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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적 축제 브라질 카니발서 ‘3·1운동 100주년’ 의미 재조명

    브라질 고유의 국민 축제 카니발에서 ‘3·1운동 100주년’의 의미가 조명될 예정이다. 브라질 한국문화원(원장 권영상)은 23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다음달 1일 오후 한인타운이 있는 상파울루 시내 봉헤치루 지역에서 3·1운동 100년 역사를 되새기고 양국의 수교 60년 우정을 기념하기 위한 문화 축제 ‘아리랑 카니발’을 마련한다고 밝혔다. 아리랑 카니발은 브라질의 거리 카니발 공연단 ‘블로쿠 푸주에’, 브라질 한인 문화예술연합회 등이 참가한다. 봉헤치루 지역 치라덴치스 지하철역 광장에서 열리는 기념식에 이어 블로쿠 푸주에가 대열을 이끄는 가운데 현지 주민과 한인 동포들이 양국 국기를 흔들고 자유와 평화의 노래를 부르며 거리행진을 펼칠 예정이다. 권 원장은 “카니발 축제를 통해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브라질 국민과 공감하고 수교 60주년을 함께 기념한다는 취지”라고 밝혔다. 한편 브라질 카니발 축제는 해마다 사순절(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교회 절기)을 앞두고 열리며, 전통 가톨릭 행사에 아프리카풍 타악기 연주와 열정적 춤이 합쳐져 생겨났다. 올해 카니발은 3월 5일이며, 10일까지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축제가 펼쳐진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북유럽 4개국 대표들이 말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 교육… 아리랑TV ‘더 디플로맷’

    북유럽 4개국 대표들이 말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 교육… 아리랑TV ‘더 디플로맷’

    교육 선진국으로 꼽히는 북유럽 4개국 대표들이 4차 산업혁명시대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리랑TV는 오는 14일 ‘더 디플로맷’(The Diplomat)에서 지난달 ‘4차 산업혁명시대의 교육과 고용’을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 ‘노르디톡스’(NORDtalks)를 방영한다고 밝혔다. 이 심포지엄에는 에로 수오미넨 주한 핀란드 대사, 프로데 술베르그 주한 노르웨이 대사, 야콥 할그렌 주한 스웨덴 대사, 마틴 루네 혹서 주한 덴마크 대사관 이노베이션센터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각 국가의 4차 산업혁명 전략과 교육정책을 비롯해 한국과 상생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마틴 루네 혹서 주한 덴마크 대사관 이노베이션센터장은 “시시각각 변하는 미래 사회에서 인간적인 가치와 특성은 기술로는 배울 수 없는 부분”이라며 “변통성 있는 교육 시스템은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로 수오미넨 주한 핀란드 대사는 연구개발, 양질의 교육 기회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 핀란드의 교육을 설명하며 이를 통한 한국과 핀란드의 협력을 희망했다. 혁신적인 교육시스템을 갖춘 북유럽 국가의 사례는 한국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프로데 술베르그 주한 노르웨이 대사는 “4차 산업혁명시대는 기술과 해법이라는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며 “어린 아이들과 젊은 청년들이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기술의 발전으로 직업을 잃거나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또 다른 전략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북유럽 4개국 대표들에게 듣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위한 준비와 협력방안’은 14일 오전 7시 30분 아리랑TV에서 방송된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디 이너뷰’ 석예빈 “BTS ‘아이돌’에 입힌 오고무…한국무용 세계화 꿈꿔”

    ‘디 이너뷰’ 석예빈 “BTS ‘아이돌’에 입힌 오고무…한국무용 세계화 꿈꿔”

    아리랑TV 토크쇼 ‘디 이너뷰(the INNERVIEW)’가 한국무용가 석예빈을 만났다.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 무드가 조성됐던 2018년. ‘봄이 온다’는 제목 아래 남한예술단이 평양에서 공연을 펼쳤다. 뜻 깊은 행사니만큼 오프닝 무대부터 남달랐는데, 화려한 3D 영상 연출에 한국무용가와 비보이의 콜라보가 남측과 북측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바 있다. 직접 관람한 김정은 위원장과 리설주 여사를 비롯해 1500여명의 북측 관객들은 2분간 큰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오프닝 공연의 히로인인 한국무용가 석예빈은 그날의 감동과 영광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때 박수 소리가 마치 한 여름의 장마 비 소리 같았어요. 비가 막 쏟아지는 것처럼 큰 박수 소리를 받을 수 있었죠. 끝나고 동행했던 북측 안내원분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화려해서 보기 좋았다, 첫 무대가 한국무용이어서 너무너무 좋았다고 칭찬해 주시더라고요. 현송월 단장도 포옹해 주면서 잘 봤다고 얘기하는데, 같은 예술가로서 교감 같은걸 느끼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공연은 잘 마쳤고 웃으면서 회상할 수 있지만 당시 상황은 생각보다 긴박했다. “기존 작품을 올리는 게 아니라 ‘봄이 온다’의 취지에 맞게 일주일 안에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 했어요. 홀로그램 영상 작업을 위해 스태프들과 3일, 4일 밤새가며 작업했죠” 사실 석예빈은 국내에서는 한국 무용의 선구자, 故 최승희 선생의 계승자로 유명하다.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국립국악원에서 단독 공연을 열 정도로 재능 있던 무용 신동이었던 석예빈은 최승희 춤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최승희 선생의 춤에는 손짓, 고갯짓, 어깻짓 이런 미세한 동작이 중요합니다. 작은 동작에서 큰 에너지를 보여주는 게 특징인데 그만큼 잘 살려내기 어렵죠. 최승희 선생의 작품 중에서 ‘물동이춤’을 가장 좋아하는데, 해외 관객들도 굉장히 좋아하고요.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도니까 기교적인 부분에서도 서커스처럼 재밌어 하고, 한국 무용의 새로운 면을 접하기 때문에 많이 흥미로워합니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최승희 춤 계승자 중 한 명인데, 김미래 (사)문화예술통합연구회 이사장은 최승희 선생의 직계 제자인 탈북 무용가 김영순 선생에게 사사 받았고 그 가르침이 대를 이어온 것이다. “어머니에게 무용을 배울 수 있단 건 정말 큰 장점이죠. 오빠도 국악기 타악을 하고 아버지는 무대 연출을 하시는데 온 가족이 한 공연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고, 서로에게 적절한 조언도 해주곤 합니다” 석예빈의 삶은 살아온 날의 대부분을 춤을 추면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로 22세, 젊은 아티스트로서 요즘 그녀의 최대 고민은 한국 무용의 대중화와 세계화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 주목한 게 바로 K-POP이다. “BTS(방탄소년단)의 ‘아이돌’이란 곡을 보고 깜짝 놀랐죠. ‘얼쑤 좋다, 지화자 좋다’ 이런 가사가 들어있었고 거기에 안무에도 한국적인 춤사위가 들어가 있더라고요. 이런 식으로도 한국 무용이 알려질 수 있겠구나 깨달았죠” 그러면서 BTS ‘아이돌’ 음악에 맞춰 새롭게 각색한 ‘오고무(한국 전통 민속무용)’를 선보이기도 했다. “롤모델인 최승희 선생처럼 한국무용을 세계에 전파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예요. 무엇보다 한국인들이 한국무용을 더 잘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서, 한국무용이 대중화 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고요” 리틀 최승희에서 성숙한 아티스트로 거듭난 한국무용가 석예빈의 이야기는 2월 1일 금요일 오후 5시, 아리랑 TV ‘디 이너뷰(the INNERVIEW)’에서 만날 수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설연휴 공연] 가락이 맞으니 풍류가 넘치네

