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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8경과 문화서울(사설)

    서울시가 한강변에 산재해있는 문화유적지 가운데 우선 8곳을 ‘한강8경’으로 선정해 대대적으로 복원·정비하기로 했다(서울신문 7월19일자 19면 보도).때늦은 감이 있지만 참 잘한 결정이다.조순 서울시장이 밝힌 한강8경은 노들섬 및 선유도,암사 선사유적지,풍납토성,아차산성,압구정지,새남터,절두산,망원정 등이다. 서울을 낳은 한강이기에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적지가 있지만 이번에 선정된 8곳은 그중에서도 선조들의 숨결을 깊이 느낄수 있는 사적지며 풍광 또한 뛰어난 곳이다.지난 94년 서울 정도600년에 맞춰 한강변 문화유적지 복원사업이 펼쳐지긴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해 아쉽던 터에 나온 계획이어서 더욱 반갑다.문화서울의 면모를 갖추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한강은 서울의 젖줄이자 한반도의 중심지역이다.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강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집을 짓고 밭을 갈며 살았다.때로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기도 했다.그 자취가 암사 선사유적지와 풍납토성,아차산성에 남아있다.조선시대 세조와 예종·성종조때 재상을 지낸 한명회가 지은 정자 압구정이 있던 터는 아파트숲에 가려 흔적조차 찾을수 없다.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신부가 순교한 새남터와 대원군의 천주교박해때 수천명의 신자들이 참수된 절두산은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철교가 지나면서 면모가 크게 훼손됐다.세종 6년에 지은 망원정 역시 지난 89년에 복원되긴 했으나 주변정비가 제대로 되지않아 가치를 잃고 있다. 서울시는 이 유적지들의 정비에 곁들여 선유도와 노들섬에는 문화예술공간을 만들고 밤섬에는 더 많은 철새가 날아들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로 했다.이런 계획들이 차질없이 이루어지려면 서울시도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아울러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가 수반되어야 할것이다.
  • 오늘 109만 가구 단수/하오 10시∼30일 10시까지

    28일 하오10시부터 30일 상오10시까지 강남·광진·구로·영등포·동작·서초·강동·금천·관악 등 강남지역 대부분과 성동·중랑·성북·노원 등 일부 강북지역을 포함한 13개 구 176개 동 1백9만2천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중단된다. 이번 단수는 암사정수장의 수돗물 30만t 증설공사와 아차산·우면산·낙성대·청담배수지 등의 상수도 관로 이설공사에 따른 것이다. 서울시는 단수에 대비,각 가정에서는 충부한 양의 물을 미리 받아놓고 각종 행사는 단수기간을 피해 실시해줄 것을 당부했다.문의는 국번없이 121.
  • 109만 가구 최장36시간 단수

    ◎서울 28일 하오10시∼30일 10시/강남·강북일부 등 13개구/정수장 증설·상수도 관로 이설공사로 오는 28일 하오 10시부터 30일 상오 10시까지 서울시내 1백9만여 가구에 수돗물 공급이 일시 중단된다. 서울시는 19일 강남·서초·강동·금천·관악구 등 강남지역 대부분과 성동·광진·성북·중랑·노원구 등 강북 일부지역 등 모두 13개 구,176개 동 1백9만2천여가구에 대한 수돗물 공급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는 암사정수장의 30만t 수돗물 증설공사와 아차산·우면산·낙성대·청담배수지 등의 상수도 관로 이설공사 때문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단수에 대비,가정에서는 미리 쓸 만큼의 물을 확보하고 각종 행사는 가급적 이 기간을 피해 실시해줄 것을 당부했다.
  • 성동구/구 재정자립 돕게 집행부와 긴밀 협력(구의회를 찾아)

    ◎「TV 경마장 수익금 지방세 전환」 시에 건의/금호동 진입로에 신호등 설치 등 민원 해결 성동구의 시급한 현안은 재정자립도를 높이는 일이다.올해 재정자립도는 43.6%로 서울시 25개 구의 평균수치 58.1%를 크게 밑돈다.투자 가용재원이 부족해 지역개발에 어려움이 많다. 의회(의장 김명수)는 집행부인 구청(구청장 고재득)과 머리를 맞대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우선 민자를 유치,왕십리역 주변을 구의 중심 상업지역으로 개발할 계획이다.2001년까지 「왕십리역 종합타운」을 세워 주변 상권을 통합하고 인근 왕십리 로터리 일대는 준 상업지역으로 지정할 방침이다. 또 뚝섬에 돔형태의 종합 스포츠시설을 세우고 어린이공원에서 아차산까지 이르는 주변에는 문화 및 휴식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실질적인 세수입을 늘리기 위한 방안도 내놓았다.임인수의원(49) 등 의원 12명은 성수1가 마권상회 발매소(TV경마장)의 수익금의 일부를 지방세로 거둘 수 있도록 지방세법 개정안을 서울시 등에 발의,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또 성수1·2가에 흩어져 있는 1천5백여개의 중소기업을 대형 아파트형 공장을 지어 흡수할 방침이다.대형 건물의 재산세와 종합토지세는 중요한 세원이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구정활동도 중요한 목표다.이를 위해 행당동 166 일대 5천8백55평 규모의 미군부대 창고부지에 종합 행정타운을 만들 계획이다.부대가 이전하는대로 구청·구의회·교육구청·보건소 등을 한 데 모아 부처간 업무협조와 주민편익을 높일 방침이다. 지역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원도 적극 수용해 해결을 돕고 있다.지난 3월1일 붕괴위험으로 용비교를 전면 폐쇄한 서울시에 한정석 총무재무위원장(56) 등 모든 의원이 대안을 요구해 「금호동 진입로 신호등 설치」,「옥수동 진입로 개설 뒤 신호등 설치」등을 이끌어냈다. 국정에 대해서도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지난 2월초 일본 외상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나오자 장기만 운영위원(61)등 26명의 구의원들은 가장 먼저 자치의회 차원의 결의문을 채택,국회 외무통일위에 보냈다.그 뒤 국회는 독도망언에 대한 강력한 대응방침을 밝혔다.〈강충식 기자〉
  • 서울 광진갑·수원 장안구(4·11총선 표밭현장을 가다:41)

