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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일 TV 하이라이트]

    ●러브 인 아시아(KBS1 오후 5시10분) 지난 2005년 6월 꿈 많은 한 인도네시아 아가씨에게 다가온 끔찍한 재앙 화마(火魔). 당시 그녀는 자신이 일했던 금형 주조공장에서 일어난 큰 폭발 사고로 전신 30%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그녀의 꿈은 산산히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얼굴과 가슴을 온통 뒤덮은 화상 흉터뿐인데….
  • 「미니」아가씨끼리 「팬티」벗기기

    4월 14일 밤 8시45분께 춘천시 중앙로 2가 「살롱」문이 왈칵 열리면서 서로 머리채를 잡은 초 「미니」의 두 아가씨가 밖으로 뛰어 나왔겄다. 무엇때문에 그런 결사적인 대결을 하는 것인지 영문은 모르지만 행인들은 때아닌 반 나체으 대결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이 차가씨들 싸움하는 전법(?)이 입고있는 초 「미니」만큼이나 초현대적이었다고. 서로 상대편의 「팬티」를 벗기는 전법으로 나왔는데 덕분에 남자 행인들은 가슴설레며 희한한 대결을 감상. <춘천(春川)> 버스서「스트립·쇼」 「버스」를 탔던 승객이 차장에게 차비대신 「스트립·쇼」를 보여준 기발한 얘기. 4월 12일 밤10시께 부산시 남포동에서 술이 거나해서 해운대행 「버스」를 탔던 C씨, 허둥지둥 내리려고 차빌ㄹ 챙겨보니 몽땅 20원뿐. 되돌아갈 차비밖에 없었던 C씨, 차비를 조르는 차장ㅇ게 사정을 하다가는 갑자기 바지춤을 내려버렸다나. 놀란 차장이 얼른 C씨를 차밖으로 떠밀어 버렸다자. 방법이 너무 적나라했군 그래 <부산(釜山)> 동침하고 옷훔쳐 4월 15일 대구 경찰서는 이모씨(25·대구시 대봉동 3가)를 절도혐의로 입건했는데-. 이씨는 지난 4월 10일 대구시 동인동 1가 사창가에서 창녀 이모양(22)과 동침, 하룻밤의 정을 나누고는 새벽 6시쯤 이양의 바지 「쉐터」등 옷가지 7천여원 어치를 훔쳐 달아났던 것. 그런데 이 친구가 붙들리게 된 것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한번 그런 얌체짓을 하려고 같은 사창가를 찾아 왔다가 그만 이양에게 덜미를 잡히게 된 것이라고. <대구(大邱)>
  • 미스·삼정물산(三鼎物産) 주선진(朱善鎭)양 - 5분 데이트(79)

    미스·삼정물산(三鼎物産) 주선진(朱善鎭)양 - 5분 데이트(79)

    가무스름하고 갸름한 얼굴에 버들잎을 닮은듯한 긴 눈을 가진 금주의 표지「모델」은 주선진(朱善鎭)양. 49년생, 3개월째 삼정물산(三鼎物産)의 비서실에서 일하고 있다. 어머니 김연옥(金連玉·61)씨의 3남3녀중 막내. 어머니는 인천에 살고 서울에서는 큰 오빠집에 묵고 있단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이면 퇴근과 함께 인천행. 한 주라도 인천행(仁川行)을 거르는 때면 엄마가 보고 싶어 못견딘다는 아직 애송이 아가씨이다. 인천여상(仁川女商) 출신. 결혼은 언제쯤? 이란 물음에는 『어유, 아직 어린걸요. 오래 오래 있다가, 엄마랑 오래 살다가 갈래요』- 펄쩍 뛴다. 『남자친구들은 두어명 있어요.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 친구들과 만나면 주로 야외로 놀러 가죠. 등산도 하고…』 좋아하는「타이프」의 남성으로는 우선 똑똑한 사람이어야겠다고. 『겉모양 보다는 속이 알찬 사람이 좋겠죠. 착실한 사람, 뭐든 나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좋아요』 그리고는『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덧붙인다. 『나이가 많아야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되지 않아요. 나이가 많은 편이 여러가지로 안전할 것 같아요』 요즈음은 회사에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역사소설『대원군(大院君)』을 읽고 있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26일호 제3권 17호 통권 제 82호]
  • [딸자랑] 변호사 김봉일(金鳳逸)씨 외딸 명희(明姬)양

    [딸자랑] 변호사 김봉일(金鳳逸)씨 외딸 명희(明姬)양

    변호사 김봉일(金鳳逸·60)씨의 3남매중 막내이자 고명딸인 명희(明姬)양은 숙명여대(淑明女大)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한 25세의 「영·레이디」. 옷맵시며 사람을 대하는 「매너」가 여간 세련된 것이 아니다. 아빠는 이 따님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언제고 옆에 두고 보살펴주고 보살핌을 받고 싶지만 그럴 수만도 없는 것이 불만이란다. 『제가 판·검사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명희는 8,9차례나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어요. 사내 아이들은 한곳에 두고 다녔지만 명희만은 어느 부임지고 데리고 다녔읍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고 별 탈없이 공부도 잘해 주었고 말썽도 부리지 않아 엄마가 없어도 힘드는 줄 모르고 키운 아이입니다』 명희양이 어머니를 여읜 것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훨씬 전. 따라서 명희양은 오로지 아버지의 손에서만 자란 아버지만의 딸이란다. 그러나 명희양에게서 느껴지는 인상은 전혀 엄마 없이 자란 딸이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게 밝기만 하다. 『요즈음에는 딸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입니다. 과음을 한 다음날 아침이면 얼큰한 해장국을 끓여내고 아버지 상에는 일절 누구도 손을 못대게 하고는 모든 반찬을 구미에 맞도록 직접 만들어 상에 올린답니다』 아버지 김봉일씨가 즐기는 따님의 솜씨는 만두국. 아버지는 어느 집에서고 따님이 만든 만두국보다 더 맛있는 것은 맛보지 못했다고 자랑이다. 또한 아빠의 옷차림새를 보살피는 것도 물론 명희양. 「넥타이」며 양말등 자질구레한 일용품으로부터 「수트」의 색깔선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명희양의 취미 그대로라는 것. 『명희는 또 아이가 사람을 다룰줄 알아요. 주부가 없는 집이니까 식모를 두어야만 했는데 어떻게 조정을 잘 하는지 일단 집에 들어온 식모는 계속 적어도 4,5년 동안은 아무런 불평없이 잘 살아주더군요』 식모를 다루는 일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도 새로 시집온 큰 올케와도 사이좋게 지낸다고 아버지는 흐뭇해 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취직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별로 달갑지 않아 그만두도록 했읍니다. 엄마없이 키운 아이라 혹 주부수업에 부족된 점이라도 있을까 해서 여러가지를 배우도록 하고 있읍니다』 이런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따님은 지난해 가을 운전기술을 배워 이미 운전면허를 얻어 두었고 지금은 4개월째 양재를 배우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던 67년에는 3개월 「코스」로 된 요리학원의 전문부를 「마스터」한 바 있고. 명희양이 꽃꽂이를 시작한 지는 이미 3년여. 임화공(任華公)씨의 애제자로 4월16·17일 이틀동안 조선「호텔」「볼·룸」에서 열렸던 임화공씨의 꽃꽂이 동우회전(同友會展)에 출품한 것. 어쨌든 1급 신부감이 갖춰야 할 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 되는 아가씨다. 『귀중한 보석을 갈듯 열심히 꾸준히 딸아이가 가진 재질을 찾아내어 개발하도록 애썼읍니다. 그러나 아이가 내가 바라는대로 잘 따라 주고 또 성격도 명랑하고 쾌활해서 지금은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아빠는 감개어린 눈으로 따님을 지그시 바라본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26일호 제3권 17호 통권 제 82호]
  • 신입사원 김신조「장가가야겠수다」

