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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안함 함미 인양]“차디찬 바다서 이제서야 돌아오느냐” 가족들 통곡

    [천안함 함미 인양]“차디찬 바다서 이제서야 돌아오느냐” 가족들 통곡

    “아들아~ 내 아들아. 차디찬 물속에서 얼마나 추웠니….” 통곡의 바다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아들의 ‘마지막 신고’에 가슴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15일 오후 천안함 희생 장병들의 시신이 잇따라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오자 경기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 숙소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가족들은 참았던 울음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삼삼오오 모여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가족들은 팽팽했던 20일간의 긴장이 일시에 풀린 듯 허공을 응시하며 눈물을 훔쳤다. 장병들의 시신은 군(軍)이 제공한 헬기에 실려 속속 2함대 영내로 도착했다. ☞[사진]우리는 영웅들을 기억한다…천안함 순직·희생자 오후 6시9분 방일민·이상준·서대호 하사의 시신을 운구한 헬기가 2함대 헬기장에 내렸고, 곧 대형 태극기가 덮인 서 하사의 시신이 첫 번째로 의무대에 도착했다. 서 하사의 어머니 안민자씨는 시신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내가 우리 아들을 보면 안다. 아들을 봐야 돼.”라고 절규해 주변의 눈시울을 붉혔다. 안씨는 “우리 애가 기름 속에 있었나봐. 기름 범벅이다. 시신이 왜 새파라냐.”며 흐느꼈다. 곧이어 이상준 하사의 시신이 들어오자 아버지 이용우씨와 어머니 김미영씨도 “상준아!”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 뒤 얼굴을 감싸고 쓰러져 통곡했다. 오후 7시10분 이상민(88년생)·박동혁 병장, 임재엽 하사 등 3명이 헬기에 실려 2함대로 들어오고 25분 뒤 강현구 병장, 박정훈 상병, 신선준 중사 등 3명을 실은 헬기까지 도착하자 2함대 영내는 거대한 울음바다로 변했다. 오후 11시50분까지 발견된 박석원 중사, 서승원·차균석 하사 등 27명의 시신도 뒤따라 도착했다. 의무대까지 시신을 운구하는 18명의 장병들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동료들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나머지 가족들은 애끓는 심정을 토로했다. 박경수 중사의 사촌형 경식씨는 “함미가 물 위로 올라왔을 때 크게 부서진 것을 보고 희망을 잃었다.”면서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오늘 하루가 지금까지 보낸 시간보다 훨씬 더 힘들다.”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일부 가족들 사이에는 대화가 끊겨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시신으로 돌아온 문규석 중사의 사촌형 강석씨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흐르고 있다.”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가족들이 더 이상 울지도 못할 정도로 탈진했다.”고 애통한 마음을 전했다. 심영빈 하사의 동생 영수씨는 “어머니를 비롯해 누구도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심정을 밝힐 만한 여지조차 없다.”고 슬퍼했다. 2함대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야간 응급진료 서비스가 도입됐다. 경기도립의료원 관계자는 “의료진이 15일부터 야간진료를 시작했다.”면서 “구급차도 5대 보강한 상태”라고 말했다. 정현용 윤샘이나기자 junghy77@seoul.co.kr
  • ‘추노’에 ‘제2의 문소리’ 있다

    ‘추노’에 ‘제2의 문소리’ 있다

    ‘추노’ 배우 하시은이 ‘제 2의 문소리’라는 호평을 듣고 있다.11일 방송된 KBS2 수목드라마 ‘추노’에서 극중 황철웅(이종혁 분)의 처로 등장한 이선영(하시은 분)이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여인으로 등장, 남편을 지키려는 애절한 연인을 선보여 화제가 된 것.몸에 상처를 입고 업혀 들어온 황철웅의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 하던 이선영은 몸이 불편한 뇌성마비 여인임에도 아버지 이경식(좌의정 김응수 분)이 “제주도에서의 일은 어떻게 되었냐?”며 남편을 다그치자 절규하며 이를 보호 했다.하시은의 눈물연기가 “제 2의 문소리 같다.”는 평이 쇄도 할 정도로 시청자 게시판은 연일 뜨겁게 글이 올라오고 있다.한 게시글에는 “저는 진짜 장애우를, 드라마 최초로 캐스팅한 줄 알았습니다.”며 “몸부림치는 그 장면이 너무 실감 나 전율이 느껴졌고 코끝이 찡했다.”고 감동을 토로 했다.또 다른 리뷰 글에는 “추노에 문소리가 있다.”며 “스토리도 탄탄했지만, 배우들 연기 보는 맛도 쏠쏠하며 지체장애역 하시은, 진짜 소름 돋는다.”고 작성했다.한편 11일 방송된 ‘추노’에서 송태하(오지호 분)는 김혜원(이다해 분)에게 청혼을 해 동시간대 드라마 중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사진 = KBS2 ‘추노’, 하시은 미니홈피 캡처서울신문NTN 이규하 기자 judi@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北 댐 방류] 유족들 “제발 시신 만이라도…”

    [北 댐 방류] 유족들 “제발 시신 만이라도…”

    북측의 댐 방류로 경기 연천군 임진강에서 실종된 6명 가운데 시신 3구가 7일 잇따라 발견됐다. 임진강 수난사고 현장지휘본부는 이날 오전 10시22분쯤 사고지점에서 5㎞ 떨어진 삼화교 하류에서 서강일(41)씨의 시신을, 15분 뒤인 10시37분쯤 삼화교에서 11.5㎞ 거리에 있는 비룡대교 하류에서 김대근(41)씨의 시신을 인양했다. 오전 11시54분쯤에는 장남교 하류 200m지점에서 이경주(38)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구조대원들은 이날 오전 헬기를 타고 삼화교 하류 부근을 샅샅이 뒤진 끝에 서씨의 시신을 먼저 인양했다. 서씨는 아들 우태(12)군을 아이스박스에 태워 살려낸 뒤 자신은 급류에 떠내려갔었다. 서씨의 아내 한지연씨는 고인이 안치된 연천의료원에 들어서자마자 병원 주차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어떡해 어떡해”라며 벌벌 떨면서 목놓아 울기만 했다. 비룡대교 부근에서 혼자 낚시를 하다가 실종된 고 김대근씨와 이경주씨 가족들도 실낱같은 희망을 끝내 외면한 채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가족을 보고 넋을 잃었다. 이씨의 아내 김선미씨는 남편의 사망 소식에 곧바로 탈진했다. 유가족 대표 중 가장 의연한 모습을 보였던 이씨의 사촌동생 동주(36)씨는 “형이 떠내려가면서 바위에 부딪혔는지 여기저기 멍이 들어있는 등 너무 처참한 몰골이었다. 얼마나 아팠을까….”라고 절규했다. 실종자 이두현(40)씨의 아버지는 “우리 장남은 낚시가 취미도 아니었고 친구따라 바람쐬러 간다며 나갔다가 이렇게 됐다. 생존은 이미 포기했으니 제발 시신만이라도 찾아 달라.”며 하소연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鐵, 따스함을 품다

    鐵, 따스함을 품다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서울 신문로 2가 성곡미술관에서 회고전 형식으로 12년 만에 국내에서 개인전을 여는 추상 조각가 엄태정(71) 서울대 명예교수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운을 뗐다. 서울대 조각과에 입학하던 19세 이래로 조각을 벌써 50여년 해왔을 은발의 조각가 발언은 의외였고, 겸손했다. 조각가들은 대체적으로 키가 작고 손과 발이 탄탄해 ‘돌쇠’의 이미지가 많은데, 그는 고고한 학 같았다. 평생을 함께해온 조각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조각은 자연과 같이 존재하는 일로, 어떤 선언적 의미도 아니며, 고통스럽고 난해한 일도 아니고, 심오한 진리를 추구하는 일도 아니다.”고 말한다. 육중한 철과 구리, 알루미늄 덩어리로 구성된 자신의 조각을 “인간적인 조각”이라고 부른다. 또 “쇠야말로 경외로운 나의 집 같다.”고도 했다. 그의 작품은 재료의 특성상 무게가 적게 나가도 2톤 안팎으로 어마어마하다. 그런데도 덩치와 재료에 상관없이 ‘인간적인 조각’이라고 느끼게 되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1960년대 용접으로 이어붙인 철작업에서는 날카로운 고통과 아픔이, 1970년대 동(구리)작업에서는 앙포르멜(Informel) 경향이 나타나며 격정적인 감정들이 드러난다. 한국 추상조각의 1세대인 엄 작가가 추상조각의 길에 들어선 것은 학부시절 김종영·장우성 2인전에서 본 추상작품의 영향이 컸다. 결정적으로는 루마니아 출신의 추상조각가 브랑쿠지였다. 1957년 신문에서 ‘현대조각의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접한 뒤로 미8군 도서관이나 명동 뒷골목에서 팔던 일본의 ‘미술수첩’과 같은 잡지를 뒤적이며 브랑쿠지 추상의 세계를 수집해 나갔다. 그는 브랑쿠지에 관해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년 전에는 ‘브랑쿠지 평론집’을 내놓기도 했다. 이번 성곡미술관 전시에도 브랑쿠지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작품이 나왔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추상작업에 몰두해온 그는 1967년 철용접 기법으로 제작한 ‘절규’가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사실주의 화풍과 조각을 소중히 하던 당시 국전에서 추상조각의 국무총리상 수상은 의외였다. 국전은 그 뒤로 구상과 추상을 분리해 수상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기준을 만든 격이 됐다. 그는 “모더니즘, 앙포로멜, 80년대 민중미술 등이 대두할 때마다 고민이 많았다. 혼란스런 시절이고, 중심을 못잡고 방황했다.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까 하고”라면서 “80년대 초반까지 그 혼란이 지속됐지만, 나는 성향상 조용히 작업하는 스타일이라 예술이 도구로 사용되는 흐름에는 끝내 가담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1981년 영국에서 작업을 하던 중 서울대 교수에 임용돼 귀국했다. 그가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만약 임용에 응하지 않고, 영국에서 작업을 계속했더라면, 중간에 교수를 그만두었더라면…. 그는 추상조각의 본질에 대해 “시간과 공간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관계를 표현하고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조각에서 이것저것 다 들어내고 보니 더욱 미니멀하고 기하학적인 작품이 됐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더욱 자유스러움을 느꼈으며 조각을 놓은 공간과의 관계에서 거듭 “겸손하고 싶다.”고 말했다. 늘 따라다니는 좌대가 없이 그의 조각작품이 바닥에 놓여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군더더기를 덜어내며 깊이 있는 사유를 기하학적으로 드러내지만, 사유의 기반은 논픽션 소설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읽은 책은 파키스탄 자치구에 학교를 세우는 일을 하는 미국인의 이야기를 그린 ‘세잔의 차’,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두 아이들의 우정의 깊이를 보여주는 ‘연을 쫓는 아이’, 아프가니스탄의 두 여인의 굴곡진 삶을 담은 ‘천개의 찬란한 태양’ 등등. 2005년 독일의 게오르크 콜베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기는 했지만, 국내 개인전은 1997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 이후 12년 만이다. 2004년 서울대 조소과 교수에서 은퇴하고 경기 화성 작업장에서 내성적인 성격만큼이나 조용하게 홀로 조각 작업을 즐겨온 그의 신작을 중심으로 예전 대표작까지 보여 준다. 1967년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절규’ 등 2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빌려와 전시한다. 독일 총리실에서 소장한 ‘유니피케이션(통합)’이라는 구리 소재의 작품도 출품했다. 악덕 상인이 가져가 20년 넘게 돌려받지 못했던 앙포르멜 계열의 작품 2점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 1990년대부터 먹으로 해오던 드로잉은 물론 물감까지 사용한 평면 회화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조각 26점과 드로잉 26점 등을 미술관 전관에서 볼 수 있다. 6월28일까지. 입장료는 3000~4000원. (02)737-7650.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도쿄 소나타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도쿄 소나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각본가 맥스 매닉스는 한때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편의 각본을 완성했고, 네덜란드와 일본의 제작사는 도쿄의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영화화할 사람으로 구로사와 기요시를 뽑았다. 이상한 선택이었다. 대부분 직접 쓴 각본을 바탕으로 삼아 장르영화, 그 중에서도 공포영화에 매진해온 감독에게 가족 드라마라니. 그러나 완성된 작품은 그들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싶었던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도쿄 소나타’는 딱 맞는 기회였던 것이다. 아빠는 직장을 관뒀다. 나이 든 관리자인 아빠는 효율성을 따지는 직장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직장을 다니는 척한다. 아빠는 아침마다 서류가방을 들고 나가 실직자 지원센터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다 무료급식소에서 식사를 때운다. 형은 미군에 입대하겠다고 선포한다. 힘든 반면 돈벌이라곤 안 되는 아르바이트에 지친 형은 불투명한 진로를 두고 몹시 고민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무너져 내리는 가족을 부여안으려 애쓰지만, 아빠와 형은 엄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모른다. 나는 가족 몰래 피아노 교습을 받고 있다. 피아노 선생님은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데, 무서운 아버지가 피아니스트의 길을 허락할 것 같지 않다. ‘큐어’, ‘회로’, ‘절규’ 등의 공포영화로만 구로사와 기요시를 아는 사람은 그의 2003년 작품 ‘밝은 미래’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해체된 가족과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인 ‘밝은 미래’를 만들던 당시, 구로사와는 기성세대를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젊은 세대가 그들의 몫인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으나, 혼란스러운 영화처럼 그의 목소리도 어딘가 명확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밝은 미래’의 메이킹필름을 겸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애매한 미래’였고, 칸영화제에서 ‘밝은 미래’를 본 관객은 의례적인 박수조차 보내지 않았다. 5년 뒤 ‘도쿄 소나타’를 들고 칸영화제를 다시 찾은 구로사와는 환호와 함께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무엇이 바뀐 걸까? 구로사와를 포함한 세계의 3, 4세대 영화작가들은 시비를 걸고 이죽거리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곤 했다. 긴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그러한 태도만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끌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도쿄 소나타’가 ‘밝은 미래’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희망의 빛을 드러내게 된 배경은 그렇다. 구로사와의 마음은 마지막 장면에서 연주되는 ‘피아노음악’에 녹아들어 있다. ‘피아노음악’은 인간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완벽하고, 신의 목소리에 가까운 것이다. 그 소리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며, 그 소리 안에서 소통과 조화와 구원의 싹이 숨쉰다. 실로 감동적인 영화다. 19일 개봉. 영화평론가
  • 박근형 연출 세태풍자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