    [설연휴 공연] 가락이 맞으니 풍류가 넘치네

    전통의 아름다움을 살린 국악 공연이 설 명절을 맞아 관객을 찾는다. 국립무용단은 명절 기획 시리즈 ‘설·바람’을 2월 5~6일 국립극장 하늘극장 무대에 올린다. ‘설·바람’에서는 섬세한 춤사위가 돋보이는 신작 4편과 지난 명절 공연 ‘추석·만월’에서 선보인 2편의 소품을 한데 모은 한국 춤 잔치가 펼쳐진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몸과 마음가짐으로 복을 기원하는 의미의 ‘신일’(愼日)을 첫 작품으로 선보이는 데 이어 선비정신을 담은 남성 춤 ‘한량무’, 여성 춤의 섬세함과 강인함을 표현하는 ‘당당’, 평채 호흡을 응용한 춤사위인 ‘평채소고춤’ 등이 관객을 찾는다. 이 밖에 지난해 작품인 ‘북의 시나위’, ‘미인도’도 함께 볼 수 있다. 정종임 연출은 “원형 무대의 특성을 살려 무대와 관객이 긴밀하게 호흡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형식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3인 이상 가족이나 한복을 입고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은 30% 할인된다. 국립국악원은 같은 기간 ‘돈豚타령’ 공연을 예악당 무대에서 선보인다. 야외마당에서 펼쳐지는 연희집단 ‘더 광대’의 길놀이부터 시작하는 공연에는 국악원 소속 4개 예술단체와 ‘국악계 아이돌’로 불리는 김나니, 김준수 등이 신명나는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무용단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잡귀를 쫓기 위해 행했던 나례 의식에서 춘 궁중무용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을, 민속악단은 ‘굿풍류 시나위’와 ‘축원가’ 등으로 관객의 만복을 기원한다. 김나니와 김준수는 국립국악원 창작악단과 함께 ‘남도아리랑’, ‘제비노정기’, ‘어사출두’ 등 친근한 국악 선율로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을 전한다.서울 세종문회회관이 운영하는 삼청각에서는 같은 기간 특별공연 ‘진찬’이 마련된다. 한식으로 구성된 식사과 국악을 함께 즐기는 삼청각 고유의 브랜드 공연으로, 판소리 ‘흥부가’ 중 흥부가 박 타는 대목을 재편곡한 연희 퍼포먼스 ‘판&소리‘, 판소리의 창작곡인 쑥대머리를 재구성한 ‘어울락(樂)’ 등을 볼 수 있다.서울남산국악당은 같은 달 4~5일 입춘·설 특별공연으로 ‘김매자의 춤-샤이닝 라이트’를 무대에 올린다. 한국 창작춤의 대모로 불리는 김매자의 과감한 혁신과 도전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로, 지난해 서울남산국악당 상주 단체였던 젊은 음악그룹 나무가 함께한다. 김매자는 이번 공연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독무 ‘일무’와 새롭게 열린 새해의 신명과 희열을 함께 나누자는 의미를 담은 ‘샤이닝 라이트’ 등을 선보인다. 이번 공연의 티켓을 예약하는 관객에게는 국악당 카페 달강의 음료와 설 선물로 꿀돼지머리 물병을 제공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③ ①
  • [기고] 평창올림픽 1주년과 평화 유산 만들기

    [기고] 평창올림픽 1주년과 평화 유산 만들기

    2월 9일, 평창올림픽 1주년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 1년 전 개막식을 앞두고 남북과 북미 간 고조된 긴장과 극적인 전환, 그리고 환호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평창은 올림픽을 계기로 강원도 대관령 인근의 시골도시라는 고유명사에서 평화올림픽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평화는 평창올림픽의 최대 유산이 되었다. 이 역사적 행사 1주년을 기념하여 평창평화포럼이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평창 알펜시아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포럼은 국내외 평화와 인권관련 시민사회 단체와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강원도, 평창군,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아리랑 국제방송 등이 공동으로 준비하고 있다. 이 포럼에는 ‘아이 캔’ 등 주요 노벨 평화상 수상 단체를 포함해 약 50여개국 100여개 평화운동 단체 대표 약 1000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평창에서 세계와 함께 평화를 구상하다.”란 주제 아래, 당면한 현안을 다루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세계평화의 큰 청사진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진행한다. 평창평화포럼의 별칭은 ‘헤이그+20’이다. 1999년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 20주년에 열리기 때문이다. 이 회의는 1899년 개최된 제1차 만국평화회의 100주년 기념으로 열렸다. 평화 분야의 여러 국제 시민사회단체가 2년간 준비한 이 회의에 지난해 작고한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 등 수많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이 참석했다. 그는 폐회식에서 “두 번의 국가간 전쟁을 겪은 20세기와 달리 21세기의 평화는 시민주도로 아래로부터 만들어가야 한다”며 참가자를 격려했다. 한국에서도 당시 약 30여명이 참석하였고, 북한도 민간 대표단을 파견하여 남북 평화 대화가 이루어졌다. 평창평화포럼은 이 전통을 이어받아 ‘평창평화의제 2030’을 채택할 예정이다. 지난 20년간 헤이그 평화의제 실천을 평가하고 대체하는 새로운 의제를 만드는 것이다. 올해 첫 포럼에서는 기본 안을 채택하고, 1년간 국제적으로 지역별·주제별 후속 논의를 통해 내용을 보완할 예정이다. 이 의제가 내년 정식으로 채택되면 2020~2030년 10년간 세계평화운동의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다. 2020년은 전세계 냉전의 시발점었던 한국전쟁 70주년이기도 하다. 평창평화의제에는 최대 현안인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조약 캠페인 그리고 평화를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연계해서 실천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이를 통해 평창은 일회성 올림픽 개최지를 넘어 한반도 발 세계평화운동의 허브로 역사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까지 평화는 국가안보란 명분하에 소수 엘리트 관료와 전문가의 영역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유엔이 최근 강조하는 지속적 평화와 평화구축 의제는 시민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평화 분야의 대표적인 시민참여 사례로는 1997년의 대인지뢰금지조약과 2017년 핵무기금지조약이 있다. 그 해 노벨 평화상은 이 조약 제정 캠페인을 주도한 평화 시민단체가 받았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는 유엔 또는 외국에서 글로벌 의제를 만들면 이를 국내에 소개하고 실천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에 반해 평창평화포럼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경험을 국제적으로 해석하고 연계해서 보편적 평화운동 의제로 만드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평창평화포럼은 지자체와 시민사회가 협력하는 아래로부터의 공공외교 모델이기도 하다. 평창평화포럼은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국민의 성원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치른 평창올림픽의 평화 유산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 ‘설’ 명절 기분 내고 싶어? 박물관·미술관 어때?

    ‘설’ 명절 기분 내고 싶어? 박물관·미술관 어때?

    국립 박물관·미술관이 설 연휴인 다음달 2일부터 6일까지 다양한 문화행사를 준비했다.국립중앙박물관은 전국 지방의 아리랑과 풍물, 탈놀이, 민요 등이 어우러진 신명나는 전통 연희극 ‘으랏차차 아리랑’을 연다. 젊은 전통연희집단인 ‘꼭두쇠’의 창작 레퍼토리로, 각 지방 아리랑이 만나 태어난 다섯 장수 이야기를 그린 전통 연희극이다. 경주·광주·전주·부여·공주·진주·청주·대구·김해·제주·춘천·나주 국립박물관을 비롯해 국립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에서도 설 음식 만들기, 민속놀이 체험, 특별공연, 가족영화 상영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마련했다. 공주·광주·전주 국립박물관은 한복을 입고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기념품을 준다. 청주 국립박물관은 방문객에게 황금돼지 저금통을 나눠 준다.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6일 오후 2, 4시 종이로 변해버린 아빠를 찾아 나선 주인공의 모험기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인형극 ‘종이 아빠’가 열린다. 4~6일에는 서울·과천·덕수궁·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무료로 볼 수 있다. 돼지띠 방문객에게는 선착순 100명에게 초대권 2장을 준다. 3일에는 선착순 20명에게 국립현대미술관 달력을 준다. 자세한 행사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www.museum.go.kr), 국립한글박물관(www.hangeul.go.kr), 국립현대미술관(www.mmca.go.kr) 홈페이지 참조.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최문순 강원지사 “평화 메시지 창출 위한 남북 태권도 공연·아리랑 협연 등 추진”

    최문순 강원지사 “평화 메시지 창출 위한 남북 태권도 공연·아리랑 협연 등 추진”

