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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풍성한 설명절’도 이젠 옛말… 대북제재·코로나19로 평양마저 ‘궁핍’

    北, ‘풍성한 설명절’도 이젠 옛말… 대북제재·코로나19로 평양마저 ‘궁핍’

    북한이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와 코로나19 대유행 까지 겹치면서 발생한 생활필수품 등 부족 현상으로 어느 때보다 혹독한 설명절을 보내고 있다. 북한에서 새해, 설, 추석과 김일성·김정일 생일 등은 국가 및 민속 명절로, ‘술날’(酒日)이라고도 칭한다. 명절 땐 그간 부족했던 영양을 보충하는 기회로 삼는다. 평소 아끼고 참고 하던 것을 이날 만큼은 허리띠를 풀고 먹고 마신다. 명절 만큼은 주변인들과 음식을 나누며 지역과 가족이 가진 공동체 의식을 공유한다. 과거 춥고 배고프던 시절 남아있는 풍습이지만 북한은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설은 예전과 다르다. 지난 16일 북중 화물열차 재개로 2년 간 막았던 북중국경을 일부 개방했지만, 생필품 품귀 현상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북한은 미원, 설탕, 기름 등 대부분의 조미료, 생필품을 중국에서 수입해 썼지만 코로나19로 국경을 봉쇄하면서 모든 재료가 고갈된 상태다. 원재료가 콩인 간장과 된장 마저도 귀해 소금으로만 간을 하는 사태까지 간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북소식통은 “평양에서 조차 조미료, 비누, 치약, 기름 등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제대로 사서 먹고 쓰는 있는 가정이 드물다”라고 했다. 특히 전량 중국에서 수입해 쓰고 있던 시계 배터리가 다 떨어져 시계가 멈첬다고 한다. 여기에 라이터 가스조차 없고, 성냥도 부족해 한번 아궁이에 불을 붙힐 때마다 갖은 고민을 해야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풍성한 설명절은 고사하고 하루 한끼 걱정이 앞서는 것이 요즘 북한의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 대북소식통은 “북중 국경이 가까운 청진, 신의주는 그래도 형편이 좀 괜찮은 편”이라며 “하지만 평양 등 내륙은 배급제가 무너진 이후 당국에서 갖은 단속으로 장사도 못하게 해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상황”이라고 했다. 북한의 이같은 경제난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코로나19의 영향도 있지만, 2019년에 휩쓴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후폭풍도 크다는 분석이다. 당시 중국을 통해 전파된 ASF로 인해 평안도의 모든 돼지는 죽었다고 한다. 인접한 평양도 역시 타격을 입었다. 북한에서 개인이 집에서 기르는 돼지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곧 재산이자, 1년치 식량이다. 키운 돼지를 시장에 팔고 그 돈으로 식량 등 생필품을 사서 1년을 버티는 데 그 재산이 한 순간에 날아간 것이다. 당시 ASF의 확산으로 원인도 모르고, 치료제도 없는 상황에서 돼지가 죽어나가자 북한의 상당수 가정에선 당국을 원망하며 민심이 흉흉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국에서 죽은 돼지를 모아 땅에 파묻자, 일부 주민들은 이를 캄캄한 밤에 몰래 파내 시장에 팔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ASF는 지역과 지역으로 넘어 퍼져나갔고, 그 피해는 고스란이 북한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당국 역시 초기 대응에 실패해 ‘중산층 붕괴’라는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이 같은 피해가 누적된 상황에서 2020년 코로나19가 발생하자 당국은 발빠르게 국경을 봉쇄했다. 하지만 외부 유입 없이 2년을 버티면서 이제는 내부에서 1990년대 중반 수많은 아사자가 나왔던 ‘고난의 행군’ 시기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정은도 지금의 난관을 반전시킬 능력이 없다보니, 50년도 더된 자력갱생이라는 구호를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미국 탓, 코로나19 탓 아무리 해봐도 민심이 더 이상 돌아서지 않아 답답할 것”이라고 했다.
  • [TV 하이라이트]

    [TV 하이라이트]

    ●해치지 않아X스우파(tvN 밤 11시 10분) 지난해 대한민국 댄스판을 뒤흔든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의 리더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특별한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는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열연하며 국가대표 악당 3인방이 된 엄기준, 봉태규, 윤종훈이 지난여름 피땀 흘려 가꾼 전남 고흥의 ‘폐가하우스’다. 이곳에서 리더들이 꿈꿨던 세 가지 소원이 뜻하지 않게 이루어진다. 혹한기를 맞아 폐가하우스 방한 작업과 아궁이 불 피우기만으로 반나절을 보낸 리더들은 낯선 노동 현장에서도 댄서 특유의 흥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스우파’ 우승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만들었다는 허니제이(정하늬)표 김치 수제비를 맛본 리더들은 또 재래시장표 꽃무늬 패션으로 마루 위에서 특별 공연까지 선보인다.
  • [핵잼 사이언스] 약 400년 전 ‘중국 포도주’ 만들던 양조장 유적지 발굴

    [핵잼 사이언스] 약 400년 전 ‘중국 포도주’ 만들던 양조장 유적지 발굴

      중국에서 약 400년 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양조장 유적지가 발굴됐다고 중국 CGTN 등 관영 언론이 지난달 29일 보도했다. 지난해 3월 허베이성(省) 헝수이시(市)의 한 건설현장 굴착 과정에서 발견된 양조장 유적은 명나라(1368~1644) 말기인 16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을 이끈 허베이성 문화유적고고학연구소에 따르면 해당 양조장은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 시대에 매우 활발하게 활용됐으며, 주로 포도주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장에서는 술을 제조할 때 사용한 증류 장비와 도자기, 술을 만들 때 사용한 구덩이 등을 발견했다. 포도주를 보관하던 지하 저장고와 외부 저장고 등도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중국에서는 기원전 7000년부터 포도 재배가 시작됐지만, 이를 이용해 만든 포도주가 보편화 된 것은 당나라(618~907) 시기였다. 고대 중국에서 포도주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술이 아니었다. 포도주의 경우 양조 방법은 다른 술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지만, 포도의 수확 시기 등을 고려할 때 계절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나라 시기 이후 대규모 포도 재배단지가 조성됐고, 궁 내부에 포도주 저장 시설이 갖춰지는 등 본격적인 중국 포도주의 역사가 시작됐다.이 유적지는 중국 북방지역에서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에 건축된 유일한 양조장이라는 점에서 학계 관심이 더욱 쏠렸다. 특히 전문가들은 양조에 사용된 아궁이의 규모와 구조 등이 다른 양조장 유적지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라는 점에서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약 3000㎡(900 여평) 규모의 해당 유적지는 중국만의 전통적인 포도주 양조 기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중국의 전통 포도주는 중국을 대표하는 증류주인 바이주(백주)의 양조 기법을 접목해 만들어졌으며, 이는 일반적인 포도주 양조 방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베이성 문화유적고고학연구소는 “이 유적지는 중국 북방에서 원나라(1271-1368) 이후에 발굴된 유일한 양조장으로서 역사·문화적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고 전했다.  
  • 130년 전 모습 찾은 ‘향원정’…’청운의 꿈’ 품은 고종의 시름 묻어나

