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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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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제’의 벽은 역시 높았다

    ‘황제’의 벽은 ‘탱크’가 넘지 못할 만큼 높고 단단했다. 월드골프챔피언십(WGC) 악센추어 매치플레이챔피언십 8강전이 벌어진 미국 애리조나주 마라나의 더갤러리골프장 남코스(파72·7351야드). 최경주(38·나이키골프)가 24일 타이거 우즈(미국)와의 맞대결에서 2홀을 남기고 3홀차로 져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초반에 주춤거린 우즈의 빈틈을 파고 들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한판. 최경주는 1번홀에서 우즈의 티샷이 페어웨이를 한참 벗어나 덤불 속에 떨어져 쉽게 1홀을 앞섰지만 우즈는 직후 2번홀에서 5m짜리 버디를 잡아내 균형을 맞췄다. 이후 지루한 파 행진을 거듭하며 팽팽하던 승부의 균형은 10번홀에서 우즈가 ‘칩 인 이글’을 뽑아내면서 깨졌다. 그린 밖에서 웨지로 툭 친 공이 홀에 그대로 빨려들어갔고, 우즈는 비로소 승기를 잡았다. 12번홀에서도 8m짜리 버디 퍼트를 뽑아내 2홀차로 달아난 우즈는 14번홀에서는 7m 버디 기회마저 놓치지 않고 간격을 3홀차로 벌렸다. 최경주는 15번홀에서 두 번째샷을 홀 1.2m 옆에 붙여 1홀을 만회하는 듯했지만 우즈가 10m짜리 버디 퍼트를 먼저 넣는 바람에 추격의 실마리를 풀지 못했고, 결국 경기는 나란히 파를 적어낸 16번홀에서 끝났다. 최경주는 지난 2003년 첫 대결에 이어 우즈에게 이 대회 2전 전패를 당했지만 대회 출전 6년 만에 2라운드에 오른 뒤 역대 최고 성적(8강)까지 올리는 등 나름대로의 성과는 거뒀다. “샷이 좋은 최경주는 아주 힘든 상대였다.”고 말한 우즈는 이어 벌어진 4강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헨릭 스텐손(스웨덴)마저 3홀차로 완파, 결승에 진출했다. 지금까지 아홉 차례 이 대회에 출전, 세 차례 결승에 오른 우즈는 스튜어트 싱크(미국)를 상대로 통산 세 번째 우승에 도전한다. 8강전에서 앙헬 카브레라(아르헨티나)를 3홀차로 제압한 데 이어 4강전에서 저스틴 레너드(미국)를 4홀차로 제압한 싱크는 지난 2004년 NEC인비테이셔널 우승 이후 지금까지 85개 대회에서 단 한 차례도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다.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정윤수의 오버헤드킥] 곽태휘에 거는 기대

    곽태휘가 떴다. 중국전 막판의 결승골로 곽태휘라는 이름 석자는 지금 짜릿했던 승리의 또 다른 주역인 허정무 감독이나 박주영보다 더 많이 입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 7월20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가 내한했던 당시 맨유 선수들은 ‘투어’라는 별칭의 친선경기임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통의 축구 역사를 증명하려는 듯 결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FC서울은 너무 일찍 주눅이 들었고, 상대들의 눈에 보이는 반칙에도 항의조차 제대로 못했다. 그럼에도 간간이 곽태휘가 버텼다. 그의 맞상대는 웨인 루니. 팀 동료 리오 퍼디낸드가 “90분 내내 공격을 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잊었다.”고 농담조로 격찬한, 바로 그 루니는 친선경기장을 흡사 격발장치를 벗어난 총알처럼 거침없이 달렸다. 그를 곽태휘가 맡았다.‘공은 놓쳐도 선수는 놓치지 말라.’는 한국형 수비의 오랜 명제를 이따금 실천했다.그러자 루니는 거칠게 신경질을 냈다. 그때 곽태휘는 두세 차례 루니의 등을 돌려세웠다. 서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두 선수는 성난 소리를 주고받았다. 며칠 전 우리가 지켜봤던 ‘전국구 스타’ 곽태휘는 바로 그런 근성의 소유자다. 근성 축구의 대명사인 허정무 감독이 지난해 하반기 김진규까지 내주면서 곽태휘를 전남으로 불러들여 FA컵 우승을 도모했고, 지금은 충칭의 신화를 절반쯤 써나가고 있다. 중요한 건 그의 위치가 박주영과 패스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골키퍼 정성룡을 안심시켜야 하는 중앙 수비수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공격수는 감각으로 뛰고 수비수는 머리로 뛴다.’는 명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혜롭게 공을 차는 건 어느 포지션에나 해당되는 것이지만, 특히 수비수는 냉철하게 전체를 조율하면서 위기의 순간을 현명하게 처리해내는 ‘머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공격수는 열에 아홉 번 실수해도 단 한번 골을 터트리면 되지만, 수비수는 단 한 차례의 실수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의 전설 말디니처럼 위대한 수비수는 언제나 천재였다.중국이 공격수 한 명만 남기고 수비로 일관하자 곽태휘는 조용형과 곽희주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최전방으로 올라가서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었다. 위험했지만, 승리를 위한 최후의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전국구 스타’가 됐다. 그는 이제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한다. 그는 중앙 수비수다. 견고하고 아름다운 수비 축구로 우선 대성하기를 바란다. 골을 넣는 위치가 아니라 골을 막는 위치에서 ‘제2의 홍명보’,‘아시아의 말디니’로 성장하길 바란다.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 [서울광장] ‘국보 1호’를 비워두라/진경호 정치부차장

    [서울광장] ‘국보 1호’를 비워두라/진경호 정치부차장

    늘있었다. 앞으로도 죽 있을 줄 알았다. 한강처럼, 남산처럼. 그런 숭례문이 사라졌다. 출근길 매번 그 앞에서 차를 돌리면서도 올려다본 건 숭례문의 수려한 처마 끝이 아니라 그 앞에 매달린 신호등이었다. 숭례문은 그런 존재였다. 언제든 있을 테니까 보지 않는…, 보지 않아도 되는…. “세계적인 유산 숭례문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놓겠습니다.”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의 이 취임사를 숭례문은 어떻게 들었을까. 육백 성상(星霜)의 시련과 영화를 꿋꿋이 견뎌냈건만 하룻밤 화마(火魔)에 이리도 허망하게 무너질 것을 숭례문은 예감했을까. “노숙자들이 ‘확 불질러버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숭례문 개방은 바람직했지만 너무 경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탁상에서 답하지 마시고, 한번 현장에 나가보십시오. 한숨만 나옵니다. 잘못하면 조만간 누가 방화할 수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지난해 2월 문화관광부 홈페이지 게시판에 오른, 경복궁을 스물아홉차례 답사했다는 스물두살 청년의 절박한 호소다. 시청역에서 쫓겨난 노숙자들이 숭례문 누각으로 몰려갔다는 얘기를 오세훈 서울시장은 한번이라도 들어봤을까. 나가보고, 들었는데도 숭례문은 무너졌을까. 문화재와 너무 친숙해서인지 제 집 안마당인 양 왕릉에서 가스불을 피워댄 문화재청장 유모씨는 멀쩡한 광화문을 뜯어 옮기기에 앞서 그 돈으로 숭례문 안에다 소화기라도 몇 개 더 갖다 놓겠다는 생각은 정말 하지 못했나. 티가 나지 않는 일이라 생각이 미치지 않았나. 유모씨가 낸 사표를 굳이 퇴임 이틀 전에 수리하겠다며 가슴에 품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심사는 대체 뭔가.“숭례문이 근 1세기 만에 다시 시민 품으로 돌아온 것은 뜻 깊은 일”이라며 자서전을 통해 자찬을 아끼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숭례문이 서둘러 시민 품을 떠난 지금 왜 한 줄의 자탄도 없나. 국민 가슴을 숯덩이로 만든 숭례문 잿더미 속에서 또 다른 절망의 불씨가 피어 오른다.“3년 안에 복원”,“국보 1호 유지”,“복원은 국민 성금으로….” 복원에 쓸 부재(部材)를 말리는 데만 3년 걸린다는데 무슨 재주로 3년 안에 복원인가. 그렇게 숭례문을 새로 지어 ‘국보 1호’라 외치면 불살라진 조선의 혼과 얼, 민초들의 숨결이 되살아나는가. 숭례문이 스러진 지 반나절도 안 돼 터져나온 국민성금 발상은 이번 숭례문 참화의 절정이다. 앞집 옆집 한푼두푼 모은 국민성금으로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터진 이 국가적 흉액을 국민 총화의 계기로 반전시키겠다는 역발상의 기민한 위기대응능력에 혀를 내둘러야 할지, 혀를 차야 할지 그저 헷갈린다. 무슨 철거가옥도 아닐진대 포클레인으로 숭례문 잔해를 거둔다는 소식엔 말문이 막힌다. 당장 가림막부터 걷어치우라. 지금은 복원을 말할 때가 아니다. 아니 복원이란 말로 재건(再建)을 가릴 때가 아니다. 숭례문 잿더미 속을 헤집어 복원 때 쓸 서까래 대들보 조각을 찾을 때가 아니다. 전통과 문화와 역사를 불태운, 천박한 우리의 자화상부터 끄집어 내야 한다. ‘국보 1호’를 영구 결번으로 비우고, 그 자리에 이 부끄러운 자화상을 담아 두자. 한없이 비정하고 그래서 가슴이 저미지만, 재건한 숭례문을 ‘국보 1호’로 둔갑시키는 자기기만은 버리자. 부끄럽지만…, 그렇게 부끄러워야 국보 2호,3호를 살린다. 숭례문은 죽었다. 진경호 정치부차장 jade@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6) 쌍겨리와 소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6) 쌍겨리와 소

