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아리랑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 생산량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 학생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 기업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 열풍
    2026-08-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952
  • 길림성 이도강촌(압록강 2천리:4)

    ◎해발 1,260m… “하늘아래 첫 동네”/일제때 독립군 순병지… 9월말이면 눈발/해방후 조선족 70가구… 현재 1천명 거주 길림성 장백현 용강향 이도강촌은 하늘 아래 첫 동네다.그토록 외지고 높은 고원의 산골이어서 일찍부터 일제에 항거한 독립군의 활동무대였다.1915년에 이미 독립군 군비총단이 들어와 둔병을 마련하고 자리잡은 지역이다.또 1936년에는 항일연군 제2군 제6사가 홍두산에 밀영을 세우고 일본군과 만주군을 호되게 족쳐댔다. 일본도 이에 질세라 서둘러 경찰서와 토벌대,산림경찰대를 만들고 헌병대까지 주둔시켰다.그리고 장백진으로부터 이도강까지 길을 냈다.1945년 이후 이 길을 넓히고 손질했으나 길은 여전히 험로였다.일제가 항일연군을 토벌하기 위해 닦아놓은 길을 버스가 구불부불 기어갔다.장백진에서 고작 28㎞ 밖에 안되는 지척인데도 이도강촌까지 2시간이 실히 걸렸다. ○후천적 고산족으로 장백현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사는데가 용강현으로 전체인구 2천6백27명 중에 1천88명이 조선족이다.비교적 낮은 지역이라는 해발 1천2백60m의 이강촌을 중심으로 해발 2천12m나 되는 홍두산자락 여러 골짜기에까지 조선족들이 흩어져 살고있다.그러고 보면 용강현 조선족들은 후천적으로 고산족이 된 셈이다.백두산 천지와는 90㎞가 떨어져 있으나 쾌청한 날씨에는 흰눈을 머리에 인 백두산이 망망한 숲 위로 아련히 떠올랐다. 그런 고산지대인지라 서리가 내리지 않는 무상기래야 1년에 90여일이 고작이다.장백현의 다른 저지대에 비해 철이 한달 이상 차이가 나기때문에 벌써 가을을 느꼈다.눈이 빨리 내리면 9월말께 첫눈이 온다고 했다.마침 점심 때가 되어 향장,당서기와 어울려 간부식당을 찾았다.시금치국 한 사발에 만두와 김치 한 접시가 나왔다.식당 일을 하는 원채봉아주머니가 애써 식단내용을 설명했다. 『그래도 향간부들의 식사는 괜찮은 편이꾸마.이 시금치도 현성에서 사왔디요.아무 집에나 들어가 봅소.이만큼 먹나….고산디대라 옥수수나 콩도 안됩꾸마.봅소,벌써 긴팔 옷을 입고들 있지 않슴둥』 여름이 아무리 빨리 간다한들 설마 했던 것은 오산이었다.그날 밤에 향장의 안내로 마을 터주격인 허용학(73)노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한기를 느꼈다.장백진 여관에 맡긴 짐보따리 속의 두꺼운 옷이 그리웠다.노인의 집에는 이미 군불을 지펴놓아 한기를 녹였다.꿈과 젊음을 고산지대 이도강촌에 묻어둔 노인의 얼굴에는 산골 밭뙈기 이랑 같은 주름이 가득했다. 노인의 본래 고향은 이도강촌에서 멀다 할 수 없는 함경남도 삼수군(현재 북한지명은 양강도 삼수군)자산면이다.세살 때 모친이 세상을 뜨자 부친이 두 형을 데리고 장백현을 들어가면서 본인은 갑산 누이집에 맡겼다.18살 나던 해에 형님이 와서 장백현으로 데리고 와서 곧 바로 남의 집 데릴사위로 주었다.석달을 살고 장인허락을 얻어 조선으로 돈벌러갔다가 징병에 끌려 일본 규슈로 갔는데,해방 석달 전의 일이었다. ○민요 「사냥 아리랑」 구전 『일본에 있을 때 미군 비행기 무서운 꼴 봤꾸마.매일 폭격을 해대서리 부상까지 입었지비.그날이 7월2일인데 미군 비행기 수십대가 가물가물 떠와서 폭탄을 내리 퍼부었다 이거우다.해방 이듬해 3월 일본에 온 함남 대표를 따라고향을 들렀다가 이리 다시 와서 붙박혀 사우다』 해방 후에만 해도 이도강촌에는 조선족 70가구가 살았다고 한다.한족은 2가구 뿐이었는데,지금은 2백가구 중에 절반이 한족이다.모두가 농사랍시고 짓지만 고산지대라 소출은 보잘 것이 없다.보리는 1무(2백평)에 1백근(60㎏),귀밀은 1백50근,밀은 작황이 썩 좋아야 3백근을 먹는다.그러나 감자는 잘되는 편이다.지금은 짐승이 덜 하지만 10여년전만 해도 멧돼지와 곰 등쌀에 애를 먹었다.7월부터 돼지가 감자밭에 덤벼들면 온통 요절을 내버렸다.귀밀과 밀밭은 곰이 압발로 이삭을 끌어안고 훑어먹기 시작하면 잠깐만에 거덜이 났다. 그래서 사냥감 짐승들이 많다.겨울이면 마을 장정들은 너나없이 사냥을 떠나 용강향에는 「사냥 아리랑」이 지금도 구전되고 있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우리 낭군 영을 넘어 사냥 가네/낭군님 무사히 돌아오세요/대보름 달빛 아래 술을 듭시다」라는 민요가 그것이다.허용학노인의 백두산 겨울철 사냥 이야기는 간이 큰 사나이들의 모험담으로 들렸다. 『한번은 돼디(돼지)사냥을 갔는데 모리꾼들이 돼디간다고 소리를 티데우.돼디 여러마리가 곧추내려오는데 던댕판(전쟁판)에 당꾸(탱크)돌격하듯 달려왔지비.다섯마리 사냥개가 걸구(큰돼지)뒷 다리를 물고 늘어지자 속도가 늦어뎠디우다.그 때 최길환이가 꺾음대(화승촌)를 탕 놓았디우.앞 섰던 놈이 쓰러디니까 뒷 놈들은 샛길로 도망쳤으니 말이디 그냥 달려왔으면 다 황천객 됐을 거우다.거 안포수란 사냥꾼은 곰을 쏘았다가 선불을 맞아 끌안았디우.같이 간 다른 포수가 곰의 머리를 쏘아 떼 놓았는데,곰한테 할퀸 안포수 머리가죽이 벗겨뎠디…』 사냥을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 마을에는 잔치판이 벌어졌다.아낙네들은 국수를 누르고 남정네들은 잡아온 짐승을 삶았다.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함지물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장단을 맞추었다.중국 전역이 한 장기판이라고 하지만 이도강촌 산골마을은 문화대혁명을 수월하게 맞았다.다른 지역에서는 이른바 대식품이라는 풀뿌리 나무껍질을 먹었지만 이도강촌 사람들은 감자를 갈아 떡도 해먹고 분을 내어 국수도 눌러먹었다는 것이다.○아직도 인정만은 부자 그러다가 조사라도 나오면 겨로 음식을 해서 대접하고 조사 나온 간부들이 돌아가면 감자는 배불리 먹었다.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이도강촌을 20세기의 별천지라고 불렀다.아직도 인정 만큼은 부자다.다만 농사만으로 돈 벌이가 시원치 않아 금전적으로 빈자나 각박한 문명세계와는 다른 삶을 살고있다.흠이라면 입쌀이 없다는 것뿐이다.밀 1근 80전,귀밀 30전,감자 30전에 팔아 1근에 2원하는 입쌀을 사먹기는 사실상 힘이 겨웠다. 그럼에도 교육열은 대단했다.조선족과 한족 아이들이 같이 다니던 한조연합학교가 있었는데 지난 1988년 조선족기숙제소학교 하나를 더 만들었다.기숙생들의 한달식비 90원 중에 20원을 기꺼이 물면서도 조선족기숙제소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 원화표시채권 첫 발행/「아리랑 본드」/ADB 통해 1차8백억

    ◎국내자본시장 개방 본격화 국내 최초의 원화표시채권인 「아리랑 본드」가 24일 아시아개발은행(ADB)의 발행을 계기로 국제무대에 처음 공식 데뷔했다. 「아리랑 본드」는 외국인이 국내에서 원화로 발행하는 채권의 애칭.따라서 「아리랑 본드」의 발행은 국내 자본시장을 외국인에게 처음 개방하고 우리의 화폐단위인 원화가 국제결제통화로 격상될 전기를 마련했음을 의미한다.또 세계은행(IBRD),유럽개발은행(EBRD) 등 국제금융기구에서 원화채권을 본격 발행하면 국제적 인지도와 신임도가 급상승,원화의 국제화 촉진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에 발행된 ADB의 「아리랑 본드」는 시장 실세금리(표면금리 12.15%)를 반영한 7년 만기의 장기채권이다. 「아리랑 본드」는 1차로 8백억원 어치가 발행 됐으며 한국산업증권이 주간사를 맡았다.
  • 한국에선…/범람하는 일 만화(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14)

    ◎작년 출판 만화 6백여만권… 80%가 “외색”/88년 「드래곤 볼」 성공적 침투뒤 급속 확산/거의가 외설·폭력물… 청소년 정서 “악영향”/만화계 “시장개방때까지 적정선 규제” 촉구 주부 이현정씨(37·서울 양천구 목동아파트 10단지)는 국민학교 2학년인 아들 때문에 요즘 걱정이 많다.방학숙제로 동화책읽기가 있는데 아이는 동화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허구헌날 「잔인하고 지저분한」 일본만화에만 매달려 있어서다.이씨는 고민 끝에 아들과 약속을 했다.동화책 2권을 읽으면 일본만화 1권을 대여점에서 빌려주기로 한 것이다. 주부 대부분이 이씨와 비슷한 고민을 한다.아이들 정서에 좋잖은 영향을 주는 일본만화를 못 보게 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국민학생에게는 「드래곤 볼」,중고생에게는 「슬램 덩크」로 대표되는 어린이·청소년대상 일본만화는 거의 예외없이 외설·폭력적이다.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는 지난 5월 있은 「보이스 클럽」폐간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곳곳 낯붉힐 장면 「보이스 클럽」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출판사인 동아출판사가 국민학교 상급생과 중학생을 겨냥,지난해 12월 창간한 격주간 만화잡지.당시 출판사측은 『국내 작가들에게 적극적으로 지면을 줘 왜색만화를 몰아내고 한국인 정서에 알맞는 만화문화를 육성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그러나 YWCA 만화모니터모임은 5월29일 이 잡지의 내용을 집중분석한 20쪽짜리 보고서를 공개하고 출판사에 즉각 폐간을 요구했다. 보고서의 지적은 끔찍할 정도다.교사가 학생을 살해해 인육을 먹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국민학생이 제한시간 안에 문제를 풀지 못하면 살해된다는 조건으로 컴퓨터게임을 하는 내용도 있다.이밖에 「자위행위」「처녀막」「오르가슴」등의 단어가 낯뜨거운 장면과 함께 곳곳에 등장한다. 「보이스 클럽」은 바로 폐간됐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지금도 버젓이 판매되는 청소년 만화잡지들이 「보이스 클럽」보다 나을 게 없기 때문이다.대형출판사가 「점잖게」 만화잡지를 시작했다가 판매부진으로 자극적인 일본만화를 실었고,결국 망신만 당한 이 사례는 「일본만화의 한국 장악」을 극명하게보여준다. ○스토리구성 앞서 만화계는 지난해 시중에 나돈 만화 6백여만권 가운데 80%이상을 일본 것이라고 보고 있다.곧 ▲수입금지된 일본 단행본 만화를 국내 잡지에 연재한 뒤 다시 단행본으로 낸 경우 ▲왜색풍이 심한 부분만 살짝 고쳐 국내 작가 이름으로 나온 책 ▲대사만 우리말로 고친 해적판을 합치면 사실상 그 정도 된다는 계산이다. 일본만화가 국내에 자리잡은 것은 지난 88년 「드래곤 볼」에서 비롯됐다.비디오가 먼저 나와 큰 성공을 거두자 「드래곤 볼」만화책이 뒤따랐고 이어 「슬램 덩크」등이 쏟아져 들어와 유행을 이루었다.특히 「드래곤 볼」과 「슬램 덩크」등 몇몇 책은 시리즈로 40∼50권씩 출간돼 그동안 수백만부가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일본만화가 판치는 까닭은 『만화수준이 높기 때문』임을 많은 만화가가 인정하고 있다.폭력·선정성이 물론 우리 정서에 맞지는 않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다.만화가들은 먼저 스토리구성이 뛰어난 점을 든다.일본에서는 만화를 영화의 경우처럼 종합적으로 제작한다.그 과정에 자료수집자,스토리구성 작가가 함께 참여해 다양한 소재를 변화 많은 줄거리에 담아내고 있다.또 그림의 선이나 구도가 각기 독특한 개성을 이루는 것도 장점이다. ○해적판 방치상태 반면 일본만화의 성행원인을 우리 제도의 허술함에서 찾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우리 만화는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지나치다 할 만큼 사전심의를 철저히 하면서도,공공연히 유통되는 일본 해적판만화는 방치해 둔다는 지적이 그 하나다.또 ▲단행본 만화 직수입은 금지하면서도 이를 잡지에 연재한 뒤 출간하면 허용된다든지 ▲단행본에 비해 잡지에 대한 규제는 거의 없다는 것도 꼽는다. ○소재제약 풀어야 한국만화가협회 권영섭 회장(56)은 『현재 말로만 만화시장이 개방되지 않았지 사실상 일본만화는 마음대로 들어오고 있다』면서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도 시장이 정식개방되기까지는 일정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가령 만화잡지에 실리는 일본만화비율을 20%이내로 제한하는등 적극적인 행정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와 함께 우리 만화에 대한 소재·그림제약을 이제 풀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 만화계가 일본만화의 시장지배를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올들어 만화계는 우리 작품을 일본에 수출하는 적극 공세에 들어갔다.방학기씨의 「대도 임꺽정」이 「조선 수호지」란 제목으로 일본에서 발간됐으며,최근 영화로 만들어진 지상월씨의 「붉은 매」도 진출했다.이밖에 이현세씨의 「활」,이희재씨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박성우씨의 「용신전설」,이태호씨의 「블랙 코브라」,오세호씨의 「수국 아리랑」,이태형씨의 「헤비메탈 식스」,양경일씨의 「소마신화전기」,백성민씨의 「장산곶 매」등이 소개됐다. ○유통부문 개선을 더불어 중견출판사들이 만화출판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으로 꼽힌다.대교출판의 계열사인 프레스빌이 이미 「대도 임꺽정」을 냈고 해냄·시공사·홍익출판사가 현재 준비중이다.이 가운데 홍익출판사는 만화전문 출판사인 「홍익리서치」를 따로 설립,국내에서의 만화출판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중국·동남아시장을석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이 출판사 이승용 대표(43)는 『현재 우리 만화계가 몇몇 인기작가에만 의존해서 그렇지,과감한 투자로 재능있는 신인을 발굴·육성하면 3∼5년 안에 그 수준을 급격히 높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이사장은 그러나 만화에 대한 인식이 낮은 점을 우려하고 그 예로 대형서점에서 만화 단행본을 취급하지 않고 있음을 들었다.그는 만화의 질 향상과 함께 유통부문이 개선돼야만 일본만화의 범람 속에서 우리 만화가 살길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지방행사 현장/경기­화성 화산 독지리서 「3·1운동 봉화」 올려

