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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유랑기]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 ‘창경궁-신촌-마포-통진-강화-교동’

    [문화 유랑기]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 ‘창경궁-신촌-마포-통진-강화-교동’

    -4박 5일 동안 간 연산의 마지막 행로 연산군 하면 당장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폭군’이다. 조선조 27대 왕 중에서 반정으로 축출된 군왕은 광해군과 연산군 둘뿐이다. 특히 연산군은 광해군과는 달리 무엇 하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없는 그야말로 ‘폭군’의 전형으로 취급된다. 말하자면 조선의 네로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대로 믿을 것이 못되는지,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 동네에 일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이 열아홉에 보위에 오른 연산이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하루아침에 귀양길에 올랐는데, 창경궁에서 출발, 강화를 지나 교동도의 적소(謫所)로 들어가기까지 한 인간의 극적 반전의 전모를 보여주는 4박5일 마지막 행로를 따라가본다. 연산은 악정으로 인심을 잃었다. <조의제문> 사건과 연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빚어진 무오, 갑자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고, 쇄골표풍 등 형벌 또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을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자신은 팔도의 미녀들을 흥청이란 이름으로 뽑아올리게 하여 주지육림 속에 나날을 보냈다. 연산 12년(1506) 9월 초하루 밤,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경복궁을 접수, 거사를 성공시켰다. 이후 거사의 마무리 수순이 진행되었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저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후궁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그날로 군기시(무기제조창. 현 프레스센터 자리) 앞에서 목을 베었다.” 폐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고, 자녀는 4남 2녀로, 폐세자 이황을 비롯, 장녹수의 딸인 영수옹주 등이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이들 앞에는 참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세자와 세 왕자는 연산이 폐위된 직후 뿔뿔이 나뉘어 각처로 귀양갔다가. 9월 24일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의 장남인 황의 나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진 그보다 다 어렸다. 한 살짜리도 있었다. 이날 연산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그는 먼저 박원종의 반정군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동궁에 연금당했다. 곧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위리안치란 가시울이 쳐진 집안에다 죄인을 가두고 밥만 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형벌이다. 그런 연유로 위리안치처는 '산 자의 무덤'이라 했다. 폐주는 궁궐에 하룻밤도 머물 수 없는 법. 연산은 그날로 궁을 나서야 했다. 귀양길에 오르기 위해 연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은 모습으로 내전 문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무사히 가게 되었습니다.” 연산은 시인이었다. 모두 125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씌어졌다. 그만큼 그의 심사도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쓴 것 같은 시도 있다. 바람 부는 강에 배 타고 건너길 좋아 마오(莫好風江乘浪渡)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飜舟當急救人唯) 아침만 해도 왕으로 눈을 뜬 연산이지만, 그날 오후에는 죄인의 몸으로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도 언제 반정군의 칼날이 자기 목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얼굴은 백짓장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자신의 생사관은 돌보지 못한 모양이다. 부인 신씨는 남편의 유뱃길에 따라나서려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반정세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가시 집으로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있다. 서산낙일이다. 교동이라면 나라땅의 서쪽 끝이다. 뱃길 험한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 폐주는 하룻밤도 궁에서 머물 수 없다. 해가 설핏할 무렵, 연산이 어가가 아닌 평교자를 타고 창경궁 동남문인 선인문을 나올 때 갓을 숙여 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리에 몰려나온 백성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폐주를 욕했다. 그날은 이미 저물어 먼 길을 떠날 수 없는 터라 서쪽 이궁인 신촌의 연희궁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한다. 연산이 연회를 자주 열었던 장소다. 거기서 하룻밤 보내는 연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루아침에 왕좌에서 내쫓기고 어린 자식들을 다 사지로 몰아넣은 회한에 거의 실성하지 않았을까. 연산의 유배 행로를 추측해보면, 연희궁을 떠난 평교는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한강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연산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연산으로서는 참 사연 많은 양화나루인 셈이다. 이 서강을 건너 그 다음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네 명의 교꾼이 메는 평교는 그리 속도를 못 내 이튿날 밤은 김포에서 유숙하고, 다음은 통진, 강화에서 각각 묵었다. 4박 5일의 여정이다. 통진에서는 관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진에서 묵은 연산은 다시 길을 떠나 강화가 빤히 보이는 염하강 나루에 닿았을 것이다. 구 강화대교가 있는 자리다. 이름은 강이나 기실은 해협이다. 폭은 좁으나 물살이 세어, 고려를 침공했던 몽고군도 끝내 건너지 못했다는 해협이다. 이곳을 건너 다시 강화 관아에서 하룻밤 묵은 후 연산의 평교는 어느 길을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을까? 교동으로 건너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연산의 평교도 틀림없이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2014년 교동대교가 놓이기 전 교동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그룻배를 탔다. 그날은 특히 파도가 사나워 배가 뒤집힐 뻔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차라리 연산에겐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4박5일 동안 뭍길, 물길 합해 80km, 2백리 길을 짚어 교동 고을 관아 뜰에 들어선 연산은 장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땅에 엎드린 채 진땀을 흘리며 감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탱자나무 울타리가 처마 밑까지 바짝 쳐진 가옥 안에 갇혀졌다. 작은 문 하나로 음식만 들일 수 있을 뿐, 해를 구경할 수 없는 감옥이다. 적소에 안치되기까지 연산의 모습을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동도는 조선 초부터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이처럼 왕족들을 주로 교동에 유배시킨 것은 도성에서 가까워 감시하기가 좋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나운 조류로 인해 완전한 격리가 가능하다는 이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동도의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유배지는 그야말로 산속 적막한 곳이었다. 위치가 산의 서사면이어서 한양 쪽 하늘은 뵈지도 않는 곳이다. 묏자리로 쓰기에도 적막한 감이 드는 여기서 연산은 그 회한의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연산이 숨진 절기는 겨울이다. 적소의 산봉과 바위들은 아마 그때 시녀들의 호곡소리와 연산의 고음을 들었을 것이다. -유폐 두 달 만에 숨져 연산의 귀양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위리안치된 지 두 달 만인 11월 6일,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뜰 수 없는 역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숨지기 전 연산이 시중드는 시녀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중전이 보고 싶구나.” 연산이 역질로 죽었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다. 11월(음력)이면 겨울인데 무슨 역질인가, 필시 독살이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왕좌와 처자식들을 모두 잃고 31살 나이에 가시울타리 집안에 갇힌다면 독을 먹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시신은 교동땅에 묻혔다가 몇 년 후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되었다. 반정으로 남편과 두 아들, 두 오라비를 모두 잃어버린 신씨는 연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건만, 죽어서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여인은 폐비 신씨 한 사람이었다. 숨지기 전 연산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신씨가 마침내 자기 옆에 유택을 마련해 들어왔을 때, 지하의 연산은 생전의 부인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되뇌어 보지나 않았을까.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會合不多時)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손금불산입·의제매입세액공제·과세이연…이런 ‘외계어’ 언제까지 써야 하나요

    손금불산입·의제매입세액공제·과세이연…이런 ‘외계어’ 언제까지 써야 하나요

    다음 중 ‘외계어’는? ①손금불산입 ②의제매입세액공제 ③중간예납 ④과세이연 ⑤체납처분유예 정답은 ‘없다’. 모두 대한민국 세법에 나오는 세금 용어다. 국세청 직원이나 세무사, 회계사 등 세금 전문가들은 단번에 무슨 뜻인지 알겠지만 정작 세금을 내는 일반 국민은 이해하기 힘들다. 세법을 처음 만들 때 일본 세법에서 따온 용어가 많아서다. 세법이 어렵고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재부 “세월호·연말정산 후폭풍에 밀려” 정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국민이 읽기 쉽고, 찾기 편하고, 이해하기 쉽게 세법을 고친다는 목표 아래 ‘세법 쉽게 쓰기’ 사업을 2011년부터 시작했다. 당시 이 작업을 주도한 기획재정부 관료는 “이게 진짜 세법개정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 부자감세, 연말정산 후폭풍 등에 치여 번번이 뒤 순위로 밀려난 까닭이다. 하지만 국민의 세금 부담을 덜어 주고 조세 정의를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이 알기 쉬운 세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 “세법 쉬워지면 납세 협력비용도 감소” 세법 쉽게 쓰기 사업은 2년째 표류 중이다. 2013년 7월 부가가치세법을 전면 개정한 이후 실적이 없다. 기재부는 부가세법에 이어 2013년 소득세법 및 법인세법, 2014~2016년 상속·증여세법 등 단계적으로 세법을 쉽게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2013년 12월 국회에 제출한 소득세법과 법인세법 개정안은 지금껏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에서 잠자고 있다. 그사이 세법이 두 번이나 바뀌어 관련 팀은 새 세법에 맞춰 ‘쉽게 쓰는’ 작업을 다시 하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세월호 참사와 안홍철 한국투자공사 사장의 거취 논란으로 (‘쉽게 쓴 세법’을) 들이밀 분위기가 아니었고 올해도 법인세 인상 등 민감한 사안이 많아서 내년 상반기나 노려 봐야 할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김갑순(한국납세자연합회장) 동국대 회계학과 교수는 “국민 생활과 밀접한 세법을 쉽게 만드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다른 사안에 밀렸다는 것은 앞뒤가 바뀐 것”이라며 “세법이 쉬워지면 국민들이 세무 전문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세금을 직접 낼 수 있어서 납세 협력 비용도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세금 1000원을 낼 때 드는 비용은 평균 55원이다. ●어려운 용어 그대로 둔 부가세법 대안도 없어 그나마 쉽게 고쳐진 부가세법도 여전히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금 계산 수식과 표 등을 보기 좋게 바꿨지만 정작 어려운 세금 용어는 그대로 둬서다. 기재부 관계자는 “세법을 아무리 쉽게 고쳐도 국민 모두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했다가 “당초 쉽게 쓴 세법의 눈높이 대상을 일반 국민이 아닌 전문가에게 맞췄다”고 실토했다. “전문가에게 익숙한 용어를 바꾸면 혼란만 생기고 마땅한 대안도 없다”는 게 이유다. 최원석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국민들이 세법이 쉬워졌다고 느끼지 못하면 (국민 세금을 들여 하는) 이 사업은 효과가 없는 것”이라면서 “다른 세법을 쉽게 바꾸기 전에 이미 시행한 부가세법이 왜 여전히 어려운지 분석하고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종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문화 유랑기] ‘악정’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창경궁-마포-교동