    박근형 연출 세태풍자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

    제목은 ‘너무 놀라지 마라’인데 객석에선 계속 폭소가 터져 나온다. 철저하게 파괴된 가족 관계, 더 이상 바닥일 수 없는 비루한 삶이 공연 내내 눈앞에 펼쳐지는 데도 이상하게 슬픔보다 웃음이 앞섰다. 객관적인 현실은 혹독하고, 그 상황에 내던져진 인물들은 진지하지만 제3자가 보기엔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인생.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극도의 과장법으로 현실을 비틀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불온한 세태를 날카롭게 포착해 냈다는 사실에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진다. 남루한 일상에서 삶의 진정성을 눈부시게 건져 올린 ‘청춘예찬’, ‘경숙이, 경숙 아버지’의 계보를 잇는 ‘연출가 박근형 표’다운 연극이다. 극단 골목길의 신작 ‘너무 놀라지 마라’의 줄거리를 글로 풀어 쓰면 영락없는 엽기 가족 소설이다. 도박 빚 때문에 아내가 가출한 뒤 혼자 된 아버지, 영화판을 쫓아 다니느라 집안을 돌보지 않는 영화감독 장남, 경제력없는 남편을 대신해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며느리, 은둔형 외톨이로 집에서만 지내는 둘째. 겉으론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이 가족의 일상은 그러나 아버지가 어느날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살하면서 곪을 대로 곪은 환부를 드러낸다. 술에 만취해 귀가해선 시아버지에게 “제가 몸팔러 가지 진짜 노래방 도우미냐.”며 술주정하던 며느리는 남편이 올 때까지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시신을 그대로 방치한 채 노래방으로 출근한다. 만성변비에 시달리는 시동생은 “왜 하필 화장실에서 목을 맸냐.”고 투덜대며 시신옆에서 변기통과 씨름한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장남의 반응도 가관이다. “불효자가 왔습니다.”고 울먹이던 장남은 이내 ‘감독이 없으면 현장 컨트롤이 안 된다.’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장례를 미룬다. 이 와중에 며느리는 노래방에서 만난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인다. 썩은 내가 진동해도 시신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환풍기 하나 고치지 않는 가족의 모습은 인륜과 천륜은 물론이고 모든 부정과 부패에 무뎌진 우리 사회를 거울처럼 비춘다. “왜 당신만 눈을 감고 사는 거야? 저기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여기 지지리도 못난 당신 동생, 생활에 지쳐 폐인이 된 당신 마누라, 이런 건 찍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야, 당신?” SF영화의 환상을 동경하는 남편을 향한 아내의 절규는 무감각해진 사회를 향한 박근형 연출의 매서운 질책에 다름아니다. 엽기적인 설정이 주는 충격은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 연출 기법으로 완화됐다. 죽은 아버지가 화장실 문을 열 때마다 수시로 말을 하고, 장남이 동생에게 얘기하는 SF영화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갑자기 등장하는 장면처럼 황당한 웃음을 유발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며느리역을 맡은 장영남의 열연은 중심추 노릇을 톡톡히 했다. 김주완과 김영필, 김동현 등 기본기 튼실한 골목길 단원들의 호흡도 좋다. 2월1일까지 서울 산울림소극장. (02)6012-2845.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박근형 연출 세태풍자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

    박근형 연출 세태풍자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

    제목은 ‘너무 놀라지 마라’인데 객석에선 계속 폭소가 터져 나온다. 철저하게 파괴된 가족 관계, 더 이상 바닥일 수 없는 비루한 삶이 공연 내내 눈앞에 펼쳐지는 데도 이상하게 슬픔보다 웃음이 앞섰다. 객관적인 현실은 혹독하고, 그 상황에 내던져진 인물들은 진지하지만 제3자가 보기엔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인생.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극도의 과장법으로 현실을 비틀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불온한 세태를 날카롭게 포착해 냈다는 사실에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진다. 남루한 일상에서 삶의 진정성을 눈부시게 건져 올린 ‘청춘예찬’, ‘경숙이, 경숙 아버지’의 계보를 잇는 ‘연출가 박근형 표’다운 연극이다. 극단 골목길의 신작 ‘너무 놀라지 마라’의 줄거리를 글로 풀어 쓰면 영락없는 엽기 가족 소설이다. 도박 빚 때문에 아내가 가출한 뒤 혼자 된 아버지, 영화판을 쫓아 다니느라 집안을 돌보지 않는 영화감독 장남, 경제력없는 남편을 대신해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며느리, 은둔형 외톨이로 집에서만 지내는 둘째. 겉으론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이 가족의 일상은 그러나 아버지가 어느날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살하면서 곪을 대로 곪은 환부를 드러낸다. 술에 만취해 귀가해선 시아버지에게 “제가 몸팔러 가지 진짜 노래방 도우미냐.”며 술주정하던 며느리는 남편이 올 때까지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시신을 그대로 방치한 채 노래방으로 출근한다. 만성변비에 시달리는 시동생은 “왜 하필 화장실에서 목을 맸냐.”고 투덜대며 시신옆에서 변기통과 씨름한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장남의 반응도 가관이다. “불효자가 왔습니다.”고 울먹이던 장남은 이내 ‘감독이 없으면 현장 컨트롤이 안 된다.’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장례를 미룬다. 이 와중에 며느리는 노래방에서 만난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인다. 썩은 내가 진동해도 시신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환풍기 하나 고치지 않는 가족의 모습은 인륜과 천륜은 물론이고 모든 부정과 부패에 무뎌진 우리 사회를 거울처럼 비춘다. “왜 당신만 눈을 감고 사는 거야? 저기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여기 지지리도 못난 당신 동생, 생활에 지쳐 폐인이 된 당신 마누라, 이런 건 찍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야, 당신?” SF영화의 환상을 동경하는 남편을 향한 아내의 절규는 무감각해진 사회를 향한 박근형 연출의 매서운 질책에 다름아니다. 엽기적인 설정이 주는 충격은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 연출 기법으로 완화됐다. 죽은 아버지가 화장실 문을 열 때마다 수시로 말을 하고, 장남이 동생에게 얘기하는 SF영화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갑자기 등장하는 장면처럼 황당한 웃음을 유발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며느리역을 맡은 장영남의 열연은 중심추 노릇을 톡톡히 했다. 김주완과 김영필, 김동현 등 기본기 튼실한 골목길 단원들의 호흡도 좋다. 2월1일까지 서울 산울림소극장. (02)6012-2845.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1960년대말 재일동포 애환… 객석도 뭉클

    1960년대말 재일동포 애환… 객석도 뭉클

    할 일 없는 사내들은 철판에 곱창을 구워 먹는다. 아낙들은 쇳내가 나는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한다. 낡은 함석 지붕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 굉음이 질곡처럼 드리우는 곳. 한국말과 일본말이 아무렇게나 차려놓은 밥상처럼 섞여드는 곳. 이곳은 1960년대 말 일본 간사이 지방에 엎드려 살던 재일교포들의 살림처, 용길이네 곱창집이다.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25일까지·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의 풍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평양전쟁에서 왼팔을 잃고 일본에 자리를 잡은 용길. 전처와 낳은 딸 시즈카·리카, 후처인 영순의 딸 미카, 영순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 도키오와 함께 곱창집을 운영한다. 사계절을 보내며 세 딸은 제 짝을 찾아 일본, 한국, 북한으로 각각 떠난다. 날마다 학교에서 상처투성이가 돼 돌아오는 아들은 여느날처럼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그림처럼 떨어진다. 한편 일본 당국은 용길이가 제값 주고 산 옹색한 땅을 ‘국유지 점거’라며 빼앗으려 한다. 한·일 배우들이 함께 극을 이끌어가고 자막도 한국어와 일본어가 번갈아 나오는 ‘야키니쿠 드래곤’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못된 채 이국땅에서 살아야 했던 재일동포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린다. 비관적 현실 속에서도 의지로 낙관하는 인물들을 보는 마음은 뭉클하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패악도 부리고 오열도 한다. 객석에서 참았던 울음이 터지는 지점은 침묵을 지키던 아버지의 속내가 비로소 드러날 때. 땅도 자식도 팔도 모두 잃은 용길은 절규한다.“일하고 일하고 일만 하다가….” 한번 터진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용길역의 신철진, 커튼콜 때도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미처 지우지 못한 미순역의 고수희는 극에 또렷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처음 왔던 것처럼 빈 수레를 끌고 떠나는 가족 위로 축복처럼 벚꽃이 내린다. 이 연극은 영화 ‘피와 뼈’의 작가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 극작가 정의신(51)과 한국의 연출가 양정웅(40)이 한·일합작으로 만든 작품. 실제로 오사카 인근 국유지에서 고물상집 아들로 살았던 자신의 어린시절 경험을 극에 녹여낸 정의신의 체취가 뚜렷하다. 반면 상대적으로 스타일리스트적 면모가 강한 양정웅 특유의 연출색이 그리 드러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02)580-1300.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中 쓰촨성 대지진] “땅이 딸 삼켰다”…통곡 연이어