    김홍도의 그림 ‘쌍겨리’다. 그림은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위쪽을 보자. 남자 둘이 쇠스랑을 들고 일을 하고 있다. 쇠스랑은 주로 두엄을 쳐내고 퇴비를 긁어 올리는 데 사용하며, 드물게는 밭을 가는 데도 사용된다. 쇠스랑은 그림에서처럼 발이 세 개인 것이 일반적이고 이따금 둘인 것도 있다. 자루는 대개 참나무로 만들고 발은 당연히 쇠로 만든다. 그런데 이 그림의 농부 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엄을 쳐내는지, 퇴비를 긁는지, 아니면 밭을 가는지 그림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지방마다 쟁기 끄는 소의 마릿수 달라 아래쪽의 사내는 소 두 마리로 쟁기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소 엉덩이에 똥이 묻은 것까지 자세하게 그렸으니, 어지간한 관찰력이다. 어쨌거나, 쟁기질이라니, 아마도 봄이리라. 흥미로운 것은, 쟁기를 끄는 소가 두 마리라는 것이다. 소 한 마리에 멍에를 지우는 것을 외겨리, 혹은 독겨리라 하고, 쌍멍에에 소 두 마리를 지우면 쌍겨리라 한다. 대개 논과 밭을 갈 때 땅이 평평하여 쉽게 흙을 팔 수 있으면 외겨리로 하지만, 화전 같은 경사지거나 흙이 단단하거나 돌이 많은 곳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쌍겨리로 하는 것이다. 대개 쌍겨리는 땅을 깊이 갈기 위해 고안된 방법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 귀양 가서 ‘탐진농가’란 시를 지었는데, 여기에 흥미롭게도 외겨리, 쌍겨리 이야기가 나온다(탐진은 강진의 옛이름이다). 모두 10수인데,7번째 작품을 보자. 게으른 습성은 정말이지 옥토에서 생기는 법 상농(上農)도 해가 중천인데 잠에 빠졌다가 느릅나무 그늘에서 술주정을 부리다 말고 느지막이 소 한 마리 몰고 마른밭을 가는구나 이 시에 주석이 붙어 있는데,“경기 지방의 마른밭은 소 두 마리로 간다.”라고 되어 있다. 곧 전라도 강진에서는 외겨리로 밭을 갈지만, 경기도에서는 쌍겨리로 갈았던 것이다. 우하영의 ‘천일록’은 지방에 따라서 쌍겨리로 밭을 가는지, 외겨리로 가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에 의하면, 관동지방은 영서·영동을 막론하고 쌍겨리로, 황해도 봉산·재령·신천·안악 등도 쌍겨리, 경상도는 대개 쌍겨리로 하고, 남쪽 지방은 외겨리로, 전라도는 산간 지방은 쌍겨리, 평야 지대는 외겨리로 한다는 것이다(주강현,‘두레’). 혼자 소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소란 것이 농민이면 누구나 손쉽게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아니어서, 이웃과 함께 어울려 소 두 마리를 메기도 하였던 것이다. 위의 그림도 그런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쌍겨리로 논밭을 갈면서 부르는 노래를 ‘쌍겨리소리’라 하는데, 경기도 가평의 쌍겨리소리를 들면 이렇다.“어져, 저 소야, 줄 잡아 당겨라. 이랴, 이랴. 먼저 나가지 말고, 두 마리가 잘 잡아 당겨라.” 물론 노래는 소리를 길게 뽑고 후렴구를 넣기도 하여 길게 늘어진다. ●농우 확보위해 도살 금했지만 ‘고려공사 사흘´ 농우는 농사를 짓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에게 소가 언제나 넉넉하게 돌아갔던 것은 아니다. 성종 때 시인이자 관료였던 강희맹이 쓴 농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보면 농촌에 소가 아주 드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동리에 100집이 있는데, 가축이 있는 집은 10집 남짓이고, 소는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거기서 송아지를 제외하고 농사일을 맡길 만한 소는 겨우 몇 마리에 불과하다.100집의 밭을 몇 마리 소가 갈자 하니 힘이 부치기 마련이다.”라고 하고 있으니, 농사지을 소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도둑떼까지 소를 잡아먹어 남은 소로는 경작이 불가능해 하는 수 없이 사람이 쟁기를 끄는데, 아홉 명이 쟁기를 끌어도 소 한 마리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농업사회인 조선조에는 소가 늘 부족했다. 소 전염병도 자주 돌았다. 예컨대 인조 15년,16년 두 해에는 소 전염병이 너무 심하여, 성균관에서 공자에게 올리는 봄 가을의 제사, 곧 석전 때도 제물로 소 대신 돼지를 쓰게 했으며, 현종 11년 전국의 소가 거의 다 죽어 사람이 대신 쟁기를 끌었다고 한다. 한데 소가 모자라는 가장 큰 이유는 쇠고기의 소비 때문이었다.‘세종실록’ 7년 2월4일조를 보면 국가에서는 농우의 확보를 위해 소의 도살을 금지하고 있다.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 되고 곡식은 소의 힘에서 나오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였고, 중국에서는 쇠고기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령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중히 여기고 민생을 후하게 하려는 것이다.” 조선조 500년 동안 지속된 세 가지 금령이 있는 바, 소나무의 벌채를 제한하는 송금(松禁), 술을 빚는 것을 금하는 주금(酒禁), 그리고 바로 소의 도살을 금하는 우금(牛禁)이 그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처럼 소의 도살을 막았지만, 그것이 성공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책을 수립하는 지배층 자체가 쇠고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계층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는 농가 최고 재산… 세금 못내면 끌고가기도 정조 때 박제가가 쓴 ‘북학의’에 의하면 당시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한다 하였다. 서울에는 쇠고기를 파는 24개의 푸줏간이 있고, 지방 300여 고을 관아에서도 빠짐없이 쇠고기를 파는 푸줏간을 열고 있다 했으니, 실로 쇠고기의 소비량이 대단했던 것이다.‘정조실록’ 17년 9월11일조의 대사간 임제원이 올린 상소문을 보면, 이해 가을 작황을 보니 좋은 날씨로 인해 유례 없는 풍년이 들었는데도, 뜻밖에도 모내기도 못한 곳이 있다면서 그 이유로 농사지을 소의 부족을 들었다. 즉 소를 잡아먹는 일이 최근 너무 심해져 소가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큰 도시에서 쇠고기를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으며, 호서 지방과 호남 지방이 가장 쇠고기를 먹는 데 열중한 나머지 소 값이 올라 논밭을 가는 소가 모자라게 되고, 그 결과 사람이 대신 쟁기질을 하므로 모를 내지 못하는 곳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요컨대 소를 잡아먹는 것을 금하자는 것이었지만, 고려공사 사흘이라고 아무리 금령을 발동해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소는 농사를 짓거나 고기만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짐을 끄는 것도 소가 하는 중요한 노동이었다. 영조 때의 시인인 홍신유가 쓴 시에 ‘우거행(牛車行)’이란 작품이 있다.‘수레를 끄는 소에 대한 노래’란 뜻이다. 서울 한강 근처에 강을 통해 서울에 도착한 양곡이며, 땔나무를 도성 안으로 옮기는 수레를 끄는 소를 제재로 삼은 것이다. 이 작품의 소는 짐을 싣고 도성으로 들어가다가 큰 비로 생긴 웅덩이에 빠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나오지만, 다시 좁은 비탈길에서 양반네 행차를 만나 놀란 나머지 진흙 구덩이에 빠져 버둥거리다 죽고 만다. 시인은 소를 가엽게 여겨 이렇게 말한다.“한 해 가고 두 해 가면/ 전신은 성한 데 없고/ 가죽은 마르고 살은 쫄아 붙어/ 영락없이 고사목처럼 되고 말지/ 그 소 마침내 푸주로 끌려와서/ 잡아먹히게 되는데/ 수레 끄는 소는 고기 맛이 없다고/ 말들 한다네/ 소의 힘 모두 빨고/ 마침내 그의 고기까지 먹으니/ 사람들 잔인하기/ 어찌 이와 같단 말가?”(임형택 편역,‘이조시대 서사시(상)’) 평생 노동력을 빼앗고, 죽으면 고기까지 먹으니, 인간처럼 잔인한 짐승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소는 농가의 최고 재산이었다. 조선시대 한시를 보면 세금을 내지 못한 농가에 아전들이 들이닥쳐 소를 끌고 가는 장면이 흔히 나온다. 아니,20세기에도 소는 대학생의 등록금이 아니었던가. 위 그림의 소를 부려 농사짓는 사람은 그나마 넉넉한 농민이었던가 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CEO칼럼] 냉면과 ‘랭면’/윤만준 현대아산 사장

