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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간 30돌 「창작과 비평」/비판적 지성의 구심점으로

    ◎민족문학론 텃밭… 「객지」 등 문제작 양산/특집호 마련… 국제학술대회·축연 준비 민족문학진영의 구심점 계간 「창작과 비평」(이하 「창비」)이 96년 봄호로 창간 30돌을 맞는다. 지난 66년 1월 1백32쪽짜리 겨울호로 출범한 「창비」는 현대사의 거센 외풍속에서 문학을 포함,문화사회적 논의에 젖줄을 대며 한국 비판적 지성의 대부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창비」의 역사는 백낙청 서울대교수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그는 사람과 자금을 끌어모아 「창비」창간을 주도했다.이후 「창비」를 이끌어온 그의 「민족문학론」은 찬반논쟁을 통과하며 한국의 진보지식인사회 전체를 단련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현대문학의 많은 문제작이 「창비」를 통해 나왔다.소설쪽에 방영웅의 「분례기」,이문구의 「장한몽」「우리동네」연작,황석영의 「객지」「한씨연대기」,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조세희의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현기영의 「순이삼촌」 등 70년대의 화제작이 소개됐고,80년대 후반부터는 홍희담·공지영·방현석·김하기·공선옥 등 굵직한 신인이 잇따라 발굴됐다.신동엽·김수영·고은·김지하를 비롯,신경림의 「농무」「새재」등 문제시에 지면을 제공한 것이 「창비」였고,시인 김남주·김정환·최영미가 「창비」로 등단했다. 그런가 하면 분단체제론의 강만길씨,민족경제론의 박현채씨,「전환시대의 논리」의 이영희씨 등이 70년대 「창비」의 필자로 활약했다.80년대 후반 사상의 르네상스기엔 「창비」의 민족문학론은 민중민주주의문학론·노동해방문학론 등 오히려 더욱 급진적인 후배들의 문학론과 맞서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창비」 96년 봄호는 창간 3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내용으로 꾸며진다.작가 이호철·박완서·신경숙씨,베이커 하버드대 옌칭연구소부소장,정개련 상임대표 박형규목사,박석무·이해찬의원 등이 「창비」에 얽힌 사연과 축하인사를 들려주는 「창비와 나와 우리시대」,일반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 「독자가 바라본 창작과 비평」 등이 「창비」 30년을 되돌아보게 한다.이밖에 중진시인 36인 신작시선을 싣고,작가 16인의 신작단편집 「작은 이야기,큰 세상」도 발간한다. 이와 함께 4월24일부터 3일간 브루스 커밍스·와다 하루키·노마 필드 등 세계적 석학을 초청하는 국제학술대회와 2월27일 각계인사를 초청한 자축연도 계획하고 있다. 80년 국보위에 의해 폐간당하는 등 군사정치시대 탄압의 대상이던 「창비」는 지난해 10월 출판문화진흥 공로로 문화체육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창비」 편집인 백낙청씨는 『과학기술·환경·여성문제등 현대사회의 쟁점을 끊임없이 끌어들여 「창비」의 시각으로 해석해내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창비」의 장래를 말했다.
  • 무용가 이정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90)

    ◎영적 표현이 자연스런 「거리의 춤꾼」/긴 연습·강훈련으로 무대마다 진한 메시지/「또 하나의 나」로 데뷔… “현대무용 불모지” 한때 좌절/“4월엔 한라·지리산 거슬러 오며 「거리의 춤」 출 것” 이사도라 던칸은 샌프란시스코 바닷가에서 태어났다.그리고 춤에 대한 그의 최초의 관념은 「파도와 리듬」이다.던칸은 언제나 주변풍경과의 하모니를 생각하며 춤추어 왔다.대상과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낱 거짓 움직임에 불과할 것이다. 이 시대의 춤꾼 이정희는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맨발로 춤춘다.도심을 흐르는 강물,머리위로 부는 바람,별이 빛나는 하늘아래서 그곳에 모인 군중의 숨결과 나뭇가지의 흔들림,바람과의 조화를 꾀하며 호핑(도약)과 스키핑(가볍게 점프),이단 도약 삼단도약을 활기차게 구사한다.그 때마다 그의 춤은 움직여서 넘치지 아니하며 멈추어서 모자라지 않는다.음악의 광선과 진동이 육체의 회로를 가로질러 샘물처럼 흘러넘치듯 가장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영적 표현을 창출해낸다.이 때의 역동적인 동작선은 사방으로 확산되지만 결코 안으로 소멸되지 않는다.한을 품어도 흥을 버리지않고 흥겨운 가운데 칙칙한 한이 스며있는 것이 인상적이다.이를 가리켜 박용구씨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그의 육체의 언어는 끊임없이 살을 풀어나간다」고 말한다.「살을 푼다는 것은 액땜이지만 그의 춤은 액을 풀어헤쳐 탈이 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이 내장되어 있다.땅위에 엎드린채 온몸을 뒤집고 뒹굴고 요동치면서 「대지와의 교감」속에서 「한단계 고양된 삶」을 성취해내려는 것이다. ○흥겨움속 한 스며있어 그중에서도 그의 「살풀이」시리즈는 인간의 탄생을 원천적으로 파헤치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비극성과 모순성」 일상적인 고뇌와 권태감의 실상을 반영한 사회적인 춤이라고 할수 있다. 일그러진 현대인의 얼굴,오늘의 기계화되고 산업화된 인간의 삶의 풍경을 「극무용적」으로 연출하여 「달리고 뛰쳐오르고 가볍게 뛰는」 모든 동작은 「무용」이며 모든 움직임이 「언어」임을 일깨운다.그리고 「누구든지 어디서나 춤출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변화 가운데 질서를 유지하고 질서 가운데 변화를 유지한다.그러나 그는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거나 무대라는 일정한 공간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이른바 뉴욕의 현대무용가인 루신다 차일즈의 거리춤,데보라 헤이의 도시의 춤에서 연유한 그의 거리의 춤 「봄날 문밖에서」는 운동복과 운동화 트레이닝을 입고 한강변이나 바닷가나 산자락을 배경으로 힘차게 도약한다. 그는 언제 만나도 조용하고 차분하다.아무리 큰 사건도 나직한 목소리로 핵심만을 말한다.마치 2차대전시절의 샹송가수처럼 전쟁의 참상과 부조리,뼈저린 슬픔을 참고 견디는 감연한 의지와 인간을 감싸안는 부드러운 자세로 노래부른다.그래서 그의 육체의 언어(가사)는 그냥 춤추는 것이 아니라 춤을 「의식」하고 「자유롭기 위해」「대지를 느끼기 위해」 춤출 뿐 아니라 「왜 춤추는가」 무엇을 어떻게 출 것인가」를 확고히 정하고 춤을 실천시킨다. 그의 방배동 연습실에 가보면 평소의 온화한 이정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이마에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밴디드댄서가 되어 그는 단원들에게 「척추의 마디마디가 수직상태가 되도록 몸을 길게 늘리고 신선한 산소로 육체를 일으켜 세우라」고 열정적으로 채찍을 가한다.그래선지 강훈련과 긴연습끝에 올려진 그의 무대는 그 때마다 진한 메시지와 함께 관객으로 하여금 심오한 사색에 잠기게 한다.「짙은 먹구름짱에서 벗어나 화사한 마음의 의상을 입고 그는 원과 원을 돌면서 원이 좁으면 원밖에서도 음악과 주변과의 관계를 조화시켜 절묘한 작품을 보여준다」는 김영태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언제 만나도 차분한 사람 미국유학시절 광주민주항쟁에서 죽은 한 젊은이의 사진을 보고 구상했다는 「살풀이­80」은 「사람이 다른 상대방을 학살하고 사형한다는 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비극」이며 「다시는 이땅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 젊은 넋을 위로하고 고통을 뿌리치는 제의식을 섬뜩하게 이어나간다. 귀국직전인 80년 뉴욕 소호의 포퍼밍 개리지에서 이 춤을 선보였을 때 그해 댄스 매거진(10월호)은 「삶과 죽음,빛과 어둠이 윤회하는 경이적 율동」으로 호평했고 지난 10년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줄기차게 춤추더니 3년전 아홉개의 시리즈로 이를 완결했다. 그는 편안한 가정의 1녀2남중 장녀로 태어났다.「가랑잎만 굴러가도」 잘웃고 잘우는 서정적인 성격에다 숭의여중에 다닐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발레를 추었다.고교 2학년이 되던해 마침 한국에 왔던 호세 리몬의 공연을 보고 그는 「미진했던 발레에 대한 감정」을 미련없이 버렸다.그 때까지는 튀튀와 토슈즈를 신고 필루트(회전)와 아라베스크를 취하는 것만이 춤인줄 알았으나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인공적인 훈련과는 달리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현대무용이야말로 정신의 비전을 반영할 수 있는 창조의 원심력임을 깨달았다. 대학 졸업작품인 「또하나의 나」로 무용계에 데뷔, 「별빛 같은 6인의 신인 무용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현대무용이 정착된지 10년도 못되는 한국적 현실에서 그가 뛰어넘기엔 너무나 「벅찬 벽」과 「험산」을 느끼자 71년 도일,의상디자이너나 되자고 마음먹었으나 춤의 혼령이 끈질기게따라붙어 그를 끊임없이 부추겼고 길거리에 나붙은 춤공연 포스터만봐도 전율 같은 율동이 전신을 관통하는 아픔을 느꼈다. 「춤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춤을 버린 것」을 자각하고 1년만에 다시 귀국,친구의 무용발표회에 가서 불꺼진 객석에 앉아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채 하염없이 흐느껴 울면서」그는 꺼져가던 춤의 불씨를 서서히 되살렸다. ○광주항쟁 사진 보고 구상 30세 되던해 미국에 유학,뉴욕에서의 3년간은 그곳의 살아있는 춤의 열기로 인해 무용의 신은 당연히 그를 향해 미소지었고 언제부턴가 그는 「춤추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춤추지 않았던 시절은 사라져버리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비디오 아티스트인 이동현씨(44)와 84년 뒤늦게 결혼,「춤과 비디오의 만남」의 작업을 함께 하면서 나이 40살에 첫딸 루다(9),5년후 둘째딸을 낳았다. 지난해엔 북경·말레이시아를 돌며 공연,오는 4월에는 멀리 한라산 끝자락에서 지리산·설악산을 거쳐 북으로 거슬러 올라오면서 거리의 춤「봄날 문밖에서」를 춤출예정이다. 「댄서는 모름지기 자연과의 하모니속에서 공기나 빛이나 음악처럼 춤춘다」는 던칸의 말대로 그는 모든 자연속에 새처럼 자유롭게 춤추어왔고 이제부터는 「인생을 위해」 그리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의 「숨을 춤추게」하면서 춤추고 난 자리에 불꽃의 항적(항적운)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연보◁ ▲1947년 서울 출생 ▲1970년 이대 무용과 졸업,송범 육완순사사,한국컨템포러리 무용단 멤버 ▲1975년 이대 대학원졸업,창작무 「꼭두인간」 발표 ▲1977년 「누군가 내 영혼을 부르면」안무 출연,중앙대·연대 출강,도미,마사그레이엄·머스커닝햄무용학교 및 호세리몬 엘빈에일리테크닉사사 ▲1980년 뉴욕데뷔고야연 「살풀이­80」(퍼포먼스 개리지),귀국공연 「살풀이­하나」,중앙대교수,대한민국무용제 참가이후 매회 참가 ▲1982∼92년 「살풀이­셋」부터 「살풀이­9」 발표,현대무용제참가 ▲1984년부터 거리의 춤 「봄날 문밖에서」(서울 삼호아파트단지,덕수궁,마로니에공원,여의도광장,국립극장분수대 등),제1회청소년예술제참가▲1986년부터 부군 이동현과 「춤과 영상과의 만남」(6차례 공연) ▲1987년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 「낙원추방」 발표이후 해마다 참가,거리의 춤 미국공연(뉴욕센트럴파크,그랜드캐니온 하와이와이키키해변 등) ▲1988년부터 솔로 「검은 영혼의 노래」연작발표 시작 ▲1989년 비엔나 국제안무 경연대회베스트9 참가(비엔나 오데온극장),이정희·남정호 포스트모던댄스 공연 ▲1990년 「현대춤과 현대미술의 만남」(국립현대미술관) ▲1993년 지방순회공연(광주·대전·부산 및 서울 예술의 전당),JADE(재팬 아시아댄스 이벤트)93 독무 「미사키절벽」 발표(도쿄 아키다) ▲1994년 중국 북경무용원 초청 및 말레이시아공연.「우리시대의 춤꾼 이정희」(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현재…중앙대교수,한국현대춤연구회회장 ▲수상…대한민국무용제안무상 및 개인상(80·81년)비엔나국제안무경연대회 안무상(89)년 올해최고예술가상)92년
  • 시인 서정주(작가를 찾아:1)

