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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 어린이캠프 참사]분향소·國科搜 표정

    1일 경기도 화성 청소년수련원 화재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강동교육청에는 종일 유족들의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오전 10시쯤 희생자 23명의 영정이 모두 합동분향소에 도착,안치돼 처음으로 분향이 이뤄졌다. 분향이 시작되면서 유족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합동분향소는 다시 한번 울음바다가 됐다. 생일을 앞두고 떠난 고가현·나현 쌍둥이 자매 어머니 장정심(33)씨는 부축을 받으며 국화 두송이를 영정 앞에 놓고 “가현아,나현아”하고 울부짖으며영정을 끌어안았다. 사고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척과 이웃들은 숨진 어린이들의 부모를 위로하면서 함께 울먹였다.일부 유족들은 “이번 사고 책임자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서 흥분했다. 오전 9시45분쯤에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가 보낸 조화가 배달됐으나 유족들이 “화환이나 조의금은 받지 않겠다”고 거부해 실랑이끝에 화환은 1층 로비로 밀려났다.또 한 유족은 임창렬(林昌烈) 경기도지사가 보낸화환을 부수기도 했다. 이날 오후 유가족을 찾은 김일수 화성군수는 유가족의질문에 일일이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불이 난 씨랜드 숙소를 재임기간인 지난해 12월 일반건축물로 준공허가를 내준데 대해 유족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김 군수는 “건축과장 전결사항이어서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합동분향소에서는 이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관계자들이 숨진 어린이들의신원파악을 위해 유족을 상대로 기초적인 인적사항 조사와 함께 인터뷰를 실시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다가 불길 속에서 공포에 떨며 애타게 엄마를 찾았을 생각에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수영(6)양의 아버지천현중(41)씨는 떨리는 손으로 ‘하늘색 청바지에 긴 나팔바지’,‘앞니 두개 빠짐’,‘염색한 갈색머리가 찰랑거림’ 등이라고 ‘실종자 인적사항 조사표’를 한칸 한칸 메워나갔다. 국과수측은 “오후 1시부터 성인 시신 4구에 대한 부검을 시작했다”면서“성인들의 신원확인은 이르면 다음주 중반이면 가능하고 어린이들도 한달안에 끝내겠다”고 밝혔다. 씨랜드 수련원에서 제자들을 구하다 변을 당한 김영재(39)교사가 재직했던마도초등학교측은 이날 아침 2층 과학실에 임시분향소를 설치,조문객을 맞았다. 첫 교시가 시작된 아침 9시20분 담임 선생님들로부터 김교사의 희생을 전해들은 학생들이 흐느끼면서 모든 교실이 한때 울음바다로 변했다. 화성군 일대 관광지는 이번 화재로 외지인의 발길이 뚝 끊겼다.서해횟집안경순(安敬順·42·여)씨는 “오늘 예약된 2건이 모두 취소됐고 일반 손님도 전혀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여관업을 하는 이모(36)씨는 “어린이들이집단으로 횡사한 곳에 관광객들이 오겠느냐”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 [화성 어린이캠프 참사] 가족표정·이모저모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참사였다.어린이들의 시신이 있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아들·딸의 얼굴이라도 확인하려는 부모들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번 사고로 가현(嘉賢·6·소망어린이집)·나현(娜賢) 두 쌍둥이 딸을 한꺼번에 잃은 장정심(張丁心·여·33)씨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남편 고석(高錫·37·명인제약 근무·서울 송파구 문정동)씨도도저히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가현 자매는 3층에 함께 잠들어 있다 숨진채 발견됐다. 고씨는 “갯벌 체험을 하러 간다며 좋아했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눈물을 흘렸다. 부인 장씨는 “시신이 너무 심하게 타 신원파악이 힘들다고 통보해왔다”며 “가현이와 나현이의 시신이 어느 것인지 영원히 모르게 되는 것 아니냐”며 울음을 터뜨렸다. ■숨진 어린이들의 시신이 있는 국과수에는 유가족들의 실신과 통곡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모(37)씨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잊은 채 땅을 치며 연신 눈물만 흘렸다.현민(5·소망유치원)이가늦게 얻은 아들인데다 이후로는 자식이 없어 이씨 부부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다.“여름방학때 태권도장에 보내준다고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막내 딸 연수(7·소망유치원)를 잃은 우기영(38·상업)씨도 딸 생각으로 치밀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어린 게그 뜨거운데서 소리도 못질렀을텐데…”,“내 아이를 그 더러운 깡통 속에넣고 태워 죽였어…” 라는 말만 내뱉었다. ■화재 당시 젊은 교사들은 건물 밖에서 술을 마셨던 것으로 경찰조사 결과밝혀졌다.소망유치원 원장 천경자(37·여)씨는 경찰에서 “당시 수련원 건물밖에서 유치원 교사 10여명이 구운 고기와 함께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고진술했다. ■숙소에 배치된 소화기들은 모두 형식적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안시련측은 “유원지에 배치된 소화기 9개를 수거해 조사한 결과 속은 모두 비어 있었고 사용 기한이나 소화기 검증표시도 없었다”면서 “소화기 노즐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 우리꽃의 아름다움 시로 노래…송수권 새시집 ‘들꽃세상’

    “온몸에 자잘한 흰 꽃을 달기로는/사오월 우리 들에 핀 욕심 많은/조팝나무 가지 꽃들만한 것이 있을라고/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에 귀를 모아 본다/…자치기를 하는지 사방치기를 하는지/온통 즐거움의 소리들이다…” ‘남도의 정신적 파수꾼’ 송수권 시인(사진)의 새 시집 ‘들꽃 세상’(혜화당)’에 나오는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이란 시의 한 대목이다.전라도 말로 조밥,밥꽃,밥나무,박태기 등으로 불리는 조팝나무.그 조팝나무 흰 꽃 속에서시인은 꿈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가하면 신나는 놀이마당을 떠올린다. ‘수저통에 비친 저녁노을’에 이어 그가 펴낸 이번 시집은 산하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우리 꽃들을 소재로 삼았다.서러운 울음의 핏빛으로 피는 철쭉,아픔의 극한에서 피어나 푸른 종소리를 울리는 나팔꽃,눈물 끝이 삐쳐나온웃음같은 방울꽃….시인이 그려내는 꽃들엔 저마다 눈물의 빛깔과 살냄새가배어 있다.풀꽃 하나의 떨림에서도 우주의 숨결을 느끼는 송시인.그에게 꽃은 어두운 삶의 구석을 밝히는 대지의 등불이다.자귀나무꽃·하늘매발톱·동자꽃·석남꽃·금강초롱·갯메꽃·무릇꽃·숨비기꽃 등 40여가지 색색의 꽃들이 시인의 들꽃 세상에 초대된다. 김종면기자
  • 듀엣 일기예보 5집 발표…28일부터 대학로서 콘서트