    [문화 유랑기] ‘악정’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창경궁-마포-교동

    -4박 5일 동안 간 연산의 마지막 행로 연산군 하면 당장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폭군’이다. 조선조 27대 왕 중에서 반정으로 축출된 군왕은 광해군과 연산군 둘뿐이다. 특히 연산군은 광해군과는 달리 무엇 하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없는 그야말로 ‘폭군’의 전형으로 취급된다. 말하자면 조선의 네로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대로 믿을 것이 못되는지,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 동네에 일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이 열아홉에 보위에 오른 연산이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하루아침에 귀양길에 올랐는데, 창경궁에서 출발, 강화를 지나 교동도의 적소(謫所)로 들어가기까지 한 인간의 극적 반전의 전모를 보여주는 4박5일 마지막 행로를 따라가본다. 연산은 악정으로 인심을 잃었다. <조의제문> 사건과 연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빚어진 무오, 갑자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고, 쇄골표풍 등 형벌 또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을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자신은 팔도의 미녀들을 흥청이란 이름으로 뽑아올리게 하여 주지육림 속에 나날을 보냈다. 연산 12년(1506) 9월 초하루 밤,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경복궁을 접수, 거사를 성공시켰다. 이후 거사의 마무리 수순이 진행되었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저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후궁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그날로 군기시(무기제조창. 현 프레스센터 자리) 앞에서 목을 베었다.” 폐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고, 자녀는 4남 2녀로, 폐세자 이황을 비롯, 장녹수의 딸인 영수옹주 등이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이들 앞에는 참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세자와 세 왕자는 연산이 폐위된 직후 뿔뿔이 나뉘어 각처로 귀양갔다가. 9월 24일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의 장남인 황의 나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진 그보다 다 어렸다. 한 살짜리도 있었다. 이날 연산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그는 먼저 박원종의 반정군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동궁에 연금당했다. 곧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위리안치란 가시울이 쳐진 집안에다 죄인을 가두고 밥만 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형벌이다. 그런 연유로 위리안치처는 '산 자의 무덤'이라 했다. 폐주는 궁궐에 하룻밤도 머물 수 없는 법. 연산은 그날로 궁을 나서야 했다. 귀양길에 오르기 위해 연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은 모습으로 내전 문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무사히 가게 되었습니다.” 연산은 시인이었다. 모두 125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씌어졌다. 그만큼 그의 심사도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쓴 것 같은 시도 있다. 바람 부는 강에 배 타고 건너길 좋아 마오(莫好風江乘浪渡)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飜舟當急救人唯) 아침만 해도 왕으로 눈을 뜬 연산이지만, 그날 오후에는 죄인의 몸으로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도 언제 반정군의 칼날이 자기 목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얼굴은 백짓장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자신의 생사관은 돌보지 못한 모양이다. 부인 신씨는 남편의 유뱃길에 따라나서려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반정세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가시 집으로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있다. 서산낙일이다. 교동이라면 나라땅의 서쪽 끝이다. 뱃길 험한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 폐주는 하룻밤도 궁에서 머물 수 없다. 해가 설핏할 무렵, 연산이 어가가 아닌 평교자를 타고 창경궁 동남문인 선인문을 나올 때 갓을 숙여 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리에 몰려나온 백성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폐주를 욕했다. 그날은 이미 저물어 먼 길을 떠날 수 없는 터라 서쪽 이궁인 신촌의 연희궁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한다. 연산이 연회를 자주 열었던 장소다. 거기서 하룻밤 보내는 연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루아침에 왕좌에서 내쫓기고 어린 자식들을 다 사지로 몰아넣은 회한에 거의 실성하지 않았을까. 연산의 유배 행로를 추측해보면, 연희궁을 떠난 평교는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한강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연산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연산으로서는 참 사연 많은 양화나루인 셈이다. 이 서강을 건너 그 다음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네 명의 교꾼이 메는 평교는 그리 속도를 못 내 이튿날 밤은 김포에서 유숙하고, 다음은 통진, 강화에서 각각 묵었다. 4박 5일의 여정이다. 통진에서는 관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진에서 묵은 연산은 다시 길을 떠나 강화가 빤히 보이는 염하강 나루에 닿았을 것이다. 구 강화대교가 있는 자리다. 이름은 강이나 기실은 해협이다. 폭은 좁으나 물살이 세어, 고려를 침공했던 몽고군도 끝내 건너지 못했다는 해협이다. 이곳을 건너 다시 강화 관아에서 하룻밤 묵은 후 연산의 평교는 어느 길을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을까? 교동으로 건너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연산의 평교도 틀림없이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2014년 교동대교가 놓이기 전 교동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그룻배를 탔다. 그날은 특히 파도가 사나워 배가 뒤집힐 뻔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차라리 연산에겐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4박5일 동안 뭍길, 물길 합해 80km, 2백리 길을 짚어 교동 고을 관아 뜰에 들어선 연산은 장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땅에 엎드린 채 진땀을 흘리며 감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탱자나무 울타리가 처마 밑까지 바짝 쳐진 가옥 안에 갇혀졌다. 작은 문 하나로 음식만 들일 수 있을 뿐, 해를 구경할 수 없는 감옥이다. 적소에 안치되기까지 연산의 모습을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동도는 조선 초부터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이처럼 왕족들을 주로 교동에 유배시킨 것은 도성에서 가까워 감시하기가 좋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나운 조류로 인해 완전한 격리가 가능하다는 이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동도의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유배지는 그야말로 산속 적막한 곳이었다. 위치가 산의 서사면이어서 한양 쪽 하늘은 뵈지도 않는 곳이다. 묏자리로 쓰기에도 적막한 감이 드는 여기서 연산은 그 회한의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연산이 숨진 절기는 겨울이다. 적소의 산봉과 바위들은 아마 그때 시녀들의 호곡소리와 연산의 고음을 들었을 것이다. -유폐 두 달 만에 숨져 연산의 귀양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위리안치된 지 두 달 만인 11월 6일,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뜰 수 없는 역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숨지기 전 연산이 시중드는 시녀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중전이 보고 싶구나.” 연산이 역질로 죽었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다. 11월(음력)이면 겨울인데 무슨 역질인가, 필시 독살이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왕좌와 처자식들을 모두 잃고 31살 나이에 가시울타리 집안에 갇힌다면 독을 먹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시신은 교동땅에 묻혔다가 몇 년 후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되었다. 반정으로 남편과 두 아들, 두 오라비를 모두 잃어버린 신씨는 연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건만, 죽어서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여인은 폐비 신씨 한 사람이었다. 숨지기 전 연산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신씨가 마침내 자기 옆에 유택을 마련해 들어왔을 때, 지하의 연산은 생전의 부인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되뇌어 보지나 않았을까.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會合不多時)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루브르 박물관의 만병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루브르 박물관의 만병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조형언어에 대해 이제 말할 때가 됐다. 조형언어는 문자언어에 대응하는 용어다. 문자언어는 지역마다 다르나 최초의 문자는 대개 BC 3000~20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중국에서 쓰기 시작했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인간은 문자언어로 역사를 쓰고 문자언어로 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마다 문자언어가 다르므로 문자언어 소통에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지구상에는 인류가 창조한 엄청난 조형예술품이 광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건축-회화-조각-도자공예-금속공예-복식 등 인류는 조형예술을 끊임없이 창조해 왔다. 조형언어로 쓴 것이 조형예술품이다. 그 ‘조형예술의 조형언어’를 해독하고 나니 조형성과 상징성을 지나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음을 알게 됐다. 미술사학 연구는 대체로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접근이 대부분이었다. 작품 자체의 순수 조형언어를 해독한 지 10년째다. 필자는 이 연재에서 조형언어를 해독해 문자언어로 설명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 속에서 분투하고 있다. 조형언어란 말은 이미 학계에서 쓰고 있는데, 선·면·입체 등을 조형언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말하는 조형언어는 전혀 다르다. 인류는 40만년 전부터 조형예술을 창조해 왔는데 놀랍게도 처음부터 조형언어 문법의 엄격한 전개 원리에 따라 조형을 구성하고, 그 구성 요소인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 보주 등으로 우주의 영원한 생명 생성의 깊은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런 모든 조형예술은 샤머니즘,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종교의 세계 건축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한 조형예술을 지금 독자들과 함께 해독하며 조형성과 상징성을 밝혀 나가고 있다. 고등종교의 고차원 신앙과 사상을 파악하기를 강조한 것은 바로 조형언어로 신앙과 사상을 조형예술로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깊이 잠들어 있었고, 오랫동안 오해로 작품의 가치가 폄하돼 시련에 허덕이던 조형예술을 올바로 해독해 고귀한 자태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인류 문화의 신기원을 여는 일이라 항상 새로운 기쁨과 흥분으로 매일 새로운 태양이 뜨는 듯하다. 이 작업은 인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고, 인류의 역사를 새로 밝혀내는 작업이며, 새로운 미래의 창조 기틀을 마련하는 일이다. 인류의 문화가 새롭게 다시 씌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문자언어의 시대는 가고 조형언어의 시대가 오고 있다. 필자는 2000년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기 시작했다. 문자언어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깨지고, 조형언어에 대한 절대적 신앙이 시작됐다. 문자언어는 조작이 가능하고, 거짓말로 쓸 수도 있으며, 사실을 왜곡해 고칠 수도 있지만 조형예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조형언어를 해독함으로써 인류 문화의 지평이 무한대로 넓어진다. 인류는 국제적으로 공통의 조형언어를 지니어 왔음을 알게 됐으며 인류를 평등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선다. 인류의 조형언어는 같으므로 각 나라에 맞게 조형언어를 번역할 필요가 없으므로, 배우기 쉬운 조형언어로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다. 조형예술에 관한 한 2000년은 신기원의 전후가 될 것이다. 용과 보주와 연꽃을 거쳐 마침내 만병(滿甁)을 만난다. 포항 보경사의 법당 불단에는 용의 입에서 연이은 제3영기싹이 양쪽으로 나오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용은 보주로 대치해 양쪽으로 연이은 제3영기싹 영기문이 생겨나는 것으로 단순화했다(①). 연꽃으로 알고 있는 그 바로 아래는 보주를 머금은 영기꽃 양쪽으로 역시 같은 영기문이 생겨나는 것을 보주로 단순화한 것이다(②). 결국 용과 보주와 연꽃(영기꽃)은 하나가 된다. 실제로 용의 입에서 만물이 나오는 조형을 모두 보여 주기는 어렵다. 보주도 마찬가지고 연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보주와 닮게 만든 것이 만병이다. 보주는 구멍이 있으므로 입을 만들고 굽만 붙이면 항아리, 즉 만병이 된다. 만병은 보주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대생명력이 가득 찬 병이다. 이때 병이란 항아리나, 병이나, 정병이나, 승반이나 모든 그릇 형태를 포함하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조형언어는 생명생성 상징성 나타내 용과 영기꽃에서 나오는 영기문을 보주로 대치해 단순화시켜 보았다. 그런데 좀 더 분명한 증거로 설득할 조형이 필요하다. 문득 서울 강남구 봉은사의 판전(板殿)을 떠올렸다. 대장경판이 봉안된 전각으로 추사 김정희가 71세 병중에 쓴 절필(絶筆) 현판이 있어서 유명하다. 사람들에게 판전 현판이란 걸작품은 보이나 그 양쪽으로 평방위에 만병이 각각 두 개가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기세 있게 잎으로 전개한 것을 선으로 간략화해 보니 보경사 것과 똑같다(③). 살인적으로 무더운 여름 그 만병을 촬영해 채색 분석하고 보니 이제 마음 놓고 만병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가장 오랜 만병은 인도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얻는다. 즉 산스크리트어로 푸르나 가타, ‘가득 찬 병’이라 했을 뿐 무엇이 가득 차 있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우주의 대생명력, 혹은 영기, 혹은 그것을 가시화한 성스러운 물 등 여러 가지로 인식하도록 상징적·조형적 여유와 자유를 둔 것이다. 이 밖에 어느 나라에도 용어는 없다. 이름이 없으니 알아보지 못하고 동서양 모두 꽃병이라고 부른다. BC 2세기 산치 제2탑의 난간에 조각된 인도의 만병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④). ●만병은 우주 대생명력이 가득 찬 병 색이 한 가지인 사암에 조각했으므로 조형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채색 분석하면 명료히 밝힐 수 있다. 즉 만병에서 활짝 핀 연꽃과 연봉과 연잎 등이 좌우대칭으로 전개하고, 중앙에 무량보주를 나타냈으며 중앙 맨 위에는 영기문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만병에서 화생하는 것은 현실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모두 보주를 발산하는 영기꽃과 관련 있다. 즉 만병에서 무량한 보주가 화생한다는 것을 BC 2세기부터 분명히 보여 준다. 같은 대탑의 다른 예를 보자(⑤). 만병에서 좌우대칭으로 영기꽃, 영기 봉오리, 연잎 등이 뻗어 나오고 있다. 만병 양쪽의 영조(靈鳥)는 만물을 상징한다. 실은 영수(靈獸)나 영조가 표현돼 있지 않더라도 만물이 화생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대인의 정신적 수준이 얼마나 고차원적인가. ●서양도 영기문 알았지만 명칭만 없어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만병을 보유하고 있는데 다양하기 짝이 없다. 같은 맥락에서 용의 입에서처럼 인도인이 창조한 만물 생성의 근원인 영수 마카라나 영화된 코끼리의 입에서 영기문이 생겨나는 예도 많다. 중국에도 만병이 많지만 중국화해 인도 것과는 다르다. 베이징 중심에 있는 명·청의 궁궐인 자금성 벽에 놀라운 모습의 거대한 만병이 있다(⑥). 부분을 확대해 보면 더이상 석류가 아니고 제1영기싹의 무수한 변주로 영기문을 전개시키고 있다. 씨방 안에는 보주가 가득 차 있다. 매우 절묘한 조형이라 감탄을 금할 수 없다(⑦). 중국에도 용어가 없으니 모두 꽃병에 석류를 가득 꽂아 놓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씨방의 보주가 가득 찬 영기꽃이다. 만병에서 엄청난 보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인도의 만병과 맥을 같이한다. 그것을 단순화해 보았다(⑧). 만병에서 제3영기싹 영기문이 세 갈래로 뻗어 나가고 있으며, 각각 끝에 영기꽃이 있으나 그 밖의 만물이 화생할 수 있으므로 특정한 사물을 정할 필요가 없어 만물이라 적어 넣었다. 아름다운 곡선의 영기창에는 제3영기싹 영기문이 연이어져 있는데 이 영기창 안은 무한한 우주 공간을 보여 준다. 그 안의 만병은 우주에 충만한 영기를 상징한다. 우리나라에도 고구려 무덤 벽화 이래 통일신라-고려-조선에 무수히 많지만 같은 맥락이어서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로마시대 그림 네 귀서 영기문 전개 그러면 서양에도 만병이 있을까. 6세기 로마시대의 것으로, 레바논의 성 크리스토퍼 대성당의 바닥 중심에 모자이크로 만들었던 510X410㎝ 크기의 거대한 만병이 있다(⑨).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다. 역시 이름이 없으니 꽃병이라 한다. 꽃병에서 영기문이 나오면서 만물이 화생하는데, 왜 이런 조형이 성립하고 있는지 루브르 박물관의 전공자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네 귀에는 만병이 있는데 각각 색을 달리해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을 내고 있는데 덩굴 모양으로 표현했으나 자세히 보면 작은 제1영기싹이 곳곳에 있으며 에너지의 파동이 있다. 서양인들도 영기문을 알고 있었지만 다만 명칭이 없었을 따름이다. 작품을 단순화하니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중국 자금성 것과 원리가 똑같지 않은가(도 10). 주어진 공간과 중심을 향한 영기문 전개로 서로 만나지만, 제1영기싹 영기문이 끝나는 곳마다 온갖 영수와 영조와 인간이 영기 화생하는 장엄한 광경을 보여 준다. 중앙은 십자가, 즉 예수가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 용의 입에서 나온 보주가 만병에 영기문을 내어 만물을 화생시키는 도상은 동서양이 똑같다. 우리는 이 중대한 진실을 수천 년 동안 알지 못했으므로 가장 근본적인 미술사학의 문제를 문제조차 삼을 수 없었다. 만병에서 만물이 화생하는 것은 용의 입에서 만물이 화생하는 것과 같다. 비록 서양에는 용의 입에서 보주가 나오는 도상은 없지만 동양 못지않은 갖가지 보주가 문명의 발상기부터 등장하며 무량보주도 창조하는 놀라운 조형도 있다. 만병은 용이다. 용의 입에서처럼 만병에서 만물이 화생하는 것은 동서양이 똑같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엄마·자녀 함께 배우는 ‘우리말’…성북, 다문화가족 한글교실 운영

