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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1) 경북 예천 천향리 석송령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1) 경북 예천 천향리 석송령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사람과 똑같은 자격과 지위를 가지고 600년을 살아온 나무다. 명백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지위를 증명하는 호적번호를 가졌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된 토지까지 소유했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부여된 납세의 의무로 재산세, 즉 토지세도 꼬박꼬박 물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토지에서 끊임없이 재산을 증식할 줄도 안다. 더 기특한 것은 재산의 용처다. 수굿하게 사람살이에 끼어들어 한푼 두푼 모은 재산을 마을 살림살이를 위해 흔쾌히 내놓는다. 이른바 장학금이다. 장학금을 주는 나무라니! ●홍수에 떠내려와 새생명… 마을에 보은 경북 예천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 동구 밖에 서 있는 석송령이 그런 나무다. 서 있다고 했지만 ‘누워 있다’고 해야할지 모른다.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의 폭이 위로 자란 키의 세 배 정도 되기에 하는 이야기다. “해마다 장학금을 줬어요. 마을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 학자금을 지원하는 거죠. 그런데 마을에 아이들이 없어서 올해는 장학금을 주지 못했어요.” 이동섭(59) 이장은 그동안 석송령이 꾸준히 마을 아이들을 키워 온 훌륭한 나무라며 장학금을 준 이야기부터 들려준다. 이야기 끝에는 아이들이 줄어드는 시골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있다. 토지를 소유하고 재산세를 납부하며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곳에 재산을 내놓는 나무는 예천 천향리 석송령 외에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자연유산이 아닐 수 없다. 석송령이 마을에 자리 잡은 건 600년 전이다. 당시 풍기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앞 개울로 온갖 잡동사니가 떠내려 왔다. 그 가운데 뿌리째 뽑힌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본 나그네가 나무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건져내 개울 옆에 심은 게 시작이라고 한다. 나무는 그때부터 석평마을의 수호목이 되어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불길한 잡귀를 막았고, 마을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올렸다. 사람에 의해 얻은 생명을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는 데에 바친 격이다. “마을 당산제는 예천군에서도 유명해서 예천군수가 종종 참석해 축원문을 읽기도 하죠.” 해마다 정월 대보름 자정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정성껏 올리는 석송령 당산제는 오늘날까지도 어김없이 이어진다며 이 이장은 석송령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털어놓는다. ●주민 이수목 호적에 올려 재산 물려줘 나무가 사람과 똑같이 ‘석송령’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등기되고 재산을 갖게 된 것은 1928년의 일이다. 당시 이 마을에는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재산은 넉넉했으나 아들이 없어 근심이 많았다. 그가 어느날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서 ‘걱정하지 마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 바로 이 나무였다. 그는 문득 나무에 재산을 물려준다면 오랫동안 잘 지켜지리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고 곧바로 군청으로 달려갔다. 그는 마치 아기의 출생신고를 하듯 나무의 호적을 만들었다. 석평마을에서 생명을 얻은 나무여서 석씨 성을 붙이고, 영혼이 있는 소나무라는 뜻에서 영혼 영(靈)과 소나무 송(松)을 써서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적 등기를 마치고 이어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인 토지 6611㎡(2000평)를 나무에 등기 이전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석송령이 가진 땅에는 지금 세 채의 살림집이 들어가서 살면서 이용료를 내지요. 석송령 통장에 그 이용료를 잘 갈무리합니다. 지금은 약 3000만원 정도 들어있어요. 그걸로 장학금도 주고 토지세도 냅니다.” ●올해 재산세 4만2530원 납부 석송령은 자신의 토지 이용료로 세 집으로부터 가구당 60㎏(100근)의 쌀을 받는다. 성실하게 재산을 늘려가면서 자신도 꼬박꼬박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인 재산세 납부 의무를 실천한다. 올해 석송령이 납부한 재산세는 4만 2530원이다. 국민 자격으로 재산권을 행사한다는 내력만으로도 세계적인 나무임에 틀림없지만 석송령은 생김새도 매우 아름다운 나무다. 나무는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개로 나뉘며 옆으로 펼쳐지는 반송(盤松) 종류다. ●나무그늘 1071㎡… 군민들이 보호 앞장 600년을 살아온 석송령은 키가 10m 정도 된다. 키로 보아서는 그리 크다 할 수 없으나 가지 펼침은 상상을 초월한다. 동서로 24m, 남북으로 30m나 된다. 넓게 펼친 나뭇가지로 그가 지어내는 그늘은 무려 1071㎡(약 324평)에 이른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지키지만 군 차원에서도 나무를 정성껏 관리한다. “병해충 방제 등 상시 관리를 합니다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마을분들이 워낙 잘 보호하고 있어서 나무의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예천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어릴 때부터 이 나무를 지방의 자랑으로 여기거든요.” 예천군청 문화재 담당 최재수(43)씨는 석송령에 신경을 쓰긴 하지만 굳이 군청에서 신경 쓰지 않아도 예천군민 모두가 잘 지키는 나무라고 강조한다. 한 그루의 나무를 마치 사람처럼 여기며 긴 세월을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자연주의 정신, 혹은 더불어 살아가는 문화에 대한 자존심을 느끼게 하는 크고 아름다운 나무다. 글 사진 예천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북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804. 중앙고속국도의 풍기나들목으로 나가서 예천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지방도로 931호선을 이용해 12㎞ 남쪽으로 직진하면 진평교차로에 닿는다. 이 부근에서부터는 석송령을 알리는 교통 안내판이 자주 나온다. 진평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인 ‘석송로’로 들어서서 2.7㎞ 더 가면 오른쪽으로 석송령 공원에 이른다. 석송령 곁으로 너른 주차장이 있어서 자동차를 이용해 찾아보기가 매우 편리하다. 석송령 옆으로 난 도로 맞은편으로 흐르는 개울이 600년 전 석송령이 뿌리째 뽑혀 떠내려오던 석관천이다.
  • “이장님도 터치하세요” 울산 언양읍 새달 태블릿PC로 회의

    “이장님도 터치하세요” 울산 언양읍 새달 태블릿PC로 회의

    8일 울산 울주군 언양읍사무소 회의실. 마을 이장들이 이메일 도착음을 듣고 태블릿PC를 열어 ‘3월 이장단 회의 자료’를 확인한다. 언양읍사무소는 다음 달 마을 이장단 회의 때부터 그동안 사용하던 종이 자료(1인당 40~50쪽 분량)를 대신해 태블릿PC를 이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언양읍은 오는 20일까지 지역 내 37개 마을의 이장에게 태블릿PC 1대씩을 지급한다. 이는 농민의 정보화 능력을 향상시키고 종이 낭비를 막기 위한 것이다. 태블릿PC 회의는 20일 시연회를 시작으로 3개월간 시범 운영을 거쳐 도입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37개 마을 이장에 1대씩 지급 언양읍은 이장들이 태블릿PC를 쉽게 사용하도록 이메일 등 주요 기능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간소화했다. 또 이장단 회의 자료 활용뿐 아니라 정비나 보수가 시급한 마을 시설을 사진으로 찍어 읍사무소 직원에게 보내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기능도 갖추었다. 언양읍 관계자는 “마을 이장들이 사전에 자료를 보고 회의에 참석하기 때문에 더 깊이 있는 회의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태블릿PC 설비와 서비스는 KT 언양지사에서 맡고 있다. KT 측은 태블릿PC 40여대를 3개월간 무상으로 임대하고 원활한 통신을 위해 이장들의 집에 와이파이 접속기도 설치하고 있다. 언양농협은 농민 인터넷 정보화 교육을 위해 매주 두 차례씩 이장들을 대상으로 태블릿PC 사용법을 교육하고 요금을 부담하기로 했다. ●일부 “전달사항은 출력해야… 이중업무” 반면 일부에서는 ‘전시행정’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장단이 태블릿PC 자료 화면을 놓고 회의를 하더라도 주민 전달 사항 등은 다시 출력해 게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기초단체 관계자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실제로는 전달 사항 등을 출력해 주민들에게 전달하거나 안내판에 게시해야 해 이중 업무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사용 요금과 기계값 등도 장기적으로는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9) 충남 연기군 봉산동 향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9) 충남 연기군 봉산동 향나무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옛 사람들은 어버이가 그리울 때도 나무를 심었다. 효도를 삶의 중요한 가치로 삼던 시절, 어버이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묘 앞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자식들은 어버이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고, 나무는 효성을 실천한 선조의 상징으로 남았다. 후손들은 선조가 남긴 한 그루의 나무를 대를 이어 정성껏 지키게 된다. 사람들은 나무를 바라보며 올바른 사람살이를 실천한 선조를 기억했고, 나무를 지키며 선조의 선행 혹은 효행을 떠올렸다. 시대가 변하고 삶의 가치 기준이 바뀐다 해도 끝내 변할 수 없는 참 삶의 알갱이는 나무와 함께 나무처럼 변함없이 오래 남게 마련이다. ●효를 중시한 강화최씨의 상징물 “12대조 강화최씨 중자 룡자 할아버지가 3년 시묘살이를 한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묘는 여기서 좀 떨어진 자리에 있어. 시묘살이는 어버이의 묘 앞에서 하는 거잖아.”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봉산리. 아늑한 농촌 마을에 낮게 웅크린 한 그루의 향나무 앞에서 최봉락(79) 노인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최씨의 후손들이 정성껏 지켜온 이 향나무는 470년 전 부친상을 당한 최중룡이 3년 동안 머리를 풀고 어버이의 묘 앞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심은 나무라고 알려졌다. “이 자리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림을 이어온 자리야. 지금은 다 무너져 내렸지만, 이 집도 정말 좋은 집이었지. 처음에 선친의 묘소 앞에 심은 나무를 시묘살이를 마치고 살림집에 돌아오시면서 옮겨 심었을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우리 조상의 지극한 효심을 상징하는 나무지.” 천연기념물 제321호인 이 나무의 고유명칭은 ‘연기 봉산동 향나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조치원읍 봉산리이지만, 마을의 옛 이름인 ‘봉산동’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썼다. 강화최씨의 집성촌인 봉산동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 뒷산 골짜기에서부터 너른 벌까지 모두 최씨 문중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마을에 남아있는 강화최씨는 40여 가구 가운데 절반도 안 된다. 또 문중 소유의 토지 대부분은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측량 사업 과정에서 소유권을 잃었다. 이제 강화최씨의 땅으로 남은 건 향나무가 서 있는 자리 주변뿐이다. 최 노인은 이 조그만 땅이 조상의 얼이 담긴 유일한 자리이고, 향나무는 문중의 상징이자 자랑이라고 강조한다. ●넓게 펼친 가지와 용틀임하는 줄기 대개의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을 국가에서 소유하는 것과 달리 봉산동 향나무가 여전히 최씨 문중의 사유지로 남은 것은 그래서다. 최근 향나무 주위의 최씨 문중 소유 구역에 울타리를 치고 대문도 세웠다. 그와 함께 천연기념물 보호구역 가장자리에 근사한 서양식 가옥을 새로 지었다. 향나무와 새 집 사이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어 잘 가꾼 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아늑한 정원의 주인공은 단연 향나무다. 나무는 키가 3m, 줄기둘레가 2.8m 정도로, 비교적 작은 키에 속한다. 무성하게 뻗은 나뭇가지가 이룬 그늘이 깊어서 멀리서 보면 나무 줄기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왜소한 나무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방으로 나뭇가지가 펼친 품은 감탄사가 나올 만큼 굉장하다. 땅에서 2m쯤 되는 높이에서부터 평평하게 뻗어나간 나뭇가지는 무려 11m를 넘게 뻗었다. 게다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방으로 고르게 뻗어 나무 그늘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촘촘한 지붕을 이뤘다. 곳곳에 10여 개의 굵은 버팀목으로 지지해 주지 않았다면 넓게 뻗은 가지들은 이미 오래전에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거나 땅바닥에 드러누웠을 것이다. 한눈에도 문중에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 가꾸어 온 나무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줄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 나무 그늘로 들어서려면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엉금엉금 기어야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대개의 집안 잔치를 이 나무 아래에서 했다고 최 노인은 덧붙인다. 지금의 형상으로 보아서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나무의 키가 지금처럼 낮아진 것은 나무를 문화재로 지정한 1982년 이후 나무 둘레에 단을 쌓고 흙을 돋우면서부터라고 한다. 가지펼침 못지않게 놀라운 건 신비로운 줄기다. 고작해야 2m를 넘지 않게 올라온 나무 줄기는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 땅에서 솟아오른 줄기는 먼저 제 무게가 버겁다는 듯 비스듬히 바닥에 누워 마치 다리쉼을 하며 한숨 돌리는 모습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힘을 일으켜 비틀리고 꼬이면서 솟구쳤다. 그러다가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하늘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듯 나무 줄기는 주춤거리며 수평으로 배배꼬였고, 이내 다시 수직으로 방향을 돌려 솟아오른다. 영락없는 용틀임의 형상이다. ●가문 대대로 정성껏 지켜온 ‘자랑’ “가문 어른들의 정성이 대단했어. 나뭇가지 하나도 예사로이 보지 않고 일일이 버팀목을 해 주었지. 쇠로 된 지지대를 세우면 편했겠지만, 금극목(克木)이라고, 쇠는 나무를 죽이거든. 그래서 뒷산에서 아까시나무를 구해 와 연못에 오래 담갔다가 말려서 쓰곤 했지.” 조상의 얼이 담긴 나무를 후손들이 정성들여 지키는 일이야 그리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없을 게다. 특히 당시 사람살이에서 가장 높은 가치로 꼽던 효성을 실천한 선조의 얼이 담긴 나무인 바에야 오죽했겠는가 싶기도 하다. 봉산동 향나무를 바라보면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는 것이 결국은 한 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지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화최씨 후손이 대를 이어 지켜낸 건 한 그루의 나무뿐 아니라, 나무 안에 담긴 참다운 사람살이의 알갱이, 바로 그것이다. 글 사진 연기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의 청주나들목에서 연기 방면의 국도 36호선으로 8㎞쯤 가면 조치원역에 닿는다. 연기군 시내를 거쳐 고려대 조치원캠퍼스 쪽으로 가면 조치원여자고등학교 사거리(조여고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조치원여고 쪽으로 들어선 뒤, 1.1㎞ 직진하면 봉산1리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봉산동 향나무의 위치를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나무는 250m쯤 안쪽에 있는데, 나무 앞에 주차할 공간이 없으니, 도로 주변의 적당한 자리에 주차하고 걸어가는 게 좋다.
  •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 점검해 보니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 점검해 보니

