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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前대통령 국가장] YS에 대한 세대별 이미지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대해 국민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세대별로 어떻게 다를까. 지난 22일 서거 후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 이력과 리더십이 새롭게 부각된 가운데 그에 대해 세대별로 연상하는 각각의 키워드를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종합해 봤다.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갓(God·신)영삼 시리즈’, ‘YS는 못말려’ 등 생전 김 전 대통령의 직설 화법을 잘 나타내는 어록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를 퍼나르는 사람들은 주로 그의 재임기에 초·중·고교를 다녔던 청년 세대다.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 못 간다”라고 했던 일화 등을 퍼나르며 ‘사이다’(자신의 감정 등을 속시원하게 대신 해 주는 말), ‘패기갑(甲)’ 등 찬사를 보내고 있다. 회사원 전모(30)씨는 “어록이나 조선총독부 철거 등의 행보를 보면 ‘사이다’이지만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의 원인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공(功)과 과(過)가 ‘반반’인 인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총학생회 선거를 맞아 대학들의 ‘선거 공백’으로 분향소 설치가 미진한 가운데 최근 고려대 커뮤니티 ‘고파스’ 등에는 분향소 설치를 촉구하는 글 등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청년 세대에게는 YS가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마치 ‘위인전 속 인물’로 느껴지는 시대적 거리감도 있었다. 회사원 김슬기(29·여)씨는 “책상에다 ‘나는 대통령이 된다’를 붙이고는 커서 진짜 대통령이 된 의지의 사나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위인전 속 인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임기 말인 1997년 정부가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을 당시 20~30대였던 중장년들에게 YS는 국내 외환위기로 상징되는 경제적 빙하기와 뗄 수 없는 인물로 각인돼 있다. 당시 군대를 제대해 갓 복학했던 회사원 김모(41)씨도 마찬가지다. 김씨는 “학교 선배들이 대기업에 합격해 입사를 기다리다 갑자기 취소돼 좌절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 바람에 취업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한턱 쏘는 훈훈한 미담 대신, 오히려 입사 취소된 선배들에게 후배들이 위로의 술을 사줘야 했던 살풍경한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IMF 사태가 전적으로 YS 때문은 아니지만, 일정 정도의 책임은 있다고 본다”고 평했다. 주부 김모(50)씨도 “당시는 엄마들끼리 ‘누구 아빠, 회사 갔어요?’라고 묻는 게 민망할 만큼 실직 가장이 많았던 시기”라며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한 시대가 비로소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노년층에게 김 전 대통령은 ‘영원한 민주화 투사’다.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트렌치코트와 중절모 차림의 노신사들이 많았다. 분향소 설치 첫날인 23일 조문을 하러 1시간 30분 거리를 달려왔다는 허철행(78·경기 평택)씨는 “나는 경상도 출신도 아니고 개인적인 연고도 없지만 젊은 시절부터 줄곧 존경해 왔다”며 “신군부에 맞서 23일간의 단식 투쟁도 마다하지 않던 대쪽 같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같은 날 분향소를 찾은 강대성(65·건축업)씨는 “본인이 남긴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말을 평생 온몸으로 실천해 온 분”이라며 “하나회 척결이나 금융실명제 실시 등 그분의 사나이다운 면모가 없었으면 오늘날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라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국회엔 검은색 대형 애도 현수막… 지방 200여곳 6만여명 조문

    국회엔 검은색 대형 애도 현수막… 지방 200여곳 6만여명 조문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24일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정·재계 주요 인사와 일반 시민의 추모 행렬이 사흘째 계속되며 ‘문전성시’를 이뤘다. 저마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그의 정신을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까지 사흘간 서울대병원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총 2만여명을 훌쩍 넘겼다. 홍준표 경남지사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국가 개혁을 하신 분인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많은 국민이 비난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며 “새롭게 다시 한번 재조명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과거 검사로 활약하며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칭까지 붙었던 홍 지사는 1996년 김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한 ‘YS키즈’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 김 전 대통령과 결별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홍사덕·이철 의원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창당했던 이기택 전 의원도 빈소를 찾아 유족을 위로했다. 이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오늘의 이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데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가장 탁월한 공을 세운 분”이라며 “이분의 민주주의 정신을 따라서 이 나라가 더욱 성숙한 국가로 발전돼 나가길 빈다”고 말했다. ●김기춘 “민주화 과업 이룩한 역사적인 국가원수” 안희정 충남지사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를 잃어 매우 애통하게 생각한다”며 “우리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야 할 책무가 맡겨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조문록에 ‘고인께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계실 때, 저는 이제 막 민주화 운동에 합류한 꼬마 대학생이었습니다. 고인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 삽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1992년 14대 대선을 이틀 앞두고 부산 초원복집에서 지역 기관장들과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하며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를 외쳤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유족을 위로하면서 한동안 빈소에 머물렀다. 김 전 비서실장은 “김 대통령께서는 산업화 토양 위해서 민주화의 역사적 과업을 이룩하신 역사적인 국가원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손학규 전 새정치연합 상임고문 그리고 ’상도동계’ 김수한 전 국회의장,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도 사흘째 빈소를 지켰다. 재계에서는 손경식 CJ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이 발걸음을 했다. 손 회장은 “고인은 우리나라 민주화와 금융실명제 등 선진 제도를 도입한 훌륭한 지도자”라며 애도를 표했다.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는 ‘일본 국민과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 깊이 조의를 표한다’라고 조문록에 쓴 뒤 “큰 위인을 잃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애써 슬픔을 참아가며 문상객을 맞이했다. 차남인 현철씨는 아침 일찍 나와 빈소를 지키며 문상객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가며 예를 표했다. 이어 오전 11시쯤 휠체어를 탄 채 빈소에 등장한 손명순 여사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슬퍼했다. 손 여사는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4시간가량 빈소를 지켰다. 김 전 대통령의 처남 손성환(82)씨는 빈소를 찾아 “새해마다 상도동에서 세배를 해서 이번에도 가게 될 줄 알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 전 대통령과 크고 작은 인연을 가진 시민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정수선(61·여)씨는 태극기에 싼 액자를 소중히 안은 채 장례식장을 찾아 “1970년 부산의 한 선거 유세장에서 김 전 대통령을 만나 사진에 사인을 받았는데 그것을 액자에 넣고 태극기에 싸서 여태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정씨가 “꼭 대통령이 되세요”라고 소리치니 김 전 대통령이 “꼬맹이가 귀엽다”며 사인을 해줬다는 것이다. 정씨는 “살아 계셨을 때 다시 한번 직접 뵙고 싶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이렇게 찾아왔다”며 눈물을 보였다.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주범 김용남씨도 빈소 찾아 일명 ‘용팔이 사건’으로 알려진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의 주범인 김용남(64)씨도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았다.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은 김씨를 만난 뒤 “(김씨가) 목사가 됐다더라. 조문을 길게 하진 않았으나 기도하고 묵념을 오래 했다”고 전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에 마련된 정부 대표 분향소에는 이종걸 원내대표를 비롯한 새정치연합 의원 30여명은 국회 분향소를 찾아 단체로 헌화와 분향을 했다. 정부 분향소가 위치한 국회 본관 전면에는 ‘근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삼가 애도합니다’라고 적힌 검은색 대형 현수막도 새로 내걸려 한층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추모가 이뤄졌다. 전국 자치단체에 설치된 200여곳의 분향소에도 이날 오후 6시 현재 6만명이 넘는 조문객이 방문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를 표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거제시 대계마을 생가 옆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사흘 동안 3000여명이 방문했다. 이곳 분향소에는 김 전 대통령이 졸업한 장목초등학교 재학생 67명 전원이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거제가 지역구인 김한표 새누리당 의원도 “1990년대부터 김 전 대통령의 경호 담당으로 인연을 맺어 왔다”며 하루 종일 분향소를 지켜 눈길을 끌었다.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서는 동교동계(김대중 전 대통령 가신 그룹) 권노갑·김옥두·이훈평 전 의원과 상도동계 정병국 의원, 김덕룡·박희부 전 의원 등이 상주를 자처하며 조문객을 맞았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도 상도동계가 함께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조문을 받으며 품앗이한 전례가 있다. ●반기문 “국제사회 존경받는 나라 노력” 해외 주요 도시에 마련된 분향소에서도 추모 행렬은 계속됐다. 주한 미국대사 출신인 성 김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겸 부차관보는 23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소재 주미대사관에 마련된 분향소에 미국 정부 대표 자격으로 찾아 조문을 했다. 김 부차관보는 헌화와 묵념을 한 뒤 “우리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한 김 전 대통령을 매우 존경한다”며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이 민주주의로 기적적인 변모를 하는 데 가장 중심적 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뉴욕 대한민국 유엔대표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고인의 뜻을 따라 대한민국이 잘 살고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정부는 해외 주재 우리 공관에 분향소를 마련해 공관원들과 교민들이 찾을 수 있도록 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전국 중구청장들 대구 중구에 모인다