    신입사원 김신조「장가가야겠수다」

    2년 3개월전 기자회견에서 『청와대를 까러 왔수다』하고 밝혔던 「무장공비 김신조(金新朝)」가 이젠 선량한 「서울시민 김신조(金新朝)씨」로 바뀌었다. 지난 14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귀순자 환영대회에서 집 한채와 생활안정기금까지 받아든 김신조씨의 얼굴엔 지난날 무장공비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서울시민이 된 총각 김신조씨의 첫 말씀인즉 『올해엔 꼭 장가를 가야겠수다』 올해 28세인 총각 김신조씨는 4월1일부터 삼부(三扶)토건에 취직되어 총무과 직원으로 근무중. 월급액수를 묻자 『아직 신입사원이어서…』하며 머리를 긁는다. 자유대한에서의 생활 2년3개월동안 김씨는 꼭 두번 예쁜 아가씨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한번은 부산(釜山)에 반공 강연을 갔을때. 「호텔·프론트」에서 누가 찾는다기에 내려가 만났더니 23세 가량의 아가씨가 대뜸 『정식으로 청혼합니다』하고 대들더라는 것. 2차 청혼공세 역시 「호텔」이 무대. 김씨가 장기 투숙하고 있는 동안 몇차례 농담을 주고 받은 「프론트」에 근무하는 아가씨가 『김신조씨 저하고 결혼 안하실래요?』하더라는 것. 점잖게 『다시 생각해보마』고 대답했지만 그뒤 아무런 사태진전 없이 지나가 버렸다. 『대한민국엔 총각이 모자라는 모양이죠? 아니면 아가씨들이 지나치게 공격적이든가…』 두 차례 청혼공세에 혼이 난 김씨의 말이다. 그 뒤로는 하숙집을 정해도 미리 그집에 장성한 딸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아보고 딸이 없는 집만 골라 다녔다. 김씨가 가장 많은 아가씨를 한꺼번에 만난 것은 서울 낙원동 1,2,3「카바레」서 열린 반공강연때. 모여든 청중은 7,8백명. 모두 다방 「카바레」등 접객업소에 근무하는 아가씨들이라 화장 냄새만 해도 총각 김씨를 아찔하게 할 정도였다. 설레는 가슴을 진정해가며 연단에 올라서 다시 청중석을 내려다보니 이번엔 눈앞이 아찔. 그도 그럴 것이 모두 아슬아슬할 정도의 초「미니」차림이라 김씨의 시선은 아가씨들의 「미니」에서 떠날 줄은 몰랐다. 덕택에 『반공 강연을 했는지 「미니」예찬을 했는지 정신이 없었다』는 김씨의 고백. 이래서 김씨는 「미니」공포증에 걸리고 더 발전해서 아가씨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미스·코리어」선발대회에 구경가 보았는데 거기 나온 아가씨들보다 서울 거리의 아가씨들이 더 예쁘더군요. 눈에 보이는 아가씨들이 모두 예뻐 보여서 큰일입니다』 그래서 올해엔 꼭 장가를 가야겠다는 것. 여자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한 1백% 숫총각 김씨는 빨리 장가를 가야 「미니」공포증에서 벗어날것 같다고. 신부조건을 밝히라니까 『만 25세미만의 대한민국 여성으로 신체건강하고 사상 건전하면 OK』란다. 단 반드시 『동생들이 많을 것』이 필수요건. 그 이유인즉 김씨 자신이 남한에 일가친척이나 친지가 없어 외롭기 때문에 처남이나 처제가 많아야 좋겠다는 것. 학력은 고졸(高卒)정도면 충분. 대학 나온 아가씨는 김씨와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고. 김씨의 키가 1백70cm니까 신부감은 1백60cm서 1백65cm 안팎이 적당. 김씨의 체중은 현재 63kg이다. 그러나-『장가가면 체중이 는다니까 걱정없어요』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맥주 2~3병이면 충분. 담배는 이틀에 한갑 정도 피우니까 신부에게 바가지 긁힐 요건은 별로 없단다. 삼부(三扶)토건에서는 받는 월급에 서울시장이 마련해 준 3·1로 중산층 「아파트」와 O백만원의 생활안정기금이 있으니까 『신부 고생은 절대 안시킨다』는 김씨의 공약이다. 『좋은 아가씨 있으면 중매 서십시오. 마음에 들면 몇달 연애해 보고 결혼하죠』 장가가는 것 말고 김씨가 올해에 해야 할 일이 또하나 있다. 다름아닌 대학진학. 42년 함북(咸北) 청진(淸津)에서 태어난 김씨는 흥남(興南)고등기계공업학교를 졸업, 본의 아니게 124군부대에 입대, 남파(南派)된 것. 그래서 원래의 포부를 살려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는 것. 당국의 알선으로 곧 H대학에 편입할 예정으로 현재 편입 시험준비에 정신이 없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내 힘으로 내 가정을 꾸려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민주시민이 아니겠어요?』 자유대한 2년3개월은 김씨에겐 천국이었다. 김씨는 대한민국 2년3개월의 소감을 「멋 있는 사회」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자기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중고교생을 보면 마치 동생같고 옛날 자기처럼 김일성(金日成)에게 속아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수백만 북한 젊은이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나 자유만끽의 2년3개월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고 비판을 가할 줄도 아는 김씨다. 『서울 거리에선 이따금 대낮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있더군요. 자기 주량껏 마셔야지요. 주정하는 자유, 곤란해요』 『「미니」도 좋지만 「미니」와 악어 「핸드백」에만 정신이 팔리면 곤란해요. 어떤땐 저게 「미니」인지 「팬티」인지 모를 때가 있어요. 총각인 저야 구경거리로 좋지만, 글쎄요…』 이래서 김씨는 무릎위 10cm 이상의 「미니」엔 반대라고 못박는다. 최근 일어난 여러 사건에 대해서도 민주시민다운 일가견을 갖고 있다. JAL기 피납사건에 대해선 『정부의 노력은 이해하지만 제 생각같아선 그대로 북괴로 보내주는 것도 좋았어요. 그래야 일본사람들도 지옥같은 북한을 알게 될 거 아녜요?』-정인숙(鄭仁淑)양 피살사건엔 『아가씨들이 그런 식으로 살려고 들면 큰일』이고 와우(臥 牛)「아파트」 사고에 대해선 『업자들이 이익만 생각지 말고 양심껏 공사를 했어야죠』다. 가장 가슴 아프면서도 고마운 충고는 잘 다니던 명(明)동 어느 다방 「레지」아가씨의 말. 『제발 제2의 이수근(李穗根)이만 되지말라』고 하더란다. 김씨는 그 아가씨의 말이 자기를 반갑게 맞는 서울시민 모두의 가슴 한구석에 숨어있는 불안일거라고 하며 여러분의 불안을 씻기 위해서라도 더욱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가겠다는 각오. 4월 14일 환영대회에서 주민등록증을 받아쥠으로써 김씨는 떳떳한 서울시민이 되었다. 그동안 서울에서 배운 당구가 1백20. 바둑은 13급 정도다. 『장가 빨리 가야할 이유가 또하나 있어요. 시장에 나가보니까 물건사는덴 남자보다 여자가 낫더군요. 물건 잘 고르고 값도 잘 깎고. 게다가 하도 얼굴이 팔려놓아서 「아, 김신조씨군요」하면 값을 깎자고 할수도 없고…참 곤란해요』 그러니 결혼하면 생활비가 30%쯤 절약될거라는 속셈. [선데이서울 70년 4월 19일호 제3권 16호 통권 제 81호]
  • 미스 금성판매(金星販賣) 문정숙(文貞淑)양 - 5분 데이트(78)

    미스 금성판매(金星販賣) 문정숙(文貞淑)양 - 5분 데이트(78)

    흡사 남방의 여인인듯 가무스름한 피부에 오목 조목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갖춘 아가씨 문정숙(文貞淑)양은 올해 25세. 진명여고(進明女高)와 이대(梨大) 정외과(政外科)를 졸업했다. OL생활을 시작한지는 꼭 1년. 69년 3월 대학 졸업과 함께 금성판매주식회사의 사장비서로 취직했다. 『직장생활은 앞으로 1년쯤 더 할 생각이에요. 아직까지는 직장 일이 재미있으니까요』 단지 너무 짓궂게 「데이트」를 신청해 오는 남자 동료들만 아니라면 직장생활은 언제까지라도 재미 있을 것 같단다. 딸만 넷을 거느린 아버지 문창석(文昌錫·55)씨의 세째. 『아들이 없지만 아버지는 딸들을 너무 귀여워하셔서 섭섭해 하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정말 좋은 아빠예요』 아버지 자랑도 잊지않은 상냥한 세째딸이다. 위의 두 언니는 결혼했고 이제 정숙양의 차례지만 자신은 26세나 27세쯤 되어서 결혼할 생각이란다. 취직과 함께 재미를 붙인 것은 신문「스크랩」. 신문의 여성난은 물론 정치면, 사회면에서도 그때그때 문제되는 내용들을 차근차근 「스크랩」해서 모으고 있다고 말한다. 올해 신문의 날엔 차곡 차곡 정리해보는 보람도 겪고. 「스테디」한 남자친구는 물론 있고…. 대학 때부터 사귀어 온 그분의 취미를 닮아 낚시를 즐기기도. 일요일은 둘이 함께 수색 화전(花田)양어장에서 낚시질로 시간을 보낸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19일호 제3권 16호 통권 제 81호]
  • [열린세상] 좌우의 폭,누가 좁히나/강지원 변호사