    만해 한용운 선생 등 항일 독립투사들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후대의 무관심 탓이다. 사적지에 쓰레기가 쌓여 있는가 하면 엉뚱한 곳에 표석이 세워지기도 했다. 표석의 오류를 알면서도 글자 한 자 고치지 않고 있다. 사적지를 관리하는 서울시의 무성의가 후대를 몰역사의 수렁으로 이끌고 있다. ●대부분 4년전 그대로 29일 서울신문이 서울의 독립운동 사적지 90여곳을 2008년에 이어 다시 점검한 결과 4년 전 지적했던 유적지 훼손이나 오류가 대부분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앞서 2008년 중앙대 중앙사학연구소는 독립기념관의 의뢰로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여 서울의 독립운동 사적지 90곳 중 70곳이 도로공사와 재개발 등으로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대표적인 곳이 한용운 선생이 머무르며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했던 유심사 터다. 만해는 이곳에서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28일 중앙학림 학생들을 불러 독립선언서 3000장을 전달했다. 3·1운동을 촉발한 뜻깊은 발원지인 셈이다. ●쓰레기 쌓여있고 엉뚱한 곳에 표석 유심사의 원래 위치는 종로구 계동 43번지다. 그러나 표석은 엉뚱하게도 100m 정도 떨어진 계동 58번지 뒷길에 세워졌다. 유심사 터에는 현재 ‘만해당’이라는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 운영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서울시도 알지만 4년째 모른 척만 하고 있다. 위치만 틀린 것이 아니다. 표석의 문구 역시 ‘중앙학림’이 ‘중앙학교’로 잘못 적혀 있다. 중앙학림은 1922년 세워진 불교계 고등교육기관으로, 불교계 항일운동의 본산이지만 표석에는 인근 사립 고등학교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다. 심지어 종로구는 표석 뒷면에 쓰레기 무단 투기 금지 안내판까지 덧대 놓았다. 주민 정모(66)씨는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는 주민도 문제지만 독립운동 사적을 알리는 표석에 커다란 안내문을 붙이는 구청 조치가 참 한심하다.”고 지적했다. ●여운형 선생 집터 흔적도 없이 사라져 여운형 선생이 머물렀던 계동 집터는 1989년 도로 확장 공사로 집 앞쪽이 절반 이상 잘려 나갔고 남은 반쪽도 칼국수집으로 바뀌어 있다. 이곳이 선생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것은 건물 건너편에 있는 작은 표석이 전부다. 1920년대 후반 좌우 항일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신간회의 창립본부 터는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다. 이봉창 의사의 집터(용산구 효창동 118번지)를 알리는 표석은 황당하게도 원래 집터에서 약 250m나 떨어진 6호선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에 박혀 있다. 한성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했던 독립운동의 아지트(한성오 집터) 역시 표지석은 엉뚱한 곳에 세워져 있다. 4년 전 사적지 실태조사를 담당했던 장규식 중앙대 교수는 “보존·복원 대책은 고사하고 4년이 넘도록 간단한 오류조차 고치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사적지 복원이 어렵다고 작은 표석 하나 세우는 것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면서 “후손들이 항일 투쟁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3·1운동길’과 같은 답사코스를 만드는 등 적극적인 복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글 사진 신진호·홍인기·최지숙기자 sayho@seoul.co.kr
  • 강원 철원 한탄강 얼음 트레킹

    강원 철원 한탄강 얼음 트레킹

    용암이 식으며 만든 주상절리 협곡 앞에 서보셨는지요. 혹은 물과 시간이 조탁한 화강암 절벽에 손을 대본 경험은 있으신가요. 빼어난 풍경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기란 쉽지 않지요. 예컨대 강원도 철원의 한탄강이 그렇습니다. 강 양쪽에 멋들어진 협곡이 줄곧 이어지지만, 강물 탓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겨울은 놀라운 선물을 선사합니다. 얼음입니다. 매섭도록 차가운 겨울이 강물을 꽁꽁 얼리고, 좀체 다가갈 수 없었던 풍경 속으로 다리가 놓여집니다. ‘추가령구조곡’이라 불리는 한탄강 협곡은 그제야 스스로의 나신을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드러냅니다. 그 기간은 길어야 1개월 남짓. 스릴 넘치는 ‘한탄강 얼음 트레킹’ 또한 그 기간에만 가능하지요.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 출발 전 발목과 다리, 그리고 허리 스트레칭으로 꼼꼼하게 몸을 푼다.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출발지는 장흥리 대교천 협곡이다. 동호회 중심으로 이뤄지는 얼음 트레킹이 직탕폭포에서 시작해 한탄강을 따라 곧장 순담계곡까지 가는, 혹은 그 반대인 것과 대비된다. 정경해 DMZ철원평화관광 대표는 “대교천은 북한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맨처음 흘러간 곳”이라며 “한탄강의 이름값에 가려 있지만, 실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대교천 협곡”이라고 강조했다. 대교천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온전히 얼음 트레킹을 즐긴 게 아니란 뜻이다. 안내판은 ‘대교천 현무암 협곡’을 천연기념물 436호라 적고 있다. 협곡 초입의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들이 눈길을 끈다. 여러 차례 철원을 찾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다. 한여름,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졌을 현무암 주상절리들의 자태가 또렷하다. 강폭은 25~40m, 높이는 30m쯤 된다. 협곡 건너편은 경기 포천 관인면이다. 이런 이유로 포천에서는 대교천 협곡을 관내 ‘한탄강 8경’ 가운데 제 1경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얼음 트레킹을 안전하게 즐기려면, 신경 써야 할 게 많다. 먼저 숨구멍이다. 물이 어는 과정에서 부피가 커지며 봉긋하게 솟아오른다. 숨구멍과 만났을 땐 우회하는 게 좋다. 여울 지대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얼지 않은 곳이 많기 때문. 대부분 가이드가 안전하게 이끌긴 하지만, 개별 행동은 금물이다. 아이젠은 지참하되, 필요한 경우에만 착용하는 게 낫다. 얇게 눈이 덮여 미끄럽지 않은 데다, 바위를 오르내리려면 외려 불편할 때가 많다. 반면 등산 스틱은 필수품이다. ●수억년의 시간과 마주하다 검은 현무암들이 늘어선 대교천을 1.5㎞가량 걸어 내려가면 양합소다. 한탄강이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성천 등과 합쳐진 뒤, 또한번 대교천과 몸을 섞는 곳이다. 이때부터 한탄강은 한껏 몸피를 키우기 시작한다. 도보꾼의 눈이 놀란 토끼눈처럼 커지고,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나오는 것도 바로 이쯤에서다. 대교천 너머로 근육질의 남성적인 풍경이 떠억하니 버티고 섰는데, 여간 장엄하지 않다. 너른 한탄강은 꽁꽁 얼어붙었고, 양안의 절벽들은 힘줄 튀어나온 거인의 팔뚝처럼 불끈 솟았다. 여기서부터 한탄강 중심을 따라 거꾸로 올라간다. 얕은 대교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품이 넓은 강. 얼음 아래는 대략 5m 깊이의 물길이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눈이 덮여 아래가 안 보이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종종걸음으로, 하지만 시선만은 주변 풍경에 고정시킨 채 가이드를 따라 걷는다. 목적지인 고석정에 이르는 동안 강 양쪽 절벽은 그야말로 천변만화의 풍경을 내어준다. 잉어바위와 거북바위, 선녀탕 등 명소들을 굴비 두름 엮듯 줄줄이 꿰고 있다. 여름철 래프팅을 즐기며 주‘주’간산(走舟看山) 했다고 만족하지 말길. 거북바위의 콧날을 만져보고, 선녀탕 안쪽까지 들어가 물의 침식을 받아 둥글둥글 해진 바위에 앉아 보는 건 이 계절만의 호사다. ●주상절리가 커튼처럼 둘러친 송대소 고석정에선 다시 뭍으로 올라온다. 고석정부터 승일교까지 얼지 않은 여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가운데 글자를 따 이름 지어졌다는 승일교 아래에서 다시 얼음 트레킹이 시작된다. 목적지는 상류의 송대소다. 거리는 4㎞ 남짓. 송대소에서 더 위쪽의 직탕폭포까지 다녀오는 도보꾼들도 적지 않다. 작은 여울 위로 물새들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날아든다. 낭만적인 풍경이다. 이 코스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명소는 마당바위다. 일종의 너럭바위인데, 여인네의 허리께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곡선이 일품이다. 종종 바위 위에서 누드사진 촬영대회도 열린다니, 제대로 장소를 고른 셈이다. 마당바위에서 30분가량 거슬러 오르면 물소리가 굉음처럼 들리는 큰 여울에 닿는다. 송대소의 대문 역할을 하는 곳. 여울 주변은 온통 너덜들이다. 경남 밀양의 만어석(萬魚石) 너덜지대를 닮았다. 너덜지대 너머가 송대소다. 낭만적이던 풍경은 마지막 너덜을 넘자마자 묵직한 풍경으로 돌변한다. 거인들이 어깨를 맞댄 채 얼어붙은 땅에 무엇하러 왔느냐며 윽박지르는 듯하다. 토박이 가이드 박종선씨에 따르면 송대소의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30m가량 된다. 강 가운데엔 강가의 절벽 크기와 견줄 만한 수중 절벽이 있다고 한다. 수심도 절벽을 기준으로 2단 구조를 이룬다. 박씨는 “어렸을 때 이곳에서 자주 수영을 즐겼는데, 상류에서 내려오다 수중 절벽 근처에 이르면 배에 닿는 물이 차게 느껴질 만큼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고 전했다. 송대소는 넓다. 무엇보다 주변을 커튼처럼 둘러친 주상절리 절벽들이 압권이다. 오로라에서 초록빛이 쏟아져 내리듯, 형광등 형태의 주상절리 기둥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송대소는 위에서 볼 때 새삼 크기와 깊이가 넓고 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검푸른 얼음 위로 수백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그만큼 많은 도보꾼들이 알음알음 다녀갔다는 뜻. 하지만 입춘이 지나면 송대소 쪽 루트는 안전상 출입하지 않는 게 좋다. 박씨 또한 추위가 맹위를 떨치지 않는 이상, 입춘 이후 송대소 루트는 안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꼭 봐야겠거들랑 부디 내년을 기약하시라. 글 사진 철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동부간선도로나 43번 국도 의정부·포천방면→운천→신철원, 또는 올림픽대로→구리요금소→외곽순환고속도로→퇴계원·일동방면→43번 국도 포천·운천방면→신철원 순으로 간다. 민통선은 동절기(11∼2월) 09:30,10:30,13:00,14:00 4회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할 것. 매주 화요일은 쉰다. 철새 탐조는 토교저수지, 평화전망대, 아이스크림고지, 철원두루미관 월정역사에서 할 수 있다. 철원군청 관광문화과 450-5365. 전적지관광사업소 450-5558. 얼음 트레킹: 안전을 위해 반드시 가이드와 동행해야 한다. DMZ철원평화관광에서 패키지 상품을 운용하고 있다. 한탄리버스파호텔 온천욕 포함 2만 7000원. 455-8275. 주변 볼거리: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 일반에 개방됐다. 오래전 궁예와 왕건이 터를 잡았고, 일제 강점기엔 신사가, 군사정권 시절엔 이른바 ‘삼청대’가 세워졌던 사연 많은 산이다. 정상에서 서면 북한 평강고원과 오리산, 피의 능선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노동당사 맞은 편에 있다. 3월이면 철원 지역 일부 민통선 초소들이 현재 위치보다 더 북쪽으로 물러선다. 따라서 양지리나 토교·강산저수지 등 별도 절차를 거쳐야 출입할 수 있던 곳들도 아무 제재 없이 오갈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맛집:삼정콩마을두부집은 콩음식 전문점이다. 별미 콩비지 5000원, 두부전골(2인) 1만원. 고석정 인근에 있다. 455-9284. 폭포가든은 메기매운탕으로 유명하다. 직탕폭포 옆에 있다. 455-3546.
  • 올 가을엔 봉제산 공원 거닐어볼까

    강서구는 주민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봉제산과 꿩고개 근린공원을 쉼터와 테마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한다고 25일 밝혔다. 구는 공원조성사업에 73억원을 투자해 오는 9월까지 쉼터와 벚꽃길, 자연체험학습원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만들 계획이다. 구에 따르면 봉제산 근린공원 중턱에는 3000㎡ 규모의 오리나무 쉼터가 조성되고, 육각정자와 운동기구, 산책로, 등의자 등을 만든다. 등촌2동 등산로 주변 1765㎡에는 흔들놀이대와 조합놀이대, 유아 숲 체험장, 파고라 등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휴식·놀이공간이 조성된다. 화곡4동에서 올라오는 등산로 주변에는 태양을 주제로 한 테마공원인 태양광장이 만들어지며 해시계, 어린이 놀이터, 반원형 파고라 등 편의 시설을 갖춘다. 화곡본동 등산로 입구 1만 671㎡에는 무궁화원, 유실수원, 단풍나무원, 야외학습장, 다목적운동장 등 자연체험학습원이 조성돼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된다. 방화동 일대 꿩고개 근린공원에는 벚꽃길, 체력단련장, 목계단, 경화토 포장, 안내판 등이 설치된다. 노현송 구청장은 “장기미집행 도시계획시설 민원을 해결하고, 쾌적한 공원 환경 개선을 위해 추진하게 됐다.”면서 “친환경 녹지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충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동해안 방파제·갯바위 안전시설물 정비