    ◎제주­법정사 승려들 「항일 만세대행진」 재현/부산­마안산 정상서 3·1운동 기념탑 기공식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 및 예술행사가 15일 전국 곳곳에서 다채롭게 마련됐다. 지역 주민들은 「광복 50주년 통일로 미래로」라는 주제로 행사들을 지켜보며 광복의 감격과 의미를 되새겼다.많은 주민이 자녀들과 함께 길놀이나 전시장,예술·문화공연을 관람하며 「나라 사랑」의 마음을 되새겼다. ○…제주에서는 상오8시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법정사 승려들의 항일운동 만세 대행진이 걸궁팀과 사물놀이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6시간에 걸쳐 재현됐다.중문 청년회의소가 주관했으며,1천여명이 참가했다.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공유수면 매립지에서는 제주 해녀항쟁 만세 대행진이 펼쳐졌고 제주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는 영화인협회 제주지부가 아리랑 영화제를 마련해 도민화합과 통일의지를 일깨웠다. 하오에는 제주시 탑동 제주해변 공연장에서 제주 시립교향악단과 시립합창단,끌리오합창단과 남녕고 합창단이 공동으로 광복 50주년 기념 「연합 음악제」를 마련해 광복절을 경축했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하오7시 우정면 화산리 봉화산과,이 곳에서 20여㎞ 떨어진 송산면 독지리 봉화산 등 두 곳에서 3·1운동을 알리는 당시의 봉화 올리기 행사를 재현했다. 가로·세로 1.5m,높이 2m의 봉화대에 불이 지펴지자 7백여명의 주민은 일제히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그날의 감격을 만끽했다. 수원의 경기도 문화술회관에서는 고 전동례 할머니의 체험을 토대로 일제에 저항한 제암리 주민의 비극적인 참상을 그린 창작 무용극 「제암리 아침」이 공연돼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명장동 마안산 정상에서는 3·1운동을 주도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3·1운동 부산 기념탑」 건립 기공식이 열렸다. 또 부산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한 백산 안희제 선생을 기리는 백산 독립기념관이 중구 대창동 옛 백산상회 자리에 문을 열었다.전시실 지하 1층에 백산선생이 사용했던 벼루·청동화로·가방·친필 서한 등 유품 12종 55점을 전시해 놓았다. ○…경남에서는 상오10시50분부터 진주시칠암동 경남도 문화예술회관에서 한국예총 경남도지회 주관으로 광복 50주년을 축하하는 종합연극 「지킴이」가 1시간40분 동안 무대에 올려졌다. 무용과 연극·민요 병창·풍물패·합창·태껸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을 한데 묶어 5막12장으로 구성한 이 극은 일제의 억압과 설움을 꿋꿋한 민족정신으로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극이 끝나자 배우·풍물패·합창단 등 1백30여명의 출연진 모두가 오색 방울이 날리는 무대로 나와 관람객들과 함께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대전시가 광복 50주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대전 역사 창조를 위해 지난 6일부터 시민회관에 마련한 「광복과 대전 발전 사진전」에는 마지막 날인 이날도 1천5백여명이 몰렸다. 일제 때부터 21세기 청사진까지 주제별로 시대상황을 담은 사진 2백여점이 전시됐다.
  • 일본에선…/한국 문화의 확산(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9)

    ◎일인들,가라오케서 우리가요 열창/TV엔 조용필·계은숙 등 심심찮게 출연/풍물놀이판·영화제 등 열리면 관객들 몰려/청소년층은 한국에 “무지”… 교류통한 저변확대 바람직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저녁이 찾아오면 한국 음식점과 술집들이 모여 있는 도쿄 아카사카의 거리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곳곳에 네온사인이 켜지고 분위기는 술렁거린다.거품경제 뒤 경기는 풀리지 않고 있지만 곳곳의 가라오케에는 그래도 노래가 흐른다. ○문화저항감 낮은편 이들 가라오케에는 「가수무 아푸게(가슴 아프게),가수무 아푸게」를 열창하는 일본인들이 곧잘 눈에 띈다.돌아와요 부산항에라든가,만남·노란 샤쓰입은 사나이·한 오백년·칠갑산·나들이 등등 한국의 인기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일본인들을 주위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신주쿠 닛포리 등 한국인들이 밀집 거주하는 지역은 물론,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지 않은 뒷골목의 가라오케에도 한국노래는 준비돼 있고 불린다. 유선방송망으로 화면과 반주를 제공받는 가라오케에는 한국 노래가 웬만한 것은 다 구비돼 있다.특히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는 가끔 망언에 가까운 발언으로 한국인의 감정을 아슬아슬하게 만들지만 5공 당시의 한국 지도층과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중증근강홍) 전총리가 잘 불렀던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일본인들은 외국문화에 대한 흡수력이 뛰어나다.관심도 많다.이곳저곳의 전시장 등에서는 외국 미술품 전시회가 끊임없이 개최된다.구미는 물론 동남아나 아랍·아프리카의 문화 소개도 활발하다.또 우리가 일본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저항감보다는 일본인들이 한국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저항감은 대단히 낮다.이 때문에 계은숙 등 한국가수들이 일본에 거주하면서 활동할 수 있고 조용필과 나훈아·패티김 등이 일본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다.일본 TV에서는 한국 가수들의 출연을 심심찮게 볼 수 있기도 하다. ○탈춤수강생도 많아 노래만이 아니다.한국의 「진수」라면 영화든 전통문화든 열심히 보고 듣고 즐기는 일본인들이 꽤 있다. 서울특파원을 지낸 도쿄신문의 야마모토 유지씨는 서편제를 울면서 보았다는 말을 가끔 한다.「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을 부르면서 주인공들이 비탈길을 내려오는 장면이라든가 마지막에 눈먼 누이와 동생이 밤새 소리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고 말한다.회사원 호사카 다다시씨도 서편제를 몇번이나 봤다고 말한다.그는 서울 경주는 자주 다녀 봤지만 서편제를 본 뒤 소리의 고향인 호남지역이 꼭 가보고 싶어져 올해초 남원까지 다녀왔다. 서편제는 지난해 봄 도쿄 삼백인극장이 「한국영화제」를 열었을 때도 일본인들의 관심을 꽤 불러 일으켰었다. 또 주일한국문화원이 개최하고 있는 한국영화 영사회에 나오거나 한국영화 비디오를 대출해 가는 일본인은 연 1만6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기도 하다.주미 한국문화원과 비교하면 한국문화를 접하려 하는 저변층이 한결 넓다는 것이 이곳 문화원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한국문화의 「진수」에 대한 관심은 이어진다. 지난달 8일부터 2주 동안 제11회 「도쿄의 여름」 음악제가 열렸다.일본 등 여러나라의 전통음악과 문화가 소개되는 가운데 한국의 봉산탈춤은 무려 이틀 동안 스케줄이 잡혔다.4백50여석을 꽉 메운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자막을 보면서 탈춤을 감상했다.이날 공연에 앞서 간단한 설명을 한 이두현 서울대명예교수는 『77년부터 4번째 공연이지만 점점 관중이 늘고 있다.봉산탈춤을 배우려는 일본인들도 많다.보람이 있다』고 말한다. 도쿄풍물패의 김영삼대표는 『4년전 일본에 올 때보다 한국문화의 저변이 넓어진 것을 느낀다』면서 『한국문화의 소개에는 돈과 언어의 벽이 아직 높지만 한국문화의 진수가 일본에 오면 한국에 관심있는 일본인들은 기를 쓰고 보려고 하고 있다』고 소개한다.김대표는 『4년 동안 도쿄에서 활동하다 보니 일본인들이 한국 전통문화의 역동성과 힘에 반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덧붙인다.이런 유의 한국 문화소개는 일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또 비즈니스가 되고 있다.특히 광복 50주년을 맞는 이번 8월에는 이곳저곳에서 각종 발표회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말한다고 해서 일본에 「한국풍」이 불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한국을 알고 접하고 노래 한 곡쯤 부르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다.특히 청소년들은 한국 자체를 잘 알지 못한다.이곳에 오래 근무한 한 한국외교관은 「청소년 1백명 가운데 한국을 아는 사람은 2∼3명,아는 사람 1백명 가운데 한국대중문화나 전통문화를 조금이라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1명 이하』라고 말한다. ○트로트외에는 빈약 왜 그런가.한국대중문화의 경우 일본시장에 대한 침투력이 빈약하다.정서가 비슷한 트로트풍 가요 등은 쉽게 들어오고 있지만 재즈·팝·영화 등 젊은이들이 즐길 만한 것은 우리 수준이 매우 낮거나 일본 것을 모방한 것들이 많다.흥미를 유발키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사실과 달리 한국이 일본문화의 유입을 전면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면서 문화의 쌍방향 교류에 많은 장애가 되고 있기도 하다.한국만큼 일본문화가 많이 침투한 나라도 드물다.다만 영화 등 일부만 제한을 가하고 있다.그러나 문화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일본문화가 아주 못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인상지워져 있다.문화는 교류다.그릇된 인상으로 말미암아 한국문화의 일본 전파도 장애를 받고 있다.
  • 늘어나는 「메이드인 코리아」(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3)