    성북구는 엄마와 자녀가 함께 가서 따로 배우는 ‘다문화 가족 한글교실’을 운영한다. 오는 9월 9일부터 12월 23일까지 매주 수요일 성북여성교실에서 열리는 한글교실은 다문화 가족 엄마와 7~8세 아이를 위한 교실을 분리해 효과적으로 한글 교육을 한다.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교육에 참여하지만 배우는 과정은 달라 효과적인 교육이 이뤄질 것으로 성북구는 기대했다. 어린이 한글교실은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이 목표로 한글 교육, 받아쓰기 지도, 책 읽어 주기 등을 한다. 어머니 한국어교실에서는 자녀의 알림장을 읽고 이 해할 수 있는 수준의 한국어 교육을 진행한다. 어머니반은 한국어 전문 강사가 지도하고 어린이 한글은 대학생 자원봉사자가 단어카드 놀이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방법으로 가르칠 계획이다. 성북구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는 참여하는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부부 의사소통 및 대화 방법 등 부부 관계 개선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개인정보 보호 위반업체 첫 실명 공개

    서울 강남구 삼성동 미래의료재단㈜은 환자 개인정보를 수집하면서 고지 사항을 위반했다. 동의 거부권 및 불이익 가능성을 알려야 하는데 지키지 않았다. 개인정보 안전성 확보라는 의무도 어겼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로부터 접근 통제 및 접근권·접속기록 관리가 미흡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2건에 대해 600만원씩 과태료가 부과됐다. 이뿐만 아니라 개인정보 처리 위탁에 따른 필수 문서 일부를 누락하고 수탁자 일부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나 200만원씩 과태료를 물어야 했다. 이런 위반 사항이 19일부터 행정자치부 홈페이지(www.mogaha.go.kr)에 공표돼 국민에게 알려진다. 행자부가 지난해 7월 발표한 개인정보보호 정상화 종합대책의 하나로 행정처분 결과 공표제도를 대폭 강화함에 따라 처음으로 위반 사실을 공개한다. 과태료 1600만원에다 처분 사실까지 공개해 보다 엄중한 소비자의 심판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행정처분 결과 공표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공표 사례는 없었다. 기준 자체가 지나치게 엄격했기 때문이다. 행정처분을 내리고 외부에 공개도 하면 ‘이중 처벌’이라는 유권해석도 있어 당국이 공개를 꺼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보안 사고 때 수습하는 것보다 외부로 알려지는 것에 더 신경을 쓰기 일쑤였다. 보안 사고로 고객 정보가 유출되거나 시스템이 공격을 받는 일보다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보 유출이나 보안 사고에 대한 행정처분이 기업에 그다지 타격을 주지 못하는 ‘솜방망이’ 수준에 그치고 보안 투자를 늘리거나 정보보호를 강화하려는 해당 기업의 노력은 여전히 미약해 행정처분만으로 규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줄곧 받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행정처분 결과 공표제도를 기존 제도에 비해 대폭 강화했다. 예전에는 처분 사실 3개 항목 중 2개 항목 이상 동시에 해당할 경우 공표했지만 기준 자체를 7개 항목으로 세분화하고 1개라도 해당하면 제재하도록 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1] 원조 평양냉면 맛을 지키고 있는 곳은?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1] 원조 평양냉면 맛을 지키고 있는 곳은?