    강원 동해안 방파제·갯바위를 찾는 낚시꾼과 관광객들의 추락사고를 막기 위한 안전관리가 대폭 강화된다. 동해해양경찰서는 18일 강릉·동해·삼척시 등과 대책 협의를 거쳐 관련 조치를 확정했다고 밝혔다. 자치단체들도 방파제와 갯바위의 안전대책 필요성을 인식해 삼척시는 3000만원의 예산을 긴급 투입해 안전 펜스, 안내판 등 안전시설물을 정비하기로 했다. 동해시는 대진과 어달·천곡항 및 한섬 입구 등 추락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위험지역에 안전의식을 심어주는 현수막을 걸기 시작했다. 해경도 순찰차와 연안 구조정을 이용해 해상과 육상에서 동시에 순찰을 강화하고, 각 항포구의 파출소 경찰관들이 취약시간 순찰을 확대하기로 했다. 동해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서울신문 2012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홍루/김가경(본명 김숙희)

    [서울신문 2012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홍루/김가경(본명 김숙희)

    소설 당선작 - 홍루/김가경(본명 김숙희) 녀석이 톱밥 속으로 숨어들었다. 녀석은 밀크셰이크처럼 어감이 달콤한 밀크스네이크 종이다. 먹이 줄 것과 따뜻하게 해 줄 것, 간단한 러시아 단어로 적어 놓은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이반이 출항하기 전 남긴 글이다. 이반은 녀석의 등을 쓰다듬고 마지막 선물처럼 케이지를 앞에 내려놓았다. 한국 사람과 러시아 사람은 닮은 구석이 많아, 이반은 러시아 사람들도 개나 고양이, 새 같은 애완동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뱀이라니, 나는 검정 바탕에 노랑, 빨강 줄무늬가 있는 이국의 낯선 뱀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러시아에서 뱀은 집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다고 생각해. 녀석을 보고 놀란 나에게 위로라도 하려는지 이반은 한국에도 그런 얘기가 있다는 걸 어디선가 들었다고 했다. 명자, 이반은 내 이름을 부르고 입으로 휘이휘이 휘파람 부는 흉내를 냈다. 그러면 집안이 텅 비게 돼, 녀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종종 휘파람을 불던 내게 이반은 러시아 속담을 빗대 말했다. 나는 멀찍이 녀석을 내려다보며 이반의 익살에 웃음을 내보였었다. 이반을 만난 것은 클럽 로즈에서였다. 로즈는 P시에서 속칭 텍사스촌으로 불리는 외국인 거리에 있었다. 예전에는 주로 미군들이 드나들었는데 미군이 철수하고 러시아 선원과 상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날도 나는 로즈에서 맥주를 마시며 립스틱이 번지지 않았는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젊은 러시아 청년 하나가 보드카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마담 장 앞에서 한국 얘기를 듣던 선원 중 하나였다. 술을 마실 때 거울을 보면 안 돼요, 아름다움까지 먹어버리거든요, 귓불에 입술을 갖다 대며 그가 속삭였다. 흔한 작업멘트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의 나긋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반이라고 했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처음 출발하는 곳이 고향이라고 말했다. 나는 시베리아 열차가 끝없이 달리는 드넓은 숲과 초원을 떠올렸다. 그에게 러브 오브 시베리아란 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양손을 허공에 올려 내 얼굴을 길게 그려보였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왼쪽 손목에 새겨진 푸른색 돛이 펄럭였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내가 여주인공과 닮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그린 얼굴이 허공에 그대로 떠 있는 것처럼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러시아 사람과 첫 대면을 할 때 영화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영화 속 여주인공을 만난 것처럼 이국의 여자들에게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대개 영화 속 지명이나 주인공의 이름을 들먹이는 선에서 끝이 났다. 러시아말로도, 한국말로도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순간에 이르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가 턱을 괴고 조용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여행지처럼 나를 설레게 했다. 음악이 흘렀고, 클럽 로즈는 마치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을 품고 있는 대합실 같았다. 그의 손목에 새겨진 푸른 돛 때문이었을까, 나는 문득 그라면 함께 여행을 떠나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같이 여행을 떠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월요일만 아니라면 언제라도 좋아요, 월요일 여행은 불행하거든요, 러시아 속담이에요. 느닷없는 제안이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는 벽면에 붙은 러시아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마치 오래 전에 만난 사람처럼 손을 잡고 아무 손님도 잡지 못한 나타샤를 지나쳐 거리로 나왔다. 밤하늘에는 만국기가 꽃잎처럼 나풀거렸고 만국기의 행렬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두 블록 떨어진 내 숙소로 걸어올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도 이반이 러시아 속담을 말하며 내 입술에 입을 맞출 것만 같다. 시계가 밤 아홉시를 넘겼다. 녀석은 원색의 몸을 감춘 채 아직 기척이 없다. 나는 열선을 펴서 케이지 크기만큼 접었다. 그 위에 타월을 깔고 케이지를 얹었다. 사람 옷 입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판매원이 열선 까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겨울철, 스스로 온도 조절을 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열선은 생명줄과 다름없다고 했다. 녀석에게 25도의 체온으로 이국의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불행일 수 있었다. 나는 콘센트에 코드를 꽂고 케이지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거실의 불을 낮추고 이반이 남긴 메모지를 냉장고에 붙였다. 주방 창가로 가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북향으로 나 있는 주방에서 밖을 보면 아래층에 있는 중국집 ‘홍루’의 뒤꼍이 훤히 보였다. 홍루 뒤꼍에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새들었다. 쥐라도 쫓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담자락을 타고 지나간다. 지난봄, 가게의 주인이 바뀌면서 홍루(紅樓)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홍루는 붉은 다락방이라는 뜻이지만 이곳에 사는 화교들은 늙은 기생의 방이라는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변두리 사거리의 허름한 중국집 이름 홍루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거리는 스산할 정도로 빛이 꺼져 가고 휑하니 바람만 몰아 불었다. 멀리 텍사스 거리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등 뒤로 손을 넘겨 자주색 민소매 드레스의 지퍼를 올렸다. 목선이 등 뒤로 깊게 파인 드레스였다. 이반을 만났을 때 이 드레스를 입었다. 이반이 긴 허리를 굽히고 마른 등에 입술을 댈 때면 나는 수줍은 소녀처럼 간지러움을 참아내곤 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빨강 립스틱을 덧바르고 귓불 뒤에 향수를 뿌렸다. 구제를 구입해 수선한 밍크를 꺼내 걸치고 자투리로 만든 밍크 모자를 머리에 비스듬히 얹었다.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장갑을 꼈다. 은색 스팽글이 촘촘하게 박힌 카우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텍사스촌에 접어들자 겨울 내내 공중에 걸려 있던 해진 만국기가 바람에 나풀댔다. 그 아래, 술에 취한 러시아 선원 두 명이 러시아 혁명가 스텐카 라진을 부르며 지나갔다. 나는 시애틀 노래주점을 지나고 캄차카 노래방을 지나 클럽 로즈로 걸음을 옮겼다. 로즈에는 러시아 민요인 백만 송이 장미가 흐르고 있었다. 낮고 고혹적인 중년 여가수의 목소리가 담배 연기와 흐린 불빛에 섞여 들었다. 손님이라고는 한국 선원 두 명과 러시아 선원 두 명이 전부였다. 마담 장이 표정 없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반을 만났던 자리에 앉아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얹었다. 한국 선원과 함께 있던 나타샤가 다가와 서툰 한국어로 언니, 마셔? 라고 물었다. 나는 보드카와 러시아 닭 꼬치인 샤실릭을 시켰다. 담배를 피워 물고 천천히 로즈 안을 둘러보았다. 마담 장이 무료하게 하품을 해댔다. 필리핀에서 온 구잘은 러시아 선원과 섞여 백만 송이 장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음악이 끝날 무렵 나타샤가 보드카와 샤실릭을 내왔다. 나는 담배를 끄고 보드카를 한 잔 따랐다.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자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목까지 치닿았다. 이반은 보드카를 마시는 순간이면 고향을 떠났다는 것도, 추운 바다 위를 떠돈다는 것도 모두 잊는다고 했다. 나는 열기가 되뿜어져 나오는 목을 진정시키기 위해 샤실릭 꼬치에서 닭 가슴살 한 점을 빼 마요네즈에 찍어 입에 넣었다. 내가 보드카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미군이 철수하고 나서였다. 러시아 선원들이 골목을 차지하고 거리의 젊은 여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짐을 꾸려서 떠났다. 고작 러시아 선원의 비위나 맞추며 살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마담 장도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갔던 여자였다. 나는 미군 대신 러시아 선원을, 맥주 대신 보드카를, 영어 대신 러시아어를 몸에 익혔다. 이 거리에 나타샤와 구잘이 찾아들었다. 나타샤는 러시아에서 발레리나였고 구잘은 필리핀에서 가수였다고 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꿈을 찾아 이곳을 떠났고 또 누군가는 또 다른 꿈을 좇아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텍사스촌으로 되돌아 온 사람들은 좀체 이 거리를 다시 벗어나지 못했다. 마담 장이 러시아 민요 대신 빠른 행진곡으로 음악을 바꾸었다. 선원들이 경쾌한 해군의 노래에 맞춰 무릎과 팔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보드카 병이 순식간에 비어 갔다. 시계는 벌써 열한 시를 넘겼다. 한국 선원이 나타샤의 뺨을 비비며 등줄기를 훑었다. 선원 하나가 그녀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 순간 그녀가 마담 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담 장이 전화를 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아가씨가 클럽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는 여자였다. 계산을 마친 그들이 클럽 안을 빠져 나갔다. 손님은 이제 러시아 선원만 남았다. 유난히 손님이 없는 밤이었다. 살집이 많은 러시아 선원 하나가 보드카를 마시며 계속 나를 주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선원은 보드카 병을 쥐고 일행을 벗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구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틀거리는 선원보다 구잘이 먼저 내 테이블 앞에 와 선다. 러시아 선원이 들으라는 듯 러시아말로 이번에도 손님을 채 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선원이 멈칫거리는 사이 구잘이 밖으로 나갔다. 선원이 내 앞에 앉는다. 그는 잔에 보드카를 따르며 자신의 고향 이야기로 말을 건넸다. 나는 그에게 이반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깨를 추켜올리며 자신이 이반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주색 드레스가 마음에 든다며 슬쩍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해군의 노래가 끝나고 러시아 혁명가가 시작되었다. 구잘이 필리핀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구잘의 친구가 러시아 선원의 팔을 꿰찼다. 멍청이! 저 언니 나이 많아, 주름 많아, 구잘이 선원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구잘의 말에 선원이 내 앞에 앉은 선원에게 손짓을 보냈다. 동료가 만류하는 손짓을 무시하듯 선원이 지갑을 꺼내 보드카와 샤실릭 값의 두 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켜보고 있던 구잘이 거칠게 다가왔다. 언니 년 나빠! 그녀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놀란 선원이 성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의 돈을 챙겨 일행 쪽으로 가버렸다. 망할 년! 어린 년이! 마담 장이 구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언니 년, 나빠! 구잘이 악다구니 끝에 손을 풀었다. 그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샤실릭 꼬치가 꾸들꾸들 말라갔다. 러시아 혁명가가 끝나고 경쾌한 아코디언 연주와 함께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유난히 손님이 없는 밤이었다. “이 짓도 이제 지긋지긋해, 러시아 년들을 한국 놈들에게 붙이고 필리핀 년들은 러시아 놈에게 붙이고, 이렇게 갈보 년들 불러대는 것도 신물이 난다구!” 그녀가 보드카를 마시며 넋두리를 해댔다. 쿨럭쿨럭, 천식 때문인지 잔기침이 뒤따랐다. “그래도 옛날에 이 바닥에서 명자, 하면 알아줬는데, 사내들을 홀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지, 그 시절에는 먹물 튄 년이 드문 때였으니…….”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흐릿한 불빛을 타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거에 혹해서 사내놈들이 많이 찝쩍댔지…… 그때 한 놈 잡아 떠나지, 무슨 미련이 있다구…….” 그녀의 목소리는 무대 위에 홀로 앉은 재즈가수의 독백처럼 한없이 낮았다. “너나 나나, 진즉에 이 바닥을 떴어야 하는데……, 사나운 팔자는 이래도 저래도 막히니…….” 그녀는 마치 거울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손님은 더 이상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코트를 걸쳤다. 카우치 백을 열어 계산을 마치고 조용히 로즈를 나왔다. 홍루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나는 홍루 앞에서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고 모자를 반듯하게 썼다. 보드카 때문인지 속에서 열이 올랐다. 어두운 계단을 지나 2층 현관문을 열었다. 녀석은 아직도 톱밥 속에 파묻혀 있다. 녀석에게 다가가 케이지 밑에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댔다. 따뜻했다. 월요일에 길을 떠나면 여행이 불행하게 된다고 했던 이반은 정작 월요일에 떠났다. 이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단순히 그가 월요일에 떠났기 때문이리라. 나는 욕실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드레스를 벗었다. 거울에 깡마른 몸이 드러났다. 이반이 명자, 라고 이름을 부른 뒤 커다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려 보이면 나는 러시아 회화 책을 뒤지듯 그가 허공에 그려낸 그림을 꼼꼼히 살폈다. 이반은 종종 그렇게 자신이 탈 배가 지나갈 곳을 손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이반의 손목에 새긴 푸른 돛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이반은 지금 어느 바다를 지나고 있을까, 나는 깡마른 몸에 샤워기의 물을 뿌렸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것은 녀석 때문이었다. 문득 녀석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이 떠나고 녀석을 제대로 본 적도 없다. 나는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케이지에서 멀찍이 떨어져 톱밥 위를 보았다.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반이 떠나고 녀석은 줄곧 톱밥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일까, 나는 케이지 안을 살폈다. 톱밥의 곡선이 흐트러짐 없이 처음 그대로였다. 나는 냉동실 문을 열고 이반이 사 놓은 먹이를 하나 꺼냈다. 먹이는 알루미늄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개수대에 따뜻한 물을 받아 포장된 먹이를 그대로 담갔다. 재스민 차를 우려내 창가로 간다. 눈이 흩날렸다. 홍루 지붕에는 엘피 가스통 4개와 물탱크,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작업복과 면장갑, 깨진 그릇이 나뒹굴었다. 