    [中 쓰촨성 대지진] “땅이 딸 삼켰다”…통곡 연이어

    |양·두장옌·베이촨(쓰촨성) 이지운특파원| 통곡 소리와 흐느낌, 이름 부르는 소리, 날카로운 절규가 뒤얽혀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도시와 마을들을 에워싸고 공명처럼 울리고 있었다. 진앙지 원촨(汶川)과 함께 쓰촨(四川) 강진의 최대 피해 지역인 양(綿陽)과 두장옌(都江堰), 베이촨(北川)은 울음바다였다. 아들을 찾는 아버지, 남편을 찾는 아내,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붕괴 현장에서 비를 맞으며 날밤을 지새운 아들과 딸들…. 강진 발생 사흘째인 14일 베이촨의 베이촨중학교. 대지진에 짓눌려버린 꿈나무들의 매몰 현장에 다가서니 안타까움에 눈시울이 붉어졌다.5층 학교 건물 가운데 3개 층은 땅 아래로 함몰돼 있었다. 지상에 남은 나머지 두 개 층도 무너져 내린 채였다. 그 틈 사이로 강직 현상이 한참 진행된 듯 보이는 시신들이 들여다보였다. 교사인 듯한 장년의 얼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었을 10대 중반인 듯한 소녀의 앳된 모습, 핏기 사라진 팔과 다리…. “내 아이가 지하 2층에 깔려 있다. 분명히 살아있다. 어떻게 좀 해줘요.” 30대 초반 주부 양모씨는 충혈된 눈으로 통곡하며 애원했지만 구조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기중기와 포클레인 여러 대가 현장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수백명의 구조대원들은 한장 한장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교정 주변에 널부러진 시체는 파란 비닐백에 담겨지고 있었다. 깨진 머리, 짓이겨진 얼굴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었을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군용 트럭에는 한 차 가득 이미 파란 비닐백들이 차 있었다. 주변의 약간 높은 언덕에 올라가 내려다 보니 두개의 거대한 산에서 밀려내려 온 흙더미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저기서 살아나올 수 있을까.” 마을이 도로까지 밀려나오고 아스팔트는 주름접힌 듯 갈라지고 솟아오르고…. 낙차가 5m 이상이나 난 곳도 있었다. 베이촨현에서 들어오는 길에는 수천대의 군용차량들이 지나쳤고 수만명의 군인들이 흩어져 끊어진 길을 잇고 무너져내린 돌과 흙을 치우는 복구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 많은 병력과 물자도 현장에 도착하니 바다에 뿌려진 모래와 같았다. 두장옌시 쥐위안전(聚源鎭)중학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한 학부모는 “이틀 전 지진 발생 직후 학교로 달려와 잔해들을 뒤졌지만 딸아이를 찾을 수 없었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교사 천취안췬(陳權群)은 “수십개의 교실들이 통째로 무너져내렸다. 구조된 학생은 100여명뿐이다.800여명의 학생들이 잔해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며 발을 굴렀다. 양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무너진 집터와 빌딩 사이를 경찰과 군인들의 제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때로 시멘트 구조물들을 잘라내는 기계음들과 포클레인이 움직이는 소음들도 울음 속에 묻혀서 들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도시는 울음과 비탄 속에 있었다. 양은 시 전체가 거대한 텐트촌과 주차장으로 변했다. 비가 그치고 날이 좋아지면서 전염병 우려로 구호당국은 걱정이 태산같다고 한 현장 관계자는 우려했다. 물 배급을 위해 늘어선 사람들,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 살아남은 사람들의 또 다른 전쟁터였다. jj@seoul.co.kr
  • “너무도 슬픈 내 조국 버마…”

    “너무도 슬픈 내 조국 버마…”

    “지옥이다/군부독재정권은 사탕을 개에게 던졌다/개가 빨아먹어 녹아 없어지는 사탕처럼, 군인이 빨아먹어 버마가 녹아 없어지고 있다/여기가 지옥이다/단결은 어디 있고, 평화는 어디 있나/두려워 숨어 있나/서로 껴안고 손을 맞잡아야 한다/그래야 싸울 수 있다(‘따야 민 카익’의 시 ‘어디에 있나?’ 중에서).” 그의 시어는 거칠다. 에둘러 가지 않는 직설이다. 꾸밈도 은유도 없는 날것이다. 시인 고 김남주와 젊은 시절 김지하의 언어를 닮았다. 그에게 현 군부독재 버마(군사정권이 개칭한 국호 ‘미얀마’ 대신 옛 명칭 ‘버마’를 고수하는 민주인사들의 뜻을 존중해 ‘버마’로 표기)는 김남주와 김지하가 목숨 걸고 싸웠던 과거 한국의 판박이다. ●필명‘따야 민 카익’뜻은‘군정을 무너뜨리다’ 필명 ‘따야 민 카익’, 본명 쩌모르윈(37).27일 밤 서울 구로동 한 호프집에서 만난 그는 “내 조국 버마의 현실이 너무 슬프다.”며 침통해했다. 유혈사태까지 발생한 버마 국내의 참극에 마음이 상할 만큼 상해 있었다.“군사독재국가여도, 그 때문에 내가 나라 밖으로 떠돌고 있어도, 난 버마를 자랑스러워했다. 이젠 왜 버마를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며 고통스러워했다.“스님에겐 아들이라도 손을 모으고 예를 갖추는 게 버마 사람들인데, 군인들은 스님들을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있다.”며 버마로부터의 전언을 아프게 토해냈다. 쩌모르윈은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5명의 버마 시인 중 한 명이다. 모두 민주화운동을 하다 한국으로 몸을 피한 경우다. 윈 포 마웅과 나잉윙 아웅은 버마에서 시집을 내며 정식으로 등단했고, 얀나이툰은 한국 문학계간지 ‘실천문학’에 시(‘아내를 위한 시’)를 발표했다. 쩌모르윈은 자신의 시를 버마민주주의민족동맹(NLD) 한국지부 소식지에 실어 ‘동지들’의 마음을 위무했고, 지난해 11월 ‘버마 민주화를 지원하는 한국인 모임(공동대표 유종순)’과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들 모임(대표 임동확)’이 마련한 ‘버마 혁명시인들의 시낭송회’에 초청받아 시를 낭송했다. 지난달 27일엔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자들의 무사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에 버마 작가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쩌모르윈의 시는 조국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무기’와도 같다. 필명 ‘따야 민 카익’마저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겠다(‘따야=별’,‘민 카익=왕을 무너뜨리다’)는 다짐으로 지었다. 그는 일요일마다 주한 미얀마대사관 앞 집회를 조직했고, 먹고 살기에도 벅찬 박봉의 상당 부분을 떼어 버마 내 민주화운동 지원자금으로 보내 왔다. 최근엔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를 CD로 만들어 판매 수익금을 태국의 미얀마난민촌에 보내고 있다.“시 쓰고, 노래하고, 노동해서 돈 벌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최선을 다하려는 것뿐”이라고 쩌모르윈은 설명했다. ●“우린 갈 곳이 없습니다” ‘8888항쟁’(1988년 8월8일에 정점에 이른, 버마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중 총봉기) 당시 쩌모르윈은 17살이었다. 총을 쏘며 뒤쫓는 군인들이 무서워 그는 수 년 간 국경지대로 도망다녔다.NLD 멤버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교사와 간호사 일을 잃었고, 모든 생계활동이 봉쇄됐다. 쩌모르윈은 4500달러를 빌려 브로커에게 주고 97년 8월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한국행을 택한 이유로 “군사독재를 경험하고 또 극복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대와 실제는 달랐다.2000년 난민 인정 신청을 접수한 그에게 한국 정부는 출국통보를 내렸다. 그와 동료들은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쩌모르윈은 “한국에 오래 있고 싶어서 난민 신청한 게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지 난민 인정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라면서도 “한국 정부만큼은 우릴 이해해줄 줄 알았다.”며 섭섭함을 나타냈다. 그는 태권도 도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먼저 일하던 공장에서 한국인 노동자의 폭행위협이 무서워 뛰쳐나온 이후 8개월 만에 얻은 일자리다. 쩌모르윈은 “한국은 버마만큼이나 공포스러운 곳”이라고 했다. 버마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한국에선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다. 버마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는 단속과 검거의 대상일 뿐이다. “버마가 민주화되지 못하면 숨 쉬고 살 수 없듯, 한국에 머물지 못하면 우린 갈 곳이 없습니다. 인권 앞에선 버마인도, 아프리카인도, 한국인도 없습니다. 인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쩌모르윈과 만나는 내내 그의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울어댔다. 그때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버마어로 무언가를 빠르게 설명했다. 뉴스도 인터넷도 접하지 못한 동료들에게 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버마 정황을 세세히 전하고 있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마셜군도 추도순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주관한 ‘마셜제도 해외추도순례’가 유족 17명이 참가한 가운데 8월17일부터 22일까지 마셜제도 마주로 섬에서 진행됐다. ●식량 끊기자 日軍 ‘식인’자행 1945년 식량보급이 끊기자 일본군이 한국인을 살육한 ‘인육사건’이 발생한 밀리 섬까지는 뱃길로 12시간.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려 이곳 마주로 섬까지 왔지만 일행은 밀리 섬을 향해 선상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바다를 향해 울부짖은 음성은 멀리 가지 못하고 국화꽃과 함께 찰랑이는 바닷물에 묻혀버렸다. 유족 대표로 추도순례에 참가한 정진영(66)씨는 “아버지는 ‘인육사건’이후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총살을 당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의 흙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는데….”라며 울먹였다. 윤진민(66)씨는 “그동안 오고싶어도 올 방도가 없었는데 이제 소원 하나 풀었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아버지의 영혼도 어서 모셔오고 싶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마주로 섬의 추모비는 유족들을 두 번 울렸다.1996년 정부의 예산을 받아 건립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는 훼손된 채 관리자도 없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당시 함께 조성된 추모공원인 ‘아리랑 공원’은 폐쇄되고 추모비는 현지 교민인 지용유(67)씨의 자택 계단 아래에 옮겨져 방치돼 있다. 가로 60㎝, 세로 170㎝의 크기의 추모비는 앞면에는 ‘마셜 아일랜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한국인 희생자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망망대해 향해 “아버지”절규 지씨는 “공원이 없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겼다.”면서 “그동안 국회의원과 대사들이 찾아와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일본 정부가 1980년대 마주로 섬에 조성한 ‘평화의 공원’을 방문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진영씨는 “여기까지 와서 일본의 추모비만 보고가야 하느냐.”면서 “한국정부가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족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행한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측은 “외교부 등과 협의해 추모비 재건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마주로(마셜제도) 윤설영 특파원 snow0@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강제징용 4000명 희생된 섬에 왜 가해자 日 추모비뿐인지…”

    “강제징용 4000명 희생된 섬에 왜 가해자 日 추모비뿐인지…”

    |마주로(마셜제도)윤설영 특파원| “아버지. 막내딸이 왔어요. 대답 좀 해보세요. 아버지….” 65년 전 백일을 갓 넘긴 막내딸은 어느덧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팬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다. 이원순(67)씨의 아버지는 일제 때 강제징용돼 1944년 마셜제도 콰잘린 섬에서 사망했다. 이씨는 목놓아 아버지를 불러보지만 코발트빛 바다는 출렁대기만 할 뿐 말이 없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주관한 ‘마셜제도 해외추도순례’가 유족 17명이 참가한 가운데 8월17일부터 22일까지 마셜제도 마주로 섬에서 진행됐다. ●식량 끊기자 日軍 ‘식인’자행 1945년 식량보급이 끊기자 일본군이 한국인을 살육한 ‘인육사건’이 발생한 밀리 섬까지는 뱃길로 12시간.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려 이곳 마주로 섬까지 왔지만 일행은 밀리 섬을 향해 선상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바다를 향해 울부짖은 음성은 멀리 가지 못하고 국화꽃과 함께 찰랑이는 바닷물에 묻혀버렸다. 유족 대표로 추도순례에 참가한 정진영(66)씨는 “아버지는 ‘인육사건’이후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총살을 당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의 흙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는데….”라며 울먹였다. 윤진민(66)씨는 “그동안 오고싶어도 올 방도가 없었는데 이제 소원 하나 풀었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아버지의 영혼도 어서 모셔오고 싶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마주로 섬의 추모비는 유족들을 두 번 울렸다.1996년 정부의 예산을 받아 건립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는 훼손된 채 관리자도 없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당시 함께 조성된 추모공원인 ‘아리랑 공원’은 폐쇄되고 추모비는 현지 교민인 지용유(67)씨의 자택 계단 아래에 옮겨져 방치돼 있다. 가로 60㎝, 세로 170㎝의 크기의 추모비는 앞면에는 ‘마셜 아일랜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한국인 희생자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망망대해 향해 “아버지”절규 지씨는 “공원이 없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겼다.”면서 “그동안 국회의원과 대사들이 찾아와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일본 정부가 1980년대 마주로 섬에 조성한 ‘평화의 공원’을 방문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진영씨는 “여기까지 와서 일본의 추모비만 보고가야 하느냐.”면서 “한국정부가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족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행한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측은 “외교부 등과 협의해 추모비 재건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snow0@seoul.co.kr ■용어클릭 ●마셜제도와 한국인 강제징용 남태평양에 위치한 마셜제도는 태평양전쟁 막판까지 격전지였다.1944년 2월과 3월 사이 약 1만 9000명의 전몰자가 발생했다. 강제 동원된 한국인도 4000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이 밀리 섬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겨놓지 않아 현재까지 사건의 진상이나 정확한 피해규모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시인 이상의 삶 다룬 연극 ‘상이’