    130년 전 모습 찾은 ‘향원정’…’청운의 꿈’ 품은 고종의 시름 묻어나

    조선 왕조 법궁인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자리 잡은 ‘향원정’(香遠亭)은 향원지(香遠池)로 불리는 연못 한가운데 지은 육각 2층 정자다. ‘향원’(香遠)은 북송 시대 중국 학자 주돈(1017∼1073)이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로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이다. 26대 임금 고종(재위 1863~1907)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건청궁(乾淸宮)을 지을 당시 왕과 왕비의 휴식 공간으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향원정으로 향하는 다리 ‘취향교’(醉香橋)가 파괴되고 건물이 기울어지는 등 역사의 모진 풍파를 견뎌내야 했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3년간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5일 공개한 향원정 일대는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이 심화하던 19세기 말 향원정에서 시름을 달랜 고종과 민비(명성황후) 당시의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했다.●건물 기울어 3년간 공사…말뚝 799개 박고 온돌도 찾아 2012년 보물로 지정된 향원정 보수 공사는 건물이 전반적으로 기울고 목재 접합부와 기단 등이 헐거워졌다는 진단에 따라 시작됐다. 2017년 5월 설계 용역을 추진하면서 향원지 주변에 가림막을 설치했고, 2018년 11월 작업에 들어가 3년 만에 마무리됐다.궁능유적본부는 향원정을 완전히 해체한 뒤 다시 조립했고, 섬 둘레에 있는 석축(石築)을 정비했다. 나무 부재는 10∼20%를 교체했으며, 건물 하부 지반을 보강하고자 말뚝 799개를 박았다. 궁능유적본부는 발굴조사를 통해 1층에 있던 도넛 형 온돌도 찾아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향원정 구들의 구체적인 형태와 연도(煙道·연기가 나가는 통로)의 위치 등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온돌은 보통 밭고랑이나 부챗살 모양으로 고래(구들 밑으로 난 연기가 통하는 길)를 설치하는데, 향원정은 가장자리를 따라 고래를 둬 난방이 바깥쪽을 중심으로 이뤄졌음이 드러났다. 또 현존하는 유구(遺構·건물의 자취)를 활용해 향원지 외부와 연결된 낮은 굴뚝을 복원했고,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연못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모습을 확인했다.●취향교는 흰색 목제다리로 본래 위치로 옮겨 취향교는 옛 사진에 나타난 모습을 되찾았다. 이전에는 돌기둥에 평평한 나무를 얹은 평평한 다리였다면, 복원을 통해 아치형 나무다리로 바꿨다. 흰색으로 칠한 나무는 얼핏 보면 철제 구조물 같아 보인다. 이에 대해 정현정 궁능유적본부 주무관은 “흰색 나무가 낯설어 보일 수 있으나, 고종 때도 건축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다양한 방식의 재료들이 도입됐다”고 설명했다. 길이 32m, 폭 165㎝의 다리인 취향교는 원래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건너갈 수 있게 향원정 북쪽에 세워졌다. 이후 1953년 재건립 됐지만, 관람 편의를 위해 향원정 북쪽의 본래 위치가 아닌 남쪽에 지었었다. 이번 공사를 통해 다리 위치를 북쪽으로 옮기면서 68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향원정 건립시기는 1885년으로 추정 이번 복원 공사를 통해 향원정과 취향교의 건립 시기도 알게 됐다. 1887년(고종 24년) 승정원일기에 ‘향원정’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면서 건립 연대를 1887년 이전으로 추정해왔는데, 목재 연륜 연대 조사를 통해 1881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벌채된 목재가 사용된 것이 확인됐다. 이에 문화재청은 향원정 건립시기를 1885년으로 추정하고 있다.궁능유적본부는 향원정의 6개 기둥 중 동남쪽 방향 주춧돌을 조사한 결과 주춧돌을 받치는 초반석의 균열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확인해 건물 기울어짐의 근본원인을 찾아냈다. 정 주무관은 “호수 위에 만든 인공섬 위쪽까지 지반을 보강하는 장치가 부족했던 탓”이라며 “이번에는 야구방망이보다 조금 더 두꺼운 정도의 나무 말뚝 799개를 박아 지반을 다졌다”고 설명했다. 6개 기둥 아래쪽에는 6m짜리 긴 말뚝 150개를 섬 바닥까지 닿게 박아넣고, 건물 주위에는 1.8m 혹은 2.7m짜리 짧은 말뚝을 649개 꽂아 토양이 조금 더 빡빡해지고 단단해지도록 했다.●푸른색 능화지로 1층 천장 도배…‘청운의 꿈’ 상징 향원지 일대의 옛 사진을 분석해 훼손된 절병통(지붕 중심에 세우는 항아리 모양의 장식기와), 창호, 능화지, 외부 난간대 등도 복원했다. 일제 시대에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친 향원정 내부의 지지목을 떼어낸 자리에선 향원정 건립 당시 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청의 원형이 발견됐다. 2층 천장에는 봉황 무늬가 가득하다.건립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내부에 발라져 있던 겹겹의 창호지 맨 아래에서는 왕실 건물에만 사용되는 ‘능화지’(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문양을 밀랍으로 눌러 새긴 한지)를 볼 수 있다. 강성찬 중요무형문화재 배첩장(전통 도배, 장판 등 기술 보유 장인) 이수자가 찍어낸 능화지 수백 장으로 천장과 기둥 등 벽지를 발랐다.강 이수자는 “능화지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것으로 밀랍이 함유돼 있어 벌레가 오지 않고, 항산화·항습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며 “여러 문화재 복원 현장을 가봤지만 향원정은 고증을 많이 한 뒤 전통방식으로 오롯이 복원해 의미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천장을 바른 푸른색 능화지에 대해 강 이수자는 “옛 양반가에서는 청운(靑雲)의 꿈을 품는다는 것을 중시해 자제들의 방에 종종 푸른색 능화지를 사용했었다”면서 “벽에 붙인 흰색 능화지가 문양을 내기는 더 힘들다”고 덧붙였다.●내년 4월부터 내부 특별관람 형태로 공개 궁능유적본부는 건립 당시에 칠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청의 안료를 추가로 조사하고, 내년 4월부터 내부를 특별관람 형태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향원지 수위는 30∼40㎝ 정도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며 “내년 봄이 지나면 홍련과 백련이 피어 화려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유네스코 등재 서천 ‘유부도’ 주민 소방대 생겼다

    유네스코 등재 서천 ‘유부도’ 주민 소방대 생겼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충남 서천군 유부도에 주민 소방대가 만들어졌다.충남도 소방본부는 지난 27일 서천 유일의 섬마을 유부도에서 주민 5명으로 짜인 ‘우리 섬 안전지킴이’ 발대식을 열었다고 28일 밝혔다. 방화복은 물론 바퀴가 달린 대형 소화기, 등짐펌프 등이 보급됐다. 이 섬의 갯벌은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섬 면적은 여의도의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섬 크기보다 20배가 넘는 갯벌이 드러난다. 34가구 43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육지 연결 도로가 없고, 여객선도 운항되지 않아 불이 나거나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어선이 있지만 썰물 때는 넓은 갯벌에 가로막혀 이동이 어렵다. 이 때문에 주민이 자체 진화할 수 있도록 대원을 선발하고 소방장비를 지원한 것이다. 주민 대원을 대상으로 한 소방 교육도 진행된다. 섬 주민들은 전기패널·장판을 이용하거나 해변에 떠밀려온 나무를 주워 말린 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겨울을 난다. 섬에 전기는 들어오지만 식수는 지하수를 정화해 쓴다. 주민들은 모두 어업에 종사한다. 이의승 어촌계장은 이날 서울신문과 전화통화에서 “요즘 갯벌에서 동죽이 많이 나온다. 주민들은 백합도 잡지만 조그만 어선으로 근처 바다에서 잡은 꽃게를 육지에 내다팔아 먹고 산다”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낙후된 섬”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직 유네스코 등재로 마을이 달라진 건 별로 없다”고 덧붙였다. 도 소방본부 관계자는 “신속한 화재 진화나 응급환자 이송을 위해 내년 초 헬기장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 추억으로 묻기엔 아직 뜨거운 불꽃

    추억으로 묻기엔 아직 뜨거운 불꽃

    아침저녁 찬바람이 소매 끝을 스치기 시작하는 이맘때면 절로 생각나는 시가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1994년 발표된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첫 구절이다. 뜨겁게 타오르다 하얗게 식어 버린 연탄재들이 집 창고 앞에 쌓여 있는 풍경은 많은 이의 가슴에 묻힌 따뜻한 추억의 한 장면이 됐다. 요즘 젊은 세대야 생소하겠지만 연탄은 현대사의 오랜 시간 동안 ‘국민 필수품’이었다. 국내에만 347개 탄광과 211곳의 연탄 공장이 있었을 정도다.●도시가스에 밀려 퇴장 길에 들어선 연탄 그러나 세월이 흘러 주거 형태가 바뀌면서 연탄은 생필품 목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부터 아파트가 대대적으로 들어서면서 집단 난방 시스템이 적용됐고, 88올림픽 이후 국민 소득이 증가하면서 연탄 소비가 급격히 줄었다. 연탄이 퇴장하는 뒤안길로 새로 등장한 것은 도시가스였다. 1990년대 중반 연탄 소비량은 80% 이상 감소했고 탄광이나 연탄 공장도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국석탄공사의 ‘국내 석탄 수급 동향’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전체 석탄(무연탄)량은 209만t이었으나 2014년 174만t, 2017년 148만t으로 감소하다가 2019년 108만t까지 주저앉았다. 소비량 역시 2012년 242만t에서 2014년 187만t, 2017년 131만t, 2019년 117만t으로 계속 줄었다.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린 지난 11일 오전 7시. 충북 제천시의 ‘별표연탄´ 공장을 찾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연탄 배달 차량들이 연탄을 받으려고 줄지어 서 있었을 시간. 하루 종일 비 소식이 예고된 날이니 연탄 배달 차량들은 아예 공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자 공장 직원들은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인 석탄(연탄의 주원료)을 방수포로 덮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석탄을 실은 트럭들은 꾸준히 한 대씩 들어와 석탄을 쏟았다. 비가 와도 직원들은 쉴 틈 없이 바빴다.●깊은 산속 노부부에겐 겨울나기 주연료 그러나 잠시 후 비가 그치기 시작하자 약속이나 한 듯 트럭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공장 안에 연탄을 찍어 내는 기계들이 연신 연탄을 찍기 시작했다. 연탄 기계의 가동과 점검을 맡은 직원들의 손길도 덩달아 바빠졌다. 행여라도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연탄이 생산되지나 않을지 계속해서 기계를 살펴보고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로 줄줄이 나오는 연탄들은 배달원들이 대기 중인 차량으로 신속하게 옮겼다. 한 배달원은 “오늘 급하게 필요하다는 주문을 받았는데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단번에 달려왔다”며 “아직도 깊은 산속 오지의 주민들에게는 연탄이 겨울나기의 주연료”라고 했다. 연탄을 가득 실은 트럭이 긴급 주문을 받아 도착한 곳은 강원 영월군 산간마을 어느 노부부의 집. 배달원을 반갑게 맞이한 노 부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터진다. “이 동네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서 기름 보일러와 연탄 보일러로 겨울을 버티는데 기름값이 올라 부담이 너무 크다”면서 “겨울이 오기 전에 연탄을 1000장 정도는 늘 준비해 놓는다”고 말했다.●찾는 이도, 만드는 이도 줄었지만 여전히 ‘국민 필수품’ 차에 실었던 연탄을 연탄 보일러실에 모두 옮긴 배달원의 입가에도 미소는 번진다. “이렇게 여전히 연탄이 꼭 필요하다는 고객들이 있잖아요. 아직도 연탄은 추억의 물건으로 물러나지 않았어요.” 연탄 트럭이 노부부의 산간마을을 한참 멀리 떠나올 때까지 연탄 아궁이의 온기도 고스란히 함께 따라 내려오는 듯했다.
  • 별님과 눈 맞추고 바람과 속삭이고 여기가 삶의 쉼표