그 낡은 지붕 아래 자장면과 짬뽕 옆으로 적힌, 익숙하나 한 번도 맛을 본 적 없는 횡서 끝자락의 낯선 메뉴를 떠올린다, 어쩌면 남자가 만들어 본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감조차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그 메뉴 밑으로 삐뚤삐뚤하게 적힌 러시아 음식들. 흑빵과 함께 홍루의 남자는 육개장과 비슷한 쌀단까나 빈대떡과 비슷한 블린 같은 러시아 음식도 만들었다. 종종 러시아 사람들이 중국 음식 중에 끼어 있는 러시아 음식을 주문하였다. 눈이 내려앉는 홍루 뒤꼍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등을 보이고 양파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다. 내가 보는 것은 언제나 남자의 등이다. 남자는 마치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사람처럼 묵묵히 앉아 양파를 깠다. 넓은 고무 대야를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물에 붇고 있는 양파 껍질을 벗겨 낸다. 인조털이 달린 두툼한 점퍼에 가려진 남자의 양 옆 어깨가 끊임없이 움직인다. 나는 껍질과 뒤섞인 혼탁한 물에 한 쪽 손을 깊숙이 집어넣고 남은 양파 알을 찾는 남자의 기울어진 어깨를 본다. 언뜻언뜻 삐져나오는 남자의 붉고 물에 불은 손. 남자는 허리를 펴고 위를 올려다보는 법이 좀체 없다. 남자의 등 뒤로 살금살금 나타샤가 다가간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허리를 익살스럽게 굽히고 남자의 등 뒤에 몰래 다가섰다. 나타샤가 두 손으로 남자의 눈을 가린다. 남자가 양파 껍질이 묻은 젖은 손을 차마 나타샤 손에 포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나타샤가 손을 풀었다. 나는 뒤돌아보고 멋쩍어하는 남자의 표정을 바라보며 식어가는 찻잔을 볼에 대고 눌렀다. 나타샤가 남자 앞에 턱을 괴고 앉는다. 분홍색 털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클럽에서와는 달리 앳돼 보였다. 남자가 양파 껍질을 벗기는 일을 멈추었다. 나타샤가 일어서더니 뒤꿈치를 모으고 양발을 벌려 발레의 폴리에 자세를 취한다. 두 팔을 뻗어 머리 위로 올리고 천천히 발 앞굽을 세워 잔걸음으로 뒤꼍을 옮겨 다녔다. 한눈에 봐도 그녀가 백조의 동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타샤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총총걸음으로 뒤꼍을 돌아 남자 앞에 섰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동그랗게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남자를 향해 웃고 있는 나타샤를 보며 식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개수대에 던져놓은 녀석의 먹이가 녹았다. 먹이를 건져서 접시에 담고 알루미늄 포장지를 벗겨냈다. 손가락 한 마디를 좀 넘긴 연한 핑크색 먹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쥐가 녀석의 먹이라니. 처음 기지촌에 왔을 때처럼, 처음 러시아 선원을 만났을 때처럼 무섭고 낯설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집게로 새끼 쥐를 집어 올려 녀석에게로 갔다. 톱밥 위는 아직도 텅 비어 있었다. 케이지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고 먹이를 내려놓았다. 휘파람을 분다. 녀석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휘파람을 분다. 어릴 적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아무도 없는 집 마루에 앉아 허공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대곤 했다. 설령 어른들의 말처럼 뱀이 나온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휘파람을 불면 곁에 누가 있는 것처럼 무서움이 가셨다. 이반의 말대로 휘파람을 불어서 집이 비었는지 집이 비어서 휘파람을 불었는지 지금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케이지에서 시선을 거두고 소파에 앉아 여행자를 위한 러시아 회화 책을 폈다. 90쪽 ‘거리’에서부터 120쪽 ‘모자 가게’까지는 이반이 떠나기 전 러시아어로 읽어주었다. 151쪽 기차여행 편을 한글로 따라 읽는다. ‘그제야 마구 쎄스츠 나 보예즈제?’ 어느 기차에 타야 합니까? 홍루 뒤꼍으로 함박눈이 쌓였다. 나는 눈을 밟으며 홍루로 갔다. 홍루에는 나타샤와 한국인 두 명만이 앉아 있었다. 주방 안으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종업원에게 이반이 즐겨 먹었던 쌀단까와 흑빵을 주문했다. 종업원 대신 나타샤가 내 쪽을 힐금거리며 주방 입구로 갔다. 그리고 주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주문을 받아 전해준다. 나는 낮은 선반 위에 펼쳐진 러시아 회화 책을 잠시 쳐다보았다. 남자도 틈틈이 회화 책을 뒤지며 러시아 말을 익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폴리에 자세로 발을 벌리고 서 있는 나타샤의 뒷모습이 왠지 서글퍼서 고개를 돌렸다. 쌀단까와 흑빵이 나왔다. 이반은 홍루의 쌀단까 맛이 고향의 맛과 같다고 했지만 홍루의 쌀단까 맛은 육개장과 별반 다름없는 맛이었다. 천천히 흑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흑빵이 입안에서 거칠게 씹혔다. 나는 반쯤 뜯어 먹은 흑빵을 남기고 홍루를 나왔다. 케이지 안에 먹이가 그대로 있었다. 녀석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나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케이지의 뚜껑을 열고 먼지떨이를 거꾸로 찔러 넣어 천천히 톱밥을 휘저었다.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막대기로 커다랗게 원을 그은 뒤 안으로 조금씩 좁혀가며 톱밥을 감아 올렸다. 녀석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반이 곁에 있었다면 아마도 내가 휘파람을 불어 모든 게 텅 비어버린 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녀석은 어디로 간 것일까. 눈이 녹고 있었다. 녀석이 사라진 지 일주일째, 부두에 배가 들어왔다. 텍사스 거리는 러시아 선원들과 보따리 상인들로 붐볐다. 나는 클럽 문을 열었다. 로즈도 러시아 선원들로 북적였다. 여전히 러시아 음악 백학이 흘러나왔고 조명은 더 흐려 있었다. 나는 이반을 만났던, 거울이 걸린 자리에 앉았다.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리고 카우치 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언니 머? 구잘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보드카와 샤실릭을 주문했다. 마담 장이 새로운 선원들을 앞에 두고 예전 텍사스 거리에 몰려들었던 미군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선원들이 이야기를 채근하듯 마담 장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시절 마담 장의 사랑을 구하려는 한 미국 병사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백만 송이 장미를 사다가 거리에 뿌렸노라고 말하자 선원들이 속았다는 듯 몸을 털며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백만 송이 장미에 얽힌, 가난한 화가의 슬픈 사랑이야기란 것을 이내 알아챈 모양이었다. 마담 장은 배가 들어올 때마다 선원들을 앞에 두고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곤 했다. 선원들은 이국의 낯선 이야기에 자신들 나라의 이야기가 섞여 든 것을 알아채자 긴장이 풀렸는지 보드카를 연거푸 마셨다. 마담 장이 의자를 돌려 몸을 반쯤 틀고 있는 러시아 선원들을 달래듯 두 손을 들어 허공을 다독였다. 선원들이 다시 마담 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타샤는 한국인 선원들 사이에 섞여 있었고 이미 취해 보였다. 한국인 선원이 길고 곧은 나타샤의 등줄기를 더듬어 내려가다 허리를 감싸 안고 일어섰다. 마담 장이 재빠르게 나타샤와 눈길을 주고받았다. 나타샤와 한국인 선원이 계산을 마치고 클럽 밖으로 나갔다. 홍루의 남자가 클럽에 들어선 것은 내가 두 번째 담배에 막 불을 붙일 때였다. 남자는 이곳이 처음인 듯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소 들뜬 표정으로 구잘에게 주문을 했다. 그의 테이블에 맥주와 마른안주가 올려졌다. 나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셨다. 마담 장이 음악을 바꿨다.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었다. 러시아 선원들이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러시아인들의 춤은 마치 목각 인형이 줄에 매달려 움직이는 것처럼 무릎과 팔이 절도 있게 꺾어졌다. 격렬하면서도 율동 사이사이에 강한 매듭이 있는 러시아 춤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정신이 맑아졌다. 춤이 격렬하면 할수록 더 그랬다. 나는 선원들이 원무를 이뤄 추는 가팍을 보며 이반을 떠올렸다. 이반도 어디선가 함성을 지르며 저들처럼 가팍을 추고 있을까, 나는 보드카를 마시고 샤실릭을 한입 베어 물었다. 바에 앉아서 계속 몸을 흔들고 있던 마담 장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육중한 그녀의 몸이 빠른 리듬에 맞춰 민첩하게 움직였다. 선원들의 함성이 추임새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음악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의 춤은 자정까지 계속될 것이다. 구잘이 나타샤가 없는 빈자리를 대신하여 분주히 움직였다. 마담 장은 점점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해갔다. 가끔 이렇게 마담 장이 흥에 취해 선원들과 춤을 추면 그녀가 어김없이 해 오던 일, 러시아 아가씨를 한국 선원에게 붙이고 필리핀 아가씨를 러시아 선원에게 붙이는 일을 잊었다. 더불어 나의 존재도 잊었다. 그녀가 잊는 것은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천식처럼 오래된 이 거리의 모든 것들, 그녀를 되돌아오게 만들었던 익숙한 모든 것들, 그녀의 생 모두를 잊을 것이었다. 이반의 말대로 휘파람을 불면 무언가 텅 비게 되는 것처럼 그녀도 텅 비어가는 것이리라. 원무에 끼어 점점 격렬하게 몸을 흔들 때마다 그녀가 한줌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기라도 할 듯 깡마른 손을 허공에 내밀었다. 홍루의 남자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남자는 무릎 사이에 손을 찔러 넣고 눈은 줄곧 나타샤를 찾았다. 나는 마지막 보드카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남자가 취했는지 점점 고개를 떨궜다. 녀석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문득 잊고 있던 녀석을 떠올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남자가 고개를 든다. 거짓말처럼 녀석을 찾은 것은 소파 밑에서였다. 환전소에 가기 위해 러시아 동전을 지갑에 넣는 중이었다. 소파 밑으로 굴러들어간 동전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누렇게 바랜 벽지에 노랑 빨강 검정 색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소파 안쪽 벽 틈에 일자로 붙어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았다. 녀석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먹이를 꺼내 따뜻한 물에 담근 다음 물기를 닦아 소파 입구에 놓았다. 집게를 들고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녀석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숨을 삼켰다. 먹이 앞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간 녀석이 고개를 들며 혀를 날름거렸다. 녀석의 여린 혀가 재빠르게 입속을 반복해서 드나들었다. 녀석이 먹이 앞으로 다가가 먹이를 덥석 무는 순간 집게로 녀석을 집어 케이지에 넣었다. 녀석의 입에는 삼키다 만 새끼 쥐의 여린 몸이 반쯤 물려 있었다. 로즈 앞에는 며칠째 클로즈라는 안내판만 달려 있었다. 겨울이면 도지는 마담 장의 천식 때문에 잠시 문을 닫았다고 했다. 나타샤도 가끔씩 목욕탕이나 환전소에서 마주치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한국 선원을 따라 이곳을 떠났다는 말도 있었고 임신을 해서 로즈에서 쫓겨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텍사스 거리는 다 해진 만국기를 걷어내는 상인들로 분주했다. 나는 만국기가 끝나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반을 처음 만났던 날, 이반의 달콤한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던 순간, 나는 내 여행이 이대로 끝이 나길 간절히 바랐었다. 이반은 지금 어느 바다를 지나고 있을까? 나는 만국기가 걷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블라디보스토크 행 비행기표 판매소를 지나 환전소로 갔다. 마지막 남은 먹이를 녀석에게 넣어주었다. 녀석이 조심스럽게 먹이에 다가간다. 잠시 목을 추켜세우더니 슬그머니 방향을 틀었다. 또 먹이를 먹지 않을 모양이었다. 온수에 목욕을 시키면 좀 도움이 될 겁니다. 수의사는 전화로 간단하게 처방을 내렸다. 소화불량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정상적으로 탈피를 하기 힘들어진다고도 했다. 대야에 온수를 받아 케이지 옆에 놓았다. 케이지 뚜껑을 열고 널브러지듯 몸을 길게 풀고 있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집게를 들다가 내려놓았다. 녀석의 외피에 손을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녀석의 차가운 체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천천히 선을 그으며 머리 쪽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녀석의 입을 지나 턱쯤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녀석이 감미로운 몸동작으로 손에 감겨든다. 소름인지 전율인지 무언가 몸속으로 울려들었다. 나는 녀석을 안듯 들어올려 온수에 담갔다. 녀석이 천천히 물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물끄러미 녀석을 보다가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미끄러지듯 내 손을 비켜나가는 녀석의 꽁무니를 따라가며 손을 저어 작은 물보라를 일으켰다. 녀석이 점점 생기를 찾은 듯 작은 원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뒤 작은 수건으로 민첩하게 손아귀를 벗어나는 녀석을 떠내 마른 수건을 깔아놓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 녀석을 재빨리 수건 위에 굴린 뒤 케이지 안으로 털어 넣었다. 명자, 아주 잘했어, 이반이 보았더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홍루를 지나고 로즈를 지나 도로 건너편에 있는 수족관으로 갔다. 파충류 먹이 있음. 간판 옆에 적힌 글씨를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이 햄스터 케이지를 열다가 내 쪽을 본다. “뭘 드릴까요? 손님.” 점원이 케이지 안에서 햄스터를 꺼내며 물었다. “밀크스네이크 종인데……먹이 좀 사려고요.” 나는 나무토막을 기어오르는 비단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한다. “뱀을 키운 지 오래되셨나 봐요. 처음 키우는 사람은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거든요.” 점원이 손에 쥔 햄스터를 비단뱀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이렇게 한창 클 때는 녀석도 산 먹이를 찾아요, 그래야 탈피를 제대로 할 수 있거든요.” 나무막대를 기어오르던 녀석이 슬그머니 방향을 틀며 혀를 날름거렸다. 케이지에 던져진 햄스터가 꾸물꾸물했다. 움직임을 감지한 녀석도 먹이를 견준 채 꼼짝 하지 않다가 입을 벌리고 먹이를 물어 삼켰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점원에게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는 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 속담이 있었나요?” 점원은 손에 묻은 햄스터 털을 털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 냉동 쥐로 드릴까요?” 점원이 물었다. 나는 햄스터의 하얀 몸이 비단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점원은 케이지에서 꿈틀거리는 분홍색 새끼 햄스터 한 마리를 꺼냈다. “녀석들이 종종 냉동 먹이를 먹지 않는데…… 그건 아마도 탈피를 하려고 그럴 겁니다. 제대로 크고 있다는 증거죠.” 나는 점원에게서 새끼 햄스터를 받아 골목으로 돌아왔다. 날이 풀리고 있었다. 곧 부두에 배가 들어온다고 했다. 나는 문이 닫힌 로즈를 지나 홍루에 들러 쌀단까와 흑빵을 시켰다. 남자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탁자 위에는 너덜너덜해진 러시아 회화 책과 비닐도 뜯지 않은 발레 슈즈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흑빵을 뜯어 쌀단까에 적셔 먹었다. 맞은편 거울에 흑빵을 씹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밥을 먹을 때 거울을 보면 안돼요, 아름다움까지 먹어버리거든요, 이반이 내 귓불 뒤에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일 것 같았다. 홍루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 “연산군 스토리텔링 관광명소 만든다”