    7개 특별·광역시의 중심구 단체장들이 26일 대구에서 모인다. 올해로 15년째, 횟수로는 27번째를 맞는 전국 대도시 중심구 구청장협의회가 열린다. 서울·부산·대구·인천·대전·울산 중구, 광주 동구는 공통으로 도심 공동화 현상을 겪고, 교통 문제를 안고 있다. 공통의 문제점을 토론하고 대응 방안을 찾자면서 ‘중구’ 구청장들은 1996년 6월부터 매년 1~2차례 모임을 가졌다. 노희용 광주 동구청장을 제외하고 모두 ‘중구청장’으로 노 구청장을 비롯해 올해 참석자는 4선인 김홍석 인천 중구청장(2·3·5·6기)을 비롯해 3선인 김은숙 부산 중구청장과 윤순영 대구 중구청장,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 박용갑 대전 중구청장, 박성민 울산 중구청장이다. 최 구청장은 24일 “협의회 구성원들이 대부분 재선, 3선인 터라 지역 현안에 밝아 활발히 해결책을 모색해 왔다”면서 “특히 지역의 문화자원과 관광 분야 발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다양한 주제로 논의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최 구청장은 이번 협의회에서 지난달 10만명이 즐긴 도심의 야간 문화축제 ‘정동야행’과 역점 사업인 노점 정비와 노점 실명제를 소개할 예정이다. 대도시 중심구 실·국 설치 기준 및 부구청장 직급 기준 개정, 도시활력 증진 지역 개발사업 자부담률 하향 조정 등 공동건의 과제도 집중 논의한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YS 사후 ‘평가 반전’… “민주화·하나회 척결 功이 더 크다”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YS 사후 ‘평가 반전’… “민주화·하나회 척결 功이 더 크다”

    지난 7월 서울신문 창간 111주년 대국민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가’란 질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을 꼽은 응답자는 0.3%에 불과했다. 박정희(33.6%)·노무현(29.3%) 전 대통령은 물론 ‘숙명의 맞수’ 김대중 전 대통령(12.8%)에 한참 못 미쳤다. 전두환(1.8%) 전 대통령에 못 미쳤고 이명박(0.9%)·노태우(0.5%) 전 대통령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난 8월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광복 70주년 여론조사에서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김 전 대통령을 꼽은 응답자는 1%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22일 김 전 대통령이 타계한 뒤 고인에 대한 평가는 ‘과’(過)보다 ‘공’(功)으로 무게추가 쏠리는 분위기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던 야권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화의 큰 산”(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온 국민의 애도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정의당 심상정 대표) 등 긍정 일색이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추모 열기나 삼삼오오 빈소와 분향소를 찾는 일반 조문객들을 보면 ‘외환위기를 불러온 대통령’보다는 민주화 투쟁과 금융실명제 등 개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한다. 소모적 정치 갈등이 심한 데다 사회의 큰 어른, 원로가 없는 분위기 속에서 현대사의 주역이었던 분에 대한 좋은 평가가 주를 이루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김 전 대통령이 ‘하나회’ 정치군인들을 척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과 노무현(정부)도 불가능했고, 그런 측면들이 뒤늦게 평가받는 것”이라며 “보수·진보의 진영 논리가 뚜렷한 상황에서 고인 같은 자유주의자가 설 땅은 없었다. 그래서 저평가된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고인에 대해 야박한 평가를 하지 않는 한국 사회 특유의 문화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여전히 3당 합당의 충격은 물론 임기 중 외환위기 초래, 차남 현철씨의 국정 농단 등이 국민의 뇌리에 남아 있지만 한편으로 잠시 미뤄 놓은 것뿐이란 얘기다. 전문가들은 전직 대통령에 대해 호불호가 아닌 역사적 맥락에 따른 객관적 평가의 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정치평론가인 박상병 박사는 “대선에서 국민에게 약속했던 시대적 소명을 완수했는지를 놓고 평가해야 한다. 예컨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 극복과 첫 정권 교체,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탈권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글로벌 금융위기 속 경제 살리기, 박근혜 대통령은 보수의 혁신”이라면서 “동시에 시대적 소명에 걸맞은 인재풀을 등용했는지, 핵심 공약 사항을 완수했는지 등을 따져 보면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이념에 치우쳐 평가해서는 안 된다. 호불호에 따라 사적 감정과 이데올로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다”면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가 필요하며 단기간에 평가가 이뤄지는 것도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도 “모든 전직 대통령은 공과가 있다. 쿠데타처럼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정권을 잡은 사람이 아니라면 지도자로 선출한 국민이 있고 제도적 적통성을 가진다”며 “사후에 공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김대중·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을 뜻하는 ‘양김(兩金) 시대’ 이후 통합·화합의 시대정신을 이끌어 갈 새로운 리더십도 필요하다. 김 교수는 “양김의 시대정신은 민주화였고 불가피하게 보스 정치나 정치의 사유화 측면도 있었지만 이젠 그런 리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며 “다양성과 다원성의 기반 위에서 협의성을 높이는 소통형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박 박사는 “총재나 제왕적 당권을 가진 사람이 공천권을 손에 쥐고 정당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끝났다”면서 “다원화된 원내 시스템의 의사 결정 구조를 통해 당을 실질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권위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1300만명의 투명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중국

