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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림부 ‘죽을맛’

    농림부가 요즘 죽을 맛이다. 쌀 협상 비준안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에다 김치파동 후유증,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여부,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 등 산적한 현안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이들 쟁점 중 어느 하나도 가볍게 다룰 사항이 아닌데다 국민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돼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다.쌀 협상을 둘러싼 ‘이면(裏面)합의’ 논란이 잠잠해질 때만 해도 한숨 돌리는 듯했던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농림부의 한 관계자는 17일 쌀 협상 비준안이 농민들의 반발로 계속 늦어지는 것과 관련,“한마디로 답답한 심정”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23일 비준안 처리가 가능하겠느냐.”고 걱정했다.10년간 쌀 관세화를 유예하고 농민들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대부분 들어줬는데 더 이상 뭘 얻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김치파동은 진정되는 상황이지만 자라보고 놀란 ‘농림부의 가슴’은 여전하다. 여인홍 채소특작과장은 “배추값이 떨어지고 있지만 무슨 일이 또 터질지 모르는 것 아니냐.”며 긴장감을 감추지 않았다.5t 트럭당 400만원까지 올랐던 배추값이 최근 출하물량이 늘면서 300만원으로 떨어졌으나 평년 가격보다는 70%나 비싸다. 일본에서 한국산 김치를 검사한 결과 기생충 알이 나오지 않은 점에 위안을 찾으면서도 김치의 일본 수출이 줄기 시작하자 타이완과 홍콩 등지로 여파가 번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전문가들은 오는 29일 가축방역협의회를 열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지만 내부 전문가회의에선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에 대해 이견이 없었다. 전문적인 판단에만 의존하면 수입 재개 결정이 나올 가능성은 크다. 하지만 그동안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쇠고기 수입문제를 꾸준히 거론해 온 점을 의식하고 있다.자칫 미국의 압력에 굴복, 국민건강을 볼모로 맡겼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DDA 농업협상은 우리에게 점점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오행겸 駐EU대사 “한국, 高분배 유럽 따를 필요 없어”

    TEXT ♥“우유가 강이 되고 버터가 산이 되는데 개혁을 하지 않겠습니까. 유럽은 지금 비효율의 늪에서 벗어나 ‘EU합중국’으로 환골탈태하고 있습니다.” 기 베르호프스타트 벨기에 총리의 방한에 맞춰 서울에 온 오행겸(58) 주 벨기에대사관 겸 유럽연합(EU) 대사는 10일 “우리는 유럽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면서 미국보다 유럽을 ‘벤치마킹’할 것을 주장했다. 오 대사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배낭여행지로 유럽을 꼽지만 유럽에 관한 전문서적이 과연 몇권이나 되느냐.”면서 “50여년에 걸친 EU의 통합과정은 우리에게 ‘지식의 보고(寶庫)’와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국내 쌀 협상 비준안 문제를 꺼내자 오 대사는 유럽의 농업 현실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2차대전 이후 유럽 각국은 피폐한 농업을 살리기 위해 생산장려금과 수출보조금을 지급하고 역내를 보호하는 ‘공동농업정책(CAP)’을 채택했는데, 그러다보니 농산물이 과잉생산됐고 농업은 점차 경쟁력을 잃게 됐습니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우유의 강과 버터의 산’을 양산한 농산물 가격지지 정책을 줄이면서 경쟁적이고 친환경적인 시장을 전제로 한 ‘농가소득직불제’를 도입, 농업기반을 되살리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오 대사는 우리가 결코 배워서는 안 될 분야는 유럽의 노동시장이라고 했다.“직원을 해고하려면 1년 전에 통보해야 하는데, 그래서야 기업이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겠습니까.”특히 해고를 통보한 순간부터 다른 직장을 구하기 위해 별도의 휴가를 1주일에 하루씩 주는데 그 비효율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라고 했다. 주 34시간 근무제가 근로자의 복지증대에 기여하기보다 ‘오버타임’에 대한 수당지급으로 기업의 부담만 키운 측면이 크다고 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떨어진 결과로 유럽의 실업률은 8∼10%에 이르는 반면 성장은 1%대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유럽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부(富)의 분배와 효율성 측면에서 북유럽 국가는 우수하다. 해고가 되더라도 정부가 보조하기 때문에 노동시장의 유연성도 높지만 그만큼 세금을 더 거두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분배구조가 좋지만 효율성이 떨어지고, 영국은 효율성은 높은 반면 분배 측면에선 뒤떨어진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의 국가는 모두 뒤처진다는 것. 우리나라의 경우 유럽에 비하면 분배수준이 낮고 효율성은 중간선이지만 굳이 북유럽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예컨대 벨기에는 지역갈등과 양극화 문제가 있지만 그대로 안고 가면서 정치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 대사는 특히 화해를 바탕으로 한 EU의 평화구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진정한 ‘참회’로 화해의 길을 열었고, 유럽은 강대국이 아닌 벨기에를 유럽통합의 무대로 삼은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만약 ‘동북아공동체’가 논의된다면 출발점은 일본이 주변국에 용서를 구하는 것이고, 그 아이디어는 우리나라가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동북아균형론’과는 다른 차원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벨기에처럼 과거 ‘전쟁터(battle field)’였던 한반도가 ‘화해의 장’으로서 적절하다는 주장이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쌀 의무수입’ 내년으로 늦춰질듯

    ‘쌀 의무수입’ 내년으로 늦춰질듯

    국회에서 쌀협상 비준안 처리가 지연됨에 따라 지난해 미국 등 9개 협상국과 약속한 올해 22만 5000t의 쌀 수입 이행이 사실상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북핵 관련 6자회담 재개 이후 회복된 국제 사회에서의 대외 신인도 추락뿐 아니라 내년에도 계속될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이 우리나라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우려된다. ●국회 비준안 상정 또 연기 18일 농림부에 따르면 여야가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쌀 비준안을 상정하지 않기로 합의함에 따라 올해 수입물량 이행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농림부 관계자는 “비준안이 19일 통과된다 하더라도 입찰공고 등의 일정을 감안할 때 연내 수입물량 이행은 빠듯한 상황이었다.”면서 “이달 말이나 다음달로 비준안 처리가 늦춰짐에 따라 협상 9개국으로부터 항의와 최악의 경우 내년에 WTO에 제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쌀 수입 이행을 위해서는 입찰공고를 한달간 해야 한다. 응찰 과정에서 각국이 제시한 쌀값과 품질을 검증하고 현지를 방문하는 등 세부일정을 감안할 때 쌀 수입에는 최소한 3개월이 필요하다는 게 농림부의 설명이다. 정부는 오는 12월중 DDA 협상이 타결되면 내년 10월까지 농업·서비스·비농업 부문의 이행계획서를 제출, 각국과 다자 및 양자협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 등과 타결한 쌀 협상안을 첫 해부터 지키지 못해 DDA 이행계획서 협상과정에서 적지 않은 불이익을 받을 소지가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DDA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관세를 높게 유지해야 국내 농산물을 보호할 수 있는데,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 협상국들은 쌀 협상안이 지켜지지 않은 점을 내세워 우리측 제안에 제동을 걸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 DDA 협상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주도하는 가운데 수출개도국을 대변하는 중국과 인도 등의 ‘G-20’그룹이 중재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쌀 협상 9개국에 포함됐다. 게다가 DDA 농업협상의 쟁점이 된 관세율 상한 설정, 관세 감축률 및 수입의무물량(TRQ) 결정, 민감품목 지정, 한국의 개도국 지위 등과 관련해 G-20은 미국 등과 우리나라가 제시한 주장의 중간점에 서 있다. ●DDA 협상 결과 본 뒤 처리해도 무방한가 야당과 농민단체들은 DDA 농업협상을 지켜본 뒤 쌀 협상 비준안을 처리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관세화를 낮추며 시장을 개방하자는 협상인 만큼, 결과가 나온 뒤 관세화를 유예한 지난해 협상안과 비교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쌀 수입을 저지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EU가 지금까지의 입장을 선회, 관세화 상한에 동의하고 관세를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할 수 있는 ‘민감품목’ 지정에도 우리에게 불리한 비율을 제시, 협상 테이블에서 우리측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특히 민감품목에 지정된 품목이라도 수입의무물량을 최소한 국내 소비량의 7.5%부터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쌀 비준안이 부결되거나 내년으로 늦춰져 관세화(시장 완전개방)로 갈 경우 농가피해는 당장 눈앞에 나타난다. 반면 쌀 비준안이 통과되면 최소한 10년간은 관세화를 적용받지 않고 수입물량도 국내 소비량의 4%에서 출발해 10년 뒤인 오는 2014년까지 7.9%로 통제할 수 있어 시장개방에 대비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다. ●농민단체 “추곡수매 부활” 요구 농민단체가 전국적으로 쌀 비준안 처리 반대와 추곡수매 부활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은 정치적 일정 등을 감안한 측면이 없지 않다.‘10·26’ 재·보선을 앞둔 정치권으로서는 ‘농심’을 건드려야 ‘이득’될 게 없다고 판단, 쌀 비준안 처리를 이달 말이나 다음달 14일로 미뤘다. 그러나 농민단체들의 시위는 산지 쌀값의 하락에 따른 소득보전이 1차적 목적이라는 지적이다. 올해부터 추곡수매제가 폐지되고 공공비축제를 도입, 시가로 쌀을 매입하게 되자 농가들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산지벼의 쌀값이 지난해보다 20% 떨어지자 농가들은 소득보전을 요구하며 수매량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는 공공비축 물량 400만섬 가운데 250만섬은 당국이 정해진 가격의 ‘건조벼’로,150만섬은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시가의 ‘산지벼’로 각각 사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RPC가 산지가격을 낮게 책정, 농민들과 마찰을 빚자 정부는 농가가 원하는 형태로 쌀을 수매하고 공공비출 물량도 100만섬 추가로 수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추곡수매는 농가에 보조금을 주는 제도로 WTO 협정에 위배되나 공공비축제는 국가가 비상시에 대비, 일정량을 비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조금 감축 대상이 아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클릭이슈] DDA협상 쟁점