    2018 평창동계올림픽과 동계패럴림픽 1주년 기념행사가 다음달 7~17일 평창·강릉 등 강원 지역 곳곳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1주년 기념식은 평창올림픽 개·폐회식장에서, 문화공연행사인 대축제는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다. 30일 최문순 강원도지사를 만나 어떤 행사가 열리고 의미는 무엇이지 들어봤다. →평창동계올림픽은 남북의 새로운 평화시대에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1주년 행사에서 남북행사는 어떻게 추진되는지. -어게인 평창 핵심 키워드는 ‘평화 메시지 창출’이다. 남북 공동행사는 남북 태권도시범단 합동공연과 북한, 헝가리, 라트비아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과 우리 대표팀이 참가하는 국제여자아이스하키 친선 대회, 남북아리랑 협연이 포함된 피스콘서트 등이 열린다. 현재 북측 태권도시범단과 여자아이스하키선수단, 아리랑 연주자 초청은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북측에 전달된 상태로 북한 당국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어게인 평창 행사에 ‘평화’를 모티브로 삼은 행사가 눈에 띈다. 어떤 내용인가.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이 남북, 북·미 간 긴장을 반전시켜 대화 분위기로 전환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평창올림픽 무형의 평화 레거시(유산)를 계승해 이번 어게인 평창에서는 ‘평화’를 키워드로 하는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를 평화대축제로 엮어 선보일 계획이다. 그 가운데 피스위크와 평창포럼은 지역과 세계평화를 비롯한 다양한 의제들에 대한 논의의 장이 될 것이다. →이번 1주년 행사 가운데 문화예술부문을 소개한다면. -평창대회는 평화올림픽이란 별칭 외에도 우리나라의 문화 역량을 전 세계인 앞에 선보인 문화올림픽으로서 성과를 거뒀던 대회였다. 이러한 문화올림픽의 유산인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강원도 전역과 서울 등지에서 펼쳐진다. 특히 10여년간 국내외에서 명성을 쌓아 탄탄하게 입지를 다져 온 대관령국제음악제가 올림픽을 계기로 추진한 겨울음악제로 활약이 컸다. 이 겨울음악제가 올해엔 클래식, 재즈 및 국악 컬래버 등의 무대를 준비해 7차례의 메인콘서트와 3차례의 무료 공연을 펼치며 팬들을 찾아간다. 또 강원도 내 시·군별로 문화올림픽의 대표 프로그램인 ‘아트 온 스테이지’를 비롯한 지역별 문화행사가 열린다. 정선아리랑센터에서는 강원도립극단의 ‘뮤지컬 메밀꽃 필 무렵’과 강원도립국악단의 특별공연 ‘평화의 몸짓, 한반도를 날다’가 펼쳐진다. 춘천 백령아트센터에서는 올림픽 1주년 기념 ‘평화’ 퍼포먼스와 합창단 공연 등 문화축전이, 중도 일대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수천개의 감동별빛’의 주제로 세계불꽃축제가 열린다. 평창 용평리조트에서 열리는 평화음식축전은 국내 셰프들에 의한 북한 음식 재현을 통한 남북 음식쿠킹쇼와 남북 음식 전시 등의 행사로 치러진다. →어게인 평창의 해외마케팅은 어떻게 추진되는지. -어게인 평창은 우리만의 잔치로 끝나는 게 아니다. 행사를 활용해 강원도뿐 아니라 우리나라로 외국 손님을 끌어들일 수 있게 다각적인 해외 관광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 20여개국 5000여명의 관광객 및 주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지역별·계층별로 특화시킨 맞춤형 관광상품을 개발해 어게인 평창 기간 동안 많은 해외관광객이 강원도를 찾게 할 계획이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현장 행정] ‘제로페이’ 홍보대사로 변신한 성북구청장

    [현장 행정] ‘제로페이’ 홍보대사로 변신한 성북구청장

    “제로페이는 소상공인 부담을 덜고, 소비자 혜택을 늘리기 위해 서울시가 오랫동안 고심한 사업입니다. 제로페이 가맹점 확대에 주력, 더 많은 소상공인과 시민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승로 서울 성북구청장이 서울시가 도입한 모바일 간편 결제 서비스인 ‘제로페이’ 홍보맨으로 나섰다. 지난 24일 오후 3시 장위전통시장에서다. 이곳은 장위동 일대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재개발 사업으로 예전만 못하지만 주민과 상인, 구청이 협력해 상권이 살아 있는 시장 중 하나다. 이 구청장은 시장을 누비며 상인과 주민들에게 특유의 ‘폴더’ 인사를 건네며, 제로페이 혜택과 결제 용이성을 역설했다. 실제 한 떡집에 들러 떡을 산 뒤 제로페이로 내기도 했다. 이 구청장은 “스마트폰 앱으로 QR코드를 인식하고 금액을 입력하면 소비자 계좌에서 판매자 계좌로 금액이 이체된다”며 “스마트폰만 있으면 아주 쉽게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전통시장뿐 아니라 식당, 봉제업체 등 지역 내 모든 소상공인들에게 제로페이를 보급하겠다”고 덧붙였다. 떡집 주인은 “아직 낯설긴 하지만 결제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돼 상인들이 속속 제로페이 결제 시스템을 갖춰 나가고 있다”며 “결제 수수료뿐 아니라 전통시장이 활성화돼 근심도 제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구청장은 지역민들에게 전통시장 홍보도 했다. “2월 1일까지 성북구 모든 전통시장에서 제사용품 5~20% 할인과 떡메치기, 윷놀이, 제기차기, 공연, 경품추첨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니 많이 찾아와 달라”고 당부했다. 길희봉 장위전통시장 상인 대표는 “재개발로 인해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면서 시장이 고사 상태나 다름없다”며 “설 연휴를 앞두고 구청장께서 직접 시장을 찾아 상인들에게 힘이 돼 주고, 상인들이 하나라도 더 혜택을 받을 방법도 알려줘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느낌”이라고 했다. 이 구청장은 돈암시장도 찾아 제로페이와 전통시장을 널리 알렸다. 돈암시장은 상인들이 지역의 전설을 활용해 ‘선녀 순대’, ‘선녀 족발’ 등을 개발, 젊은이들에게 각광받는 곳이다. 이 구청장은 다음달 1일까지 아리랑시장·돌곶이시장·길음시장 등 관내 6개 전통시장에서 제로페이와 전통시장 홍보를 한다. 이 구청장은 “경기 침체와 골목 구석구석까지 거대 자본이 들어오면서 전통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역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하는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김구, 우파정당 세워 中국민당과 연합 전선…사회주의 김원봉 “자유는 우리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김구, 우파정당 세워 中국민당과 연합 전선…사회주의 김원봉 “자유는 우리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

