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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고통의 기억, 치유의 정치/김종면 수석논설위원

    [서울광장] 고통의 기억, 치유의 정치/김종면 수석논설위원

    2012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단연 국민통합이다. 모두가 하나가 되는 화합과 상생의 대동사회를 열어가라는 것이다.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논쟁도 결국은 양극화에 찌든 우리 사회를 하나로 보듬으려는 몸부림이다. 그러나 인간은 배고픈 소크라테스로만 살 수 없듯 배부른 돼지로만도 살 수 없다. 사실 진정한 국민통합을 위해서는 밥 문제에 앞서 정신의 허기부터 해결하는 게 순서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의 ‘과거와의 화해’ 행보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박 후보는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 지난 악연을 뒤로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해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전태일재단 방문은 쌍용차 노동자 등의 반발로 무산됐다. 산업화시대 노동 탄압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불쑥 간 것 자체가 어쩌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일이었는지 모른다. ‘유신’으로 상징되는 현대사의 상처는 피해자들에게는 영원한 트라우마다. 국민통합이 시시포스의 바위 굴리기만큼이나 고달픈 일이라 해도 멈춰서는 안 된다. 문제는 다시 역사인식이다. 박 후보는 그제 라디오 시사프로에 출연해 유신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기존 입장 그대로다. 새누리당이 삼고초려해 영입한 안대희 정치쇄신특위 위원장조차 유신과 관련,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법관 시절에 ‘긴급조치가 위헌이다’는 판결을 한 바가 있다는 것”이라고 공언한 마당이다. 그럼에도 박 후보의 과거사 인식은 요지부동이니 보편적 상식을 지닌 국민으로서는 그가 내미는 손을 선뜻 잡기 어렵다. 유신은 40년이 됐지만 지금도 여전히 만만찮은 후과를 수습해야 하는 현안이다. 지난 역사의 얼룩으로 말미암아 통합의 사각지대가 생긴다면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박 후보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역사 청맹과니’들부터 좀 정리했으면 좋겠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다. 국민은 측근에게서 후보를 본다. 심심찮게 구설에 오르는 홍사덕 전 의원의 말이 가관이다. 그는 유신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력 연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전태일재단 방문이 무산된 바로 다음 날, 그렇잖아도 박 후보의 파격적인 통합 발걸음이 진정성을 의심받는 판에 그게 할 소리인가. 유신은 국가를 사유화하고 권력을 인격화했다. 그 결과 헌정이 결딴났다. 아무리 과를 떠나 공을 인정한다 해도 결코 미화의 대상은 될 수 없다. 박 후보 둥지에는 ‘침묵의 나선’이 흐르나 보다. 쓴소리도 곧은 소리도 듣기 힘들다.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며 때로는 그보다 더 강경하게 ‘충성 처신’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정치판의 생리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염우염치는 있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개념’ 발언에 ‘그 입 다물라.’고 한마디만 했어도 박 후보의 박제된 이미지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유신 저항의 상징인 김지하 시인까지 ‘접촉 대상’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국민통합을 무슨 기획상품 찍어내는 것쯤으로 여긴다면 그건 코미디다. 억지춘향식 파격의 연출은 감동이 아니라 진정성을 갉아먹는 바이러스다. 다급할수록 평상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과오에 대한 반성 없는 ‘100% 대한민국’ 구호는 공허하다. 가짜 희망이다. 그런 정신적 인프라로 통합행보에 나서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차라리 통합의 좌판을 거두는 편이 낫다. 역사에 비약은 없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역사라고 해서 건너뛸 수 없다. 유신의 망령을 빨리 털어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이웃이 철지난 ‘유신병’을 앓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유신을 버려야 박 후보도 살고 국민도 산다. 박 후보가 대통령의 딸이 아니어도 유신에 대해 똑같은 평가를 내릴까. 박 전 대통령을 오로지 전직 대통령으로서만 대상화해 보면 된다. 망각에도 윤리가 있다. 피어린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라. 더 낮은 곳에서 더 열린 자세로 미래를 위한 치유의 정치를 펴나가기 바란다. jmkim@seoul.co.kr
  • 與 “반인륜적 범죄자 사형집행 고려해야” 野 “사형논의·불심검문 부활은 시대역행”

    與 “반인륜적 범죄자 사형집행 고려해야” 野 “사형논의·불심검문 부활은 시대역행”

    여야는 6일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사형제도 존폐와 공천헌금을 둘러싼 검찰 수사에 대해 뜨거운 설전을 이어갔다. 늘어나는 아동 성폭력에 대해서는 정부 대책을 촉구했다. 김황식 총리와 설훈 민주통합당 의원의 ‘유신 악연’도 관심을 모았다.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은 최근 잇따르는 사형제도 존폐 논란과 관련, “반인륜적 패륜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집행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권재진 법무부 장관을 향해 “솜방망이 처벌도 원인이 아니냐.”고 묻자, 권 장관은 “행위에 따르는 엄정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박범계 민주통합당 의원은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의 사형 집행 재개에 대한 섣부른 검토와 불심검문 부활은 시대에 역행하는 방침”이라면서 “유신 시절 인혁당의 법정 살인에서 보듯 사형제는 억울한 죽음을 낳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실이 본인을 비롯한 법사위원들의 출입국 기록을 조회했다.”며 불법 사찰 의혹을 제기한 것과 관련, 권 장관은 “출입국 기록을 볼 수 있는 기관들은 여러 군데가 있다.”며 “심지어 은행연합회 같은 데도 볼 수가 있는데, 아마 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확한 조회의 주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김황식 국무총리는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 출석해 대통령 사저 부지매입 의혹 특검법과 관련 “법률이 정부에 이송되면 통상 절차에 따라 법제처가 관계 부처의 의견을 듣고 국무회의에서 논의해야 하므로 현재 정부의 입장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최재천 민주당 의원은 대정부 질문에서 이명박 정부의 장관 정책보좌관들이 ‘묵우회’라는 비밀 조직을 운영했으며, 2010년 6·2 지방선거를 통제하려 했다는 정치공작 의혹과 함께 3개의 녹음 파일을 폭로했다. 최 의원은 “10개 행정부처 정책보좌관들의 비밀조직인 묵우회는 매주 수요일 청와대 연풍관 2층 회의실에 모여 대통령의 정무적 관심사를 논의했다.”면서 “당시 청와대 정모 비서관이 총책임자, 선임행정관 김모씨가 실무 책임자였다.”고 말했다. 이날 대정부 질문 두 번째 질의자로 나선 설훈 의원과 김 총리의 악연도 관심을 끌었다. 설 의원은 1977년 5월 유신헌법 철폐 시위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2년 6개월을 복역했다. 김 총리는 당시 배석 판사였다. 이들은 35년 만에 공개 석상에서 재회한 것이다. 설 의원은 “법치주의를 무너뜨린 유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라고 묻었고, 김 총리는 “유신 헌법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본다.”고 답했다. 이어 설 의원은 “유신 관계자들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면서 “법적인 책임을 그냥 두더라도 사회적·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총리는 “유신 체제하에서 고통받은 분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설 의원은 또 유신 시절에 ‘퍼스트 레이디’ 대행을 했던 박근혜 후보를 겨냥해 “유신을 적극 옹호한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것 아니냐.”며 김 총리의 동의를 요구했다. 하지만 김 총리는 “박 후보는 당시 육영수 여사가 작고하신 상태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따님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지 직접 정치에 관여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설 의원은 “(박 후보가 사과하는 것이) 상식이 아니겠나, (김 총리는)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며 수차례 몰아세웠다. 김경두·황비웅기자 golders@seoul.co.kr
  • 한나라 ‘차떼기 검사’ 새누리 캠프로… “朴 가족도 예외없다”

    한나라 ‘차떼기 검사’ 새누리 캠프로… “朴 가족도 예외없다”

