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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칼럼] 하토야마 정권의 신일본과 미국/박홍기 도쿄특파원

    [특파원 칼럼] 하토야마 정권의 신일본과 미국/박홍기 도쿄특파원

    예상대로다. 미·일 관계가 전례없이 차갑다.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이 출범한 지 두 달이 다 됐다. 냉기류는 여전하다. 근원은 ‘긴밀하고 대등한 미·일관계’를 구축하려는 하토야마 정권의 정책노선에서 비롯됐다. ‘대등’은 서로 낫고 못함이 없이 비슷하다는 의미다. 자민당 정권 때의 미·일 관계가 대등하지 않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지난달 10일 한·중·일 정상회담 때 “미국에 그동안 너무 의존해 왔다.”고 밝혔다. 탈(脫)대미추종 선언이다. 최근 국회에서도 “미·일 동맹의 자세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거리낌없이 답변했다. “왜, 미국에 이견을 말하면 안 되는가.”는 하토야마 총리의 오래된 소신이다. 1996년 옛 민주당을 이끌 때부터 자민당의 대미 노선과 차별을 뒀다. 당시 중의원선거 때 주일 미군의 감축을 뜻하는 ‘상시 주둔 없는 안보로의 전환’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일 안보조약의 근본적인 수정, 대등한 파트너십의 심화도 주장해 왔던 터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미국 추종외교 탈피, 헌법 제정 등을 제기했던 자민당 초대 총리이자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다. 하토야마 정권의 대미정책은 결코 느닷없이 출현한 게 아니다. 하토야마 정권은 미국에 관계 재정립을 위한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버팀목으로 삼았다. 명분도 갖췄다. 자민당 체제로부터의 탈각이다. 미국이 씌워주는 ‘안보 우산’에서 일정 부분 안보의 ‘자립’을 꾀하는 전략이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 몫을 하겠다는 각오다.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과 맞물린 측면도 없지 않다. 미국이 달가워할 리 없다. “일본이 어떻게…”라며 발끈한 상태다. 하토야마 정권을 인내를 갖고 지켜보자던 미 정부 내 신중론이 수그러들었다. 대신 강경론이 부상했다. 하토야마 정권을 빗대 “좌파정권이다.”, “지금 최대 문제는 중국이 아닌 일본이다.”라는 격한 목소리가 들릴 정도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지난달 20일 방일, “후텐마비행장의 이전은 합의안대로 실시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상황까지 낳았다. 미국의 대처는 매끄럽지 못하다. 반세기만에 이룬 비자민당 정권인 만큼 정책검증은 마땅하다. 일본은 정치적 지각변동에 있다. 정치주도의 대청소가 한창이다. 미국이 초조해할 일이 아니다. 자칫 자민당 정권 시절 “미·일 관계가 돈독해지면 질수록 아시아 각국과도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밝힌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식의 대미 추종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과 하토야마 총리가 13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짧은 기간에 생긴 깊을 골을 다 메우지는 못했다. 지난 9월 미국에서의 첫 회담에 이어 ‘미·일 관계의 중층적 심화’를 약속했다. 핵 없는 세상과 지구온난화 대책도 합의했다. 심각한 엇박자를 낸 후텐마비행장 이전을 비롯, 미·일 지위협정 개정, 주일 미군의 경비삭감, 핵밀약설 등 민감한 개별 사안은 얼버무려 넘겼다. 정상 간의 낯을 고려해서다. 때문에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끓는 형국을 연출했다. 불협화음의 조율은 회담 이후부터다. 하토야마 정권은 신일본의 구도를 표방한 이상 결실 없이 미국 측에 물러설 수 없는 처지다. 정권의 명줄을 재촉할 수도 있는 까닭에서다. 내년 7월 참의원선거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파국으로 치닫는 치킨게임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의 안보 정세도 시간의 흐름 속에 바뀌었다. 미국의 대응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다. 내년은 미·일 안보조약 50주년이 되는 해다. 미래를 지향, 건설적인 협의를 진행할 수 있는 적기다. 미국도, 일본도 실리와 명분을 갖춘 타협점, 나아가 새로운 관계의 설정을 기대하고 싶다. 박홍기 도쿄특파원 hkpark@seoul.co.kr
  • [오바마 아시아 순방] 日, 안보 중점… 동맹 재구축 협의

    │도쿄 박홍기특파원│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10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전화회담에서 오는 13일 정상회담과 관련, “미래지향의 일·미 관계를 강화하는 기회로 삼자.”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미·일 정상회담의 최대 쟁점은 하토야마 정권의 출범과 동시에 불거진 미·일 안보문제다.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과도 맞물려 있다. 그러나 대등한 미·일 관계, 주일 미군의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 등 짧은 시간 내 합의 도출이 쉽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포괄적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지향점은 ‘미·일 동맹의 중층적 심화’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지난 5일 방일 때 “정상회담을 후텐마 비행장 문제만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라고 설명했다. 하토야마 총리도 9일 “(후텐마 비행장이) 큰 의제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만 오바마 대통령은 ‘후텐마’를 직접 거론하지 않은 채 미·일 합의 준수를 요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토야마 총리 역시 회담에서 후텐마 비행장 이외에 미·일 지위협정의 개정, ‘핵밀약설’ 등을 에둘러 짚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서 핫 이슈가 된 까닭에서다. 두 정상은 내년에 미·일 안보조약개정이 50주년을 맞는 것을 계기로 동맹 재구축을 위한 협의에 합의할 것 같다. 또 ▲북핵 및 핵확산방지 ▲우주개발 ▲사이버 안전 ▲지구온난화대책 등도 주요 의제로 삼기로 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10일 각료회의에서 확정된 아프가니스탄의 지원책을 ‘선물’로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달할 방침이다. 일본은 내년부터 5년 동안 아프간에 50억달러, 인접국인 파키스탄에 20억달러(약 2조 320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대신 해상자위대의 인도양 활동은 내년 1월 중단할 예정이다. hkpark@seoul.co.kr
  • 日 4대연속 ‘세습총리’ 탄생

    日 4대연속 ‘세습총리’ 탄생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은 오는 16일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가 제93대 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4대째 잇따라 ‘세습 총리’를 맞는다. 민주주의가 정착한 국가에서 세습 지도자가 드문 만큼 세계적인 진기록이다. 제90대 아베 신조 전 총리부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하토야마 차기 총리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모두 총리를 지냈다. 아베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1960년 1월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을 강행해 조인까지 마쳤지만 이른바 ‘안보투쟁’을 초래, 총리직을 내놓았다. 아베 전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대의 첫 총리이자 최연소 총리였다. 제91대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는 ‘부자 총리’라는 첫 사례를 남겼다. 또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가 총리에 재직할 때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아버지 후쿠다 전 총리는 1978년 중국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남겼다. 제92대 아소 다로 총리는 전쟁의 혼란을 수습해 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외손자다. 하토야마 차기 총리의 할아버지는 아소 총리의 외조부인 요시다 전 총리와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인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다. 자민당 창당의 주역이자 초대 총재를 지낸 하토야마 전 총리는 1956년 10월 소련과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아소 총리는 “부모의 뒤를 이어 나쁜 게 없다.”며 세습에 긍정적인 반면 하토야마 차기 총리는 “세습이 일본의 정치를 왜곡시켰다.”며 비판적이다. 하토야마는 연고도 없는 홋카이도가 선거구인 점을 들어 세습정치인이라는 시선에 대해 “너그럽게 봐줬으면 좋겠다.”며 이해를 구했다. 앞으로는 ‘세습 총리’를 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민주당은 ‘8·30’ 선거부터 현직 국회의원의 배우자나 3촌 이내의 친족이 같은 선거구에서 출마하는 것을 내규로 금지한 데다 자민당도 세습 정치인의 입후보를 제한하기로 공약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제2대 존 애덤스와 6대 존 Q 애덤스, 제41대 조지 H 부시와 43대 조지 W 부시가 부자대통령의 기록을 갖고 있다. hkpark@seoul.co.kr
  • 日, 천황제 유지 전략적 거래 있었다

