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민생의 이면/이지운 베이징 특파원
지난 5일은 천안문 광장 일대에 가장 많은 오성홍기(五星紅旗)가 내걸리는 날이었다. 그 많은 깃발들이 다리미로 다려놓은 듯 깃대와 직각으로 펼쳐졌다. 바람이 연출한 장관이었다. 여간해선 펴지지 않는 광장 중앙의 초대형 깃발도 힘차게 나부꼈다. 바람 많은 베이징에서도 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5차회의는 이런 가운데서 시작했다.
이보다 하루 앞서 개막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와 함께 이번 양회(兩會)는 ‘민생’이라는 단어로 출발했다. 물론 중국 언론이 내건 표제어다. 많은 서방 매체들도 이에 초점을 맞춰 이번 양회를 보도했다. 지난해에 이어 투명성도 강조됐다.
하지만 올 양회는 범상치 않은 바람만큼이나 예전과 다른 이면을 보여줬다. 우선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글이 느닷없다.‘사회주의 초급단계의 역사적 임무와 대외정책의 몇가지 문제에 관해’라는 제목의 글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분석처럼 그저 “최근 잇따르는 민주화 압력과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개혁 요구에 대한 당국의 공식 반응”일 뿐인가. 발표 시점이나 공개 장소도 없이 2월27일자로 국영 신화통신이 전재한 형식이다. 원자바오 총리는 취임 이래 이같은 방식으로 글을 낸 적이 없다. 이처럼 이례적인 일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비정상적 상황은 비정상적인 인사(人事)로 대변된다.
오는 10월 열리는 17차 당대회는 4세대 지도부의 2기 출범식.3세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각 성(省)의 서기와 성장 인사가 마무리돼 힘의 토대가 구축돼 있어야 할 때다. 그러나 인사는 지금까지 14곳에서만 이뤄졌다. 예전 같으면 이미 지난해 말에 다 끝나야 할 일이다. 한 중국 인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까지 했다. 내부적으로는 오는 6월까지 정리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으로 알려지지만, 그마저도 달성될지 의문이다. 각 단위에서 이른바 ‘미세 조정’까지 마치려면 시간이 급하다.‘후진타오(胡錦濤) 2기’가 자신만의 실핏줄 조직을 갖지 못한 채 출범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인사가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후 주석의 힘이 과거 전임자들만큼 충분치 못하다는 방증으로 여겨진다. 일각에서는 그만큼 인사에 대한 예측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나온다. 과연 9인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7명으로 줄어들 것인지, 쩡칭훙(曾慶紅)은 살아남을 것인지, 새 상무위원의 반열에는 누가 오를 것인지, 반부패 수사의 칼날은 어디까지 겨눠질 것인지….
인사는 인사에 그치지 않는다. 인사는 당사자들의 주변 사람과 그들의 대규모 사업, 얽히고설킨 그들의 네트워크를 운명짓는다.“주요 인사들은 지금 모두 살얼음을 걷듯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갈 만하다. 지난 2월의 춘제(春節)에 묻혀 조용히 지나갔던 덩샤오핑(鄧小平) 서거 10주년에 대해서도, 혹자는 “제 앞가림에 정신이 없는데 추모고 뭐고 신경 쓸 틈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이쯤 되니, 원자바오 총리의 글은 “1차적으로 후 주석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분석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어떤 노선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선언한 행동이란 해석이다. 지금 중국의 핵심부가 얼마만큼 민감한 상태에 놓여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대목이다.
17차 당대회의 중요성과 민감성을 두고 한 경제계 인사는 “올해 당 대회 이전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전망도 내놓았다. 당 지도부의 물갈이는 아예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환율도, 증시도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북핵 문제도 이 기간만큼은 잠잠해야 한다.16일 양회가 끝났다. 중국 핵심부의 소리없는 전투는 진행형이다.
이지운 베이징 특파원 jj@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