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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 전공선택 이렇게] 꿈·적성 우선…직업 고르듯 신중히

    [대학 전공선택 이렇게] 꿈·적성 우선…직업 고르듯 신중히

    수험생 가운데 상당수는 대학 전공을 수능 점수에 맞춰 단숨에 정한다.평생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전공을 결정하는데 ‘남이 가고,주위에서 가야 한다고 해서 선택했다.’고 답할 정도이다.전공 선택에서 자기 탐색이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빠져있다.이 때문에 대학에 진학한 뒤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으로 머리를 싸매는 학생들이 많다.입학 초기 자신의 적성을 새로 발견하고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으로 활로를 찾으면 그나마 다행이다.시행착오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도록 올바른 진로 선택을 위한 방법을 소개한다. 진로 전문가들은 전공 선택을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먼저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정한 뒤 능력·적성 등을 고려해서 결정하라.”고 조언한다.또 장기적인 관점에서 수요가 많은 학과를 선택하고 진학하려는 대학·학과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교생은 자신의 적성과 관심 분야가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상위권 학생들은 적성에 상관 없이 법학과와 의예과,경영학과 등 인기 학과를 선택한다.중·하위권 학생들도 이와 비슷하거나 취직이 잘되는 과를 정할 뿐이다.적성과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신의 적성부터 살펴야 전공 선택에 자신이 없는 학생들은 먼저 검사를 통해 자신의 적성과 흥미·성격·가치관 등을 알아봐야 한다.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적성 검사에는 직업흥미검사와 진로적성검사,일반직업적성검사,진로의식 발달검사,인성검사 등이 있다.중·고생들은 자칫 적성과 흥미의 의미조차 혼동하기 쉬운 탓에 자신의 적성과 관심도를 모두 따져 봐야 한다. 인터넷을 통해 각종 검사가 가능하다.워크넷(www.work.go.kr)에서 직업흥미 검사와 직업선호도 검사가 가능하고 커리어넷(www.careernet.re.kr)에선 직업흥미검사와 직업적성검사,직업가치관 검사,진로성숙도 검사를 할 수 있다.에듀넷(www.edunet4u.net)에서는 진로성숙도 검사를 받을 수 있다.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진로정보센터에서 운영하는 커리어넷(www.careernet.re.kr)에서는 자신에게 맞는 16가지 직업군을 찾아 준다.하지만 인터넷 심리검사는 정확성이 떨어지므로 절대적으로 믿어서는 안된다. 적성검사를 통해 특정 분야에 대한 적성을 살펴봤다면 다양한 상담센터를 통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세부사항을 그려야 한다.시·도 교육청에는 청소년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YMCA진로진학상담실 등 시민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상담실도 다양하다. ●전공에 맞는 직업 체험 자신의 전공을 결정했다면 실제 어떤 직업에 연관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청소년들이 단기간에 직업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다양한 기관에서 운영하고 있다.시·도 청소년상담실을 비롯해 한국산업인력공단,중앙고용정보원,YMCA 등에서 제공한다. 중앙고용정보원의 ‘잡스쿨’의 경우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학생들이 강의와 현장 체험을 통해 직업의 실체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예를 들어 유전공학 분야를 주제로 프로그램이 짜여지면 먼저 특정 직업에 대한 정보를 개괄적으로 다룬다.인터넷 사이트와 진로를 선택할 때 겪는 어려움과 중요한 점 등을 소개한다. 또 유전공학과 대학 교수가 직접 유전공학의 중요성과 관련학과 및 전망,졸업생의 진출 분야 등에 대해 설명한다.또 유전 공학 관련 기업체 종사자가 이 분야의 추세와 소속 기업에서 만들어낸 제품 등에 대해 강의한다.학생들은 과정 가운데 기업체를 방문해 기업체의 규모와 공정과정,설비 등도 견학한다.이같은 직업 체험 과정은 학생들이 전공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전공은 전문·장래성을 고려해 선택” 직업에 대한 탐색 과정을 마쳤다면 대학과 학과를 결정해야 한다.여기에는 자신의 학업성적이 절대적으로 반영된다.하지만 대학과 학과를 선택할 때는 지명도나 인기보다는 장래성을 살펴야 한다.교과 과정과 교수진,시설,선배의 취업 등 모든 따져본 뒤 결정한다.학교에 재학하는 동문 선배를 찾아가 조언을 듣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실 수험생들은 대학 선택에서 대학 브랜드와 학과를 놓고 고민하기 마련이다.처음에는 적성을 고려해서 학과를 선택하지만 막상 원서를 넣을 때는 대학을 먼저 정한다.전문가들은 마지막까지 장래성을 고려해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이영대 연구위원은 “다음은 자신의 꿈에 맞춰 학과를 선택한다 해도 과연 졸업 후에 얼마나 유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면서 “전문화된 사회에서 학과는 곧 자신의 미래와 관련이 있어 자신의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첩경”이라고 말했다. ■ 도움말 이영대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중학생을 위한 진로선택법 중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뚜렷하게 정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학생들의 성적이 가변적이기 때문에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도 하다.하지만 중학교 3학년에는 어느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다.적어도 문과와 이과를 놓고 어느 쪽이 적성에 맞는지 선택해야 한다. 먼저 진로 탐색 검사를 통해 자신의 문·이과 적성을 살핀다.수리·공간지각 능력이 높으면 이과 분야에 적성이 맞을 확률이 크다.언어 능력 등이 높으면 문과계통 적성일 가능성이 높다.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흥미를 느끼면 이과,국어와 영어 등을 선호하면 문과 적성으로 추측할 수 있다.그러나 학생들의 적성은 개인적인 취향과 다를 수도 있어 적성 검사를 통한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 중학교에서는 대개 5월 초쯤 진로 적성 검사를 실시한다.4월 중순에 치른 중간고사 성적표와 진로 적성 검사 결과를 비교하는 것도 좋다.또 교육청과 전문 기관에서 만든 프로그램에 참가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일부 과정에서는 다양한 직업인들을 초청해 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놓고 있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전공 탐색이 이뤄졌다면 담임 교사와 진로지도 교사 등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필요하다.객관적인 자료와 자신을 오랫동안 눈여겨 본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구상을 해야 할 시기이다.단기적으로 3학년 때에는 진학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한다. 진로 결정을 토대로 인문계와 실업계,특수목적 고교 가운데 어느 곳에 진학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최근에는 특별전형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려고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실업고교생의 진로선택법 실업계 고교는 졸업생 가운데 절반 이상이 대학 진학을 선택한다.실업고는 마지막 교육 과정이 아니라 고교 과정의 하나인 셈이다.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통상 실업계 학생들은 취업과 진로,창업 등으로 방향을 정할 수 있다.인문계에 비해 실업계 재학생들은 취업과 진학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하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일찍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좋은 결과물을 거두기 어렵다.1학년 때는 적성 검사 등을 통해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고 2학년에서 학업성적을 고려해 진학과 취업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거친 선배들의 소중한 조언이 필요하다.선배와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사회생활의 어려운점과 취업 정보 등을 얻을 수 있다.특히 전공분야로 취직하려는 학생들은 일찍 현장 분위기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경험이 부족한 졸업생 가운데 직장을 자주 바꾸는 사례가 허다하다.또 취업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 진학을 결정한 학생들은 특별전형 등 입시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실업계 재학생은 아무래도 입시 정보에 둔감하기 마련이다.또 대학 수업에서 필요한 외국어와 수학 등에 대한 보충 학습도 필요하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서울이야기] (36) 노인복지

    [서울이야기] (36) 노인복지

    우리나라는 2002년을 기점으로 전체인구 중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7%를 넘어서서 ‘늙어가는 사회, 고령화 사회로 들어섰다. 특히 고령화가 진행되는 속도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어서 2018년에는 노인인구가 전체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사회’로,2026년에는 2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의 노인 인구비율은 이보다는 낮은 6%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고령인구 증가율은 전국 평균을 상회해 서울의 노인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전국 인구의 약 4분의1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서울의 노인인구 규모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서울에 살고 있는 노인은 어떤 모습일까. ●노인,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이순옥(67세)씨는 요즘 손자, 손녀들과 이메일로 편지를 주고받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지난해 봄부터 복지관에서 하는 컴퓨터 수업을 들어온 이씨는 서툴지만 자판을 두들겨 짧은 편지를 쓰고 메일을 보내는 요령도 익혔다. 처음엔 할머니의 편지를 조금 신기해하기도 하고 어색해하던 손주들이 이젠 할머니의 짧은 편지에 학교 이야기, 여자친구 이야기, 엄마한테 야단맞은 이야기까지 알아보기 힘든 이모티콘까지 곁들여 긴 편지로 답장을 한다.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도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젠 가까운 곳에 둔 것 같아 마음 든든하기만 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듣는 컴퓨터 수업 이외에도 이씨는 포크댄스 수업과 일주일에 한번씩 근처의 장애인아동시설에 자원봉사를 가고 있어서 누구보다도 바쁜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 봄부터는 근처의 사회복지관에서 열리는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에 참여하려고 신청해 두었다. 재작년 남편과 사별하면서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스런 시간을 기억하면서 주변의 비슷한 경험을 겪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이웃의 권유로 마지못해 따라왔던 복지관에서 이순옥씨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노인종합복지관은 노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노인복지시설 중의 하나이다. 현재 서울시에는 24개의 노인종합복지관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노인의 생활, 주택, 신상 등에 관한 생활 상담 및 질병예방 치료 등에 관한 건강상담과 지도, 취업상담과 알선, 기능회복 훈련, 교양강좌 등을 포함해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과 서비스들이 제공되고 있다. 장소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지난 2000년부터 경로당 활성화 사업을 통해 경로당에서 노인복지를 위한 실제적인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한 복지관으로 이동할 때에는 무료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무료셔틀버스는 현재 서울시에서 12개 노선 25대가 운행되고 있으며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 이동에 장애를 가진 시민과 이들과 동행하는 보호자가 함께 이용할 수 있다. ●경로당, 더 이상 동네 사랑방이 아니다 경로당은 그 숫자 면에서 볼 때 우리 주위에서 더욱 가깝게 찾아볼 수 있는 시설이다. 서울시에는 2005년 10월 현재 총 2770개의 경로당이 운영되고 있어서 양적으로 가장 많이 공급된 노인여가복지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경로당은 동네 노인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여가를 즐기는 장소로 인식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노인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지역사회 내의 노인종합복지관 또는 종합사회복지관과 경로당간의 연계를 통해 복지관 사회복지사들이 경로당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사회복지 서비스나 사회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여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아직까지 초기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지원금의 부족, 전문인력과 프로그램 미비, 공간과 설비의 부족 등 많은 운영상의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러한 사업은 경로당이 지역사회의 노인들을 위한 종합적인 다목적 노인복지센터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설보호를 필요로 하는 노인이 늘고 있다 이처럼 지역사회 내에서 활동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노인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반면에 건강이 악화된 고령노인도 함께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출생률의 감소로 노인들을 부양할 가족들은 절대적으로 줄어들고 있고 더욱이 여성들의 사회활동 증가와 핵가족화로 인해 노인을 보살피는 일이 더 이상 가족 내에서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부양을 필요로 하는 노인에게 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방법은 서비스가 제공되는 장소에 따라서 시설보호와 재가보호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인 입소시설은 양로시설과 요양시설로 구분할 수 있다. 양로시설은 일상 생활에 지장이 없는 6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이다. 양로시설이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는 일반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요양시설은 노인성 질환 등으로 요양이 필요한 노인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가운데 치매나 중풍 등 중증 노인성 질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설을 전문요양시설로 구분한다. 현재 서울시에는 18개의 요양시설과 23개의 전문요양시설이 있다. 서울시의 노인인구 규모를 고려할 때 이들 시설은 아직 수요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의 노인요양시설은 대부분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를 대상으로 한 무료시설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시설보호를 필요로 하는 서민층, 중산층 노인들이 갈 곳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양로시설과 요양시설이 보호가 필요한 노인들을 시설에 입소시켜 보호하는 서비스 형태인 반면 지역사회에 거주하면서 필요한 보호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재가복지시설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가복지시설은 주간보호시설과 단기보호시설을 들 수 있다. 주간보호시설은 가족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심신이 허약한 노인과 장애노인들을 낮동안 입소시켜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다. 2004년 12월 현재 서울시에는 73개의 주간보호시설(실비시설 포함)이 있으며 이 곳에서 생활지도 및 일상동작훈련 등 심신의 기능회복을 위한 서비스와 급식 및 목욕서비스, 여가생활 서비스, 이용노인가족에 대한 상담 및 교육 서비스 등이 제공되고 있다. 단기보호시설은 보호가 필요한 노인을 시설에 단기간 입소시켜 보호하는 곳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는 주간보호시설과 유사하다. 단기보호시설의 보호기간은 원칙적으로 45일 이내이며 연간 최장 이용일수가 3개월을 초과할 수 없다. ●재가복지서비스 지역사회 내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제공되는 다양한 서비스들은 ‘재가복지서비스’로 구분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주간 단기보호시설에서 제공하는 재가서비스 이외에 무료급식, 식사배달 및 밑반찬 배달, 가정도우미 사업, 방문간호서비스 등 재가복지서비스가 제공하고 있다. 서울시에는 1만 5000여명(2002년 기준)이 넘는 결식노인이 있다. 생활곤궁, 취사불편, 가정문제 등 부득이한 사정으로 식사를 거르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서울시는 무료급식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경로식당은 서울시 관내 노인종합복지관 혹은 사회복지관 등의 민간복지시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저소득 결식노인을 위한 무료급식사업의 일환으로 자원봉사자 등을 통하여 식사 또는 밑반찬을 가정까지 배달하는 식사배달사업 및 밑반찬배달 사업도 실시되고 있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보건소에서 실시하는 방문간호사업은 노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는 아니지만 실제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상당수가 노인들이며 보건서비스의 수요가 노인들에게서 많기 때문에 수혜자의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특히 노인들의 경우 치매나 중풍 등 신체적, 정신적인 이유로 병원방문이 어려운 경우가 많고 함께 병원까지 동행해 줄 보호자가 없는 경우가 빈번해 보건·의료서비스가 필요한 경우에도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재가노인을 대상으로 한 방문간호서비스는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로연금과 교통수당 일정한 소득이 없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인들에게는 경로연금이 지원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의 경우 80세 이상 노인은 월 5만원,65세에서 79세 노인은 월 4만 5000원의 경로연금이 지급되며 저소득 노인의 경우 배우자가 없는 경우 월 3만 5000원, 부부가 동시에 수급자인 경우 월 3만 630원이 지급된다(2005년 기준). 법적으로는 부양의무자인 아들이나 딸이 있으나 사실상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해서 생계가 어렵지만 자녀가 있어서 생활보호대상자나 저소득 노인으로 선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따라서 대상자를 선정하기 위한 보다 정교한 기준이 요구되고 있다. 경로연금은 노인의 경제적인 수준을 기준으로 하여 지급되는 반면 경제적인 수준과는 상관없이 모든 노인에게 지급되는 노령수당의 개념으로 서울시는 65세 이상 노인에게 교통수당 및 지하철 무임승차권을 지급하고 있다. 교통수당은 분기별로 1인당 3만 6000원씩 신청 노인에 한하여 지급되고 있으며 65세 이상 노인이 지하철을 이용할 때 신분증을 매표소에 제시하면 무임승차권을 지급하고 있다. ●‘노인일자리’가 곧 ‘노인복지’ 일을 하고 싶어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노인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일’이란 경제적인 소득을 보장해 주는 동시에 삶의 의미와 활력을 제공해 주는 원천이 된다. 때문에 일하고 싶어하는 노인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은 노인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 주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노인을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주체로 인식하고 일자리 알선이나 사회참여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복지사업의 방향전환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고령자의 고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서울시에서는 고령자취업알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에서는 구직자 모집, 취업상담, 알선 및 사후관리, 구인처 개발 및 관리, 고령자 적합직종 개발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며 노인취업훈련센터를 통한 취업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2003년부터 연 2회 실버취업박람회를 개최하고 있다. 고령자취업알선센터 사업의 하나로 운영되고 있는 노인취업훈련센터(www.goldenjob.or.kr)는 만 55세 이상의 고령자를 대상으로 재취업에 필요한 맞춤형 교육을 제공한다. 경비원, 주차관리인, 건물환경관리원, 텔레마케터, 배달원, 노인, 아동도우미, 광고모델, 창업, 방화관리사 등 12개 직종에 대한 취업교육과 소양교육 등이 실시되고 있다. 지난 2005년 9월 개최된 ‘서울 2005 실버 취업박람회’에는 2만여명의 장년층 구직자가 참여했다. 이 박람회에서는 2000여개의 공공부문 일자리를 포함하여 총 6207개의 일자리가 제공되었다. 이외에도 고령자 자활 후견기관으로 지하철 택배, 꽃배달, 안내인 등의 사업을 운영하는 지역사회 시니어클럽과 공동생산 및 분배를 통해 소득기회를 제공하는 노인공동작업장 등을 통해 노인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노인의 다양한 욕구에 대한 이해가 필요 보호가 필요한 노인에겐 적절한 보호와 지원을, 일하고 싶어하는 노인에겐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자리’와 ‘일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체계적인 복지서비스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도 자리잡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은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구와 상황들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김선자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시사회부 부연구위원
  • [스폰서 기획-사이버대학특집] 서울디지털대학교

    최근 인터넷으로 4년제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사이버대학이 인기다. 특히 20·30대 직장인들 사이에서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가 확산되면서 학위취득이나 재교육을 위해 사이버대학에 진학하는 이가 늘고 있다. 사이버대학은 학교에 출석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수업을 받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없고, 학비가 일반 대학 등록금의 3분의1 정도로 경제적이어서 직장인에게 적합한 교육방식이다. 국내 사이버대학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서울디지털대학교(www.sdu.ac.kr 총장 조백제)는 재학생 8600여명의 약 80%가 직장인이다. 직장인의 비율이 늘어나자 실무와 자격증 취득과정을 중심으로 교과과정을 개편하고 국내 사이버대학 중 가장 많은 16개 학부 23개 전공을 개설했다. 서울디지털대 정인식 교무처장은 “직장에서의 업무능력 향상, 이직이나 창업, 노후대비 등을 위해 사이버대학에서 재교육을 받으려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면서 “직접 강의를 들어보면 수업방식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사이버대학의 인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음은 정인식 교무처장과의 일문일답. ▶서울디지털대의 강점을 소개해달라. -2006학년도 신입생을 포함하면 재학생 규모가 1만명을 넘어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사이버대학으로 거듭나게 된다. 다음달에는 1500여명이 졸업하며 이들의 상당수가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다. 이를 볼 때 수업의 질적 우수성을 알 수 있다. ▶현재 몇개 학과가 있으며 특징은 무엇인가. -현재 16개 학부에 23개 전공이 있다. 23개 전공은 경영학, 법학 등 전통적인 분야부터 게임, 엔터테인먼트경영, 디지털영상 등 첨단 IT 분야까지 실제 사회생활에서 활용되는 전분야에 망라돼 있다. 교과과정 대부분이 자격증 취득, 실무능력 배양 등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실무 분야의 다양한 전문 지식을 폭넓게 얻을 수 있다. ▶수업의 장점과 종류를 말해달라. -서울디지털대에서는 한 번 수강했던 강의를 1년 후까지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선인터넷을 통해서도 학습이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수업 방식으로는 ▲일반적인 칠판 강의 ▲수업 콘텐츠와 교수 모습을 보며 수강하는 동영상 강의 ▲멀티미디어를 수업에 활용하는 HTML수업 ▲어학수업에 주로 활용되는 롤플레잉강의 등이 있다. ▶교과목이나 강의 콘텐츠의 강점은 무엇인가. -사이버 대학 중에 가장 많은 연간 825개 교과를 개설해 선택의 다양성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직장인이며 기존 학위 소지자도 50%를 넘기 때문에 자격증 취득과 실무 교육에 비중을 두고 교과 과정을 운영한다. ▶출석이나 시험·평가 등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모두 온라인으로만 이뤄진다. 주차별로 제작돼 온라인 상에 오픈된 수업을 2주안에 들으면 출석이 체크된다. 시험의 종류는 퀴즈시험,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이 있으며 4지 선다형, 서술형, 주관식, 논술형 등의 형태로 치뤄진다. ▶학사관리는 어떤식으로 이뤄지나. -졸업생이 1500여명을 상회한다는 것은 학사관리가 철저하고 꼼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서울디지털대에는 학생들의 학습과 대학 생활을 지원하는 다양한 인력이 있다. 학생들을 복지, 학사일정, 대학생활, 수업장애 등 다양하고 세분화된 영역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수강생들은 큰 무리 없이 학업을 마무리할 수 있다. 이런 학사관리로 학생들이 가장 많이 지원하는 사이버대학이 될 수 있었다. ▶서울디지털대에서 처음으로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졸업생 규모는 얼마나 되며 진로는 어떠한가. -국내 사이버대학 최초로 2004년 2월, 74명의 조기졸업생을 배출한 바 있으며 다음달 졸업예정자를 포함하면 1587명의 졸업생을 보유하게 된다. 자기계발에 뜻을 두고 입학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분야에서 보다 전문적인 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현재 졸업생의 약 30%가 대학원 진학을 하고 있으며 일부는 자격증 취득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사이버대학에서 공부하려는 예비 입학생들을 위해 한마디 해달라. -사이버대학은 졸업과 동시에 일반 대학교와 동등한 법적 자격을 부여받는 만큼 교과과정이나 대학생활 자체가 쉽지만은 않다. 컴퓨터를 상대로 혼자서 공부하기 때문에 의지와 노력이 더없이 필요하다. 문은 열려있다. 언제든 여러분의 새 출발을 도와주겠다. kim@seoul.co.kr ■ 사이버대 이렇게 공부하라 서울디지털대학교 정인식 처장은 “학생이 일정한 공부시간이나 학습량을 정해놓는 등 온라인 수업방식에 맞는 자신만의 공부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서울디지털대학교는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학업을 독려하고, 강의나 시험을 빼먹지 않도록 돕는 학사관리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이버대학에서 공부하려는 직장인을 위해 정인식 처장이 조언하는 학습방법을 정리했다. ●목적을 분명히 하라 공부를 하려는 목적이 직장에서의 승진인지, 창업인지 목적을 분명히 하면 학습의욕도 오르고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반복학습을 활용하라 이해가 안 되거나 암기가 필요한 부분이 있을 때는 물론, 외국어학습 같은 경우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해서 들으면 큰 도움이 된다. ●금요일을 조심하라 보통 직장인은 주말로 공부를 미룬다. 주말에 공부하려고 결심했다면 금요일은 술자리를 갖지 말고 가능한 일찍 퇴근하는 게 좋다. ●게시판을 이용하라 궁금증과 상담 등은 게시판을 이용해 문의할 수 있다. 담당교수 및 담당자가 24시간 내에 자세하게 답변해준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라 MP3 플레이어에 강의를 다운받아 출퇴근 시에 듣는 다거나 20분 단위로 나뉘는 강의를 새벽이나 자기 전에 듣는 등 자투리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다. ●대학생활을 즐겨라 학부의 특성에 따라 ▲외국인 교수의 어학 교실 ▲명사 특강 ▲상담 실습 ▲문화탐방 등 오프라인 학습활동에 참여하면 대학생활을 즐기면서 실력도 쌓을 수 있다. ■ 2006학년도 신·편입생 모집 서울디지털대학교는 오는 24일까지 2006학년도 신·편입생을 모집한다. 모집정원은 신입생 3000명, 편입생 1286으로 총 4286명. 신입생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 소유자면 지원이 가능하며 수능성적과 관계 없이 지원서와 학업계획서로만 뽑는다. 2·3학년 편입의 경우 대학 또는 전문대학에 준하는 학교나 학점인정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각각 35학점과 70학점 이상을 이수했다면 지원할 수 있다. 53학점 이상 이수한 경우 2.5학년 편입도 가능하다. 학비는 기본등록금 없이 학점당 5만원이며 한학기에 60만~90만원으로 오프라인 대학의 4분의1 수준. 사이버대학 중에서 가장 저렴하다. 세계 최고의 온라인 대학인 미국 피닉스(Phoenix)대학의 커리큘럼을 도입해 16개 학부 23개 전공을 개설했다. 교과과정은 실무중심교육과 자격증 취득과정 위주로 구성됐으며 개설 전공은 ▲경영, 부동산, 영어, 사회복지학부 등의 인문사회계열 ▲멀티미디어, 디지털영상, 문예창작, 엔터테인먼트경영학부 등의 IT 및 문화예술계열이 있다. 250여명의 교수진은 이론적인 바탕이 탄탄한 업계 실무자들로 구성됐다. 한 강의를 실무전문가, 과목담당교수, 유관분야 겸임교수가 함께 강의하는 이른바 ‘팀티칭(Team Teaching)´ 방법으로 이론과 실무를 동시에 가르친다. ▲중도 하차하는 것을 막아주는 24시간 학사관리 ▲한번 수강한 강의를 1년 동안 들을 수 있는 반복수강 서비스 등도 제공한다. 서울디지털대학교는 직장인의 이직과 미취업 상태의 재학생 취업지원을 위해 커리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커리어센터는 취업교육과 경력관리 등 맞춤형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학생 개개인의 취약점 극복을 위해 온·오프라인 교육과 1대1 맞춤상담을 실시한다. 중국 상하이에 e캠퍼스를 개교하는 등 해외대학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학교측은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 유럽의 대학교와 학술연구 및 상호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함으로써 세계 디지털교육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도록 ‘글로벌 교육네트워크´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 [달라진 세법] 개편된 퇴직연금·기업지출 과세제도