    [클릭이슈] DDA협상 쟁점

    세계무역기구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이 우리나라에 상당히 불리한 쪽으로 급진전되고 있다. 윤장배 농림부 통상정책관은 17일 “각국의 입장을 파악하자는 ‘청취모드’가 지난주부터 세부원칙을 정하자는 ‘협상모드’로 바뀌면서 우리나라에 굉장히 어려운 상황으로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농민단체와 야당 일각에서는 DDA 농업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 쌀 협상안 비준을 늦춰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추세로 농업 협상이 진행된다면 관세화 유예를 전제로 한 쌀 협상안 포기는 마치 ‘굴러들어온 호박’을 내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다. ●관세상한 100% 안팎에서 정해질 듯 DDA 협상은 모든 품목의 ‘예외없는 관세’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각국이 관세를 물리되 수입 빗장은 활짝 열어 두자는 취지다. 그러나 “제한없는 관세 부과는 곤란하다.’는 미국의 주장에 따라 관세율에 상한을 두는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됐다. 미국은 관세상한을 75%로 하되, 개도국에는 조금 여유를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유럽연합(EU)은 상한을 두는 것에 반대하다가 지난주부터 ‘100% 설정’으로 선회했다. 수출 개도국을 대변하는 중국, 인도, 아르헨티나 등의 ‘G-20’그룹은 선진국 100%, 개도국 150%로 분리·제시했다. 농산물 수입국인 한국과 일본 등 ‘G-10’그룹은 관세상한에 반대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저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윤 통상정책관도 “우리의 제안대로 될 확률이 적다.”고 말했다. 현재 1452개 농산물 품목 가운데 관세율이 100% 이상인 품목은 참깨(630%), 마늘(360%), 고추(270%), 감귤(144%) 등 142개에 이른다. ●관세 덜 깎는 민감품목 지정도 험난 DDA 협상국들은 각국의 사정에 따라 관세를 다소 높게 물릴 수 있는 ‘민감품목’ 지정을 허용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는 전체 품목 가운데 10%인 140여개는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1%,EU는 8%로 맞서고 있다. 민감품목에 지정되면 기존의 관세율을 10∼20% 덜 깎아 준다. 예컨대 관세율을 50% 깎기로 합의할 경우 관세율이 150%였던 일반 품목은 75%가 되지만 민감품목에 지정되면 감축률 30∼40%만 적용, 관세율은 90∼105%로 다소 높아진다. 그만큰 수입가격이 비싸져 국내 해당 농산물을 보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는 쌀 관련품목 16개를 민감품목에 지정할 방침이다. 문제는 민감품목에 지정되면 관세를 덜 깎는 만큼 수입의무물량(TRQ)을 국내 소비의 7.5%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고 미국이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우루과이라운드(UR) 쌀 협상에서 최소 수입의무물량을 4%로 인정받았기에 DDA 협상에서는 5%부터 적용하자는 입장이다. 물론 쌀 협상안이 비준되면 10년간 관세화를 피할 뿐 아니라 TRQ도 4%에서 2014년까지 7.96%로 낮게 적용받는다. 반면 관세화로 갈 경우 민감품목에 지정되더라도 당장 국내 소비량의 5∼7.5%만큼 이상의 개방이 불가피, 농가 피해는 커질 전망이다. ●농업부문의 개도국 지위받기 어려울 듯 농림부 관계자는 “선진국이나 개도국 모두가 우리나라의 개도국 지위인정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개도국 지위를 받으면 관세 감축률은 선진국 수준의 3분의2를 적용, 상대적으로 고관세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관세상한이 합의되더라도 선진국보다는 높게 설정할 수 있다. 하지만 개도국 지위는 모든 분야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는 12월 홍콩에서 열릴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 DDA 협상이 일괄 타결돼 내년에 각국별로 이행계획서가 제출되면 부문별로 협상이 다시 이뤄지게 된다. 예컨대 관세상한은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더라도 나라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민감품목이나 TRQ 설정시에는 선진국에 가까운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 WTO는 협상이 타결되면 10개월 이내에 각국이 이행계획서를 내도록 시한을 정해 실제 DDA 협상이 이행되는 시점은 2008년이 될 것으로 농림부는 보고 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수입농산물 관세상한제 가능성

    수입 농산물에 일정 수준 이상의 관세를 매기지 못하는 관세상한이 도입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관세상한이 도입되면 소비자는 싼값에 농산물을 살 수 있어 좋지만 해당 농가에는 큰 타격이 예상돼 쌀 협상에 이어 다시 국내 농업계가 큰 홍역을 치를 전망이다. 16일 농림부에 따르면 9∼10월 잇따라 열린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에서 관세상한에 반대했던 유럽연합(EU)이 관세상한 100%를 내놓았다. 미국은 관세상한 75%를 이미 제시했었다. 수출개발도상국그룹(G20)은 선진국 100%, 개도국 150%를 내놓은 상태다. 한국과 일본 등 농산물수입국그룹(G10)은 관세상한에 반대하고 있지만 세(勢)에서 밀리는 형국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쌀 16개 품목 등을 포함해 142개 농수산 품목에 대해 100% 이상의 고관세를 물리고 있다. 홍삼류 753%, 참깨 630%, 마늘 360%, 고추 270%, 감귤 144% 등이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관세상한선이 100%로 정해지면 고추 관련농가 연간소득은 올해 7200억원에서 2010년 3600억원으로 절반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마늘 생산농가의 연간소득은 2005년 2300억원대에서 2010년 1400억원대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관세상한이 설정되지 않아도 대폭의 관세감축은 불가피한 사항이다. 미국은 관세구간을 4개로 나누고 최고 관세구간은 90%의 감축률 적용을 내놨다. 이렇게 되면 참깨의 관세는 현재 630%의 10%인 63%만 남게 된다. EU도 관세를 4개로 나눴으나 최고 관세에 대해서는 50∼60%의 감축안을 제시했다.G20은 선진국의 최고 관세구간은 75% 감축률을, 개도국의 최고 관세구간은 40% 감축률을 각각 내놨다. 개도국 지위 유지여부도 관건이다. 농림부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객관적 경제여건을 볼 때 개도국 지위가 쉽지만은 않다.”며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개도국 지위가 유지돼야 관세감축률 등에서 예외를 인정받는 특별품목을 많이 가질 수 있다. 농업협상의 세부적 틀은 오는 12월 홍콩에서 열릴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 확정된다.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열린세상] 쌀 비준 반대할 때 아니다/현오석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장

    지난해 합의한 쌀 관세화 유예 연장 협상결과에 대한 국회 비준이 농민단체와 일부 국회의원들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관련 상임위도 통과하지 못하는 등 진통을 겪고 있다. 비준을 반대하는 측은 쌀 개방 유예 협상 과정에서 정부가 이면합의를 해 주었고 농민에 대한 소득보전 대책이 미흡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치 지난 2003년 한·칠레 FTA(자유무역협정) 국회비준 과정의 재판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쌀 관세화를 요구하는 국제적인 압력과 쌀 관세화는 절대 불가하다는 국내 농업계의 주장 사이에서 우리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1995년 WTO(세계무역기구) 체제 출범 시 세계 모든 국가는 이미 쌀을 포함한 모든 농산물에 대해 시장개방을 천명하였다. 현재 WTO 회원국 중에서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필리핀 두 나라밖에 없다. 세계 12위 수출국인 우리나라가 쌀의 관세화를 유보하고 그 기간에 국내 소비량의 일정부분을 의무 수입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사정에 대한 국제적인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10년간의 관세 유예화 기간에 우리 쌀 산업이 착실히 구조조정을 해 왔다면 이번과 같은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조정보다는 오히려 지속적인 가격지지 정책으로 국제가격과의 격차가 확대됨에 따라 이번에 또다시 관세화 유예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쌀 관세화 재협상을 앞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번에 관세화를 하는 것이 국내산 쌀의 시장점유율 확보나 장기적인 농업 구조조정에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이미 1999년부터 쌀의 조기 관세화를 선택하여 쌀 수입을 확대하면서 이를 농촌의 구조조정으로 이끌어 온 것이 하나의 예이다. 그러나 쌀 관세화는 절대 안된다는 농민단체의 목소리에 묻혀 합리적인 대안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기보다는 관세화 유예만을 목표로 협상을 해 온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농민단체에서는 쌀 협상 과정에서 있었던 양보를 이면합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협상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도 뭔가를 주어야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번에 쌀 관세화를 또다시 10년 유예하는 대신 의무수입 물량을 점차 늘려 2014년에는 7.96%까지 확대하고 수입량의 10%에서 30%까지 시장에서 판매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최선을 다해 국내 쌀 시장을 방어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이미 119조원에 달하는 농어촌구조개선 자금을 마련해 장기적인 계획 하에서 농어민 소득 보전 및 구조조정 지원 등 보완대책을 수립·시행하고 있다. 한·칠레 FTA 비준과정에서 농민단체들과 일부 국회의원들은 우리 농업이 망할 것처럼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협정 발효 1년 반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 농민들이 입은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묻고 싶다. 정부는 한·칠레 FTA 발효에 따른 농가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FTA지원특별법을 제정하였고 1조 2000억원의 FTA이행지원기금을 조성하여 2010년까지 7년간의 지원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2004년도 FTA 이행지원금 집행현황을 살펴 보면, 당초 예상과는 달리 농업부문의 직접적인 피해보상을 위한 소득보전직불은 집행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글로벌 경제의 격랑은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거세질 것이 틀림없다. 이제 우리에게 또 한번의 10년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지난 10년처럼 이 기간을 허비한다면 10년 후 우리는 또다시 쌀 시장 개방문제로 홍역을 앓게 될 것이다. 지금은 비준을 반대할 때가 아니라 우리 쌀,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때이다. 현오석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장
  • 美·中 “WTO차원 문제소지”

    지난해 타결된 쌀 관세화 유예 협상이 국회의 비준동의안 차질로 발효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관련, 태국 중국 미국 호주 등 주요 쌀 수출국들이 “세계무역기구(WTO)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5일 정부 당국자는 “관련국들이 한국측 요구에 따라 10년간 수입 개방을 미뤘는데 협상안 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올해 안에 해결되지 않으면 WTO 차원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입장을 전해 왔다고 말했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효성그룹 (1)-창업주 故조홍제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효성그룹 (1)-창업주 故조홍제 회장家