    별님과 눈 맞추고 바람과 속삭이고 여기가 삶의 쉼표

    딱 일주일, 일상의 고민과 시름을 잊고 자신을 정화할 수 있다면 어디로 갈까. 푸른 하늘과 따뜻한 대지에 안겨 안식을 찾고 싶은 요즘, EBS 1TV ‘한국기행’이 오는 27일부터 10월 1일까지 밤 9시 30분에 쉼표가 되어줄 만한 곳들로 안내한다. 27일 ‘나만의 비밀낙원’ 편은 전남 진도의 관매도를 찾는다. 섬 전문 여행작가 김민수씨를 따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곰솔밭의 우거진 숲에서 텐트 하나 쳐 놓고 섬 여행을 즐긴다. 뭍으로 올라온 갈치로 밥을 지어 먹고, 협곡 사이 아찔한 하늘다리①까지 오르다 보면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풀린다. 자연 속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비밀 낙원을 공개한다. 28일 ‘산골 부부의 사랑이야기’ 편은 지리산으로 향한다. 힘겨웠던 도시생활을 벗어나 26년 전 귀산한 양진욱·배윤천씨 부부는 야생 녹차 밭을 관리하며 노후 생활을 보내고 있다. 찻잔 하나부터 오두막까지 버려진 나무로 직접 지었다. 가을 햇밤을 주워 아궁이 불에 굽고, 호강골의 무명 계곡②을 바라보며 자연 속 자연도 즐긴다. 29일 ‘딱 일주일만 그렇게’는 월출산 아래 한옥③에 새 보금자리를 튼 노영미·서영주씨 부부를 찾아간다. 은퇴 후 시골 생활을 하고 싶다는 남편의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풍경 좋은 강진을 선택했다는 아내는 함께 텃밭을 일구고 앞마당의 빨간 꾸지뽕 열매 따 먹으며 여유를 누린다. 이곳을 찾은 단골손님들도 한 해의 선물로 일주일간 쉬다 간다. 강진 숙마마을에서 100년 된 집터에 집을 세워 살아가는 이호남·손정신씨 부부도 방문한다. 사람들이 편히 머물다 갈 공간을 내어 준다는 부부는 집 옆 빈 땅이 보일 때마다 농작물을 심어 32가지 채소로 가득 찬 텃밭도 가꿨다.30일 ‘하늘 밑 그 암자에서’는 스님과의 하루를 따라간다. 충북 단양군 황정산에는 입구부터 1㎞의 가파른 길을 꼬박 올라야 나오는 천년고찰 원통암이 있다. 속세와 동떨어져 사는 각문 스님은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참선했다는 토굴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본다. 스님을 찾아 봇짐을 싸 들고 산을 오른 한 부부는 해와 바람이 키운 자연의 농작물로 밥상을 채우고, 별과 달이 비추는 칠성바위를 보며 편안함에 대해 논한다. 10월 1일 ‘쉬어도 좋아요’는 섬에서 배운 쉼을 전한다. 아프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서울에서 고향인 진도군 하조도로 내려온 진성영씨.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추억이 깃든 집을 떠나지 않고 섬에 정착해 4년째 살고 있다. 캘리그래피 작가인 그는 새벽에는 삼치를 낚는 어부로, 낮에는 어머니의 밭을 일구는 농부로 살며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다.
  • 천상의 포장마차 같은… 귀천 시인의 ‘세상 소풍’ 마지막 그곳

    천상의 포장마차 같은… 귀천 시인의 ‘세상 소풍’ 마지막 그곳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본디 하늘의 사람이었으나 잠시 이곳에 왔다 간 이들이 있다. 시인 천상병도 그중의 하나이다. 아니 그 반대의 경우일까. 그렇다면 땅과 하늘 중에 어느 곳이 ‘소풍’의 자리인가. 천상병은 1930년 1월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태어났다. 간사이에서 초등학교까지 졸업하고 해방과 동시에 부모와 함께 귀국했다. 경남 마산에서 중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돼 등단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국 통역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51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중퇴를 한다. 부산시장의 공보실장으로 일하다가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됐다. 친구인 강빈구에게 막걸리값으로 빌려 썼던 돈 3만 6500원을 중앙정보부에서 정치 공작금의 일부로 과장해 그를 연루시켜 버린 것이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선고 유예로 풀려난 후에도 4년 동안 행려병자로 살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진 뒤에 1970년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됐다. 지인들은 천상병의 소식을 알 길이 없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시집 ‘새’를 묶었다. 이 소식이 신문에 실려 널리 퍼지자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천상병의 입원 소식을 알려왔다. 친구들이 부랴부랴 그를 찾아갔을 때 그들의 손에는 ‘유고시집’인 ‘새’가 매우 고급스러운 양장본으로 나와 있으니 병실에서 피차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천상병은 말없이 그것을 쓰다듬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매우 건강한 목소리로 일갈한다. “내 인세는 어찌 되었노?”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천상병, ‘새’) 버젓이 살아 있는데 뜬금없이 유고시집이 생겼지만, 그는 이 시기에 친구 동생인 목순옥씨가 간병을 해 준 인연을 계기로 1972년에 그와 결혼을 했다. 입때껏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아내가 찻집을 해 얻은 수입으로 조금은 생활이 나아졌다고 한다. 그래도 고문의 후유증과 술에 의탁하는 습관 때문에 그의 건강은 날로 나빠질 수밖에 없었고, 1988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천상병은 1993년에 간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에 부의금으로 800만원이 들어왔는데, 늘 곤궁하게 살아왔던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크게 만져 봤을 그 돈을 장모가 잘 숨겨 둔다고 숨긴 곳이 바로 아궁이. 또 그의 아내가 불을 지핀 곳도 아궁이. 타고 남은 것 중에서 그나마 건진 돈이 절반가량이었다고 한다. 그의 장모는 딸인 목순옥의 장례까지 치르고도 더 살다가 이듬해인 2011년 4월 딸과 사위를 따라 소천했다. 천상병이 평소 장모의 장례비 걱정을 하며 지냈다는데, 그때 장모의 통장에 남아 있던 돈이 꼭 장례비만큼이었다고 한다. 목씨가 운영했던 인사동 카페 ‘귀천’은 2010년 목씨가 죽은 뒤에도 그의 조카가 이어받아 2호점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파주 출판도시에 귀천 3호점이 있다. 천상병의 시와 그의 자취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꾸준히 찾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목씨의 모과차 담그는 솜씨가 일품이어서 전국적으로 그 맛과 천상병의 시를 함께 찾는 이들로 늘 문전성시였다.시인은 생전에 의정부 수락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았다. 열 평 남짓한 슬레이트 지붕의 전형적인 도시 빈민 가옥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장모와 처제도 함께 살았다. 고문의 후유증 탓에 자식도 없고, 크게 일군 재산도 없이 세상을 뜬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시집 몇 권이 전부였다. 그러니 그가 죽었을 때 그를 기리기 위한 어떤 자취도 제대로 남겨지거나 기려진 것이 없었다. 국가적으로나 의정부시에서도 문화적인 행사나 인물을 제때 의미화하지도 않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충남 안면도에 살던 천상병 시인의 오랜 팬인 모종인씨가 발벗고 나섰다. 농사를 짓고 시를 쓰며 살던 그가 아무 인연도 없던 천상병 시인을 위해 의정부까지 찾아가 그의 집에 있던 문틀과 냄비, 남아 있던 수저 하나까지도 가져와 고택을 고스란히 복원했다. 유족의 허락을 받아 생전의 살림살이들을 가져오고, 시인의 사진과 시 ‘귀천’의 액자를 걸어 두어 천상병과 그의 시를 오가는 이들이 느끼게끔 해두었다. 오가던 이들은 천상병의 생전의 일들을 기억하며 1000원, 2000원씩 그 문틈에 꽂아 두고 가기도 한다. 막걸리값, 노잣돈, 하늘 어딘가에 열고 있을 포장마차의 개시 돈이라고도 한다.“허허, 내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테니 오거든 갚을 만큼의 공짜술을 주겠네”(천상병의 ‘유언’) 천상병의 마지막 거처는 안면도가 됐다. 먼저 하늘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포장마차나 열고 공짜술을 주겠다던 시인이 마지막으로 시와 펜을 남긴 곳이 하필이면 아무 연고도 없는 안면도. 시인의 마지막 공간이 그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바다의 곁이라는 것만으로도 안면도가, 그의 뜻을 이어 준 모종인씨가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남편의 사후에도 끊임없이 시인의 고택을 관리하며 무료로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모종인씨의 아내 역시도 품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얼마든지 취재하라며, 단지 올여름 장맛비에 곰팡이가 슨 벽지를 아직 일꾼을 구하지 못해 새로 바르지 못해서 면구하다며 애써 손사래를 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다. 그마저도 천상병 시의 일부분같이 느껴지는 것은 바다와 시와, 그 시를 사랑하는 독자가 옮겨 온 고택의 정겨움을 닮은 어떤 것이라 여겨졌다.그렇게 이어온 시인과 시의 마음이 있어 더욱 풍요로운 시인의 땅이 되는 것이 아닌가 되짚어 본 안면도행이었다.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한다던 시인은, 지금쯤 어느 포장마차의 천막을 걷고 있을까. 아니 어느 때고 기분에 따라 장사를 접으며 언제고 자신을 위한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있지 않을까. 언제고 열 수 있는 구름 냉장고에 가득 들어 있는 막걸리를 꺼내며 낮밤 상관없이 찾아든 문우에게 ‘자네 이제야 왔는가’ 하며.그 목소리가 참 맑았다는 사람, 눈웃음이 술잔에 채워진 술처럼 휘어 있던 사람, 안면도의 노을진 수평선처럼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도 가며 어딘가로 소풍 떠난 그 사람, 내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며 새를 타고 하늘로 가버린 시인 천상병의 마지막 집이다. 소설가 이은선
  • 최영주 서울시의원 “개포주공 1·4단지 역사유산(흔적) 남기기는 재건축 발목 잡는 실패한 정책”