    요새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다. 국민 지지도가 바닥으로 치닫자 집구석을 헐고 다시 짓자느니 안 된다느니 하며 난리법석이다. 네탓 타령에 심지어는 서로 나가라며 삿대질이다. 마치 난파 직전의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 같다.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데다 고장까지 났다면, 해야 할 일은 빨리 고장 부분을 찾아 수리하고 파도를 이겨내고자 중심을 잡는 일이다. 그런데 반성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없고 서로 손가락질만 하는 것이다. 새 정당을 만든다는 것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선 선거 때만 되면 고질병처럼 정당 간판 갈아달기가 등장한다. 부득이한 경우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도대체 그 간판 단 지가 몇년 되었으며,100년 가는 정당 만든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때는 또 언제였던가. 잘못되었으면 반성하고 고치면 될 것인데, 입으로는 반성한다고 하면서도 무엇 하나 몸으로 개선하는 것은 없다. 문패 바꾸기는 마치 퇴폐 유흥업소의 신장개업과 다를 바 없다. 새 아가씨 들어왔다며 툭하면 화려한 신장개업 간판을 내거는 것을 수도 없이 봐오지 않았는가. 문제는 정책이다. 집구석 간판 바꾸기나 일부 인물들의 헤쳐모여가 아니라 그동안 좌파 정책으로 지목받으며 내놓은 정책들이 과연 국민에게서 얼마나 호응을 얻었는지에 착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참에 신바람 난 쪽은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이 특별히 잘한 것 같지도 아니한데 지금처럼 40∼50% 지지도를 얻는 것 또한 매우 특별한 일이다. 이 역시 그 의미를 잘 읽어야 한다. 마치 그 안의 인물 누구누구가 잘났거나 말을 잘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아마도 여당 정책의 실패가 또 다른 기대를 가져오게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좌파 정책에 대한 불호응의 반작용으로 과거처럼 극우 ‘꼴통’ 정책 쪽으로 치닫는다면 이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될 것이다. 모름지기 좌·우의 정책은 그 폭이 좁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불안하지 않고 요동침 없이 굴러갈 수 있다. 시계추를 보자. 시계추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높이 올라가면 다음 차례에는 역시 크게 반대쪽으로 오르기 마련이다. 그 폭이 클수록 그만큼 불안하다. 세상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와 같으므로 항상 중심에 서 있을 수만은 없다. 그렇지만 그 요동침의 폭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세상은 불안할 것이다. 바다 위 배를 보자. 파도가 세게 몰아치면 배는 좌우로 출렁인다. 그 요동침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불안하다. 이럴 때는 빨리 중심을 잡아야 한다. 파도에 부딪칠수록 배의 쏠림현상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지식인이요 언론인이다. 요즘엔 지식인이나 언론인이란 사람들까지도 온통 파당성에 빠져 편파적 이론구성에 정신이 없는 듯한 인상이다. 참 지식인이라면 이래선 안 된다. 참 언론인이라면 이래선 안 된다.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 약간 반대편 쪽에 힘을 실어 얼른 중심을 잡아주려 힘쓰고, 시계추가 한 쪽으로 치켜 올라가면 얼른 중심 쪽으로 끌어내리되, 또 반대쪽으로 지나치게 치켜올라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어야 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국민여론은 늘 파도처럼 물결치기 마련이다. 이럴 때 중심을 바로 잡아주어야 할 사람들은 극단주의 ‘꼴통’들일 수 없다. 중심의 진리를 찾아 가는 지식인과 언론인의 몫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시중(時中)사상’이란 그 당시의 사정에 알맞게 행하라는 뜻이다.‘시의(時宜)적절’하다고 할 때의 시의와 비슷하다. 선악(善惡)과 정사(正邪)의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분야다. 그러나 선(善)과 정(正)의 범위 안에서 선택의 여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바로 때를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라는 것도 그중의 하나이다. 강지원 변호사
  • [깔깔깔]

    ●나체김밥 사오정 누나가 사오정에게 누드김밥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사오정은 누드김밥을 계속 외우면서 갔다. 가게에 도착해서 생각을 해보니 누나가 무엇을 사오라고 말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식점에 들어간 사오정이 말하길, “아줌마, 나체김밥 주세요”●짐승과 함께 밤을 어느날 모델처럼 예쁜 B양이 값비싼 털가죽 코트를 입고 거리를 지나갔다. 때마침 ‘야생동물을 보호하자’며 시위 중이던 한 동물 애호가가 B양을 붙잡고 물었다. “아가씨, 이 코트를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갔는지 아십니까?” 그러자 B양이 눈을 치켜뜨고 되물었다. “아저씨, 이 털가죽 코트를 사입으려고 제가 얼마나 많은 밤을 짐승들과 지내야 했는지 아세요?”
  • [깔깔깔]

    ●세 남자의 동물소리 동물 울음소리를 잘 내는 세 남자가 모여 재주를 뽐내며 허풍을 떨고 있었다. 첫번째 사람이 말했다. “내가 큰소리로 짖어대면 우편배달부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다고.” 그러자 두번째 사람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꽥꽥거리고 오리 울음소리를 내면 새끼 오리들이 나한테로 몰려든다니깐.” 세번째 사람이 말했다. “쯧쯧, 그까짓 걸 가지고 뭘 그러나. 내가 수탉 울음소리를 내면 아침해가 뜨기 시작하더군.”●아가씨, 애인, 아내의 차이점 아가씨:“아직 안 끝났어요?” 애인:“자기, 벌써 끝났어?” 아내;“여보, 천장 칠 좀 다시 해야겠어.”
  • 웃키는 외국인 웅편대회

    웃키는 외국인 웅편대회

    주한 외국인 남녀 한국어 웅변대회가 3월31일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강당에서 열렸다. 8개국 22명의 연사들은「에트랑제」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서툰 한국말로 청중을 웃기기도 했다. 다음은 이날 청중을 웃긴 걸작「하일라이트」-. 한복에 와이샤쓰 입고 넥타이 맨 차림도 첫번째 여자 연사로 등장한 사람은 태국서 온「짜루완·부냐시티」양. 현재 예원(藝苑)여중에 재학중인「부냐시티」양은 한국에 온지 1년1개월밖에 안된 아가씨답지 않게 우리 말에 익숙했다. 『킴치, 맵다 맵다 하지만 우리 태국 킴치 더 맵습니다. 딴 외국학생들 킴치 못 먹는데 전 아주 아주 잘 먹습니다. 그래서 전 한국 더 좋습니다』하며 김치예찬론으로 자신이 친한파(親韓派)임을 과시.「부냐시티」양은 현재「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방 호수가 10호. 그래 자기는 멋도 모르고「넘버·텐」,「넘버·텐」했더니 하루는 자기 집에 온 태국군인 하나가「넘버·텐」이란 나쁘단 뜻도 갖고 있다고 알려 주더라는 것. 그러면서 『한국「넘버·원」』이라고 치켜 올려 박수를 받기도 했다. 다음 등장연사는 자유중국의 조운화(曺雲和)씨. 장사 관계로 10년 가까이 한국을 드나들었다는데 한국어 실력은 예상 외로 저조.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이따금 「커닝」하며 연설하곤 했는데 끝내 종반에 가선 외워 두었던 원고를 잊어버린듯 말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자 당황하여 갑자기 두 주먹으로 연단을 꽝! 두드리며 외쳤다. 『여러분! 우리 모두 천진합시다!』 알고보니 연제는『우리 모두 전진합시다』 그래도 그 뒷말이 생각 안나 연단 위에 있던 물을 따라 한「컵」들이키고도 말을 잇지 못해 계속 연단을 두드리며『천진! 천진!』만. 관중석에선 폭소가 터지고. 7번째 연사로 등장한 미국인 「마크·하카」씨는 독특한 의상으로 한몫 보았다. 옥색 한복바지에 흰 웃저고리와 푸른 조끼로 영락없는 시골 총각차림인데 저고리속엔 흰「와이샤쓰」에「넥타이」까지 단정히 매고 바지 아래는 윤이 나는 구두를 신었다. 한양(韓洋)절충식. 이어 등장한 연사는 주한 일본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는「도시로·이시구라」씨. 서울에 온지 8개월 밖에 안된다는데 한국사람보다 더 정확하고 유창한 한국말을 해 청중을 놀라게 했다. 『이야기 좀 할까요?』로 말문을 연 「이시구라」씨는 우리말 큰 사전에 나온 선입관의 뜻부터 설명,「쪽바리」,「조센징」으로 서로를 멸시하는 한·일양국의 국민감정이 근거없는 선입관에서 온 것임을 지적, 보다 돈독한 우의를 쌓아야겠다고 외교관다운 연설을 했다. 끝까지『이야기 좀 할까요?』식의 차분한 강연으로 이날의 우수상을 차지. 두번째 아가씨 연사는 평화봉사단으로 1년전 우리나라에 온 「브리나·카이츠」양.『저는 현재 여관에서 살고 있읍니다』로 시작, 파란 눈의 아가씨 눈에 비친 여관생태를 털어 놓아 청중을 웃겼다. 『한국 여관 참 웃기는 곳입니다. 밥먹고 잠자고 돈안내고 도망가는 사람, 밤 12시 지나 담 넘어 도둑처럼 오는 사람, 또 좋지 않은 짓 하러 오는 상상(쌍쌍), 이거 별로 안 좋습니다』 ”체주도·켱주불쿡사·해인사 다 갓고 싶습니다”에 폭소 한창 여관비판으로 열을 올리던「카이츠」양, 화제를 바꾸어『체주도 보고 싶고 광한루, 오작교 가고 싶습니다. 켱주 불쿡사, 합천 해인사 모두 갓고(가고?) 싶습니다』로 한국관광 한바탕. 끝내는 한국사람으로 자기보다 더 영어 잘하는 사람 많아 자기도 빨리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말을 잘해야겠다고. 이 날 영예의 대통령상은 역시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온 인도 출신의「라마·크리슈난」씨. 작달막한 키에 가무잡잡한 얼굴의 이 인도 청년은『한국사람들 1961년 전엔 무엇 했읍니까?』로 시작, 시종 60연대의 경제성장과 건설상을 격찬. 『미스·코리어와 민족문화』를 연제로 들고 나온 미국의「제임즈·미프서드」신부는 거리에 범람하는 외래어 상표와 한국인들의「외국 것이면 덮어놓고 좋다」식의 사고 방식에 일침을 가했다. 『명동 지나가면 어느나란지 잘 모르겠읍니다.「샹젤릴제」「에펠」의 간판 있고「뉴요크」「워싱턴」「에스콰이어」있고 「이스탄불」「삿뽀로」있고, 없는것 없읍니다. 이거 되겠읍니까?』하며 한국고유의 것을 내세우고 찾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 『「미스·코리어」뽑는다 해서 구경캈더니 나온 사람, 천부 미국여자 뿐입니다. 36~22~36 그거 미국여잡니다. 트기입니다. 그런것 한국의 아름다움 아닙니다.「미스·코리어」-한국 아름다움 그대로 가진 여자라야 합니다. 수영복, 「이브닝·드레스」대신 더 아름답고 우아한 한복 입고 「콘테스트」해야 합네다. 그래야 외국사람에게 매력 있읍니다. 또「미니」많이 입는데 무릎 더 내놓았다고 근대화 절대 절대 아닙니다』 ”한국말 5가지 밖에 몰라 상을 타도 기자회견 못해” 『세균전』을 연제로 들고 나온 미국의「그란트·파커」씨 역시 도중에 말문이 막혀 청중을 웃겼다.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지자「파커」씨도 함께 파안대소. 『이거 미안합니다』하곤 다시 히죽. 결국 청중과 연사가 함께 웃기만 하다가 시간이 다 지나자『우리 모두 힘 뭉쳐「콜레라」쳐부십시다!』하곤 하단. 연세대 교환교수로 와있는 서독의「게르하르크·브라이덴슈타인」박사의 연제는『한국말이 쉽지 않습니까?』 한국말 다섯가지만 알면 충분하다는게「브라이덴슈타인」박사의 지론인데 우선 김포(金浦)에 내려「택시」타고 『반도호텔 갑시다』그다음엔『어느나라서 왔다』『식구는 몇이다』『한국하늘 참 좋다』『고맙습니다』면 OK 라는 것. 이런「브로큰·코리언」으로 자신은 눈치껏 살아왔는데 어느날 봉변을 당해 역시 한국 말은 어렵다고. 3·1절날「택시」를 탔는데 운전사 말이『오늘 무슨날인 줄 아느냐?』교수 대답인즉『서독서 왔다』이 동문서답은 「날」을「나라」로 알아들은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맨 마지막으로 가로되『심사위원께 꼭 부탁합니다. 나 상주지 마십시오. 한국말 5가지 밖에 몰라 상타도 기자회견 못합니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12일호 제3권 15호 통권 제 80호]
  • [딸자랑] 엄마없는 집안일 도맡은 은성(恩成)양