    효성의 입사 면접은 깐깐하기로 유명하다. 예컨대 ‘한강의 물 무게는 얼마나 되나, 대한민국 바퀴벌레의 총 수는.’등의 질문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대략, 약, 수준,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고 불확실한 답을 내놓는다면 효성에선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효성은 숫자에 관해 근거 없는 ‘적당주의’를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이는 효성 창업주인 고 만우 조홍제 회장의 경영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그는 어떤 사항이든 계수화해서 보고 받기를 좋아했으며, 그래야 납득을 했다. 만우 회장도 중요한 경영상의 결재를 할 때는 철저히 계수에 입각해서 처리했다. 특히 신규 사업은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마저 계산에 넣고 사업을 추진했을 정도다. 시쳇말로 “1년간 지급하는 로열티와 그 기술을 이용해 얻은 이익을 금액으로 계산해 향후 10년간의 수지계산서를 만들라.”고 한다면 요즘 실무진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것이다. 그러나 만우 회장은 40년전에 이를 당연하게 지시했으며, 당시 효성 실무진도 이에 익숙했었다. 그의 이같은 ‘계수 경영’은 그만의 독특한 성냥개비 계산법을 낳았다. 그가 계산하기 위해 손가락에 성냥개비를 끼우고 슬슬 돌릴라 치면 실무자들은 계산이 혹시 틀리지 않았을까 긴장하곤 했다고 한다. 그의 꼼꼼한 경영 스타일은 창업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효성의 주력 사업으로 훗날 나일론을 선택하기에 앞서 만우 회장은 공학과와 경제학과 출신의 엘리트 10여명을 뽑아 당시엔 생소한 기획부를 구성, 무려 2년간 20여종의 유망 업종을 검토하게 했다. 오늘날 효성의 제조업 전통과 실속 우선주의, 심사숙고형 기업 문화, 철저한 계산으로 돌다리도 두드리는 사업 풍토 등은 만우 회장이 효성에 남긴 유산들이다. 또 꼬장꼬장하고 대쪽같은 그의 성격은 효성을 늘 정치권과 거리를 두게 했으며, 생전에 2세들의 분가를 마무리한 것은 ‘돈 만큼은 가족이라도 철저해야 한다.’는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근 재계의 불미스러운 일련의 일들을 보면 만우 회장의 혜안이 놀랍기만하다. ●늦되고, 어리석은 만우(晩愚) 만우 회장은 모든 게 늦었다. 신학문을 접한 것이 17세였고, 고보(중·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약관(弱冠)을 앞둔 19세였다. 또 대학을 졸업한 것이 이립(而立·30세)이었으며, 사업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 불혹(不惑·40세)을 넘어서였다. 그리고 효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독자 사업을 시작한 것이 이순(耳順·60세)을 앞둔 56세였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는 스스로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으로 호를 ‘만우(晩愚)’로 지었다. 그러나 출발이 늦었을 뿐 그의 성취는 작지 않았다.1960년대 부실기업이었던 한국타이어와 대전피혁을 정상화시켰으며, 현재 나일론 세계 4위, 타이어코드 세계 1위인 동양나이론(현 효성)을 설립했다.70년대엔 효성금속과 효성기계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한때 총 24개 계열사의 재계 5위 그룹으로 성장시켰다.40∼50대를 받쳐 삼성 성장에 일조를 했던 만우는 56세의 늦은 나이에 창업, 불과 10년 만에 효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올려 놓은 것이다.1981년 포천이 뽑은 500대 기업 속엔 만우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된 효성과 삼성이 나란히 포함됐다. ●진정한 가장은 애처가 늦었던 만우 회장이 빠른 것도 있었다. 그는 15세 때 집안 뜻에 따라 진주 하씨가의 차녀 정옥(작고)씨와 결혼했다. 당시 하씨가는 진주에서 쌀 2000섬 규모의 부호로 개화한 집안이었다. 부인 정옥씨는 신학문을 깨친 신식 여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교 생활이 몸에 밴 만우였지만 아내 사랑만큼은 각별했다고 한다. 만우는 무슨 일이든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엔 ‘팔불출’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이었다. 회사에 있다가도 아내가 아프다고 하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열 일을 다 제쳐놓고 들어왔다. 또 틈을 내 여행도 같이 자주 다녔다. 사업에서 물러났을 때엔 매일 아침 아내와 함께 창경원 산책을 취미로 삼았으며, 함께 시장에 나가 장을 보는 것도 즐겼다. 특히 만우 자신도 말년에 몸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아내의 병수발을 자식 몫으로 두지 않았다.78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만우는 아내의 상청(혼백을 모시는 제단을 마련하는 일) 돌보는 일을 1년간 직접 했다. 당시 만우 자신도 간병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던 심한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다. 만우는 사람을 고를 때도 이런 점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사람을 쓸 때 세가지를 봤다. 첫째가 반골 유무, 둘째가 지론 출중이며 셋째가 진정가장(眞正家長)이었다. 반골 유무와 지론 출중은 누구든지 고려할 만한 요소이겠지만 진정 가장은 꽤 이채롭다. 만우는 가정이 제대로 서야 사회와 국가가 제대로 선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 중에 바람을 피우거나, 첩을 얻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내치라고 했다. 실제로 부장급의 한 직원은 여자 문제로 이혼을 하게 되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가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회사를 어떻게 다스리겠나.”이것이 만우의 생각이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동업 만우 회장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당시 자금난을 겪고 있던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에게 자금을 빌려준 계기로 동업을 시작했다. 만우 회장은 어린 시절 호암(고 이병철 회장의 호)의 친형인 병각씨와 지기여서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만우와 호암의 동업은 사실상 삼성이라는 대그룹의 출발점이었다. 고 이 회장의 기획력과 만우 회장의 꼼꼼한 일처리는 자산규모 1700만원의 삼성물산을 설립 3년 만에 48억원이라는 순이익을 올리게 했다. 삼성물산의 성공은 제일제당(현 CJ그룹)과 제일모직 등의 제조업 진출로 이어졌다. 특히 제일모직은 만우 회장이 자금 마련부터 기계설비 발주, 기술 숙련 등 모든 과정을 진두 지휘했다. 제일모직의 당시 ‘골덴덱스’는 영국제와 마카오 복지를 대체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렇듯 조·이 투톱 체제는 불과 10년 만에 삼성을 명실공히 한국 제일의 재벌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 회장은 돌연 만우 회장에게 동업 청산을 요구했으며, 만우도 ‘이쯤에서 재산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분 문제에 대한 의견 조율이 안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점차 깊어갔다. 이 과정에서 만우는 4·19와 5·16 군사 쿠데타로 이어진 급변하는 정국에서 삼성 대표로 부정 축재자라는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정국이 점차 안정되면서 호암과 만우는 다시 재산 분배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옳다, 그르다 싸우기만 하면 자기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만우는 결국 3억원을 받는 것으로 삼성과의 모든 정리를 마무리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56세였다.15년간 대주주이자 경영인으로서 삼성을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키우는 데 일조를 했지만 그 ‘끝’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만우는 ‘나의 회고’에서 당시 이 결정을 이렇게 밝혔다.“오늘날 7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수많은 어려운 결단 가운데서도 가장 현명한 결단이 아니었나싶다.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분배받을 재산에만 연연했더라면 내 독자사업은 시작도 못해보고, 재산은 재산대로 찾지 못한 채 끝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만우와 호암의 결별에도 양가의 인연은 대(代)를 이어 지속됐다. 만우 회장의 장남인 조석래 효성 회장과 호암 회장의 차남 고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다. 또 조 회장의 부인인 송광자(61) 여사와 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는 서울대 미대 동창이다. 3세로 내려오면 인연은 더 깊고 다양해진다. 조 회장 차남인 조현문(36) 효성 전무와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는 친구 사이다. 장남인 조현준(37) 부사장과 이 상무는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다. 삼성가인 이재현 CJ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의 아들인 김재열(이건희 회장 사위) 제일모직 상무 등도 조 회장가(家)의 3형제(현준·현문·현상)와 잘 어울린다. 조 부사장은 “같은 또래인 데다 어린 시절부터 잘 어울려 요즘에도 운동 모임을 자주 갖는다.”고 했다. ●사돈들의 활약 효성은 재벌가 가운데 사돈들의 활약이 유달리 두드러진다. 특히 만우 회장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아들 후견인의 역할을 사돈들에게 맡겼다. 장남인 조석래(70) 회장의 장인인 송인상(91) 한국능률협회 회장은 만우의 지기이자 조 회장의 후견인이었다. 송 회장은 재무부 장관과 한국수출입 은행장을 두루 거친 경제계의 거물로 조씨가와 사돈을 맺기 전부터 만우와 친분이 두터웠다.78년 만우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엔 사위를 도우며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송 회장은 80년부터 16년간 동양나이론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으며, 지금은 효성 고문으로 있다. 차남인 조양래(68) 한국타이어 회장에겐 처남들의 경영 참여가 눈에 뛴다. 외환은행장을 지낸 손위 처남 홍용희씨가 고문으로 활약했으며, 또 다른 손위 처남인 홍건희 한국타이어 부회장도 경영에 참여할 정도로 한국타이어는 한때 ‘조·홍’ 공동 경영체제를 이뤘다. 삼남 조욱래(56) 동성개발 회장도 장인인 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의 경영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만우 회장은 77년 대전피혁을 28세에 불과한 욱래 회장에게 맡기고 난 뒤, 사돈인 김종대 전 농림부 장관에게 아들의 뒷일을 맡겼다. 경험이 부족한 아들의 단점을 김 전 장관에게 보완해 달라는 뜻에서다. 김 전 장관은 회장직을 맡아 경영에 나섰다. ●양말 빠는 회장님 만우 회장은 자식들이 혹시나 ‘부잣집 아들 병’에 걸릴 것을 몹시 경계했다. 이 때문에 일부러 엄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확실한 경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 어릴 때부터 용돈 예산을 짜게 했다. 또 아들들이 유학을 떠날 때는 유학 기간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최소 경비를 한꺼번에 쥐어주며 돈이 남든지, 모자라든지 간에 더 이상의 용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덕분에 2세들은 유학 시절에 툭하면 접시 닦이를 해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나 만우가 늘 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중학교에 다니던 양래가 영어책을 잃어버려 난감해 할 때 친구에게 그 영어책을 빌려오게 한 뒤, 밤새 직접 필사를 했다. 또 장남인 석래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사업차 방문한 만우는 장남의 하숙집에 널려 있던 양말을 깨끗이 빨아 놓을 정도로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는 공석에선 자식이라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선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선친은 자식을 키운다고 할까, 믿어준다고 할까 하는 점이 굉장히 강해요. 당시 일반적인 가정과 달리 아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하고, 자식들의 결정을 무척 존중해 주셨습니다.”실제로 만우 회장은 조 회장이 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하기를 바랬지만, 공학을 전공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만우는 “재산이라는 것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다가 들어오기도 한다. 자식에게 재산보다는 스스로 일해서 생활해 나갈수 있는 능력을 꼭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화려하게 뻗은 2세 혼맥 조씨가(家)의 혼맥은 여느 재벌가 못지않게 사통팔달로 뻗어 있다. 전직 대통령가(家) 뿐 아니라 정·관·재계 골고루 인연이 닿아 있다. 만우와 부인 하 여사는 슬하에 3남 2녀를 뒀다. 장녀와 차녀인 명숙(작고)씨와 명률(78)씨는 만우가 고향인 함안 군북에 있을 때, 인근 대지주 집안에 시집보냈다. 장녀 명숙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진양 대지주인 허정호(80)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시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 의대) 학생이었던 정호씨는 신한병원 원장을 지냈다. 둘째 딸 명률씨는 산청 대지주인 권동혁가(家)의 장남인 병규(80)씨와 인연을 맺었다. 병규씨는 한때 효성건설 회장을 역임했다. 효성의 혼맥은 장남인 조석래 회장의 결혼으로 정·재계 중심부로 들어간다. 학업 때문에 결혼이 늦은 조 회장은 그의 나이 32세 때, 송인상 회장의 3녀 광자씨를 평생의 배필로 맞아들였다. 조 회장은 처가를 통해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과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과 동서지간이 된다. 또 신 전 회장가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연결되며, 이 회장가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연이 닿아 있다. 차남인 조양래 회장은 66년 지인의 소개로 법조계 원로인 홍긍식 전 변호사협회 회장의 차녀인 문자(64)씨와 혼례를 치렀다. 조 회장은 이명박 서울시장과 사돈지간이다.3남인 조욱래 회장은 경기여고 교장인 손영경씨의 중매로 김종대 전 농림부 장관의 딸인 김은주(50)씨와 결혼했다. 김 전 장관은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의 부친인 고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의 처남이기도 하다. 조씨가의 혼맥은 방계도 만만치 않다. 만우 회장의 동생인 고 조성제 대전피혁 사장은 5남 3녀를 통해 관·재계의 명망가를 사돈으로 맞아들였다.3남 경래(73)씨는 홍재선 전 전경련 회장의 딸 애수(68)씨와 결혼했으며,4남 익래(70)씨는 원용필씨의 딸 정선(68)씨와 결혼했다. 원용필씨는 원용석 전 경제기획원 장관의 친형이다. 장녀 장숙(68)씨는 정종철 전 서울시장의 아들 창순(70)씨와 결혼했다. golders@seoul.co.kr ■ 조석래 회장의 ‘명문 처가’ 조석래(70) 효성 회장의 처가인 송인상(91·효성 고문) 한국능률협회 회장의 가계도를 들여다보면 화려하다는 단어가 부족할 정도다. 송씨가(家)는 고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가문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한국 상류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가와 사돈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관·재·법조계에 이르기까지 ‘그물망 혼맥’으로 촘촘히 엮여 있다. 송 회장 본인도 일제시대의 식산은행을 시작으로 재무부 이재국장과 한국은행 부총재, 부흥부장관, 재무부 장관, 룩셈부르크 대사,EC대사, 한국수출입은행장, 동양나이론(현 효성) 회장 등 관·재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슬하에 1남4녀를 둔 송 회장과 최연순(91) 여사는 딸을 모두 국내 대표 집안에 시집보냈다. 특히 손주들의 통혼을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집안과도 연결된다. 장녀 송원자(66)씨는 이봉서(69) 전 상공부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이 전 장관은 경기고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나왔으며, 현재 부동산임대업체인 단암산업 회장이다. 이 전 장관의 부친 고 이필석옹은 상업은행장과 국제화재 회장을 지냈다. 이 전 장관의 3녀인 혜영(33)씨는 1997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장남 정연(42)씨와 화촉을 밝혔다. 두 사람은 정연씨의 친구 소개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혜영씨는 숙명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정연씨는 현재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 회장의 차녀 길자(63)씨는 신명수(64) 전 신동방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 전 회장과 길자씨는 2남 1녀를 뒀으며, 장녀인 정화(36)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40)씨와 결혼했다. 재헌씨는 미국 조지타운대를 나와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한나라당 이 전 총재와 노 전 대통령은 송 회장가(家)를 통해 ‘사돈의 사돈’인 셈이다. 이렇게 가지치기를 하게 되면 송 회장가는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김승연 한화 회장과도 이어진다. 3녀 송광자(61)씨는 조 회장과 67년 결혼해 현준-현문-현상 3형제를 뒀다.4녀 송진주(59)씨는 주관엽(61)씨와 혼인했다. 진주씨는 서울대와 예일대(박사)를 거쳐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golders@seoul.co.kr ■ ‘예산 샌님’ 조홍제 前회장 만우 조홍제 전 회장의 별명은 샌님과 구두쇠였다. 만우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그냥 샌님도 아닌 ‘예산 샌님’이라 불렀다. 미리 예산을 꼼꼼하게 짜놓고 융통성 없이 그대로 집행하는 데서 비롯됐다. 당시 도움을 받기 위해 만우 회장의 사무실 문턱을 넘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만우가 배정해 두었던 예산이 바닥나기 일쑤였다. 그러면 만우는 “올해 예산이 떨어졌으니까 내년에 보자.”고 했다고 한다. 만우의 먼친척 동생인 조영제씨의 회고는 이렇다.“사회봉사도 회사 경영과 마찬가지로 예산 집행을 한다 이겁니다. 요즘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40년전에 그런 경비를 예산짜서 집행하는 기업가가 대한민국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만우는 구두쇠로도 유명했다. 그냥 구두쇠가 아닌 ‘통 큰’ 구두쇠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신발장에 남은 것은 밑창이 다 닳은 구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화다. 그는 내의도 해진 것을 기워입었으며, 양복 역시 다 떨어져 못 입게 되기전까지 새 양복을 맞추는 법이 없었다. 그의 근검절약 정신은 가족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줄 때는 늘 빠듯하게 줘 낭비하는 버릇을 갖지 않게 했으며, 손자에게 주는 세뱃돈도 천원짜리 한 장으로 때우곤 했다. 만우는 자신이 먹고, 쓰고, 입는 데에는 한없이 검소했지만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일엔 수십억원을 내놓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쓸 때는 쓰고, 쓰지 않을 때는 쓰지 않는, 그런 구두쇠였다. 만우가 돈을 아끼지 않은 곳은 교육 사업이었다. 대학시절 은사 권유로 교수가 될까 했던 만우는 1950년대부터 영남장학회를 통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으며, 고향 함안군의 몇몇 학교에 시설을 마련해 주었다.76년엔 운영 부실로 재정난에 빠진 동양학원의 이사장을 맡아 대규모 채무를 해결해줬으며, 학습환경 개선을 위해 당시로서는 거금인 25억원을 내놓았다. “나는 학교에서 돈 한푼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선생님들은 오직 좋은 교육만을 해주시기 바랍니다.”만우 회장이 이사장으로서 원했던 유일한 소망이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염주영칼럼]쌀개방과 농촌의 희망 찾기