    1300만명의 투명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중국

     중국 베이징(北京)시 서북부 창핑(昌平)구에 살고 있는 양(楊)씨는 걱정이 태산이다. 수십만 위안(수천만원)에 이르는 양육비와 벌금을 부담할 형편이 못돼 4년6개월 된 아들을 호구(戶籍·호적)에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구이 없는 양씨의 아들은 예방접종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공립 유치원에도 갈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몇년 후면 아들을 소학교(초등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공립 학교는 규정상 들어갈 수 없고, 사립학교의 학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 엄두를 낼 수 없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으로 보장돼야 할 기본권을 누릴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딱한 처지에 있는 양씨 아들과 같은 중국 내 무호적자가 전체 인구의 1%인 1300만명에 이른다며 무호적자의 등록 문제가 사회 공평과 조화에 중대한 사회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중국 제일재경일보(第一財經日報),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중문판이 24일 보도했다. 중국에서는 한 자녀 이상 아이를 낳으면 내야 하는 양육비나 벌금이 없어 호적이 없는 사람들을 ‘어둠의 사람, 어둠의 호적’이라는 뜻의 ‘흑인흑호(黑人黑戶)’라고 한다.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거시경제연구소 완하이위안(萬海遠) 부연구원이 지난해 7~8월 연구조사에 따르면 무호적자들의 60% 이상은 ‘한 자녀 정책’ 위반으로 태어난 아이들이다. 나머지 40% 가까이는 영아 유기와 미혼모 출산, 관련 서류 분실, 지방정부의 직무 태만 등 여러가지 이유로 호구에서 누락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호구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보장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취업도 불가능하고 교육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현대 사회가 ‘실명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추세인 만큼 향후 생활 여건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에서 원칙적으로는 무호적자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원칙과 현실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고 이들 매체는 지적했다. 1958년부터 시행된 중국 호구 등기조례에는 “중국 공민(국민)이라면 모두 조례규정에 따라 호구를 취득해야 하며 호구를 신청할 때 그 어떤 부가조건도 요구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각 지방정부는 호구 제도를 산아제한 정책과 연계시켜 둘째 아이 이상인 경우 벌금을 내지 않으면 호구를 발급해 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무호적자들은 어릴 때부터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자괴감을 느끼며 성장하는 데다 진학과 취직 등 정상적인 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해 장기적으로 사회 불안세력이 될 우려도 있다고 완 부연구원은 강조했다. 중국 정부도 이런 점을 우려해 지방별로 한시적으로 무호적자의 호적 취득 기회를 수차례 제공했다. 푸젠(福建)성의 경우 무호적자 어린이들에게 등록 기회를 제공해 2008년부터 2010년 5월까지 2년 반 동안 50만명이 등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한시적 무호적자 호적 취득 기회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지난 21일 궈성쿤(郭聲琨) 공안부장 주재로 확대 간부회의를 열어 전국의 무호적자 문제 해결 방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공안부는 “합법적인 호구 등기는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중국 공민의 기본적 권리로 사회공평과 조화 안정에 관계된 문제”라면서 “무호적자에 대한 호적 부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합법적 권익을 보장할 것”을 지시했다. 완 부연구원 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자 호적 관리 제도를 도입해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조건 없이 자동으로 중국 공민의 신분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민주화 상징 인물” “임기말 경제 위기”

    주요 외신들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을 긴급 기사로 타전했다. 외신들은 대체로 ‘한국의 민주화 지도자 출신 전직 대통령 서거’라는 제목으로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여정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각지 한인회가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외신들은 야당 대표 시절의 민주화 여정과 대통령 재임 중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을 김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고루 강조했다. AFP 등 유럽 언론들은 김 전 대통령이 군부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출범시킨 대목에 주목했다. 영국 BBC 방송은 김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 가택연금을 당했던 사실과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의 북핵 시설 공습에 반대했던 일화를 전했다. 프랑스 일간 르파리지앵은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고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1993년 한국에서 군사정권을 끝내고 (실질적인) 민간정부의 시대를 처음 열었다”고 보도했다. 한편으로 외신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상황이 초래되며 그가 대통령 임기 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도 비중 있게 다뤘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반부패 개혁을 추진 중인 중국의 언론들은 문민정부 시절 군 개혁 및 반부패 개혁 정책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중국신문망은 김 전 대통령 재임 중 하나회 척결 인사를 소개하며 “김 전 대통령이 반부패, 청렴을 기치로 개인의 배경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유재시거’(唯才是擧)를 실천했다”고 보도했다. 해외 한인회들도 잇따라 애도의 뜻을 밝혔다. 김훈 재외동포언론인협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에 항거해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끌어내신 한국 민주주의의 거목”이라면서 “가슴 깊이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박우민 재영 한인여성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신 분이란 점에 이견이 없을 것”이라며 명복을 빌었다. 외교부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사실을 재외공관에 통보하고 조문소 설치를 지시했다. 유제헌 재독한인총연합회 회장도 “어려운 시절, 젊어서부터 정치에 입문해 역경을 거쳐 승리했던 분이라고 본다”면서 “잘한 일도, 또한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재계 “경제 선진화·부패 척결 일조… 경제 발전에 매진하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재계도 일제히 추모의 뜻을 내비쳤다. 경제단체들은 22일 잇달아 논평을 내고 김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공직자 재산 공개 등 우리나라가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투명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기렸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경제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면서 유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와 위로의 뜻을 표한다고 전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OECD 가입을 추진해 한국 경제의 위상을 높였고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지도록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재계는 김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투명하고 진정한 선진국이 되도록 노력하신 생전의 업적을 기리며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도 논평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다”면서 “금융, 부동산실명제를 도입해 경제개혁을 이끌었고 하나회 척결과 고위 공직자 재산 등록 의무화를 통해 사회 부정부패 척결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고인이 오랜 기간 민주화를 위한 열정과 헌신을 통해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며 “경제 선진화 기틀을 마련한 고인의 업적을 기린다. 국민 모두 슬픔을 이겨 내고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김 전 대통령이 “1990년대 확대된 경제 규모와 고도화된 산업구조에 걸맞은 규제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시장경제 체제의 효율성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면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초래되면서 국민에게 지우기 어려운 고통과 아픔의 기억을 남긴 것은 아쉬운 한계로 지적될 수 있지만 이는 경제 선진화를 위한 체질 개선의 계기였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중앙회도 “김 전 대통령은 중소기업청 개청, 벤처기업법 제정 등 중기·벤처 지원의 틀을 새로 마련하는 등 중소기업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며 “특히 (고인은) 일류 정보기술(IT) 강국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사설] ‘민주화의 별’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며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이 어제 새벽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 88세의 일기로 영면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의 아호인 거산(巨山)처럼 현대사의 굽이마다 뚜렷한 족적과 공과를 남겼다. 우리는 헌정사의 거목(巨木)을 잃은 상실감이 적지 않을 온 국민과 함께 그의 서거를 애도한다. 아울러 부인 손명순 여사 등 유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마음을 표한다. 이제 고인이 생전에 열망했던 민주화의 완성이나 신(新)한국의 건설은 남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정치 일생에는 우리 현대사의 부침과 영욕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유일무이한 나라다. 이 같은 기적을 거론하면서 그 눈부신 성취의 양대 축인 민주화에 앞장섰던 김 전 대통령을 빼놓고 말하긴 어렵다. 엄혹했던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의원직 제명과 가택 연금, 그리고 목숨을 건 23일간 단식 등 고인에게 가해졌던 혹독한 탄압과 그의 응전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가는 가시밭길 같은 역사 그 자체였다. ‘정치인 YS’에 대해서는 호오(好惡)와 포폄(褒貶)이 엇갈릴 수 있겠지만,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그의 신념처럼 이 땅에 ‘민주 헌정’을 뿌리내리게 한 공적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걸어온 역정(歷程)을 되돌아보자. 그를 슬픔 속에서 떠나보내는 이 순간 고인의 과보다 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고인은 평생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협력과 경쟁을 통해 이 나라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 않은가. 대한민국이 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 중 가장 짧은 기간에 민주화를 일궈 냈다는, 세계적 평가는 많은 부분 고인과 DJ의 영전에 받쳐야 할 헌사일 수 있다. ●민주화, 군정 종식의 기수 YS 양김(兩金)이 펼친 유신 반대나 대통령 직선제 관철 투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의 4반세기에 걸친 민주화 대장정이 대통령직선제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결합해 1987년 5년 단임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적 헌정질서를 이끌어 내면서다. 그래서 YS의 14대 대통령 당선은 고인의 민주화 노력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겠지만, 헌정사에서 군 출신 대통령의 집권을 끝내고 문민 시대를 다시 열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1992년 대선에서 이겨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고인의 대통령으로서의 치적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척결 등으로 군부에 힘이 실린, 32년간의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 시대를 연 공적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가 솔선한 공직자 재산공개, 그리고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부패 척결을 제도화한 공적도 빼놓을 수 없다. 고인이 광주 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키고 5공 신군부에 유혈 진압의 죄를 묻는 등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사를 정리하려 했던 시도도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뇌리에는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물론 고인의 이런 정치 역정에 대해 여전히 명암과 긍정·부정적 평가가 교차한다. 어찌 보면 그가 이끈 문민정부의 공과는 훗날 사가(史家)들로부터 엄정한 재평가를 받아야 할 대목도 없지 않을 게다. 특히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명분으로 단행한 ‘3당 합당’이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행보가 그렇다. 전자는 집권을 위해 비판의 대상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손잡았다는 점에서, 후자는 몇몇 악재와 비리로 문민정부가 흔들리는 국면에서 이를 덮으려 자의적으로 단행한 것처럼 비치면서 벌써 국민적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다. 더구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기까지 김 전 대통령에게 지워진 정치적 책임과 흠결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어받아야 할 신(新)한국 건설의 꿈 DJ에 이어 YS의 서거로 소위 ‘3김(金) 정치’ 시대도 저물어 가고 있다. 다만 3김 정치의 한 꼭짓점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아직 생존해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빛이 바래기 시작한 3김 정치식(式) 정치 행태와 강고한 지역주의로부터 우리 정치가 일정 부분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도 없지 않을 게다. 당장 아직도 우리 정치권에 유령처럼 배회하는 지역주의의 망령부터 배격해야 한다. YS의 상도동계니 DJ의 동교동계니 하는, 소위 가신 정치의 폐해를 상기해 보라. 차제에 정치권이 지역감정의 피해자이면서도 지역 갈등을 등에 업고 정치 생명을 연장했던 3김의 정치 행태와는 영원히 절연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양김의 퇴장은 3김 정치가 드리운 부정적 그늘을 확실히 걷어 낼 적기다. 더욱이 1987년 5년 직선제 개헌 이래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아 가는 시점이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로 국리민복을 추구하는 국가 정책에마저 흑백 논리로 접근해 발목을 잡던 것을 당연시하던 양김 시대의 이분법과도 결별할 때다.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직 선진 복지국가의 문턱에서 맴돌고 있다. 무릇 시민의 자유와 공공성의 조화로운 추구가 민주공화정 운영의 핵심 원리다. 그런데도 작금의 우리 사회에선 제 몫을 찾으려는 목소리는 높지만, 공동체에 헌신하는 움직임은 미약하다.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이른바 4대 개혁은 여전히 난항이다. 이는 어쩌면 김 전 대통령의 생전에 치유하려 했던 신(新)한국병이 더 위중하다는 증좌인지도 모르겠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그가 이루려 했던 신한국 건설은 남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 됐다. 다만 그나 그가 속했던 3김 정치의 긍정적 유산은 물려받되 부정적 측면은 소거하는 일은 여야 정치권에 주어진 엄숙한 소명이다. 그중에서도 합리적 토론과 소통으로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완성해 정치가 더는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 안 되게 하는 게 으뜸가는 시대적 과제일 것이다.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며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 “민주화 이끈 큰 어른” 아이들 손잡고 문상