    고소한 메밀국수에 깊은 맛을 내는 찬 고기 육수를 부은 뒤 국수에 무 몇 조각을 얹어 먹는 평양냉면은 여름철에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보통 국수는 메밀과 전분 가루를 6대4 또는 5대5 등으로 섞어 부드러운 식감을 더했다. 육수는 쇠고기나 꿩고기를 쓰는데, 때론 닭 뼈 또는 돼지고기도 함께 넣어 더 깊은 맛을 우려내기도 한다. 평양냉면은 본래 평북 지방에선 그냥 냉면으로 불린다. 조선 시대부터 육수가 아닌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한겨울에 먹었으니 차가운 냉면이라고 했을 것이다. 메밀에는 일부 유해 성분이 있기 때문에 해독 작용이 탁월한 무는 궁합이 꼭 맞는 고명이다. 냉면의 육수 맛은 짠맛, 신맛, 단맛, 쓴맛에 이어 이른바 5번째 맛이라고 하는 감칠맛이 중요한 요소이다. 이 구수한 맛은 L-글루타민산나트륨이 함유된 MSG 계열의 조미료로도 풍부하게 낼 수 있다. MSG 조미료를 넣지 않은 냉면을 전국적으로 수소문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은 냉면집이 어딘가 있기는 하겠지만 왠지 우리가 아는 냉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냉면에는 인체에 해롭지 않은 소량의 MSG가 들어가야 한다. 겨울철 동치미 국물에 먹던 냉면이 여름철 육수 냉면으로 자연스럽게 바뀐 것은 한 일본인 덕분이었다. 1907년 도쿄대 교수는 다시마 등을 농축해 ‘우마미’(감칠맛)를 발견했다. 이를 화학 성분으로 처리해 최초의 화학조미료 ‘아지노모토’를 개발했다. 쇠고기, 다시마, 멸치 등을 넣고 몇 시간씩 푹 끓이지 않아도 되는 혁신적 발명이었다. 음식점 등에서 반응이 더 뜨거웠던 곳은 조선이었다. 일본인보다 국물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한양에 있던 평양식 냉면집은 값싸고 편하게 육수를 만들 수 있던 아지노모토 조미료를 넣었고, 이 맛에 길들여진 식객들의 입소문을 통해 냉면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냉면의 본고장인 평양에도 퍼졌다. 6·25전쟁 이후 서울에 다시 평양 냉면집이 하나둘 문을 열었다. 지금은 많은 평양냉면 전문점이 있지만, 역사성을 따져 분류하자면 3종으로 보인다. 을지로 충무로길의 ‘Y점’ 등은 냉면에 고춧가루를 살짝 넣는 게 묘한 특징이다. 필동 서애로의 ‘P점’도 Y점과 마찬가지로 돼지고기를 잘게 썰은 (제육)편육을 평양냉면 외의 대표 메뉴로 한다. 다른 하나는 장충동 장충단로의 ‘P점’과 마포 숭문길의 ‘Y점’을 꼽을 수 있다. 처음 먹어본 식객들에겐 너무 심심한 육수에다 만두가 특징이다. 나머지 한 맥은 중부시장 근처의 ‘W점’이다. 화려한 고명과 불고기, 누구나 좋아하는 맛을 특징으로 한다. 평양냉면이 서울식으로 진화해 최고 절정에 오른 맛이다. 그럼 왜 3종으로 분류된 것일까. 우선 충무로길 Y점 등은 평양 시내의 큰 음식점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냉면이다. 북쪽 지방에선 귀했던 고춧가루를 사용했고, 또 접대용으로 돼지 편육을 쓰기 때문이다. 쇠고기는 산세가 험한 북한에 거의 없었다. 따라서 실향민이나 탈북자들은 Y점 등에 가면 “북한 냉면에 가깝다”며 극찬한다. 두 번째 맛인 P점 등의 냉면은 부유한 양반 집에서 즐기던 맛이다. 일종의 가정식 냉면이어서 맛이나 모양이 그리 화려하지 않다. 특유한 맛을 좋아하는 식객들은 “중독성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 W점은 이 모두를 합쳐 외국인의 입맛까지 넘볼 수 있는 맛이다. 그런데 지금 평양에서도 서울과 똑같은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평양을 다녀온 지인들의 평가를 종합한 결과 북한 측이 남한 고위 인사들을 데려가거나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권하는 대동강변의 ‘옥류관’ 냉면 맛은 서울 중부시장 근처의 W점처럼 화려한 맛의 극치를 자랑한다. 고명에 쇠고기 수육도 쓴다. 보통강변의 ‘청류관’은 고명으로 빨간 김치나 심지어 고추장까지 등장한다. 청류관 냉면은 충무로길 Y점 등 냉면의 변형으로 여겨지는데, 결국 그 원형은 본고장을 떠난 Y점 등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국수> 시인 백석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DMZ 접경지 철원 동송 예술가들이 접수하다

    DMZ 접경지 철원 동송 예술가들이 접수하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東松)은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약 10㎞, 민간인통제선에서 약 5㎞ 거리에 위치한 상업 중심지역이다. 주민들과 외출나온 전방 군인들의 평범한 일상이 존재하는 공간은 얼핏 보기엔 긴장 상황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곳곳에 냉전 이데올로기의 잔재가 살아 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힘이 얽혀 ‘느슨한 긴장감’이 있는 동송을 예술가들이 접수했다. DMZ와 그 접경지역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진행하는 ‘리얼 디엠지프로젝트’는 네 번째를 맞는 올해 ‘동송세월’(同送歲月)이라는 제목으로 현장 예술축제를 열고 있다. 동송은 1914년 동송면이라는 호칭이 생긴 이후 1945년 해방과 함께 북한의 영토에 속했다가 1953년 한국전쟁 정전 후 다시 남한에 수복되어 오늘까지 이어진다. 미술가, 건축가, 시인, 문화기획자 등으로 구성된 참여작가 49명은 동송의 장소적 정체성을 활용한 회화, 사진, 조각, 설치, 글쓰기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작업들을 시내 곳곳에서 선보이고 있다. 금학로에 있는 커피숍 앞에 작은 꽃밭이 있다. 천일홍, 채송화, 메리골드 등 일년생 화초들은 전방 군인들의 군화에 묻은 흙에서 찾아낸 씨앗을 키운 식물치료 작가 김이박의 작품 ‘이사하는 정원-DMZ’다. 작가는 “동송에서 군인들이 자주 가는 식당, 노래방 등의 발판에서 두 달 넘게 흙을 채집해 씨앗을 찾고 서울의 작업실에서 키워 이곳에서 전시하는 것”이라며 “사람들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민통선 안팎을 식물들이 군화에 묻어서 자유롭게 드나든다는 것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강현아는 이평로 86 텃밭을 활용해 ‘동송 DMZ 생태관광’ 코너를 만들었다. 인간의 손이 타지 않는 DMZ 안에 기이한 생태현상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는 발상에서 시작된 작업으로 담벼락에 작가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동식물의 드로잉을 붙여 놓고 망원경으로 감상하도록 했다. 대인지뢰 사고에 대비한 ‘발목보호 검독수리’, 혹독한 추위를 견디려는 ‘방한털 산양노루’, 야간 매복 훈련에 참여하는 ‘소등반딧불이’, 변종 물고기인 ‘탄피 물고기’, 철책을 따라 다니는 ‘삼팔따라쥐’, 감시초소에 서식하다 보니 고개가 북을 향하게 된 ‘북향 금강초롱꽃’ 등은 모두 비무장생이다. 철원 감리교회에서는 조영주의 영상물 ‘DMG-비무장 여신들’을 볼 수 있다. 철원 안보관광 해설사로 일하는 7명의 여성들이 흰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DMZ 내 군사시설에서 공습경보 사이렌과 새소리에 맞춰 고요하게 춤을 춘다. 도시에서는 존재감을 잃어버린 공중전화가 동송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에 착안해 이재호 작가는 길거리의 공중전화를 비닐포장재로 덮은 ‘위장-공중전화’를 선보였다. 철원경찰서 관전치안센터 앞에도 작품이 있다. 시멘트를 백두산 모양으로 쌓아 놓고 백두산 천지의 사진을 재촬영한 이미지를 병치시킨 권용주의 ‘우리 정상에서 만나요’다. 통신기기점 쇼윈도에는 DMZ와 관련된 웹상의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보여 주는 강신대 작가의 ‘#DMZ’가 선보인다. 철원 동송의 첫인상과도 같은 동송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유목연이 ‘통일국수’를 말아 주고 건축가 김동세와 설치미술가 정소영이 일시적인 사적 공안 ‘터미널: 가깝고도 먼’을 설치했다. 동송농협지하에서는 프랑스 작가 알랭 드클레르크가 PC방에서 전투게임을 하는 병사들의 모습과 소이산의 참호, 스위스의 지하 벙커를 이용한 영상 작품 ‘헤드쿼터’, 최진욱의 노동당사 회화작품, 최대진이 안보관광지에서 본 시설들을 찰흙으로 만들어 재구성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전방에 근무하는 군인들의 심정을 다독이려는 작가들의 마음도 엿보인다. 진희웅은 제분소 벽면에 네온으로 ‘정말 다 괜찮을 거야’라는 작품을 설치했다. 조혜진은 손뜨개로 만든 화환을 희망포토스튜디오에 설치해 놓고 군인들과 가족들이 활용하도록 했다. 금학로의 성심약국에서는 군인들의 마음병을 치유할 수 있도록 정원연 작가가 약초와 천연꿀로 만든 ‘군심환’을 구할 수 있다. 전쟁을 책으로 배운 세대인 작가들이 한반도의 분단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은 저마다 독특하고 흥미롭다. 주민들의 반응도 호의적이다. 지역에서 50년째 군장비와 패치를 판매해 온 류선규(72)씨는 “일반인들이 멀고 위험하게 느끼는 전방을 예술적인 시각에서 보고 알리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기획자 김선정 예술감독은 “지난해까지 민통선 안쪽에서 행사를 가졌지만 올해는 프로젝트가 지역사회에 좀더 친밀하고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참여자들이 지역민들의 일상공간으로 들어갔다. 개별작업과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지역 공동체와의 소통과 협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붉은 색 전시 입간판을 세우고 전시설명문을 붙여 놓았지만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고 워낙 작품이 많아서 운동화끈을 단단히 조이고 나서야 한다. 동송 전시는 오는 23일까지 이어지고 29일부터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재구성해 선보인다. (02)739-7098. 글 사진 철원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주방 식초 욕실 점령

