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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홀몸노인 반려자 찾아드려요”

    “홀로 되신 노인들께 은빛사랑을 실어 드립니다” 평생을 의지하던 배우자와 갑자기 사별(死別)하거나 이혼했을 때의 허전함을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유엔이 정한 ‘노인의 해’를 맞아 홀로 된 노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만남의 자리가 마련된다. 결혼정보회사 (주)선우는 독신 노인들에게 새로운 만남을 주선해주는 ‘99로맨스 그레이-은빛사랑 미팅’행사를 개최한다.4월 한달동안 500쌍의 독신노인들로부터 참가신청을 받아 개인적 만남을 주선하며 5월1일부터 10일동안 전체 참가자들의 단체만남 행사도 갖는다. 고궁·야외행사장·놀이공원 등에서 열릴 단체만남은 댄스파티,에어로빅,신파극 연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가족 응원코너도 마련,함께 온자녀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제공한다. 이혼·사별 등으로 홀로 된 남자 60세 이상,여자 55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선우측 관계자는 “몇차례 효도미팅 행사를 열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은 나이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반드시 여생을 함께 할 반려자를찾기보다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격려해줄 수 있는 말벗을 찾아주자는 뜻으로 행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 악극 신파극에 시골장터 울고웃고…/’아빠의 청춘’ 기획 김학민씨

    악극 ‘아빠의 청춘’이 경기도 일대에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경기문화재단의 주최로 극단 아리랑은 지난 3일부터 5일장 장터,지역축제,길거리 등 이른바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 악극의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악극 바람’은 남양주시 진접읍에 이어 성남 모란장,평택 안중장을 휘감은 뒤 11일 경기도청 잔디마당에 안착했다. 먼저 극단 아리랑의 풍물패가 마당을 돌면서 경쾌한 리듬과 민요로 흥을 돋군다.다음 대중가요 ‘불효자는 웁니다’가 구성지게 울려퍼지면서 무대는신파조로 바뀐다. “사는게 힘드시죠.우리 한판 놀아보면서 시름을 잊어버립시다” 각설이(이홍근)가 나와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 갑자기 객석에서 취객이 소주병을 든채 뛰어 나온다.그러나 관객의 술렁거림은 잠깐.아빠 김달식 역을 맡은 배우 김기천의 연기임을 알아차리고는 장터는 웃음바다로 바뀐다. “나가 ‘대한민국 김달식’이여.비록 지금은 아침은 안먹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은 못먹을 계획이지만 한땐 잘나가던 사람이여.사연하면 나도 ‘한사연’하는데 여기 있는 분들이 들어줄텨?” 남녀노소의 박수 속에 실직,장사실패,부랑생활 등 김달식의 애절한 사연이실타래를 풀어나간다.IMF 관리체제 이후 부쩍 늘어난 ‘인생유전’이다.단순한 줄거리이지만 살갗에 다가오는 절실한 내용들이다. 노숙중인 남편을 찾아나선 아내(오연실)의 고생담과 아들(송태성) 딸(김지희)의 철없던 얘기가 이어지면 관객의 코끝은 절로 찡해진다. “이렇게 좋은 날 웬 청승이여” 상봉한 가족의 ‘아빠의 청춘’합창은 졸아들었던 마음을 흐뭇하게 펴준다.단원들은 1.5t트럭을 이용해 만든 간이무대에서 가수 뺨치는 노래로 흥을 이어 간다.‘밤이면 밤마다’‘포이즌’‘소양강 처녀’ 등의 레퍼토리에 모든 연령층의 어깨가 들썩인다. 잔치의 하이라이트는 ‘대동놀이’.각설이가 엿장수 판을 꾸미고 풍물놀이가 뒤따르면 흥에 취한 관객들이 앞으로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기 일쑤다. 아들과 손자 등 3대가 함께 찾아온 김학윤(65)할아버지 부부는 “옛날에 보던 악극과는 약간 다르지만 곧잘한다”면서 “내일도 구경할 생각”이라고말했다. 대동놀이 때 가장 앞서 뛰어나가 ‘썰렁한’ 분위기를 뜨겁게 달군 김영희주부(35)는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즐거운 자리”라며 “이런 무대가 자주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1시간30분이 짧다는듯 여기저기서 “더 해요”라는 고함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아리랑패는 다음 장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연출을 맡은 김명곤씨는 “예술성 강한 작품은 아니지만 관객과 ‘만난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면서 “서민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겠다”고 말했다.