    [CEO칼럼] 냉면과 ‘랭면’/윤만준 현대아산 사장

    산해진미라 한들 서너 차례 맛을 보면 손길이 잘 가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유독 냉면만은 좀처럼 물리는 법이 없다. 한 달에 한두 번 가는 금강산 출장길에도 매번 금강산 옥류관에서 냉면 한 그릇 먹는 즐거움은 놓치지 않는 편이다. 어쩌다가, 어쩔 수 없이 빠뜨리는 때에는 돌아오는 길이 서운하다. ‘랭면’이라 불리는 북한식 냉면에는 이남의 냉면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 음식 타박은 아니지만, 남쪽의 냉면은 열에 아홉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다. 맵거나 또는 달거나 해서 자극적인 맛이 강하고, 그래야 보통 맛있는 냉면으로 통한다. 하지만 북쪽의 랭면은 우선 얼음처럼 차갑지 않다. 그저 적당히 시원한 정도다. 또한 처음 맛보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심심한 맛이 특징이다. 두 번 세 번 먹다 보면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 북한식 랭면이다. 금강산의 옥류관 랭면도 심심하고, 담백하고, 깊은 맛이 자랑이다. 평양 옥류관 본점의 재료와 비법을 그대로 옮겨, 매일매일 메밀을 새로 빻아 조리한 랭면에는 흉내 내기 어려운 특별한 맛과 함께 음식에 대한 정성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금강산 랭면이 잠시 외도를 한 적이 있었다.‘랭면’보다는 냉면에 가까운, 특유의 구수함보다는 당장 혀를 즐겁게 하는 맛과 향에 더 많이 신경을 쓴 듯한, 북쪽 식이라기보다는 보통의 남쪽 식에 가까운 냉면이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그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유인 즉, 남쪽의 냉면 맛에 길들여져 있는 관광객들이 담백함이 특징인 북쪽의 심심한 랭면 맛에 여러차례 불만을 토로하여,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추어 보려고 조리를 조금 달리 해 보았다는 것이다. 남쪽 식으로 말이다. 갑작스러운 랭면의 외도에 짐짓 놀라고 당황스럽긴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거늘, 관광객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고 음식을 바꾸어 내놓는 그 수고와 정성을 그저 예사롭게 생각하고 넘기기 어려웠다. 어쩌면 금강산관광이 올해로 10년째를 이어올 수 있었던 힘도 이렇게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위해 주려는 노력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금강산 랭면의 외도는 짧게 끝났고, 이제는 다시 담백하고 구수한 본래의 랭면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랭면의 외도에 담겨있던 속마음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엄밀히 말하면 그대로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깊고 세심해지고 있다. 봄이 오면 관광객들이 자신의 승용차를 직접 운전해서 금강산에 갈 수 있게 되고, 또 지난해부터 열린 내금강을 통해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에 오를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이다. 랭면의 외도 정도에 비할 수 없는 관광객에 대한 큰 배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처럼 함께 살다 보면 서로 닮아간다고 한다. 금강산에서 남쪽은 북쪽을, 북쪽은 남쪽을 닮아간다. 금강산 랭면이 남쪽 식 냉면을 닮아가려고 했던 에피소드처럼, 금강산의 남쪽 사람들에겐 ‘위하여!’라는 건배제의보다 ‘쭉∼냅시다!’라는 북쪽 식이 더 자연스럽고 친근하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닮아가는 것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렇게 금강산은 남과 북이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연습하는 공간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인 셈이다.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
  • 배움도 가르침도 기쁨이어라

    배움도 가르침도 기쁨이어라

    취재, 글 이만근 기자. “학교 다녀왔습니다.” 짧은 겨울 해를 뒤로 속속 도착한 아이들이 신선영 씨를 보자 꾸벅 인사한다. “꿈을 묻지 않으면 학교가 아니에요.” 그는 단호하다. 외아들 한전이도 초등 과정 이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학 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하기까지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집 아이들도 품었다. 오직 내 자식만 잘되기를 바라는 또래 엄마들 사이에서 그의 품은 유독 넓어 보인다. ‘배우는 것도 기쁨이요, 가르치는 것도 기쁨’이라는 뜻의 ‘조이 스터디’. 그들의 꿈이 영그는 아홉 평 남짓한 작은 집은 신선영 씨 말마따나 ‘진짜 학교’다. 어수선하게 꽂혀 있는 책들 사이 아이들은 들쭉날쭉 제멋대로다. 여드름 가득한 얼굴로 기타를 튕기는 아이 옆에 유심히 신문을 보며 기사를 자르고 붙이는 아이가 있고 또 다른 아이는 동화책을 크게 읽는다. 그리고 여느 학생처럼 문제 풀이에 골똘한 아이 옆에는 곤하게 잠을 자는 학생도 있다. 언뜻 산만한 것 같지만 나름 질서도 있다. 옮겨야 할 짐이라도 있어 손이 필요하면 서로 벌떡 일어나 나르기도 하고 나이 많은 오빠 누나들은 동생들을 챙긴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모아 무료로 방과 후 수업을 합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홈스쿨링을 택한 아이들까지 합쳐 삼십여 명이 모였으니 대가족이죠. 엄마는 하나인데.” 한전이는 엄마 덕분에 형제가 늘어 외롭지 않게 자란 셈이다. 미국에서 결혼한 신선영 씨는 한전이가 여섯 살 때 이혼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우리 고유문화에 애착이 컸던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데도 큰맘을 먹어야만 했다. 집안 망신 말고 조용히 미국에서나 살라는 가족들의 타박이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귀국해 적잖은 나이에 10년 후의 꿈을 위해 상담과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시작한 소년원 봉사는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가정불화로 마음이 황폐했다. 아무리 좋은 말을 건네도 차갑게 튕겨져 나오는 반응이 허탈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도 이혼하고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다며 솔직하게 얘기하자 그때부터 아이들이 마음을 열더란다. 왜 아이를 버리지 않았느냐는 냉소와 함께. “아이들이 꿈이 뭔지도 모르고 왜 꿈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게 가장 마음 아팠어요. 제도권 학교는 이 아이들 하나하나를 보듬기는커녕 오히려 편견의 희생양으로 만들었죠. 무관심 속에 모두를 똑같이 다루기만 하는 교육은 폭력에 가까운 거예요.” 그는 서울의 한 유명 국제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소년원 아이들이 떠오를 때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얼마 안 가 그의 기억 속에 ‘달동네’로 남아 있던 서울의 행당동을 찾았다. 학교에 적응 못해 갈 곳 없거나 보살피는 어른이 없어 학습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아이들의 엄마이자 선생님을 자처한 것이다. 진짜 자신이 할 일을 찾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초등학교를 나왔는데도 1분이 60초란 것을 모르거나, 구구단을 이해 못해 369게임을 못하는 아이들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죠. 일상을 같이하며 관심을 두고 아이들을 알아가는 게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에요. 그러면 아이들은요 신기하게도 영어, 수학은 하지 말래도 붙잡고 해요.” 올겨울 신선영 씨는 고민이 크다. 동네가 재개발될 예정이라 보금자리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 스무 평 이상 공간을 찾아야 하는데 서울시 지원비로는 턱없다. 그래도 아홉 평 공부방에서는 오늘도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따뜻한 밥 한 끼와 함께할 꿈의 대화가 기다리고 있다.
  • 황정민 캐스팅 뮤지컬 ‘나인’

    황정민 캐스팅 뮤지컬 ‘나인’

    “찰리 채플린 이후 이런 위대한 감독은 없었어.”‘나인’(3월2일까지·서울 LG아트센터)의 주인공 귀도 콘티니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명영화 감독 귀도는 아파트 층수마다 애인이 있는 남자. 막이 오르면 온갖 종류(?)의 여자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든다. 엄마, 정부, 배우, 제작자, 평론가, 창녀…. 여자들의 한마디는 곧 하나의 소음으로 뭉쳐진다.14명의 여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을 때 오직 한 여자만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그의 부인 루이자.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8과 1/2’에 뿌리를 댄 ‘나인’은 1982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작품.2003년에는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주연으로 활약했다. 국내에도 비슷한 캐스팅 공식이 적용됐다.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배우 황정민이 4년만에 뮤지컬 무대로 돌아온 것. 스크린 속 연기력은 무대에서도 흡입력 있게 표출됐다. 명예, 여자, 예술성 모든 것을 욕망하는 바람둥이 감독은 “낼 모레면 마흔이지만 영혼은 아홉살”이라 스스로 노래한다. 무대에는 넘치는 자의식에 갇힌 그의 현재와 과거, 현실과 몽상이 교차된다. 22일 개막 공연에서 황정민의 얼굴은 10분도 안 돼 땀으로 번뜩였다. 그는 상상 속에서 다큐멘터리, 서부극을 만들어내는 장면, 추기경과 상담하는 장면에서는 1인2역을 오가며 특유의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애드리브 같은 대사 처리는 영화에 더 가깝게 느껴졌고 노래에는 힘이 담겼지만 능숙함이 떨어져 극 안에 충분히 녹아들지 못했다. 육체파 정부 칼라역의 정선아의 농염한 연기와 가창력은 눈에 띄는 부분. 커튼 하나에 의지해 공중에서 내려왔다 다시 퇴장하는 장면은 아슬아슬한 만큼 시선을 끌었다. 루이자역의 김선영은 남편에게 실망과 분노를 터뜨리는 마지막 ‘Be on your own’에서야 힘을 받았다. ‘나인’은 기존 대형 뮤지컬처럼 익숙한 레퍼토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낯설다. 극은 현실과 꿈을 오간다는 점에서 매혹적이지만, 인물 사이의 미묘하고 깊은 심리와 작품이 함축한 메시지가 짜릿하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난해하다. “현재를 바꾸면 미래도 바꿀 수 있다.” 황정민이 ‘나인’프로그램 책자에 남긴 멘트다.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 그가 되뇌이는 말이다. 극의 결말, 아홉살 귀도는 총을 머리에 갖다대는 어른 귀도의 손을 내리고 지휘봉을 쥐어준다. 그리고 노래한다.“어른이 되길….”사랑도 재능도 확신도 잃은 감독. 그에게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래서 현재를 바꿀 수 있다면, 미래도 바뀔까. 제작자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무대, 황혼에 물들다

