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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이 만난사람] 20년간 백두산 찍은 산악 사진가 안승일

    [김문이 만난사람] 20년간 백두산 찍은 산악 사진가 안승일

    4월의 어느 날이었다. 한라도령은 꽃향기에 잔뜩 취했다. 저절로 백두의 문이 열렸다. 금잔 한 잔에 시름 한 술 놓았다. 흰 구름과 함께 백두낭자가 나타났다. 낭자는 팔을 벌려 한라도령을 감싸 안았다. 고운 자태와 온화한 숨결로 그를 따뜻하게 포옹했다. 도령은 낭자의 아름다운 치마폭에 푹 빠졌다.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었다. 세월 가는 줄 몰랐다. 낭자는 어느새 백두의 여신으로 변했다. 도령은 얼마 후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설레는 20년을 백두산에서 살았다. 나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한 한 마디를 백두산에 묻었다. 백두산은 나의 스승이요 사랑이다. 20년 전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자연을 복제해내는 단순한 인간 복사기로, 사람질 제대로 못해 보고 머저리 사진장이의 삶을 살고 말았을 것이다.’ 산악사진가 안승일(68)씨는 ‘괴짜’로 통한다. 20년 동안 사시사철 백두산에 살다시피 하며 백두산 속살만 수십만 컷을 찍었다. 단순히 카메라 셔터만 누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나만큼 진하게 백두산의 영혼과 동고동락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할 정도로 백두산에 미쳐 지냈다. 천지를 보는 순간 백두의 신을 만나 넙죽 큰절을 올리면서 단박에 시작된 백두산 인생이었기에 ‘괴짜, 백두산의 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로지 사진 한 장을 담기 위해 백운봉에서 장군봉으로 솟는 해를 기다리며 영하 50도를 견뎌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예 천막집을 두 채나 짓고 살았다. 계속되는 눈보라에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천막집 안에서 김치전과 만두를 빚고 눈 녹인 물로 북어 대가리와 멸치 육수를 만들어 칼국수만 먹다 보니 복부비만에 고지혈증 환자가 됐다. 제대로 된 일출 하나 건지려고 서백두 청석봉에서는 눈구덩이를 파고 지낸 일이 수백 번은 된다. 그러나 아무리 추워도 한 컷 한 컷에 대한 기대감으로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즐겁게 지냈다. 백두산 하늘 아래 첫 동네인 이도백하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하나 사서 작업실을 꾸렸다. 백두산을 마주 보는 식탁에서 밥을 먹고 뒹굴뒹굴 책이나 보다가 미풍을 타고 살살 들어오는 구름이 산과 어울리는 낌새가 보이면 후다닥 집 근처 오름으로 달려갔다. 운 좋은 날이면 창밖으로 펼쳐진 웅장한 장백산맥의 새벽을 담았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또 찍으며 살았다. 최근 안씨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불멸 또는 황홀’이라는 제목으로 백두산의 20년 사진전을 열어 ‘역시 괴짜 안승일’이라는 낙관을 또 한번 찍었다. 백두산에서 지낸 세월이 궁금해 지난 18일 서울 충무로의 한 인쇄소 사무실에서 안씨를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아직도 갈 수 없는 산’과 ‘우리 동네 꽃 동네’라는 두 권의 사진집을 최근에 찍어냈다. 백두산 20년의 흔적이 담긴 것들이다. 사진집을 들추던 그에게 어떻게 해서 백두산과 인연을 맺었는지 먼저 물었다. “1994년 4월이었지요.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산악인 글쟁이 박인식씨가 백두산에 가자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통일이 된 후에나 백두산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4, 5년 뒤면 통일이 될 줄 알았지요. 인천항에서 박씨를 만났는데 다른 일행 열댓 명과 같이 왔습니다. 이들은 중국 여러 곳의 여행코스 중 백두산에 들르는 일정을 잡고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백두산 코스에서 숙명처럼 혼자 남게 되면서 20년 동안 그곳에 파묻히게 됐습니다. 필름 현상을 위해 한국에 와야 할 때 말고는 줄곧 백두산에서 지냈지요.”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산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쉽지가 않았다. 기상이변이 워낙 심해 ‘진경의 순간’을 놓치기 일쑤였다. 눈 덮인 산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찾는 것처럼 마땅한 터를 잡고 앉아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보면 가끔 중국 병사와 맞닥뜨려 ‘수상한 자’로 내몰리기도 했다. “하루는 중무장한 중국 군인 셋이 제 방에 들어와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하자 그렇다면 얼른 찍고 갈 것이지 왜 오랫동안 살고 있느냐, 국경 부근에 어슬렁거리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냐, 카메라와 렌즈들은 무슨 용도에 쓰이는 것이냐고 다그쳤습니다. 결국 저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나중에는 친한 사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백두산에서 1년을 지낸 뒤 ‘백두산’이라는 사진집을 냈다. 장기체류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찍은 생생한 장면들이 모였다. 백두산이라는 하나의 피사체에 4m에서 16m에 이르기까지 마치 백두산에 들어와 있는 착각을 일으킬 만한 사진들이었다. 이어 안씨는 북한 쪽에서 백두산을 찍은 일본 사진작가 이와하시의 사진 ‘장백산’과 자신의 사진 ‘백두산’을 합해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때 ‘백두산’ 사진집 표지 안쪽 날개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눈길을 끌었었다. ‘정일이 형님, 백두산 금강산 사진이 필요하시면 일본 사람 부르지 마시고 내가 좀 찍게 해주시오. 나는 평생 산 사진을 찍어온 사람이오. 사진은 재주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혼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민족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내 조국 산하를 왜 일인들에게 빼앗겨야 합니까.’ 2001년 6월 평양 인민대학습당에서 남북공동사진전이 열릴 때에도 난생처음 넥타이를 매고 ‘정일이 형님’을 향해 이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백두산 사진작업을 통일을 위한 민족화합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작했다. 그래서 백두산 사진은 대부분 ‘남과 북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혹자는 감상적 통일론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백두산에 있다 보니 참으로 이상한 산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면서 “애국자도 아닌 사람에게 나라를 걱정하게 하고 국가관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에게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게 한다”고 말한다. 1998년 부산에서 열린 북한의 사진가 김용남의 사진과 함께 2인전을 통해서도 이 같은 ‘백두산의 혼’을 알리기도 했다. 산과의 인연은 어떻게 해서 맺게 됐을까. 어릴 적부터 시끄러운 세상살이가 싫어 자꾸 산으로 갔다. 중학교 때였다. 그해 처음 뜨는 해를 본다고 삼각산으로 갔다.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텐트 속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심취했다. 나중에 한적한 시골에서 살 생각에 건국대 원예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공부는 뒷전이고 시간만 나면 산으로 가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2학년 때 대학을 중퇴한 그는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서라벌예술대 사진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나이 많은 자신한테 반말로 하대하는 후배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 꼴사나웠다. 다시 등산 장비를 챙기고 산으로 올라갔다. 간첩으로 오인받아 여러 차례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이럴 무렵 서라벌예대 산악회 선배들한테 결혼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68년 당시에는 신랑 신부가 결혼 예복을 입고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붐이 일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에 따라 결혼하는 선배들이 그를 불렀던 것이다. 나중에는 결혼하는 친구들도 그를 찾았다. 이래저래 돈이 모였다. 1979년 충무로에 스튜디오를 내고 광고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달동네에서 어렵게 사는 아버지한테 500만원을 건네면서 집을 늘려 구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아들에게 사진집을 만들 것을 권유하면서 사진가로 대성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해서 1982년 첫 사진집 ‘산’을 시작으로 ‘삼각산’ ‘한라산’ 등이 연이어 나왔다. 도봉산 인근에 작업실을 위한 땅을 장만할 만큼 돈을 모았다. 충무로 생활 10년쯤 지날 무렵 그는 백두산에 ‘필’이 꽂히면서 모든 것을 접고 백두산으로 훌쩍 떠나게 된다. 벌어놓은 돈까지 몽땅 백두산 사진에 투입했다. “경제적으로는 다시 어려워졌지만 제게는 영원한 스승이자 연인과 같은 백두산이 곁에 남아 있습니다. 항상 뿌듯하고 행복합니다. 또한 지금 와서 효자 노릇까지 하고 있습니다. 백두산 사진을 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사진을)크게 인화해주곤 합니다. 살림에 보탬이 되고 있거든요(웃음).” 백두산 사진은 몇 장 정도 가지고 있을까. 웃으면서 “그런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8을 옆으로 누이면 무한대를 나타내는 수학기호가 된다. 그만큼 정말 지독하게 찍었다”면서 “하지만 고르고 골라 엄선해서 내놓을 만한 사진은 100여장이다. 찍은 사진 컷 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과연 몇 장의 사진을 건지느냐가 중요하다. 그나마 20년 동안 운 좋게도 100장 정도 건졌다고 생각한다”며 웃는다. 다시 물었다. 백두산은 그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할까. “저는 2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추석을 백두산에서 보냈습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이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가야 할 산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산입니다. 제가 사진을 찍는 작업이 민족화합의 그날을 한시라도 앞당길 수 있다면, 저의 사진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통일이라도 한 발 앞당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제 16세 때 맨 처음 카메라 매고 올랐던 삼각산부터 다시 오를 예정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산악사진 인생 2막을 뚜벅뚜벅 걸어가기로 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안승일은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6세 때부터 카메라를 매고 산에 올랐다. 서라벌예술대 사진과를 중퇴했다. 1979년 서울 충무로에 그린스튜디오를 설립해 광고사진을 찍었다. 1994년부터 20년 동안 백두산 사진에만 몰두했다. 주요 사진전으로는 ‘한국의 산’(1970·1975년), ‘백두산-일본 사진가 이와하시와 2인전’(1996년), ‘백두산-북한 사진가 김용남과 2인전’(1998년), ‘남북공동사진전-평양’(2001·2004년), ‘산의 영과 기-서예가 권창륜과 2인전’(2011년), ‘백두산 사진전-불멸 또는 황홀’(2014년) 등이 있다. 또한 사진집으로는 ‘산’(1982년), ‘삼각산’(1990년), ‘한라산’(1993년), ‘백두산’(1995년), ‘굴피집’(1997년), ‘아리랑’(1999년), ‘고산화원’(2007년), ‘천상지천하화’(2010년), ‘백산백화’(2013년), ‘아직도 갈 수 없는 산’(2014년), ‘우리 동네 꽃 동네’(2014년) 등 10여권을 발간했다.
  • ‘평화협정으로 통일’ 25일 특강