    대한민국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나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가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로 운영돼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이 대부분 민족주의자이다보니 역사학계에서는 그렇게 분류한다. 두 계열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기 전부터 갈라져 활동했다. 하지만 일제의 위력을 체감한 1920년대 후반부터 ‘서로 힘을 합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안창호 “대혁명적 조직으로 하나된 행동을” 지난달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찾아간 중국 상하이 황푸구 닝하이둥루. 빌딩숲 사이로 저층의 주상복합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식당들이 많아 활기가 넘쳤다. 임정 시절 상하이 한인들의 종교 활동 공간이자 독립운동 집회 장소로 쓰였던 기독교 예배당 ‘산이탕’ 터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여기서 안창호(1878~1938)가 ‘민족유일당’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한국 독립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대인배였다”고 평가했다. 1923년 전 세계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의 미래를 논의하고자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임정이라는 구심점이 와해되자 정치 세력들도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개별 독립단체가 일본을 상대하기에는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이상의 분열은 자멸’이라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이때 안창호가 모든 독립운동 단체·정당을 하나로 묶는 연합정당을 창설하자고 주장했다. 이것이 민족유일당 운동이다. 안창호는 1926년 7월 산이탕에서 동포들에게 호소했다. “공산주의 혁명을 하자, 무정부주의로 가자, 복벽(왕정복고) 운동에 나서자 등 각자가 자기의 의견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다투면 안 됩니다. ‘민족 혁명’을 한다는 각오로 ‘대(大)혁명적 조직’을 만든 뒤 하나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을 건지기 위해 개인의 사리(私利)를 버리고 큰 혁명당을 조직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민족 혁명이란 독립운동 세력이 정치·경제·종교의 차이를 떠나 민족 역량을 하나로 모으자는 것이다. 대혁명적 조직은 민족 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구심체를 뜻하는데, 이는 결국 임정을 대신할 새 기구를 꾸리자는 의도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가 조국 독립인 만큼 모든 갈등을 잠시 접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백가쟁명에 나서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민족유일당 운동은 독립운동계의 최대 화두가 됐다.●반임정 기치 내건 조선민족혁명당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윤봉길(1908~1932) 의거로 일본에 쫓겨 항저우로 피신했던 1935년 7월. 난징에서 의열단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5당이 모여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김두봉(1889~1961)을 비롯한 사회주의자, 김원봉(1898~1958년)으로 대표되는 무정부주의자, 이청천(1888~1957)과 신익희(1892~1956) 같은 민족주의자가 두루 모였다. 이들은 ‘반(反)임정’ 혹은 ‘비(非)김구파’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 독립운동가 2200여명이 참여한 거대 좌파 정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야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좌우 통합 분위기가 거셌다. 중국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제와 함께 싸우기 위해 1차 국공합작(1924~1927)을 성사시켰다. 소련에서도 한국 사회주의자들에게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은 이런 시대적 조류와도 잘 맞았다. 이들은 일본의 중국 침략(1931)과 독일의 국제연맹 탈퇴(1933),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1935) 등을 보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시 한 번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으로 예측하고 한국 독립의 기회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초기부터 김원봉이 이끄는 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의 독단이 문제가 됐다. 통합 두 달 만인 1935년 9월 한국독립당 조소앙(1887~1958)과 신한독립당 홍면희(1877~1946) 등이 탈당했다. 1937년 3월 이청천(1888~1957)도 김원봉과 결별하고 조선혁명당을 다시 세웠다. 충칭에서 만난 이선자(55) 전 충칭임시정부기념관 부관장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 기밀 문서를 살펴보면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힘을 합치지 못하고 분열을 일삼는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고 전했다.●한국국민당 창립 멤버 이동녕·안공근 조선민족혁명당은 외교 독립 노선에 매달려 온 임정 인사들을 ‘몽상가’로 여겨 줄곧 임정 폐지를 주장했다. 김구(1876~1949)는 이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과거 사회주의 세력이 ‘자유시 참변’(1921)과 ‘레닌 자금 배달사고’(1920) 등으로 독립운동 진영을 어려움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을 지키고자 ‘대항마’ 성격의 우파 정당을 준비했다. 김구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된 지 넉 달쯤 뒤인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결성했다. 창립 멤버는 이동녕(1869~1940)과 안공근(1889~1939) 등으로 대부분 그의 핵심 측근이었다. 이 정당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 국민당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여겼다. 실제로 한국국민당은 중국 측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며 임정의 여당 역할을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한국국민당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돕고자 조선민족혁명당 탈당파인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일종의 우파 연합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계열도 같은 해 12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해 맞섰다. 이로써 중국 본토에서 독립운동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임정파·민족주의 세력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주축이 된 반임정파·사회주의 세력의 두 축으로 재편됐다.●재평가 받아야 할 의열단 지도자 김원봉 난징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시간쯤 차로 이동하자 한 산골마을에 서탕녠 저수지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산을 타고 1㎞ 넘게 걸어 올라가니 산 중턱쯤에 폐허에 가까운 도교사원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1920년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무장단체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이 조선혁명간부학교(1932~1935) 학생들을 훈련시킨 톈닝사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일부러 산속 깊숙한 절에서 군사 훈련을 한 것이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우리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1919~1920)를 신성시하면서 이 학교 출신이 주축인 의열단을 무시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우리나라에서 재평가받아야 할 독립운동가를 꼽으라면 김원봉이 단연 1위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봉은 스무 살이던 1918년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현 난징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 같은 약소국을 위해 일본과 싸워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고 미련없이 학업을 포기했다. 이후 무장투쟁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가 의열단원에게 한 말이 지금도 전해진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우리(의열단)가 선구자가 돼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조국 광복의 꿈을 안고 의열단을 창단한 스물한 살 때부터 광복을 맞아 귀국한 마흔일곱 살까지 26년간 일제와 쉬지 않고 싸웠다. 조선총독과 친일세력, 한국인 밀정을 처단하고자 의열단 투쟁을 진두지휘했고,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항일무장 세력으로 인정받은 조선의용대도 세웠다. 그는 1919년 3·1운동을 ‘실패한 혁명’으로 봤기에 이를 계승한 임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래도 조선 독립을 위해 1941년 김구와 과감히 손잡고 임정에 참여했다.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과 임정 군무부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 해방을 앞당겼다.●일제, 현재 가치 300억원 넘는 현상금 걸어 일제는 그에게 100만 대양(大洋·중국 화폐단위)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다. 요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3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이 60만 대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원봉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필명 님 웨일스)가 쓴 책 ‘아리랑’에 나오는 김원봉에 대한 묘사다. “그는 고전적 유형의 의열투쟁가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몰랐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동경했다. 미남으로 빼어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김원봉의 생애는 영화 ‘아나키스트’(2000)를 시작으로 ‘암살’(2015), ‘밀정’(2016) 등을 통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상하이·난징·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영화 ‘공작’ 영화기자들이 뽑은 ‘2018 올해의 영화’

    1990년대 활동한 대북 스파이 ‘흑금성’을 소재로 한 영화 ‘공작’이 영화 담당 기자들이 뽑은 ‘2018 올해의 영화’가 됐다. 한국영화기자협회는 3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제10회 ‘올해의 영화상’ 시상식을 열고 ‘공작’을 작품상으로 선정했다. ‘공작’의 이성민과 주지훈이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으면서 ‘공작’은 3관왕에 올랐다. 감독상은 ‘버닝’을 연출한 이창동 감독에게 돌아갔다. ‘미쓰백’의 한지민과 ‘독전’의 진서연은 각각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신인남우상과 신인여우상은 ‘안시성’의 남주혁과 ‘마녀’의 김다미가 받았다. ‘죄 많은 소녀’는 독립영화상과 함께 배우 전여빈이 올해의 발견상 수상자로 뽑히면서 2관왕에 올랐다. 심사위원상은 ‘국가부도의 날’에서 열연한 김혜수가 받았다. 외국어영화상은 ‘퀸’ 신드롬을 일으킨 ‘보헤미안 랩소디’가 선정됐다. 한편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상도 마련됐다. 정지영 감독과 배우 안성기 두 영화인에게 특별공로상이 주어졌다. 올해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제정된 민족영화상에는 일제강점기의 항일 투쟁 영화 ‘아리랑’(1926), ‘먼 동이 틀 때’(1927), ‘사랑을 찾아서’(1928)가 선정됐다. 올해의 영화상은 미디어의 눈으로 영화의 예술적 가치와 산업적 의미를 조명하고 한국 영화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지난 2010년 제정됐다. 올해는 지난해 1월 1일부터 12월 31일 개봉한 영화를 대상으로 협회 소속 64개 언론사 기자 90여명의 투표를 통해 수상작과 수상자를 결정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전통 어업문화 근간 ‘전통어로방식’ 국가무형문화재 된다

    전통 어업문화 근간 ‘전통어로방식’ 국가무형문화재 된다

    물고기를 잡을 때 지형과 조류의 흐름, 물고기의 습성을 고려해 어구(漁具)를 부리는 ‘전통어로방식’이 국가무형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전통 어업문화의 근간인 전통어로방식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고 29일 밝혔다. 전통어로방식은 물고기를 잡는 기술 뿐 아니라 관련 기술과 지식 등의 문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어구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방식은 고대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문헌에 ‘어량’(漁箭)이라는 어구가 등장한다. 어량은 대나무 발을 치거나 돌을 쌓아서 밀물 때 연안으로 몰려들었다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는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어구로, 조선시대 서해안과 남해안 서쪽에서는 ‘어살’(漁箭)로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대나무 발을 친 것은 ‘살’, 돌을 쌓은 경우 그 축조물을 ‘독살’로 지칭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어로 기술이 발달하고 해산물 수요가 증가하면서 ‘방렴’(防簾)이나 ‘장살’(杖矢) 같은 변형된 어구가 등장했다. 방렴은 대나무 발을 고정하기 위해 나무 기둥 아래에 무거운 짐돌을 매단 어구이고, 장살은 고정한 나무 기둥 사이에 대나무 발 대신 그물을 설치한 도구다. 이같은 어로방식은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에 수록된 ‘고기잡이’에도 묘사돼 있다. 상인들이 바다에 설치된 어살이 있는 곳으로 배를 타고 나가서 물고기는 사는 모습이 담겨있다.전통어로방식은 1970년대 이후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경남 남해군 지족해협과 사천시 마도·저도 등에서 하는 죽방렴 멸치잡이가 있다. 그물살을 이용한 고기잡이 역시 전통어로방식의 명맥을 잇고 있다. 문화재청은 전통어로방식의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로 어민들의 경험적인 지식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고, 어업사와 민중생활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전통방식이 다양하게 계승돼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다만 전통어로방식이 어촌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는 생활관습이자 문화라는 사실을 고려해 특정 보유자와 보유 단체는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보유자와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은 국가지정문화재는 아리랑과 김치 담그기, 장 담그기 등을 포함해 8건이다. 문화재청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영국을 감동시킨 ‘맑은 소리’