    무대, 황혼에 물들다

    23일 오후 서울 충무아트홀에서는 뮤지컬 ‘러브’(2월1일∼24일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의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다. 양로원 노인들의 사랑을 담은 이 작품의 출연자 평균 연령은 61.6세. 분홍·보라·주홍·파랑의 반짝이 의상에 흰색 부츠를 차려입은 할머니 배우들이 등장했다. 이들이 그룹 아바의 ‘댄싱퀸’을 부르며 춤을 추자 연습실 여기저기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연출자, 에이콤의 윤호진 대표는 “아마추어 배우를 뽑으며 기대 반 우려 반이었는데 그건 기우였다.”고 말했다.“‘이런 노인들이 가만히 집에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을 정도로 그 열정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형사반장, 교수님 배우에 부부배우까지 ‘러브’에서는 20여명의 일반인 배우가 더 빛난다. 노래솜씨며 대사 처리, 표정 연기 모두 기존 배우 못지않다. 최연장자인 형사반장 출신 이윤영(77)씨는 이번 공연으로 언론에 여러번 얼굴을 알린 스타(?). 젊을 땐 하루에 영화를 세 편씩 본 영화광이었다는 이씨는 “그렇게 좋아하던 뮤지컬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다음에는 이미 늙어 동경만 했었는데, 꿈이 이뤄지니 뭐든 재미있다.”고 말했다. ‘교수님’ 배우도 있다. 대학에서 물리를 가르치는 오윤식(55)씨는 성악이 꿈이었지만 교회 성가대에 서본 게 무대 경험의 전부. 그는 “캐릭터에 맞게 연기를 하는 건 또 다른 어려움”이라고 긴장감을 토로했지만 미국에 사는 아들과 부인이 공연을 보러올 거라며 한껏 설레고 있었다. 부부 배우도 활동 중이다. 주부 윤이남(63)씨는 남편 권영국(68)씨와 함께 ‘러브’에 참여하고 있다. 치매 할머니 역을 맡아 남들 노래할 때 멍하니 하늘 보고 웃기만 하던 윤씨는 “답답하죠. 노래하고 싶고 연기하고 싶은데….”하며 아쉬워했다. 그는 “물 먹고 오면 까먹고 화장실 갔다 오면 까먹는데 그래도 남편과 함께 격려해주면서 하니 너무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황혼으로 접어드는 이들의 얼굴이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환하게 부서지는 조명 탓만은 아니었다. ●여든에 반한 열아홉,60대‘가족의 발견’도 현재 공연가에 ‘실버 세대’ 소재는 이뿐만이 아니다.1987년 초연,2003년부터 박정자가 합류한 연극 ‘19 그리고 80’(3월5일까지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도 뮤지컬로 옷을 갈아입었다. 17번의 자살 경력,‘꽝’하는 다이너마이트의 굉음을 숭배하는 청춘 해럴드(이신성)는 곧 여든이 되는 할머니 모드(박정자)를 만나며 인생관을 수정한다. 모드는 기발한 상상력과 촌철살인의 지혜를 해럴드에게 전해주는 생기발랄한 할머니. 해럴드는 모드에게서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법, 춤추는 법, 즐거움을 알아보는 법 등을 배운다. 그리고 이내 모드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모드는 ‘다음 단계’로 이동할 준비를 한다.“난 이미 살아버렸고 넌 이제 삶을 시작했을 뿐이야. 넌 내가 심은 나무야. 넌 더 자라야 해.” 감동은 노배우의 몫, 화려한 기교와 웃음은 멀티맨으로 출연하는 배해선, 이건명의 몫이다. 배우 양택조, 사미자가 부부를 이룬 ‘늙은 부부 이야기’(2월10일까지·대학로 소극장 축제)는 2003년부터 초연된 대학로 인기레퍼토리. 예순살 두 할아버지의 우정을 담은 ‘아주 특별한 초대’(25일∼4월 6일·소극장 예술정원)는 황혼에 발견한 새로운 가족을 그린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호주오픈테니스]총가, 나달 잡고 결승진출

    ‘검은 페더러’,‘코트의 무하마드 알리’, 그리고 ‘테니스의 지단’까지. 다섯 번째 나선 메이저대회에서 그가 얻은 별명이 이 정도다. 결승전이 끝나는 날, 그 개수는 몇 개까지 더 늘어날지도 모를 일. 조 윌프레드 총가(23·프랑스)의 ‘태풍’이 결국 호주오픈테니스 결승 코트에 상륙했다.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세계 랭킹 38위의 총가가 24일 호주 멜버른파크 로드레이버아레나에서 벌어진 대회 남자 단식 4강전에서 ‘왼손 천재’ 라파엘 나달(스페인·2위)을 1시간57분 만에 3-0으로 완파하고 결승에 선착했다. 지난 2005년 메이저대회 코트에 첫발을 디딘 뒤 이번 출전이 겨우 다섯 번째. 총가는 최고 시속 221㎞짜리 광서브를 앞세워 서브 에이스에서 17-2의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며 초반부터 리드를 잡았다. 오른쪽 어깨에서 뿜어내는 스트로크의 힘과 방향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나달의 다리를 무력화시킨 뒤 드롭 발리로 베이스라인에 붙어 있던 나달을 농락했다. 백인인 프랑스인 어머니와 콩고 출신의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선수. 앤디 머레이(영국·9위), 리처드 가스케(프랑스·8위)에 이어 이번엔 나달까지 ‘톱10’ 랭커 세 명을 내리 무너뜨리고 결승에 올라 르네 라코스테 이후 최고의 프랑스 선수로 이름을 올린 기회를 잡았다. 총가는 27일 ‘황제’ 페더러와 결승에서 격돌한다. 둘은 이제까지 한 차례도 코트에서 만난 적이 없다. 여자 단식에서는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요정’ 마리아 샤라포바(세계 5위), 아나 이바노비치(3위)가 각각 대회 첫 패권을 놓고 만나게 됐다. 샤라포바는 옐레나 얀코비치(4위·세르비아)를 2-0으로 일축,2년 연속 결승에 진출했다. 서브에이스 8-0의 절대 우세를 앞세워 상대를 압도, 생애 처음 4강에 올라온 얀코비치의 결승행 기회를 무산시켰다. 이바노비치도 다니엘라 한투코바(9위·슬로바키아)에 2-1의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고 지난해 프랑스오픈에 이어 두 번째 메이저 결승에 올랐다. 이바노비치는 단 한 게임도 따내지 못하고 25분 만에 0-6으로 1세트를 내줬지만 2세트 포핸드가 살아나면서 어렵게 균형을 맞춘 뒤 3세트 4-4의 승부처에서 아홉 번째로 한투코바의 서브게임을 따내 전세를 뒤집었고, 자신의 마지막 서브 게임을 지켜 2시간10분 동안의 혈투를 마무리했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우리말 여행] 국어의 품사

    품사(品詞)는 단어를 문법적 기능, 형태, 의미에 따라 나눈 갈래다. 학교 문법에서는 이를 아홉 가지로 나눈다. 어떻게 분류하는지 되짚어 본다.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 안에 순 우리말 이름을 적는다. 명사(이름씨), 대명사(대이름씨), 수사(셈씨), 조사(토씨), 동사(움직씨), 형용사(그림씨), 관형사(매김씨), 부사(어찌씨), 감탄사(느낌씨).
  • [김미라 교수의 부모들을 위한 교육특강] (24) ‘패트리샤의 동전’과 학습 용이성

    [김미라 교수의 부모들을 위한 교육특강] (24) ‘패트리샤의 동전’과 학습 용이성

    세 살배기 패트리샤는 식탁에 앉아 차분하게 식사하고, 빨랫감은 빨래 통에 집어넣고, 진공청소기로 집안을 청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식탁에 음식을 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일은 어렵지 않게 해내는 패트리샤가 동전을 저금통에 집어넣으라고만 하면 이상하게 행동합니다. 동전을 저금통에 집어넣는 대신 바닥에 떨어트린 다음, 입으로 밀고, 공중으로 던지고, 바닥에 떨어지면 다시 입으로 밀곤 하는 것입니다. 패트리샤는 1960년대 미국의 한 동물 프로그램에서 연기하던 인기 돼지입니다. 돼지는 사람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미련한 동물이 아닙니다. 개에 버금가는 정도의 학습 능력을 보이기 때문에 조련사가 선호하는 동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똑똑한 돼지인 패트리샤는 매우 복잡한 행동도 거뜬히 학습했습니다. 그러나 입에 물고 있는 동전을 저금통에 집어넣는 것만은 유난히 어려워했습니다. 동전을 저금통에 집어넣는 것보다 더 정교하고 난이도 높은 행동은 곧잘 학습하면서도 왜 동전을 저금통에 집어넣는 것만은 그토록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요. 조련사는 동물을 조련하는 과정에서 동물이 어떤 것은 아주 쉽게 학습하는 반면 어떤 것은 아주 어렵게 학습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패트리샤를 포함한 동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고, 특히 어린 시기에는 더욱 더 그렇다는 것이 비교심리학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학습 용이성이라는 차원에서 살펴보면 생존과 관련된 것을, 그러지 않은 것보다 더 쉽게 배울 수 있고, 몸으로 하는 것을 머리로 하는 것보다 더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의 학습 내용은 그 자체로는 생존과 별로 관련이 없고 몸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가 배우기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습 용이성은 학습 내용 자체에도 적용되지만 학습 환경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정의 학습 환경을 살펴보면 이런 점을 간과해 아이의 학습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즘 가정에는 아이 방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개인 공간이 할당된 것입니다. 인간은 군집 동물이고 특히 어린이는 어른에 비해 미숙하고 종속적이기 때문에 개인공간이 주어지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굳이 엄마가 책을 읽어 주지 않고 같은 방에서 책을 읽기만 하는 것으로도 독서 효율성이 증가하는 이유를 공간공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이 방의 가구 배치와 가구 종류 역시 학습 용이성과는 거리가 멀게 구성된 경우가 많습니다. 매스 미디어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전형적인 아이 방의 가구는 옷장과 침대, 책상으로 구성되어 있곤 합니다. 그리고 책상에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자리에 침대가 자리 잡고 있지요. 부모가 아이 학습과 관련해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침대와 책상에 관련된 것입니다. 공부할 때 처음부터 작정하고 침대에 드러눕는 아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아이들 열명 가운데 여덟, 아홉명은 침대에 눕거나 엎드려서 공부를 하곤 합니다. 침대에서라도 공부를 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공부를 하다가 자기도 몰래 어느새 책을 베개 삼아 잠든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런 장면을 본 부모는 아이에게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라고 다그치면서 집중력과 끈기 없음을 질책하곤 합니다. 아이 방에 침대와 책상을 나란히 배치해 놓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을 학습용이성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달고 맛있는 음식과 그러지 않은 음식을 상위에 나란히 차려 놓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어른도 달고 맛있는 음식을 선택할 것입니다. 굳은 결심이 있지 않는 한 어른도 책상에 앉는 것보다 침대에 눕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물며 어린 아이는 어떻겠습니까. 패트리샤는 동전을 저금통에 집어넣는 일을 뺀 나머지 다른 일은 잘 배우는 돼지였습니다. 입에 물고 있는 동전은 배고픈 패트리샤에게는 그 크기와 모양이 먹이와 유사한 것이었을 겁니다. 가정 내의 공부환경과 관련해 아이에게 ‘패트리샤의 동전’을 주고 저금통에 집어넣으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깔깔깔]