    “민주화 이끈 큰 어른” 아이들 손잡고 문상

    22일 새벽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기원했다. 오랜 군사정부 시대를 종식시키고 ‘문민’(文民) 정부를 구현해 낸 민주화 투사로서 그의 행보가 다시 한번 회자되는 한편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등 대통령 재임 시절 업적들에 대한 평가들도 나왔다.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초등학생 자녀들과 함께 빈소를 찾은 최호용(45·서울 성북구 안암동)씨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23일간의 단식도 마다하지 않은 큰 어른의 국상”이라며 “역사의 흐름도 배우고 견문도 넓히게 할 겸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이모(80·여·서울 서초구 반포동)씨도 “너무도 존경하는 분이라 몇 번 자택에도 찾아갔는데 새벽에 뉴스를 보고 놀라서 일찌감치 찾아왔다”며 “정직하고 양심이 바른 저런 분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인터넷 포털의 뉴스 댓글 등에는 고인의 업적에 대한 회상이 이어졌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김 전 대통령 부고를 알리는 뉴스에는 “금융실명제와 전직 대통령 청문회 등 민주주의를 실현한 고인을 존경합니다” 등 댓글이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았다. ‘좌우 진영 논리에 관계없이 추모하고 존경해야 할 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대학원생 조은상(30)씨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어느 진영에서나 완전한 숭배나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현대사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앞으로 함께 회고하고 토론해야 할 인물”이라고 말했다. 공무원 박모(36·여)씨는 페이스북에서 “김 전 대통령이 ‘IMF 사태’(1997년 말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인 양 몰아대는 주장이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민주화의 세례를 온전히 받은 세대로서 그가 어떤 지도자보다 열정적이었고 자존심과 철학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고 애도했다. 직장인 송수근(44·서울 구로구)씨는 “하나회를 숙청해 군인이 정치에 더는 개입하지 못하게 싹을 자른 일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장면이 선명하다”고 회상했다. 시민사회단체들도 금융실명제나 공직자윤리법 제정 등 고인의 생전 업적을 언급하며 ‘오늘날 필요한 시대 정신을 가졌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옥남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치실장은 “김 전 대통령은 결단력, 추진력에 있어 최고의 국가 지도자였다”며 “오늘날도 공무원 연금 개혁이나 노동 개혁 등 개혁 어젠다가 잘 추진되지 않고 있는데 당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킨 금융실명제를 실현시킨 건 지하 경제에 정의를 세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평했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연합 사무총장은 “고인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며 형식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애쓴 것 외에 집권 이후 사회 투명성 제고를 위한 요소들을 찾아내 실천했다”면서도 “그러나 사회·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해 임기 말에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은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추모사] 당신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진 대한민국 남기고