    [딸자랑] 엄마없는 집안일 도맡은 은성(恩成)양

    대성(大成)교통 대표이사 권필주(權弼周) 씨(57)의 1남(男) 3녀(女) 중 맏딸인 은성(恩成)양(24)은 올 봄 서울여대(女大) 식품가공학과(食品加工學科)를 졸업한 앳된 아가씨. 조용하고 차분한 인상과 같이 알뜰살뜰 엄마없는 가정생활을 도맡아 하고 있는 보기드물게 착실한 아가씨이다. 『아이가 원래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해서 어떤 일을 맡겨도 서두르거나 실수하는일이 없어요. 대학을 다닐때는 기숙사에 있느라고 집을 떠나 있었지만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하루종일 집에서 식사준비, 집안치우기, 화초가꾸기로 시간을 보내는군요』 따라서 이 가정에서는 응접실의 「커튼」에서부터 마당에 가꾸는 화초, 동생들의 도시락 반찬에 이르기까지 은성양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집안일을 맡아 처리하는 솜씨는 어느 집 주부가 부럽지 않을 정도. 겉으로 보기에는 결코 주부(主婦)가 없는 집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없게 살림살이며 가재도구가 정돈되어 있다. 아버지 권필주씨는 이렇게 대학을 졸업하고도 집안에 들어앉아 아무런 불평없이 살림살이를 돌보는 맏따님의 대견하면서도 한편 안쓰럽기까지 하다. 『대학을 선택할 때는 여자도 뭔가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학문을 택하는게 좋겠다 싶어 식품가공학과를 권했읍니다. 별 불평없이 따라주었고 지금도 외국유학을 권하고 있어요 』 여자도 능력만 있다면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은 시대적인 요구이기도 하다는 것이 아버지 권필주씨의 평소의 주장. 이러한 아빠의 주장을 받들어 은성양은 지금 새로운 배움을 닦으러 떠나기 위한 준비에 또한 분주하다. 『「골프」를 시작한지는 한 3년 됩니다. 은성이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지난 가을에는 몇번 같이 다녔어요. 올 봄부터는 본격적으로 한번 가르칠 생각입니다』 「골프」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몇번인가 상을 타기도 했고 요즈음은 상품으로 곧잘 옷감을 타오기도 해서 따님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세 딸들이 순번을 정해놓고 차례를 기다릴 정도. 『은성이는 어릴때에도 기특한 데가 있었어요. 6·25때니까 4살 때였어요 제가 미처 피난을 못가 이리저리 피해다녔읍니다. 평소에는 아빠 아빠 귀찮을 정도로 부르고 쫓아 다녔는데 괴뢰군이 집 수색을 할때는 입을 다물고 일절 말을 안하더군요』 아버지는 지금도 그때의 은성양을 생각하면 신통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 때 부터 은성양은 아빠의 입장을 이해하고 도와왔던것이 아닌가 하고 아빠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은성양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와 음악감상. 고등학교때는 미술 성적이 가장 뛰어나서 한때는 그 쪽으로 전공을 택할까 고려했을 정도라는 것. 국민학교때부터 동생들과 함께 익힌 「피아노」솜씨도 수준 이상이라는 아빠의 자랑. 그러나 은성양 자신은 『단지 여러가지를 조금씩 건드리다 말았을 뿐이에요』- 겸손해 한다. 좋아하는 곡은 「드비시」의 초기 작품들. 우울할때는 「모짜르트」의 소품(小品)을 연주하고. [선데이서울 70년 4월 12일호 제3권 15호 통권 제 80호]
  • 미스 선경직물(鮮京織物) 홍혜연(洪惠蓮)양-5분 데이트(77)

    미스 선경직물(鮮京織物) 홍혜연(洪惠蓮)양-5분 데이트(77)

    「미스·선경직물(鮮京織物) 」 홍혜연(洪惠蓮)양은 올해 22세의 「영·레이디」 . 동그스름한 얼굴, 둥근 눈이 귀염성 스럽지만 꼭 다문 두 입술은 만만치 않은 아가씨임을 느끼게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란 본토박이 서울 아가씨. 딸만 넷이 있는 딸 부잣집의 맏딸. 딸이 많은 집의 딸들이 대개 그렇듯이 옷차림새며 화장 솜씨가 보통을 훨씬 넘는다. 선경직물에 근무한지는 올해로 3년째. 덕성여고(德成女高)를 졸업한 직후부터 죽 이 직장에 근무해 왔고 지금은 사장실의 비서. 『울적할 때는 음악을 자주 들어요. 주로 「팝·송」을 듣지만 때로는 웅장한 고전음악이 듣고 싶어질 때도 있더군요. 요즈음은… 』 이렇게 예쁘기만한 아가씨도 때로는 울적해지기도 하는가 보다. 『기분이 좋을때, 여가가 있을때는 그림을 그립니다. 수채화도 그렸고 유화(油畵) 까지도 그려봤어요. 한때는 미술과(美術科) 계통으로…』 얘기중 나중의 것은 쓰지 말란다. 진학을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겠는데…. 한편 관광엽서를 모으는 취미도 가지고 있어 국내외 것을 가리지 않고 관광엽서를 꽤 가지고 있다고. 종교는 「말일성도(末日聖徒) 예수·그리스도」교. 흔히 「모르몬」교라고 이르는 종교이며 우리나라에 전파된지는 1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또한 3위(位) 2체(體)1영설(靈說)을 신봉하는 종교라고도 일러준다. 「보이·프렌드」라도- 라는 질문에는 『아직 없어요. 앞으로 생기겠죠』 - 분명하게, 또박또박 대답한다. 감명깊게 본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선데이서울 70년 4월 12일호 제3권 15호 통권 제 80호]
  • 이혼(離婚)당한 성전환(性轉換) 신부(新婦)의 쇼킹 수기(手記)

    이혼(離婚)당한 성전환(性轉換) 신부(新婦)의 쇼킹 수기(手記)