    대구성보학교 학교기업 맑은소리하모니카앙상블이 영국 해외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지난 1월 10일 영국 특수학교인 Linden Lodge School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15일 SouthFields Academy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끝내 총 11차례의 영국 공연을 통해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특히 10일 주영국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공연에는 한인은 물론 현지 영국인들 중에서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100여명이 공연장을 찾았으며 사전관람 신청을 받은 결과 이례적으로 많은 인원이 몰려 선착순으로 마감되었다. 이날 공연에서는 한국의 정서를 담은 아리랑부터 영국의 민요와 가요까지 연주해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으며 마지막 곡의 연주가 끝난 후 관객들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공연을 관람한 앤디 윌리엄(52)씨는 “정말 말이 필요 없는 환상적인 공연이었다. 잊을 수 없는 연주를 해준 맑은소리하모니카앙상블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맑은소리하모니카앙상블의 하미애(성보학교 교장) 단장은 “이번 영국 해외공연은 장애를 뛰어넘은 단원들의 진심이 담긴 연주를 통해 영국 현지인들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단원들의 연주 역량을 향상시키고자 기획했다. 앞으로도 단원들이 의미 있는 걸음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새해엔 ‘왈츠’…빈 향기 물씬 담긴 신년음악회들

    새해엔 ‘왈츠’…빈 향기 물씬 담긴 신년음악회들

    왈츠와 폴카 리듬의 춤곡으로 꾸며지는 빈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를 닮은 새해 공연들이 곳곳에서 마련된다. 마포문화재단은 23일 마포아트센터에서 ‘2019 비엔나왈츠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이 펼쳐진다고 12일 밝혔다. ‘봄의 소리 왈츠’, ‘남국의 장미 왈츠’를 비롯해 빈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고정 앵콜곡’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등 우아하고 경쾌한 곡들로 무대가 펼쳐진다. 지휘자 산드로 쿠투렐로가 1990년 창단한 이 단체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춤곡을 주요 레퍼토리로 한다. 이번 공연의 협연에는 슬로바키아 반스카비스트리차 국립오페라단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소프라노 파트리샤 솔로투르코바가 출연한다. 부천필하모닉은 18일 부천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비엔나의 봄’ 공연을 선보인다. 상임지휘자 박영민의 지휘로 왈츠와 폴카, 행진곡, 마주르카 등 다양한 형태의 춤곡을 들을 수 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라데츠키 행진곡’ 외에도 ‘이집트 행진곡’, ‘전자기’ 등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곡들도 선보인다. 협연에는 테너 석정엽과 소프라노 구민영이 함께한다. 과천시립교향악단은 같은날 과천시민회관에서 신년음악회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서곡’을 비롯해 춤곡과 오페라 아리아 등을 선보인다. 세계적 명성의 빈 소년 합창단은 26~27일 예술의전당에서 신년음악회를 연다. 1969년 첫 내한 이후 140회가 넘는 내한공연으로 한국 팬들의 사랑을 받은 빈 소년 합창단은 이번 공연에서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 요들송 ‘뻐꾸기’, 민요 ‘아리랑’과 가곡 ‘그리운 금강산’ 등을 들려준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씨줄날줄] 능라도 5·1경기장/황성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능라도 5·1경기장/황성기 논설위원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디움은 평양에 있는 ‘능라도 5월 1일 경기장’이다. 북한이 88서울하계올림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행사를 치르겠다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유치하고, 1989년 5월 1일 서울 한강의 여의도 같은 대동강의 능라도에 완성했다. 그해 7월 축전에는 세계 177개국에서 2만 2000명의 청년 학생이 참가했고, 남측에서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임수경씨가 참석했다. 마크 어빙 등이 펴낸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의 하나다.정몽준 아산재단이사장이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내던 1999년 평양을 방문해 5·1경기장을 둘러보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의 분산 개최를 북한에 제의했다. 북한이 난색을 표명해 무산됐지만, 끼어서 앉으면 20만명까지 들어갈 수 있다고 믿은 그는 국제축구연맹(FIFA)과 일본을 설득할 수 있다며 몇 년간 의욕을 보였다. 말이 15만명 수용이지 20만 가까운 관객이 들어간 적이 있다. 일본의 프로레슬러이자 지금은 참의원 국회의원인 안토니오 이노키(75)가 실전에 나섰던 경기다. 1995년 4월 북한 정부가 5·1경기장에서 주최한 프로레슬링 대회에 19만명이 관람해 세계 프로레슬링 사상 최대의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 다목적인 5·1경기장은 2000년대에는 집단체조 ‘아리랑’ 등의 집단체조 공연장으로 쓰였다. 미국 국무장관으로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을 관람했으며,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리랑’을 봤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15만명의 평양시민 앞에서 “8000만 겨레의 손을 굳게 잡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는 연설을 한 것도 5·1경기장이다. 5·1경기장은 남북 교류와 인연이 많다. 남북 대표팀의 통일축구대회가 1990년 10월 11일 5·1경기장에서 열렸고, 1999년, 2015년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도 5·1경기장에서 개최됐다. 서울·평양 축구대회 ‘경평전’의 부활을 서울시가 추진 중인데 5·1경기장에서 열린다면 잔디를 다시 깔아 주는 조건으로 올해 개최될 가능성이 있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평양선언 1주년인 오는 9월 5·1경기장에서 방탄소년단(BTS)의 공연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안 의원은 “한 달쯤 전 기획사 쪽에 타진을 했으나 답변이 없다”면서 “무료 공연을 하겠다는 스타들이 많은 만큼 5·1경기장 공연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가 급속도로 진전된다면 BTS가 평양 공연을 망설일 이유는 없다. 지난해 4월 걸그룹 레드벨벳의 공연에 서먹한 얼굴을 했던 평양 시민이 BTS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된다. marry04@seoul.co.kr
  • 한국 음식문화의 뿌리 ‘장 담그기’ 국가무형문화재 됐다

    한국 음식문화의 뿌리 ‘장 담그기’ 국가무형문화재 됐다

    콩을 발효해 간장과 된장을 만드는 기술인 ‘장(醬) 담그기’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장이라는 음식 자체와 함께 재료를 준비해서 장을 만드는 전반적 과정을 아우르는 ‘장 담그기’를 국가무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했다고 9일 밝혔다. 장 담그기는 한국의 전통 음식문화 중 ‘김치 담그기’(국가무형문화재 제133호)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무형문화재가 됐다. 우리나라는 콩을 발효해 먹는 ‘두장’(豆醬) 문화권에 속하며 삼국시대부터 장을 만들어 먹었다고 알려졌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장을 보관하는 창고인 장고(醬庫)를 두었고 ‘장고마마’라 불리는 상궁이 직접 장을 담그고 관리하기도 했다. 장 담그기는 콩 재배, 메주 만들기, 장 만들기, 장 가르기, 숙성과 발효 등의 과정을 거친다. 메주를 만든 뒤 된장과 간장이라는 두 가지 장을 제작하고, 지난해에 사용하고 남은 씨간장에 새로운 장을 더하는 겹장 방식은 한국만의 독창적 문화로 평가된다. 다만 문화재청은 장 담그기가 우리나라 전역에서 각 가정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전승되는 생활 관습이자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보유자와 보유단체가 인정되지 않은 국가무형문화재로는 아리랑, 제다(製茶·차를 만드는 전통기술), 씨름, 해녀, 김치 담그기, 제염(製鹽), 온돌문화가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부경대 학생, 영국현지에서6·25전쟁참전용사들의 희생정신, 영원히 기억할게요.”

    부경대 학생, 영국현지에서6·25전쟁참전용사들의 희생정신, 영원히 기억할게요.”