    ◎강물이 다시 풀리는 자연 이치 믿으며 살지요/내 시에 덜 표현된 것은 언제라도 다시 써/지구촌 곳곳 여행… 모든 사상·철학 등 시세계 담아/해방후 정치 건달이 나라 그르쳐… 문인들은 이용만 당했지 올해는 문화체육부가 정한 「문학의 해」.서울신문은 문학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문학의 해」특집기획 「작가를 찾아」를 새로 연재한다.국내 유명작가와 화제의 작가등을 찾아 그의 문학과 인생 및 세상에 대한 얘기를 듣는 심층인터뷰 「작가를 찾아」는 격주로 연재된다. 미당 서정주(81)시인댁을 찾은 기자를 대문간에서 먼저 반긴 것은 담장위로 뻗은 감나무에 붙어 홍시를 쪼아먹고 있던 까치였다.중닭만한 몸피에 흑백대비가 또렷한 이 새는 습기 머금은 청회색 하늘에 드리운 가지를 타고앉아 쭈글쭈글한 선홍열매에서 정신없이 단물을 빨고 있었다. 『…사당국민학교 본관 뒤에서 바로 서쪽편으로 2층짜리 개인주택이야.멀리서도 감나무가 잘 보일거야.손닿지 않는 높은데 단감 백여개는 까치밥으로 남겨뒀거든.까치만 아니라 가끔녹두빛 희귀조도 놀러온다고』 며칠전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집 위치를 설명하며 덧붙이던 시인의 얘기가 선연히 떠올랐다.미당이 지난 70년 이래 살아온 남현동(구 사당동)예술인 마을의 일명 「봉산산방」.손바닥만한 마당에 소나무·시누대 등 자연을 들여놓은 봉산산방은 「질마재 신화」이후의 시집 아홉권을 세상에 내보낸 곳이다. 정초부터 세배객에 시달려 2층 서재에서 쉬고 있다는 미당은 한참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어느 새 갈아입었는지 말쑥한 옥색 한복차림으로 『서재가 정리도 안되고 구접스럽다』면서 1층 빈 방으로 잡아끄는 미당에게선 여전히 정정한 기운이 승했다. ○산이름 외며 두뇌 단련 아침마다 세계의 산봉우리 이름을 한차례 외우며 뇌세포를 깨운다는 미당의 두뇌체조는 널리 알려진 일.노시인은 그간 한번에 1천6백25개씩 외던 산이름을 지난해 가을부터 세개 더 늘렸다고 활기차게 말문을 연다. 『시베리아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걸쳐 시코테 산맥이라고 있어.거기 아브라치나야·크오·타르토키아니 산을 보태 이젠 매일 1천6백28개 산이름을 외우지.왜 그 산이냐고?아브라치나야 산중턱 두터운 밀림지대가 시베리아 호랑이 본산이라고.시베리아 호랑이 알지? 우리나라 호랑이 원조 말이야.우리 백두산을 타는 놈이 바로 아브라치나야 밀림에 사는 고놈이라 그것이야』 산에 대한 미당의 애착은 지난 91년 세계 각지의 산사람들과 산령들의 신묘한 사연을 별도의 시집 「산시」로 묶어낼 정도로 유별난데가 있다.그간 수차례 떠돈 세계여행길에서 산뿐만 아니라 세계곳곳의 풍물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싹튼듯 보인다. 『지난 77년 10개월간 세계여행한 것을 시발로 나는 지구끝까지 다녀봤어.킬리만자로부터 남태평양의 자그만 섬까지 안거친 데가 없다구.내가 인류문학사를 대개 아는데 세계의 작가,시인들 중 나만큼 많이 떠돈 이도 없어.어떤 때는 죽음도 무릎쓰고 결사적으로 다녔지.지금도 눈감으면 세계 중요한데가 머릿속에 환해.사상·철학·종교분포 등이 죄 인상박혀 있어』 이같은 여행체험은 미당 후기의 시세계를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다. 하지만 미당시의 압권은 역시 초기·중기의 시집들에 나타난다.젊음의 원색적 생동감이 뿜어나오는 「화사집」「귀촉도」시절,사슬풀린 해방공간에서 한국적 단아미를 탐구한 「서정주시선」시절,인과와 윤회의 주제가 신라정신으로 둥글게 맞물린 「신라초」「동천」시절,고향 질마재의 민담 기록 「질마재 신화」시절의 미당은 무오류의 신에 비견할 만했다.이 책들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 버릴 것 없는 숨막히는 명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애비는 종이었다…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자화상」)「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문둥이」)같은 명구를 비롯,교과서에 실린 「국화옆에서」,노래로도 만들어진 「푸르른 날」,이밖에도 「바다」 「밀어」「동천」「무등을 보며」「아지랑이」 「춘궁」 「기억」 「신부」 「상리과원」등 침을 꼴깍 삼키게 하는 밀도높은 시편들이 한없이 많다.「어느 것 하나 타작이 없다」「어떤 말이나 붙잡아 놀리면 그대로 시」라는 극상찬이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어떤 이는 미당을 「신라 향가이래 최고의 시인」으로 꼽았고 어떤 이는 장자를 빌려「영원위에서 소요하는」 미당 시세계의 아득한 경지를 찬탄했다. 그러나 정작 미당 자신은 껄껄 웃으며 대꾸한다.『아무 것도 아냐.바구니를 겯는 사람도 하도 오래 결으면 불끄고 해도 불켠 젊은이들보다 낫잖아.시도 이와 마찬가지야.뭐든지 숙련공이 되면 솜씨부리기 쉬워지는 법이라구』 한국시의 거봉답게 미당의 작품은 현재 영어권인 미국·영국·아일랜드를 비롯,일본·스페인·프랑스·독일·중국 등 7개국에 14권 번역돼 있다.외국에서 찬밥취급돼온 한국문학의 현실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내 평생 마신 술을 끌어 모으면 큰 호수만해질 것』이라며 백주대낮에 캔맥주를 권하는 미당.시적 천재성에 그릇 큰 인물됨,게다가 『술마시는 것을 재미로 안다』는 술실력까지 갖춘 그에게도 삶의 부침,마음대로 안되는 인간사가 있었다.끊임없는 친일전력시비에다 80년 전두환대통령후보 찬양연설로 그는 문학의 사회참여 바람이 거셌던 80년대 내내 후배 문인들로부터 경원당했고 특히 진보적인 민족문학쪽 작가들의 분노를 톡톡히 샀다.『황동규하고 고은 모두 내가 추천했어.내 제자야.그런데 올초 황동규는 세배를 왔지만 고은 그놈은 그예 안와』라는 시인의 말은 씁쓸한 마음 한자락을 비춰보인다. 『해방후 정치가,그놈의 정치건달들이 우리나라를 그르쳤어.이들한테 회유당해 문인들은 뭣도 모르면서 이용만 당했지.문인만 아니야.민족전체가 나쁜 정치를 통과해온거야』라는 얘기는 그간의 정황에 비춰 이젠 어느 정도 허심한 토로로 들린다.그는 『강물이 다시 풀리는 자연의 이치를 믿는 낙천적인 심사로 한번도 절망해본적은 없었노라』고 덧붙인다. (「풀리는 한강가에서」중) ○진보문단 복권 움직임 지난 세월 수많은 후배문인들이 미당에 대한 미움과 사모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해왔다.그 미움은 그의 정치적 언동을 향한 것이었고 사모는 한국문학사가 도저히 저버릴 수 없는 그의 작품때문이었다.어떤 시절엔 그 미움이 너무 커서 그의 문학 전체를 매장해버리려는 이들도 있었다.하지만 최근엔 상황이 바뀌어 진보적 문학계간지가 앞장서 미당을 재평가,그의 복권에 힘을 보탰다.미당 문학은 인간 미당이나 그를 둘러싼 외부적 요인보다 훨씬 광활하고 영원하다는,문학의 위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해방된 뒤 중학교 때 친구가 항상 완성을 향해 미래지향적으로 나가라는 뜻으로 지어줬다』는 호 미당.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호를 뛰어넘어 온전히 차고 넘치는 작품세계를 보여줬다.천편에 이르는 시를 썼으면서도 미당은 아직도 계속 쓴다.그 나이에 『내 시에 아니꼽게 덜 표현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고쳐써』라고 잘라말한다.그는 「천재는 대가의 필요조건일뿐 충분조건은 못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준다.타고난 천재를 몇배 능가하는 노력으로 그는 「박제된 전설」을 넘어서 아직도 「현역」으로 건재해있기 때문이다.94년 계간 「작가세계」봄호의 미당 특집에 실린 문학평론가 유종호씨의 다음과 같은 말이 미당에 대한 현재적 평가를 가장 잘 대변할 것 같다. ▷미당 약력◁ ▲1915년 5월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서광한의 장남으로 출생 ▲마을 서당에서 한학수업(1922∼24).부안군 줄포공립보통학교 졸업(1929),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1929)하였으나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퇴학.이어 편입한 고창고등보통학교(1931)에서도 권고자퇴.박한영대종사 문하생으로 입문(1933),그의 권유로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원에 입학(1935).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당선.11월 김동리·이용희·오장환 등을 동인으로 한 「시인부락」편집인 겸 발행인. ▲1941년의 「화사집」부터 1993년의 「늙은 떠돌이의 시」까지 14권의 시집을 비롯,「떠돌며 머물며 무엇을 보려느뇨?」(1980)「미당산문」(1991)등 산문지,「서정주 세계 민화집」(1991)「우리나라 신선선녀이야기」(1993)등 동화 출간.일지사에서 「서정주 문학전집」5권(1972)민음사에서 「서정주 시전집」2권(1991)간행. ▲동아일보 사회·문화부장(1948)예술원 회원(1954∼)동국대 교수·문과대학장(1960∼79)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사(1966)숙명여대 명예문학박사(1976)한국문인협회이사장(1977∼78) ▲74년 고향 선운사입구에 「미당 시비」건립.
  • 올 베스트셀러/출판계 불황… 뚜렷한 히트작 없다