    [달라진 세법] 개편된 퇴직연금·기업지출 과세제도

    정부가 9일 입법예고한 세법 시행령·규칙 개정안 중 퇴직연금 및 기업지출과 관련된 주요 세제를 간추린다. ●퇴직연금:일시금보다 연금으로 받으면 세금 덜내 연금을 받을 때 매월 5%씩 원천징수한다. 연말에는 다른 연금소득과 합산해 과세대상 소득이 600만원이 넘으면 8∼35%의 세율로 종합과세한다. 합산액이 600만원 이하이면 연금소득을 합하지 않고 따로 분리과세한다. 연금 가입자가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거나 중도에 인출하면 일반 퇴직소득으로 간주, 정률공제(45%)와 근속 연수 등의 퇴직소득 공제를 받는다. 중도인출은 주택구입 및 본인과 가족의 6개월 이상 요양 등에만 허용된다. 직장을 옮길 경우 퇴직금을 금융기관에 마련된 개인퇴직계좌(IRA)로 이체할 때에만 세금을 나중에 내는 ‘과세이연’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퇴직연금의 정착을 위해 기업의 퇴직급여 충당금의 법인세 손비 인정비율을 40%에서 2007년까지 35%,2008년까지 30%로 낮추기로 했다. 또 근로자들의 연금가입을 유도하기 위해 연금 수령액이 연간 1700만원 이하이면 일시불로 받을 때보다 세금을 덜 내게 만들었다. 예컨대 올해 퇴직연금에 가입, 매년 1000만원씩 불입,2016년부터 연간 1500만원을 받을 경우 내야 할 세금은 연간 13만 6000원이다. 연금 수령자가 65세 이상이면 경로우대 공제 200만원이 적용돼 세금을 한푼도 안 낸다. 하지만 같은 기준으로 연금을 불입한 뒤 10년 뒤 일시불로 받으면 540만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 이는 연금으로 퇴직금을 받을 때 매년 13만 6000원씩 40년을 내야 하는 세금액과 비슷하다. ●기업투자 활성화:임시투자세액공제 연장 및 사전상속제도 도입 기업이 기계장치 등 설비에 새로 투자할 경우 투자금액의 일정비율을 법인세에서 공제해 주는 임시투자세액공제 제도를 올해 말까지 1년 연장했다. 다만 공제율은 10%에서 7%로 낮췄다. 즉 올해 100억원을 설비투자할 경우 지난해에는 10억원의 세금을 빼 줬으나 올해에는 7억원만 공제해 준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올해 매출액이 700억원이고 과세표준이 70억원인 기업이 100억원을 투자했을 경우 세액공제가 없으면 17억 3800만원의 법인세를 내야 했으나 세액공제를 받으면 10억 3800만원을 내게 된다. 투자가 여러 해에 걸쳐 이뤄지면 과세 연도별 공제율에 따라 집행된 투자액만큼 세제혜택을 받는다. 또 30세 이상 혼인한 자녀가 내년 말까지 65세 이상 부모로부터 창업자금을 증여받으면 우선 10%의 낮은 세율로 과세하고 나중에 상속받을 때 10∼50%의 정상 세율로 정산한다.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추세에 따라 은 층으로 ‘부(富)의 이전’을 촉진,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취지다. 예컨대 10억원을 사전 상속할 경우 일단 5000만원의 세금을 낸 뒤 나중에 실제 상속받을 때 4000만원의 세금을 내면 된다. 그러나 이 제도가 없는 경우 상속에 앞서 증여하면 2억 3100만원의 증여세를 내야 하고 상속시에는 9000만원의 상속세를 한꺼번에 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다만 토지·건물이나 상장주식 가운데 소액주주분 등 소득세법상 양도소득세 과세대상 자산은 제외된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철강업계 ‘터줏대감’ 칠순에 담담한 은퇴사

    철강업계 ‘터줏대감’ 칠순에 담담한 은퇴사

    지난 2000년 4월4일 서울대병원. 동국제강 2대 회장인 고 장상태 회장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장세주 당시 동국제강 사장(현 회장)과 부인 김숙자씨 등 유족들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장상태 회장을 임종한 유일한 경영인이 6일자로 상근고문으로 물러난 전경두(71) 동국제강 사장이다. 동국제강 역사의 ‘산증인’, 철강업계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전 사장은 마산상고와 부산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조교로 일하다 1964년 10월 동국제강에 입사했다.41년 3개월동안 ‘철강외길’을 걸어온 셈이다. 동국제강 창업주인 장경호 회장부터 장상태 회장, 장세주 회장 3대를 이어오며 한국철강사를 함께 써 온 전 사장은 “이제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때”라며 담담하게 은퇴사를 밝혔다. 무역부, 경리부, 경리이사, 관리본부장 등 주로 재무파트에서 일하며 IMF위기 등을 헤쳐 온 전 사장은 99년 CEO 취임 이후 직원들의 사기를 키우는데 힘을 쏟았다.“아무리 강한 로마군단도 기가 센 군대에게는 진다.”는 지론이다. 지난해 일본의 역사소설 ‘대망’을 다시 꺼내 읽으며 “돈으로 해결 못하는 큰 효과를 내고 결집력을 내는 것은 기업의 사기”라는 사실을 또한번 절감했다고 한다. 40년 넘게 ‘철강밥’을 먹다보니 생사의 기로에 선 적도 있었다. 베트남전이 종전으로 치닫던 1974년 12월 무역부 차장으로 사이공에 고철수입 계약을 위해 출장을 갔다가 타고가던 미군 수송기가 프로펠러 고장으로 베트콩 출몰지역인 탈라트시에 불시착한 것이다. 다행히 비행기를 수리해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여행보험에는 가입했느냐.”는 현지 가이드의 질문에 등골이 서늘했다고 한다. 전 사장의 검소한 생활태도가 회사의 금융위기를 막아내는데 일조했다는 일화도 있다. 2001년 동국제강은 흉흉한 소문에 시달렸는데 마침 주거래 은행 간부가 주말 롯데백화점에서 전 사장 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한 그릇에 5000원 하는 단팥죽을 먹으러 모처럼 외식을 나온 길이었다. 이 은행 간부는 “대표이사가 저렇게 검소한데 회사가 잘 안될리가 있겠는가.’라고 감탄했고 이 때문인지 금융대출이 쉽게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전 사장은 또 동국산업, 한국철강 등 장상태 회장 형제들간 계열분리를 일찌감치 마무리지어 두산이나 한진과 같은 ‘형제간 분쟁’의 불씨를 제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권철현씨와 17년간 끌어온 연합철강(현 유니온스틸) 지분정리도 전 사장이 진두지휘했다. 전 사장은 늘 “직원들 기를 살리고 화목한 기업문화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한 사장으로 남고 싶다.”고 소망해왔다. 백화점에서 직원 가족들을 만나면 아이들에게 용돈을 직접 쥐어주고 딱딱한 종무식 대신 회식을 시켜주던 전 사장을 ‘든든한 아버지’로 기억하는 직원들이 실제로 적지 않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길섶에서] 대통령과 붕어빵/오풍연 논설위원

    붕어빵 장수가 많이 눈에 띈다. 창업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일까. 취업난도 일정 부분 거든 듯해 씁쓸하기도 하다. 붕어빵을 굽는 손놀림이 빠른 젊은 사람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붕어빵의 향수에 젖은 이들에겐 반가운 일이다. 어디서든 손쉽게 구해 옛 추억을 되새길 수 있으니…. 특히 붕어빵은 한국인에게 친근감이 있다. 붕어는 우리 하천에 널려 있는 가장 흔한 어종. 그 모양보다는 맛에 더 묘미가 있다. 단팥을 주 원료로 한 소가 그것이다. 고소하면서도 달콤하고 바삭바삭하다. 말랑말랑하고 쫄깃쫄깃한 맛을 무엇에 견줄까. 먹는 방법 또한 가지가지다. 머리부터, 꼬리부터, 배부터, 등지느러미부터, 반을 뚝 잘라 먹는 사람 등. 전체를 음미하면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만한 먹을거리가 어디에 있으랴. 금방 구워낸 것만큼이나 식은 붕어빵도 맛있다. 붕어빵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는 것 같다. 한 전직 대통령은 최근 텔레비전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붕어빵’을 좋아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종종 붕어빵을 찾았다는 전언이다. 추운 겨울 붕어빵을 굽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풍연 논설위원poongyn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천리그룹-이만득·유상덕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천리그룹-이만득·유상덕 회장家

    사업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동업’ 얘기를 꺼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사업 과정에서 동업자와 합의로 꾸려가기란 득보다 실이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업가들은 형제나 친척과도 동업을 꺼리는 편이다. 하지만 동업은 제대로 하면 혼자 때보다 훨씬 많은 경영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중견 그룹인 삼천리는 동업 관계로 사세를 확장시킨 대표적 기업이다. 창업 선대(先代)부터 반세기 이상 ‘동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혈육보다 진한 동업정신 삼천리의 그룹 역사는 1955년 10월1일 고 유성연ㆍ이장균 명예회장이 공동으로 ‘삼천리연탄기업사’를 설립하면서 시작했다. 지금은 도시가스 및 해외자원 개발에 전념하면서 국내 도시가스 1위 업체로 부상한 것은 물론 세계 7위 규모의 유연탄광을 경영하는 세계 굴지의 자원개발회사를 보유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형제보다 가까웠던 두 선대 회장의 관계를 유상덕(46) ㈜삼탄 회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이장균 회장님 댁과 우리 집안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웃에서 살았고 서로 큰 집, 작은 집이라 부르며 지내 와 서로 남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 우리 집안은 유(劉)가인데 왜 작은아버님의 성은 이(李)가인지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세 번에 걸친 운명적인 만남 두 창업주는 창업을 하기 전까지 모두 세번의 의미있는 만남을 가졌다. 첫번째는 해방 직후 함흥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식료품 장사를 하다가 8인계 멤버로 만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 피란 시절에는 각자 경남 거제와 경북 포항에서 생활하다가 조우했다. 세 번째는 1955년 삼천리 창업을 통한 만남이었다. 창업 당시엔 두 가정이 단칸방에서 이불 칸막이만 쳐놓고 동고동락하며 사업을 일궜다. 연탄가루를 가져와 기계틀에 넣고 찍어 말린 뒤 배달도 직접했다. 네 사람이 연탄 수레를 ‘끌고 밀면서’ 삼천리의 그룹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유성연 명예회장은 1917년 함남 삼평면 부흥리에서 아버지 유봉주씨와 어머니 김씨의 2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다. 유 명예회장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명심보감´을 공부하고 11세가 되던 해에 4년제 삼평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남보다 늦은 학업이었지만 유 명예회장은 보통학교 4년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함흥 시내에 있던 함흥제일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평양사범학교에 관비(官費)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평양사범 입학시험에는 함경도에서 200여명이 응시해 9명만 합격했을 만큼 어려운 관문이었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유 명예회장은 함흥 부근에 있는 삼호보통학교에서 첫 교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1년간의 교사생활을 거친 뒤 함흥시내의 영정보통학교로 전근했다. 영정보통학교에서의 교직생활이 3년 지났을 무렵인 1943년 유 명예회장은 일본 유학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태평양전쟁이 2년째로 접어들면서 생활이 힘들어져 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함남 피복조합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이후에도 징용 위협이 다가오자 징용 대상에서 제외됐던 교사직을 다시 선택했다. 1944년 함흥 외곽에 있는 주북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 이후 유 명예회장은 경제활동에 투신해 나라 경제를 위해 큰 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사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함흥 선덕비행장에 주둔한 소련 공군을 상대로 미군 군수물자, 초콜릿, 통조림, 담배, 술 등 식료품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유 명예회장은 한국전쟁 발발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우여곡절끝에 남한으로 가는 LST함정에 겨우 올라 타 피란민 대열에 합류했다. 거제도 난민수용소에 잠시 수용됐지만 수용소를 빠져 나와 미군을 상대로 토산 기념품을 팔기 시작했다. 이만득(49) 삼천리그룹 회장의 부친인 이장균 명예회장은 1922년 6월27일 함남 함주군 상기천면에서 아버지 이황주씨와 어머니 윤윤옥씨 슬하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전답을 모두 차압당했다. 이후 몇해동안 움집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이 명예회장은 7∼8세 무렵부터 ‘소년 지게꾼’이 돼 공사장에서 자갈을 짊어져 날라야 했다. 힘든 와중에도 그는 낮에는 지게꾼으로, 밤이 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야학에 나가 공부를 했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거둬 주북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이후 4년간의 학창생활은 이 명예회장이 경험한 유일한 정규 학업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 명예회장은 유담보통학교에서 촉탁 직원으로 잠시 일하다 21세에 흥남질소비료공장의 사원을 거쳐 토목건설 현장의 서기로 옮겼다. 이후 함남토목회사의 하청업자로 변신해 사업가로서 첫 길을 걷게 된다. 어느 정도의 사업 성공도 이룬다. 소련군이 함흥에 진군하자 시내에서 ‘민흥상회’라는 가게를 열어 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소련군이 좋아하는 통조림 제품을 구하려 수소문하던 중에 유 명예회장과의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됐다. 곧바로 의형제 이상의 관계로 발전한 두 사람은 8인계를 조직해 더욱 가까워졌다. 유 명예회장보다 보름 앞서 흥남에서 국군이 철수하는 배를 타고 포항으로 내려온 이 명예회장은 이곳에서 원산 출신인 김성숙(73)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 회장 부부는 포항 죽도시장 중심부에 ‘흥성상점’을 열어 시멘트, 밀가루, 설탕, 비료, 무연탄을 취급해 큰 돈을 벌었다. 특히 이 명예회장은 서민들의 연료인 신탄(숯)을 제조해 팔면서 장차 무연탄이 가정연료로 중요하게 쓰일 것이라고 판단해 1953년부터 연탄사업에 손을 댔다. ●연탄사업으로 시작된 동업 이 명예회장은 1955년 서울에 있는 단성사로부터 원탄을 대량 매입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직접 강원도에 가서 560t의 원탄을 구매, 서울로 수송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운반 과정에서 원탄 가격이 하락하면서 단성사가 매입을 거부하자 탄을 저탄장에 쌓아 놓아야만 했다. 이 명예회장은 이때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던 유 명예회장을 만나 같이 연탄사업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이 날은 삼천리그룹의 창립일인 1955년 10월1일로 유 명예회장이 박옥순(78)여사와 결혼한 날이기도 하다. 이후 아예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 두 사람은 중구 신당동에 터를 잡아 호적에 본적지로 등록했다. 유 회장이 신당동 248-1, 이 회장은 건너편의 신당동 304-211에 안착했다. 이때 5세 위인 유 명예회장은 연탄 제조와 판매를 담당하는 사장을 맡고, 이 명예회장은 원탄 구매와 자금을 담당하는 부사장 형태로 역할 분담을 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 구분일 뿐 두 사람은 이후 어떤 일을 하든지 상의하고 양보하면서 삼천리의 역사를 일구기 시작했다. ●2세에게 동업 각서 물려줘 이들은 각각 회장실 금고에 동업각서를 보관해 오다 두 집안의 2세도 간직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다. 두 창업회장은 5개 조항의 동업서약서를 쓴 뒤 가족보다 끈끈한 관계를 50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동업서약서에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다른 사람이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투자 비율이 다르더라도 수익은 절반씩 나눈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는 등 5개 조항이 담겨 있다. 재계 주위에서는 두 집안의 경영 스타일이 다른 점도 동업에 큰 도움이 됐다. 유 선대 회장 부자는 과묵하고 꼼꼼하고 심사숙고하는 성향인데 비해 이 선대 회장 부자는 직설적이고 외향적이며 공격적이어서 서로 보완이 됐다는 것이다.25년 전 코크스(용광로 연료) 사업에 진출할 때 이 명예회장과 유 명예회장은 공개 석상에서 한 시간 넘게 싸우는 등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이 명예회장이 유 명예회장을 17번 찾아 설득한 끝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룹의 명운을 가름할 중요한 고비마다 두 창업자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일단 합의를 이루면 상대방의 뜻에 따랐다. ●선대와 버금가는 2세들의 동업경영 두 집안은 이렇듯 탄탄한 동업경영을 기반으로 두 창업주의 아들인 이만득, 유상덕 공동회장에 이르기까지 2대에 걸쳐 동업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 2세 회장은 선대 회장들과 같이 서울 방배동 한 동네에 살면서 3세 자녀들이 2세 회장에게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 1993년 이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만득 회장은 유 명예회장의 외아들 유상덕 회장과 함께 경영 전면에 나섰다. 이 회장이 그룹회장으로 취임하며 경영권을 물려받았지만 한번도 경영권 분쟁이 없었다. 유 회장은 삼천리 모든 계열사의 지분을 이만득 회장과 동일하게 갖고 있지만 삼천리 경영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7개 계열사 지분까지 50대50의 똑같은 비율로 2대에 걸쳐 공동경영을 하며 연간 2조 5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회장이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삼천리(도시가스회사)와 삼천리ES(천연가스 냉난방기 판매), 삼천리ENG(도시가스 배관설비)를 맡고 있다. 유 회장은 해외에너지 자원 개발을 하는 ㈜삼탄(유연탄)과 삼천리제약을 책임지고 있다. ●월남민 출신 창업주들, 소박한 혼맥 가꿔 창업주들은 대부분의 친인척을 북한에 두고 내려와 화려한 집안을 꾸리지는 못했다. 이 명예회장은 2남2녀를 두었지만 자식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집안이나 배경보다는 며느리와 사위들의 개인 능력을 최우선으로 봤다. 며느리는 단출한 집안을 꾸릴 수 있는 ‘성품’을 위주로 봤고, 사위들은 ‘능력’을 중심으로 간택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기업들에 비해 요란한 혼맥을 이루지 않았다. 이 명예회장의 큰아들인 이천득씨는 삼천리 부사장으로 있던 1987년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평범한 집안의 유계정(55)씨와 사이에 은백(32)·은아(30)·은미(29)씨 등 2남1녀를 두었다. 이만득 회장은 이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1년 가발 수출을 하는 삼천리의 계열사인 미성상사에 입사, 경영에 참여했다. 형이 작고하자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 회장은 1977년 전혜연(50)씨를 배필로 맞아 은희(27)·은남(26)·은선(23) 등 3녀를 낳았다. 전씨의 부친은 예비역 대령 출신으로 같은 이북 출신 실향민이다. 이 회장과 부인 전씨의 결혼 스토리는 부친 이 명예회장의 성격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이 회장은 친구의 소개로 부인을 만나다가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이 명예회장은 아들이 군 복무중에도 열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두 사람을 불렀다. 이때는 5월5일 부인 전씨의 생일이어서 휴가나온 이 회장이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을 집으로 급히 호출한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집으로 달려간 두 사람은 이 명예회장이 전씨를 꼼꼼히 뜯어 보더니 “됐다. 결혼해라. 결혼식은 10일 후인 5월15일 오후 5시로 잡자.”고 말해 너무 놀랐다. 두 사람은 귀를 의심했지만 “며느리가 착실하고 몸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뭘 바라겠느냐. 혼수는 일절 없이 식을 올리자.”며 두 사람을 독려했다. 혈혈단신 월남한 이 명예회장은 아들을 빨리 결혼시키고 싶은 생각에 혼례를 서둘렀다고 이 회장은 회고한다. 이 회장의 큰 딸 은희씨는 성균관대를 졸업한 뒤 현재 플로리스트(화훼장식가)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딸 은남씨는 미국 UC어바인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셋째딸 은선씨는 UC버클리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다. 장녀 이란(51)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이후 서울대 자연과학대 통계학과 교수인 조신섭(53)씨와 결혼했다. 조 교수는 서울대 응용 분석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통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86년부터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2녀인 이단(47)씨는 진주화(52)씨와 혼인했다. 진씨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페퍼딘대에서 MBA를 취득했고,2002년 ㈜삼천리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그리니치 투자자문㈜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유 명예회장은 박옥순 여사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유 명예회장도 사위들을 고르는 기준으로 이 명예회장과 같이 집안 배경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했다. 외아들인 유상덕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1989년 삼척탄좌개발㈜ 상무이사로 재직하다 1993년에 ㈜삼탄회장에 올랐다. 고등학생인 용훈(18)·용욱(17)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장녀인 명옥(55)씨는 이태성(59)씨와 결혼했다. 이씨는 미국의 스티븐스대 기계과를 졸업한 뒤 2001년부터 삼천리USA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명옥씨는 이 사장과 사이에 준영(30)·찬영(28) 등 두 아들이 있다. 차녀인 혜숙(49)씨는 이민엽(53)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혜숙씨는 미성상사를 맡고 있는 남편 이씨와의 슬하에 규빈(25)·규환(21)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jrlee@seoul.co.kr■ 이만득 회장의 ‘골프경영론’ 이만득 삼천리그룹 회장은 만능 스포츠맨이다. 매일 오후 헬스클럽에서 1시간동안 땀을 흘리고 주말이면 골프를 치며 경영 전략을 가다듬는다. 핸디캡 5 수준으로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컵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 회장은 골프에서 기업 경영의 원리를 배울 수 있다며 ‘골프경영론’을 설파하고 있다. 이 회장은 “골프를 치면서 기업 경영에 필요한 많은 영감을 받는다.”면서 “골프와 경영의 가장 큰 공통점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또 골프의 고수는 14개의 클럽을 고루 잘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처럼 기업가들도 다양한 경영 요소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골프를 통해 배웠다고 한다. 그는 “경영자는 인사, 자금, 기획, 홍보 등 다양한 요소를 잘 활용해야 기본적 조건에 맞는 조화로운 경영을 할 수 있고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어 골프의 코스 전략과 경영의 코디네이션이 ‘닮은 꼴’이라는 점도 지적한다.“골프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코스와, 그렇지 못한 코스의 전략이 다르듯이 경영에서도 각각의 사업 분야마다 특징을 고려해 사업부문을 코디네이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골프 경영론의 핵심이다. 골프 고수들은 아무리 쉬운 코스라도 티샷을 하기전에 머릿속에 자신만의 전략을 수립하고, 특히 어려운 코스는 더 복잡한 전략을 세우게 된다는 점이다. 이 회장은 “이번 코스에서는 파(PAR·기준 타수)가 힘들겠다고 판단되면 보기(기준 타수보다 1타 더 치는 것)를 위한 전략을 세우게 된다.”면서 “그리고 다음 코스에서는 버디를 잡아야겠다는 전체적인 전략을 짜게 된다.”고 말했다. 경영도 사업분야마다 이익이 많이 날 때와 적게 날 때가 있지만 모든 부분을 고려해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작은 곳에 집착하지 않고 사업 전체를 크게 바라보고 전략 수립과 투자를 감행해야 성공적인 경영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끝으로 “골프공은 같은 자리에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 매번 새로운 위치에서 플레이를 해야 한다.”면서 “기업도 마찬가지로 매년 같은 환경에서 경영을 할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한다.”고 말했다. 경영 환영은 수시로 변하는 만큼 새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jrlee@seoul.co.kr ■ 전권 받은 전문경영인 ‘삼천리호’ 지휘 고 유성연·이장균 명예회장이 회사 이름을 ‘삼천리´라고 정한 것은 우리나라 제품으로 삼천리반도 전체를 석권하겠다는 야심찬 포부에서 비롯됐다. 함경남도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식료품 장사를 해야 했던 창업주들의 ‘한(恨)´이 서려 있는 셈이다. 50년 만에 연탄 회사에서 종합에너지 기업으로 발돋움한 ‘삼천리호´에는 베테랑 CEO들이 승선해 있다. 이만득·유상덕 회장은 일선 CEO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스타일이다. 이영복(61) ㈜삼천리 사장은 엔지니어링 출신의 CEO로 국내 최대 도시가스기업을 이끌고 있다. 도시가스 업계의 산증인으로 안전을 중요시하는 업계 특성상 꼼꼼하게 일을 살피는 경영스타일을 갖고 있다. 최근 들어 비효율적 경영 개선을 위해 윤리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윤리경영 선포식을 이끄는 등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부산고와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천리 도시가스사업본부 영업이사를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김경이(59) 삼천리ENG 사장은 재무관리 전문가로 관리형 CEO다. 재무 전문가답게 업무 프로세스를 중히 여기며 원리와 원칙에 따른 업무를 진행한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이후 줄곧 ㈜삼천리에서 경리부문에서 재직하며 경리담당 이사대우, 부사장을 거쳐 2003년에 사장에 취임했다. 강태환(57) ㈜삼탄 사장은 글로벌 에너지기업을 이끄는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해외자원개발 전문기업으로서 연구·개발(R&D) 투자는 물론 인력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해 ㈜삼천리 기술투자 상무이사를 거쳐 2001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이찬의(51) KIDECO 사장은 인도네시아 파시르 광산을 세계 7대 유연탄광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2002년부터 사장을 맡아 업무별 소사장제를 도입하는 등 철저한 공정 관리와 치밀한 원가관리를 진두지휘해 왔다. 연세대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고,㈜삼천리 기획실 이사를 역임하는 등 ‘기획통´으로 정평이 나있다. 김용수(53) 삼천리열처리 사장은 무결함 경영을 지론으로 삼고 법적 기준에 따른 프로세스를 강조하고 있다. 경기고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천리 기계 상무이사, 기술연구소 상무이사를 거쳐 1997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김태성(60) 삼천리제약 사장은 삼성그룹에 입사해 홍콩 샹그릴라호텔 한국 대표를 역임하는 등 ‘외부영입´ 케이스로 삼천리호에 승선했다. 의사 결정과정에서 다양한 정보채널을 활용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이민엽(53) 미성상사 사장은 직원들에게 업무를 믿고 맡기는 ‘보스형´ CEO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에서 MBA를 취득한 뒤 삼척탄좌 상무이사를 거쳐 1993년부터 대표이사에 재직 중이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동양제철화학 글로벌기업 도약”