    최영주 서울시의원 “개포주공 1·4단지 역사유산(흔적) 남기기는 재건축 발목 잡는 실패한 정책”

    서울특별시의회 최영주 의원(더불어민주당, 강남3)이 서울시가 추진 중인 뉴타운·재개발·재건축 정비사업 역사유산(흔적)남기기는 실패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28일 서울시청에서 개포1·4단지 흔적남기기 관련 주민간담회가 개최됐다. 간담회에는 최영주시의원과 이석주, 전석기 시의원, 김형대 강남구의원, 개포주공1·4단지 조합장, 서울시 공동주택과장, 도시계획상임기획단장, 공동주택운용팀장, 강남구 재건축사업과장 등이 참석했다. 이번 간담회는 재건축을 추진 중인 개포주공 1·4단지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해당 정책 및 사업에 대한 시의원 및 구의원의 의견을 듣고 향후 재건축 사업이 나아가야할 방향 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최영주 시의원은 간담회에 앞서 오세훈 시장과의 오찬 자리(‘21.5.27)에서 개포주공 1·4단지가 역사유산 남기기 정책으로 인해 재건축이 지연되고 있음을 밝히며,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다른 방식으로 공공기여 할 수 있도록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최의원은 조합측에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청원을 제출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개포4단지 조합장은 간담회 자리에서 주민청원서를 제출했으며, 1단지 조합장도 3천 명 정도의 서명을 받고 있으며 곧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뉴타운·재개발·재건축 정비사업 역사유산(흔적)남기기는 전면 철거 위주의 정비사업으로 인해 역사성 있는 건축물이 철거되고 주민들의 삶과 애환, 희로애락이 담긴 흔적이 소멸되는 한계가 있어, 지역 내 역사 유산과 흔적을 다양한 방법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실제 개포1·4단지에 남겨진 동(역사유산)을 직접 가서 보면 유산보다는 흉물에 가깝다. 개포1·4단지 조합장들은 주민 및 조합원 모두가 흉물이라고 생각하는 건물을 남기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공정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도시계획위원회의 변경 심의가 없으면 재건축에 차질이 생긴다고 밝히며, 강남구청 및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했다. 최영주 의원은 역사(연탄, 아궁이)가 보존되어 있지도 않은 건축물을 남겨 인위적으로 당시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해당 건물은 안전진단 D등급을 받고도 10년이 경과된 건물로 리모델링을 한다 하더라도 해당 시설을 이용할 주민 및 시민의 안전이 걱정된다고 언급하며, 빠른시일 내에 주민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건축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을 당부했다.
  • 아라가야 왕궁터 주방에 웬 소가야 토기?

    아라가야 왕궁터 주방에 웬 소가야 토기?

    아라가야 왕궁터에서 취사전용 공간이 확인됐다. 당시 가야 세력 간 교류를 이해할 수 있는 토기류도 함께 나왔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에 있는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발굴조사에서 취사전용 건물지를 확인했다고 10일 밝혔다. 경사진 기반암을 길이 11m, 너비 5m, 깊이 80㎝ 정도로 파내고 내벽을 설치해 취사 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벽은 길이 8m, 너비 3.5m, 높이 15㎝ 정도다. 황갈색 점질토를 1~2㎝ 두께로 다졌는데 열을 가해 단단하게 만드는 불다짐 기법을 사용했다. 취사시설은 동서로 길이 5m 정도로 비교적 큰 규모였다. 동쪽에는 아궁이를 두었고, 서쪽 배연부 사이에 구들을 설치했다. 다만 아궁이는 하단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규모와 형태는 파악할 수 없었다. 구들은 최대 길이 약 1m, 높이 약 50㎝의 평평한 돌을 놓았고, 외부를 회색 점질토를 발라 연기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했다. 구들 내부의 평평한 돌로 볼 때 측벽과 같은 방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연부는 깬돌을 가로로 눕혀 쌓아 만들었으며 연기가 잘 빠질 수 있도록 계단식으로 구축해 높이 차를 두었다. 취사시설 부지 외곽에 배연부와 가까운 곳에는 기반암을 원형으로 판 구덩이가 확인됐다. 연구소 측은 취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보고 있다. 건물지 내부에는 6세기에 볼 수 있는 원통모양그릇받침과 적갈색의 취사용 토기류가 출토됐다. 특히 원통모양그릇받침은 물결무늬 장식, 원형의 창 등이 있어 가야토기의 공통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라가야만의 속성인 둥근 옥 또는 새 모양 창과 소가야의 특징인 점줄무늬 장식과 한 쌍의 장방형 창도 확인됐다. 연구소 관계자는 “아라가야와 다른 가야 세력의 교류와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조사는 2018년부터 진행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세상과 거리두기… 자연과 거리 줄이기… 자신과 거리 없애기