    ◎서울 광진갑/김영춘후보 “세대교체” 외치며 공략/민주 강수임 의원에 무소속 김도현씨도 가세 서울 광진갑은 서울 최대의 격전지중 한 곳.민주당 강수임의원(49)과 청와대 정무비서관 출신인 신한국당 김영춘 위원장(34),국민회의 김상우 위원장(41),자민련 박종철 위원장(52),무소속 김도현씨(53·전 문체부차관) 등이 안개속의 혼전을 벌이고 있다. 휴일인 지난달 31일의 첫 합동연설회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주장하는 각 후보들은 1일에는 지역순방과 거리유세를 통해 얼굴 알리기와 지지를 호소하기에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신한국당 김위원장은 고려대 학생회장으로 84년 민정당사 점거농성을 주도한 학생운동권 출신.1일 새벽에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아차산에 운동하러 나온 유권자 2백여명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통일된 강대국을 만들려면 개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런 일에는 참신하고 젊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젊은 층의 지지를 호소했다.하루종일 지역구의 8개동을 돌며 5백여명의 주민들과 만나는 등 초반 「운동권 출신의 최연소후보」에 대한 거부감을 씻어 승리를 자신했다. 국민회의 김위원장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정치학박사로 지난 대선 때 김대중후보의 외교담당보좌역을 지낸 통일외교전문가.참신한 이미지를 내세워 호남표를 기반으로 밑바닥을 훑고 있다. 민주당 강의원은 이기택 상임고문과 정치노선을 같이해 온 「신의」를 내세우고 초반 주도권을 계속 이어 나간다는 전략.『끝까지 민주당에 남아 전통야당을 지키겠다』는 그는 『이번 선거를 통해 현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재선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자민련 박위원장은 동국대 교수출신으로 신민주공화당 총재특보와 민자당위원장,국민당사무부총장 등 여야를 두루 거쳤다.전북 익산출신으로 충청표에 호남표 일부,안정희구세력을 더하면 승산이 있다며 부지런히 뛰고 있다. 문체부차관을 지낸 민주계 출신으로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나온 김도현후보는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다크호스로 가속이 붙고 있다.정치규제에 묶였던 13대를 제외하고 11대 이후 4차례 금배지에 도전.광진갑은 강의원의 박빙의 우세속에 신한국당 김위원장과 국민회의 김위원장이 바싹 추격하고 있으며 무소속의 핸디캡에도 불구,김도현씨가 복병인 형국이다.〈황성기 기자〉 ◎수원 장안구/이호정 의원 「이병희 7선」 저지 관심/쟁점없고 후보 9명 난립… 안개속 혼전 수원 장안 수원장안은 최근 신한국당과 자민련이 분석한 자료에서 두당이 모두 승리를 장담하는 지역이다.하지만 9명의 후보가 난립한 이곳의 승부를 쉽게 점칠 수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최근 합동연설회 등에서도 지역의 뚜렷한 쟁점이 없는 탓인지 선거에 나선 9명의 후보 모두 각자의 정치적 비전등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지난 14대 때 국민당으로 출마,금배지를 단 이호정의원(58)을 내세운 신한국당은 이번에도 6선의 중진 이병희 전 의원(70·자민련)을 누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신한국당 이후보는 최근 합동연설회 등에서 『지난 4년동안 깨끗하고 소신있는 정치를 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고 『이번에 다시 뽑아주면 썩은 정치,붕당정치를 몰아내는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수원·중고교와 서울대 치대 출신의 치과의사인 이후보는 보수적인 지역적 특성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자민련의 이후보는 지난 총선에서 서울의 대형유통업체를 수원에 유치시켜 재래시장의 상권을 침체에 빠뜨린 장본인이라는 루머 때문에 억울하게 패했다고 분석하고 『이번에는 당당히 심판을 받아 지난 패배를 설욕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그는 『수원과 평생을 함께해온 사람』이라고 호소하면서 『다시 국회에 보내 준다면 지역을 위한 마지막 봉사로 알고 열심히 일하겠다』고 지지를 부탁하고 있다. 여기에 10,11대 의원을 지낸 민주당의 유용근후보(56)의 추격도 만만찮다.류후보는 『현정권의 집권3년동안 보여온 정치·경제·외교적 실적은 낙제점수』고 비난하고 『이번 선거에서는 정통야당의 맥을 잇는 민주당을 지지해 달라』며 표밭을 누비고 있다.국회의원직을 떠난뒤 오랫동안 재야에 머물러 그동안의 공백기간을 어떻게 만회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라고 보고 부지런히 뛰고 있다. 또 이종찬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이종철씨(53)가 뒤늦게 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얼굴알리기에 분주하고 무소속의 박현호후보(38·전수원시의원),안병철후보(38)등도 30대의 참신성을 무기로 표밭을 공략중이다.〈수원=김병철 기자〉
  • 서울 구의동 유적·아차산 보루성 “백제 아닌 고구려 유적”

    ◎서울대 박물관 최종태 연구원 기존 학설에 반론/움집터·출토토기 고구려 양식/몽촌·풍납토성과 마주한 요새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한강유역 고대유적들을 종래의 학설과 다른 각도로 조명한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그 대상은 서울 광진구 구의동유적과 이웃 광장동 아차산 보루성인데,종래의 백제유적설을 부정했다.이같은 해석은 서울대박물관 최종택 학예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논문 「한강유역 고구려토기 연구」에서 제기되었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유적은 지난 1976 ∼ 77년까지 발굴된 한강 북안의 고대유적.해발 54m의 언덕위에 자리잡았던 이 유적은 택지개발로 지금은 흔적 조차 없다.발굴작업 당시 백제계 고분으로 보고되어 학계가 이를 정설로 굳힌 바 있다.그러나 이 연구는 구의동유적에서 출토된 19개 기종 3백69점의 토기를 검토한 결과 모두가 고구려 계통 토기라는 점을 들어 우선 백제유적이 아니라는 반론을 폈다. 그리고 구의동유적이 고분이라기 보다는 생활유적의 성격이 강한 고구려의 남방 전초기지로 해석했다.그 증거로 항아리,단지,접시,대접,시루 등 토기류 거의가 실생활 용기일 뿐 아니라 둥근 움터 안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들추어냈다.특히 출토유물 중에서 무기류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군사들이 생활을 하면서 상주한 유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 구의동유적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건너로 한성시대 백제의 거성으로 알려진 몽촌토성 일대가 조망되는 것도 전초기지에 접근 할 수 있는 이유로 들었다. 이와 더불어 구의동유적이 아차산 산줄기에 흙을 쌓아 만든 진지(보루)들과 곧바로 연결되어 아차산보루성 역시 고구려 요새라는 주장이다.또 아차산 일대 지묘조사에서 구의동 유적에서 나온 것과 같은 고구려 토기가 계속 채집된다는 것이다.아차산 일대의 보루는 구의동유적에서 처럼 오늘의 서울 강동구 한강 남안의 몽촌토성과 풍납동토성을 마주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도 가려냈다. 이들 유적의 축조시기를 고구려가 한강 이남을 차지하기 이전인 4세기 중엽으로 추정했다. 이 연구는 삼국시대 토기의 그릇 생김새(기형)분석 및 과학적 성분분석을선행하고 나서 이를 근거로 당시 고대유적의 강역을 추적했다는 점에서 학계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특히 구의동유적의 경우 출토된 토기 수량을 중심으로 이 요새지유적에 상주한 병력을 10여명 안팎으로 추정해 더욱 주목을 끌었다.
  • 선거운동 현장(“열전” 6·27선거)

