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상실의 순간/김정란 시인·상지대교수(굄돌)
다시 가을이 온다.내 마음속에서는 조그마한 짐승이 우우 하고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한다.그것은 아주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른 짐승인데,가을이 되면 비로소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그것은 이제 제 철을 만났다는듯이 눈을 반짝인다.언제였던가,나는 그렇게 썼었다.『가을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가을이 겨울과 봄과 여름을 거쳐 우리에게 돌아온것이 아니라,우리가 겨울과 봄과 여름동안 헤매다니다가 가을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가을은 그렇게 나에게 어떤 원초적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이 계절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어떤 귀환,본질로의 회귀,그리고 삶의 근원적인 상실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모든것은 일년의 성장을 끝마감하고 열매를,한해살이의 싸움과 환희와 인내의 결과물을 세계앞에 고요히 내민다.그러나 그 열매맺음은,이제 얼마나 임박한 조락의 징후 앞에 내맡겨져 있는가.그래,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힘껏,나의 삶의 장소에서 삶이 삶이 되게하는 모든 요건들에 성실하게 대답한 뒤,그리고 조용히 스러지는 것.
가을이 영감을 불어넣는 상실에 대한 자각은 어쩌면 거의 선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너무나 명랑하고 끝내주는 유희인간인 우리 둘째놈은 가끔 엉뚱한 시를 써서 어른들을 놀래키는데,이 놈이 다섯살때 글씨도 쓸 줄 몰라서(요즘 아이들은 서너살이면 한글을 다 깨우치는 모양이니까) 아줌마에게 「구술」시킨 시가 이랬다.
「가을입니다/나뭇잎이 하나둘씩 떨어져요/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멍멍이가 컹컹 짖어요/멍멍이는 가을이 무섭지도 않은가봐요」 분석을 하려고 덤벼든다면 이「시」에 등장하는 가을낙엽멍멍이공포는 완벽하게 설명된다.어린아이들이 쓴 시는 때로 어른들이 쓴 시보다도 더욱더 완벽한 상징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그애들은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가짜 이미지들이 끼어들지 않는다.내가 놀랐던 것은,어째서 저 어린 놈이 가을을 「무섭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다.저 명랑한 영혼의 무엇이 벌써 가을에 드러나는 삶의 결핍의 징후를 알아차리게 만든 것일까.그리고 아이는 왜 그것을 「무섭다고」 느낀 것일까.
지혜로운영혼은 환희보다도 우울의 징후에 민감하다.상실의 순간에 비로소 삶은 숨겼던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사는게 즐거워 죽겠어서,오 껍데기만을,화려한 껍데기만을 쫓아 달려가는 어떤 경박한 정신들에게 그런 막연하고 모호한 깊이에 관한 이야기는 씨도 먹히지 않을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