    세상과 거리두기… 자연과 거리 줄이기… 자신과 거리 없애기

    회색 건물을 떠나 초록 숲속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다. EBS1 한국기행은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살면서 행복을 일구는 이들을 그린 ‘놀면서 멍하니’를 7~11일 밤 9시 30분부터 5부작으로 방영한다.7일 방영하는 ‘수고했소, 당신’은 경북 문경 해발 10 77m 황장산 자락에서 흙벽을 두르고 너와 지붕을 얹은 집에서 살아가는 이창순씨 부부의 삶을 보여 준다. 이씨는 아내의 병을 고치겠다며 집 짓는 방법을 독학하고 청정한 이곳에 와 손수 집을 지었다. 건강을 되찾은 부부가 자연을 놀이터 삼아 산 정상으로, 골 깊은 계곡으로 놀러 다니는 모습이 아기자기하다. ‘어린 시절처럼’(8일)에선 천진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경기도 가평의 할머니가 사시던 옛집으로 돌아와 서까래와 아궁이, 문과 기둥을 그대로 보존하며 사는 고희정씨,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지으신 광주광역시의 집에서 아버지의 흔적이 가득한 곳곳을 보수하고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김창섭씨가 주인공이다. 고씨는 장작을 패서 불을 때 음식을 만들고, 큰 은행나무 아래에서 그네를 타고 논다. 김씨는 아버지가 조성한 대숲에서 죽순을 잔뜩 캐다가 어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손질해 먹고, 대나무로 활을 만들어 즐긴다. 고향 집을 떠올리게 하는 툇마루와 몬드리안풍으로 조각을 붙여 예사롭지 않은 감각으로 장식한 벽은 땔감을 재활용했다. 방 안에 만든 아궁이는 폐전자레인지로 만들었다. 9일에 방송하는 ‘산골남자 도시여자’에 등장하는 이태동씨의 집이다. 100만원짜리 중고 컨테이너 하나 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들어와 자연생활을 시작했다는 그는 산중에 안긴 정감 넘치는 오두막에서의 삶을 사랑한다. ‘꿈을 찾아서 여기에’(10일)는 평생 집 한 채 없이 살았던 이들의 꿈을 이야기한다. 노년에는 대궐만 한 집을 짓고 살겠다던 김재환씨 부부는 재활용 자재로 커다란 한옥을 지어 결국엔 꿈을 이뤘다. 부부의 취향대로 꾸민 집을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엔 해발 1000m 이상의 백두대간이 남서로 뻗어 있어 병풍에 둘러싸인 듯 아늑한 충북 영동의 산골로 향한다.11일 마지막 회 ‘골짜기를 흐르는 물처럼’에선 물한계곡의 수려한 물줄기에서 살아가는 김선도씨의 삶을 보여 준다. 통나무 학교에서 집 짓는 방법을 배워 재활용 자재와 흙, 나무를 이용해 손수 흙집을 지었다. 또 갖가지 꽃과 과일나무로 예쁜 정원을 채우고 오래된 촌집을 보수하며 사는 최진숙씨 부부의 삶도 그림 같다. ‘놀면서 멍하니’ 즐기는 이들의 행복을 TV로 잠시 함께 누려 보는 일도 좋을 듯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그들이 속세 벗어나 자연 향한 이유는...‘놀면서 멍하니’

    그들이 속세 벗어나 자연 향한 이유는...‘놀면서 멍하니’

    회색 건물을 떠나 초록 숲속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다. EBS1 한국기행은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살면서 행복을 일구는 이들을 그린 ‘놀면서 멍하니’를 7~11일 밤 9시 30분부터 5부작으로 방영한다. 7일 방영하는 ‘수고했소, 당신’은 경북 문경 해발 1077m 황장산 자락에서 흙벽을 두르고 너와 지붕을 얹은 집에서 살아가는 이창순씨 부부의 삶을 보여 준다. 이씨는 아내의 병을 고치겠다며 집 짓는 방법을 독학하고 청정한 이곳에 와 손수 집을 지었다. 건강을 되찾은 부부가 자연을 놀이터 삼아 산 정상으로, 골 깊은 계곡으로 놀러 다니는 모습이 아기자기하다.‘어린 시절처럼’(8일)에선 천진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경기도 가평의 할머니가 사시던 옛집으로 돌아와 서까래와 아궁이, 문과 기둥을 그대로 보존하며 사는 고희정씨,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지으신 광주광역시의 집에서 아버지의 흔적이 가득한 곳곳을 보수하고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김창섭씨가 주인공이다. 고씨는 장작을 패서 불을 때 음식을 만들고, 큰 은행나무 아래에서 그네를 타고 논다. 김씨는 아버지가 조성한 대숲에서 죽순을 잔뜩 캐다가 어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손질해 먹고, 대나무로 활을 만들어 즐긴다.고향 집을 떠올리게 하는 툇마루와 몬드리안풍으로 조각을 붙여 예사롭지 않은 감각으로 장식한 벽은 땔감을 재활용했다. 방 안에 만든 아궁이는 폐전자레인지로 만들었다. 9일에 방송하는 ‘산골남자 도시여자’에 등장하는 이태동씨의 집이다. 100만원짜리 중고 컨테이너 하나 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들어와 자연생활을 시작했다는 그는 산중에 안긴 정감 넘치는 오두막에서의 삶을 사랑한다. ‘꿈을 찾아서 여기에’(10일)는 평생 집 한 채 없이 살았던 이들의 꿈을 이야기한다. 노년에는 대궐만 한 집을 짓고 살겠다던 김재환씨 부부는 재활용 자재로 커다란 한옥을 지어 결국엔 꿈을 이뤘다. 부부의 취향대로 꾸민 집을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이번엔 해발 1000m 이상의 소백산맥이 남서로 뻗어 있어 병풍에 둘러싸인 듯 아늑한 충북 영동의 산골로 향한다. 11일 마지막 회 ‘골짜기를 흐르는 물처럼’에선 물한계곡의 수려한 물줄기에서 살아가는 김선도씨의 삶을 보여 준다. 통나무 학교에서 집 짓는 방법을 배워 재활용 자재와 흙, 나무를 이용해 손수 흙집을 지었다. 또 갖가지 꽃과 과일나무로 예쁜 정원을 채우고 오래된 촌집을 보수하며 사는 최진숙씨 부부의 삶도 그림 같다. ‘놀면서 멍하니’ 즐기는 이들의 행복을 TV로 잠시 함께 누려 보는 일도 좋을 듯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용인 건지산 봉수 흔적 발견…126년 만에 원위치 확인

    용인 건지산 봉수 흔적 발견…126년 만에 원위치 확인

    경기 용인시는 10일 처인구 원삼면 건지산에서 봉수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로 변방의 급한 소식을 한양에 알리는 국가통신제도로, 조선 초 세종 때 설치된 뒤로 1895년(고종 32년) 공식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약 450년간 사용됐다. 건지산 봉수는 조선의 5개 봉수 노선 중 부산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노선의 42번째 내륙 봉수이다. 안성 망이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처인구 포곡읍 석성산 봉수로 신호를 전달했다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기록돼 있다. 126년 전인 1895년 봉수제도가 사라진 이후 멸실된 것으로 알려진 건지산 봉수를 찾기 위해 시가 지난해부터 현장답사를 진행하다 지난달 22일 봉수 흔적을 발견했다. 이번에 확인된 건지산 봉수터는 산 정상에서 남서쪽 아래 약 300m 거리의 능선에 위치한다. 봉수를 둘러싼 80m 둘레의 방호벽과 아궁이 5개, 돌로 만든 방호벽 출입 시설 등이 발견됐다. 건지산 봉수터가 발견되면서 석성산 봉수터와 함께 용인지역에 있는 2개의 봉수 위치가 모두 확인됐다. 석성산 봉수터는 조선 전기 유적으로, 서울 남산(목멱산)∼성남 천림산∼용인 석성산으로 이어지는 주요 봉수로에 위치한 역사적, 지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해 11월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됐다. 시 관계자는 “올해 안에 건지산 봉수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경기도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행복한 한끼 준비하는 젊은 중국 부부, 올해의 음식 사진

    행복한 한끼 준비하는 젊은 중국 부부, 올해의 음식 사진

    중국 산시성에 있는 명산 태항산의 들머리가 되는 리청에 사는 한 젊은 부부의 부엌 풍경이다. 빛이 오묘하게 스며 드는 부엌 안이다. 남편은 나뭇가지를 태우는 아궁이에 올린 솥에서 쪄낸 만두를 채에 담아내려 하고 아내는 만두를 빚으며 딸과 정겨운 애기를 주고받는다. 10년째 시상하는 핑크레이디 음식 사진상의 올해 대상으로 뽑힌 작품 ‘맛’이다. 뭉근하게 마음을 데우는 삶의 맛이랄까, 행복감 같은 것이 전해진다. 리화이펭이 카메라에 담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상을 만든 캐롤라인 케년은 “빛을 적절히 이용했다는 점에서 기술적으로 빼어난 사진”이라면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진으로 끌어올린 것은 스토리텔링의 깊이와 감동 때문이다. 고립과 실내, 그것도 직계 가족끼리만 갇혀 지낸 지난 일년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예외적인 장면은 위대하거나 기억할 만한 것들을 담은 사진이 충격을 주거나 마음을 흔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완벽히 보여준다고 했다. 올해 이 상의 작품 공모에는 70여개국에서 1만 500점이 출품됐으며 라이브 스트리밍 시상식을 통해 수상자가 발표됐다고 영국 BBC가 27일(현지시간) 전했다. 부문별 수상작도 발표됐는데 부문만 열거한다. 집에서의 추수, 상파뉴 떼땅져 결혼 음식 , 음식 스타일, 후지필름 혁신, 핑크레이디 사과의 날, 길거리 음식, 마크스 앤드 스펜서 음식 초상, 학생 올해의 사진, 음식 인플루언서, 윈터보탬 음식 판매, 세계식량기구(WFP) 목숨을 위한 음식 등이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최초의 분양광고와 정세권