    새누리당이 전신인 한나라당과 악연이 있는 안대희 전 대법관을 영입했다. 새누리당은 27일 옛 한나라당에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을 씌웠던 안 전 대법관을 부정부패와 측근 비리를 막을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박근혜 후보는 안 전 대법관을 직접 찾아가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법관에서 물러난 지 2개월도 안 된 인사가 특정 대선 후보 캠프에 합류한 것을 두고 논란과 비판이 일고 있다. 안 전 대법관과 새누리당의 악연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대검 중수부장으로서 불법 대선 자금을 수사해 당시 한나라당이 국내 주요 그룹으로부터 수백억원을 차떼기로 받았다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안 전 대법관은 부정부패의 해결사로서 국민적인 호응을 얻었다. 반면 한나라당은 차떼기 정당으로 몰리며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안 전 대법관은 이날 오후 새누리당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싫어하는 것을 없애는 게 (정치 개혁의) 기본”이라면서 “선거 부정과 반복되는 측근 권력 비리와 관련해 박 후보 측근도 문제가 있으면 보고하고 개선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법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때 의미가 있다.”며 “박 후보의 가족을 제외한다면 이 자리에 있을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안 전 대법관이 박 후보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정치 개혁의 시발점에 서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하지만 안 전 대법관의 여의도행(行)은 인선 발표 직후부터 도마에 올랐다. 대한변협 최진영 대변인은 “그렇게 바로 (정치권으로) 가실 줄은 몰랐다. 깜짝 놀랐다.”면서 “개인적으로 법조인으로서 안 전 대법관의 행동은 무리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인 박영선 민주통합당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대법관의 위상, 정치적 중립, 권위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지. 만약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이라고 반문했다. 안 전 대법관은 정통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2006년 검찰 몫 대법원장에 임명돼 지난 7월 10일 6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당초 안 전 대법관은 다음 달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연수를 하기로 일정이 짜여 있었다. 박 후보는 안 전 대법관의 발길을 돌리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다고 한다. 안 전 대법관은 기자회견에서 “오늘(27일) 점심 때도 친구들과의 송별 모임이 계획됐다.”면서 “하지만 지난달 말 경선 과정에서 박 후보를 만났고 최근에 다시 만나 나라를 사랑하는 진정성과 믿음을 확인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깨끗한 나라를 만드는 데 동의해 위원장직을 수락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후보를 통한 제의는 (박 후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안 전 대법관은 정치쇄신특위 위원으로 ‘강골 검사’로 알려진 남기춘 전 서울 서부지검장을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대 서울지검 강력부장 출신으로 대검 중수부 근무 당시 안 전 대법관의 총애를 받은 남 전 지검장은 지난해 1월 한화·태광 그룹 비자금 사건을 지휘하다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김경두·김효섭·최지숙기자 golders@seoul.co.kr
  • 강병규, 이병헌 열애한다니까 한다는 말이

    강병규, 이병헌 열애한다니까 한다는 말이

     야구선수 출신 방송인 강병규씨가 19일 열애설을 밝힌 배우 이병헌씨와 이민정씨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강씨는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 “트친님들 이변태 얘기해 달라고 조르지 마셔요. 저 지금 전화기 때문에 심적 고통이 많답니다. 이변태가 분명 사귀지 않는다고 했었죠? 또 심경 글을 썼다구요? 아마, 조만간 임신 소식이 들릴 겁니다.”란 글을 올렸다.  그는 또 “도대체 그XX는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추억이 몇개야? 도대체 함께 누구랑 뭘하고 싶은 거야? 그X은? 누구야?ㅋㅋㅋ”라고 덧붙였다. 이어 “이변태는 인터넷을 못해. 자필 글씨로만 소중하다고.”라고 비아냥거렸다.  강씨는 지난 16일에도 두 사람의 스캔들이 보도되자 자신의 트위터에 ‘정태원&수애, 이병헌&이민정... X놈들은 참…, 여자들도 참…”이란 짧은 글을 올렸었다.  강씨와 이씨와의 악연은 니난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과 KBS2 드라마 ‘아이리스’ 제작자 정태원 대표는 촬영장에서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지난해 8월까지 법정 다툼까지 벌였다. 이후 강씨는 SNS를 통해 여러차례 이씨를 공개 비난해왔다. 한편 이병헌씨와 이민정씨는 19일 각자의 홈페이지에 시중 떠돌던 열애설을 인정하는 글을 올렸다. .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한국 음악의 거장들’ 펴낸 서울대 한국학연구원 송지원

    [저자와 차 한 잔] ‘한국 음악의 거장들’ 펴낸 서울대 한국학연구원 송지원

    오선지에 익숙하다. 음악가 이름을 대라면 모차르트와 베토벤, 바흐 등 서양음악 작곡가가 튀어나올 것이다. ‘한국 음악의 거장들-그 천년의 소리를 듣다’(태학사 펴냄)는 이와 다른 우리 음악이 있음을 보여 준다. ●국악 이야기 쉽게 풀어내 “산책을 하듯 썼어요. 산책을 하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어느 날 안 보이던 것을 발견할 때도 있잖아요. 국악연구는 그런 경험과도 같아요. ” 지난 1일 서울 태평로 서울신문 본사에서 만난 송지원(53)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은 책에 차곡차곡 담은 음악가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음악가를 빠끔히 들여다보다가 그들에게 인생역정을 듣는 듯 몰두하게 됐다고 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런 내 이야기를 해 줘’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면서 살포시 웃었다. ‘한국 음악의 거장들’은 2009년에 출간한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고’의 확장판이다. ‘마음은 입을 잊고’에는 세손 시절부터 악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정조와 절대음감의 소유자 세조, ‘악학궤범’을 남긴 성현, 해금 명인 유우춘, 여성 음악가 계섬과 석개, ‘오디오형 가수’ 남학 등 음악가 28명을 담았다. 이번 책은 여기에 24명을 덧댔다. 저자는 “군주나 사대부 출신은 기록이 많지만 대다수 인물들은 고서에 한두 줄 정도 흔적만 있다. 그런 기록들을 모아 음악학적으로 해석하고 당시 사회상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해 풀었다.”고 설명했다. 책은 새로 추가한 조선 후기의 문인 오희상으로 시작한다. 거문고 연주를 “삿된 마음을 금하고 자신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여긴 인물이다. 거문고를 탈 때는 안정된 자세와 고정된 시선, 한가로운 생각, 맑은 정신, 견고한 지법을 유지하는 오능(五能)을 강조했다. 거문고를 연주하지 말아야 할 조건(오불탄·五不彈)도 지켰다. 그가 연주를 마칠 즈음이면 “고니가 조용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했고, 고요하고 한가로워” 사람이 절로 빠져들었다고 전해진다. 손가락 끝이 아닌,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음악을 한다고 평가받은 오희상은 송 연구원이 우리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 “선비들은 학문을 닦다가 마음이 답답하면 거문고를 타면서 어지러운 생각을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음악을 생활의 일부, 삶의 포괄적 개념으로 본 풍류가 있었죠.” ●거문고 연주에 고니 날고 노랫소리에 학 춤춰 학이 움찔움찔 춤추고 싶도록 노래한 가객도 있다. 김수장의 ‘해동가요’에 열거된 명창 56인에 속한 김중열(숙종~영조 대)이다. 거문고 실력도 “덤불 속의 난초, 까마귀와 까치 속 봉황새”라고 칭찬받을 만큼 출중했던 그는 18세기 가객으로 활약했다. “궁상각치우를/ 주줄이 잡혔으니/ 창밖에 엿듣는 학이/ 우줄우줄하더라.”는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장가 먼저 들고 가야금을 배워라.” 하던 스승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평생을 홀로 산 가야금 명인 민득량이 있는가 하면, 젊은 시절 인기를 누리며 아내를 멀리했다가 “늘그막에 비로소 짝이 있는 즐거움을 알았노라.”고 노래한 거문고 거장 이원영도 있다. 정간보 창안이나 편경 제작법을 이룬 세종부터 소현세자를 따라 망국의 한을 안고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사람 굴저까지 신분과 성별을 초월해 우리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을 줄줄이 만날 수 있다. 석사까지 서양음악을 전공했지만 저자는 서울대 음대에서 한국음악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양 음악과 문학을 폭넓게 넘나드는 이유다. 산책하듯 연구했다더니, 산책길의 수다처럼 책도 재미있다. “1990년대에 KBS 국악 프로그램에서 대본을 쓰고 진행하기도 했다.”는 그의 이력을 듣고 나니 과연 그 ‘글솜씨’를 제대로 녹였구나 싶다. “우리는 서양음악을 많이 알고 있지만 국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요. 우리 음악을 만들고 발전시킨 음악인을 계속 발굴하고 흥미롭게 풀어내면 우리 문화를 보는 시선도 자연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가 우리 음악인들과 함께하는 산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이다. 글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로블레스·류샹 110m 허들 잔혹사