    ◎김치서 반도체까지 1백35억달러 시장­작년 광복 50년 한·일국교정상화 30년을 지나는 동안 일본에서의 한국 위상은 꽤 높아졌다.이에 발맞춰 한국상품도 일본시장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한·일국교가 정상화됐던 65년 두나라간의 교역은 2억1천2백만달러 수준에 불과했다.당시 우리는 일본에 불과 4천5백만달러 어치를 내다 팔았을 뿐이다.일본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55%에 지나지 않았다.우리는 저임금에 바탕을 둔 단순제품과 원자재를 주로 수출할 수 밖에 없는 수준이었다.생사를 비롯한 섬유류와 김등 수산품이 주력 수출상품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상품은 1백35억2천3백만달러 어치였다.30년 전의 3백배다.일본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9%로 높아졌다.그만큼 한국과 일본 양국관계가 경제면에서 긴밀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지난 한해 김치 한 품목만 대일 수출액이 3천5백만달러를 기록했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한국상품은김치다.슈퍼마켓은 물론 시골의 조그마한 가게에도 김치는 필수진열품이다.인기가 높아지면서 일본산 김치도 많이 생산되고 있다.하지만 일본산 김치보다 한국산 김치는 두배나 되는 가격을 받고 있다.「비싼 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양은 질을 변화시킨다.단순히 수출이 늘어난데 그치지 않고 질적인 변화도 눈이 부실 정도다. 65년까지만 해도 얼마 안되는 수출 가운데서도 공업제품은 전체의 16.9%에 불과했다.93년에는 80%를 넘어섰다.아직도 섬유류와 1차 산품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난해와 올해 들어서는 반도체와 철강이 전체 대일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전기제품은 지난 한해동안 32억9천7백74만8천달러,철강 등 금속제품은 20억8백91만1천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올해 들어서도 지난 5월까지 54.3%,53.1%의 수출신장률을 보였다. 반도체는 급속한 수요증가로 공급자시장이 형성되고 있다.값도 넉넉히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가파른 수출신장세가 오히려 일본 기업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삼성그룹의 한 중역은 『반도체의 수출에 관해 자세히 밝히기는 곤란하다.잘 써주는 것도 고맙지 않다』면서 『반도체는 일본기업들의 자존심이 걸린 산업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보호책이 강구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한국상품의 진출과 함께 최근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반도체·자동차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한·일기업간 기술제휴,차세대 기술개발을 위한 공동연구소 설립,일본기업 매수및 합병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인삼 두번 안사는 이유 알아야 포항제철이 지난해 9월 기타규슈시의 한 강재가공 공장을 매입했으며 삼성전자는 지난해 5월 오디오 제품관련 첨단설계 기술보유업체인 「럭스」사를 인수했다.그밖에도 럭금과 히타치제작소,현대전자와 후지쓰,삼성전자와 도시바사이에 반도체및 고속신형 메모리 개발협력이 이뤄지고 있다.이에 대해 주일 한국대사관측은 「일본기업이 일부 한국기업의 기술수준과 경쟁력을 인정한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앞으로 일본에 내놓게 될 한국상품이 보다 더 기술집약적 고부가가치상품화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 재일한국인들을 중심으로 도쿄의 곳곳에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고 있기도 하다.이 가운데 한국 음식점 등은 일본인들도 즐겨 찾는 곳으로 발전하고 있고 금은세공,구두,가방제조업 등에는 벌써 한국인 「신거주자」가 상당한 정도로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이러한 상품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는 아니지만 「메이드 바이 코리안」으로 일본 경제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한국상품 이야기가 핑크빛만은 아니다.실제로 소비자시장에서 김치말고는 크게 인기가 있는 한국상품을 찾아 보기 어렵다. 가전제품을 예로 들어보자.요즘 일제 코끼리 밥솥을 사들고 한국으로 가는 한국사람은 거의 사라졌다.세탁기·냉장고를 굳이 이사짐에 싣고 가는 예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우리나라 가전제품의 질이 크게 좋아졌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우리나라 가전제품이 일본시장에 파고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지난해까지 도쿄의 전자제품 전문상가인 아키하바라에서 팔리던 삼성의 가전제품은 올들어 진열장에서 사라졌다.구매자가 없기 때문이다.애프터 서비스망이 갖춰지지 않은 것은 물론 질에 비해 값이 비싸기 때문이다.방어적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공격적 경쟁력은 향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재일한국인을 상대로 아리랑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고 있는 김종영씨는 이런 지적을 한다.『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은 고려인삼을 한번 사지 두번 안산다.한번 맛들이면 두고두고 팔 수 있는 품목인데도 도대체 외국인들이 어떻게 먹어야 할지 친절한 안내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한국상품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약점의 하나인 「친절함」의 결여를 꼬집는 말이다. 이제 한·일 양국은 97년 건설시장 상호개방을 앞두고 있다.자동차도 멀지않은 장래에는 상호개방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미국,EU와 함께 세계 3대시장인 일본시장에서 한국상품이 성공을 거두느냐의 여부는 광복 50주년을 맞는 올해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그리고 한·일 양국의 진정한 우호관계는 교역의 평형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한국 영화사(외언내언)

    1995년은 영화가 태어난지 꼭 1백년이 되는 해.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촬영기와 영사기를 만들어 「활동사진」을 찍은 것이 그 효시다.우리나라에 영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3년.이후 서울 종로의 단성사와 우미관 등에서 서양영화와 일본영화를 상영,인기를 모았었다. 한국인이 만든 첫 영화는 1919년 신극좌의 김도산이 제작한 「의리적구투」.그러나 이것은 정식영화가 아니라 연쇄극용 영화로 연극을 하면서 무대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야외장면들을 영화로 비춰주는 식이었다.이로부터 4년후인 1923년 윤백남이 감독한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가 탄생됐다. 한국의 무성영화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사람은 나운규.그는 1926년 「아리랑」에서 주연을 맡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고 그후 「풍운아」「벙어리 삼룡」등에서 직접 메가폰을 잡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는 1935년 이필우가 제작한 「춘향전」.이때부터 한국영화도 발성영화시대로 접어들었다.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방이 될때까지 한국영화는 질식상태를 면치 못했다. 해방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1946년 최인규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자유만세」.당시 자유중국으로 수출된 이 영화를 시사회에서 본 장개석총통이 「자유만세·대한민국만세」란 휘호를 보내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의리적구투」이후 지금까지 제작된 한국영화는 4천7백여편.이중 대부분의 필름이 한국영상자료원(이사장 신우식)에 보관돼 있다.영상자료원은 광복50주년을 맞아 오는 8월2일부터 9월6일까지 「광복50년 한국영화50편」이란 특선 영화제를 갖는다.이 영화제는 해방이후 지난해까지 제작된 한국영화중에서 50편을 골라 일반에게 공개하는 「좋은영화 다시 보기」축제.이 영화제를 계기로 우리 모두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으면 한다.
  • “한국전은 가장 기억할만한 전쟁” 새 평가

    ◎워싱턴 참전기념비 제막식 현장/“자유실현 원동력 됐다” 두 정상 영령추모/양국국가·민요 연주속 태권발레 선보여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이 27일 하오(한국시간 28일 새벽)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쪽 광장에 새로 조성된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엄숙히 거행됐다.한국과 미국 양국은 이날 김영삼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참전용사및 가족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 휴전 42주년을 맞아 참전비를 제막함으로써 반세기에 걸친 혈맹의 우의를 다졌다.특히 이번 제막식을 통해 6·25전쟁을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의 팽창을 처음으로 단호하게 저지해 전후 세계질서를 바꾸어 놓은 사건으로 재조명되게 함으로써 그동안의 「잊혀진 전쟁」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으로 새로 태어나게 했다. ○냉전종식에 큰 공헌 ○…김대통령은 제막식 연설에서 『6·25 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42주년이 되는 오늘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는 성스러운 터전을 마련했다』면서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은 전후 세계사를 자유의 실현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됐다』고 한국전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클린턴대통령은 『한국전은 자유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면서 『한국전은 동서 냉전을 종식하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고 역시 6·25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두 나라 대통령에 앞서 앨 고어 미국부통령은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을 위해 피를 흘렸다』면서 『전쟁희생자와 참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자』고 제의했다. ○…제막식은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이 기념공원에 나란히 입장해 공원을 시찰하는 것으로 막이 올랐다.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참전용사들의 박수 속에 도열한 의장대를 통과해 기념비에 다가가 대기하고 있던 데이비스 미국측 준비위원장으로부터 기념비에 대한 설명을 청취한 뒤 V자형으로 배열된 기념조형물 맨 앞의 병사동상 앞에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두 나라 국가 연주와 기념연설이 끝나고 미공군기가 축하비행을 하는 가운데 데이비스위원장은 『모두 손잡고 이 기념비의 제막을 알리자』면서 기념비 제막을 공식 선포했다.제막 선포에 앞서 미국 여가수가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열창해 개막식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미군악대는 「아리랑」과 「그리운 금강산」등 한국 민요와 가곡을 연주해 분위기를 돋웠고 재미동포 이준구씨가 지도하는 태권도단원 96명이 양국 국기를 손에 들고 애국가와 미국국가에 맞춰 태권발레를 선보였다.태권발레 시범단에는 이씨의 제자인 에스피 전농무장관도 끼어 있어 이채를 띠었다. 한국측에서는 3군 의장대와 전통의상을 입은 육군 취타대 2백50명이 행사에 참가했고 주최측은 단상 뒤편에 대형 점보트론을 설치해 행사장면을 중계했다.주최측은 섭씨 35도에 달하는 무더위속에 고령의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점을 고려해 수만t의 생수와 수십대의 앰뷸런스를 대기시켰는데 참전용사 몇몇은 더위를 먹고 쓰러져 들것에 실려 후송되기도 했다. ○완공에 3년1개월 ○…기념비는 미의회가 지난 86년 미국재향군인회의 요청으로 기념사업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치할 것을 의결한 것을 계기로 모금한 1천8백만달러의 재원으로 3년1개월간의 공사끝에 완공됐다.기념조형물은 49m의 화강암 석벽과 승리를 상징하는 V자형 대지 위에 행진하는 19명의 병사동상으로 구성됐다. 화강암 벽면에는 참전용사의 얼굴이 부조식으로 새겨졌으며 맞은편 화강암 보도경계석에는 한국전 참전 22개국 이름이 알파벳순으로 조각됐다.19명 병사동상 가운데 맨 앞 병사의 앞면 바닥에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만난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에 참가한 미국의 아들과 딸들을 위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분단상징 38선 표현 병사동상 가운데는 미참전기념비준비위 이사인 윌리엄 웨버씨를 모델로 한 동상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올해 69세인 웨버씨는 강원도 원주에서 낙하하면서 지뢰밭에 떨어져 오른발과 오른손을 잃고도 육군에 계속 근무하다가 지난 80년 대령으로 전역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이날 행사를 단상에서 참관했다. 행진하는 19명의 병사동상은 육군 14명,해병 3명,해군특공대 1명,공군척후병 1명으로 구성됐다.그들의 모습은 화강암 석벽에 유리처럼 비쳐 모두 38명이 행진하는 모습을 연출하고있는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상징하는 38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행사준비위 관계자가 설명했다. ◎김대통령 제막식 연설/전문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42주년이 되는 오늘,우리는 이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는 성스러운 터전을 마련했습니다.이 참전 기념비는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우리 자손 만대에 전해줄 것입니다. 나는 한국 국민을 대표하여 한국전 전몰장병을 추모하며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이 뜻깊은 기념비가 제막되기까지 사업을 주관하고 지원해온 미국 정부와 의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데이비스장군을 비롯한 건립위원들과 모금에 참여한 모든 분들,그리고 조형물 제작에 참여하신 예술가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치하드립니다. 45년전 6월 북한 공산군의 기습침략으로 시작된 한국동란은 3만3천여명의 미국 장병들을 비롯하여 9만5천여명에 달하는 유엔군 용사들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한국군과 유엔참전국의 총 사상자수는 무려 50만에 달했습니다. 이 기념비의 바닥에 각인되었듯이 한국동란은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이었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이들이 흘린 피와 땀은 전후 세계사를 「자유의 실현」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자유세계는 6·25전쟁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처음으로 단호하고 효과적으로 저지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6·25전쟁은 먼 훗날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고한 전쟁이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오늘날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4천4백만의 한국인들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뿌리내린,미국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때 「잊혀진 전쟁」이었던 6·25전쟁이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으로 바뀐 역사의 진전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낍니다.아시아·태평양시대의 개막과 함께 자유와 평화를 향한 한국과 미국 양국의 유대는 이 흑색 화강석처럼 단단하고,저포토맥강처럼 장구하게 발전할 것입니다.이 기념비에 새겨진 권리를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 전합니다.자유는 희생없이 지켜지지 않는다고.감사합니다.
  • 김대통령­클린턴 2년새 4번째 대좌/김대통령­방미 여로