    ●스쿨버스 한 동네에 최근 이사 온 가족이 그만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홉 살 난 딸애가 스쿨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직장에 늦었지만 아빠는 딸애를 학교에 태워다주려고 딸애가 말해주는 방향을 따라 운전을 했다. 그런데 몇 차례씩 방향을 바꾸면서 20분 후에 학교에 이르고 보니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집에서 가까운 위치였다. 왜 그렇게 빙빙돌게 길을 알려줬느냐고 화가 난 아빠가 물었다. “아빠, 난 그 길밖에 몰라요. 스쿨 버스는 언제나 그렇게 다녀요.”●방법이 있어 클린턴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정치인들과의 모임에서 클린턴이 말했다. “국회에서 연설을 하고 싶소.” 그러자 한 정치인이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건 공식 일정에 없어서 안 됩니다.” 클린턴이 무릎을 치며 시원스레 말했다. “그럼 날치기로 통과시킵시다.”
  • 영화 ‘6년째 연애중’

    6년 연애의 끝자락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일까 의리일까. 영화 ‘6년째 연애중’은 연애가 일상 다반사가 돼버린 20대 남녀의 속내를 가감없이 그려낸다. 6주년 기념일에도 더 이상의 설렘이나 새로울 것도 없는 베스트셀러 기획자 다진(김하늘)과 홈쇼핑 PD 재영(윤계상). 서로의 존재가 공기같이 편해진 이들에게 연애는 의무감의 또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시때때로 상대의 집을 오가는 다진과 재영은 친밀한(?) 이웃사촌이다. 집이 주는 익숙함만큼이나 둘의 관계는 민망한 부탁도 서슴없이 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익숙함을 넘어 지극히 당연해져버린 이들의 연애. 다진-재영 커플은 지난 6년간 공들여 쌓았던 탑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새로운 것에 대한 유혹과 욕구. 암묵적으로 결혼을 약속했으면서도 여전히 ‘사랑타령’인 다진을 못마땅해하던 재영은 방송국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온 지은(차현정)의 도발적인 매력에 흔들린다. 서른 전 팀장 입성을 목표로 잘 나가는 북디자이너 이진성(신성록)을 섭외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다진. 그녀 역시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재영과 달리 진심어린 고백을 해오는 진성에게 가슴이 떨리긴 마찬가지다. 영화 ‘6년째 연애중’이 갖는 최대의 미덕은 바로 ‘리얼함’이다.6년 연애 끝에 위기가 닥친 커플의 이야기를 얼마나 진솔하고 설득력 있게 풀어내느냐에 작품의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6년 연애’ 커플의 이야기에 국한된다기보다는 권태기에 빠진 부부, 연이은 실패로 인해 긴 슬럼프에 빠진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촬영 당시 모두 스물 아홉 동갑내기였던 주연배우 김하늘과 윤계상, 박현진 감독은 서른을 앞두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고민을 담담하게 표현한다.‘사랑이 뭐 별건가요?’ ‘결혼할 사이잖아, 해야 되는 거니까’ ‘우린 이미 사랑하는 친구잖아?’ 등의 대사는 이들의 고민을 여실히 드러낸다. 여성감독 특유의 감성이 이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잘 따라잡은 것도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서사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의 구원투수가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작품은 ‘생활 밀착형 드라마’임을 내세우고 있지만, 예상 가능한 평면적 인물 구조나 이제는 식상해진 열린 결말들은 새로운 영감을 주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청춘만화’ 등으로 로맨틱 코미디계의 대표격인 김하늘도 성숙한 면모를 보이지만, 캐릭터보다는 ‘배우’ 김하늘이 먼저 보인다. 군 제대 이후 첫 스크린 나들이로 관심을 모았던 윤계상은 드라마와는 또다른 긴 호흡의 연기도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장기연애의 경험이 있거나 익숙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기는 ‘생활연애담’을 즐기고 싶다면 한번쯤 볼 만하다.15세 관람가. 새달 5일 개봉.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여성&남성] 79년생 남녀들의 이야기