(02)741-5332 - ‘아빠의 청춘' 기획 김학민씨 “경기도의 31개 시군은 문화를 누리는 데에서는 편차가 심합니다.문화 취약지구에 ‘문화 복지’의 작은 불꽃을 지피려는 뜻에서 악극의 도내 순회공연을 시작하게 됐습니다.김명곤씨와 그의 아리랑극단이 없었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아빠의 청춘’의 순회공연을 기획한 숨은 공신인 김학민 경기도문화재단문예진흥실장(51).도서출판 학민사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황석영 임진택 등과 민족문화협의회에서 활동한 경험을 되살려 이번 무대를 꾸몄다. “기존 공연은 앉아서 관객을 기다리는 일방적 형식이었지요.이같은 관행을 벗어나 소외된 ‘문화 수요자’를 찾아나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상한 것입니다”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특히 장터에선 ‘인기 캡’이었다.‘5일장의 제왕’인 성남 모란장에선 1,000여명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장터 상인과 시민들이 돈을 내 고사(告社)에 참석할 정도였다.1주일동안 ‘입소문’이 퍼지면서여기저기서 출연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그만큼 시골 사람들이 문화예술에 굶주렸다는 뜻이겠죠.기껏해야 텔레비전이나 보고 술 한잔 하는 정도의 놀이밖에 없는 이들에게 이번 무대는 흥겨울 수밖에 없지요” 유랑극의 생명은 즉흥성.주요 관객인 행인이 얼핏 보고 그냥 지나가면 일단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아빠의 청춘’은 달랐다.김실장은 그 매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단한 작품은 아닙니다.그럼에도 반응이 좋은 이유는 ‘서민의 냄새’에 있습니다.아파트단지에 사는,현대 문화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촌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밑바닥 인생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았지요.그래서 관객의 호응이더 뜨겁게 나타납니다” 이어 “원래 10월말까지 50회를 계획했는데 상반기 중에 50여곳을 다 돌고공연횟수를 더 늘릴려고 합니다.그래도 공연 요청을 다 채울 수 없을 정도입니다”라며 즐거운 비명을 올렸다. 이종수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14)분출하는 욕구(中)/교원노조

    4월혁명후 활발해진 각계의 움직임 가운데 노동운동은 특히 두드러졌다.이승만(李承晩)정권에서 체제유지의 첨병 노릇을 한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등 기존의 노동관련 단체들은 급속히 그 힘을 잃어갔다.반면 노동조합을 비롯한 새로운 노동조직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고 쟁의도 크게 늘어났다. 4·19직전 전국의 노동조합은 621곳,조합원은 30만7,000여명이었다.하지만다섯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60년 9월1일 현재 조합 수는 821군데로 32.2%,조합원 수는 33만3,000여명으로 8.6%가 각각 늘어났다. 노동쟁의도 1958년에 50건,59년에 109건이던 것이 60년에는 218건으로 급증했다.노동운동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활력을 보인 것이다. 그 격렬한 흐름 속에서 정치·사회적으로 가장 관심을 끈 것이 교원노조 운동이었다.교직(敎職)이 갖는 가치지향적 성격에,학생·학부모에게 미치는 파급효과도 컸지만 무엇보다 교원노조가 합법성을 얻고자 벌인 투쟁이 워낙 치열했기 때문이다. 교원노조 운동은 4월혁명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된다.대구에서는 4월29일 경북여고에 중고교 교사 60여명이 모여 학원 자유화와 교사의 권익옹호를 위해 ‘교원조합’을 결성키로 합의한다. 이어 ▲5월1일 동성고에서는 ‘서울시 교원노조결성 준비위원회’가 ▲5일에는 전주고에서 교원노조가 ▲12일에는 부산 동광초등학교에서 교원노조 결성준비위가 각각 출발한다.5월 말이면 학교 단위로,또는 시·군 단위로 교원노조가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지 한달만에 이처럼 교원노조가 전국적으로 자생하게된 토양은 무엇일까.그것은 ‘속죄와 책임의식’이었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독재권력에 항거하여 용감하게 싸우는데 그들을가르친 교사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자기반성,그리고 ‘역사의 비극을 또다시 저지를지도 모르는 권력 앞에 무방비로 있을 수는 없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사실 ‘3·15부정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정권이 교육계에 저지른 만행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교육감·교장들이 나서 교사들을 자유당 비밀당원으로 입당시킨 일은 기본이었다. 