    [근대광고 엿보기] 최초의 분양광고와 정세권

    “재동 54 신축 와가(瓦家) 10간(間) 내외 10동” 1929년 2월 7일자 조선일보에 ‘방매가’(放賣家)라는 제목 아래 실린 광고의 일부분이다. 서울 재동은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는 곳과 그 주변 동네로 지금도 행정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재동 54번지의 위치는 번지수가 바뀌지 않았다면 북촌문화센터 바로 서쪽이다. 그곳에 기와집 10채를 지어 매각(방매)한다는 뜻이다. 광고에는 관철동, 낙원동, 관훈동, 소격동, 봉익동에 지은 기와집들도 판다고 돼 있다. 이 광고를 최초의 주택 분양광고라 봐도 좋을 듯하다. 광고 말미에 분양 업체는 ‘건양사’로 표기돼 있는데 요즘의 부동산 개발 업체다. 1902년 4월 25일자와 그 이후 날짜의 황성신문에서도 ‘방매가’ 광고를 찾을 수 있지만 기존 주택을 판다는 광고다. 부동산 매매 광고인 셈이다. 건양사를 세운 정세권(1888~1965)은 광고에 나오는 북촌 일대와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단지를 건설한 일제강점기의 ‘건축왕’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가 개발한 동네는 경성의 뉴타운이라고 할 만하다. 오늘날 북촌 한옥마을이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된 것은 정세권의 덕이다. 건양사는 토지 매입과 기획, 설계, 시공, 금융까지 부동산 개발의 모든 과정을 진행했다. 정세권이 지은 집은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고 작은 마당이 있는 아담한 한옥으로 부엌 바닥에 타일을 깔고 석탄 아궁이를 설치한 개량식이었다. 그는 “조선 집이어야 조선 사람이 살기 편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춘원 이광수의 세검정 집과 배재학당 대강당도 그가 지었다. 정세권은 경남 고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3살에 고성군 하이면 면장에 임명됐다. 그는 면장을 하면서 방풍림 조성 사업, ‘대동계’라는 저축계 발족, 잠업조합연습소 설립 등의 치적을 남겼고 특히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는 주택 개량에도 힘을 쏟았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 후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기 싫어 면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건양사를 설립했다. 그의 항일 의지는 그 후의 행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동산 개발로 돈을 번 정세권은 민족자본가로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신간회에 참여했다. 특히 이극로와의 인연으로 서울 화동의 2층 건물과 대지를 조선어학회에 회관으로 쓰라고 기증하고 운영 자금을 대주는 등 조선어학회 활동도 지원했다. 정세권은 이런 이유로 한글학자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돼 보름 동안 고문을 당했다. 일제는 그것도 모자라 건축 면허를 박탈하고 뚝섬에 있는 그의 땅 3만 5000평을 빼앗았다. 정부는 1990년 정세권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부산해지는 봄날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부산해지는 봄날

    언덕 경사지에서 자라는 생강나무 좀 낮게 키울 요량으로 전지를 했다. 굵은 나무는 잘라 쌓아 두고 꽃 피어 있는 가지를 화병에 꽂아 두었다. 이미 피어 있는 노란 꽃 사이로 잎이 나오고 있다. 마당에는 수선화가 노란 꽃을 피우고, 튤립이 꽃대를 올린다. 매화와 살구꽃이 한창이고 앵두꽃도 하얗게 피고 있다. 그렇게 봄을 맞이하니 춥다고 미뤄놓은 일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화단 지나는 길 손보고, 계단 만들어야 하고, 닭장으로 가는 길에 블록 깔아 주어야 하고, 데크와 현관문 칠해야 하고, 쥐가 드나들기 시작한 닭장 손봐야 한다. 지난해 기록적인 폭우로 무너진 돌담도 마저 보수해야 하고 울타리도 설치해야 한다. 무슨 일이 끝도 없다. 대부분 새로 만들기보다 고치고 보완해야 하는 것들이다. 이사 와서 새로 만든 창고와 닭장, 텃밭상자와 아궁이. 창고는 방치와 보수로 점철되고, 퇴비장은 몇 번을 만들었던지. 아궁이는 좀더 편리하고 적당한 자리 찾는다고 서너 번은 만들고 허물고 그랬다. 화단은 구성이 달라지고, 지하수 쓰다가 수도를 놓으며 수돗가는 처음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공사로 잔디가 뒤집어진 것이 서너 번이다. 늘 그대로인 듯한 집과 마당은 오늘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듯하다. 적응하기 바쁘더니 욕심내기 끝이 없네. 경험 없는 탓에 호미 들고 하루 보내기가 쉽지 않더니, 이제는 아쉬워 새로 텃밭상자 하나를 더 만들었다. 인연으로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아 정신없이 한두 해 보내고 나니 이제 9마리도 많다 느껴지지 않는다. 그 많던 닭이 세 마리만 남으니 볼 때마다 쓸쓸하다. 예전엔 작업하는 공간만 챙기면 되었는데 이제 집이다. 꽉 차게 보이던 곳이 허술하게 다가오고 망가진 곳이 크게 보이니 무덤덤하게 외면하기 쉽지 않다. 그러면서 일이 많고 힘들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당연한 상황에 적응이 덜 된 탓일까, 과한 욕심 탓일까. 생각이 매일매일 바뀐다. 나이 들수록 달라지는 것은 생각대로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는 것. 이제는 몸이 가는 만큼 생각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본다. 뛰지 말고 천천히. 요즘 내게 건네는 위로다. 격려의 말이기도 하다. 슬슬 연장들을 꺼내야 할 때가 됐다.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는 봄은 길지 않다.
  • 사람 냄새 가득한 다섯 빛깔 행복을 찾아서

    사람 냄새 가득한 다섯 빛깔 행복을 찾아서

    2021년 새해에도 언제나 내 곁을 지켜 준 ‘님’이 있기에 든든하다. 함께한 세월만큼 의지할 수 있는 님은 부부도, 형제도, 친구도 될 수 있다. EBS 1TV가 4일부터 8일까지 오후 9시 30분에 방송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한국기행’은 5부작 ‘님과 함께’를 통해 사람 냄새 가득한 세상을 집중 조명한다. 4일 방송되는 1부 ‘행복동 1번지’에선 강원 홍천 살둔마을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장용동·백춘희씨의 사연을 소개한다. 언론사에서 퇴직한 장씨가 노후 안식처를 찾아 헤맨 끝에 찾은 산장을 ‘행복동 1번지’라고 이름 붙였다. 부부에게 숲속 산장은 놀거리가 넘쳐 나는 삶의 터전이다. 강원 영월 70년 된 흙집에 사는 박덕수·김인숙씨 부부는 귀농 3년차다. 서툰 솜씨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보양식 백숙을 준비하면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감을 느낀다.2부 ‘그대만이 내 세상’(5일)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결혼한 지 40년째인 김희증·오세희씨의 신혼부부 같은 삶을 다룬다. 서울에서 살던 김씨 부부는 세 남매를 키워 놓고 6년 전 아내 오씨의 고향 하동으로 갔다. 다양한 자격증을 준비하는 아내와 명상을 즐기는 남편은 방을 분리해 각자의 생활을 한다. 오작교나 다름없는 거실에서 만나 알콩달콩 부부만의 시간을 보낸다.3부 ‘가족애(愛) 탄생’(6일)은 경남 합천 가회면에 함께 사는 8남매 대가족의 우애를 살펴본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장남 정운태씨는 형제간에 돈독한 우애를 다지고 싶어 100년 된 옛집을 보존하고 있다. 뒷산에 가족 묘소가 있어 새해가 되면 오순도순 모여 온 가족이 조상에게 감사를 드린다. 김장을 할 때는 8남매뿐 아니라 사돈댁까지 모두 모여 행복하다. 4부 ‘화개골 스님의 새해’(7일)는 지리산 자락에서 30년간 홀로 농사지으며 참선해 온 자응 스님을 소개한다. 1984년 출가한 이후 지리산이 좋아 계속 머물고 있다는 스님의 화개골 자혜 정사. 추운 겨울 새벽 3시 동굴에 참선하러 가는 스님이 텃밭에서 직접 기른 냉이를 끓여 공양하는 모습엔 새해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5부 ‘어쩌다 가족’(8일)은 전남 무안에서 사거리반점을 운영하는 세 친구 김을현, 김경만, 김용운씨의 우정 이야기다. 3년 전 시인 을현씨와 주방장 경만씨의 인연을 시작으로 귀농을 준비 중인 용운씨도 친구가 되면서 셋은 ‘어쩌다 한 가족’이 됐다. 무안 앞바다에서 세 친구는 굴을 캐고 낙지도 잡는다. 함께 있어 든든하기에 일도 놀이도 같이 즐긴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여기는 중국] 17년 간 매일 ‘눈물 밥’ 짓는 암환자들 위한 ‘사랑의 주방’