    ‘평화협정으로 통일’ 25일 특강

    문화운동 단체인 우리마당(대표 김기종)은 25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무교동 국가인권위원회 8층에서 원로 민속학자 심우성(80)씨를 초청해 ‘평화협정으로 통일아리랑을’이란 주제로 창립 30주년 특별 강연을 연다.
  • [문화단신]

    한국무용제전 29일 개막 한국춤협회가 주관하는 제28회 한국무용제전 ‘글로벌 아트춤 축제’가 오는 29일부터 다음 달 6일까지 서울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다. 한국의 창작춤 문화를 주도해 온 한국무용제전은 올해도 인도, 필리핀 무용단 등 국내외 13개 무용단의 기량 높은 신작들을 선보인다. 백현순(한국체육대 교수) 한국춤협회 회장은 “아시아 국가들의 전문 무용단이 서로의 문화적 가치를 소통함으로써 우리 창작춤의 성장과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축제의 의의를 설명했다. 3만~5만원. (02)410-6888. 김희성 파이프오르간 리사이틀 ‘2014 파이프오르간페스티벌’의 첫 번째 공연인 ‘김희성 파이프오르간 리사이틀’이 다음 달 19일 이화여대 김영의홀에서 열린다. 파이프오르간을 재즈, 영상, 춤 등 다양한 장르에 접목시키며 오르간의 가능성을 확대해 온 김희성 이화여대 교수는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을 맞아 바흐의 코랄 소곡집 가운데 수난 코랄 ‘오 사람아, 너희의 죄를 슬퍼할지니’와 뒤프레의 ‘수난 교향곡’ 등을 연주한다. 세계적인 오르가니스트 나지 하킴은 오는 9월 2~3일 자작곡으로 꾸민 리사이틀을 열고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1만~5만원. (02)780-5054. 국악방송 봄철 프로그램 개편 국악방송(FM)이 전통음악을 심화 편성하고 우수 창작국악을 발굴하는 방향으로 봄철 프로그램을 개편했다고 24일 밝혔다. 문학평론가 하응백이 진행하는 ‘창악집성’(일요일 오후 2시)과 작곡가 김중현이 맡은 ‘국악의 발견’(일요일 밤 9시)이 신설됐다. 하응백은 자신의 저서인 ‘창악집성’에 수록한 우리 음악 노랫말에 담긴 멋과 맛을 전한다. ‘국악의 발견’은 창작국악을 집중적으로 들려주는 시간으로 꾸민다. ‘국악산책’(월~토 오전 9시)은 국악인 유은선이 새로운 진행자가 됐고, ‘꿈꾸는 아리랑’(월~토 오후 4시)에서는 작곡가 함현상이 새로운 아리랑지기로 자리했다. 함현상은 국악영화 ‘두레소리’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국악작곡가다. 또 ‘솔바람 물소리’(매일 오전 5시)에서는 정확히 PD가 깊이 있는 해설과 음악을 전한다. 국악방송의 지역별 주파수는 홈페이지(www.gugakfm.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 K팝스타 총출동… 아리랑TV 22일 상하이 한류 콘서트