    ◎“6·25참전 미군 희생은 한국번영 초석”­김대통령/단독·확대회담 60분… 덕담 교환하며 우호 확인/미 각계 유력인사 4백명 부부동반 초청 환담 김영삼 대통령은 워싱턴 국빈방문 사흘째인 27일 상오 11시40분(한국시간 28일 0시40분·이하 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단독·확대정상회담을 갖고 북한 경수로 지원문제 등 두 나라 사이의 현안을 논의한데 이어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내외신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26일 하오 조지타운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저녁에는 미국의 정계·재계·언론계·문화계 등 각계의 유력인사들을 초청,리셉션을 베풀고 환담을 나눴다. ○회담장 향하며 미소 ▷단독 정상회담◁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의 클린턴대통령 집무실(오벌오피스)에서 20분 남짓 단독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 대통령은 사진기자들을 위해 잠시 포즈를 취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회담에 돌입했다. 양국 정상회담은 지난 93년7월 클린턴대통령의 방한과 93년11월김대통령의 방미,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에 이어 이번이 네번째. 단독정상회담에는 우리측의 유종하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미국의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만 배석했다. 두 정상은 여러차례 정상회담과 전화통화 등으로 가까워진 탓인지 회담을 갖기 위해 이동하는 도중에도 시종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나눴다. ○통상문제 집중 거론 ▷확대 정상회담◁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단독정상회담에 이어 캐비닛룸으로 자리를 옮겨 확대정상회담에 들어갔다. 양국 대통령은 확대회담에 앞서 각각 배석자를 소개한 뒤 두 나라 우호관계를 화제로 덕담을 주고 받았다. 약 40분간 진행된 확대정상회담에서는 단독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토대로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함께 양국간 통상증진 문제가 집중 거론됐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지난해 6월부터 우리 정부가 시행한 외국인 투자환경개선정책을 설명한 뒤 『미국이 지속적으로 한국에 대한 투자를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확대정상회담을 끝낸 양국정상은 단독회담이 열렸던 오벌 오피스로 다시 자리를 옮겨 잠시 환담한 뒤 공동기자회견장으로 이동했다. 확대정상회담에는 우리측에서 공로명외무·박재윤 통상산업부 장관,박건우 주미대사,청와대의 한이헌경제·유종하 외교안보·윤여전 공보수석,임성준 외무부 미주국장이 배석했고 미국측에서는 고어 부통령,크리스토퍼 국무·페리 국방·브라운 상무장관,파네티 백악관비서실장,캔터 USTR(미국무역대표부)대표,레이크 안보보좌관,레이니 주한대사,로드 국무부차관보 등이 배석했다. ○미의 평화지원 다짐 ▷백악관 공식환영식◁ ○…정상회담에 앞서 김대통령은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 참석했다. 레이저 백악관의전실장의 안내로 입장,클린턴 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김대통령은 앨 고어 부통령내외,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존 섈리캐슈빌리 합참의장 등 미국측 환영인사를 소개받은 뒤 사열대로 올랐다. 김대통령은 21발의 예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애국가와 미국국가가 연주된 뒤 의장대를 사열했고 미국 고적대의 분열식을 참관했다. 클린턴대통령은 환영사를 통해 『한·미관계는 상호 고통분담의 역사와 공동목표의 미래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김대통령의 희생과 집념에 힘입어 한국은 경제성장에 걸맞는 정치적 발전을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클린턴대통령은 또 『북한핵문제가 한·미·일 세나라간의 긴밀한 공조체제 아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면서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남북대화 재개,한반도의 평화와 안정확보를 위한 미국의 확고한 지원을 다짐한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답사를 통해 『42년전 오늘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참전우방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린 전쟁이 3년만에 역사상 가장 긴 휴전에 들어갔다』고 상기시킨 뒤 『한국국민이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와 국민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미국 젊은이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증언하러 왔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또 『그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4천4백만 한국인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번영을 구가하고있다』고 감사의 뜻을 밝히고 『한국은 앞으로 보다 평화로운 세계,보다 번영하는 지구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미국국민과 굳게 손잡고 나아가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5차례 열렬한 박수 ▷미국 유력인사 리셉션◁ ○…김대통령은 26일 하오 백악관 바로 옆쪽에 자리한 코코란 미술관 1층홀에서 톰 폴리 전하원의장,제시 브라운 육군성장관,샘 넌 상원의원 등 미국의 유력인사 4백명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환담을 나눴다. 김대통령은 박건우주미대사의 안내로 리셉션장에 들어선 후 4중주 실내악단의 「아리랑」 등의 연주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중앙 플로어에서 45분간에 걸쳐 참석자 전원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 김대통령은 이어 인사말을 통해 『전쟁의 잿더미에서 실의에 빠진 우리에게 미국은 전쟁복구와 경제재건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서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김대통령이 『한국이 기적을 이루기까지 미국의 도움이 컸다』면서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습니다』고 인사하자 일제히 박수를 보내는 등모두 5차례에 걸쳐 박수로 호응했다. ○자유는 번영의 열쇠 ▷명예박사학위 수여◁ ○…김대통령은 26일 하오 조지타운대학 본관 힐리홀에서 오도노반 총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자유는 번영의 열쇠」라는 제목의 학위수락 연설을 했다. 순차통역으로 진행된 연설에서 김대통령은 『한국에서 북한공산주의의 위협은 군사독재를 불러왔고 절대빈곤의 고통은 개발독재를 정당화했다』면서 『그러나 나는 자유와 인권은 양보할 수 없는 권리로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임을 확신했다』고 강조했다. ○전화통화도 10여회 ○…스탠리 로스 백악관 NSC(국가안보위) 아시아담당 보좌관은 27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선 브리핑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이 매우 친밀한 관계라며 수치를 비교해가며 강조. 로스 보좌관은 두 정상간의 직접 대좌는 93년 여름 클린턴대통령의 한국방문으로 가진 첫대좌 이래 4번째라고 소개하고 두번째는 블레이크섬 회담후 백악관에서,세번째는 APEC 보고르회담에서라고 발표. 그는 또 양국 정상간에는 전화와 서신교환도 잦다고 설명하고 지금까지 직접 전화통화만도 10차례가 넘는다며 이는 매우 친밀한 관계라고 부연설명. ◎김대통령 미 조지타운대 명박 수락연설/요지 세계 최고수준의 학문적 업적과 교육적 명성으로 빛나는 조지타운대학으로부터 수여받은 이 학위는 나에게 최상의 영예가 될 것입니다.클린턴대통령을 비롯하여 미국과 세계를 이끌어온 이 대학졸업생들,그리고 21세기의 주역이 될 학생 여러분과 동문이 된 이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대학이 2백여년전,종교적 자유와 미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창설되었다는 사실에,40여년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해온 나로서는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태평양 너머 동북아 한가운데에 위치한 한국의 지난 반세기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우리는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후 국토분단과 전쟁,그리고 절대빈곤이라는 3중고를 안고 국가건설에 나서야 했습니다.우리는 절망의 어두움으로부터 희망의 빛을끌어내야 했습니다. 대학생으로서 서양철학에 심취해 있던 나는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숱한 고뇌를 하였습니다. 나는 미국이 이미 누리고 있던 자유와 평등,풍요와 복지는 다름아닌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맺은 결실임을 확신하였습니다.나는 스물다섯살의 나이로 정계에 투신하여 40여년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삶을 바쳤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숱한 역경이 있었습니다. 일본 식민통치가 남긴 척박한 토양에 민주주의는 뿌리내리기 어려웠습니다.북한 공산주의의 위협은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군사독재를 불러왔습니다.절대빈곤의 고통은 개발독재를 정당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유와 인권은 양보할 수 없는 권리로서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임을 확신하였습니다.자유민주주의가 빈곤으로부터 해방되는 지름길이며,공산주의의 위협을 극복하는 요체라고 믿었습니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별개가 아니라 자유라는 한 뿌리를 가진 두 가지라는 나의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이러한 신념을함께 한 한국 국민의 기나긴 민주화 투쟁은 마침내 문민 민주주의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나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한국사회에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뿌리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왔습니다. 이러한 개혁조치가 경제를 침체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없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지금 한국 경제는 몇년전의 만성적 침체를 벗어나 8%이상의 높은 성장을 구가하고 있습니다.정당성과 효율성을 함께 지닌 민주정부만이 국민에게 참다운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랜 민주화투쟁을 통해 자유 없는 번영은 진정한 번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자유 없는 번영은 풍족한 노예생활과 같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인류는 새로운 문명을 태동시키고 있습니다.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이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고 있습니다.동양과 서양이 진정으로 만나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화의 조화」를 통해 인류역사 추진의 두 수레바퀴가 되는 위대한 시대가 열렸습니다. 자유와 정의와 진리의 산실인대학을 비롯한 세계의 지성계가 새로운 문명을 이끌어나가야 합니다.나는 세계공동체의 시대이자 지식사회의 시대를 맞아 세계 대학간의 교류와 협력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해졌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이미 조지타운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대학에서 교육받은 한국의 인재들은 한국사회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지금도 5만여명의 한국 학생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이제 세계경제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름으로써 여러분의 새로운 개척지가 될 것입니다. 한·미 우호관계는 자유와 번영의 가치 아래 새로운 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더욱 성숙되어갈 것으로 나는 확신합니다.
  • 성악가 조수미씨 런던 에어스튜디오 CD녹음 현장

    ◎「한오백년」 열창에 “원더풀”/민요·외국곡 수록… 「광복50돌 선물」로 제작/런던 칠 협연… 녹음작업 나흘동안 강행군 런던 북쪽의 아름다운 동네 햄스테드에 자리잡은 에어스튜디오.18 80년에 지어진 빅토리아 스타일의 거대한 교회건물을 개조한 이곳은 유럽에서도 세 손가락안에 드는 최상의 음악녹음실이다.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현지시간) 바로 이 스튜디오의 가장 큰 녹음실인 린드헐스트홀에선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조수미)씨의 컴팩트 디스크(CD) 녹음작업이 이뤄졌다. 반주를 맡은 영국 최고의 교향악단인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녹음 당일에 주어진 한국노래 악보를 완벽한 솜씨로 연주했으며 조씨 또한 절정에 이른 음악세계를 과시했다. 레퍼토리는 한국노래 「한오백년」「울산아가씨」「봉숭아」「고독」「강건너 봄이 오듯」「아리아리랑」등과 외국의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들. 흥겨운 가락의 우리노래 「울산아가씨」를 연주하는 런던필 단원들의 어깨는 그 가락의 의미도 모르는채 저도 모르게들썩거렸고 조씨의 미성은 옥구슬로 변했다. 조씨가 광복50주년을 맞는 올해,조국에 바치는 선물로 제작하는 이 앨범의 머릿곡인 신가곡 「아리아리랑」(안정준 곡)의 녹음작업은 린드헐스트홀의 공기마저 명정하게 바꾸었다.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한국여인으로서 그녀의 반주 없는 「한오백년」 열창이 끝났을 때 홀과 스튜디오에선 「원더풀」이 터졌다. 소리의 부피가 작고 단단하며 가벼울수록 기교가 빛나는 천의 목소리를 가진 조씨는 나흘간의 강행군 녹음작업에도 전혀 변하지 않는 미성을 유지했으며 런던필 단원들도 성실하게 호흡을 맞췄다. 조씨와 몇차례 함께 작업한 바 있는 미국 지휘자 스테판 폰 크론씨와 뮤직 디스크 제작에 명성이 높은 프랑스의 프로듀서 아놀드 드 프로버빌씨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에 열중,밤샘 작업을 하던 관계자들을 감탄케 했다. 크론씨는 조씨가 『순발력이 뛰어나고 섬세하며 자연의 새 같은 노랫소리를 들려준다』면서 『그녀는 본능적인 리듬감각을 지니고 있고 가사의 해석력이 뛰어나다』고 말했다.2년전부터 앨범 녹음을 함께 하며 조씨를 알게 됐다는 크론씨는 동양음악에 특히 관심이 많아 중국음악을 공부해 왔는데 이번에 한국음악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고 밝혔다. 프로듀서 프로버빌씨도 『무대열정이 뛰어나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에너지발산의 가수』라고 조씨를 칭송했다. 조씨의 이번 앨범은 지난해 삼성나이세스와 계약을 맺어 첫 CD앨범 「새야새야」를 발매,클래식 음반으론 예상치 못한 25만장 판매의 대성공을 거둔데 힘입어 탄생하는 것.조씨는 물론 제작진의 뜨거운 열의로 「조수미 음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앨범이 될 것으로 삼성나이세스 관계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 배고픈 지식인(두만강 7백리:16)