    화창한 봄날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화음의 듀엣 ‘일기예보’가 1년반만에 5집앨범 ‘뷰티풀 걸’을 들고 돌아왔다.이전 ‘좋아좋아’‘잘해봐’등에서 전해준 편하고,기분좋은 느낌 그대로다. “욕심 안내고 그냥 우리 스타일로 편하게 했어요”(나들)“사람들이 좋아하는 멜로디를 따라가기보다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을 맘껏 표현했습니다”(강현민).‘거짓없는 가장 솔직한 앨범’이라는 게 둘의 공통된 의견.아무리 심혈을 기울였어도 막상 앨범이 나오고나면 뭔가 아쉽기 마련인데,이번작업이 꽤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세련미나 화려함 대신 소박하고 진솔한표현에 중점을 뒀다는 설명이다.전곡을 모두 직접 작사·작곡·편곡했다. ‘뷰티풀 걸’은 사랑을 하면 누구나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게 사랑에 빠진 남자의 행복한 심정을 잘 표현한 곡.멜로디를 받쳐주는 화음이 빈틈없이 탄탄한데,4부로 구성해 8번을 더빙한 세심한 노력의 결과이다.중간에 삽입된파헬벨의 캐논이 귀에 쏙 들어오는 모던록풍의 발라드곡 ‘그대가 있다면’은 떠나는 사랑을붙잡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배어나는 예쁜 곡이다. 이번 앨범에는 비틀스풍의 복고적인 록으로 아기의 울음소리와 밴조,만돌린 등 특이한 악기들을 사용해 세상살이에 찌들어가는 어른들에게 동심의 평화로움을 느끼게하는 ‘아이처럼’,영화 ‘웨딩싱어’의 마지막 장면에 감명받아 만든 ‘함께 할께요’처럼 듣기 편하고 쉬운 곡들로 가득하다. 고음과 가성이 아름다운 나들,거칠면서 힘있는 목소리의 강현민.대학 요들동아리에서 만나 10년을 함께 한 이들은 이처럼 서로 다른 개성이 오히려 음악활동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단다.나들은 90년 제2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을,강현민은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한 인연을 갖고 있다. 93년 일기예보란 이름으로 데뷔해,‘좋아좋아’‘인형의 꿈’등을 히트시켰다.28일부터 6월13일까지 대학로 학전그린에서 ‘두남자의 뷰티풀 걸 이야기’란 제목으로 콘서트를 갖는다.(02)763-8233.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8회)-趙泰一시인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일이다//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국토서시’중) 죽형(竹兄) 趙泰一시인(59·광주대학교 예술대학장).그가 70년대 초부터 5년에 걸쳐 쓴 48편의 연작시집 ‘국토’(창작과비평사)에는 조국의 땀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황톳빛 서정이 넘실거리고 잊혀져간 민중의 목소리가일렁인다.건강한 민중적 삶의 의지를 이처럼 곡진하게 그린 시가 또 있을까. 그러나 ‘국토’의 운명은 가혹했다.유신시절 ‘국토’는 출간되자마자 긴급조치 9호로 판매금지됐다.“그 당시 긴급조치는 긴급조치 위반사례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기막힌 제도였습니다.‘국토’는 75년 ‘신동엽 전집’,박형규 목사의 수상집 ‘해방의 여울목에서’와 함께 판매금지됐지요.이나라 강토와 민족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쓴 것인데 그것을 범죄시하고 민족정신을 훼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이 있었으니….그 뒤로 7년동안 시집을 내지 않았습니다” 30년 넘게 시를 쓰면서 趙시인은 한번도 현실을 외면한 적이 없다.시대의어둠을 가르는 전령으로서 시인의 임무에 충실했다.74년 11월 그는 뜻있는문인들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간사직을 맡아 유신독재에 맞섰다.77년에는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 발간사건에 연루돼 시인 고은씨와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그의 문학적 시련은 80년대라고 비켜가지 않았다.80년 그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임시총회와 관련,계엄법 및 포고령 위반이란터무니없는 죄목으로 구속돼 5개월의 형을 살았다.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바뀌면서 그는 초대 상임이사를 맡았다.70년대와 80년대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승과 저승의 삶을,아니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도무지 분간할 수 없던 시대”였다. 시인은 흔히 예언자로 불린다.신(神)의 입을 대신하는 사람이 시인이다.76년에 발표된 趙씨의 시 ‘겨울소식’을 보면 그가 얼마나 날카로운 시안(詩眼)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다.“…찬바람 속에서 광주는/큰 애를 뱄다더라//찬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더라//광주를 온몸에 적셔서/서울의 내곁에 사알짝 놓아두고/터벅 터벅/서울을/떠나버리는 친구!” 그의 시는 광주와 우람한 무등산이 합궁해 낳은 옥동자가 바로 5·18광주민중항쟁임을 웅변해준다.‘겨울소식’은 일종의 예언시 또는 참시(讖詩)로 읽힌다.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그것은 곧 주어진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趙시인은 자신의 시작업을 이렇게 규정한다.“나의 시는 내가 태어난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서 발원해 전국토를 온몸으로 내달려 민족과 역사 앞에 올바르게 서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에게 고향은 시적 영감의 원천이며,시를 쓰는 것은 시대의 어둠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趙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태안사는 곧 아폴로의 헬리콘산과 같은 존재임을알게 된다.“나의 눈물 속에는/동리산 태안사 밑에 붙어 있던/초가집들이 어른거립니다//…초가집도 죽창도 옛 친구들의 허벅다리도/아아,누나의 옷고름도/소리내어 울고 있습니다”(‘나의 눈물 속에는’중) 시인은 태안사의 승려였던 아버지를 한번도 ‘아버지’라고 편히 불러보지 못했다.그는 ‘신기(神氣)서린’ 아버지를 열 두살에 여의었다.그 어두웠던 유년의 체험,고향의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울음소리의 환청을 시인은 끝내 뿌리치지 못한다.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종종 좌절과 체념의 정서가 깔린다.‘눈물’이라는 말이 중심시어로 등장한다.문학평론가 김화영교수(고려대 불문과)는 “조태일은아이러니컬하게도 ‘눈물의 시인’이다.눈물에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그것은 손끝의 재주가 아니라 영혼의 힘이다”라고 했다.적절한 지적이다. 趙시인의 일관된 문학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월간 ‘시인’지 활동이다.그는 69년 지금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뒤에 있던 남일인쇄소란 곳에보수도 없이 들어갔다.그곳에서 그는 시전문지 ‘시인’을 창간했다.김지하,양성우,김준태 등 70년대를 빛낸 시인들이 이 ‘시인’지를 통해 등단했다.“당시 ‘시인’지를 주관하며 김지하씨의 시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특권층의 권력형 부정과 부패상을 비판한 담시 ‘오적’ 때문에 김씨가 도망다닐 무렵이었죠.당국의 탄압으로 할 수 없이 책을 회수,문제 부분을 잘라내고 다시 배포했습니다.‘시인’지는 1년 남짓 발간되다 결국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때 많은 문인들이 고료 한 푼 받지않고 글을 써준 것이 무엇보다 고마웠다고 회고한다.문학평론가 염무웅씨 같은 이는 ‘시인’지에 ‘서정주와 송욱의 경우’란 평론 한 편 쓴 것이 화근이 돼 S대 전임기용 기회까지 박탈당하기도 했다고 귀띔한다. 趙시인은 최근 외도 아닌 외도를 했다.처음으로 ‘무등(無等) 둥둥’이란창작오페라 대본을 쓴 것.오는 7월쯤엔 여덟번째 시집 ‘도토리들’(가제)도 펴낼 예정이다.“결코 짧지 않은세월 시를 생각하며 시를 보듬고 살아왔지만 시는 점점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집니다” 시에 관한한 문리가 트였을법한 그이지만 요즘은 시 쓰는 일이 너무 힘들단다.그의 말마따나 시인은 밤에도눈을 감지 못하는 존재인가보다.金鍾冕 jmkim@
  • 과학 읽기-英 데보라 캐드버리‘환경호르몬’

    ‘불임이 유행병처럼 번져 있다.거의 하룻밤 사이에 인류는 종족을 보존할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25년동안 지구상의 누구도 새로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P.D. 제임스의 소설 ‘남자의 아이들’에 나오는 끔직한 인류의 미래다. 공상과학 소설같은 이 내용이 현실화 될 수 있을까?아무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지만 영국의 데보라 캐드버리가 펴낸 ‘환경 호르몬(The Feminization of Nature)’은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영국 BBC방송의 과학 프로그램 PD로17년간 일하며 많은 상을 탄 지은이는 과학자들과의 폭넓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화학물질 남용이 초래할 재앙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이 책에 따르면 코펜하겐 대학병원 불임클리닉에서 일하는 닐스 스카케백교수는 지난 50년간 남성의 정자수가 50% 줄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논문을1992년 발표했다.그 발표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반론도 많았다.그러나 프랑스 생식력 전문가 피에르 주아네도 1973년 시험된 남성의 평균 정자수는 밀리리터당 8,900만이었으나 92년에는 6,000만으로 감소했다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인간 생식에 우려할 만한 조짐은 고환암과 사내아이의 생식기관 이상의 급증에서도 나타난다.암컷으로 성전환하고 있는 물고기와 야생동물의 ‘암컷화’ 등 생태계의 이상한 현상과 유방암·전립선암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이모든 변화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자성(雌性)호르몬인 에스트로겐에 노출됨으로써 유발된다는 것이다. 최근 많은 인조 화합물들이 자성호르몬이나 기타 호르몬을 흉내내어 ‘미약한 에스트로겐’ 효능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다.플라스틱,농약 그리고 많은 공산품에 사용되는 일부 화합물이 호르몬을 흉내내서 인체의 생식과 성발달을 변형시키고 암을 유발한다는 자료도 확보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득산 옮김 전파과학사 1만2,000원)李昌淳 cslee@
  • 千河張安(秘錄 南柯夢:29·끝)