    [여성&남성] 79년생 남녀들의 이야기

    나이 서른. 청춘이라 부르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중후함이라 칭하기도 뭣하다. 삶의 모든 걸 스스로 책임질 줄 안다고 하기엔 조금 모자랄 것 같고 부모에게 의지한 채 이것저것 기대기에도 눈치보인다. 연애도 감정만으로 따지지 못하고 결혼이라는 배경음악을 깔지 않으면 철없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나이. 어중간함 외에는 딱히 설명할 수사가 없는 나이 서른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2008년 우리 나이로 서른이 되는 79년생 여성과 남성들의 이야기로 갈무리해 봤다. 전문직 임모씨는 2008년 새해를 우울함과 함께 시작했다. 우리 나이로 서른이 됐지만 자신을 돌이켜 보니 여전히 ‘철이 없는’이라는 수식어밖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작은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혼자 남으면 그 상처를 떠올리며 훌쩍거리기도 한다.10대부터 좋아하던 록음악에 대한 감정이 여전해 아직도 록 페스티벌을 찾아가 발벗고 함께 열광한다. “어릴 땐 왠지 나이 서른이 되면 인생의 의미를 다 알 것 같고, 힘든 일이 있어도 꾹 참고 스스로 버티고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서른이 돼도 제가 지금 하는 짓이나 생각하는 걸 보면 여전히 어른이 아닌 것 같아요. 이젠 마흔이 되고 쉰이 되어도 제 인생에 ‘어른이 됐다.’고 안도할 시기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어요.” 최근 공기업을 그만두고 로스쿨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강모씨에게 서른이라는 이름은 말도 꺼내기 싫은 스트레스 덩어리다.20대 땐 자신감에 가득차 연애도 많이 하고 회사도 여기저기 옮겨 다녔지만 지금은 서른이라는 나이 자체를 믿을 수가 없을 만큼 받아들이기 힘들다.“서른이 되어도 인생에서 정리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어요. 얘기하기조차 싫어지네요.” ●나이 서른, 삶의 중요한 터닝포인트 교사 조모씨에게 서른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의 다른 이름이다. 지난해 가족끼리 결혼 얘기까지 오갔던 남자친구와 성격상의 문제로 이별했다. 그렇게 힘든 20대 말을 보내다가 4년 정도된 교사 생활에도 권태기가 찾아와 힘든 일이 겹쳤다. 결국 휴직계를 내고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20대엔 늘 쫓기듯 살아와서 외려 이런 계기가 잘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좀 더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여유를 가지고 몰두하기에 서른은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아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신모씨는 서른보다 스물 아홉 때가 훨씬 막막했다고 돌아봤다. 지난해 해놓은 것 없이 30대를 맞이하게 됐다는 두려움에 신씨는 늘 마음이 무거웠다. 주변에 직장 생활을 하며 돈을 모아 재테크에 열을 올리는 친구들을 보면 자신이 한심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지 않을 것 같던’ 서른이 막상 현실로 닥치자 마음은 문득 편해졌다.“20대는 이미 지나갔잖아요. 지난해 생각지도 않게 남자친구도 생긴 걸 보니 암울했던 20대와는 달리 30대는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아서 시험 준비든 결혼 준비든 열심히 해볼 생각이에요.” ●서른은 연애의 부족한 2%를 채울 시기 회사원 이모씨에게 서른이란 나이는 근시에서 원시로 바뀌듯 남자를 보는 안경이 달라짐을 의미한다.20대 때 몰려드는 남자들의 전화와 구애공세에 몸살을 앓았던 이씨는 자신을 압도하는 강한 남자들을 위주로 ‘골라 가며’ 사귀어 왔다. 저자세로 달려드는 남자에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른이 다가오면서 남자를 보는 눈이 확 바뀌었다. “친구들이 ‘넌 나쁜 남자 콤플렉스에 빠졌어.’라고 아무리 충고해도 사실 귀에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젠 나를 막 대하는 남자들과의 마음 졸이는 연애는 하기가 싫어졌고, 그저 따뜻하게 나를 감싸줄 수 있고 변함이 없는 남자에게 매력이 느껴지더군요.”이씨는 지난해부터 만나기 시작한 남자와 올 가을 쯤 결혼할 계획이다. 남자친구가 있는 회사원 박모씨는 서른이 되기 직전인 지난 연말 남자친구가 없는 친구들과 밤을 함께 보냈다. 남자친구와 보내고도 싶었지만 부쩍 우울해하는 친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박씨의 참석에 너무 기뻐하며 경쟁적으로 계산서를 움켜 쥐었다.“사실 생물학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스물아홉과 서른이 주는 의미 차이는 크죠. 친구들을 보면 더이상 외모 등에 자신이 없어하는 것 같고 이제 사람을 만나도 결혼하려면 서른 하나나 둘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힘들어하더군요. 남친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만화가 김모씨에게 나이 서른은 인생의 부족한 2%를 채우는 시기로 받아들여진다. 지난해 결혼한 김씨는 오는 20일쯤 출산을 앞두고 있다.20대 초반 김씨는 서른 즈음에 결혼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되뇌어왔다. 결혼만 동경하면 왠지 여자의 삶이 구차해질 것만 같았고 능력만 있으면 결혼을 안해도 즐기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상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인정을 받아도 삶이 퍽퍽한 것 같고 항상 2%씩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여자친구들을 만나도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는데, 결혼할 사람을 만나고 곧 아이를 낳게 되니까 그 부족함이 자연스레 충족되더군요.” 교육 공무원 김모씨도 결혼과 출산으로 삶을 바라 보는 눈이 달라진 서른살이다.20대 땐 작은 일 하나에도 전전긍긍하고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삶에서 아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80%에 이를 만큼 부모로서의 책임감이 막중해 내 삶의 불만에만 신경쓸 겨를이 없다. “나이 서른에 벌써 아줌마로 사는 게 억울하고 화려한 싱글로 사는 친구들이 가끔 부럽기도 해요. 하지만 친구들이 저보고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하는 걸 보면 서른은 불행보단 다행이란 이름이 맞는 것 같아요.” 이재훈 신혜원기자 nomad@seoul.co.kr 직장인 김모씨는 요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즐겨 듣는다. 모두 새해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지만 김씨의 새해는 너무나 ‘센티멘털’하다. 그저 이 노래를 들으면서 지나간 나날을 반추해 보는 게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법’이다.“청춘이 다 가버린 느낌입니다. 정신없이 20대를 보내고 나니 벌써 30대가 돼 버렸죠.”김씨는 이 노래의 가사 가운데 ‘내가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부분이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김씨의 씁쓸한 심정을 너무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30대는 군대에서 한창 일해야 하는 ‘일병’과 같은 존재라고 하잖아요. 과연 제 인생에 남는 게 있을까요.” ●남자에게 나이 서른은 ‘가을’ 직장인 이모씨도 ‘센티멘털’해지기는 마찬가지다.10대에서 20대로 넘어갈 때에는 ‘어른’이 됐다는 기쁨에 밤잠을 설쳤는데 30대가 된 기분은 정반대다.“여자들은 군대를 가지 않으니 20대 후반에 정착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남자는 다르죠. 군대 다녀오고 취업준비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30대가 돼 있더군요.” 최근 결혼 준비를 하는 것도 마냥 기쁘지마는 않다. 다들 이씨의 결혼을 부러워 한다고 말하지만 이씨의 생각은 다르다.“올 봄에 결혼도 하고, 또 남자이니 어엿한 가장이 돼야 할 텐데 이제 저 자신을 위한 삶은 끝이 난 것 같아 많이 아쉽습니다. 남자의 ‘계절’이 ‘가을’이라면 남자의 ‘나이’는 ‘30살’입니다.” 학원강사 정모씨는 지난 연말만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리다.20대의 마지막 연말에 느꼈던 외로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친구들도 결혼준비에 여념이 없어요. 그래서 송년회 때 모두 약속이 있다고 일찍 자리를 뜨더라고요. 저는 쓸쓸히 거리를 배회하다 결국 집으로 들어갔습니다.30대는 남자만의 진정한 우정을 느끼는 것조차 어렵다고 절실히 느꼈습니다.”정씨는 이날 홀로 집으로 들어갔을 때 그 처량함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취방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속옷과 양말을 보면서 ‘이제 나도 어느덧 30대 노총각이 됐구나.’란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 왔기 때문이다. ●취업도 못한 30대 남자의 ‘오명’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강모씨는 침울하다 못해 공포스럽다. 고시공부를 시작한 지 5년이 넘었지만 아직 고시 합격은 불투명하다. 특히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강씨의 가슴은 답답하다.“가끔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고 속내를 털어 놓기도 했는데 이젠 그것도 어려워요. 다들 바쁘기도 하고 혼자 백수생활 하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해집니다. 그래서 친구들도 만나지 않는 편이에요.” 강씨가 가장 힘겨운 부분은 다름아닌 ‘가족’. 대학졸업 뒤 고시준비를 하고 있어 부모님은 처음에 동정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이젠 공부를 그만 뒀으면 하는 눈치다.“나이 서른에 돈도 못벌고 공부하는 아들이 얼마나 한심하겠어요. 아직 우리사회가 일하지 않는 여성보다 일하지 않는 남성에 더 엄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잖아요.” 지방공무원 9급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설모씨도 새해가 두렵다. 대학졸업 뒤 3년간 시험을 준비하고 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계속 한숨만 나온다.“여자들은 군대를 가지 않으니 남자보다 공부할 시간이 많죠. 군대 갔다와서 적응하고 준비하니 20대는 훌쩍 떠나가 버렸습니다.” 설씨는 고시나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남자들은 정말 ‘불쌍한 존재’라고 말한다.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금방 30대가 되기 때문이다.“마음 같아서는 군가산점제가 부활됐으면 좋겠어요.30대 남자가 되고 보니 커지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뿐이네요.” ●이제는 ‘청년’이 아닌 ‘장년’ 그러나 서른살 남자들이 모두 우울한 것은 아니다.30대에 진입한 일부 직장인들은 ‘가족에 대한’ 의무감으로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 지난해 봄 결혼한 직장인 김모씨는 새해 1일 서른 문턱에서 이제 어엿한 가장이 됐다는 의무감에 어깨가 무겁다. 열심히 돈 벌어 처자식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됐다. “이제는 저도 ‘청년층’이 아닌 ‘장년층’이잖아요. 일신의 쾌락보다는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아야죠.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행복 조건인 돈을 열심히 벌어 보려고요.” 김씨는 최근 펀드와 주식투자 등 재테크에도 여념이 없다.20대에는 ‘그저 적금이나 부어야지.’하고 생각했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돈을 모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벤처기업 사장 박모씨는 마음이 스산할 시간도 없다. 막 사업을 시작해 눈코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IT회사에서 일하다 2년 전 벤처기업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잘 되지 않자 동업자들이 다 떠나더군요. 다행히 최근 상황이 좀 나아져 희망이 생겼습니다.30대의 첫 단추가 잘 끼워진 셈이죠.” 박씨는 지난해 봄 결혼한 아내와 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어엿한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아내와 아이를 위해서 제 30대를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실패의 기억은 접어 두기로 했습니다. 이제 새롭게 출발해야죠.” 이경원 장형우기자 leekw@seoul.co.kr
  • 이재무 시집 ‘저녁 6시’

    팍팍한 삶을 이어가는 현대인들의 이야기를 곡진하게 그려온 시인 이재무가 아홉 번째 시집 ‘저녁 6시’(창비 펴냄)를 냈다. 고향을 등지고 도시의 삶을 선택했으나 어두운 정치현실과 가난에 부딪혀 희망을 찾기 힘들었던 80년대, 각박한 도시 현실과 반생태적인 환경에 맞선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진솔한 감정을 담백하게 전한다. “생활의 터전에서 시적 재료를 발견, 당대 구성원의 삶과 나 자신의 삶을 모티프로 삼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험성을 추구하기보다 ‘생활의 발견’에 주목한다는 시인은 ‘삶의 보폭’과 ‘시의 보폭’을 나란히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고백한다. 표제작 ‘저녁 6시’는 인간적 절제와 이성을 상실한 도시인의 야성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타락한 도시 문명의 후미진 공간쯤으로 읽힌다.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이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과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를 물었다 뱉는다” 주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동화된 삶을 그린 ‘팽이’, 정신적 가치가 사라진 현 세태에 아쉬움을 표현한 ‘가난에 대하여’, 원시적 생명감을 추구한 ‘푸른 늑대를 찾아서’ 등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60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어떤 영화