    “연산군 스토리텔링 관광명소 만든다”

    “도봉산 둘레길 옆으로 연산군 묘와 부인 거창 신씨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조선 10대 임금이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1476~1506)의 묘를 도봉구의 관광명소로 가꿀 것이라며 28일 이렇게 말했다. 연산군은 TV드라마나 영화 등 역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인물로, 역사적 교훈을 전달하는 문화역사 탐방 코스로 최고라는 이야기다. ●5000만원 들여 연산군묘 인근 정비 문제는 연산군 묘가 왕릉으로 국가지정 문화재인데도, 공장과 식당 등이 바로 인접해 주변 환경이 불량하고, 차량 진입로가 좁고 주차공간이 없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년 상반기에 5000만원을 들여 주변을 정리할 예정이다. 유적지를 정비하고 안내판을 설치한 뒤 주변 문화유적지와의 동선을 연계하기로 했다. 주차장과 화장실, 전시실 등 편의시설도 확충한다. 연산군 묘 주변에는 파평 윤씨 일가가 600년 전 정착하면서부터 이용했다는 원당샘과 서울시 보호수 1호인 830년 수령의 방학동 은행나무가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이곳에 불이 나면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다는 일화도 있다.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양효공 안맹담의 묘도 자리했다. 정의공주와 부군의 묘는 서울유형문화재 제50호다. 원당샘은 복원돼 지난 13일 준공식을 가졌다. 최근 도봉구에 있는 이들 유적지가 주목받는 것은 지난 6월 개통한 북한산 둘레길 도봉 구간 20구간(왕실묘역 길)이 바로 옆으로 펼쳐진 덕분이다. 이들 유적을 잘 관리하면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둘레길 산행을 하는 이들에게도 괜찮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도봉의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할 수 있다고 이 구청장은 판단한다. 이 구청장은 “특히 한글 창제의 숨은 공로자로서 정의공주를 재조명할 수 있는 대표적 자원”이라면서 “도봉구의 가치와 긍지를 높이는 일에 이들 자원이 활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배 김근태 前대표 투병 안타까워” 이 구청장은 최근 속앓이를 한다고 했다. 도봉구에서 함께 활동하던 민주화 동지이자 선배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대표가 뇌정맥혈전증으로 투병하고 있어서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이 왔는데, 대중 정치인으로 그걸 널리 알리고 싶지 않아 병원을 피하다 보니 뇌정맥혈전증이 진행되는 것을 너무 뒤늦게 알게 됐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그나마 다행히도 얼마 전 문병을 갔더니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또 “개인 김근태가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에 이바지한 인물로서 현대사의 한 부분으로 평가하고, 그분의 삶을 존중해 주면 좋겠다.”면서 “빨리 회복돼 내년 총선에도 뛰어들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9) 김제 망해사 팽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9) 김제 망해사 팽나무

    ‘침묵의 봄’으로 유명한 지난 세기 최고의 해양생태학자 레이철 카슨(1907~1964)은 유고집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서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자연에 진정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지식보다 자연으로부터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올바른 지식과 지혜는 “자연에 대한 감정과 인상이 튼튼한 바탕을 이루어야 열매 맺게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뭇 생명을 만나는 데에 있어서 상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거니와 길고 깊은 만남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름을 알기 전에 거쳐야 할 다른 과정은 없을까. 꽃도 잎도 열매도 모두 내려놓은 겨울 나무는 그의 이름을 알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떠오르는 생각이다. ●지식보다는 감성으로 지켜온 나무 사람이나 짐승에게 그렇듯이 나무의 이름도 그의 특징을 드러내는 한 표징이다. 그래서 이름을 잘 알아두면 그 나무와 더 빠르고 깊이 친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름을 모르거나 혹은 잘못 아는 나무와의 관계는 어떠할까. 전북 김제의 너른 만경벌 끝자락 바닷가에 자리 잡은 망해사에서 400년을 살아온 한 쌍의 나무 앞에 서면, 이 같은 의문이 구체적인 현실을 만나게 된다. 이 나무는 봄에 노란색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까만색 열매가 조롱조롱 맺히는 팽나무다. 그게 이 나무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정보다. 그러나 절집에서나 마을에서나 이 나무를 팽나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비슷하게 가지를 넓게 펼치는 느티나무와 헷갈려 잘못 부르는 것도 아니다. 한 쌍의 나무 가운데 비교적 우뚝 선 큰 나무를 사람들은 ‘할배나무’라고 부르고 조금 작은 옆의 나무를 ‘할매나무’라고 부를 뿐이다.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114호인 이 나무 앞에는 지자체에서 정성들여 세운 입간판이 있다. 거기엔 분명히 ‘망해사 팽나무’라고 씌어 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입간판 바로 앞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할배나무 할매나무라고 부른다. 사람의 호칭인 ‘할배’, ‘할매’가 어찌 나무의 이름이 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식물학적으로 따지고 들면 이 같은 호칭은 이치에도 맞지 않다. 팽나무는 은행나무나 비자나무처럼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는 암수딴그루가 아니다. 굳이 할배 할매처럼 성(性)을 구별해 부르려면 최소한 암수로 구분되는 나무여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이 같은 지식은 소용에 닿지 않았다. 절집 요사채 앞마당에 너그러운 품으로 서 있는 나무를 보고, 사람들은 고향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린 건지 모른다. 게다가 400년을 살아온 나무이니, 나이로 치면 영원한 할배 할매가 아닐 수 없었다. ●400년 전 진묵 대사가 심어 망해사 팽나무는 400년 전 이 절에 주석한 진묵(震默, 1562~1633) 대사가 심은 나무라고 한다. 망해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지은 천년고찰이지만 여러 차례의 부침을 겪은 뒤 조선의 대표적 선승(禪僧) 가운데 한 사람인 진묵이 주석하면서부터 인근에 사세를 널리 떨쳤다. 진묵은 망해사에 주석하면서 한 채의 전각을 짓고, 법당이자 요사채로 사용했다. 소박한 전각이지만 서해 낙조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이어서, 낙서전(西殿)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낙서전을 지은 뒤에 진묵은 그리 넓지 않은 앞뜰에 나무를 심었다. 바닷바람을 막으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작은 마당이 허허로운 탓이기도 했다. 그때가 1624년,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이다. 두 그루 가운데 할배나무로 불리는 큰 쪽의 나무는 키가 21m나 되고, 가지는 사방으로 고르게 25m 가까이 펼쳤다. 그 곁에 다소곳이 서 있는 할매나무는 키가 17m, 가지퍼짐은 사방으로 17m쯤 된다. 할배나무보다는 작지만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여느 팽나무에 비해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나무가 전체적으로 순한 동그라미 모습을 갖춘 것도 사람들에게 고향 집 할머니의 너그러운 품을 떠올리게 했을 게다. 한 쌍의 팽나무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윽한 눈길을 데면데면 나누며 4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 마치 겉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평생 드러내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만 서로를 보듬어 안고 살아가는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의 성정과 분위기를 영락없이 닮았다. 이 나무가 팽나무인지 느티나무인지 소나무인지를 아는 게 과연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마을로 닥쳐오는 칼바람을 온몸으로 막으며 우리네 할매와 할배처럼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을 위무하고 지켜온 세월이 400년이다.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서해바다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로 주지 스님이 출타 중인 오붓한 절집 망해사에 가톨릭 교회의 수녀님 다섯 분이 찾아 들었다. 김제 시내의 성당에 살면서도 멀지 않은 망해사를 찾아오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바다를 바라보아 망해사라고 했지만,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에 막혔으니 호수 호(湖)자를 써서 망호사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절집을 이리저리 구경하던 수녀님들 가운데 가장 젊어 보이는 수녀님이 홀로 할배나무 앞의 입간판을 유심히 읽은 뒤, 칼바람에 윙윙거리는 나뭇가지 끝을 바라보며 ‘팽나무’라고 분명하게 소리 내어 나무의 이름을 불렀다. ‘망해사’가 아니라 ‘망호사’라 부르고 싶은 것처럼 그 나무는 ‘팽나무가 아니라, 할배나무예요’라고 고쳐 주려다 그만두었다. 이름보다 더 귀중한 것이 삶의 진정성, 느낌, 인상 그런 감정에서 오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세상에 떠도는 모든 이름들이 허공으로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겨울 오후다. 글 사진 김제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전북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서해안고속국도의 동군산나들목으로 나가서 전주 방면으로 직진한다. 대야교차로를 지나 5.6㎞ 남쪽으로 가면 다시 신금교차로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지방도로 711호선을 이용해 5㎞ 남짓 간다. 만경여자중학교 앞의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광할 방면으로 지평선을 바라보며 9.5㎞ 간다. 오른편으로 나오는 심창초등학교를 지나면 ‘망해사’ 혹은 ‘곽경렬선생묘소’ 방면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나온다. 우회전하여 300m 가면 망해사 입구다. 절집까지는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솔숲에서 걸어가야 한다.
  • [교통문화발전대상-대통령 표창] 저상버스 도입·전자문자 안내판 실시

    ●김인하(71·영인운수㈜ 대표이사) 45년간 운수업계에 종사하면서 교통약자를 위한 저상버스 도입과 전자문자 안내판 설치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운전기사를 대상으로 분기별로 사고 예방 캠페인을 실시하고 사내 장학금과 무사고 포상금을 도입해 안전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말로만 ‘금연’ … ‘감시 눈’ 없었다

    말로만 ‘금연’ … ‘감시 눈’ 없었다

    서울 시내 공원 20곳과 중앙차로 버스정류장 314곳에서 흡연 과태료 10만원을 부과하는 첫날인 1일 흡연 단속이 겉돌았다. 오후 2시 여의도 문화공원 문화마당. 흡연금지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지만, 불과 20m 떨어진 벤치에서는 한 남성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가 담배 3대를 연달아 피울 때까지 단속 인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여의도 공원에서 흡연을 단속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광장 내 흡연 금지’라는 문구가 적힌 어깨띠를 두른 공익요원 1~2명이 걸어다녔지만 공원 곳곳에서 흡연하는 사람들을 단속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비슷한 시간 인근 여의도환승센터 버스중앙차로 정류장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속의 눈이 없는 곳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정류장 벽에 ‘금연구역’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부착돼 있었지만 한 40대 남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옆 쓰레기통 주변 바닥에는 담배꽁초들이 뒹굴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박모(27·여)씨는 “정류장마다 흡연 단속 인원이 상주할 수도 없는데 과연 단속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앞서 오후 1시 대방동 보라매공원에는 두꺼운 점퍼를 입고 산책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60~70대 노인들이 많았다. 20~30m 간격으로 서 있는 가로등마다 ‘공원에서 흡연시 과태료 10만원이 부과됩니다’라고 적힌 보라색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흡연을 단속하는 인원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정모(68)씨는 “공원에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주로 찾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시민은 “흡연을 단속하는 인원이 부족해 제대로 된 법집행이 될지 미지수”라고 했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연평도 대피소는 문화휴게실

    연평도 대피소는 문화휴게실

    지난해 11월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당시 기능 부실을 지적받았던 주민 대피소가 차갑고 어두운 이미지를 벗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24일 인천 옹진군에 따르면 연평 중·고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있는 대피소에는 ‘북카페 대피소’라는 새로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대피소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부터 기증받은 도서 1500여권이 비치돼 있으며, 앞으로 두산그룹 ‘연강재단’에서 1000권의 서적이 지원될 예정이다.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대피소에는 책 외에도 컴퓨터, 미니 당구대, 테이블 등이 갖춰져 아담한 휴게실을 연상케 한다. 연평중 1학년 차진혁(14)군은 “대피훈련이 있을 때 3시간가량 대피소에 머물러야 하는데 새 대피소에서는 하루종일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연평초등학교 대피소 역시 도서 등을 갖추고 ‘희망대피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대피소 한쪽에는 대피 때 어린이들이 취침할 수 있는 목조로 된 2층 시설, 미니 농구대, 장난감 등이 마련돼 있으며 바닥에는 열선을 깔아 겨울에도 대피가 가능하게 했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5)무주 삼공리 반송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5)무주 삼공리 반송