    日, 천황제 유지 전략적 거래 있었다

    1945년 8월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다.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침략전쟁에 대한 법적·윤리적 책임자로서 ‘천황’ 히로히토가 전범 재판정에 설 수도 있는 위기가 닥친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1947년 5월 시행된 신헌법(평화헌법) 아래서 히로히토는 민주주의와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일본을 패하게 한 미국은 오키나와에 거대한 군사 기지를 건설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맥아더의 점령정책에 필요했던 히로히토 ‘히로히토와 맥아더’(권혁태 옮김, 개마고원 펴냄)의 저자 도요시타 나라히코 일본 간사이가쿠인대 법학부 교수는 이 의문에 대한 열쇠를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관계에서 찾는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맥아더로 대변되는 미국과 천황제를 사수하려는 히로히토간의 ‘전략적 거래’ 관계이다.히로히토와 맥아더는 1945년 9월27일 첫 번째 회담을 시작으로 1951년 4월 맥아더가 해임될 때까지 총 11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뒤이어 부임한 리지웨이와도 7차례에 걸쳐 회담했다. 저자는 회담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통해 히로히토가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변명했던 것처럼 입헌군주제 하의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이중외교’를 구사하는 능동적인 정치 주체였다는 점을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히로히토와 측근들은 전쟁의 모든 책임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부에 떠넘겨 도쿄재판의 위기를 모면할 계획을 세웠다. 패전 처리 과정에서 나타난 히로히토의 권위를 점령정책에 이용하려던 맥아더는 본국에 히로히토를 기소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1차 회담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히로히토와 맥아더가 이같이 노선을 조정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그러나 ‘맥아더 회고록’에는 당시 회담에서 히로히토가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말해 맥아더가 크게 감동을 받은 것으로 기술돼 있고, 이 ‘미담’은 일본 전후 사회에 널리 유포돼 천황의 권위를 더욱 굳건하게 했다. 맥아더는 또한 일본 점령에 대한 연합국 최고 결정기관인 극동위원회가 설치되기 전에 서둘러 헌법 개정을 ‘강제’함으로써 천황제가 폐지될 가능성을 차단했다. 이런 전후 사정들은 히로히토가 왜 맥아더와의 마지막 11차 회담에서 도쿄재판에 대해 감사의 뜻을 밝혔는지, 그리고 ‘천황’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왜 중지하게 됐는지에 대한 배경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일본 전후사의 ‘금기’ 본격 다뤄 히로히토가 천황제 사수를 위해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한 두번째 사례는 오키나와 미군 기지이다. 공산주의를 천황제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한 히로히토는 신헌법으로 ‘상징천황’이 된 후에도 ‘극동의 스위스론’을 주장한 맥아더를 따돌리고 직접 미국과 접촉을 통해 불평등한 미·일안보조약을 음지에서 실현시켰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이 책은 일본 전후사 연구에서 금기시돼 온 ‘천황’을 전면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전쟁 책임은 물론 전후 책임을 둘러싼 히로히토에 대한 연구가 ‘공백’으로 남아 있는 한 전후 일본사를 충분히 서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전후 일본이 걸어온 길을 인식해야만이 일본이 동북아시아라는 지역 차원에서 새롭게 안정보장의 틀을 만들어나가는 역사적 책임에 응답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1만 6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씨줄날줄] 뉴 그레이트 게임/박정현 논설위원

    영국의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잘 알려진 동화 정글북의 저자다. 그는 소설 ‘킴(KIM)’을 펴낸 지 6년 뒤인 1907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소설은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진 강대국간 세력경쟁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영국인 고아 소년 킴은 인도에 살다가 순례여행을 떠나지만 영국정부 비밀첩보원의 문서를 전달한다. 러시아 스파이 추적 임무도 맡는다. 킴의 활동무대인 중앙아시아는 19세기 초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진정책을 폈던 곳. 러시아는 흑해 주변에 사는 슬라브 민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튀르크와 발칸전쟁을 일으킨다. 초반에 러시아가 우세했으나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튀르크 편을 들면서 러시아는 패전국이 되고 만다. 전쟁 이후에도 영국 등 서방국가와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패권을 놓고 한판의 ‘그레이트(거대) 게임’을 벌였다. 군사 안보 측면과 함께 중앙아시아에 매장된 석유·가스 등의 천연자원을 둘러싼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영국 학자 매킨더의 말처럼 중앙아시아 지배권은 바뀌어 왔다. 냉전시대에는 옛 소련이 장악했고, 소련 연방 해체 이후에는 미국이 영향력을 차지했다. 미국은 키르기스스탄에 1000여명의 미군이 주둔하는 마나스 기지를 두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이끄는 러시아는 ‘강력한 러시아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 이 지역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벨라루스·우즈베키스탄 등 옛 소련 연방의 7개국과 함께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신속대응군을 창설하기로 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응하려는 것이라는 관측이다. 마나스 기지에는 미군 대신 CSTO 신속대응군이 주둔할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약 200년 전처럼 범슬라브 민족 통합을 내세워, 새로운 남진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뉴 그레이트 게임’이 본격화되면 긴장감이 높아질 테고, 국제적 관심도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박정현 논설위원 jhpark@seoul.co.kr
  • [글로벌 시대] 오늘을 뛰어넘는 희망/간노 도모코 일본 프리랜서 언론인