    국내 K팝 가수들의 해외 진출 창구로 자리매김한 아리랑TV의 ‘심플리 K팝’이 22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규모 한류 콘서트를 연다. 22일 저녁 7시(현지시간) 상하이 벤츠아레나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에는 빅뱅의 지드래곤과 태양, F(X), 크레용팝, 유키스, 레인보우, 블락비, 빅스 등 한국의 K팝 그룹 12개 팀이 참여해 공연을 펼친다. 이들은 세 시간 동안 1만 5000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펼치게 된다. 이번 공연은 중국의 상하이동방위성TV를 통해서도 방송되며 공연의 수익금 일부는 중국아동소년기금회를 통해 쓰촨성 지진 피해지역인 안강지역에 ‘한·중 우호 도서관’을 건립하는 데 사용된다. 아리랑TV는 이날 공연실황을 1, 2부로 제작해 다음 달 11일과 18일 전 세계 1억 2000만 가구에 방송할 예정이다. 2012년 3월 첫방송을 시작한 ‘심플리 K팝’은 전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K팝 기존 가수 및 신인 가수들의 해외진출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그룹 유키스의 멤버인 일라이가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가수들이 직접 다음 출연팀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등으로 소개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전 세계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방송이 나간 뒤에는 홈페이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인도,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는 물론 중남미, 유럽 등의 다양한 국가의 시청자들의 시청 후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견본주택 사전공개 한 돈암 코오롱하늘채 대박 예감

    견본주택 사전공개 한 돈암 코오롱하늘채 대박 예감

    최첨단 설계에 계약금분납제∙중도금무이자 등 파격조건으로 ’갈아타기’ 수요 몰려 올 봄, 그 동안 신규 공급이 적어 갈아타기 수요가 풍부한 돈암동 일대에 ‘분양 단비’를 뿌릴 ‘돈암 코오롱하늘채’가 주목되고 있다.코오롱글로벌은 이번 주 21일(금) ‘돈암 코오롱하늘채’의 견본주택을 오픈하고, 분양에 돌입한다. 특히 이 단지는 돈암동 일대 7년만에 분양되는 600세대 이상의 단지인 만큼 내 집 마련 수요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14일 미아사거리역 1번출구 인근에 모델하우스를 사전공개 한 돈암 코오롱하늘채는주말 동안 예상을 뛰어넘는 상당한 인파가 방문을 하여 그 인기를 실감케 함으로서 분양 대박에 대한 예감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돈암동 일대는 도심 접근성이 좋아 수요는 풍부하지만 그동안 500가구 이상의 중형급규모 이상의 신규 아파트 공급이 뜸했던 지역으로, 입주한지 10년이 넘는 노후 아파트가 대부분이다. 공급이 적고 노후 아파트가 많은 지역일수록, 기존의 주택을 팔고 새 아파트로 이사하려는 갈아타기 수요가 많기 때문에 돈암 코오롱하늘채에 대한 지역민들 관심이 높다. ‘돈암 코오롱하늘채’는 총 629가구 규모인 중형단지로 실내골프연습장, 탁구장, 피트니스센터, GX룸, 클라이밍장과 청소년 독서실, 키즈카페 등이 있는 1,100여㎡ 규모 커뮤니티센터와 단지 내 1층~ 3층, 연면적 약 600㎡ 규모의 도서관(외부개방형)이 별동으로 마련된다. 코오롱글로벌만의 주부들을 위한 수납특화시스템이 ‘칸칸’은 이미 주부들에게 검증된 인기 아이템이며, 그 외에도 돈암동 500세대 이상 아파트로서는 처음으로 지상주차장을 모두 없애 완벽한 보차분리 설계를 한 단지이며, 전체 주차공간의 약 40%는 옆으로 20cm, 뒤로 10cm 넓힌 확장형 주차구획을 도입했다. 음악이 흐르는 ‘뮤직사인벤치’, 움직이면 음악이 흐르는 그네인 ‘뮤직스윙놀이터’, 밟으면 소리와 빛이 나는 피아노계단&슬라이드 등 단지 내에 다양한 감성문화 아이템을 접목시켜 단순한 오랜만의 공급의 의미를 떠나 그 동안 돈암동에서 보지 못했던 아파트로서 인기몰이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돈암 코오롱하늘채는 신규분양 단지에서는 드물게 계약금 분납제(계약금 1,000만원)와 중도금 60% 무이자 등의 파격적인 계약조건을 제공해 수요자들이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분양가도 3.3㎡당 1,300만원 초반대부터 형성돼 주변 타 아파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역’과 우이~신설간 경전철 ‘아리랑고개역(2016년 개통예정∙가칭)’을 걸어서 이용할 수 있으며 단지 옆에 정덕초등이 있어 걸어서 통학이 가능하며 사립인 우촌초, 매원초, 성신초∙중∙고교 및 성신여대∙국민대∙한성대∙고려대 등 명문대학들이 몰려있다. ‘돈암 코오롱하늘채’는 지하 4층~지상 16층, 10개 동 총 629가구 중 전용면적 ▲59㎡(25가구) ▲84㎡(223가구) ▲113㎡(9가구) 등 257가구가 일반 분양된다. 오는 24일 특별공급을 시작으로 25일 1∙2순위, 26일 3순위 청약접수를 받는다. 견본주택은 서울 강북구 미아동 66-6번지(4호선 미아사거리역 1번출구 방향)에 있다. 입주는 2016년 12월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전통 춤 인생 50년… 이 시대의 춤꾼 국수호

