좌상’,승동표의 ‘자화상’등 서양화가 포함돼 있다. 또 월북화가 이여성의‘격구도’,망명화가 이응로의‘삼각산’등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만날 수 있으며 국내에서 활동한 네덜란드 출신 휴버트 보스,일본화가 야마시타 신타로의 작품도 소개한다.
  • 러 유탄에 東歐마저…/CIS 국가들 전전긍긍

    ◎러 의존 큰 우크라이나 외채상환조정 준비/서구 경제 편입된 폴란드·헝가리 등도 타격 러시아가 사실상 국가부도를 내며 세계경제를 끊없는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러시아의 침몰은 경제성장 둔화와 과도한 재정지출,유가하락이 근인(根因)으로 지적된다. 러시아는 92년 시장경제로의 전환이후 재정조달을 위해 최고 229.7%까지 급등한 이자를 감수하며 단기국채(GKO)를 발행했다. 약 400억달러에 달하는 GKO중 190억달러는 러시아 시중은행이 인수하고 110억달러는 외국인 투자자가 매입했다. 원유는 수출의 20%를 담당해왔으나 최근 유가가 30%나 폭락,막대한 재정수입 감소를 초래했다. 국제투자자들이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자금을 회수한게 금융시장 붕괴를 초래했다. 주가폭락,환율급등의 재앙을 당했지만 재원이 부족한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관은 구원권이 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와 교역관계가 독립국가연합(CIS) 소속 국가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반면 서유럽 경제체제에 편입된 폴란드 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들은 간접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점치고 있다. 교역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해온 우크라이나는 벌써 외채상환조정을 준비중이다. 러시아 붕괴는 세계 경제에 심리적 불안감을 확산시키고 있다. 305억달러의 채권을 보유한 독일을 비롯,서유럽과 미국,일본에서 일제히 주가가 폭락한 이유다. 이같은 심리적 불안감은 한국,인도네시아,태국 등 경제회복에 필요한 자본유입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시아 국가의 고통을 배가시키고 아직까지는 ‘건재한’ 홍콩과 중국의 통화를 시험대에 올릴 것으로 분석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신흥시장을 이탈한 자본의 안식처인 뉴욕증시의 주가하락은 단순한 불안감의 반영일 수도 있으나 버블상태의 미 경제의 거품이 빠지는 것으로 공황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고 말했다.
  • 브람스 ‘첼로 소나타 1,2번’(명반과 함께하는 음악여행:6)

    ◎요하네스 브람스/다시 그후,겸손함의 기적/혼탁한 마음 다한듯 길게 무겁게 낮게/‘巨人 베토벤’ 실감/처절한 열등감·자책/단련의 美學 포옹/巨匠의 피아노 반주/겸손함의 驚異 잉태 1.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일주 전에 들었다.그 후로도 첼로 음(音)이 내 귀를 놓아 주지 않는다. 내가 흔들리는 정신인 까닭이다.명료하고 확고한 마음에는 오히려 바이올린이 어울리는 법.바이올린은 황홀하게 반 란하고 도약하며 뒤틀린다.첼로는 길게 낮게 무겁게 이어진다.혼탁한 마음이 다할 때까지. 바흐의 동시대인(同時代人) 헨델은 이재(理財)에 밝았고 그래서 ‘독주악기 첼로’의 예술적 가능성을 볼 수 없었다.바흐 이래 하이든은 첼로 음색(音色)에 너그럽고 명징한 노년(老年)을 입혔다.‘말짱한’ 모차르트는 그런 하이든을 ‘파파’로 모셨지만 그 자신은 첼로를 좋아하지 않았다.베토벤에게 첼로 소나타 다섯 곡은 침묵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놓았던 고통연습의 징검다리였다. 모차르트 못지않게 음악이 말짱했던 멘델스존은 역시 이렇다 할첼로 음악을 남겨 놓지 않았다.그러나 정신병에 시달렸던 슈만에게 첼로는 드문드문 내면에 비치는 아주 달콤한 햇볕이었다.그것은 ‘대중적’이고 눈물 겨운 안식처였다. 그리고 슈만에 이어,아니 슈만과 병행하여 브람스의 첼로 음악이 전개된다.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는 모두 두 곡.1번은 1862∼5년 간,2번은 그후 30년도 더 지난 1886년에 쓰여졌다. 2. 