    다이론 로블레스(26·쿠바)와 류샹(29·중국)은 지난 수년간 110m 허들 세계기록을 번갈아 갈아치운 세기의 라이벌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세계기록 타이인 12초91로 금메달을 목에 건 류샹은 2006년 12초88의 세계기록을 세웠다. 2007년 오사카세계선수권 금메달도 류상의 차지. 이후 로블레스의 반격이 시작됐다. 2008년 12초87을 기록, 류샹의 세계기록을 0.01초 앞당겼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류샹이 아킬레스건 부상 때문에 출전을 포기하자 로블레스가 금메달을 채갔다. 2008년 이후 류샹은 재활 탓에, 로블레스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려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육상팬들이 런던올림픽에서 둘의 벼랑끝 승부를 기대한 까닭이다. 하지만 둘은 같은 운명을 타고난 걸까. 지난 7일(현지시간) 110m 허들 예선에서 류샹이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쓰러지더니. 8일 런던 올림픽스타디움에서 끝난 결승에서는 5번 레인에서 뛰던 로블레스가 6번째 허들을 넘는 순간 왼쪽 허벅지를 붙잡고 레이스를 포기했다. 심판진은 로블레스가 고의로 허들을 넘어뜨렸다고 판단, 국제육상경기연맹 규정에 따라 실격 처리했다. 로블레스는 지난해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가장 먼저 결승선을 밟았지만, 비디오 판독 결과 옆 레인에 있던 류샹의 왼팔을 잡아끈 것으로 드러나 실격을 당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황색 탄환 또 불발… 류샹, 110m 허들 예선 탈락

    ‘아시아 육상의 희망’ 류샹(29·중국)이 4년 만에 또다시 올림픽 불운에 고개를 떨궜다. 류샹은 7일 런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육상 남자 110m 허들 예선 6조에 출전했으나 첫 허들에 걸려 넘어졌다. 8년 만에 정상을 노리던 꿈도 산산이 부서졌다. 4번 레인을 출발한 류샹은 첫 허들에 걸려 넘어진 뒤 오른발을 쓰다듬었다. 다른 주자들이 레이스를 마치는 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힘겹게 일어선 류샹은 실의에 빠진 표정으로 왼발만을 이용해 경기장 옆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올림픽 도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완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었고 8만여 관중은 기립박수로 그를 위로했다. 류샹의 올림픽 악연은 예고된 일이었다. 대회 개막을 2주 앞두고 독일 전지훈련 도중 고질적인 오른발 부상이 도졌다. 실제로 류샹은 이날 경기장에 오른발에 테이핑을 한 채 들어와 발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줬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이 종목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레이스를 펼쳐 보지도 못한 채 물러났다. 지난해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선 옆에서 달리던 라이벌이자 세계기록(12초87) 보유자인 다이슨 로블레스(쿠바)의 팔에 부딪혀 속도가 떨어져 세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나중에 로블레스가 실격 처리되면서 2위를 차지했다. 이날 예선 4조에서 뛴 로블레스는 13초33으로 1위를 차지, 준결선에 진출했다. 애리스 메리트(이상 미국)는 출전선수 중 가장 빠른 13초07로 준결선에 올랐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동국대 故박영석 도전정신 기린다

    지난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고(故) 박영석 대장의 도전 정신을 가르치는 강의가 개설된다. 동국대는 동문인 박 대장의 삶과 도전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올 2학기부터 ‘산악인 박영석의 탐험과 도전’이라는 교양강좌를 개설한다고 5일 밝혔다. 강좌 내용은 산악 탐험의 정의와 역사, 인류의 주요 탐험 업적, 박 대장이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과정 등으로 구성된다. 남산과 북한산, 설악산 등지에서 실제 산행을 통해 안전수칙, 비상사태 대처법과 장비사용법 등 등반의 기초를 배우는 현장교육도 병행한다. 박 대장의 대학시절 산악부 동기인 김진성 박영석탐험문화재단 상임이사가 책임 교수를 맡고 이인정 대학산악연맹 회장, 배경미 아시아산악연맹 사무총장, 허영만 화백 등 평소 그와 가까웠던 지인들이 강의에 참여할 예정이다. 김진성 상임이사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히말라야와 세계 오지에 끝없이 도전한 박 대장의 정신이 젊은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줘 자신과의 싸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새누리 경선 일정 정상화] 파문 주역 4人의 인연과 악연

    새누리당 현영희(61) 의원의 공천헌금 의혹 사건을 제보한 정동근(37)씨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현 의원 남편의 소개로 현 의원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 의원의 남편인 임수복(65) 강림 CSP 회장은 평소 다니던 치과의 원장으로부터 “똑똑하고 성실한 젊은 친구가 있으니 써 보라.”는 권유를 받고 정씨를 부인의 운전기사 겸 수행비서로 고용했다는 것이다. 경남 밀양 출신인 현 의원 부부가 호남 출신인 정씨를 최측근에 둔 것을 두고 당시 주변에서는 의외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군사교육단(ROTC) 출신인 정씨는 꼼꼼하고 빈틈없는 일 처리로 현 의원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순탄하던 이들의 관계는 현 의원이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되면서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정씨가 국회에 입성한 현 의원에게 4급 보좌관을 강하게 요구했으나 현 의원이 너무 젊고, 정치 보좌 경력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두 사람의 관계가 급격히 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공천헌금 의혹 사건의 등장인물 4명 중 나머지 2명인 조기문(48) 전 새누리당 부산시당 홍보위원장과 현기환(53) 전 의원의 관계 또한 애증으로 얼룩져 있다. 정씨가 공천헌금 3억원을 현 의원한테 받아 조씨에게 전달했고, 조씨는 이 돈을 친박계 핵심인 현 전 의원에게 건넸다는 것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다. 그러나 조씨와 현 의원의 관계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지역 정가의 분위기다. 조씨는 안상영 전 부산시장 정책특보로 활동하던 현 전 의원과 대학동문(연세대)임을 내세워 가까워졌으나 조씨가 출신 대학을 속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둘의 관계가 단절됐다는 것이다. 조씨도 현 전 의원을 18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5·16 세력 ‘얼굴마담’ 장도영씨 영욕의 삶 마치다