    ◎콩나물 장수만도 못한 의사·작가 수입/자금난에 출판사들 잇달아 문닫고/문인들은 천직 버리고 장사꾼 전업/이욱·윤동주시인 후대들에 「우리정신」 심어줘 이욱의 시비를 찾아 덕화로 가는 산길을 걸었다.그의 시비는 북한땅 무산이 바라다 보이는 두만강가 산 언덕에 서 있었다.이욱은 1907년 러시아 극동지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숨을 거둔 곳은 연길이었는데 그해가 1984년이다. 시비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한동안 묵도를 올렸다.나는 그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비 앞에서 경건해질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반동학술 권위자로 몰려 연변대에서 쫓겨났다.그래서 화룡시 서성진으로 하방되었다.시인 이욱을 그때 만났다.어린 중학생이었던지라 시인이 쌓아놓은 책들을 목마른 사람 물 마시듯 탐독했다. ○반동학술로 몰려 수난 이욱 시비의 정면에는 19 57년에 쓴 시가 새겨있다.「칠순/할아버지/나무를 심으며/어린 손자를 보고/싱그레 웃는/그 마음/그 마음/그 마음」이라는 시비의 시에서 어떤 명언을 떠올렸다.내일 세상이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민족의 선각자들은 후대를 위해 사과나무와 같은 정신을 심어왔다.이상설,김약연,윤동주 같은 분들이 그들이다. 용정시 백금향의 최몽필 문화잠장의 말에서 오늘날 조선족의 문화,선인들이 뿌린 정신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친은 가수였디요.광복 전에 회령 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해서리 축음기와 판 20장을 상으로 받았다고 기래요.아버님은 김정구 이화자 백년설 남인수와 같이 목단강에 가서 공연했다는 말도 들었시요.공연기간이 끝나기 전에 소련 홍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진격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다 귀국했는데 이화자만 남았다는 거디요.이화자가 못떠난 것은 전염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합데다.데려다 치료를 해준 어떤 한족의 은공을 못 잊어 이화자는 한족과 살다가 문화대혁명 때 결국 잘못되었다는 겁네다』 이렇듯 고급문화나 대중문화 모두가 한반도에 뿌리를 두었다.그러나 광복후 소련의 영향을 똑같이 받은 중국과 북한의 문화가 연변 조선족 문화를 좌우했다.19 58년에 일기시작한 문화대혁명의 대우파 투쟁에서는 또 사정이 바뀌어 북한의 문화가 밀려났다.그 이후 70년대 초에는 중국과 북한관계가 다시 개선되었다.조선어는 평양을 기준 삼아야 한다는 주은래의 담화가 나올 정도였다.따라서 언어규범이 북한을 닮아갔고 모든 분야의 문화가 중국과 북한의 혼합형으로 변했다. 그러다 80년대 후반에는 더 큰 변화를 맞았다.그것은 한국문화였다.한국문화를 닮아보려는 노력을 무던히 했고,실제 한국문화는 급속도로 번져나갔다.이에 대한 투쟁도 만만치 않아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해에도 한국노래의 범람을 경계하는 광대극을 놀았다. ○북한의 언어규범 닮아 문화의 목적은 인간이 중시되어 세상이 보다 편리하게 열리는데 있다고 한다.연변의 원로작가 김학철선생은 미발표 소설 「20세기의 신화」가 문제되어 옥살이를 한 분이다.그가 연변 작가모임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감명깊게 들은 적이 있다.반우파투쟁 당시 북경에서 실제 본 목격담이었는데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북경의 한 단위모임에서 어느작가를 우파로 몰아붙이고 있을 때 다른 작가가 발언권을 얻었다.발언에 나선 작가는 『이 분은 좋은 사람입니다』라는 단 한마디의 말로 당하고만 있는 작가를 변호하고 6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것이다. 용정시 고급중학교 운동장에는 시인 김성휘의 시비가 서 있다.1933년 용정시 백금향에서 태어나 1990년 작고한 이시인의 시 「시냇물의 흐름을/천천히 보아라/천리만리/먼먼 길도/자신 만만타/흐르고/흐르고/내처 흐르며/한생을/말숙하게/가는 나그네」.역대를 살면서 민족과 영혼을 팔아먹고 편히 살아온 좌파들의 양심을 두드리는 소리다.성급한 투쟁은 역사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정치투쟁은 이제사 끝났다.하지만 문인들은 요즘 경제사정에 충격을 느끼고,또 고민하고 있다.수술칼을 손에 쥔 의사가 면도칼을 든 이발사 수입만도 못하고 교수나 작가의 수입이 콩나물장수를 못 따라간다.그래서 많은 지성인들이 천직을 버리고 장삿길에 나서는 이른바 하해로 뛰어드는 것을본다.더구나 출판업이 곤경에 빠져들어 문인들의 수입이 줄어들고 있다. 연변인민출판사는 국가로부터 해마다 1백90만원의 자금을 지원받는다.그럼에도 1백43명의 재직자와 50여명의 퇴직자들의 인건비,기타 경비를 빼고나면 책을 찍어낼 돈이 남지 않는다.내가 근무하는 아리랑편집부에서 80년대 초에 1년에 30여종 문예도서를 발간했는데 지난해는 계획도서가 겨우 4종 뿐이었다.다른 몇종은 위탁출판으로 돈을 받고 대신 출판한 것인데 그것마저 몇종 안된다.그래서 한문도서를 찍어 번 돈으로 조선어책을 발간하고 있지만 그것도 근근득식이다. ○출판은 하늘이 별따기 요즘 작가들은 글을 써도 발표할 수가 없다.장편소설 한권을 발간하는데 자비로 1만5천원을 내야 하는데 그것은 교수급 지식인의 거의 2년 노임이니 개인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다.혹시 정부나 기업인들의 찬조를 받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하늘의 별따기다.아무리 좋은 명작이고 좋은 글이라도 그것은 원고상태에서 죽어가는 형편이다.그리고 민간예인과 민담가들이 발굴되지 못한채 인생을마치는 경우도 있다. 이에따라 책을 통한 출판문화가 사라지는 경향이다.연변신화서점은 우리 민족도서가 가장 많은 곳인데 조선어책이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종수가 적다.그리고 변강 향진의 상점엔 책이라곤 전혀 없다.그만치 농촌의 문화생활이 고갈되고 있는 것이다. 화룡시 덕화진에서는 원래 1년에 한번씩 운동대회를 열어왔다.지금은 2년에 한번으로 줄어들었다.그리고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가 있는 날이면 영화관이 관중들로 꽉 찼다는 영화관이 문이 다 떨어져 나간 폐물로 되어 버렸다.용정시 백금향은 원래 문화보급이 잘되어 소문난 곳이었는데 지금은 문화잠은 있어도 문화활동은 없다.용정시 개산툰진 문화잠 책임자의 말에서 그 실상이 잘 드러났다. 『촌의 노인협회,부녀회,청년회의 활동차수로 보면 가관입네다.모여서 트럼프를 쳐도 통계에 넣으니깐요.경비난으로 지난해부터 문화활동이 정지됐지 뭡네까.촌마다 문화실이 있고 손풍금이 있지만 손풍금을 칠 사람이 없고 더구나 활동을 조직할 만한 청년 골간은 더욱 없습네다.똑똑한 사람들은 도시로 들어갔디요.연말회보를 하면서 이것저것 숫자는 많이 말하게 됩니다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한것이 없다 이말입네다』
  • 택시기사와 요금시비/미 군속 또 폭행

    주한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범죄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미군속이 한국인 택시운전기사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물의를 빚고 있다. 1일 하오8시쯤 서울 남대문구 동자동 서울역앞에서 미8군 군속 플레밍 조셉씨(51·카투사영어교사)가 미군전용택시인 이른바 「아리랑택시」기사 유모씨(45)와 요금문제로 시비를 벌이다 유씨의 얼굴등을 마구 때려 상처를 입혔다. 유씨에 따르면 『용산 미8군 영내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온 조셉씨가 평소보다 2달러정도 요금이 더 나왔다며 시비를 걸어 이에 항의하자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옆구리를 차는 등 행패를 부렸다』고 주장했다. 조셉씨는 사건현장에 있던 시민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인계됐다. 한편 서울남대문경찰서는 조셉씨를 폭력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입건,조사를 벌이고 있다.
  • 아리랑 본드(외언내언)

    외국인 또는 기관이 다른 나라에서 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하는 채권에는 흔히 그 나라의 정서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별칭이 붙는다. 예를 들어 미국이 아닌 나라의 기업이나 기관이 뉴욕금융시장에서 달러화 표시 채권을 발행하고 미국투자가들이 인수할 경우 이 채권의 별칭은 「양키 본드」다.양키하면 미국말고 다른 나라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채권은 「사무라이 본드」가 되고 영국의 채권은 그나라 사람들이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불도그를 좋아한다고 해서 「불도그 본드」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오는 5∼6월중 8백억원어치의 원화표시채권을 발행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진다.그동안 우리가 외국에서 채권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일은 많았지만 국제금융기구가 원화채권으로 우리나라에서 돈을 빌려가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우리경제의 성장잠재력이 대외적으로 확고한 신인을 받고 있다는 얘기이며 원화의 국제적 위상도 그만큼 높아지는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에 앞선 자본거래 자유화의 본격적인 시동이란 상징적 의미도 크다. 그런데 이번 발행되는 원화채권 별칭의 후보로 많은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다.아리랑을 비롯 김치,호돌이,태극,세계로,하나로 등이며 이 가운데 「아리랑」이 외국인들에게 발음하기 좋고 우리나라를 잘 상징한다는 중평을 듣는 것같다. 바라는 것은 좋은 별칭 못지않게 앞으로 국내 자본시장이 안정을 바탕으로 건전하게 발전하고 그래서 외국인들이 앞다퉈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리러 올 수 있게끔 우리경제가 막강한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일이다. 그때쯤 되면 외국기업들에겐 「아리랑 본드」의 발행자격을 얻는 것이 우량업체임을 증명하는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ADB/원화채권 새달 발행/7년 만기… 1억달러 규모

    ◎국내 채권시장 개방/증시상장 일반거래 오는 5월에 국내 채권발행 시장이 국제금융기구에 제한적으로 개방돼,아시아개발은행(ADB)이 1억달러의 원화표시 채권을 발행한다. 재정경제원은 11일 국내 자본시장의 본격적인 개방에 앞서 이같은 내용의 「국제금융기구의 원화채권 발행 방안」을 마련,오는 5월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 방안에 따르면 ADB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원화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자금을 외화로 바꿔 해외에서 개도국 지원 사업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한다.지금까지는 국내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빌려오는 것만 가능했으나 앞으로는 외국인이 국내에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빌려가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ADB가 발행하는 원화채권은 만기 7년,발행금리 연 13.5%(국채발행 금리) 수준으로 6개월 마다 이자를 지급하는 조건이다.채권 발행을 주선할 증권사와,조달한 원화 자금을 국제적인 통용력을 지닌 외화로 바꿔줄 은행(스왑 은행)은 ADB가 국내사 중에서 선정한다. 정부는 국제금융기구에 이어 96∼97년에는 원화채권 발행 대상을 외국 기업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ADB가 발행한 원화채권은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일반 투자자들이 사고 팔 수 있게 된다.외국인으로서는 외국인 전용 자금조달 시장이,내국인으로서는 외국채에 대한 투자시장이 새로 생기는 셈이다. 정부는 이 시장을 해외에 홍보하기 위해 외국인이 국내에서 발행하는 원화채권에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이름을 지을 계획인데,「아리랑 본드」,「김치 본드」,「호도리 본드」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원화 채권」 문답풀이/채권시장 국제화 촉진… 원화 통용령 높아져/국제 금융기구에 허용… 외국인은 취득 불가 ­국제금융기구가 원화채권을 발행하는 의미는. ▲국제금융기구가 발행한 채권이 국내 시장에서 유통되므로 국내에 외국채의 유통시장이 형성돼 채권시장의 국제화와 선진화에 기여하게 된다.대외적으로 신인도가 높은 국제금융기구가 원화 자금을 빌려가는 것이므로 원화의 국제적 신인도를 높이는 효과도 기대된다.원화의 국제화(원화가 달러화처럼 국제적인 통용력을 지닌 화폐가 되는 것)를 향한 진일보라고 할 수 있다. 원화채권 발행을 계기로 국제금융기구와의 유대관계가 두터워지면 앞으로 이들 기구에서 추진하는 개도국에 대한 차관 사업에 국내 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원화채권 발행이 허용되는 국제금융기구의 범위는. ▲우리나라가 가입한 신용도가 우수한 국제금융기구로 ADB,세계은행(IBRD),유럽부흥개발은행(EBRD),아프리카개발은행(AFDB),국제금융공사(IFC),국제통화기금(IMF) 등 10개이다.이 기구들은 모두 세계 유수의 신용평가기관들로부터 A 이상의 신용등급을 받았기 때문에 신용도에 아무 문제가 없다.일본의 경우는 신용등급이 BBB 이상이면 엔화 표시 채권 발행을 허용한다. ­원화채권의 발행 규모와 조건 등은 어떻게 결정하나. ▲원화채권 발행을 희망하는 국제금융기구와 주간사인 증권회사가 협의해 상업 베이스로 결정하며,증관위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증관위는 국내 시장여건 등을 감안해 발행 금리와 만기 등을 지정할 수 있다. ­국제금융기구가 발행한 원화채권을 외국인이 취득할 수 있나. ▲없다.외국인의 취득을 허용할 경우 원화채권의 유통시장을 개방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국내외 금리차가 있는 상황에서는 발행시장을 먼저 개방하고 유통시장을 나중에 개방하는 것이 순서이다.다만 원화채권을 발행한 국제금융기구가 조기 상환을 위해 자기 채권을 사는 것은 가능하다.
  • 22현 가야금 등 개량국악기 등장/청와대 만찬 “한국화”

    ◎칠갑산 등 25곳 연주… 호평 청와대의 공식만찬행사에 처음으로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개량국악기 연주가 등장,2백여 내·외국인 참석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3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젤류 젤레프 불가리아대통령을 위한 만찬에는 처음으로 그동안의 실내악 연주대신 22현 가야금과 흑단으로 만든 대금등 모두 6종류의 개량국악기가 등장했다.22현 가야금은 12현 가야금의 줄을 두배로 늘려 음폭을 확장시키고 화음연주가 가능하도록 개량한 것.대금은 쌍골죽이던 재료를 흑단으로 바꿔 음량을 대폭 확대시켰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이날 입장음악과 함께 두 나라의 국가를 연주한데 이어 「칠갑산」 「아리랑」 「로렐라이」 「오 솔레미오」등 동서양 음악 25곡을 연주했다.선보인 개량 국악기는 가야금과 대금 외에 아쟁·편종·운라·모듬북등이었고,연주곡들은 개량국악기에 맞게 새로 편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연주는 지난 달 28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개량국악기 시연이후 우리국악의 세계화를 위한 첫 시도이다.청와대는앞으로도 개량국악기의 연주를 통해 청와대만찬의 「한국화」를 꾀할 방침이다.
  • 「아래아한글 3·0버전」 소비자 불만많다