    ◎교보·종로 등 서울시내 대형서점의 판매량 분석/컴퓨터 입문서·외국어학습서 등 실용서 인기/소설… 「고등어」·「천년의 사랑」·「아리랑」 많이 읽혀/시…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정도/사회 분위기 편승 예언서·비자금 관련서 눈길 사상 최악의 불황이라는 출판계 현실을 반영하듯 올해는 우뚝한 대형 베스트셀러가 나오지 않았다.또 독서 분위기를 이끈 흐름도 뚜렷한 게 없었다.다만 컴퓨터와 인터넷 입문서,외국어 학습서등 실용서들은 인기를 끌었다. 교보문고·종로서적·을지서적·영풍문고등 서울 대형서점 네곳은 올 초부터 12월 초까지 판매량을 집계,95년 베스트셀러를 12일 발표했다. 네 서점이 1위로 올린 책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고등어」 「신화는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등으로 제각각이다.이 가운데 「신화는 없다」만 올해 나왔을 뿐 나머지 세권은 지난해에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들.이는 출판계가 독서열을 자극할 만한 책들을 새로 만들어내지 못했음을 뜻한다.93∼94년에는 「나의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지음,창작과비평사 펴냄)나 「일본은 없다」(전여옥,지식공작소)가 문화기행서,일본비평서 붐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도 지난해에 견줘 판매량이 크게 떨어졌다.교보문고의 경우 상위 열권의 판매부수가 지난해보다 31.3%,93년에 비해서는 25.4% 덜 팔렸다. 한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을 분야별로 보면 소설로는 「고등어」 「천년의 사랑」 「아리랑」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들이 잘 나갔다.특히 하반기에 출간된 「천년의 사랑」은 넉달만에 50만부를 넘어서 대형 베스트셀러를 예고하고 있다.지난 93년 5월 처음 나온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외국 소설로는 보기드물게 장기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시 부문에서는 감성적인 언어로 청소년층을 사로잡은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가 눈에 띈다.비록 상위권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천상병),「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등 오래 된 시집들도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이밖에 유명·무명의 인사들이 쓴 자전적 수필류도 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했다.기업인으로 유명한 국회의원 이명박씨의 「신화는 없다」를 비롯해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홍세화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대표적인 여성 MC 허수경씨의 「미소 한잔 눈물 두스푼」,사랑과 일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조안 리씨의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들이 많이 팔렸다. 올해 특히 두드러진 점은 실용서들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했다는 것.「컴퓨터 길라잡이」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등 컴퓨터 입문서,「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로 대표되는 외국어 학습서,처세론 성격이 강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들이 그것이다.이처럼 실용서들이 인기를 끄는 까닭은 책읽기를 통해 직접적인 보상을 받으려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반기에는 우리 사회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편승,몇가지 예언을 담은 무녀 심진송씨의 「신이 선택한 여자」(백송)와 노태우씨 비자금 수사와 관련,한승희 전검사의 「성역은 없다」(문예당)가인기높았다.인문·사회·자연과학서나 어린이책들은 올해 유난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 눈물의 메시지(외언내언)

    『아빠는 어른들의 싸움에 돌아가셨어요.그것은 제게 가장 슬픈 일이었습니다.…저의 올해 크리스마스 소원은 아일랜드에 평화와 사랑이 영원히 계속되게 해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아홉살 난 한 소녀가 사상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방문중인 미국대통령 환영행사에서 낭독한 메시지가 세계를 감동시키고 있다.금발머리에 예쁜 노란색 리본을 단 가냘프고 아름다운 이 소녀가 메시지를 읽어나가는 동안 장내의 많은 사람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훔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미국의 CNN­TV를 통해 세계에 소개됐고 세계인들은 이 소녀의 절절한 「평화의 메시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클린턴 대통령은 이 메시지를 듣고 난 뒤 『저 아름다운 소녀가 평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나의 연설을 불필요한 말로 만들어 버렸다』고 조크했다.무장단체의 총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캐서린 해밀이란 이 소녀의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것은 진실과 평화에의 간절한 소망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극은 16∼17세기 잉글랜드지방의 개신교신앙을 가진 노르만족이 북아일랜드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주민의 90%가 가톨릭인 이 섬에 혈통과 종교가 다른 이민족이 들어왔다.갈등은 자명한 일.비록 수적으로 열세이나 영국의 지원을 받는 개신교도들은 북아일랜드 지방의 지배계층으로 자리를 굳혔다.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도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영토로 남게 됐다.북아일랜드에 사는 소수 가톨릭계는 60년대 무장투쟁부대인 IRA(아일랜드 공화군)를 만들어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공화국 통합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개신교쪽은 「얼스터자원민병대」(UVF)를 만들어 IRA와 맞서고 있다.이들간의 무력충돌이 표면화된 지난 25년여동안 양측에서 희생된 인원이 무려 3만여명.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도 인종과 종교간 갈등은 조금도 순화되지 않고 있다.인간의 편견과 이기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 준다.
  • 원혼들에 평안을 안기는 내용으로(박갑천 칼럼)

    원통한 죽음은 눈만 못감는게 아니다.설사 눈을 감아도 썩지 않는다고 했다.어찌 썩지 않으리요마는 오뉴월에라도 서리가 치듯이 한이 맺히는 법이라는 뜻이었으리라. 불륜·보복등이 기록된「추관지」2편에 충청도 대흥땅 열녀 우씨얘기가 있다.남편이 죽자 그 종손된 자가 짐승같은 짓을 하고자 협박하나 끝내 거절하니 때려죽여서 묻는다.그러고서 아홉달이 지나 관이 알게 되어 파내었는데 그얼굴은 산사람과 같았다.그때의 군수 이도선이 이를 밝혀 한을 풀어주자 이태동안 가물던 그 고을에 비가 내렸다.그때 사람들은 이를 「절부의 비」라 했다. 이런 얘기는「계서야담」에도 보인다.풍원군 조현명(풍원군 조현명)이 영남안찰사일때 정언해가 통판이었다.어느날밤 정통판에게 순사로부터 빨리 오라는 전갈이 왔다.득달같이 달려갔더니 칠곡의 배이발·지발형제를 찾아 지발을 체포하고 이발의 딸 주검을 검증하라는 것이었다.통판이 주검을 파내보니 죽은지 3년이 지났건만 그모습에 변함이 없었다.동생지발이 재산상속문제로 형의 후처와 짜고 했던 짓.사형에 처해 원한을 풀어준다.원혼이 순사에게 현몽하여 옴나위없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게 원통함과 억울함을 푼 다음에는 여느 주검과같이 되면서 서릿발을 거두는 것일까.하여간 그걸 풀지 못하는 동안에는 버력내릴 길을 백방으로 찾는다.광주의 5.18원혼들도 지금껏 이승의 얼굴을 지우지 못한채 있는 것이리라.한은 구천에 사무쳐있다.더구나 그들의 죽음을 딛고 깔고 펼쳐진 가해자들의 주눅좋은 영화가 그들을 더욱더 분통터지게 해왔다.그러는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들은 서릿발을 이고지고 떠돌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천하에는 본디 아무런 일이 없건만 용렬한 자들이 난을 꾸며서 어지럽게 한다』.순암 안정복 「임관정요」(처사장)에 나오는 경구이다.이글은 이렇게 이어진다.『알선하고 변통할만한 재주가 없으면서 경장을 좋아한다면 폐단이 가시기 전에 백성은 먼저 병폐를 받는다』.「무능한 정부」라면서 그에 갈음하겠다고 총칼로 일어선 자들의 명분론·당위론을 찌르는 글귀 아닌가 한다. 현안이던 5.18특별법이 마련된다.원혼들은 생전의 그눈빛을 띠고서 어떤 내용으로 되는지 지켜보는 것이리라.거늑해진 그들이 주검의 본디모습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만들어져야겠건만.
  • 국어용례사전 출간/국어정보학회 남영신 이사 엮음

    우리말 정확한 쓰임새 소개/사라져가는 토박이말 7만여개 수록/뜻풀이 이어 문학작품속 사례 알려줘 곱고 바른 우리말,우리글을 쓰고자 해도 정확한 쓰임새를 몰라 망설일 때가 있다.자주 쓰지 않는 말은 비록 뜻을 알아도,왠지 어색하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우리말 쓰임새를 폭넓게 보여주는 국어사전인 「국어용례사전」이 최근 나왔다(성안당 펴냄). 국어정보학회 이사 남영신씨(47)가 엮은 이 사전은 낱말 뜻을 풀이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쓰는 사례(용례)를 하나하나 소개한 특수사전이다. 예컨대 「싫거나 불쾌한 마음」을 뜻하는 「끙짜」를 찾아 보면 뜻풀이에 이어 김정한의 소설 「낙일홍」의 한토막이 나온다.「또 고구마밥인가.(중략)이밥에 넌더리 난 사람이 별미 삼아 가끔 먹을 때 말이지,허구한 날을 노 그놈만 처맡기니 끙짜가 아니날 수 없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이란 뜻으로 요즘 자주 쓰는 말 「시나브로」를 설명하면서는 신석정시인의 시 「망향의 노래」를 예로 든다.「한 이파리/또 한 이파리/시나브로 지는/지치도록흰 복사꽃을/(후략)」 이처럼 낱말이 사용된 문장만 달랑 내보이질 않고 앞뒤 글을 같이 실음으로써 낱말의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아울러 잘된 글의 표본을 보여주는 구실도 한다. 「국어용례사전」에 실은 올림말(표제어)은 토박이말 7만,한자어 1만 등 모두 8만가지쯤이며 6만여 낱말에 용례를 실었다.그 가운데 2만5천개는 고전·신소설·근현대소설·시조·가사·민요등 우리 문학 2천5백여 작품에서 따왔으며 모두 원전을 밝혔다.북한 문학작품도 과감하게 활용했다. 이와 함께 흔히 잘못 쓰는 낱말에 대해서는 따로 「주의」표시를 넣어 틀린 점을 설명했고,그동안 국립국어연구원이 발표한 순화대상 용어들도 일일이 지적해 옳은 말을 쓰도록 이끌었다. 엮은이 남영신씨는 명문대 법대를 다니면서 우리말사랑 운동에 빠진 뒤 20여년을 우리말 연구에 바쳐온 재야 국어학자.지난 87년에는 우리말 6만여 단어를 생활 중심으로 아홉 범주로 나눈 「우리말 분류 대사전」을 낸 바 있다. 그는 『토박이말이란 지식이전에 삶에서 체득한 진짜 우리말』이라고 정의내리고 우리 얼이 담긴 토박이말이 사라져 가는 현실을 걱정했다.또 『한자어에 토박이말을 대입하면 서투르고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의도적으로라도 순수 우리말을 써야 하며,또 잘 쓰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장편소설 「외딴방」 펴낸 신경숙(인터뷰)