환경미화를핑계로 이승만·이기붕(李起鵬)의 사진,업적을 교실에 장식토록해 그 결과로 교사의 근무성적을 평가하거나 ▲교장·교감이 가정방문에 나서 자유당후보 지지를 직접 호소하고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시켜 이승만을찬양토록 하는 일들이 예사로 벌어졌다. 교육계 지도자들도 총동원되다시피 했다.60년 1월26일자 서울신문 1면에 난자유당의 ‘정·부통령선거중앙대책위원회’공고를 보면 지도위원에 백낙준(白樂濬)김활란(金活蘭)임영신(任永信)김연준(金連俊)유석창(劉錫昶)등 사학(私學)의 거물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을 정도였다. 교원노조 운동은 60년 7월17일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조총련)’를결성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통일된 체제를 갖춘다[별표 참조].이때 노조에 참여한 교사는 이미 1만9,883명이었다.교조총련은 위원장 자리를 당분간 공석으로 두는 대신 서울지구 부위원장인 강기철(姜基哲)을 대표로 지명했다.얼마전 타계한 재야인사 계훈제(桂勳梯)도 서울지구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교원노조 결성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정부측 대응도 곧바로나왔다.허정(許政)과도정부의 이항녕(李恒寧)문교차관은 “교원노조 결성을 권장하지도 막지도 않겠다”고 밝혔다.그러나 곧이어 이병도(李丙燾)문교장관은 5월19일 “교원노조를 불허한다”고 신문지상에 발표했다. 교원교조의 적법성을 둘러싼 논쟁이 곧 사회 전반으로 번졌다.교사들은 53·57년 법무부의 유권해석을 근거로 ‘합법’을 주장했고 대한변호사회도 이를 지지했다.‘7·29총선’을 앞둔 민주당의 장면(張勉)주요한(朱耀翰)조재천(曺在千)등 신파 지도자들도 이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교원노조와 행정권의 정면충돌은 60년 8월 대구에서 발생했다.조준영(趙俊泳)경북지사가 대구·경북의 노조간부 25명을 산간벽지로 전근시킨 것이다.대구·경북 노조는 ‘사태가 해결되지 않으면 8월25일 오후6시 조합원 8,000명 전원이 퇴직한다’는 마지노선을 확정한다. 조합원들은 11일부터 연좌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16일에는 경북지사의 부당한 인사조치를 중단시켜 달라는 ‘행정처분 집행정지명령 가처분신청’을 대구고법에 냈다. 이 와중인 8월23일장면내각이 정식 출범한다.교조총련의 강기철 대표를 비롯한 수뇌부는 오천석(吳天錫)문교장관,윤택중(尹宅重)문교부 정무차관과 협의를 계속한다. ‘교사 8,000명 사퇴’라는 초유의 사태는 그러나 의외로 손쉽게 해결된다. 교조가 정한 시한인 8월25일 대구고법이 경북지사의 인사가 잘못됐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그 이유는 ▲교원노조 결성이 합법이며 ▲경북지사의 인사권 행사는 재량권의 범위를 넘은 것으로 판정했기 때문이다. 이 사태후 장면정부는 ‘노동조합법 개정’‘교직단체법 개정’을 통해 교원노조 운동의 흐름을 바꾸려고 애쓴다.그렇지만 교원노조는 9월 말 단식투쟁에 돌입해 결속을 과시한다.교원노조 운동은 1960년 당시 한국 노동운동을대표했다.이 운동은 ‘5·16쿠데타’후 사실상 사라졌다가 결국 1980년대 ‘전교조운동’으로 되살아난다. 이용원- 교사40%가 자발적 참여 교원노조 운동에서 노조를 대표한 인물은 강기철(姜基哲·74·전 평택대교수)씨.강씨는 1960년 7월17일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조총련)’가 발족할 때 대표를맡았다.그는 ‘5·16쿠데타’로 교조총련이 용공·불법 단체로 낙인 찍힌 다음에도 지금까지 그 대표직을 유지해 왔다. 강대표는 교원노조가 설립될 당시 한양대 강사였다.그는 “‘3·15부정선거’당시 교육자는 독재권력의 하수인 내지는 시녀 노릇을 해왔다”면서 그 당시를 “정신적인 노예상태”라고 기억했다. “교원노조는 자주적인 힘으로 탄생했다”고 강조하는 그는 “당시 전국의교사가 10만명이 채 안됐는데 그 가운데 4만명 가량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강조했다. 강교수는 허정(許政)과도정부 당시 이항녕(李恒寧)문교차관,김학묵(金學默)보사차관 들이 처음 교원노조 결성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음을 기억했다. 그런데 그들이 입장표명을 한 지 며칠만에 현직에서 쫓겨나더라는 것. 강교수는 “장면(張勉)정부는 교원노조 운동에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고 평가하면서 “그래도 쿠데타 세력보다는 장면정부의 죄가 엷다”고 말했다. - 노조측 쟁의권 자진포기 교원노조 설립 당시 윤택중(尹宅重·86)옹은 장면내각의 문교부정무차관이었다.