    “동양제철화학 글로벌기업 도약”

    ‘개성에서 인천을 거쳐 세계로’ 동양제철화학의 최근 움직임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동양제철화학은 최근 들어 카본블랙 세계 3위 업체인 미국 컬럼비안케미컬(CCC)을 인수하고, 소디프신소재에 지분 인수를 통한 경영 참여에 나서 주목을 받고 있다. 변신의 중심에는 올해부터 CEO를 맡은 백우석(53) 사장이 있다. 동양제철화학은 개성상인 출신인 창업주 이회림 명예회장이 인천에 차린 소다회 생산공장이 모태가 됐다. 백 사장은 동양제철화학의 잇단 대형 인수·합병(M&A)과 관련,“글로벌 화학업체로 발돋움하기 위해 IT 신소재사업 진출 등으로 2010년까지 매출 40억달러(약 4조원)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카본블랙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컬럼비안케미컬(CCC)을 인수하게 됐다.”면서 “이로써 미국 소다회 생산공장 등을 합쳐 내년에는 미국에서만 12억달러의 매출을 올리게 돼 국내 매출보다 규모가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앞으로의 경영 방침도 “미래 성장 가능성과 수익성을 갖춘 사업을 꾸준히 개발하고 투자하는 반면 한계에 봉착한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실제로 백 사장은 전자부품 사업이나 구미공장을 최근에 정리했으며 전자화학사업분야 등은 지속적으로 육성해 나갈 뜻을 확고히 하고 있다. 지난 1975년 동양화학에 입사한 백 사장은 기초화학사업부 본부장(상무이사)과 경영관리본부장(전무이사)을 거친 뒤 97년 ㈜이테크건설 대표이사 사장을 맡는 등 외도했다가 지난 7월 동양제철화학사장으로 컴백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실습하며 월급받는 학교기업

    실습하며 월급받는 학교기업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실습하면서 월급도 받는 실업계 고교의 ‘학교기업’이 주목받고 있다. 학교기업은 산업교육을 하는 학교가 직접 기업을 운영해 학생들의 현장 실습에 활용하도록 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정식 도입됐다. 공고의 자동차과에서는 자동차정비업을, 농업고에서는 농산물 생산업을, 조리과에서는 제빵업을 사업아이템으로 하는 식이다. 진짜 고객을 상대하는 생생한 실습은 물론 창업교육 효과도 높으며, 업종도 점차 첨단화·다양화되고 있다. 기술뿐 아니라 현장감과 사업감각까지 갖춘 산업인재를 양성하는 학교기업 현장을 찾았다. ●서서울생활과학고 ‘서서울 베이커리’ 지난 8일 오전 서울 구로구 궁동 서서울생활과학고 별관 2층. 갓 구워낸 빵의 구수한 냄새가 제빵실을 가득 메운 가운데 조리과학과 3학년 장수인(18)양이 쉴새없이 오븐에서 따끈따끈한 빵을 꺼낸다. 옆에는 김선정(18)양이 넓적한 소보로빵 2개 사이에 딸기잼을 바르고 건포도를 뿌리며 ‘맘모스빵’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시중에서는 2500∼3000원씩 하는 빵이지만 이 학교 학교기업인 ‘서서울베이커리’에서는 1800원에 판다. 김양이 막 오븐에서 꺼내 놓은 ‘조프(빵 사이에 달콤한 카스텔라 반죽을 겹겹이 넣어 구운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자, 입안 가득 진한 우유와 달걀의 고소한 맛이 부드러운 감촉과 어우러진다. 두 학생은 제과제빵사 자격증을 소지한 어엿한 ‘파티셰’다. 각각 동양조리과와 제과제빵과에 수시모집으로 합격해 수능이 끝난 뒤부터 하루 9시간 정도를 일하고 80만원 안팎의 월급도 받고 있다. 쉬는 시간을 이용해 2학년 ‘직원’들까지 가세해 적당히 식힌 빵을 봉지에 담는 중에 중식 과목을 담당하는 김현정 교사가 들어선다.“샌드위치 하나 포장해 줄래.”빵값 1000원을 건네던 김 교사는 “맛있고 위생적이고 가격도 저렴해 자주 이용한다.”면서 “입소문이 퍼져 이웃 학교에서도 사러 올 정도”라고 자랑했다. ●저렴하고 위생적 인기…학교 밖에 ‘2호점’ 오픈도 이 학교는 3년 전부터 자체적으로 학교기업 형태의 제과제빵 실습을 해 오고 있다. 학생들이 만든 빵을 매월 고아원과 양로원 5곳에 무료로 공급하고, 교내 매점 판매는 물론 복지시설 등에 주문 판매를 했다. 이같은 경험을 인정받아 지난 10월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학교기업으로 정식 선정돼 2년간 1억원을 지원받고 있다. ‘서서울베이커리’에는 조리과학과 학생 15명 정도씩 돌아가며 일한다.3학년 학생들과 지도교사가 주로 빵을 만들고 1∼2학년들은 쉬는 시간이나 방과후에 빵을 옮기고 수량을 파악하는 등의 일을 한다. 밤식빵, 고구마케이크, 호밀빵, 머핀 등 빵 종류만 40∼50개 정도. 고급 재료만 쓰고 방부제는 절대 넣지 않는다. 하루 매출은 30만원 안팎이며,15% 정도인 순이익은 장학금과 재투자비로 사용한다. 지난 4일에는 학교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상가에 ‘2호점’도 열었다. 장수인양은 “평가항목에 따라 정확히 만들기만 하면 되는 실습수업과는 달리, 색깔도 잘 내야 하고 시장의 반응을 파악해 신상품도 개발해야 한다.”면서 “녹차와 인삼을 첨가한 ‘웰빙빵’을 개발중”이라고 말했다. 이현국 지도교사는 “매일 수량을 파악하고 반품되는 제품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들이 모두 살아있는 교육”이라면서 “단지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창업과 경영능력까지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인천기계공고 ‘스쿨모터스’ 같은 날 오후 인천시 남구 주안2동 인천기계공고 운동장 옆.‘스쿨모터스’라는 간판이 걸린 승용차 경정비 학교기업에서 자동차과 3학년 최진호(18)군 등이 정비예약을 받은 이웃 학익고 교직원의 승용차의 엔진을 점검하고 있다. 모두 자동차정비기능사와 자동차검사기능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이 학교는 지난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교육인적자원부 지정 학교기업으로 선정됐다. 지난 1년간 매출액은 8400만원 정도.3학년 학생 15명 정도가 직원으로 일하며, 근무시간과 참여 정도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 자동차 정비는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반드시 전 과정을 정비기능장인 전담 교직원이 꼼꼼히 감독한다. 학교기업의 교육 효과는 실습수업보다 훨씬 크다. 최진호군은 “경차, 중형차, 가솔린차, 디젤차 등 다양한 차종을 다루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세세한 부분까지 익힐 수 있다.”면서 “고객이 말하는 자동차의 ‘증상’을 듣고, 배운 지식을 동원해 ‘진단’하고, 정비한 부분을 다시 고객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서비스 능력까지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전국 첫 학교기업…학생 주도 ‘자회사’도 설립 ‘스쿨모터스’의 장점은 순정품만 사용하면서도 일반 업체보다 20∼30%정도 저렴한 가격이다. 고객을 인천시내 교직원으로 한정했는데도 예약이 밀릴 정도다. 엔진오일 교환부터 전기장치 정비, 휠 얼라이먼트까지 3급 부분 정비업 범위 내 작업은 모두 가능하다. 싼 값에 믿을 수 있어 한번 온 고객은 단골이 된다. 올 초에는 중소기업청의 지원을 받아 자동차 내·외장 관리사업부를 떼어내 ‘클린모터스’라는 업체를 창업하기도 했다. 시설을 함께 이용하고, 회사 설립과 운영에 대한 각종 법률 관계 업무를 스쿨모터스가 지도해 주는 ‘자회사’격이다. 전담 교직원인 조재철 정비기능장은 “실제 정비를 하면 학생들이 훨씬 더 긴장감과 집중력을 보인다.”면서 “다양한 상황대처 능력과 기업마인드까지 키울 수 있어 졸업 뒤 현장에 바로 투입돼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학교기업이란? 학교기업이란 교육·연구 및 기술 습득을 위해 특정 학과 또는 교육과정과 연계된 분야에서 산업교육기관이 직접 운영하는 기업을 말한다. 지난해 3월 학교기업 설립·운영에 관한 법령이 제정된 뒤 6월부터 도입됐다. 학교기업은 학교가 사업자가 돼 교과과정과 연계된 사업을 계획한다는 점에서 창업동아리 등을 통한 ‘고교생 창업’과는 구분된다. 학교기업은 현재 교육인적자원부와 시·도교육청이 지정한 곳을 합해 전국에 20개 가까이 운영되고 있다. 교육부에서 재정지원을 받는 학교는 인천기계공고, 전북 학산정보산업고 등 7곳이며, 서울 선린인터넷고와 여주 자영농고는 실험학교로 지정돼 있다. 이 가운데 경남 거제공고는 조선업과 관련된 전기자동제어반 제조업, 구례농고는 친환경 무농약 채소와 생산업이며, 충남 기계공고의 귀금속 디자인 및 제조·가공·판매업도 눈에 띈다. 이외 용산공고 등 서울시교육청이 지정한 6곳과, 충북도 교육청 지정 시범학교인 충북전산기계공고, 중소기업청의 위탁을 받아 강원도 교육청이 시범 운영하는 태백기계공고가 있다. 현재 학교기업은 교육효과를 인정받아 교육당국의 지원이 확대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인천기계공고 황기호 담당교사는 “2년간 교육부 지원을 받으며 어느 정도 사업 기반을 닦았지만, 지원이 끝나면 상당히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울시교육청 학교기업 선정에 참가한 호서대 벤처대학원 하규수 교수는 “사업아이템이 비교적 참신하긴 했지만 더 정밀하게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학교기업이 수익성과 교육 효과를 동시에 거두려면 지도교사들이 기업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IT·디자인분야도 뜬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학교기업은 실업계고의 특성과 상품화가 용이하다는 점 때문에 그동안 대부분 농업, 공업, 식품업 등 1·2차산업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최근 IT와 디자인 등 첨단 산업 아이템으로 분야가 넓어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교육부 실험학교로 지정돼 학교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 선린인터넷고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는 수업의 실습 부산물을 상품으로 개발하는 가장 기본적인 학교기업의 취지에 맞게 기업형 홈페이지 제작을 주 사업아이템으로 하고 있다. 전자상거래과 2·3학년 실습수업에서 4∼5명씩 조를 짜 홈페이지 제작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하고, 그렇게 구축된 인터넷 쇼핑몰을 업체에 맞게 수정해 납품하는 식이다. 홈페이지 이름을 붙이고, 플래시를 구성하고, 항목을 정해 링크를 시키고, 로고를 디자인하는 모든 과정이 수업과 연계된다. 또 납품 업체측과 만나 주문사항을 듣고 계약을 하고, 납품 뒤 클레임을 접수해 애프터서비스까지 하는 과정에서 상업과 마케팅의 전반을 배울 수 있다. 월급도 철저히 성과급제다. 지난 여름부터 제작해 ‘시마스’라는 도서출판 쇼핑몰을 최근 150만원에 납품한 1학년 채강민(16)군은 “1∼2학년 8명이 함께 작업했는데 학년에 상관 없이 참여도와 기여도에 따라 10만∼20만원씩 차등해 프로젝트 수행비를 받았다. 노는 것보다 일 하는 것이 더 재밌었다.”고 말했다. 송준헌 담당교사는 “경제개념과 기업 마인드, 홍보마인드까지 익힐 수 있어 전 과정이 교육 그 자체”라면서 “점차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다루는 학교기업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10월 서울시교육청이 새로 선정한 6개 학교기업에도 이색적인 사업이 많다. 서울 영상고는 영상·애니메이션 분야 특성화고라는 이점을 살려 문화 콘텐츠를 바탕으로 하는 학교기업을 설립했다. 졸업작품과 영상제작한 강의 동영상 등 무료 콘텐츠로 시작해, 장기적으로 고교생 전용 뉴스와 영화까지 제작하는 인터넷 방송국을 운영할 계획이다. 또 교내 스튜디오를 지역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사진관으로 개방해 운영하고, 학교 교가·교훈·로고 등을 바탕으로 하는 학교 CI(이미지통합)와 홍보 대행사업도 할 예정이다. 이밖에 서울공고는 건축 CAD 교육과 건축 도면 제작, 기능성 아트타일 제조에, 성동여실고는 웨딩드레스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 작품 제작에 나선다. 도봉정보산업고는 디지털 영상·홈페이지 제작과 함께 헤어미용 분야에 첫 도전장을 냈다. 서울시교육청 산업정보교육과 이상배 장학사는 “실업계 고교 교육 내용을 바탕으로 한 사업이 골고루 선정됐다.”면서 “다양한 사업을 통해 수익성과 교육적 효과를 함께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우리는 맞수 CEO] 한수길 롯데제과 사장 vs 윤영달 크라운제과 사장

    [우리는 맞수 CEO] 한수길 롯데제과 사장 vs 윤영달 크라운제과 사장

    수은주가 영하 10도 밑으로 뚝 떨어진 요즘, 제과업계는 날씨만큼이나 냉랭하다. 크라운제과가 올 초 해태제과를 인수한 뒤 업계 1위인 롯데제과와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점유율은 롯데제과가 40%, 크라운제과가 35% 안팎으로 긴장을 한치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과자전쟁’은 한수길(64) 롯데제과 사장과 윤영달(60) 크라운제과 사장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실속파 CEO vs 활동파 CEO 제과업계의 ‘산증인’인 한 사장과 윤 사장은 모든 면에서 곧잘 대비된다. 한 사장은 지난 75년 롯데제과에 입사한 뒤 오랜 기간 경리 업무를 담당해 일처리가 매우 꼼꼼하다. 내성적인 성격에 실속을 챙기는 전형적인 롯데맨으로 제과업계의 ‘수성’에 매진하고 있다. 경영환경을 안전하게 이끌고, 제조업체 수익성을 결정하는 원가 구조 개선에 회사 역량을 집중하는 경영스타일을 고수한다. 반면 윤 사장은 크라운제과 창업주인 고 윤태현 회장의 장남으로 재벌 2세다운 화려한 경영기법으로 정평이 나있다. 크라운제과와 해외 제휴업체가 각각 대표 상품을 맞교환해 판매하는 ‘크로스마케팅’을 창안, 업계의 주목을 받는 동시에 등산경영으로도 회사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올 초 제과업계 2위인 해태제과를 인수, 만년 ‘꼴찌’라는 오명을 씻는 수완을 발휘해 업계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창과 방패의 양보없는 승부수 크라운제과 윤 사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태와 크라운의 과자시장 점유율이 롯데에 5% 정도 뒤져 있지만 조만간 추월해 제과업계의 진정한 리딩 기업이 되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는 “주력 제품을 해태제과와 중복되지 않게 하고 원료 공동 구입, 공동 물류, 생산공장 공동 활용으로 최대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며 내년에는 시장판도가 바뀔 것임을 자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롯데제과는 당분간 수성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수길 사장은 “크라운제과는 당분간 해태제과의 부채 때문에 공격적인 신규 투자를 하기 어렵다.”며 “크라운과 해태간에 겹치는 제품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구조조정이 불가피해 매출 규모는 오히려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한 사장은 “회사의 매출과 수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형 브랜드를 집중 관리해 불확실한 시장 상황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선두를 지킬 수 있다.”며 직원들에게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한다. ●해외에서도 혈전 이어져 롯데제과와 크라운제과의 피말리는 싸움은 국내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 69년 껌을 시작으로 수출전선에 뛰어든 롯데제과는 올해 중국, 인도시장의 폭발적인 신장세에 힘입어 1억 5000만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특히 인도의 패리스제과를 인수, 올해 450억원의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사장은 “중국이나 인도는 인구가 많고 소비 수준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거대 시장”이라며 “롯데제과는 60년대 후반 제과시장의 변화를 장기적으로 예측했던 노하우와 향후 아프리카, 중동지역을 생산기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수출을 독려하고 있다. 크라운제과는 ‘크로스 마케팅’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윤 사장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도 크라운의 경쟁사는 없고, 우리가 많은 이익을 나눠줄 ‘협력사’만 존재한다.”는 경영론을 펼치고 있다. 실제로 크라운제과는 타이완 제과업체 1,2위를 다투고 있는 ‘이메이’와 ‘콰이콰이’, 세계 1위의 쌀과자업체인 ‘왕왕’과 제휴를 맺었다. 이런 전략으로 호주, 중국, 이탈리아, 일본 등의 협력사들의 도움을 받아 해외판로를 열고 있는 중이다. 특히 상하이에 해태·크라운 공동 매장 5군데를 열고 해마다 5개씩 매장수를 늘려나가는 등 중국을 글로벌 경영의 본거지로 삼을 계획이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8)정치적 야심가들과 ‘정감록-허균과 유효립’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8)정치적 야심가들과 ‘정감록-허균과 유효립’