    ◎16∼19세의 자전적 기억 고백/산업현장서 몸살앓는 한소녀의 삶 그려 「나의 발자국은 과거로부터 걸어나가봐도,현재로부터 걸어들어가봐도 늘 같은 장소에서 끊겼다.…과거로부터는 열여섯을,열일곱을,열여덟을,열아홉을 묵살하고 곧장 스물로,현재로부터는 열아홉을,열여덟을,열일곱을,열여섯을 묵살하고 곧장 열다섯으로 건너뛰어야 했으므로…」 속삭이듯 수줍고 섬세한 문체로 존재의 비의를 노래해온 작가 신경숙씨(32)가 두번째 장편 「외딴방」1,2를 문학동네에서 펴냈다.소설에서 썼듯이 가슴속에 봉해둔 채 멸절되다시피한 작가의 열여섯에서부터 열아홉까지의 기억을 되끄집어내는 작품이다. 작품에는 높은 나뭇가지에서 하얗게 빛나는 백로를 꿈꾸며 상경,전자부품회사에 취직해 산업체부설학교를 다닌 한 소녀의 삶이 그려져 있다.그 시기는 현대사의 격변속에 산업현장이 몸살을 앓던 지난 78년부터 81년 사이와 겹친다.변두리의 「외딴방」에서 오빠들,외사촌과 부대끼며 어렵게 서울에 둥지를 튼 이 소녀는 진절머리나는 가난속에서도 작가를 향한 은밀한 꿈을 키운다.그런가 하면 아무 물정 모르는 소녀에게도 당시 노동운동의 부산한 열기는 숨가쁘게 뻗쳐온다. 『누군가 이 소설을 노동소설이라고 했다는데 그 말은 기꺼워요.종래 말해온 노동소설과는 다르겠지만 앞으로 제 소설이 확산된다면 이쪽을 향해서 일 거예요』 그래도 존재의 그늘을 들춰 삶의 본모습을 파고드는 작가의 천성은 이 소설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처음으로 사춘기소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옆집 언니의 자살사건이 농밀하게,하지만 정면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 『쓰기 전에 먼저 삭여내야 한다고 생각됐던지 그 일은 계속 미뤄지데요.하지만 쓰고 보니 「깊은 슬픔」도 그렇고 죽음을 테마로 한 작품엔 다 이 사건이 변주돼 들어가 있더라구요』 창작과 비평사의 이시영 주간은 『흔히 아름다운 문체의 작가로만 보는 신경숙은 알고 보면 까도 까도 알 수 없는 양파속 같은 작가』라면서 농촌정서에 뿌리를 둔 진득한 작품세계를 상찬했다. 18일 명륜동의 한 음식점에서는 문단의 현역들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도 열려 독자와의 만남을 남겨두고 있는 이 책의 앞길을 축복했다.
  • 교실의 피그마리온/손상철 서울 개포중 교장(굄돌)

    로마시대의 서사시에 피그마리온이란 사람이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을 연모하게 되는데 그의 강한 사랑에 비너스여신도 감동하여 그 여인상에 생명을 불어 넣어 준다는 이야기가 있다.로젠솔 R란 심리학자가 1968년에 「교실의 피그마리온」이란 일종의 실험보고서를 내놓았다.그 내용은 어느 초등학교 담임교사에게 아홉 명의 학생 이름을 적어 주면서 이들 학생은 학습능력이 급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학생이라고 말한 후,1년만에 테스트를 해 보았더니 학업성적은 물론 지능지수도 급상승해 있었다.그러나 실제로는 이 아홉 명의 학생은 무작위 추첨에 의하여 뽑은 학생들이었다는 것이다.그 담임교사는 로젠솔이 말한 대로 높은 기대수준을 갖고 이들 학생을 대하면서 지도했기 때문에 그 기대의 방향에 따라 능력향상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피그마리온의 효과」라는 말이 생겼다. 필자는 이 「피그마리온의 효과」를 하임 G 기너트가 『교사는 아이들의 인생을 만든다』고 한 말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는 때가 있다.이 말속에는 교사는 아이들 인생에 있어서좋게도 나쁘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필자가 주일교육관으로 근무할 당시,일본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분발하라고 격려하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번 반복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한 인간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란 자각이 「좋은 선생님」이 되도록 채찍질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나는 우리의 교육여건을 생각하면서 그토록 귀엽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우리의 기대를 안고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란 생각을 지니고 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들이 과연 어느 정도가 될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이러한 선생님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은 나라의 힘이 그만큼 커진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교실의 피그마리온」을 확산시켜 나가는 방법은 없을까.피그마리온의 효과를 우리 교실의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필자만의 염원이겠는가.
  • 백년지난 「드레퓌스」가 화제로 됨은(박갑천 칼럼)

    19세기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입에 곧잘 오르내린다.알자스태생 유대계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에 간첩행위를 했다해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단순해 뵈는 이사건이 유명해지는 것은 반유대감정에서 시작된데다 당시의 프랑스 정치상황과 맞물려 시끄러워지게 되었고 마침내 『민주주의세력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사건은 작가 에밀 졸라로해서 더 유명해진다.그가 「나는 탄핵한다」는 공개장을 대통령에게 낸것이 공화정 승리의 분수령을 이루었던것.사건 12년후인 1906년 최고법원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판결한다.한데도 군부는 무죄를 공식인정하지 않았다.그런데 드레퓌스가 종신형선고를 받은 1894년으로부터 1백년이 흐른 이제 이르러서 공식인정한 것으로 리베라시옹지가 보도한다.드레퓌스는 눈감은지 60년만에야 완전히 명예를 되찾은 셈.역사가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이사건은 우리 역사에서의 사육신의 신원을 생각해보게도 한다.죽을 때는 「역적」이었건만 죽은지 2백여년에 복관되면서 절의숭상의 대상으로 되는것 아니던가.특히 중종반정이후 명예회복의 소리는 높아진다.그전에도 있긴 했으나 왕실과 관계되는 것이기에 발언에 위험이 따랐다.가령 성종때의 일을 보자.어느날 김종직이 성삼문은 충신이라 했을때 임금의 얼굴색은 금세 변한다.점필재에게는 응구첩대의 순발력이 있었다.『…하오나 불행히도 우리조정에 변고가 생긴다면 신은 성삼문이 되겠습니다』고 하자 안색은 펴졌다(이이의 「석담일기」하권).이런 과정을 거친 「충신」으로의 반전이었다. 이와는 반대되는 일도 세상에는 물론 있다.죽은 다음 오명이 덧씌워지는 경우들.화려했던 생전도 그로해서 어두워져버린다.그런 경우들 가운데는 더러 주검위에 매질을 당하는 굴욕을 받는 수도 있다.초나라 평왕의 주검은 오자서에 의해 아홉마디 철장으로 3백대를 얻어맞는 것이 아니던가.충신인 자기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죽인 한을 그렇게 푼 것이었다. 조작된 역사는 언젠가 뒤집힌다.뒤집히지 않고 묻혀버리는 경우도 없는것은 아니리라.하지만 어찌 하늘의 눈까지를 기일수있다 하겠는가.그 하늘의 눈이 있기에 백년 2백년이 지나서도 흑백은 가려진다.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그점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것인지.드레퓌스사건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일깨워주는 바가 크다.
  • 「신문경쟁의 문제점」 언노련 토론회/성대 이효성 교수 주제발표

    ◎“신문 과당경쟁이 질을 떨어뜨린다”/내용·논조 차별화… 구독자의 주권 인정해야/무가지 살포·경품 제공 등 강력한 단속시급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30일 하오 2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신문 경쟁의 실태와 문제점」이라는 주제로 정계·학계·언론계 인사 1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토론회를 가졌다.다음은 「신문업의 과당경쟁과 개선방안」이란 제목으로 주제발표에 나선 성균관대 이효성(언론학)교수의 발표를 간추린 것이다. 신문업계의 경쟁이 내용의 다양성을 줄이고 질을 떨어뜨리는 양적 경쟁이어서는 곤란하다.현재 우리 신문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면증대와 같은 양적 경쟁은 더 좋은 기사와 정보를 발굴토록 하는 자극제가 되기 보다는 신문의 질을 떨어뜨리는 부정적인 효과만을 갖기 쉽다. 신문업계가 과열 경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우선 신문사주나 경영진이 지나친 상업주의와 선정주의를 지양하고 공공성을 상업성에 우선시키는 공공철학을 확립해야 한다.둘째,신문을 특성화해 제품을 차별화해야 한다.신문들이 내용과 형식,논조에서 뚜렷한 특성을 가진다면 자연스럽게 독자층이 구별되고 처절한 이전투구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셋째,신문배달 및 판매의 협동체제를 구축해야 한다.신문사들이 공동으로 배달공사 등을 설립하여 배달과 판매를 공동으로 한다면 목 좋은 보급소를 더 많이 확보하려는 경제적 부담과 폐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넷째,광고수입 비율을 적정화해야 한다.광고수입은 경기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불안정한 수입이므로 신문이 기업으로서 안정되려면 광고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다섯째,일선 신문인들은 노조활동을 강화해 사측에게 과열된 양적 경쟁에 빠져들지 않도록 견제 역할을 해야 한다.신문사 노조는 사측의 인사권 횡포,증면경쟁속의 생존논리,자사 이기주의에 휘둘려서 유야무야한 상태이다.여섯째,공정거래위원회등 관계당국은 구독강요,무가지 살포,경품제공 등 불공정 거래행위를 엄격하게 단속하고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일곱째,신문의 과당경쟁을 막는 개혁의 하나로 신문발행부수 공사(ABC)제도를 강력히 시행해야 한다.초기에는 몇몇 신문에게 생존의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지만 부작용을 우려해 이 제도를 미루는 것은 과당경쟁이라는 더 큰 부작용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는다.여덟째,신문시장의 독과점을 제도적으로 방지해야 한다.신문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자유주의 이론의 정신을 구현하려면 신문을 시장에 맡기되 소수의 신문이 신문시장을 지배하는 상황을 막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아홉째,신문의 과도한 힘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구독자의 주권의식,신문에 대한 비판능력,신문을 견제할 수 있는 조직력을 키워야 한다.기존의 언론유관기관이나 사회단체는 구독자의 주권을 강조하고 그 운동을 지원해야 한다.현재 우리나라에는 방송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시청자 운동단체는 더러 있지만 신문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운동단체는 소수이고 그활동도 지속적이지 못하다.
  • 종합생활기록부/성적 서열평가서 인성 종합평가로