    [추모사] 당신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진 대한민국 남기고

    신념과 결단으로 대한민국을 거듭나게 해 주신 김영삼 대통령님! 크나큰 감사와 사무치는 회한으로 삼가 이 글을 바칩니다. 님의 일생은 신념과 행동의 완전한 합일이었습니다. 민주화투쟁 과정에서나 그 열매로 쟁취한 집권 이후의 통치 과정에서 이제는 전설이 된 님의 그 모든 결단은 신념에서 비롯되고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남겨진 것 같던 의원직 제명 때나 목숨을 잃을 것 같았던 단식 막바지 때도 님이 흔들리지 않았던 덕에 동지들과 국민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지금도 대통령 취임사의 빛나던 한 구절을 기억합니다. 불굴의 신념을 받쳐 주던 정치 철학이 담겨 있는 구절이기에 나라의 앞길을 밝혀 주는 불기둥으로 삼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이 말씀에 이어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을 제의하셨지요. 저희는 취임 이후 내리셨던 전광석화 같던 그 모든 결단들이 평화 통일을 위한 정상회담 준비 작업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위협 요소였던 하나회 척결, 공정 분배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금융실명제 실시, 공직사회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 된 공직자 재산등록제 등등이 모두 수미일관된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남북한 자유총선거에서 자유민주세력의 승리를 보장하기 어려운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김 주석과의 담판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많은 준비를 했고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을 온몸으로 막아내면서 기회를 만들었건만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개혁에 대한 무한 감사와 함께 회한이 밀려오는 이유입니다. 이제 님은 당신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진 대한민국을 남겨주시고 떠났습니다. 저희는 님이 밝히신 민족에 대한 철학을 가슴 깊이 새기고 평화, 상생 통일을 향해 굳건히 전진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선친 생전에 매일 기침(起枕)하자마자 전화 문안을 올리셨던 님의 효심은 남기신 자녀들과 자라나는 세대들이 본받고 이어 갈 것입니다.
  • 민주화 ‘巨山’ 떠나다…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1927~2015

    민주화 ‘巨山’ 떠나다…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1927~2015

    우리 국민에게 군부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고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금융실명제를 도입했으며 한때 철권을 휘둘렀던 전직 대통령들을 법정에 세우고 일제 잔재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과감히 해체했던,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되지만 당시에는 지극히 무모해 보였던 개혁을 무섭게 밀어붙였던 인물이 영원히 잠들었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88세로 서거했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이어 이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민주화를 주도하며 대한민국 정치의 격동기를 양분해 이끌었던 ‘양김(兩金) 시대’는 이제 역사 속으로 저물게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정오쯤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했으며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돼 사망에 이르렀다고 오 원장은 설명했다. 서거 당시 김 전 대통령 옆에는 차남 현철씨 등 가족이 자리해 임종했으나 부인 손명순 여사는 곁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이명박,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전·현직 대통령들이 애도를 표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등 여야 지도부는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조의를 표하는 등 사회 각계에서 애도 행렬이 이어졌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등 해외 주요 인사들도 조의를 전했다. 외교부는 김 전 대통령 조문소를 세계 160여개 재외공관에 설치하기로 했다. 현철씨는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을 묻는 조문객들에게 “사실 2013년 입원하셔서 말씀을 잘하지 못하시고 필담으로 글씨를 좀 쓰셨는데, 평소 안 쓰시던 ‘통합’하고 ‘화합’을 딱 쓰셨다”면서 “무슨 의미냐고 여쭤 보니 ‘우리가 필요한 거라고, 우리가 필요한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대화를 끝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필담을 포함해 일절 대화가 불가능했다고 현철씨는 덧붙였다. ‘통합’과 ‘화합’이 사실상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이었던 셈이다. 김상연 기자 carlos@seoul.co.kr
  • 금융실명제·공직 재산공개… OECD 1년만에 외환위기