    ◎메모리 부족·에러메시지 너무 잦아/기존 윈도스용보다 기능도 떨어져 국내에서 가장 넓은 사용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아래한글」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치닫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최근 발표시기를 몇달씩이나 뒤로 늦춰 선을 보인 한글과 컴퓨터사의 윈도스용 3.0판이 사용자들의 강한 불만을 사고 있는 것.이 소프트웨어는 윈도스용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히는 그림그리기 기능결여를 포함,전반적인 윈도스용 프로세서 기능부족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돼 그동안 3.0을 기다려왔던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지난 18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아래한글 3.0발표회에서는 1만여명의 기존 아래글 사용자가 운집해 무료교환권으로 윈도스버전인 3.0을 교환해 갔다.그러나 발표즉시 통신망의 「한컴」방에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담긴 편지가 쇄도했고 이들의 불만은 『2.5판을 구입할 때 3.0판까지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고 선전을 해놓고 막상 무료업그레이드인 3.0판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가 있느냐』 『본전은 유료업그레이드인 3.1판에서 뽑으려는 의도가아니냐』 『에러메시지가 너무 자주 뜬다』,『메모리부족 메시지가 자주 떠 제대로 문서작업을 할 수 없다』였다. 아래한글 3.0버전이 주기억용량 4MB에서도 충분히 운용된다고 하는 한컴측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문제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실제 ▦글 사용자들은 대부분 『지난 몇달 동안이나 발표를 기다려 왔는데 이번 버전만큼 실망한 적은 없었다』며 『이번 판은 완전히 소비자를 기만한 행위』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기능면에서도 여타의 윈도스용 문서작성기에 비해 떨어지는 점이 많다.그림그리기 기능은 「아리랑」,「마이크로소프트워드」,「훈민정음」,「파피루스」등의 윈도스용문서편집기에서는 벌써부터 기본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기능이다.물론 도스용프로그램을 윈도스용으로 전환할 때의 문제점이 아직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지만 마이크로소프트사를 경쟁상대로 삼고 있다는 한컴이 이 정도도 해결못하고 불완전한 모습의 3.0버전을 내놓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글을 사랑해왔던 수많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로 비칠 수도 있다. 아래한글은 사실상 외국산 워드프로세서가 한국에서 판을 칠때 거의 유일한 국산소프트웨어로 시장을 선점해왔다.아래한글의 기능이 물론 뛰어나기는 하지만 아래한글이 지금까지 사랑을 받아온 이유중의 하나는 순수 우리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한글구현의 편리함 때문이었다.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MS워드나 워드퍼펙트같은 외산 소프트웨어들이 한글화,한자화 기능을 추가해 아래한글의 위상을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아래한글은 20대 해커 이승욱씨의 암호해독소동으로 출시를 목전에 둔 아래한글의 암호체계를 황급히 수정해내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어쩌면 너무 순식간에 커버린 한글과 컴퓨터사가 기존의 사용자층의 호응만 믿고 너무 안일했던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 대목이다.
  • 한지/“수명1천년”…가장좋은 지공예품 소재(한국문화 세계의길:8)

    ◎인형·판화용지·옷감으로 이미 세계적 호평/양산체제 갖추고 「비닐대체 연구」 뒤따라야 「지천년 마오백년」(지천년 마오백년).「종이는 1천년,헝겊은 오백년」이란 뜻으로 우리 한지의 긴 수명을 강조할때 흔히 쓰는 말이다.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다라니경(국보126호)이 종이수명 1천3백여년을 누리고 있고 신라때의 대방광불화엄경(국보196호 호암미술관 소장)의 지수가 올해 1천2백41세이고 보면 이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닥종이를 원료로 한 우리 한지의 우수성은 비단 그 수명에서 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예부터 호평을 받아왔다.일본 서지학자 야기는 『신라의 백추지(한지)는 다른 어떤 종이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훌륭한 종이로 중국에서까지도 천하제일이라고 하여 소중히 여겼다』고 기록했다.고려지,즉 한지는 최상품의 주요 조공품이었고 17세기 중국의 기술서 「천공개물」은 『조선의 백추지는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며 감탄하고 있다. ○옛부터 천하제일 명성 오늘의 한지도 세계적 명성을 지니고 있다.재독작가 김영희씨가 오래전부터 유럽에서 우리 고유의 닥종이 인형과 한지작업을 통해 인기를 누리고 있고 파리에서 활동중인 패션디자이너 이미금씨는 한지를 이용한 의상을 선보여 현지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최근엔 파리의 화랑가에서 한지가 미술작가들의 인기소재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한국국제교류재단이 한국문화를 해외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최근 펴낸 「KOREAN CULTURAL HERITAGE」(한국의 문화유산)시리즈 첫권도 한지를 우수한 문화품목으로 실었다.지난해 5월 손주환 당시 재단이사장이 기획,출간해 세계 1백36개국의 도서관등 관련기관에 무료배포할 이 학술시리즈 첫권에서는 한지의 특징과 제작과정,이용분야를 알기 쉽게 정리해 소개하고 있다. 한편 재독작가 김영희씨의 닥종이인형은 정제가 덜된 거친 한지인 닥종이를 이용한 손작업을 통해 한국인과 한국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작품.지난 81년 서독 뮌헨서의 첫 해외전시회이후 독일전역과 스위스,네덜란드,프랑스의 민간·정부초청 전시회를 꾸준히 가져오며 현지 언론과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또 이미금씨는 지난해 4월 파리근교 소나무회 전시장에서 전통 한복의 선과 색감을 서양의상에 응용한 한지패션쇼를 열어 패션의 새 영역을 열었다는 평을 얻었다. ○일서 인쇄지 이용 계획 그러나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한 한지의 상품화는 아직 부진한 형편이다.미술전문서적 출판사인 API가 조선시대 민화를 한지에 판화로 찍어낸 판본민화를 세계시장에 내놓은게 그나마 한지 상품화의 한 예일 정도이다.지난 93년 전통 닥종이를 서른세겹 겹친 「구아리랑」이란 판화지의 실용특허를 받아낸 API는 지금까지 모두 34종의 판본민화를 개발해냈다.지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에 판본민화를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던 API는 이 판본민화를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에 내놓기 위해 영국,오스트렐리아등지에서 시장조사중이다. ○보석함·장롱 제조 가능 현재 세계시장에서는 종이를 이용한 각국의 고유상품들이 활발히 유통되고 있어 우리도 전통 한지를 이용한 문화상품의 세계화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이 시급한 실정이다.멕시코의 경우고유의 종이에 인디언 문양을 넣은 복제품을 각국 백화점에 내놓아 여행객들의 기호품으로 자리잡게 했고 가까운 일본만하더라도 한지원료를 가공해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팔고 있어 한지의 종주국인 우리의 체면을 깎고 있다.특히 일본의 경우 수명이 긴 한지를 도서등 인쇄용 재료로 이용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시급한 실정이다. 국내에서는 편지지,편지봉투,포장지,부채,가구등 한지 특유의 질감과 빛깔을 살린 상품들이 다양하게 유통되고 있는데 이들 상품의 세계화를 모색해볼 만하다.또한 상품화는 되지 않았지만 작품단계에 머물러 있는 오색한지공예나 지승공예도 세계화할 수 있는 문화상품이다.한지를 덧붙여 색채를 넣는 오색한지공예의 경우 내구성에 특유의 자연스런 색채감과 질감까지 갖추고 있어 상품화가 될 경우 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특히 한지를 꼬아 만드는 지승공예의 경우 보석함,장롱등 가구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다.지공예의 장점은 단단함인데 한지에 식물성기름을발라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여서 조선시대 한지는 갑옷,화살통,비옷,우산등에 쓰여졌다. 한지의 이같은 특성에 착안,과학기술처는 지난해 10월부터 공장시설을 통한 우수 한지의 대량생산을 위해 과학적으로 한지 분석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통상산업부는 최근 김치·도자기등과 함께 한지를 수출용 전통상품 유망 14개 품목에 포함시켜 집중육성하기로 했다. ○산업화 적극 지원해야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지를 세계적 문화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과학적인 연구와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임영주 전통공예관 관장은 『한지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연구소와 한지공단을 정부차원에서 설립해야 한다』고 말했다.서양의 종이가 1백년을 견디지 못하고 훼손되는데 비해 한지의 수명은 1천년 이상이고 또 비닐등을 대체해 쓸 경우 공해요인을 없앨 수 있는 장점이 있는만큼 과학적 응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기호 오색한지공예연구회장은 『현재 개인적 작업단계에 머물러 있는 지공예나 지승공예작가들이 조직적으로 산업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경우 한지의 문화상품화와 세계시장 진출은 쉽게 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한지 어떻게 만드나/닥풀·섬유소에 풀어 종이액 걸러내/닥나무 속껍질 가려 양잿물에 삶아 한지의 특장은 무엇보다도 직접 손으로 만들어가는 제작과정의 정성에서 나온다.베어낸 닥나무를 다발로 묶어 가마솥에 세워 놓고 가마니로 둘러싼 뒤 물을 붓고 불을 때서 삶는다.겉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삶아지면 꺼내서 껍질을 벗겨 말린다.건조된 껍질을 물에 불려 발로 밟은 뒤 하얀 내피부분만 가려낸다.이 내피를 양잿물 섞인 끓는 물 속에서 3시간 이상 삶아 물을 짜낸다.여기에 닥풀뿌리를 으깨서 짜낸 닥풀과 섬유화된 재료를 넣고 잘 저어서 고루 풀리게 한 다음 발에 종이액을 걸러서 떠낸다.이런 과정을 거쳐 흰 빛의 통기성 강하고 질긴 한지가 나오는 것이다. 현재 이런 공정을 거쳐 한지를 만들어내는 공방은 전국에 걸쳐 1백여개.전주한지나 원주한지 등 수공업공장 형태의 한지제작사는 손꼽을 정도이고 대부분이 영세성을면치 못한 채 근근히 맥을 잇고 있는 형편이다.한지 전문 기술인들이 점차 줄어 들어 제대로 된 한지를 만드는 공방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여서 보존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재불 패션디자이너 이미금씨 소견/질감좋고 색상고와 외국인 선호/“한지상품 상설전시관 아쉽다” 『각국의 백화점 전시장 등 대중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한지와 함께 한지로 만든 상품을 상설 전시해야합니다』 재불 패션디자이너 이미금씨(35)는 우수한 한지를 세계시장에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안타까워했다. 『지난해 파리근교의 소나무회 전시장에서 한지 의상전시회를 했을 때 외국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전시가 끝나고 나서 의류업계와 컬렉터들로부터 상품화 제휴가 몰려들어 곤혹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덕성여대 섬유과를 졸업하고 현재 파리 8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씨는 파리장식의상미술학교 재학 중이던 85년부터 퐁피두센터에서 한지를 이용한 의상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그는 한지가 외국인들의 눈을 끄는 이유를자연적인 소재와 색채를 주로 이용하게 된 패션계의 최근 추세 말고도 한지가 갖고있는 고유의 장점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세계 각국의 종이를 모두 소재로 써봤는데 닥종이를 이용한 한지 만큼 자연스런 멋을 내는 소재를 보지 못했어요.한지는 견고하고 자체의 질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염색할 때 나타나는 색상이 정확하고 산뜻해 외국의 작가들도 아주 좋아해요』 서울에 올 때마다 인사동 골목을 뒤져 각종 닥종이를 구입해간다는 이씨는 파리의 화랑과 외국작가로부터 한지 구입요령을 알려달라는 주문을 적지않게 받는다고 밝혔다. 종이작업 작가들의 전시회로 매년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판화미술제(SAGA)에는 종이를 판매하는 회사들도 함께 참여하는 만큼 정부 지원으로 한지를 상설 전시하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그 파급효과가 기대 이상으로 클 것이라는 귀띔도 했다.
  • 한복패션/동양적 선·색살린「하이패션」창출(한국문화 세계화의길:6)