    [김문이 만난사람] 전통 춤 인생 50년… 이 시대의 춤꾼 국수호

    그저 손 끝 하나가 나풀거릴 뿐인데 지나간 세월이 아지랑이로 나타나고 다가올 미래를 살며시 열어젖힌다. 또한 꺼져가는 한 자락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하늘 높이 솟아올린다. 조지훈이 ‘승무’에서 읊었던 한 구절이 떠올려진다.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농악소리에 혼이 팔려… 16세때 처음 장구춤 1964년, 그러니까 전주농고 1학년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우연히 농악소리에 혼이 팔려 농악대에 들어갔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그저 신이 났다. 전주 권번의 춤사범 출신인 정형인 선생이 이런 그를 보고 미래의 춤꾼으로 확실히 점지하고 지도를 했다. 그리고 몇달 뒤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열렸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관객들 앞에서 처음으로 장구춤을 췄다. 이때부터 그의 춤 인생길은 손짓과 몸짓을 휘휘 감아돌며 시작됐다.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이수자이자 이 시대의 춤꾼으로 유명한 국수호(66)씨.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여자도 아닌 남자가 춤에 빠져 살다 보니 어느덧 50년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하여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춤 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춤의 귀환)에서 다시 한번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이 무대를 통해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아직도 우리 전통춤이 기거할 ‘집’이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과 이제는 ‘전용극장’이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호소했다. 많은 문화예술인들도 공감하는 무대가 됐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디딤무용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 ‘화두’부터 꺼낸다. “우리나라에는 우리의 전통예술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무대는 없고 오페라 등 서양식 무대만 있습니다. 창(판소리)만 하더라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 전용극장이 없잖아요. 한국인에게는 의식주가 삶의 버팀목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정신의 버팀목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歌), 무(舞), 악(樂)에 있지요. 집도 없이 공연한다는 것은 빈터에 공염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50년 동안 그렇게 춤을 추다 보니 항상 마음 놓고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순수예술의 집’이다. 국립극장이나 국립국악원, 예술의전당 등도 있지만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서양의 공연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웃나라 중국의 경극만 하더라도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도시는 물론 지방마다 전용극장이 수없이 많으며 일본의 가부키(歌舞伎)와 노(能) 역시 국립극장을 비롯해 여러 지방에서도 마음 놓고 공연할 수 있는 전용극장이 있어서 전통의 맥을 제대로 이어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국립은 고사하고 도립이나 시립에서 운영하는 전통 극장조차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 춤이 지지부진하고 대중에게 잊혀 가는 이유가 바로 특성화된 ‘순수예술의 집’이 없기 때문이며 이는 춤뿐만 아니라 음악, 창극 모두에 해당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한국의 음악과 소리, 그리고 춤은 한국인의 기호품이 아니라 한국인한테 필수적인 의식주에 해당되는 영혼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순수예술 문화는 우리의 정신적 샘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은 그 물을 마시고 살아가야 하며 그것이 튼튼해야 대중문화도 튼튼해지는 것이지요. 일본이 국가차원에서 전통예술에 관심을 갖고 융성시키는 것은 바로 국가를 위한 국민의 정신적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문화융성위원회가 있지만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구려 당시 동맹제나 무천제 등을 보십시요. 이는 곧 고구려의 정신이었고 광활한 땅을 거느릴 수 있는 국가권력의 튼튼한 발로였습니다.” ●정형인·박금슬 선생은 춤인생 최고의 스승 이와 관련된 얘기를 더 나누다가 화제를 바꿨다. 춤인생 50년을 잠시 돌아보자는 의미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는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3~4세 때 비봉면 마을에 전주댁이라는 무당이 있었다. 쾌자 자락을 휘날리며 꽃을 들고 길길이 뛰는 무당과 옆에서 장구와 꽹과리를 치면서 경을 읽는 모습이 어린 그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의 예술적 끼는 주변 환경도 한몫 거들었다. 봉황이 난다는 비봉마을 골짜기마다 꽃가지 사이로 지저귀는 산새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어깨가 저절로 으쓱으쓱해졌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는 단상에 올라가 아리랑 춤을 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런 시골의 정취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서울 같은 곳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대단한 기억으로 남는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부친은 토지개량조합장 등을 거쳐 1960년대초까지 민선 면장을 지냈다.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에 그는 춤과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주 서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혼자 하숙을 하면서 브라스밴드부에 가입했다. 북을 치고 서양의 악보를 아버지 몰래 공부했다. 음계와 악보를 알고 분석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진 것도 이때였다. 졸업 무렵 아버지가 농고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할 수 없이 전주농고 토목과에서 측량을 공부했다. 하지만 몸속 깊이 내재돼 있는 끼는 주체할 수 없었다. 정규수업이 끝나자마자 농악대에 가서 북과 장구, 한국 음악과 무용 등을 익혔고 18세까지 정형인 선생한테 승무와 북춤, 남무 등 남자춤을 배웠다.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해서는 송범과 김백봉 선생한테 강의를 들었고 특히 박금슬 무용연구소에서 3년간 숙식을 함께하며 박금슬 선생이 오세암 천월스님으로부터 사사한 바라 승무를 익혔다. 정형인과 박금슬 선생은 그의 춤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한영숙, 은방초 등 당대 무용계를 주름잡던 전통춤꾼들을 사사했다. 1971년 군 복무 시절이었다. 전북도지사의 부탁으로 1사단장한테 특별휴가를 얻은 그는 전주농고 농악대에서 잠시 안무를 하게 됐다. 얼마후 그의 지도를 받은 전주농고 농악대는 전국대회에 출전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대회가 끝나자 전국의 고등학교에 농악대가 생기는 붐이 조성됐고 그의 안무실력은 자연스럽게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1973년 2월 제대한 그는 때마침 국립무용단이 생기자 남자로는 처음으로 입단하면서 월급받는 직업무용수가 됐다. 이때부터 ‘국립무용단 남자 무용수 1호’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다녔고 매스컴에서 집중조명을 받았다. ●국립무용단 남자 무용수 1호로 주목받아 “제가 국립무용단에 들어갔을 때 송범 선생께서 단장을 맡고 있었지요. 10년동안 여자 단원이 20명쯤 있었는데 남자는 저 혼자였지요. 남자라는 이유로 일주일에 한 번씩 언론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날마다 주인공이었죠 뭐.” 이 무렵 남자무용수 시대를 예상하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3학년에 편입해 춤극을 공부했다. 기존의 무용에 극적인 요소를 결합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어 대학원에 진학해 민속학을 전공했고 ‘한국 민속 연희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이론적 행위는 그의 춤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예술적 바탕이 됐다. 직접 무대 출연은 물론 대본, 안무, 연출, 음악 등 여러 영역으로 넓혀나가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갔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27세에 서울예대 교수로 임용됐고 이후 중앙대에서 26년간 교수직을 겸하면서 30년 가까이 국립무용단에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면서 130여개국 순회공연을 통해 한국의 전통춤을 어떤 식으로 추고 어떤 식으로 창작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부터 김만중의 ‘구운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로 세계인이 공감할 작품을 만들어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2002년 월드컵 개막식 등에서 총괄 안무를 맡아 세계인들에게 여러 감동을 선사했다. ●“1년에 한두편 창작 춤극으로 관객과 소통하고파” 그는 지난 50년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춤도 춤이지만 자료수집하느라 참 바쁘게 지냈다. 이사할 때 무용 관련 책만 트럭 10대분이 넘었다. 이런 것들이 작품의 골격을 세우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튼튼한 인문학적 토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춤의 매력은 진정 무엇일까. “인간이면 지닐 수 있는 핏빛 움직임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공들여닦여지고 정신이 들어간 움직임을 통해 미학적으로 보여질 때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력을 쌓은 실 하나가 내 가슴에서 저쪽 사람의 가슴으로 건너갈 때 금실이 되는 것처럼 춤의 매력은 세련미와 정성들여 쌓은 공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60대 중반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여전히 청춘이다. 건강비결을 묻자 “걷기를 주로 하고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예술과 관련되지 않는 불필요한 곳에는 되도록 가지 않으려 한다”면서 “가끔 식구들과 먹거리가 좋은 데 찾아가는 것을 작은 행복으로 여긴다”고 대답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1년에 한두 편씩 창작 춤극을 만들어 가급적 소극장 무대에서 관객들과 더 가까워지겠다고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국수호는 88올림픽 개막식 등 안무가로도 명성 춤극의 지평 넓혀 1948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1964년 전주농고 1학년때 스승 정형인 선생한테 농악과 한국음악, 장단 등을 익혔다. 그해 공식무대인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구춤을 췄다. 이후 서라벌예대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중앙대에서 연극영화를, 중앙대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했다. 1973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했고 이듬해 ‘왕자호동’을 시작으로 30여 편의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안무를 병행해 안무가로도 명성을 쌓았다. 88올림픽 개막식과 2002년 월드컵 개막식 공연의 안무를 맡았고 국립무용단 단장, 서울예술대 교수, 중앙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국수호디딤무용단을 창단해 ‘무녀도’ ‘대지의 춤’ ‘한국 환상’ ‘봄의 제전’ ‘명성황후’ 등으로 춤극의 지평을 꾸준히 넒혔다. 주요 수상으로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전북농악지도 대통령상(1971년), 88올림픽 개회식 안무 ‘화합’(국무총리표창), 최우수 예술가상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작품상(1988년), 한국 예술평론가협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인물(1999년), 제16대 대통령 취임식 총괄안무 대통령표창(2003년), 올해의 예술가상 춤극 ‘고구려’(2006년) 등이 있다. ‘세계 춤 기행문집- 춤 내사랑’ ‘국수호 춤 작품집-국수호의 춤’ 등의 저서를 펴냈으며 현재 국수호디딤무용단 예술감독 겸 이사장을 맡고 있다.
  • 국악 신한류로… 돈화문~종로3가역 ‘국악로’