    24세에 성전환(性轉換)수술을 받고는 완전한 여성으로 재생했다. 풍만한 가슴, 대리석 같은 피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장 여성적인 부분. 그녀는 어떤 여자보다도 더 여성적이었다. 수많은 사교계 남성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깊은 사랑에 빠졌으나 우리들은 서로 깊이 사랑했다. 그는 이상한, 동성애적(同性愛的)인데라곤 없는 사람, 극히 정상적이며 건강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내 쪽에서도 보통 계집애나 같은 마음이 되었었다. 말하자면 사랑에 빠진 다른 여자들과 똑 같은 감정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던 일 같은 것이 그랬다. 사실은 여자애가 아니라는 것을 그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안다는 것은 사랑에 빠진 젊은 남자에게 있어서 무서운 「쇼크」임에 틀림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도 없게 돼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두사람은 동성애의 관계를 맺을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쇼크」였었다. 당시의 내 상태에 대하여, 그러니까 내 자신이 참으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그 때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쇼단에 입단, 춤도 배우고 마음속에서 나는 이미 여자였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남성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부자연한 관계를 갖는 수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몸이었던 것이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나는 남성이라고 쓰여있는 「패스포트」를 갖고 「프랑스」에 갔다. 그런데 우습게도 「프랑스」 사람들은 사진과 얼굴을 보고 『마드모아젤』이라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무렵 「카르세르·쇼」단에 들어가고 싶거든 「히치·하이크」로 「파리」에 가서 그 유명한 남성만의 「쇼」단(團)을 이끌고 있는 남성을 만나 보라고 일러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도 처음에는 내가 여자애인 줄 알고 주저 주저했지만 내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밝히자 곧 나를 채용해주었다. 이리하여 나는 춤을 배우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하루 20「파운드」 씩 벌게 되었고 나의 인생을 바꿔 줄 2천「파운드」의 저금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유명한 영국인 외과의(外科醫)에게 가서 수술을 받으려 했었다. 그 사람은 나같은 사람의 수술을 수많이 해온 사람이었다. 그 외과의는 이렇게 말했다. 『왜 당신같이 이쁜 아가씨가 성전환(性轉煥) 같은 걸 하려들게?』 『나는 여자가 아니란 말씀이에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의사는 깜짝 놀라서 몸을 보여 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마고 해서 나는 몸을 검사받았는데 진찰을 끝낸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술비 마련에 4년고생 『당신은 정말이지 진기한 「케이스」요. 나도 이제껏 당신같은 사람은 만나보질 못했소. 내가 만일 지금보다 젊었다면 지금이라도 곧 수술을 해 주었을텐데- 』 「카르셀·쇼」단에 4년 있은 뒤, 나는 「밀라노」로 가서 또 성전환에 필요한 돈을 저축했다. 이런 종류의 수술이 뛰어난 병원은 세계에 둘 있어서 그중 하나가 「카사블랑카」에 있다. 1960년 5월 나는 「카사블랑카」로 갔다. 외과의는 나를 진찰하더니 『수술은 문제 없구먼』 하고 말했다. 수술은 6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 뒤 2개월이나 입원해서 요양해야만 되도록 돼었었지만 돈이 없어져 버렸다. 친구 권고로 모델계 데뷔 『퇴원해야겠어요』 의사에게 말했더니 『그건 안돼, 돈 같은 것은 문제가 안돼요』 외과의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퇴원해 버렸다. 덕택에 그 뒤 경과가 별로 좋지를 못했다. 후유증이 그후 18개월이나 계속되었고 통증이 심해서 해골처럼 말라 버렸다. 그러나 나중에는 씻은듯이 건강해 졌다. 차분함과 「엘레강스」는 내 몸에 밴 요건(要件)이 돼 있었다. 아마도 춤을 추었던 덕택이 아닌가 싶다. 내 친구들은 「모델」이 되면 적격이라고 권해 주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곤 했을 정도였으니까. 『전에 「모델」노릇을 한 적이 있나요?』 나는 오래 오래 심사숙고 한 끝에 한번 「모델」이 돼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소개업소에 찾아가 보았더니 다행하게도 그 자리에서 얘기가 결정되었다, 그뒤 두주일도 채 못되어 「모델」로서 화려하게 「데뷔」하는 몸이 되었다. 나는 「사라·처칠」과 우연히 알게되어 무척 친한 친구 사이가 돼 있었다. 「사라·처칠」과 알게되어 그녀는 이를테면 나에게는 선생님인 셈이었다. 영국 사교계에 내가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그 준비를 해 준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는 「프랑스」의 「나이트·클럽」 사교계밖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한창 잘 팔리는 「모델」로서 유명한 사교계 인사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연애를 할 수도 있었고 진짜 「보이·프렌드」를 가질 수도 있었다. 나는 결혼도 하고 멋진 남편과 함께 살고 싶다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린애를 양자로 얻어 올 수도 있으려니 싶어 여러 남자와 「데이트」를 거듭했다. 다행히도 수술이 잘 되었기 때문에 나는 여성으로서 성교섭을 가질 수가 있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실행했다. 하지만 내가 이들 「데이트」 상대들에게 수술한 몸이라는 것을 감춘것은 아니었다. 사실을 밝힌 뒤에도 나의 「보이·프렌드」들은 대체로 나를 순수하게 여인으로서 받아들여주는 것이었다. <계 속> [선데이서울 70년 4월 12일호 제3권 15호 통권 제 80호]
  • 미스 조흥은행 김명희(金明姬)양- 5분 데이트(76)

    미스 조흥은행 김명희(金明姬)양- 5분 데이트(76)

    조용 조용한 말씨, 사근사근한 태도의 김명희(金明姬)양은 방년 24세의 앳된 아가씨. 은행에서의 창구 근무는 첫째도 친절, 둘째도 친절이어야 한다는 사규를 충실히 이행하는 아가씨로 은행경력은 5년, 지금은 조흥은행 본점 영업부 창구계에 근무하고 있다. 전남(全南) 목포(木浦) 정명여고(貞明女高) 출신. 고향도 목포란다. 작고 가냘프고 연약해서 잘못 다루면 곧 다쳐버릴 것만 같아 걱정스러운 아가씨. 누구든지 보호해 주고 싶어 지는 보호 본능을 유발시키는 「타이프」의 아가씨다.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 김영진(金英振)씨의 4남 5녀 중 셋째 딸, 형제 순위로는 일곱째가 된다고 . 따라서 언니 둘, 오빠 셋이 결혼한 지금 차례는 바로 김양. 「스테디」한 「보이 ·프렌드」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대답한다. 『있어요』- 올 가을쯤 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일러준다. 『성격은 솔직한 사람, 씩씩한 사람이 좋아요. 경제력은 저 하나 고생시키지 않을 정도면 되고요』. 아마 바로 그런 이상형의 남성을 만난 행운을 김양은 가졌나 보다. 결혼 준비는- 『특별히 준비하는 것은 없고요. 단지 마음의 준비를 할 뿐이죠』 결혼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양재와 요리를 배우고 싶지만 시간의 여유가 없어 안타까와 한다. 일단 결혼을 한 뒤에는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다며 얼굴을 붉힌다. 『가벼운 「클래식」을 즐겨 들어요. 경음악도 좋아하는데 특히 「짐·리브스」를 즐겨 듣죠』. 독서도 무척 즐기는 아가씨. 최근에 읽은 책 중 감명 깊은 것으로는 『영광에의 탈출』을 든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5일호 제3권 14호 통권 제 79호]
  • 등단 6년차 30대 두 작가의 연작소설집

    등단 6년차 30대 남성 작가 두명이 나란히 연작소설집을 냈다.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장편 ‘서울특별시’로 ‘오늘의작가상’(2003)을 수상한 김종은(32)과 같은 해 계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으로 문단에 나온 김종호(36)가 그들이다. 등단 햇수도 같고, 이름도 비슷(?)하지만 소설집 제목에서 느껴지는 차이만큼이나 두 작가가 보여주는 작품 세계는 확연히 다르다. ■ 첫. 사. 랑. 잊지못할 기억들 14편 김종은의 ‘첫사랑’(민음사)은 누구나 가슴 한편에 아릿하게 간직한 비밀스런 추억의 언저리를 건드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줄기차게 다뤄져온 진부한 주제지만 전작들에서 경쾌한 감수성을 인정받은 작가는 이를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풀어낸다. 소설은 첫사랑의 실체를 다양한 선율과 리듬으로 변주해낸 1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작가의 이력을 빼닮은 1974년생 남자 ‘정은’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탓에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도 읽힌다. “첫사랑 없어요?첫사랑 얘기 좀 해보라니까요.” 친구의 부탁으로 소개팅 자리에 대신 나간 ‘정은’은 상대 여자의 갑작스런 질문에 불현듯 시간을 거슬러 첫사랑에 얽힌 옛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 기억들속에는 교회 예배당에서 정은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소녀가 있고, 정은의 눈에 천사로만 보였던 술집 아가씨도 있다. 첫사랑의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가 있을까. 어릴 적 애써 모았던 딱지, 구슬같은 사물이나 “연애라도 하는 듯 즐거웠던” 소설도 정은에겐 잊지못할 첫사랑의 기억이다. 그리고 자신의 첫사랑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첫사랑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임현정의 ‘첫사랑’, 이은하의 ‘미소를 띠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등 곳곳에 녹아있는 대중문화 코드가 타임머신마냥 독자를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려놓는 것도 소설의 또 다른 재미다.9500원. ■ 정. 체. 성. ‘나’ 찾아 떠나는 글쓰기 김종호의 ‘산해경草’(랜덤하우스)를 읽기 위해선 독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서사의 틀을 깨는 자유분방한 텍스트 구성, 과감한 문법해체, 난해한 형이상학적 사변 등이 책장을 쉬 넘기지 못하게 한다. 소설의 서두는 글을 쓰는 화자 ‘나’의 얘기로 시작한다.‘나’는 ‘너-그녀’가 떠나가자 상실감을 메우려 글을 쓴다. 글쓰기를 통해 그녀와 다시 만날 방법을 모색하지만 글을 쓰는 도중에 ‘나’는 애벌레에서 고치로, 그리고 나비로 변모하는 환각의 세계를 경험한다. 소설에서 명확한 것은 없다.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나’의 실체도 모호하다. 작가가 강조한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말해주듯 다만 쓰는 행위를 하는 ‘나’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주체적 행위자로 존재한다. 평론가 김인호의 말을 빌리면 김종호는 “문학이 세계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서 문학 자체의 문제에만 파고드는”작가다. 말(언어)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꿈과 환상을 다룬 등단작 ‘섞어가다, 말’, 욕망과 무의식이 뒤엉킨 사유의 세계에 천착한 첫 소설집 ‘검은 소설이 보내다’에 이어 작가는 이번 연작소설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굳건히 지켜가고 있다.98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깔깔깔]