    5·16 세력 ‘얼굴마담’ 장도영씨 영욕의 삶 마치다

    1961년 5·16 쿠데타 때 군부 세력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옹립됐다가 미국으로 쫓겨난 장도영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 3일 밤(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89세. 장 전 장관은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으며 휠체어가 아니면 거동을 못하고 대화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한때 5·16 주체 세력의 ‘얼굴마담’ 노릇을 해야 했던 고인의 생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악연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장 전 장관은 1923년 1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마친후 1944년 일본 도요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에서 일본군 소위로 활동하였으나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뒤 신의주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양성에 주력했다. 이후 월남한 고인은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였으며 같은 해 3월 졸업과 함께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해 본격적인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6·25전쟁에 참여한 고인은 육군 9사단장, 2군단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되는 등 거칠 것 없는 경력을 쌓아왔다. 1961년 5월, 장 전 장관의 인생에 전환점이자 몰락의 서곡인 5·16 쿠데타가 발발하자 그는 박정희 소장 등 ‘군사 혁명세력’에 의해 최고의 권한을 가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으로 옹립된다. 민주당 정권 아래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고인은 당시 쿠데타가 발생하자 모호한 태도를 보여 사실상 쿠데타가 성공하도록 도왔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고인은 2001년 펴낸 회고록 ‘망향’에서 “쿠데타 세력의 음모를 사건 발생 하루 전에야 파악했을 정도였고 방첩대의 거짓보고로 사전에 대비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쿠데타 세력에 둘러싸여 실권이 없던 고인은 1961년 7월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의장직에서 해임되고 8월에는 중장으로 군에서 강제 예편당했다. 이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고 1963년 3월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 형집행 정지로 풀려난 후 정권의 강요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고인은 이에 대해 회고록에서 “조속히 민정으로 돌아가자는 나의 방침에 반발한 쿠데타 주체세력이 장기집권을 획책해 반혁명 사건이라는 터무니없는 드라마를 연출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국내 언론과 접촉을 끊은 지 13년 만에 가진 지난해 5월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등에 대해) 서운한 마음은 없다.”고 말했다. 5·16 당시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쿠데타를 저지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서는 “다 넘어갔어. 어떻게 할 수 없었어.”라고만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먼 산만 바라봤다. <서울신문 2011년 6월 2일자 1면> 알츠하이머병으로 기억을 거의 다 잃은 고인이 어눌한 발음으로 힘겹게 세상에 던진 마지막 말들이었다. 고인은 도미 이후 1969년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1993년까지 위스콘신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은퇴 후에는 부인 백형숙(83)씨와 함께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근처 윈더미어에 거주해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백씨와 아들 효수(재미 개인사업)·경수(의사)·진수(개인사업)·완수(의사)씨와 딸 윤화(미 아이오와대 의대 교수)씨 등 4남 1녀. 장례식은 오는 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족장으로 열릴 예정이다. 국내 연락처는 (02)798-3155, 011-264-2524.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서울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붕대 투혼’ 유도 황희태 3·4위전서 절반패… 아쉬운 5위

    ‘붕대 투혼’ 유도 황희태 3·4위전서 절반패… 아쉬운 5위

    2일 런던의 엑셀 런던 노스아레나에서 열린 런던올림픽 남자유도 100㎏급 3·4위전. 32강전에서 상대와 머리를 부딪쳐 붕대를 칭칭 감았지만 계속 피가 배어났다. 한국 유도팀의 맏형 황희태(34·수원시청)는 상처입은 황소처럼 거친 숨을 내뿜었다. 자신보다 15㎝나 크고, 7살 어린 헨크 그롤(네덜란드·2위)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과감하게 선제공격을 시도했지만, 그롤에게 되치기를 당하며 절반패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올림픽 도전은 5위로 끝났다. 투기 종목인 유도, 그중에서도 100㎏급이란 점을 떠올리면 서른넷이란 운동선수로는 환갑을 넘긴 지 오래. 그래도 ‘황소’ ‘탱크’ 등 별명에서 짐작하듯 힘과 투지에 관한 한 태릉선수촌을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럽다. 훈련량 또한 조카뻘 후배들 못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올림픽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최전성기를 경험했다. 2003년 세계선수권을 우승하는 등 90㎏급 최강자로 군림했다. 당연히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금메달 0순위로 꼽혔지만, 준결승에서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이즈미 히로시(일본)에게 종료 10여초를 남기고 업어치기 절반을 내줘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충격이 컸던 탓일까. “은퇴를 결심했다. 군대도 공익으로 다녀와서 인생을 새로 시작하려고 했다.”고 황희태는 당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전만배 상무 감독의 설득으로 황희태는 다시 도복 끈을 졸라맸다. 이후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 같은 해 대한유도회 최우수선수로 뽑히는 등 부활을 알렸다. 물론 불운과의 악연은 쉽사리 끊기지 않았다. 2008년 5월 베이징올림픽 최종선발전에서 선배 최선호에게 무릎을 꿇었다. 올림픽만 보고 4년을 내달려온 그는 유도복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을 터. 그 무렵 일본 종합격투기 센고쿠((?極)가 러브콜을 보냈다. 앞서 윤동식(40), 김민수(37), 정부경(34) 등 유도계 선배·동료가 이미 일본 종합격투기에 진출했던 상황. 그러나 황희태는 매트로 돌아왔다. 설득에 일가견이 있는 정훈 대표팀 감독의 집요한 권유로 100㎏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그의 나이 서른하나 때다. 100㎏급 선수치곤 ‘꼬마’나 다름없는 175㎝의 키를 강점으로 만들었다. 한 뼘쯤 큰 상대를 빠르게 파고들어 괴력의 업어치기로 넘겼다. 단조로운 기술이지만, 알고도 당하는 필살기가 됐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자신감을 회복한 황희태는 파리 그랜드슬램, 중국·독일그랑프리 등을 징검다리 삼아 런던까지 왔다. 앞서 정경미(27·하이원)도 오가타 아카리(일본)와의 여자 78㎏급 1회전에서 유효패해 탈락했다. 런던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푸른 눈’ 원로 국악학자 해의만의 국악사랑 50년