    승리의 순간은 기억되고 패배는 잊혀진다.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 이전까지는 그랬다.1000여개의 핸드볼팀을 보유한 덴마크와 붙은 선수들은 열아홉번의 동점, 연장 접전에 승부던지기까지 갔다. 그리고 졌다. 그 패배의 순간은 감동의 실화가 됐다.‘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제작 MK픽처스·10일 개봉)이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이야기는 풍부한 양감과 생생한 촉감을 가진 캐릭터로 직조됐다.‘우리 생애…´는 생활전선과 경기장을 분리하지 않는다. 노장선수 미숙(문소리)은 팀이 해체되며 마트 야채코너에 선다.“양파가 1㎏에 990원”을 외치던 ‘아줌마´는 다시 국가대표로 들어가 빚에 쫓기는 남편과 아들의 생계를 책임진다. 새 국가대표팀에 감독대행으로 온 혜경(김정은)은 팀내 불화보다 이혼 경력 때문에 경질된다. 자존심 뭉개고 선수로 다시 복귀하는 그는 입술 앙다물던 과거의 독기를 풀고 동료들을 보듬는다. 평생 ‘국대´마크 한번 못 달아보다 늘그막에 익은 정란(김지영)은 화통한 사투리로 웃음을 주도하지만 호르몬제로 불임의 고통을 겪고 있다. 삶도, 경기도 순탄치 않은 이들은 새 감독 승필(엄태웅), 신진 선수와의 불화 등으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이 영화의 관건은 경기의 재현이 아니라 선수 저마다의 사연이다. 경기 장면은 기대만큼 박진감 넘치거나 정교하지 않다. 그러나 배우들의 결단 서린 맨얼굴은 ‘역투´를 만들어냈다. 김정은은 큰 눈망울의 생기를 지우고 진중한 감독과 선수로 자리잡았다. 늘 조연 역에 머물렀던 김지영은 언제 어떻게 파고들지를 정확하게 계산해 낸다. 배우 문소리는 시사회에서 “우리가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에도 부족했고 한국영화 현실에서 여성영화를 만들기도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스포츠영화에 여성영화라는 마이너리티 근성은 핸드볼이라는 비인기 종목의 애끓는 경험과 맞아떨어지며 ‘감동´의 진폭을 넓힌다. 크레디트 옆으로 지나가는 실제 선수들의 망가진(?) 스틸컷은 가장 가슴 먹먹한 크레디트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마지막 승부던지기. 카메라는 공 대신 선수의 얼굴에 남은 적막과 진공을 비춘다. 환희와 절망이 빠르게 뒤섞이던 순간이다. 오심과 부상의 악재가 겹치는 인생의 경기장에서 의연하게 끝을 맺는 성숙함. 지더라도 결코 울지 말자는 약속. 생애 최고의 순간은 결과가 아니라 의지가 말해 준다는 진실.‘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전체 관람가.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동화당선작] 꼬르륵/이성율

    [서울신문 신춘문예-동화당선작] 꼬르륵/이성율

    꼬르륵. 꼬마는 짐자전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페달을 돌립니다. 페달엔 흙이 묻어 있고, 성에처럼 먼지가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꼬마는 엄마, 아빠의 해진 신발을 보는 것 같아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뒷바퀴는 세 번쯤 돌다가 조금씩 느려집니다. 꼬마가 두 손을 모으고 한 바퀴만 더 달리라고 응원을 해도 조금 뒤엔 스르르 멈추고 맙니다. 꼬마는 양손에 침을 퉤, 퉤 뱉고 손바닥을 마주칩니다. 아빠가 하던 모습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페달을 잡고 다시 돌립니다. 꼬르륵. 엄마, 아빠가 오려면 페달을 얼마나 더 돌리고 있어야 하는지 꼬마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페달을 자꾸 돌리다 보면 햇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자전거 안장에 내려와 쉬고 있는 키다리 전봇대 그림자도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드디어 엄마, 아빠가 온다는 것을 꼬마는 잘 알고 있습니다. 꼬르륵. 엄마, 아빠는 고가도로 아래서 호두과자를 팝니다. 엄마는 호두과자를 만들고, 아빠는 차들이 밀리기를 기다렸다가 자동차 사이로 다니면서 호두과자를 팝니다. 그렇지만 꼬마는 호두과자가 먹고 싶을 때마다 얼른 눈을 감아버립니다. 호두과자를 많이 팔아야 엄마가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꼬르륵. “넌 배고프지 않아서 좋겠다.” 꼬마는 페달을 돌리다 말고 자전거를 부러워합니다. 빵을 사 먹고 싶은데 왼손에 쥐고 있는 돈은 백 원뿐입니다. 엄마가 준 오백 원짜리는 장롱 밑에 들어가 있습니다. 동전 굴리기 놀이를 하는데 장롱 밑으로 또르르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옷걸이를 가지고 빼내려고 했지만 동전은 장롱 깊숙이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꼬마는 재미있는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납니다. 그러고는 자전거 벨을 잡고 계속 울립니다. 따르릉, 따르릉. 자전거 벨은 마치 전화기 소리처럼 울립니다. “여기 행운 빌라 가동 비 백일혼데요. 짜장면 한 그릇하고, 단무지 많이많이 갖다 주세요.” 꼬마는 금방이라도 자장면이 배달될 것처럼 입맛을 다십니다. 아빠가 한 것처럼 나무젓가락을 비비는 시늉도 하고, 자장이 면에 잘 섞이도록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세 번 젓기도 합니다. 그런 다음엔 고개를 들어 면발을 하나씩만 먹는 흉내를 냅니다. 두세 가닥씩 먹으면 너무 아까워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먹는 흉내를 냅니다. 단무지는 여러 번 핥아서 단물부터 빨아먹는 시늉을 합니다. 깨물어 먹을 때는 별 모양을 만들어가면서 야금야금 먹습니다. 그렇게 자장면 일곱 가닥과 단무지 하나를 먹었을 때입니다. “니가 행운빌라 비 백일호에 사는 꼬마니?” 꽁무니에 오토바이 소리를 요란하게 달고 온 철가방 아저씨입니다. 꼬마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에 침을 바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자, 짜장면하고 단무지 많이” 꼬마는 너무 놀라 자전거 벨만 쳐다봅니다. 빈 그릇은 집 앞에 내놓으라는 아저씨가 어쩌면 천사 아저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참이나 후에 떠올립니다. 꼬르륵. 담 너머에서 흐뭇하게 지켜본 문간방 할머니는 자장면 값을 치른 뒤에야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단칸방에 딸린 부엌으로 들어온 할머니는 컵으로 수돗물을 두 컵이나 받아 마십니다. 콩나물처럼 물만 먹고 산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할머니는 피식 웃습니다. 그러면 바다가 제일 부자겠다고 생각하다가 또 피식 웃습니다. 부엌 구석에 3층탑으로 쌓여있는 연탄들도 아홉 개의 이를 드러내놓고 까맣게 웃습니다. 꼬르륵. 달라는 밥은 안 주고 물만 줬다며 배가 투덜거립니다. 할머니는 시치미를 떼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방엔 14인치 텔레비전과 이불이 얹혀 있는 서랍장, 모서리가 깨진 거울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할머니, 계세요?” 할머니는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금방 압니다. 무료 급식을 배달해 주는 대학생입니다. 문을 열자 대학생이 환한 미소와 함께 도시락을 내밉니다. 급하게 왔는지 숨이 차 보입니다. 그렇지만 집에 마실 거라고는 수돗물밖에 없어서 선뜻 권할 수도 없습니다. “배고프시죠? 죄송해요, 너무 늦어서. 수업이 늦게 끝났거든요.” “죄송하긴. 내가 더 미안하지. 다음엔 더 천천히 와도 돼. 게다가 배도 안 고팠는걸.” 꼬르륵. 할머니는 꼬르륵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헛기침을 합니다. “번번이 이런 수고를 해서 어쩌누.” “전, 할머니 뵐 수 있어서 좋은데요.” 대학생은 가져온 도시락을 가지런히 놓으면서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할머니는 대학생 같은 손자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할머니, 꼭꼭 씹어서 드셔야 되는 거 아시죠? 반찬도 골고루요.” 할머니는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옵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사고로 죽은 아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대학생만 한 손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는 울컥 목이 메어 또다시 헛기침을 합니다. 꼬르륵. 대학생은 대문을 나섭니다. 늦지 않으려고 헐레벌떡 뛰어다녔더니 배가 고픕니다. 그러자 모락모락 김 나는 라면이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대학생은 호주머니를 뒤적거립니다. 동전들이 동그란 얼굴을 내밀며 하나 둘씩 나옵니다. 오백 원짜리가 하나, 백 원짜리가 아홉 개입니다. 라면을 먹으려면 천오백 원이 있어야 하는데 꼭 백 원이 모자랍니다. 근처엔 편의점이 없어서 컵라면을 사 먹을 수도 없습니다. 백 원이 없어서 라면을 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폴폴 김 나는 라면이 더욱 먹고 싶습니다. 후후 불어가면서 면발에다 김치를 얹어 먹으면……꿀꺽 침이 넘어갑니다. 꼬르륵. 대학생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주머니를 뒤져봅니다. 백 원짜리 동전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호주머니마다 안타까움만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자요!” 자전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꼬마가 어느 새 다가와 하는 말입니다. 대학생은 꼬마가 내민 백 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허리를 수그립니다. 그러고는 꼬마와 눈높이를 맞춥니다. 대학생의 눈 속에서 꼬마는 말갛게 웃고 있습니다. 대학생도 꼬마의 눈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습니다. “너 정말 이 돈 나한테 주고 싶어?” 꼬마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대학생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꼬마의 입가에 묻어있는 자장부터 손수건으로 닦아 줍니다. 그러고는 꼬마에게 묻습니다. “사탕도 사 먹을 수 있고, 뽑기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주고 싶어?” 꼬마는 여전히 말갛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다면 공짜로야 받을 수 없지. 너, 말 타고 싶지 않니?” 꼬마는 대답 대신 눈을 크게 뜨고 호두과자 두 개가 들어갈 만큼 입을 활짝 벌립니다. “말 타면 어디 가고 싶은데?” “엄마, 아빠 있는 고가도로 아래요.” 대학생은 꼬마를 자전거 짐받이에 태우고 안장에 앉습니다. 그러고는 페달에 발을 올려 놉니다. “오늘은 이게 우리 말이야. 그럼, 간다?” 대학생이 묻는 말에 꼬마는 좋아서 만세를 부릅니다. “이랴!”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자전거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지만 두 사람은 신나게 달립니다. 따가닥 따가닥 소리를 내면서 차들을 앞지르고 신호등을 건넙니다. 꼬마는 엄마, 아빠한테 가서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엔 엄마와 아빠도 말을 태워주고 싶습니다. 어서 달려가 히힝 소리 내는 말 위에 엄마와 아빠를 태우고 싶습니다. “이랴!” 대학생이 다시 한 번 더 채찍질을 합니다. “이랴!” 꼬마도 엉덩이를 들썩이며 대학생을 따라 합니다. 어느 새 대학생은 배고픈 것도 잊고 어린 시절로 달려갑니다. 제주도에서 조랑말을 타고 놀던 바로 그때입니다.IMF때 부도를 맞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지금도 목장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대학생은 더욱 열심히 말을 몹니다. 바다가 보이고 저 멀리 섬들이 보입니다. 갈매기들은 끼룩끼룩 노래하면서 배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고, 파도는 철썩철썩 응원을 합니다. 그 너머로 저 멀리 예쁜 섬 하나가 보입니다. 엄마처럼 따뜻하고 아빠처럼 든든한 제주도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제주도에 닿을 듯합니다. 그때 꼬마가 엉덩이를 요란스럽게 흔들며 외칩니다. “엄마다!” 그 말에 대학생도 덩달아 “엄마다!” 하고 외칩니다. 어느 새 달무리가 덩그렇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참 평화롭고 배부른 저녁입니다.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이명박과 與大野小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이명박과 與大野小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17대 대선 압승은 이 당선인이 갖고 있는 고유의 ‘브랜드’ 가치 때문일까, 아니면 이 후보가 속한 한나라당이란 ‘울타리’ 때문일까. 쉽게 결론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어디에다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향후 정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한나라당의 공천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공천 일정 때문이다. 속내는 대폭 물갈이 vs 지분 인정이다. 무자년 새해 정국의 핫이슈다. 이 당선인측과 박근혜 전 대표측 간의 발언 수위가 예사롭지 않다. 일전을 벼르는 형국이다. 공천이 국회의원들에겐 생명과도 같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게다. 한데 이 문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서처럼 어디에 주안점을 두느냐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 당선인측은 경제 CEO의 이미지에다 중도진영까지 끌어들인 이명박 브랜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박 전 대표측은 그것을 인정하지만 그보다는 좌파 정권 10년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원조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 표를 던진 것으로 해석한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상상 이상이다. 최근의 여론조사들은 열에 여덟, 아홉은 이 당선인이 잘 할 것이고 새 정부에선 뭔가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취임도 하기 전에 이처럼 기대감이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당장 정부조직 개편부터 해야 한다. 관료들에게 파묻혀서는 될 일도 안 된다. 주요 부처 핵심 보직에 포진하고 있는 특정 지역 인맥을 솎아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또 ‘경제 대통령’의 실천적 과제인 실물경제를 되살려야 한다. 기업들의 투자도 대폭 늘려야 하고, 성장동력도 찾아야 한다. 교육 개혁 등 손볼 대상이 널려 있다. 그러기 위해선 여대야소(與大野小)가 필수적이다. 지금 분위기론 여대야소가 당연시되지만, 민심은 조변석개(朝變夕改)다. 곧 집권당이 될 한나라당의 내분이 격화될 경우 민심은 차갑게 바뀔 수 있다. 견제와 균형 심리가 작동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1987년 13대 대선 이후 재임 중 총선 승리를 거둔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뿐이다. 그것도 탄핵 바람 때문이었다. 정치가 국정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혐오해서도 안 된다. 혹여 이 당선인측에서 2002년의 이회창식 ‘피의 숙청’을 생각하고 있다면, 박 전 대표측에서 탈당 후 ‘이회창 신당’과 합치는 것을 구상 중이라면? 양쪽 다 소망스러운 결과를 얻기 힘들 것이다. 그 때와는 정치상황이 많이 다르다. 자칫 이회창 신당이 제1 야당이 되는 길을 터줄 수 있고, 박 전 대표 역시 당적 변경으로 높은 평점을 잃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 당선인과 박 전 대표는 이제 경쟁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여대야소의 해법은 나와 있다. 이 당선인이 박 전 대표를 보듬고 가는 것이다. 대선 때 진 빚도 있다. 박 전 대표의 처신도 달라져야 하지만,‘국정의 동반자’답게 상호 협력 범위를 넓혀야 한다. 자주 만날 필요가 있다. 진정성을 담보로 한 신뢰 구축은 자연히 뒤따른다. 공천 갈등도 어렵지 않게 풀릴 것이다. ‘박근혜 효과’는 4월 총선에서도 효력을 발휘할 소지가 크다. 차라리 박 전 대표가 총선을 이끌게 하고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어떨까. 지역구 공천도 그렇다. 당에서 지역구별로 2명의 후보를 선발, 경선을 통해 후보자를 뽑는 방안은 검토할 만하지 않은가. 또 ‘내편, 네편’보다는 ‘이명박 사람’으로 동화(同化)시키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열쇠는 이 당선인이 쥐고 있다. 민심은 수시로 변한다. jthan@seoul.co.kr
  • [시론] 새해가 ‘좋은 교육’ 원년 되기를/이원희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장