    ◎주택가 확성기유세/상가·점포 밤새 순례/“후보비방” 흑색선전/유권자들 “공명 저해” 우려 풀뿌리 민주주의의 틀을 다질 「6·27」지방자치선거의 닻을 올리자마자 선거열기가 후끈 달아오르면서 벌써부터 과열선거의 조짐이 나타나 우려를 낳고 있다. 이번 4대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은 11일 대부분 후보등록을 마친 뒤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통합선거법)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선거유세에 뛰어들어 「당선」을 위한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를 바라보는 전국의 유권자들은 한결같이 흑색선전·비방 등을 경계하면서 이번 선거가 「지역일꾼」을 뽑는 잔치인 만큼 어디까지나 차분하고 공명정대하게 치러지기를 기원했다. ○…지방선거에 입후보한 후보자들은 후보등록을 마친 뒤 바로 선거유세에 돌입,선거팸플릿을 돌리는 한편 선거유세차량 등을 동원해 「한표」를 호소했다. 후보자들은 밤 11시까지 선거유세가 가능해지자 확성기를 장치한 유세차량을 타고 동네의 뒷골목을 누비며 지지를 호소,주민들로부터 밤잠을 설친다고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정원식·조순·박찬종씨등 서울시장후보 「빅쓰리」의 합동토론회가 후보등록 첫날 밤 모방송을 통해 방송되자 서울시민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권자들은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표명하며 세 후보의 우열을 저울질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는 2백여명의 시민들이 TV앞에 몰려들어 후보자들이 저마다 열변을 토하면 박수로 환호하거나 야유를 퍼부어 대조를 이루었다. 회사원 이기영(29·성동구 금호동)씨는 『후보자들의 일방적 공약이 아닌 각자의 의견을 한자리에서 비교할수 있는 자리여서 큰 흥미를 갖고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이날 서둘러 등록을 마친 후보자들은 아직 결정을 하지못한 부동표를 흡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기초의회출마자들인 구의원 후보들은 이를 위해 밤늦게까지 해당 지역의 상가집이나 점포 등을 돌아다니며 발로 뛰는 선거운동을 했다. 특히 일부 후보들은 이날 밤늦게까지 서울시장 세 후보들의 토론회에 귀를 기울이는 주민을 찾아다니며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후보등록 첫날 일선 경찰서에서는 후보자들이 흑색선전 등 선거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제보가 잇따라 경찰관들이 긴급출동하는 촌극을 벌였다. 이날 서울 종로 경찰서에는 『특정 후보자의 집에 유권자들이 몰려들어 모임을 갖는다』는 신고 전화가 걸려 왔으나 확인결과 사실 무근임이 확인됐다. ○…서울 마포구청에 나와 후보등록상황을 지켜본 주민 이충걸(50·마포구 성산동)씨는 『이번 선거만큼은 불법·타락선거가 아닌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가 될 수 있도록 후보자와 유권자 모두가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김광열(33·회사원·강서구 내발산동)씨도 『일부 지역에서 탈법·과열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는데 우리 시민들의 수준이 그같은 불법 선거운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후보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수막 목좋은 곳 설치” 경쟁 치열/자전거 타고 거리서 시민과 대화 ○…추첨순위에 따라 등록을 마친 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은 검인을 받기가 무섭게 다른 후보보다 먼저 시민들이 많이 오가는 목좋은곳에 현수막을 설치하려고 바삐 움직였다.선관위측도 이에 맞춰 후보추천장 검색조와 현수막 및 팸플릿 점검조 등으로 나뉘어 선거사무를 신속·정확히 처리하는데 온힘을 다했다. ○…광진구청장에 출마한 K후보는 등록을 마치자마자 지역에 선전용 팸플릿을 돌린 뒤 아차산 관광단지 개발·한강변 전통시장 개설 등을 즉석에서 공약으로 제시했다.이곳 구청장에 함께 출마한 J후보도 하오 2시 구의2동 선거사무실에서 현판식을 가진 뒤 배드민턴동우회에 참석,즉석연설을 했다. ○…용산구청장 후보로 출마한 S후보는 곧바로 한남동의 한 개소식에 들렸다가 하오 2시쯤 이웃 복개천에서 개인연설회를 가졌다.하오 6시에는 동부이촌동 아파트촌에서 공약설명회를 갖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과천시장에 출마한 S후보도 이번 선거의 승부가 정책대결에 있을 것으로 보고 등록 후 자전거를 타고 거리에서 「시민과의 대담」을 가졌다.하루 10∼15차례의 「거리대담」을 계획하고 있는 이 후보는 이날 저녁에도 중앙공원에서 「열린 행정」을 주제로 교육,환경,문화예술,도시계획 등에 대해 유세를 했다. ○…첫날부터 서울시내 각 구청등에 마련된 시의원·구청장·구의원 후보등록 창구에는 등록시작 한시간전인 상오 7시부터 후보들과 관계자들이 수십명씩 몰려들어 극심한 혼잡을 빚었다.이처럼 대부분의 후보자들이 일찌감치 등록을 마치면서 등록기간이 이틀임에도 불구하고 상오 11시가 넘어서자 등록창구는 썰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썰렁한 모습이었다. ○…접수창구가 혼잡할 것으로 보고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고 구청사무실에서 밤을 샌 서울 중구선관위 직원 3명은 이날 상오 1시30분부터 문을 두드리며 『접수를 받으라』는 어느 후보측의 요구에 잠을 설쳤다.이들은 3시간 뒤인 상오 4시30분쯤 또다시 문을 두드리자 『바뀐 접수방식도 모르느냐』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등록을 마치고 조금이라도 먼저 선거운동을 시작하려는 지방의원 후보들의 실랑이를 지켜본 구청직원들은 『질서확립에 솔선수범해야 할 후보들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꼬집었다.
  • 문화재 감각(외언내언)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이 호텔 뒤쪽에 있는 사적지 234호 아차산성일대에 송수관공사를 하면서 3백여m나 산성유적을 훼손시켜 물의를 빚고 있다.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없어진 산성유적은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문화재라는 점에서 아쉽고 답답하다. 문화재로서가 아니라 관광소재로서도 아차산성은 상당히 괜찮은 대상이다.고구려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이야기의 주인공인 온달 장군이 수와의 대결을 앞두고 전략상 신라를 먼저 제압하려 나섰다가 전사한 장소가 바로 아차산성이다.고구려 실지회복의 꿈이 잠겨있는 역사의 배경이기도 하다.그러니까 워커힐은 아차산성을 스스로 다듬어 판촉프로그램으로 삼았어야 옳았을 것이었다. 우리의 문화재 감각은 참으로 심각하다.무엇보다 역사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나 표적들을 문화재로 보는 관점이 국민적으로 부족하다.이는 그동안 문화재관리가 주로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이루어져 논증적으로 확인되는 유물만을 주요문화재로 인식시켜 온 태도에도 책임이 있다.박물관 전시품이 아직도 대부분 접시나 구슬같은 것으로 구성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는 목적은 개별유물뿐 아니라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터전들을 보기 위해서다.그 터전들은 또 대개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기 마련이지만 그럴수록 역사를 회상하는 상상력은 자극되고 자신의 느낌을 통해 더 잘 기억에 남게 된다.우리에겐 지금 이 역사의 터전들이 묵살되고 있다는 문화재인식의 본질적 맹점이 있다. 워커힐에서 무심히 산성을 허물면서 이곳은 우리의 사유지다라고 말하는 것도 우리문화재 감각에서는 하나도 이상할 게 없을지 모른다.하지만 이제는 문화를 가져야 호텔영업도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천박한 관광객」을「진지한 순례자」로 만드는 일이 곧「관광의 문화화」인 것이다.
  • 백제를 다시본다를 마치고/전문가 좌담