    모든 생명에는 저마다 제 삶에 어울리는 격이 있다. 어떤 생명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고 크게 자라는 데에 제 격이 있고, 어떤 생명은 작아도 독특한 모양새에 제 멋이 들어 있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이 있게 마련이다. 그 모든 생명체가 조화롭게 어울릴 때에 비로소 우리 사는 이곳이 진정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다. 온 생명의 어울림이 빚어내는 결과다. 나무도 그렇다. 잎이 예쁜 나무가 있는가 하면 꽃이 좋은 나무가 있고, 큰 나무가 있으면 작은 나무도 있다. 봄에는 꽃이 좋은 나무,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 가을 겨울이면 상록성나무의 초록 잎이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낸다. 이 땅의 사철이 어느 때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근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반송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꼽는 소나무도 그렇다. 소나무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소나무로서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제가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육지의 소나무와 바닷가의 곰솔은 비슷한 소나무이지만 서로 다른 멋을 지닌다. 소나무의 한 종류로, 아름다운 수형을 가진 반송(盤松)은 또 다른 멋이 있다. 반송은 뿌리 부분에서부터 여럿으로 갈라진 줄기가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지며 자라는 특징을 가졌지만, 잎이나 열매를 포함한 모든 특징은 소나무와 같다. 반송은 크게 자라지 않고, 수형이 아름다워 조경수나 정원수로 많이 심어 키운다. 대개의 반송은 모양이 조금씩 다르지만 활짝 펼쳐지는 가지가 이뤄내는 생김새가 아름답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우리나라의 반송 가운데에 천연기념물 제291호인 무주 설천면 삼공리 반송이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반송이라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줄기가 여럿으로 갈라지는 게 반송의 특징이라고는 했지만, 이처럼 많은 가지로 갈라지면서도 반듯하게 자란 경우는 흔치 않다. 낮은 산기슭에 우뚝 선 이 나무는 150년 전에 이 마을에 사는 이주식이라는 사람이 옮겨 심었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가 350살쯤으로 여겨지는 것에 비춰 보면 200살쯤 됐을 때 옮겨 심었다는 이야기다. 적잖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사실 큰 나무를 옮겨 심는 일은 이식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고난도의 공사에 속한다. 150년 전이라면 기술과 장비가 흔치 않았을 때다. 심지어 장비를 동원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나무가 있는 자리까지 큰 나무를 싣고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을 게다. 좁다란 산길은 지금의 중장비도 오르기에 매우 급한 비탈이기 때문이다. ●만지송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멋 “이주식이라는 어른의 후손이 우리 마을에 살아 계세요. 이종만이라는 분이지요. 하지만 언제 어떻게 나무를 옮겨 심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게 없어요. 마을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 전해내려온 것이지요.” 나무 바로 옆에 조성한 가족 묘원을 둘러보러 나온 김철규(57)씨의 이야기다. 나무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목의 첫 번째 집에 사는 김씨는 마을에 나무의 근본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부터 이 나무가 이 자리에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모두가 귀하게 여겨온 나무라고 덧붙인다. “가지가 많아서 구천송이라고도 하죠. 저는 어릴 때부터 이 나무와 함께 살아온 셈이에요. 워낙 잘생긴 데다 튼튼하기도 해서 별 걱정이 없었죠. 그런데 옛날에 눈이 많이 내린 적이 있었어요. 큰 가지 위에 눈이 소복이 내려앉으니 나뭇가지가 휘청거리면서 부러지겠더라고요. 그때 마을 어른들이 군에 이야기해서 쇠줄을 쳐서 가지를 보호했어요. 그게 한 삼십 년쯤 전입니다.” 삼공리 반송에서 가장 눈에 거슬리는 건 아무래도 활짝 펼쳐진 가지와 가지 사이를 견고하게 잡아쥔 굵은 쇠줄이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을 옥죄는 쇠창살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옆으로 펼쳐진 가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나뭇가지에 무게가 실리면서부터 바람이 세게 불거나 눈이 쌓이면 부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이 무주의 대표적 명승인 구천동으로 들어서는 길목이어서 삼공리 반송은 구천송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또 하늘로 펼쳐진 나뭇가지가 1만 개에 이른다고 해서 만지송이라고도 불린다. 물론 만지송은 모든 반송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이지만, 만지송이라는 이름이 삼공리 반송만큼 잘 어울리는 나무도 없지 싶다. 순하게 그린 동그라미 모양으로 솟아오른 나무의 높이는 14m나 된다. 또 여러 개의 줄기로 나눠진 뿌리 근처의 둘레는 7m 가까이 된다. 크게 자라지 않는 반송의 특징에 비춰 봤을 때 이 정도면 매우 큰 나무에 속한다. 우리나라 반송 가운데에는 가장 큰 나무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나무 “이 자리는 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 곳이에요. 언덕 아래에서 바람이 웅크리고 힘을 모아서 한꺼번에 휘몰아치거든요. 심할 때에는 그냥 서 있기도 힘든 자리지요. 이런 자리에서 수백 년 동안 자랐다는 것만도 놀라운 일 아닌가요? 게다가 이만큼 건강하고 멋들어지게 자랐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주변에 바람을 막아줄 지형지물이 전무한 까닭에 나무는 언제나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나무는 지난 350년 세월을 잘 버텨왔다. 이제 삼공리 반송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다고 김씨는 강조한다. 그러나 더 고마운 건, 한 그루의 나무를 사랑으로 바라보고, 부러질까 저어하며 지켜낸 삼공리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다. 바람 부는 언덕 위에 나무는 홀로 서 있지만 이제는 큰 사랑을 받는 나무가 됐다. 나무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며 빚어낸 넉넉하고도 아름다운 결과다. 글 사진 무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전북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31. 통영대전고속국도의 무주나들목으로 나가서 장수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7㎞ 남짓 가면 덕유산국립공원과 장수 방면으로 가는 길이 나눠지는 사산삼거리가 나온다. 좌회전하여 덕유산국립공원 가는 길로 들어서서 14㎞쯤 가면 왼편으로 구천초등학교가 나온다. 1㎞쯤 더 가면 길가에서 삼공리 반송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보인다. 여기에서 왼편의 비좁은 마을 길로 들어서서 길 끝까지 오르면 나무가 있다. 나무 앞까지 자동차로 접근할 수는 있지만, 경사가 급하고 길이 좁아서, 초보운전자는 조심해야 한다.
  • 수원시, 2014년까지 걷기 좋은길 8곳 조성

    수원시, 2014년까지 걷기 좋은길 8곳 조성

    경기 수원의 대표적 하천인 수원천과 서호천을 따라 도심 속 자연을 그득히 느낄 수 있는 ‘모수길’이 조성된다. 수원은 삼한시대부터 ‘물의 근원’이라 하여 ‘모수국’으로 불렸다. 모수길은 수원천 상류 광교저수지를 따라 화홍문~팔달문시장~세류동 옛 수인선~서호천 서호~여기산~광교산을 잇는 19㎞의 누리길이다. 걷다 보면 조선시대 수원으로 천도(遷都)를 위해 화성(華城·사적 제3호)을 쌓으며 위에 만든 정자 방화수류정과 옆에 자리한 서호의 낙조 등 수원팔경도 만날 수 있다. 한 바퀴 도는 데 대략 5시간 20분 걸린다. 수원에 2014년까지 이 같은 역사문화 자원과 하천, 전통시장, 옛길을 연계한 ‘걷기 좋은 길’ 8곳이 생긴다. 수원시는 22일 ‘녹색도시회랑 조성’ 사업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긴 팔색(八色)길과 마을길 12곳을 선정했다. 팔색길은 자연생태를 테마로 한 모수길, 지게길, 매실길, 여우길, 가로수길을 비롯해 역사·문화 테마길인 효행길, 성곽길, 추억길 등이다. 북수원권 지게길(광교쉼터~한철약수터~항아리화장실~파장시장 5.3㎞·1시간 50분 소요), 서수원권 매실길(호매실 국립산림과학원~칠보산~왕송저수지~일월저수지~황구지천 17㎞·4시간 30분), 광교신도시권 여우길(광교 원천저수지~봉녕사~광교역사공원~신대저수지 14㎞·3시간 20분), 영통권 가로수길(영통중앙공원~영흥공원~원천리천~삼성전자~영통초교 10.5㎞·2시간 40분) 등은 생활권역별 산책로로 조성된다. 정조대왕 능행차 길인 효행길(효행공원~노송지대~만석공원~장안문~팔달문~수원천 10㎞·2시간 40분), 세계 문화유산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도는 성곽길(수원역~화성 성곽~화서역 9㎞·2시간 30분), 유적 중심의 추억길(여기산 유적지~잠사과학박물관~서울대 수목원 4㎞·1시간 30분) 등은 역사·문화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시는 전체 88.8㎞ 구간에 이르는 팔색길 산책로에 안내판과 이정표, 보행자의 휴식을 위한 그린 스테이션 등도 설치할 예정이다. 김정수 수원시 환경국장은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 둘레길이나 올레길과 달리 재미있는 도시 이야기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시민들의 일상공간으로 꾸밀 방침”이라며 “시민 안식처는 물론 수원을 찾는 방문객에게는 하나의 관광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4) 전북 진안 천황사 전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54) 전북 진안 천황사 전나무

    가을이 겨울의 무게에 짓눌렸다. 겨울이 짙은 안개를 몰고 전북 진안 운장산에 내려앉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에 밤안개가 짙어지자 지척도 분간할 수 없다. 스멀거리는 안개가 산을 넘는 나그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수행처로서보다는 관광지로 더 잘 알려진 운일암 반일암이 자리한 아름다운 산이다. 고개를 넘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한 그루의 전나무가 있다. 나무 앞에는 아늑한 암자, ‘남암’이 있는데, 가는 길이 쉽지 않다. 나무가 걸어온 세월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게다. 그건 그를 만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할 일종의 통과의례겠다. 알싸하게 번지는 초겨울 안개를 거역할 수도 모면할 수도 없는 늦가을이다. 안개는 이른 아침까지 걷히지 않았다. 운장산 기슭에 자리한 천황사도 안개에 묻혀 고요하다. 절집에서 키우는 개 짖는 소리만 정겹다. 천황사 돌담 곁에 커다란 전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 앞에 돌로 새긴 보호수 안내판에는 이 나무의 높이를 35m라고 했지만, 실제 나무의 키는 그만큼 되지 않는다. 오래전에 줄기 윗부분이 큰바람에 부러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 작은 나무는 아니지만, 이 나무가 지금 찾아가는 나무는 아니다. 천연기념물 제495호인 진안 천황사 전나무는 천황사에서 다시 200m쯤 산길을 거슬러 올라 천황사의 산내 암자인 남암까지 가야 만날 수 있다. 먼 길은 아니지만, 길이 좁고 가팔라서, 자동차로 접근하기도 쉽지 않고, 걷기에도 제법 숨이 차오르는 산길이다. 나무는 그 길 끝에서 감동으로 만나게 된다. ●높이 35m 국내 최고 수준 나무 앞에는 허름한 암자가 한 채 놓였다. 여느 암자처럼 기와 지붕을 올린 것도 아니고, 그럴듯한 법당도 차려지지 않은 볼품없는 암자다. 여느 시골 집 살림채처럼 보이는 ‘남암’은 1000년 전에 스님들의 수행처로 세운 유서 깊은 암자다.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도 잦지 않아 외롭기 그지없는 작은 집일 뿐이다. 암자로 오르는 조붓한 길 옆의 비탈에 선 전나무는 융융한 기품의 곧은 줄기를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올렸다. 암자 외에는 별다른 건물도, 다른 나무가 곁에 없는 까닭에 존재감이 매우 두드러진다. 겨울의 무게가 실린 안개가 가지 끝에 걸렸다. 눈대중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높다.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2008년의 정밀조사에 의하면 나무의 높이는 무려 35m나 된다. 사람 가슴 높이에서 잰 줄기의 둘레도 5m나 된다. 전나무는 원래 절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나무다. 나무의 곧은 자람이 마치 불심 깊은 스님의 지조와 절개를 닮았다는 뜻에서다. 천황사의 전나무도 400년 전 이 암자에서 용맹정진하던 스님이 온 땅에 불심이 널리 퍼져 평화로운 세상이 이뤄지기를 발원하며 심어 가꾼 나무라고 전한다. 추운 날씨에 잘 자라는 전나무는 우리나라의 높은 산지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리 별난 나무가 아니다. 줄지어 숲을 이룬 전나무도 좋지만, 이 나무처럼 홀로 우뚝 섰을 때의 느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나무다. 그 많은 전나무 가운데 천황사 전나무는 규모에서나 생김새에서 우리나라의 모든 전나무를 대표할 만한 나무다. “나무 주위에 있던 작은 나무와 어지럽던 풀을 정리하고 나니, 깔끔하고 더 커 보이지요? 하지만 사람 눈에 들자고 저렇게 꾸밀 필요가 있나요? 누가 돌보지 않은 채 수백 년을 살아온 생명체잖아요. 그냥 놔눠도 잘 사는 게 나무 아니던가요?” 사람 들지 않는 암자에서 홀로 수행 중인 스님이 인기척을 느끼고 차 공양을 권하며 처음 내놓은 이야기다. 사람 눈으로 보기야 좋아진 건 분명하지만, 나무에게도 그게 좋을지는 모르겠다며 스님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진리는 뜻밖에도 쉽고 간단합니다. 사람도 나무도 다 그래요. 주어진 대로 편안하고 쉽게 사는 게 진리에 닿는 방법입니다. 자식 잘 키우겠다고, 지나치게 애면글면하면 안 되는 것처럼 나무도 사람 마음대로 이리저리 매만지면 안 됩니다.”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뒤, 보호구역 정리를 위해 곁에서 자라던 낮은 키의 나무들과 무성한 풀꽃들을 베어낸 게 탐탁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무는 그대로 두고, 주변을 정리하고 울타리를 친 것 외에 별다른 변화는 없지만, 스님의 귀에는 작은 생명의 아우성이 아쉬웠던 것이다. ●“사람이 뭐라하든 자신의 생을 살아” “키 작은 나무나 풀도 똑같은 생명체입니다. 함부로 베어내고 뽑아내도 되는 생명은 없어요. 사람 마음이 문제예요. 사람 마음 따라 자연의 뭇 생명을 마음대로 다스리려 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그럴 권리가 있기나 한가 몰라요.” 스님은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직후 이곳 남암에 들어와, 2년 넘게 마음 공부에 정진 중이라고 한다. 나무를 누가 심었는지, 나무에 얽힌 어떤 이야기가 전하는지도 아는 게 없단다. 굳이 그걸 헤집어 낼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제 이름은 알아 뭐 해요? 사람이나 나무나 마찬가지예요. 전나무라고 부르든 천연기념물이라고 부르든 나무는 처음 이곳에 뿌리를 내렸을 때처럼 자기의 생을 살아갈 뿐이지요.” 법명을 묻자, 스님은 손사래를 치며 나무처럼 이름보다는 마음으로 남는 게 좋다고만 대답한다. 차 공양을 마치고 앉은 자리에서 작별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그 사이 높은 가지 끝에 걸렸던 초겨울 아침 안개가 걷혔다. 사람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가지 끝에 충만한 생명이 안개처럼 습기처럼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글 사진 진안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gohkh@solsup.com >>> 가는길 전북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 산169-4. 호남고속국도와 통영대전고속국도를 동서로 잇는 익산장수고속국도의 진안나들목을 이용해서 진안군청까지 간다. 군청 동북쪽의 진안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400m쯤 간 뒤 상림천이라는 작은 개울을 건너 지방도로 795호선으로 10㎞ 가면 정천면소재지에 이른다. 정천휴게소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3.6㎞ 가면 천황사 입구가 나오는데, 여기에 ‘진안 천황사 전나무’ 입간판이 있다. 여기에서 좌회전하여 500m 가면 천황사가 나온다. 천황사 앞 개울을 건너 산길 200m를 오르면 나무가 있다.
  • “朴대통령이 직접 심은…” 도산서원 금송 안내판 바로잡는다