    ◎기생 송설 ‘영친왕’ 태몽 핑계 엄비에 접근/‘돈줄테니 수령자리 사시오’/서울보낸 이용교 함흥차사/속타는 과부기생 ‘내가 직접…’ 실력가 소문 상궁에 뇌물공세/출산 앞두고 초조한 엄귀인에 ‘아들낳는 꿈꿨다’며… 1897년 음력 9월17일은 대한제국 선포의 날이었다.곧이어 9일 뒤인 9월26일에는 고종황제의 세째아들인 은(垠:영친왕)이 태어났으니 경사가 겹친 해였다.고종에게는 민비에게서 아들을 얻기 이전에 이미 궁녀 이씨의 몸에서 첫 아들(完和君)을 얻었는데 그때 고종의 나이 17세였다. 그리고 나서 10년 뒤에야 민비 몸에서 둘째아들(순종)을 얻고 이어 엄상궁의 몸에서 세째아들(영친왕)을 얻게 되었다.실로 23년만의 득남이었으니 기쁘기 한량이 없었다.‘매천야록’에 보면 “엄상궁은 은(垠)을 분만할때 아무 산기(産氣)를 느끼지 못했으나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들을 얻은 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남가몽에 따르면 엄비가 아들을 낳을 것으로 미리 알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그것은 송설이 미리 현몽해 이를 엄상궁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송설이 엄상궁의 산실까지 접근하는데는 엄청난 노력이 있었던 것 같다.송설이는 이용교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송설이가 이용교에게 말하기를 “서방님의 중형(仲兄=둘째형)께서는 송경유수(松京留守)로 계신다고 하니 관작매매(官爵賣買)에 생소하지 않을 듯 합니다.가셔서 형님과 상의하시어 수령 한 자리 얻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하였다.이에 이용교가 대답하기를 “이런 일에는 돈이 있고 볼 일인데,적수공권(赤手空拳),빈손으로야 어찌 이룰 수 있는 일입니까”라고 했다. 송설이 말하기를 “돈이야 필요하시다면 제가 감당할 터이니 염려하지 마시고 빨리 상경하셔서 중형과 상의하시지요”라고 했다.이용교가 말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수령 한 자리 쯤이야 손에 침뱉듯 쉬운 일 아니겠소.가이 염려하지 마시구려” 하였다. 이에 송설은 사람을 시켜 세마(貰馬) 한필을 얻어 오게 한 뒤 노비(路費)와 담배값으로 2백금을 주어 이용교를 서울로 올려 보냈다.그러나 반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는지라,조급해진 송설이는 교자를 타고 서울의 이용교를 찾아갔다.이용교는 멋적은 표정으로 “서울에 와서 형님과 상의하여 보니 자기는 관작매매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그래서 혹시나 궁안의 내시(內侍)나 별입시(別入侍=신하가 사사로이 임금을 찾아 뵙는 일)에 부탁할 수 없을까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러나 아직 그 길을 뚫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고 했다. 이용교는 그동안 송설이에게서 적지않은 돈을 갖다 썼다.그러니 송설은 되든 안 되든 한번 “칼 물고 춤춘다”는 결심으로 부딛쳐 보기로 했다. 송설이 먼저 부딛칠 상대는 천상궁(千尙宮)이었다.당시에는 천상궁과 하상궁·장상궁·안상궁 네 여인을 ‘천하장안’이라 불렀다.가장 권세있는 여인이란 뜻이었다. 한때 동요(童謠)에 천하장안(天下長安)이라 했는데 그것은 천하장안(千河張安)을 가리킨 말로서 천상궁(千尙宮)을 비롯하여 하상궁 장상궁 안상궁이 천하 제일이라는 뜻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송설은 이 말을 믿고 먼저 천상궁의 고지기를 통해 천상궁을 만나 보기로 했다. 천상궁은 고지기에게 “모레가 당번이니 한번 송설을 만나보는 것도 무방하다”고 하였다.그날 밤 송설은 입궐하여 천상궁을 찾아갔는데 들고 간 선물이 거창하였다.기왕 선물을 줄 바에는 사람이 놀라 자빠질만큼 하라는 말이 있다.송설이의 선물은 영남산 15승(升) 세목(細木) 세필,별화문석(別花紋席) 열립(立) 한죽(竹),양두빗(兩頭梳子) 50개 등등이었다. 요즘 값으로 따지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당시로는 너무나 호화판 선물이었다.특히 15승 세목은 얻기 힘든 고가품이었다 그래서 천상궁은 15승 세필만 받고 화문석은 받지 않았다. 양심이 살아있었다고 할수 있는데,천상궁은 사실 왕년의 천상궁이었지 지금은 별볼일 없는 한물간 상궁이었다.시골서 올라온 송설은 그것도 모르고 천상궁이 여전히 권세가인줄 알았던 것이다.그 뒤 경선궁(慶善宮=엄비의 거처)에 출입하는 문상궁까지 알게 되었는데 문상궁도 역시 별볼일 없는 상궁이었다.그러나 요행히 송설은 문상궁에게서 중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바로 엄비가 임신하여 출산을 눈앞에 두고있다는 것이었다.문상궁은 이렇게 말했다. “엄귀인(엄비는 그때 아직 귀인이었다)의 산월이 오는 9월인데,그 태점(胎占)이 혹은 아들이다.혹은 딸이다 하고 있습니다. 물론 순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나 누가 딱 부러지게 아들이라고 점을 칠 사람이 없겠습니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아들을 낳으신다면 그보다 더한 나라의 경사가 어디 있겠는가” 나라의 경사뿐만 아니라 문상궁과 송설이의 경사이기도 한 것이다.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송설은 정동 무교다리 서쪽에서 세번째 집이 문상궁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생일 선물을 보냈다.그 품목을 보면 돈 2백원과 백미 다섯 섬,정육(소고기) 1백근,해물과 산채였다.물품에는 이라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문상궁은 일년에 3백원밖에 받지 못하는 가난한 상궁이었다.그때문에 송설이 보낸 선물이 어찌나 고마운지 인사차 만나자고 했다.송설은 문상궁을 찾아보고 “일전에는 약간의 물품으로 정표(情表)를 했을 뿐 입니다”고 인사한뒤 간 밤에 꾼 꿈이야기를 했다. “지난 8월15일 밤 하늘의 월궁(月宮)에서 부른다기에 따라 올라 갔더니 금전(金殿)이 즐비하고 옥루(玉樓)가 높이 솟아 있는데 상제(上帝)를 모신 선관(仙官)들이 시립해 있었습니다.그때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오기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중화전(中和殿)이 보이고 황금으로 경선궁(慶善宮)이라 썼습니다.이 꿈은 확실히 엄귀인께서 생남(生男)하실 꿈입니다.바라옵건데 해산때 필요한 모든 물건은 소첩이 장만하여 올리려고 하오니 받아주시도록 주선하여 주십시오” 문상궁은 송설의 꿈이야기를 엄귀인에게 전했다. 엄귀인은 순산 생남한다는 꿈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 이 꿈이야기를 고종황제께 고하고 송설이 장만한 출산도구를 받아 쓰는 것도 ‘무방하다’는 윤허까지 받았다. 송설이 문상궁의 안내를 받아 엄귀인을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일 뒤의 일이었다. 농문을 열어 보니 15승 세목(細木)과 여러 출산 도구가 모두 새것이었다. 며칠 안가서 과연 한 남자 아기가 태어났으니 이 아이가 바로 이은(李垠),곧 영친왕(英親王)이었다.
  • 親日의 군상:10/前 홍익대 총장 李恒寧씨(정직한 역사 되찾기)