윤옹은 전북 학무국장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장면내각에 문교부 정무차관으로 들어갔으며 나중에 문교장관을 지냈다. 그는 교원노조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강대표 등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 간부들을 만나 장면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인물이다. 윤 전장관은 “당시에도 교사들의 노동운동은 일반 노동자와는 다르다는 인식이 깊었다”고 회고했다.교사들에게 단체행동권 등을 인정하는 것은 좋으나 굳이 ‘노동조합’이란 명칭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반감이 있었다는 것. 윤 전장관은 “교원노조 대표들과 상의할 때도 일반 노동조합과는 다르다는사실에 뜻을 같이했다”고 공개하면서 “그들도 파업 등 쟁의권을 실제로 포기했다”고 밝혔다.그는 교원단체 명칭을 ‘교원노조’가 아니라 교원연구단체나 교원친목단체로 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가다 ‘5·16쿠데타’를 당했다”고도 기억했다. 장면내각에 들어올 당시 신·구파 어느쪽도 아니라 중도파로 인정받은 윤 전장관은 “다만 민주당원으로서 새 정부 출범에 기여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신·구파 갈등이 혁명을 불렀다는 주장은 쿠데타세력이 조작한 명분”이라고 단정했다. 이용원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13)분출하는 욕구(上) /사형수 편지

    ‘혁명은 독한 술과 같다’던가. 4월혁명 후 한국사회는 용광로처럼 들끓었다.李承晩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시민은 제각각 품고 있던 기대와 욕구를 마음껏 뿜어냈다.남자나 여자,노인과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시위에 나서 목청을 높였다.그것은 어쩌면스스로 자유를 쟁취한 자의 권리행사였다.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고들 말한 張勉정부 8개월여.그때일어난 데모 중에는 지금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례들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교사전근 반대’를 내세워,또 ‘어른들은 이제 데모를 그만 하라’고 요구하며 각각 데모하는가 하면 경찰관들은 국회의원이 경찰관의따귀를 때렸다고 시위를 벌였다.군인도 예외는 아니었다.논산훈련소에서는정훈부 사병들이 “宋모중령이 우리를 머슴처럼 부려먹는다”고 항의데모를벌이려고 해 장교들이 가까스로 저지한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 시기의 데모가 모두 무절제하고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많은 부분은 자유당 독재정권의 유산을 청산하는 일과 관련이 있었다.6·25 때의 양민학살사건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구가 대표적인 예다. 1960년 5월11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는 주민 70여명이 朴모씨를 불태워죽이는 처참한 사건이 일어났다.51년 이 지역에서 양민학살이 있었는데 당시 면장이던 朴씨가 주민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유족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사건발생 후 경찰이 출동했지만 오히려 주민들에게 매를 맞고 쫓겨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곳곳에서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달라는 요구가빗발쳤고 이에 따라 국회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직접 조사에 나섰다.그결과 신원면에서는 51년 봄 3개 부락 주민 600여명이 빨갱이로 몰려 金宗元이 지휘하는 화랑부대에게 학살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국회조사반이 파악한 6·25 당시의 양민 피살자는 경남 2,892명,경북2,200명,전남 524명,전북 1,028명,제주 1,878명 등이었다. 張勉정부 하에서의 가장 충격적인 시위사태는 60년 10월11일 발생했다.‘4월혁명유족회’회원을 비롯한 시민·학생 수천명이 민의원에 난입한 것이다. 그 원인은 4·19 때의 발포자,3·15 부정선거 관련자,정치깡패 등 4월혁명을 불러 일으킨 범죄자들에 대한 법원 판결이 너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는 피고인들에게 1심 형량을 선고했다.발포건과관련해서는 柳忠烈 당시 서울시경국장에게만 검찰 구형대로 사형을 언도했을 뿐 역시 사형이 구형된 洪璡基내무장관에게는 징역 9월이,郭永周 대통령경호관에게는 징역 3년이 각각 떨어졌다.