    ◎“문화·사회사적 접근… 백제사 인식 새롭게”/금동향로서 보듯 수입문화를 자기화/학자 동원 알기쉽게 풀이… 독자이해 도와/풍납동토성·아치산성 보존대책 시급/문헌자료 부족… 역사분야 공백에 아쉬움/「백제문화권 개발」은 완벽한 역사 복원위해 학술조사 선행돼야 ▷참석자◁ 김기웅 문화재전문위원·고고학 이기동 동국대교수·한국사 최몽용 서울대교수·고고학 서울신문이 10개월여에 걸쳐 매주 금요일 연재해 온 「백제를 다시본다」가 30회를 끝으로 지난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해 연말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세기적 보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 출현과 더불어 시작했던 이 기획시리즈는 새로운 시각의 백제문화사라 할 수 있다. 이를 마감하면서 그동안 갈채를 보내온 독자 여러분의 기대감을 조금이라도 더 충족시켜주기 위해 관계학자들이 참여한 정담을 마련했다.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놓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가가 내려지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김기웅박사=지금까지 백제에 대한 인식은 전문가들만의 영역이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백제를 다시본다」는 일반독자들이 그동안 전문가가 독점했던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백제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여는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여기에는 참여한 학자들이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 써 일반독자들의 백제역사를 이해하는데 한 몫을 했지요.「백제를 다시본다」는 한마디로 현재까지 이루어진 백제연구의 총 결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연구는 너무 세분되어 있었다는 느낌입니다.한 분야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자기 영역을 벗어나면 어두운 것이 현실이었어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30여명에 이르는 각 분야 학자들의 전문적 연구결과를 모아놓고 보니 백제역사의 대강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어요. ○백제연구의 총결산 ▲최몽용교수=사실 이런 유의 기획은 과거 TV에서도 여러차례 시도된 적이 있었지요.그러나 TV가 지닌 한계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지 못한 아쉬움이 컸어요.그런 점에서도 「백제를 다시본다」는 좋은기획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김=욕심이겠지만 백제 뿐 아니라 신라나 가야·고구려도 다루었으면 해요.「백제를 다시본다」에서 보듯 한 지역문화를 보편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이 시리즈는 지난해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나온 것이 계기가 됐지요.이 향로는 한때 무령왕릉 발굴로 바짝 달아올랐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점차 침체되어 가는 마당에 출토되어 백제를 다시 인식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최=향로가 나온지 10개월이 다 되어가는군요.그동안 이 향로 자체에 대한 해석도 불교·도교,혹은 백제의 건국신화와 연관시키는 등 여러가지로 논의됐습니다.여기에 악기와 의복 기타 미술사적인 연구도 활발했지요.물론 뒤에 총체적인 해석이 나오겠지만 이 향로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다각도에서 조명해볼 수 있는 백제문화의 진수입니다. ▲김=이 향로는 결국 당시 백제가 가지고 있던 문화적 역량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백제는 외국문화를 수입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지만 향로에서 보듯 절대 그대로 수용치 않고 자기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공주 벽돌무덤을 보면 중국의 묘제를 받아들였지만 연꽃모양의 벽화를 그려넣는 등 백제화 시켰습니다.당시 무덤의 양식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문제였지요.묘제를 바꾸는 것은 바로 집권자의 상징을 바꾸는 것이었으니까요.비슷한 예는 석촌동 2·4호고분과 이번에 익명의 일본사람이 기증한 3백77점의 유물 가운데 하나인 백제귀고리에서도 발견됩니다. ○귀고리서도 발견 ▲이=문화분야의 경우 그래도 물질자료가 상당히 출토되어 어느 정도 이야기가 가능합니다.그러나 문헌자료에 의존해야 하는 역사분야는 자료의 혜택을 거의 못받아 연구상의 공백도 많습니다.아시다시피 국내 자료라고는 「삼국사기」가 거의 전부이고 「삼국유사」가 약간 보충하고 있는 정도입니다.「삼국사기」도 그나마 연대기적인 간단한 자료지요.그런데 「일본서기」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이르는 2백년 동안 백제와의 교섭을 다룬 자료가 풍부합니다.어떤 시기는 일본의 국내 사정보다 분량이 더 많을 정도니까요.그 때문인지이마니시(금서 용)라는 일본학자가 쓴 「백제사 연구」라는 책을 보면 백제는 외교만 한 나라같은 인상입니다.여기에 해방 이후 우리연구자들도 백제의 국가사를 중심으로 정치제도·중앙관제·지방통제기구·관제·중국과의 교섭사 등을 주로 다루었습니다.연구가 정치사와 외교사에 치우쳐 있었던 셈이지요.그런데 백제 자체의 성격을 알려면 사회사에 대한 연구가 바람직합니다.최근 젊은 연구자들은 고고학적 사고를 일부 동원하면서 백제사의 내부구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종래 정치사에서는 백제는 지배층이 북방에서 남하한 고구려계가 서남쪽의 마한계 토착세력을 정복한 왕조로 지배세력과 토착세력의 이중성으로 심한 괴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백제 멸망도 사회구조의 이중성에서 오는 갈등에서 연유했으리라는 추측이었지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니까 그런 이중성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흡수통일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최=토착세력은 고구려계의 정복전쟁 과정에서이미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나머지 공백지대는 백제에 쉽사리 동화되었지요.마한세력이 확실히 남아있었으면 이중적인 구조가 됐겠지만 이미 남하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합니다.서기 369년께에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도 이 남하세력을 복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이=「일본서기」에는 그들 남하세력을 「남만」이라고 썼어요.굉장히 경멸하는 표현이지요.이질적인 문화 때문이었을 겁니다.그런데 이 「남만」은 바로 백제에서 부르는 그대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이름에서 보듯 백제의 남쪽이지 일본에서는 서쪽이니까요. ▲최=고구려까지 패배시킨 근초고왕의 힘이 아니었으면 남쪽까지 정벌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백제에 흡수되지 않은 이 세력은 처음에는 직산이 본거지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이 세력이 바로 목지국이지요. ▲김=백제의 마한정벌 이후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 대안리의 백제고분을 보면 백제가 정벌 이후 행정관을 파견해 지배했을 것입니다.그런데도 백제화 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백제의 내부관계를 알 수 있는 한 예가 되겠지요.이제 문화재 보존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일본서기 기록 많아 ▲최=백제는 기원전 18년에서 서기 475년까지 한성시대,서기 538년까지 웅진시대,이후 서기 660년 멸망 때 까지 사비시대로 나눌수 있습니다.이 가운데 공주와 부여는 앞으로 더 많은 유물·유적을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정부의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조사가 착수되면 유물·유적이 대거 나올 것입니다.유물·유적에 대한 기대와 아울러 보존대책을 지금부터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그런 생각을 미리 안해 실패한 예가 바로 한성백제입니다.올림픽경기장이 주위에 있는 석촌동 3·4호분과 몽촌토성은 그런대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풍납동토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방치되어 황폐화한 상태입니다.전장이 3.5㎞에 이르는 풍납동토성은 지금 5백m만 복원 되었을 뿐 대부분 길이나는 등 원형을 잃어버렸습니다.강 건너에 있는 고구려 산성인 아차산성도 마찬가지입니다.이 두 곳에 가보면 우리에게 문화정책이라는게 과연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올해가 조선을 기준으로 서울 정도 6백년이라지만 더욱 중요한 백제시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합니다.이 두 곳은 유적보존차원이 아니라 단순한 역사관광지로 만 신경을 써도 뛰어난 관광자원이 될 것입니다.올해가 「한국방문의 해」라지만 하다못해 문화유적을 관광수입과 연결시키는 정책만이라도 펴주었으면 좋겠습니다.풍납동토성은 지금 보존하지 않으면 정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풍납동토성은 기원전 18년 백제의 기원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몽촌토성은 4세기 정도로 연구되고 있지요.풍납동토성이 하북위례성,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많아요.강 대안의 고구려 성이 불안해서 도성을 쌓은 것이 몽촌토성으로 보는 거지요. ○단순 관광지 안돼야 ▲김=석촌동고분군을 발굴하니까 적석총 아래에 토광묘군이 나왔습니다.두 묘제는 전혀 이질적이에요.정복자와 피정복자라고 볼 수 있겠지요.이 지역에 대한 재조명도 이루어져야 할 시점입니다. ▲이=조금전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이 계획이 지역개발이라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최=그렇습니다.백제권개발계획이 이미 확정은 됐습니다만 착공하기에 앞서 시간을 두고 학술적 조사를 충실히 하고 학자들의 중지를 모아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행정당국의 백제사에 대한 진지한 접근자세가 아쉬운 시점입니다. ▲이=유적정비도 중요하고 관광휴양단지도 중요하지만 백제역사의 복원이 그 사업의 궁극적 목표라면 내실 있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연구원을 대폭 보강해야 하는 것인데 부여문화재연구소를 활성화시키는 일도 그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연구소를 세워놓고 활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최=그 중요한 부여에 문화재연구소와 박물관을 합쳐 현장에 나가 발굴하고 보고서를 쓸 수 있는 학예직원은 소장·관장까지 포함해 합쳐 10명이 있을 뿐 입니다.일본의 경우 특별사적이 있는 나라에는 이보다 1백배가 넘는 연구인력이 있습니다.문화재 정책이 1백년 앞을 내다보려면 늦더라도 연구인력을 키워야 합니다.공주에도 박물관이 있고 공주대 사학과가 있지만 연구인력은 몇명이나 됩니까.유적·유물이 모두 사라지고나서 도굴됐다느니 매몰됐다느니 그래봐야 이유가 안됩니다.역사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서라도 이제는 문화재 보존·보호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 입니다.
  • 휴일 고속도 성묘체증/행락차량 겹쳐 한밤까지 거북이운행

    추석연휴를 2주일 앞둔 휴일인 4일 전국의 고속도로와 주요 국도는 행락차량에다 미리 성묘길에 나선 차량까지 겹쳐 극심한 정체현상을 보였다. 특히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 공원묘지로 통하는 중부고속도로의 경우 이날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차량들이 상오 내내 제속도를 내지 못했으며 국도와 연결되는 서울기점 57㎞지점인 일죽인터체인지 전후 약 10㎞구간에서 가장 심한 교통혼잡이 빚어졌다. 또 통일로와 망우로,아차산길 등 경기도 일원의 공원묘지로 연결되는 주요 국도는 이날 상오 행락차량과 성묘차량들로 한때 심한 정체를 보였으며 하오 5시이후부터는 서울진입구간에서 귀경차량들이 꼬리를 물며 밤늦게까지 큰 혼잡을 빚었다. 한편 이날 서울 중랑구 망우동 공원묘지에 3천여명,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용미공원묘지에 5천여명,경기도 고양시 벽제공원묘지에 3천여명이 각각 추석을 앞두고 미리 성묘를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도로공사는 『주말에 20만5천대의 차량이 서울을 빠져나간 데 이어 일요일에는 20여만대의 차량들이 경부와 중부,동수원 톨게이트 등을 통해 지방으로 내려갔다』고 말하고 『이같은 교통량은 평소보다 20∼30% 정도 늘어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 뛰어난 축성술(백제를 다시본다:18)