    흰 광목천이 무대를 사선으로 갈랐다. 앞에는 무당이 주문을 외고 뒤로는 시인 이상이 술상을 앞에 두고 왁자하게 웃고 있다.2007년의 무당이 1936년 이상의 원을 풀어주는 자리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이렇게 간단하게 나뉜다. 무대의 힘이다. 서울 대학로 글로브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상이(箱李)’ (7월1일까지)는 한판 흐드러진 씻김굿이다. 이상의 부인 변동림은 3개월을 살고 남편을 떠나보냈다. 변동림은 무당을 찾아가 남편의 혼을 찾아달라고 한다. 무당이 불러낸 이상의 혼은 박수무당에게 씌이고 이상이 살아 펄펄했던 시절이 무대에 펼쳐진다. 이때부터 이상은 둘이다. 이상과 이상의 혼이 씌인 상이가 늘 붙어다닌다.“쓰리고 아프고 미치겠어.” 도쿄의 차가운 방에 누워 상이가 투정을 부린다.“잠들어버려!”이상이 소리친다. “넌 더러운 쓰레기덩어리야.” 폐병임에도 사그러지지 않는 욕망의 육신을 못견뎌 이상이 내뱉는다. 상이는 이죽거린다.“이 쓰레기는 자생력이 강하거든. 넌 죽어도 이 쓰레기는 끝까지 남을걸.” 카페를 차려주고 몸을 팔아 돈을 벌게 하는 이상에 지친 금홍이 패악을 부리며 떠나자 상이는 비틀거리며 절규한다. 하지만 이상은 어두운 구석에 혼자 앉아 있을 뿐. 관객은 이상과 상이를 통해 이상의 정신과 육체, 진정한 자아와 내면에 갇힌 자아를 동시에 경험한다. 극은 시종일관 진지한 인상을 남기진 않는다. 관객이 미소지을 여지도 남겨둔다.1936년 이상이 변동림과 결혼하던 그 꽃다발 가득한 순간, 줄지어선 인물들은 사뭇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한다. 이상은 눈을 감고 김기림은 입이 삐뚤어졌다. 말끝마다 어미를 ‘이잉∼’하고 끄는 박수무당 때문에 객석에선 피식 웃음이 새나온다. 죽음의 순간, 시인은 격정에 차 외친다.“천재를 병신으로 만든 책임이 너에게 있다.”고.‘너’는 가난 때문에 천재를 거두지 못한 생부이며 억압과 불안으로 천재를 내몬 큰아버지. 사랑하고 학대했던 여인들이며 환희와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 성적 욕망이기도 하다. 이상이라는 천재의 원을 풀어주고 이상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을 보여주겠다는 ‘상이’의 연출의도. 그러나 과연 이상의 진면모를 제대로 그려낸 것일까.‘상이’는 결국 ‘박제가 돼버린 천재’의 자조만 남기고 말았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당신은 샘물처럼 맑은 삶을 사셨습니다”

    선생님은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좋아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번역하신 프로스트 시구에 샘물을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쌓였던 낙엽을 거두어내면 맑은 모습을 드러내는 호젓한 곳의 샘물입니다. 선생님은 샘물처럼 맑은 삶을 사셨습니다. 맑은 것이 가려지기 쉬운 세상에서 선생님은 맑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맑음은 드높은 것이면서도 근접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작은 것들과 지나가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사랑하고 그 아름다움을 기리셨습니다. 그러기에 맑음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맑음은 극히 가깝게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사랑에는 사사로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사람 하나하나 극진하게 사랑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살아오신 어려운 시대, 겪으신 어려움을 생각할 때, 선생님이 견지하신 맑음과 사랑은 우리에게 모든 어려움 가운데에도 삶의 작은 경이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그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 원한과 분노와 절규의 시대에, 선생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도 교활한 지혜를 멀리하고, 큰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보다 순수하고 참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돌아 깨닫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던 사람에게는 물론 그러하였지만, 글로써 선생님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왔던 어두운 나날에, 선생님의 글은 널리 희망과 위안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저는 저희 가족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뵐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뜨신 돌연한 전언을 듣습니다. 작년 2월 선생님의 외손 스테판 재키군의 연주회에서 선생님을 뵈온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건강이 쇠하신 것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면서도, 스테판군이 할아버지에게 헌정하는 연주를 선생님께서 수납하실 수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쇠약하신 몸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선생님의 삶에 큰 기쁨이 되실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스테판군이 헌정한 쇼팽의 C 샤프 단조 야상곡을 이제 새삼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깊은 슬픔을 담은 곡이었지만, 그 슬픔은 깊은 평화와 긍정을 품은 슬픔이었습니다. 저는 세상 떠나심의 큰 슬픔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삶이 큰 평화와 긍정과 완성의 삶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선생님의 세상 뜨심을 슬퍼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선생님의 가족 여러분께 드리는 애도와 위안의 말씀을 삼고자 합니다. 2007년 5월27일 김우창 삼가 적음
  • [이정연 가족클리닉-행복만들기] 실직한 남편 잔소리만 늘어요

    Q남편이 실직한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잔소리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남들은 가정적이라고 말하는데, 실제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결혼 초에는 참고 살았지만 지금은 내가 늙어서도 간섭받고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신경질이 납니다. 주5일제가 되고 보니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 오히려 그 전에 회사일로 바빠 늦게 들어올 때가 더 편한 것 같습니다. - 김희순(55세·가명) A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들으면 누구나 듣기 싫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여자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남편이 귀찮은 존재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변한다 해도 우리 집 남자가 가장 늦게 변할 거라고 말하는 부인들도 많습니다. 중년기는 크고 작은 고개가 많은 시기입니다. 아이들 뒷바라지가 끝나는가 싶더니, 남편의 실직이나 은퇴를 겪게 되기도 합니다. 예상한 일이어도 막상 닥치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사나 하는 문제로 머리가 무거워지게 되지요. 실직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고 가족간의 역동성에도 파장을 주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집에 있다.’는 말 자체가 할 일 없는 무능한 존재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어감을 내포하는 게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 왔고, 자신은 젊은이 못지않게 의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족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은연중에라도 그런 내색을 하게 되면 남편은 더욱 자신을 방어하게 돼 집안일에 더 관여하거나, 아니면 조그만 일에도 역정을 내는 과민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잔소리는 더 많아질 수도 있고, 짜증이 더 늘기도 하며, 시력이나 청력이 약해지면 더 큰 소리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이어서, 내가 잘 들어주면 상대방의 목소리가 작아지지만, 내가 들어주지 않으면 상대방은 점점 더 거칠고 금속성의 소프라노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인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남편의 행동은 예전 그대로인데, 부인은 남편이 집에 있는 것에 대해 적응하지 못해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한 것도 잔소리로 들린 건 아닐까요. 각자 자기 일이 있을 때에는 밖에 빗소리도 잘 들리지 않더니, 서로 할 일 없이 마주 앉아 있다 보면 즐거운 음악도 귀에 거슬릴 수 있거든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쫓아다니며 잔소리 하는 것은 같이 있고 싶은 욕구의 다른 표현입니다. 한 소리 또 하는 것은 조금 더 자기에게 귀 기울여 달라는 절규입니다. 별일 아닌 것도 트집 잡고 호통치는 것은 겉으로만 강한 약자의 모습입니다. 만일 그런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너무 매정한 일이 아닐까요. 남편의 잔소리가 줄어든다면 그건 더 위험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몰입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한 경우, 흔히 상대방에게 비난이나 책망을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남에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에 대해 불만스러울 때 남에게 퍼붓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남편의 잔소리는 실직 후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잡을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중년기의 실직은 도전이요 기회입니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남편의 관심과 에너지가 세상이 가는 방향으로 잘 쓰일 수 있도록 부부가 함께 지혜를 모으세요. 배우자에게 베푸는 가장 깊은 배려는 매끄러운 칭찬이나 대단한 선물이 아니라, 배우자를 곁에 허락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으로 허락하고, 행동으로도 허락해야 합니다. 어떤 순간이라도, 배우자는 우리가 아끼는 어떤 골동품보다 더 소중히 대해야 하는 생명체입니다. 가정의 행복지수는 내가 마음을 넓히는 만큼 올라갈 수 있습니다. <목포대 교수·가족상담문화센터장> ● 이번 주부터 ‘가족클리닉’ 필자가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 소장에서 이정연(생활과학부·아동학 전공) 목포대 교수로 바뀝니다. 이 교수는 목포대 가족상담문화센터장과 한국가족관계학회 부회장, 대한가정학회 가족정책개발 전문위원 등을 맡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앞으로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장과 2주에 한 번씩 번갈아 글을 쓰게 됩니다. 가족클리닉의 상담 의뢰는 인터넷 서울신문(www.seoul.co.kr)에서 받습니다.
  • ‘거장’ 조정래·김원일 다시 묻는다

    한 남자가 있다. 일제 때 군대에 끌려가 일본 관동군에서 복무하다 몽골전투에 참가한 이 남자는 동료 ‘조센징’들과 함께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소련군으로 ‘전향’한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해 독일군과 전투를 하다 또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수용소에서의 간단없는 삶 끝에 독일군 ‘동방대대’에 편입된 이들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의 ‘대서양 방어선’ 건설에 투입됐다가 미군의 포로가 된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이 된 이들의 ‘기막힌’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인간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전락할 수 있을까. 다른 한 남자가 있다. 할아버지는 ‘독립투사-관동군 731부대 보초-빨치산’이라는 특이한 경력이 있고, 아버지는 ‘산업화의 주역’으로 현장에서 오른쪽 팔목 밑을 프레스에 잃은 뒤 가정폭력을 일삼고, 행패나 부리며 살더니 결국 ‘개백정’으로 전락했다. 공교롭게도 부자가 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 조용하게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지내다 죽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거구 유전자를 물려받아 신장 190㎝인 ‘그 남자’는 또 어떤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개백정 짓에 이골이 난 그는 중학생 때부터 이름난 깡패짓을 하더니 고등학교 문턱도 못가고 교도소만 들락거렸다. 가출했던 누이는 ‘YH사태’때 투신했다가 장애인이 됐다. 아버지한테 강간을 당해 억지로 결혼한 어미는 정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기막힌’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피’의 그림자가 이렇게 짙을 수 있을까. 문단의 두 거두인 소설가 조정래(64)씨와 김원일(65)씨가 ‘인간’에 천착한 문제작 ‘오 하느님’(문학동네 펴냄)과 ‘전갈’(실천문학사 펴냄)을 최근 각각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각각 장대한 ‘공간’과 ‘시간’을 다루고 있다. ‘오 하느님’이 아시아, 유럽, 미주를 아우르는 거대공간을 갖고 있다면,‘전갈’은 100년이라는 긴 시간이 무대다. 두 작품 모두 ‘의도적으로 잊혀진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붙잡힌 동양인 독일군의 모습을 담은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 ‘오 하느님’이나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일제 부역자’ ‘산업화 역군’ ‘조폭’ 등 3대를 그린 ‘전갈’은 모두 우리들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올해 조씨는 등단 37년, 김씨는 41년째를 맞았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양감 넘치는 대하소설을 주로 발표해온 조씨이기에 사실 이번 작품은 의외다. 계간지 문학동네에 겨우 두 차례 연재한 경장편이다. 하지만 소재나 주제는 이전 작품에 견줘 전혀 가볍지 않다. 결코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씨는 “‘도대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는 범인류적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장편의 제목은 ‘맙소사’라는 뜻이 강한 ‘오마이갓(Oh my God)’과 다르지 않는 ‘절망적 절규’를 담고 있는 셈이다. 조씨는 “역사가 바뀌어도 강대국은 끊임없이 약소국을 억압할 것”이라면서 “이는 결국 인류공통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며 작가는 이런 문제를 계속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도 5∼6편 정도 이같은 범인류적 주제를 다룬 작품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갈’은 김씨의 13번째 장편이다. 지난해말 갑자기 찾아온 병마(뇌경색)를 딛고 난산한 작품이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 김씨는 “처음부터 지독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작정하고 썼다.”면서 “당대에는 소수집단으로 분류될지라도 그들의 발자취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3대 가운데 아버지인 ‘강천동’은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일 뿐이지만 우리들의 아버지이자 형이고, 아들과 꼭 닮았다. 아직 온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작가는 가을에 또다시 중단편집을 한권 더 낼 작정이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구치소에 ‘그놈 목소리’

    “나도 죄를 짓고 벌 받고 있지만, 유괴범이라는 저 놈은 너무 심하네.”“소멸시효 지났다고 부모 가슴에 못박은 사람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게 놔두면 되나.” 8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식당. 수형자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숟가락을 들었다. 오전에 본 영화 ‘그 놈 목소리’ 때문이다.1991년 유괴된 지 44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된 이형호군 사건이 이 영화의 소재다. 유괴범의 등장과 함께 파탄난 가정, 유괴범의 요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부모,300명이 넘는 인원이 투입된 경찰수사 과정이 사실적으로 빠르게 전개되는 동안 강당은 침묵만 흘렀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여성수용자 20여명을 포함한 312명 수형자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사기죄를 짓고 2년 6개월이 넘게 복역중인 노모(46)씨는 객석의 ‘무거운 침묵’에 대해 “수감된 사람들은 감정을 참는데 익숙하다.하지만 다들 느끼는 바가 컸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29일로 유괴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하자 노씨는 “말도 안된다.”며 흥분했다.실제 사건에 대해 몰랐던 노씨는 대규모 수사팀이 투입된 게 신기한 듯 “극중 유괴된 아이 아버지가 유명 앵커니까 경찰이 그렇게 많이 투입된 게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실제 사건의 아버지는 유명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하자 놀라는 표정이다. 병역법 위반 혐의로 수감돼 한달 뒤 출소 예정인 최모(27)씨는 소감을 묻자 “인상적이었다.”고 짧게 말한 뒤 “저런 범인을 못잡다니 경찰이 너무 무능한 게 아니냐.”고 했다.“피해자의 모습이 과장됐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오열하고 절규하는 피해자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고 털어놨다. 영화 관람 행사를 기획한 최제영 교정관은 “피해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수형자들이 영화를 보며 생각해 보고, 더 이상 잔혹범죄가 발생하면 안된다는 메시지도 이들에게 전달됐으면 한다.”고 말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21일 TV 하이라이트]