    [염주영칼럼]쌀개방과 농촌의 희망 찾기

    쌀협상이 끝난 지 1년이 다 가도록 국회가 비준을 못하고 있다. 농민들이 비준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쌀협상 비준거부=개방 저지’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국회가 비준을 안 하면 국내 쌀시장은 ‘관세화 방식’이 적용된다. 이것은 쌀도 일반 농산물과 동일하게 취급해 관세를 물려 수입을 자유화하는 것이다. 관세를 얼마나 물릴지는 연내 이뤄질 후속 협상에서 결정된다. 국회가 비준을 하는 경우 개방폭은 오는 2014년에 국내시장의 8% 수준으로 확대된다. 따라서 현재 농민들이 벌이고 있는 쌀협상 비준 거부 투쟁은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투쟁이 성공해 국회 비준을 저지한다 해도 농민들이 얻을 건 별로 없을 것이다. 국회가 비준을 하든 안 하든 수입쌀시장은 상당폭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에 마치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정부와 국회, 농민 모두가 매달려 갑론을박을 하며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여기에는 세계무역의 객관적 정세를 외면하고 인기발언에만 급급해 농민들에게 실현 불가능한 기대를 갖게 한 정부와 일부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허비할 시간과 정력이 있다면 물 건너간 쌀개방 저지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데 투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 대안은 개방화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농촌의 새로운 생존전략을 개발하는 일이다. 농촌의 희망 찾기에 힘을 모아야 한다. 이제는 정부와 국회, 농민 모두가 차분하게 미래를 짚어보아야 할 때이다. 문제는 쌀에서 그 희망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농업소득의 절반을 차지하는 쌀의 미래가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쌀은 시장 개방과 소비 감소라는 두개의 적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다. 이 가운데 시장 개방의 위험성만 크게 부각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비 감소가 훨씬 심각하다. 농민들은 매년 대략 500만t의 쌀을 생산해 7조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 가운데 개방으로 매년 0.4%씩 시장을 외국에 내줘야 하고, 쌀 소비량은 매년 2∼3%씩 줄어들고 있다. 두가지 요인을 합치면 매년 3% 정도 소득결손이 생기게 된다.10년후에는 쌀에서만 연간 2조원의 소득결손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쌀에만 의존한다면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쌀 이외의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원, 즉 ‘포스트 쌀’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감성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쌀을 바라보아야만 합리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쌀이 여전히 주식인 만큼 생산기반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방치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농민들에게 쌀농사만 지으라고 권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그런 관점에서 신지식 농업인들의 등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브랜드로 승부하는 친환경·고부가가치 농업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시장을 확대해가고 있다. 농업과 2차산업을 결합한 전통식품업이나 농업과 3차산업을 결합한 농가체험관광 등도 ‘포스트 쌀’로 적극 육성해나가야 한다. 국내시장을 외국산 농산물에 내줘야 하는 만큼 수출농업을 육성해 해외에서 그만큼의 시장을 되찾아오는 방안도 추진해야 할 것이다. 화훼산업은 중국과 일본 시장 진출 유망품목이다. 이밖에 비농업 분야의 소득원 개발도 중요하다. 소득이 농민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농업이냐 비농업이냐를 따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수석논설위원 yeomjs@seoul.co.kr
  • 市銀 질곡의 60년

    TEXT 시중은행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만큼이나 질곡의 연속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경제수탈의 도구로 시작된 은행이 민간 일반은행으로 정착하는 데에는 광복 이후 60년의 세월도 부족했다.●수탈의 도구한국의 은행은 애초 민족 자본으로 탄생했다.1896년 조선은행이 최초로 설립됐고 이후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이 민족 자본을 바탕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민족은행들은 영업 부진으로 스스로 문을 닫거나 강제 폐업됐다. 이후 설립된 조선은행, 식산은행, 금융조합,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은 수탈의 도구가 됐다.1925년까지 이들 은행의 대출은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거나 수출가공업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에게 집중됐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국내 은행은 한국을 군수기지화하고 이에 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일제 패망 직후에는 조선은행권이 일본에서 일본 화폐로 1대1 교환이 가능해짐에 따라 마구잡이로 돈을 찍어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다.●경제개발의 도구 1960년대 이후 은행은 국가의 경제정책을 전달하는 도구였다. 금리는 시장이 아니라 정책에 따라 결정됐다. 재무부 등 정책당국이 여·수신 과목별로 최고율을 정하면 각 은행들이 이를 그대로 실현했다. 정부는 산업 부문별로 대출 우선순위와 한도를 정해 은행에 내려보냈다. 은행은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면서도 기업을 감시하지 못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민영화, 자율화 분위기가 이식되기 시작했지만 관영통제의 사슬을 끊지는 못했다. 형식적이나마 민영화된 은행들은 기업의 수익성을 평가하는 대신 담보능력과 상호보증능력이 있는 대기업에 여신을 몰아줬고, 이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불러 왔다.●본격 민간은행으로 IMF 체제는 한국의 은행사에 가장 폭발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했다.1997년 당시 15개 일반은행,22개 투자금융,6개 종합금융,58개 상호금고 중 퇴출당하거나 합병되는 변화를 겪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100여년 전통의 상업은행이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으로, 뒤이어 우리은행으로 간판을 바꿨다. 상업은행보다도 역사가 긴 조흥은행은 신한금융지주에 인수됐다. 외환, 한미, 제일은행은 외국계 은행으로 바뀌었다.5개 시중은행 및 수많은 금융회사들이 합병·퇴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시장의 동요와 실직자들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쌀 맛도 기능도 업그레이드

    쌀 브랜드가 전국적으로 1800여개나 돼 소비자들이 ‘좋은 쌀’을 선택하는데 혼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기능성 쌀을 비롯, 특A 쌀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전남 쌀 미국수출 전남도 농업기술원은 5일 “나주에서 발아현미를 생산하고 있는 ‘가바월드’가 기능성 현미 2t을 지난달 말 미국에 첫 수출했다.”고 밝혔다. 이 발아현미는 싹을 틔운 뒤 현미로 가공하는 기술에다 기능성 물질인 ‘가바(Gaba)’를 극대화 한 쌀이다. 가바는 동·식물계에 널리 분포돼 있는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동물의 뇌수에 존재하는 신경 전달물질로 알려졌다. 가바월드가 수출한 기능성 쌀은 유기농 발아현미, 찰 발아현미, 발아 흑미 등 4종류이다. 가바월드는 나주에서 생산된 고품질 일반벼를 가공, 정부 수매가격의 3.9배인 가마당(80kg) 62만원에 수출했다. 특히 이번 수출은 전남도 농업기술원이 3년여 연구 끝에 개발, 특허를 받은 ‘가바가 강화된 발아현미 제조방법’을 벤처 기업에 이전해 이뤄졌다. ●남土북水쌀 경기도 연천군에서 생산되는 ‘남土북水’쌀이 농협중앙회 종합평가에서 ‘특A’를 획득했다. 연천군과 군 농협에 따르면 농협중앙회 양곡부가 최근 농협쌀 품질개선을 위한 내부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전국 200여개 미곡처리장에서 생산된 쌀을 모아 농협식품연구소에서 분석한 결과 연천 ‘남土북水’가 ‘특A’ 등급을 받았다. 특A엔 이밖에도 ‘김포금쌀’, 나주 ‘드림생미’와 안성의 ‘안성맞춤 완전미’ 등도 포함됐다. 연천 한만교기자·광주 최치봉기자 mghann@seoul.co.kr
  • [‘생존위기’ 사과농가] 중국산 수입대기·묘목값 급등 ‘죽을맛’

    [‘생존위기’ 사과농가] 중국산 수입대기·묘목값 급등 ‘죽을맛’