    ◎토성 쌓는 판축기법 5세기에 발달/진흙·마사겹겹이 다져… 노동력 절감/통일신라에 전수… 일본에도 전해져/후기 들어 돌·흙 함께 사용… 안팎겹쌓기 등 공법 다양화 백제는 처음 창례성에 도읍하였고,이어서 하남창례성 혹은 한성을 도읍으로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이처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때가 서기 5세기 후반기까지 였다.이후 웅진(오늘날 공주)과 사비(오늘날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다.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익산지역에 별도를 경영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라가 줄곧 한 곳에서 도읍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도읍을 옮기곤 했다.국가성립기에는 이웃한 낙낭군과 말갈이라 불리던 세력에 의하여 도읍이 불타는 경우도 있었다.또 한군현을 몰아낸 뒤에는 고구려와 대치한 상황에서 백제는 축성을 통해 방어력을 향상시킬 필요성이 컸다.그런만큼 한성시기의 백제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력을 키우려 축성을 해 온 것은 곧 백제의 성장과정인 동시에 발전과정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강과 임진강유역에 자리잡은 여러 옛성터들은 백제가 국가로서 성장하던 과정에서 축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그 중에서도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가장 규모가 큰 중심적인 것으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이러한 강안에 위치한 성들은 주변의 산 위에 있는 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커다란 방어망을 형성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잦은 외침에 대비 백제가 고구려의 대대적인 남침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내놓고 새로이 마련한 도읍이 웅진이었다.지금의 공산성이 그것으로 후대의 보수와 개축이 있었음에도 백제 도읍지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공주에서 공산성의 외곽인 시가지까지 나성을 갖춘 새로운 형식의 도성제도가 있었는지는 학자간에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계획된 천도에 의해 서기 6세기 전반에 마련된 사비도성은 산에 의지한 산성과 거기서 뻗어내려 온 시가지를 감싸고 도는 나성을 마련함으로써 우리나라 성곽 발달에 있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한 것임이 확인된다.이러한 나성을 가진 도성제도는 고구려의 경우 장안성을 쌓은 6세기 중엽의 일이었다.어쩌면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결합한 도성제도는 백제인에 의해 처음 고안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경우 산성에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을 가진 뒤에도 그 외곽에 또다른 산성을 쌓아 이중·삼중의 방어망을 구축한 도성제를 바탕으로 번영하였다.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굳건한 방어망이 백제인들에게 안일한 믿음을 가지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후세에 남긴 교훈이기도 하다. 백제의 성곽들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하여 흙으로 켜쌓기하는 이른바 판축의 기법으로 축조한 것들이 많다.본디 이 판축기법은 중국에서 일찍이 발전된 것이다.일정한 구간을 나누어 기둥을 세우고 구간마다 칸을 마련하여 진흙과 마사토를 교대로 부어가며 길다란 대나무로 일일이 다져쌓는 것이었다. 백제에 있어서는 최근에 조사된 여러 개의 성들에서 이러한 공법으로 축조된 성벽이 많이 확인되었다.특히 처음에는 다지다가 차츰 바닥의 고르기를 일정하게 만든뒤 구간 사이에 돌로 가장자리를 쌓아 기단을 만들어 그 위를 판축하는 특유의기술이 공산성이나 부여의 나성,그리고 지방의 커다란 성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공산성등서 확인 한편 백제 후기에 이르면 돌로 성벽을 쌓는 안팎겹쌓기(내외겹축)와 바깥면을 돌로 수평잡아 굄쌓기를 하고 안쪽을 돌부스러기와 흙으로 채우는 방법(외축내탁)이 확인되고 있다.축조기법의 다양한 발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다.이처럼 발전된 축성술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통일신라로 이어지고,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성곽의 원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먼저 백제의 판축기법은 거의 그대로 통일신라로 이어졌다.신라는 돌로 겹쌓는 방법이 대부분이었으나 백제의 판축기법을 받아들여 낮은 위치나 험하지 않은 산성에 그대로 적용했다.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흙으로 쌓는 성은 돌로 쌓는 성보다 공사비가 약 3분의 1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한다.적은 노동력으로 훨씬 크고 웅장한 성을 쌓을 수 있는 이 공법이 점차 확산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추세는 더욱 후대에까지 이어졌다.고려시대 주요한 지역에 축조된읍성들은 거의 전부 판축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또 조선왕조의 도성이었던 한양도성도 처음에는 많은 부분이 흙으로 쌓아졌으며 세종 때에야 돌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축성기술은 직접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국도를 함락당한뒤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와 일기·축자에 방어병력과 봉수대를 배치하고 수성을 쌓았다고 하였다.또 서기 665년8월에 달률(백제의 제2관등) 답발춘초를 보내어 장문국에 성을 쌓게 하고 역시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보내어 축자국의 대야·연이라는 두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오늘날 대마도에 남아있는 가네다(김전)성과 규슈에 있는 오노조(대야성)·미즈키(수성)·기이조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축조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특별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이 성들의 축조에 백제의 지배층이 관련되고 있다는 기록은 현재 성곽의 배치관계와 축조기법 뿐만 아니라 거기서 출토되는 그릇조각이나 기와조각이부여에서 보는 것과 동일 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서기에 기록 일본의 고대성곽 가운데 가장 긴 학술적 논쟁을 거친 것으로 고고이시(신총석)란 것이 있다.이는 우리나라의 산성과 동일한 것으로 계곡부분은 돌로 벽을 만들고 성문과 수구문을 두었으며 대부분의 성벽은 돌로 된 기단위에 판축의 토루로 구성되었다.수십년간 이것을 놓고 성역설과 한국식 산성설로 논란을 거듭하다가 발굴조사에 의하여 산성임이 확인되었다.이의 축조연대는 아직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그러나 백제의 축성술이 주축이 되고 신라와 고구려 계통의 영향도 받아 이룩된 우리나라 성곽의 연장임은 우리보다 일본의 학자나 일반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게 사실이다. ◎백제성곽 유적/한강·금강유역에 많이 남아/풍납동 토성·부여산성등이 대표적 백제시대 성곽은 당연히 도읍지였던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풍납동 토성은 서울 강동구 천호대교 아래쪽에 남아 있는 평지토성으로 그 둘레가 4㎞에 이른다.현재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 있으나 한강에 면한 성벽은 거의 유실됐다.이 토성을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몽촌토성은 현재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목책 유구와 토성 외곽에 하천을 파고 한강물을 끌어댄 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어 하남위례성의 주성,곧 궁궐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타원형의 내성과 그 바깥에 달린 외성으로 나눠져 있으며 총둘레는 2천2백85m로 8천명 내지 1만명이 살 수 있는 규모다. 광주 이성산성은 풍납동 토성,몽촌토성과 함께 도성 권역에 들어있다.총 둘레 1천9백25m로 내부면적은 5만평. 아차산성은 풍납동 토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광장동에 있다.풍납동 토성과 함께 도성의 북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주 공산성과 부여의 부소산성 및 나성은 뛰어난 방어조건을 갖춘 백제 후기의 도성이었다.여기에 부여 북쪽에 있는 환산성이나 금강하류 대안에 축조된 성흥산성 등은 모두 부소산성을 겹겹이 둘러싸 보호하는 외곽 방어시설 역할을 했다. 이밖에 예산의 임존성은 백제가 망한뒤 유장 흑치상지가 백제의 부흥운동을 꾀했던 곳이다.이곳에서 흑치상지는 한때 나·당연합군을 깨뜨려 잃었던 옛땅을 한 때나마 되찾기도 했다.이곳은 또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와 견훤이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 통신수단:상(서울 6백년만상:21)