    ◎종합석차 폐지… 과목별 등위 백분률 표기/점수는 보조기록부에… 대학 요청때 제시 교육개혁안에서 도입된 종합생활기록부는 교과성적에 의해 15등급으로 구분해 획일적으로 서열을 매기는 현행 내신제도를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총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이는 입시위주로 운영돼 왔던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유도하기 위해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과 적성·인성을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삼고 있다. 이런 방향에서 종합생활기록부는 ▲인적사항 ▲학적 ▲출석과 결석 ▲신체발달 ▲심리검사 ▲진로지도 ▲교과학습발달 ▲특별활동 ▲행동발달 등 아홉가지를 기록하던 지금의 생활기록부에서 ▲수상경력 ▲자격증 취득 ▲봉사활동 상황을 추가 기록토록 하고 있다. 이 추가기록이 학생의 전인적 발달 상황을 충분히 체크할 수 있을 지는 속단하기 어렵지만 교과 성적외의 능력을 살펴볼 방편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변화는 교과학습의 기록 양식이 바뀐다는 점이다. 과목별로 점수를매기고 학급석차와 학년석차를 내는 방식을 바꿔 교과별 성취도를 90%이상은 수,80∼90%미만은 우,70∼80%미만은 미,60∼70%미만은 양,60%미만은 가로 5등급으로 구분해 표시하는 것이다. 학년 석차는 기록하지 않지만 교과별 석차는 백분위로 표시한다.또 원점수는 생활기록부에 쓰지 않고 보조기록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요구가 있을 때는 제공한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의 3학년 국어과목의 평균이 1백점 만점에 85점이라면 종합생활기록부의 성취도란에는 「우」로 기록되고 과목 학년 석차가 5백50명 가운데 13등이라면 백분위 석차는 2.4가 된다.이는 같은 학년의 학생 가운데 2.4%안에 든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은 교육부가 제시한 두가지 종합생활기록부 양식인 이른바 「단매형」과 「파일형」 가운데 A3용지 양면 한장을 쓰는 단매형이다. 파일형은 A4용지 6∼8장으로 구성되며 그만큼 기록할 면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그러나 무엇보다 파일형이 단매형과 다른 것은 교과학습상황의 기록 양식이다. 파일형은 교과마다 2∼3개의 성취목표를 정해 놓고 각각 성취도를 매긴다는 점이 특이하다.가령 과학 과목의 경우 ▲기본개념의 이해 ▲탐구 능력 ▲과학적인 태도로 나눈다.각각의 성취목표마다 A∼E의 5등급으로 평정을 하고 이를 종합해 그 과목의 성취도를 수∼가로 표시한 뒤 백분위 석차를 내는 것은 단매형과 똑같다. 파일형은 성취목표별로 학생의 강점과 약점을 상세히 기록할 수 있고 다른 항목에도 많은 정보를 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교사의 업무가 몹시 늘어난다는 단점도 있다.또 용지 양이 많아 복사가 불편하고 과연 상세한 정보가 입시 전형에 활용될 수 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운영상의 이런 번거러움 때문에 파일형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다. 종합생활기록부에 새로 추가된 봉사활동은 학기중에 담임이 기록해 두었다가 학년말에 활동시간과 횟수를 합산해 분류,기록한다.수상경력은 학교장이 인정하는 교내의 상과 학교장 추천으로 참가한 대회에서의 수상,시·도 교육청 또는 학교에서 인정하는 기관의 표창으로 제한한다. 자격증 취득은 국가에서 인정한 기관에서 취득한 자격을 원본을 확인한 뒤 담임이 써 넣도록 했다.
  • 신세대 시각(21세기 한­일 새 지평:5·끝)

    ◎한일 공존을 위해 풀어야할 숙제들/우월의식·불신 제거로 과거치유를/상호신뢰 넓혀 「갈등 역사」 청산/청년층 격의없이 자주 만나야/김홍진 ▲75년생 ▲서울대사범대 국민윤리교육과 2년 1995년 8월15일.우리는 「광복」이라 하고,현해탄 건너 일본에서는 「패망」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일어난 지 만 50년이 되는 날이다.하지만 일본의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과거책임은 분명 우선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식민지배가 낳은 분단이라는 고통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민족의 불행과 주권상실의 아픔을 하나의 유전형질로까지 간직하게 된 우리는 까닭도 모르는 채 분단이라는 비극도 떠맡아왔다. 그동안 각자의 길을 달려온 남과 북은 이제 민족의 동질성 회복마저 운운해야 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36년간 이어진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힘겹게 떨치고 난 후에도 아득한 절망과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참된 광복은 통일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타당성을 갖는다. 과거청산도 아직 풀리지 않는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한민족의 지난 50년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청산의 역사인 반면 우리에게 빚을 진 일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만해져만 갔다.해방 이후 한·일 역사는 마뜩한 뒷풀이가 없었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이처럼 식민지배와 분단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르게 풀어나갈 주체와 방향은 어떤 것일까. 기나긴 역사에 비해 인간의 삶이 제한적인 만큼 식민지배의 고통을 직접 당한 기성세대가 일본의 죄값을 추궁하는 역사가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는 없다.이제는 청년학생이 주축이 되어 한·일관계의 새 지평을 열어나가야 할 때다. 앞으로 한·일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갈 청년은 「신세대」로 불린다.일본도 이미 80년대에 기존세대와 가치관의 단절을 고한 「신인류」의 출현을 맞이했다. 신세대 혹은 신인류가 오도된 역사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앞으로의 역사도 알력과 대립으로만 점철돼서는 안될 일이다.다가올 세기는 하나된 한반도의 젊은이와 국제사회의 중추로 자리잡은 섬나라 젊은이의 공존의 시대이어야 한다. ○젊은이 역할 중요 이를 위해서는 두 민족간의 오랜 원한과 그릇된 우월의식,상호신뢰를 허무는 어줍잖은 영웅의식,이를 기반으로 등장하는 극단적 민족주의,공동이익을 저버리는 일방적인 국가행위 등을 극복해야 한다. 한반도와 일본의 정황은 아직도 이같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한반도는 아직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이고 일본도 이같은 긴장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제국주의자의 망언은 최근까지 계속되면서 한·일관계를 이간질하고 있다.최근에는 자위대증강,핵물질보유 등 군사력 신장과 극우파의 창궐로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감정도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다.일본에서는 얼마전 염한론이 한창 회자됐다.『얼마나 더 사과해야 되나』『이제 한국이라면 지긋지긋하다』는 소수 일본국민의 반한감정이 드러난 형태였다. 우리 국민도 대일감정을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싫다고 말한다.그것은 과거에 대한 혐오일 수도 있으나 일본이 보여주는 반성의 태도에 수긍할 수 없다는 불만 때문이기도 하다.그들이 보여주는 지나친 민족우월의식은 거부를 넘어 두려움의 대상이기까지 하다. ○영웅의식 극복을 이같은 현실을 극복하고 한·일관계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정부는 좀더 대범하고 적극적인 대일외교를 수행,한국과 일본 양국이 헌법에서 밝힌 바대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역사적 대의에서 주도권을 쥐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일본도 제국주의의 꿈을 버리지 않은 채 지역패권을 추구,공존해야 할 이웃국가에게 수고를 끼친다면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한·일 양국이 다가올 세기의 공존과 번영을 이끌어갈 청년학생에 대한 투자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양국의 청년이 바른 역사관을 세우고 양국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꾸준한 만남의 장이 조속히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참 공영의 미래향한 선결과제/상대 바로알기가 선린우호 첫 걸음/무지·몰이해서 오해·마찰 비롯/교육·문화 등 교류확대 급선무/나카가와 도시히코 ▲71년생 ▲일 무사시대 사회학과 4년 「한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런 나라다」라고 답할 수 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어느 정도나 될까. 김치,치마저고리,메이드 인 코리아 운동화·T셔츠 등으로 밖에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지식의 모자름.나 자신 이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가까운 나라이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먼 나라.왜 그런가.그 답을 찾기 위해 올해 봄 한달 반동안 한국에 단기 유학했다. ○부정적 생각 깊어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그저 누님 내외가 서울에 살고 있다는 관계밖에 없었다.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알지 못한다」.이 한 마디로 집약되는 것이 아닐까. 역사 문화 그리고 말.고대 불교와 유교의 전래,고려청자와 이조백자가 일본의 도예에 기초를 제공했다는 것,도쿠가와 막부와 조선의 교류 등 일본에 문화적 영향을 주어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지고 있는 전쟁책임에 따른 부채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까,아무래도 한일관계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고 말았다. 종군위안부문제 등 전후처리에 관련된 일도 잘 이해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실감을 갖지 못한 채 「전후책임」이라는 네글자가 눈 앞을 그냥 지나쳐 「부채」라는 프레셔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한국에 대해서 막연한 혐오감을 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어와 문법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로 닮았다는 것을 유학에 임해서 처음 알았다. 또 이러한 문제이전에 한국인을 잘 알지 못했고,한국인들이 속마음으로 일본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도 몰랐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씨의 강연에 찾아가 볼 기회가 있었다.예상이상으로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나는 강연장에 들어갈 수 없어서 포기하고 돌아갈까 할 때,입장을 할 수 없었던 한국인은 대단히 사납게 주최자측에 따지고 들어 어떻게 해서든 강연장에 들어가려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조금이라도 빈틈이 있으면 문을 향해서 밀려 들고 밀려나오면 또 나아갔다. ○서로의 고민토로 혼잡을 빚는 사람에 시달리면서 나는 한국인의 과격함에 압도당해 강연의 건은 아무렇게 돼도 좋게 됐다. 또 한국에 가기 전 내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혐오감을 받게 되지 않을까하고 내심 불안했지만 그것은 지나친 생각이었다.특히 같은 세대의 한국 젊은이들과 해외의 문화의 유입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서양문화를 모방하는데 지나친 것은 아닐까라고 서로 닮은 고민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 대단히 기뻤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일본어 책을 읽고 있을 때 나이 많은 남자가 일본어로 나에게 「일본과 한국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어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생각을 말해 줄 수가 없었다.그 남자가 너무 유창한 일본어를 말하고 있어서 「일본은 한국에 대해 거듭 전쟁책임을 져야한다」등등 가볍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앞으로 서로 나라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것은 우리들 세대다.서로 알지 못하고 있는데도 알고 있는 듯이 하면서 전후 50년의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문화가 다르면 이런저런 부분은 받아들여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 허용하기 어려운 부분을 줄여나가는 것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교육 문화교류 등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깊은 이해심 필요 다른 나라와의 오해와 마찰은 상대국에 대한 지식부족,무이해로부터 생긴다.일본인도 노력이 부족하지만 한국의 국민들도 일본이라는 나라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아주기를 바란다. 한일 양국민은 감정적으로 의미도 없이 서로 혐오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잘 안 뒤에 양자가 이르지 못한 부분을 서로 지적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 우호관계를 지속될 수 있도록 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부터 우선 한일관계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배우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다.
  • 8·15 쉰돌… 이젠 오십보백보 안되게(박갑천 칼럼)