    ●사이즈가? 어느 남편이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내의 생일선물로 팬티 세트를 사주기로 마음먹고 백화점에 들어갔다. “아가씨. 부인용 팬티 하나 주세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죠?” “사이즈라…. 그건 잘 모르겠고, 하여튼 24인치 텔레비전 앞을 지나갈 때면 화면이 안보이는데요.”●경쟁사회 나란히 붙은 문구점 세곳에서 경쟁이 붙었다. 왼쪽 끝에 있는 문구점에서 이런 간판을 내걸었다. “폭탄 세일! 왕창 세일!” 그러자 오른쪽 끝에 있는 문구점도 큰 간판을 내다 걸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은 없다. 핵폭탄 세일! 와장창 세일!” 가운데 문구점 주인도 이에 질세라 더 큰 간판을 갖고 나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입구!”
  • [딸자랑] 삼척탄좌 이사 조경서(趙慶瑞)씨 맏딸 정순(正順)양

    [딸자랑] 삼척탄좌 이사 조경서(趙慶瑞)씨 맏딸 정순(正順)양

    삼척탄좌(三陟炭座) 이사(理事)인 조경서(趙慶瑞)(51)씨의 2남 3녀중 맏딸인 정순(正順)양은 올봄 숙명여대(淑明女大)에 입학원 풋나기 여대생. 꿈많은 18세의 아가씨다. 대학에서의 전공은 성악. 유치원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학교 합창단으로 노래를 했다. 전공으로 성악을 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아빠의 이야기. 소질을 살려 예능계통을 택했지만 대학입학 예비고사에도 당당히 「패스」했다고 아빠는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딸 아이가 셋이나 있지만 역시 아버지인 나에게는 맏딸이 가장 소중하군요. 어렸을 때부터 아이가 명랑하고 쾌할해서 아빠인 나를 즐겁게 해줬어요』 정순(正順)양의 위로는 오빠만이 둘. 그래서 딸을 기다리던 아빠에게 정순(正順)양은 출생때부터 환영받는 존재였다고. 이렇게 온 집안의 환호속에 태어난 정순(正順)양은 아빠의 사랑밑에 밝고 환하게 자라왔다. 『아버지는 노래에 대한 이해가 퍽 깊으세요. 저희 형제들에게도 국민학교 때부터 「피아노 · 레슨」을 받게 하시고 또 우리가 공부에 필요한 「레코드」라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꼭 구해다 주셔요』 아버지 조경서(趙慶瑞)씨가 음악에 취미를 붙이게 된 것은 남서울 「로터리 · 클럽」의 모임에서 여흥으로 다같이 노래를 부르게되면서부터. 그 뒤부터는 KBS합창단의 후원회장, 서울 합창단의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음악과 가까와 졌다고. 『정순(正順)이는 부산 피난시절에 태어났어요. 정순(正順)이가 태어날 당시에는 피난생활이라 살림이 넉넉치 못했어요. 그래서 그 때 고생시킨 생각을 하면 지금도 측은해요. 더우기 4살이 되는 해에는 열병을 앓아서 한달넘어 입원을 시켜야 했었는데 그때 어린 몸에 한번에 5, 6개의 주사를 꽂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아버지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듯이 이마를 찡그린다. 이렇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1년에 2, 3차 해외여행을 다닌다. 그럴때면 아버지는 빼놓지 않고 정순(正順)양의 옷가지를 사다 준단다. 언제나 「사이즈」와 모양 색깔이 꼭 정순(正順)양의 마음에 드는 것으로 . 『정말 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도 내 마음을 잘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꼭 제가 원하던 것을 골라다 주는 것이 이상할 정도예요』 이렇게 딸을 위해주고 자상스러운 아버지이지만 정순(正順)양은 불평이 없을 수 없다. 『아버지는 좀 구식이에요. 글쎄 입학할 때 입은 「스커트」가 너무 짧다시면서 그럴테면 아예 「스커트」를 벗고 다녀라 그러시지 않아요. 「팬털룬」도 속곳같다고 입지 말라시는 거예요 』 그러나 아버지는 『너무 지나치게 짧은 것만을 피하라』고 했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정순(正順)양의 취미는 「팝· 송」의 「디스크」모으기. 특히 「톰· 존스」의 노래를 좋아해서 그의 노래라면 빠짐없이 모으고 있다고. 아버지는 정순(正順)양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그가 원하는 외국유학까지를 마친 뒤 제 「스타일」을 가진 하나의 성악가(聲樂家)로 성장 해 주기를 바란다고. 그러나 옆에서 정순(正順)양은 『아버지 나 공부하기 싫어요』 유쾌한 말괄량이다. [선데이서울 70년 3월 29일호 제3권 13호 통권 제 78호]
  •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3월 17일 밤 11시30분께. 서울 강변3로서 울린 3발의 총성은 죽은 정인숙(鄭仁淑)양의 신원이 밝혀짐에 따라 뜻밖의 파문을 몰고 왔다. 저명인사들과의 접촉이 잦았으며 아버지의 이름이 밝혀지지않은 3살짜리 어린애를 가진 처녀 엄마라고해서 이러쿵 저러쿵 파다한 후문을 일으킨 것. 타고 난 미모 하나로 밤의 요화로 군림, 각계 실력자들과 어지러운 관계를 가졌던 정인숙(鄭仁淑)양. 45구경 권총탄환 2개로 26세의 나이로 비명에 숨져야했던 그녀의 「짧고도 긴 생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은 가족 ·친구들의 말을 바탕으로 한 「정본(正本) 정인숙전(鄭仁淑)傳).」 옛 이름은 정금지(鄭金枝). 해방되던 해인 1945년 2월 13일 대구시 남산동 681의 2에서 전 대구부시장을 지낸 정도환(鄭道換)씨(65)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인숙(仁淑)양의 아버지 정(鄭)씨는 12살 때 일가 중 후손이 없었던 정남수(鄭南洙)씨의 양자로 입양했다. 그러나 입양한 해에 양부 정남수씨가 돌아가자 정(鄭)씨는 호주상속을 받아 바로 그해 11월 인숙양의 어머니인 전(全)씨(61)와 결혼했다. 당시 정씨가 살던 곳은 경북(慶北) 김천(金泉)군 (금릉군) 개영(開寧)면. 정(鄭)씨 일가는 해방되기 전 해까지 줄곧 이 곳에서 살며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 이 4형제 중 4남이 바로 인숙양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종욱(宗旭)씨다. 생전 인숙양이 주장하던 것처럼 「뼈대있는 집안」은 아니었다는 게 김천(金泉)일대 주민들의 말이다. 정씨는 행정관리로 출발, 대구(大邱)부시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숙(仁淑)양의 출생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아들만 넷을 둔 정씨의 부인은 어떻게든 딸을 보고 싶어 절에 다니며 『딸자식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렸다는 것. 과연 불공의 효험이 있었던지 45년 정씨의 아내 전씨는 딸 자식을 낳았다. 그것도 인숙양 하나가 아닌 딸 쌍동이였다. 그래서 바라던 딸을 한꺼번에 둘이나 얻게 되자 「금이야 옥이야」기르며 이름조차 금지(金枝)·옥지(玉枝)로 지어주었다. 아들 4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금지·옥지 두 쌍동이는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났다. 그러나 생후 1년 반만에 옥지는 죽고 금지만 살아 남게 되었다. 옥지가 죽은 다음해 정씨는 자식을 또 보았으나 이번 역시 아들. 그래서 금지의 외동딸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고 그녀를 아끼는 일가의 귀여움을 독차지. 특히 어머니 전씨가 금지를 위하는 것은 딴 가족들보다 더 심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난 인숙(仁淑)양이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인숙(仁淑)양이 대구(大邱)서 국민학교 다닐 시절 인숙(仁淑)양에게 몸종이랄 수 있는 여자아이하나를 따로 두었다. 학교 갈때 따라가는가 하면 세수할때, 밥먹을때 등 노상 인숙(仁淑)양의 옆에 붙어 잔심부름과 시중을 들게 했다. 인숙(仁淑)의 성격은 더욱 오만해 졌다. 인숙(仁淑)양의 윗 오빠 네 사람은 이런 인숙(仁淑)양을 가리켜 『어머니가 너무 쟤만 위해 주니까 계집애가 버릇이 나빠진다』며 불평, 이따금 여동생 인숙(仁淑)에게 기합을 주었으나 그때마다 인숙(仁淑)양을 감싸고 도는 어머니 때문에 인숙(仁淑)양의 성격을 끝내 뜯어 고치지 못했다는 둘째오빠 종구(宗九)씨의 말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대구(大邱) S여중에 진학했다. 이 때 아버지 정(鄭)씨는 경북(慶北)도청의 고급 관리로 집안형편이 넉넉할 때였다. 인숙(仁淑)양의 오만한 성격은 더욱 심해지고 이에 따라 오빠들과의 의는 점점 나빠졌다. 호랑이같은 오빠 4명이 인숙(仁淑)양이 조금만 늦게 귀가해도 때리고 꾸지람하기 일쑤. 이래서 정(鄭)씨집은 오만한 인숙(仁淑)양의 기를 꺾으려는 오빠 4명과 인숙(仁淑)을 편들어 주는 어머니 전(全)씨와 인숙의 두 패로 갈리게까지 되었다. 대구 S여고시절 인숙(仁淑)양의 학교성적은 중 이하. 그러나 영어실력만은 대단해 이때부터 이미 외국손님이 오면 안내역을 맡곤 했다. 인숙(仁淑)양이 영어에 능하게 된 데는 오빠들의 도움이 컸다. 현재 일본「도꾜」 의 「아까사끼」서 전기 부속품상을 하고 있는 큰오빠 종원(宗源)씨나 H무역의 대표로 현재 「인도네시아」에 있는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모두 영어라면 귀신. 이런 오빠 밑에서 익힌 인숙(仁淑)양의 영어실력이 뒷날 요정 「선운각」 에서 외국인들에게 술을 따르며 쓰이게 될 줄이야. S여고에 남은 인숙(仁淑)양의 학적부를 들추어보면 『명랑하고 성실하나 안일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되어있다. 인숙(仁淑)양이 S여중 3학년에 올라갔을 때 4·19가 터졌다. 대구 부시장으로 있던 아버지 정(鄭)씨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가세는 기울기 시작. 이 때무터 인숙(仁淑)양의 집 살림은 어머니 전(全)씨가 계 등으로 꾸려 나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은 인숙(仁淑)양에게도 심한 충격을 주었다. 낭비벽 심하고 화려했던 인숙(仁淑)양의 생활은 집안 형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살고 있던 대구(大邱) 남산(南山)동 집을 팔고 삼덕(三德)동으로 이사, 집 규모를 줄여야 하는 등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의 성격도 비뚤어지기 시작. 62년 S여고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E大 영문과에 진학하겠다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서울엔 인숙(仁淑)양의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S 무역에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응시했던 E大 영문과 입시에서 인숙(仁淑)양은 깨끗이 낙방. 