    한국의 정치적 예언서는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정감록’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 기원은 실로 오래됐다. 신라 말 풍수예언의 대가 도선국사가 고려태조의 아버지에게 바쳤다는 ‘봉서’(封書)가 그것이다. 도선은 하늘의 명을 받아 송악에서 왕이 배출될 줄을 미리 알았다. 그는 한 편의 예언서를 밀봉한 다음, 왕건의 아버지에게 바쳤다. 훗날 고려 태조는 예언서를 펼쳐 보고 자신에게 천명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 한다. 이것은 고려 초기 최유청이 지은 글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도선이 전해준 ‘봉서’에 힘입어 왕건이 고려의 성립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었다. 역사상 왕건만큼 운이 좋은 경우는 드물었다.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내세워 대권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허균(許筠·1569~1618)과 유효립(柳孝立·1579~1628)의 경우도 그랬다. 그들 두 사람은 거사에 앞서 각기 자신들에게 유리한 예언을 조작해 널리 유포했다. 역사상의 야심가들이 예언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게다가 그들이 퍼뜨린 예언은 직접 간접으로 ‘정감록’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끈다. ●허균과 유효립 허균은 우참찬(정2품)이란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했으나 세평은 별로 좋지 않았다.“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광해 10년(1618) 대간(臺諫)들이 허균을 탄핵할 때 나온 말이다. 상소문에는 허균이 평소에 저지른 온갖 악행이 고발되었다. 그는 상중(喪中)에도 창기를 끼고 놀았으며, 예언을 조작하고, 난리를 꾸미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는 비난이다. 과장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통용되던 도덕 기준을 가지고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긴 했다. 그는 본래 조정의 실권자 이이첨과 사이가 멀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이첨의 집엔 머리가 큰 뱀이 하나 있다 했다. 허균은 그 뱀이 이이첨에게 죽임을 당한 최영경과 김직재의 귀신이라고 풀이했다. 허균은 이이첨을 저주했던 것인데 광해군 5년(1613) 이른바 ‘칠서(七庶·7명의 서자)사건’이 일어나 자기의 처신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이이첨에게 매달렸다. 허균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된 것은 변절의 대가였다. ‘칠서사건’에는 평소 허균이 가까이 하던 서울 양반의 서자들이 모두 관련되었다. 그들은 광해군에게 서얼 차별을 없애 달라고 호소했으나 뜻이 이뤄지지 않자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였다. 그러다 경상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의 은을 약탈한 사실이 적발돼 모두 사형을 당했다. 대북파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정권을 독점하려 했다. 서인과 남인이 서자들을 앞세워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며 사건을 조작해 정적들을 처단했다.‘칠서’와 가까웠던 허균은 신변의 위기를 느낀 나머지 이이첨에게 붙었다. 허균의 벼슬길은 트였다. 그러나 선비들은 허균의 처사를 비루하게 여겨 틈만 나면 공격해댔다. 약점을 잡힌 허균은 늘 우울하게 지냈다(실록 광해 6년(1614) 10월10일 기축). 그러나 그만한 처지도 유효립과 같은 사람이 보기엔 부럽기 그지없었을 테다. 허균이 처단되고 한참 지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축출되고 그 아래서 최고 실권자로 행세하던 이이첨, 박승종 및 유희분이 일거에 숙청되었다. 유효립은 바로 그 유희분의 친조카였기 때문에 연좌되어 충청도 제천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울분을 참지 못한 유효립은 인조반정 자체를 부당한 역적행위로 규정하고, 유배지에서 역 쿠데타를 준비하였다. 그는 이미 폐위된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공(仁城君珙)을 새 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대북파의 복권을 위해서였다. ●유효립이 조작한 예언과 ‘정감록’ 예로부터 야심가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예언을 조작하곤 했다. 인조 초년에 발생한 유효립 역모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유포된 예언 중에는 ‘정감록’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유효립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 담화(曇華)라는 승려와 무척 친했다. 유효립의 사주를 받은 담화는 옛날 도선국사가 창건한 전남 광양의 옥룡사(玉龍寺)로 가서 “개해(戌年)와 돼지해(亥年)에 사람이 상하는 화가 발생한다. 그러면 범해(寅年)와 토끼해(卯年)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구절을 비석에 남몰래 새겨 넣었다. 인심을 선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밖에도 담화는 예언서를 조작해 “쥐해(子年)와 소해(丑年)에는 안정되지 않다가 범해(寅年)와 토끼해(卯年)에 패한다.”라든가 “용해(辰年)와 뱀해(巳年)에 인성(仁城)을 얻는다.”는 대목을 삽입했다. 담화가 즐겨 이용한 편년체 예언방식은 18세기 이후 예언서의 기본형이 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에도 자주 발견된다. 그런데 담화가 ‘인성´을 인성군 이공으로 해석하였던 관계로, 강원도 원주 지방 사람들은 머지않아 인성군이 즉위할 것으로 믿고 큰 기대를 걸었다 한다. 유효립과 담화 등이 퍼뜨린 예언 중에는 새 임금이 등극할 시기를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거친 개펄에 배가 다닐” 때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이 구절은 현재 ‘정감록´의 ‘감결’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 죽이 흰색으로 변한다. 거친 개펄에 조수가 일어 배가 다니며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일고 붉은 기운이 삼일 동안 감싼다.”는 구절이다. 역시 ‘정감록’의 일부인 ‘징비록’에도 “진인이 남해에서 계룡으로 오면 창업을 알 수 있다. 말세가 되면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거친 개펄에 배가 다니며, 목멱산의 소나무가 붉게 변하고 삼각산의 모양이 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듯,‘정감록’은 역사상 등장한 한국의 수많은 예언들이 모여서 이뤄진 호수다. 그 일부는 결과적으로 유효립 등이 목숨과 맞바꿔 조작한 예언들이다. 사실 계룡산의 돌이니, 개펄의 배 또는 용의 해 따위는 ‘정감록’ 가운데서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앞으로 세상이 바뀔 조짐을 보여주며, 마지막 것은 진인이 나오는 시기를 점치는 것이라서 중요하다. ●허균이 조작한 예언과 ‘정감록’ 그의 반대파들이 보기에도 허균의 문재(文才)는 뛰어났다. 그는 붓만 손에 들면 수천 마디의 글을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한다. 특히 위서(僞書·가짜 책) 짓는데 취미가 있어 산수참설(山水讖說)과 선불이적(仙佛異迹·신선과 부처의 기이한 행적) 등을 멋대로 꾸몄다 한다. 허균의 위작은 그가 평상시 지은 글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허균은 ‘산수비기’(山水秘記)라는 예언서를 읽다가 거기에 본래 없던 내용을 보태 썼다. 조선의 첫째 수도는 한(漢), 둘째는 하(河), 셋째는 강(江), 넷째는 해(海)라고 조작해 넣었다 한다.‘한’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한양이었다. 그리고 ‘하’는 경기도 교하(交河)를 가리켰다.‘강’과 ‘해’는 어디에도 밝혀져 있지 않으나 ‘강’은 아마도 계룡산이 있는 금강을 뜻하지 않았을까.‘정감록’의 ‘감결’을 보더라도 한국의 수도는 한양, 계룡산, 가야산, 전주, 개성 등으로 몇 차례 더 바뀐다고 되어 있다. 허균은 예언서를 조작해 우선 인심을 뒤흔든 다음, 영창대군의 외척인 김제남과 공모해 서울을 교하로 옮기려 했다. 이것은 ‘칠서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그에게 씌워진 이런 혐의를 강력히 부정한다.‘산수비기’를 읽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법률상 엄격히 금지돼 있어 집안에 들여놓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 뒤에도 허균은 도성의 인심을 동요시키기 위하여 매일 밤 부하를 시켜 남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게 했다.“서쪽의 도적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 “유구(琉球)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 섬에 숨어 있다.”는 식이었다. 남북 양면에서 외적이 쳐들어올 기세란 거짓 소문이었다. 특히 유구는 조선에 쌓인 원한이 있어 군대를 보내 섬 속에 숨겨둔 채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주장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허균은 조선을 멸망시킬 군대가 섬에 있다는 예언을 조작해 널리 퍼뜨렸던 것인데,‘정감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오랑캐인지 왜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쳐들어 온다고도 했고, 새 나라를 일으킬 진인이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고도 했다. 그밖에도 그는 다른 예언을 지어 전파시켰다.“성은 들만 같지 못하고 들은 멀리 도망가는 것만 못하다.”는 식이었다. 이 역시 ‘정감록’ 에 약간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다. 활활(活活 또는 闊闊), 궁궁(弓弓), 밭(田) 또는 소나무(松)가 난세에 가장 유리하다는 구절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허균은 부하들을 시켜 남산의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걸어 놓고 “살고 싶은 자는 피난을 가라.”고 소리쳤다 한다. 이런 소동으로 인해 도성 인심은 몹시 어지러워졌고 실제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려는 인파가 길을 메웠다고 한다. 당시 한양 주민은 이미 임진왜란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허균이 조작한 외침 예언에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아닌 게 아니라 광해 8년(1616)부터 북방이 어수선했다. 만주의 여진족들이 청나라를 일으켜 중국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여진족들은 건주까지 밀려들어 국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바로 그때 허균은 변방이 위급하다며 거짓 예언을 조작했고, 익명으로 된 글을 지어 어느 해 어느 곳에서 역적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등 실로 터무니없는 예언을 퍼뜨렸다. 반란에 관한 허균의 예언은 18세기 이후 ‘정감록’에 여러 차례 기록된 ‘삼국분국설’ 즉 특정한 시기에 나라가 세 토막이 나고 만다는 예언과 유사하다.‘분국설’의 기원이 허균에게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역자의 동지들 허균이든 유효립이든 그들이 일으킨 반역사건에는 다종다양한 여러 인사들이 관련되었다. 유효립 사건의 경우는 처형된 공범 수가 무려 50명을 헤아렸다. 그 가운데는 전 현직 관리는 물론 궁중의 내시와 화원(畵員)까지도 끼여 있었다. 이런 사건엔 늘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승려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그 점에서는 허균의 역모사건도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위에 말한 부류 외에도 무사와 하인들도 다수 가담했다. 허균의 경우엔 한두 가지 이색적인 취향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는 평소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현인(賢人)”이라 칭찬했다 한다. 정도전은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에게 희생된 고관이었다. 그는 명실 공히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공신이었으나 권력투쟁에서 실패해 역사에 오명을 남긴 불우한 인물이다. 허균은 바로 그 정도전을 사모해 ‘동인시문(東人詩文)’을 정리할 때 그의 시를 가장 먼저 실었다. 혹시 허균은 정도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또 하나, 허균은 재주가 비상한 서자들과 가까웠다. 특히 처조카인 서자 심우영(沈友英)을 몹시 아꼈다. 심우영과 함께 ‘칠서사건’의 주범이던 서양갑과도 무척 친했다. 허균은 서양갑에게 석선(石仙)이란 자를 지어 주기도 했는데, 전설에 등장하는 신선 황초평(黃初平)이 돌을 양으로 둔갑시켰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평소 허균은 주장하기를,“오늘날 영웅은 서석선(徐石仙)뿐이다.”라고 했다. 물론 허균이 친하게 지냈던 서자들은 글재주가 탁월해 장안의 명망가로 통하던 인물들이었고, 서울의 양반들 중에는 그들 서자와 사귀는 사람들이 많았다. 허균만 그들과 친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현실세계에서 버림을 받은 재주 있는 서자들, 그리고 비명에 죽은 정도전 같은 인물을 허균은 유달리 좋아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반대파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허균은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칠서사건’ 이후 서자들을 비롯한 비제도권 인사들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광해군 때 승려들이 난리를 일으키려고 모의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많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허균이 꾸민 일이라고 비난했다. ●허균이 정말 반역을 꾀했을지는 의문 앞에서 예로 든 허균과 유효립은 서로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허균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될 생각이었다 한다. 그에 비해 유효립은 대북파의 재집권을 노렸다. 인조를 쫓아내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복권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주모자인 유효립은 자신의 ‘역모’가 정당하다고 굳게 믿었으므로, 체포된 뒤에도 떳떳했다. 그 태도에 놀란 조정 대신들은 “효립의 진술은 언사가 매우 흉악하고 버릇이 없어 차마 읽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먼저 목을 베게 하소서.”라고 우선 처형부터 하자고 인조를 졸라댔다. 왕은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고, 유효립이 펼친 주장이 후세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두려워 “그가 진술한 내용을 불살라 버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허균의 역모사건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실록’에 나오는 여러 기록을 정리해 보면 그가 은밀히 무사를 모은 것과 승군(僧軍)을 동원한 일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은 뚜렷하지 않다. 당시 허균은 군사를 이끌고 인목대비의 처소로 쳐들어가 먼저 대비를 제거한 다음 광해군에게 아뢸 계획이었다 한다. 왕도 이미 그 계획을 허락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때 갑자기 조정의 실권자인 삼창(三昌·이이첨, 박승종 및 유희분)이 왕에게 허균이 반역을 꾀한다고 밀고했다. 대비를 없앤다는 구실 아래 허균이 역모를 일으킬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 말에 놀란 인조는 사건을 엄히 조사하게 했다. 아무리 보아도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명백하지 않다. 그는 대북파의 우두머리 이이첨을 상대로 인목대비의 폐모를 누가 먼저 할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을 벌였다. 이이첨은 공을 빼앗길까봐 두려움을 느꼈고, 허균에게 반역죄를 씌워 반전을 도모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실록 광해10년 8월21일 정축). 그때 허균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크게 조력한 이는 허균의 제자였던 기준격이었다. 기준격의 아버지 기자헌은 애초 허균의 친구였다. 그런데 인목대비에 관한 문제로 그들의 우정은 금이 갔다. 허균은 기자헌을 죽이려 들었고, 분노한 기준격은 허균의 과거 언행 가운데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을 꼬투리 삼아 공격했다(광해 9년 12월26일 정사). ●예언을 통한 집권의 정당화는 오랜 전통 어쨌거나 허균과 유효립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예언을 통해 기성의 정치세력에 반항하다 실패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성사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는 빤하다. 때로 예언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 예언을 바꾸는 경우는 더욱 많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이 사통팔달, 한국 제일의 목에 방황하는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 이곳에 와서 책을 서서 보려면 서서 보고, 기대서 보려면 기대서 보고, 앉아서 보려면 앉아서 보고, 베껴 가려면 베껴 가고, 반나절 보고 가려면 반나절 보고, 하루종일 보고 싶으면 하루종일 보고,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고 사지 않아도 되고, 사고 싶으면 사 들고 가도 좋습니다.”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대산(大山) 신용호’라는 평전에서 당시 세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싸라기 땅인 종로 1가 1번지 교보빌딩 지하에 교보문고를 세운 일에 대해 이같은 논리로 동의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한국의 미래를 모토로 만든 교육보험에도 청소년들의 지적 수준과 나라의 성장은 비례한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창업 이념도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다. ●독립운동 집안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 신 창립자는 1917년 8월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솔안 마을에서 부친 신예범 선생과 모친 유매순 여사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며 잦은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가장 노릇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곱살 때는 폐병에 걸려 죽는다는 선고도 받았다. 열살 즈음 병이 나았지만 학교를 가진 못했다. 형편이 어려운 데다 형들이 각종 애국 운동으로 집안을 돌보지 않아 어린 마음에도 그가 살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는 대신 ‘책속에 길이 있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밤에는 책을 읽었다. 동생의 책은 물론 주변에 보이는 책은 닥치는 대로 가져다 보았다. 겨울엔 잠과 싸우기 위해 방에 불도 때지 않고 책을 읽다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당시 ‘천일독서’를 목표로 각종 위인전, 철학서, 고전, 사서를 섭렵했다. 비록 학교 문턱에는 가지 못했지만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독서철학으로 스스로 내실을 다졌다. 함께 교보생명 창업을 도운 막내 동생 신용희(83) 전 회장을 제외하고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애국운동에 몸담았다. 큰형인 고 신용국옹은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광복 후에는 청년 노동운동을 했다. 그 큰아들인 신동재씨가 2000년까지 교보의 부동산관리 전문 자회사인 교보리얼코의 회장을 지냈다. 둘째 형 고 신용율씨도 항일운동에 몸담았으며, 그의 둘째 아들 신평재(67)씨가 현재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일은행 상무로 재직하다 1991년 제의를 받고 교보생명 사장 등을 역임했다. 셋째 형 신용원옹은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항일음악가로 활동하다 납북했다. 넷째 형 고 신용복옹은 일제 당시 조선생명지사장을 지냈다. 막내 동생 신용희 전 회장은 목포상고를 나와 산업은행에서 일하다 한국전쟁 이후 줄곧 신 창립자를 도와 함께 일했다.1967년 교보생명 창립 이후에는 30년간 교보에 몸담으며 부사장, 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인 신인재(39) 보드웰 인베스트먼트 사장(8%)과 함께 교보생명 지분을 13.25% 갖고 있다. 신 사장은 고 신 창립자로부터 경영권을 승계받은 큰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 신 사장은 최근 이동통신사에 솔루션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업체 무선인터넷솔루션 회사인 필링크의 대표이사 직함도 얻게 됐다. ●교육열을 사업으로 연결한 기지…교육보험의 탄생 문학가를 꿈꿨지만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에 뜻을 세웠다. 약관이 되던 해에 서울로 갔고 이어 1936년 중국에서 양곡 수송 사업을 벌였지만 광복과 함께 10년간 닦은 기반을 버리고 빈손으로 귀국했다.1946년. 귀국후 첫 사업으로 전북 군산에 ‘민주문화사’란 출판사를 냈으나 외상 책값이 회수되지 않아 간판을 내렸다. 그렇게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한 뒤 문득 중국에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논 한 뙈기 없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강한 교육열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무형원자재인 것이다.‘생·로·병·사’중 유일하게 보험이 빠져 있는 ‘생’ 부문에 교육보험을 끼워넣어 상품화하기로 했다. 당시 보험에 대한 인식은 형편 없었다. 일제시대 보험은 수탈 방식이자 보신(保身) 방편이었다. 더욱이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미치지 못해 보험에 들 여유가 없었다.1954년 정부가 보험업을 재개시켰으나 기존 생명보험 회사들이 대부분 휴면상태에 있을 만큼 보험업은 쑥대밭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험난해서인지 국민의 80%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그의 재기가 번뜩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가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을 들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다. 창업 당시에는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지 못했다.1958년 종로1가 60번지 2층짜리 건물에서 직원 46명과 함께 먼저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교육보험이란 업종상 생명보험으로 분류돼 상호에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을 수 없었다. 교육열을 자원으로 만든 상품이었고 당시 생명보험에 대한 인식도 열악해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1958년 1월 창업한 뒤 관계 공무원을 끊임없이 설득, 같은 해 7월 상호변경 승인을 얻어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을 출범시켰다. ●슬하 2남2녀의 혼맥 1943년. 중국에서 한창 양곡수송 사업을 크게 벌이던 신 창립자는 당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그를 맞아주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일 모레가 네 장가가는 날이다.”는 아버지의 한마디. 결혼을 시키려고 거짓 소식을 보낸 것이다. 당시 남자 26세는 혼기를 놓친 나이였지만 그는 벌인 사업 때문에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도망칠 마음까지 먹었다고 고백하며 배려를 바랐으나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눕는 바람에 결혼식을 치렀다. 부인 유순이(81)씨는 당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전수학교까지 마친 명문가 출신 규수. 사업에 전력을 쏟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남편을 탓하지 않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묵묵히 2남2녀를 길러냈다. 자녀들의 혼사도 그와 비슷하다.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중매 결혼이다. 명문 대가와의 정략 결혼은 눈에 띄지 않는다. 큰딸 신영애(56)씨는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 의학과 마취과학교실 교수 함병문(58)씨와의 사이에 현진(32), 지훈(31), 세훈(25) 등 2남 1녀를 두었다. 신영애씨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지분 평가로 지난 2004년부터 단번에 350억원대 자산을 보유, 연말마다 언론에서 선정하는 여성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둘째 딸 신경애(54)씨는 법조인에게 시집가 1남1녀를 낳았다. 남편 박용상(61)씨는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까지 마친 뒤 사법시험에 합격,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로 활약한 뒤 방송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박용상법률사무소를 운영중이다. 박용상씨의 큰형 용설씨는 내외빌딩관리㈜ 대표, 동생 용삼씨는 내외엔지니어링 대표다. 고 신 창립자의 자리를 이어받은 큰 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은 부인 정혜원(48) 봄빛여성재단 이사장과의 사이에 중하(24)·중현(22)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인 신 회장은 불혹이던 지난 1993년 교보에 발을 들여놓은 뒤 현재 직계 중 유일하게 교보에서 일하고 있다. 정 이사장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왔다. 막내 신문재(44)씨는 이정숙(44)씨와의 사이에 딸 혜진(18)을 두고 있다. 형제들 중 유일한 연애 결혼이다. 미국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1991년부터 2005년 8월까지 광화문 교보문고내 문구 액세서리 음반 팬시용품 등을 판매하는 400여평 매장의 문보장을 비롯해 전국 6개 교보문보장을 운영해 왔다. 교보문고가 직접 문보장을 운영하기 위해 신씨로부터 지난 8월 문보장 사업권을 회수했다. 현재 새 사업을 구상중이다. ●지독한 완벽주의와 파격 인사 고 신용호 창립자는 지독하다 싶을 만큼 완벽하고 집요하다는 평을 받는다. 땅을 고를 때도 좋은 날, 궂은 날, 비온 다음날 등 두루 살피는 완벽주의자다.77년 명예회장,85년 창립자 등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1990년대 후반까지 신입사원 면접에 직접 들어왔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도 실적이 저조해 본사 부장, 실장, 중역까지 나서 손을 들라고 권하자 그들을 나가게 한 뒤 ‘급료는 후불로 주겠다.’는 광고를 통해 간부 사원을 다시 구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창업 10년 만인 1967년 회장으로 물러난 뒤 2000년 아들 신창재씨가 교보생명 회장에 취임하기까지 33년간 무려 사장이 19번이나 바뀌었다. 평균 수명이 1.7년이었다. 경영 안정을 위해 최고경영진을 쉽게 바꾸지 않는 업계의 관행과는 다른 것이다. 교보의 임원 인사는 상식을 뛰어넘어 기발하고 파격적이란 평이 나오는 이유다. 신창재 회장의 인사 스타일도 재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2년 5월 취임한 장형덕 대표이사 사장의 경우 사장직을 폐지하는 형식으로 취임 10개월 만에 퇴임시켰다. 단일 지도체제가 더 효과적이라며 사장을 없애고 대신 부사장 3명을 임명해 집단경영체제로 개편했던 것. 그때부터 ‘대표이사 회장’ 밑에 ‘대표이사 사장’ 없이 ‘대표이사 부사장’ 체제로 가고 있다. 이어 지난 2004년 2월 박성규 부사장을 선임,‘집단경영체제’는 다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맨손으로 생나무를 뚫어라’ 고 신용호 창립자는 ‘죽고 나면 손해’란 보험에 대한 당시 인식을 바꾸는데 초점을 맞춰 교육보험 1호인 ‘진학보험’을 세계 처음 내놓았다. 죽어야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부모가 돈을 적립해 자녀가 초·중·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마다 학자금을 주는 상품이다. 먼저 단체들을 공략했다. 군인 단체 저축성 보험인 일명 ‘화랑계약’을 고안했다. 잦은 군의 이동에 탈락계약이 늘어 성과는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군 이동에도 추적·관리되는 시스템을 도입,1967년 육군과 170억원의 단체 계약을 맺었다. 파죽지세로 해군·한전 등 대형 단체들과 꾸준히 계약하는 개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판매 창구도 강화했다. 종로기독청년회관(YMCA)에서 대학생을 모아 보험강좌를 실시한 것을 계기로 대학지부를 설치, 대학생도 판매 채널로 끌어들였다. 지방유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기관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상품에도 그의 기지가 엿보인다. 암 상품은 그가 처음 개발했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성인병도 하나씩 보험상품으로 만들었다. 보험업계 전산화 발상을 추진한 최초의 인물도 바로 그였다.1974년 학자금 선지급 업무를 처음 전산화했고 “컴퓨터를 모르면 간부가 될 수 없다.”며 전 사원을 상대로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인증제’도 실시했다. 그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전반은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과정’이고 후반은 ‘생나무 뚫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인 과정’이라 비유했다. 인생은 장애의 연속이지만 강한 정신력만 있다면 아무리 높고 힘든 목표라도 달성할 수 있다는 게 그만의 철학이다. 이같은 열성과 집념으로 1958년 당시 6대 생보사 중 막둥이로 태어난 교보생명은 창립 5년 만에 보유계약 56억원으로 업계 3위,1964년엔 보유계약 100억원 돌파로 업계 2위에 오른 뒤 1967년 설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섰다.‘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의 다른 한 축…교보문고 교육 보험은 대세가 아니었다.80년 들어 경제성장과 함께 늘어나는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절이 오면서 보험만으로 교육비를 해결할 수 없게 됐다. 변하는 고객 욕구에 따라 양로보험, 종합보장생활보험 등 일반 생명보험 상품의 비중이 커졌다. 교육보험만으로 경쟁력이 떨어지자 1995년 ‘교보생명’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삼성생명의 약진으로 교보는 1974년부터 업계 1위에서 2위로 밀려났다. 자산이 늘어나면서 관련 계열사도 속속 설립했으나 모두 보험으로 맡긴 고객의 돈을 운용하기 위한 금융 계열사였다. 부동산관리 전문회사인 교보리얼코(1979), 교보증권(1994) 등 총 9개 자회사를 세우면서 교보를 오늘날 35조원 규모의 금융 자본으로 성장시켰다. 그 중 금융과 동떨어진 업종이 하나 있다. 바로 교보문고(1980)다. 교육을 통한 민족부흥을 창업 이념으로 삼고 있는 만큼 따지고 보면 업종의 본질은 같다는 설명이다. 1980년 종로 1가 1번지에 사옥 교보빌딩이 세워지자 그는 지하에 서점 설립을 제안했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며 지하아케이드 자리 쟁탈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간부들은 채산성이 약하다며 서점이 들어서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냈고, 손해가 나면 보험회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당시 허가관청인 재무부도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 회사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 자리에는 당연히 으리으리한 고급상가를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값진 땅에 책방을 크게 열어 청소년과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토록 한다면 그 효과가 어느 정도나 될지 상상해 보시오.” 손해가 나더라도 청소년의 정신역량을 키우는 일인 만큼 자신이 떠맡겠다고 설득했다.1985년에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학자들을 위해 80만종의 세계 논문도 공급했다. 지방사옥이 세워질 때마다 학생과 시민들이 교보문고 지점 설치를 요구했을 정도다. 대전, 성남, 대구, 부산, 부천, 강남 등에 속속 지점을 열었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찾는 고객 수는 일평균 4만 5000여명, 연간 1500만명에 달한다. 삶의 두 축이 교보생명과 교보문고라고 지적했을 정도로 애착도 컸다. 그러나 말년을 맞아 또다시 병마가 찾아 왔다.77세가 되던 1993년. 회사 정기건강 검진에서 간 기능에 석연치 않은 증후가 발견됐다. 담도암이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기운 있을 때 여행을 다녀오라는 처방을 내렸다. 사형 선고였던 셈이다. 그는 암과 싸우며 여생을 보내느니 살든 죽든 결판을 내겠다고 마음먹고 불가능하다는 담도암 수술을 감행했다. 수술후 그는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2개월이나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재활물리치료 반년 만에 골프장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근력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90년대 후반까지 업무를 보고받는 등 경영에 관여했다. 그러나 8년 뒤 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몸이 약해졌다. 결국 2003년 9월 19일 오후 6시1분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86세였다. jhj@seoul.co.kr ■ 신창재회장과 정혜원 여사 “내조만 하며 살아온 탓에 사회공헌 사업은 꿈도 꿔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제의로 사회공헌 사업을 시작하게 됐지요. 내조와 아이들 뒷바라지에도 벅차지만 소명으로 여기며 열심히 하고 있어요.”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의 부인 정혜원(48)씨는 요즘 사회활동에 바쁘다.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해온 전업 주부였다. 남편 신 회장으로부터 사회공헌 사업을 해보라는 제의를 받고 2004년 4월 성매매 피해여성 보호단체를 지원하는 봄빛여성재단을 창립,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순전히 남편 신 회장의 사재로 시작한 사회공헌 사업이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면서도 아이들이 완전히 홀로서기할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걱정이 많다. 그는 한사코 취재를 거부했다. 사회 활동은 하고 있지만 언론 대응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인 그는 소탈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으로 책임감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중매를 통해 남편을 만났다고 밝혔다. 평범한 집안에서 데려온 며느리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고 신용호 창립자의 수수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남편 신 회장이 양복도 맞추러 갈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고 했다. 실제로 신 회장은 아버지의 유업인 교보문고와 교보생명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아버지만큼 골프를 좋아하지만 교보로 옮긴 이후 거의 필드에 나가지 못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교보생명은 지난 2000년 5월 신 회장 취임과 함께 ‘질´경쟁을 선언하면서 업계 2위에서 3위로 밀려난 뒤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교보문고는 교보생명이 증자해 전자책 등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지식문화 전문회사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포부다. 출판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하다 보니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교보문고는 현재 부채비율이 416%로 은행으로부터 신규 여신이 어려운 처지다. 교보생명은 기존 주주가 여력이 없어 제3자 배정 방식으로 5000억원을 증자할 계획이다. 다른 생보사보다 상대적으로 지급여력비율(160%)이 낮다. 자기자본 확대가 이유다. 그러나 2대 주주인 자산관리공사가 난색을 표명하고 있어 문제다. 자산관리공사 소유·관리지분(41.26%)의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 상태에서 잘 팔릴 수 있도록 협조해야 증자에 동의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업계는 신 회장이 과연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교보생명의 한 임원은 신 회장에 대해 “아버지를 닮은 완벽주의자”라고 말했다. 경기고,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로 살아오다 불혹이던 지난 1993년 아버지 고 신용호 창립자의 뜻에 따라 그간 배운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대산문화재단 이사장으로 교보생명에 발을 들여놓았다.1996년 11월 교보생명 부회장,2000년 5월 교보생명 회장으로 취임한 뒤 변화와 혁신을 기치로 삼고 전력 질주 중이다. 박성규 교보생명 부사장은 “과연 의사 출신이 기업을 어떻게 경영할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를 보면 답이 나온다.”고 전했다. 의사 출신답게 깊은 통찰력과 분석력을 갖춘 데다 책을 많이 읽는 덕분에 멀리, 넓게 보는 안목이 있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교보 사옥 ‘광화문 글판’ 15년째 명물