    주방 식초 욕실 점령

    올여름 식초가 화려하게 변신하고 있다. 식초가 음식을 상큼하게 만드는 감초 같은 역할을 넘어 다이어트, 미용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유통업계가 식초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최근 식초를 가장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는 업종은 미용 부문이다. CJ올리브영은 지난 5월 중순쯤 출시한 ‘이브로쉐 라즈베리 헤어식초’가 CJ올리브영 린스 부문 매출 순위 1위(점유율 49%)를 기록하며 소비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16일 밝혔다. 이 제품이 유독 인기를 누리는 것은 최근 ‘노푸’(샴푸 없이 머리를 감는 것) 유행에 힘입어서다. 염기성인 샴푸를 쓴 다음 마지막 머리를 헹구는 과정에서 식초 몇 방울을 떨어뜨린 물에 머리를 헹구면 식초의 산성 성분이 이를 중화시켜 머릿결을 좋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CJ올리브영 마케팅 담당자는 “먹는 식초가 냄새가 강해 직접 쓰기 찜찜한 사람들이 헤어 전용 식초를 찾게 되면서 구매가 증가한 것 같다”고 밝혔다. 에뛰드하우스는 최근 모공 속 트러블 요인을 제거하고 이를 예방하는 모공 토털 케어 라인 ‘원더포어’ 신제품 5종을 추가 출시했다. 원더포어 모공 케어 라인은 피부 산도(pH) 균형을 맞추는 데 효과적인 식초와 박하가 만난 박하초와 편백수 추출물 등으로 모공 유해 요인을 제거하고 과도한 피지 분비를 막아주는 특징이 있다. 식초의 강점은 역시 살균력이다. 애경은 기존 제품인 순샘에 발효와인 식초 성분을 첨가한 ‘셰프의 선택’ 주방 세제를 출시했다. 와인 식초 성분 덕분에 물때 제거력이 강화됐다. 애경 관계자는 “셰프들이 요리할 때 요리 도구에 식초를 간간이 뿌려 냄새를 제거하고 살균하는 것에 착안해 만든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LG생활건강의 ‘샤프란 꽃담초’ 섬유탈취제는 꽃과 허브잎을 자연 발효한 꽃식초 성분이 옷과 침구류, 커튼, 쇼파 등 섬유 속 불쾌한 냄새를 제거해 주고 향긋한 꽃향기만 남긴다. 이 회사의 ‘한입 식초살균 액체 세제’는 빨래할 때 사용하면 천연 식초 성분이 살균은 물론 냄새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식초를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여름이라 군살 때문에 고민인 이들을 위해 바나나 식초 레시피도 주목받고 있다. 바나나와 식초, 흑설탕을 1대1대1 비율로 유리병에 넣은 뒤 냉장고에서 보름간 숙성시킨 다음 바나나를 건져내면 완성이다. 바나나의 펙틴 성분이 몸속의 독소와 함께 나트륨 배출을 도와 부종을 없애 주는 효과가 있다. 식초는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죽은동료 테노리오 위한 세리모니? 사연보니 ‘눈물 나’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죽은동료 테노리오 위한 세리모니? 사연보니 ‘눈물 나’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죽은동료 테노리오 위한 세리모니? 사연보니 ‘눈물 나’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테노리오의 우정이 재조명 되고 있다. 16일 방송된 MBC ‘서프라이즈’ 방송 이후 에콰도르의 이반 카비에데스의 오티리노 테노리오를 위한 스파이더맨 마스크 세레모니가 화제에 올랐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에콰도르와 코스타리카의 A조 조별리그 2차전 경기, 경기 종료를 앞두고 에콰도르의 한 선수가 골을 넣었다. 그는 스파이더맨 가면을 얼굴에 쓴 채 하늘을 바라보며 그라운드를 누볐다. 이는 테노리오의 동료 카비에데스였다. 앞서, 테노리오는 아들 때문에 스파이더맨 가면을 써왔다. 그의 아들이 ‘스파이더맨’을 유독 좋아했기 때문. 테노리오는 생애 첫 월드컵을 앞두고 유독 들떠있었다. 월드컵 무대에서 꼭 가면을 쓰기로 아들과 약속한 것. 그러나 월드컵을 1년 앞두고 테노리오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가족들은 물론, 에콰도르 국민들까지 슬퍼했다. 1년 후 독일 월드컵이 시작됐고 에콰도르는 선전했다. 그런데 갑자기 경기 종료 직전, 스파이더맨이 등장했다. 테노리오의 생전 동료, 카비에데스였다. 카비에데스는 테네리오를 대신해 스파이더맨 세리머니를 펼칠 것을 다짐해 온 것. 죽은 동료와 그의 아들을 위해 가면을 쓴 카비에데스의 세리머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네티즌들은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테노리오 우정 눈물 난다”,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테노리오, 감동이네”,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테노리오, 지금 봐도 눈물샘 자극하는 장면” 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MBC ‘서프라이즈’ 캡처(에콰도르 카비에데스 테노리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사망한 동료 테노리오 위한 ‘스파이더맨 세리모니’ 전세계 울려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사망한 동료 테노리오 위한 ‘스파이더맨 세리모니’ 전세계 울려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사망한 동료 테노리오 위한 ‘스파이더맨 세리모니’ 전세계 울려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테노리오’ 에콰도르 카비에데스 테노리오의 우정이 재조명 되고 있다. 16일 방송된 MBC ‘서프라이즈’ 방송 이후 에콰도르의 이반 카비에데스의 오티리노 테노리오를 위한 스파이더맨 마스크 세레모니가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고 있다. 에콰도르의 공격수 이반 카비에데스는 지난 2006년 독일월드컵 코스타리카전서 추가 시간 팀의 3번째 골을 넣은 뒤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쓰는 세레모니를 선보였다. 이는 앞서 2005년 5월 7일 25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대표팀 동료 오티리노 테노리오에게 바친 세레모니였다. 테노리오는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스파이더맨 세리모니를 펼칠 계획이었으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를 기억한 카비에데스는 독일월드컵 출전 전부터 마스크를 쓰기로 작정했다. 결국 팀의 16강행을 확정짓는 쐐기골을 뽑은 뒤 스파이더맨 세리모니를 펼치며 세상을 떠난 동료와 기쁨을 함께 했다. 이날 승리로 에콰도르는 이 경기에서 코스타리카에 3-0으로 압승을 거두고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올랐다. 사진=MBC ‘서프라이즈’ 캡처(에콰도르 카비에데스 테노리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저자와 차 한잔]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저자와 차 한잔]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광복 70년. 반세기가 훨씬 넘는 긴 세월이 흘렀어도 일제 통치의 아픔과 그로 인한 후유증은 여전하다. 그 아픔의 큰 부분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와 잔재의 지속이다. 이윤옥(56)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은 잔재의 청산을 통한 바람직한 미래를 앞당기자며 움직이는 글쓰기에 천착해 사는 문화게릴라이다. 그동안 낸 저술도 그 방향에 집중돼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엔 이 땅의 식물들을 뒤져 아픔과 오류를 파헤쳤다. 책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인물과사상사) 출간에 맞춰 서울신문 편집국에서 만났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요. 그 아름답고 예쁜 우리 풀꽃에 그토록 음흉하고 질 낮은 일제의 흔적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4년 전 지인이 휴대전화로 보내온 ‘큰개불알꽃’ 사진을 본 게 시작이었다. “이 예쁜 꽃에 왜 이런 흉칙한 이름이 붙었을까.” 곧바로 국회도서관으로 달려가 1937년 일제치하 한글로 편찬된 최초의 식물도감 ‘조선식물향명집’을 이 잡듯이 뒤졌다고 한다. 그동안 출간된 각종 도감과 자료를 대조해가며 4년간 작업 끝에 일종의 고발서로 낸 셈이다 “‘조선식물향명집’의 2079종 식물을 일일이 조사했더니 번역도 제대로 못한 엉터리 이름이 수두룩했어요. 2079종의 식물 중 99종에 달하는 식물 이름에서 ‘조선’이 사라졌더군요. 국립생물자원관에서 만든 ‘한반도 고유종 총람’에 따르면 한반도 고유식물은 모두 33목 78과 527종인데 일본학자 이름으로 학명이 등록된 게 327종으로 무려 62%나 됐구요.” 그 오류와 악의의 증거는 일일이 말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개’자가 붙은 식물들은 대부분 일부러 격을 낮춰 부르거나 폄훼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개망초를 한번 보자. 개망초의 일본 이름은 히메조온(姬女)이다. 히메(姬)는 어리고 가냘프며 귀여운 것을 뜻하므로 애기망초나 각시망초로 옮기는 게 적당한데 개망초 등 일부 식물은 ‘히메’를 ‘개’로 번역해놓았다. “일본인들이 한반도 식물을 채집, 조사하면서 상당수에 ‘조선’‘고려’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지금 조선, 고려가 붙은 들꽃이름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식물 이름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조선이나 고려를 빼고 옮겼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봄을 대표하는 꽃인 개나리의 일본 이름은 조센렌교인데 번역자들이 조선 대신 ‘개’를 붙여 개나리라고 이름 붙였다. 개암나무, 개벚나무, 개비자나무등이 같은 경우이다. 큰개불알꽃, 며느리밑씻개도 모두 외양을 폄하하거나 왜곡된 이름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리 풀꽃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겠죠. 일제 압력 탓이 크고 식견과 지식도 일천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지금 야생화 도감이며 들풀, 꽃 사진집이 넘쳐나지만 대부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일제시대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 쓰고 있다. 개선에 앞장서야 할 학자나 대학교수들도 오래도록 써온 이름을 바꾸는게 옳지 않다며 뒷걸음질치기 일쑤라고 한다. “일제의 식민 침략은 단순한 영토 침략을 넘어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우리 고유의 이름마저도 창씨개명으로 없애버렸습니다. 식민의 쓰라린 역사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37년간 일본어와 고전을 연구하며 잔재 청산에 매달려 사는 그의 지론은 또렷해 보인다. “제대로 알고 바로잡아야 바람직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 아니겠어요.” 인터뷰 말미에 한 마디를 붙였다. “고대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일본 식물 이름을 추적하고 있어요. 2년쯤 후에 책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아베 담화] 반성·사죄 단어는 있었다…무라야마 담화 ‘덮어 쓰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에는 기존 주요 담화의 핵심 단어인 ‘식민지 지배’, ‘침략’, ‘반성’, ‘사죄’는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난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해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해 왔다”며 아베 총리가 직접 사죄하는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고이즈미 담화는 모두 일본의 행위를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규정하고 이로 인해 아시아 국가 사람들에게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며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밝혔다. 반면 아베 총리는 “침략은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두 번 다시 써서는 안 된다”, “식민지 지배와 영원히 결별해야 한다”면서 일본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식민지 지배 및 침략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또한 반성과 사죄의 표명은 과거형으로 언급해 본인이 직접 사죄하지 않고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전에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와 고이즈미 담화에서는 “국제적인 군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 “세계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부전(不戰)의 맹세를 견지하겠다”며 전쟁을 포기한 평화헌법을 준수하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어떤 분쟁에 있어서도 평화적·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면서도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어 세계 평화와 번영에 공헌하겠다”고 밝혔다. ‘적극적 평화주의’는 집단자위권을 용인하는 아베 정권의 외교안보 기조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여성의 존엄과 명예가 크게 상처받은 과거를 가슴에 새기겠다”고만 짧게 언급했다.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부의 존재와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며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와 반성을 표했다.  아베 담화의 원형은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가 발표한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 담화’(무라야마 담화)다. 이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대한 일본 정부 최초의 공식적인 사죄라는 평가를 받는다. 무라야마 담화에서는 “우리나라(일본)는 (중략)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여러분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면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천명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이라고 규정하며 “깊은 반성에 입각해 독선적인 국수주의를 배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이라는 표현은 위안부를 부정하고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축소하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조너선 밀러 연구원은 “무라야마 담화는 위안부 문제를 넘어 다른 문제들(식민지 지배, 침략)도 언급하며 포괄적인 사죄를 했다는 점에서 군 위안부 문제만 사죄한 고노 담화를 보완했다”고 평가했다.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는 전후 60주년 종전기념일 담화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담긴 ‘식민지 지배’, ‘침략’, ‘반성’, ‘사죄’ 등 핵심 단어와 문맥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면서 아베 총리를 비롯한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활동할 여지를 남겨 두었다.  한편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은 1991년 12월부터 약 1년 9개월간 진행된 일본 정부의 위안부 관련 조사 결과를 담화 형식으로 발표했다.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는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선언했다. 이어 “위안부로서 고통과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밝혔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반성과 사죄, 단어는 있었다… 무라야마 담화 ‘덮어 쓰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에는 기존 주요 담화의 핵심 단어인 ‘식민지 지배’ ‘침략’ ‘반성’ ‘사죄’는 담겨 있었다. 하지만 평화헌법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있어서는 기존 담화보다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 무라야마 담화와 고이즈미 담화에서는 “국제적인 군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 “세계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부전(不戰)의 맹세를 견지하겠다”며 전쟁을 포기한 평화헌법을 준수하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반면 아베 총리는 “어떤 분쟁도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면서도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어 세계 평화와 번영에 지금 이상으로 공헌하겠다”고 밝혔다. ‘적극적 평화주의’는 집단자위권을 용인하는 아베 정권의 외교안보 기조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20세기에 있어서 전쟁 중 많은 여성의 존엄과 명예가 크게 상처받은 과거를 가슴에 새기겠다”고만 짧게 언급했다.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부의 존재와 일본의 책임을 인정했으며 특히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명시했다. 이어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와 반성을 표했다. ●무라야마는 ‘전쟁·침략’ 첫 공식 사죄 아베 담화의 원형은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가 발표한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 담화’(무라야마 담화)다. 이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대한 일본 정부 최초의 공식적인 사죄라는 평가를 받는다. 무라야마 담화에서는 “우리 나라(일본)는 (중략)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여러분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줬다”면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천명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이라고 규정하며 “깊은 반성에 입각해 독선적인 국수주의를 배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이라는 표현은 위안부를 부정하고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축소하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조너선 밀러 연구원은 “무라야마 담화는 위안부 문제를 넘어 다른 문제들(식민지 지배, 침략)도 언급하며 포괄적인 사죄를 했다는 점에서 군 위안부 문제만 사죄한 고노 담화를 보완했다”고 평가했다.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는 전후 60주년 종전기념일 담화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담긴 ‘식민지 지배’ ‘침략’ ‘반성’ ‘사죄’ 등의 핵심 단어와 문맥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면서 아베 총리를 비롯한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활동할 여지를 남겨 뒀다. 또 일본이 저지른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강조했던 무라야마 담화와 달리 고이즈미 담화에서는 전후 60년 동안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수행했던 긍정적인 역할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고노 ‘위안부 존재·반성’ 명확히 담아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은 1991년 12월부터 약 1년 9개월간 진행된 일본 정부의 위안부 관련 조사 결과를 담화 형식으로 발표했다.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는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선언했다. 이어 “위안부로서 고통과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밝혔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금융상품 가입 때 서명 15회→4회로 줄어든다