    금융실명제·공직 재산공개… OECD 1년만에 외환위기

    ■ YS가 남긴 功 김영삼 전 대통령도 국내외의 다른 모든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功)과 과(過)가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 역사적인 평가와 재평가가 계속 이어지겠지만 김 전 대통령 시절의 대표적인 공적으로는 ‘금융실명제 도입’ ‘군 사조직(하나회) 숙청’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일제 잔재 청산’ 등이 꼽힌다.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 등도 주요 성과로 기록됐다. 김영삼 정부의 첫 번째 업적으로 금융실명제를 꼽는 데는 이견이 없다. 모든 금융 거래를 실제 명의로 하도록 하는 제도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거액 어음 사기 사건’ 발생을 계기로 논의가 시작됐다. 제도 도입 전에는 가명이나 차명, 무기명으로도 금융 거래가 가능해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음성적 거래가 심각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발동했다. 그는 당시 “국회의 법 개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금융시장 동요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득이 ‘긴급명령’ 방식을 택했다”고 밝혔다. 또 “금융 거래에서 부정부패, 부조리를 연결하는 고리를 차단해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실명제는 우리 사회의 ‘검은돈’을 걷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합리적 과세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금융실명제는 부동산 실명제로 이어졌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자금이 부동산 투기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1995년 1월 6일 부동산 거래 실명제 실시 계획이 발표됐다. 입법도 단 3주 만에 이뤄졌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대대적인 정치 개혁에 나선 김 전 대통령은 군의 대표적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했다. 하나회는 1963년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해 만든 조직이다.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등에 참여한 군부세력들이 주요 회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10일 만인 1993년 3월 8일 하나회 멤버였던 김진영(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했다. 다음날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웃었다고 한다. 이어 군부 실세들이 줄줄이 경질됐다. 모두 42개의 별이 날아가며 군사 정권의 종식을 알렸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전격적으로 숙청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베일에 가려 있었던 30조원 규모의 전력증강사업(율곡사업) 비리에도 사정의 칼날을 들이댔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시켰다. 김 전 대통령은 쇠말뚝 뽑기,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과 같은 일제 잔재 청산 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1993년 8월 광복절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지시가 떨어진 이후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 8월 15일 중앙돔 해체가 시작돼 1996년 11월 13일 지상 부분 철거까지 모두 완료됐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취임 사흘째인 1993년 2월 27일 첫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자신의 재산을 공개했다. 17억 7822만 6070원이었다.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화의 첫 출발점이었다. 대통령이 솔선수범하자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 군 장성, 판검사들이 잇따라 재산을 공개했고 이 과정에서 전·현직 국회의장의 부정 축재 의혹이 드러나기도 했다. 고위 관료들의 부동산 투기 정황도 대거 노출됐다. 또 청와대 국무회의나 각종 회담 자리에서 제공된 ‘칼국수’는 개혁의 상징이 됐다. 시민사회운동 활성화, 정상외교 확대, 지방자치제 부활, 2002년 월드컵 유치 등도 김 전 대통령이 일궈낸 성과다. 현행 초·중·고교에서부터 대학까지의 교육제도 기틀을 잡은 1995년 5·31 교육개혁도 김영삼 정부의 공으로 평가된다. 민선 지방자치제를 부활시켜 지방분권 시대를 연 것도 김 전 대통령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 YS가 남긴 過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선진국으로의 진입에 대한 기대감은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켰지만 동시에 금융위기 사태를 초래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은 패착으로 인식된다. 김영삼 정부는 9%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적극적인 시장 개방이 이뤄지자 1996년 12월 OECD에 가입했다. 대한민국이 6·25전쟁의 상흔을 딛고 40여년 만에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고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여권은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며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야권은 “외화 출자, 개발도상국 지원 등 의무 사항이 많다”며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OECD 가입은 1년 만에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방만한 경제 운영과 부실한 대처는 결국 ‘외환위기 사태’를 불러왔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계기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를 맞았다. 삼미와 기아자동차, 쌍방울, 해태,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연이어 쓰러졌다. 1997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원을 훌쩍 넘었다. 해외 금융기관들의 부채 상환 요구가 쇄도했고 정부는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 유예)을 가까스로 면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비판이 김 전 대통령과 한국에 쏟아졌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11월 22일은 공교롭게도 18년 전인 1997년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이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의 개인사뿐 아니라 대한민국으로서도 잊지 못할 ‘역사적인 날’이 된 셈이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공기업 민영화와 재벌 정책 등에서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외적으로 공정 거래를 강조하면서도 재벌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펼친 까닭에 ‘대재벌’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세계화’ 역시 방향 설정은 좋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만 생기면 내린 고위 공무원 경질이라는 ‘충격적 처방’은 관가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과도한 사정은 역풍을 가져왔다. 정권 말 정작 자신의 차남인 현철씨가 알선 수재·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 수감되면서 김 전 대통령의 부패 척결 드라이브는 빛이 바랬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金永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서울대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올해 88세로 고령에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 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9일 몸에서 열이 나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했고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겼다. 지난 10일 검진차 병원을 찾았다가 17일까지 입원했다 퇴원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대중·김영삼’의 ‘양김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5·6·7·8·9·10·13·14대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한국 헌정사에서도 최연소(만 26세) 국회의원과 최다선(9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함께 갖고 있다.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를 다섯 차례나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됐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에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를 이어갔다. ‘상도동’과 ‘동교동’으로 상징됐던 양김의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역사를 이끌었다.김 전 대통령은 1987년 12월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한 바 있다.그러나 이후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 합류하면서 박철언 전 의원과의 대결 끝에 대선 후보가 되었다. 1992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그는 ‘군정 종식’을 선언했고 ‘문민시대’를 열었다. 특히 ‘칼국수’를 즐겨먹는 것으로 검소함과 청렴함을 표방하면서 하나회 청산과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실시,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을 통해 군사정권 시절에 비해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 부도 사태를 초래했고 친인척 비리가 불거지는 등 임기 초반에 누렸던 절대적인 지지를 대부분 상실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이자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의 ‘대부’로 자리하며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 씨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YS 서거]금융실명제 ·하나회 해체 성과, 외환위기 초래 뼈아픈 실정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첫번째 공적으로는 금융실명제가 꼽힌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모든 금융거래를 실제 명의로 하도록 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현재 은행 예금에서 본인 명의로만 계좌 개설이 가능한 것이 이 제도 때문이다. 제도 도입 전에는 가명이나 차명, 무기명으로도 금융거래가 가능해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음성적 거래가 심각했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거액 어음사기사건이 발생하면서 논의가 시작된 금융실명제는 대통령의 ‘긴급명령’ 형식으로 시행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회의 법개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금융시장 동요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득이 대통령의 ‘긴급명령’이라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또 “금융거래에서 부정부패·부조리를 연결하는 고리를 차단해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고 밝혔다. 금융실명제는 우리 사회의 ‘검은 돈’을 걷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합리적 과세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군의 대표적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해 만든 조직으로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등에 참여한 ‘군부세력’ 대부분이 회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한지 10여일만인 1993년 3월 8일 하나회 멤버였던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경질하며 군부 척결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다음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이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웃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숙청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42개의 ‘별’이 물갈이 됐고, 하나회는 해체됐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군인정부 이후 처음으로 ‘문민 정부’를 표방하며 ‘군사 정권’의 종식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위 공직자와 공직 후보자의 재산공개 의무화, 시민사회운동 활성화, 정상외교 확대, 지방자치제 부활, 2002년 월드컵 유치 등도 김 전 대통령의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야기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최대 과오로 꼽힌다. 재벌들의 지나친 문어발 확장 묵인과 수출산업 강화, 임금인상, 물가상승, 외화낭비 등으로 인한 경제적 부실이 원인이 됐다. 1997년 11월 21일 당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국가는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원·달러 환율은 2000원대까지 치솟았고, 대량해고 사태가 빚어졌다. 김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 임기초 국난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임기 초반 90%를 웃돌았던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아들 현철씨 비리와 외환위기 등으로 임기 종반 10%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와 관련,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가입국이 된 것이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선진국 진입’에만 도취 돼 ‘세계화’라는 명분 하에 해외 기업과 자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것이 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문민정부는 또 공기업 민영화와 재벌정책 등에서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외적으로 공정거래를 강조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재벌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펼친 까닭에 ‘대재벌’을 탄생시켰고, 이에 중소기업은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문제만 생기면 ‘경질’이라는 ‘충격적 처방’을 내려 개혁적 이미지는 한층 부각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효성에서 적잖은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세계화’ 역시 방향 설정은 좋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문민정부의 과감한 민주화 조치 등은 민주주의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평등과 복지 확대에 있어서 소홀했던 것은 과거 정권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김영삼 전 대통령 연표

     ●김영삼 전 대통령 연표  -1927 경남 거제 출생  -1950 학도의용군 입대,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요원  -1951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졸업   손명순 여사와 결혼  -1952년 장택상 국무총리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  -1954 만 26세 최연소로 제3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5·6·7·8·9·10·13·14대 국회의원(9선)  -1954 자유당 탈당  -1963 군정 연장 반대 데모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1965 야당 원내총무 5선  -1969 3선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하다 초산테러 당함  -1972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 반유신투쟁 전개  -1974 신민당 총재로 선출  -1979 ‘YH사건’ 등으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뉴욕탐임스 회견을 빌미로 국회의원직 제명  -1980 1차 가택연금  -1981 민주산악회 발족  -1982 2차 가택연금  -1983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  -1984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공동의장  -1985 신한민주당 창당, 2·12 총선에서 선거혁명  -1987 통일민주당 창당, 총재 취임 이후 6월항쟁 주도  -1987 제13대 대통령선거 출마해 낙선  -1989 한국 정치인 최초로 소련 방문  -1990 민주·민정·공화 3당 통합 선언,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표최고위원  -1992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1992 제14대 대통령에 당선  -1993 문민정부 출범  -1993~1998 금융실명제 도입,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 군내 핵심 사조직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1998 대통령 퇴임 이후 상도동 자택에 머물며 정치활동  -2013년 폐렴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금융실명제에서 IMF까지 ‘대통령 김영삼’의 공과