    ◎“부일의 과오 민족앞에 눈물로 참회”/1939년 ‘고교’ 합격… 일제말 하동·창녕군수 4년 역임/군청 직원들 앞세워 죽창으로 농민 위협하며 쌀 공출/해방 후 35년간 교육계서 근신… 기회있을 때마다 사죄 “일제말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동(河東)군수를 지내면서 저 자신의 출세와 보신(保身)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竹槍)으로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하동 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謝罪)드립니다” ‘참회’는 아름답다.진솔한 참회는 숭고하기조차 하다.왜냐하면 보통사람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일제하에서 고관대작을 지냈거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소위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 중에서도 더러는 자신의 친일전력을 참회한 바 있다.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나중에 변절한 崔麟은 반민특위 재판에서 법정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었다.“민족의 이름으로 이 최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단해 주십시오”.그의 진실한 참회 한 마디가 사람들을 울린 것이다.파인 金東煥은 반민족행위를 뉘우치며 반민특위에 자수하였고,玄錫虎(일제때 충남 광공부장,2공화국에서 국방장관 지냄,88년 작고)는 회고록 ‘한 삶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고백한 바 있다.친일행적을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참회·사죄한 인사도 있다.홍익대 총장을 지낸 李恒寧(84·학술원 회원)씨가 그 주인공이다.그는 다소 껄끄러운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의외로 단번에 허락했다.가을빛이 완연한 정릉 자택으로 그를 찾아가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눴다. ­하동군민들에게 사죄한 것은 언제,어디서 하신 말씀입니까? ▲91년 7월10일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 초청 강연회에서 인사말로 한 것인데 여러 신문에 보도가 됐더군요. ­주최측에서 그런 얘기를 해달라고 주문을 하던가요? ▲아닙니다.제 스스로 한 얘깁니다.그 자리에 서니까 50년전의 일이 생각도 나고 군민들을 직접 뵈니까 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얘기가 저절로 나옵디다. ­처음 주최측으로부터 강연요청을 받고서 어떤 감회가 있었습니까? ▲‘하동’이라고 하니까 저로서는 감회가없을 수야 없지요.거기서 군수를 지냈으니까요.해방후에도 더러 하동을 지나친 적이 있었습니다만 ‘죄의식’때문에 (군민들을) 찾아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일제 앞잡이로 군민 괴롭혀 ­‘죄’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일제말기 하동·창녕군수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앞잡이가 돼 군민들을 괴롭힌 행위를 말합니다. 李씨는 1934년 경성(京城)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후 예과 3년,본과 3년의 6년 과정을 마치고 40년 졸업했다.본과 3학년 때인 39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李씨는 대학 졸업후 1년간 시보(試補)생활을 거쳐 1941년 6월 하동 군수로 첫 발령을 받았다.1년 뒤인 42년 7월 그는 창녕(昌寧)군수로 전보돼 그곳에서 3년간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군수는 어떤 경로로 됐습니까? ▲당시 대학을 나와도 마땅한 취직자리도 없고 해서 재학중에 고시(考試)공부를 해서 (군수가)됐습니다. ­당시 고시공부는 주로 직장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습니까? ▲그런 면도 있지만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시보 생활은 어디서 했습니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했습니다.국회 부의장을 지낸 尹吉重씨가 저와는 고시 동기생인데 尹씨는 총독부 농림국에서 시보생활을 했습니다. ­군수의 대우는 어땠습니까? ▲당시로선 비교적 많은 봉급을 받았습니다.일제말기에는 일본인에게만 주던 가봉(加俸)을 조선인들에게도 지급해 봉급차이도 없어졌습니다. ­하동군수 시절 식량공출(供出)문제로 고생을 하신 것 같은데… ▲제가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942년부터 ‘공출제도’가 시행됐습니다.그런데 하동에선 생산량보다 할당량이 많아서 무리가 있었습니다. ○1942년부터 공출제 시행 ­공출미 할당은 어디서,누가 결정하였습니까? ▲당시 경상남도 산업부장으로 있던 金大羽씨가 군수회의를 소집한 후 각 군수에게 강제로 할당해 주었습니다. ­하동군에 할당된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군 양곡담당 기수(技手)에게 물어보니 재고가 6,000석이라고 하더군요.그 내용을 金大羽씨에게 보고했더니 ‘기수 말은 못 믿겠다’며 재고량의 무려 5배인 3만석을 할당하더군요. ­최종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할당량의 1할 정도인 3,000석 가량을 공출했습니다. ­다른 군의 사정은 어땠습니까? ▲대개 할당량의 절반 정도는 달성했었습니다.그 때 제가 있던 하동군이 꼴찌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죽창’ 얘기는 왜 나온 겁니까? ▲당시 군민들이 집안 곳곳에 쌀을 감추어 두니까 군청직원들이 죽창을 들고 다니며 창고나 벽 같은 쌀을 숨겨둘만한 곳을 쿡쿡 찔러본 것을 두고 한 얘깁니다. ­죽창으로 사람을 해친 사례도 있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그러나 ‘공출독려반’들이 죽창을 들고다니니까 군민들에게 위협은 됐을 겁니다. ­하동군수에서 1년만에 창녕군수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승진은 아니지요? ▲예,군세(郡勢)로 보면 오히려 좌천인 셈이지요.부진한 공출성적이 문제가 됐을 것으로 봅니다. ­본인의 ‘친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합니까? ▲식량공출이나 노무자 징용,학병권유,징병제 독려 등에 대한 방침이 도의 군수회의에서 결정이 되면 군수는 다시 면장회의를 소집하여 그 내용을 하달,독려했습니다.결국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지요. ­그같은 일은 당시 군수의 기본적인 직무가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지요.그러나 그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군수자리를 직업으로 택했다는 자체가 ‘친일’입니다. ○고등관리 이상 관리는 친일파 ­항간에는 일제말기에 군수 노릇 몇 년 한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도덕적 평가 이전에 지식인의 민족의식 문제라고 봅니다.아무 생각없이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것도 그렇지만 더러는 출세목적으로 부풀려 집행한 사례도 있었습니다.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훨씬 권한과 재량이 많았습니다.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재임기간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인 관리들과의 차별대우는 어땠습니까? ▲고급관리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일제말기에는 임금차이도 거의 없었습니다.총독부 내에 ‘계림구락부’라는 고등문관시험 출신 고등관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저도 시보 시절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해방후 그는 45년 10월까지 창녕군수로 계속 근무하다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경남도청 사회과장으로 발령을 받고는 한 달만에 사표를 썼다.이유는 자신은 일제때 관리를 지낸 몸이라는 것.이후 그가 자리를 옮긴 곳은 부산 동래구 범어사 입구 청룡초등학교였다.“해방후 민족앞에 속죄해야겠다는 생각에 승려가 되려했습니다.그러나 이미 딸린 아이가 다섯이나 돼 혼자 이 문제를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낮에는 교사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범어사 河東山 스님 밑에서 수행생활을 했습니다”.지난 81년 홍익대 총장을 그만둘때까지 그는 35년간 교육계에만 몸담았었다.그 나름의 ‘근신’이었다. 60년대초 그는 수필과 신문에 연재한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참회했었다.또 80년 봄에는 조선일보에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라는 글을 발표,지식인 사회에 파문을 던졌다.거듭된 ‘참회’를 두고 일각에서는 ‘상습적 양심선언가’라고 비아냥거렸다.그러나그의 ‘참회’는 앞뒤,체면안가리고 솔직하다.사실왜곡이나 자신을 미화한 구석도 없다. “사죄를 하고나니 마음이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밝은 모습이었다.묻는 말에 뭘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법도 없었다.그의 얼굴 가득히 ‘뉘우친 자’의 평화감과 여유가 넘쳐 흘렀다. ◎日帝下 군수는 어떤 자리였나/군행정 최고 실권 가진 실력자/고등 문관시험 합격자 임용/1년간 시보 거쳐 군수부인/면장·군청직원 인사권 가져/초임은 초등교사의 약 3배 일제하 공직자 관등(官等)은 네 종류였다.최상급은 일황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親任官)으로 조선내에서는 조선총독·정무총감 두 사람뿐.그 다음이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순.주임관 이상을 고등관(高等官)으로 쳤는데 현 사무관(5급)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다.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현 행정고시)합격자가 임용됐다.고문(高文)출신자의 경우 1년간 시보 시절에는 판임관 6급(군청 과장급)대우를 받다가 군수로 정식 임용되면 주임관 7등급 대우를 받았다.초임 연봉은 1940년 7월1일 기준 1,650원.(당시 초등학교 교사 초봉은 월 45원) 군수는 면장 이하 군청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군행정의 최고책임자로 ‘영감(令監)님’으로 불렸고 부인은 ‘마님’소리를 들었다.‘각하(閣下)’라는 용어는 도지사급의 칙임관들에게 붙였다. 李恒寧씨는 “사법과 출신의 법관들은 판결문 작성 등 잡무가 많았으나 군수는 도장찍는 일 밖에 없어 편했다”고 회고했다.
  • 인생을 바꾼 DJ와의 만남/청와대 해외입양동포 다과회 눈물바다