    ●진실(YTN 오후 11시5분)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이장형. 육군 대위로 전역한 이장형은 84년 간첩협의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이근안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당한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절규한 이장형과 고문 사실을 법정에서 부인한 이근안. 이장형의 판결문에 나타난 허위를 파헤친다. ●스페이스-공감(EBS 오후 10시) 7인조 퓨전 그룹 ‘닮은 사람들’. 언제부터인가 서로의 마음과 음악 성향이 닮아있음을 느낀 7명의 국악기 연주자들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가자는 취지에서 만나 2000년에 그룹이 결성되었다.‘지루한 국악’의 편견을 넘어서, 국악의 아름다움을 널리 전하는 이들을 만나본다. ●연개소문(SBS 오후 8시45분) 연개소문은 영류제에게 이미 혼례를 올린 아내가 있다고 얘기하지만, 영류제는 고구려인이 아닌 사람과의 혼례는 인정할 수 없으며 황실의 후손인 고소연이 정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소연은 연개소문에게 힘이 되어주겠다고 당돌하게 얘기한다. 죽리는 연개소문에게 대의를 위해서 혼례를 올리라고 종용한다. ●누나(MBC 오후 7시55분) 수아의 광기는 함께 러시아로 가지 않는다는 건우의 말을 들은 뒤 절정에 이른다. 수아는 건우 어머니를 찾아가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이냐며 따진다. 성난 할아버지가 앞을 가로막자 수아는 할아버지까지 밀치며 건우 어머니 앞으로 다가가 집안을 공포 분위기로 만들어 놓는다. ●반올림#3(KBS2 오전 8시50분) 오토바이를 다시 찾아오라는 엄마의 말에 일권은 신바람이 났다. 이준 집에서 찾아온 오토바이로 엄마를 일터까지 모셔드리고 마음이 뿌듯한 일권. 그러나 수업을 받던 중 뜻밖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충격을 금치 못한 아이들은 함께 장례를 돕는다.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진품명품을 찾아온 서화첩 두 점. 그중 하나는 대표적인 근대 서예가 오세창의 화첩인데 백범 김구의 글까지 담겨있어 그 진가가 궁금하다. 다른 하나는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교지 한 점. 큼직하게 찍힌 도장이 교지의 권위를 말해주는 듯한데 과연 이 교지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지 알아본다.
  • [서울신문 신춘문예-희곡당선작] 문득, 멈춰 서서 이야기 하다- monologue Quartet/김정용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병원복 차림으로 휠체어를 타고 등장, 잠시 휠체어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네 사람: (동시에)저기……. 짧은 암전. 명일: 그녀를 처음 본 건 두정: 치악산이었습니다. 신흥: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신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신흥: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명일: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해질무렵이었는데, 지금도 기억나요. 두정: 그날 따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명일: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남들이 뭐라하건 전 그때 운명을 느꼈습니다. 두정: 이렇게 될 운명이라 그랬던 걸까요? 신흥: 앞이 깜깜하더군요 신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사람 모습만 보이는 거 있잖아요. 신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것부터 수습해야 할지, 그때만 생각하면……. 두정: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날 일은. 명일: 그날이 제 생애에서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난 날입니다. 신내: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죠? 신흥: 용기가 나질 않더군요, 어떻게 마누라 얼굴을 봐야 할지, 술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두정: 술요?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산행하는 날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내려와서 마시면 모를까. 명일: 시간 되시면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명일 주변이 밝아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명일: 이 말이, 제가 그녀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어요,‘술 한 잔 하실래요?’ 참 바보 같았죠, 머릿속에 별별 말이 다 떠돌았는데, 막상 나온 말이 그거였어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런데 그녀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한잔만요?’(미소) 그렇게 시작 했어요. 우리들. 정말 행복했어요,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정도로,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좋은 일만 계속 생기면 왠지 불안해지고 그러는 거. 육상 경기복 차림의 신내 등장. 얕은 숨으로 몸을 푼다. 명일: 하지만 그런 불안도 그녀의 미소 앞에선 힘을 잃고 말았죠.(신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우린 언제나 함께였어요, 몸이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마음만은 늘 붙어 있었죠. 신내: 그만해, 더는 못 들어주겠다. 그래서 대학 떨어지면 누구 탓하려고?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많이 놀랐어요, 원래 말씀을 거침없이 하시는 편이시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리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제가 원하는 일에 반대 한번 안 하셨던 분인데, 아빠도 제가 고3이 되는 게 스트레스가 되셨나봐요, 사실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육상하면서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들으실 생각조차 안 하세요 명일: 그런 우리를 하늘이 시샘했는지 신내: 그만해 명일: 불안함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신내: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명일: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신내: 낼 모레가 마지막 시합이에요. 오빠가 와 줄까요?(호루라기 소리) 예, 가요! 암튼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까.(급하게 달려 나간다.) 명일: 다 제 잘못이에요, 급하게 달려 나가는 연수를 잡았어야 했는데, 연수가 제 눈앞에서 붕 떠오르더니 바닥으로 나뒹굴었어요, 아주 잠깐 사이였는데……,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그렇게 몇 바퀴를 굴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군요. 명일: 수술실 앞에서 내내 기도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두정: 멀리서 누군가 절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눈을 떴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하얀 천장, 그보다 더 하얀 형광등뿐이었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명일: 잠깐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저 세수좀 하고 올게요. 죄송합니다.(나간다.) 두정: 이제 에베레스트는커녕 문턱하나 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니 죽고 싶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고, 설령 잘못 되더라도 열심히 재활하면 될 거라고 말했지만, 제 몸은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저는 걷지 못할 겁니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제게 있어 그림엽서 속에서만 존재하는 산일 뿐입니다. 신흥: (통화하며 등장)아니라니까 그러네, 왜 내 말을 못 믿어, 다 잘 될 테니까 너무 걱정마……,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끝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깟 일로 안 무너져……, 여보 나 믿지? 그래 내가 알아서 잘할게, 그리고 내 전화 말고는 다른 전화는 절대 받지마……, 알아, 알아 당분간 친정에 가 있어, 애들은……, 그래, 너무 걱정마.(끊는다.) 두정: 너무 걱정마, 모두들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대한 법이니까요. 이렇게 되고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관대함이란 게 무관심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요,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시죠? 그것도 다 여러분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는 생각입니다.(사이)저도 며칠 전까진 여러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하고 있었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절망이란 놈은 순식간에 저를 이곳에 앉혀 놓고는 두 다리를 옭아맸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신흥: “너무 걱정 마”,“걱정하지 마세요.” 도대체 이 말을 몇 사람에게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걱정 말라고 당부하는 꿈을 꿀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웃긴 건, 그 어느 누구도 저에게 이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저인데도 말이죠. 가해자 취급만 당했어요, 물론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저 잘못 했어요,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딱 까놓고 말해서, 저만 좋자고 프로젝트 진행시킨 겁니까! 다 같이 잘되자고 한 일인데, 일이 틀어지고 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로 돌변하더군요, 같이 진행한 동료들까지도 말이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두정: 다 필요 없습니다. 신흥: 다 필요 없어요. 신내: (등장)꽃이 필요할 거예요, 그쵸? 신흥: 그래서 준비한 게 있습니다. 두정: 전……,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입니다. 신흥: (약병을 꺼낸다)저만 없어지면 됩니다. 두정: 제가 없어지면 모두들 걱정하는 척하다가 금세 잊어버릴 겁니다. 다리병신 하나쯤 없어졌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신내: 아니야, 그건 아니야.(두정 나간다.) 여자가 먼저 꽃을 주는 건 좀 그렇겠죠? 신흥: (병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이게 왜 이래. 신내: 어떡하지? 신흥: 어떡하지? 신내: 오빠가 와주긴 할까요? 신흥: 깨버릴까? 신내: 용기내서 말하긴 했는데 대답을 못 들었거든요 신흥: 용기가 깨질 때 유리 파편이 섞이면 먹기 힘들 텐데.(열심히 뚜껑을 돌린다.) 신내: 다시 한 번 말해 볼까요? 이상한 애로 보이면 어쩌죠?(사이) 안 되겠어요. 신흥: 안 되겠어. 수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신내: 무슨 수를 써야지……. 명일, 나가는 신흥과 교차되며 들어온다. 신내: 아하! 다시 말하기는 그러니까, 편지가 좋겠어요. 그렇죠? 좋은 생각이죠? 마지막 시합에 오빠가 와주면 더 힘내서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쓰는 거예요. 역시 솔직한 게 좋겠죠? 그래, 그래야겠어요. 명일: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신내: 편지 명일: 편지 얘기는 아직 안 하지 않았나요? 신내: 우선 펜하고 종이가 필요하겠죠? 명일: 적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냥 듣기만 하시면 안 될까요?(신내,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신내, 나간다.) 그럼 얘기가 나왔으니 편지 얘기를 할게요.(잠시 머뭇거리다) 사귀기로 한 날부터,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연애편지를 쓴 건 아니고요, 일기 쓰듯이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나 써서 메일로 보냈어요. 하루도 빼먹지 않았어요, 단 하루도.(웃음)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어느날 술을 잔뜩 마셔서 떡이 된 적이 있었는데요,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차 싶은 거예요, 하루도 빼먹지 않겠다고 약속했었거든요, 늦었지만 변명이라도 해볼 양으로 부랴부랴 컴퓨터 앞에 앉았죠, 그리고 메일을 쓰려고 로그인을 했는데 수신 확인 창이 뜨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하고 봤더니, 글쎄 제가 전날 밤에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무슨 말을 썼는지 궁금해서 메일을 열어 봤는데(피식거린다.) 그게, 영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그런 거 있잖아요.fhufhㅈ뎌???ㄷew 이런 거 (웃는다.) 더 웃긴 건,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fhi롤fwqo어ㅈㅇ……. 명일, 말을 잊지 못하고 정신없이 웃는다. 무대 뒤에서 두정과 신흥의 절규가 들려온다. 명일: (무안해 하며)죄송합니다. 신흥, 두정 서로 반대편에서 등장 신흥, 두정: 이럴 순 없어 두정: 병원 정문도 못가서 잡혀버리다니. 신흥: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신흥, 두정: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아무리 이런 꼴이 됐어도 두정: 병원문턱 하나 신흥: 병뚜껑 하나 신흥, 두정: 내 맘대로 두정: 넘지, 신흥: 열지-못하다니, 왜 하필 이런 일이 나한테 닥친 거야, 왜 하필이면 나냐구, 내가 뭘 잘못했게! 내가 바라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명일: 다시 시작하죠. 두정: 그만하자, 그만해,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 꼴만 더 우스워지지. 두정, 신흥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신흥: (병을 내밀며) 저……, 이것 좀. 명일: 네? 두정: 뭘 봐! 휠체어 탄 사람 처음 봐! 명일: 네. 신흥: 죄송합니다. 이것 좀 열어 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병을 건넨다.) 두정: 씨발.(술병을 꺼내 마개를 따려한다.) 이건 왜 이렇게 안 열려 신흥: 잘 안 열리죠?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명일: 무리라뇨, 전 괜찮아요.(사이) 알겠습니다. 내일 오면 되는 거죠? 같은 시간에 두정: (술병을 집어던진다) 젠장, 젠장, 젠장! 신흥: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사이) 안 열리면 할 수 없죠 뭐(병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아련한 음악 다시 흐른다. 명일, 천천히 무대를 돌고. 신흥 뚜껑을 열기 위해 애쓰며 퇴장, 두정 지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퇴장, 신내 편지를 들고 등장, 음악이 끝나면 명일과 신내 각자 자리를 잡는다. 신내: 편지 다 썼어요, 들어 볼래요?(편지를 꺼내 읽는다.) 오빠 명일: 연수야, 야! 신연수 신내: 잘 지내고 계세요? 명일: 난 잘 지내고 있어,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신내: 전 무지무지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며칠 전에 오빠에게 했던 말 기억나세요? 명일: 기억난다. 너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신내: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쳐 버려서, 놀라셨죠? 명일: 아니야. 네가 미안할 건 없어, 붙잡아 주지 못한 내가 미안하지. 신내: 그래서 말인데요. 오빠가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제 얘기를 못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편지를 써요. 저, 내일모레 있을 시, 도 대항 육상 대회에 시 대표로 나가게 됐어요, 아마도 제 인생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 같아요, 아빠가 육상을 못하게 하시거든요. 마지막 경기를 오빠가 꼭 보러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힘이 불끈 불끈 날거 같아요 어쩌면 한국 신기록을 세울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아빠도 더는 반대 못하시겠죠.-제발 그렇게 됐으면-, 자라나는 한국 육상 꿈나무의 앞길을 열어 주세요, 네 오빠! 우리가 대기하는 곳이 3번 게이트 쪽이거든요, 그쪽 스탠드 앞쪽에 계시면 제가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꼭 와주셔야 해요, 오빠가 오지 않으면 저는 실망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꼴찌를 할지도 몰라요, 꼭 와야해요, 꼭 꼭 꼭. 명일: 가고 싶어, 그곳에…….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들려온다, 신내 재빨리 편지를 감춘다. 명일: 저 소리 들려? 우는 소리가 괴상하니까 분명 생긴 것도 이상한 새일 거라고, 확인해 보고 싶다고 몇 시간이나 헤매고 다녔었잖아. 결국 확인도 못해보고…….(목이 멘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호루라기를 불며 걸어서 등장. 두정: (버럭)지금 뭐하는 거야! 정신이 있어 없어!(신내 얼른 뛰어 나간다.) 그런 정신 상태로 뭘 하겠다는 거야, 응!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 정말 실망이다. 네놈만은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 같은 녀석은 에베레스트를 입에 담을 자격도 없어! 명일: 미안, 그때 널 잡았어야만 했는데. 두정: 에베레스트는 고결한 자에게만 허락된 곳이다, 약해 빠지고 결점투성이인 인간에게는 절대로 그 하얀 살결을 허락하지 않아! 명일: 그렇지 않아, 다 내 탓이야. 두정: 그깟 집안일 때문에 술에 절어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 네가 말했던 꿈이라는 게 고작 이런 거였어? (사이) 그래, 나 이해 못한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지? 얼빠진 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어떤 인간인 줄 알아? 바로 너 같이 환경 탓, 상황 탓 하는 것들이야.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뚫고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야. 별것도 아닌 일에 주저앉아 버리는 너 같은 놈은 필요없어!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무슨 염치로 훈련장에 나타난 거야, 나타나길. 다른 팀원들이 너 보면 사기 떨어지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명일: 제발 나타나줘, 한번 만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내 앞에 나타나줘. 암전. 빛 속에 홀로 있는 신흥 신흥: (반쯤 줄어든 약병을 들고 허탈하게 웃으며)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겨우겨우 열어가지고 스무알을 넘게 먹었는데……, 뭐? 고통 없이 갈 수 있다고? 나쁜 새끼들.(꺽꺽댄다.) 이딴 걸 20만원씩이나 주고 산 내가 미친놈이지.(전화 벨이 울린다, 병을 내려놓고 전화를 확인하고는 배터리를 빼버린다.) 미안해 여보. 날 용서하지 마.(사이) 한심하죠? 저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습니다. 하기야 태어날 때부터 한심한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보니까,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한심해지는 거지.(사이) 돌아가신 저희 아부지께서 술만 드시면 어린 저를 붙잡고 늘상 하시던 얘기가 생각나네요. 두정: (빛 속에서 등장)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사라진다) 신흥: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알겠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아부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넌 어른이 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동물이 바로 어른이란 동물이다.” 백번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사이) 그나저나 이제 어떡해야 하죠? 