    서울 종로 1가 1번지에 위치한 교보생명 사옥은 2006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계획하고 있다.지난 1980년 준공 이후 처음이다.25년이란 세월의 흔적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세련된 멋을 풍기는 이 빌딩 곳곳에는 고 신용호 창립자의 아이디어와 손길이 묻어 있다. 답답한 도심속 명상의 여유를 제공한 ‘광화문 글판’은 15년째 이 지역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기업 홍보 플래카드나 걸었을 법한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창립자의 글판 아이디어는 매우 독특하지 않을 수 없다.그가 문학과 예술분야의 타고난 기질을 경영에 접목시킨 ‘감성경영의 선도자’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는 유달리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사옥 설립 계획을 세우며 외국 건축물 견학에 나서기도 했고, 아예 전문통역관을 두고 외국의 유명 건축가들을 초청해 강의를 듣기도 했다.교보빌딩 3층의 집무실 책상에는 생전에 즐겨 봤던 건축 관련 도서들과 습지에 그렸던 설계도면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사옥의 엘리베이터 자재까지 일일이 챙기는 열성을 보였다. 세계 10대 건축가인 마리오 보타에게 1987년 맡긴 강남 교보타워 설계는 1996년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깐깐한 관여와 완벽성 때문에 무려 열일곱 번이나 전문가의 설계를 퇴짜놓은 일은 건축에 대한 그의 전문성과 집착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어릴 땐 병마와 싸우느라 고향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학교 문앞에도 가보지 못해 동창생이랄 만한 이도 없었지만,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이끌었던 골프모임인 ‘수요회’를 통해 각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그곳에서 만난 고 월전 장우성 화백은 교보빌딩의 색깔을 정해준 그의 40년 지기로 꼽힌다. 예술을 사랑해 이육록 화백의 후원자로 활동하며 골프장 회원권까지 선물로 주었을 정도다. 이 화백이 그린 436점의 수채화는 광화문 교보빌딩과 연수원인 천안 계성원 곳곳에 걸려 있다. 그는 말년까지 170㎝의 올곧은 서구적 체형을 유지하며 색조와 무늬가 유별날 만큼 깔끔하고 똑 떨어진 옷차림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에게 심미적 감각이 배어 있다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jhj@seoul.co.kr
  • ‘생활통계’ 2007년 상품화

    ‘생활통계’ 2007년 상품화

    통계도 상품화를 본격 추진한다. 이르면 2007년부터 수요자가 원하는 원시통계자료가 지리정보와 결합돼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거래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블루오션으로 통계지리정보시스템(GIS)을 활용한 신산업(BM, 비즈니스모델) 창출도 기대되고 있다. 통계청의 원시통계와 민간의 우수한 기술이 접목돼 상권분석 등 다양한 상품 개발이 이뤄질 전망이다. 통계GIS 인프라가 한발 앞선 일본은 2003년 기준 1조 8000억원의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통계청이 최근 마련한 ‘센서스 데이터 활용 제고방안’에 따르면 5년마다 이뤄지는 센서스 자료는 도시가계와 경제활동, 사회통계 등 각종 통계 생산의 근간이나 비용 및 수집 노력 등에 비해 활용도가 크게 떨어진다. 더욱이 센서스에 필수품인 지도는 다양하고 정확함에도 불구, 조사 이후 활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센서스 지도는 조사원들이 현장에서 실제로 확인하여 수정한 가장 정확한 지도이다. 이에 따라 통계청은 지도와 통계를 접목한 통계GIS를 제작, 유료로 운영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사전 작업인 ‘즐겨찾는 통계지도’가 이미 완성돼 인터넷(www.nso.go.kr)에서 선을 보였다. 통계지도에는 고령화와 저출산, 이혼 등 사회적 통계를 비롯해 주택과 가구, 사업체 등 50개 항목이 수록돼 있다. 통계청은 이같은 통계지도와 센서스 자료를 혼합시킨 지역단위별 통계 상품숍(가칭 Geo-STAT shop)을 2007년 하반기 개설키로 했다. 통계상품숍에는 센서스와 사업체조사 자료 등이 수록되며 이용자가 입력한 주소뿐 아니라 특정지역의 특화된 통계까지 검색이 가능하다. 즉, 용산역 주변 역세권에서 칼국수집을 내려는 창업준비자는 통계숍에서 역 주변 반경 300m 이내의 유동·상주인구 등과 동일업체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본단위구(1개동)는 인구·주택 등 21개 기본통계가 실리며 항목 추가시 처리비용 등이 가산되는 주문자생산방식도 가능하다. 이용료는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 시·도에 해당하는 도도부현 기본항목이 약 35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보다 낮은 5만∼10만원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통계청 관계자는 1일 “국민이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생활통계’를 생산함으로써 합리적인 정책 추진 및 신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원그룹-김재철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원그룹-김재철 회장家

    “김재철(70) 회장은 자신을 장보고라고 생각하는 몽상가였다. 김 회장이 서울 농대를 포기하고 부산수산대를 지원한 것은 어쩌면 바다에 대한 동경이 아니면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거칠고 험한 바다를 꿈의 대상으로, 기업의 대상으로 삼은 기업인은 우리 사회에 드물다.”소설가 최인호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 원양어선을 타고 5대양을 주름잡던 마도로스 출신의 김 회장에 대해 건전하고 꿈이 있는 몽상가라고 평했다.2000년 당시 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를 이끌던 김 회장은 최인호씨에게 장보고를 소설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최인호씨는 장보고가 흥미있는 인물이지만 권력을 꿈꾸다 암살(삼국사기)당했던 만큼 내키지 않았지만 김 회장의 설명을 듣고 장보고에 깊이 빠져 소설 ‘해신(海神)’을 쓰게 됐다. ●바다와의 인연…장보고를 꿈꾸며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벤처 비즈니스맨의 전형이다. 서울대 입학을 마다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좇아 바다 인생을 택했기 때문이다. 성실과 불굴의 투지, 그리고 개척자 정신으로 바다와 싸워 성공을 거뒀고 식품가공업과 금융부문 등으로 그룹을 키워내며 자신의 꿈을 이뤘다. 김 회장의 삶은 이처럼 바다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1935년 전남 강진 농촌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큰아들이 잘 돼야 한다는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에 따라 동생들 대신 학교를 다닌 셈이다. 어린 동생들은 후에 김 회장이 학비를 대주었지만 기대와 책임감을 한몸에 안고 유년시절을 보냈다. 걸어서 두 시간이 족히 걸리는 강진농고를 결석 없이 다니면서 우등생 자리도 놓치지 않았다. 진로를 고민하던 고3 시절.“바다는 무진장한 자원의 보고다. 우리 젊은이들이 무궁무진한 자원의 보고인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이끌려 망망대해로 인생의 나침반을 돌렸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계기로 그는 수산대에 진학해 바다로 나가기로 했다. 당시 서울대 농대에 장학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김 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시골 학교에서 서울대에 들어간다면 큰 경사인데 갑자기 지방에 있는 뱃사람 학교에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에서 반대가 많았습니다. 또 졸업하고 나서 배를 탈 때도 장애가 많았습니다. 정식 학부 졸업생이 배를 탄 것은 제가 처음이었거든요. 당시 수산대 졸업생들은 수산청이나 수산업협동조합 같은 관계기관에서 근무하거나 교사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때 저도 여수수산고 교장으로 계시는 고등학교 은사로부터 교사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양어선을 타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백면서생의 객기쯤으로 받아들이는 듯했습니다. 결국 항해중에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겨우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참치 잘 잡는 마도로스’ 1958년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원양어업을 시작한 뜻깊은 해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 첫 원양어선인 ‘지남호’의 승선자이기도 하다. 기업가로 변신하기 전 김 회장은 8년간 실제로 마도로스 생활을 했다. 항해사로 시작한 뱃사람 생활에서 곧 능력을 인정받아 3년 만에 ‘지남2호’의 선장이 됐다. 파격적인 승진이다. 다른 배보다 빨리 만선을 기록한 데 대한 보상이었다. 그때부터 국내외 원양어선 업계에서 그는 ‘참치 잘 잡는 선장’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나라 수산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각오로 배를 탔고 한 마리라도 더 잡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출어에 나섰다.”면서 “고기떼를 찾아 바다를 헤맬 때나 조업을 앞둔 새벽이면 목욕재계를 하고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강조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뒤의 일은 신의 섭리에 맡긴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신조로 삼았던 마음 가짐 때문인지 승승장구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대충대충’‘괜찮아’다. 1964년 고려원양 수산부장으로 스카우트돼 물품판매, 차관업무, 선박도입 등 수산업 관련 업무를 익혔다. 당시 원양어선이 잡은 참치는 대부분 현지에서 수출됐는데 그때 외국상선들과 거래하며 쌓은 신용은 나중에 창업할 때 큰 도움이 됐다. 1969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조업과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동원 산업을 창업했다. 당시 사업 밑천은 1000만원. 배는 일본 기업에서 공짜로 빌렸다. 일본에서 어선 구입비로 37만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는데 담보나 정부·은행의 지불보증 없이 신용만으로 빌린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10여년간 쌓아온 신용의 결과였다. 사장이 된 뒤에도 그는 직접 배를 몰고 고기잡이에 나섰다.‘참치 잘 잡는 선장’이라는 별명이 무색치 않게 동원산업의 원양어선은 월등한 어획고를 기록했다. 창업 2년만인 1970년 외화 획득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과 수산청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70년대 초 몰아닥친 1차 석유파동은 동원산업을 비롯해 모든 원양어선 업계에 타격을 주었다. 불황으로 도산하는 기업체가 속출하는 가운데 감원·감량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동원은 오히려 투자를 늘리는 등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일본에서 4500t급 초대형 트롤어선을 구입했다. 당시로서는 큰 모험이었지만 그는 바다생활을 통해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배를 타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만 해도 기상정보가 정확지 않아 예보없이 폭풍우를 만나는 일도 많았지만 바람이 온다고 일일이 피해 다니다보면 고기를 잡을 수 없다. 배를 삼킬 듯한 거대한 파도와 싸워 이기고 났을 때처럼 감격스럽고 벅찬 희열도 없다. 폭풍우와 맞서 싸운 경험들이 인생을 성장시켰고 여물게 해준 것 같다.” 그는 해양에 관한 풍부한 경륜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85∼91년 한국수산업 회장,90∼92년 원양어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식품과 금융업으로의 확장 다른 원양회사들이 낡은 배를 가지고 ‘본전뽑기’식 조업을 하는 동안 동원은 조업을 끝낸 선박은 현지에서 매각하고 최신형 장비를 갖춘 선박을 구입하는 공격적인 경영으로 업계 선두주자가 됐다.30여척의 원양어선과 함께 연간 10만t의 어획량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 수산업체로 키운 것이다. 동원산업에서 참치캔을 내놓으며 식품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2년. 다랑어란 본명을 가진 참치는 참치의 일본명인 ‘마권(眞黑)’에서 ‘참(眞)’을 따고 우리나라 생선 대부분의 이름처럼 끝에 ‘치’를 넣어 참치로 부른 것이 유례가 됐다. 참치잡이는 그가 배를 타던 지난 1958년부터 시작됐지만 참치 가격이 비싸고 일반인들에게 낯선 고기여서 전량 수출됐다. 그는 “1981년 하버드대학 최고경영자 코스에서 몇달 공부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가 되면 참치통조림을 먹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그럼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참치통조림을 먹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참치캔을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당시 어획고 전량을 일본·태국 등 외국에 전량 수출하다 보니 가격 결정권이 전혀 없었다. 한국에서 소비가 된다면 동원의 힘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내 다른 업체들이 참치통조림을 만들어 팔다 실패한 뒤의 도전이었지만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참치가 원래 우리나라 근해에서 잡히지 않는 고기라 낯설기 때문에 통조림에 참치 모양을 그려 넣고 텔레비전 광고를 시작했다. 등산로 입구에서 참치통조림 시식회를 하는 등 참치를 알리는 데 총력을 쏟았다. 출시 이후 4∼5년간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88올림픽과 함께 국민 식품으로 자리잡으면서 동원은 명실공히 식품 업계 강자로 부상했다. 동원 참치캔은 국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식품업을 시작한 1982년. 김 회장은 증권업에도 뛰어들었다. 역시 하버드대학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공부하며 들었던 얘기가 동기가 됐다. 하버드대학 MBA출신들이 어떤 분야에 주로 취업하는가를 조사해 봤더니 우수한 사람들이 증권회사나 투자은행을 선호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라는 것이다. 그는 어선을 더 사려고 준비했던 돈으로 증권회사를 샀다. 당시 국내 증권회사의 인식이 좋지 않아 원양어선 한 척 값(80억원대)으로 중견 증권회사인 한신증권을 살 수 있었다. 한신증권을 낙찰받으면서 김 회장은 본격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신증권은 1996년 동원으로 개명했다. 지난 2004년 12월에는 아예 동원그룹에서 분리되어 한국투자증권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투자금융지주로 재탄생했다. 99년 무역협회 23대 회장에 취임한 이후 그룹의 일들은 주요 사항만 보고받고 있다. 무협 직원 절반가량을 줄이는 등 조직 슬림화를 단행하는 한편 전자무역 인프라 구축, 세계적인 전시 컨벤션 육성, 수출입물류비개선 , 국제물류센터 추진 등을 위해 총력을 쏟고 있다. ●아들들에 밑바닥부터 경영수업 김 회장은 부인 조덕희(67) 여사와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선장시절인 1962년 당시 초등학교 동창이던 조 여사의 오빠 조영채(70)씨의 소개로 만나 6개월 만에 결혼했다. 조 여사의 아버지는 김 회장이 졸업한 군동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낸 분으로 김 회장을 사위로 맞는 것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다. 김 회장은 2004년 12월 그룹을 각각 금융과 식품의 양대 지주회사로 분리하면서 큰아들에게는 금융을, 작은아들에게는 식품을 맡도록 했다. 장남인 김남구(42)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은 2004년 3월 동원증권 대표이사 사장이 되면서 경영 전면에 나섰다. 이듬해인 지난 6월 자사보다 덩치가 훨씬 큰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하며 기존 동원금융지주보다 시가총액이 두배나 많은 1조원대의 한국투자금융지주를 설립했다. 고려대 경영학과(83학번)를 졸업하고 1987년 동원산업 사원으로 입사한 후 91년 동원증권 대리, 기획담당 상무, 부사장을 거쳐 2003년 동원금융지주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금융지주 지분 33%를 소유하고 있다. 동원F&B 등 식품 계열의 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는 김 회장의 차남인 김남정(32) 경영지원실장(직급 차장)이 물려받았다. 고려대 사회학과 92학번인 김 실장은 회사 지분 44.98%를 갖고 있다.97년 동원산업에 입사, 동원엔터프라이즈 과장 등을 거쳤다. 아버지가 만든 참치캔 이후 업계를 선도할 새 베스트셀러를 내는 게 목표다. 동원그룹 관계자는 “장남 김 사장은 입사하기 앞서 6개월간 남태평양과 베링해에 나가 참치배를 타며 동원을 이해하기 위한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쳤다.”면서 “하루 16시간 중노동을 하면서 그물을 던지고 참치를 잡는 한편 참치를 삶고 냉동시키는 과정에서부터 갑판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차남 김 실장 역시 1997년 경남 창원 참치통조림 공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로 시작, 동원산업 영업부 평사원으로 시내 백화점에 참치제품을 배달하는 등 밑바닥부터 배웠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닮아 체구가 좋고 남들이 보면 구두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근검절약 정신이 투철하다는 평이다. ●정·관계로 이어지는 화려한 혼맥 건설교통부 장관부터 국정원장까지 동원가의 혼맥은 화려하다. 큰 아들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은 집안끼리 알고 지내던 고병우(72) 28대 건교부 장관의 딸인 고소희(37·이대 전산학과 86학번)씨와 1992년 4월 공항터미널 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고려대 김동기 교수가 주례를 섰다. 두 사람 사이에 동윤(12)과 지윤(7) 1남1녀가 있다. 고 전 장관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동아건설 회장 등을 역임하다 현재 한국경영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재철 회장과 같은 호남 출신. 쌍용증권 회장 재직시절부터 김 회장과 가깝게 지냈다. 김남구 커플은 ‘괜찮은 사람이니 한 번 만나보라.’는 양가 어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8개월간 연애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이대 서양학과 84학번인 첫째 딸 김은자(40)씨는 1989년 서울지검에 재직중이던 정택화(44·고대 법대 79학번) 검사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은자씨는 내성적이고 일 욕심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남구 대치동에서 초등학생을 겨냥한 사설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정 검사는 광주지검 부부장검사, 대구지검 안동지청장, 부산고검 부부장검사, 의정부지검 형사1부 부장검사 등을 역임한 뒤 현재 대구 고검 검사로 재직하고 있다. 올해 열두살된 외동아들 연욱이 있다. 둘째 딸 김은지(37·이대 정외과 87학번)씨는 고 김택수 전 의원의 4남인 서울 법대(81학번) 출신의 김중성(43)씨와 지난 1992년 10월 김상협 전 국무총리의 주례로 식을 올렸다. 성격이 명랑하고 친정과 시댁의 집안 대소사를 두루 잘 챙겨 어머니 조덕희씨의 자랑이 자자하다. 두 사람은 김 회장과 평소 친분이 있는 천신일 세중여행사 회장이 1988년 여행사에서 어린이들을 인솔하고 외국으로 떠나는 프로그램(CISV)의 대학생 리더로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나라종합금융 상무이사를 지낸 김씨는 지난 2001년 미국 뉴저지로 건너가 투자관리회사인 세인투자관리를 설립,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민선(12)과 현선(6) 두 딸이 있다. 막내 김남정(32) 실장의 아내는 33대 법무부 차관과 25대 국정원장을 지낸 신건(64) 세계종합법무법인 변호사의 셋째 딸 신수아(33·이대 장식미술학과 91학번)씨. 대학교 4학년 때 동아리 선배의 소개를 통해 누나-동생 사이로 만난 뒤 6개월만에 연인 사이로 발전,3년 열애끝에 결혼했다. 김상하 삼양사 회장 주례로 지난 1998년 10월 워커힐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동찬(5)과 서연(2) 남매를 두고 있다. 사돈인 신건 전 국정원장은 김 회장의 셋째 동생인 김재국(63) 전 동해하이테크 사장의 친구이기도 하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뛰어난 문장가’ 김재철 회장 “재웅아! 우리는 드디어 만선(滿船)을 했다. 우리 배는 지금 어창(魚倉)마다 고기를 가득 싣고 사모아로 돌아가는 길이다. 푸른 하늘엔 흰 구름 떠가고 바다엔 새하얀 우리 배가 물결을 가르면서 달린다. 물위에 떼를 지어 놀던 고기들이 놀라서 달아나고 한가로이 물에 떠 있던 고래도 배를 피해 점잖게 물 속으로 자맥질을 한다. 엊그제까지도 바다는 성난 파도로 꿈틀거렸는데 오늘은 우리의 만선귀항을 축하라도 하는 듯 잔잔하구나.”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소개된 김재철 회장의 ‘남태평양에서’의 한 구절이다. 김 회장은 책을 많이 읽는 독서광으로 유명하지만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높다. 젊은 시절 바다에서 생활하면서 간결하고 생동감 있는 글을 많이 썼다. 이밖에 ‘바다의 보고’,“거센 파도를 헤치고’ 등 그의 글은 초·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소설가 정비석씨는 ‘사상계(思想界)’에 발표한 김 회장의 글을 보고 “이 정도 글 솜씨라면 작가로 데뷔해도 좋겠다.”고 평했다. 김 회장 스스로도 기업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문인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서로는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가 있다. 그는 원양어선 선장시절 선용품을 사기 위해 시모노세키 등의 항구에 기항하면 책방에 가서 헌책들을 무게로 달아 구입해 배 안에서 끊임없이 읽었다. 덕분에 김 회장은 문학적 표현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만큼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다. 지난 2004년 일본 미쓰비시 그룹 회장·사장단으로 구성된 모임인 ‘금요회’에서 ‘나의 인생과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주제로 일본어 특강을 했다. 요즘도 월 평균 10∼20권의 책을 읽는다. 경제·경영·역사·심리 등 분야가 다양하다. 회계학도 독학으로 배워 재무제표도 꼼꼼히 본다. 직원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동원산업 사내 게시판에는 책 요약 서비스까지 제공된다. 처남인 박인구 동원F&B 사장도 국내 출장이나 여행 때는 반드시 KTX를 탄다.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자식들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강조했다.1주일에 적어도 한 권씩은 읽도록 했다. 정독이 안되면 통독을 하라고 가르쳤다. 책을 주고 A4용지 4∼5장 분량의 독후감도 받았다. 내용이 부실하거나 느낀 점이 부족하면 느껴야 될 점과 핵심 등을 설명해 주었다. 장남인 김남구 사장은 오래전에 독후감 제출을 졸업했지만 김 사장보다 열살 어린 동생 김남정 실장은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독후감 제출 대상이었다. 김 실장은 “일본 대하소설 ‘대망’을 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얼마나 고생해 지도자 자리에 올랐는지 토론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서 “최근에는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를 추천받았는데 유익했다.”고 말했다. jhj@seoul.co.kr ■ 동원출신 CEO들 ‘반짝반짝’ 김재철 회장은 소식·금연·절주 등 절제된 생활로 유명하지만 인재 욕심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좋은 인재=좋은 실적’이란 생각에서 1980년대 후반 증권업계 최초로 성과급제를 도입했고 금융권 최초로 스톡옵션제를 실시했다. 동원이 인수한 한신증권은 90년대 한번에 특별성과급을 400%씩 지급, 업계의 부러움을 샀다. 참치를 많이 잡으면 선장에게 돌아가는 몫이 많듯 선장을 지낸 그의 삶에 성과주의가 깊이 배어있는 것이다. 때문에 동원증권 출신들 중에는 스타급 인사가 많다. 동원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CEO(최고경영인)는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 대신증권에서 김 회장에게 한신증권으로 스카우트된 그는 1998년 동원증권 사장 재직 당시 금융권 최초로 10만주의 스톡옵션을 받았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주택은행장으로 영전돼 권리 행사는 하지 못했다.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즐겁게 일한 뒤 행복하게 헤어진 모범 케이스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동원이 놓아주지 않으려 애를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나이 마흔이 되면 창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이사 재직 시절인 서른 아홉이 되던 해에 동원증권을 나왔다. 그를 놓아줬다는 이유로 화가 난 김 회장이 김 전 행장과 무려 6개월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낸 일화는 아직도 금융권에서 회자되고 있다. 김 전 행장은 한신증권 이사로 일하면서 박 회장을 동원에 영입했다. 두 사람은 절친한 광주일고 선후배 사이다. 재경부 공무원 출신의 정태석 광주은행장(전 동원증권 상무), 장인환 KTB 자산운용 사장(전 동원증권 차장), 송상종 피데스 투자자문 사장(전 한신증권 대리), 조승현 전 교보증권 사장(전 동원창업투자 사장)도 모두 한때 동원증권에 적을 뒀다. 지금도 동원에 몸담고 있는 스타 CEO들이 많다. 서두칠 동원시스템즈 사장은 2002년 초 김 회장의 영입제의를 받고 통신장비업체인 이스텔시스템즈(옛 성미전자) 사장으로 왔다. 동원시스템즈는 지난 3월 이스텔시스템즈와 동원EnC가 합병한 회사다. 그는 1997년 말 한국전기초자의 전문경영인으로 부임해 수백억원의 적자를 내 퇴출위기에 몰렸던 회사를 3년만에 우량기업으로 변신시킨 주인공. 김범석 한국투자신탁운용 사장은 금융관료 출신으로 2002년 합류했다. 금융감독위원회에서 은행구조조정팀장과 구조개혁기획단 은행팀장을 지냈다.2000년 초 키움닷컴 사장을 지냈다. 김 회장의 두 아들을 제외하고 동원에서 일하는 인척은 김 회장의 셋째 동생 김재운 동영콜드프라자 대표이사 회장, 둘째 처남인 동영콜드프라자 최재열 상무와 셋째 처남인 동원F&B 박인구 사장 등이다. 박 사장은 1997년 산자부 상무관 시절 동원정밀 부사장으로 동원에 합류했다. 외환위기 당시 이익을 낸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동원F&B 사장이 됐다. 박 사장은 “김 회장은 항상 동생들과 가족들에게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우리가 희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말했다. 박 사장의 부인이 아직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없이 사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라고 덧붙였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서울광장] 삼성, 다시 변해야 할 때다/이상일 논설위원