브람스의 꿈은 베토벤 교향곡 세계의 계승­발전.이것은 너무도 원대한 꿈이었다.왜냐하면 그에게 베토벤 교향곡 9곡은 음악의 모든 가능성을 탕진하면서 이룩된 음악의 세계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가는 누구나 불가능한 것을 지향한다.그리고 예술적인 열등감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킨다.그는 역사상 어느 예술가보다도 고통스럽고 치열한 작곡 생애를 살았다.그의 실내악들은 하나 같이 걸작이지만 교향곡 작곡을 위한 필생의,피말리는 연습곡들이기도 하다.그러나 누군들,특히 베토벤이 또한 안 그랬겠는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들의 벽에 부딪쳐 두 곡에 그쳤다.피아노독주곡,바이올린 독주-협주곡 등 거의 모든 실내악 장르에서 브람스는 ‘베토벤의 숫자’를 넘지 못했다.교향곡은 4번에서,끝난다. 베토벤 콤플렉스에 물들지 않은 것은 장년(壯年)의 첫 걸작 ‘독일 레퀴엠’과 생애 내내 산발적으로 분출한 민요풍 성악곡들 정도.첼로 소나타 또한 그 숫자에서 베토벤의 절반에 못미친다.그러나,경우가 다르다.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은 거인적(巨人的) 열등감의 노력이 감행되던 무렵,‘독일 레퀴엠’ 직전의 작품이다.그리고 2번은 그 노력이,교향곡 4곡까지 포함하여,모두 마감된 이후 시기의 작품이다. 무슨 뜻인가? 2번은 심화된 좌절감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좌절의 브람스 30년 음악 생애를 너그럽게 ,그리고 역전(逆轉)의 미학으로 포옹한다.놀라운 일이다.겨우 첼로 소나타 한 곡이…그 30년은 브람스 자신에게 뼈를 깍는 훈련과 자책의 기간이었지만 바로 그렇게 음악사에서 가장 창조적이었던 한 페이지 아닌가. 3. 오늘 소개하는 음반은 1952년,제네바 빅토리아 홀 연주회 실황을 담고 있다.작품이 창조되고 64년후.첼로는 피에르 푸르니에,피아노는 빌헬름 박하우스.푸르니에가 첼로를 맡은 것이야 하등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거장 박하우스가 피아노 ‘반주’라니.그는 평소에 대학원생처럼 겸손하지만 일단 피아노 앞에 앉으면 포효하는 ‘건반의 사자’ 아닌가.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박하우스의 피아노가 분위기를 압도하기 시작한다.과연,아니나 다를까…그러나 이 우려는,틀렸다.여기서 박하우스는 제 힘을 주체 못하고 ‘반주의 경계’를 뛰어 넘는 것이 아니다.박하우스의 ‘튀는’ 반주야 말로 브람스의,무의식의 본심(本心)을 꿰뚫는다. 브람스는 첼로와 피아노의 역할을 역전­중첩시키면서 그 관계를 심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음악 생애를 응축­정리하고 있는 것이다.그렇게 1번 1악장에서 첼로가 주저 주저하고 피아노는 ‘열등감을 벗고’ 매우 명랑하게 채근 대더니 2번 1악장에 이르면 첼로는 여전히 투명한 겸손함을 유지하면서 아연 교향곡 수준의 고통의 무게를 머금는다. 그리고 교향곡 너머로 나아간다.그렇게,겸손함의 기적이 재현된다.1번의 3악장 구조는 2번에서 4악장 구조로 발전했다.3악장 구조는 공간적 열림의 춤과,4악장 구조는 시간적 발전과 연관이 있다.그러나 교향곡의 4악장 구조는 모든 악기를 동원하면서 동시에 총체화하려는 욕망 때문에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열리지 않고 오히려 닫히는 성향이 있다. 1955.녹음 DECCA 425973­2 첼로:피에르 푸르니에 피아노:빌헬름 박하우스
  • 美 도피 범죄자 강제송환 길 터/韓美 범인인도조약 의미

    한국과 미국이 9일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우리의 사법권이 미국에까지 미칠 수 있게 됐다.미국으로 달아난 범법자를 강제 송환받아 처벌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한마디로 범법자에게 미국은 더 이상 ‘도피처’가 아니다. 10년이 넘도록 끌어온 조약의 체결은 우리의 인권 상황이 국제적으로 신뢰를 받을 만큼 성숙됐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해외도피 사범의 60% 가량은 미국을 안식처로 삼아왔다.특히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사람이나 사기·횡령 사범 대부분은 미국에 체류 중이다.