    ◎88년 해외서 만난 입양 여학생 “운명에 굴복말라” 용기 심어줘/법률자문가 돼 10년만에 해후 23일 오후 청와대에서는 한편의 드라마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金大中 대통령과 해외입양 동포들의 청와대 다과회 자리에서 가슴저린 해후가 있었다고 朴仙淑 청와대 부대변인이 전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金대통령이 말문을 열었다.金대통령은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마음으로부터 미안하고 우리가 정말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그러면서 ‘네덜란드의 한 식당에서 만난 노부부가 한국인 장애입양자들에게 정성을 다해 음식을 떠먹이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 울어버렸다’는 지인(知人)의 얘기를 소개했다. 이어 지난 88년 2월 스웨덴을 방문했을 때 동포리셉션에서의 일화를 들춰냈다.기모노를 입은 한 여학생이 일어나 질문을 하기에 ‘일본 여학생이구나’했는데 “나는 한국에서 온 입양아다.당신 나라는 우리는 물론 지금도 아이들을 낯선 외국으로 팔고 있다.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물었다고 했다. 그래서 느낀 대로 “부끄럽기짝이 없다.그러나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라”는 취지의 답을 했다고 회고했다.“그 여학생은 ‘20년 맺힌 응어리가 풀렸다’고 인사했고,몇년이 지난 후 기자가 되어 스웨덴을 방문중인 나를 인터뷰하러 찾아왔었다”고 털어놨다.그리고 “그 여학생이 지금 성공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왔다”고 소개했다.지금은 스웨덴에서 법률자문사로 일하는 리나 김경애씨(33)가 일어섰고,흐느낌 속에 박수가 터져나왔다.리나씨는 “민주주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을 다시 만나 정말 기쁘다.그때의 만남이 저를 바꿔놓았다”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한국전쟁때 미국으로 입양된 크리맨트 토머스(46)가 “과거는 과거이고 바꿀 수 있는 것도,또 바꾸고 싶은 것도 없다.과거에 대해서 후회도 없다”며 대통령이 미래로 향하는 문을 열어줘 고맙다고 했다.모두가 하고 싶었던 얘기였든지 다과회장은 삽시간에 ‘흐느낌의 개울’에서 ‘울음의 바다’로 변했다.金대통령도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우리말을 할 줄 아는 동포는 아무도 없었다.
  • 50∼70代 할머니 만학도 300명 초등과정 이수

    ◎“한글 깨치니 세상이 보여요”/이젠 혼자서도 은행 가고 지하철 탈 수 있어 “글을 몰라 평생을 죄인처럼 부끄럽게 살아왔습니다.이제 손이 아파 이름을 못쓰겠다고 거짓말하지 않아도…” 2일 하오 2시30분 서울 종로구 수도학원 강당.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아든 백발의 할머니가 ‘선생님께 드리는 글’을 낭독하다 목이 메자 행사장은 이내 눈물바다가 됐다. 졸업생들은 가난과 사회적 편견 때문에 배우지 못해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몰랐던 50대 주부에서 70대 할머니까지 만학도 300여명.이들은 수십년 설움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손으로 눈물을 훔쳐가며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元貞淑씨(70·여·도봉구 방학동).元씨는 일제때 ‘여자는 배워서는 안된다’는 편견 때문에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지난해 초 며느리의 손에 이끌려 학원을 찾은지 1년만에 졸업장을 받은 元씨는 “이제 혼자서 은행에 가거나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元씨는 3일 발표되는 중학교 입학검정고시에도 최고령으로 합격할 것을 자신하고 있다.
  • 네팔 카트만두(세계 문화유산 순례:72)

    ◎삶도 죽음도 없는 ‘지혜의 사원’/스와얌부나트 스투파에 새긴 ‘부처의 눈’/만물을 꿰뚫어 보는 ‘all­seeing eyes’/살아있는 여신 쿠마리는 종교 초월 숭앙받고/황금사원 옆에는 영원을 흐르는 바그마티강이… 【카트만두(네팔)=金鍾冕·金明國 특파원】 히말라야의 준봉을 우러러보고 있는 네팔왕국의 수도 카트만두. 네팔 사람들은 지금도 카트만두에 가는 것을 “네팔로 간다”고 말한다. 산간오지의 네팔인들에게 카트만두 분지는 곧 동경의 땅이자 마음의 주인이다. 그곳에는 깍아지른 듯한 계단식 밭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농사 지을 땅이 있고 유서깊은 사원들 또한 즐비하다. 전설에 따르면 카트만두 분지는 원래 하나의 커다란 산정호수였다.그런데 만주슈리 즉 문수보살이 나타나 ‘지혜의 칼’로 산허리를 자르고 물을 퍼낸 뒤 육지로 일궈냈다는 것이다.그때 맨처음 수면 위로 빛을 내뿜으며 떠오른 곳이 바로 카트만두의 성지 스와얌부나트이다. ○룸비니 버금가는 성지 스와얌부나트는 지금부터 2천여년 전에 세워진 불교사원이다.카트만두 시내에서 서쪽으로 2㎞쯤 떨어진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사원 입구에 가루다상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면 힌두사원도 겸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가루다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가 타고 다닌다는 상상의 새이다.사원은 온통 야생 원숭이들의 울음소리로 왁자했다.‘멍키 템플’로 불릴 정도다.스와얌부나트로 오르는 길은 300개가 넘는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카트만두의 평균 고도가 1천400m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숨이 더욱 차올랐다.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허위단심 사원에 올랐다.요란하게 치장된 거대한 탑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네팔 불교에서 룸비니 동산 다음으로 신성시되는 스와얌부나트 스투파였다.솔도파(率堵婆)라고도 불리는 스투파는 불사리를 봉안하거나 절의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해 쌓은 탑을 말한다.하지만 이곳의 스와얌부나트 스투파는 여느 스투파와는 달랐다.무엇보다 눈길을 끈것은 스투파 상단부 4면에 새겨진 사방을 응시하는 부처의 눈이었다.만물을 꿰뚫어 본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올 싱 아이즈(all­seeing eyes)’라고 부른다.대승불교에서는 과거겁과 현재겁,그리고 미래겁에 걸쳐 각각 1천명의 부처가 출현한다고 한다.이곳의 스투파는 과거겁의 한 부처인 본초불(本初佛)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스투파 주변은 참배객들로 북적댔다.특히 부처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은 스투파의 둘레를 몇번이고 돌고 또 돌았다.스투파를 한바퀴 돌면 불경을 1천번 읽는 것만큼의 공덕을 쌓는 일이라는 게 그들의 믿음이다.스투파 옆에 죽 늘어서 있는 기도용 휠 ‘마니차’ 주위에도 순례자들의 행렬은 이어졌다.그들은 라마교의 진언(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 새겨진 원형의 마니차를 연신 돌려댔다.마니차를 돌리는 것은 불경을 외우는 것과 같은 공덕행(功德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이 수수께끼 같은 사원에 서면 누구라도 성자가 되고 현자가 될 법했다. 스와얌부나트 스투파의 ‘예지의 눈’을 멀리서 다시 보았다.순간 네팔의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의 이마에 붙인 티카(tika)가 떠올랐다.쿠마리에게 있어 그것은 삼라만상의 이 법을 훤히 꿰뚫는 ‘제3의 눈’이다.기자는어느새 쿠마리의 자장(磁場)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발걸음은 이미 쿠마리가 살고 있는 쿠마리 바할로 향하고 있었다.카트만두 시내의 남쪽 뉴 로드라 불리는 신생 거리를 지나 바산트풀 광장에 닿았다.쿠마리 바할이 모습을 드러냈다.작은 창이 달린 3층의 낡은 목조건물이 세월의 무게를 전해줬다. ○불경 1천번 읽는 공덕 고대 경전을 보면 쿠마리의 신체조건은 까다롭기 짝이 없다.쿠마리의 신체는 반얀(banyan,벵골 보리수의 일종)나무와 같고,허벅지는 사슴의 그것과 같으며,목은 고둥 같아야 하고,눈꺼풀은 소의 그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쿠마리 바할에서는 쿠마리를 볼 수 있지만 사진촬영 만큼은 엄격히 금했다.영화에서나 보던 쿠마리는 실제 어떤 모습일까.사원의 종이 울리고 비둘기 몇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르더니 마침내 2층 창문으로 쿠마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석류꽃같이 빨간 입술에 조붓한 어깨,호리호리한 목선,게다가 기품까지 갖췄지만 표정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쿠마리.아침이슬처럼 잠시 나타났다 이내 몸을 숨겨버리는 쿠마리는안쓰러움 바로 그것이었다.네와르족의 어린 소녀 중에서 선발되는 쿠마리는 힌두교 탈레주 여신의 현신(現神)으로 여겨지지만 종교를 초월해 두루 숭배받는다.나이가 들어 초경을 치르면 쿠마리는 사원을 떠나야 한다. ‘목조의 절’이라는 뜻을 지닌 카트만두에서는 어디를 가도 사원과 마주친다.그 중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힌두교의 성지 파슈파티 사원이다.카트만두 시내에서 동쪽으로 5㎞ 지점에 위치한 이 황금빛 2층 사원은 힌두교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정면에는 시바신이 타는 성스러운 소 ‘난디’상이 수호신처럼 웅크리고 있다.이곳은 힌두교의 성인 사두(sadhu)나 요기들에게는 메카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파슈파티를 한층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원을 휘감고 흐르는 바그마티 강이다. 이 강은 흘러 흘러 인도의 강가(Ganga,갠지스강)와 만난다.바그마티 강 역시 강가처럼 가트(ghat,화장장)로 성역시된다. 매캐한 화장 연기속에서 태연히 머리를 감는 여인,식기를 닦는 아낙,의지가지 없이 병들어 누워있는 노인…. 이들에게는 더이상 죽음도 삶도 없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종교의 비의(秘義)만 숨쉴 뿐.바그마티 강은 오늘도 영원을 안고 흐른다. ◎여행 가이드/대여 자전거 이용 편리/통행규제 심해 주의를 카트만두 시내를 여유 있게 둘러 보려면 대여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자전거를 개조한 오토 릭샤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카트만두 시내의 일방 통행로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자전거도 규제를 받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카트만두 시내 서쪽에 있는 국립박물관 앞을 거쳐 가는 것이고,또 하나는 구왕궁 앞 듀버 광장에서 서쪽으로 비슈누마티 강의 조교(弔橋)를 건너서 가는 것이다.이국정취를 만끽하고 싶다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좋을 듯.카트만두에는 많은 여행사들이 밀집돼 있다.이들은 카트만두 성지 순례 외에 트레킹이나 래프팅 등도 주선해준다.
  • 또 하나의 생일/김희진 국립국어연 학예연구관(굄돌)