    [김문이 만난사람] ‘푸른 눈’ 원로 국악학자 해의만의 국악사랑 50년

    쇼팽과 바흐, 베토벤 등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양과 품격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외국인이 우리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부르는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대부분 의아해하거나 놀라워할 것이다. 특히 한평생 직업으로 여기며 살아간다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해의만(81·본명 알렉 헤이먼)씨는 29살 때부터 한국에서 우리의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익히며 연구해 온 보기 드문 원로 국악학자이다. 193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53년 위생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 강원도 양구에서 근무할 당시 국악과 처음 접한 것이 인연이 돼 우리의 전통음악에 푹 빠져 살아오고 있다. 국악 연구는 물론 가야금, 단가, 민속장고와 북, 거문고, 태평소, 설장고 등 우리의 전통악기를 대부분 아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그동안 뉴욕과 파리 등에서 ‘삼천리 나라 무용’, ‘한국 판소리 해설’, ‘한국 민속음악과 무용’, ‘한국음악, 음악대사전’ 등을 직접 펴냈으며 ‘한국 무가’, ‘한국 무속’, ‘한국 가면극’, ‘한국 민속무용 해설’, ‘한국 전통무용과 탈춤’, ‘한국 전통악기’ 등 수십 권을 영문 번역해 해외에 알리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지난해 4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또 한국외국어대학과 국민대, 한세대 등에서 학생들에게 영어와 전통음악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 아들과 딸을 두었으며 ‘서울 해씨’의 시조가 됐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음악에 빠진 그를 지난달 27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 자택에서 만났다. 부인이 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에어컨이 고장나서 좀 더울 텐데….”라고 친절하게 맞이한다. 해씨도 “어서 와요.”라고 말한다. 몸이 약간 불편했던지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옆에 놓인 가야금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악기를 다루는지 먼저 물었더니 가야금은 홍원기 선생, 민속장고와 북은 지영희 선생,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 선생, 태평소는 최인서 선생 등에게 배웠다는 대답이 나지막이 돌아온다. 그는 요즘 외부 활동을 거의 안 하고 있다. 대신 집에서 전화로 영어를 가르치면서 국악자료를 번역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몸이 불편해 부인이 항상 옆에서 도와 주고 있다. 가끔 제자들이 찾아와 목욕탕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다. 부인한테 이런 얘기를 잠깐 들으며 거실 벽에 세워진 한문 글씨의 병풍을 바라봤다. 글씨 끝 부분에 그의 이름 ‘해의만’(海義滿)이라고 적혀 있었다. 성씨를 왜 바다 해(海)라고 했을까. “원래는 내가 좀 더 일찍 (한국에)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1950년대 말) 민간인 신분이라 입국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좀 기다렸다가 입국허가가 풀리는 1960년에 한국행 배를 탔습니다. 일본을 거쳐 왔지요. 그때 배 안에서 선교사를 만났는데 한국식 이름을 지어 주더군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뜻의 바다 해(海)와 옳은 일로 가득 차라고 해서 의만(義滿)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양(서울) 해씨의 시조가 됐지요(웃음).” 슬하에 자녀가 있으니 서울 해씨가 새로운 성씨로 대대손손 쭉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해서 그가 국악을 좋아하게 된 사연을 듣기로 했다. “강원도에 있는 야전병원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중국군과 북한군 빨치산들이 산속에 있었는데 새벽 2~3시만 되면 북, 태평소, 징,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잠을 못 자 아주 싫어했지만 저는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소리가 있었어요. 다른 군인한테 물어봤더니 태평소 소리라고 하더군요.” 정전협정 이듬해인 1954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뉴욕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서 들었던 국악 소리를 늘 잊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인 유학생을 만났다. 궁금했던 차에 한국음악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됐다. 한국에는 5000년 역사를 간직한 전통악기가 많을 뿐 아니라 다양한 국악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른바 ‘필이 꽂혔다’라는 말처럼 무작정 한국 전통음악을 배워 보겠다는 생각에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때 수소문해서 인사동 근처에 있는 한국국악예술학교에 무작정 찾아갔지요. 교장 선생님한테 ‘전통음악을 배우고 싶다. 공부하게 해주면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께서 흔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에 오선보 사용법도 동시에 가르쳤습니다. 그때 여류 명창 박녹주 선생 등 훌륭하신 분들과 만나게 되면서 국악을 열심히 배웠지요.” 이와 동시에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펴낸 교재를 구입해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혀 나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난 1963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욕 아시아학회’에서 한국전통음악에 대한 발표와 함께 바라춤을 직접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이듬해에는 우리 전통공연예술단의 미국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현지 대학과 대학원 등을 포함, 27곳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등 유럽에 한국전통음악을 알리는 데에도 노력했다. 영국의 음악가 존 레비(1910~1976)가 1964년 우리나라에서 50일간 머물렀을 당시 가곡, 판소리, 기악연주, 궁중음악, 민속음악 등의 전통음악을 집대성할 수 있도록 주선했던 것. 레비는 당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스위스제 녹음기 나그라를 사용, 모두 10장의 CD에 담았는데 지금도 중요한 음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씨는 또 전국을 다니며 귀중한 국악 자료를 수집, 연구하면서 국악강연과 번역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지난해 말에는 그가 평생 모아 온 국악 자료 중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서애악부’(1504), ‘정축진찬의궤’(1877), ‘설중회춘곡’(1905년 추정) 등을 비롯해 200여점의 고서적과 녹음자료를 국립국악원에 기증해 화제를 모았다. 이에 대해 해씨는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증하게 됐는데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한국음악을 듣는다. 밤중에는 가끔 소리를 크게 틀어놓아 옆집에서 항의를 받기도 한다. 그에게 한국의 전통음악이 왜 좋은지 다시 물었다. “한국음악은 아주 즉흥적이면서도 기쁨과 슬픔 등 인생의 혼이 담겨 있어요. 서양음악은 4분의3박자인 경우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똑같이 반복되지만 한국의 민속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반복 없이 진행됩니다. 넓은 사상이 있어요. 각 지역의 서민들의 삶이 담겨 있지요.” 그런데도 요즘 젊은이들이 한국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때문에 대학강의나 초청 강연 때에는 전통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단다. “국악은 중요한 것입니다. 결코 잊어버리면 안 되지요. 세월이 갈수록 잊어버리는 가락이 많습니다. 그런 가락들을 악보로 써서 남겨야 하는데…. 가야금 악보도 써야 하고, 요즘 들어 기력이 별로 없어요.” 푸른 눈의 백발, 국악학자의 길을 오롯이 걸어온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국악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만큼은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전국민속예술축제 50년사’를 번역하고 있다. 기력이 떨어지고 불편한 몸에도 여전히 국악사랑에 대한 열정은 변치 않고 있다. 어쩌다 가끔 집에서 염불하며 바라춤을 추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염불은 최인서 선생에게 배웠다. 바라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춤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부인과 어떻게 만나 결혼했느냐고 하자 “머릿결이 곱고 아주 길었다.”며 웃는다. 옆에 있던 부인이 “간호사로 독일 가려고 학원에서 공부할 때 남편이 영어 선생이었다. 3년 동안 사귀다가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고 거들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He is ~ 193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1952년 콜로라도 주립대에서 음악학사를 받았으며 1953년 6·25 전쟁에 참전, 위생병으로 근무할 당시 국악을 처음 접했다. 1959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음악석사를 마친 뒤 1960 다시 한국으로 와 4년 동안 한국국악예술학교에서 전통음악을 공부했다. 이때 홍원기, 박녹주, 지영희, 신쾌동 선생에게 가야금과 시조, 단가, 민속장고와 북, 거문고 산조 등을 익혔다. 이후 태평소(취타와 염불), 태평소 시나위, 범패와 작법, 설장고 등을 배웠다. 국립국악원 장기과정(1990~1994)을 수료했다. 주요 저술은 삼천리 나라의 무용(1964), 한국 판소리 해설(1972), 한국 민속음악과 무용(1974) 등 5권이 있다. 영문번역으로는 한국가면극(이두현·1974), 한국민속무용해설(성경린·1974), 한국전통악기(이혜구·1982) 등 수십권이 있다. 이 밖에 1964년 한국삼천리가무단을 인솔해 미국 27개 대학과 뉴욕 카네기홀 공연 및 강의를 통해 한국 전통음악과 무용을 소개했다. 1973년 국립국악원연주단과 함께 이란, 프랑스, 서독 등 여러 차례 공연 및 강의를 통해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렸다. 주요 수상으로는 한국국제문화협회 문화상(1982), 국악의 해 유공표창(1995), 한국유네스코위원회 문화상(1991), 은관문화훈장(2011) 등이 있다.
  • [보고 듣고 즐기세요] 국악·클래식

    ●청소년 국악여행-우리음악 스킨십 8월 11~12일 오후 2, 5시 경기도문화의전당 아늑한소극장. 경기도립국악단의 기획공연. 단소 배우기와 국악연주, 민요 아카펠라 체험, 팝핀현준과 국악왈츠 등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돼 국악을 경험하는 시간으로 꾸몄다. 1만원. (031)289-6471~3. ●앙상블 소아베 ‘순수’(Pure Four) 29일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지아친토 셀시의 현악4중주 4번,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저기 물결들이 속삭이고’(Ecco mormorar l‘onde), 드뷔시의 현악4중주 작품번호 10번, 베토벤 현악4중주 작품번호 130번 등 바로크 이전 음악부터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실내악곡을 준비했다. 2만~3만원. (02)580-1300.
  • [김문이 만난사람] 티베트 무인구 첫 횡단 박철암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티베트 무인구 첫 횡단 박철암 교수