    “중국산 사과가 수입되면 사과농사를 포기해야 할 판입니다.”경북 영주시 풍기읍 이영철(58)씨는 요즘 표정이 어둡다. 중국산 사과가 수입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30여년 동안 사과농사를 지어왔다는 이씨는 “쌀에 이어 중국산 사과까지 개방하면 농민들은 다 죽으란 말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또 “그동안은 작황이 부진해도 가격이 높은 것으로 위안을 삼았으나 이제는 이것마저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고 낙담했다. 이처럼 중국산 사과 수입과 관련해 농민들의 원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지난 1997년 경북 안동시 일직면에 정착,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강화수(42)씨는 “인건비와 농자재 가격 등이 매년 상승하는 데다 최근에는 쌀농사가 전망이 안보여 사과농사로 몰리는 바람에 사과 묘목값도 1년새 3배나 급등했다.”면서 “이같은 현실에서 수입개방까지 되면 농민들의 설 땅은 없다.”고 말했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정구봉(60)씨는 “정부가 말끝마다 농민을 생각한다면서 막상 정책은 이와 동떨어지게 추진한다.”며 “수입시기를 최대한 늦춰 농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국 최대 사과 주산지인 경북 북부지역 시장·군수들도 발벗고 나섰다. 안동시 등 15개 시장·군수들은 최근 영주시청에서 모임을 갖고 ‘경북 사과주산지 시장군수협의회’를 구성했다. 협의회는 앞으로 사과 수입에 대해 적극 대처하고 대정부 건의를 위한 창구도 일원화하기로 했다. ●수입 개방은 시간문제 중국산 사과의 수입 개방은 시간문제다. 현재 중국산 양벚(체리)에 대한 수입위험평가가 진행 중이다. 이 평가가 마무리되면 사과에 대한 평가가 이어질 전망이다. 중국 정부는 이미 지난해 8월 사과에 대한 수입위험평가를 우리 정부에 신청했다. 병충해 유무를 검증하는 8단계 수입위험평가를 통과해야 하지만 빠르면 3년, 늦어도 5년 이내에는 모든 절차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산 사과가 수입되면 국내 사과시장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 뻔하다. 중국산 사과 값이 국산에 비해 크게 낮기 때문이다. 농협조사연구소에서 지난해 11월과 지난 4월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사과 주생산지인 산둥성과 허베이성, 산시성 등 3곳을 방문, 실태를 조사한 결과 10㎏에 4000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 수입됐을 경우 관세, 해상운임, 통관비, 수입업자 수수료 등을 붙여 국내 농산물 도매시장에 출하되는 가격은 8720∼9490원으로 예상된다. 이는 국산의 3분의1수준이다. 국산 사과 값은 2만 7000원 정도이다. 농협조사연구소 오정윤(34)조사역은 “중국산 사과 값이 싼 것은 인건비가 낮은 데다 1990년 이후 우수품종 도입, 대량 생산, 재배기술 향상에 힘써 생산성을 높인 결과”라고 말했다. 중국의 지난해 사과 생산량은 2100만t으로 우리나라 38만t의 55배에 이른다. 중국산 사과의 품질도 국산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농협 조사팀과 함께 중국을 방문한 열린우리당 이시종(충북 충주) 의원은 “중국 사과생산지 3곳에서 생산되는 사과의 당도·경도·육질 등을 비교한 결과 국산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특히 산시성 일대는 해발 1200m의 고지대로 병충해가 적어 연간 15차례 농약을 살포하는 우리와 달리 4차례 정도만 농약을 사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은 지난 2002년 10월 캐나다 수출을 계기로 전 국토의 8분의1에 이르는 121만㎢를 ‘병충해 무발생구역’으로 지정하는 등 사과수출에 전력하고 있다. 중국 사과가 수입될 때 쯤이면 일본과도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일본산 고급 사과도 수입될 전망이다. 국내 과수농가는 중국의 저가 공세와 일본의 품질 공세 사이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게 될 우려가 높다. ●품질 고급화·생산성 향상 급선무 경북 사과주산지 시장군수협의회 회장인 권영창 영주시장은 “사과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고급화와 생산성 향상이 시급하다.”며 “이를 위해 키 낮은 사과보급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또 “정부는 사과 유통근대화사업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도사로 목회활동을 하다 농촌이 좋아서 귀농했다는 경북 안동시 북후면 이상호(46·사과농사 7년째)씨는 “중국산 사과수입을 품질 고급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유기농법으로 무공해 사과를 생산하면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고 밝혔다. 충북 충주시 금릉동 유종현(47)씨는 “농산물 수입은 이미 대세여서 막을 수가 없다.”면서 “농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영주·안동·충주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⑤호찌민의 꿈과 ‘도이머이’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⑤호찌민의 꿈과 ‘도이머이’

    베트남은 이미 외국인들 생각처럼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베트남정부가 발표한 2005년도 예상 경제성장률은 8.5%다. 지난 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넘어선 다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해온 베트남이 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금년 1월부터 4월까지 베트남은 96억 5000억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2%가 늘어났다.1·4분기 동안 베트남에 유입된 외국자본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늘어난 15억 6000만달러였다. 경제발전에 따른 내수시장의 성장도 두드러진다.1·4분기 베트남의 자동차 내수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6%가 늘어난 6930대에 달했다. 관광산업 성장도 폭발적이다. 특히 미국 관광객의 숫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3%가 늘어난 9만 5000명을 기록했다. 총 대신 달러를 들고 돌아온 미국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베트남은 새로운 전선, 수출전선에 무역전사를 대거 투입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베트남은 미국을 2004년도 최대 수출국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베트남은 단순 투자대상국에서 해외 투자국가로 변하고 있다.2억 3000만달러를 해외에 투자한 베트남은 97만달러를 들여 한국에도 농기계부품을 생산하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2005년 베트남 국가운용계획의 핵심은 8.5%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 국영기업의 구조조정에 맞추어져 있다. 국제기준에 맞지 않는 법령을 개정하고 내·외국기업에 통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투자법을 마련 중이다. 2002년 1월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발효시킨 베트남은 2006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유럽연합(EU)에 이어 일본도 베트남의 WTO 가입에 지지의사를 표했다. 베트남의 변화는 경제분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4월30일, 항미 승전 30주년을 맞아 베트남 국영TV는 특집 방송의 일환으로 사이공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이 생전에 남긴 인터뷰 화면을 내보냈다. 즈엉반민은 2001년 미국에서 죽은 사람이니 그렇겠거니 했던 사람들도 이어지는 인터뷰화면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응우옌까우끼가 국영TV에 등장한 것이다. 응우옌까우끼는 사이공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이미 시장경제가 일상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지만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매우 완고했던 베트남이다.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를 엄연한 국가체제로 삼고 있는 베트남이 종전 30주년을 맞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또 한 번의 정치적 변화를 예상케 하는 것이다. 지난 뗏(설)에는 20여만명의 재외동포들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여기에는 응우옌까우끼와 열렬한 반공주의 작곡가였던 팜주이 등이 있었는데 이들 다수는 프랑스와 미국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다. “만약 우리가 호찌민사상이 아닌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베트남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이공 당 서기장을 지낸 쩐박당은 전쟁 후에 베트남이 비교적 적은 후유증을 앓으며 민족통합을 이루고 도이머이를 통해 경제재건을 이룩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호찌민사상에 있다고 단언했다. “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호찌민만이 베트남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호찌민의 사상만이 베트남을 다 담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일은 말입니다, 절대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정신과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1975년 개방한 호찌민영묘를 참배한 사람이 지난해 연말 집계로 4000만명에 달한다.1990년 개관한 호찌민박물관을 관람한 관광객의 숫자는 1500만명이다. 지난 한 해 동안 250만명을 불러들인 베트남 관광사업의 성공은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자연이나 기반시설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베트남은 비록 부자나라는 아니지만 자부심을 가진 나라다. 베트남은 그들의 자부심을 문화적 매혹으로 드러내는 데 성공해왔다. 문화는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무엇보다 인간의 수준과 품격에 관계하는 것이다. 호찌민은 여기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부자는 아니지만 자부심이 있는 나라인 이유를 호찌민박물관 우옌티딘 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호찌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호찌민 자체가 문화니까요. 호찌민은 단순히 정치, 사상적인 차원이 아닌 우리의 문화적 차원에서 존재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할 때 생각하게 됩니다.‘호 아저씨였다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말이죠.” 호찌민은 죽었지만 그가 추구했던 삶의 양식은 오늘날 베트남 문화의 일부로 수용되어 있다. 베트남인들의 가치판단 과정에서 호찌민의 생애는 어떤 형태로든 관계한다고 우옌티딘 관장은 덧붙였다. “호찌민이 만약 단순히 정치·사상적인 차원에서 존재했다면 이미 잊혀졌을지 모릅니다. 그의 삶은 어떤 정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바쳐진 것이 아니었어요. 인간이 품격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정치, 사상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것도 독창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호찌민의 그런 면모는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초기부터 나타난다.1924년 6월23일, 제5차 국제공산당대회 제8차회의에서 호찌민은 식민지문제에 무관심한 서구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구사회는 공산주의 운동의 요람이기도 했지만 세계에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이기도 했다. “동지들은 식민지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나는 최대한의 기회를 이용해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반드시 동지들을 각성하게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호찌민의 맹렬한 비판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세계 공산주의 진영의 막강한 지도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한 무명 아시아청년이 보여준 당돌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도차이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그들은 식민지 문제에 아무런 견해도 없었기에 더욱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 총서기장이었던 엠 토레는 훗날, 그 당시 유럽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문제에 대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호찌민이었다고 고백했다. 1924년 모스크바에서 독일혁명가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호찌민은 한층 더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인도차이나 사회는 서구와 다르다. 현재 인도차이나의 계급투쟁은 서구처럼 격렬하지 않다. 마르크스는 뛰어난 이론으로 자기 학설을 세운 사람이지만 그 학설은 일정한 역사적 토대 위에서 수립된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란 어떤 역사인가. 유럽의 역사다. 유럽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유럽이 인류 전체는 아니다.” 이런 호찌민의 견해는 그가 창당한 베트남공산당에 반영됐다. 그가 직접 기초한 강령과 노선은 레닌 이후 코민테른을 장악한 스탈린이나 그의 정적 트로츠키 어느 쪽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호찌민은 당시 식민지 베트남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자와 반민족세력을 제외한 모든 계급 및 정파와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찌민의 대통합노선은 반공주의자들의 폄하처럼 전술적 차원의 ‘술수’가 아닌 확고한 원칙이었다. 호찌민은 많은 혁명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통합의 가치와 기능에 대해 깊이 주목했다.1941년,3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호찌민이 까오방성의 팍보에서 창건한 반외세 통일전선조직인 베트민. 통합을 지향하는 확고한 원칙 없이 술수적인 차원에서 베트민을 운영하였다면 단일한 항불전선은 결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단결 단결 대단결, 호찌민은 그 슬로건의 상징이고 증거였다. 단결을 지향하는 호찌민의 지도력은 베트남 통일의 정신적 토대였다. 그러나 소망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운명이 일치한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단결할 수 있다. 너의 행복이 나의 불행일 때, 나의 행복이 너의 불행일 때 단결은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울 때 네가 웃고, 내가 웃을 때 네가 울어야 한다면 절대 뭉칠 수 없다.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한국보다 50년 전에 호찌민이 벌인 금 모으기 운동이다. 1945년, 호찌민은 독립국가를 출범시켰지만 베트남 경제는 완전히 피폐해 있었다.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을 차지한 일본의 착취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통킹델타와 메콩델타라는 세계의 곡창지대가 있었지만 여기서 나온 쌀과 곡식은 모조리 수탈당했다.1944년에서 1945년까지,1년 남짓한 일본의 통치기간 동안 굶어죽은 베트남인들은 무려 200만명이었다. 그러니 독립을 얻었어도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인민들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다. 끔찍한 시간은 계속되었고 인민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굶주리며 죽어갔다. 이 참담한 때에 독립정부를 만든 호찌민은 민생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두 가지 운동을 궁리해냈다. 금식운동과 금 모으기 운동이다. 일주일에 하루 굶기 운동을 통해 아사자 구제에 나섰고, 호찌민은 그 운동을 제일 앞에서 실천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금 주간’을 선포하고, 가지고 있는 금붙이를 모으자는 호찌민의 호소에 인민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굶주리고 있는 동포를 구제하기 위한 이 운동에 각계각층의 인민들이 참여했다. 대를 물려온 반지를 내놓은 농촌의 가난한 부인네, 끼니를 굶으면서도 처분하지 않았던 결혼 패물을 내놓은 중년의 노동자 부부…. 금 기부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때 놀랄 만한 기부자들이 나타났다. 참파왕조의 공주 출신인 우옌티템은 황금관과 황금목걸이를 모두 내놓았다. 포쩐짱 왕의 마지막 후예인 우옌티템 공주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으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하노이의 한 부자는 수백 돈이 넘는 금덩어리를 기꺼이 내놓았다. 이때 걷힌 금은 이제 막 출범한 독립정부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재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항불·항미항전의 마지막 시기까지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금 모으기 운동의 최대성과는 50년 뒤 한국에서처럼 모아진 금붙이 그 자체가 아니었다.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자는 전국민적 결의와 연대감의 확보,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의 회복이었다. 베트남인민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조국이 목숨을 바쳐서 지킬 가치가 있는 공동체라고 느낄 수 있었다. 호찌민의 지도력은 이러한 통합의 힘을 바탕으로 한 결단과 선택을 통해 발휘되었다.8월혁명 당시 남부베트남혁명위원장을 지낸 쩐반이유는 호찌민의 가장 탁월한 능력을 인내와 결단력으로 꼽았다. “너무 큰 나라와 붙어지내며 세계 최강대국과 싸워야 했던 베트남이 가장 잘하는 일은 우리가 언제 강해져야 하는지, 또 언제 싸워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호찌민은 우리가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가르쳤고, 우리가 싸워야 할 때 주저하지 않는 용기를 심어준 지도자지요.” 변화하는 베트남이 어떻게 호찌민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묻는 나에게 남부베트남 혁명의 최고지도자였던 쩐반이유는 이 한마디로 대답했다. “내 안의 불변으로 만변하는 세계에 대응하라(以不變 應萬變).” 이 말은 호찌민이 협상을 위해 프랑스로 떠날 때 후인툭캉에게 주석직 대행을 맡기면서 한 말이었다. 여러 문제점이 뒤따르고 있지만 베트남은 지금 만변하는 세계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호찌민이 지니고 있었던 ‘내 안의 불변’하는 정신을 지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주이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0)인천 제물포, 천년의 역사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0)인천 제물포, 천년의 역사