나머지 피고인들에게도 무죄 또는 징역 8월∼5년이 언도됐다. 민심은 크게 격앙했다.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재판부를 규탄하는 데모가 잇따르다가 급기야는 10월11일 내각책임제 권력의심장부인 민의원을 강타한 것이다. 국회 난입에는 환자복에 목발을 짚은 4·19 부상자 50여명이 앞장섰다.이들은 본회의장으로 몰려가 의사진행을 중단시켰다.그들은 “하루빨리 혁명입법을 완성하라”고 요구했으며 민주당 의원들에게는 “신·구파가 싸우지 말고 화합하라”고 강요했다.이에 구파의 金度演과 신파의 林文碩,구파의 徐範錫과 신파의 李哲承이 억지로 악수를 나누는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상황을 郭尙勳 민의원의장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부상학생의 위세가 당당하여 마치 부상학생들의 천하와 같은 감이들었고 아무도 감히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정권을 우리가 주었는데’하는 생각은 ‘부상학생 천하제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국회에 경호권을발동하여 한번 크게 호령을 해줄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그들의 항의방법이너무도 졸렬하여 그만 자신을 잃어버렸다”거듭되는 데모로 사회는 불안정하고 정부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진 듯한 이같은 상태,훗날 ‘무능하다’는 비판의 근거로 제시된 이 상황을 張勉정부는어떻게 판단하고 있었을까. 張勉의 뜻은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번 주어보자”는 데 있었다(회고록에서 인용).그는 “오랫동안 자유당정권 하에서 억눌렸던 국민이 자유가허락된 이때에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한번은 마음껏 발산시키고 나서야 가라앉을 것은 어쩔 수 없는 뻔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작용했음도 물론이다.張勉은 “귀와 입으로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이는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기 때문”이었다.결국 張勉은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혐오를 느낄 때 비로소 진실한 자유를 얻는다”는 신념을 실천하고 있었다. 張총리 의전비서관을 지낸 李泓烈(77)은 4·19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한사건 직후 비서관들이 “비상대책기구를 구성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건의했다고 기억했다.자신을 비롯해 宋元英공보비서관,정보담당인 해군尹대령 등이 시국을 걱정하다 張총리도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별도기구를 직속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한다. 이에 자신이 비서진을 대표해 말했더니 張총리가 “泓烈군,무슨 소리야.민주적인 행정을 하자고 투쟁을 해서 총리가 된 것 아닌가.비상수단을 꼭 써야한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날 거야”라고 안색을 바꾸며 꾸짖더라는 것. 張勉과 그의 정부가 믿은 것은 시간이었다.세월이 지나 혁명의 흥분이 가라앉으면국민은 무절제한 자유가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가를 깨닫겠지,그리고그 자각(自覺) 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꽃필 것이라고 기대했다.실제로 1961년에 접어들자 데모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5·16의 총성이 울려퍼지기전까지 張勉정부의 교과서적인 민주주의는 꽃망울을 맺어가고 있었다. - 張勉 저격 共謀 사형수 편지 첫 공개 張勉의 인품과 인간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는 편지 2통이 8일 공개됐다.그의맏아들인 張震 서강대 명예교수 부부가 최근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이 편지들은 한때 그의 목숨을 노린 崔勳이 1965∼66년에 걸쳐 보낸 것이다. 崔勳은 1956년 9월28일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벌어진 ‘張勉부통령 저격사건’의 범인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3명 가운데 하나이다.현장에서 張勉에게 직접 권총을 쏜 金相鵬과,金에게 권총을 마련해준 李德信(당시 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 사이를 연결해준 것이 崔勳이었다. 65년 7월27일자 소인이 찍힌 첫 편지에서 崔는 張勉에의 존경심과 고마움을 절절히 토해냈다.