    ◎봉화 19세기까지 가장 빠른 연락망/변방서 수도까지 12시간 걸려/근대우편제 1884년 도입 서울에 「벙거지꾼」이 모습을 나타낸것은 1884년 4월 22일. 벙거지꾼은 우체부를 가리키는 옛말로 신식 우편제도의 도입과 함께 우정총국이 설치되면서 부터 장안을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우편제도는 갑신정변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사랑을 받았으며 전자정보화시대에에 들어선 요즘도 그 역할과 중요성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초창기에 『양반집 사랑과 규방에까지 들어가 우편물을 전달하려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기사가 독립신문(1897년 7월3일자)에 실리기도 했으며 각 가구마다에는 요즘같은 지번이 없던 관계로 편지봉투에 「경문밖 청패고개 나쥬셔 올라온 양천허씨댁 입랍」이라고 쓰는등 주소가 불분명해 우편물이 잘못 전달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당시 우체부는 보부상조합이나 한강 물지게꾼조합에서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했다. 갑오개혁 직후만해도 보름동안의 서울시내 우편물은 1백37통에 불과했으나 그 편리함이 점차 알려지면서 이들은 들일 하는 곳에 점심도 날라다 주고 친정집에 물건을 전달해 달라는 아낙네의 청을 들어주고 식사를 대접받는등 「인정배달부」역할을 겸하는등 대중속에 자리잡았다. 근대식 우편제도가 도입되기전 한양의 중요 통신수단은 봉화였다.19세기말까지만 해도 서울 남산타워 자리에 있던 봉수대를 중심으로 변방까지 이어졌던 봉화야말로 지역과 지역간의 교신을 가장 신속히 할 수 있는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봉수대는 국가의 기간통신망이었고 개인이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인편뿐이었다.그 당시로서야 농경사회였던 만큼 서민들로서는 요즘처럼 다급히 소식을 전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고 급하다 해도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서울로 정했을 때 먼저 시작한 일 가운데 하나가 왜구와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한 봉수대를 새로 만들고 정비하는 일이었다. 세종때에 와서야 완료된 봉수대정비사업은 서울 목멱산(남산)봉수대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군사적 요충지 6백50여곳에 세워졌으며 봉화를 올리는 방식도 4거에서 5거로 늘어 났다.예를 들어 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1거,나타나면 2거,해안에 접근하면 3거,아군과 해안에서 접전하면 4거,육지에 오르면 5거를 올리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매일 올려지는 봉화가 변방에서 서울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시간.전보나 전화가 없던 시절 이보다 더빠른 통신수단은 없었다. 서울에서는 강서구 방화2동 개화산,성동구 광나루북쪽 아차산,강남구 원지동 청계산의 봉수대터등에서 아직도 봉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봉화가 국방상 필요에 의해 이뤄진 시호통신이었다면 우역은 우편·통신기능과 숙박시설을 겸비한 동시에 개인의 이용이 가능했다. 선조 30년(1597년)에 도입된 파발제도는 통신만을 위주로 한 조금은 진전된 통신수단이었으며 말을 이용한 기발과 사람을 이용한 보발로 나눴다.기발은 25리마다,보발은 30리마다 참을 두었다.이로써 교지를 알리거나 장계를 올리는 공문의 빠른 전달이 가능하게 됐다.은평구의 역촌동이나 구파발은 바로 파발제도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 정도 6백년 휘장·마스코트 제정/역사에 바탕둔 미래지향 상징화

