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강(시베리아 대탐방:18)
◎3,530㎞ 굽이마다 러시아제국 정취가…/유람선·주변 성벽 어울려 한폭의 그림/8∼9월 2주간 뱃놀이 코스는 환상적/섬유도시 이바노바시는 “남소여다” 문제점 노출
모스크바를 출발한지 4시간25분만에 야로슬라블역에 도착했다.모스크바에서 2백90㎞ 떨어진 도시다.블라디보스토크 도착 때까지 오른쪽 철로변에 작은 말뚝에다가 매 ㎞마다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표시가 돼있다.
주민 63만명의 비교적 큰 도시인 야로슬라블은 1010년 당시 키예프에 있던 러시아왕국의 왕 야로슬라블 무드리히(현명한 야로슬라블)가 건설했다.그뒤 러시아가 여러 왕국으로 갈라지면서 1280년 야로슬라블왕국이 세워졌다가 이후 1463년에 다시 모스크바왕국에 합쳐져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 도시가 러시아인들에게 유명한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보다도 이곳에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페테르부르그,모스크바에도 당시 극장이 있었지만 야로슬라블극장은 유독 클래식만 무대에 올린 극장이었기 때문에 이를 제일 오래된 것으로 꼽는다.
○옛러시아의 왕도
혁명 뒤 볼셰비키들은 오랜 종교전통을 가진 야로슬라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영국의 맨체스터 같이 순수 섬유노동자 도시인 남동쪽 2백50㎞ 지점의 이바노바시를 집중육성했다.재정러시아 때 유명한 섬유공장이 건설됐던 야로슬라블과 이바노보는 이렇게 해서 한때 경쟁관계에 놓였으나 이바노보가 판정승을 거두었다.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섬유도시로 볼셰비키의 총애를 받은 이바노보는 섬유노동자들인 여자들의 도시가 되다보니 요즈음 많은 사회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한다.여자가 많고 남자 수가 적음에 따라 생길 수 있는 갖가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야로슬라블부터 모스크바와 1시간의 시차가 벌어진다.야로슬라블역을 출발한지 꼭 5분만에 한강 정도의 강폭을 가진 푸른 볼가강이 차창밖으로 펼쳐졌다.모스크바에서 2백93㎞ 떨어진 지점이다.강 한쪽에는 요트 수대가 매어 있고 그뒤로 휴양지가 꾸며져 있다.볼가강.볼가강의 뱃놀이를 해보지 않고는 러시아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북부 트베르스카야주와 노보고르드스카야주 경계 지점에서 발원해 트베르,야로슬라블,카스트로마,니주니노브고로트,카잔,사마라,사라토프,볼고그라드 등 혁명전 러시아제국의 심장부를 두루거쳐 카스피해의 아스트라한으로 흘러들어가는 길이 3천5백30㎞의 장강이다.
8월 말에서 9월 초사이 모스크바에서 증기유람선을 타고 아스트라한까지 2주간의 볼가강 뱃놀이를 떠나는 것을 러시아인들은 최고의 여행으로 꼽는다.도중에 각기 다양한 크렘린(성벽),교회를 갖고 있는 도시들을 구경하며 내려가 마지막 아스트라한에서 9월이 최고 적기인 아스트라한 수박을 맛본 뒤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이다.아스트라한 수박 5덩이만 먹으면 신장병은 깨끗이 낫는다는 속설도 있다.
야로슬라블의 볼가강 다리가 건설된 해는 1903년도인데 이 지역의 철도건설연도는 1873년이다.30년동안 열차 승객들은 볼가강까지 와서는 페리로 강을 건넌 다음 기다리고 있는 다른 열차를 타고 여행을 계속해야 했다.
○8∼9월이 여행 적기
볼가강을 건너자 사스나,옐 등 드디어 침엽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타이가의 전조인 것이다.비슷하게 생겼지만 사스나는 모래땅에서 자라고 옐은 진흙땅에서 자란다.볼가강을 넘으면서 열차는 진짜 러시아의 품으로 들어간다.모스크바는 여러 잡다한 문화,사람이 뒤섞인 메트로폴리탄일 뿐 러시아가 아니다.모스크바에서 멀어질 수록 진짜 러시아인 것이다.볼가강을 넘어 계속 북으로 올라가면 철로는 다닐로프역에서 양쪽으로 갈라진다.북으로 곧장 가 볼로그다를 거쳐 아르항겔스크로 가는 선과 동으로 돌아 시베리아로 진행하는 선등 2개 노선이 갈라지는 것이다.다닐로프시는 16세기에 건설된 버터,치즈의 주산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베리아행 열차의 전동차를 교환하는 일이다.
시베리아행 열차는 매 3백∼4백㎞마다 전동차를 바꾸고 전동차 운전사를 교대해주는데 다닐로프는 모스크바에서 3백50㎞ 떨어져 있어 그 첫번째 순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20분을 정차하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달고온 국방색 전동차는 날씬한 붉은색의 체코제 전동차로 바뀌었다.객차는 몸체와 내부의 시설들이 모두 동독제,화물전동차는그루지아의 트빌리시에서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탄 객차의 복도 한쪽 끝에는 「티탄」이라고 부르는 물 끓이는 대형티포티가 마련돼 있는데 컵을 들고가서 꼭지를 틀면 항상 뜨거운 물이 나온다.한켠에 온도표시가 돼있는데 보니까 90도∼1백도 사이를 가리키고 있다.우랄에서 생산되는 티탄으로 만든 용기인데 그 이름이 그냥 용기의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식성이 까다로운 승객이라면 컵라면을 준비해가서 언제든지 뜨거운 물을 부어먹을 수 있다.
○전동차 새로 교체
오랜 기차여행중 맛볼 수 있는 작은 즐거움중 하나는 이렇게 장시간 기차가 정차할 때 플랫폼으로 내려가 걸으며 맑은 공기를 듬뿍 마시는 것이다.기차의 스팀 내뿜는 소리가 「슉슉」 나고,식당칸의 물 쏟아내는 소리,쇠망치를 들고 기차 아래쪽을 툭툭 치며 지나가는 나이든 노동자,저녁 요깃거리를 준비하라고 외치며 지나가는 상인들…하나 같이 여행의 맛을 더해주는 소중한 장면들이다.
다닐로프를 지나며 기차는 북진을 끝내고 동으로 방향을 틀어 드디어 본격적인 시베리아행을 시작한다.저녁을 들기 위해 식당칸을 찾았다.옛날 소련 시절에는 음식값도 싸고 사람도 많았다는데 너무 비싼 탓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다.다만 한쪽켠에 우리 옆칸 손님들인 덴마크인,영국인,독일인 승객들이 언제 친구가 됐는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벌써 술이 거나해 있다.덴마크 사람들이 이렇게 술을 잘 마시는 줄은 처음 알았다.밤늦게 보드카를 마시는 것을 분명히 봤는데도 이튿날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하면 어김없이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방에서 뛰어나오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