세째 오빠 종인(宗仁)씨가 주는 돈으로 M초급대학에 입학했으나 등록금만 내고 학교에는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실직, E大 낙방 등의 겹친 불운은 콧대 센 아가씨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을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집안의 외동딸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온 인숙(仁淑)양이 두차례에 겹친 좌절끝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곤 태어날 때부터의 타고난 미모뿐. 콧대 꺾인 방년 19세의 아가씨 인숙(仁淑)양은 마지막 남은 재산인 미모를 마음껏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요정의 「호스테스」란 생각지도 못했고 『나 정도의 얼굴이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지 않느냐?』하는것. 그래서 인숙(仁淑)양은 등록한 M여대엔 나가지도 않고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기웃거렸다. 이 때 만난 사람이 「시나리오」작가인 장(張) 모씨. 당시 장(張)씨는 KBS에 『태양은 늙지 않는다』란 연속극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인숙(仁淑)양은 친구들을 만나면 자주 『우리 애인은 유명한 작가야』하며 뽐냈다. 張씨 자신도 張씨가 인숙(仁淑)양의 첫 애인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콧대꺾였던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은 유명작가를 애인으로 둠으로써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듯 했다는게 그녀 친구들의 이야기다. 당시 인숙(仁淑)양은 친구를 만날 때마다 張씨를 자랑했다고. 인숙(仁淑)양은 1년남짓 장(張)씨와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에겐 『장(張)씨와 약혼한 사이며 곧 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비치기도했다. 장(張)씨와 동거할 때도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사치벽은 버리지 못했다. 이래서 이따금 장(張)씨와 말다툼을 하고 장(張)씨 집을 뛰쳐나온 인숙(仁淑)양은 친구들 집을 찾아 하룻밤씩 자고 가기도. 그러면서 옛날 외동딸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것을 잊지 못해 어떻게든 상처입은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알게 된 것이 지금 신촌(新村)모처에서 비밀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K「마담」. K 「마담」은 한때 배우 윤(尹)모씨와 동거, 「패션·모델」생활도 한적이 있는 멋장이 「마담」으로 인숙(仁淑)양은 K 「마담」의 소개로 「디자이너」조(趙)모씨를 통해 「패션·모델」로 몇차례 나서기도 했다. 인숙(仁淑)양과 K 「마담」의 관계는 그뒤 줄곧 계속되어 K 「마담」이 경영하는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에 인숙(仁淑)양은 1급 「호스테스」로 나갔었다. 인숙(仁淑)양은 몇차례 「패션·모델」로 나가는 한편 동거하던 장(張)씨의 소개로 S영화사와 접촉이 되어 2,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신촌(新村), 수유리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던 인숙(仁淑)양과 장(張)씨의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허영과 장(張)씨의 사업실패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원인이 되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동거 1년만에 끝장을 보고 말았다. 그러나 장(張)씨가 인숙(仁淑)양으로선 첫 남자였던 만큼 장(張)씨를 향한 인숙(仁淑)양의 마음은 어지간히 강했었다. 피살되기 한달전 인숙(仁淑)양을 만난 한 친구는 『여러가지로 골치 아픈 일이 많아 못 살겠다』면서 『그래도 장(張)씨가 제일 잊혀지지 않고 그립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장(張)씨와 헤어진 인숙(仁淑)양이 다음에 발 디딘 곳이 바로 요정 선운각(仙雲閣). 타고 난 미모와 영어실력이 그녀를 선운각(仙雲閣)의 1급 「호스테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선운각(仙雲閣)에서 인숙(仁淑)양이 만난 사람이 바로 A씨. 미남이자 이름이 알려져 있는 A씨라 인숙(仁淑)양의 허영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A씨를 만나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은 저명 인사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 밤의 꽃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A씨와 인숙(仁淑)양의 관계는 석달남짓 계속되었다는게 당시 인숙(仁淑)양 동료들의 이야기다. A씨를 알게 될 때 인숙(仁淑)양을 가운데 두고 A씨와 역시 A씨만한 실력자 B씨가 한달 남짓 열띤 각축전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다. 그 뒤 인숙(仁淑)양은 선운각(仙雲閣)을 떠나 활동무대를 비밀요정으로 옮겼다. 전부터 아는 K 「마담」이 경영해 오던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을 주무대로 2류급 여배우들을 잘 불러내는 것으로 소문난 S 「마담」집등에 단골로 불려 다녔다. 그러나 비밀요정 「호스테스」로 나가는 동안에도 인숙(仁淑)양은 콧대가 높아 반드시 「마담」들에게 그 날 참석자들을 알아보고 웬만한 이름이 아니면 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밤이면 이름있는 사람들과 접하는 인숙(仁淑)양은 낮이면 필동2가에 자리잡은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지냈다. 어렸을 적부터 인숙(仁淑)양 편이었던 어머니 전(全)씨는 남편 정(鄭)씨가 일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도 남편집에서 살지 않고 인숙(仁淑)양과 단둘이 살며 딸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필동에서 살때 인숙(仁淑)양은 아들(3)을 낳았다. 인숙(仁淑)양의 가족들은 그 아이가 인숙(仁淑)양의 아이가 아니고 인숙(仁淑) 양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①가족 주장대로 배다른 동생이며 대구(大邱)서 낳아 서울로 데려다 길렀다면 최소한 5살은 되었어야 하는데 3살이라는 점 ②배 다른 동생이라면 미국 갈때 굳이 인숙(仁淑) 양이 아기를 함께 데리고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등을 보면 인숙(仁淑) 양의 아이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럼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시체해부에서도 드러났듯이 인숙(仁淑) 양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바 있다. 더우기 비밀요정가에선 「호스테스」가 아이를 낳는 것은 「터부」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숙(仁淑)양이 아기를 낳았을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 충분한 이유란 사후보장. 처녀(?)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할 아기를 낳을땐 어딘가 굳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란건 틀림없는 일이다. 워낙 남자관계가 복잡한 인숙(仁淑)양이라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인숙(仁淑)양 자신만이 알 일이지만 항간에선 일본에서 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갑(甲)씨, 을(乙)씨, 병(丙)씨등 알만한 이름들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인숙(仁淑)양이 아이를 낳은 후부턴 『내 말 한마디면 안되는 일 없다』혹은 『 서교동집도 아기 아빠가 사준 거야』등의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세사람중 한사람일것이라는 소문. 68년 12월 30일자로 발급된 수속서류 없는 회수여권 MA 10647이 발급된 경위만 하더라고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선 어림도 없는 일이란 것. 어쨌든 아기를 낳은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전보다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우선 본거지인 비밀요정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68년 8월엔 싯가 7백만원이 넘는 단층 석조주택을 사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평소 친하던 K 「마담」 이외엔 좀체로 그녀를 만날 수 가 없었다. 비밀요정 대신 「타워 · 호텔」, 「사보이 · 호텔」, 반도 ·조선 「아케이드」에 자주 나타났다. 69년 봄 일본에 다녀온 인숙(仁淑)양은 그해 5월에 K 「마담」의 소개로 한남동 조(趙)모씨로 부터 문제의 「코로나」를 사들였다. 이 때 부터 인숙(仁淑)양은 다시 남성편력을 시작했다. 이번엔 전과는 달리 주로 돈 잘쓰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재일교포인 갑(甲)씨 등 적지않은 사람들이 인숙(仁淑)양을 거쳐 갔다. 아마도 『 아이를 낳고 보니 무엇보다 돈 걱정이 앞섰던것 같다』는게 인숙(仁淑)양을 아는 친구와 「마담」족의 중론이다. 지난 69년 10월 10일 인숙(仁淑)양은 아기를 데리고 미국행을 했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친구에게 밝히기론 『 잠시 골치아픈 일이 있어 외국에 나갔다 와야겠다』는 것. 인숙(仁淑)양은 미국서 석달 있다가 되돌아 왔다. 1월21일 다시 돌아온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의문투성이뿐. 『 곧 미국에 갈테니 차를 팔아야 겠다』는가 하면 『 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하기도 했고 한때는 『 이젠 미국 안갈래』하기도 했다. 사건당일만 해도 자동차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6기통 짜리 흥정을 했다는데 미국에 갈 생각이었다면 한국에서 차를 바꿀 이유가 없다. 이래서 그녀의 주변에서 『 미국에 가 있으라』는 「그이」의 요구와 이를 선뜻 응낙치 않은 인숙(仁淑)양의 태도에 이번 사건의 수수께끼가 숨어 있지않나 보기도 했다. 어쨌든 3월 17일밤 11시 20분 한강변에 울린 3발의 총성으로 한때의 요화(妖花)정인숙(鄭仁淑)양은 비명에 갔다. 아빠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홀로 남겨 놓은채. [선데이서울 70년 3월 29일호 제3권 13호 통권 제 78호]
  • 미스 재일교포 변인자(卞仁子)양- 5분 데이트(75)