    서울 정도 6백년을 상징하는 공식 휘장과 마스코트가 29일 첫 선을 보였다. 휘장은 6백년과 관련한 각종 기념사업에 공통적으로 사용돼 통일된 시각적 이미지를 부여하게 된다.휘장은 서울의 역사성과 미래지향성을 한눈에 담고있다.「1394∼1994」에서 역사성을,「새로운 탄생」이라는 구호에서는 미래성을 찾을수 있다.또 산으로 방위를 표시하고 있다.오른쪽(동)은 낙산과 아차산,왼쪽(서)은 인왕산과 덕양산,아래쪽(남)은 남산과 관악산,위쪽(북)은 북악산과 북한산을 각각 의미한다. 산과 성곽이 붙어있지 않고 떨어진 것은 서울이 국제화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휘장을 분해해 변형시키면 공식 마스코트가 된다.휘장의 4산 표시는 마스코트의 기본이 되는 4명의 어린이 머리모양이 된다.성곽은 발모양으로 바뀐다.
  • 서예가 김기승씨(이세기의 인물탐구:21)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 원곡체 창안/한자명체 두루 통달… 독창적 변형경지 도달/고 최현배박사도 “한글 본연성품 표출” 칭송/성경구절 작품화 유명… 도산선생 묘비문 등 명필남겨 글씨를 이루기전 작업대앞에 선 원곡 김기승씨의 모습은 신을 향한 기도처럼 절실하고 경건하다. 눈부신 백지위에 붓길이 닿는순간 율동처럼 이어지는 묵향,어느때는 일필휘지,어느 때는 점 하나에도 혼신을 다해 멈출듯 흐느끼는 ▦황은 그 자체가 이미 통신의 경지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니라 신에 의해 움직이는것처럼 힘차게 그어내린 획마다에선 맑고도 밝은 상서로운 향기를 뿜어낸다.그리고 그 몇순간의 긴장은 폭풍전야의 정적인듯 은은히 주위를 압도한다. 원곡의 문향실은 그가 38년간 머물렀던 종로구 적선동에서 이곳 워커힐 아파트로 옮긴지 올해로 만 10년이된다. 요즘도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근처 아차산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바로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하루 2시간에서 3시간,전날 독서로 구상해두었던명언·명구를 마음속에 새겨 우러나오는 진한감동을 작품속에 담아낸다. 그는 글씨를 이루는데 있어 아름다움은 언제나 「선」이어야함을 전제하고 있다.이른바 선하지 않은 것은 미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기술이 피부라면 인격은 근골이다.티없이 청정한 피와 살과 뼈대가 합일될때만 비로소 미의 영혼이 글씨와 글속에 첩식된다는 것이다.순수한 서체에서의 체삽이나 시속기는 천착스러움의 극치다.글이 뜻하는 바를 거르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선 심혼의 혈서로 성자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씨 내재의미 중시 「초학자시 불가진형세 선상자성의 재필전」­글씨는 처음 대할때 그 형세를 알수없으니 먼저 글씨가 이루어짐을 생각하면 뜻은 쓰기전에 있게 된다,즉 원곡은 서의 진수는 글씨의 모양에 두기보다 그 내부에 내재된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등 한자체에 두루 통달하여 일가를 이룬동안에도 그는 한때 중국말로 된 성경을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다.막상 이를 내놓았으나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때부터 그만의 독특한 원곡체를 창안,한문각체의 독창적 변형을 한글에 적용시킨 이 서체는 한자와의 대련 작품을 쓸때도 조화와 균형을 깨지않는것이 특징이다. 옛날 궁중에서 궁녀들이 소설을 베낄때 사용한 궁체가 부드러운 반흘림의 반행초의 실용글씨라면 원곡체는 한문보다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구슬을 꿴듯한 우아미보다 먹물이 뚝뚝 듣는 힘의 분출이 돋보이는 서체다. 한글학자 고 최현배박사는 원곡의 한글체를 보고 『산같이 망막하고 강같이 줄기차다.우리의 한글이 제본연의 성품으로 온전히 나타났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의 독창성이 지나쳐 그 자신이 스스로 「전위예술」이라 일컬었던 「묵영기법」은 서예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묵영기법이란 청묵의 번짐을 사용하거나 먹물의 농담으로 거듭써서 시각효과를 앞세운 일종의 회화적 서예 회화인 셈이었다. 서예계는 『전위예술,즉 묵영은 서예에서는 있을수 없다』고 발칵 뒤집혔고 심지어는 『전통을모르고 전통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예술』로 혹평되기도 했다. ○「묵영기법」 논쟁불러 이때도 젊은감각과 시대에 부응하는 예술을 지향해온 원곡으로서는 전통예술을 지키기 위해선 고루하게 전통만을 고집하기 보다 오히려 여러각도의 실험과 시도를 언해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굴,전통의 소중함은 물론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평생동안 그가 써온 작품은 개인전때마다 40점에서 60점씩 32회.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평소에 아끼는 성경구절들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육당 최남선의 「삼·일독립선언문」을 비롯,제갈량의 「전후출사표」는 3천자이상,아가서8장 4천여자,무위자연의 노자 「도덕경」5천여언,특히 굴원의 「이소경」의 경우는 사적고증,한자구성·암기 등으로 6개월준비,집묵만도 10일이상 걸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랜 연륜과 우수사려가 없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그의 글씨에는 향기는 물론 불가사의한 힘이 담겨 있다. 올해나이 84세.그러나 그 음성과 행동에서 연노의 기색은 찾아볼수 없다. 또 서예계 최고 원로의 권위의식 같은것도 없다.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격의없이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한다. 1909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김정현씨와 김취옥여사의 2남중 차남으로 출생.5세때부터 조부인 동효공이 설립한 한문서당 삼언재에서 글씨와 천자문을 배웠고 홍산소년백일장에 나가 한시짓기 장원,11세때 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신교육을 받게됐으나 공주고보 2학년때 일인체조교사를 배척하는 맹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그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문회고급중학과 상해중국공학대학 경제과에 다녔다. 상해유학시절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여 도산 안창호선생을 모신 독립운동에 가담,국내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정리하여 국내정세를 보고하거나 흥사단 행사때마다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식순을 쓰는 일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흥사단서 독립운동 그때부터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보다 글씨 쓰는 일에 심취하여 졸업후 고향에 돌아오자 고장의 명필인 산정 신익선선생에게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웠다. 하루종일 쓴 글씨가 집안마당에 흰눈처럼 수북히 쌓였던 기억은 지금도 그에게 불길같은 작업의지를 당겨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전 손재형선생에게 사사.『재주는 있으나 헛 공부했다』는 혹독한 질책을 받으면서 그는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의 법첩으로 겨울밤이 지새도록 수련을 쌓아갔다. 봉천 문회고급중학교때 남경서 신학대학을 나온 백영엽목사의 영향을 받아 크리스천이 된 그는 조국에 돌아가면 목사가 되려했으나 글자 한자한자의 그 묘한 성자에 빠져 글씨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그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글씨로 전한다는 의도에서 성경구절을 작품에 담게 되었고 성경구절을 쓴 작품만도 6백여점에 이른다. 새문안교회에 다닌지 45년,출중한 건강을 타고난 그는 담배나 커피·술은 입게 대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차인실씨(82)와는 1939년에 결혼,외아들인 명호씨(53·미앨라배마에서 병원)와 4녀가 있다. 원곡은 주변을 조금씩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지난83년 그가 아끼던 자작품 2백87점을 골라 국립현대미술관에 보내던날,아들 딸을 결혼시켜 내보낼때보다 더 가슴저미는 허망함과 섭섭함에 그날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난 90년에는 그가 한평생동안 소장해왔던 추사 김정희의 「고시행서」위창 오세창·김구선생의 글씨,청전 이상범과 절친했던 운보 김기창,청계 정종여의 금물로 그린 「독수리」등 30억 상당의 골동서화를 아들의 모교인 연대박물관에 기증. 1958년 제1회 개인전을 필두로 신세계미술관이 주관하는 개인전이 끝나면 부인과 자녀들이 권유하는대로 이대와 고려대 중앙대등 각 대학에 작품을 나누어 보낸다. ○33회째 개인전 준비 그가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올해 16회째,오는 10월25일부터 제33회 원곡서예개인전을 역시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게된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묘비문을 비롯,수백여개의 비문과 동상문 현판글씨 시비등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글씨가 산재해 있으나 단 한글자도 그는 허트로 내놓는 일은 없다. 그의 마음가짐은 「논어」에 나오는­ 「불지명이면 무이위군자야요 불지례면 무이립야요 불지언이면 무이지인야라(천명을 알지못하면 군자가 될수 없고 예를 모르면 세상에 나서 행세할수 없고 말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를 실천하며 앞만보고 살아왔다.분한이 있으면 향기로운 글,빛을 발하는 글에 이를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덕약곡」(큰덕은 골짜기 같아야 한다)」에서 따온 그의 아호인 원곡처럼 그래서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고 마음을 텅비운 맑고 깊은 골짜기,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포용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정진하는 예인의 자세를 지킬 뿐이다. □연보 ▲1909년 충남 부여 홍산출생 ▲1927년 만주 봉천 문회고급중학졸업 ▲28년 흥사단 원동위원부입단 안창호 김구 이동령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입당 ▲1932년 중국 상해 중국 공학대학부 경제과 졸업 ▲1936년 소전 손재형선생사사 ▲1939년 조선서도 진흥회 주최 전국서도전 입선 ▲1942년 중국 상해서 전중국서화전 입선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년 제1회국전 서예부 특선(문교부장관상) ▲53∼55년 국전 제2·3·4회 특선 ▲〃 대성 서예학원 설립 ▲〃 서울대·숙대·상명여대 출강(15년간) ▲56∼58년 국전 제5·6·7회 추천작가(출품) ▲58년 제1회 원곡 서예전 ▲59·60년 〃 제8·9회 초대작가(출품) ▲61∼82년 국전 제10∼30회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 ▲59∼89년 원곡서예전 제2회∼29회 개최 ▲1976년 미국·유럽 미술여행 ▲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제정 ▲79년 동아일보 주최 원곡서예 회고전 ▲79년 북유럽및 캐나다 미술여행 ▲〃 제1회 원곡 미술상 제정 시상 ▲79∼92년 제2∼15회 원곡서예상 시상 ▲83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자작 대표작(2백87점 기증) ▲84년 주일 한국 대사관 한국문화원 초대 서예전 ▲87년 봄베이·카이로등 유럽지역 여행 ▲기독교 미술인 협최 회장역임 고왕경·김강경·경천애인·시편23편·이소경·삼일독립선언문·애경·전후출사표·1오일삼성오신·불원천불우인·묵시록등 1천여점 은관문화훈장 한국서예사 원곡서문집
  • 10대 집단 성폭행/폭주족 6명 영장

    서울 동부경찰서는 27일 이모군(17·H공고 3년)등 10대 6명을 특수강간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동네 친구사이인 이들은 지난 24일 0시30분쯤 서울 성동구 자양동 한강시민공원 야외음악당부근에서 오토바이를 몰고다니다 때마침 이곳에 놀러온 김모양(15·성동구 성수동)등 10대소녀 2명을 『오토바이를 태워주겠다』며 인근 아차산으로 유인한뒤 번갈아가며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전국약수터 17% “식수 부적합”

    ◎보사부,도시주변등 1,253곳 수질검사/대장균·일반세균등 기준치 넘어/수은등 중금속은 검출안돼/재검사후 개선안되면 폐쇄키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전국 약수터(옹달샘)1천2백53개소 가운데 서울 삼청공원약수터·아차산약수터,부산 태종대 두꺼비약수터 등 17%에 이르는 2백53개소가 대장균등에 오염돼 식수로서는 부적합한 것으로 밝혀졌다. 보사부는 19일 지난 3월부터 이달 중순까지 하루평균 이용자가 50명 이상 되는 전국 주요도시주변 약수터와 등산로·야산·절·유원지등지의 약수터 1천2백53개소를 대상으로 수질검사를 실시한 결과 이같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히고 부적합판정을 받은 약수터에 대해서는 당분간 시민들의 이용을 금지시키고 주변청소와 취수시설을 소독한뒤 재검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부적합판정을 받은 2백13개 약수터에서 납과 수은·시안등 인체유해 중금속은 검출되지 않았으나 서울 도봉산장 밑 약수터,인천 탐천약수터등 67.1%에 이르는 1백43개소에서 대장균과 일반세균이 기준치 이상 검출됐고 충북 영암약수터등 70개소에서는 철·망간 및 부유물이 상당량 나왔다. 지역별로 부적합 약수터는 ▲서울이 79개소(23.5%)로 가장 많고 ▲부산 74개소(46.8%)▲경북 17개소(21.5%)▲광주(42.1%)▲강원(7.8%)각8개소▲전남 7개소(20%)▲충남 6개소(17.6%)▲경남 5개소(4.5%)▲인천 3개소(11.5%)▲경기(0.8%)▲충북(14.3%)▲전북(7.1%)각 2개소 등이며 대구와 대전지역은 부적합판정을 받은 약수터가 한 곳도 없다.
  • 부부함께 핸들잡아 이룬 스위트홈(이사람)