    “朴대통령이 직접 심은…” 도산서원 금송 안내판 바로잡는다

    국가 사적 170호인 경북 안동 도산서원 경내에 있는 금송(錦松)의 안내판(위) 문안이 바로잡힌다. 문화재청은 14일 ‘박 대통령 각하 기념식수’란 제목으로 돼 있는 금송의 안내판을 “이곳은 1970년 12월 8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청와대의 금송을 옮겨 심었던 곳이나 1972년 고사(枯死)됨에 따라 1973년 4월 동 위치에 같은 수종(樹種)으로 다시 식재하였다.”는 내용으로 바로잡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제공
  • 함양 황석산을 오르다…꼿꼿한 고봉 따라 흐르는 만추의 파노라마

    함양 황석산을 오르다…꼿꼿한 고봉 따라 흐르는 만추의 파노라마

    선비 고을 경남 함양. 예사롭지 않은 풍경들을 숨겨 두고 있는 곳입니다. 함양의 외관을 결정짓는 건 산세입니다. 사방을 둘러친 30여개의 1000m급 고봉들이 어깨를 맞댄 채 파노라마를 펼칩니다. 그 가운데 함양 사람들의 굄을 듬뿍 받고 있는 게 황석산입니다. 정상부의 칼날 같은 암봉이 압권인 산이지요. 멀리 덕유산에서도 누런 바위가 또렷이 보일 정도랍니다. 여기에 절정의 빛깔을 뽐내는 상림과 운곡리 은행나무를 보탠다면 만추의 함양 여정으로 모자람이 없겠습니다. ●서수(瑞獸)의 뿔을 딛다 함양은 산청(동), 전북 장수(서), 하동(남), 거창(북)과 인접한 전형적인 산악 소도시다. 기특하게도 조그만 품에 지리산과 남덕유산을 모두 품었다. 명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들 또한 어느 산군(群)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 함양의 뒷산 괘관산(1252m), 지리산 세석고원과 닮은 월봉산(1279m), 육십령 북쪽 할미봉(1013m) 등 여느 도시에선 한 개도 찾기 힘든 1000m급 고봉들이 ‘발에 차일’ 정도다. 함양 사람 특유의 꼿꼿한 선비 기질 또한 이같은 자연환경에서 잉태되지 않았을까. 그 가운데 독특한 산세를 뽐내는 곳이 용추계곡 일대다. 용추계곡을 가운데 두고 기백산(1331m)~금원산(1353m)~거망산(1184m)~황석산(1190m)이 말발굽 형태로 에워싸고 있다. 산악인들이 비박 산행 황금 코스로 꼽는 이른바 ‘기·금·거·황 코스’다. 호사가들은 1000m가 넘는 네 산을 ‘부부(夫婦)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암수와 음양이 조화를 이뤘다는 게 이유다. 황석과 기백이 바위를 앞세운 근육질의 남성적인 산세인 것에 견줘 거망과 금원은 여성적인 부드러운 육산이다. 이웃한 황석과 거망, 금원과 기백이 각각 한 쌍의 부부로 엮인다. 그래서 산행을 할 때도 ‘부부 일심동체’라며 두 개 산을 타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초보자가 두 산을 묶어 오를 경우 체력적인 부담은 각오해야 한다. 단독 산행 일순위를 꼽자면 단연 황석산이다. 오르는 길이 제법 험하지만, 등산로 주변의 인위적인 구조물이라고는 이정표 몇 개가 전부일 정도로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정상의 암봉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압권이다. ●거친 산세… 울퉁불퉁 근육질 자랑하다 황석산을 오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정상 부근 황석산성의 동서남북 네 문을 향해 각각 등산로가 조성돼 있다. 그 가운데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한 접근로가 우전마을 코스다. 마을에서 황석산 정상까지 약 6㎞. 바삐 걸어도 4시간은 족히 걸린다. 26번 국도 변의 거연정 휴게소 바로 왼쪽으로 난 도로가 우전마을 진입로다. 여기서 마을을 지나 3㎞ 정도 오르면 사방댐. 이곳부터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이정표가 세워진 초입부터 너덜지대다. 완만하게 이어진 구간을 20여분 오르면 거대한 피바위와 만난다. 정유재란 당시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적들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며 몸을 던져 순절했다는 곳이다. 부녀자들의 피로 바위 벼랑 아래가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피바위 아래를 가로질러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붙으면 황석산성 남문이다. 안내판은 황석산성에 대해 ‘2750m에 달하는 포곡식 산성’이라 적고 있다. 포곡식이란 물 확보를 위해 성벽 축조 시 계곡을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안내판 끝자락엔 황석산성 전투 당시 500여명이 순국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정대훈 서하면장은 “최근 자료에 따르면 전투 중 사망한 조선인 수는 7000여명에 달했고,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왜구의 수도 2만 7000명이 아닌 7만 5000여명이었다.”며 “이때 사망한 왜구만 2만 5000여명”이라고 지적했다. 정 면장은 또 “왜구들이 조선인을 죽인 근거로 코를 베어 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당시 왜구들이 베어 간 코가 3만개에 달했다. 그중 2만개 정도가 황석산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덧붙였다. 죽은 조선인 숫자가 7000여명이었으니, 나머지는 아군의 코였다는 얘기다. 남문에서 황석산 정상을 바라보고 오른쪽 성벽을 따라 이어지던 등산로가 샘터 갈림길에서 성벽과 떨어져 황석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 구간. 산세가 어찌나 가파른지 비명 같은 거친 숨소리가 연신 터져 나온다. 정상 바로 아래, 그러니까 안부 주변의 가파른 능선을 따라 산성이 복원돼 있다. 비록 작은 산성이지만, 서수의 뿔처럼 불쑥 솟은 산봉우리를 에두른 자태가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투사를 닮았다. 조총을 앞세워 밀려드는 수만의 왜구들에게 지지 않고 창칼과 낫, 그리고 투석전으로 맞섰던 조선인들의 결기가 여태 남아 있는 듯하다. 안부에서 보면 양옆으로 칼날 같은 암봉 두 개가 서있다. 오른쪽은 북봉, 왼쪽은 남봉이다. 그저 향하고 있는 방위에 따라 이름을 정한 것인데, 멋들어진 자태에 견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다. 황석산의 정상은 왼쪽 남봉이다. 정상을 밟기 위해선 로프가 설치된 암릉을 올라야 한다. 로프를 잡고 공룡의 등껍질 같은 암릉을 오를 땐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정상은 두세 사람이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비좁다. 하지만 굽어보는 풍경만큼은 더없이 넓다. 가까이로는 깎아지른 북봉과 만추에 잠긴 함양 일대, 그리고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줄달음치는 거망산과 기백산, 금원산 등이 한눈에 들어찬다. 멀리 덕유산 자락과 지리산도 아련하다. ●노란 눈폭탄 날리는 운곡리 은행나무 안의면 화림동 계곡은 흔히 ‘8담(潭) 8정(亭)’으로 표현된다. 여덟 개 연못에 여덟 개 정자가 있다는 곳. 깊은 녹음과 한가로운 쉼이 한여름의 매력이었다면 가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화려함이다. 수수한 모시 적삼에서 만추의 비단 옷으로 갈아입은 계곡의 정자들이 화려하고 요염하다. 안의면에서 화림동 계곡을 되짚어 올라가면 운곡리 은행마을에 닿는다. 마을에 들면 정말 깜짝 놀랄 풍경과 맞닥뜨린다. ‘살아 있는 화석’ 은행나무다. 돌담으로 멋을 낸 마을 고샅길 끝자락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데, 작은 시골 마을의 품에서 자란 나무치고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천연기념물 제406호. 이 계절에 운곡리 은행나무는 딱 ‘크레이지 모드’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잎을 떨구는데, 노란 잎들이 꼭 폭설처럼 흩날린다. 어디서고 쉽게 만날 수 없는 장관이다. 그 많은 잎을 떨궜는데도 여전히 가지마다 나뭇잎들이 치열하게 매달려 있다. 300여년 전에 생식 능력을 상실한 고목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어느 모로 봐도 융융한 젊은이의 기상 그대로다. 높이는 38m.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39m)에 이어 국내 두 번째다. 나이는 800년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판에 따르면 운곡리는 돛배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은행나무가 돛의 역할을 하고 있단다. 마을 이름을 ‘은행정’(銀杏亭)으로 바꿀 만큼 주민들의 각별한 굄을 받고 있다. 함양 여행길에 잊지 말고 찾아야 할 곳이 상림이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비밀의 정원이다. 2만여 그루의 수목 사이로 낙엽과 단풍이 어우러지며 절정을 이루고 있다. 글 사진 함양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5)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서상나들목으로 나와 함양·안의 방면으로 우회전, 7㎞쯤 직진한 뒤 거연정휴게소 직전에서 좌회전해 1㎞쯤 올라가면 우전마을이다. 마을 끝자락 사방댐 뒤편에 승용차 3~4대 주차할 공간이 있다. 용추계곡을 들머리 삼을 경우 지곡나들목으로 빠지는 게 낫다. 장갑과 등산 스틱은 필수다. →맛집 한징기(963-9986)는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어탕국수집이다. 6000원. 민물매운탕 2만 5000원부터. →잘 곳 함양군에서 용추자연휴양림을 운영한다. 숲속의 집 4인용(5평)이 3만 5000원. 963-8702. 읍내에선 엘도라도 모텔(963-9889, 9449)이 ‘가격 대비 성능’이 좋다. 3만 5000원.
  • 서호주 카리지니 국립공원 ‘아홉개의 붉은 협곡’

    서호주 카리지니 국립공원 ‘아홉개의 붉은 협곡’