    1950년대 어느 날,초등학교에 다니던 필자의 오빠가 달력을 쳐다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가족들이 달려들어 우는 연유를 묻자 생일이 지났다는 것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 생일이라 하여 푸짐한 상을차려 줄 형편이 될까마는 당사자에게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게 몹시 서운했던 모양이다. 유엔에서 구호물자로 보내준 분유를 가마솥에 끓여 학생들에게 나눠주면정작 본인은 못 먹고 철조망 너머 올망졸망 기다리고 있던 동생들에게 먹여야 했던 시절이니,꼬박꼬박 끼니를 찾아 먹는 몇 안 되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추운 겨울 교실 밖 양지에 서서 긴긴 점심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누가 사과라도 가져오면 껍질이나마 얻어먹을 셈으로 칼끝에서 벗겨지는 껍질 끝자락을 먼저 잡으려고 다투기도 했다. 두루마리처럼 술술 벗겨질때의 흐뭇함도 잠시,중간에 끊겨 옆의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 껍질자락을 움켜잡을 적의 아쉬움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방과 후에는 부모와 함께 노상에 앉아 장사를하고 밤이 이슥토록 “찹쌀떡”을 외치며 골목골목을 누비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 시절 아이들에게 꿈을 키워 주는 노래들은 많았다. 지금도 이런노래 구절이 생각난다. “건너마을 일남이는 가난하여서/하루에 죽 한 끼도 어렵답니다.” 뒷구절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주인공 일남이가 촌음을 아껴 가며열심히 노력해서 결국은 크게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필자도 그 시절 그런꿈을 먹으며 자랐던 것 같다. 신문들은 1월 초에 생일을 맞은 김영삼 대통령,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김종필 명예총재가 생일을 간소하게 치렀거나 아예 생일을 잊고 나랏일에 전념했다고 한다. 바람직한 일이다. 이렇듯 너나없이 내핍하고 열심히 뛰다 보면 ’건너마을 일남이’처럼 분명히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말’을 찾아서/김희진 국립국어연 학예연구관(굄돌)

    “얼음이 풀리는 강물은 어떻게 흐르는지 그 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졸졸졸’은 아닐 것 같았습니다.저는,차가 있는 친구를 한밤중에 불러내어 북한강 기슭으로 함께 달려갔습니다.한참을 강가에 자리 잡고 귀 기울여 물소리를 들어 보았습니다.멀리서 오는 봄의 밤 강물은 ‘소살소살’ 흐르고 있었습니다.” 지난 11월 8일 국립국어연구원에 초청되어 “‘혼불’과 국어사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소설가 최명희씨의 말이다. 마땅한 형용사 하나를 쓰고 자사전을 이리저리 모조리 훑어 ‘풍연하다’를 찾아 흐뭇했고,작중 인물에게 어울리는 택호를 정하고자,땅 이름 사전을 몇 번이나 뒤진 끝에‘아느실’을 발견하여 기뻤다는 그의 경험담은,‘혼불’을 쓰는데 왜 17년이 걸렸고,‘혼불 사전’이 필요할 만큼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 왜 그리 많은지를 이해하게 한다.정지용 시인도 어떤 편지글에서“꾀꼬리도 사투리를 쓰는 것인지 강진골 꾀꼬리의 소리는 다른듯 하고,또 같은 곳의 같은 꾀꼬리라도 때에 따라 여러 가지 소리를 내는데,꾀꼬리 보학에밝지 못하고 발음 기관이 에보나이트판이 아니어서 정확하게 기록하지 못하여 안타깝다”고 하였다. 적확한 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어찌 문필가에 그치랴.시사 만화를 그리는 한 화백도 그림에 들어맞는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자신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몸부림치고 싶다고 실토한다. 아직 말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애가 표정과 손짓으로 뭔가 의사를 표하는데,아이 생각을 제대로 짚지 못한 어른이 “응? 이렇게 하자고? 저렇게 하자고?”하고 엉뚱한 해석을 보이면,아이는 처음 몇 번은 “아니,아니”하며 도리머리를 흔들다가 종국에는 짜증이 분노로 변해 “으앙” 울음을 터뜨린다.어린애 의중을 정확하게 헤아리듯 그 정황에 딱 맞는 말을 찾아쓰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그래도 ‘그 말’을 찾아내는 일은 말할줄 아는 이의 도리가 아닐까?
  • 부모 자격증/곽배희 가정법률상담소 부소장(굄돌)

    오늘따라 유난히 내담자(상담을 하려고 온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많이 딸려 있다. 이런 날은 아이 울음소리,떠드는 소리,칭얼대는 소리로 상담소 전체가 떠들썩하다. 그러나 철없는 아이들 눈에도 부모 표정이 심상치 않은지,그들은 한결같이 불안해 하며 부모 눈치를 본다. 내담자 한분이 10살정도된 아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왔다.남편의 의처증과 폭행때문에 이혼하려는데 아이는 남편에게 두고 가겠다고 한다.행여나 놓칠세라 엄마 팔을 꼭 붙들고 옆에 앉은 아이의 눈빛이 자못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일렁거린다.그 아이의 가슴이 ‘쿵’하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하다. 순간 남편때문에 얼마나 고통받았으면 저럴까 생각하면서도 말귀를 다 알아듣는 아이를 옆에 두고 그렇게 말하는 내담자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는 분명 어느 한편만의 자식이 아니다.부모에게는 아이를 낳은후 기르고 보살필 의무와 권리가 똑같이 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혼하게 된다면,그래서 부모중 한사람이 아이를 맡아 길러야 한다면 양육자는 아이의장래와 의사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아이를 낳는 것만으로는 부모 구실을 다할수 없다. 아이를 낳되 어떻게 기르는가에 따라 그 부부가 부모 자격이 있는지를 진정으로 가려낼 수 있다. 앞으로는 아이를 낳은 부부가 당연히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잘 길러낼지를 알아보는 시험을 거쳐 ‘부모자격증’을 주면 어떨까.답답한 심정에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본다.
  • “나리 만나야 한다” 오열… 실신/가족·친구들 표정