    지구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하여 그곳을 탐험하는 것은 새로운 역사를 쓰는 일이다. 무인구(無人區)라는 말을 들어봤을까. 티베트 장북고원(藏北高原) 해발 5000m 지점에 있다. 인류 문명의 모든 기기가 정지되는 곳이다. 잘 가던 시곗바늘이 멈춰버린다. 나침반도 작동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발사된 총알도 날아가지 않는 ‘수수께끼의 땅’이다. 티베트 무인구는 국가금구(國家禁區) 지역으로 지도에서조차 지명을 찾을 수 없는, 세상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곳이다. 수억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심오한 곳이다. 말 그대로 자연의 장엄함과 태고의 신비가 펼쳐진다. 티베트 사람들은 현세나 내세에서도 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도 생존할 수 없는 땅으로 여긴다. 한반도 면적과 비슷한 22만㎢의 광활한 규모임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다. 대신 스라소니, 곰, 늑대, 황양, 야생 당나귀 등이 천국처럼 살고 있다. 원로 탐험가 박철암(88) 경희대 명예교수(중문학)는 2007년 세계 최초로 티베트 고원지대 무인구 2200㎞를 횡단했다. 1990년 한국 최초로 티베트에 들어간 이후 30차례나 다녀왔고 무인구 횡단은 11번 도전 끝에 성공했다. 중국 정부에서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곳이지만 그의 끝없는 집념에 탄복해 중국 측 지질학 박사 1명, 의사 1명, 통신원 1명, 티베트 지질학 연구원 1명, 호수학 박사 1명 등 9명의 수행원과 함께 탐험대를 조직해 마침내 평생의 꿈을 이루며 새 역사를 썼다. 그는 2007년 12월 티베트 과학조직위원회로부터 ‘장북고원 무인구를 세계 최초로 탐험한 과학자’라는 호칭과 함께 표창까지 받았다. 그런데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다시 한번 무인구를 꿈꾸고 있다. 다음 달 티베트에 가서 무인구 출입 허가를 신청할 예정이다. ●남·북극 이어 제3극 무인구 그는 1962년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 원정에 나서 당시 화제가 된 주인공이다. 그때 다울라기리 2봉(네팔과 티베트 접경지역 위치)에 도전했고 1971년에는 로체샤르에 도전한 경력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티베트 고원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티베트 무인구만 생각하면 지금도 어린 소년처럼 마음이 막 설레지요. 더 늙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무인구에 가고 싶습니다. 미지에 도전한다는 것은 늘 행복이자 즐거움입니다. 북극과 남극은 난센과 아문센이 탐험했고 제3의 극인 무인구는 박철암이 탐험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어요. (잠시 생각하더니) 1988년 중국이 티베트를 개방했다고 했거든요.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티베트에 처음 갔을 때를 잠시 회고한다. “해발 5250m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에 들어가 한 고원지대에서 잠시 앉아 쉴 때였죠. 마침 유목민 아가씨가 양 떼를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17살 정도 됐나요. 그런데 그 아가씨가 꽃을 입에 물고 그걸로 피리 소리를 내는 것이에요. 꽃 이름을 물었더니 파파화(巴巴花)라고 하더군요. 얼마나 아름답던지 별천지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티베트의 꽃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지요.” 박 교수는 당시 한 명언을 떠올렸다고 한다. ‘누가 말했던가, 누구라도 티베트 창탕고원에 단 1분만이라도 설 수 있으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라고!’ 이후 티베트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500여종의 식물을 수집, 1998년에 ‘티베트의 꽃과 생물’이라는 책을 세계 최초로 발간하게 된다. ●대륙의 버뮤다 삼각지 무인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6년 6월이었다. 티베트 라싸대학 총장을 만났을 때 박 교수는 무인구 얘기를 처음 듣게 됐다. ‘과거에도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고 앞으로 100년 후에도 사람이 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또 ‘국가금구 지역이니 절대 가면 안 된다.’라는 말을 듣고 더욱 궁금해졌던 것. 이때부터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무인구 탐험이라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무인구에는 정말 모든 기기가 정지되는 곳일까. 그러자 지체없이 무인구의 위치부터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티베트의 아리(阿里)고원 일부 지역과 장북고원의 서북부, 동북부의 광대한 지역을 창탕고원이라고 합니다. 창탕은 북방의 하늘이라는 뜻이지요. 무인구는 그 창탕고원의 최북쪽에 위치하며 쿤륜(崑崙)산맥, 커커씨리(可可西里)산맥과 인접하고 있습니다. 서남으로 히말라야산맥과 깡디스(崗底斯)산맥, 넨칭탕구라(念靑唐古拉)산맥, 그리고 헝뚜안(橫斷)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지요. 무인구의 장서깡르산(藏色崗日山)과 서우깡르산(色烏崗日山)의 중간 지역에 이르면 모든 기기의 작동이 정지됩니다. 시계가 멈추고 라디오 소리도 정지되며 자동차 엔진도 꺼진다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지요. 마치 남태평양의 버뮤다 해협을 지나는 배들이 가라앉듯이 말입니다.” 정지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시 말해 지구상에는 북극과 남극, 그리고 제3의 극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무인구이며 극 중의 극이다.”고 강조하면서 “알 수 없는 광물체와 수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설명한다.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티베트에 같이 갔던 한 대원이 호수에 물을 길으러 갔다가 개울에서 머리를 감았는데 귀국해서 얼마 되지 않아 머리털이 귀 뒷부분만 남겨놓고 몽땅 빠져버렸습니다.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한 것은 3개월 후였습니다. 또 고원지대를 지날 때였는데 땅속에 있는 흑사(黑沙)를 발견한 적도 있었지요. 놀라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무인구는 1억년 전에는 바다였고 그래서 신비한 화석과 호수가 많습니다.” ●경희대 산악반 이끌고 히말라야 첫 등반 그가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릴 적부터였다. 해발 2000m가 넘는 평안북도 낭림산맥의 동백산 밑에서 자랐다. 어른들로부터 ‘동백산 위에 뱃조각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동백산으로 올라갔다. 마타리꽃이라는 야생화 속을 걷는 산길이 무척 좋았다. 산을 처음 알았고 이후 산을 좋아하게 됐다.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 스승한테 ‘옥배에 술을 마시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곤륜산에서 포부를 펴라.’는 말을 듣고 히말라야에 대한 야망을 키워나갔다. 1947년 북한산 백운대에서 열린 한국산악회 주최 등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학우 두 명과 팀을 이룬 것이 나중에 경희대 산악부의 시초가 됐다. 이후 1950년 안나푸르나와 1953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이어 1956년 마나슬루를 오르는 일본과 유럽의 산악인들의 성공 소식을 전해 듣고 히말라야 진출의 의지를 더욱 다지게 됐다. 경희대 산악반을 이끌고 한국 산악 사상 첫 히말라야 등정에 나서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던 것. 하지만 출발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가면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고 하면서 선뜻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결국 ‘등정대’가 아닌 ‘정찰대’라는 이름으로 출발해야 했다. 따라서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할 수 없이 집을 팔아 비용을 마련했다. 또 현지 지도를 구하지 못해 일본에 들러 손으로 그린 약도를 받아들고 떠나야 했다. 다시 무인구 얘기로 돌아온다. “1년 중 8개월은 매우 추우며 특수한 자연 환경 덕분에 무인구는 신비스러운 면모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고원, 신비스러운 소금호수, 그곳에만 서식하는 야생동물과 조류, 고산식물들이 태초의 모습 그대로 펼쳐져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지요.” 노() 탐험가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히말라야에는 6000m급 이상 봉우리가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이는 앞으로 후배들이 오를 산이다.”면서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를, 특출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개척돼 왔다. 지구상에는 어느 분야에서든 미지가 있다. 그 미지를 알아내는 일 또한 우리 후배들의 몫이다.”라고 강조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원로 탐험가 박철암 경희대 명예교수는] 평남 낭림산맥 동백산 자락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만주에서 독립단을 찾아갔다가 광복 후 월남했다. 경희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 한국특수체육회 이사, 대한산악연맹 이사, 한국대학교수협의회 이사, 경희대 기획관리실장, 한국히말라야클럽 초대회장, 한국티베트탐험협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히말라야 다울라기리 산군 탐사기(山群 探査記)’, ‘티베트의 꽃과 생물’, ‘지도의 공백지대를 가다’ ‘티베트 무인구 대탐험’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명예교수로 한국히말라야클럽 명예회장, 한국티베트탐험협회 명예회장 등을 맡고 있다. 1962년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에 진출했으며, 1971년 최초로 8000m급 로체샤르를 원정했다. ‘무인구’라는 말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탐험가로 2007년 세계 최초로 티베트 무인구 횡단에 성공했다. 무인구의 생태계 연구자료를 수집한 공로를 인정받아 티베트 과학조직위원회로부터 ‘장북고원 무인구를 세계 최초로 탐험한 과학자’임을 증명하는 인증을 받기도 했다.
  • “사상계, 초기 박정희정권과 어떤 관계였나”… 정진아 건국대 교수 논문