수습할 수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고, 빌어먹을 죽지도 못하고, 어떡해야 하죠? 신내: (빛 속에서 등장) 그럴 땐 초콜릿을 먹으면 돼요, 그것도 아주 진한 다크 초콜릿, 아무리 우울해도 한두 조각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한두 번 혼난 것도 아니고 뭐. 괜찮아요. 초콜릿 하나면 땡이에요.(사라진다.) 신흥: 그 생각도 안해본 건 아닙니다. 근데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예? 그건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제가 아픈건 딱 질색이라. 명일: (목소리) 연수야, 연수야 신흥: 쉿! 지금 누가 제 이름 부르지 않았나요? 설마 놈들이 여기까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제발 좀 도와주세요,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명일: (목소리)아! 꿈이었구나. 신흥: 윽!(배를 움켜쥔다.) 아 배야, 갑자기 왜 이러지? 뭐 먹은 것도 없는데. 화장실, 화장실……, 크 아퍼, 먹은 거라곤 이것뿐인데,(무언가 떠올라.) 약! 이 약! 개새끼들.(배를 부여잡고 달려 나간다.) 빛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약병. 빛이 점점 번져 공간을 환하게 만든다. 밝아지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신내. 신내: 이 시간이면 항상 이곳을 지나가는데 (두정 등장) 어! 태령 오빠! 두정: (신내의 맞은편에 앉는다.) 왜 불러낸 거야? 신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드릴 게 있어요. 두정: 뭔데 신내: (편지를 건네며) 이거 두정: (받으며) 이게 뭔데? 신내: 나중에 읽어 보세요(얼굴이 붉어진다.) 두정: (읽은 후) 각서……, 야! 지금 너 장난하냐? 신내: 아니에요, 안 빨개요 두정: 이딴 종이 쪼가리를 어떻게 믿어? 신흥 한손에 휴지를 들고 등장, 처절한 소리를 지르며 부리나케 테이블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신내: 전엔 죄송했어요, 제 말만 하고 멋대로 가버려서. 두정: 죄송하다면 다야? 신내: 예, 그치만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두정: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신내: 오빠. 두정: 이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더 이상 난 네 대장이 아니다 신내: 호, 혹시……, 여, 여자친구……, 있으세요. 두정: (단호하게) 없어, 추호도. 난 한번 결정한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꾸지 않아. 마음 같아서는 널 죽도록 패주고 싶지만 옛정이 있어 참는다. 신내: 다행이다. 제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두정: 더 할 말 없으면 나 간다. 훈련중이었거든, 네놈이 그렇게 하찮게 여겼던 그 훈련 말이다. 신내: 그러세요, 예, 가보세요, 편지 꼭 읽어 보시고요, 두정: 두 번 다시 널 만나는 일이 없길 바란다.(각서를 구겨 테이블에 던진다.) 신내: 저도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신내 꾸벅 인사하고는 떠나는 오빠(두정)의 뒷모습을 눈으로 는다. 두정 나간다. 신내는 오빠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뜬다. 신흥 허겁지겁 등장, 숨을 곳을 찾는다. 급하게 숨을 곳을 찾고는 몸을 숨긴다. 신흥: (숨을 몰아쉬며)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마주칠 건 뭐야, 그나마 나오는 길에 마주쳤기에 망정이지 들어가는 길에 마주치기라도 했어봐. 아유아유 죽겠네.(두정이 버렸던 병을 발견) 뭐야? 새거잖아.(너무나 쉽게 병을 열고는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뚜껑을 닫아 제자리에 놓는다.) 햐 시원하다.(허탈하게 웃으며) 안좋은 일만 생기는 것 만은 아니구나.(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제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아부지 말처럼 어른이 돼버려서 이렇게 된 걸까요? 가장 더럽고……, 후후후.(사이) 네? 어른이 되기 전에요? 글쎄요, 어른이 되기 전이라……. 그러고 보니 제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그땐 뭐, 다들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랬는데, 샐러리맨 따위가 될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때의 저한테 미안한 생각까지 드네요,(사이) 그럼요, 뭐였냐면요……, 막상 말하려니까 쑥스럽네요, 웃지 마세요, 가수예요, 가수 (웃음) 웃기죠? 가수를 꿈꾸던 청년 도망자 되다! (웃음 소리속에 점점 슬픔이 담긴다.) 명일: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 꿈이었어, 꿈. 연수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연수야.(컴퓨터를 켠다, 윈도 시작음악) 언제까지 너한테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언제 와서 이 편지 읽어 줄래,(창 뜨는 소리, 몹시 놀란다.) 어, 어! 신흥: 아, 아! (배를 움켜쥐고) 또야? (뛰어 나간다.) 명일: (흥분) 틀림없어요. 그녀가 읽은 거예요. 그녀가 읽은 거라고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메일을 읽어요, 안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게 아니었던 거예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짧은 사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신흥: (등장) 지독한 놈들, 왜 화장실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거야, 아, 미치겠네.(반대쪽으로 달려 나간다.) 명일: 봤죠, 네 봤어요, 근데 제가 본건 사고 나서 실려 가는 것까지였어요, 죽은 연수를 본 건 아니잖아요. 장례식요? 어……, 그건……, 아 그래그래, 필요했던 거예요 장례식이, 연수는 큰 사고를 당했어요, 죽지는 않았겠지만 몸이 성치는 않을 거예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영화나 소설 보면 죽은 걸로 하고 숨어서 지내는 거, 그래 그거야, 그거.(짧은 사이) 비약요? 그건 선생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어요, 연수가 살아있어요! 제 우울증 따위는 한방에 끝났다고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수를 데려가지 않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요 살아 있기만 하다면요, 신흥: (퀭한 얼굴로 등장) 살았다……. 두정: (목소리) 야! 야! 신흥: (소리 나는 쪽을 보며) 젠장! (도망친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낮은 목소리로) 거기 서! 뭐 나한테 속이는 거 있지? 틀림없어,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뭐야? 사실대로 말해봐. 뭐야 대체? 명일: 예? 두정: 뭐라고 했어 지금? 다시 한 번 말해봐. 명일: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지금은 연수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짧은 사이) 선생님! 왜 자꾸 그러세요? 선생님은 연수가 살아 있는 게 싫으세요? 비밀 번호를 아는 사람은 연수밖에 없어요, 그런 건 철저한 애였어요, 수신확인이 됐다는 건 연수가 열어 봤단 소리예요. 다른 가능성은 없어요. 두정: 그래 알았어, 너희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이해한다. 알았어, 알았어,(짧은 침묵) 잘 가라, 참 그리고 앞으론 문병 같은 거 오지마라, 훈련에만 전념해, 나 들어간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연수를 찾아봐야겠어요.(나간다.) 두정: (가다 멈춰서) 개자식들! 신흥: (온 몸엔 상처, 옷은 쥐어뜯겨 엉망인 채로 등장) 개새끼들! 두정: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그 자식을 끌어들여? 신흥: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패냐 두정: 씨발, 씨발 씨발,(거친 웃음) 신흥: 아, 진짜 아프다, 돈 몇 푼에 아주 사람을 죽이려고 환장을 했구먼, 도망치지 않았으면 골로 갈 뻔했네.(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씨발 새끼들, 아부지, 여보, 나 아퍼.(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두정: 그만해, 그만해!(울먹인다.) 두정과 신흥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가득 메운다. 신내 허겁지겁 들어온다. 신내: 뭐하는 거예요 대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얼른 일어나요 (두정, 신흥 울음을 그친다.) 자 초콜릿 (두정과 신흥 앞에다 놓는다.) 이거 먹으면 힘나거든요, 씹어 먹지 말고 천천히 녹여 먹어요.(사이) 자 가요, 가서 멋지게 1등하고 돌아오면 되잖아요. 그럼 분명 코치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얼른 일어나세요. 시간 다 됐어요. 우리 몸도 풀겸, 경기장까지 뛰어 가요! 오케이.(나간다.) 두정, 신흥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신흥은 두정의 자리로, 두정은 신흥의 자리로 간다. 둘은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초콜릿을 발견하고 집어든다. 신흥: 아깐 음료수 이번엔 초콜릿? 두정, 신흥: (하늘을 올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초콜릿을 본다.) 뭐야? 둘,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는다. 마법같은 음악 잠깐. 알 수 없는 미소가 둘의 얼굴에 감돈다. 두정, 신흥: 그래, 힘내자, 신흥: 약을 스무 알씩이나 먹고, 그렇게 맞았는데도 안 죽었는대. 두정: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거야, 발버둥 쳐 봤자지. 두정, 신흥: 뭔가 길이 있을 거야. 두정: 그렇지? 신흥: 그렇지. 둘, 서로 반대편으로 퇴장, 신내 다른 곳으로 들어온다. 신내: 자! 우리 파이팅하는 거예요! 코치님도 병원에서 틀림없이 우릴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몸을 풀며 두리번거린다.) 아직 안 왔어요, 조금 있으면 시작인데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죠? (관중석으로 손을 흔들며 웃는다.) 엄마, 아빠 여기, 여기.(사이) 차가 막히나?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래, 그래. 오빤 틀림없이 올 거야. 자! 힘내자 연신내. 멋지게 달려서 일등 하는거야, 알았지? (더욱 열심히 몸을 푼다.) 명일 등장. 신내: 어! 오빠! (명일에게) 여기에요, 여기.(환하게 웃으며 인사) 오빠가 왔어요, 오빠가 왔다고요. 좋았어, 아자아자! 명일: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친구들은 모를 테고,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나? 그래, 일단 아이피 추적부터 해보자, 좋았어, 아자아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소리: 여자 800미터 예선전 참가자들은 본부석 쪽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오빠 쪽을 향해) 꼭 일등 할게요! (나간다.) 두정 등장, 휠체어를 세우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 재활운동을 시작한다. 각자의 일에 열심인 두 사람. 명일: 안 되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두정: 헛 둘, 헛 둘. 한참을 하다 지친 둘. 명일: 아,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야? 두정: (숨을 몰아쉬며) 두고 봐 꼭 해내고 말 테니까. 기다려라 에베레스트, 내 네놈을 꼭 밟아주고 말 테다. 소리: 딩동댕동.601호 특실 환자분 면회객이 와 있습니다. 속히 병실로 돌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명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서 공사하나?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집중을. 두정: 면회? 누구지? (휠체어에 오른 후 퇴장.) 명일: 도저히 안되겠다. 누구 컴퓨터 잘하는 사람 없나? 아 그렇지! (휴대전화를 꺼내 건다.) 여보세요? 문정이냐? 응, 나 명일인데·…….(통화하며 나간다.) 나가는 명일과 교차하며 신내 등장. 긴장을 풀기 위해 몸을 턴다. 소리: 여자 800미터 세번째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선수들은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앞으로 나와 몸을 푼 다음 놓여 있는 병을 들고 마시고는 (두정이 버렸던 병) 출발선에 선다. 소리: 차렷, 준비. 소리2: 거기 서 개새끼야! 소리: (총소리) 탕 출발과 동시에 터지는 응원과 환호성 속에서. 슬로 모션으로 출발하는 신내.“안 서면 죽어!” 소리를 등지고 신흥 슬로로 뛰면서 등장. 신내와 신흥 같은 방향으로 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두 사람. 신흥이 점점 신내를 따라잡아 이윽고 나란히 뛰게 된다. 신흥이 신내를 앞서가려는 찰나. 신흥의 발이 꼬여 중심을 잃고, 그런 신흥에 걸려, 비명을 지르고 넘어지는 신내. 신흥은 얼른 추스르고 멀리 달아난다. 엎어진 채 그대로 있는 신내에게 빛이 모아진다. 빛은 점점 작아진다. 암전. 다시 서서히 밝아지면 신내의 자리에 서서 홀로 빛을 받고 있는 신흥 신흥: 하하하, 꼴좋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한번은 잡혀도 두 번은 안 잡힌다! 이래 봬도 왕년에 한달리기 한 사람이야 왜 그러셔.(사이) 그나저나 이제 뭘 어떡해야 하지? 집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길거리에서 전전긍긍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약만 안 샀더라도 좀 더 나았을 텐데 (뒤적거려 지갑을 꺼낸다.) 육 만원. 육 만원이라, 이걸 갖고 뭐해……, 인생 허무하다, 나이 서른여덟에 가족 버리고 수중에 딸랑 육 만원 들고서 고민하는 꼴이라니……, 아니다, 아니다. 돈 한푼 없는 것 보다 낫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육 만원으로 새출발하는 거야! 까짓 인생 대역전이 별거야, 나라고 뭐 육 만원의 신화 만들지 말라는 법 있어? (절규한다.) 젠장, 근데 뭘 하냐구! 세 개의 빛이 동시에 들어온다. 빛 속에 나란히 있는 명일, 신내, 두정, 신흥. 명일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고, 신내, 입 주변이 피에로처럼 초콜릿이 범벅인 채로 무지막지 멍하게 앉아 있다. 두정은 한 곳을 응시한 채 얼어있다. 지하철 환승 멜로디가 경쾌하게 울린다. 소리: 이번 역은 전동차를 갈아타실 수 있는 환승역입니다. 다른 전동차를 이용하실 손님께서는 빠뜨리신 물건이 없나 잘 살펴보시고 다른 열차로 갈아타시길 바랍니다. 넷. 각자의 자리를 떠나 각기 다른 사람이 있던 자리로 이동한다. 두정과 신흥 쪽의 빛이 어두워진다. 명일: 틀림없다니까요, 증거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돼요, 제가 보낸 메일이 수신 확인이 되어 있었다고요, 왜 그게 증거가 안 되는 건데요, 비밀번호는 연수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니까요.(사이) 그러니까 한번만 조사해달라는 거예요, 저기요, 무슨 얘긴 줄 알겠는데요, 사망신고가 됐다고 해서 꼭 죽었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사이) 말이면 답니까! 제가 미친놈으로 보입니까? 당신들 시민의 요청을 거절하는거 그거 직무 유기야 알아? 민중의 지팡이라며? 친절봉사라며! 이따위로 일할 거야! (사이) 제발요,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조사해 주세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 살리는 셈치고 아니, 정말로 죽은 사람 살릴 수 있는 일이니까 한번만 도와주세요? 네? 한번만요. 신내: 안 돼! 안 돼! 아무리 초콜릿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아,(흐느낀다.) 마지막 시합이었는데, 다시는 달릴 수 없는데……, 오빠가 보고 있었어,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끝이야, 전부 끝장나버렸어. 명일: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신내: 코치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입원하실 정도로 열심이셨는데. 명일: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신내: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모두들 나한테 손가락질할 거야, 부모님도 친구들도 오빠도 모두들 한심하게 생각할 거야. 내가 전부 망쳐버린 거야. 어떡해. 멀리서 신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한 손에 낡은 기타를 들고 등장하는 신흥 미친 듯 웃으며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신흥: 하하하, 이거야 이거! (기타를 튜닝하며 흥얼댄다.) “나는야 돈 한푼 없이 기는 도망자라네 하지만 나에겐 낡은 기타와 노래가 있어 둥기둥가.”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육 만원으로 어떻게 새 삶을 시작할까 고민해 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더군요, 이럴 때 의지할 마땅한 친구도 없는 내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갈 곳은 없고 배는 고프고, 그러고 있자니 일단 배라도 채우고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눈에 띄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오뎅을 집어 들었습니다. 터진 입술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는데,(웃음) 오백원짜리 오뎅이 그렇게 맛있는 거예요, 사실 길거리에 서서 쩝쩝거리며 먹는 사람들을 보면 손가락질 했었는데……, 아! 이래서들 먹는 거구나, 이해가 되더라고요. 막 세 개째 꼬치를 집어드는데 낯익은 노래가 들려왔어요, 포장마차 앞에 있는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노래였어요, 렛잇비였는데, 너무 유명해서 촌스럽게까지 느껴졌던 그 노래가 전혀 다르게 들리는 거예요, 길거리 오뎅과 렛잇비, 저한테는 그냥 그저그런 뻔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뭐 암튼, 오뎅을 질겅거리며 노래를 들었어요. 렛잇비가 그대로 두라는 뜻이라면서요? 어렸을 때는 왜 그대로 두라는 건지 이해를 못했었는데, 그 순간에 아!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그래서 그길로 곧장 중고 악기상으로 달려가 이놈을 장만했습니다. 지금 제 수중에 있는 거라곤 이 녀석과 단돈 삼천원이 전부입니다. 기타와 삼천원이라 뭔가 고독하기도 하고 낭만적이지 않나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20년 만에 만들 노래의 제목.“기타와 삼천 원” 하하하, 놀라셨죠? 저도 놀랐습니다 이런 완벽한 제목을 만들어 내다니, 제목부터 뭔가 확 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명일: 뭐라고요?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 신흥: 기타와 삼천원 명일: 설마……. 신내, 신흥 쪽을 바라보다 ‘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뛰쳐나간다. 신흥: (신내가 나간 방향에 대고) 놀라시긴……, 노래가 완성되면 여러분은 지금보다 열배는 더 놀라실 겁니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사이) 흥신소요?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 때문에 찾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둘러 이사를 간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는 거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흥: 일단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만들었던 노래로 시작할 겁니다. 장소는 뭐, 찾아봐야죠, 설마 서울 하늘아래 제가 노래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가숩니다. 불행한 샐러리맨이 아니라 어릴적 꿈을 이룬 멋진 사람이 된 거죠. 하하하. 자! 그럼 저를 기다리는 무대를 찾으러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흥, 큰 소리로 웃으며 퇴장, 명일 쪽지와 주소들을 확인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두정: (놀람을 감추며) 웬일이냐? 명일: 여기가 16-28번지 맞죠? 두정: 용케도 올 생각을 했구나. 명일: (떨리는 목소리로) 연수네 집 맞죠? 두정: 다 알고 온 거 아니야? 그런 건 왜 물어. 명일: 저는 연수 남자친구 명일이라고 합니다. 두정: 팀을 맡게 됐다고, 축하한다. 명일: 힘드시겠지만 저도 어렵게 마음먹고 온 것이니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두정: 너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그만 가봐. 명일: 그 심정 이해합니다. 하지만……. 두정: 사실대로 말하지, 네 얼굴 두번 다시 안 봤으면 좋겠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 오늘 이후 찾아뵙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두정: 꼴 좋다고 웃고 싶겠지, 웃고 싶으면 웃어. 