    ◎나리 어머니 “살려만 주면 용서하려 했는데”/급우들 “못다핀 꿈 좋은세상서…” 눈물의 편지 나리양(8)의 어머니 한영희씨(40)는 12일 하오 딸의 사체 발굴현장 주변인 서울 동작구 사당3동 파출소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흐느꼈다. 경찰은 나리양의 사체가 심하게 부패돼 한씨 등 가족이 사체를 보지 못하도록 했으며 시신수거 작업이 끝난뒤 “나리를 만나야 한다”고 울부짖는 한씨를 간신히 집으로 돌려 보냈다. 한씨는 이날 아침 유괴범인 전현주씨(29)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리만 살려 보내준다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며 나리양이 돌아올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아침 일찍부터 수사본부에 나와 만나는 사람마다 “나리를 살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나리양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한씨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더욱 범인이 임신 8개월의 주부라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 아이를 가진 사람이 아이를 유괴할 수 있느냐”며 말을 잇지 못했다.서울 서초구 잠원동 한신아파트 나리양의 집에는 친할머니(60)와 한씨의 교회 신도 7∼8명이 모여 가족 등을 위로하며 기도를 올렸다. 급우의 비보를 접한 서울 원촌초등학교 교사와 친구들은 한결같이 비통해했다.2학년5반 친구 5명은 조남각 교사(54)로부터 나리양의 살해 소식을 듣고는 “나리가 살아 돌아오길 기원한 보람도 없이 친한 친구가 죽어 너무 슬프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리양의 책상위에는 ‘이 세상에서 못다한 꿈을 좋은 세상에서 이루기 바란다’고 적은 리본이 달린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으며 친구들이 쓴 편지들이 꽂혀 있었다.
  • 성악가 박수길(이세기의 인물탐구:141)

    ◎미성과 볼륨 지닌 바리톤의 선도자/독특한 가창법엔 철학적 예술성 가미/오페라도 40여편 출연·연출한 재주꾼 위대한 인물중에서 피나는 노력없이 정상에 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또 노력하지 않은 천재가 일찍이 사회에 공헌한 일이란 드물다.바로 바리톤 박수길이 걸어온 역경의 뒤안길은 한낱 흘러간 추억일 수 없는 진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준다.어둡고 외롭고 험란한 가시밭길을 걸어왔으나 그의 얼굴은 햇살처럼 밝고 항상 즐거움에 넘쳐있다.극단적인 아픔을 이겨낸 노래 또한 증류수와도 같은 청정이 깃들어 그가 슬픈 노래를 부르면 심장이 울리고 기쁨에 찬 노래는 환희의 감동을 전달해준다. ○함흥서 출생 1·4후퇴때 월남 지난 68년 ‘사랑의 묘약’을 첫 오페라로 그는 ‘라보엠’의 마르첼로역만 6차례,‘아이다’ ‘리골렛토’ ‘라트라비아타’ 등 40여개의 오페라에서 주역과 조역을 해냈다.그중에서도 그의 노래의 백미는 슈베르트 가곡인 ‘겨울 나그네’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전곡연주를 들 수 있다.특히 지난날을 자전적으로 읊조리는 듯한 ‘겨울 나그네’의 ‘얼어붙은 눈물’은 마음속으로 쓰는 시와 마음속으로 흘러내리는 차가운 눈물을 느끼게 한다. 그는 오페라 가수로서 자신의 역할에 도취하여 역할의 성격들을 철저히 표현해 내는가 하면 피부에 스며드는 음악성을 엘레지아코(비가조)로 살리는데 혼신을 다한다.가곡을 부를때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도 중요하지만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어떻게 소리를 내느냐에 치밀하게 접근한다.지금도 50대 중반의 예술가로서 사고의 여백과 서정적 시정을 담아 함축성있는 창법이 한층 내공화하는 시기다. 음악평론가 김형주는 ‘한국의 명연주가 집중연구’에서 “인간미 넘치는 표정뒤에는 음악에 대한 인내와 집념이 숨어있고 감미롭고 특이한 가창법과 유려한 가요성은 그만의 매력”이라고 평한다.더구나 그의 탁발한 창법은 오랜 연주생활 경험에서 얻어진 ‘철학적인 예술성’을 발휘하여 오성적인 인식이 고도화된 경지다.‘온화하고 차분한 학자적 풍모’가 있는가 하면 ‘옳다고 판단된 일은 끝까지 밀어부치는 고집과 행동력’ 또한 만만치가 않다. 박수길은 어쩌면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곤두박질치는 인생의 전환을 겪은 예라고 할 수 있다.그는 함남 함흥에서 신교육을 받은 박영록씨의 3남2녀중 장남.그러나 6·25의 와중에서 1·4후퇴때 외조모를 따라 먼저 피란을 내려온 것이 지금까지 이산가족으로 남게된 동기가 된다.어릴때는 부친이 아코디언을 켜는 가정환경에서 풍족하게 자라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부터 노래에 뽑혀다니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외삼촌댁이 있는 전라도 이리에서 동산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중학교시절은 서울에 있는 백부댁에서 기식,친척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동성고를 졸업했으나 대학진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오히려 노래실력이 뛰어난 그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이 음대진학을 권유해 주었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세대교수이던 황병덕씨를 소개받아 생전 처음으로 발성법이며 창법 호흡법을 배울수 있었다.그리고 60년,연세대 성악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그러나 등록금이 없어 한달만에 자퇴해 버렸고 그로부터는그의 인생의 길은 터널속처럼 멀고 암담하기만 했다.무엇에도 희망을 걸 수 있는 실마리란 없어보였다.생계해결을 위해서 시계모형을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 철판을 자르는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단지 그는 절망이나 포기대신 언젠가는 자신이 무엇인가가 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해 가을,한양대가 설립되었고 당시 한양대 음대학장인 오현명씨와 총장인 김연준씨의 배려로 전학년 장학생으로 발탁되었다. ○한양대 음대 장학생 발탁 그는 오페라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작품이 갖는 내용의 주제와 시가 갖는 운율을 남보다 전달하는 노력이 투철하다.이는 ‘인간에 대한 심오한 사랑이 내부에 도사려있기 때문’이며 ‘젊은 날의 방황과 고통이 음악적으로 양성됐기 때문’일 것이다.그의 음역은 베이스의 깊은 음색과 테너의 화려함을 동시에 지닌 테너 바리톤으로 인생의 쓸쓸함과 순수한 청춘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넘나든다.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지난 61년 서울에 와서 독창회를 연 독일의 세계적인 바리톤 게르하르트 휘시의 연주를 보고나서부터다.당시 휘시는 60을 넘긴 나이였으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침이슬’처럼 불러주었고 그후 슈베르트 가곡을 부를때마다 그는 휘시의 음유적인 음악세계를 되살려 노래의 참맛과 멋에 빠져들수 있었다. 최근에는 오페라연출에도 손대어 ‘피가로의 결혼’과 지난해 ‘사랑의 묘약’을 연출했고 요즘은 국립오페라단의 하반기공연인 ‘섬진강 나루’를 지휘감독하면서 오페라단 운영,연출의 새로운 모색 등 오페라발전을 위한 여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69년에 바이올린을 전공한 부인 김진희씨와의 사이에 남매. 그동안 그를 둘러싼 수많은 호평이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음악평론가 이유선씨가 ‘독일 리트의 사전인 카를로 베르곤지의 미성과 볼륨을 가진 한국 바리톤의 일인자’로 지적해준 것과 78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때 뉴욕타임스가 ‘장래가 촉망되는 감명깊은 노래’로 평해준 것이 그의 음악생애에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연출 그는 명실공히 한국 오페라와 가곡을 이끄는 리더의 입장에 서있다.이제 그가 할 일은 그가 두고온 고향산천과 그리운 부모,삶의 축적을 희로애락으로 담아 늙어서도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눈물의 가곡을 전생애적으로 노래부르는 ‘진실한 예술의 혼’으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다. □연보 △1941년 함남 함흥 출생 △1964년 한양대 음대 졸업 △1968년부터 오페라 ‘사랑의 묘약’ ‘순교자’출연 △1972년 국립극장 독창회 △1978년 뉴욕 매네스 음대 졸업,뉴욕데뷔 독창회(카네기 리사이틀홀) △1978∼84년 성심여대 음대 부교수 △1979년 귀국독창회(국립극장) △1982년 슈베르트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전곡 우리말번역연주,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첫연출 △1984∼현재 한양대 음대 교수 △1987년 슈베르트와 슈만가곡의 밤(호암아트홀) △1989년 국립합창단 ‘독일진혼곡’ 협연(나영수 지휘) △1995∼현재 국립오페라 단장 △1997년 9회 독창회(국립극장) ▷오페라 출연◁ ‘아이다’‘리골렛토’‘파리앗치’‘일트로바토레’‘세빌리아의 이발사’‘오델로’‘호프만의 뱃노래’‘마담 버터플라이’‘춘향전’‘파우스트’‘탄호이저’‘논개’‘카르멘’‘원효’‘결혼’‘돈파스칼로’‘원술랑’‘돈카를로’‘돈조반니’‘심청’‘무당’ 등 40여편,현재 한양대 교수·국립오페라단 단장·예울음악무대 대표,‘섬진강 나루’제작 예술감독(8월19일부터 국립극장)
  • 여고생 여관서 아기출산/남자친구가 질식사 시켜