    은행 대출에 이어 펀드 등 금융투자상품에 가입할 때도 서명 횟수가 대폭 줄어든다. 각종 설명서와 작성 서류도 핵심 설명서 등으로 간소화된다. 금융감독원은 금융투자상품 투자권유 절차 등의 간소화 방안을 마련해 오는 10월부터 시행할 계획이라고 12일 밝혔다. 그동안 투자 상품에 가입할 때 작성하는 서류들이 형식적이고 중복된 것이 많아 고객과 업계 모두 불편을 토로해 왔다. 우선 서류에 서명해야 하는 횟수가 15회 안팎에서 4회로 줄어든다. 금융사와 첫 거래를 할 때 작성하는 계좌개설 신청서, 상품 가입 신청서, 투자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투자자 정보 확인서 등 3가지 서류에만 개별 서명을 하면 된다. 나머지 서류는 일괄 서명으로 처리한다. 상품별 확인서를 작성하면서 자필로 써야 하는 100자 안팎의 형식적인 덧쓰기도 10자 이내로 줄어든다. 고객과 업계의 불만이 가장 많았던 설명서 교부 및 주요 내용 설명 확인서, 취약금융소비자 우선 설명 확인서는 상품 가입 신청서의 설명 내용 확인란으로 통합된다. 고령 투자자 투자숙려제·가족조력제 확인 서류는 폐지된다. 펀드와 주가연계증권(ELS) 등을 판매할 때에는 3장 안팎의 간이투자 설명서나 핵심 설명서를 활용해 핵심 사항만 직접 설명하고, 세부 내용은 본설명서를 참조하도록 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해외여행 | 터키,누군가는 내 뼈 위에서 파티를 즐기리라③History & Heritage