    [서울광장] 삼성, 다시 변해야 할 때다/이상일 논설위원

    미국 최고의 백화점인 노드스트롬은 삼성이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외국기업중 하나다. 경영학자인 짐 콜린스 등은 일류기업의 특징중 하나로 ‘사교(私敎)같은 문화’를 들면서 그 예로 노드스트롬을 소개했다. 노드스트롬의 완벽한 고객서비스를 뒷받침하는 비결은 기업 핵심이념의 열렬한 고수, 사원들에 대한 강도높은 충성 요구, 엄격한 통제 등이다.‘노드스트롬은 미국 해병대와 비슷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삼성은 재계에서 노드스트롬처럼 ‘무서운 곳’이라거나 ‘냉혹한 곳’으로 비쳐진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상무에 대한 변칙 상속, 대선자금과 관련된 엑스파일, 정·관계에 대한 삼성장학생 시비, 일류 스포츠선수 독점 등의 사태로 삼성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요즘 더욱 강화되는 듯하다. 그러나 제품과 서비스가 우수한 경우 특정 기업문화를 좋다, 나쁘다고 시비걸 필요는 없다. 또 오너 경영을 선호하는데 전문경영을 굳이 강제로 권고할 근거도 없다. 광복 이후 각 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삼성 그룹이 정치자금을 내지 않고도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이다.‘3류’인 정계와 정부에 인맥을 만들어 미리 손쓰려 한 경우도 비난은 할지언정 이해할 수 없지는 않다. 그러면 국제기업 삼성이 한국에서 당하는 것은 ‘반기업정서’탓만일까. 삼성 때리기를 잘못된 여론몰이 때문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모그룹 회장의 전직 측근은 삼성이 집중 난타당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사회성 부족 탓”이라고 지적했다. 즉 징검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신중함, 경제논리를 앞세운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삼성의 결정이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은 주요 결정의 사회적인 반향에 대한 고려가 모자라기 때문이란 것이다. 실제 에버랜드나 서울통신 전환사채를 통해 이재용상무에게 변칙 상속한 것은 상속세 절약 논리만 내세웠지 수십억원의 세금으로 수조원을 상속하는 것을 보는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전선의 창업자인 설원량씨 유족들이 1300억원이 넘는 상속세를 문 것과 대조적이다. 삼성생명이 계약자 몫에 인색한 바람에 10년이상 상장이 늦춰진 것도 ‘합리적이지만 사회고려가 부족한’대표적인 사례다. 삼성그룹이 사회성이 부족한 결정을 어떤 이유가 있어 내린 것이라면 의사 결정자들이 강성기질이란 증거다.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만큼 삼성그룹의 핵심라인이 동맥경화증에 걸려있다는 증후일 수 있다. 사회적인 이슈는 대부분 그룹 사령탑인 구조조정본부가 생산해온 점에서 구조본의 의사 수렴과정과 구성에 문제는 없는지 스스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들이 지적한 경영 개선 사항을 그룹 핵심 의사결정자들이 “한번 밀리면 계속 밀린다.”는 식의 전투개념을 바탕으로 모두 거부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삼성그룹을 움직이는 핵심인맥이 ㄱ대, 특정지역 출신과 재무팀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재무팀 인맥이 강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지역과 학교 파벌설은 무파벌을 자랑해온 삼성에서는 경계할 사항이다. 이를 의식해 이학수 본부장은 ㄱ대 출신을 구조본에 추가 배치하지 말라고 지난해 지시했다. 해병대 같은 노드스트롬이 강한 것은 종업원에게 엄청나게 많이 자율적인 의사판단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삼성이 계속 강해지려면 사내외의 다양한 의견을 ‘3류’라고 접어놓지 말아야 한다.10여년전 신경영 초기처럼 ‘마누라 빼고 다 바꿔보자.’가 삼성 사령탑에 필요할 때다. 새로운 신경영을 삼성에 기대해본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2)-대잇는 가족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2)-대잇는 가족경영