    10대 남녀가 성관계를 가진뒤 아이를 출산하자 바로 질식시켜 사망케 한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서부경찰서는 16일 유모군(19·서울 서대문구 북가좌1동)을 살인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유군은 지난 6일 하오 5시30분쯤 지난해 7월 같은 동네에서 알게 돼 성관계를 가진 안모양(당시 H여상 3학년)으로 부터 산기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동네 여관에 함께 투숙,아이를 낳자 질식사시킨 뒤 좌변기에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난다는 여관주인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유군을 붙잡았으며 안양을 인근 산부인과에 입원시켰다.
  • 연초록 꼬까의 5월을 기리노니(박갑천 칼럼)

    5월은 연초록 웃음으로 문을 연다.진초록으로 가는 여린 푸르름.어머니 입김같은 명지바람인데도 행여 다칠까 마음죄게 하는 생명들이 점지받은 이승을 노래한다.계절의 어린이다. 그렇다.이윽고 헤살부려올 모진 비바람 모르는 양 웃는 어린이의 모습이 5월이다.「맹자」(리루하)는 『대인이란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을 지니는 사람』이라고 했다.연초록 꼬까에 티없이 방실거리는 5월은 그래서 대인이다.대인의 보법을 보인다.저 물쩡해뵈는 잎이 추위에 어찌 앙버티면서 딴딴하고도 억센 장벽을 뚫고나온 것인고.「노자」가 말한 유능제강(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김)의 철리를 새삼 곱씹어보게 하는 눈엽의 5월이다. 왜 그러는걸까.진달래 개나리하며 목련 등은 꽃부터 핀다.그게 섭리의 웃음인 봄꽃의 눈비음.그것도 유능제강을 보이기 위함이던가.그 웃음을 거둬들이면서 잎을 틔운다.웃음에 갈음하여 솟구치는 잎은 그러므로 생명의 엄숙함과 장엄함을 가르친다.파란 부활.생명의 영원을 약속하는 섭리의 결연한 의지이다.그걸 펼쳐뵈는 5월은 위대하다.두견을 울게하고 꾀꼬리를 미치게하는 달이 5월이라고 했던 사람은 김영랑이었지,아마.어디 꾀꼬리만 미치게 하는 것이던가.그에 앞서 5월의 여린 잎들은 장끼와 까투리의 미침도 잊은 정사부터 엿보던 것을.그러고서 5월은 피토하는 두견의 울음소리를 보내어 다가올 세파를 미리 알린다.그 옛날 슬프디 슬프게 영월땅으로 쫓겨간 단종임금도 들었던 두견(자규)의 울음소리.자신의 신세를 거기 엇섞은 시가 세월의 흐름속에서도 애끊는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달 5월이다. 지금은 남의 얘기다.하나 50년대까지만 해도 넘기가 아프고 서러운 보릿고개를 안았던 5월.풀뿌리 캐먹고 나무속껍질 핥던 그 시절의 5월 하루해는 왜그리 길던 것인고.『사람이 살면은 몇백년이나 산단 말이냐…』고 구성지게 울먹이던 육찬이의 육자배기가락은 아지랭이속으로 가물가물 스러져갔거니.가난한 죄로 「장가한번」 못간 그 상머슴이 살아있다면 지금쯤 여든도 넘어있는 것이리라. 해마다 5월은 왜오는가.꽃피고서 시들고 사랑하고서 미우며 가멸진 다음 가난해지고 젊은 다음 늙어가는… 돌고도는 이치 알려주고자 온다고 해두자.그걸 느끼는 가운데 가정의 달 5월을 푸르고 싱싱하게 보내야겠다.〈칼럼니스트〉
  • 모녀·친지 부둥켜안고 눈물마/탈북일가 회견장

    ◎비참한 북 실상 설명하다 끝내 목메/“김일성 대원수 고맙습니다…” 5세 소녀노래에 섬뜩함도 북한 주민의 처절한 삶에 대한 폭로,탈북 대장정의 긴박했던 순간에 대한 회고,그리고 그리던 가족·친지들과의 상봉…. 「동토의 왕국」 북한을 탈출,지난 9일 자유의 품에 안긴 김경호씨 일가족의 17일 기자회견장은 눈물과 환희로 가득찼다. 회견에는 김씨의 일가족 등 17명 가운데 임신 8개월인 넷째딸 명실씨(28)를 제외한 16명이 참석했다.김씨의 맏형 경태씨(70)·조카 홍석씨(34),이태원 친구 이한성(61)·변지열씨(61),그리고 부인 최현실씨(57)의 어머니 최정숙씨(76) 등 일가 친지 등 14명도 회견 장면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다. 회견이 끝나자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았다.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흘렸다. 내·외신 기자 200여명과 TV로 이를 지켜본 사람들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특히 탈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회안전부 노무원 최영호씨(30)는 북한에 아내와 세살박이 아들을 두고 온 것으로 밝혀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날 회견에서는 몸이 불편한 김씨 를 대신해 부인 최씨가 마이크를 잡았다.사지에서 일가족을 탈출시킨 「대모」답게 목소리는 시종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배고픔과 가난….최씨는 너무도 비참한 북의 실상을 설명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장내는 이내 숙연해졌다.이를 지켜보던 최씨의 어머니 최정숙씨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최씨는 『북한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이려고 했고 발각되면 북으로 끌려가기보다 쥐약을 가족들에게 돌리려고 했었다』고 두만강을 건널 때의 비장한 각오를 털어놓았다. 이어 『남한에는 한강다리 밑에 거지가 수두룩하다고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빌딩하고 큰 배(유람선)만 다니더라』고 말해 장내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셋째 사위 박수철씨(38)는 『북한에서는 간부와 어부,과부들이 잘 산다고 해 「3부」로 불린다』면서 『간부는 주민들의 뇌물로,어부는 통제가 적은 바다에서 고기를 낚기 때문에,과부는 몸을 팔아 그나마 잘 살 수 있다』고 설명해 북한의 실상을 엿보게 했다. 손녀 박봄양(5)은 『한국에 오니까 과자랑 사탕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다』면서 마냥 즐거워했다.기자들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자 「따사로운 품속에 안아주시니 김일성 대원수님 고맙습니다…」라고 또렷하게 불러 북한의 철저한 정신교육에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 빈 방 있습니까·교실이데아/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연극 2편

    ◎빈방 있습니까­따돌림 받던 지진아가 연극공연서 얻는 기쁨/교실이데아­폭력교사 변시체를 둘러싼 학교·학생의 갈등 경쟁적인 입시공부에 찌든 청소년들이 공감할만한 연극 「빈 방 있습니까」와 「교실이데아」가 선보인다. 극단 증언의 「빈 방…」은 지난 81년부터 해마다 겨울이면 무대에 오른 작품.올해는 27일부터 12월18일까지 서울 대학로 학전 블루소극장에서 공연한다. 지난 80년 미국 기독교잡지 「가이드 포스트」에 실렸던 칼럼 「빌리의 성탄절」을 연극화한 「빈 방…」은 희곡·연출을 맡은 최종률씨와 극중 덕구역을 맡은 박재련씨가 16년째 이 작품과 운명을 같이 하고있어 더욱 관심을 모은다. 성탄극을 준비하던 교회 고등부 연극반에서 연출교사는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진아 덕구에게 여관주인역을 맡긴다.모든 면에서 소외돼있던 덕구는 눈물겨운 연습으로 자신감을 얻어간다.하지만 막상 연극의 막이 올라 빈 방을 애타게 찾는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를 보자 덕구는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하고 『우리집에 빈 방 있어요.마구간에 가지 마세요』라고 울음을 터뜨리며 절규한다.연극은 망쳤지만 덕구는 그날밤 하느님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며 기쁨에 넘친다. 763­8233. 12월5∼29일 대학로 북촌창우소극장에서 공연하는 극단 한강의 「교실이데아」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제목을 따와 교육풍토를 비판한다. 「가장 억압돼있는 집단중 하나가 학교며 이 속에서 20세기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다」는 극단측의 전제하에서 이 연극은 학생의 시점으로 펼쳐진다.한 고등학교 창고에서 교사의 변시체가 발견되자 학교측은 학생들을 범인으로 몰지만 숨진 교사의 폭력행위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학생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762­6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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