    해외여행 | 터키,누군가는 내 뼈 위에서 파티를 즐기리라③History & Heritage

    ●History & Heritage 관념이 구체화 되는 순간 터키를 여행하면서 오늘날의 국경과 지도적 공간 개념을 허물지 않는다면, 상당히 혼란스러진다. 또한 유럽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없다면 여행 내내 수도 없이 등장하는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과 아고라, 그리스 양식의 건축물과 신전들, 기독교 성화 위를 덮은 코란의 문구들이 계통 없이 뒤죽박죽된다. 로마를 보려면 터키를 먼저 가라 아나톨리아 반도는 초기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고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멸망되기까지 오랫동안 그리스인들이 주인이었던 땅이었다. 그리스 유물을 볼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서로마가 제국의 이름으로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에는 로마의 속주였던 땅이었으니 로마의 흔적도 남아 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집단거주지, ‘차탈회육’ 이 발견된 곳이고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든 히타이트 문명BC 2000년경이 태동한 곳이니 선사시대의 유적을 확인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스 로마 문명을 보려면 터키를 먼저 가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안탈리아에서 동쪽으로 47km 떨어진 곳의 아스펜도스에는 원형극장이 있다. BC5세기에 이미 은화를 만들어 쓸 정도로 번성했던 이 지중해 도시는 이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슬람의 시대를 바람처럼 거치면서 풍화되었다. 지금은 작은 마을로 남았지만 과거의 영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는 곳이 바로 원형극장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찍부터 연극이 발달했다. 그들은 청명한 지중해 기후를 즐기며 야외극장에서 축제를 했고 토론을 했고 비극과 희극의 경연대회를 했다. 호전적인 로마인들은 극장을 검투사 경기장의 용도로 더 많이 활용했다. 그리스는 언덕과 경사면을 깎아 극장을 만들었고 로마는 평지에 아치를 받쳐 극장을 완성했다. 유럽 여행을 가면 성당을 질리게 본다는데 터키 지중해 여행에서는 원형 경기장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경기장이 저마다의 다름으로 다가오는 탓에 성당처럼 질릴 겨를은 없다. 건축물의 형태가 다르고, 훼손의 정도가 다르며, 공명의 상태가 다르고, 주변의 산세가 다르다. 무엇보다 이미 기원전에 ‘보고’ ‘보여지는’ 쌍방향의 문화를 즐겼다는 것이, 여전히 기원전 하면 돌도끼를 든 원시인을 생각하는 내 머리에는 질투 섞인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아스펜도스의 원형극장은 <명상록>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161~180년 재위를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최대 2만명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극장이다. 보존 상태도 완벽하지만 특히 오케스트라에서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해도 객석 어디서든 잘 들리는 공명감이 미스터리한 건축 기법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죽음의 모습에서 삶을 읽다. 안탈리아 좌측,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서쪽 끝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곳이 ‘리키아Lycia’다. 그리스어가 아닌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사용할 정도로 독창적 문명을 키워 온 땅이다. 리키아의 중심도시 미라Myra의 고대 유적지는 뎀레Demre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도 원형극장이 있는데 고대 유적지의 초입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절벽 위의 무덤들이다. 고대의 리키아인들은 죽은 자를 땅에 묻지 않고 수직 절벽에 굴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그 안에 석관을 안치하는 매장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시신을 땅에 묻으면 썩을 것이니 영혼 불멸과 사후 세계를 믿었던 그들은 영혼의 집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지위가 높으면 더 높은 절벽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늘에 가깝게 다가갈수록 부활도 빨라질 것이라는 순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키아의 무덤에서는 수천년 전에 살았던 리키아 사람들의 순망함을 보면서도, 정작 그들을 묻었던 사람들의 도시는 무덤 아래 땅 밑에 묻혀 버린 그 기묘한 아이러니를 목격하게 된다. 미라에서 좀 더 남쪽 바닷가로 내려가면 마을 전체가 아예 바다 속에 잠겨 버린 곳도 있다. 케코바Kekova라는 곳이다. 2세기경 지진으로 수몰됐다고 하는데 해안가에는 목욕탕과 집터, 나지막한 돌산에는 당시의 건축물과 석관묘의 흔적이 남아 있고 수심 5~6m의 코발트빛 바다 아래로 수중 도시가 희미하게 들여다보인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Chatting 수다거리 미라Myra의 바닷가 마을, 뎀레Demre가 유명한 것은 바로 산타클로스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에 루돌프 사슴을 타고 와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 그 동화 속 할아버지의 실제 인물인 성 니콜라우스270년~346년경가 주교로 있던 곳이다. 산타클로스와 성 니콜라우스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먼저겠지만, 그리스 정교회나 가톨릭, 기독교에서는 대표적인 성인으로서 성 니콜라우스를 숭배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억울한 사람에게 힘이 돼 준 그의 생전의 업적이 약자와 뱃사람과 여행자의 보호 성인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주교로 있던 미라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는 폐허처럼 남아 있다. 3세기부터 있었던 교회의 자리에 6세기, 현재 모습의 교회가 지어졌고 이후 증축되었으나 이슬람의 점령과 자연 재해 속에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파손됐다. 그리고 이슬람을 믿는 터키의 무관심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지는 방치되었다. 중앙 홀과 두 개의 회랑이 있는 바실리카 형식의 교회는 입구 바닥에 모자이크 장식이 있고, 현관 벽에 파손된 프레스코 성화가 있다. 니콜라우스 성인에 대한 공경심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이곳을 둘러볼 이유가 있을까 싶게 우중충한 모습이다.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은 죽은 성인을 신화로 포장해서 유통시키는 자본의 힘이다. 성 니콜라우스 생전의 수많은 선행은 2차 대전 후 관광산업 부활의 기치를 내건 핀란드에 의해 산타클로스로 재탄생했고 여기서 굴뚝, 선물, 어린이, 순록과 같은 장치물들이 등장한다. 산타클로스의 빨간 색, 하얀 색의 옷 역시 1930년대 코카콜라 광고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결국 우리는 자본이 만들어 낸 이미지 속에서 산타클로스를 소비했다는 것인데, 생기 하나 없는 성 니콜라우스 교회를 나오면 그 주변의 기념품 가게들의 활기찬 모습에서 자본의 위력을 실감한다. 아무리 터키의 이슬람을 세속 이슬람이라고 하지만, 십자가를 기념품으로 진열해 놓고 성가를 틀어놓는 그 태연함에 웃음마저 나온다. 여하튼 미라를 갈 때, 산타클로스의 기원 또는 원형을 찾아 간다는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뭔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산타의 기원을 찾으려면 코카콜라 공장을 가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라는 성 니콜라우스의 봉사와 희생 그리고 선행의 행적을 기리는 장소로서 더 빛날 것이다. 터키에서 듣는 하루 다섯 번의 ‘아잔’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다 보면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윙하고 울린다. 하루 다섯 차례일몰 직후, 밤, 새벽, 낮, 오후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방송이고 이를 ‘아잔’이라고 한다. ‘아잔’은 ‘알라는 위대하다’로 시작해서 ‘알라 외에 신은 없다’ 로 끝난다. 터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비록 터키가 이슬람 국가로서는 거의 유일한 민주국가이자 탈 종교국가이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세속 이슬람주의라고 하더라도 모스크에 모여 기도하는 의식은 철저히 지킨다. 이슬람을 생활이 아닌 뉴스 정도로 접하는 우리에게, 터키와 같은 이슬람 국가를 여행한다는 것은 이슬람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는 터키를 여행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비 이슬람교’가 좋았다. 여자들에게 부르카또는 히잡 쓰기를 강요하지 않고, 자기 종교만을 위한 폭력을 성전 ‘자하드’라고 억지 부르지 않는 탈 근본주의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평화와 평등이라는 이슬람 사상의 중심을 지켜 나가고 있었고, 무함마드 자체가 아닌 그가 추구한 삶을 살기 원하며, 하느님알라 말씀에 복종하고 기독교의 복음과 선지자 예수까지 믿음의 범주로 수용하는 포용성을 지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장미로 유명한 데니즐리의 구네아겐트 작은 마을에서 ‘아잔’의 울림을 들었을 때, 나는 이것도 누군가에게는 소음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자동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한적함, 길거리 햇볕 좋은 곳이나 가게 앞에 나와 앉아 한담을 나누는 많은 노인들의 졸음 같은 평화의 한가운데서 ‘아잔’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 거침 없는 기도 소리가 내 고막에 금을 쩍쩍 가게 하고 신경을 긁기 시작했을 때,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이 누릴 고요함의 권리는 왜 무시하는 것인지 반감이 생겼던 것이다. 나중에 이 생각을 터키 사람에게 말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늘 아잔을 듣다 보면 그 소리에 너무나 익숙해진다.” ●Sentiment 그리고 감상 한 조각 감동은 셔터를 누르게 하고 감상은 볼펜을 찾게 한다. 엽서든, 수첩이든 혹은 빈 종이든, 무어라도 끄적거리고 싶은 욕망을 늘 나는 특별한 여행지에서 경험한다. 그 특별한 장소란 좀 더 쇠락하고, 밀려 있고, 버려지거나 남겨진 곳들이다. 내 뼈 위에서도 파티를 터키의 지중해 여행에서 일행과 떨어져 자발적 고립을 선택했던 곳은 두 군데였다. ‘사갈라소스Sagalassos’는 고원에 세워진 고대도시다. 해발고도 1,450~1,700m 지점에 유적지로 남아 있는 이 도시는 그 잔해만으로도 과거에 얼마나 영화로웠는지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게 한다. BC333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함락당한 후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BC25년, 로마령이 되면서 절정의 시기를 갖게 된다. 518년의 지진과 이후의 아랍 공격 등으로 폐허가 된 사갈라소스는 1706년 탐험가 파울 루카스에 의해 발견된 이후 1985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하얀 산이라는 뜻을 가진 아크다으산 바로 아래에 아고라, 공회당, 도서관, 대형 분수, 공중목욕탕 들이 도시 형태로 흩어져 있지만 특별한 감상은 원형경기장에서 맞이한다. 터키에서 가장 높은 곳의 고대 극장 무대는 무너졌지만, 9,000석 규모의 객석들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있으면 원형경기장의 풍경이, 그리고 그 함성이 단번에 두루마리 펴지듯 죽 펼쳐진다. 파묵칼레 옆 ‘히에라폴리스’에서는 어떤 이에게 긴 편지를 썼다. 혼자 품고 있기에는 이 감상이 너무 벅찼다. BC190년경 페르가몬 왕국 때 세워진 이 폐허의 도시는 공간적으로 넓고 여백은 충분하다. 원형 경기장을 오르는 언덕에 유채꽃은 만발하고 그 길에서 자유와 해방감과 상상력은 무르익는다. 아스펜도스처럼 보존 상태가 좋으면서도 경치는 압도적으로 더 좋다. 1,200개의 무덤이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공동묘지도 히에라폴리스에서 볼 수 있다. 죽은 도시를 바라보며 아래쪽의 관광객들은 수영과 온천을 즐긴다. 고대와 현대, 죽음과 삶, 지止와 동動의 대칭들이 천연덕스럽게 공존하는 곳, 히에라폴리스에서 시간과 공간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어느 해, 내 뼈 위에서 누군가는 파티를 즐길 것이다. ▶travel info Turkey AIRLINE 터키 가는 길 인천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는 비행기로 12시간이 걸리며 터키항공,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이 운행중이다. 이스탄불에서 안탈리아까지는 국내선으로 1시간 20분이 걸린다. 터키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전압은 220V로 한국과 같으며 화폐는 터키리라TL. 1리라는 한화로 약 400원 정도. Hotel Regnum Carya Golf & Spa Resort 안탈리아 벨렉에 위치한 이 호텔은 골퍼들에게 특화된 리조트 호텔이다. 멋진 바다와 해변, 워터 파크와 넓은 수영장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객실도 고급스럽다, 거대한 열대 나뭇잎으로 포인트를 준 리셉션에서의 웰컴 샴페인과 와인, 그리고 디저트 등이 이 호텔의 첫인상을 풍요롭게 해준다. 객실 미니바를 포함해 레스토랑, 바 등에서의 모든 알코올, 음료 등은 무료다. 레스토랑의 메뉴도 매머드급이다. 저녁 8시, 풀장에서의 불꽃 페스티벌도 환상적이다. Kadriye Bolgesi, Uckum Tepesi Mevki, Belek 7500, Turkey fOOD 입이 호강하는 터키 음식 지중해 음식이 대개 그러하듯 터키 음식은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하고, 눈보다 입을 즐겁게 하며, 덧입힘보다는 날것과 원재료의 향과 맛을 중요하게 여긴다. 잘게 썬 고기 조각을 구워 먹는 전통요리 케밥은 양고기, 쇠고기, 닭고기로 만든다. 케밥의 종류는 수십가지가 넘는데 고기를 꼬챙이에 끼워 굽는 시시 케밥과 도네르 케밥이 잘 알려져 있다. 케밥은 요구르트로 만든 시원하고 시큼한 맛이 나는 아이란과 함께 먹기도 하며 터키식 볶음밥인 필라프와 함께 먹기도 한다. 또한 올리브를 빼놓을 수 없다. 오이, 양파, 올리브 등을 크게 썰어서 올리브유를 넣고 만드는 샐러드는 언제나 편하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넓게 편 밀가루 반죽 위에 토마토, 마늘, 고추, 쑥갓, 쇠고기와 양고기, 후추와 각종 향신료, 치즈 등을 올린 다음 큰 화덕 속에 넣고 익혀낸 후 한 입 크기로 잘라 내오는 피데도 참 맛있다.홍차 맛 터키 차이 터키 사람들은 차도 많이 마신다. 하루에 보통 열 잔 이상의 차를 마시는데 우롱차를 더 발효한 것이 터키의 차이chai다. 엷은 홍차 맛이 난다. 차이를 파는 차이하네Chaihane나 차이에비Chaievi는 문화와 정보의 사교장이며, “와서 차 하잔 하시오구엘 차이 Guel Chai”는 그들의 관용어다. 실제 물건을 사는 가게에서도 주인은 차를 시켜 손님에게 권하기도 하는데, 뜨거운 차를 호호 불면서 가격을 흥정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이래저래 터키 사람과 차를 마시고 있으면 마음이 느긋해지고, 덩달아 착해진다. 죽음만큼 강렬한 커피 커피도 터키인의 기호품이다. 터키에서는 커피를 ‘카흐베Kahve’라고 부른다. 커피 가루를 넣어서 끓여내기 때문에 잔에 가루가 남는다. 그러니까 터키 커피는 2/3 정도만 마신 후 남겨야 한다. 터키 사람들은 커피를 음식과 차의 향기를 개운하게 씻어 주는 마무리로 생각한다. 또한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는 것은 그 사람의 역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행위로 여긴다. 터키 속담에, ‘한 잔의 커피에는 40년의 추억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내 앞의 사람의 40년 역사를 존중하거나, 또는 40년 동안 나에게 커피를 대접한 사람을 존경하고 기억한다는 중의적 의미이다. restaurant 케바치 카디르Kebapcı Kadir 1851년부터 164년째 영업을 하고 있는 터키에서 가장 오래된 케밥집이다. 장미의 도시 으스파르타 시청 뒤에 있다. 할리우드 배우 등 셀러브리티들이 많이 찾는 탓에 가게 벽에는 유명인들의 사진, 각종 상장 등이 빼곡하다. 염소와 양을 꼬치에 끼운 뒤 대형 화덕에 아침 7시부터 굽기 시작하는데, 당연히 기름이 쪽 빠지면서 고기가 아주 쫄깃해지고 담백해진다. 가격은 1인분에 15~30리라 수준. Ulu Cami Yanı ,Valilik Arkası Kebapcılar Arastası No:8 +90 246 218 24 60 에디터 트래비 글 윤용인 사진 Bar & Dining 김은주, 윤용인 취재협조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02-336-3030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씨줄날줄] 한국 표준시 논란/김성수 논설위원