일부 재력가들은 재산을 미리 빼돌린 뒤 미국으로 달아나는 수법을 일삼아왔다. 법무부에 따르면 미국에 도피 중인 범법자 가운데 검찰 경찰 관세청 등 수사기관이 공식적으로 수배한 사람은 350여명이다.비공식 수배자까지 포함하면 3,000명에 이른다. 그동안 국내 수사기관은 미국으로 달아난 범법자에게는 사실상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한미 양국은 인도 의무 대상 범법자를 두나라 법률상 징역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규정했다. 형사소송법상 해외도피 중에는 공소시효가 진행되지 않으므로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달아난 사람도 강제 송환이다. 검찰은 PCS(개인휴대통신) 사업체 선정 비리와 관련,미국 하와이에 체류중인 李錫采 전 정보통신부장관을 송환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따라서 李 전 장관이 조약체결에 따른 첫 대상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 鄭鎭奭 대주교/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가톨릭교회는 오는 2000년에 맞을 대희년(大禧年)을 크게 준비하고 있다.희년은 7년마다 오는 안식년(安息年)의 7번째 다음 해,즉 50년만에 오는 해를 일컫는다.그 희년 가운데서도 새로운 천년대(밀레니엄)를 시작하는 1000년이나 2000년에 희년을 맞을 때는 꼭 대희년이라 부르며 전세계 교회가 축제 분위기에서 새로운 세기를 준비한다.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지난 94년에 ‘3천년기’라는 교서(敎書)를 발표하고 이 뜻깊은 대희년을 준비토록 했다.그 해 로마에서는 세계 성체대회를 비롯한 세기적인 대희년 축제가 예정돼 있기도 해 로마로 향하는 모든 항공권은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다. 한국천주교회 역시 교황교서에 따라 지난 해를 ‘성자의 해’,올해를 ‘성령의 해’,내년을 ‘성부의 해’로 정해 대희년을 준비하고 있다.한국교회는 특히 새로운 세기에 걸맞는 ‘새 날,새 삶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세부실천사항도 마련해 추진하고 있다.세번째 천년기를 맞는 가톨릭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거대한 변화와 넘치는 은총을 바라는 설레임으로가득하다. 이 큰 변화의 시기애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서울대교구장이 바뀌었다.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과 교구장 金壽煥 추기경 착좌 30주년이 되는 지난달 29일,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새로운 교구장에 청주교구장인 鄭鎭奭(니콜라오) 주교를 임명한 것이다.교황은 교구장 정년인 만 75세 되던 지난 해 5월 金 추기경이 밝힌 사임의사를 1년만에 공식 수락한 셈이다.엄혹한 시절,수많은 민주인사와 국민들은 명동성당을 안식처요 피난처로 삼았고 金 추기경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며 힘과 용기를 얻었다.민주화가 되고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때 단행된 서울대교구장의 교체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교회의 임무가 바뀌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임명과 동시,대주교가 된 그는 ‘하느님이 하필이면 나를 선택하신 뜻이 무엇일까,그 뜻을 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가장 먼저 기도했다고 한다.로마 성 우루바노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하던 지난 70년,당시로서는 최연소인 39세에 주교로 서품돼 청주교구장으로 28년 동안 사목해오면서 채택한 주교표어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옴니부스 옴니아)’였다.오는 29일 초대교황 성베드로 대축일에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을 갖는 鄭 대주교의 표어가 어떻게 바뀔 지 주목된다.