    미스 재일교포 변인자(卞仁子)양- 5분 데이트(75)

    동그랗고 귀염성스러운 얼굴의 아가씨 변인자(卞仁子)양은 올해 18세의 「미스·재일교포(在日僑胞) 」. 3월 8일 일본 「도꾜」에서 열린 결선 「 콘테스트」에서 일본 전역에서 뽑힌 15명의 교포 아가씨와 겨루어 당당히 재일(在日) 「미스 ·코리어 」로 선발되었다. 인자(仁子)양의 언니 신자(信子)씨 또한 64년 「도꾜」「올림픽」의 재일(在日) 「미스 ·코리어 」로 당선된바 있는 미인(美人)가족. 「 오사까」민단(民團) 의장(議長)인 경북 (慶北) 선산(善山) 태생의 아버지 변선춘(卞先春)씨(59)의 5남매중 막내딸. 어머니도 민단부인회(民團婦人會)의 간부직을 맡고 있다. 「 오사까」태생. 「 오사까」매화여자대학(梅花女子大學) 영문과 2년에 재학중.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의 힘을 입어 변(卞)양은 드물게도 한국말을 잘 하는 재일교포(在日僑胞) 「하이틴 」. 취미는 고전무용과 유화(油畵). 한때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국 고전무용학원에서 한국무용에 심취되기도 했다고. 또한 변(卞)양은 재일교포(在日僑胞) 대표로 오는 4월 서울에서 열릴 「미스 ·코리어 」선발대회에 참가할 예정. 「 샤프론」으로는 이미 언니 신자(信子)씨를 정해 놓고 꿈에 그리던 모국과의 상면에 가슴 부풀어 있다. 『결혼은 꼭 한국에서 어머니가 하신것처럼 불우한 교포들을 돕는 사업을 하고 싶어요』라고 앞날의 포부를 펼치는 야무진 아가씨이기도. 그리고 또 언젠가는 고국에 나가 살고 싶다고도 말한다. 『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김치를 담가 먹어서 그런지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해요. 김치외에는 불고기와 된장국을 아주 좋아합니다』식성도 순수한 한국인. 이제는 어머니에게서 배워 웬만한 한국요리는 대개 만들 수있다고. <「 오사까」에서 이귀열(李龜烈) 이중식(李仲植) 특파원> [선데이서울 70년 3월 29일호 제3권 13호 통권 제 78호]
  • [딸자랑] 한국생산성본부 이사장 이은복(李恩馥)씨 맏딸 명원(明遠)양

    [딸자랑] 한국생산성본부 이사장 이은복(李恩馥)씨 맏딸 명원(明遠)양

    한국생산성본부 이사장 이은복씨(李恩馥·49)의 6남매중 맏딸 명원양(明遠·25)은 아빠의 취미인 미술을 전공한 상냥하고 싹싹한 인상의 아가씨. 미술에 관해서는 「프로」급의 안목을 지닌 아버지에게는 취미가 같은 따님과의 대화가 항상 즐겁기만 하다. 『집의 실내장식을 바꾸거나 옷가지를 장만할 때라도 우리는 서로 의논을 합니다. 가끔 서로 의견이 대립될 때가 있어요. 나는 내 나름의 주장이 있고 딸애는 또 그나름의 안목이 있으니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아요. 그러다가 결국은 누군가가 상대방의 의견에 굴복하고 말죠』 그러나 논쟁을 승리로 이끄는 편은 항상 아버지. 상냥하고 양보심 많은 따님의 배려 때문이다. 미술이 취미인 아버지는 일요화가회(日曜畵家會) 회원.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거실과 현관을 장식할 정도의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다. 따님 명원(明遠)양은 69년 홍익대학 공예과(工藝科)를 졸업,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한 아가씨이다. 『사실 미술은 내가 하려고 했는데 워낙 완고한 집에서 태어나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그런데 마침 딸애가 미술에 소질도 있는 것 같고 또 전공을 그 쪽으로 택하겠다기에 적극 협조했읍니다. 뭐, 대학을 다닐 때는 몇번인가 상을 타기도 하더군요』 안방에 놓여있는 고풍(古風)의 문갑은 제7회 문공부 신인예술상의 공예부문 장려상을 탄 명원양의 작품. 또한 놋쇠 촛대 1쌍으로는 제3회 상공미술 전람회에서 상공회의소 회장상을 받기도 한 쟁쟁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아가씨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69년)한 뒤에는 도자기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염색도 하는 것 같더군요. 취미를 살리고 뭔가 하겠다는 것이 대견스러워 적극 권장하고 있읍니다. 그런유의 소일거리란 결혼한 뒤에라도 별로 지장이 없을 것 같기도 해서…』 대학을 졸업한 뒤 시작한 도자기에도 꽤 재미를 붙여 자신이 빚은 도자기만으로 응접실의 한 옆을 장식한 도자기 「매니어」이기도 하다. 이은복씨 댁의 통행금지 시간은 저녁 8시30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아무런 연락없이 이 시간을 어겨서는 안되는 걸로 되어있다. 『대학 2학년 때까지는 통행금지 시간이 저녁 7시였어요. 제가 3학년이 되던 해 마침 밑의 동생이 대학엘 들어갔어요. 둘이 「데모」를 해서 결국 저녁 8시30분으로 낙착을 본 거예요』 『예술을 한다고 해서 그런지 아주 감정이 섬세하고 예민해요. 또 아주 기억력이 뛰어나요. 무슨 노래라도 몇번만 들으면 곧 그 곡을 전부 기억하고 말아요』 그래서인지 취미도 음악감상. 고전(古展)음악이나 「라이트·뮤직」을 즐겨 듣는다. 지난 가을에는 운전을 배워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기도. 『맏딸이라서인지 엄마인 나에게는 명원이의 도움이 여간 큰게 아니예요. 산림살이 의논으로부터 옷차림, 화장에 이르기까지 마치 자매처럼 다정하답니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어머니 정광일(鄭光日·47)여사의 말이다. [선데이서울 70년 3월 22일호 제3권 12호 통권 제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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