    [시론] 새해가 ‘좋은 교육’ 원년 되기를/이원희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장

    새해 새정부의 화두는 경제와 더불어 교육이 되어야 한다. 역대 대통령 선거 때마다 후보들은 표를 얻기 위해 그럴싸한 ‘교육공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국민이 바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학생, 학부모, 교사에게 희망을 주는 해결 방안을 마련하여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한국 교육이 당면한 문제로는 공교육 불신 및 사교육 심화, 교육여건 부실 및 교육투자 미흡, 교육격차 심화, 학교운영의 다양성·특성화 부족, 지방교육자치 및 단위학교 자율적 운영체제 미확립, 교육 운영의 경직성 및 관료 행정의 상존, 교권실추 등 교직구조의 약화, 대학교육의 자율성 및 경쟁력 미흡, 정부 정책 추진의 혼선 및 교육 주체간 갈등 심화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러한 아홉가지 교육 난제들을 해소하고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감소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새 정부의 책무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한국교총 초청 교육정책 토론회에서 ‘모두를 위한 창의적인 교육으로의 전환’을 구상으로 밝히고, 이를 체계화하기 위해 ‘공교육 두 배, 사교육비 절반’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인수위의 교육정책 수립 및 새 정부의 추진과정에서 이러한 구상이 체계화되고 그 성과를 학생, 학부모, 교원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몇 가지 제언을 한다. 우선 학교현장 중심의 정책수립과 지원을 위한 시스템변화가 필요하다.60여년간 한국교육은 교육부, 교육청, 학교로 이어지는 철저한 계선적 운영으로 일방적 지도와 통제에 놓여 창의적, 자율적 교수·학습이나 인성지도가 이뤄지지 못했다. 교육부와 교육청의 올바른 조직개편을 통해 현장교육 지원센터로서의 변화와 역할 모색이 이뤄져야 한다. 세계사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우리 교육현실에 맞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교육부 개편에서 유·초·중·고의 의무교육을 부실화하거나 지역간 격차가 커지게 하는 방식은 곤란하다. 둘째, 교육예산 확보에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교육비 증가는 학부모들의 등을 휘게 하고, 해외 유학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사교육비 경감은 새 정부에 바라는 국민들의 가장 큰 염원이다. 이를 위해 정부의 과감한 교육재정 확보와 투자가 이뤄지고 이를 통해 교육여건 개선과 공교육 정상화의 기틀이 마련돼야 한다.GDP 6% 예산 확보를 통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의 교육 여건 마련이 우선이다. 셋째, 교육정책의 안정적 추진이 필요하다. 교육개혁은 학교현장의 변화로 나타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학교현장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가지 않는다면 역효과를 부를 공산이 크다. 국민의 정부뿐 아니라 참여정부에도 어느 정부보다 교육부총리의 교체가 잦았다. 따라서 ‘초 정권적 교육위원회’의 설치는 5년 단임 정부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교육 백년대계를 위한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50만 교원들은 학생, 학부모들의 염원인 ‘더이상 교육으로 고통받지 않고 좋은 교육을 받고 싶다.’는 바람을 가슴에 담고 분발할 것이다. 새 정부도 교원들이 전문성과 교육적 열정을 갖고 교육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교권확립과 교원존중 풍토 마련에 최선을 다해줘야 한다. 정치권도 지혜를 모아 2008년 새해를 선진교육 강국 실현을 위한 ‘좋은 교육’의 원년으로 만들어 주기 바란다.
  • 마니아들 다 모여라

    마니아들 다 모여라

    서울독립영화제 화제작을 다시 본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는 내년 1월4일부터 10일까지 2007독립영화제 수상작을 재상영한다. 16개 섹션,31편으로 이뤄진 이번 상영전에서는 독립 애니메이션 최초로 대상을 수상한 김진만 감독의 ‘소이연’과 강호 최고의 고수가 현대에 커피 자판기로 환생해 사랑에 빠진다는 ‘무림일검의 사생활’이 소개된다. 독립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전장에서 나는’은 이라크 파병 군인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다룬다.‘살기 위하여-어부로 살고 싶다’는 새만금의 마지막 물막이 공사가 끝난 후에도 이어지는 주민들의 투쟁 현장을 따라간다. 관람료 5000원.(02)778-0362. 프랑스영화를 선보이는 ‘시네프랑스’의 내년 첫 시리즈도 확정됐다. 장 르누아르 감독의 회고전이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인 장 르누아르는 사회 풍자극과 인간 본성을 담은 영화 등 영화사에 다양한 얘깃거리를 만들어냈다. 리얼리즘 촬영 방식과 딥 포커스 기법 등의 실험으로 훗날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찬사를 받은 감독이기도 하다. 회고전은 1월부터 2월까지 매주 화·수요일 서울 하이퍼텍나다에서 열린다. 장 르누아르가 전성기 시절 만든 아홉 편의 작품이 스크린에 오른다. 에밀 졸라의 소설을 영화화한 ‘인간 야수’,‘게임의 규칙’뮤지컬 코미디 ‘프렌치 캉캉’ 등이 상영될 예정이다. 관람료 6000원.(02)776-3390.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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