    부경대 학생들이 영국 현지에서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 보은활동을 펼쳤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 학교 평화봉사단 ‘부경유엔서포터즈’ 대원 15명. 8일 부경대에 따르면 이들은 영국 현지시각으로 7일 오후 맨체스터 소재 빌리지 호텔에서 ‘영국 한국전쟁 참전용사협회 맨체스터 지부’소속 브리안 호(Brian Hough) 지부장 등 11명의 참전용사가 참석한 가운데 보은행사를 펼쳤다. 이날 학생들은 80대의 노병들 앞에서 감사의 편지 낭독과 감사패를 전달하며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학생들이 ‘아리랑’ 노래를 부르자 몇몇 노병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브리안 호 지부장은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오고, 또 한국에 잠든 우리의 전우들을 돌보는 부경대 학생들이 놀랍고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부경대는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인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 인근에 있다. 유엔서포터즈 학생들은 6·25전쟁에서 목숨을 바치고 잠든 용사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헌화하고 빗돌을 닦는 등 평화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맨체스터 탬사이드의 데니스 와드 시장이 직접 참석해 부경대생들의 방문을 환영했고, 영국 BBC 등 현지 언론들이 취재활동을 펴는 등 관심이 뜨거웠다. 데니스 와드 시장은 학생들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고, “부경대 학생들의 이번 방문을 계기로 우리 시도 참전용사의 희생정신을 후세들에게 알리기 위해 교육과 캠페인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맨체스터 신문인‘ 타임사이드 리포터(Tameside Reporter)’는 이날 한국 대학생들의 방문소식을 ‘South Korean students give thanks war veterans’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로 비중 있게 소개했다. 안태언 유엔 서포터즈 대표는 “70여 년 전 이역만리까지 오셔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우리를 지켜주신 용사들을 직접 마주하니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2009년 창단한 이 봉사단은 유엔 기념공원에 안장된 전몰용사들의 넋을 돌보고, 세계의 6·25전쟁 참전용사를 직접 찾아가 보은행사를 펼치고 있다. 영국은 6·25전쟁에 5만6000명을 파병했으며 이 가운데 1177명이 전사했고, 전사자 중 884명은 유엔 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 비극의 시대에 싹튼 한국영화…세계의 은막서 꽃피다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 비극의 시대에 싹튼 한국영화…세계의 은막서 꽃피다

    한국의 영화시장은 2013년을 기점으로 2조원대 매출, 2억명 이상 관객수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고,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도 50% 이상을 유지하는 세계적인 영화 강국입니다. 특히 1인당 연평균 극장 관람 횟수는 4.25회로 세계 최고 수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영화진흥위원회 ‘2017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기준). 이 같은 한국 영화산업의 활기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기원했던 것일까요. 2019년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서울신문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선임연구원이 쓰는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한국영화의 도전과 성장, 중흥과 불황의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한국 영화산업의 역동성의 근원을 탐색하는 흥미로운 기획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 회는 한국영화사 100년에 대한 지도 그리기로 시작합니다.●한국영화의 탄생과 도전(1919~1945) 한국영화사의 시작은 언제일까. 중국,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서구영화의 수입과 감상으로 영화사(映史)를 시작했다. 첫 영화 촬영이 이루어진 것은 1901년 미국의 여행가 엘리어스 버튼 홈스가 내한한 때로 기록되며, 대중에게 널리 영화가 공개된 것은 1903년 6월 동대문 안에 위치한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의 상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주도해 제작한 첫 영화는 1919년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다. 연극과 영화가 결합했다는 의미의 연쇄극은 연극 사이사이에 야외의 활극 장면 같은 것을 영화로 보여 주는 방식이었다. 비록 완전한 형태의 극영화는 아니었지만, 상영된 필름에는 서구 활극영화를 염두에 둔 스펙터클한 장면과 서울의 풍경을 촬영한 실사 장면들이 포함됐다. ‘의리적 구토’가 처음 상영된 1919년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지정한 이유다. 본격적인 극영화는 1923년에 등장했다. ‘월하의 맹서’는 조선총독부 문화영화였지만, 조선인 감독 윤백남의 연출로 완결성 있는 극의 형태로 구성됐다는 영화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고전소설을 영화화한 ‘춘향전’(1923)과 ‘장화홍련전’(1924)이 이어지며 무성영화 시기를 열게 된다. 조선 무성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은 바로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처음 영화라는 매체를 알게 된 계기가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파급력이 컸던 작품이다. 이후 조선영화인들은 1935년 ‘춘향전’을 통해 토키영화(발성영화)를 개척하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지만, 1940년 8월 조선영화령 공포 이후 일제의 전시체제로 편입되면서 민간 차원의 영화 제작은 불가능해졌다. ●성장하는 한국영화(1945~1969)해방 이후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든 열악한 상황에서도 한국영화인들의 극영화 제작은 멈추지 않았고, 이는 6·25전쟁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영화인들의 열정은 전후 한국영화가 성장하고 1960년대 내내 대중오락의 왕좌를 차지하는 기반이 됐다. 1950년대 한국영화사를 성장기라 일컫는 이유는 무엇보다 영화 제작 편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954년 단행된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 조치라는 정책적 호재 그리고 ‘춘향전’(이규환·1955)의 흥행 성공이 기폭제가 돼 1954년 불과 18편을 기록했던 극영화 편수는 1959년부터 100편대를 훌쩍 넘어서게 된다.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거치며 탄생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에 기반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력 삼아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했다. 영화산업 역시 급격하게 외양이 넓어졌지만, 이에 비해 영화로 만들 이야기가 그 수요를 받쳐주지 못했던 시기였다. 흡족한 시나리오를 만날 수 없었던 감독들은 이미 예술성을 인정받은 소설을 각색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1960년대 한국영화가 대중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인 ‘문예영화’였다. 유현목의 ‘오발탄’(1961·이범선 원작)을 비롯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1961·주요한 원작) ‘김약국의 딸들’(유현목·1963·박경리 원작), ‘안개’(김수용·1967·김승옥 원작) 등 1960년대의 많은 작품들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방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만희의 ‘만추’(1966·필름 유실)는 대중과 평단 모두로부터 골고루 지지받으며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남았다. ●통제와 불황, 암흑 속의 모색(1970~1989)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다. 1970년대 한국영화는 TV, 즉 안방극장과 외국영화 사이에 끼어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국적 불명의 무협영화로 연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0년대 역시 불황과 침체의 연속이었고, 흥행 방편이었던 에로티시즘 영화가 현대부터 시대극까지 아우르며 시리즈로 양산됐다. 하지만 그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오는 고통의 시기는 1980년대 후반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가 등장하고,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의 도약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70년대 한국영화의 불황은 수치로 증명된다. 1969년 관객 동원 1억 7300여명으로 정점에 도달했던 영화 관객수는 1974년 1억명 이하로 감소했다. 영화 관객은 늘어나는 TV 보급 대수에 반비례했고, 1969년 229편을 기록했던 제작 편수 역시 1971년 202편에서 1972년 122편으로 급감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인기 대중소설을 새로운 감각의 젊은 감독을 기용해 영화화한 호스티스 영화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별들의 고향’(이장호·1974)의 46만명 흥행, ‘겨울여자’(김호선·1976)의 58만명 흥행 성공(모두 단관 개봉 기준)이 대표적이다. 또한 최인호의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하길종의 새로운 감수성과 영화 감각이 화학작용을 일으킨 ‘바보들의 행진’(1975)이 청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80년대에는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로 국민을 환각시키는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과 맞물려 에로티시즘 영화가 넘쳐났다. 1982년 서울극장 단관에서만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애마부인’(愛麻夫人, 원래 ‘愛馬婦人’이었으나 공윤 검열에서 뜻이 야한 뉘앙스를 풍긴다고 해 ‘말 마(馬)’ 대신 ‘삼 마(麻)’로 교체)은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며 1980년대 에로영화의 상징이 됐다. 한편 1980년대 중후반은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등 세련된 멜로드라마 화법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배창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1988년 ‘칠수와 만수’로 데뷔한 박광수, ‘성공시대’의 장선우, ‘개그맨’으로 데뷔한 이명세, 1988년 할리우드 직배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영화운동가로서도 활약한 ‘남부군’(1990)의 정지영 등 1980년대 후반의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1990~2018)1988년 영화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UIP 등 할리우드 직배사가 한국시장에 들어왔고, 외화 수입편수가 급증하면서 한국영화 제작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한국영화 점유율은 1983년 39.8%에서 1990년 20.2%, 1993년 15.9%로 하락세를 보였다. 지방흥행사로 불리는 토착 흥행 자본과 연계한 기존 영화사들도 덩달아 한국영화 제작에 등을 돌리고 외화 수입에 열중했던 시기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등장한 것이 바로 ‘기획영화’ 세대다. 제작 자유화 정책의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고학력의 젊고 합리적인 영화인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 내며, 영화산업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1992년 ‘결혼이야기’(김의석)가 개척한 산업의 활기는 ‘접속’(1997)의 명필름,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우노필름 같은 제작명가들이 이어받으며 한국영화의 체질을 바꿔놓았다. 이어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불린 ‘쉬리’(1999)가 620만명의 흥행 대기록을 세운 후, 강우석의 ‘실미도’(2003)와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불가능해 보였던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2000년대 한국영화의 화두는 ‘웰 메이드(well-made) 영화’였다. 2003년 등장한 ‘살인의 추억’(봉준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장화, 홍련’(김지운) 등이 흥행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두루 만족시키자 영화저널과 비평계가 명명한 것이다. 특히 국내에서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올드보이’(박찬욱)가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까지 받으며 한국영화의 저력을 과시했다. 국제영화제의 인정을 받는 작가주의 감독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서편제’(1993)의 흥행 성공으로 국민감독 반열에 오른 임권택이 ‘취화선’(2002)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초록물고기’(1997)로 데뷔한 이창동은 영화 매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보여 준 ‘오아시스’(2002)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6년을 정점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던 한국 영화산업은 2012년 이후 관객수, 매출액, 수익성 등을 고루 만족시키며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있다. 또 2013년에는 글로벌 프로젝트 ‘설국열차’가 성공하며 한국영화의 세계로 도약하는 기반이 됐다. 과연 한국영화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한국영화는 언제나 그랬듯이 국가 제도와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도, 흥행성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고민을 연동시켰고,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과 비평가의 지지를 동시에 받아냈다. 이것이 바로 한국영화의 힘이자 역동성의 바탕일 것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금요일의 서재]북한 전문가들이 말하는 지금의 북한과 통일, 그 이후