    ◎창조·기술·비즈니스 연결 공동작업 필요/전문 세일즈맨 양성… 디자인 판촉도 강화 「할아버지의 바지저고리와 목도리를 연상시키는 투박한 재킷,가마니를 짠듯한 실크·울의 허리선이 높은 코트.색동색 무늬가 돋보이는 원피스」….93년 3월 세계패션의 메카 프랑스 파리. 장 폴 코르티에·이브 생 로랑·지아니 베르사체 등 세계 패션계를 이끌고 있는 기라성 같은 디자이너들의 화려한 컬렉션에 집중되던 언론과 패션전문가들의 시선이 한국에서 온 생소한 이름의 디자이너 이신우와 이영희를 비추기 시작했다. 『아직 세계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특히 선과 색이 무척 아름답다』­프랑스 국영2TV는 『일본에 이어 한국이 파리패션계를 노크하고 있다』고 호기심과 경계심 어린 반응을 보였다. ○이신우·이영희씨 진출 두 사람이 파리무대에서 첫선을 보인 옷의 기본은 색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적인 복식미의 선과 색을 살린 것. 20년간 한복의 현대화 작업을 해온 이영희씨는 파리로 입성하기 직전 양장디자이너로 변신,한복의 활용폭을넓혀 파리로 나온 것이다. 93년 10월에는 진태옥씨가 가세했다.그리고 지난해 봄에는 홍미화씨가 한국 특유의 정서인 해학을 느낄수 있는 옷들을,가을에는 안피가로 장광효등 남성 디자이너들까지 뛰어들었다. 컬렉션기간중 지면을 아껴온 파리의 패션전문지와 일간지들은 이영희씨의 의상을 한마디로 자연을 닮은 「바람의 옷」이라고 표현했다. 한국미 과시의 절정은 지난해 3월 이신우씨의 파리컬렉션에서 였다. 고구려 고분벽화 문양을 응용해 여성의 내재된 강한 힘을 표현한 이신우씨의 옷은 『고대아시아의 영광이 찬양한 아름다운 옷』이란 평을 받았으며 6백여벌의 주문을 받았다.이어 10월 진태옥씨는 우리 전통 혼례옷인 활옷을 서양의 진과 매치시켰다.실크 소재의 붉은색 바탕에 정교하게 십장생 수를 놓은 재킷 조끼등이 하이라이트였다. 일본의 원로 패션평론가 히로시 다나카는 진씨에게 편지를 보내 『한민족의 역사성에 대한 깊은 사색이 투명한 미의식에 의해 승화된 작품세계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범국가적 지원 따라야 한국의섬유산업은 지난 30년간 수출입국의 견인차 노릇을 해온 효자산업이다.그러나 근년들어 반도체·자동차등의 수출이 늘며 사양산업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푸대접을 받는 처지가 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세계 4대섬유수출국이다).이에 국내의 뜻있는 디자이너들은 한국복식의 선과 색을 살려 고부가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하이패션쪽으로 방향전환을 시도,과감히 파리 입성을 한것이다. 냉혹한 세계패션 무대에서 우리 디자이너들이 어느 정도 파리 패션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수 있었던 것은 90년대 이후 급부상한 동양풍 때문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지아니 베르사체등 내로라 하는 디자이너들이 너도 나도 중국이나 몽골의 대륙적인 분위기를 자신의 작품속에 응용했다.또한 자기민족 고유의 것이 세계화의 지름길이라는 「에스닉 이노베이션」의 분위기속에 그나마 성과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파리 입성은 결코 만족할만한 수준이 못되고 있다. 「기모노 볼레로」­.이 말은 일본의 디자이너들이 세계무대에서 이미 「자포니즘」으로 확고히자리를 잡은 속에 앞으로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더 치열해져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충격적인 단어다. 지난해 10월 프랑스 패션지 「마리클레르」가 한 한국디자이너의 한복저고리 응용작을 보고 「기모노 볼레로」로 잘못 소개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우리패션계에서는 세계패션시장의 스타로 떠오른 한국인 디자이너가 없고 국가적 지원도 전무한 상태에서 파리진출을 시도하는데 대해 「무모성」을 우려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상품기획·마케팅 취약 상품기획이나 마케팅 분야가 취약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서 디자이너 개인이 거대한 세계시장에 도전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창조」와 「기술」 「비즈니스」­이세가지가 세계화 시대의 한국패션이 나가야할 길이라면 우리의 디자이너들은 이런 면에서 너무 준비가 없이 홀로 뛰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패션관계자는 『우리 디자이너들은 현지 홍보자에게만 의지하는 실정이며 광고·홍보·마케팅 등 사전 조사가 전반적으로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탓에 독창적인한국패션의 디자인은 인정받으면서 정작 외국여성들의 인체비례등 신체조건을 잘 파악치 못해 재고를 늘린다는 것. 국제 바이어들에게 수주전을 펴는 전문세일즈맨을 두는등의 실질적 전략 마련이 절실하다. 디자이너들이 파리컬렉션에 참가하는 비용은 한번에 1억∼3억원정도. 돈만있으면 너도 나도 나갈수 있어 실속없이 외국인들의 주머니를 불린다는 소리도 듣고 있다. 겐조등이 유럽시장 진출에 성공한이후 지난 81년 일본 통산성은 11명의 디자이너를 선발, 미국 뉴욕 진출을 직접 지원하는 정책을 썼다. 85년 프랑스에 유학, 세계적 패션업체인 파리의 기라로시사 여성복 수석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이미경씨(35)는 『실크등 고급스런 소재와 꼼꼼한 바느질,한복의 선등이 파리에서 주목 받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지나치게 한국적인 옷을 내세우기보다는 독특한 선과 색으로 우회적인 공략을 해야한다고 한국패션의 세계화 전략방안을 말한다. 패션평론가 김청씨는 『60년대 국제복장학원의 최경자씨가 아리랑드레스를 만들어 한국패션의 세계화를 시도했다면 30년이 지난 지금은 보다 세계인의 정서를 수용할 수 있는 창의적인 디자인이 나와야할 시기』라며 『한국적인 것을 구체화시키는 공동작업에 힘을 모을 것』을 강조한다. 국내디자이너들을 보면 디자이너 O씨는 모시나 삼베 실크등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날염하는데만 매달려 있다.또 디자이너 S씨는 도장찍듯 문양을 찍어나가는 작업만 하고 있다.그러나 이런 분산된 작업으로는 세계시장을 뚫을 수 없다. 작업내용들을 하나로 모으고 체계화시켜야한다. 패션은 문화산업이다.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사치라는 인식에 머물고 있다.패션산업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동시에 한국의 정신과 이미지등 유형무형의 것을 수출하는 길임을 생각할때 국가적인 지원과 관심은 시급해진다. ◎파리 패션계 입지다지는 진태옥씨/“전통적 고전미 현지 정서에 접목”/활옷·십장생 문양 응용해 호평받아(인터뷰) 『한국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또 어떻게 국제적인 감각으로 이를 수용해 유럽인들의 미의식을 파고 드는가가 늘 숙제였습니다』 30년 이상을 양장 디자인에 몰두하면서 지난 93년 가을이래 파리라는 세계무대에 자신의 작품을 제시,입지를 다지고 있는 진태옥씨.김영삼대통령의 유럽순방 수행경제인으로 선정돼 2일 장도에 오른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청담동 작업실에서 만나보았다.22일 열리는 「95가을·겨울 파리프레타포르테(기성복)컬렉션」마무리 준비가 겹쳐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패션은 고부가가치의 산업입니다.우리 문화의 세일즈작업을 패션디자이너들이 맡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 가을 조선시대 결혼예복인 활옷을 응용,특유의 붉은 색상을 재현하고 십장생등 문양을 손수 수놓은 작품을 일부 제시해 현지 언론의 관심을 끌었던 진씨는 『활옷을 응용한 재킷과 조끼상품에 십장생의 의미를 담은 설명서를 부착했는데 동양의 신선사상에 호기심을 갖는 상류층 유럽여성들에게 어필한것 같다』고 밝혔다.현지 미국 뉴욕의 도프굿맨 백화점 등에서 1천∼1천5백달러(재킷)의 고가에 팔린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진씨는 『「고전적」요소를 「아방가르드한」상품으로 재현한 활옷응용과 같은 작품으로 디자이너 「진태옥」의 정신세계와 한국문화의 정수를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고 자평하고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시장에 어울리는 보편적인 옷을 선보이는 디자이너로 인정받을때 진정한 「문화의 세계화」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 강사이 오가던 인정(두만강 7백리:2)

    ◎60년대초엔 북한냉면 먹으러 수시 왕래/물길러 오가던 아낙네들 문화혁명뒤에 사라져/용정 백금발전소 전기는 아직도 상계리에 공급 화룡시 용화향 상화촌 김 노인은 마을 앞 강건너 북한 땅인 무산군 화평리(화평리­옛 이름은 봇더기)에 사는 조카잔치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어느날 강에 나갔다가 강 건너에서 목욕을 하는 조카를 보았다.아무 날 잔치를 한다고 높은 소리로 알리더라는 것이다.그런데 미처 출국 수속을 하지 못해 갈 수 없었던 그는 잔치날 강언덕에 서서 형님 집을 바라보며 눈물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가깝고도 먼 이웃땅 참으로 두만강 양안의 마을은 가까우면서도 멀다.거리로 계산하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고 국법으로 따지면 멀다.그러나 철조망을 치고 콘크리트 담벽을 쌓은 무인지대를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눈 한반도 군사분계선에 대면 두만강은 보통강이라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두만강은 국경선 구실을 변변히 못했다.강 양쪽의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운 통행증이나 여권 따위는 필요도 없이 왕래를 했다.용정시 개산둔진 선구촌 사람들은 냉면 먹으러 대안의 종성으로 다녔다고 한다.개산둔에 가야 식당추념들을 할 수 있었는데 20여리나 떨어졌고 국수맛도 엉망이었다.그래서 가까운 강건너로 가면 걸음도 덜고 입맛도 돋굴 수 있었으니 진짜 꿩 먹고 알 먹기였다.더구나 종성의 냉면은 함경도에서도 제일이어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연변 텔레비전방송국 아나운서 박홍섭씨는 어릴 때 삼촌을 따라 강을 건너 친척 잔치에 참가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한달을 놀다가 돌아오려니 그만 얼음이 풀리기 시작했디 뭡네까.교두로는 감히 올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강이 다 풀리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디요.그래서 두껍고 긴 널빤지를 가져다 량켠 얼음우에 걸쳐놓고 허리에 바줄을 동여매고 건너왔댔시요』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중국과 북한관계가 냉랭해지면서 국경선은 쌀쌀한 냉기를 풍기기 시작했다.그러나 1970년 주은래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후 완화되긴 했다.겨울이면 두만강에서 아이들은 함께 썰매나스케이트를 타는 경우도 있다.말하자면 중국과 북한의 국제경기라 하겠다. 용정시 백금향 동광촌 제3촌민소조(옛명 현암동)는 10여호 오붓한 마을이다.몇년 전까지만해도 이 마을에서는 두만강물을 길어 음료수로 했다.겨울에 강이 얼면 아예 대안의 북한 상계리에 건너가 물을 길어왔다.온 마을이 물동이를 이고 지게를 지고 국경을 넘어 이국으로 간다.그들은 하루에도 수차례씩 출국했다간 입국했다.아마 중국에서 출국 수가 가장 많았던 사람을 꼽으려면 이 마을 아낙들일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동삼 내내 펄럭거리고 다니자니 미안하기 짝없더만요.상계리 분들이 얼굴한번 찡그리는 일없이 반겨 줄수록 죄송했디요.그래서 가끔 사탕,과자며 과일이며 떡을 가져다 드리곤 했는데,그러면 상계리 분들은 「이러지 마시라우요.엎음 갚음이랍니다」고 기래요.「우리가 쓰는 전기가 백금발전소의 전기 아닙니까」라면서….물고생을 무던히도 했디요.그때는 언제면 집에서 물을 받아 먹나고 학수고대했는데….정부에서 이런 사정을 알고 뽐프를 놓아주어서야물동이를 팽개치게 되었다구요.그런데 정작 물고생을 덜고 나자 상계리의 고마운 분들이 그리워집디다.물을 긷는다는 핑계로 국경을 넘나들었는데 이젠 세울 명목을 잃은거디요. 동광 마을 김씨가 들려준 국경을 드락거릴 시절의 회고담이다. 북한 땅 상계리와 서쪽으로 마주한 용정리 백금향 안개골에 들어선 백금발전소는 7백리 두만강에서 유일무이한 발전소다.1960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리처 이호성과장이 안개골을 답사하고 발전소 건설구상을 구체화했다.그해부터 착수한 공사는 만 10년이 걸려 지난 1970년 5월부터 정식 발전을 시작했다.그런데 상계리는 조개형국으로 된 언덕이 북으로 뻗어내려 두만강이 병풍처럼 둘러선 두렁바위(둘러선 바위라고 해서 불려진 이름)를 핥으며 10여리를 굽이 돌아간다.강을 따라 전깃줄을 늘리려면 인력과 물력 낭비가 엄청나 사전에 북한측과 협의하고 곧바로 조개언덕으로 전선대를 세우게 되었다.그 보상으로 상계리와 상계리에 있는 북한 공전소에 무상으로 전기를 공급한다. ○안개골이 전기골로 백금발전소 퇴직간부 서현석(67·경상북도 영천군 고견면 태생)씨는 『예전에 안개골은 이름 그대로 늘 안개에 묻혀 있었수다.발전소가 세워진 후로 안개골은 별무리가 내려 앉은 격이 되었지.안개골이 전등골로 탈바꿈한 셈이우다』라고 말했다. 누누천년 이 땅을 적시며 흘러온 두만강은 우리 민족의 발목을 잡는 테였다.재난을 덮어씌우고 혈육간의 이별을 주고,그래서 아리랑고개 다음 가는 눈물이 강이 아니였던가! 하지만 반 만년의 찬란한 문화를 창조해온 우리는 끝내 두만강을 정복하고 두만강문화를 창조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문명시대가 열리면서 두만강 푸른 물이 누렇게 혼탁해졌다.그래도 두만강연안 사람들은 여전히 동방예의지국의 배달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백금향 백금촌 제2촌민소조 박길남(함북 무산군 풍경면 소학동 태생)노인을 찾아갔을 때 그 집에서는 꿩고깃국에 햇 이밥으로 후더운 접대를 했다.연변에서 평강벌 입살이 제일미라 만주국시기 공품이었다고 하지만 백금의 입쌀도 못지 않았다.최몽필잠장은 이밥맛이 어떠냐고 묻고는 수입해온 종자라고 부언했다. 『백금은 연변에서 해발고가 가장 높고 서리가 빨리 내려 논벼산량이 많이 떨어지는 땅입네다.그런데 백금 제4촌민소조 분이 어느 해 가을 강을 건너가 조선(북한)논에서 잘 영근 벼이삭을 몰래 가져 왔댔습니다.이듬해 그것을 심었는데 그 품종이 지금 백금에 많이 퍼진겁네다.서리가 빨리오는 고산지대에 맞는 우량품종을 수입 한 걸로 봐주시라요.그 다음부터 좋은 소출을 내게 되고 맛도 훨씬 좋아졌고…』 ○봄이면 과일꽃 만개 지난해 11월 25일 나는 우리 민족의 후더운 정을 한가슴 지니고 용정시 대소 과수농장을 찾았다.시루형국의 두개의 시루봉사이 안침진 곳에 터를 잡고 강건너 오국산성을 바라보며 오순도순 모여 앉은 대소 과수농장은 봄이면 과일꽃속에 묻히고 가을이면 싱그러운 사과향기에 젖어 말 그대로 아름다운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된다.현재 1천7백명의 인구에 4백여명 노동자를 가진 이 농장의 과수밭은 4백50㏊.국광,홍성,진홍,계광 등 20여가지 사과품종의 총산이 4백50만근이라고 했다. 광복전에 대소 땅은 거의가 이씨 성을 가진 지주 차지였다.천성이 부지런한 이씨 지주는 북한땅 길주에서 사과묘목을 사다가 아래 시루봉과 웃 시루봉줄기가 만나는 움푹지고 양지바른 비탈에 심었다.그리고 식구들과 소작인들을 총 동원해서 사과밭을 가꾸었다.사과원을 만들면서 이씨지주의 며느리는 일에 지쳐 죽기까지 했다.이씨지주는 며느리의 묘를 사과밭속에 썼는데 지금도 임자 없는 묘가 쓸쓸히 남아있다.그러나 광복이 나고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하면서 지주를 청산하자 자기가 심은 사과가 열매를 맺는 것도 보지 못하고 이씨지주는 몰래 떠나버렸다. 1964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덕해 제1대 주장이 대소로 시찰을 왔을 때 촌에서는 이씨지주과원의 사과를 대접했다.홍조를 띤 처녀의 볼마냥 탐스러운 사과를 받아든 주장은 대대적으로 사과원을 꾸려볼 구상을 했다.그는 요녕성 개현에서 초빙받아온 과수전문가 관치성(만족)을 대소에 파견하여 농장을 세웠다.이씨지주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더라면 오늘 날 두만강변에 사과원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몇해 전에 대소과수농장허경진(46)부농장장이 20여리 떨어진 백금향에 초빙되어 가 30㏊ 땅에 사과나무를 심었지만 매서운 강바람에 겨울을 나면 얼어 죽어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일이 있다. 대소 맞은 쪽 대안 마을은 북한 함북 회령군 상수리다.그들은 강 하나 사이두고 대소에 사과꽃이 만발한 것을 볼 때마다 승벽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어느 해엔가 그들은 대소의 사과묘목을 떠다가 옮겼다.한해 겨울을 났는데 무사했다.신심이 생긴 회령군에서는 과수지도원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여 시찰을 했다.원래 회령군에는 1천여㏊의 살구나무와 다른 과일나무가 있을 뿐 사과는 없었던 것이다.1985년 가을 대소에서는 묘목을 대량 보내고 이듬해 4월 22일 대소과수 농장에서 관치성,허경진,김수돈(57)등 책임자와 기술자들이 회령으로 건너갔다.그들은 회령군의 6개 이를 순회하며 기술지도를 했고 자동차로 접수를 싣고 가서 접목 등 지도를 해주기도 했다.85년부터 88년까지 4년동안 대소과수농장에서는 묘목과 접수를 무상으로 지원했다. 1988년 회령군에서는 세 상자의 사과를 따가지고 대소과수농장으로 와서 감사드렸다.1993년 여름에는 대소에 친척이 있는 상수 사람이 친척앞으로 편지를 보내 과수농약을 보내달라고 했다.농장지도부에서는 토론하고 밤을 타서 농약상자들을 둘러메고 강을 건너 주었다.이치로 따지면 국경을 사사로이 넘나드는 것은 불법이다.하지만 후더운 인간애앞에서 그런 것들이 때로는 무시되었다.
  • 거문고 명인 김영재(이세기의 인물탐구:69)