    “사상계, 초기 박정희정권과 어떤 관계였나”… 정진아 건국대 교수 논문

    ‘사상계’는 1960~70년대 가장 대표적인 ‘민족적 저항 잡지’로 손꼽힌다. 1970년 5월 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고 사라진 것도 지식인들에게는 ‘저항’을 떠올리는 역사의 한 장면이 된다. 그러나 사상계와 박정희 정권이 처음부터 악연은 아니었다. 사상계의 경제부문 편집위원들은 군사정권의 경제개발정책 골격을 형성할 만큼 협조적이었다.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 수립, 농업과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 7%대의 높은 성장률 추구, 국민의 소비절약과 내핍의 일상화, 수출증가 등이 그것이다. 정진아(43)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는 신간 ‘냉전과 혁명의 시대 그리고 사상계’(작은 소명출판 펴냄)에 실은 소논문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사상계 경제팀의 개발담론’에서 사상계와 박정희 정권의 관계를 파헤쳤다. 사상계 인사들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4·19 민주주의 혁명의 계승자로 바라보며 장면 정부의 무능을 극복하려는 불가피한 혁명으로 평가한 것이다. 당시 지식인 대부분이 호의적이었다. 정 교수는 “지식인들은 박정희 등 군사쿠데타 세력들이 ‘혁명 과업을 완수한 뒤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처음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 호응 따라서 사상계 경제부문 편집위원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과 각 부처 장관의 고문 등으로 참가했다. 특히 김준엽은 고문 요청을 거절했다가 장준하 등의 적극적인 권유를 받아들여 수락했다.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이 제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성안 과정에 사상계 편집위원인 성창환 고려대 교수와 이정환 연세대 교수가 참여했다. 정 교수는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한 상황에서 사상계 소장 학자들의 경제개발론을 포용해 환심을 샀지만, 정책 운용에서 점차 노선을 달리했다.”고 말했다. 사상계와 박정희 군사정권 사이의 틈은 군사정권이 한일회담 과정에서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려고 하자 벌어졌다. 사상계 측은 대일 청구권 문제를 우선 해결한 뒤 국교를 수립하고, 그 뒤에 일본과의 경제실무를 협의하는 한·일 협정을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결과는 반대였다. 이어 군사정권이 군정 연장을 시도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버리고 원칙 없는 한일회담을 강행하자 사상계는 1962년 7월부터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 “의욕의 과잉”, “체계화되지 않은 혼합경제 정책으로 혼란 가중”을 들어 비판하기 시작했다. 1년 2개월의 밀월이 박살 나는 순간이다. 군사정권도 중앙정보부를 설치해 대민 사찰을 강화하고,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해 정적들을 숙청해 나갔다. ●‘민생 vs 국가부흥’ 가치 엇갈려 정 교수는 “사상계는 경제개발안에서 일자리 창출 등 ‘민생’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군사정권은 ‘민족과 국가의 부흥’이라는 전체주의적 가치에 역점을 뒀다. 또한 사상계가 민주화와 산업화의 동시 진행을 요구한 반면, 군사정권은 산업화 이후에 민주화를 주장해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게 됐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현재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극심한 양극화나 민주주의의 제한 등은 모두 선(先) 산업화, 후(後) 민주화를 주장했던 박정희 정권 때부터 배태된 것”이라며 “파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하지 못한다면 파이를 다 키운 뒤에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1960년대 경제개발의 교훈”이라고 지적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이상득·정두언 얄궂은 인연…개국공신→파워게임→나란히 檢앞에

    이상득·정두언 얄궂은 인연…개국공신→파워게임→나란히 檢앞에

    새누리당 이상득 전 의원과 정두언 의원이 검찰 수사선상에 나란히 오른 모습이 지난 4년여 동안 두 사람 간의 얄궂은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현 정권의 대표적 개국공신이었지만, 정권 초기부터 으르렁대다 결국 검찰에 나란히 불려갔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묘한 인연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상득 전 의원은 창업공신 그룹인 ‘6인회’의 주요 멤버이자 대통령의 친형으로서 막전막후에서 실권을 휘둘렀다. 정 의원 역시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후보 시절 비서실장을 거쳐 정무부시장에 발탁된 뒤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정 의원은 이명박 정권 인수위 시절 권력의 축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 일가의 뒷조사를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정 의원은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에게 노무현 정부 때 국세청이 만들었던 ‘국세청 엠비(MB) 파일’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 파일에 ‘도곡동 땅 의혹’ 관련 내용 등 이 대통령에 대한 뒷조사 내용이 담겨 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일 ‘오해’가 해소됐다는 후문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이 대통령은 ‘형님’의 손을 들어줬고 정 의원은 파워게임에서 밀려났다.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 의원과 이 전 의원과의 악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 의원은 이 전 의원의 불출마를 요구하는 ‘55인 서명 파동’을 일으켰다. 이 전 의원이 반란을 진압하고 당선되면서 두 사람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정 의원은 이때부터 쇄신파로 변신해 청와대를 정면 겨냥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이 전 의원의 측근인 박영준 당시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을 겨냥,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고 비판해 박 전 차관이 청와대를 떠나게 됐다. 2009년 4월에는 경북 경주 재·보선에서 이 전 의원이 지원한 정종복 전 의원이 정수성 현 새누리당 의원에게 패하자, 정두언 의원이 이끈 ‘7인회’가 여권내 인적 쇄신을 요구했고, 이 전 의원은 2선 후퇴를 선언했다. 자원외교를 하겠다며 해외를 돌다가, 지난해 12월 그의 보좌관이던 박배수씨가 SLS 이국철 회장으로부터 수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면서 그는 결국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최근 둘의 운명은 다시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이 이 전 의원에게 돈을 건네는 과정에서 정 의원이 깊숙이 관여한 정황이 포착됐다. 이 얄궂은 운명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검찰의 수사에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핵이빨’ 타이슨 “15년 전 홀리필드의 귀 맛은…”

    ‘핵이빨’ 타이슨 “15년 전 홀리필드의 귀 맛은…”

    “홀리필드의 귀 맛은…” 과거 전세계 프로 복싱팬들을 충격에 빠뜨린 일명 ‘핵이빨’ 사건 15주년을 맞아 당사자인 마이크 타이슨(45)이 입을 열었다. 타이슨은 최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홀리필드의 귀를 BBQ소스에 찍어 먹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 홀리필드에 대한 ‘악담’이 아닌 재치있는 화답이다. 에반더 홀리필드(49)는 지난달 말 자신의 새 사업인 BBQ소스를 홍보하며 “내 새 소스는 누군가의 귀를 물어뜯게 만들 것이다. 마이크 타이슨에게 물어보라.” 며 ‘선방’을 날렸다. 이에대해 타이슨이 센스있게 맞받아치며 한마디로 홀리필드의 BBQ소스가 맛있다는 것을 홍보해 준 셈. 타이슨과 홀리필드의 악연(?)은 15년 전인 지난 1997년 6월 28일(현지시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호텔에서 열린 WBA 헤비급 타이틀전 경기중 타이슨은 홀리필드의 귀를 수차례 물어 뜯어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타이슨은 성폭행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등 많은 구설수에 휘말려 왔다.        인터넷뉴스팀 
  • 외국인이 연주하는 우리 가락

    외국인이 연주하는 우리 가락

    ‘2012 국제국악연수’에 참가한 외국인들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발표회를 갖고 있다. 미국, 영국, 중국 등 11개국 출신 18명의 참가자들은 지난 18일부터 2주일간 전문가들로부터 우리 악기 연주법 등을 배웠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Weekend inside] 민주 vs 공화 대립 격화…美정계 뒤흔든 태풍의 눈 2인