그는 “진작 편지를 올릴 마음 간절하였으나 침묵을 지키는 것이 박사님의 쓰라린 상처를 위로해드리는 일일 것이라는 어리석은 마음에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은혜를 못잊어 조석으로 박사님을위해 기원하는 한 생명이 이 땅 지붕 아래 살고 있다는 점만은 알려드리고싶었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는 張勉총리가 60년 10월1일 감형을 해줘 사형을 면한 일,그해 12월에는 직접 교도소를 방문해 털내의를 건네준 덕에 따뜻하게 겨울을 난 일들을 기억했다. 崔는 “박사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사상을 시범하신 사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서 “박사님이 ‘그대의 죄를 전부 사해주노라’라는 말씀을 친히 들려주실 날이 오기를 간망(懇望)한다”고 기원했다. 張勉은 崔勳에게 바로 답장해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여러차례 오갔고,그 편지에서 張勉은 가톨릭에 귀의하도록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현재 남아 있는 두번째 편지(66년 1월9일자 소인)에 이를 알려주는 구절들이 나온다. 새해인사를 겸해보낸 이 서신에서 崔勳은 “박사님의 편지를 받은 후 반년 이상이나 신중히 생각한 결과로 근방의 주임신부님을 곧 만나게 될 것”이라고 가톨릭에 입문할 결심임을 알렸다.이어 “영세를 받기까지는 자주 편지를 올리지 못하더라도 오해 마시기 바라며 그러는 것이 박사님의 심경에 위로를 드리는 것이라는 졸렬한 생각에서”라고 밝혔다. 張勉과 崔勳 사이에 오간 편지는 이 두 통밖에 남아 있지 않다.둘 다 우편봉함엽서이며,‘대구시 삼덕동 82의 1’에 사는 崔勳이 서울 명륜동 張勉의자택으로 보낸 것이다. 崔勳이 편지를 보낸 시점은 張勉이 5·16쿠데타로 정권을 탈취당한 지 4년이 지난 때였다.張勉이 정계에서 완전 은퇴해 자택에서 가톨릭 서적을 번역하는 데 몰두한 시절이다.따라서 崔勳의 편지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존경심과 그리움을 담고 있을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국무총리로서 국정의 최고책임을 맡았던 정치가,한때 그를 암살하려다 체포돼 사형이 확정됐던 사형수.역사의 현장에서 벗어나 둘만이 나눈 대화는 張勉을 가까이서‘모신’ 어느 누구의 증언보다도 張勉의 인간적인 면모를 진솔하게 들려준다.그 귀한 ‘증언’이 가족도 모르게 30여년을 숨어지내다 올해 ‘張勉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세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張勉에게 총을 쏜 金相鵬은 복역을 마치고 나와 목사가 되었다.金목사는 지난 87년 張勉의 셋째아들인 張益주교(춘천교구장)를 만나 ‘위대한 인격자 張勉’을 함께 회고했다. 李容遠
  • [제2공화국과 張勉](12)少壯派의 도전/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張勉정부의 안정을 뒤흔든 내부 요인은 민주당 신·구파의 대립만이 아니었다.당내 젊은 의원들,특히 신파쪽 소장파들의 반발과 도전은 만만치 않았다. 張勉내각 명단이 발표된 1960년 8월23일 밤 민주당 신·구파의 소장파 대표 두 사람이 만나 양 세력이 제휴해 내각을 견제한다는 데 합의한다.다음날신파 소장파의 주요 멤버인 金在淳의원은 “신·구파 소장의원들이 새로운서클을 형성해 정계를 정화해야 한다”는 ‘제3서클론’을 제기하고 “앞으로 구파의 朴浚圭·金泳三의원 등과 본격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金의원은 이어 “우선 신파 중진들의 모임인 13인위원회 멤버를 제거해야겠다”고 발언했다.이날자 신문들은 ‘민주당 소장파가 張내각 무너뜨리기(倒閣·도각)에 나섰다’는 식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8월25일 신파쪽 소장파의원들은 정치혁신을 표방하고 ‘소장동지회’(후에‘신풍회’로 개칭)를 구성했다.참여의원은 모두 36명으로 대표 격인 총무는 李哲承,대변인은 金在淳,간사는 趙淵夏가 각각 맡았다.이들은 “당내당(黨內黨)으로서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공언했다. 張勉의 첫 내각에는 소장파의원 누구도 장관으로 끼지 못했다.禹熙昌(외무)金載坤(상공)金學俊(체신)등 세 사람이,내각에서 국회쪽 일을 처리하는 정무차관으로 발탁됐을 뿐이다.따라서 정가에서는 “소장파 리더인 李哲承이 국방장관 직을 요구했으나 무산되자 이에 반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소장동지회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그것은 張총리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라기 보다 그를 둘러싸고 요직을 독점하다시피한 ‘고시파’에의불만이었다.고시파란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해 고급관리를 한 사람들을 지칭했다.