    국악 신한류로… 돈화문~종로3가역 ‘국악로’

    서울시가 국악로 시작점인 창덕궁 정문 돈화문~종로3가역 770m 구간을 ‘국악로 문화지구’로 지정한다. 돈화문 맞은쪽 양옆으로는 국악예술당과 전통문화전시관을 짓는다. 국악로 인근 문화 자원과 연계해 남산~국악로~북촌을 잇는 국악벨트를 육성한다. 시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국악 발전 종합계획을 17일 발표했다. 국악을 서울의 고유한 문화관광 상품으로 개발해 신한류 아이템으로 발전시킨다는 복안이다. 인프라 확충, 국악로 활성화, 국악 창작 역량 강화, 국악 대중화 4대 분야 32개 세부 사업을 10년에 걸쳐 3단계로 나눠 진행한다. 시는 우선 국악 전문 공연장으로 한옥의 멋을 살린 국악예술당을 2016년 초에 개관한다. 전시, 공연, 퍼포먼스 등이 열리는 전통문화전시관은 2016년 하반기에 들어선다. 민요박물관, 국악박물관, 국악종합정보센터 등의 기반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다. 국악 명소, 상설 공연, 국악 행사 등을 묶은 테마 관광 코스도 개발한다. 오는 5월부터는 남산국악당에서 우리 전통을 살린 국악 뮤지컬 ‘서울 아리랑’을 상설 공연한다. 청계천로, 연세로 등 보행 전용 거리에서는 수시로 야외 국악 공연이 펼쳐진다. 시는 국악 교육 강화와 대중성 제고 등 국악 저변 확대도 추진한다. 초·중·고교에 국악 강사를 파견하고 시가 운영하는 ‘예술영재 교육지원사업’에 국악을 추가하기로 했다. 신진 국악인 발굴, 육성을 위한 창작경연대회를 비롯해 시민강좌, 시민대학도 마련할 예정이다. 한문철 문화관광디자인본부장은 “외국 관광객 1000만 시대를 맞아 전통에 기반한 문화관광 상품 개발이 필요하다”며 “무엇보다 침체된 국악을 활성화, 대중화해 서울 대표 브랜드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가장 한국적인 문화인 국악이 새로운 한류의 축이 되도록 꾸준히 보존,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포토] 페럴림픽 폐막식서 아리랑 부르는 송소희

    [포토] 페럴림픽 폐막식서 아리랑 부르는 송소희

    16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 해안클러스터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4 장애인동계올림픽(페럴림픽·Paralympic) 폐회식에서 송소희가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소치(러시아) 사진공동취재단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1930년대 유행 풍자가요 부르는 가수 최은진