    셈(수)의 이름은 세는 현상과 많이 관련된다고 보아야겠다.하나·둘·셋…하고 세다가 두자리수인 열에 이르면 손바닥이 펴지면서 열린다.그것은 열다(개)는 뜻과 같아서 흥미롭다. 그다음 두자리수는 스물·서른·마흔·쉰·예순·일흔·여든·아흔이다.주목되는 사실은 「스물」만 빼고는 모두 「흔」을 항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소리가 변화를 거쳤고 맞춤법따라 표기함으로 해서 달라보인다는 것뿐이다.서른은 셋, 예순은 여섯, 여든은 여덟과 관계되지 않은가.「쉰」도 「쉬흔」이 줄어진 형태.「다섯」과는 떨어진 소리지만 『마흔아홉,쉬흔…』하면서 온(백)의 가운데 까지 왔으니 일단 숨돌려 쉰다(휴)는 뜻을 담았다고 해석해 봄직하다. 하지만 여기서 「쉰다」는 것을 멈춘다는 뜻으로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쉰하나,쉰둘…』을 세어나가기 위해 숨을 한번 새롭게 「쉬어」본다는 뜻이 더 짙었던 것 아닐지.가령 공자가 『쉰살에 이르러 천명을 알았다』(오십이지천명:「논어」위정편)고 했던 뜻도 그것이다.세상이치에 대해 그때 비로소 어섯눈을 뜨게되었으므로 참다운 내것으로 만드는데는 그다음이 더 중요하다는 고백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논어」의 술이편에 보이는 말도 그렇다.『(내나이 몇해를 더하여) 쉰에 역경을 배우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면서 한뉘로도 모자랄 깨달음의 어려움을 밝히고 있지않은가.잠깐 숨을 내쉬면서 원숙을 기약하는 나이가 쉰이라고 말해볼수 있을 법하다. 「회남자」(원도훈)에 쓰인 바 위나라 대부 거백옥의 성찰하는 자세도 쉰을 표준삼고 있다.거백옥은 공자도 군자라면서 존숭했던 사람.그는 『쉰살에 이르러 마흔아홉살까지의 잘못을 알았다』(오십이지사십구년비).나이 쉰이란 그렇게 반백년의 삶을 거울삼아 굳세고도 옹골찬 삶에의 숨을 쉬는 연륜이라고 해야겠다. 올해의 8.15광복절은 그 쉰돌맞이라는 점에서 한결 뜻이 깊어진다.그게 어디 짧은 세월인가.일제강점의 굴레아래 살았던 35년보다도 15년이나 더 긴 햇수가 아닌가.변하고 발전하고 한것이 엄청나다.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49년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두동진 경우 또한 한두가지가 아니다.영욕 엇섞인 49년.수렁속을 헤맨 발자취에 대한 성찰을 뼈아프게 해야한다.쉰살부터서의 걸음걸이가 더넘에 겨워 오십보백보로 될수는 없다.빛나는 내일을 여는 대열에 발맞춰나가는 기점으로 삼을수 있어야겠다.
  • 서울 각 구청/“애향심 높이고 지역특성 부각”

    ◎새 상징물·로고 제작 「붐」/구로­아홉 노인/은평­비둘기/양천­태양·물 등 형상화/공모통해 주민 행정참여·단합 유도 민선단체장의 취임으로 본격적인 주민자치시대가 열리면서 지역주민의 애향심을 높이고 자치단체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가 상징물과 휘장·로고 등을 앞다투어 새로 제작하고 있다.이러한 움직임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취지에서 지방자치의 개막에 걸맞는 참신한 이미지를 심기 위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자치단체들은 특히 새로 정할 상징물에 대해 주민을 대상으로 직접 공모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자치단체 행정에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편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서울 구로구는 최근 「도시이미지프로그램」의 하나로 구를 상징하는 로고와 휘장을 구민 공모방식으로 새로 만들었다.휘장은 쾌적한 환경을 상징하는 초록색 바탕에 주민의 단결과 화합을 뜻하는 둥근 타원과 흰색 느티나무를 그려넣었다.여기에 구로구의 탄생에 얽힌 전설속의 노인 9명을 9개의 푸른 점으로 형상화했다. 양천구도 지난달 15일 구의 이름을 나타내는 태양(양)과 물(천)을 동그라미와 물결무늬 등으로 형상화한 휘장과 구기를 새로 제작했다.타오르는 희망을 상징하는 주황색 동그라미를 미래지향적인 구의 발전상을 나타내는 3개의 선이 둘러싸고 있고 그 아래쪽으로 깨끗함과 생동감을 상징하는 청색 물결무늬를 새겨넣었다. 은평구는 구민한테 공모한 대추나무열매와 비둘기를 조화시킨 상징마크를 민선구청장 취임직후인 지난달 29일 구의회 심의를 통해 최종확정했다.서대문구도 최근 엑스포 디자인연구소에 맡겨 구민의 화합과 애향심을 상징하는 두개의 타원이 겹쳐 있고 구의 대표적 명물인 독립문을 그린 상징도안을 새로 만들었다. 성동구는 최근 1천8백만원의 예산을 들여 세종대 산업디자인연구소에 상징물제작을 의뢰,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산을 형상화한 작품을 최종채택했다.지난 3월 성동구에서 나뉜 광진구는 일간지 광고를 통해 공모한 42점의 구기 시안 가운데 당선작을 오는 25일 확정,발표한 뒤 오는 10월쯤 만들 예정이다.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다.대구시는 최근 시민 3천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팔공산을 상징물로 선정하고 7백만원의 시상금을 걸어 주민을 대상으로 도안을 현상공모했다. 경북도민의 기상과 적응력을 상징하는 뜻에서 상징나무를 느티나무로 바꿨으며 강한 의지와 서민적 기품을 나타내는 백일홍을 도의 꽃으로 정했다.웅비하는 경북을 뜻하는 왜가리는 도의 새로 선정했다. 강원 강릉시와 원주시는 민선시장 취임직후 시청를 상징하는 휘장과 상징물 배지를 만들어 이곳을 방문하는 외부손님과 주민에게 지역홍보 치원에서 나눠주고 있다. 충북은 속리산 정이품소나무 사진액자 1천개를 만들어 주병덕 지사를 찾는 방문객에게 충북을 기억하라는 뜻에서 선물로 주고 있다. 충주시는 충주·중원의 통합과 민선자치단체의 출범을 기념하는 뜻에서 고도 충주를 기리는 기념탑이나 상징조형물을 내년까지 세우기로 하고 세부계획을 짜고 있다. 새로 신설된 인천의 연수구와 계양구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로고와 상징물,구민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구청장의 관심 아래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서울 광진구청 박기호(42)문화계장은 『구민의 애향심을 높이고 우리 구의 독자성을 강조한다는 뜻에서 상징물과 구기·구가 등을 구민을 상대로 공개모집하고 있다』고 밝혔다.
  • 기념공연 「혼자사는 세여자」 연습 구슬땀 원로배우 백성희씨

    ◎연극은 내 신앙… 영원한 현역으로 남을터”/한줌의 연기위해 우주만큼 생각해야/「나도 인간이…」 혼혈가수 나타샤역이 가장 인상적 『내일을 꿈꾸어도 오로지 무대만 보이고 어제를 뒤돌아 보아도 무대만 펼쳐져 있다』 원로연극배우 백성희씨(70).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연극이라는 번제에 희생제물로 바쳐온 그는 요즘 어느 때보다 「현역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연극을 신앙삼아 무대를 지켜오기 52년,연극인생 반세기를 넘긴 그앞에 자신을 위해 후배들이 정성을 담아 마련한 「백성희 연극인생 52주년 기념무대」가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오는 8월 1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정동극장에서 공연될 「혼자 사는 세 여자」(이반 멘첼 작·정일성 연출) 막바지 연습에 여념이 없는 백성희씨를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만나 보았다. ­이번 공연은 범 연극계가 뜻을 모아 축제형식으로 치러진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개인적으로 연극인생 52주년 기념공연을 갖는 소감은 어떤 것입니까. 『지난해 「노부인의 방문」공연 때부터 기념공연 얘기가 나왔습니다.하지만 저의 미욱하다할 정도의 고지식한 성격때문에 선뜻 수락을 못했죠.저를 핑계삼아 나른한 연극계에 한판 잔치를 벌여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이번에 용기를 내게 됐습니다』 ○43년 「봉선화」로 데뷔 ­국립극단 단장 재직중 「창작활성화 운동」까지 벌였는데 왜 하필 번역극을 올립니까 『적정인원과 예산에 맞는 소품을 찾다보니 불가피했습니다.다행히 이 작품이 동양적 정서를 바탕으로 중년여성의 새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잔잔하고 재미있는 연극인 만큼 잔치분위기엔 썩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정통연극의 본류에서 점차 멀어져가는 「대학로연극의 슬럼화」경향에 우려를 표시하는 백씨는 이번 무대를 통해 중년관객들이 차분히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진정 어른스런 연극을 보게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연극의 세계에 입문하게된 어떤 극적인 동기라도 있었는지요. 『연극에 대한 제 동경심의 뿌리는 국민학교시절까지 맞닿아 있습니다.5학년땐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외삼촌이 일본 「일활소녀가극단」에서 발행하는 월간지를 한권 사다 주셨습니다.실크 해트에 연미복을 입고 파리풍의 춤을 추는 소녀가극단의 원색사진이 어찌나 멋있게 보였든지…저는 그때 3학년 때부터 가슴속에 묻어뒀던 「배우」라는 단어를 새로 발견했습니다』 ­그 무대배우에의 꿈은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를 만나 이루어지게 되었습니까. 『동덕여고 3학년때 신문에 난 「빅타무용연구소 단원모집」광고를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한달음에 연구소로 달려갔고,5대1의 경쟁을 넘어 당당히 합격했죠.일활소녀가극단에 대한 환상만 없었어도 그 길로 달려가진 않았을 거예요.결국 월간지 한쪽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은 셈입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사회에서 양반집 규수가 연극을 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본격적인 연극활동은 언제부터였습니까. 『「빅타무용연구소」에 들어간 이듬해 어쩌다 대역으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무대에 선 것이 인연이 돼 43년 극단 현대극장에 정식 입단하게 됐습니다.데뷔작은 함세덕 작·유치진 연출의 「봉선화」였어요.무명의 신인이 일약 주인공을 따내 화제가 됐었죠.아버님의 호된 반대로 사흘씩이나 앓아 누운 끝에 얻은 자리라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결혼을 잘한 덕분인지 연극을 시작할 때는 힘들었지만 그 이후로는 연극이외의 문제로 고통받지 않았다』고 언젠가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결혼생활에 대해 말씀좀 해주시죠. 『지난 44년 열아홉살 되던 해 소설가 나도향의 친동생인 나조화씨(66년 작고)와 결혼했습니다.저보다 열네살 연상인 남편은 배재고보,연희전문을 거쳐 일본대 창작과를 나온 희곡작가로 한때 야구선수로 활약한 적도 있어요.바깥 양반은 저의 연기스승이자 후원자,평론가였으며 지금도 영원한 정신적 귀의처입니다』 ­부군은 퍽이나 다감한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제가 먼저 집에 돌아와 대본을 읽고 있다가 그분이 들어오는 기척이 나 뛰어나가 맞으면 그분은 극구 말리곤 했어요.그냥 계속 대본을 보라는 거죠.당신은 늘 연극에만 신경쓰라고 다독거렸고,저는 마음놓고 연극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스승·후원자 ­데뷔이래 4백여편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과 배역은 무엇입니까. 『유치진 선생이 직접 쓰고 연출하신 반공극「나도 인간이 되련다」(57년 작)를 단연 대표작이자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들고 싶어요.서울 토박이인 제가 맡은 역은 거센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혼혈 여가수 「나타샤 김」인데 너무 추해 최은희씨도 황정순씨도 모두 거절했던 역이죠.말로만 듣던 러시아 「꽃박춤」을 배우느라 했던 고생은 또 어땠구요.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72∼75년,90∼93년 두차례에 걸쳐 국립극단 단장직을 맡으셨습니다.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사실 두번이나 사표를 썼었습니다.무대에만 몰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행정가보다는 순도 높은 무대예술인으로 남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연극단체장은 되도록이면 추대형식으로 뽑는게 좋다고 생각해요』 ­배우에게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자신을 작중인물화하는 배우와 작품속의 인물을 자기화하는 배우중 어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작중인물을 자기화해 스타로서의 개성을 떨치는 것도 좋지만 저는자신을 작중인물화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전 배역을 맡으면 제자신을 철저히 지워버리는 일부터 합니다』 ­연극배우 백성희를 압축하는 말로 태강즉절이란 표현을 종종 씁니다.너무 대가 강해 꺾어지기 쉽다는 뜻일 텐데요. 『일면 수긍이 갑니다.고집스러움 없이 어떻게 「냉정한」연극무대를 50년넘게 외곬으로 지킬 수 있었겠어요.시류를 외면하고 하고싶은 연극만 한다해서 가끔씩 「외계인」「탱크」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외계인·탱크 별명도 ­연극배우로서 갖춰야 할 이상적인 조건과 자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확한 대사와 치밀한 동작,폭넓은 연기와 성실성을 우선 꼽고 싶습니다.모래알 만큼의 연기를 위해서도 우주만큼의 생각을 해야하는 것이 연극인만큼 연극배우에게는 스스로 배우고 노력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본명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부모님이 본래 지어주신 이름은 이어순이입니다.백성희는 예명으로 신극운동의 선구자이셨던 서항석 선생이 붙여주셨어요』 ­고희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건강(몸매)유지 비결이라도 있는지요. 『요가를 응용해 제가 직접 개발한 자리운동(일종의 맨손체조)을 수십년째 아침마다 30분씩 해오고 있어요.배우는 몸이 바로 예술의 도구인 만큼 끊임없이 다듬고 단련해야 합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주연한 연극「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새털같이 가벼운 여자 블랑시에 손색없는 24인치의 허리와 여전히 낭랑한 미성을 뽐내고 있다. ­은퇴시기는 언제쯤…. 『그런 말 하지 마세요.지팡이를 짚고라도 언제까지나 무대에 서고 싶거든요』 무대이외의 삶이란 없고 연기가 생리처럼 돼버려 오히려 연극을 안하고 있으면 불편을 느낀다는 「영원한 현역」백성희씨.그는 현재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한 조그만 빌라에서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외아들 결웅(50)씨 내외와 함께 결곱게 살고 있다.
  • 4당 체제속 구 양김구도 복원노려/김대중씨 복귀와 정국전망