     22일 새벽 서거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공과는 어떤 역대 대통령보다 뚜렷하게 갈린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 청산과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등 과감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는 점은 주요 성과로 기록된다. 하지만 무리하게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하다가 임기 말 외환위기를 맞은 점은 김 전 대통령의 과(過)로 지적된다.  5·16 군사정변 이후 31년간 동안의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문민 시대를 연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초 과감한 개혁으로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 마자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사회 투명성을 전반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성과를 냈다. 또 과거사 바로세우기 작업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을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줄줄이 구속시켰다. 쇠말뚝뽑기, 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이 이때 이뤄졌다.  특히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내걸었던 김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둘러싼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우선 금융·부동산의 양대 실명제를 이룩해 부패 차단과 과세 형평성을 확보했다는 점은 성과로 꼽힌다. 당시 가명과 차명을 쓴 금융거래가 각종 비리·부패 사건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자,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시행했다. 또 금융실명제 실시로 부동산 투기 우려가 높아지자, 1995년 부동산 실명제를 전격 도입했다.  대외적으로는 임기 전반기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점도 업적으로 꼽힌다. 하지만 OECD 가입은 급속하게 시장개방과 자본 유출입을 허용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초래했다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이어진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는 한국을 금융위기로 몰아가게 된다. 같은 해 삼미그룹과 기아자동차의 도산 사태가 터졌으며 쌍방울그룹, 해태그룹, 고려증권, 한라그룹도 차례로 위기를 맞았다.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나자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선언을 가까스로 면했다.  집권 초 지지율이 90%에 달했던 김 전 대통령은 부패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아들 김현철씨의 뇌물수수 및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자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IMF 사태와 친인척 비리는 정권교체의 빌미로 작용해, 1997년 대선에서 영원한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물려주게 된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사기꾼 무서워 못합니까” 금융당국 일방통행에 은행들 골머리

    “사기꾼 무서워 못합니까” 금융당국 일방통행에 은행들 골머리

    시중은행들이 비대면 실명확인제(은행이나 증권사 영업점에 가지 않고도 계좌 계설이 가능한 제도) 도입을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금융 당국이 올해 5월 ‘계좌 개설 시 실명확인 방식 합리화 방안’으로 제시한 6가지 비대면 인증방식 모두 신분증 위조, 대포통장 개설 등에 취약해서다. 제도 도입 시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만큼 금융권은 새로운 인증 방식을 추가하거나 시행 시기를 내년 초로 미뤄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연내 도입’을 공언한 금융 당국은 “사기꾼 무서워 혁신 못 하느냐”며 몰아붙이고 있다. 금융권은 “서둘러 새 방식을 도입했다가 사고가 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금융사 몫”이라며 울상이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연합회와 시중은행, 금융위, 금융감독원, 금융보안연구원, 금융결제원으로 구성된 사전 테스트 전담반(TF)은 5월 말부터 최근까지 25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때마다 시중은행들은 ‘보안 취약성’을 꾸준히 지적했다. 은행들은 ‘신분증 사본 제출’ 인증 방식에서 OCR(이름·주민등록번호·주민등록증 발급일자) 정보 이외에 행정자치부가 보유하고 있는 주민등록증 사진 정보를 대조·확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신분증 사본 제출은 고객이 신분증을 촬영하거나 스캔해 온라인으로 은행에 제출하는 방식이다. 금융위와 행자부가 수개월 협상 끝에 우선은 OCR 정보만 금융사에 확인해 주는 것으로 지난달 결론이 났지만 이 정보만으로는 사진을 오려 붙인 위조 신분증을 걸러낼 방법이 없다. A은행 관계자는 “은행 영업점의 신분증 위변조 검증 시스템에서 신분증 인식률이 60~70%에 그치는 실정”이라며 “사진 정보가 없으면 가짜 신분증으로 대포통장을 개설하거나 가족 및 지인의 신분증을 이용한 차명계좌 개설은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은행권이 요구하는 추가 인증 방식은 ‘지문’이다. 고객이 온라인상으로 제출한 지문을 행자부가 수집한 지문 정보와 대조하는 방식이다. 지난달 말 당·정(새누리당·금융위) 협의 때도 은행권은 이 방식 도입을 공동 건의했다. 하지만 채택 가능성이 높지 않다. “개인의 생체정보(지문)를 민간 회사에 제공할 수 없다”며 행자부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비대면 실명인증 방식도 대면 거래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수준의 감독 규정을 적용할 방침이다. “비대면 인증을 통해 발생하는 금융사고에 대해서는 금융사나 직원의 책임 소재를 대면 거래와는 달리 적용해야 한다”는 은행들의 건의는 반영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자 은행들은 제도 도입 연기를 요청하고 있다. B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이 연내 관련 서비스 출시를 꺼리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면서 “(당국에) 등 떠밀려 성급하게 내놨다가 사기 집단의 표적이 되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반문했다. C은행 관계자는 “우리에게는 밥줄이 걸린 문제인데 금융 당국은 (빨리 생색낼) 건수에 더 신경 쓰는 눈치”라고 뼈 있는 말을 했다. TF 회의에서도 금융 당국 관계자는 은행 실무자에게 “연내에 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얘기하라”고 몰아세웠다고 한다. 금융위 관계자는 “생래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은행들의 보수적 속성 탓에 금융 개혁이 더딘 측면도 있다”며 “금융실명제법상에서도 실명 확인만 규정하고 있지 인증 수단(신분증·지문 등)의 진위를 은행이 직접 확인하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고 반박했다. 보안 문제만 하더라도 사기꾼을 막을 방법을 강구해야지 사기꾼 무섭다고 자꾸 움츠러들어서야 되겠느냐는 주장이다.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 [자치단체장 25시] 김만수 부천시장, 역사 돌며 노점상 새 역사로…현장이라는 이름의 ‘민생 전차’

    [자치단체장 25시] 김만수 부천시장, 역사 돌며 노점상 새 역사로…현장이라는 이름의 ‘민생 전차’