    [여기는 중국] 17년 간 매일 ‘눈물 밥’ 짓는 암환자들 위한 ‘사랑의 주방’

    매일 오전 11시 30분이면 약 200여명의 사람들이 몰려 분주히 밥을 짓는 골목이 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 외진 골목 한 쪽에 마련된 옛날 방식의 아궁이에서 저마다의 가족들을 위해 밥을 짓는 상황이 목격되고 있는 것. 바로 중국 장시성(江西省)에 소재한 종양치료 전문병원과 벽을 사이에 두고 성업 중인 ‘사랑의 주방’ 모습이다. 일명 ‘사랑의 주방’ 또는 ‘사랑의 부엌’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노천에 마련된 구식 주방이다. 60대 종 모 씨 노부부가 지난 2003년부터 단 하루도 문 닫지 않고 영업 중이다. 일반적인 식당과 다른 이곳 만의 특징은 조리된 음식을 판매하는 것이 아닌, 아궁이를 대여해준다는 점이다. 아궁이를 대여한 고객은 부부가 제공하는 깨끗한 생수와 각종 양념, 식기류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이용료는 단돈 1위안(약 170원)이다. 지난 2003년 문을 연 직후 일평균 200여 명의 고객들이 찾아와 밥을 짓고 있다. 고객들의 대부분은 인근 종양전문 치료병원에서 항암 진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의 가족들이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상당수가 타 지역 소재의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하거나 연명 치료 중인 말기 환자가 대부분인데 가족들은 이들을 위해 직접 조리한 음식을 먹여주고 싶다는 소망을 ‘사랑의 주방’을 통해 도움 받아오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이 일대 주민들은 부부의 주방을 가리켜 ‘항암주방’이라는 별칭을 붙여 부른다. 이 종양치료 전문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이미 병세가 말기에 이른 상태로 회복 불가 판정을 받은 사례가 다수다. 사랑의 주방 운영자 종 씨는 “이미 치료 불가 판정을 받은 말기 환자들의 경우 앞으로 얼마나 긴 시간 더 견딜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힘겨운 투병을 이어가는 상황”이라면서 “실제로 자주 왔던 고객들 중 상당수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사망하거나 퇴원했다. 이들 중 몇이나 아직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그러면서 “말기 환자들은 일반인보다 더 잘 먹고 잘 쉬어야 하지만 오히려 식욕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게다가 이미 긴 시간동안의 항암 치료로 빚을 진 사람들이 많다. 병원비와 병원 음식비용까지 지불할 여력이 없는 환자들이 다수인데, 이런 사연을 가진 분들이 주로 우리 주방을 찾아온다”고 했다. 부부가 처음 ‘사랑의 주방’이 문을 연 것은 지난 2003년이었다. 당시 종 씨 부부는 바로 이 자리에서 아침만 잠깐 문을 여는 꽈배기 집을 운영했다. 그런데 이 시기 항암 치료로 지친 아들을 품에 안은 젊은 엄마가 아이를 위해 직접 요리할 수 있는 아궁이 대여를 문의했고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사랑의 주방 시초가 됐다. 당시 매일 한 차례씩 와서 밥을 지었던 아이 엄마는 퇴원 후 홀연히 사라졌지만 종 씨 부부의 사랑의 주방은 그로부터 단 한 번도 문을 닫지 않고 연일 성업 중이다. 종 씨 부부가 제공하는 것은 냄비와 각종 식기류, 연탄불 등이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사용료는 단 돈 1위안이다. 지난 2016년 까지 5마오(약 85원)이었던 것이 물가 상승을 견디기 어려워 1위안으로 올려 받기 시작했다. 종 씨는 “환자들의 치료비는 가난한 농민공 가족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면서 “많은 농촌 가족들이 한평생 힘들게 10여 만 위안(약 1700만원)을 저축했더라도 가족 치료비로 단 두 달을 버티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연명치료를 위한 주사 한 대에 2만 위안(약 340만 원)을 넘는 경우가 많은데, 한 달에 여러 번 주사를 놓아야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종 씨 부부에 따르면 그의 주방을 찾는 고객들 중 상당수가 평소 요리를 직접 해 본 경험이 전무한 이들이다. 종 씨는 “몇 년 동안 이곳에 와서 밥을 짓는 사람들 중 약 40%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요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면서 “심지어 올해 80세가 넘은 노부부 중 아내가 암투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연을 가진 할아버지는 평생 아내가 지어주는 밥을 먹을 줄만 알았지 단 한 번도 밥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이 할아버지는 아내가 중병에 들고서야 아내를 평소 아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회상했다. 또 종 씨는 “암환자인 엄마를 돌보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16세 소년도 잊을 수 없다”면서 “외지에서 일하는 아버지 대신 엄마를 돌보던 소년 역시 이곳에서 처음으로 밥을 지었다. 당시 그의 사연을 듣게 된 다른 손님들이 직접 만든 반찬을 십시일반 모아서 소년에게 전달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종 씨의 주방을 이용해 따뜻한 밥을 지어 먹었던 환자들 중 완치 후에도 병이 재발해 사랑의 주방을 다시 찾아오는 사례도 있었다. 종 씨는 “항암 치료로 완치 판정을 받더라도 재발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었다”면서 “퇴원 후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돌아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병원을 떠날 때 내게 맡겼던 식기류를 다시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이때 마음이 제일 아프다”고 말했다. 종 씨 부부의 주방은 17년 째 성업 중이지만, 개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적자다. 일평균 연탄 100여 개와 부지 임대료 등을 감당하기 어려운 탓에 부부는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노령연금을 모두 사랑의 주방 운영비용에 충당해오고 있다. 사랑의 주방 이용자 수는 연평균 1만여 명에 달한다. 하루 평균 100여 개의 연탄과 20여 위안(약 3400원) 상당의 생수 값이 소요된다. 종 씨는 “우리 부부는 사랑의 주방을 찾아오는 환자가족들을 위해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면서 “그러면 오전 10시부터 환자 가족들이 하나 둘 씩 식재료를 들고 찾아와서 저마다 사연 있는 요리를 만들어 간다”고 말했다. 부부의 월평균 운영비는 1만여 위안(약 170만 원)이지만 수입은 턱없이 부족해 정부에서 받는 개인연금 중 상당수가 운영비로 충당되는 실정이다. 종 씨는 “우리 부부는 비록 늙고 힘은 없지만,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환자들이 맛있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고 그러면 조금이나마 병세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의 몸도 마치 묘목처럼 먹는 것이 곧 좋은 비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경기도, 연천 대전리산성·용인 석성산봉수터 문화재 지정

    경기도, 연천 대전리산성·용인 석성산봉수터 문화재 지정

    경기도는 지난 6월 지정 예고한 ‘연천 대전리 산성’과 ‘용인 석성산 봉수터’를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했다고 4일 밝혔다. 연천 대전리 산성은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한 삼국시대 산성으로 서울·경기지역 산성 가운데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변화 양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았다. 이곳은 연천과 양주 사이 추가령 구조곡에 의해 형성된 긴 회랑지대(통과 가능한 길고 좁은 지대)가 이어지는 지리적 중요성이 매우 높은 곳이다. 대전리 산성은 신라가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나라와 벌인 7년 전쟁의 치열한 격전지인 ‘매초성 전투’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알려져 왔다. 용인 석성산 봉수터는 산 정상에 위치한 조선 전기 봉수 유적으로 서울 남산(목멱산)∼성남 천림산∼용인 석성산으로 이어지는 주요 봉수로에 위치해 역사적, 지정학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용인 석성산 봉수터’는 석성산 정상에 돌출된 암반 봉우리에 대지를 마련하고 방호벽을 축조해 연조(봉화를 올리거나 낮에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는 아궁이·굴뚝시설) 5기를 조성했다. 방호벽 아래로 평탄지에는 창고를 조성했고, 봉수대에서 남쪽으로 약 50m 가량 떨어진 위치에 조성된 평탄대지에 봉수군이 거주했던 건물지로 추정되는 구들시설 건물지 우물 등이 확인됐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연조의 하부구조, 방호벽 축조기법, 출입시설, 봉수군이 거주했던 건물을 통해 당시 봉수의 시설과 구조, 봉수의 운영 방식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1번 연조의 암반 굴착 축조 방식, 방형의 제사유구, 백자제기 등은 희귀 사례로 중요성이 인정돼 문화재로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정식 경기도 문화유산과장은 “이번 경기도 문화재 지정으로 연천 대전리 산성과 용인 석성산 봉수터 등 경기도에 소재한 귀중한 문화유산을 후대에 원형대로 보존 전승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툭하면 가출했던 ‘질풍노도’의 영재, 뇌과학에서 인간 관계의 답을 얻다