    척박하고 위험한 땅이 되레 아름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극한의 기후와 생존 여건이 빚어낸 극한의 풍경들. 호주의 ‘아웃백’(Out Back)이 그렇습니다. 아웃백의 사전적인 의미는 ‘건조한 내륙부에 사막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넓고 인구가 매우 적은 지역’입니다. 서(西)호주 사람들은 그 풍경을 ‘익스트로더네리’라고 표현합니다. 상식을 넘어서는, 기이한 풍경이라는 뜻이지요. 그 광활한 곳이 인간의 땅임을 설명해 주는 건 실핏줄 같은 길 하나뿐이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길이었지만, 단언컨대 그 길에서 생략해도 좋을 풍경은 없었습니다. 팝업북처럼 책장을 넘기면 같으면서도 다른 풍경들이 튀어 나왔습니다. 우리가 시골이나 고향 등의 단어에서 먹먹한 느낌을 갖듯 호주 사람들도 아웃백에서 여러 감정들이 섞인 풍경을 떠올릴 겁니다. 붉은 암석과 흰 유칼립투스 나무,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들개 ‘딩고’와 수줍은 캥거루가 퍼뜩 떠오르겠지요. 브루스 산(1235m)에서 내려다보는 장쾌한 풍경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거대한 철광석 광산과 수 ㎞에 달하는 화물열차가 평원을 오가는 그런 풍경 말입니다. 아웃백이란 이런 여러 느낌과 풍경들이 씨줄날줄로 얽힌 표현이지 싶습니다. 서호주의 대표적인 아웃백인 필바라 지역에 카리지니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아홉 개의 붉은 협곡이 인상적인 곳입니다. 각 지역을 색깔로 표시한 현지 지도조차 붉은 색으로 칠해 놓은, 척박한 미개척지입니다. 카리지니야 아무 때고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협곡 아래로 내려가 35억년 전의 세계를 맨살로 부대낄 기회는 늘 있지 않습니다. 우기가 시작되면 협곡 사이를 흐르는 물의 양이 많아지고 발 디딜 공간도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우기가 끝나고 여름이 시작된 요즘, 카리지니는 모험을 즐기는 세계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노 폰, 노 인터넷, 노 스트레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아웃백. 사방이 붉다. 철광석이 함유된 토양이 산화되며 생긴 현상이다. 그리고 넓다. 홍두깨로 땅을 두들겨 편평하게 펼쳐 놓은 듯하다. 지평선을 접할 기회가 흔하지 않은 한국인에게 붉은 땅은 그래서 더없이 넓게 느껴진다. 그 땅 위로 드문드문 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방 몇백 리에 크기를 견줄 만한 대상이 없어 나무가 큰 건지 작은 건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서호주 주도(州都) 퍼스에서 두 시간 가까이 날아온 비행기가 붉은 먼지를 휘날리며 내려섰다. 활주로 하나와 간이 건물 하나 달랑 서 있는 황량한 땅, 파라버두 공항이다. 여느 공항처럼 탑승교를 통해 나가는 건 언감생심이다. 트랩에서 내려 곧바로 땅 위를 걸어가야 한다. 햇볕이 어찌나 강한지 모자와 선크림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구운 오징어가 될 판이다. ‘게이트 1’이라 적힌 철문이 유일한 출입구다. 그냥 게이트라고 하면 될 걸 굳이 ‘1’ 자를 붙여 멋을 냈다. 수하물이 자동으로 돌아 나오는 시스템도 당연히 없다. 철망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짐차가 와서 짐을 내려놓는다. 거기가 곧 ‘수하물 찾는 곳’이다. 낯선 풍경에 웃음이 새어 나오고 가슴은 미지의 땅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방망이질을 친다. 호주 원주민을 ‘애버리지니’라 부른다. 그 가운데 서호주 원주민인 눙아(Noongar)족은 일년을 6계절로 나눈다. 계절의 양태가 우리와 달라 4계절로 환치하긴 어렵지만 각 계절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 그들의 생활 습관과 계절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서호주의 봄’은 ‘캄바랑’(Kambarang)이라 불리는 10~11월부터 시작된다. 따뜻하고 건조한 날씨가 시작되고 야생화들이 절정을 이룬다. ‘비락’(Birak)은 12~1월로 ‘첫 번째 여름’이다. 건조하고 뜨거운 계절이다. 아이들에게 사냥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때다. ‘브누루’(Bunuru)는 2~3월이다. ‘두 번째 여름’으로 일년 중 가장 뜨겁다. ‘제란’(Djeran)은 4~5월이다. 슬슬 차가운 계절이 시작된다. 6~7월은 ‘마쿠루’(Makuru)라고 부른다. 비가 가장 많이 오는 계절이자 생식의 계절이다. 영어로는 첫 번째 우기라는 뜻에서 ‘First Rain’이라 쓴다. ‘질바’(Djilba)는 8~9월이다. ‘두 번째 우기’라 불린다. 수태의 계절이다. 종종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이 기록되곤 한다. 그들의 셈법에 따르면 지금은 ‘캄바랑’이다. 아쉽게도 아까시꽃 등 일부를 제외하고 야생화들은 상당수 자취를 감췄다. 그 빈자리는 스피니펙스가 채워준다. 열기가 더해질수록 성장하는 녀석으로 야생화처럼 들녘에 고르게 분포돼 있다. 사초와 닮았으나 가시는 여간 뾰족하지 않다. 스피니펙스 주변엔 유칼립투스 나무가 서 있다. 표피가 흰색이어서 현지인들은 ‘화이트 껌’이라 부른다. 나무는 저 하나가 생명이려니와 다른 생명을 보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유칼립투스 위엔 새가, 아래엔 흰개미가 집을 짓고 살아간다. 비포장길을 달려 얼굴이 붉은 먼지로 뒤덮일 즈음에야 카리지니는 이방인의 발걸음을 허락했다. 별이 총총한 밤, 팝송 제목처럼 그야말로 ‘스타리 스타리 나이트’(Starry starry night)다. 현지 가이드 피트 웨스트는 세 문장으로 카리지니를 설명했다. “노 폰, 노 인터넷, 노 스트레스!”(No Phone, No Internet, No Stress) ●맨발로 부대낀 35억년 전의 세계 카리지니의 외관은 참 독특하다. 너른 평지가 펼쳐지다 느닷없이 아래로 푹 꺼진다. 영화 ‘2012’에서 지각변동으로 갈라진 로스앤젤레스 시가지를 연상하면 알기 쉽다. 각 협곡 위의 전망대에서 보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갈라져 있다. 원주민의 전설대로 왈루(Wahlu)라는 거대한 뱀이 인도양에서 올라와 붉은 땅을 헤집으며 지나간 듯하다. 전체 면적은 약 63만㎢로 우리나라 충북도보다 약간 좁다. 아래서 보면 협곡은 100m에 달할 만큼 높지거니 솟아올랐다. 우사인 볼트라면 채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주파할 거리지만 100m가 주는 위압감은 대단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붉디붉은 협곡의 빛깔이다. 황토처럼 부드러울 것 같은데 만져보면 딱딱한 암석이다. 꼭 키 100m짜리 근육질 붉은 거인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듯하다. 불퉁한 외모와 달리 카리지니는 원주민 말로 ‘만남의 장소’란 뜻을 갖고 있다. 건조하고 뜨거운 협곡 위에 견줘, 유칼립투스가 그늘을 만들고 군데군데 오아시스 같은 폭포와 연못들이 있는 협곡 아래야말로 사람들이 쉬고 모이기에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카리지니 방문객 센터 안내판 등에 따르면 45억년에서 35억년 전 사이 카리지니는 원시 지구의 바다 밑바닥이었다. 그러다 해수면이 급격히 낮아지면서 지상으로 드러났다. 이후 물과 비바람이 깎고 세월이 조탁해 오늘날과 같은 기이한 풍경이 만들어졌다. 시루떡같이 쌓인 협곡 층 사이사이 원시 지구의 정보가 빼곡히 담겨 있는 건 그런 까닭이다. 카리지니 안에는 모두 9개의 크고 작은 협곡이 있다. 해머슬리를 제외하면 핸콕, 조프리, 레드, 데일스, 위노, 녹스 등 사람들이 많이 찾는 협곡들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몰려 있다. 깎아지른 벼랑을 어떻게 내려갈까 싶지만 절묘하게도 협곡마다 내려갈 만한 길이 하나씩은 꼭 있다. 협곡 트레일은 난이도에 따라 1~6단계로 나뉜다. 어느 단계든 조심해야 하지만 5~6단계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각 협곡은 저마다 특징을 갖고 있다. 데일스 협곡은 평이한 난이도에 수채화 같은 유려한 풍경을 갖췄다. 계곡 물이 모여 서큘러 풀과 포테스큐 폭포 등 예쁜 풍경을 만들고 있다. 유칼립투스 나무 위에 조롱박처럼 매달려 낮잠을 자는 박쥐 등 이국적인 풍경과도 조우할 수 있다. 조프리 협곡은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연상케 하는 조프리 폭포가 매력적이다. 붉은 암석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는 녹스 협곡은 장엄미가 단연 돋보인다. 핵심은 핸콕 협곡이다. ‘지구의 중심’을 숨겨둔 곳. KBS 2TV ‘남자의 자격-배낭여행’ 편에 등장하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다른 협곡과 달리 헬멧과 스위밍 수트, 암벽등반을 위한 하네스 등을 갖춰야 할 정도로 험한 편이다. 하지만 꼭 남자뿐이랴. 다소의 모험을 즐길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전할 ‘자격’은 충분하다. 출발은 다른 협곡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전화번호부처럼 촘촘하게 쌓인 암석들을 딛고 내려간 뒤 계곡길을 따라 걷는다. 물에 잠겼거나 미끄러운 부분도 있지만 어려울 건 없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리건 풀 바로 앞까지다. 여기서부터는 장비를 갖춘 참가자(가이드 2명 포함 최대 10명)들만 갈 수 있다. 서로의 몸을 자일로 묶고 하켄 박힌 암벽을 따라 오르내려야 한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까닭에 적잖이 힘도 든다. 그러나 붉은 거인의 심장, ‘지구의 중심’이 멀지 않은데 예서 멈출 사람은 없다. 핸콕 협곡의 마지막 코스인 ‘지구의 중심’은 핸콕과 조프리, 레드, 위노 등 네 협곡이 만나는 곳이다. 당연히 물줄기도 합류돼 큰 호수를 이룬다. 핸콕 협곡의 묘미는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지구의 중심’이 전하는 풍광도 좋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만나는 근육질의 풍경은 그보다 몇 곱절 뛰어나다. 무엇보다 위험한 곳들을 참가자들이 합심해서 건너가는 과정이 정말 짜릿하고 즐겁다. 서호주 관광청이 내세운 슬로건 ‘기이함을 경험하라!’가 설득력을 갖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핸콕 협곡 위의 ‘옥서 전망대’는 반드시 들르길 권한다. 9개 협곡에 조성된 전망대 가운데 가장 도저한 풍광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발 아래 ‘지구의 중심’을 두는 맛이 각별하고, 네 협곡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경이롭다. 옥서 전망대 유칼립투스 나무 아래엔 십자가가 하나 세워져 있다. 핸콕 협곡의 아름다운 연못 ‘리건 풀’의 이름으로 남은 남자, 지미 리건의 묘다. 구조대원으로 자원해 활동하던 그는 2004년 안전장비 없이 협곡 위를 걷던 사람을 구하다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스스로의 안위를 빚졌다는 기분으로 그의 묘에 돌 하나 얹어 놓고 오는 것도 좋겠다. 글 사진 톰 프라이스(호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이것만은 잊지 마세요 ▲싱가포르 항공(www.singaporeair.com)이 매일 3회 싱가포르를 경유해 퍼스까지 오간다. 총비행 시간은 11시간 남짓. 퍼스~파라버두는 국내선, 파라버두~카리지니는 지프 등 차량(약 3시간 소요)을 이용한다. 퍼스~카리지니 약 1600㎞ 거리를 4륜구동 차량으로 이동하는 여행객들도 많다. 운전석이 오른쪽이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서호주정부관광청 한글 사이트(www.westernaustralia.com), 호주정부관광청( www.australia.com) 참조. ▲카리지니 1일 패스는 차량 1대당 11호주달러(약 1만 2000원)다. 1호주달러=약 1150원. ▲하루 종일 따가운 햇살이 내리쬔다. 자외선 차단제, 선글라스, 모자 등을 챙겨 가는 게 좋다. 아울러 협곡마다 노천 풀이 형성돼 있으니 수영복을 준비해 가는 것도 좋겠다. ▲카리지니 국립공원 내 숙박업소는 에코 리트리트가 유일하다. ‘에코 텐트’ 안에 침대, 샤워기가 딸린 화장실 등 기본적인 시설만 설치했다. 취사는 불가. 식사는 사무실 겸 레스토랑에서 해결한다. ▲현지 ‘웨스트 오즈 액티브 어드벤처’(www.westozactive.com) 프로그램으로 핸콕 협곡을 돌아볼 경우 장비 일체가 제공된다. 215달러. 개별 여행자는 레스톡 투어(www.lestoktours.com.au/karijinipark)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퍼스 시내 국제선과 국내선은 터미널이 떨어져 있다. 오전 4시부터 50분 간격으로 셔틀 버스가 양 터미널을 오간다. 택시 요금은 25달러가량. ▲콘센트 형태가 일자형 세 개다. 별도 어댑터를 가져가야 한다. ▲퍼스 시내 팬 퍼시픽 호텔은 스완강에 인접해 있는 데다 시내 접근성이 좋다. 자전거를 빌릴 수도 있다. 1시간 6달러. ▲퍼스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프리맨틀이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맛집, 시장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애버리지니 문화센터에서는 풍속화와 민속악기 디저리두 등을 배울 수 있다. ▲워너투어(www.wannatour.com, 02-3477-7555)와 코코스여행사(02-318-1998) 등에서 서호주 아웃백 여행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 [新 개인정보 보호시대] (1) 30일 시행 관련법 내용

    하루가 멀다 하고 개인정보 유출 소식이 잇따른다. 대기업, 공공기관 등에서 카드사, 포털사이트, 여권발급기 관련업체 등 민·관·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안전지대가 없다. 수천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신상정보가 불특정 공간을 떠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 속에 벌거벗은 느낌으로 산다. 이런 가운데 오는 30일부터 개인의 권익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개인정보보호법이 전면 시행된다. 세 차례에 걸쳐 법 시행을 통해 바뀌는 내용과 개인과 사업자들의 피해 예방 및 구제 방법을 꼼꼼히 따져 본다. #사례1 국민건강보험공단, 경찰청, 국민연금공단, 근로복지공단은 물론 개인정보보호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까지 포함한 10개 주요 공공기관에서 갖고 있는 40억여건의 개인정보 중 7억 900만건이 보유 기간을 넘겼음에도 파기되지 않고 있었다. 개인정보 보호 불감증에 민관이 예외가 없음을 보여준다. #사례2 출출한 밤, 야식이 생각났다. 동네 ‘꼬꼬댁 치킨’에 전화를 걸었다. 지난주에 처음 시켜봤는데 맛이 꽤 좋았던 기억이 났다.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주세요. 생맥주 2000㏄도요.” “네, 알겠습니다. ××아파트 ×동 ××호로 총알같이 쏘겠습니다.” 20분 뒤 버젓이 현금영수증까지 만들어 왔다. 개인정보를 저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는데 어떻게 이미 알고 있지? 불법 아냐? 야식을 먹는 내내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기업들 ‘민감정보’ 수집 원천금지 오는 30일부터 개인정보보호법이 전면 시행된다. 그동안 공공기관 개인정보법, 정보통신망이용촉진법, 신용정보이용법, 의료법 등 특정 대상별로 나누어져 있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들이 하나로 모아지게 된다. 대기업, 공공기관은 물론 동창회, 부동산중개소, 비디오대여점, 치킨집, 피자집 등 업무를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350만 사업자가 적용대상이다. ●위반땐 5000만원이하 과태료 위에서 예로 든 ‘사례2’의 경우 현행 법으로는 규제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개인정보보호법이 시행되면 반드시 법에 따라 이용 목적과 이용 기간 등을 자세히 알려준 뒤 동의를 받고 개인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위반하면 5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사례1’은 현재 공공기관 개인정보법이 있지만 과태료 등 처벌 조항은 없었다. 오는 30일 이후에는 보유 기간이 지났는데도 개인정보를 파기하지 않을 경우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동안 기업들은 관행적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해 온갖 개인 정보를 수집했으며 동의하지 않을 경우 가입이 불가능한 일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주민등록번호, 여권번호 등 ‘고유식별 정보’와 사상·신념, 건강, 성생활 등 ‘민감정보’는 원칙적으로 처리가 금지된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 정보주체의 별도 동의를 받아야 한다. CCTV 설치 또한 마찬가지다. 목욕탕, 화장실 등은 당연히 안 된다. 커피점 등에서 직원의 근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설치할 수 없다. 공개된 장소에 설치할 수 있는 경우는 범죄예방, 시설안전, 화재예방을 위해 필요한 경우로 국한된다. 또 이 경우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으로 CCTV를 설치한다는 안내판을 두어야 한다. 안내판 미설치 시 10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권헌영 광운대 과학기술법학과 교수는 “개인 입장에서는 신상정보를 더욱 보호받고 구제 절차가 더 구체화돼서 좋지만 자칫 영세사업자를 비롯한 기업 입장에서 늘어난 비용이 개인들에게 다시 전가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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