    지난달 28일 오전 7시 30분 경기 부천역 북부광장 출구. 오늘은 주 2회 있는 ‘현장 대화의 날’이다. 이런 날은 바로 현장으로 출근한다. 쏟아져 나오는 승객들 사이로 김만수 부천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 시장이 복합문화광장 조성 사업이 한창인 공사현장 이곳저곳을 살피고 사진을 찍는가 싶더니 하나밖에 남지 않은 노점상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는 순간 “안녕하세요?”하며 노점 안에서 정겨운 인사말이 들렸다. 김 시장이 왼쪽으로 몸을 틀어 바라보자, 노점상 부부가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했다. 단속기관 수장과 단속대상 간의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다. ‘부천시’ 하면 곳곳에 산재한 500여개 노점상 이미지가 떠오른다고도 했다. 전임 시장들은 매년 10억원의 용역 예산을 책정해 노점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단속이 거셀수록 저항은 집단화했다. 김만수 시장은 2012년 7월 정책을 바꿨다. ‘햇살가게’가 바로 그 해답. 생계형 노점만 허용하기로 시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한 뒤 단속이 아니라 관리하기로 했다. 노점할 수 있는 자격 기준을 재산 2억원 미만 부천 거주자로 한정하고, 계속 재산상황을 체크하기로 했다. 노점 실명제와 구역제, 정수제, 규격제 등의 시행기준을 마련했다. 기업형 노점은 퇴출시켰다. 송내역 및 길주로, 둘리공원 등 6개 지역에 규격화된 66개 햇살가게가 생기고, 전체 노점 수가 300여개로 40%가량 감소했다. 30여 지자체에서 정책 견학을 올 만큼 성공을 거뒀다. 김 시장은 “최종적으로 200여개의 노점만 남을 것인데, 이 노점도 일반 점포를 낼 만큼 자립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며 “초저리 대출금리가 가능한 정책금융으로 추가적인 지원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점이 차지하던 역곡역 남부광장, 부천북부역 광장, 송내역 북부광장 등은 특색 있는 광장으로 조성된다. 11~12월 광장 조성사업이 완료되면 일부 노점들이 햇살가게 이름을 달고 한쪽에 다시 자리잡는다. 김 시장은 “상권이 되살아나면서 역 광장 주변 건물입주 상인들의 표정도 밝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철을 타고 송내역 북부광장으로 갔다. 전철역에서 나오면 버스와 연결되는 2층 환승시설이다. 1층 역 광장에는 포장마차가 사라지고 인공호수가 만들어지고 있다.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을 운영할 예정이다. 김 시장이 며칠 전 이 광장 명칭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페이스북에 물었더니 80여건의 댓글이 달렸다. 3개 역 광장을 돌아본 김 시장이 오전 9시 시청에서 열리는 ‘부천영상문화단지 복합개발사업’ 협상 관련 검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줄달음 쳤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오병권 부시장과 실·국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오 부시장은 부천 토박이로 1년 전 충청도 출신인 김 시장이 적극 요구해 고향으로 부임했다. 민선 지자체장들은 자칫 ´호랑이 새끼´를 키운다며 기피하던 일이다. 김 시장은 지난달 지난 1년 동안 오 부시장의 성과를 홍보자료로 내기도 했다. 부천영상문화단지 복합개발사업은 삼산체육관역 부근 38만 3000㎡를 ㈜신세계프라퍼티 컨소시엄에 매각해 호텔·전망대·백화점·캐릭터뮤지엄·공원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신세계 컨소시엄에 얼마를 받고 매각할지, 공공기여는 무엇으로 얼마나 받을지 논의하는 자리이다. 회의가 끝나자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리는 부천아트밸리 발표회장으로 이동했다. 1000여명의 학생, 학부모, 교사 등이 대강당을 가득 메웠다. 부천아트밸리는 부천시, 시교육청, 시문화재단, 학교 등 4자가 합심해 초·중·고 학생은 물론 어른들에게 문화·예술·스포츠를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김 시장은 축사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구경 오는 이 자리가 가장 즐겁다”면서 “내년에는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은 모두 (생존)수영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4학년 이상은 축구를 체계적으로 배워 체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일정은 중동신도시 사랑마을 16단지 주민들과의 현장대화. 이 마을에서는 20여년 전 설치된 상수도관 교체공사 중이다. 현재 사용이 중지된 아연도강관이어서 수돗물에서 녹물이 나오고 있다. 아파트 주민들 자체 부담만으로는 교체할 수 없어 시가 일부 비용을 보조한다. 철거된 아연도강관 내부를 살펴보니 부식 상태가 충격적이다. “안심하고 마셔라”고 정부와 각 지자체가 국민에게 호소하지만 이런 급수관의 물을 마셨다니 화가 치민다. 1994년 4월 1일 이전 지은 건물 상당수, 1기 5대 신도시 대부분이 같은 사정일 터. 마침내 점심때. 집을 나선 지 5시간 만에 지친 몸을 쉴 수 있게 됐다. “아이디어 행정이 특히 많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습니다. 다른 지자체에서 잘하는 행정을 우리 현실에 맞도록 개량해 적용한 것도 많습니다.” 오후 일정이 다시 시작됐다. 90회째 맞은 ‘열린시장실’이 있는 날이라 한국생활개선부천시연합회 회원 30여명이 찾아왔다. 주요 현안과 발전사항, 미래비전을 듣고 애로사항도 건의했다. 오후 4시에는 부천축산물복합단지 건립 업무와 관련한 협약식이 이어졌다. 이기수 농협경제지주 대표이사는 “농협이 삼정동 부천축산물공판장 인접 부지 2만 8185㎡에 국내 최대·최첨단 시설로 조성할 축산물복합단지가 완공되면 축산 유통의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시장은 ‘직거래 시설뿐 아니라 군납과 수출까지 할 수 있게 된다’는 설명에 한껏 기대감을 표시했다. 영상단지와 함께 지역경제를 견인할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잠시 집무실에서 머물며 일을 본 김 시장이 마지막 일정으로 간 곳은 신축한 지 35년이 넘은 심곡본동 광희아파트. 부천시는 뉴타운 계획을 모두 해제한 후 대안으로 ‘AtoZ(아토즈)지원단’을 운영하고 있다. 130가구의 광희아파트는 철거가 시급하다. 주민 앞에 선 김 시장은 “재건축 시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해 드리기 위해서 우리 직원들이 많이 배웠다”면서 “첫술에 배부르지 않겠지만 주민과 시가 서로 최선을 다해 보자”고 당부했다. 해는 벌써 서산을 넘은 지 오래돼 어둑해졌지만 “함께 노력하자”며 열변을 토하는 김 시장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밝게 빛났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민원 현장해결 어렵지 않아요! 창식씨와 함께라면

    민원 현장해결 어렵지 않아요! 창식씨와 함께라면

    “대한민국 관광 중심지인 명동에 이게 뭡니까.” 3일 오후 2호선 을지로입구역을 지나던 최창식 중구청장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지하철역 입구 옆에 종이상자들이 몇 묶음씩 쌓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행정지도를 해야 할까요, 보관 장소를 따로 마련해야 할까요. 어떤 게 낫겠습니까.” 최 구청장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길에서 간이 회의가 시작됐다. 환구단부터 롯데백화점 본점 증축현장까지 숨 가쁘게 돌아보면서 최 구청장은 구석구석 시선을 보냈다. “지하보도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지상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바로 연기가 가지 않겠나”라며 흡연실을 제안했고 “전기시설을 이렇게 지저분하게 관리하면 도로 환경을 해친다”면서 배전함 주변에 아크릴판을 두르는 건 어떨지 의견을 냈다. 30여년 공직생활 대부분을 서울시 도시계획 분야에서 근무한 전문가답게 매서운 눈이다. 함께 나온 구 직원들은 설명하랴 의견 내랴 제안을 받아 적으랴, 입과 손이 분주했다. 이날 최 구청장의 행보는 지역 현안을 둘러보는 ‘공감소통투어’의 하나로 이뤄졌다. 각 동을 돌아보면서 현안사업을 챙기고 지역 민원을 듣는 시간이다. “큰길로만 다니면 이런 걸 다 보질 못한다”면서 이날도 롯데백화점과 조선호텔의 샛길, 명동 뒷길을 쏘다닌 최 구청장은 “구정 업무의 시작은 현장이고 그 현장에서 민원인의 요구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소통투어의 의미를 소개했다. 최 구청장은 관광버스가 여러 대 주차하면서 차량 정체를 일으키는 명동역을 비롯해 폐쇄회로(CC)TV가 비효율적으로 운영된다는 지적이 있는 숭의여대 별관, 교통사고 위험이 큰 여명학교(탈북청소년 대안학교) 등 명동지역을 두루 살폈다. 또 명동쉼터에서 펼쳐지는 녹색장터를 둘러보고 주민들과 수화체험도 함께 했다. 민원을 경청하는 한편 동별로 특색 있는 체험을 하면서 주민과 자연스러운 소통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4일에도 주민 맞춤형 복지와 민원 통합모델 ‘행복다온’ 시범 지역인 약수동을 비롯해 노점상 실명제로 시장 환경을 개선한 황학동, 공구·조명 등 전문 상점들이 즐비한 을지로동 등을 이어가면서 오는 12월까지 공감소통투어를 계속할 예정이다. 최 구청장은 “동별 1동 1명소 사업과 현안 등을 둘러보면서 어려운 문제를 담소로 풀어나갈 수 있는 자리로 만들고 싶다”면서 “주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행정으로 구정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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