    툭하면 가출했던 ‘질풍노도’의 영재, 뇌과학에서 인간 관계의 답을 얻다

    ‘뇌과학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대기업 미래기술전략팀장….’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여러 분야를 오간다. 장동선 뇌과학자. 생소한 과학을 일반인들에게 강의하며 소통하고 TV에도 출연하며 유명세를 얻은 그가 최근 3년 반 몸담았던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유튜브 방송 ‘궁금한 뇌’를 시작했다. 자칭 ‘변화 전문가’를 지향하는 그는 ‘경계 없는 삶’을 살아온 주인공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7세 때 한국에 돌아온 이후 30대까지 한국과 독일, 미국을 오가며 공부한 영재다. 하지만 초등학교에선 체벌과 왕따를 겪었고, 일반고 입학 전 약 2년은 반복된 가출로 반항과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다행히 이 무렵 ‘사람과의 관계’에 목말랐던 자신에게 눈을 떴고 뇌과학자 길을 걷게 됐다. ‘회식자리에서 후배들을 대신해 고기 굽고 술 따르는 전형적인 낀 세대’라며 웃어 젖히는 그에게선 명민함에 어울리지 않는 옆집 아저씨 같은 소탈함이 엿보인다. -최근 모친상을 당했다. 퇴사 이유가 간병 때문이었나. “코로나 때문에 가정 간병인도 다 막혔다. 어머니를 간병하시던 아버지께서 못 버티겠다 하셔서 가족돌봄 휴가를 알아봤는데, 차라리 간병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여러 아궁이에 불 때는’ 작업을 해 보기로 했다. 10년 넘게 ‘과학 커뮤니케이터’라는 아궁이에 불 때고 살다가 선택의 순간이 온 거다. 40대 임원을 위해 회사를 위해 불사를 것인가, 안정감은 떨어지나 내 콘텐츠를 기반으로 새 도전을 할 것인가.” -자아정체성 혼란이 극심한 유년기를 보냈을 것 같다. “가장 힘든 것은 ‘세상과의 분리감’이었다. 독일서 박사과정 밟은 아버지, 간호사 어머니가 한국 가족에게 송금한 것 외에 정착을 위해 고향 친구분께 꼬박꼬박 돈을 보냈는데 고스란히 사기를 당했다. 부모님은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무일푼이 되셨다. 서울 은평구 역촌동 달동네 반지하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게 됐다. 부모님은 속이 문드러졌지만, 꼬맹이는 연탄 때는 달동네와 서울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입학해 문화충격이 왔다. 체벌과 싸움과 촌지 요구. 결국 1학년 때부터 홈스쿨링, 조기교육을 받고 중학교는 검정고시 졸업했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9년을 공교육에서 분리돼 있었던 셈이다.” -뒤늦게 가출은 왜 하게 됐나. “영재 교육을 계획한 어머니가 저와 여동생을 데리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가셨는데, 직업도 시민권도 없는 상태여서 너무 힘들었다.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병환을 얻으시고 가정불화도 심했다. 가족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창 예민한 사춘기에 했다. 2년 정도 가출을 밥 먹듯 했다.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자고, 부산 광안리에서 ‘조폭·삐끼’와 어울리는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렸다. 영재교육을 받던 아이가 사회 경계 밖 버려진 집단과 어울린 거다. 그런데 그런 애들이 오히려 나를 받아 줬다. 물론 내게도 편견을 갖고 있고 욕도 하고 거칠었지만, 우리는 ‘소외됐다’는 동질감이 있었다.” -영재교육과 비행 청소년의 삶을 모두 겪었다. “또래집단에 소속되지 못했던 단절이 크다 보니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커서 일반고로 입학했다.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 방황하고 고등학교 입학해서 수학 정석을 보니 안 풀리더라. 괴테가 ‘전진하지 않는 자는 후퇴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똑똑해도 매일 갈고닦지 않으면 근육도 뇌세포도 망가진다는 걸 알았다.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 자율화를 해 줘 음악밴드를 조직했고, 고 2때 ‘전국고등학교 과학동아리연합’을 만들어 천체 관측, 로켓발사 등을 하러 다녔다. 소문을 듣고 당시 카이스트 총장님이 내가 어떤 아이인지 보려고 학교를 방문했는데, 하필 결석하고 놀러 나간 날이었다.(웃음)”-어렸을 적 소통 욕구가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발돋움하게 한 건가. “뇌과학은 어릴 때부터 목말랐던 인간관계를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생물학에서 과학철학으로 전과했는데 독일 정부가 비자 가진 유학생의 전공 교체를 불허했다. 랩에서 쥐 실험 하는 게 너무 싫었다. 한데 나는 어려운 시기가 오면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나는 유목민 기질이 있다. 마침 미국 교환학생 자리가 났는데 (독일서) 반미 감정이 높던 때라 운 좋게 순번이 와서 무조건 갔다. 지금 죽을 것 같이 힘들다면 무엇이라도 능동적으로 바꿔 보시라. 대부분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환경 탓일 때가 많다.” -2020년 한국사회에서도 그런 게 통할까. 젊은이들에게 ‘동남아로 진출하라’고 했던 정부는 역풍을 맞았다. “우리처럼 교육수준이 굉장히 높은 사회에서는 내가 못나 보인다. 환경을 바꾸면 분명히 새로운 기회가 생긴다. 우리만 갖고 있는 장점인데 여기서는 못 보는 게 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똑같은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기회가 왔다고 본다. 한국에서 3D 프린터로 안경을 만들어 뉴욕 유명인사들한테 판매하는 브랜드가 있던데, 한국적 콘텐츠로 온라인을 활용해 새 기회를 잡는 것도 가능하다.” -‘N포세대’에게는 쉽지 않은 말이다. “우리는 ‘성공해야 된다’는 압박이 너무 크다. 실패하면 낙인찍히고 재기 못할까 봐 두렵다. 좋아하는 격언이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시도해 본 적 있는가, 실패해 본 적 있는가, 괜찮다),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다시 시도해라, 다시 실패해라, 더 나은 실패를 해라)이다. 매번 도전할 때마다 실패해도, 용기를 갖고 또 도전하고 ‘덜’ 실패하면 된다. 블랙유머 같지만 도전하면 실패하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7전 8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존재 의미는 성공보다 실패의 영역을 조금씩 줄이는 데서 찾는 거다. 상처받을 것을 미리 두려워하지 마시라.”-애프터 코로나 시대 뇌과학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코로나 위기를 통해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디지털 플랫폼’이 5년은 가속화됐다. 무한한 데이터 중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뽑아내고, 인간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해졌다. 엔지니어도 중요하지만 뇌과학자, 심리학자의 통찰이 필요한 분야다. 코로나 시대 물리적 거리두기가 중요해졌지만, 역설적으로 사회적 거리는 좁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해마시고(웃음), 힘든 시기일수록 서로 연결돼 있어야 힘이 되고 아이디어가 솟구친다는 뜻이다. 20만년 전 구석기 시대 인류의 뇌와 오늘날 인류의 뇌 용량은 진화하지 않고 똑같다. 그럼 21세기 문명을 어떻게 이룩했느냐 의문이 생기는데, 책·증기기관처럼 연결성이 고도화된 기술혁명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라고 해서 연결성이 끊긴 사회로 가선 안 된다. 우리 뇌는 연결을 지향하는 사회적 뇌로 진화해 왔고, 연결 속에서 행복하고 혁신을 찾으며 발전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계기는. “2014·2015년 독일 사이언스 슬램(과학교육부 주관 과학강연대회), 세계 페임랩 인터내셔널에서 연이어 수상하며 유럽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회 강연에 2000만원까지 주는 독일 최대 ‘스피커 에이전시’(강연자 전문회사)에도 들어가게 됐는데 아내가 한국행을 원했다. 삶의 제일 큰 딜레마를 겪었다. ‘나 혼자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가족을 따를 것인가’.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경험은 어땠나. “한국에서 혁신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것이 변화해야 한다. 톱다운 방식의 ‘꼰대 문화’와 ‘고맥락사회’가 문제다. 가족, 학연, 지연 등 사회적 연결고리가 중요하다 보니 개인이 실패를 감수하고 뭔가 지르기 힘들다. 밉보이면 안 된다는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도 혁신을 저해한다. 풀뿌리처럼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아이디어가 자라도록 대기업·정부는 판만 깔아 주고 그 안에서 개인·스타트업이 동반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재 출신 아버지의 교육법이 궁금하다. “나도 답이 없다.(웃음) 코로나 시대 부모들의 짜증도 이만저만 아니다. 아이들 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늘 너를 위해 존재한다’는 신뢰와 공감을 주는 말이다. 영재교육도 사회성이 가미되어야 한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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