    “재계 랭킹 몇 위 어쩌구 하는 언어의 마술에 홀려 방만한 기업경영을 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도리어 나라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그런 기업은 되지 않았다.”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의 자서전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에 나오는 글이다. 김 명예회장의 심정은 삼양그룹 경영의 핵심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올해로 81년째를 맞는 삼양그룹은 흔히 ‘돌다리도 수없이 두드려 본 뒤 건너가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우보(牛步)경영’ ‘내실경영’ ‘보수경영’ ‘정도경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세계적으로 기업 평균 수명이 3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저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수식어의 이면에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지 못해 성장동력을 놓쳐 재계 50위권으로 처져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함께 담겨져 있다. ●역대 정권과 긴장관계, 성장경영 꿈도 못 꿔 삼성석유화학 허태학 사장은 강연때마다 삼양사의 사례를 들곤 한다. 허 사장은 “삼양사가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국내 최고의 기업 중에 하나였지만 적극적인 경영을 하지 못해 중견기업으로 뒤처졌다.”며 삼양식의 경영방식에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는 게 주위의 전언이다. 그러나 삼양그룹의 시각은 이와는 다르다. 삼양사는 역대 정권과 갈등 관계를 유지하느라 회사를 크게 키울 수 없었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삼양사는 이승만 대통령 재직시 창업주 김연수 회장의 형인 ‘인촌’ 김성수씨가 부통령까지 지내며 이 대통령의 라이벌로 활동해 집중 견제를 받았다. 김 창업주는 1951년 제당공장을 짓기 위해 울산에 부지를 확보했지만 정부가 공장 공사대금으로 활용할 외화 사용 승인을 3년이나 늦게 내줘 고초를 겪기도 했다.3공화국때도 인촌이 창간한 ‘야당지’ 동아일보를 지원하느라 정부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정부의 금융지원 같은 특혜는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게 삼양그룹측의 주장이다. 삼양사 문성환 부사장은 “60∼70년대 급성장한 기업들의 성장동력은 정치권과 야합해 무차별적인 차입경영에 있었다.”며 “그러나 삼양사는 역대 정권과 긴장관계를 유지해 정경유착에 나설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통기업을 묵묵히 지켜온 2세 기업인 이런 안정 지향적인 기업 경영은 외환위기(IMF)때 빛을 발했다. 부채비율이 높았던 대부분의 기업은 무너졌지만 삼양그룹은 그때나 지금이나 탄탄한 재무구조를 유지하고 있다.2004년 12월 현재 삼양그룹의 매출액은 2조 7180억원에 머물러 있지만 부채는 8537억원으로 부채비율 60%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기간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양사는 매출 8902억원, 부채 2799억원, 부채비율 40%다. 이런 이유로 삼양그룹은 지난 9월 재정경제부와 신산업경영원이 주최하는 재무경영종합대상을 수상했다. 삼양그룹이 튼실한 경영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김상홍(83) 명예회장의 공이 크다. 김 명예회장은 1956년 34세에 삼양사 사장에 취임했다. 부친 김연수 회장으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것이지만 80년이나 넘게 기업을 온전히 지켜온 ‘수성’(守城)이 그의 최대 업적이다. 김 명예회장이 우리나라 대표 기업을 지켜온 데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철저하게 받은 경영수업 덕이 컸다. 창업주는 1944년 일본 와세다대에 재학 중이던 김 명예회장을 만주로 불러 삼양사가 운영하던 매하구 농장에서 일을 시켰다. 사장 아들이라고 특혜를 베풀지 않고 농장 직원들과 똑같이 숙식하고 생활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호텔 경영인의 꿈을 꾸기도 했다. 이때 창업주는 “무슨 일이든 성공해 맨 윗사람이 되려면 우선 그 분야의 제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면서 기초를 익혀야 된다.”며 조선호텔에서 접시닦기와 객실담당(벨보이)부터 맡도록 권했다. 이후 1947년 제헌의원이던 나용균씨의 추천으로 수도경찰청(내무부 치안국) 경위로 특채돼 경찰에 입문했다. 그는 4년간 경찰관으로 복무하다 1952년 큰아버지인 김성수씨가 부통령직에서 사임하자 총경직에서 퇴직했다. 이때부터 김 명예회장은 경영인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창업주는 장남 상준씨를 비롯해 둘째 상엽, 넷째 상돈씨에게는 해리염전을 포함한 ‘삼양염업사’를 맡겼다. 김 창업주가 직접 경영하는 삼양사는 셋째인 김 명예회장과 다섯째 상하씨가 일을 하도록 교통정리를 했다. ●밑바닥부터 배워라 김 명예회장은 부친에게 받았던 경영수업이 혹독하리만큼 철저했다고 회고한다. 회사의 맨 밑바닥 일부터 배우라고 지시했는데 주산, 부기, 기장은 물론 고용노무작업, 구매자금조달 등 실무 업무부터 맡아야 했다. 김 명예회장은 일본 와세다대, 상하 회장은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상업고교 출신처럼 주산을 열심해 배워야 했다. 이런 전통으로 인해 삼양그룹은 사무직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우선 공장에서 현장 연수를 하는 것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한다. 김 명예회장은 50세가 넘어서도 창업주 앞에서는 의자에 마주 앉는 일조차 삼갔다고 한다. 부친을 지근 거리에서 모셨지만 “아버지 그림자도 안 밟겠다.”며 어려워했다. 지금도 사무실에 부친의 흉상을 두고 ‘무언의 조언’을 듣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이처럼 혹독한 ‘문하생’ 생활을 보낸 김 명예회장은 1950년대 제당사업을 전개할 때는 부친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설탕 영업의 골간을 만들었다.70년대 제당업이 정상에 오르자 경영 다각화의 일환으로 금융업에 진출, 삼양종합금융을 인수했다. 그러나 그는 삼양종합금융은 물론 1대 주주였던 전북은행에도 삼양사 직원을 단 한명도 파견하지 않는 등 자율과 원칙을 지킨 경영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삼양그룹의 장수비결에 대해 “욕심내지 않고 우리가 잘하는 것만, 그것도 능력이 닿는 범위내에서만 사업을 해왔다.”며 “정말 힘든 일이긴 했지만 우리가 잘하는 제조업체에만 집중하면서 넘치지도 않고 부족함도 없는 중용정신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의 경영철학은 ‘제조업을 통해 건전하게 돈을 벌어야 하고, 수익성이 좋다고 아무 사업이나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부회장을 함께 맡았던 김 명예회장에 대해 “과묵 침착하며 절제를 아는 선비, 중용의 참뜻을 실천해온 외유내강형의 단아한 신사”라고 평가했다. 김 명예회장은 1996년 동생인 상하씨에게 그룹회장직을 넘겨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 났다. ●삼양의 제2탄생을 마무리 김상하(80) 그룹회장은 상홍 명예회장과 함께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성장 궤도에 정착시킨 주역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김 그룹회장은 1949년 삼양사에 몸 담은 뒤 줄곧 부친과 상홍 회장을 도왔다.1952년 일본 도쿄사무소 첫 주재원으로 파견돼 삼양사 공장설계와 전문가 채용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상홍 명예회장과 상하 회장은 형제간이긴 해도 서로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상홍 회장이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하는 반면 상하 회장은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했다. 상홍 회장이 사람을 가려서 만난다면 상하 회장은 이런저런 사람을 폭넓게 사귀는 성격이다. 취미도 상홍 회장은 단조로움을 즐겼던 반면 상하 회장은 스포츠와 여행을 좋아했다. 때문에 그룹 경영에 있어서는 꼼꼼한 상홍 명예회장이 관리를 맡고, 활동적인 상하 그룹회장이 영업전선에 나서는 등 형제간 역할분담을 이뤘다. 실제로 상하 회장은 유창한 일어 실력과 깨끗한 인품으로 재계에서는 국제 감각이 뛰어난 대표적인 일본통으로 꼽혔다. 특히 1988년부터 12년간 최장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많게는 100여개의 대외 직함을 수행할 정도로 전방위 활동을 벌였다. 상하 회장은 이런 왕성한 대외활동을 바탕으로 제조업 중심으로 삼양의 성장을 진두지휘했다. 폴리에스테르 사업의 경우 10년에 걸친 증설을 이끌어 국내 최대 폴리에스테르 업체로 위상을 높였다.1980년대에 집중된 화학, 의약 등의 사업 다변화에도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폭넓은 대외 교분을 토대로 미쓰이, 미쓰비시화학과의 각종 기술제휴 및 합작이 추진돼 삼양화성, 삼남석유화학을 설립했다. ●외유내강의 기업인 상하 그룹회장은 소탈하면서 모가 없는 성품이지만 그룹경영에 있어서는 진퇴를 명확히 제시하는 ‘외유내강형’의 기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90년대 국내 폴리에스테르 업체들이 신·증설을 활발하게 진행했지만 그는 화학섬유 사업의 한계를 감안해 대규모 증설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또한 섬유본부에서 신사업으로 오랫동안 검토해 샘플 제작까지 끝낸 폴리에스테르 필름 사업도 사업의 구조적인 경쟁력과 취약성을 들어 사업을 중단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상홍 명예회장을 모시는 데도 깍듯했다. 상홍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수시로 의견을 구했다. 상하 회장은 서울 성북동에 형집과 담장 하나 사이를 두고 함께 살고 있다. 담장 중간에 쪽문을 해놓고 수시로 오갈 수 있는 ‘핫라인’까지 설치해 놓고 있다. 상홍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동생과 집을 나란히 짓고 살게 된 것은 동생이 스스로 땅을 함께 사고 집도 순서대로 나란히 짓고 살아온 덕”이라며 “아우는 본래 2층집을 짓고 싶었는데 순전히 나 때문에 일조권을 염두에 두고 단층집을 짓고 산다.”며 돈독한 형제애를 소개했다. 상하 회장은 2004년 3월 상홍 회장의 장남이자 조카인 김윤 삼양그룹 부회장에게 ‘대권’을 물려줬다. 아들인 원씨는 삼양사 사장에 나란히 취임했다. 이로써 1975년부터 30년간 지속된 2세 형제경영에 이어 3세 사촌 형제간 공동경영 시대의 막이 올랐다. ●숨은 주역들 김 명예회장과 그룹회장은 삼양그룹이 81년의 전통을 이어온 데는 동생들과 매제의 역할히 컸다고 회고한다. 김 명예회장은 “나는 아우들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면서 크고 작은 일에 신중을 거듭했다. 아우들과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선친께서 잡아놓은 틀을 잡는 데 힘썼다.”고 말했다. 김 명예회장은 회사 발전에 공을 세운 일등공신으로 지난 2002년 작고한 김상응 막내 동생을 손꼽는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미국 유타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상응씨는 96년부터 삼양사 회장으로 재직하며 외환위기 등 창업 이래 최고의 시련기를 뚝심으로 돌파하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고 떠올린다. 부인 권명자(53)씨와 4남 1녀인 자식들은 남편이 죽은 뒤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또 막내 여동생 희경(66)씨의 남편 김성완(66)씨의 공헌도 높이 평가했다. 김씨는 미국 유타대 교수로 생체고분자 및 약물전달시스템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김 교수는 김 명예회장에게 “기업이 발전하려면 연구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데 장래성이 좋은 분야는 의약계통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결국 김 명예회장은 김 교수의 의견에 따라 1993년 충남 대덕 연구단지에 ‘삼양그룹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삼양그룹이 중점사업으로 키우고 있는 화학, 식품, 의약부문의 성장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제는 공격경영 김윤(53) 회장은 부친 상홍 명예회장, 상하 그룹회장과 같이 바닥부터 경영수업을 받았다.1979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LG그룹 계열인 반도상사에 취직했다.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기에 앞서 다른 회사 직원으로 영업전선을 두루 체험해 보라는 부친의 의도였다. 이를 두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김상홍 회장님의 큰자제가 2년간 반도상사에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내게는 그런 사실을 전혀 귀띔도 해주지 않았다.”며 “나는 훗날에야 그 사실을 알고 한쪽으로는 좀 서운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상홍 회장님의 인품을 새삼 느꼈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MIIS(Montere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에서 MBA 석사를 취득한 뒤 곡물회사인 루이스 드레푸스에서 2년간 근무하며 국제적인 경영감각을 익혔다. 또 삼촌인 상하 그룹회장처럼 도쿄지점에서 2년간 주재하며 삼양그룹의 해외진출 사업을 손수 챙기며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다져 나갔다. 고국에 귀국한 뒤에는 울산공장 기술수출팀을 시작으로 이사(90년)-상무(91년)-대표이사 전무(93년), 대표이사 사장(96년)-대표이사 부회장(2000년) 등을 거치며 착실히 경영수업을 쌓았다. 2004년 삼양사 회장에 취임한 김 회장은 차분하고 안정적인 경영 스타일로 삼양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편 보수적인 관행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삼양그룹은 보수적이고 안정 위주의 경영전략을 구사해 성장이 정체돼 있었다.”며 “앞으론 사고방식을 진취적으로 전환해 그룹의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포부를 밝혀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2010년까지 2조원을 투자해 매출액 6조원을 달성하고 자본수익률 2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이를 위해 화학, 식품, 의약, 신사업 등 4대 부문을 핵심 성장 사업군으로 설정했다. ●다시 세계로 진출 2004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전기전자, 부품소재 등을 생산하는 삼양공정소료 유한공사를 설립, 창업주인 할아버지가 만주에 진출한 데 이어 68년 만에 중국에 현지법인 형태로 재진출했다. 향후 중국을 기점으로 인도, 중남미 등 생산기지를 다각화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 세계적인 전문 화학회사로 육성한다는 복안이다. 또한 식품부문을 총괄하는 통합 브랜드로 ‘큐원’(Qulity No.1)을 출범시켰다.47년간 사용해 오던 대표 브랜드 ‘삼양설탕’을 과감히 버리고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식품소재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김윤 회장의 이런 자신감은 1996년부터 삼양사 사장과 부회장을 거치며 길러졌다. 과감한 추진력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발휘됐다. 사장 시절이던 1998년 사업실적이 저조한 금융업과 무선통신사업을 포기하고 계열사를 섬유·식품·화학 등을 핵심 사업군으로 재편했다. 특히 삼양사의 주축이었던 폴리에스테르 사업부문을 과감히 정리,2000년 SK케미칼과 통합법인 휴비스를 설립했다. 이후 삼양그룹 직원들은 단 한명의 구조조정과 한 푼의 임금삭감 없이 경영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이런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19일 서울대 산학협력재단이 주최한 ‘제1회 한국을 빛낸 CEO’에 이명박 서울시장, 정운찬 서울대 총장,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이지송 현대건설 사장 등과 함께 뽑혔다. 또 2001년 전경련 부회장에 선임됐고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3세에도 공동경영 상하 그룹회장의 장남인 김원(48) 사장은 선대 회장들처럼 사촌 형인 김윤 회장을 도와 삼양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3대 경영의 주역들은 선대 회장들과는 달리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윤 회장은 부친인 상홍 명예회장이 내성적인데 반해 활발한 활동으로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반면 원 사장은 전방위 대외활동을 펼친 부친 상하 그룹 회장과는 달리 묵묵히 사촌형을 챙기고 있다. 원 사장은 연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유타대에서 재료공학과 산업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윤 회장처럼 도쿄지점 부장을 거쳐 삼양이 의약부문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1993년 개발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의약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연구개발 부문을 관장하면서 이사, 상무로 승진한 뒤 1997년 연구개발본부장(전무)에 오르는 등 ‘테크노 경영인’으로 각인되고 있다.1999년 부사장 승진에 이어,2000년 8월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됐다. 이공계 출신으로 매사에 치밀하며 경영분석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외 영업에 치중했던 부친과 달리 관리쪽에 무게가 실리는 경영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결혼도 자식 뜻대로 상홍 명예회장과 상하 그룹회장은 창업주처럼 자식들의 결혼과 관련해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본인들의 의사를 최대한 들어주는 스타일을 지켰다. 상홍 명예회장의 장남 김윤 회장은 친구들 모임에서 부인 김유희(46)씨를 처음 만났다. 김 회장은 이화여대를 졸업한 김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김씨가 상당한 미모를 갖추고 있는데다 집안 대대로 친척들이 이대 출신이 많다는 점도 맘에 들었다고 고백한다. 김 회장은 부인을 웬만한 행사에는 동행할 정도로 ‘부인사랑’이 남다르다. 지금도 사석에서 김 회장의 18번인 ‘만남’을 두 부부가 함께 부른다고 한다. 김원 사장도 친구들끼리의 모임에서 부인 배주연(41)씨를 만나 열애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반면 김량(51) 삼양제넥스 사장과 김정(46) 삼남석유화학부사장은 중매로 배필을 만났다. 김량 사장은 김정렬 전 국방부 장관의 중매로 부인 장영은(46)씨와 혼인했다. 상홍 명예회장과 김 전 장관의 집안이 오래전부터 친해 자연스레 연결됐다. 김 전 장관은 영은씨의 부친인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과 막역한 사이어서 혼인을 주선했다. 김정 부사장은 어머니 박상례(75)씨가 자영업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안혜원(39)씨를 만났다. 안씨 부친이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어서 흔쾌히 혼담이 오갔다. jrlee@seoul.co.kr ■ 막강한 손녀사위들 김연수 삼양사 창업주는 부인 박하진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는 2세들보다 3세들의 혼사를 통해 혼맥을 이뤘다. 재계, 정계, 언론계, 법조계 등 매우 다양하다. 이 가운데 손녀사위들은 대학교수, 의사, 경영인 등의 전문 직업군을 이루며 삼양가(家)의 명망을 잇고 있다. 둘째아들인 김상협 전 국무총리는 1남3녀를 두었는데 3명의 사위가 모두 교수인 것이 이채롭다. 김 전 총리는 형제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다고 한다.5년제였던 경복중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당시는 도쿄제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나올 정도의 수재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김 전 총리는 학자 사위들을 좋아했다. 김 전 총리의 장녀 명신(58)씨 남편 송상현(65)씨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씨는 송진우 전 동아일보 사장의 손자다. 둘째딸 영신(56)씨는 정성진(58) 서울대 공대 교수와 결혼했다. 정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이다. 막내딸 양순(52)씨의 부군 이양팔(59)씨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다. 또 상홍(83) 명예회장의 장녀 유주(56)씨도 윤영섭(59)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와 혼인했다. 창업주의 넷째딸인 정유(73)씨는 외동딸인 원경(43)씨를 한정수(48) 전 충남대 교수와 결혼시켰다. 손녀사위들의 ‘의사 파워’도 만만치 않다. 김 창업주의 둘째딸 상민(78)씨는 둘째딸인 이정현(41)씨를 백완기(47) 인하대병원 흉부외과 의사와 인연을 맺어 줬다. 김 창업주의 셋째딸 정애(75)씨 장녀 조경미(47)씨의 부군 주춘희(47)씨도 캐나다에서 병원을 운영 중이다. 그러나 삼양가가 전문 경영인 집안이어서인지 손녀사위들도 전문 경영인이 많다. 김 창업주의 장남 상준씨의 장녀 정원(62)씨의 남편 김선휘(68)씨는 삼양염업사 부회장으로 재직하며 처가의 가업을 잇고 있다. 둘째딸 정희(58)씨는 김준기(62) 동부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또 셋째딸 정림(57)씨도 윤대근(59)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이자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과 결혼해 유달리 ‘동부그룹’과 인연이 많다. 창업주의 둘째 김상협 전 총리가 교육자 집안으로 꾸렸던 것에 비해 장남 상준씨는 전형적인 경영인 가족을 형성한 셈이다. 넷째 상돈(81) 삼양염업사회장은 외동딸 희진(45)씨를 오광희(49) 전 나이스 정보통신 전무와 결혼시켰다. 다섯째 상하(80) 그룹회장도 외동딸 영난(44)씨를 송하철(45) ㈜ 항소 사장과 혼인시켰다. 송씨는 송삼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다. jrlee@seoul.co.kr ■ 계열사 사장들 ‘전문적 경험’ 풍부 삼양그룹의 현 계열사 사장들은 경영전면에 나선 창업주의 3세들을 지원하는 것에 역할이 주로 맞춰져 있다. 분야별로 전문적 경험이 풍부해 경영 승계가 무리없이 이뤄지도록 돕고 있다. 박종헌(66) 삼양사 사장은 40년동안 영업, 해외업무, 인사, 재무, 기획분야를 두루 거쳤다.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박 사장은 법학도답게 매사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영훈 대법원장과 서울법대 동기동창이다. 김량(51) 삼양제넥스 사장은 김상홍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경방유통에서 16년간 재직하며 사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유통부문의 핵심 역량을 쌓아왔다.2002년 삼양제넥스에 입사해 제조업 유통부문의 경영 노하우를 성공적으로 접목시키고 있다. 김 사장은 창업주의 손자이지만 직원들과 자주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즐기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다. 김경원(62) 삼남석유화학 사장은 전주 폴리에스테르 공장 설립때부터 중앙연구소 소장, 화성본부장, 삼양화성 사장 등 화학, 섬유, 폴리카보네이트 등을 두루 지낸 전문 경영인이다. 폴리에스테르 부문의 대가로 ‘폴리머 김’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김 사장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연구통’이다. 송창기(63) 삼양중기 사장은 인사관리분야에서 15년간 일해온 ‘인사통’이다. 총무부장, 인사부장, 관리본부장을 지냈다. 송 사장은 삼양중기에서 기계부문 4개사로의 분사와 주물사업부문 합작사 설립을 성공리에 추진했다. 박호진(59) 삼양화성 대표는 도쿄지점을 거쳐 전주공장에서 20년 동안 현장 경험을 쌓았다. 지난 3월 대표로 선임돼 사원간에 가족적인 유대감을 높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규한(58) ㈜삼양밀맥스 대표는 판매와 현장을 두루 거친 식품부문 전문가다. 경영과 마케팅 감각을 두루 갖췄고 비전팀을 만들어 내부 혁신활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변수식(55) 삼양데이타시스템 대표는 전사적자원관리(ERP)팀장,IT전략팀장, 경영혁신(PI)팀장 등 프로세스 이노베이션 업무를 주로 맡았다. 변 대표는 IT부문의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IT통’이다. 김상익(59) 삼양웰푸드 대표는 경리부, 삼양제넥스 경영지원팀장을 거치는 등 25년 동안 경리와 관리를 맡았다.2004년 대표로 선임돼 원칙과 현장을 중시하는 현장 밀착형 경영을 중시한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고침 서울신문 17일자 15면에 게재된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편에서‘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 서울대 법대교수’는 ‘송 전 사장의 손자’이기에 바로잡습니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일반인들에게 ‘삼양설탕’(현 ‘큐원설탕’)으로 익숙한 삼양사는 한국 근대경제사를 주도한 명문 기업이다. 호남 거부의 후예인 김연수(金秊洙) 창업주는 일제하인 1924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기업을 설립, 한국기업의 명맥을 이었다. 김 창업주는 형인 인촌(仁村) 김성수씨가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꾸려가도록 뒷받침했고, 여러 차례 재산을 털어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뒤에서 도왔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일제하에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친일인사로 선정하는 등 사후에 ‘친일’ 시비에 휘말리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근대 한국경제의 산증인인 김 창업주의 삶은 굴곡 많은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김 창업주는 1896년 10월1일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부친 김경중씨와 모친 장흥 고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형의 호인 인촌은 바로 두 형제가 태어난 동네 이름을 따온 것이다. 김 창업주의 부친은 1만 5000석 지기의 호남 최대 거부였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부친은 일제하에서 나라가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당시 저명한 사학자들을 몰래 불러 ‘조선사’를 17권이나 엮을 정도로 민족애가 투철했다는 게 삼양그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창업주는 어린 시절 외롭게 지냈다. 김 창업주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일찍 잃었다. 여기에다 한 명뿐인 형인 인촌이 큰아버지인 김기중씨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양자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어릴 적 김 창업주는 몸이 허약했다. 폐가 약했으며 위도 튼튼하지 못해 일찍이 폐와 소화기 계통의 질병으로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는 부모의 애를 끓게 했다. 이런 이유로 개구쟁이처럼 장난이 심하고 활발했던 인촌과는 달리 김 창업주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품을 지녔다. ●27세에 경영인으로 출발 김 창업주는 15세 되던 1910년 12월8일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박하진씨와 혼인을 맺었다. 결혼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인 최초로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922년 형의 권유로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전무와 상무에 취임, 경영인의 삶을 시작했다. 김 창업주는 고무신과 ‘태극성표’ 광목을 대히트시킴으로써 일본자본과 맞서는 최대의 민족회사를 일궜다. 집안 내력을 잘 아는 김재억 삼양사 상임감사는 “30년대 경성방직은 우리나라 금융거래 절반을 담당할 정도의 민족 최대 기업이었다.”고 말했다. 김 창업주는 또한 농촌재건을 위해 소작농을 협동농업 형태로 결합한 근대영농을 시작했다. 이를 발판으로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해 호남 일대의 소유농토에 대한 근대화 작업에 나섰다. 장성, 줄포, 고창, 명고, 신태인, 법성, 영광농장을 차례로 개설해 기업형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간척사업에도 눈을 돌려 손불농장과 해리농장의 2개 지역에 1070정보의 농토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상호가 삼양사(三養社)로 바뀌었다. 어느 날 한 작명가가 찾아와 ‘물 수’(水)를 ‘만인의 양식’이라는 뜻인 ‘기를 양’(養)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 창업주는 만주벌 개척에도 나섰다.5개 협동농장을 개설한 데 이어 봉천에 남만방적을 설립했다. 남만방적은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생산법인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으로 만주의 사업장들을 고스란히 놓고 철수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제당업으로 재기에 나서 해방공간을 겪으면서 반민특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 창업주는 한국 전쟁 이후 해체상태에 놓였던 삼양사 재건에 나섰다. 그는 재기의 발판으로 제당업과 한천제조업을 선택했다. 당시 설탕은 수입에 의존해온 대표적인 외화소비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울산 바닷가를 메워 그곳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건설했다. 그는 1956년 삼양을 제당으로 키우면서 주식회사 삼양사를 출범시켰다. 자신이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고, 사장에 3남인 상홍(83), 상무에 5남 상하(80)를 앉혔다.3남과 5남이 삼양사를 맡는 전통은 3세에도 그대로 이어져 삼양그룹은 현재 상홍씨의 장남 윤(53)씨와 상하씨의 장남 원(48)씨가 삼양사 회장과 사장을 맡고 있다. 둘째 아들들인 량(51)씨와 정(46)씨도 각각 삼양제넥스 사장과 삼남석유화학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당시 삼양사보다 수익률이 높았던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라는 별개의 회사로 독립시키고 맏아들 상준(작고)을 사장에 임명해 경영을 맡겼다.3공화국때 문교부장관과 5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차남 상협(작고)에게도 삼양염전의 지분 25%를 떼어주어 형제간 경영권을 일찌감치 교통정리했다. ●재계의 거목으로 김 창업주는 1962년 설립한 삼양수산을 통해 다양한 어종을 가공, 수출하는 등 한때 냉동선만 21척을 보유할 정도로 수산업에도 주력했다. 이처럼 제당과 수산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 한국 재계의 얼굴이 되었다. 경영이 본 궤도에 오르자 김 창업주는 전주방직을 인수, 삼양모방(주)을 설립했다. 이어 1969년 전주에 대단위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건설했다. 이로써 70년대 들어 삼양은 국내 초창기 산업의 중심이었던 제당으로 확고한 제조업체로의 변신을 이룩했다. 이 당시 삼양은 매출액에서나 기업선호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국내 정상급 기업으로 우뚝 섰다. 김 창업주는 사업에 투신한 지 만 53년이 되던 1975년 회장을 상홍에게, 사장에 상하를 임명하는 등 ‘2세경영’을 출범시키고 은퇴했다. 그의 나이 80세일 때였다. 그는 은퇴 후 농촌으로 돌아가 마지막 열정을 쏟다가 1979년 84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교육사업도 아낌없는 지원 그는 기업경영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운영기금을 출연한 것을 비롯해 양영회와 수당장학회를 설립,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문성환 삼양사 부사장은 “창업주는 두 재단을 통해 대학생 2만여명에게 대학등록금을 비롯해 하숙비, 책값, 소정의 용돈까지 장학금으로 대줬다.”고 회고했다. 이런 김 창업주의 혜택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덕수 경제부총리, 오세철 연세대 교수 등이 꼽힌다. 경성방직의 회계를 맡아 김 창업주를 도왔던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는 “수당(秀堂·김 창업주의 호)은 돈 쓰는 데도 일가견을 가진 사람으로 만금을 쓰면서도 기업경영에는 한 푼을 아꼈다.”고 그의 용전(用錢)철학을 전했다. 김 창업주는 경쟁회사에도 관대했던 묵묵한 성격의 경영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1966년 삼양의 경쟁회사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한국비료가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곤혹을 치렀다. 임원들이 ‘사카린 없는 삼양설탕’이라는 문구로 대대적인 광고전을 벌이자고 수차례 건의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는 그의 성품을 읽는 일화로 경영인들에게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방대한 혼맥…사회 각 분야와 사통팔달 김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아들로는 장남 상준(작고), 차남 상협(작고),3남 상홍(83),4남 상돈(81),5남 상하(80),6남 상철(70),7남 상응(작고) 등 7남과 장녀 상경(79), 차녀 상민(78),3녀 정애(75),4녀 정유(73),5녀 영숙(72), 막내 희경(66) 등 6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 가문의 혼맥은 정계·관계·학계·언론계·재계·교육계 등과 거미줄처럼 얽힌 방대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김 창업주의 성격이 소탈해 자식들에게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평범하고 무난한 결혼을 시켰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김재억 감사는 “창업주의 생활철학이 권세를 배격하는 것이어서 자식들이나 3세들의 결혼에도 사돈 될 집안의 내력과 상대방의 성실성을 먼저 봤다.”고 회고했다. 김 창업주는 특히 자녀들의 대부분은 중매결혼으로 짝지웠지만 사위와 며느리를 맞는 데서는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사위를 고를 때는 가문을 따지지 않고 사람됨됨이와 능력을 위주로 보았고, 며느리는 후덕한 집안 출신으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기를 원했다. 특히 사돈가의 위치를 보고 정혼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 그의 직접 사돈 가운데는 정관재계의 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김 창업주의 며느리들 가운데 위로 세 명은 이화여전 출신 등으로 당시의 김 창업주가 원했던 신여성들의 표본이 많았다. 반면 창업주의 형인 인촌 성수씨도 9남4녀를 두어 대가를 이뤘는데 장남인 상만(작고)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직계 자손들은 화려한 혼맥을 자랑하고 있다. 고려대 이사장이자 동아일보 전 회장인 장손 병관씨는 장남 재호(41·동아일보 대표이사 전무)씨를 이한동 전 총리의 차녀인 정원(38)씨와 결혼시켰고,2남 재열(37·제일모직 상무)씨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인 서현(32·제일모직 상무보)씨와 결혼했다. 김연수 창업주 자녀들의 혼맥을 살펴보면 장남 상준씨는 당시 집안과 각별하게 지내던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의 소개로 이뤄져 1943년 구영숙씨의 맏딸 연성(85)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상준씨는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조흥은행에 근무할 때였고 연성씨는 이화여전 음대를 졸업한 직후였다. 상준씨는 3명의 딸을 출가시켜 정·관·재계 인맥을 형성했다. 장녀 정원(62)씨의 부군은 고려대와 국가대표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선휘(68·삼양염업사부회장)씨다. 축구를 좋아하던 상준씨는 모교인 고려대 축구팀을 지원했는데, 이 일로 선휘씨가 상준씨 집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혼사가 맺어졌다. 차녀 정희(58)씨는 5공시절 당시 거물 정치인이었던 김진만씨의 맏며느리로 보내 동부그룹 회장인 김준기(64)씨를 사위로 맞았다.3녀 정림(57)씨는 전 문교장관 윤천주씨의 장남 대근(59)씨와 결혼했다. 대근씨는 현재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과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을 맡고 있다. 상준씨의 장남 병휘(60)씨는 한양대 자연과학대 자연과학부 수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차남 범(52)씨는 독신으로 지내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차남 상협씨는 해방 직후 고려대 부교수 시절, 의사 김준형씨의 2남3녀 가운데 맏딸 인숙(82)씨와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인숙씨도 니혼조시 대학을 나온 당시 보기 드문 일본 유학 신여성이었는데 상협씨의 도쿄제대 동창 부인의 소개로 만나 연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녀 명신(58)씨를 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65) 서울대 법대교수와 혼인시켰다.2녀 영신(56)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 성진(58)씨와 결혼했다. 외아들 한(52)씨는 메리츠증권 부회장으로 있다. 3남 상홍(83)씨는 구 치안본부 재직시절 수원갑부 차준담씨의 2남2녀 가운데 맏딸 부영(79)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영씨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이었다. 상홍씨는 2남2녀 가운데 장남 윤씨를 전 서울신문사 김종규 사장의 딸 유희(46)씨와 혼인시켜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과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됐다. 또 차남 량씨는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막내딸 영은(46)씨와 백년 가약을 맺었다. 영은씨의 오빠 장대환씨는 매일경제 신문 창업주 정진기씨의 사위로, 현재 매일경제신문 대표이사회장 인쇄인 겸 발행인과 현 매일경제TV 대표이사 회장이다. 장녀인 유주(56)씨를 사업가 윤주탁씨의 2남 영섭(59·고려대 상대교수)씨에게 시집 보내 윤주탁씨와 직접 사돈간인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과 연결되고 있다. 영섭씨의 남동생인 영식씨가 박 전 위원의 장녀 진아(48)씨와 결혼했다. 4남 상돈씨는 6·25 직후 김유황 전 광장㈜ 부사장의 딸 용옥(73)씨와 결혼했다. 상돈씨는 맏형인 상준씨의 중매로 장남 병진(52)씨를 축구협회 부회장과 축구대표팀 감독을 지낸 한흥기씨의 딸인 혜승(45)씨와 맺어줬다. 차남 영로(50)씨는 사업을 하던 정형식씨의 딸 은미(46)씨와 혼인했다. 외동딸 희진(45)씨는 전 대한항공 이사 오명석씨의 외아들 광희(49)씨에게 시집갔다. 광희씨는 전 나이스정보통신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5남 상하씨는 삼양사 설탕공장 설립관계로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1953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 바로 박상례(75)씨와 혼인을 맺었다. 상례씨는 공무원 출신인 박규원씨의 딸로 김 창업주의 친구가 중매를 섰다. 외동딸인 영난(44)씨를 송하철(45·주식회사 항소 사장)씨와 결혼시켜 송남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며느리로 보냈다. 장남 원씨를 배영화 경희어망 회장 딸인 주연(45)씨와 맺어 줬다. 차남 정씨는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딸인 혜원(39)씨와 결혼했다. 6남 상철(70)씨는 사업을 하던 우근호 씨의 딸 정명(63)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7남 상응(작고)씨는 공무원 생활을 했던 권오경씨의 5녀중 셋째딸 명자(53)씨와 결혼했다. 장녀 상경(79)씨는 아폴로박사 조경철씨와 결혼 후 이혼해 조서봉(필립), 조서만(조지)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차녀 상민(78)씨의 남편은 이두종(작고)씨로 활발하게 삼양사의 경영에 참여했다. 온양 지주의 아들로 자란 두종씨는 1956년 삼양사 과장으로 입사해 이 회사의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올랐다.1984년 회사를 떠난 뒤에도 삼양그룹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양영회와 수당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3녀 정애(75)씨는 교육계에 몸담았던 조종립씨의 아들 석(작고)씨와 결혼했다. 석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결혼 후인 57년 삼양사에 사원으로 입사, 총무부장·경리부장·이사·상무·대표이사 부사장을 거쳐 전 삼양제넥스 상임고문까지 역임했다. 4녀 정유(73)씨의 남편은 전 서울대 부총장인 김영국(작고)씨다. 그는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김덕창씨의 8남매 가운데 3남으로 인천이 낳은 천재로 불리었다. 이들은 김 창업주 친구의 소개로 결혼했다. 영국씨는 서울대 정치학과 총동창회장을 지낸 상하씨의 후배이자 매제인 셈이다. 5녀 영숙(72)씨는 미국인 스테푸친과 결혼, 딸 페기, 아들 프랭크를 두고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막내딸 희경(66)씨도 교육자였던 김종규씨의 아들 성완(68·삼양사 의약사업 고문)씨와 결혼,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성완씨는 미국 유타대학 석좌교수로 인공심장 분야의 권위자다. jrlee@seoul.co.kr ■ 창업주의 친일논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29일 친일인사인명사전 편찬을 앞두고 수록예정자 명단 3090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삼양사의 창업주 김연수씨도 포함됐다. 김씨는 전쟁협력 분야에서 ▲1939년 만주국 명예 총영사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적 이사장 ▲1940∼1945년 중추원 참의(자문위원)를 지냈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이에 대해 삼양그룹측은 대응을 일절 자제한 채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다만 그룹의 한 관계자는 “창업주가 일제의 압제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등 깜짝 놀랄 만하게 대항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일제의 폭거에 맞서 민족자본을 형성했다.”며 “후세에 역사가들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보다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창업주는 무죄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또 창업주는 창씨 개명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 창업주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는 일제시대 그의 행적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6부로 구성된 전기에는 4부 ‘고난의 시절’ 편에 일제에 협조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었던 고심의 일단들이 실려 있다. 김씨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통렬한 자기반성의 글을 실었다. 김 창업주는 반민특위에 검거돼 7개월간 수감됐지만 이런 반성의 자세가 참작됐는지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경성방직을 경영함에 강력히 일본자본과 싸웠고, 항상 한민족을 위한 경제적 기반확립에 노력했고, 경성방직의 상표를 태극기에서 모방한 것으로 보아 피고의 행위는 많이 참작할 곳이 있으며, 그 외의 관직 및 명예직은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피동적으로 맡은 것이라고 증명되며, 또 피고는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학생에게 원조를 해 그의 혜택을 본 자의 수는 현재 수백명에 달하는 것이니 이 점으로 피고가 남긴 공적은 크다고 할 것이며, 기타 증인의 증언을 통해 볼 때 피고를 단순히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jrlee@seoul.co.kr ■ 형 김성수와 동생 김연수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인촌(仁村) 김성수와 수당(秀堂) 김연수를 아는 주위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인촌과 수당은 호남갑부 김경중씨의 두 아들이었지만 성격은 딴판이었다. 수당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침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형 인촌은 활달하고 외향적이었다. 여기에 형제는 다섯살이나 터울이 져 어린 시절엔 서로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평생을 친한 형제로 지냈다. 인촌은 수당이 근대적 교육을 받도록 인도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일본으로 가게 해 중·고등학교와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도록 도왔다. 수당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일찍이 ‘기업인’이 될 것을 결심했다. 오사카의 공장지대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결단의 계기였다. 이처럼 수당의 행적은 형 인촌의 행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수당이 기업가로서 길을 걷는 데는 인촌이 설립하고 인수한 기업의 경영을 맡음으로써 시작됐다. 수당이 경영인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도 1922년 형이 운영하던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인을 맡고부터다. 이후 수당은 경영인으로서 성공하자 인촌을 적극 도왔다. 생전에 인촌은 수당이 없었으면 교육사업을 비롯한 자신의 활동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곧잘 술회했다. 수당은 언제나 인촌에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뜻을 펼치라고 말했다. 인촌이 설립한 고려중앙학원이나 고려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등 모두 동생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수당은 1940년대까지 고려중앙학원과 고려대에 기부한 재산이 연 평균 250만원에 이르렀는데, 이를 현 시가로 어림잡아 환산하면 1000억원(쌀값 기준)을 훨씬 넘는 액수다. 그러면서도 동생은 형이 하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돕기만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형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나는 재정적인 지원만 하면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형을 만날 때마다 “형님은 교육과 문화사업을 하세요. 저는 뒤에서 돈을 대리다.”라며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했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효성그룹 (1)-창업주 故조홍제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효성그룹 (1)-창업주 故조홍제 회장家