張勉의 첫 내각에서는 金永善재무 曺在千법무 申鉉燉보사金善太 무임소장관 등이 이에 해당됐다.이 그룹의 지도자는 은행가 출신인吳緯泳 국무원사무처장이었으며 이들을 흔히 ‘원내자유당계’로 불렀다. 실제로 내각이 출범하자 구파의 梁一東은 “張勉내각이 아니라 吳緯泳내각”이라고 깎아내렸고,신문에서도 “혜화동 吳씨 사랑방에 속옷 바람으로 앉아 있던 분들이 전원 입각했다”고 비아냥댔다. 소장동지회는 또 李錫基의원이 원내총무 물망에 오르자 “원내자유당계가내각 요직을 독점한 데 이어 총무까지 차지하려느냐”면서 李哲承을 원내총무로 미는 등 저항을 계속했다.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가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것은 ‘7·29총선’직후부터이다.광복이후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해 온 李哲承은 4·19혁명에서 7·29총선에 이르는 정치적 과도기에 학생운동 동지들을 공천하고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총선이 끝나자 李哲承은 30∼40대 초·재선 의원들을 규합해 리더로 떠올랐다. 하지만 신파 소장파가 이념적인 지향성을 공유(共有)하거나 결속력이 강했던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초선의원으로서 張勉내각에서 내무차관을 지낸 金永求(79)는 내내 소장파모임의 멤버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그는 “젊은 국회의원들이 ‘힘은 없지만 청신(淸新)한 정치를 해보자’고 만든 모임이지 당내 서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자신도 고려대교수(정치학 전공)시절 李哲承을 가르친 인연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이라는 것.金永求는 “李哲承의 인맥이 많아 그에게 정치적 기반이됐던 것은 사실이고 張박사도 골치아파했다”면서 가끔은 張勉총리가 자신에게 소장파를 설득하도록 지시했다고 공개했다. 어쨌든 소장파는 한때 신파 의원의 절반 가까이를 확보할만큼 세력을 키웠고 그에 따라 張勉내각에 사사건건 공격을 가했다.또 張勉정부에서는 개각이 모두 세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집요하게 물갈이를 요구했다.그렇지만 2차내각에 金在淳 외무차관·金永求 내무차관이,3차 내각에 朴珉基상공차관 등몇몇이 들어갔을 뿐 끝내 장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1961년 1월24일 소장동지회는 ‘신풍회(新風會)’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으로 정파의 모습을 띤다.이틀뒤에는 신민당(민주당 구파)과 무소속의 소장파가 합세해 “새생활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청조회(淸潮會)’를 만든다. 신파 지도부와 신풍회사이의 갈등은 61년 2월 ‘중석사건’으로 드디어 폭발한다.26일 신풍회의 咸종빈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중석이 일본 동경식품에 중석 400t을 수출키로 하면서 100만달러의 커미션을 받는 이면계약을 맺었다”고 발설한 것이다.咸의원은 아울러 그 배후에는 吳緯泳 당시 무임소장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폭로’는 정가에 태풍을 몰고왔다.신민당을 비롯한 야당과 신풍회는張勉정부 최대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라고 흥분했고 언론도 날마다 의혹을 대서특필했다.급기야 배후로 지목된 吳장관은 咸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야당 요구대로 국회에는 ‘중석사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는 지경에까지이른다. 사건이 확대되자 咸의원은 “소문을 들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고 발뺌하고 사과하지만 張勉정부의 이미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5·16후 쿠데타군은 이 사건을 대표적인 부패사례로 꼽아 철저히 수사하지만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張勉내각이 이 사건과 관련없음을 오히려 쿠데타세력이 입증해준 꼴이 된 셈이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두달여 지나 월간 ‘사상계’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당대의 독설가’로 불리던 申相楚는 張勉정부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3신(新)’을 꼽았다.‘3신’이란 이름에 신(新)자가 들어간 세가지,곧 ‘정부를무조건 두들겨팬 신문 민주당 구파가 떨어져나가 만든 신민당,그리고 신풍회였다. 