    [금요일의 서재]북한 전문가들이 말하는 지금의 북한과 통일, 그 이후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 관련 책은 꾸준히 나온다. 북한 관련 책 저자는 크게 세 부류다. 탈북 출신이거나 북한에 많이 가봤거나, 북한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한 이들. 이번 주 ‘금요일의 서재’는 신간 가운데 탈북 출신 기자가 쓴 ‘조선 레볼루션’, 북한에 많이 드나든 목사가 쓴 ‘평양에서 서울로 카톡을 띄우다’, 북한 전문가가 쓴 ‘정세현, 정청래와 함께 평양 갑시다’를 꼽았다. ●2029년 통일된다면=‘조선 레볼루션’(서울셀렉션)은 탈북 출신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가 10년 후인 2029년을 예견하며 쓴 책이다. 저자는 북한 최고 교육기관인 김일성대학교를 졸업했지만, 탈북해 2003년부터 기자로 일하며 북한 관련 기사와 칼럼을 쓰고 있다. 저자는 통일 후 김정은 체제 붕괴를 가정하고 21세기 북한을 이끌어갈 선진 시스템 구축 방법을 모색한다. 저자는 북한 체제가 불안함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이유에 관해 “철저한 수용소식 체제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통일은 민중봉기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며, 우리가 이에 맞춰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북한과 한국에서 살아본 저자는 통일 이후 경제뿐 아니라 정치, 행정, 사법, 교육, 국방, 복지, 언론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의견을 내놓는다. 한국의 제도와 시스템이 북한에 고스란히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적절한 방안을 모색한다. 예컨대 정치 체제는 북한이 기존 정치체제 대신 전문가들이 이끄는 위원회 체제를 예상하고, 이에 맞춰 필요한 준비가 무엇인지 강조하는 식이다. 의견 일부는 다소 이상적인 측면이 있지만, 다른 북한 관련 책보다 나름 전문성을 갖췄다. ●평양, 가보니 달랐다=미국에서 NK Vision 2020을 설립해 남과 북을 왕래하는 통일운동가 최재영 목사가 직접 북한을 수차례 오가며 겪은 일을 ‘평양에서 서울로 카톡을 띄우다’(가갸날)로 엮었다. 저자는 재미교포로 지난 10년 동안 북한을 가장 빈번히 방문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분단 이후 최초로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모두 탐방한 사람’, ‘분단 이후 북측 교회에서 가장 많이 설교한 사람’, ‘분단 이후 현존하는 북측 종교시설을 가장 많이 방문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저자는 우리가 아는 북한이 최근 들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변화고 있다고 설명한다. 평양 시내에 자가용 물결이 날로 늘어가며, 심지어 상습 교통정체가 일어난다는 것. 결국 폐쇄회로(CC)TV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한 음식점은 메뉴판으로 태블릿PC를 활용한다. 이탈리아식 피자집(별무리), 비엔나식 커피 프랜차이즈점(Helmut Sachers Kaffee)도 문을 열었다. 북한 주민은 스마트폰(아리랑)으로 로동신문을 읽고 게임을 즐긴다. 보급된 휴대전화의 수효가 600만 대에 이른다. 평양에서 서울로 카톡을 보내고 화상통화를 한 저자의 이야기, 박정희 대통령을 다룬 북한 TV드라마, 한국전쟁에서 월북한 소설가 이광수가 언제 사망하고 어디에 묻혀 있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 등이 소소하게 재밌다. ●전문가의 평양 안내서=통일이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통일 한국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정세현과 외교·안보전문가 황재옥, 정청래 전 국회의원이 모여 ‘정세현, 정청래와 함께 평양 갑시다’에서 논한다. ‘평생 통일을 생각해온 최고 전문가들이 그린 통일 한국의 청사진이자, 평화의 한반도에서 신나고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충실한 안내서’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세 명이 공동으로 쓰느라 한 주제가 아니라 여러 주제로 묶였다. 1부 ‘가보자’, 2부 ‘해보자’, 3부 ‘만나보자’, 4부 ‘알아보자’로 구성했다. 1부에서는 평양 시내를 ‘국빈 코스’로 안내한다. 정청래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기를 통해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색다른 경험을 소개한다. 2부에서는 평양에서 치킨집을 운영했던 사업가와 남북경협 실무자 인터뷰가 실렸다. 북한에서 사업한다면 어떤 것이 성공할지에 관한 내용을 주목해봄직 하다. 3부에서는 평양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듣는 ‘평양 시민이 사는 법’,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김창수 사무처장이 말하는 남북 교류 이야기가 담겼다. 4부에서는 정세현과 황재옥이 한반도 문제 50년 역사를 분석하고, 미래 50년을 전망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1919년 3·1운동 뒤로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는 독립전쟁을 치르기 좋은 위치였지만 일본의 공세에 노출돼 있었다.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정부)는 정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국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성임시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잘 지켜 정통성이 컸지만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은 서울에 머문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세 정부는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고 힘을 모으고자 통합에 나섰다.●상하이정부·노령정부 통합 앞서 갈등 표출 지난달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차 찾아간 상하이 상업지역 화이하이중루. 10·20세대가 주로 찾는 거리 한 모퉁이에 글로벌 의류 브랜드 매장이 입점한 6층짜리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하비로 청사’라고 부르는 곳으로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상하이정부가 그해 8∼10월 사용했다. 당시 임정이 청사로 쓰던 2층 양옥은 1920~1930년대 철거됐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1919년 9월 11일 개헌을 통해 세 임시정부의 통합을 여기서 결정해 선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전했다. 상하이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국내외에서는 세 임정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성·상하이정부는 정부 수립을 전후해 양측 인사들이 꾸준히 교류한 터라 통합에 거부감이 적었다. 한성정부 대표 자격으로 상하이정부 안창호(1878~1938)와 협상을 벌인 이규갑(1887~1970)의 증언을 보면 당시 양측의 우호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도산과 두 정부의 통합을 논의했다. 나는 상하이정부가 먼저 생겼으니 우리 한성정부가 합류하는 것이 맞다고 양보했다. 하지만 도산은 한성정부야말로 국내 13도 대표가 총의를 모아 만든 정부이니 당연히 자신들이 속한 상하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며 (내 제안을) 사양했다.”●안창호 “해산 후 한성 밑으로 모이자” 제안 사실상 상하이정부와 노령정부 간 통합 논의만 남았다. 노령정부가 먼저 나섰다. 1919년 4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의를 열어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의정원을 합치고 러시아에 행정부를 두자는 의견을 정했다. 노령정부는 5월 특사 원세훈(1887~1959)을 중국에 보내 이를 제안했다. 상하이정부에서도 안창호가 본격적인 통합 협상에 나섰다. 6월 17일 상하이정부 국무원(행정부)은 노령정부와의 협의 내용을 반영한 의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되, 새 의회는 러시아로 이전이 가능하도록 여지를 뒀다. 하지만 의정원은 상하이에 계속 남고 싶었던 탓인지 안건을 거부하고 국무원에 돌려보냈다.●노령정부 불만 터져 불완전한 결합 이뤄 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안창호는 새 아이디어를 냈다. 상하이·노령정부를 모두 해산하고 한성정부 밑으로 다시 모이자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제3지대 창당론’이 될 것 같다. 단, 통합 정부는 ‘한성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부르고, 상하이에 남기로 했다. ●상하이정부, 한성을 ‘우회 상장’ 통로로 여겨 노령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8월 30일 총회를 열고 의회를 해산했다. 그런데 상하이에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애초 해산하기로 한 의회와 행정부를 그대로 둔 것이다. 정부 조직만 한성정부 형태로 바꿔놨다. 비유컨대 건설업자가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기로 약속한 뒤, 실제로는 건물 도면에 맞춰 리모델링만 한 것이다. 당시 안창호는 “한성정부를 (실제가 아닌) 정신적으로 승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정통성은 있지만 실체가 없던 한성정부를 동등한 통합대상으로 보지 않고 서울에서 생겨난 정부라는 법통을 흡수하려는 ‘우회 상장’ 통로로 여긴 듯 하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상하이정부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려다가 생겨난 일”이라고 분석했다. 통합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한 문창범(1870~1938)과 이동휘(1873~1935)는 “상하이가 우릴 속였다”며 취임을 거부했다. 문창범은 연해주로 돌아가 1920년 2월 대한국민의회 재건을 선언했다. 통합 임정으로서는 미래 정부 활동 자금줄이자 무장 투쟁 동력을 잃어버렸다. 여기에 신채호(1880~1936)와 박용만(1881~1928)도 새 내각 불참을 선언했다. 임정 통합 중심축 이동휘, 독립자금 좌파세력 유용으로 치명타이승만(1875~1965)이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에게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할 수 있게 주선해 달라”고 청원한 것을 문제 삼았다. 통합 임정이 시작도 전에 분열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이동휘는 안창호의 간곡한 설득으로 11월 3일 통합 임정 국무총리에 복귀했다. 내무총장 이동녕(1869~1940)과 재무총장 이시영(1868~1953), 법무총장 신규식(1880~1922) 등도 함께 취임식을 가졌다. 이렇게 세 임정은 불완전하게나마 통합정부로 다시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상하이정부가 생겨난 4월 11일이 아니라 세 임정을 통합한 9월 11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상하이정부가 노령정부를 모두 끌어안아 완전체가 됐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통합 임정에 힘 실어 준 아전의 아들 이동휘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가슴이 떡 벌어졌다. 군인답게 콧수염을 길러 마치 프랑스 원수 같았다. 민족운동의 거성인 동시에 저명한 혁명가였다. 열렬한 행동주의자였으며 불덩이 같은 신념을 지녔다. 천군만마를 노호할 듯한 기개와 위엄을 갖춘 당당한 거인이었다.” ‘아리랑’의 저자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가 이동휘에 대해 내린 평가다. 그는 ‘반쪽짜리’로 전락할 뻔한 통합 임정에 극적으로 합류해 독립운동 중심체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에게서 받은 통합 임정 운영자금을 자파(自派) 유지비로 돌려써 독립운동 분열도 초래했다. 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나 18살 때 통인(군수의 시중을 드는 하급관리)이 됐다. 23살 때 탐관오리였던 단천군수 홍종후가 잔칫날 어린 기생을 무릎 위에 앉혀 추행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술상 옆에 놓인 화로를 군수에게 끼얹었다고 한다. 불의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그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이동휘는 서울로 도피했다가 함경도 명천 출신 관료 이용익의 도움으로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해 군 장교가 됐다. 이후 일제가 그의 애국심을 우려해 수차례 체포와 수감을 반복하자 1913년 북간도로 탈출했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1914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당시 일본은 러시아 영토를 탐내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었다. 이동휘는 러시아와 손잡고 일제와의 전면전을 벌여 단박에 조선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일본군과 맞서던 러시아 볼세비키(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러자 북간도로 넘어가 중국과 연합해 대일 독립전쟁을 치르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중국도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중국에 제출한 권익 확대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한편이 돼 이 역시 무산됐다. 1918년 5월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세우고 기관지를 발행했다. 군사학교 설립과 한인적위대 조직에도 나섰다. 애초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3·1운동 민족대표들과 임시정부 설립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질 리 없고 조선 지식인들이 기대를 건 파리강화회의 역시 식민지 해방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동휘는 “상하이 측과 정치 싸움을 벌여선 대국(일본)을 파괴할 수 없다”며 통합 임정에 뛰어들었다. 그의 결단 덕분에 통합 임정은 ‘이승만(한성)-안창호(상하이)-이동휘(노령)’라는 3대 축을 갖춰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독립자금 전용 탓 신뢰 잃어… 국제사회도 외면 그는 씻기 힘든 과오도 남겼다. 1920년 1월 통합 임정은 이동휘의 측근 한형권(생몰연대 미상)을 러시아 모스크바에 보냈다. 레닌 정부와 접촉해 정식국가로 승인받고 독립 자금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결국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받기로 하고 1차분 60만 루블을 얻어냈다. 지폐의 양이 많아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두고 일단 40만 루블을 김립(1880~1922)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그는 이 돈을 통합 임정에 전달하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좌파 운동세력에게 나눠줬다. 일부는 개인 용도로도 썼다. 이동휘는 소련 자금 배달사고의 배후로 지목돼 입지가 좁아졌다. 1921년 1월 총리에서 물러났다. 이 일로 사회주의 계열은 신뢰를 잃고 독립운동 주류에서 배제됐다. 통합 임정도 국제적으로 평판이 나빠져 운영 자금 마련이 더 힘들어졌다. 이후 이동휘는 연해주 일대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하다가 1935년 1월 31일 62세로 숨을 거뒀다. 서울·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산청한방약초축제 올해 대한민국 대표축제 선정