    중국을 겨냥하여 ‘서해안 시대’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 보다 훨씬 이전부터 인천은 서해안의 대중국 창구이자 교두보였다. 강화 고인돌과 단군의 유향(遺香)이 전해지고,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되는, 미추홀과 비류백제로 상징되는 해양세력의 거점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인천시의 남동갯벌, 도장리에서 승학천을 따라 이어지는 저지대는 바닷물이 들어오거나 습지였기에 문학산과 승학산이야말로 지리·환경적으로 초기국가 단계의 도읍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백제시대에는 대외 창구로 기능하여 오늘날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의 능허대를 거점으로 해 중국과 넘나들었다. 한강 하류인 인천을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산둥반도 등주에 이르는 등주항로야말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칠때 이용한 바로 그 항로이다. 오늘날 능허대는 아파트촌에 뒤덮이고 말았으나 조선 후기 읍지에 ‘백제조천시발선처(百濟朝天時發船處)라 하였듯 역사의 현장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인천이 한반도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뜬’ 것은 역시나 조선시대가 아닐까. 수도 한양에 이르는 입구, 이른바 인후지지(咽喉之地)로 온갖 역사의 영욕을 지켜보았다. 서해 뱃사람들에게 ‘행주참을 댄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수, 즉 밀물이 몰려들면 바닷물은 강물 위로 뜨고 바다로 내려가는 강물은 밑으로 깔리는 원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인천쪽에서 한강을 거슬러 행주나루를 거쳐 마포까지 직행하는 뱃길 노정을 이르는 말이다. 바로 그 뱃길을 따라서 열강들이 빈번하게 침범을 강행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는 수많은 포대가 이를 웅변해준다. 대개의 개항장이 시련을 겪으며 탄생했지만 인천만큼 열강들의 침략의 손길이 가장 강력하고도 직접 뻗친 곳이 또 있으랴.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는 바로 이런 개항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는 증거물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열강들은 인천 해역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그것으로, 선조들은 이들의 도래를 온몸으로 싸워 막았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조선 진출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운요호(雲揚號)사건(1875)을 감행했고, 끝내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1876)으로 문을 열게 되었음은 교과서적 상식이다. 구미 열강과도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니 은둔국 조선은 갑자기 봇물 터진 외압을 직접 받게 된다.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던 제물포는 하룻밤 새 개항장으로 둔갑하여 1883년에 인천해관과 감리서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조계들이 설치되기에 이른다.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 일본의 전쟁을 위하여 조선땅을 내준 꼴이 됐으니, 이후 일본군의 군화발이 인천항을 자기 땅처럼 짓밟았다. 1892년,‘일본 밖에서 일본인 손에 의해 이루어진 가장 완벽한 일본책’으로 자평하는 ‘인천사정’이란 책자는 당시 ‘일본 영사관이 일장기를 아주 높게 휘날릴 수 있는 좋은 위치에서 장엄하고 수려하게 인천항을 삼킬 듯 바라보고 있다.’고 썼다. 정말 그들은 인천항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삼켜버렸다. 그 후 우체국, 경찰서, 일본거류지의회, 인천상법회의소, 무역상조합, 잡화상조합, 영어소학교, 공립소학교, 교토의 본원사(本願寺), 공립병원와 강제병원, 정미소, 제물구락부, 조선신보, 활자소, 그리고 제일국립은행, 제18국립은행, 제58국립은행, 일한무역상사, 우선주식회사의 일본지점 등이 속속 들어섰다. 대불호텔과 이태호텔, 수월루 등의 여관도 들어섰다.‘근래 불경기라는 소리가 인천항의 온 시가를 뒤덮는 데도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花紅柳綠) 흥청대기 이를 데 없으니 술집에는 어린 소녀들도 많았다.’고 한 기록도 있다. 이로써 유곽이 번창하여 도심까지 집창촌이 뻗어 나가 항구를 드나드는 뭇사내들을 유혹하였다. 교회도 빠질 수 없었으니 영국 성공회를 필두로 답동성당, 내리교회 등이 속속 들어섰다. 수출입세를 관장한 해관(海關)만큼은 조선정부 관할이었다. 물론 해관 운영에 ‘왕초보’였기에 대대로 영국, 독일, 일본인 등이 도맡아 했고 그들은 그야말로 ‘엿장사 마음대로’ 개항장을 농락하였다. 일본인들이 잘못된 협약서를 근거로 세금을 내지 않고 부를 축적했던 수탈 과정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당시 수입된 면직물은 대부분 영국제로 일본인이 수출을 독점했는데 영국도 저렴한 세금을 관철시켰다. 제국주의 경제침탈의 전형적인 모습이 인천항에서 관철되었다. 개항 당시 서울은 ‘좋지 않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인천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적었고, 총인구 2649명 중 쓰시마, 나가사키 사람들, 그리고 시모노세키가 위치한 야마구치(山口), 규슈의 오이타(大分)사람들이 주류였다. 일제침략기를 통해 대개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건너왔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쪽 방언들이 즐겨 쓰였으며, 도쿄, 오사카, 쓰시마 등 여러 곳의 언어가 섞인 것을 ‘인천어’라 부르기도 했다. 이후 인천에는 관리 세관원 은행원 회사원 무역상 중개인 운수업 하역업 여관 요리점 목욕탕 음식점 양주집 일본주점 약국 의사 사진사 이발업 재봉업 활판인쇄업 세탁소 양조장 대장간 오락실 과자점 창고업 고용직과 잡상 목수 석공 농업 등 온갖 직종 종사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장차 식민지가 될 조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청일전쟁 등이 터졌을때는 자발적으로 전선구호와 간호 등에 힘을 보탰으며 스스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즉, 개항장에 나와 있던 일본거류민들을 순수한 의미로만 볼 일이 아니다. 일본의 관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움직였다.‘생돈’이 생기는 만큼 화려한 의복과 음식으로 사치를 부렸다. 웅장한 반양반일(半洋半日) 가옥들이 앞다퉈 들어섰다. 개항장은 일본거류지, 각국거류지, 중국거류지로 삼분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확연하다. 은행건물 등이 남아있는 일본인 거리, 음식점이 즐비한 중국인 거리가 그것이다. 각국 거류지라고는 해도 19세기말에는 영국인 7명, 독일인 13명, 미국인 4명, 프랑스인 3명, 이탈리아인 1명 등이 거주했을 뿐이고 대개 일본·중국인들이었다. 그런데 각국거류지 회의는 인구비례가 아니라 국적별로 참여하도록 했으며, 서양인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게다가 회의조차 영어로 진행하니 일본인들로서는 못마땅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간척을 통해 땅을 확보, 도심을 불려나갔다. 오늘날 인천항 주변이 대부분 간척지인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의 대응은 전무하였던가. 인천 출신의 역사학자 임학성(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인천객주협회를 모체로 1897년에 설립된 인천항신상협회는 민족 상인의 상권을 옹호·신장하였다.”고 지적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역주한 ‘인천개항25년사’(1907)를 보면, 조선인들은 오늘로 치면 송월·전·복성·인현·경·신포·답·신생·사·유·신흥·선화·도원동 등에 몰려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개항 초기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의 상권 경쟁이 치열했다. 중국인들은 특유의 근면과 상업적 재기를 토대로 일본에 맞섰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결국 중국 상권도 몰락했다.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자 중국인들은 다시금 성실하게 상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천시가 중국인거리를 대대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터전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중국집이나 운영하고 살았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들은 옥양목 같은 옷감장사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상권을 장악해 ‘비단장사 왕서방’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조선의 쌀을 싸게 사들여 일본에 되팔아 엄청난 돈을 거머쥔 자들이 생겨났으며, 경인철도가 부설되자 서울을 오가는 보따리장사는 물론이고 석유장사 등으로 일본인들 역시 큰 돈을 벌어들였다. 군인들이 자주 부르는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도 당시 이후 첨단 공장인 성냥공장이 인천에 많았음을 방증하며, 그만큼 선진적 공장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의 하나였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제 인천은 일본인 대신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길목이 되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거니와 산둥반도 등지를 오가는 페리에서 사람과 짐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중국인 거리에 가면 대하소설 삼국지를 연작 벽화로 그려놓아 길거리를 걸으면서 책읽기를 끝낼 수 있게 해놨다. 게다가 원조자장면집을 아예 자장면 박물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라니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박물관만큼은 ‘대박’이 예감된다. 하고많은 박물관 중에 자장면 박물관은 특이성도 돋보이지만 인천에 딱 어울리는 까닭이다. 김춘선 인천해양수산청장은 “거대한 대중국 서해시대의 거점이기도 하지만 대북 통일시대의 거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남포, 해주 등지를 오가는 화물선들이 끊임없이 사람과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북핵문제 등으로 긴장이 조성되고 있지만 바닷길만큼은 항상 열려 있어 민족화합에도 이바지하는 셈이다. 인천항의 고민이 없는 것이 아니다.1970년대에 대대적으로 건설된 파나마식운하의 물을 가두었다 풀어 놓는 갑문이 낙후해 머잖아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야 할 형편이다. 갑문으로 가보니 5만t,10만t급의 거대한 선박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러나 인천항도 이제는 외항시대로 접어들었다.“인천항도 북항 등을 대대적으로 건설,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돌이켜 보면, 일제시대의 인천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 고베와 나가사키 쓰시마 부산 원산 톈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잇는 정기연락선이 오고갔으니 지금보다도 훨씬 바다를 통한 국제간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러시아와의 교류가 근자에 이뤄졌음을 감안할 때, 바다를 통한 교류는 무려 반세기나 묶여 있다가 재개된 셈이다. 당시 인천은 ‘완연한 한국의 요코하마’로 불렸다. 국제 첨단 신도시로 개발되는 송도신도시가 완공되면 인근 인천공항과 더불어 인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 분명하니 돌고 도는 역사의 변화가 다시 온 몸으로 느껴진다.
  • [열린세상] 선진통상국가가 되는 길/이영선 연세대 교수