    ◎세대교체 맞불 확산땐 정치권 긴장 지속/신당의 지역당 이미지 극복 노력이 변수 ○대권도전 의심 안해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18일 기자회견에서 정계은퇴 선언을 2년7개월만에 번복하게 된 이유로 두가지를 들었다.하나는 지금이 국가적 위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주당이 제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주당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신당창당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정계복귀 선언이 그의 네번째 대권도전을 위한 것이라면 신당은 그의 목표달성을 위한 확실한 발판인 것이다.물론 그는 이날 대권도전에 관해서는 명확한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점을 의심치 않는다. 무엇보다 지방선거 승리가 그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했고 『이번만은 상황이 다르다』며 대권도전의 야망에 불을 지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내년 총선에 승부수 김이사장은 이제 더이상 장막뒤의 지도자가 아니다.그가 만들 신당은 민주당 의원들의 대거 합류로 원내 제2당이 확실하다.그는 신당의 총재를 맡을게분명하다. 그의 복귀로 정치권은 민자·민주·자민련과 신당 등 4당체제로 재편된다.그러나 민주당은 남은 식구들간의 당권경쟁으로 한동안 자기위치를 찾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3당구도로 봐야할 것 같다.이는 곧 「신 3김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당분간은 DJ(김이사장)와 JP(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연대한 가운데 김영삼대통령에게 맞서는 형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김이사장은 이날 회견에서도 『향후 자민련과의 연대를 적극 모색할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또 『개인적으로 대통령제를 지지하지만 내년 총선에서 나타날 민의를 겸허히 수용,필요하면 태도를 바꿀 수도 있다』고 내각제 개헌문제에 관해 한자락을 깐 것도 자민련을 의식했기 때문이다.실제로 지역적 기반에 의존해 온 김이사장으로서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감안할 때 내각제가 보다 현실성이 있다. ○내각제 무력화 시도 그러나 권력구조에 대한 김이사장의 선택은 내년 총선 결과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자신의 목표대로 내년 총선에서 민자당을 제치고 신당이 원내 제1당이 된다면 야권의 대표주자로 김대통령과 정국주도권을 양분하는 양김시대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자연스레 권력구조에 대한 선택권도 김이사장의 수중에 떨어질 공산이 커지게 된다.이에 이르기까지 DJ와 JP 두사람은 줄기차게 자신들의 실체 인정을 요구하며 내각제 개헌문제를 적절히 활용할 것 같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이들의 요구에 응할 조짐은 아직 없다.오히려 대대적인 세대교체 공세로 두사람의 무력화를 꾀할 전망이다.좋든 싫든 세대교체와 내각제 개헌은 이제 정치권의 핫이슈가 돼 버린 셈이다.당연한 결과로 정국은 긴장의 연속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신당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우선 지역당의 한계극복이 문제다.사당의 부정적 이미지도 강하다.까닭에 「전국정당」은 여전히 요원한 과제다.8월말로 창당일정을 늦추면서 잔류 민주당과의 통합을 내심 바라고 있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70%에 가까운 비난여론도 신당의 행동반경을 제약할 요소로 꼽힌다. 마지막 대장정의 길을 떠난 DJ가 과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김대중씨 회견문 요지 오늘 저는 참으로 고뇌에 찬 마음과 죄송한 심정으로 저의 정계복귀에 대한 의사를 국민 여러분께 밝히는 바입니다.1992년12월19일 국민 여러분께 드린 정계은퇴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정계은퇴시 김영삼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고 그 분의 국정운영을 편안하게해 드리고자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2년반이 지난 오늘의 현실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것입니다.이 점은 구구히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이번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준엄한 국민적 심판으로 명백해졌습니다. 민주당이 걸어온 상황을 보면 야당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 왔을 뿐 아니라 김대통령으로부터 대화의 상대로 조차 취급받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민주당이 견제와 비판의 기능을 제대로 했던들 오늘처럼 현정권이 오만에 빠져서 국정을 이토록 그르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민주당내 사정을 보면 당은 「한지붕밑 아홉가족」 같은 파벌양상을 보여왔습니다.당은 없고 파벌만 있습니다.당대표의 지도력부재,나눠먹기식 당운영,파벌과 금력을 동원한 당권경쟁으로 당은 절망적인 혼란과 기능마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은퇴 당시 기대했던 대로 정부와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면 제가 다시 정계에 복귀할 엄두도 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저는 오랜 시간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습니다.그 결과 비록 지금은 비판을 받더라도 당과 국정을 바로잡는데 저의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는 것이 「행동하는 양심」을 평생의 신조로 살아온 제가 택할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많은 국민들과 당원들이 왜 당내에서 개혁을 하지 않고 신당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의아해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현재 민주당으로서는 당내개혁이 전혀 불가능합니다. 첫째,현 민주당지도부는 당을 잘못 이끌고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습니다.둘째,지금 상태로 전당대회를 치른다면 또다시 6천여명의 대의원을 상대로 파벌이기주의와 금력에 의한 매수가 판을 칠 것은 분명합니다.셋째,참신하고 역량 있는 인재를 영입하여당의 체질을 개선하고 정책을 발전시켜야 하지만 지금의 나눠먹기식 정당의 현실로서는 이것이 전혀 가망이 없습니다. 저는 지난 40년동안 많은 시련을 무릅쓰고 민주화와 평화통일에 노력해 왔습니다.이제 그 노력의 완성을 신당을 통해서 이룩하여 국민 여러분께 마지막 봉사를 하고자 합니다.
  • 「5대 개혁과제」 복귀용 구호 인상/DJ 회견 내용속의 「비논리」

    ◎정국 위기론­뚜렷한 근거없이 아전인수식 진단/민주당 내분­상당부분 자기책임… KT에 떠넘겨/통일의 주역­지역 등권론 외치며 민족통합 될까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18일 기자회견내용은 2년7개월만에 대국민약속을 뒤엎고 정계에 복귀,민주당을 깨고 신당을 창당해야만 하는 불가피성을 국민에게 이해시키기에 미흡했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반응이다.「솔직하고 진솔한 자세」를 다짐했지만 정작 회견의 많은 부분은 아전인수식 변명으로 일관한 인상이 짙다는 지적이다. 김이사장은 정계은퇴 번복에 대한 사죄대목은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한마디로 넘어가고 은퇴당시와 현재의 상황변화가 엄청나 번복이 불가피하다는 점만 강조했다.현상황을 「심각한 국가적 위기」라고 진단하는 그는 『은퇴당시 기대대로 정부와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면 정계에 복귀할 엄두도 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말하자면 정부와 야당인 민주당이 모두 잘못해 국가적 위기상황을 초래,그 해결을 위해 자신의 정계복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현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그의 인식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이 곧바로 자신의 정계복귀를 정당화하는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각론으로 들어가 민주당의 난맥상과 관련,김이사장은 「9인9색」의 계파정치를 문제삼았다.그러나 그 원인의 대부분을 그 자신이 제공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즉 은퇴이후에도 권노갑 부총재를 대리인으로 하여 당무에 대한 수렴청정을 계속해왔으며 이것이 곧 이기택총재의 지도력 약화,민주당의 분란으로 연결돼왔다는 것이다. 이총재측은 『김이사장측이 이총재와 당을 흔들어 내분을 일으켜놓고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있다』며 적반하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한지붕밑 아홉가족」이 된 것도 김이사장의 원격조정을 위한 「분리·견제」전술의 결과라는 주장이다.또 총재를 「얼굴사장」으로 격하시키고 「오너」가 설쳐댄 결과 이총재가 대통령의 대화상대가 될 수 없었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느냐고 따진다. 경기지사 선거패배의 책임을 묻는 것 또한 명분이 약하다는 분석이다.서울에서 승리한 것은 오로지 김이사장의 공로이고 경기도 패배는 이총재만의 책임이라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며 책임을 묻더라도 당헌·당규절차에 따라 전당대회를 통해 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전당대회에서의 폭력사태등 불상사가 우려된다고 했지만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은 일체 생략한 채 신당을 창당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이다. 김이사장이 제시한 신당의 5대개혁과제에도 모순이 적지 않다.우선 젊은 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정치를 표방했지만 정국을 「후(후)3김시대」로 역류시킨 그가 과연 이런 역할을 자임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또 개혁과제로 「단계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의 주역」을 자임하고 나선 데 대해서도 지역등권론을 들고나와 지역분할구도를 더욱 강화시킨 그가 민족의 대통합을 추진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전체적으로 김이사장이 제시한 신당의 개혁과제는 앞으로의 추진과정을 지켜봐야겠으나 자신의 정계복귀를 정당화하는 구호에 불과한 인상이라는 게정치권의 중론이다. ◎「대권 4수의 길」 DJ의 정당편력/87년 평민당 창당… 두번째 대권도전 고배/「꼬마 민주당」과 합당… 92년 대선 패배후 은퇴 「대권4수」의 길로 다시 들어선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40여년동안 숱한 정당생활을 거쳤다. 김이사장은 30살 때이던 지난 54년 목포에서 무소속 후보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원내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김영삼대통령이 25살의 나이로 최연소 당선기록을 세운 때였다.58년 4대 총선에 민주당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고 5대 때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됐으나 5·16으로 며칠만에 내놓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정당에 참여한 전력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광복직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익정당인 신민당에 잠시 참여했다.좌익에 환멸을 느껴 탈퇴했지만 이 경력은 그에게서 평생 「색깔론」의 꼬리를 떼어놓지 못하게 한 빌미가 됐다. DJ(김이사장)는 첫 소속정당인 민주당에 입당하면서부터 장 면박사의 총애를 받아 민주당 구파의 맥을 잇게 된다.60년 신구파의 대립으로 구파가 분당,신민당을 창당할 때 그는 민주당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5·16」으로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인사들과 63년 민주당 재창당에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65년에는 민주당이 윤보선총재가 이끄는 민정당과 통합,민중당을 창당할 때 합당 중재역을 맡았다. 그는 67년 양대 선거에 대비해 야권 통합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된 신민당에 참여했다.김대통령과의 경쟁은 원내총무 경선에서 처음 시작됐고 그는 패배했다. 이어 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대선 첫 패배를 맛보게 된다.72년 유신이후 망명생활을 하다 73년 일본에서 납치사건을 겪고부터 「재야」에 몸담게 된다.80년 「서울의 봄」 때도 김영삼총재의 신민당에 입당하지 않고 재야에 남아있었다. 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은뒤 무기징역,20년형으로 감형되는 과정을 거쳐 82년 도미,민주화 투쟁을 계속했다. 3년 뒤인 85년 2·12 총선 직전 귀국,김대통령과 함께 민추협공동의장 자격으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재개의 발판을 마련했다. 87년 이른바 「이민우구상」 등과 관련,김대통령과 함께 신민당의 대다수 의원들을 이끌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 문제로 김대통령과 결별,제갈길로 나섰다.이 때 평민당을 창당,대선에 두번째 도전해 다시 실패하지만 이듬해 여소야대 정국아래 제1야당의 총재가 됐다.그러나 90년 「3당통합」으로 하루아침에 소수야당의 총재로 전락했고 몇차례의 재야인사들을 흡수하면서 당명을 신민당으로 바꾸었다.이어 14대 총선에 대비,이기택 총재의 「꼬마민주당」과 합당,이총재와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듬 해인 92년 대통령선거에 세번째 도전하게 되지만 또다시 패배한 뒤 93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 한줄기 눈부신 빛… 박양 “사람 있어요”/기적의 생환­구조까지