    [글로벌 시대] 오늘을 뛰어넘는 희망/간노 도모코 일본 프리랜서 언론인

    “오늘을 뛰어넘는 희망.” 지난 6월10일 서울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를 두고 일본의 어느 저널리스트는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의 말을 빌려 이렇게 표현했다. 그날 집회 현장에 나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촛불 행렬에는 중·고등학생부터 유모차를 끈 30대 부부, 넥타이족까지 있었다. 서울시청에서 광화문 사거리까지의 차도를 가득 메운 광경은 압권이었다. 이들은 차분하게 내게 분노를 말해줬다. 행진 대열을 뒤따르면서 일본인은 언제부터 분노하기를 포기했을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본에서 시위가 정점에 올랐던 것은 1960∼70년대다. 최대 규모는 60년의 신(新) 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한 ‘안보투쟁’ 때였다. 국회의사당 앞에 약 65만명이 모여 많은 부상자를 내고 학생 1명의 아까운 목숨이 희생됐다. 당시 기시 내각을 총사퇴시킨 시위가 ‘국가 권력에 대한 투쟁’이란 무정부주의로 변모하자 시민의 참여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쇠퇴해 버렸다. 지금 일본에서도 고용문제, 고령자 의료문제 등으로 분노가 솟구치고 있다. 하지만 그 분노가 하나로 뭉쳐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다. 한 일본인 기자의 탄식이다.“불만의 목소리가 가득 차 있지만 언젠가는 사라진다. 과거 같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체념 분위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만 해도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미국은 대선 후 일본에 쇠고기 수입조건의 폐지 압력을 가해 올 것인데, 일본은 과연 먹거리 안전을 놓고 한국처럼 국민이 궐기해 반대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미국산 쇠고기는 1977년부터 3차례 교섭을 거쳐 91년 수입을 시작했다. 싸고 부위별로 수입할 수 있어 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3년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돼 수입이 처음으로 중단됐다. 남녀노소가 즐겨 먹던 ‘쇠고기 덮밥의 위기’가 닥쳤다. 쇠고기 덮밥 체인점이 미국산 쇠고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2001년 9월 일본에서 처음으로 광우병 소가 발견돼 열도를 공황 상태에 빠트린 적이 있다. 당시 일본에서 기자생활을 하던 나는 여성이 주름을 없애기 위해 주입하는 콜라겐도 소에서 추출한 것이어서 위험하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일본산 소에 대한 전수검사가 시작됐다. 일본은 미국에도 전수검사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20개월령 이하의 소에서는 광우병 발병 사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오히려 특정위험물질(SRM)을 제거하면 검사가 필요없다는 완화된 조건을 제시하고 일본 정부가 수용하는 형태로 수입이 재개됐다. 그런데 2006년 1월 나리타 공항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검역하면서 SRM에 해당하는 척수가 섞여 있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수입이 금지됐다. 같은해 7월 일본 시찰단이 미국으로 건너가 안전성이 확인된 시설에 한해 수입을 재개하기로 합의하는 등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중단과 재개가 몇차례 되풀이됐다. 국민들이 전전긍긍할 때 저명한 경제평론가가 미국산 쇠고기로 만든 ‘쇠고기 덮밥’에 대해 “덮밥을 먹고 광우병에 감염돼 죽는 게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보다 낮다.”고 지지발언을 한다. 이후 지난해 3월부터 대형 마트에 미국산 쇠고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4월 또 SRM이 포함된 쇠고기가 발견돼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은 꼬리를 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앞으로가 더 문제다. 미국은 수입소의 월령을 30개월 미만으로 하도록 일본에 이미 요구해 놓은 상태다. 게다가 올 들어 미국이 복제 소의 수출을 일본 측에 타진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이러한 사태 전개에 일본인은 어떻게 대처할까. 분노를 잊은듯한 일본인에 “오늘을 뛰어넘는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간노 도모코 일본 프리랜서 언론인
  • 日 60년대 학생운동 세력 국가 경제성장 중추 변신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의 1960년대도 사회 전반에 걸쳐 뜨거웠다. 빈곤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경제 성장의 궤도에 집입하던 시기다. 또 낡은 권위의 틀을 깨려는 학생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던 때다. 사회적 변혁기였다. 흔히 ‘학생운동에서 시작, 학생운동으로 끝난 10년’이라고 일컫는다. 이소자키 노리요 가쿠슈인대학 교수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47∼49년생)가 당시 학생운동의 주축이었지만 투쟁 현장을 떠난 뒤 모두 산업현장에 뛰어들어 경제성장을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정치·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세월의 흐름 에 녹아든 탓에 딱 짚어 내기도 어렵다는 얘기다.60년대 전반은 ‘전국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후반은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가 주도했다. 전학련은 미군의 일본 주둔을 공식화한 ‘미·일 안보조약’의 반대투쟁을, 전공투는 학내 민주화와 탈권위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68년 7월2일 도쿄대 전공투의 야스다 강당 점거사건은 학생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점거 사태는 69년 1월18일 6개월여 만에 경찰의 강제 해산에 의해 막을 내렸다. 도쿄대는 당시 69학년도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다. 야스다 강당 사건 이후 학생운동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과격한 투쟁과 함께 노선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동시에 시민들의 사회 변혁에 대한 의식도 경제 성장에 따른 생활 환경의 개선에 무뎌졌다.‘불꽃놀이의 폭죽처럼 확 일었다가 사그라졌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고바야시 가즈히로 도쿄신문 논설위원은 “60년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추진한 ‘소득배증계획’의 실질적인 효과는 국민들의 사회의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이었다.”면서 “폭력적인 학생운동도 시민들을 식상하게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사회는 한층 보수화 쪽으로 흘렀다. 학생운동은 70년대 들어서 소수 과격으로 치달았다. 대표적인 조직이 적군파다.70년 3월 도쿄 후쿠오카행 일본항공(JAL) 여객기 요도호를 공중납치, 북한 평양으로 들어갔다. 당시 범행을 저지른 적군파 4명은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다. 적군파의 활동은 72년 2월19일 아사마산장의 인질사건을 끝으로 사실상 맥이 끊겼다.10일간 인질사건을 벌인 적군파 5명은 도피 과정에서 동료 14명을 사살, 충격을 줬다. 70년대 크게 활성화된 ‘생활협동조합운동(생협)’의 모태도 60년대 학생운동에 기반을 뒀다. 생협은 생활과 밀접한 활동을 전개,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 생활 공동체의 풀뿌리 운동으로 자리잡았다. 시민단체의 대중화 토대도 마련했다. 지난 1월 현재 등록된 시민단체는 3만 3675곳에 달한다. 나일경 주쿄대 교수는 “생협은 정치적 성향에 질린 운동의 대안으로 등장한 생활밀착형인 까닭에 주민들과 호흡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hkpark@seoul.co.kr
  • 심보르스카 시선집 출간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선집 ‘끝과 시작’(문학과지성사)과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의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만엔원년의 풋볼’(웅진지식하우스)이 나란히 나왔다. 심보르스카는 실존 철학과 접목한 시와 간결하고 적확한 표현으로 잘 알려진 폴란드의 대표시인. 이번 시선집은 1945년 초기작부터 2005년 최신작까지 170편의 시를 한데 묶은 것이다.오에 겐자부로의 1967년작인 ‘만엔원년의 풋볼’은 귀향한 형제가 떠올리는 1860년의 농민봉기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미·일안보조약 이후 1960년대의 상처와 치유를 그린 작품이다.
  • ‘동북아판 나토’ 밑그림 그릴까

    |베이징 김미경특파원|동북아 다자(多者) 안보협력체 탄생할까? 6자회담 ‘2·13합의’ 이후 한반도 비핵화와 함께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한 안보협력 논의가 시작됐다.16일 열린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실무그룹 회의는 동북아 역내에서 처음으로 정부 차원의 안보협력 다자협의 틀의 제도화를 논의한 자리로, 그동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6개국은 이 자리에서 역내 합동 해상 수색·구조훈련 등 초보적인 신뢰구축 조치들과 각국이 가진 안보인식 공통분모를 동시에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를 위해 6개국이 현재 참여하고 있는 양자 차원의 안보조약, 다자 차원의 안보관련 국제기구 등의 협약 및 합의문 헌장 등을 비교·검토함으로써 공통분모를 찾는 방법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이에 대해 북측은 동북아 지역의 냉전 잔재 및 군비경쟁을 우려하면서도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를 통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동북아에는 역내 평화·안보체제 다자협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를 비롯, 한·중·일 및 미·러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면서 안보협력을 위한 다자대화가 한번도 이뤄지지 못했다. 반면 동남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비롯,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중미통합체제(SICA) 등 세계 각지에 정부간 다자안보 협의체가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날 각국 정부 차원의 동북아 안보협력 다자대화가 시작됨으로써 오는 19일 개막하는 제6차 6자회담 본회의와,‘2·13합의’ 초기이행조치 이후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6자 장관급회담의 주요 의제로서 지속적인 협의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6자 장관급회담에서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방안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보여 향후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실무회의의 협의결과가 동북아 안보협의체 구성의 큰 그림을 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동북아 다자안보대화가 정례화된 협의체로 발전, 동북아 평화·안보 구축을 위한 역할을 다 하려면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관계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과 맞물려 가야 하기 때문에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chaplin7@seoul.co.kr
  • [주일 미군기지를 가다] (하) 美·日 ‘국방공조’ 요충지 오키나와