  • 위기의 가정을 지키자(사설)

    신록이 눈부신 5월이다.“금방 찬물로 세수한 스물 한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시인이 노래한 달이다.어린이 날,어버이 날,스승의 날,성년의 날이 이어지는 이 달은 ‘가정의 달’이자 ‘청소년의 달’이다. ○곳곳에 가정해체 징후들 싱그러움과 희망을 상징했던 축복의 5월이 그러나 올해는 우울하게 다가왔다.국제통화기금(IMF)체제 아래서 ‘위기설’이 떠돌고 있고 우리 가정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다. 가장(家長)의 사업 부도와 실직으로 부부관계가 악화돼 이혼이 급증하고 생활고로 노부모와 어린 자식 돌보기를 포기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무의탁 노인 수용시설이나 영아원·육아원 등에는 올들어 할아버지·할머니나 어린 아이들을 맡기겠다는 상담전화가 지난해의 2~4배로 늘어났다 한다.가정해체의 안타까운 징후들이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화풀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들도 늘어났다.한국이웃사랑회 아동학대상담소의 경우 아동학대 신고건수가 올해 들어 지난해 같은기간에 비해 무려 10배 가까이 많이 접수됐다는 것이다. 경제적파산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의 자살행렬 또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대검 강력부가 집계한 3월말까지의 자살자 현황에 따르면 올들어 하루 30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우리 가정이 이처럼 위기에 처한 적은 없었다.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겪고 극심한 궁핍의 시련을 당하면서도 우리는 가족이라는 따뜻한 울타리에 기대어 혹독한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그 가족이 지금 해체되고 인륜이 무너지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회복보다 더욱 시급 물론 산업화 이후 일터와 분리된 가정의 중요성과 역할이 축소되면서 전세계적으로 가족해체와 청소년 문제가 제기돼 오긴 했다.우리 사회에서도 가족의 고립화 현상,가정폭력 등이 문제화했다.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하숙집 같은 가정에서 컴퓨터·TV·비디오에만 각자 몰두함으로써 가족간 대화가 단절되고 남편과 아내,부모와 자식 사이에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기도 했다.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현상이었지 지금처럼 무서운 파급력을 지니지는 않았다. 가정은 우리 사회를지키는 마지막 보루이다.최소 단위의 공동체인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와 나라도 건강해진다. 흔들리는 가정을 바로 세우는 것은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는 일보다 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국가 차원의 사회 안전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우리 상황에서 사회통합의 핵심역할을 해온 가정해체를 방치하면 사회전체의 위기가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원 자신의 노력 중요 노인 및 아동 복지시설의 확충 등 국가 차원의 대책과 종교·사회단체의 프로그램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족 구성원 자신의 각성과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우리 모두 남편과 아내로서,아버지와 어머니로서,아들과 딸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자. 가정이 하루의 피로를 풀고 활력을 줄 수 있는 안식처의 역할을 유지한다면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은 오히려 가족의 결속을 더욱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풍요의 시대에 나약하고 이기적으로 자란 아이들이 보다 건강하게 강인하게 성장할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루 세끼중 한끼만 배불리 먹어도 은혜로웠고 가족간에 사랑과 우애가 넘쳤던 지난날 궁핍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가정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를 5월 가정의 달에 찾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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