    ◎첫 부부버스운전자 강병천·배문순씨 “인간승리”/남편 사업 실패하자 아내도 나서/개미저축 4년끝 이젠 승용차도/운전중 마주칠땐 서로가 “빵빵…” 애정교신도 『새해에는 더욱 두터워진 우리부부의 사랑으로 승객들을 보다 따뜻이 맞으렵니다』 우리나라 첫 부부버스운전사인 강병천씨(41)와 배문순씨(37).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 있는 서울승합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강씨 부부는 금실이 좋기로 소문난 「잉꼬부부」이다. 남편 강씨는 서울승합 568번 버스를 몰고 명일동에서 경동시장으로 가는 노선을 뛰고 있고 부인 배씨는 자회사인 삼선 813번으로 고덕동에서 가락시장까지 다니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근무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서로 핸들을 잡고 마주쳤을 때. 서로의 노선이 교차하는 잠실∼명일동구간에서 하루 2∼3차례 만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보기가 무섭게 경적을 울려대고 전조등을 켰다껐다 신호를 보낸다. 대개는 강씨가 먼저 부인이 모는 버스옆에 자기차를 붙여 대고 눈을 껌벅여 윙크를 보내고는 『아이 러브 유!』라고 큰소리로외쳐댄다. 이들의 버스를 탔던 승객들은 이 광경을 보고는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게 마련이다. 이들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강씨가 서울승합에 입사한 지난 81년부터. 그때까지 택시 운전사로 일하던 그는 큰 차량을 몰고 싶어 이 버스회사로 옮겼다.그때 배씨는 이회사 안내양의 교양주임(사감)으로 있었다. 이들은 처음 한 직장동료로서 그저 알고 지내는 정도였다.그러다 배씨의 쾌활하고 활동적인 성격이 마음에 든 강씨는 『아내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됐다. 그런데 배씨는 운전사와는 결혼하지 않으려는 생각에 강씨를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러나 강씨의 성실하고 끈질긴 프로포즈에 감동,마침내 83년9월 결혼에 골인했다. 호사다마라할까,그러던 어느날 강씨는 『방범방사기(가스총)사업이 전망이 밝다』는 친구의 권유와 『평생 핸들을 잡을 수는 없는게 아니냐』는 생각에 개인택시 2대를 5천만원에 처분,사업가로의 변신을 꾀했다. 그러나 2년도 안돼 빚더미만 짊어지고 파산하고 말았다. 빚독촉과 가난,이런저런 설움등을참을 길없어 투신자살을 하기로 작정하고 아차산으로 올라가 서로 부둥켜안고 밤새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죽을 각오로 열심히 일해 다시 살아보자』는 새로운 각오로 이를 악물고 산을 내려왔다. 강씨는 바로 서울승합에 재입사했고 배씨는 기사가 되기위해 운전연습에 열중,86년 대형운전면허를 취득했다. 면허를 딴 그녀는 남편을 따라 서울승합에 입사원서를 냈다.회사는 그러나 여자에게 버스운전은 무리라는 이유로 입사를 거절했다.그녀는 이에 아랑곳하지않고 6개월동안이나 매일같이 출근하다시피 회사에 찾아가 취업을 졸라댔다.결국 회사측은 41일 동안이라는 사내 최장기연수를 조건으로 입사를 허락했다. 우리나라에서 부부버스운전사가 처음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한달 수입 1백40여만원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두 저축했다. 아침식사는 굶고 점심,저녁은 강씨 형들집을 찾아다니며 신세졌다. 그러기를 4년.마침내 생활이 눈이 띄게 달라졌다. 그동안 정붙이고 살아온 보증금 1백만원,월세 6만원짜리 고덕동의 아파트단칸방을 떠나 강동구암사동에 24평짜리 어엿한 아파트를 장만했다. 1백60만원짜리 중고승용차도 구입했다. 그리고 그동안 동료들로부터 「커피한잔 살 줄 모르는 노랑이 구두쇠」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던 응어리들을 풀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아픔을 회상하면서 동료들이 귀찮아할 정도로 집으로 초대해 식사등을 대접하고 있다. 강씨부부는 무엇보다 그 어려웠던 시절 일할 터전을 마련해준 회사에 늘 감사하고 있다.
  • 남한산성등 52곳 “취사금지” 추가/새달부터

    ◎관악산등 21곳은 야영장서만 허용/내년부터 어기면 과태료 5만원/전국등산로 4백64곳 “출입통제” 내무부는 18일 자연보호 및 환경훼손방지를 위해 남한산성ㆍ불암산 등 전국 52개 도립 및 군립공원과 관광유원지에 대해 오는 11월1일부터 취사행위를 전면금지키로 했다. 또 관악산ㆍ팔공산 등 21개산과 유원지도 취사행위를 금지하되 기존야영장내에서의 취사만 허용하기로 했다. 내무부는 이와함께 오는20일 전국 유명산과 유원지에서 일제히 산에서는 취사행위를 하지않는다는 내용의 범국민결의대회를 갖는 등 이달말까지 계몽 및 홍보를 하고 11월부터는 산림감시원 등 모든 행정력을 동원,집중단속을 펴기로 했다. 한편 산림청은 내년 1월부터 모든 산에서 취사행위를 하거나 버너 등 화기물질을 갖고 들어가는 행위에 대해서는 5만원이하의 과태료를,오염 및 폐기물질을 버리는 사람에게는 1백만원이하의 과태료를 각각 물리기로 하는 내용의 산림법 개정안을 마련,18일 입법예고했다. 산림청은 개정법안이 시행되면 전국의 주요 등산로 입구에 취사도구 등 화기물질 보관소를 설치,여기에 화기물질을 보관시키도록 해 취사도구를 가진 사람은 입산을 금지시키도록 할 계획이다.한편 산림청은 오는 11월15일부터 시작되는 가을철 산불조심기간을 맞아 현재 2천9백56개소의 입산통제구역을 3천1백31곳으로 확대하고 주요등산로 9백14개소중 4백64곳을 폐쇄키로 했다. 특히 설악산 등 전국 31개 주요명산과 시장ㆍ군수가 특별관리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산림에 대해서도 입산통제나 등산로 폐쇄를 확대할 방침이다. ◇취사행위 전면금지지역 ▲도립공원(11곳)=광주 무등산,문경새재,봉화 청량산,태백산,남한산성,청양 칠갑산,예산 덕산,논산 대둔산,승주 조계산,해남 두륜산,양산 가지산 ▲군립공원(7곳)=울진 덕구온천,달성 비슬산,의성 빙계계곡,인제 아미산,창녕 화왕산,하동 고소성,울주 신불산 ▲관광유원지(34곳)=불암산,아차산,용마산,대모산,청계산,우면산,인왕산(이상 서울) 식장산,보문산,구봉산,도덕산,계족산(이상 대전) 점촌 돈달산,상주 갑장산,영천 채약산(이상 경북) 목포 유달산,여수 구봉산,순천봉화산,나주 금성산,장흥 천관산,무안 성달산,영광 불갑산,진도 첩살산,신안 임자범산,곡성 동악산,여천 영취산,동광양 가야산,고흥 팔영산,화순 만년산(이상 전남) 울주 대운산,하동 송림숲,밀양 표충사계곡,마산 무학산,진주 진양호(이상 경남) ◇야영장에서만 취사가 가능한 지역 ▲도립공원(8곳)=대구 팔공산,구미 금오산,낙산 도립공원,경포 도립공원,완주 모악산,진안 마이산,고착 선운산,완주 대두산 ▲군립공원(5곳)=울진 불영계곡,영일 보경사,청도 운문산,남양주 천마산,순창 강천산 ▲관광유원지(8곳)=서울 관악산ㆍ수락산,인천 대공원,대구 앞산공원,금릉 황학산,동해 무릉계곡,담양 추월산,광양 백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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