    [주일 미군기지를 가다] (하) 美·日 ‘국방공조’ 요충지 오키나와

    |오키나와(일본) 김상연특파원|기자는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1일까지 도쿄 인근과 오키나와에 위치한 주일 미군기지를 둘러보고 미·일동맹의 현주소를 체감했다. 그 소감을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사령관과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가상대화 형식으로 5일자에 이어 한차례 더 소개한다. ●맥아더 오키나와를 둘러본 소감이 궁금합니다. ●기자 나름대로 휴양지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전반적으로 낙후된 인상이었습니다. 섬 전체를 무차별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군 기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주도보다 작은 섬에 미군기지가 36개나 산재하다니…. ●맥아더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말미에 미군이 격렬한 전투 끝에 점령한 뒤로 사실상 군기지 역할을 해왔죠. 실질적으로 주일 미군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밀집해 있다지요. ●기자 전쟁 얘기를 하셨는데, 오키나와의 ‘평화기념공원’에 가서 당시 전투장면을 담은 흑백 동영상을 보면서 전쟁의 참상에 가슴이 저렸습니다. 특히 한국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 앞에 서서 징용과 위안부 등으로 끌려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불귀의 객이 된 분들의 가엾은 인생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맥아더 오키나와 전투는 미·일 사이에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었죠. 미군 입장에선 결정적 승기를 잡기 위해 화력을 쏟아부었는데, 일본이 죽기 살기로 나오면서 희생자가 많아졌습니다. 미군 1만여명과 일본군 9만여명을 비롯해 민간인까지 합쳐 20만여명이나 희생됐어요. ●기자 정치지도자들의 오도(誤導)로 희생을 당하는 건 결국 애꿎은 민중입니다. 전쟁만한 악덕(惡德)이 있을까요. ●맥아더 냉정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전쟁을 혐오한 나머지 국방을 홀대하는 우를 결코 범해선 안 된다는 충고를 하고 싶군요. 문약(文弱)에 빠지면 결국 더 큰 참상을 부른다는 것을 역사는 입증하고 있습니다. 나는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이란 인류가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래서 플라톤은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보았노라.”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기자 …. ●맥아더 이거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군요. 그래, 가데나 공군기지에 가봤습니까. ●기자 예. 정말 대단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공군기지라는 평판이 무색하지 않았습니다. 장장 1만피트에 달하는 광활한 활주로에 가공할 첨단 ‘항공 무기’들이 즐비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봤던 E-3C공중조기경보통제기,RC-135정찰기,KC-135공중급유기,P-3C대잠초계기 등을 육안으로 접하니 실감이 안날 정도였습니다. 특히 첨단 F-15전투기 54대가 격납고에 나란히 진열돼 있는 장면은 보는 이의 기를 질리게 하더군요.‘지구상에 이런 미군을 감히 상대할 나라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이같은 가공할 무기들이 사용되는 사태가 닥치지 않았으면…. ●맥아더 어허~, 감상을 자제하라니까요. ●기자 가데나는 평소 120여대의 항공기가 상주하는데 전시에는 여기에 50% 이상 전력이 증강된다고 합니다. 일본 본토의 요코다 기지가 보급·수송의 허브기지라면 가데나는 전투기지의 허브인 셈입니다. 훨씬 무시무시하다는 얘기죠. 가데나는 위치상 도쿄보다 오히려 서울, 평양이 더 가깝습니다. 유사시 F-15로 서울까지 1시간도 안 걸린다고 합니다. ●맥아더 한국 입장에서는 든든하겠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전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되더라도 미군과의 동맹을 공고히 한다면 감히 한국을 넘볼 나라는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맥아더 사실 가데나는 북한뿐 아니라 중국 견제용으로 활용되고 있을 겁니다. ●기자 군사전문가답습니다. 냉전 때만 해도 일본 본토 북부의 미사와 공군기지가 중요시됐는데, 그 대접을 지금은 오키나와가 받고 있습니다. ●맥아더 후텐마 기지도 가보셨나요. 그 용맹한 해병들…. ●기자 그렇습니다. 해병은 역시 해병이더군요. 시원시원하고 박력 있는 게….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자신들이 제일 먼저 한국 땅을 밟게 된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더군요.‘고속수송함’(HSV)을 타면 30시간 안에 한국에 도달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인 8000여명이 2014년까지 미국령 괌으로 옮겨간다고 합니다. 인근 주민에 대한 성추행 범죄 등으로 더이상 여론의 원성을 버티기 힘든 상황이랍니다. ●맥아더 그 용맹무쌍한 해병들이 어쩌다가 그런 평가를…. ●기자 일본 정부는 미국과의 ‘찰떡 공조’를 공언하는지 몰라도 일본 국민들은 점차 목소리를 키우고 있습니다.2008년 요코스카 기지에 들어올 예정인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을 놓고도 반대 목소리가 있습니다.‘핵’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 미 해병대가 괌으로 이전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105억달러 가운데 60억달러를 일본측이 부담하는 데 대해서도 탐탁지 않은 기류가 감지됩니다. 미국 땅에 기지를 짓는데, 왜 일본이 돈을 내냐는 것이지요. ●맥아더 당연히 일본이 부담할 몫이지요. 장소만 달라질 뿐 괌 해병대의 주임무는 일본 방위이니까요. 미·일 안보조약 5조는 미국이 일본의 안전을 지켜주는 대신 일본은 땅과 시설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기자 막상 일본에 가서 보니 일본 정부가 내는 방위비 분담금이 실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공식적으로 51%를 부담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75% 이상을 낸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로 미군에 헌신적인 인상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다행이지요. ●맥아더 한국과 일본은 다르지요. 일본은 패전국 아닙니까. ●기자 그렇죠. 그리고 일본은 종전후 일왕이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미군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런 내막은 외면한 채, 한국내 일각에서 “일본은 미군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데 한국은 뭣하고 있느냐.”고 지적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행태입니다. 한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당당하게 임할 자격이 있습니다. ●맥아더 맞아요. 그때 일본 왕이 나한테 편지와 사람을 보내 애걸복걸했지요. 이제 와 내 입으로 그런 얘기를 하기는 뭣하지만…. 어쨌든 동맹 간의 작은 차이는 공동의 가치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자 짓궂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만약 한국과 일본이 싸우면 미국은 어느 편을 들까요. ●맥아더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는 식이군요. 하지만 정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미국은 아마 일본 편에 설 것이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일본은 19세기에 이미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화된 나라이자 미국의 가치에 부합하는 동양 국가라는 이미지로 미국인에게 비쳐졌습니다. 태평양전쟁 끝무렵에 소련과의 점령지 경쟁에서 미국이 일본을 최우선적으로 ‘찜’해 놓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일본의 몸값을 높게 친 거죠. 직설적으로 말하면, 당시 한반도는 일본만큼 매력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결국 미국은 능력 있고 매력 있는 나라를 친구로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국 사람들이 사대주의적인 의존심을 버리고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하길 바랍니다. 그래야 미국 사람들한테 등뒤에서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기자 충고 고맙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서 장군의 말씀을 꼭 전하겠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장군의 그 멋진 은퇴사를 직접 들려주실 수 있나요. ●맥아더 이거 참, 쑥스럽게…. 노장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질 뿐입니다. carlos@seoul.co.kr
  • 美 냉전시대 핵무기 1만3000기 해외 배치 “한국에도 상당수 있었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은 과거 냉전시대에 한국을 비롯해 유럽, 일본, 타이완, 필리핀, 하와이, 괌 등 미국 본토를 제외한 해외 지역에 모두 1만 3000여기의 핵관련 무기를 배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SA)가 5일 밝혔다. 한국의 핵무기 배치와 관련,1977년 보고서에는 미군이 상당수의 핵무기를 한국에 배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NSA는 지적했다. 일본과 관련, 일본 본토(규슈, 혼슈, 홋카이도)에 완전한 형태의 핵무기를 보관하지는 않았지만 1960년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의 부속합의서에 핵무기 이동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킴으로써 사실상 주일 미군의 핵무기 보유를 가능케 했다고 밝혔다. 즉 미국은 미군 함정이나 항공기가 핵무장을 하고 일본에 있는 기지나 항구를 통과하거나 단기간 머물 경우엔 협의하지 않았다고 NSA는 지적했다.NSA는 최근 미 국방부와 국무부, 에너지부, 국가안보위원회(NSC) 등의 핵관련 문서 등을 분석, 홈페이지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NSA는 냉전시대 미국이 해외에 배치했던 1만 3000여기의 핵무기 가운데 7000여기 이상이 유럽 지역에 배치됐다고 밝혔으나 다른 지역에 배치된 핵무기 수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의 해외배치 핵무기 숫자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은 옛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종식된 80∼90년대에 해외에서 수천기의 핵무기를 철수시켰지만 아직도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국가에는 계속 배치하고 있다고 NSA는 덧붙였다. dawn@seoul.co.kr
  • [떠오르는 아베시대] 집안 내력과 성장 배경(상)

    [떠오르는 아베시대] 집안 내력과 성장 배경(상)