    ◎주변서 신음 멈추자 죽음의 공포 엄습/“살아야겠다” 강한 의지… “엄마 난 괜찮아” 「기적은 또 있었다」 「세번째 기적」의 주인공은 열아홉살의 가녀린 백화점 여직원 박승현(강동구 명일동 삼익그린 아파트 506동 1006호)양. 승현양은 지난 67년 구봉광산에 매립됐다 16일만에 구조됐던 양창선(당시 36세)씨의 기록을 깨고 17일만에 「지옥」에서 살아왔다. 초인적인 의지로 살아난 승현양은 구조될 때까지 한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밝혀 의료진들을 놀라게 했다. 29일 하오 5시50분.승현양은 평소처럼 A동 지하1층 아동복매장에서 주부 손님들을 맞느라 분주했다. 하루종일 서 있느라 다리가 아프고 피곤이 몰려왔지만 조금만 있으면 퇴근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가벼웠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쾅』하는 굉음과 함께 천장과 벽이 갈라지며 콘크리트더미가 머리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승현아 뛰어』 옆 매장에서 일하는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중앙홀 쪽 출입구를 향해 무조건 뛰었다.그러나 불과 몇ⓜ도 못가서 무언가 둔탁한 물건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깨어보니 주변은 칠흑같은 어둠이었다.간간히 부상을 입은 사람들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들렸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사방은 완전한 침묵에 휩싸였다.죽음의 공포가 찾아왔다. 『여기서 이대로 죽을수는 없어』 장사가 안돼 몇달전에 식당을 그만두고 고민하고 계신 엄마와 아빠,어려서부터 키워주신 고마운 할머니,자주 다투기는 했지만 항상 믿음직했던 승민오빠,중학교 1학년인 귀염둥이 막내 승호…. 사랑스런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영파여중 때부터 단짝인 혜진이의 얼굴도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오른쪽 무릎이 욱신거렸고 공간은 팔과 다리를 펴지 못할만큼 비좁았다. 바닥을 만져봤다.물이 고여있었지만 녹 냄새가 너무 심해 마실수 없었다. 『살려주세요』 젖먹던 힘까지 다내 소리를 지르고 콘크리트 벽을 두드렸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다시 깨기를 수십차례.물한모금 마시지 못한채 죽음의공포가 시시각각으로 엄습했다. 그러다가 구조되기 하루나 이틀전.『승현아 이 사과를 받아라』 엄마와 함께 갔던 미아리 금룡사에서 뵌 낯익은 스님이었다. 손을 내밀었다.사과를 받으려는 순간 화락 잠이 깼다.한 닷새쯤 지난 것같았다. 이때 『쿵 쿵』하는 소리가 머리위 가까이에서 들렸다.포클레인이 두드리는 소리같았다. 아 구조대가 왔구나. 『여기 사람있어요』 갑자기 한줄기 빛이 구멍 틈으로 비쳤다.눈이 부셨다. 손전등 빛이었다. 『이제는 살았구나』라는 안도감과 함께 부끄러운 생각이 와락 들었다.사고당시 찢어지고 물에 젖어 옷을 모두 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을 갖다주세요』 파란색 담요와 수건이 들어왔다. 『이름이 뭡니까』 소방사아저씨가 물었다. 『19살 박승현이에요.삼풍직원이에요.물좀 갖다 주세요』 흰가운을 입은 의사가 수건에 물을 적셔 입에 대주었다. 구급차에 실렸다. 아직 꿈인듯 엄마 얼굴도 희미하게 보였다. 『승현아…』 『엄마 나는 괜찮아 그런데 오늘이 며칠이야』 2백77시간의 기나긴 사투가끝나는 순간이었다. ◎“다른 가족도 기쁨 누렸으면…”/박양 부모 일문일답/사고당일 사찰 찾아가 “살려달라” 불공/최군·유양과는 친남매처럼 지냈으면 박승현양의 아버지 박제원(52)씨와 어머니 고순영(46)씨는 『나머지 실종자 가족들도 우리 가족과 같은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고 「제4의 기적」을 간절히 소망했다. 16일 박씨부부와 가진 일문일답. ­지금 딸의 상태는 어떤가. ▲(아버지)아침에는 물만 먹었으나 점심 때는 미음을 먹는 등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어머니)맨날 울었다.시어머니 앞에서 마음놓고 울 수도 없고 승현이 방으로 가 사진을 어루만지며 매일 울었다.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미아리 사찰에서 승현이를 살려달라고 불공을 드렸다. ­딸이 살아있으리라는 꿈같은 것은 꾸지 않았나. ▲(어머니)내가 꾼 것은 없으나 스님으로부터 승현이는 꼭 구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승현이도 매몰됐을 때 꾼 꿈에서 어느 스님으로부터 사과 1개를 건네받았다고 했다.우리 승현이가 꼭살아돌아올 것이라는 암시였던 것같다.(아버지)상황이 어렵다고 생각했다.승현이가 구조됐던 지점에서 신원미상의 사체도 몇 구 나왔었다.이 사체 가운데 승현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사실 매우 불안했었다.도와주신 구조대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먼저 구조된 최명석군과 유지환양을 승현이가 알고 있다던데. ▲맞다.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다 어렵게 살아난 만큼 친남매처럼 지냈으면 좋겠다. ­승현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어머니)뭐든 잘먹는다.특히 돼지고기 등 육류를 좋아했다.퇴원하면 승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해 큰 잔치를 벌일 생각이다. ­아버지가 최근 사업을 그만 두었다고 하던데. ▲서초동에서 조그만 분식점을 운영했으나 제대로 되지않아 3개월 전에 처분했다.승현이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니 이젠 사업도 잘될 것같은 느낌이다.
  • 미 대학서 밀려나는 해외두뇌들/김재영 워싱턴(특파원 코너)

    미국 국적의 과학기술자들을 보호하는 노동정책 때문에 미국 과학기술연구의 밑바탕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에는 수많은 민간 과학기술연구소가 있지만 모두가 상품화를 전제로 연구를 실행한다.장기적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학·자연과학,공학 분야의 근본적 기초연구는 결국 「상아탑」 대학 차지이나 이같은 대학연구 활동에서 미국국적을 갖지 않는 외국인 과학기술자들이 오히려 미국 본토 두뇌들보다 많은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그러나 「과학기술」보다는 「국적」에 주안점을 둔 새 노동정책으로 기초 과학기술 연구의 견인차 노릇을 해온 해외두뇌들을 초빙,고용하는 데서 지금까지 대학들이 누려온 이점과 여유가 일거에 사라질 형편이다.미국인 과학기술자들의 취업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미 노동부가 「지금보다 두세배의 급여를 준 다음에야 외국두뇌들을 고용하라」고 대학들에게 지침을 내린 것이다. 보다 「싼 값에」 고용할 수 있는 해외파들을 대학들이 선호한 바람에 미국인 일자리가 그만큼 줄어 들었다고 노동부는 보고 있다.사실 외국국적을 소지한 전문 과학기술자들은 미국 이민 및 고용정책에서 아주 예외의 특수층을 형성한다. 정식으로 이민비자를 받지 않는 한 노동시장에 참여해 취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철칙이나 이 H­1B 비자를 받는 해외두뇌들은 미국국적 없이도 대학 및 민간연구소에 당당히 취업,미국인과 똑같은 급여를 받는다.최장 6년간이란 제한이 붙지만 그사이 충분히 영주권을 딸 자격을 확보하는 것이다.세계 각지에서 이 비자를 받는 연 6만5천명 중 4만명은 민간연구소로 가고 나머지 2만5천명이 패컬티(교직)나 리서치(연구)요원으로 대학에 들어온다. 미 노동부의 새 정책 요지는 「똑같은 비자를 받았고 하는 연구도 특별한 구별이 없기 때문에 대학도 민간연구소와 똑같은 비용을 지불하고 이들을 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하버드,MIT,캘리포니아대 등 유수의 어떤 미국대학도 민간연구소와 똑같은 급여를 주고 해외두뇌를 유치할 재정적 여유는 없다.민간연구소의 급여는 대학보다 2∼3배나 후해 유망한 미국 본토두뇌들 열에 아홉은 대학은쳐다도 보지 않고 이곳으로 오게 마련이다.연 2만명의 해외두뇌들이 이같은 공백을 메워 미국의 기초과학연구를 대리실행해 온 것이다.노동부의 고용보호정책 덕으로 대학에서 해외두뇌 대신 일자리를 차지할 미국인 과학기술자들의 수준을 두고 미국대학이나 과학기술계가 기대를 걸 리 없다.과학연구의 앞날을 걱정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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