    ◎흐트러짐 없는 연주… 이론·작곡 밝아/신쾌동씨에 귀사… 피나는 연습끝 정상 올라/정규교육 1세대… 가야금·아쟁에도 일가견/93년 지하실에 상설무대 설치… 발표할곳 없는 동료들에 개방 송강 정철은 거문고 대현을 타는 데 있어 그 소리를 「얼음에 막힌 물 여흘에서 우니는 듯」하다 했고 영조때의 풍류객 송계연월은 「북창송음에 거문고줄을 얹어두니 바람이 줄을 건드려 타지 않는데도 스스로 우는 소리야말로 참으로 듣기 좋다」고 노래한 바 있다. 거문고의 명주실로 꼰 여섯줄 중에서 선율을 타는 유현은 소리가 맑고 부드러운 반면 대현은 줄이 굵고 투박하여 해죽으로 만든 술대를 단단히 거머쥐고 내리쳐야만 짙푸른 소리를 얻을 수 있다.거문고의 고매한 자태와 음률은 남성적인 화평정대와 악기 중의 으뜸인 백악지장에 비유되어 연주자는 아무리 어려운 대목도 고뇌어린 표정을 짓거나 박자를 맞추거나 몸을 흔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귀에 듣기 좋게 하는 것은 저속하며 음악 자체에 몰두하는 것도 금물이다. ○지영희씨에 해금 배워 거문고연주에서 한올 흐트러짐 없이 엄격한 법도를 지켜가는 이가 바로 명인 김영재다. 그는 『음악성이 비범하여 거문고 주자로서 일급일 뿐만 아니라 지영희 문하에서 오랫동안 학습한 해금도 그를 따를 이가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백낙준에서 신쾌동으로 이어진 그의 「거문고 산조」는 비감과 청정을 떠나 무념무상의 흐름속에서 극청 극탁을 끌어낸다. 느린 장단인 진양조로 괘를 짚어 먼저 장엄한 우조로 소리를 울리고 슬픈 느낌의 계면조와 화평스런 우조를 교차시키다가 중모리·엇모리,마지막 자진모리에 이르기까지 가슴 한복판을 후빌 듯 두들기는 장탄식은 절묘하다.손과 줄이 얽히고 풀리면서 흥청거리는 기교와 기량으로 천변만화를 농현하면 남자가 울분을 참듯 한을 안으로 다스리듯 듣는 이도 켜는 이도 어느 샌가 눈가에 눈물이 스미는 감동에 젖는다. 우리 음악은 일시에 피어오르는 장미꽃과는 달리 부단하게 변화되기 때문에 그 선율을 일사불란하게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그러나 그의 연주는 『교묘하게 꾸며진 말과 보기 좋게 꾸민 표정에는 인이 드물다』고 한 것처럼 정 가운데 동을 감춘 정중유동의 자세다. ○처음엔 무용으로 입문 또 스승으로부터의 피나는 훈련과 연습으로 전수되던 우리 국악현실에서 처음으로 정규교육을 받은 일세대이며 가야금·양금·아쟁을 고루 다루고 작곡과 이론에도 밝아 우리 고전악기가 갖는 가능성을 다양하게 타진해왔다. 그는 처음엔 「춤추는 사람」이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으나 변호사사무실에서 일하던 부친(김세종씨)을 따라 일찍이 서울로 이사,마포구 합정동에 정착하면서 마포 강나루터에 산재해 있던 남사당패들의 굿판에 정신이 팔려 그곳에서 하루해를 보낼 때가 많았다.이런 그를 안쓰럽게 여긴 어머니(차은식 여사)가 부친 몰래 김천흥 전통춤연구소에 보내준 것이 국악에 입문하게 된 동기다.그러나 무용특기자가 되어 국악예고에 진학하자 이번엔 「승무」를 가르치던 벽사 한영숙이 『얼굴이 예쁘고 춤태가 곱긴 하지만 춤보다 악기를 해보라』고 권했다.거문고·해금은 「연잎에 지는 빗소리」처럼 아름다운 가락을 엮지만 『악기 다루기가 너무 어려워 이를 이어갈 인재가 없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거문고산조 인간문화재인 신쾌동과 해금의 대가인 지영희를 만나 거문고의 유현한 가락과 섬뜩할 정도로 생생한 해금의 음률에 숙명처럼 잦아들어갔다.학교에서 배우는 외에도 스승의 개인연구소에 따라가서 이를테면 「스승들을 모시고 살다시피」하면서 그는 멀고 아득한 음악의 길을 걸어왔다.남성적인 거문고는 특히 연주법이 까다로워 술대(시)끝을 현침 가까이 내려치거나 거슬러 쳐도 원하는 소리를 얻을 수 없었다.무릎이 저리고 손가락에 피멍이 들어도 그는 제소리를 낼 때까지 몸에서 악기를 떼어놓지 않았다. 국악의 「국」자도 모르고 시작한 음악이지만 초기엔 스승의 열성에 감동되어 한음 한가락도 놓치지 않았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배우는 자세로 자신이 악기가 되기를 주저치도 않았다.특히 남모를 내력이 굽이굽이 숨겨져 있는 해금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손아귀의 혈맥이 악기에 이어지고 기맥이 통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긴 스승이 하루는 자신이 못 배운 것을 한탄하며 『너희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대학에 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우리 민속악은 무대에서 왕인데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어 서러운 대접을 받고 있다.너희 세대에선 제자리를 찾아 반드시 무대의 주역이 되라』는 절규였다. 행운의 여신이 미소짓기 시작하더니 벌써 고교 2학년때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 최연소단원이 되었고 당시 이름을 날리던 리틀엔젤스의 무용반주자가 되어 세계 45개국 순회공연에 따라나섰다.돈을 벌면서 세계무대에 서는 동안 그는 우리 음악만의 특성과 미감에 눈떴고 그때부터 체계적으로 작곡에 손대기 시작했다. 서라벌예대 졸업후 경희대 작곡과에 편입,대학원과정에서 서양음악의 발성법·지휘법·화성악을 공부하고 고전악기와 현대악기를 대비시킨 「거문고와 해금」 「해금과 기타」 「해금과 하프」등 이중주곡·독주곡·관현악곡들을 창작하여 국악의 연주영역을 넓혀나갔다. 82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개인발표회에서 그의 「거문고 즉흥곡」을 들은 황병기(이대교수)는 『마치 진흙의 뿌리에 내린 연꽃의 심도를 느끼게 하는 신기오른 솜씨』라고 호평했고 국악평론가 한명희도 『손끝의 느낌으로 음을 고르고 소리를 찾아내며 활대 아닌 눈짓만으로도 해금을 부리는 귀신 같은 실력』을 찬양해 마지않았다.그의 거문고산조가 심연과도 같은 무변광대를 누빈다면 그의 해금은 장자가 일컫듯이 「하늘의 소리처럼 신기하고 땅의 소리처럼 투박하며 인간의 속소리처럼 즐겁고 애절하여」 희비애락의 인생사를 꾸밈없이 담아낸다. ○“신기같은 솜씨다” 호평 그의 성격은 완고하다 못해 차분하다.어느 자리에서나 나대지 않아 예인 특유의 신기나 광기가 넘쳐 보이지도 않는다.한천의 난처럼 고절한 기상으로 연주에 임할 뿐 연주장이 아닌 장소에서 그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겉으로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마음이 상할 듯 섬약해 보이지만 참으로 오랫동안 방대한 학습경륜을 쌓아온 사람이라 속을 들여다보면 태산준령 같다』고 한 이보형씨(문화재전문위원)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남과의 번거로운 교류는 외면하지만 연주활동에는 열의가 대단하여 지난 93년 마포구 합정동 그의 집 지하층에 국악상설무대 「우리소리」를 개설,발표장을 구하지 못한 동료들에게 이를 개방해왔고 오는 3월에는 개관 2주년 기념무대를 갖는다.가족은 그의 음악을 이해하고 협조하는 부인 최광희 명지대교수와 남매. 이제 그는 스승들이 물려준 모든 것을 보존하고 계승시키는 위치다.그리고 「단순히 줄을 고르는 것만으로 이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가장 우아한 거문고 연주자는 선비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무위자연의 경지에서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현학금의 대도에 입신하는 일만이 남았다. □연보 ▲1947년 경기도 용인출생 ▲1959년 김천흥 전통춤연구소 입소 ▲1965년 서울시립 관현악단 단원 ▲1967년 서울국악예술학교 졸업,신쾌동 지영희사사,난계예술제특상 ▲1966∼75년 리틀엔젤스와 미국 유럽등 세계45개국 순회연주 ▲1971년 서라벌예대졸업 ▲1972 일본 삿포로 동계올림픽·뮌헨올림픽 세계민속예술제 참가 ▲1977년 경희대 작곡과졸업 ▲1980년 동 대학원졸업,일본 산게이홀과 한국문화원서 독주회 ▲1982년 제1회 국악발표회(국립극장 소극장),대한민국국악제 참가 ▲1985년 제2회 김영재 작곡발표회 ▲1986년 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국악제 해금독주자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16호 (거문고산조)준인간문화재 지정 ▲1990년 동아일보 창사 70주년기념 소련공연 창극 「아리랑」작곡및 연주,미국 링컨센터 연주 ▲1991년 환일본해 국제예술제참가 ▲1993년 「해금명인 김영재의 밤」(국립극장 소극장) 전남대 국악과 교수,도립남도국악단 상임지도위원 「조명곡」「비」「아리랑연곡」「현금곡」「가야금 병창곡」「거문고 즉흥곡」「대금과 가야금을 위한 2중주」,창극 「수궁가」,무용곡 「그날이 오면」등 1백여곡 「현금곡전집」「가야금 병창곡집」 「남도의 창」「줄풍류 거문고 가락의 비교관찰」「한국근현대사의 음악가 열전」 국민훈장석류장(73년)KBS국악대상 작곡부문수상(89)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