    |도쿄 이춘규특파원|아베 신조 일본 관방장관이 1일 사실상 총리를 뽑는 집권 자민당 총재선거 출마 선언을 한다. 하지만 그의 차기총리 당선은 확실시된다. 그는 이미 전직 총리들을 예방하며 성원을 부탁하는 등 총리 행보를 시작했다. 다가오는 ‘아베 시대’에 앞서 그의 성장배경과 인맥, 정치 철학과 한반도 인식 등을 3회에 걸쳐 짚어본다. 아베의 성장 배경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우선 그의 출신지역이 야마구치현이라는 점이다. 야마구치현은 일본의 근대국가를 출범시킨 1868년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을 배출한 지역이다. 야마구치현은 근대 일본 최대의 파워엘리트집단을 배출했다.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도모, 가쓰라 타로, 데라우치 마사다케, 다나카 기이치,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등 7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일본 광역단체 중 가장 많은 숫자다. 도쿄도, 이와테현은 각각 4명씩을 배출했다. 아베가 총리가 되면 8번째 야마구치현 출신 총리다.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 이후 34년만에 야마구치(조슈) 대망론이 재현되는 셈이다. 그의 집안은 화려하다. 그는 ‘우파’‘강경파’‘매파’‘네오콘´(신보수)이란 표현을 싫어한다. 그러나 아베는 강경우파로 인식된다. 지역출신이나 가계의 내력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베의 외할아버지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그는 태평양전쟁 기간 ‘천황’을 보필해 성전을 수행하는 군국주의 정치 운동을 했던 정치가였다. 패전과 동시에 A급 전범 용의자로 수감됐다가 1948년 다른 전범들이 처형되기 전날 석방돼 ‘쇼와의 요괴’로 불렸다. 석방 배경은 수수께끼지만 미국과의 뒷거래설이 제기되고 있다. 기시는 석방후 정치무대에 복귀,1955년 결성된 자민당 초대 간사장, 외상을 거쳐 57년 총리로 취임해 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강력한 반대여론 속에 실현시켰다. 당시 여섯살이던 아베는 도쿄 시부야 기시의 집을 형과 함께 자주 다니던 사실을 회상하며 “데모대에 포위됐던 할아버지의 집”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기시는 자주헌법과 재군비를 강조한 자민당 강경우파의 원조였다. 일본이 진정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자주헌법’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신조이자 일생의 정치 목표였다. 아베도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를 통해, 자민당 결성은 “일본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 표현했다. 아베는 점령군사령부의 의지가 담긴 현행 평화헌법 대신, 자주헌법 실현을 위한 개헌과 교육기본법 개정을 외친다. 그러면서 “아버지보다 (외) 할아버지의 정치적 DNA를 이어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기시 전 총리도 죽기 전에 외손자 아베 신조를 불러 “빨리 정치가가 되라.”고 했을 정도로 강경우파의 피가 이어지고 있다. 기시 집안은 메이지유신과 맥이 닿는다. 기시는 야마구치 현청 직원 사토 히데스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사토 신칸은 메이지유신의 철학적 토대를 쌓았다는 조슈 출신의 요시다 쇼인이나 이토 히로부미 등과 폭넓게 교제하는 등 조슈 인맥의 명망가였다. 하지만 기시는 중학교 3학년때 아버지쪽 집안인 기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사토 집안에서 양자로 왔다. 그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는 나중에 총리가 된 뒤 노벨평화상(1974년)을 수상했고, 형 이치로는 해군 중장까지 역임했다. 아베의 아버지는 총리를 눈앞에 둔 채 병으로 작고(1991년)한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이고, 친할아버지 아베 간 역시 중의원 의원(1946년 작고)이었다. 이처럼 세습정치가 전통인 일본에서 아베는 지역이나 집안 면에서 일본 정계의 ‘성골(聖骨)’이다. 그래서 ‘강한 자’에 따르는 일본인들이 귀공자 아베를 좋아한다고 한다. 아베 신조는 1954년 기시 전 총리의 장녀 요코와 아베 신타로 전 외상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인은 모리나가제과의 마쓰자키 아키오 전 사장 장녀 아키에(44)다. 아베 신조의 형 히로노부는 우시오 전기 회장의 장녀와 결혼하는 등 재계와의 연결고리도 튼튼하다. 아베는 공부는 신통치 않았다. 외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도쿄대학을 지망했지만 실패했다. 귀공자들이 다닌다는 세이케이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대 정치학과로 2년간 유학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고베제철소에서 3년 반 월급쟁이를 한 뒤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들어가 정치수업을 쌓았다.199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지역구를 물려받아 1993년 37세에 중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된 뒤 승승장구했다. taein@seoul.co.kr
  • 日 교수 조언 “靑-日총리 잇는 인맥 필수적”

    日 교수 조언 “靑-日총리 잇는 인맥 필수적”

    |도쿄 황성기특파원|오는 9월20일 일본 총리를 결정짓는 자민당 총재선거가 열린다. 선거는 아베 신조 관방장관을 비롯,3∼4파전이 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일찌감치 ‘아베 압승’으로 성적표가 나온 상태다.5년간의 고이즈미 시대가 끝나고 아베 시대가 개막되는 것이다. 아베는 대북 강경파 정도로만 알려져 있을 뿐 우리에게는 미지의 정치인이다. 아베는 누구이고, 아베 정권은 한국과 동북아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바야시 요시아키 게이오대 정치학과 교수에게 들어봤다. 고바야시 교수는 “아베가 총리가 되기 전, 머릿속에 한·일관계의 틀을 만들기 전에 제대로 된 한국 이해를 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다. 아베의 등장으로 개선될 것 같은가. -아베는 안티 공산주의, 안티 사회주의다. 그래서 중국과 북한은 안된다. 한국은 괜찮다. 그렇지만 지금의 한국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직 한국에 대한 프레임이 형성돼 있지 않다. 부인이 한류 팬이라는 것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몇번이나 한국에 함께 갔으니까. 그렇다고 한국에 대해서 호의적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안티로는 보고 있지 않다. 지금 자기 내부에서 프레임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한국대사관의 문제인지, 청와대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베측과 파이프를 만들어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고이즈미 정권 때 한국은 너무 늦었다.2001년 4월 초순(고이즈미는 4월26일 총리 취임)에 한국의 움직임이 있긴 했어도 충분하게 접근이 이뤄지지 않았다. 접근하는 쪽이 아래이고 접근을 받는 쪽이 위는 아니잖은가. 그런 의미에서 미국은 빨랐다. 그렇다고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아래가 아니듯이 말이다. ▶대북 선제공격론이라든가 아베의 발언 때문에 노무현 정부가 먼저 어프로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고이즈미 정권 때 김대중 정권이 실패했지만, 한·일관계 패러다임의 아이디어를 총리가 될 사람(고이즈미)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같은 일을 (노무현 정권이)아베에 대해서 되풀이하는 게 아닌가. 이상한 고집이 있다. 청와대든 한나라당이든 좋지만 제대로 된 파이프가 중요하다. 한국의 외교통상부와 일본의 외무성이 아무리 합의해도 의미가 없잖은가. 청와대와 일본 총리 사이에 제대로 된 개인적 인맥이라도 좋으니 양쪽을 잇는 파이프가 필요하다. ▶아베 장관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7월20일 출간)에는 미국, 호주, 인도, 일본 4개국의 연대를 강조하면서도 한국을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은 전혀 어프로치가 없었지 않은가. 아베의 머리에 한국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단히 관심이 있다. 단지 아직 프레임을 만들지 않았다. 아베는 뉴질랜드에 흥미가 많다. 인도, 뉴질랜드 같은 나라들은 작년부터 어프로치를 많이 했다. 아마도 뉴질랜드까지 넣은 5개국 연대가 될 것이다. ▶북한에는 더욱 강경해질 것으로 보는가. -물론이다.(미사일과 납치문제 해결이 없는 한)절대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일본 국민도 나아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지금 북한과 국교정상화를 원하는 일본인이 몇명이나 있는가. 아베는 납치피해자와 직무상 죽 일을 해왔다. 자식을 납치당한 사람의 슬픔을 죽 들어왔다. 북한에 대해서는 절대로 ‘노’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완전하게 프레임이 생겼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아베는 한차례도 이웃나라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단지 대국이라고 할 뿐이다. 그렇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이웃나라라는 표현을 쓴다. ▶전쟁을 모르고 태어난 아베의 등장은 일본에서 평화헌법을 지키자는 호헌파의 퇴조와도 연관성이 있다. 집단적자위권이나 교전권, 군대의 인정을 주장하는 아베가 적극 헌법개정에 나설 것인가. -고이즈미는 헌법에 흥미가 없었다. 아베가 헌법과 관련한 발언을 하지 않고 있으나 그것으로 개헌에 적극적이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는 없다. ▶아베의 정치적 유전자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외할아버지인 기시 신스케(총리 역임)의 영향이 크다. 아동심리학에 따르면 사람의 정치적인 사회화는 13,14세에 이뤄진다. 그 나이면 아버지는 그렇게 훌륭하게 보이지 않지만 할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 나이때 여론이나 언론은 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하며 기시를 엄청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누가 뭐라 해도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았던 정치가 기시를 몇 십년이 흘러서 일본이 재평가해 주는 것을 아베는 보고 배웠다. 기시와 전혀 캐릭터가 다르지만 아버지 아베 신타로(외상 역임)는 사람 좋은 사람이다. 협력관계였던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배신을 당했어도 친구사이를 유지하고 총리까지 양보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게 있다면 (총리가)될 수 있을 때 되어야 하고, 사람 좋은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 국민에게 아베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총체적인 것이다. 아베 말고 총리가 될 사람을 꼽자면 그 말고 달리 없다. 자민당 내에서도 그렇지만 나쁜 이미지가 없고, 스캔들도 없고, 예의바르고 일견 온화해 보인다. 차기 총리로 누가 좋으냐고 조사하면 높지만, 아베가 총리가 된 후에 지지율을 조사한다면 고이즈미처럼 80%정도 될까 하면 그건 아니다. 고이즈미 같은 카리스마가 있는가 하면 그 역시 아니다. ▶일본인들은 아베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뭐든 확대하고 성장하고 공공사업을 늘리는 종래형 일본을 고이즈미가 바꿨다. 과거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할 것은 우리가 할테니 공정한 룰은 국가가 만들어 달라든가, 종래와 같은 국가의 역할을 바라지 않는 게 유권자의 3분의2 정도라면 나머지 3분의1은 하층이니까, 뭔가 국가가 해줘야 하고, 돌봐달라 그런 정도 아니겠나. ▶아베 등장의 일본 국내정치적 의미라면. -역대 총리들은 자민당 총재 60∼70%, 일본 총리 30∼40%였던 것을 고이즈미는 총리의 역할을 90%까지 높였다. 자민당 총재로서의 인식은 10%밖에 없었던 예외적인 인물이다. 아베는 그것을 원래대로 돌릴 것이다. marry04@seoul.co.kr ■ “아베 총리되면 야스쿠니 참배할것” |도쿄 황성기특파원|여느 해와 다름없이 ‘야스쿠니의 계절’,8월 들어 일본은 현 총리와 총리 후계자들의 신사참배를 놓고 떠들썩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총리는 오는 15일 참배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의 3대 공약 중 ‘우정개혁’과 ‘자민당 부수기’를 이룬 만큼 남은 ‘8월15일 참배’ 공약도 지킬 것이라는 예상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요미우리 신문은 “총리는 연 1회의 참배를 계속해왔고 이번에는 자민당 총재선거의 공약대로 15일에 참배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한국이나 중국 등의 맹반발이 예상되지만 어차피 9월이면 물러나는 만큼 강행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로 생기는 국내외적인 부담은 차기 총기의 자리를 굳힌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안아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바야시 요시아키 게이오대 교수는 “총리가 되더라도 아베는 8월에는 참배하지 않을테지만 4월 같은 시기를 택해 참배는 할 것”으로 내다봤다. 4월 참배 사실이 보도된 지난 4일 이후 아베 장관은 야스쿠니에 대한 지론을 되풀이했을 뿐 자민당 총재선거의 쟁점으로 야스쿠니가 부각되는 것을 꺼렸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다른 후보들보다 야스쿠니 참배에 강경한 그가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대학원 교수는 야스쿠니 문제의 해결책은 총리가 참배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지난 4일자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한국이 말해서가 아니라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을 지키면 외교문제도 없어진다. 나라가 야스쿠니신사를 이용하고 국민의 정신을 동원하는 일을 막기 위해 (헌법에)정교분리 원칙이 있다.”고 말했다. marry04@seoul.co.kr ●고바야시 교수는 유권자의식과 선거, 지방자치 문제에 정통한 51세의 정치학자. 게이오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땄다. 한국에도 관심이 많아 ‘일본과 한국에 있어서 정치와 거버넌스’라는 책을 냈으며 ‘현대일본의 정치과정 연구’(한울),‘공공선택’(오름)의 번역본을 출간했다. 회원 1600명의 일본정치학회 회장에 뽑혀 오는 10월 취임한다.
  • [일본을 다시본다] (16) 힘의 외교 추구