    최근 정부는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경제 모형으로 ‘선진통상국가’를 제시하였다. 그동안 우리 경제가 소득 1만달러 수준의 ‘중진국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바, 이를 타개하기 위해 꼭 필요한 목표와 정책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할 일이다. 선진통상국가란 무엇인가? 통상국가라 함은 2차대전 이후 대외교역을 통해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 독일과 일본을 지칭하는 개념이며, 그후 수출지향적 성장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공업화에 성공한, 소위 신흥공업국이라 불리는 대만, 싱가포르, 홍콩, 그리고 한국도 통상국가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새로이 추구하려는 경제 모형은 단순한 통상국가가 아니라 ‘선진’통상국가이다. 여기서 ‘선진’이라 함은 선진국을 의미할 터인데, 선진국은 단순히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 또는 3만달러가 된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각 부문이 국제적 수준에 도달해야 하고, 또 국민의 의식이 세계화되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 3만달러에 도달할 길도 없을 것이다. 지난날에는 수출지향적 정책을 구사하며 통상국가로서 경제성장을 이루기는 쉬운 일이었다. 외국의 원자재를 들여다가 값싼 노동력으로 가공하여 외국에 많이 수출하기만 하면 되었다. 값싼 물건을 가져가는 선진국들이 신흥공업국에 대해 그다지 통상상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국내 문제가 통상에 의해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우리의 1인당 소득을 높이기 위해서는 높은 부가가치제품을 생산해서 이를 세계시장과 교류해야만 한다. 다른 나라라고 고도의 부가가치산업에 뛰어들지 말라는 법이 없다. 결국 많은 선진국과 고도의 부가가치 산업에서 극심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고도의 부가가치 산업이란 어떤 것인가? 정보통신, 의료, 금융, 교육, 문화 등 고도의 지식기반산업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고부가가치 산업이 제조업 생산품과는 달리 우리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서비스산업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서 선진통상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우리의 상품시장만을 열어 놓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삶을 열고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산한 휴대전화와 드라마를 세계 각국에 팔면서 외국의 쌀과 영화의 수입을 제한하겠다고 버틸 수는 없다는 말이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은 매년 엄청난 규모의 외국 인력을 받아들여 자국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외국인들의 이주를 제한하고,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불편을 주고 있다니 이렇게 하고도 어찌 선진통상국가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을 열어야 우리의 제품과 서비스의 경쟁력이 향상되고,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게 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통상국가정책은 상공부가 수출정책을 잘 펴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통상국가는 단순히 외교통상부가 다수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적극적 통상정책을 펴고, 산업자원부가 효율적인 공업정책을 펴나간다고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정착시키고, 개방친화적 사회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며, 자기 분야만은 개방해선 안 된다는 식의 집단이기주의적 행위가 근절되지 않고선 선진통상국가의 모형은 성공하기 어렵다. 선진통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부 부처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 경제부처는 물론이고, 교육부는 교육 개방을, 법무부는 법률서비스시장 개방을, 노동부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보건사회부는 의료시장 개방을, 문광부는 문화시장개방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어느 부처도 선진통상국가의 실현과 무관하지 않다. 선진통상국가는 모든 삶과 의식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제기된 선진통상국가라는 목표가 제대로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영선 연세대 교수
  • 생산 않는 나라에도 “양보”…이상한 쌀협상

    정부가 미국 등 9개국과 쌀협상을 하면서 쌀수입과 직접 관련이 없는 나라들에 상당폭 양보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에 쌀을 수출한 적이 없는 나라들은 물론이고 자국에서 쌀을 생산하지 않는 캐나다 등도 관세인하 등 이득을 거저 얻었다. 13일 쌀협상 관계자 등에 따르면 정부는 개별 협상국들과 특정품목의 관세율을 낮추고 농산물 수입위험 평가를 신속히 처리하는 등 내용의 합의를 했다. 전체 틀을 규정하는 이행계획서 외에 국가별·쟁점별로 별도 합의를 하겠다는 당초 발표에 따른 것이다. 정부는 캐나다에 대해 캐놀라유(유채유의 일종) 관세를 현재의 30%에서 8%로 내려주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근 사료용 완두콩의 저율 할당관세(올해 2%) 적용 규모를 16만t에서 45만t으로 늘린 것도 캐나다를 위한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사료용 완두콩을 국내에 수출하는 나라가 캐나다뿐인 데다 쌀협상 초기부터 이를 강력히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는 저율관세를 장기간 유지시켜 주겠다는 약속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한 캐나다 대사관측은 “할당관세는 해마다 바뀌는 게 원칙이지만 사료용 완두콩에 대해서만큼은 한국정부가 5년 이상 장기에 걸쳐 낮은 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또 아르헨티나에 대해서는 닭고기·오렌지 등에 대한 수입위험평가 절차를 신속히 추진하고, 인도와 이집트의 경우는 향후 대북지원 등 식량 원조용 쌀을 구매할 때 우선해 사주기로 했다 하지만 캐나다는 자국내 쌀 생산이 전혀 없고, 아르헨티나도 지난 2003년 기준(유엔식량농업기구 통계) 71만 8000t으로 극히 미미한 나라다. 이집트도 580만t으로 우리나라보다 적다. 중국 1억 6642만t, 인도 1억 3201만t, 태국 2700만t, 미국 903만t 등을 제외하면 우리나라(607만t)보다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거의 없다. 게다가 협상대상 9개국 중 우리나라에 쌀을 수출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미국·태국·호주 등 4개국에 불과하다. 협상 관계자는 “캐나다의 경우, 앞으로 자기들도 쌀 수출을 하겠다며 갑자기 끼어들었다.”면서 “모든 참가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전체 협상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에 부분적인 양보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인도 역시 국내 쌀수출 실적이 95년 한 해밖에 없는데도 “세계 2위 수출국인 우리를 빼놓고 협상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협상에 참가했다. 한편 농림부는 중국산 과일 수입이 허용된다는 일부 보도와 관련, 체리·사과·배 등 과일에 대해 수입위험평가 절차를 개시하기로 합의하긴 했지만 이것이 막바로 수입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김태균 전경하기자 windsea@seoul.co.kr
  • [혁신 공기업탐방] ③정귀래 aT(농수산물유통公) 사장