명일: 연수……, 연수 살아있죠? 네? 두정: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명일: 사실대로 얘기해 주십시오. 사고 이후에도 매일같이 연수에게 메일을 보냈었는데 며칠전 그 메일이 모두 수신 확인이 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 하실 때 도망치듯 떠났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수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두정: 상상력이 풍부하구먼.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워, 보시다시피 난 글러먹었어. 명일: 그렇다면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연수 찾는 걸 포기하지 못합니다. 두정: 내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그래 그런 말을 했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상황 탓, 환경 탓 하는 게 아니야, 현실이 그렇다는 거지. 네 놈이 그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더 이상 널 마주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조심해서 가라.(나가려 한다.) 명일: 거짓말……, 거짓말이죠? 그럴 리 없어, 저를 포기하게 하려고 하는 얘기죠? 그렇죠? 두정: (멈춰서서 혼잣말로) 고결한 자만이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있다·……, 고결한 자라…….(쓴웃음) 에베레스트.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나간다.) 명일: (절망적으로) 잘 알겠습니다, 폐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나가려다 멈춰서서) 연수야……, 너 정말 없는 거야? 명일이 나가자마자, 박수 소리와 함께 현란한 조명이 무대를 훑는다. 무대 중앙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선글라스를 쓴 신흥이 기타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서 있다. 신흥: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에 들려드릴 곡은 지금의 저를 있게한 바로 그 노래입니다.20년 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가수의 꿈을 가득 품고 며칠 밤을 새우며 코피를 쏟아가면서 만든 노래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좋은 노래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해간다는 얘기가 있죠, 그게 바로 이 곡을 두고 한 얘기란 걸 요즘 들어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자 그럼 눈을 감고 제 목소리에 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빌어먹을 인생.” 신흥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단조롭고 유치한 느낌의 멜로디. 신흥: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뭔지 몰라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산다는 건 무엇일까 산다는 건 무엇일까 각각의 빛을 받으며 세 사람 나타난다. 약통을 들고 있는 명일, 휠체어 위의 두정, 경기 중에 쓰러져 있는 신내. 신흥: 그것이 뭔지 몰라도 신내: 이건 아니야, 명일, 두정: 이건 아니야 신흥: 목적도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순위가 매겨지고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모두: 이건 아니야. 간주. 두정 굳은 표정으로 한곳만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다. 명일: 전부 제 착각이었습니다. 여동생이 혹시나 하고 비밀번호를 쳤는데 열렸대요, 계정을 없앤다고 그러더군요, 그렇다고 앞으로는 메일 보내지 말라고……, 근데 비밀번호가 뭐였는지 아세요? ‘엠, 와이, 유, 엔, 지, 아이, 엘’이었대요. 명일, 제 이름이었어요.(허탈하게 웃는다.) 연수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약병을 바라본다.) 신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어떡하지, 일어날 수가 없어, 오빠, 엄마, 아빠, 코치님……. 일어나 달려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모두들 저만 바라보고 있겠죠, 고개를 들 수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신흥: 이른 아침, 아니 그건 해도 안 뜬 새벽이야. 흔들어 깨우며 하시는 말씀, 얼른 일어나, 얼른 일어나. 늦은 밤에, 아니 그건 달도 지는 새벽이야 지친 나에게 하시는 말씀, 공부 하다 자, 공부 하다 자,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제발. 잠도 못 자가며 난 무얼 하는 걸까.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간주. 명일 결심한 듯 약을 꺼내 털어 넣는다. 신내는 여전히 그대로 엎드린 채다. 등이 들썩거린다. 두정,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고 수건을 감은 숟가락을 꺼내 입에 문다. 명일 쓰러진다. 두정, 있는 힘껏 일어나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온힘을 다해 일어나려 한다. 신흥: 귓가에 맴도는 어머니 말씀.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일어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신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어나려고 애쓰는 두정 신흥: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명일 갑자기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간다. 명일: 아 배야! 눈물을 흘리며 일어난 신내, 이를 앙다물고 슬로로 뛰기 시작한다, 두정 간신히 몸을 지탱해 휠체어에 오른다. 신흥을 제외한 나머지 빛이 사라진다. 신흥: 인생이란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 모두들 다 그렇게 살아 일어나, 일어나. 얼른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가 빌어먹을! 일어나, 어서 일어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기쁨에 차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는다.) 여, 여보……. 무대 밝아진다. 신흥 머뭇거리는 사이 신내 천천히 등장한다. 신내: 오빠 신흥: 여, 여보 신내: 어쩐 일이세요? 신흥: 당신이 어떻게 여길……. 신내: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할말 있었는데. 신흥: 그러니까……, 그게 신내: 아무 말 마세요, 부탁이에요, 제가 얘기할 테니 듣기만 하세요. 신흥: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신내: 사실 저 오빠 좋아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아니에요. 신흥: 그게 무슨 소리야? 신내: 말 그대로예요, 이젠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신흥: 여보, 그러지 마, 제발, 응? 내가 잘못했어, 내가 죽일 놈이야. 신내: 고마워요, 진작 얘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저 꼴찌해서 이런 거 아니에요. 정말 오빠에 대한 마음이 식어 버려서 그런 거예요. 신흥: 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죽는다는 소리는 말아줘, 부탁이야. 신내: 그러지 마세요, 오빠답지 않아요. 신흥: 난 이미 끝난 놈이지만, 당신하고 우리 창신이 수진이는 아니잖아. 남편,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잖아, 여보, 그러니까 그런 소리 두번 다시 하지마. 신내: 괜찮아요? (사이) 저요? 보세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 신흥: 많이 생각해 봤는데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 신내: 그래요, 그렇게 해요. 신흥: 이혼하면 놈들도 더는 못 괴롭힐 거야, 자리잡히는 대로 연락할게,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생활비랑 애들 교육비는 최대한 노력해 볼게. 어떻게든 아빠 노릇은 하도록 할게. 미안해 여보. 신내: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오빠도 조심해서 가세요. 안녕……, 안녕.(자리를 옮긴다.) 신흥: 놈들이 위치추적을 해서 전화기 못쓰니까, 내가 연락할게. 신내: 오빠도 제가 좋대요, 우습죠? 기껏 마음 정리했는데 고백을 받다니……, 조금만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괜찮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사이) 저 끝까지 달렸어요,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목소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 이후엔 아무 생각도 안나요, 어떻게 결승점을 통과 했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 정신이 들고 보니까 제 방에 덩그러니 앉아 초콜릿을 잔뜩 쌓아놓고 먹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거울을 봤는데 눈은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 있고, 입 주변은 초콜릿이 번져서 피에로처럼 되어 있더라고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깔깔대고 웃어버렸어요,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 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눈을 감고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들어 봤어요, 자세히 들어 보니까 제 목소리더라고요,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 보면 처음엔 자기 목소린 줄 모르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거였어요, 조금 익숙해지니까 알겠더라고요, 제 목소리인지. 신흥: 그랬어? 그거 다행이네. 알았어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사이) 내 걱정은 하지마, 당신하고 애들이 힘들지 나야 뭐……. 그만 가봐, 수일내로 전화할게, 조심해서 들어가고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다.) 여보! (사이) 아, 아니야.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사이. 혼잣말로) 잘 살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평소에 안해 버릇해서 힘드네. 신내: 근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는 이미 끝나버렸는데, 레이스를 마치라니,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 하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신흥: 자! 이젠 나의 무대를 찾아가 볼까,(기타에게) 가자 로시난테, 갈 길이 멀다. 서두르지 않으면 날이 저문다고.(나간다.) 신내: 800미터 경기는 트랙을 2바퀴 도는 거예요, 작전도 중요하긴 하지만 페이스 조절과 순간의 판단력이 그 어떤 종목보다 중요해요,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려도 안 되고 페이스 조절한다고 천천히 출발해도 안 되죠, 작전대로 달리다가도 상황에 따라 작전을 포기하고 감으로 스퍼트하는 경우도 많고요. 생각해 봤어요, 나는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달려온 것보다 달려야 할 트랙이 더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알람이네요. 저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나간다.) 텅 빈 무대. 멀리서 전동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로 들려온다. 소리는 멈추지 않고 무대를 가로지른 후 점점 멀어져 간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빈 휠체어를 끌고 등장한다. 휠체어를 세우고 한두 걸음 떨어져 선다. 두정: (휠체어에 대고) 너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위로해 주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다. 잔인하게 들려도 할 수 없어. 다 네 잘못이야, 한 번 더 점검했어야지, 한 번 더 살폈어야지. 그 정신 상태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면 너 때문에 동료들 모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어, 너 이렇게 된 거, 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목숨과 다리를 바꿨다고 생각해, 어찌 보면 이렇게 된 거 너한테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닌 인생 선배로서 하는 얘기니까 귀담아 듣는 게 좋아, 휠체어 생활도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괜히 재활한다고 힘 낭비하지 말고 그 다리에 적응하는 편이 나을 거다. 나같이 바른 말을 하는 선배를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이제 가봐야겠다, 돌아가서 합숙 준비를 해야 하거든, 들어가서 한 숨 자는 게 어때? (휠체어를 밀고 나간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두정이 나간 반대편에서 피골이 상접한 명일이 다리 힘이 풀린 채로 등장 명일: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정말 특이한 약이야. 고통스럽냐고 물었을 때 왜 그런 웃음을 지었는지 이해가 돼.(힘없는 웃음) 왜 죽으려고 했는지, 죽기로 결심한 내가 원망스러워지다니……, 아픈 배를 감싸고 변기 위에 앉아 있자니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러다 알게 됐어요, 연수를 잃었을 때보다 변기 위에서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웃음이 나왔어요, 눈물은 줄줄 흐르고 웃음은 멈추지 않고, 아래도 멈추지 않고 (힘없는 웃음) 제가 연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는데, 배가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 아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요?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명일: 저 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까요? (고개를 숙인다.) 서로 다른 곳에서 나오는 신흥, 신내, 휠체어 탄 두정. 각자 자리를 잡고 선다. 네 사람: 요 며칠 정말 힘들었어요. 세상에서 버려져, 혼자 어딘가에 버려진 것 같은 느낌,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나한테 달려든 것 같은 느낌,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죠. 두정, 신흥: 왜 하필 나야? 명일, 신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네 사람: 속으로 원망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 봤습니다. 근데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연한 얘기죠, 고민하고 소리 질러서 일이 해결 된다면 이 세상에 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신흥: (큰 목소리로) 가수가 되기로요! 두정, 명일: (바로 이어) 받아들이기로요 신내: (이어서) 다시 달리기로요. 네 사람: 많이 겁나고 솔직히 자신 없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어나야죠, 신흥: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네 사람: 변하는 건 하나 없지만 그렇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두정: 저, 결국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휠체어를 뒤로 돌리자 자동차 번호판 모양의 판에 ‘에베레스트’라고 쓰여 있다.) 썰렁했나요? 지하철이 들어온다고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지하철이 다가오는 소리, 멈추는 소리, 문 여는 소리. 모두 한발씩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힘찬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기타를 정성껏 보듬으며 어디론가 간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한다. 네 사람: (동시에) 저기……. 암전. 어둠 속에서 신흥의 목소리 신흥: (목소리) 드디어 완성했습니다.‘빌어먹을 인생’을 이을 평생의 역작.‘기타와 삼천원’ 조명을 받으며 멋지게 등장한 신흥. 노래한다. 신흥: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가수를 꿈꾸는 소년이 살았다네 매일 밤 꿈속에서 노래하던 소년은 매일이 너무나 행복했다네 그러나 어느 샌가 소년은 노래하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서울 하늘 아래 어딘가 가수를 꿈꿨던 남자가 살고 있다네 꿈을 잊은 채로 살아가던 남자는 하루가 너무나 힘들었다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노래하던 꿈을 떠올렸다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아, 가진 건 사랑스런 기타와 단 돈 삼천 원뿐이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네, 아, 가진 걸 모두 잃어 남은 것 하나 없어 불행하지만 나에겐 기타와 삼천원 있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세상에 내 것이 하나 없어도, 노래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있어 너무 행복하다네. 너무 행복하다네. 박수 소리에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하던 신흥, 키스를 날리며 퇴장한다. 무대 한쪽에서 연수, 차분한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태령,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약장수,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연수가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약장수, 태령,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세사람. 연수: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약장수: 종로 5가입니다. 태령: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연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약장수: 주로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고객이죠. 혹시 필요하신가요? 태령: 네, 그녀를 사랑했거든요. 연수: 사랑했어요, 그래서 많이 미안했고요, 혼자 남겨두고 떠나서 약장수: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태령: 그녀는 떠났지만 전 아직 그녀를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연수: 이제 떠날 거예요, 명일씨를 놓아주려고요, 마음속에서 서서히 사라질 거예요. 약장수: 그 약을 먹게 되면 죽을 각오로 살게 되죠, 태령: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우선은 열심히 달리는 신내를 뒤에서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하고요 연수: 뒤에서 지켜본다는 거 그리 쉽지 많은 않더라고요, 많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약장수: 그것이 문제죠, 부작용이 너무 심해요, 설사가 장난 아니거든요,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하하하. 세 사람 모두 정지. 두정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온다. 무대 중앙에 휠체어를 놓고 나간다. 휠체어 홀로 빛을 받는다. 휠체어: 전 에베레스틉니다. 제 주인님이 붙여준 이름이에요, 전 어디를 가나 주인님과 함께 하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나 할까요.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인님이 제게 이름을 붙여주고 난 뒤로 가끔이긴 하지만 웃는 모습을 보이시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제 이름이 좋습니다.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휠체어: 지하철이 왔네요, 못다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저는 지금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거든요. 경쾌한 음악과 함께 암전. ■ 등장인물 명일(25세, 대학생) 신내(18세, 고등학생, 육상부) 두정(32세, 산악인) 신흥(38세, 샐러리맨)
  • “20여 년 전에 맏아들 잃은곳서 막내도 휩쓸려가”