    [일본을 다시본다] (16) 힘의 외교 추구

    |도쿄 특별취재팀|올해 일본 외교의 출발 소리는 요란했다.‘국민을 지키는 외교’‘선두에 서는 외교’‘주장하는 외교’‘저력있는 외교’. 이런 정책방향에 따라 일본은 연초부터 한국과 중국, 러시아, 타이완 등 주변국과 영토 분쟁을 불사했다. 역사교과서 채택과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의 역사문제로 한국과 중국을 자극했다. 저력을 발휘, 선두에 서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목표로 엔화를 쏟아부었다. 국제외교 무대에서도 일본 입장을 강력히 전개했다. 하지만 패전 60주년인 현재 일본외교는 6자회담에서, 유엔에서, 국제외교무대에서 더욱 고립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일본은 패전 이후 60년간 와신상담, 패전국의 멍에를 떨쳐내기 위해 때론 속내를 숨기며, 때론 정면으로 힘을 내세우는 외교전략을 펼쳤다. 특히 패전 60주년을 앞두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 강한 외교력을 행사하려는 의지가 무척 강했다. ●일본외교,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하지만 일본외교는 점점 고립되는 양상이다. 후와 데쓰조 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은 일본외교가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고 표현한다. 한국·중국과의 관계는 물론 아시아 각 국들과 야스쿠니신사 참배나 과거사 문제 등으로 뒤틀려 있다고 진단한다. 즉 아시아 경시 외교로 인해 아시아에서 고립감만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후와 의장은 “주변국과 평화적 관계를 설정하는 대전략을 가져야 한다.”고 일본외교의 방향 수정을 제시했다. 현재 일본외교는 이른바 아시아 전략이 없다는 비판을 듣는 만큼 “상대국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서로의 실정을 살피는 장기전략을 세워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언론들도 여름 들어 ‘시련의 일본외교’,‘위기의 일본외교’라고 진단한다. 조셉 나이 미 하버드대 교수는 “일본은 미국이란 후원자가 있기는 하지만, 동남아 국가들과 적극적인 접촉·교류를 도모해야 한다.”면서 이들 국가와의 문화교류 등을 통한 외교기반 강화를 주문했다. 역시 하버드대 이리에 아키라(미국사) 교수는 일본이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과 ‘장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3국간 관계개선을 위해서는 민간 레벨의 접촉이나 교류가 불가결한 요소라고 제시했다. ●일본, 그래도 힘의 외교는 한다 일본정부는 그럼에도 힘의 외교를 고집하는 양상이다. 지난달 발표된 통상백서는 일본이 동남아국가연합(ASEAN) 역내 국가의 경제통합을 주도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축으로 무역과 투자활성화를 뒷받침할 제반 규칙을 조성해 나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일본의 힘으로, 중국의 힘을 제어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백서는 중국 경제 부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일본 기업들에 아세안 국가 등으로 투자처를 다변화할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동아시아 투자의 일극집중(一極集中)’을 막아내야 할 사명이 일본기업에 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패권을 중국에 양보할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외교는 돈의 힘을 앞세웠다. 지난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직접 나서 올해 내 상임이사국 진출 의사를 천명했고, 올해 엔화를 앞세워 아프리카, 중남미 등 표밭 공략에 집중했지만 최근 들어 점차 좌절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마치무라 노부다카 외상 등이 거부권이 있는 상임이사국 진출 꿈을 접을 수도 있다고 밝힌 것도 이런 기류를 반영한다. ●미국편향 외교 치열한 논란 유발 일본외교의 미국 편향성은 심각한 수준으로 우려된다. 사가키바라 에이스케 게이오대 교수는 화제를 불러온 저서 ‘경제의 세계세력도’에서 “일본은 반(半)주권국가로서 미국의 충실한 파트너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서 “미국의 경제가 정체, 군사비를 견디지 못할 상황이 오거나 동아시아 안전보장에서 손 떼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면서 아시아 공동통화 등 아시아외교 강화를 주문했다. 도쿄대 대학원 후카가와 유키코 교수는 일본이 전후 경제·정치적으로 미국이나 아시아국가(중국)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운명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의 시대이고, 그래서 미국을 선택, 안보를 미국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카가와 교수는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는 일본은 지금 핵무장을 할 수 없으니 미국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중국이 해군을 늘리는데 이런 위험에서 지켜줄 힘은 미국밖에 없다. 그래서 (승전국)미국에 대해 복잡한 심경으로 의지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taein@seoul.co.kr ■ 日주장 ‘미들파워’란 미들파워(middle power)라는 개념은 국가안보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중급국가’로 번역되고 있다. 캐나다나 호주가 자신들의 외교를 표현하는 용어다. 일본에서는 소에야 교수가 ‘일본의 미들파워 외교’라는 저서에서 사용, 빠르게 퍼지면서 주목받고 있다. 소에야 교수는 국가들을 ‘슈퍼파워(초대국)’,‘그레이트파워(대국)’,‘미들파워’,‘스몰파워(소국)’라는 4개의 부류로 분류했다. 초대국은 현 시점에서 미국이 유일하고 냉전시대는 미국과 소련이었다고 분류한다. 국제정치의 기본적 질서를 구성하는 대국은 현재는 중국과 러시아를, 잠재적으로는 인도를 꼽았다. 인도는 국민 정서가 대국으로서의 발상을 하고 있고, 핵무기도 갖고 있어 독자적인 안보나 외교수행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대국은 아니지만 국제질서에 대해 일정 정도의 수정을 촉구하는 힘만을 가진, 독자적인 안보능력이 없는 나라인 미들파워로는 일본과 독일 등을 분류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국과 미들파워의 중간단계로 분류했다. ■ 소에야 게이오大 교수 인터뷰|도쿄 특별취재팀|“일·미 안보조약이 일본안보의 요체이기 때문에 미국은 모든 일본외교의 기초입니다. 미국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일본외교는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논의의 시발점이 됩니다.” 게이오대학 법학부 소에야 요시히데 교수의 전공은 일본외교이다. 그는 요즘 들어 고민이 적지 않다. 일본외교가 올 한해 6자회담이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외교 등에서 고립돼 있다는 지적을 받기 때문이다. 도쿄시내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일본이 힘의 외교를 추구한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일본내의 혁신세력이나 한국, 중국 등에서 보면 힘의 외교를 하고 있다고 비쳐질 것이다. 일본이 2차대전 패전 전에는 대국으로서 힘의 외교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후는 다르다. 힘의 외교를 할 수 없게 됐다. 한국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전후 일본외교는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기본 스탠스다. ▶일본이 아시아 경시외교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은데. -대미관계가 일본외교의 기본전략이다. 좌, 우로부터 비판이 있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우파들이 요구하는 미국으로부터의 외교적 독립은 미국측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좌파들이 요구하는 비무장 중립국도 현실성이 없다. 전후 일본의 불행은 대미의존이 지나치다는 점이다. 아시아 외교도 대미동맹을 전제로 전략을 짤 수밖에 없는 처지다. ▶주변국과 마찰의 원인은 무엇인가. -역사문제이다. 일본이 전전 대국으로서 힘의 외교를 했고, 그런 인식이 한국인들에게 지금도 남아 있다. 반성하지 않고, 역사를 잊고, 대국외교를 하려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주변국민들의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역사문제는 전략적인 문제로 충돌하는 경향이 강하다. 같은 입장을 가진 각 국의 시민단체들이 해결하면 빠르다. 일본의 역사문제 대응은 지금보다 더 전략적이어야 한다. ▶일본이 외교적으로 고립돼 있는데. -6자회담에서 일본이 납치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납치문제가 국내정치 문제이긴 하나, 외교가 국내정치와 별개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북핵문제 해결 얘기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국내정치도 현실인데 어쩌겠나. ▶일본이 돈 외교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들어가려고 ‘와이로(뇌물) 외교’를 하는 것은 아니다. 빈곤타파와 인간안전보장을 위해 정부개발원조(ODA)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다. 일본이 전후 60년간 평화외교를 했다는 사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일본의 노력부족’에도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일본외교의 돌파구는 무엇인가. -일본 국내여론을 좌나 우로 일방통일은 못한다. 우로 하면 중국은 물론 미국도 반대한다. 따라서 일·미 동맹을 전제로 한국이나 동남아국가들과 상호 협력하는 ‘미들파워(중급국가) 외교’를 해야 한다. 특히 평화주의자들이 개헌론을 제기, 현실적 모순을 없애주면 5∼10년 뒤엔 일본외교가 움직이기 쉬워질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의 개헌론은 우익들과는 다르다. 최소한의 부분만 고쳐도 좋다. taein@seoul.co.kr
  • 한반도 유사시 직접지휘권 주일 美육군 새 사령부로