    산청한방약초축제 올해 대한민국 대표축제 선정

    약초의 고장 경남 산청군에서 열리는 ‘산청한방약초축제’가 대한민국 최우수 축제에 이어 올해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됐다.산청군은 2일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선정해 발표한 2019년 ‘문화관광축제’ 41개 가운데 ‘산청한방약초축제’가 대표축제에 선정됐다고 밝혔다. 산청한방약초축제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4년 연속 대한민국 최우수축제에 선정된데 이어 2019년 ‘대표축제’로 승격됐다. 2019년 대표축제에는 전국 축제 가운데 산청한방약초축제 등 3개가 선정됐다. 제주들불축제 등 7개는 최우수 축제에 선정됐으며 통영한산대첩축제 등 10개는 우수축제, 밀양아리랑대축제 등 21개는 유망축제에 각각 선정됐다. 지리산 자락에서 자라는 1000여종의 약초를 기반으로 2001년 부터 해마다 개최하는 산청한방약초축제는 전통 한방과 웰니스(wellness) 관광을 접목한 대한민국 대표 힐링·웰니스 축제로 꼽힌다. 지역 약초재배농가와 한의사, 지역사회단체 등이 축제에 참여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군은 특히 2013년 국제행사인 세계전통의약엑스포를 개최한 한방테마파크 ‘동의보감촌’은 지역균형발전의 성공적인 모델 가운데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고 밝혔다. 군에 따르면 2018년 개최된 제18회 산청한방약초축제는 태풍 탓에 이틀 휴장했는데도 약초·농특산물과 향토음식 판매액이 2017년 축제때 보다 2배쯤 증가하는 등 성공적으로 개최됐다.군 관계자는 “지역주민들이 마음을 합쳐 노력한 덕분에 산청한방약초축제가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승격됐으며 ‘대표축제’ 명성에 걸맞는 글로벌 축제로 발전되도록 올해 축제도 알차게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제19회 산청한방약초축제는 오는 9월27일부터 10월9일까지 13일간 산청IC 입구 축제광장과 동의보감촌 일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산청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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