    “아들 셋 가운데 둘이 같은 장소에서 급류에 휩쓸려갔어. 이런 세상에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없어….” 지난 16일 전북 동부 산간부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불어난 급류에 아들 이상길(24)씨를 잃어버린 김일색(51·여·전북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 신월마을)씨. 김씨는 첫째 아들에 이어 정신지체 3급 장애인인 막내아들까지 폭우가 앗아가자 괴로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20여년전 폭우로 첫째 아들 상철(당시 7세)이를 잃어버린 이후 막내아들까지 급류에 휩쓸려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되자 김씨는 “하늘도 무심하다.”고 절규했다. 장대비가 퍼붓던 16일 오후 숨진 이씨는 어머니의 간식거리와 생필품을 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향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물이 불어 다리는 형태조차 보이지 않았다. 장수군과 무주군을 나누는 양학천을 가로지르는 폭 4m, 길이 40m의 교량은 평소 비가 조금만 내려도 물에 잠기는 잠수교. 그러나 이씨는 집에 홀로 계실 어머니 생각에 하천을 건너다 급류에 휩쓸렸다. 다리에 난간이 없어 이씨는 급류에 저항 한번 하지 못했다. 이씨는 정신지체 장애자이지만 건강이 나쁜 어머니를 위해 병수발과 각종 심부름은 물론 살림도 척척 해낸 착실한 청년이었다. 이장 서홍식(34)씨는 “정신연령은 남들에 비해 떨어지지만 ‘엄마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며 애틋하게 말하던 효자 중에 효자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상길이가 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누구보다 컸다.”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애지중지 키웠는데 나보다 먼저 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목놓아 울었다.전주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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