    |도쿄 이춘규특파원|주일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일본 가나가와현 자마기지로 이전할 예정인 미육군 신사령부(UEX)가 한반도 유사시 직접지휘권을 갖는다고 요미우리신문이 1일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주일미군 재배치의 최대 쟁점으로 미국측이 강력히 요청했던 UEX의 자마기지 이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UEX는 당초 자마기지로 이전이 검토됐던 워싱턴주 소재 제1군단사령부 보다 소규모로 이른바 사단과 군단 기능을 통합한 ‘미래형 사단’으로 불린다. 미국 당국은 한때 제1군단사령부를 자마기지로 이전해 극동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중동에 이르는 이른바 ‘불안정한 활’ 지역을 작전범위로 두어 사령탑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측이 그 경우 주일미군의 활동범위를 ‘극동’에 한정한 미·일안보조약 6조의 범위를 벗어날 것을 우려하자 이전 부대의 성격을 소규모 미래형 사단인 UEX로 바꿨다. 그러면서 미국측은 UEX의 직접지휘는 한반도 유사시에 한정하며 중국과 타이완 분쟁이나 ‘불안정한 활’에 포함되는 동남아시아 분쟁은 오키나와 주둔 제3해병 원정군사령부에 작전지휘권을 주겠다고 전했다. 이 경우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 해병대도 UEX의 작전지휘를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taein@seoul.co.kr
  • EU, 對中 무기금수 해제 유예

    유럽연합(EU)이 조지 부시 대통령과 미국 의회의 보복조치 압력에 굴복, 당초 올 상반기 해제하기로 했던 대중국 무기금수 조치를 내년 말까지 유지하기로 입장을 바꿨다고 뉴욕타임스가 22일 보도했다. 하루 전 EU가 ‘현실적 이익’을 고려해 미 국방부 부장관 출신의 대표적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인 폴 울포위츠의 세계은행 총재 선임을 용인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 뒤끝이어서 더욱 충격적이다. 특히 지난주 반국가분열법을 통과시킨 중국에 대해 무기 금수를 풀어줄 경우 타이완 침공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EU 회원국이 심하게 동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 타임스는 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이 지난주 지안프랑코 피니 이탈리아 외무장관을 만나 이같은 영국의 입장 변화를 지지해줄 것을 부탁했다. 스트로 장관은 런던에서 20일 “(금수를 풀 경우) 유럽의 보수·진보진영 모두에게 매우 험난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가 맹렬히 반대하고 있지만 미국과 강력한 안보조약을 맺고 있는 독일도 이미 영국쪽 입장에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울포위츠의 세계은행 총재 선임에 대해 “적임이 아니다.”“빈국을 지원하는 국제기구를 네오콘 입맛대로 좌우하려 한다.”며 반대해온 입장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순번 의장국인 룩셈부르크의 장 클로드 융커 총리는 회원국에 보낸 서신에서 22일 열리는 EU 재무장관회의 안건에 울포위츠 지지 여부가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네덜란드가 외롭게 “더 폭넓은 후보 물색이 필요하다.”고 밝혔지만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울포위츠는 자격이 있으며, 독일은 그의 선임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사실상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EU 집행위원회도 “울포위츠에 적대적인 선입견을 갖지 말고 일단 총재로 취임한 이후 행동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혀 미리 조율을 마친 듯한 느낌마저 준다. EU가 이렇듯 물러서게 된 배경에는 지난달 부시 대통령 유럽 방문 이후 고조되고 있는 미국과의 협력 분위기를 깰 수 없다는 정치적 판단에다 프랑스 출신인 파스칼 라미 전 EU 집행위원을 차기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에 앉히기 위한 ‘협상 카드’라는 분석도 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日 “美 1군사령부 수용 검토”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정부가 미국 태평양 연안 워싱턴주에 있는 미 육군 제1군단사령부를 가나가와현 자마기지로 이전하자는 미국측 제안을 결국 수용하는 방향으로 본격 검토에 들어갔다고 일본 언론들이 17일 보도했다. 아시아·태평양지역 전반의 육상작전을 총괄하는 사령탑을 일본에 두어 미 육군과 일본 육상자위대, 나아가 미·일의 군사일체화를 강화하는 방안이다. 이렇게 되면 주한미군의 위상과 역할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또 극동에서 중동에 이르는 이른바 ‘불안정한 활(弧)’의 사령탑으로 일본을 활용하겠다는 구상으로 ‘미ㆍ일 안보조약’에 따른 주일미군의 활동 범위를 극동지역에 한정한 ‘극동조항’의 위배 논란을 부를 전망이다. 마치무라 노부다카 일본 외상은 16일 기자회견에서 “머릿속으로 먼저 안보조약,‘극동조항’만을 생각할 게 아니라 지금은 새로운 위협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폭넓은 관점에서 논의해가야 한다.”고 밝혀 일본 정부가 ‘극동조항’을 새롭게 해석할 것임을 시사해 논란이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당초 미 육군 제1군단사령부의 이전에 대해 극동조항과 지자체의 반발을 들어 난색을 표했으나 최근 미국이 강력히 반발하자 “미·일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해 수용으로 선회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분석했다. 아울러 다음달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미 정부의 부담을 덜어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등의 재료로 활용하려는 의지도 엿보인다. 일본 정부는 지자체 반발과 관련,“1군단사령부의 이전 대상은 전투부대가 아니고 사령부 요원 약 800명에 지나지 않는다.”며 “따라서 미군병사에 의한 범죄다발 등의 악영향은 없다.”고 설명하며 이해를 구할 예정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taein@seoul.co.kr
  • 日 “무기도 팔고 파병도 하고…”