    [김문이 만난사람] 1930년대 유행 풍자가요 부르는 가수 최은진

    왕년의 노래 한 곡을 잠시 음미해본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뭐/오빠는 심술쟁이야 뭐/난 몰라 이 난 몰라 이/내 반찬 다 뺏어 먹는 건 난 몰라/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구/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고/오빠는 욕심쟁이/오빠는 심술쟁이/오빠는 깍쟁이야~’ 1938년 처음 발표된 ‘오빠는 풍각쟁이’에 나온다. 가수 박향림이 불렀다. 간드러진 콧소리와 가사의 내용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노래는 2004년 개봉돼 1174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초반부에 배경음악으로 깔리면서 대중에게 다시 알려졌다. 여기에서 궁금증 하나가 생긴다. ‘오빠’는 과연 누굴까. 1930년대의 여학생들은 장래 남편감으로 의사나 상인이 아닌 회사에 다니는 ‘샐러리맨 오빠’를 가장 선호했다고 한다. 시간만 나면 명동극장(당시 명치좌)으로 공연을 보러 다니고 술집도 마음대로 다니면서 불고기, 떡볶이 등 고급 음식을 맘껏 먹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이 노래 3절 가사에 샐러리맨 오빠에 대한 얘기가 잠깐 언급된다. ‘~날마다 회사에선 지각만 하구/월급만 안 오른다구 짜증만 내구/오빠는 짜증쟁이/오빠는 대포쟁이야’ 샐러리맨 오빠를 바라보면서 사랑과 투정을 부리는 대목이다. 당시에도 오빠부대를 쫓아다니는 여성팬들이 많았나 보다. 풍각쟁이는 원래 악기를 들고 사람이 많은 곳이나 시장터를 찾아다니는, 즉 떠돌이 인생을 말하지만 인생의 희로애락을 노래로 풀어내는 광대라는 뜻도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암울한 세상에서 세태를 풍자하고 희화한 만담(漫談)이 생겨났고 동시에 이를 노래로 만든 만요(漫謠)가 유행했다. 이 가운데 히트를 쳤던 만요가 ‘오빠는 풍각쟁이’를 비롯해 ‘신접살림 풍경’ ‘엉터리 대학생’ ‘다방의 푸른 꿈’ ‘화류춘몽’ ‘아리랑 낭낭’ ‘다방의 푸른 꿈’ ‘연락선은 떠난다’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1930년대 대중음악 개화기 때의 노래들이 80년 세월을 머금고 요즘 다시 한번 등장해 인기를 모으고 있다. 2010년 5월 8일 저녁이었다. 서울 홍대앞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는 흔치 않은 무대가 펼쳐졌다. 보통 때 같았으면 젊은이들이 인디밴드의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출 텐데 이날만큼은 낯설게도 ‘오빠는 풍각쟁이’와 ‘엉터리 대학생’ 등의 음악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를 흥겹게 따라 부르며 환호했다. 무대 위에서는 어린 아이에서 아가씨의 목소리, 중년의 살롱가수 같은 고혹적인 음색을 가진 여성이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연주는 ‘기타리스트 하찌와 악단들’이 맡아 클라리넷과 바이올린, 아코디언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었다. 이날 무대는 ‘풍각쟁이 은진, 새로 부른 근대가요 13곡’ 기념앨범 발매 쇼케이스 자리였다. 이후 소문이 번지면서 여러 차례 공연이 이루어졌다. 풍각쟁이 가수 최은진(53)씨는 젊은이들 사이에 그렇게 등장했다. 이에 앞서 2008년 11월 두산아트센터 기획콘서트 ‘천변풍경 1930’에 가수 이상은, 강산에 등과 함께 출연해 흑백영화의 성우처럼 특유의 교태와 아양으로 만요를 불러 관객들의 애간장을 녹이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작은 문화공간 아리랑에서 최씨를 만났다. 2003년 ‘아리랑’ 음반을 내고 나서 1930년대의 만요를 본격적으로 찾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창문 입구에는 ‘은진이는 풍각쟁이’ 등 그동안 공연했던 여러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안에는 고풍스러운 해골 마이크가 손님을 반기듯 홀로 우뚝 드러나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궁금해하자 그는 “(건너편에 있는 헌법재판소 정원을 가리키며)목련과 산수화를 볼 수 있고 새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뻥 뚫린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이 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는 까치도 함께 있다. 하늘, 달과 별 등 모든 자연이 맑고 순수하다”며 웃는다. “처음에는 1930년대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있다며 알음알음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다가 ‘풍각쟁이 은진’의 앨범 이후 많이 알려졌습니다. 화가, 사진작가, 패션디자이너, 요리연구가, 영화 관계자 등 문화 예술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오지요. 그들이 오면 자연스럽게 해골마이크를 붙잡고 질펀하게 풍각쟁이 노래를 들려줍니다.” 풍각쟁이가 부르는 만요의 바탕에는 재즈도 있고 엔카도 있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우리 옆집 대학생 호떡주사 대학생은/십년이 넘어도 졸업은 캄캄해~’로 시작되는 ‘엉터리 대학생’은 스윙재즈에다 엔카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만요는 세태를 풍자하고 희화한 노래로 얼핏 보면 가사가 엉터리 같지만 참으로 맑고 순수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시대의 아픔이 잘 녹아들어 있다고 강조한다. “1930년대는 시인들이 가사를 써서 한국적인 정서로 음악을 만들던 시기였지요. 고향, 꽃 피고 새 우는 것을 노래하고 가슴에도 꽃이 핀다는 것을 노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현대적인 편곡보다 당시의 분위기를 최대한 복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이런 노력에 공감해주는 젊은이들이 많아 고맙지요. 그동안 하나의 음악장르로 대접받지 못했던 만요가 당시 민초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는 자산으로 평가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만요 되살리기에 앞장선 계기는 2000년 어느 날 재즈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리랑협회에서 최씨에게 아리랑과 관련된 자료를 건네주면서 ‘나운규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아리랑 노래에 대해 뭔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며 여러 가지 주문을 했다. 아리랑이 운명처럼 가슴에 다가왔다는 것을 느낀 그는 뉴욕행을 포기하고 아리랑을 다시 찾는 일에 몰두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재즈카페에서 ‘개발새발 아리랑’이라는 노래와 연극을 합친 1인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서 불린 각종 아리랑을 복원해 ‘아리랑 소리꾼 최은진의 다시 찾은 아리랑’이라는 음반을 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1930년대의 노래를 접하면서 ‘만요 복원’이라는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됐다. 이쯤 해서 그의 인생 내력을 알아보자. 인천에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이미자의 노래는 죄다 불러 동네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하루는 학교를 가는데 동인천역 옆 한 전파사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꼼짝할 수 없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였다. ‘아, 나도 가수가 될 거야’라고 다짐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만약 학교에 안 들어가 음악을 계속했더라면 천재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지난번에 낸 만요음반도 누구한테 배워보지 않고 혼자 흥이 나는 대로 저절로 불렀다”고 말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인천의 한 연극단에서 창단멤버로 활동하다가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고교생 때 잠시 빠져들었던 신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다시 연극무대에 섰다. ‘방자전’ ‘약장수’ 등에 출연했고 노래 ‘광화문 부르스’를 불러 주목을 끌었다. 서른 살 무렵, 연희단거리패에서 무대에 올린 연극 ‘오구’와 ‘산씻김’, 그리고 ‘아시아 1인 연극제’ 등에서 연기를 했으며 그림자극과 인형극에서 장구를 치기도 했다. 특히 ‘오구’와 ‘산씻김’으로 도쿄 연극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연극판에서 ‘잘나간다’는 얘기를 들을 무렵 결혼을 했다. 애를 낳고 살림을 하다가 다시 무대로 나온 것이 마흔 되던 해였다. 1999년 한 케이블TV 방송에서 성대모사를 하는 ‘슈퍼 보이스 탤런트 대회’가 열렸다. 그는 신문광고를 보고 출전해 가수 양희은, 뽀빠이, 아동 TV극 텔레토비의 보라돌이 등을 그럴 듯하게 흉내를 내 우수상을 받았다. 대상 수상자는 배칠수였고 사회는 임성훈씨가 맡았다. 이후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 됐다. 재즈와 아리랑에 심취하고 음악사적으로 묻힌 만요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벌여나갔다. 환경운동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2001년 4개월동안 주변에서 모은 일회용품 쓰레기를 명성황후의 커다란 비녀에 매달아 서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환경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노래면 노래, 영화면 영화, 책이면 책에 대한 얘기를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이에 대해 “1년에 영화 70~80편을 보고 음악을 많이 듣고 고전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인생은 한번 왔다 가는 것입니다. 제대로 먹고 마시고 잘 놀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든지 제대로 하고 제대로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문화살롱을 여러 곳에 만들어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진 만요를 부르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질펀한 인생을 살아보는 것이지요.” “만요는 나의 인생이고, 정체성”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가수 최은진은 ‘아리랑 소리꾼’으로 불려…근대가요 13곡 음반 내 1960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에 들어갔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극단 미추홀 창단 멤버로 참여했다. 이후 연극배우로 활동하면서 ‘방자전’과 ‘약장수’ ‘오구’ ‘산씻김’ 등에 출연했다. 결혼으로 활동을 잠시 접었다가 1999년 성대모사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차지하면서 다시 무대에 섰다. 2001년 환경 보호를 주장하는 ‘쓰레기 퍼포먼스’를 펼쳤다. 2003년 ‘다시 찾은 아리랑’이라는 음반을 낸 후 ‘아리랑 소리꾼’으로 불렸다. 2008년 두산 아트센터의 기획콘서트 ‘천변풍경 1930’ 무대에 강산에, 백현진, 이상은 등과 참여해 1930년대에 유행했던 만요를 선보였다. 2010년에는 ‘풍각쟁이 은진, 새로 부른 근대가요 13곡’ 음반을 냈다. 요즘에는 서울 안국동에 있는 자신의 문화공간 아리랑에서 만요를 알리고 있다. 틈틈이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고 작은 공연을 열기도 한다.
  • 불후의 명곡 송소희, 홍경민과 ‘홀로 아리랑’…”전율의 가창력 소름돋네”