    [혁신 공기업탐방] ③정귀래 aT(농수산물유통公) 사장

    농수산물유통공사가 ‘aT’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aT의 전략도 바뀐다. 유통회사에서 수출 전문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다. 이를 위해 모든 부서를 팀제로 개편했고, 수출지원을 위해 해외조직을 확대키로 했다. 11일 오후 이같은 내용을 담은 ‘aT 신비전 선포식’이 서울 서초구 양재동 본사 사옥에서 열린다. 정귀래 사장이 취임한 이후 마련한 신경영전략을 공식화하는 자리다. 정 사장은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aT는 1967년 발족한 이후 물류와 유통에 치중해왔다”면서 “그러나 수입개방화 시대에는 물류·유통으로는 맞서기 어렵기 때문에 수출을 통한 해외시장 개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오풍연 공공정책부장이 정 사장을 만나 비상을 꿈꾸는 aT의 청사진을 들어봤다. 예전에도 팀제였는데 이번에 도입한 팀제는 종전과 어떻게 다른가. -지난해 10월 취임한 이후 조직의 변화를 줘야 했다. 그래서 포장만 팀제였던 조직을 명실상부한 팀제로 바꿔놨다.1급도 중요한 팀을 맡으라는 취지다. 종전 있던 7개처와 39개 부서를 줄이고,22개 팀을 신설했다. 팀장은 1∼3급에게 맡겼다. 직급과 직위를 분리하고 성과주의 경영관리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내부 공모제를 통해 3급 팀장 2명을 발탁했다. 적은 인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전부서를 팀제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현 팀제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나. -우선 결재시스템이 간결해졌다. 종전 팀장이나 부장은 처장이나 실장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지금 팀장은 이사와 사장에게 직접 간다. 팀장급 직원들에게 자극제가 됐다.1급들은 자신들이 거느릴 수 있는 팀장이 없어져 불만일 수 있겠지만,2급들은 업무부담이 종전보다 줄어들어 좋아하는 것 같다. 어쨌든 팀제 자체가 목적은 아닌 만큼 기업마인드를 살릴 수 있도록 보완해 나가겠다. 지난해 aT가 정부고객만족도 평가결과 정부투자기관 가운데 1위를 차지했는데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2000년부터 고객만족 경영을 aT 비전달성을 위한 핵심요소 및 중장기 5대 기업전략으로 설정한 뒤 사장 주재로 ‘고객만족 전략회의’를 매달 개최하는 등 전사적으로 CS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사장 등 경영진과 고객을 직접 접하는 모든 직원이 고객만족교육 전문기관인 삼성 서비스아카데미에 입소 교육을 받았다. 고객서포터스 제도를 도입해 1대1식의 고객지원체계도 구축했다. 특히 고객만족도가 개인별 연봉을 결정하는 핵심지표로 반영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전직원에게 연봉제를 도입하면서 평가지표 중 20%를 고객만족 지표로 운용하는 것이다. 이같은 노력으로 1999년 58점이던 고객만족도가 매년 증가해 2002년 70점,2003년 77점, 지난해 86점을 받았다. 신비전 선포식을 하게 된 취지를 말해달라. -간단히 설명하면 농업에 활력을 주고, 고객중심의 가치경영을 하겠다는 것이다. 세계로 향하는 글로벌기업, 최고의 농산물 마케팅기업, 고객과 함께하는 국민기업, 우리농업의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이 aT가 지향하는 비전이다. 해외비즈니스가 많은 업무특성을 고려해 공사의 기능과 역할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영문명칭을 Korea Agro-Trade Corporation으로 설정하고 Agro-Trade의 이니셜을 따 aT로 정했다. 신비전 선포식에 맞춰 단행하는 조직과 인력의 개편안을 설명해 달라. -현대는 정보화 사회다. 수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살아있는 정보를 알아야 한다. 공산품에 비해 정치적·환경적 조건에 민감한 농수산물은 더욱 절실하다. 그래서 aT는 미국·일본·중국·네덜란드·싱가포르 등 5개국에 설치된 8개 해외 aT센터를 오는 2007년까지 10개국 17개 센터로 늘릴 예정이다. 올 하반기 중 모스크바에 센터가 확충된다. 지난해 20억달러의 농산물을 수출하는 성과를 거뒀는데. -수출을 통해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수출농업인, 수출업체의 노력 덕분이다. 수출을 늘리는 것은 aT의 과업이다. 지난해 처음으로 20억달러를 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네덜란드는 꽃이나 감자, 양파 등 농산물의 수출규모가 420억달러에 달한다. 꽃만 50억달러를 수출할 정도다. 그 결과 우리 농가의 1인당 수출액수는 600달러지만 네덜란드는 16만달러에 달한다. 격차가 크다. 새품종 개발과 고부가가치 농산물 수출로 오는 2013년에는 50억달러를 수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중국·일본·타이완 등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aT가 지방자치단체와 MOU를 체결하고 있는데 어떤 효과를 기대하고 있나. -aT의 고객은 농어촌에 있다. 때문에 지자체와 MOU를 체결하면 긴밀한 업무협조가 가능하게 되지 않겠나. 또 수출지원 활동을 하는데 시기와 품목면에서 aT와 지자체가 충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수출유망 품목을 공동 발굴하는 작업도 할 수 있다. 현재 충북을 시작으로 전북, 경북, 경남, 제주, 강원, 충북과 MOU를 체결했다. 북한과의 농산물 관련 협력관계는 어떤가. -남북협력팀을 신설해 쌀·옥수수 등 대북 식량지원 업무를 체계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산 쌀 10만t을 육로로 첫 지원했다. 통일·농림부 등 관계기관과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해 육로지원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외국산 쌀 30만t을 해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대담=오풍연 부장 정리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정귀래 사장은 정귀래 사장이 농수산 전문가는 아니다. 무역·통상 전문가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서 30여년동안 이 업무를 담당했다. 그중 15년은 해외 무역관장 및 본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수출지원의 첨병역할을 했다. 정 사장이 농수산물유통공사(aT)의 핵심역량을 농수산물 유통에서 수출로 바꾼 이유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가 지난해 10월 aT 사장으로 취임할 당시 일화 한 토막. 비전문가인데다 낙하산 인사라며 노조의 반대가 거셌다고 한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그였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농림축산 제품은 2차산업이지만 영업은 3차산업이다. 나는 KOTRA에서 잔뼈가 굵은 3차산업 전문가다.aT 사장 공모에서 12명 중 당당히 1등을 했다. 내가 왜 비전문가이며 낙하산 인사인가.”라며 반문했다는 것이다. 이후 노조의 반대는 잠잠해졌다. 정 사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성격이다.1997년에는 미 컬럼비아대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논문을 발표했다.2003년에는 배재대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끊임없는 자기개발형이다. ▲충북 청주(62) ▲청주고·서울대 미학 ▲KOTRA 미주지역본부장·기획관리실장·무역진흥본부장 ▲서울산업진흥재단 대표이사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신설된 ‘고객만족 혁신부’ 농수산물유통공사(aT)에는 일반 기업에서 찾아보기 힘든 새 부서가 있다. 지난 2월 발족한 ‘고객만족(CS)혁신부’가 그것이다. 정귀래 사장은 고객만족과 경영혁신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CS혁신부를 신설하도록 지시했다. 기획실에 설치된 CS혁신부는 종전 비전경영팀과 전략경영부가 맡고 있던 경영혁신 업무도 모두 가져왔다. 정 사장은 “CS혁신부의 권한이 막강해야 제대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서 “최고의 인재로 CS혁신부를 구성했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이성진 초대 부장 등 구성원 7명이 모두 최고의 인재들이다. 정 사장은 중요한 사항의 경우 CS혁신부를 관할하는 기획실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이 부장에게 지시할 정도다. 정 사장은 당초 약속한 대로 CS혁신부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우선 CS혁신부는 조직 및 정원관리를 담당한다. 각 조직별 직무분석을 통해 적정한 정원을 배정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한때 재벌그룹에서 유행했던 구조조정본부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그래서 CS혁신부는 무늬만 팀제였던 조직을 실질적인 팀제로 바꿔놨다. 10개의 처·실 산하에 10개의 팀을 두던 체제를 1센터·3실·32팀으로 개편했다. 적은 인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해서는 1∼3급 직원을 팀장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CS혁신부는 e비즈니스를 전사적으로 도입했다. 농산물을 수출하고자 하는 업자가 aT 홈페이지에 접속하기만 하면 자금조달에서부터 수출지역의 판로 등 수출업자가 원하는 정보를 일괄적으로 제공받도록 한 것이다. CS혁신부는 aT가 새로운 모토로 제시한 ‘고객과 함께 하는 우리 농업의 가치를 창출하는 글로벌 마케팅 전문 국민기업’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작업도 맡게 된다. 이 부장은 “팀제도입과 e비즈니스 등 하드웨어 부분이 자리를 잡은 만큼 앞으로는 경력개발시스템과 성과관리시스템을 도입해 직원들의 경쟁력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예정”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논술이 술술]자유무역·보호무역 논거는?

    [논술이 술술]자유무역·보호무역 논거는?

    ●자유무역론의 논리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무역협상의 목적은 자유무역의 확대다. 어떤 사람들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 보호무역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때문에 세계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자유무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무역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각국의 국민들은 더 싸고 좋게 생산하는데 자원을 선택적으로 투입한 뒤 수출해서 자신들이 생산하면 높은 비용이 드는 제품을 수입해서 쓸 수 있다. 둘째, 국제교역은 생산과 마케팅, 유통 등을 대규모화 해서 생산비를 낮춰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을 안겨준다. 셋째, 국제무역은 국내시장에서의 경쟁을 촉진한다. 그 때문에 소비자들은 다양한 제품을 더 저렴한 가격에 사서 쓸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무역에 대한 제한은 경제적 번영을 방해한다. 다수의 나라들이 무역제한 조치를 선택하는 이유는 특수 이익집단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보호무역론자들은 자유무역을 하면 한 나라의 산업이나 농업이 경쟁력을 잃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수출 증대를 통해 고용을 증대하고, 국내경기의 안정으로 임금을 안정시키고, 국방 및 기간산업을 육성하려면 보호무역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GATT,UR,WTO 무역장벽을 제거하기 위한 전후 첫 협정은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로 194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체결됐다. 그러나 GATT는 상품에 한정돼 서비스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었다. 이것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 다자간 무역협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모두 8차례 있었다.8차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진행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다.UR협상은 농산물, 섬유류, 서비스, 무역관련 투자조치, 무역관련 지적재산권 등을 다자간 협상의제로 채택했다.GATT 체제의 강화도 UR의 의제였는데 더 강력한 국제기구로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를 출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2001년 현재 144개국이 가입한 WTO는 UR협정의 사법부 역할을 맡고 있다. 세계무역분쟁 조정, 관세인하 요구, 반덤핑 규제 등 준사법적 권한과 구속력을 행사한다. ●DDA 그러나 WTO 회원국들은 UR협상을 타결하면서 농산물과 서비스분야의 시장개방 내용이 미흡하고 공산품 분야에서도 상당한 무역장벽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회원국들은 새로운 다자간 무역협상을 2001년 11월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출범시켰는데 그것이 DDA(Doha Development Agenda)로 WTO 출범 이후 첫 무역협상이다. DDA 협상은 과거의 어느 다자무역협상보다 폭넓은 의제를 다루고 있다. 특정 분야만을 다룬다면 각국간 이익과 손실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에 회원국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분야를 망라했기 때문이다. 서비스 분야 이외에 농업, 비농산물 시장접근, 환경, 규범 등 광범위한 협상의제를 채택했다. 서비스 협상은 사업, 커뮤니케이션, 건설, 유통, 교육, 환경, 금융, 보건·사회, 관광, 오락·문화·스포츠, 운송, 기타 서비스 등 12분야의 155개 세부 업종을 다룬다. ●DDA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 세계은행은 DDA협상을 통해 무역보호수준이 40% 삭감될 경우 공산품 분야에서 696억 달러의 후생 증대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DDA 협상으로 우리 경제는 대체로 2.5∼4.2%의 실질 GDP가 증가할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시장개방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산자의 기술개발 및 품질개선을 촉진함으로써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문별로 보면 이해득실이 엇갈린다. 농산물 관세와 비관세장벽이 완화되면 국내 농업종사자들은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어 소득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쌀수매 등을 통한 농민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이 감축되면 농민들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수산업도 마찬가지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서비스 산업은 농업 및 제조업의 생산에 있어 중간재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성 제고에 도움을 주게 된다. 물류시스템은 유통, 통신, 금융 등 서비스 산업의 강화없이는 개선되기 어렵다. 주요국들은 우리나라에 법률, 교육, 시청각, 보건의료 산업의 추가 개방 및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 분야는 다른 서비스 분야와는 달리 공공 서비스의 성격도 가지고 있고 사회적, 문화적 파급 효과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개방의 폭과 속도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대경연측은 밝히고 있다. 손성진기자 sonsj@seoul.co.kr
  • [국제경제플러스] 日 중국에 고품질쌀 수출 추진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정부가 중국에 자국산 쌀 수출을 추진 중이라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2일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오는 2009년까지 농산물 수출을 두배로 늘린다는 목표 아래 중국 정부에 일본쌀 수입금지 방침을 해제해 달라고 요구, 긍정적인 답변을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신문은 중국 당국이 이미 검역관련 절차 등 수입 허용을 위한 사전조사에 들어갔으며, 일본 정부는 이번 여름 수출 개시를 목표로 협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는 중국에서 외식산업이 번성하고 있어 고품질 일본쌀의 수요가 커질 것으로 판단, 수출 추진에 나섰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 수입쌀 9월 밥상 오른다

    지난해 말 쌀협상 타결에 따라 올해부터 허용되는 수입쌀의 일반 소비자 시판이 오는 9월쯤 시작될 전망이다. 농림부 관계자는 6일 “수입쌀 시판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지난주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수입쌀 시판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개정된 양곡관리법이 발효되는 6월 말 이전에 수입쌀 시판을 위한 시행령 등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중국 등 9개국과의 쌀협상 결과에 대한 국회비준이 6월 임시국회에서 이뤄지더라도 수입쌀 시판은 9월쯤부터 시작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법적으로는 개정 양곡관리법이 발효되는 6월 말부터 수입쌀 시판이 허용되지만 정부가 쌀 보관이 어려운 장마철(7∼8월)을 피해 9월쯤 수입쌀을 국내로 들여와 시중에 유통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수입쌀 시판을 10월 이후로 늦출 수도 있지만 쌀 수확기와 맞물려 농민들의 큰 반발이 우려되고, 시기를 더 늦추면 쌀 수출국들과의 통상마찰이 예상돼 9월이 수입쌀 시판 개시 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지난해 말 쌀협상에서 올해부터 쌀 의무수입물량(TRQ)의 10%를 시중에 유통시키고 이를 2006년까지 단계적으로 30% 수준까지 늘리기로 했다. 올해의 의무 시판물량은 2만 2575t(15만 8000섬)이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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