    |도쿄 이춘규특파원|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자문기구인 ‘안전보장과 방위력에 관한 간담회’가 4일 ‘미래의 안전보장ㆍ방위력 비전’이라는 보고서를 총리에게 제출,새로운 일본의 ‘방위계획 대강’의 윤곽이 드러났다. 보고서는 무기수출 부분개시와 자위대의 해외 군사활동,전수방어 사실상 폐지 등 평화헌법의 이념에 따라 전후에 금기시돼 왔던 의제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해석을 요청하고 있다.재무장을 통한 군사대국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배어 있는 내용들이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오는 11월 개정되는 ‘신방위계획 대강’이 마련된다.이어 12월에는 일본의 새로운 중기방위력 정비계획이 결정돼 연말쯤 2005년도 방위예산이 결정된다. 독립국가로서 최소한의 ‘기반적인 방위력’만을 가진다는 전수방위 개념을 개정(사실상 폐지),국제테러 등 이른바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기류다.특히 헌법에 반하는 공격적 무력 보유와 연결되는 국제분쟁에 적극 참가 구상 등을 담은 ‘다기능ㆍ탄력적 방위력’의 개념이 제안된 게 주목된다. 안전보장상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긴급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자위대의 원활한 국제활동의 길을 열기 위한 방안으로 ‘부수임무’로 규정돼 있던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본래임무’로 격상할 것을 요구했다.이 경우 헌법이 금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사실상 용인되는 것이다. 당초 간담회는 평화헌법의 이념에 따른 무기수출 3원칙의 전면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강했으나 막판 완화를 건의했다.하지만 국제적인 비난여론을 피해가려는 전술적인 변화일 뿐,전면개정과 상통하는 내용들이다. 실제로 미국과 공동 연구,개발이 진행 중인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위한 일본 업체의 요격미사일 부품 수출 등을 위해 무기수출을 금지해왔던 원칙인 ‘무기수출 3원칙’의 완화를 요구했다. 보고서는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미ㆍ일 안보 공동선언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새로 마련하라.”고 제언했다. 이는 미·일동맹 강화,미·일 군사 일체화의 강화가 핵심이다.보고서는 “중동으로부터 북동아시아에 걸친 ‘불안정한 활(弧)’에서 위협 발생을 막는 의미에서도 미·일 동맹을 축으로 폭넓은 협력이 중요하다.”며 일본 주변외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미ㆍ일 동맹의 강화를 제언했다. 이는 주일미군기지를 동북아·중동지역의 사령탑으로 격상시키려는 움직임과 맥이 닿는다.미·일안보조약의 범위를 ‘극동’에 한정하는 극동조항도 피해가려는 속셈이다. taein@seoul.co.kr
  • 주한미군 향후 지위 태평양사령부 직할될듯

    |도쿄 이춘규특파원|미국은 워싱턴주에 있는 육군 제1군단사령부를일본 가나가와현 자마 기지로 옮겨도 주한미군은 미1군단사령부 밑에 두지 않기로 했다.주한미군은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군사령부 직할부대로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산케이신문이 22일 미군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육군 제1군단사령부를 자마 기지로 옮겨 아시아 전역의 미 육군을 통괄하는 총사령부로 운영한다는 계획이며,사령관도 통합군사령관과 같은 육군대장을 보임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한·미 양국은 당초 주한미군을 육군 제1군단사령부 휘하에 편입시킬 계획이었다.그러나 제1군단사령부가 자마 기지로 이전한 후 북한과 직접 대치하고 있는 주한미군을 포함,아시아지역을 모두 담당하는 데 대해 “미·일안보조약 범위를 벗어난다.”는 지적이 해당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나왔다. taein@seoul.co.kr
  • [1904 & 2004 한반도] 주변 4强 한반도정책-일본

    1904년 한국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강점과 병합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여세를 몰아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주변 열강으로부터 한반도 지배의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일본에 있어 한국은 동아시아 식민지 개척의 시발점이자,대륙 팽창정책의 교두보였다.1904년에서 일본이 패전하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일본은 서구 열강에 대항하면서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세력권 확대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 정책을 펴왔다. 1945년 패전 직후 일본이 독자적인 한반도 정책을 세울 여유는 없었다.1947년경 유럽에서 냉전이 시작되고 아시아에서도 중국 공산화의 그늘이 드리워지자,미국은 ‘역코스’를 단행하면서 일본 강화전략에 나선다.1952년 미국은 점령을 끝내면서 미·일 안보조약을 맺었고,한국은 한국전쟁 종식과 더불어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따라서 냉전의 국제적인 전개 속에서 일본과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이라는 공통점에 의해 실선처럼 연결되었다.미국은 공산진영에 대항하는 보루로서 한·일 양국간 국교 정상화를 종용했지만,반공과 반일의 기치를 내건 이승만 정권은 이를 사실상 거부하였다. 박정희정권이 수립되면서 양국은 국교 정상화의 발걸음을 내딛는다.미국은 원조를 줄여가면서 일본을 한국에 대한 자금공여국으로 대체하려 했고,한국은 집권의 정당성 확보 및 경제 성장을 위해 일본 자금이 필요했다.한·일 국교정상화라는 1965년 체제의 출발은 냉전하에서 한·미·일 3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가능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후 안보에 관한 대미 의존을 유지하면서 동아시아의 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파트너로 자리잡게 된다.이는 다른 한편으로 한국에서 권위주의적 개발독재를 가능하도록 하는 토양을 제공했다.냉전기 일본의 한반도정책은 북한을 적대시하면서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시키는 자유진영의 연대화로 특징지어진다. 냉전 종식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80년대 말 한국이 적극적으로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도 대한정책을 넘어선 한반도정책을 구상하기 시작한다.이는 1990년 가네마루 자민당 간사장의 방북 이래 수차에 걸친 북·일 국교 정상화 움직임으로 구체화된다.하지만,한국은 일본이 분단의 당사자인 한국보다 앞서서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미국도 아시아의 화약고인 북한이 개혁 개방으로 전환하기 전에 북·일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따라서 9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의 한반도정책은 대북정책의 가닥을 잡기 위해 우왕좌왕한 시기였다. 일본의 한반도정책에 있어 1998년은 전환점이었다.김대중정권은 오부치총리와의 공동 선언을 통해 문화 개방을 포함한 전면적인 미래지향적 관계 설정을 추진했다.한편 한국 정부가 북한과의 획기적인 관계 개선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대북정책도 전환이 요구됐다.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으로 구체화된 남북한 관계 개선에 일본도 동참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2002년에는 북·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본에 있어 북한은 기회이자 위협이었다.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는 이를 가시화시켰다.일본은 미사일 방어 참여,군사위성의 발사,방위력의 근대화,유사법제의 정비 등 현실주의적 대응으로 나서고 있다.일본에 있어 북한은 수교와 위협의 교차점에 서 있다.탈냉전기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은 한국과의 협력과 연대를 심화시켜 나가면서도 북한문제의 처리에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현재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은 두 가지 시험대에 올라 있다.‘반미’‘친북’으로 비쳐지는 한국에서의 진보적인 사회운동의 확산이 미·일동맹을 중시하는 일본을 고민스럽게 하고 있다.민주화된 한국에 대한 신뢰를 가지면서도 자칫 향후 동북아 정세의 전개가 미·일동맹에 대항하는 남북한 및 중국의 느슨한 연합으로 양분화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아울러,납치와 핵문제로 일본을 위협하는 북한을 감싸고 나갈 것인지,위협의 대상으로 견제할지에 대한 전략적 선택에 결론을 낸 상태는 아닌 듯 싶다. 박철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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