    “일제의 침략 이래 사용돼 온 현 표준시간은 오는 3월 21일(춘분) 상오 0시 30분을 기하여 구 한국시간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동일(同日) 상오 0시 30분이 새로운 한국시간으로 상오 0시 정각이 된다.” ‘다시 찾은 우리 표준시간’이라는 제목의 1954년 3월 14일자 신문기사는 30분을 늦추는 표준시(標準時) 변경을 예고하고 있다. 일본에 맞춰 동경(東經) 135도를 기준으로 했던 표준시간이 우리나라를 통과하는 동경 127도 30분 선으로 바뀐다는 내용이다. 국립중앙관상대장 이원철 박사는 일본과의 감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며 한반도의 중앙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표준시를 정하는 게 타당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표준시란 한 나라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지방 평균 태양시를 말한다. 지구를 세로로 나눈 경도(經度)를 기준으로 정한다. 영국 그리니치천문대를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180도를 15도씩 나누어 모두 24개의 자오선이 있다. 15도마다 1시간의 시간 차가 있다. 영토가 넓은 나라들은 여러 개의 표준시를 사용한다. 미국에는 동부, 중부, 산악지대, 태평양 표준시 등 4개의 표준시가 있다. 동경 120도가 베이징 표준시이고 동경 135도가 일본의 표준시다. 우리나라는 함흥-원산-가평-양주-이천-청주-대전-순천으로 이어지는 동경 127도 30분을 표준시로 삼는 게 지리적으로 보면 맞다. 이 경우 우리는 중국보다는 30분이 빠르고, 일본보다는 30분 느린 시간을 쓰게 된다. 우리나라만큼 표준시가 많이 바뀐 나라도 드물다. 정치적 산물이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뒤 1908년 4월 1일부터 동경 127도 30분 기준의 표준시를 사용했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1912년 1월 1일을 기해 강제로 우리나라 표준시를 일본의 표준시인 동경 135도 기준으로 바꾼다. 해방 후 유지됐지만 이승만 정권은 1954년 3월 21일부터 표준시를 동경 127도 30분으로 환원한다. 그러나 1961년 8월 10일부터 다시 일본 표준시로 바꿔 지금까지 쓰고 있다. 2013년 11월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이 표준시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는 등 표준시를 재조정하자는 주장은 그간 끊이지 않았다. 정부는 국제 관례상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가 없으며, 북한도 동경 135도를 쓰기 때문에 통일 후에나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어제 이번 광복절부터 동경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표준시를 바꿔 지금보다 시간을 30분 늦춘다고 발표했다. ‘평양시간’이 생겨나는 셈이다. 외국인 일본과는 같은 시간을 쓰면서 같은 한반도에 있는 북한과는 30분 시차가 나는 기묘한 상황이 됐다. 개성공단 입출경 때 30분의 시차를 조율해야 하는 등 혼란도 예상된다. 비용이 만만치 않겠지만 ‘시간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표준시 변경을 다시 논의해 볼 때가 됐다. 김성수 논설위원 sskim@seoul.co.kr
  • 37세에 세계 모든 나라(198개국)를 가보다

    37세에 세계 모든 나라(198개국)를 가보다

    37세가 되기까지 세계 모든 나라(198개국)를 여행한 노르웨이 남성이 화제다. 세계적인 인터넷 매체인 비즈니스 인사이더가 6일 소개한 주인공은 노르웨이에서 방송사(NRK)에 근무하는 군나르 가르포스(39). 여행 마니아인 가르포스는 2008년 이미 85개 나라를 여행한 뒤, 아예 198개 모든 나라를 여행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목표는 그로부터 5년 만인 2003년 5월 8일 달성됐다. 그때 가르포스의 나이는 불과 37세. 세계 모든 나라를 여행한 최연소 사나이가 된 것이다. 그는 이후 ‘어떻게 198개국을 여행했을까’란 책을 출판하고, 웹사이트도 만들었다. 보도에 따르면 가르포스는 198개국을 여행하면서도 계속 직장에 다녔다. 직장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여행을 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여행을 일에 접목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가르포스가 보내준 여행 사진중 45장을 설명을 붙여 소개했다. 사진= 군나르 가르포스/ 비즈니스 인사이더 이미경 기자 btkseoul@seoul.co.kr
  • ‘체험의 장’ 남산공원 관리사무실

    ‘체험의 장’ 남산공원 관리사무실

    남산공원 관리사무실이 ‘서당’으로 변신해 화제다.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등 명소로 탈바꿈하는 분위기다. 서울시는 남산공원 호현당(옛 관리사무소)에 하루 50여명의 시민이 방문, 한복 입기와 좌우명·가훈 쓰기, 마당 전통놀이 등을 즐기고 있다고 6일 밝혔다. 지난 5월 활용도가 낮았던 관리사무실 공간을 시민체험공간으로 리모델링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시 관계자는 “처음에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많이 방문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케이팝 등 한류문화를 넘어 한국문화를 체험하고 싶어 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5일에는 중동 오만의 젊은이 10명이 호현당을 찾았다. 중동에서 한국문화를 알리는 사업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 KCC(Korean Cultural Club)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이들은 호현당에서 우리의 전통 예절과 차 문화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처음 알게 됐다는 마리암 알자드잘리(27)는 “사극을 통해 봤던 한복을 직접 입어 보고, 또 서당 훈장님께 한국식 인사법 등을 배워 보니 한류 드라마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면서 “한국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만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전승배(44)씨는 “현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 전통 문화를 보여줄 기회가 적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호현당 전통문화 체험으로 오만 학생들에게 케이팝과 드라마 이외에 우리 문화를 알려줄 수 있어 기쁘다”면서 “앞으로 외국인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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