    효성의 입사 면접은 깐깐하기로 유명하다. 예컨대 ‘한강의 물 무게는 얼마나 되나, 대한민국 바퀴벌레의 총 수는.’등의 질문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대략, 약, 수준,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고 불확실한 답을 내놓는다면 효성에선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효성은 숫자에 관해 근거 없는 ‘적당주의’를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이는 효성 창업주인 고 만우 조홍제 회장의 경영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그는 어떤 사항이든 계수화해서 보고 받기를 좋아했으며, 그래야 납득을 했다. 만우 회장도 중요한 경영상의 결재를 할 때는 철저히 계수에 입각해서 처리했다. 특히 신규 사업은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마저 계산에 넣고 사업을 추진했을 정도다. 시쳇말로 “1년간 지급하는 로열티와 그 기술을 이용해 얻은 이익을 금액으로 계산해 향후 10년간의 수지계산서를 만들라.”고 한다면 요즘 실무진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것이다. 그러나 만우 회장은 40년전에 이를 당연하게 지시했으며, 당시 효성 실무진도 이에 익숙했었다. 그의 이같은 ‘계수 경영’은 그만의 독특한 성냥개비 계산법을 낳았다. 그가 계산하기 위해 손가락에 성냥개비를 끼우고 슬슬 돌릴라 치면 실무자들은 계산이 혹시 틀리지 않았을까 긴장하곤 했다고 한다. 그의 꼼꼼한 경영 스타일은 창업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효성의 주력 사업으로 훗날 나일론을 선택하기에 앞서 만우 회장은 공학과와 경제학과 출신의 엘리트 10여명을 뽑아 당시엔 생소한 기획부를 구성, 무려 2년간 20여종의 유망 업종을 검토하게 했다. 오늘날 효성의 제조업 전통과 실속 우선주의, 심사숙고형 기업 문화, 철저한 계산으로 돌다리도 두드리는 사업 풍토 등은 만우 회장이 효성에 남긴 유산들이다. 또 꼬장꼬장하고 대쪽같은 그의 성격은 효성을 늘 정치권과 거리를 두게 했으며, 생전에 2세들의 분가를 마무리한 것은 ‘돈 만큼은 가족이라도 철저해야 한다.’는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근 재계의 불미스러운 일련의 일들을 보면 만우 회장의 혜안이 놀랍기만하다. ●늦되고, 어리석은 만우(晩愚) 만우 회장은 모든 게 늦었다. 신학문을 접한 것이 17세였고, 고보(중·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약관(弱冠)을 앞둔 19세였다. 또 대학을 졸업한 것이 이립(而立·30세)이었으며, 사업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 불혹(不惑·40세)을 넘어서였다. 그리고 효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독자 사업을 시작한 것이 이순(耳順·60세)을 앞둔 56세였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는 스스로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으로 호를 ‘만우(晩愚)’로 지었다. 그러나 출발이 늦었을 뿐 그의 성취는 작지 않았다.1960년대 부실기업이었던 한국타이어와 대전피혁을 정상화시켰으며, 현재 나일론 세계 4위, 타이어코드 세계 1위인 동양나이론(현 효성)을 설립했다.70년대엔 효성금속과 효성기계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한때 총 24개 계열사의 재계 5위 그룹으로 성장시켰다.40∼50대를 받쳐 삼성 성장에 일조를 했던 만우는 56세의 늦은 나이에 창업, 불과 10년 만에 효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올려 놓은 것이다.1981년 포천이 뽑은 500대 기업 속엔 만우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된 효성과 삼성이 나란히 포함됐다. ●진정한 가장은 애처가 늦었던 만우 회장이 빠른 것도 있었다. 그는 15세 때 집안 뜻에 따라 진주 하씨가의 차녀 정옥(작고)씨와 결혼했다. 당시 하씨가는 진주에서 쌀 2000섬 규모의 부호로 개화한 집안이었다. 부인 정옥씨는 신학문을 깨친 신식 여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교 생활이 몸에 밴 만우였지만 아내 사랑만큼은 각별했다고 한다. 만우는 무슨 일이든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엔 ‘팔불출’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이었다. 회사에 있다가도 아내가 아프다고 하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열 일을 다 제쳐놓고 들어왔다. 또 틈을 내 여행도 같이 자주 다녔다. 사업에서 물러났을 때엔 매일 아침 아내와 함께 창경원 산책을 취미로 삼았으며, 함께 시장에 나가 장을 보는 것도 즐겼다. 특히 만우 자신도 말년에 몸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아내의 병수발을 자식 몫으로 두지 않았다.78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만우는 아내의 상청(혼백을 모시는 제단을 마련하는 일) 돌보는 일을 1년간 직접 했다. 당시 만우 자신도 간병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던 심한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다. 만우는 사람을 고를 때도 이런 점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사람을 쓸 때 세가지를 봤다. 첫째가 반골 유무, 둘째가 지론 출중이며 셋째가 진정가장(眞正家長)이었다. 반골 유무와 지론 출중은 누구든지 고려할 만한 요소이겠지만 진정 가장은 꽤 이채롭다. 만우는 가정이 제대로 서야 사회와 국가가 제대로 선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 중에 바람을 피우거나, 첩을 얻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내치라고 했다. 실제로 부장급의 한 직원은 여자 문제로 이혼을 하게 되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가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회사를 어떻게 다스리겠나.”이것이 만우의 생각이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동업 만우 회장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당시 자금난을 겪고 있던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에게 자금을 빌려준 계기로 동업을 시작했다. 만우 회장은 어린 시절 호암(고 이병철 회장의 호)의 친형인 병각씨와 지기여서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만우와 호암의 동업은 사실상 삼성이라는 대그룹의 출발점이었다. 고 이 회장의 기획력과 만우 회장의 꼼꼼한 일처리는 자산규모 1700만원의 삼성물산을 설립 3년 만에 48억원이라는 순이익을 올리게 했다. 삼성물산의 성공은 제일제당(현 CJ그룹)과 제일모직 등의 제조업 진출로 이어졌다. 특히 제일모직은 만우 회장이 자금 마련부터 기계설비 발주, 기술 숙련 등 모든 과정을 진두 지휘했다. 제일모직의 당시 ‘골덴덱스’는 영국제와 마카오 복지를 대체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렇듯 조·이 투톱 체제는 불과 10년 만에 삼성을 명실공히 한국 제일의 재벌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 회장은 돌연 만우 회장에게 동업 청산을 요구했으며, 만우도 ‘이쯤에서 재산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분 문제에 대한 의견 조율이 안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점차 깊어갔다. 이 과정에서 만우는 4·19와 5·16 군사 쿠데타로 이어진 급변하는 정국에서 삼성 대표로 부정 축재자라는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정국이 점차 안정되면서 호암과 만우는 다시 재산 분배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옳다, 그르다 싸우기만 하면 자기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만우는 결국 3억원을 받는 것으로 삼성과의 모든 정리를 마무리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56세였다.15년간 대주주이자 경영인으로서 삼성을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키우는 데 일조를 했지만 그 ‘끝’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만우는 ‘나의 회고’에서 당시 이 결정을 이렇게 밝혔다.“오늘날 7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수많은 어려운 결단 가운데서도 가장 현명한 결단이 아니었나싶다.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분배받을 재산에만 연연했더라면 내 독자사업은 시작도 못해보고, 재산은 재산대로 찾지 못한 채 끝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만우와 호암의 결별에도 양가의 인연은 대(代)를 이어 지속됐다. 만우 회장의 장남인 조석래 효성 회장과 호암 회장의 차남 고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다. 또 조 회장의 부인인 송광자(61) 여사와 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는 서울대 미대 동창이다. 3세로 내려오면 인연은 더 깊고 다양해진다. 조 회장 차남인 조현문(36) 효성 전무와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는 친구 사이다. 장남인 조현준(37) 부사장과 이 상무는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다. 삼성가인 이재현 CJ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의 아들인 김재열(이건희 회장 사위) 제일모직 상무 등도 조 회장가(家)의 3형제(현준·현문·현상)와 잘 어울린다. 조 부사장은 “같은 또래인 데다 어린 시절부터 잘 어울려 요즘에도 운동 모임을 자주 갖는다.”고 했다. ●사돈들의 활약 효성은 재벌가 가운데 사돈들의 활약이 유달리 두드러진다. 특히 만우 회장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아들 후견인의 역할을 사돈들에게 맡겼다. 장남인 조석래(70) 회장의 장인인 송인상(91) 한국능률협회 회장은 만우의 지기이자 조 회장의 후견인이었다. 송 회장은 재무부 장관과 한국수출입 은행장을 두루 거친 경제계의 거물로 조씨가와 사돈을 맺기 전부터 만우와 친분이 두터웠다.78년 만우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엔 사위를 도우며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송 회장은 80년부터 16년간 동양나이론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으며, 지금은 효성 고문으로 있다. 차남인 조양래(68) 한국타이어 회장에겐 처남들의 경영 참여가 눈에 뛴다. 외환은행장을 지낸 손위 처남 홍용희씨가 고문으로 활약했으며, 또 다른 손위 처남인 홍건희 한국타이어 부회장도 경영에 참여할 정도로 한국타이어는 한때 ‘조·홍’ 공동 경영체제를 이뤘다. 삼남 조욱래(56) 동성개발 회장도 장인인 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의 경영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만우 회장은 77년 대전피혁을 28세에 불과한 욱래 회장에게 맡기고 난 뒤, 사돈인 김종대 전 농림부 장관에게 아들의 뒷일을 맡겼다. 경험이 부족한 아들의 단점을 김 전 장관에게 보완해 달라는 뜻에서다. 김 전 장관은 회장직을 맡아 경영에 나섰다. ●양말 빠는 회장님 만우 회장은 자식들이 혹시나 ‘부잣집 아들 병’에 걸릴 것을 몹시 경계했다. 이 때문에 일부러 엄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확실한 경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 어릴 때부터 용돈 예산을 짜게 했다. 또 아들들이 유학을 떠날 때는 유학 기간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최소 경비를 한꺼번에 쥐어주며 돈이 남든지, 모자라든지 간에 더 이상의 용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덕분에 2세들은 유학 시절에 툭하면 접시 닦이를 해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나 만우가 늘 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중학교에 다니던 양래가 영어책을 잃어버려 난감해 할 때 친구에게 그 영어책을 빌려오게 한 뒤, 밤새 직접 필사를 했다. 또 장남인 석래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사업차 방문한 만우는 장남의 하숙집에 널려 있던 양말을 깨끗이 빨아 놓을 정도로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는 공석에선 자식이라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선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선친은 자식을 키운다고 할까, 믿어준다고 할까 하는 점이 굉장히 강해요. 당시 일반적인 가정과 달리 아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하고, 자식들의 결정을 무척 존중해 주셨습니다.”실제로 만우 회장은 조 회장이 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하기를 바랬지만, 공학을 전공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만우는 “재산이라는 것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다가 들어오기도 한다. 자식에게 재산보다는 스스로 일해서 생활해 나갈수 있는 능력을 꼭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화려하게 뻗은 2세 혼맥 조씨가(家)의 혼맥은 여느 재벌가 못지않게 사통팔달로 뻗어 있다. 전직 대통령가(家) 뿐 아니라 정·관·재계 골고루 인연이 닿아 있다. 만우와 부인 하 여사는 슬하에 3남 2녀를 뒀다. 장녀와 차녀인 명숙(작고)씨와 명률(78)씨는 만우가 고향인 함안 군북에 있을 때, 인근 대지주 집안에 시집보냈다. 장녀 명숙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진양 대지주인 허정호(80)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시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 의대) 학생이었던 정호씨는 신한병원 원장을 지냈다. 둘째 딸 명률씨는 산청 대지주인 권동혁가(家)의 장남인 병규(80)씨와 인연을 맺었다. 병규씨는 한때 효성건설 회장을 역임했다. 효성의 혼맥은 장남인 조석래 회장의 결혼으로 정·재계 중심부로 들어간다. 학업 때문에 결혼이 늦은 조 회장은 그의 나이 32세 때, 송인상 회장의 3녀 광자씨를 평생의 배필로 맞아들였다. 조 회장은 처가를 통해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과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과 동서지간이 된다. 또 신 전 회장가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연결되며, 이 회장가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연이 닿아 있다. 차남인 조양래 회장은 66년 지인의 소개로 법조계 원로인 홍긍식 전 변호사협회 회장의 차녀인 문자(64)씨와 혼례를 치렀다. 조 회장은 이명박 서울시장과 사돈지간이다.3남인 조욱래 회장은 경기여고 교장인 손영경씨의 중매로 김종대 전 농림부 장관의 딸인 김은주(50)씨와 결혼했다. 김 전 장관은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의 부친인 고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의 처남이기도 하다. 조씨가의 혼맥은 방계도 만만치 않다. 만우 회장의 동생인 고 조성제 대전피혁 사장은 5남 3녀를 통해 관·재계의 명망가를 사돈으로 맞아들였다.3남 경래(73)씨는 홍재선 전 전경련 회장의 딸 애수(68)씨와 결혼했으며,4남 익래(70)씨는 원용필씨의 딸 정선(68)씨와 결혼했다. 원용필씨는 원용석 전 경제기획원 장관의 친형이다. 장녀 장숙(68)씨는 정종철 전 서울시장의 아들 창순(70)씨와 결혼했다. golders@seoul.co.kr ■ 조석래 회장의 ‘명문 처가’ 조석래(70) 효성 회장의 처가인 송인상(91·효성 고문) 한국능률협회 회장의 가계도를 들여다보면 화려하다는 단어가 부족할 정도다. 송씨가(家)는 고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가문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한국 상류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가와 사돈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관·재·법조계에 이르기까지 ‘그물망 혼맥’으로 촘촘히 엮여 있다. 송 회장 본인도 일제시대의 식산은행을 시작으로 재무부 이재국장과 한국은행 부총재, 부흥부장관, 재무부 장관, 룩셈부르크 대사,EC대사, 한국수출입은행장, 동양나이론(현 효성) 회장 등 관·재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슬하에 1남4녀를 둔 송 회장과 최연순(91) 여사는 딸을 모두 국내 대표 집안에 시집보냈다. 특히 손주들의 통혼을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집안과도 연결된다. 장녀 송원자(66)씨는 이봉서(69) 전 상공부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이 전 장관은 경기고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나왔으며, 현재 부동산임대업체인 단암산업 회장이다. 이 전 장관의 부친 고 이필석옹은 상업은행장과 국제화재 회장을 지냈다. 이 전 장관의 3녀인 혜영(33)씨는 1997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장남 정연(42)씨와 화촉을 밝혔다. 두 사람은 정연씨의 친구 소개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혜영씨는 숙명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정연씨는 현재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 회장의 차녀 길자(63)씨는 신명수(64) 전 신동방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 전 회장과 길자씨는 2남 1녀를 뒀으며, 장녀인 정화(36)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40)씨와 결혼했다. 재헌씨는 미국 조지타운대를 나와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한나라당 이 전 총재와 노 전 대통령은 송 회장가(家)를 통해 ‘사돈의 사돈’인 셈이다. 이렇게 가지치기를 하게 되면 송 회장가는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김승연 한화 회장과도 이어진다. 3녀 송광자(61)씨는 조 회장과 67년 결혼해 현준-현문-현상 3형제를 뒀다.4녀 송진주(59)씨는 주관엽(61)씨와 혼인했다. 진주씨는 서울대와 예일대(박사)를 거쳐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golders@seoul.co.kr ■ ‘예산 샌님’ 조홍제 前회장 만우 조홍제 전 회장의 별명은 샌님과 구두쇠였다. 만우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그냥 샌님도 아닌 ‘예산 샌님’이라 불렀다. 미리 예산을 꼼꼼하게 짜놓고 융통성 없이 그대로 집행하는 데서 비롯됐다. 당시 도움을 받기 위해 만우 회장의 사무실 문턱을 넘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만우가 배정해 두었던 예산이 바닥나기 일쑤였다. 그러면 만우는 “올해 예산이 떨어졌으니까 내년에 보자.”고 했다고 한다. 만우의 먼친척 동생인 조영제씨의 회고는 이렇다.“사회봉사도 회사 경영과 마찬가지로 예산 집행을 한다 이겁니다. 요즘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40년전에 그런 경비를 예산짜서 집행하는 기업가가 대한민국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만우는 구두쇠로도 유명했다. 그냥 구두쇠가 아닌 ‘통 큰’ 구두쇠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신발장에 남은 것은 밑창이 다 닳은 구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화다. 그는 내의도 해진 것을 기워입었으며, 양복 역시 다 떨어져 못 입게 되기전까지 새 양복을 맞추는 법이 없었다. 그의 근검절약 정신은 가족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줄 때는 늘 빠듯하게 줘 낭비하는 버릇을 갖지 않게 했으며, 손자에게 주는 세뱃돈도 천원짜리 한 장으로 때우곤 했다. 만우는 자신이 먹고, 쓰고, 입는 데에는 한없이 검소했지만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일엔 수십억원을 내놓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쓸 때는 쓰고, 쓰지 않을 때는 쓰지 않는, 그런 구두쇠였다. 만우가 돈을 아끼지 않은 곳은 교육 사업이었다. 대학시절 은사 권유로 교수가 될까 했던 만우는 1950년대부터 영남장학회를 통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으며, 고향 함안군의 몇몇 학교에 시설을 마련해 주었다.76년엔 운영 부실로 재정난에 빠진 동양학원의 이사장을 맡아 대규모 채무를 해결해줬으며, 학습환경 개선을 위해 당시로서는 거금인 25억원을 내놓았다. “나는 학교에서 돈 한푼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선생님들은 오직 좋은 교육만을 해주시기 바랍니다.”만우 회장이 이사장으로서 원했던 유일한 소망이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학부·학과 올 가이드] (3) 공학계열

    [학부·학과 올 가이드] (3) 공학계열

    공학과 과학기술은 국가경쟁력의 핵심이자 미래 성장의 원동력이다. 그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는 학문이 공학이다. 공학계열은 한때 이공계 위기론으로 우수한 학생들로부터 외면받기도 했다. 하지만 취업률은 다른 분야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공학의 발전 가능성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공학도의 미래는 밝다. 다양한 학과가 있는 만큼 전공하려는 학과의 교과목을 미리 파악한 뒤, 공부하는 게 현명하다. ●진로 다양한 응용학문 인문학부나 순수 자연과학과 달리 일상생활을 비롯, 산업에 바로 활용될 수 있는 공업생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인재육성을 목표로 하는 응용 학문분야다. 예를 들어 화학과에서는 새로운 물질의 합성, 새로운 화학반응의 발견, 화학현상 등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화학공학과에서는 주어진 물질의 합성이나 화학적 변화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수행하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공학계열은 건축, 토목·도시, 교통·운송, 기계·금속, 전기·전자, 정밀·에너지, 소재·재료, 컴퓨터·통신, 산업, 화학 등으로 구성돼 있다. 실생활에 활용되는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라면 공학계열 진학을 고려할 만하다. 어릴 때부터 라디오나 카세트 테이프,TV 등 고장난 전자기기 고치기에 관심이 많았거나 기계 다루기나 기계의 작동원리 등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 공학계열 진학이 적성에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공학의 기본이 되는 수학과 과학을 잘하는 학생이라면 유리하다. 졸업 후 진로는 다양하다. 적지않은 학부 졸업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기업체나 전공관련 연구소 연구원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 취업에도 석사자격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무를 배우는 전문대학 공학계열에 진학한다면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 산업현장으로 곧바로 진출할 수 있다. 물론 4년제 대학에 편입해 공부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건축·토목 공학 구조·설계·시공 공학의 기초이론을 토대로 이를 건물을 만드는 데 응용하는 ‘건축 분야’와 그 외의 구조물을 만드는 데 응용하는 ‘토목 분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건축 분야는 설계에 좀 더 중점을 두는 건축학과와 시공에 중점을 두는 건축공학과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건축학과나 건축공학은 모두 건물을 짓기 위해 필요한 건축구조, 건축설계, 건축시공을 배운다. 예전에는 건축학과나 건축공학과가 큰 구별없이 통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건축설계 분야를 중점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건축학과가 5년제로 분리되는 추세다. 토목공학과에서는 건물을 제외한 도로, 철도, 교량, 터널, 항만, 댐 등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사업에 필요한 이론과 기술을 배운다. 토목공학은 일반 건축보다 주위환경을 더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교량은 물의 흐름, 항만은 바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만큼 이러한 주변 환경에 대한 지질학·수리학·해양학 등의 지식이 요망된다. 이들 관련학과를 졸업하면 건축목공 산업기사, 건축설계사, 건축설비기사, 건축일반시공 산업기사, 실내건축기사, 목재창호산업기사 자격증 등을 취득할 수 있다. 진출 분야는 설계·시공회사나 공기업은 물론 기술직 공무원 등 다양하다. 특히 감정평가사와 같은 자격증을 취득, 은행·보험회사 등의 금융회사에서 부동산 평가업무를 볼 수도 있다. ●기계공학 기계 및 기구의 설계·제작에 응용할 수 있는 학문 분야다. 물리학의 동역학, 유체역학, 재료역학, 열역학 등의 4가지 역학과 수학을 기본으로 하여 기계나 구조물의 설계를 다루는 설계공학, 설계한 대상을 제작하는 기계제작, 에너지를 이용, 동력을 얻는 동력공학 등의 영역이 있다. 로봇이나 기계장치를 제어하는 제어공학도 있다. 관련 학과로는 기계공학의 기본이론을 토대로 하는 기계공학과, 조선공학과, 항공공학과, 기전공학과(기계와 전자가 결합한 전공) 등이 있다. 기계공학과의 경우, 자동차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기계 뿐만 아니라 생산기계, 수송기계 등 산업기계들을 포함, 이들을 설계, 가공, 생산하고 자동화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배운다. 조선(선박)공학과에서는 기계공학의 기본 이론을 토대로 선박설계, 건조와 해상에서의 이동을 연구한다. 이들 학과에 진학하려면 무엇보다 수학을 잘해야 한다. 복잡한 기계와 장치를 해석하고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응용범위가 광범위한 만큼 기계, 전기, 전자 등 관련 분야에 흥미가 갖고 주의력과 탐구심도 있다면 도전할 만하다. 기계공학 관련 학과를 졸업하면 건설기계기사, 사출금형 설계기사, 프레스 금형산업기사, 기계설계 산업기사, 농기계기사, 용접기사, 자동차 검사기사, 자동차 정비기사, 정밀측정기사, 철도차량기사 등의 자격을 딸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자동차산업, 항공우주산업, 환경 및 에너지 관련 기업체에서 일할 수 있다. 전자·정보통신산업, 신에너지 등의 기업체 취직도 가능하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공학계열의 인기학과는? 이공계가 ‘찬밥’ 신세라지만 공학 계열은 비교적 수험생들의 선호도가 높은 분야이다. 특히 건축(공)학이나 정보기술(IT) 관련 전공인 컴퓨터, 전자정보통신공학의 경우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건축(공)학 전공은 가장 인기있는 전공으로 꼽힌다. 취업이 비교적 잘 되는 서울 지역 상위권대에 지원하려면 수능 성적이 상위 2등급(7%)은 되어야 한다. 지방 국공립대의 경우에도 최소 3등급(11%) 이내에 들어야 유리하다. 건축(공)학 전공은 대학에 따라 다르지만 건축학과나 건축공학과로 구분된다. 건축학과는 4년제, 건축공학과는 5년제다. 건축학과의 경우 인테리어나 디자인 분야가 가미된 곳이 많다. 이른바 일부 상위권 대학을 제외하면 취업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 대학 취업 담당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학비 부담은 다른 공학 계열 전공에 비해 크다. 공학 계열 전공의 한 학기 등록금은 400만원 안팎이다. 건축(공)학 전공의 경우 이보다 조금 높고, 건축공학을 전공한다면 1년을 더 다녀야 하는 부담이 있다. 컴퓨터나 전자정보통신공학 전공 등 IT 계열도 꾸준히 인기다. 건축(공)학 전공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수능 3등급 이상의 성적이 필요하다. 건축(공)학에 비하면 취업은 잘 되는 편이다. 반면 워낙 발전 속도가 빨라 나중에 취업했을 때 한 곳에 오래 근무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인기가 없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취업이나 10년 이후를 생각하면 알짜배기 학과도 적지 않다. 토목학과는 대표적이다. 건축(공)학과와 배우는 것은 거의 비슷하지만 이름 때문에 외면을 받고 있다. 건축(공)학과처럼 졸업하면 관련 전문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진다. 실제 건설업체에서는 건축(공)학과 토목공학 출신을 모두 비중 있게 대우한다. 그러나 실제 대학에 입학할 때 두 전공 사이에는 수능 점수로 15∼20점 차이가 난다. 건축(공)학은 이른바 상위권 학과에, 토목공학은 중위권 학과로 분류된다. 때문에 건축(공)학에 지원할 만한 실력이 안 된다면 토목공학을 노려보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 짧은 신생 학과에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최근 5년 전부터 등장하고 있는 나노공학이나 신소재 관련 학과의 경우 경쟁률도 낮고 중위권에 속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높다. 환경공학과도 지금은 인지도가 낮아 학생들의 지원이 적은 편이지만 충분히 미래를 걸어볼 만하다. 공학 계열 전공에서는 수능 성적의 당락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다. 반영 영역은 수리와 외국어(영어), 과학탐구 등 세 영역만 반영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고려대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포항공대 등은 언어 영역을 포함해 네 영역을 반영한다. 지방 국립대의 경우 전북대와 강원대, 제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공립대가 올해부터 언어를 반영, 모두 네 영역을 반영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학별고사는 한양대가 건축과 컴퓨터공학 등 인기학과에 한해 논술고사를 치른다. 면접은 서울 지역의 경우 서울대만 심층면접을 실시한다. ■ 도움말 종로학원 평가연구실 남윤곤 팀장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건축공학과 출신이 말하는 ‘현업’ “친화력이 중요합니다.” 현대건설 건축공모부 안계현(30·여)씨는 건축 분야 업무에서 가장 필요한 자질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꼽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해결해야 하는 업무가 많기 때문이다. 한양대 건축공학과(94학번)를 졸업,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그에게 건축 관련 업무에 대한 궁금증을 물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착공 서류를 준비하고, 하도급 업체를 선정·관리하는 등 공사 전반적인 관리 업무를 하고 있다. 입사할 때는 구조설계 분야를 맡았다. 건물의 뼈대를 설계하고 구조 안전과 관련된 설계 업무, 현장에 맞게 설계도를 검토하고 고치는 등의 일이다. 잠깐 건축 현장에 나가는 시공 업무를 맡아 작업 공정과 일정을 관리하고 조율하는 일도 해봤다. ▶건축 전공자의 취업 방향은. -건축과라고 하면 대부분 ‘설계’ 업무라는 막연한 밑그림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 설계사무소에 취업하는 등 설계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는 전체의 10∼20%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일반 종합건설업체에 취업한다. 건설회사의 경우 설계 외에도 다양한 업무를 맡는다. 리모델링이나 부동산개발팀 등에서도 건축 전공자들을 선호한다. 건축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사업성과 수익성을 검토하는 업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필요한 자질이 있다면. -하도급 업체와 함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 유리하다. 사람 관계를 중시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실제 공사 현장에서도 사람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가 중요하다. 융통성과 임기응변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건설 현장은 날씨나 돌발상황 등 항상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경험이 중요하지만 소심하지 않게 소신껏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것도 능력이다. ▶어려운 점이 있다면. -건축은 다른 분야와는 달리 경험에 근거한 학문의 성격이 짙다. 실제 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예를 들어 아파트만 짓던 사람이 컨벤션센터에 대해 잘 알기는 어렵다. 때문에 학문이나 종사자들의 기질 자체가 보수적인 편이다. ▶취업 후 장기적인 진로는.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40,50대에도 전문성만 있으면 가치를 발한다.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하면 중소 건설업체에서 새로 둥지를 틀거나 하도급 업체를 창업하기도 한다. ▶건축 전공 지망생에게 조언한다면. -전체적인 관리, 매니지먼트 개념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어디에 취업하든 다양한 분야에서 프로젝트 형태로 업무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기본은 공학이지만 관리 분야까지 다룰 줄 알아야 유리하다. 멀리 내다보고 경영대학원(MBA)까지 노려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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