    불후의 명곡 송소희, 홍경민과 ‘홀로 아리랑’…”전율의 가창력 소름돋네”

    불후의 명곡 송소희, 홍경민과 ‘홀로 아리랑’…”전율의 가창력 소름돋네”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국악소녀’ 송소희(17·호서고)가 가수 홍경민과 ‘홀로 아리랑’을 불러 감동을 선사했다. 송소희는 지난 1일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삼일절 특집에서 홍경민의 파트너로 등장해 서유석의 ‘홀로 아리랑’을 열창했다.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송소희는 특유의 가창력으로 ‘아리랑’을 불러 관객과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불후의 명곡 송소희는 홍경민과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며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송소희-홍경민은 그러나 ‘내 나라 내 겨레’를 부른 김종서에 밀려 우승을 하지 못했다. 불후의 명곡 송소희 무대에 대해 네티즌들은 “불후의 명곡 송소희, 소름 돋는 가창력”, “불후의 명곡 송소희, 어쩌면 얼굴까지 저렇게 예쁠까”, “불후의 명곡 송소희, 사실상 1등이나 다름없다” 등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불후의명곡’ 국악소녀 송소희, 깜짝 출연 ‘어떤 노래 불렀지?’

    ‘불후의명곡’ 국악소녀 송소희, 깜짝 출연 ‘어떤 노래 불렀지?’

    국악소녀 송소희가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에 깜짝 등장했다. 송소희는 1일 방송되는 KBS 2TV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이하 불후의 명곡)’ 삼일절 특집에서 가수 홍경민의 파트너로 출연한다. 최근 ‘불후의 명곡’ 녹화에서 홍경민과 송소희는 서유석의 ‘홀로 아리랑’을 열창했다. 이 가운데 송소희는 자신의 주특기는 민요로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여 현장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이들의 무대를 본 출연진들은 “역시 송소희”라는 감탄과 함께 기립박수를 쳤으며 “450점이 나와야 한다. 너무 좋다”고 평했다. 또한 깜찍한 외모로 국악계 아이돌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송소희는 의외의 예능감을 뽐내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진 = KBS (국악소녀 송소희)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산간 오지마을에도 문화 복지 서비스

    경북도가 도내 산간 오지 마을에도 문화적 혜택을 주는 ‘문화 복지 서비스’에 나섰다. 또 행정기관 주도의 문화 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문화융성위원회를 설립한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26일 도청에서 ‘경북형 문화융성 추진 기본 계획’을 발표하고, 10대 대표 정책을 제시했다. 10대 정책은 ▲문화를 통한 민생 속으로 프로젝트 ▲문화유산을 활용한 지역 재생 ▲산수문화권 마을 재생 ▲산해진미 마을 재생 ▲종가, 고택문화 명품화 ▲경북형 길문화, 아리랑 문화보전 육성 ▲문화랜드마크 조성 ▲경북 문화의 세계화 ▲전통문화의 산업화 ▲경북형 문화 인력 양성 등이다. 박근혜 정부의 4대 국정 기조 중 하나인 문화융성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가기 위한 전략에서 나왔다. 김 지사는 “시골 마을에도 이제 문화 힐링 서비스가 필요하다”며 “대학 및 중고교 예술 동아리와 협약을 맺은 뒤 이들을 ‘문화 봉사단’으로 만들어 산골 오지에까지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마을회관 등을 리모델링해 시골 마을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문화 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도는 이를 위해 경북도 예술복덕방을 운영하는 한편 ‘민요 마실(마을의 방언)’, ‘사진 마실’, ‘연극 마실’ 등 시골 마을 어르신들이 스스로 조직하는 풍류방 조성을 도울 예정이다. 김 지사는 또 서울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 분야 출향 인사를 초청해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하는 한편 1기업 1문화 예술촌 자매결연 사업을 시작하는 등 ‘문화 귀농귀촌운동’도 벌이기로 했다. 도는 5개 분과 50여명으로 구성된 문화융성위를 설립, 문화 정책 수립 및 시행 과정에 민간 전문가 의견을 반영할 방침이다. 김 지사는 “경북형 문화융성 계획을 통해 경제적 개념의 중산층에서 탈피해 삶의 질 향상과 직결되는 문화적 개념의 중산층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대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평창오륜기 휘날리며… 하나된 강원