    ■ ‘초당적 배신’ 로버츠 미국 대법원이 28일(현지시간) 건강보험 개혁법(일명 오바마 케어)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린 이후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밋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도 아니다. 5 대 4의 합헌 판결에 가세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다. 미 언론과 전문가들은 로버츠 대법원장의 ‘선택’에 “깜짝 놀랐다.”고 입을 모았다. 로버츠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와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 정부 등 공화당 정부의 법무부에서 일하고 조지 W 부시 정부에서 대법원장에 발탁된 전형적인 ‘공화당맨’이다. 대법원장으로서 그의 판결 역시 낙태권 제한에 찬성하는 등 대부분 보수성향을 보여왔다. 때문에 이번 오바마 케어 판결에서도 당연히 공화당의 손을 들어줄 것으로 예상됐다. 결국 이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공화당과 보수파는 경악했고, 로버츠를 향해 “배신자”, “사악한 천재”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로버츠의 반전’은 오바마 대통령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50세의 오바마와 57세의 로버츠는 둘다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이지만, 악연을 이어왔다. 2005년 부시 대통령이 로버츠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하자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는 “로버츠는 훌륭한 역량을 약자보다는 강자를 위하는 데 사용했다.”며 인준 반대에 앞장섰다. 2009년 오바마의 대통령의 취임식 때 대법원장으로서 대통령 선서를 이끌던 로버츠가 실수로 오바마가 선서문의 어순을 바꿔 읽도록 만든 해프닝도 있었다. 당시 로버츠의 행동을 놓고 “고의 아니냐.”는 입방아도 있었다. 오바마가 2010년 1월 의회 국정연설 때 로버츠의 면전에서 대법원의 정치자금법 판결을 비판하자, 로버츠도 그해 3월 한 연설에서 “누구라도 대법원을 비판할 수 있지만 상황, 환경, 예의라는 문제도 있다.”고 오바마를 겨냥했다. 이런 개인적 악연과 이념적 노선을 뒤로 하고 로버츠가 초당적 선택을 하자 미 언론들은 “결과적으로 사법부가 정파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실제 로버츠는 평소 “사법부는 정책을 결정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 분쟁을 조정하는 곳”이라며 ‘사법부의 독립’을 강조해 왔다. 한편에서는 위헌 판정으로 빚어질 국가적 혼란을 막기 위해 대법원 수장으로서 역사적 책임의식을 발휘했다는 시각도 있다. 만약 로버츠가 위헌 쪽에 섰다면 해리 트루먼 대통령 이래 60여년 간 좌절을 거듭해온 미국의 ‘전 국민 의료보험’의 꿈이 다시 한번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초유의 피소’ 홀더 28일 오후 4시 30분(현지시간)쯤 미국 워싱턴의 연방의회 의사당 건물 후문에서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를 선두로 100여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줄지어 걸어 나오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됐다. 한참을 걸어 취재진 앞에 다다른 이들은 “공화당의 법무장관 형사처벌안 강행 처리는 대선에서 정치적 이득을 겨냥한 쇼”라고 비난했다. 같은 시간 하원 본회의장에서는 공화당 주도로 에릭 홀더 법무장관의 ‘의회 모독’ 혐의와 관련한 표결이 진행되고 있었다. 민주당 의원 대부분은 하원 다수를 장악한 공화당의 표결 강행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본회의장을 퇴장한 것이다. 본회의에서 표결 없이 집단 퇴장하는 것은 미 의회에서 극히 드물다. 미 언론들은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의회의 정파적 충돌이 악화되는 양상”이라고 보도했다. 공화당 의원들과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참여한 이날 표결 결과 찬성 255표 대 반대 67표로 홀더 장관 형사처벌안은 가결됐다. 이에 따라 홀더 장관은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법무부 소속의 검사로부터 기소될 수 있는 처지에 놓였다. 미 의회가 현직 장관의 의회 모독 혐의에 대해 표결하기는 처음이다. 댄 파이퍼 백악관 부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공화당이 합법적인 의회 감독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정치적인 연극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미 정가에서는 어차피 정치적 사건이기 때문에 11월 대선 때까지 홀더 장관에 대한 검찰의 기소 여부가 결론나기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날 표결은 2009년부터 지난해초까지 미 정부가 무기 밀매루트를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함정수사를 위해 2000여정의 무기를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반입시키는 작전을 펼친 것과 관련, 의회 조사 과정에서 공화당이 법무부의 자료제출 비협조를 문제 삼은 것이 발단이 됐다. 법무부는 하원에 7600쪽의 서류를 제출했지만, 추가 자료 요청에 대해서는 “범죄 수사의 독립성과 효율성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친박 ‘경선흥행 살리기’ 분주 이재오·김문수 ‘동참 러브콜’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 진영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앞두고 움직임이 분주하다. 비박(비박근혜) 주자들과의 경선 규칙을 둘러싼 갈등을 아직 매듭짓지 못하고 있지만 물밑에서는 대권 가도를 향한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캠프 출범뿐 아니라 경선 이후의 상황까지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분위기다. 최근 친박 진영에서는 경선 규칙으로 빚어진 공방과는 별도로 비박 진영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들이 잇따르고 있다. 경선을 치른 뒤 본선 과정에서 결국 세를 합해야 한다는 전망이 담긴 ‘러브콜’이다. 박 전 위원장의 캠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을 것으로 알려진 한 중진 인사는 이재오 전 특임장관을 두고 “당의 보배이자 훌륭한 정치인”이라면서 “지금 이렇게 갈등을 빚고 있지만 결국에는 돌아와 박 전 위원장과 함께 대선 승리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의원도 “이번 대선은 진영 대 진영의 싸움이기 때문에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하는 만큼 이 전 장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공감한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아직은 각 주자들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며 박 전 위원장을 공격하고 있는 데다 이 전 장관의 경우 더욱 악연이 이어져 온 만큼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 친박 핵심 의원은 “이 전 장관과 김문수 경기지사가 박 전 위원장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야당에서 박 전 위원장을 공격하는 방식과 유사하다.”면서 “이들을 껴안으면 야당의 공세를 무디게 하는 등 본선에서 상당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이들과의 협력이 박 전 위원장에게는 오래된 숙제와 같은 것이고 박 전 위원장이 풀어야 할 과제”라고 덧붙였다. 반면 다른 핵심 관계자는 “본선에서 박 전 위원장과 함께하느냐는 비박 주자들에게 달렸다.”면서 “이번 대선에서 정권재창출에 실패할 경우 새누리당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비박 주자들의 향후 진로를 위해서도 박 전 위원장과 협력적인 관계로 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박 전 위원장이 다음 주초쯤 출마를 공식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당내 경선 규칙 갈등이 마무리되는 것과 함께 19대 국회 개원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시점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캠프에는 6선 국회의원을 지낸 홍사덕 전 의원과 함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이 공동선대위원장의 직함을 갖고 투톱 체제를 이룰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비대위원이 캠프의 수장으로 합류해 박 전 위원장의 정책을 총괄할 경우 박 전 위원장이 그만큼 경제민주화의 실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캠프에는 이 밖에도 2007년 경선 때부터 역할을 함께해 온 최경환·유정복·홍문종 의원 등과 직전 사무총장을 지낸 권영세 전 의원 등이 역할을 하는 병렬적 구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실무적인 총책도 2007년 캠프에서 메시지를 담당했던 조인근 전 비대위 비서실 부실장이 맡을 것으로 알려진다. 또 박 전 위원장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는 ‘의외의 인물’로 어떤 인사가 합류할지도 주목된다. 특히 박 전 위원장이 젊은 층에 더욱 다가갈 수 있도록 정책과 홍보 분야에서 새로운 얼굴의 외부 인사들이 합류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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