    평창오륜기 휘날리며… 하나된 강원

    ‘이제는 평창이다.’ 2014 소치동계올림픽 폐막으로 세계의 관심이 강원도 평창에 집중된 가운데 26일 올림픽 깃발이 강원도에 도착했다. 강원도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개최와 분위기 조성을 위해 이날부터 28일까지 사흘 동안 강원 지역 18개 시·군을 순회하는 범도민 화합 행사를 펼친다. 이날 범도민 화합 행사에서는 강원도청 앞 특설무대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을 알리는 동영상과 정선아리랑예술단이 펼치는 식전 공연, 올림픽기 입장과 올림픽 디데이 카운트다운 점등식 등 본행사, 크레용팝 등이 참가하는 축하 공연 등이 열렸다. 심석희, 공상정 등 강원도 출신 선수들도 참가해 열기를 더했다. 올림픽기는 28일까지 시·군을 순회하며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개최 열기를 전한다. 올림픽기는 환영 행사 등을 거친 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까지 4년간 평창군에 보관될 예정이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이승철, 동계올림픽 영웅들과 기념사진 “부러워”

    이승철, 동계올림픽 영웅들과 기념사진 “부러워”

    가수 이승철은 지난 24일 자신의 트위터에 “감사하고 고마운 얼굴들. 행복합니다. 든든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과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에는 피겨 여왕 김연아, 빙속 여제 이상화, 쇼트트랙 선수 박승희, 심석희 등 대한민국 빙상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이승철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선수들은 모든 부담을 털어낸 듯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승철은 이날 러시아 소치 해안클러스터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소치 폐막식에 초청돼 가수 나윤선, 성악가 조수미와 함께 ‘아리랑’을 열창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승철 폐막식 인증샷, 김연아-이상화-박승희 ‘여왕 다 모였네’

    이승철 폐막식 인증샷, 김연아-이상화-박승희 ‘여왕 다 모였네’

    ‘이승철 폐막식 인증샷’ 가수 이승철이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 인증샷을 공개했다. 이승철은 지난 24일 자신의 트위터에 “감사하고 고마운 얼굴들. 행복합니다. 든든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과 찍은 인증샷을 게재했다. 공개된 폐막식 인증샷에는 피겨 여왕 김연아, 빙속 여제 이상화, 쇼트트랙 선수 박승희, 심석희 등 대한민국 빙상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이승철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승철 폐막식 인증샷에서 선수들은 모든 부담을 털어낸 듯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승철은 이날 러시아 소치 해안클러스터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소치 폐막식에 초청돼 가수 나윤선, 성악가 조수미와 함께 ‘아리랑’을 열창했다. 네티즌들은 “이승철 폐막식 인증샷 부러워”, “이승철 폐막식 인증샷, 영웅들 다 모였네”, “이승철 폐막식 인증샷, 대박이다”, “이승철 폐막식 인증샷, 여왕들에 둘러싸였구나” 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 = 이승철 트위터(이승철 폐막식 인증샷)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승철 폐막식, 김연아-이상화-박승희 ‘여왕에 둘러싸인 가요황제’

    이승철 폐막식, 김연아-이상화-박승희 ‘여왕에 둘러싸인 가요황제’

    가수 이승철이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한 소감을 전했다. 이승철은 지난 24일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과 찍은 기념사진과 함께 “감사하고 고마운 얼굴들”, “행복합니다”, “든든합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사진 속에는 피겨 여왕 김연아, 빙속 여제 이상화, 쇼트트랙 선수 박승희, 심석희 등 대한민국 빙상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이승철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선수들은 모든 부담을 털어내고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승철은 이날 러시아 소치 해안클러스터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소치 폐막식에 초청돼 가수 나윤선, 성악가 조수미와 함께 ‘아리랑’을 열창했다. 사진 = 이승철 트위터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소치올림픽 폐막식 나윤선은 누구? 이승철 조수미와 ‘아리랑’ 열창

    소치올림픽 폐막식 나윤선은 누구? 이승철 조수미와 ‘아리랑’ 열창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리랑’을 열창한 재즈가수 나윤선에 대해 네티즌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24일(한국시간) 러시아 소치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소치 올림픽 폐막식에서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으로의 국기 이양식이 진행된 뒤 이를 기념하는 공연이 펼쳐졌다. 이날 나윤선은 가수 조수미, 이승철과 함께 재일동포 피아니스트 양방언이 편곡한 ‘아리랑’으로 무대를 꾸며 눈길을 끌었다. ’재즈 한류의 원조’로 불리는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은 건국대 불어불문학과를 거친 뒤 프랑스 보베 국립음악원 성악과를 수석 졸업했다. 이후 나윤선은 199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했으며 2004년 제1회 한국대중음악 최우수 크로스오버 부문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나윤선은 2009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2012년 제3회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표창 등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특히 유럽에서 높은 인기를 받고 있는 나윤선은 지난해 3월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가진 단독 콘서트가 전석 매진되고 관객들에게 15분간 기립박수를 받은 일화로 국내에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소치올림픽 폐막식 나윤선 이승철 조수미에 대해 네티즌들은 “소치올림픽 폐막식 나윤선, 미모뿐만 아니라 가창력도 최고. 이승철 조수미도 대단”, “소치올림픽 폐막식, 이승철 조수미와 나윤선이 함께 아리랑 부를 때 소름돋았다”, “소치올림픽 폐막식 나윤선 세계적인 재즈가수였구나. 이승철 조수미까지 대박” 등의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소치 폐막식’ 이승철 “감사하고 고마운 얼굴들” 선수들과 기념사진

    ‘소치 폐막식’ 이승철 “감사하고 고마운 얼굴들” 선수들과 기념사진

    가수 이승철은 지난 24일 자신의 트위터에 “감사하고 고마운 얼굴들. 행복합니다. 든든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과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에는 피겨 여왕 김연아, 빙속 여제 이상화, 쇼트트랙 선수 박승희, 심석희 등 대한민국 빙상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이승철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선수들은 모든 부담을 털어낸 듯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승철은 이날 러시아 소치 해안클러스터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소치 폐막식에 초청돼 가수 나윤선, 성악가 조수미와 함께 ‘아리랑’을 열창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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