張勉총리의 공보비서관을 지낸 故 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신풍회가)시시비비로 나온다고 하지만 항상 ‘비(非)’쪽이라 과연 당내 서클인가 의심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30년전 신풍회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공개정치를 표방하는 풍토였다고는 하나 지나친 것이 아닐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 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李哲承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77)은 제2공화국 때 만40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국회의원이었다.그런데도 3선의원인 그는,소장파 의원 30여명이 속한 신풍회의 리더로서 ‘실세’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풍회가 張勉정부를 흔들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정부나 당에 해를 끼친 일이 없어요.다만 당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고 의견이나 정책을 낸 것까지 트집잡는다면 할 말은 없소만은” 李의장은,신풍회가 당내에서세력다툼을 벌이는 ‘파벌적’인 성격을 띤 게 아니고 일종의 정책연구 모임이라고 못박았다.“신파 지도자들이 노장층이어서 정치에 새바람(新風)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를 택했지만 사실 당에서 내각에 보낼 장관이나정무차관 재목이 충분하질 않았어요.지방자치제도 시행 중이니 시·도의원들도 키워야 했고.신풍회가 사람을 키워 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구실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張勉내각이 들어선 뒤 신풍회 멤버들이 정무차관으로 많이 들어간 것도 그때문이라는 설명이다. 李의장은,張내각 출범때 국방장관 자리를 얻지 못해 곧바로 ‘도각 운운’했지 않느냐는 질문에 “뭘 도각까지야….신문들이 과장한 거지”라고 부인했다.그러나 국방장관 자리와 관련해서는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남들도 다 내가 국방장관이 된다고들 믿었어요.민주당 신파에서 군 인사들이나 국방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또 나는 그때 이미 장관이 될만한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노장의원들이 결사반대했다고 한다.李의장은 그 까닭을 “내가 소장파 40명쯤을 거느리고 있는데 군까지 쥐게 되면 총리 자리를 노릴까 걱정해서”라고 풀이했다.그러면서 “張박사가 총리를 한두차례하고 난 다음에는소장파가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李의장은 “내가 국방장관이 됐다면 쿠데타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면서 “(쿠데타 세력이)할 생각도 못했고 하려 해도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이나 제2공화국,그리고 張勉총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부했다.민주당은 비록 파벌과 견해차를 갖고 있었지만 순수한 민주적 정당이었고,張勉정부도 정경유착이 없는 깨끗한 정부였다고 평가했다. “대화와 타협,그리고 법치(法治)가 민주당과 張勉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고 밝힌 李의장은 “통솔력이 부족해 질서를 잡지 못했다고들 하는데 그때는 시위를 단속하는 법이 없어 데모 자체가 불법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李의장은 5·16쿠데타를 일본 도쿄에서 맞았다.미국에서 열린 제16차 UN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미국으로 돌아가 망명생활을 하다 1964년귀국하지만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71년에야 8대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張박사는 덕망과 인격 면에서는 성직자보다도 깨끗한 분이었습니다.외유내강한 분이기도 하고.부통령 시절 저격당했을 때도 의연했고,형무소나 다름없는 순화동 부통령공관을 끝까지 지켰습니다.그렇지만 난세의 지도자로서는 약했다고 봅니다”李의장은 요즘도 張勉총리가 그립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 [제2공화국과 張勉](11)신구파 대립과 分黨(下)

    張勉총리는 조각(組閣)을 발표한 다음날인 1960년 8월24일 아침 기자회견을 가졌다.새 내각의 포부,국민에의 바람 등 기본사항 몇가지에 관해 질의·응답이 오간 뒤 한 기자가 신파 일색의 조각 결과를 염두에 둔듯 ‘거북한 얘긴데…’라며 물었다.“이 내각이 얼마나 오래갈 것으로 생각하는가.” 張총리는 각료 13명을 한번 훑어보고는 “이 내각은 잠정적인 것이며 언제든지 거국내각을 짜겠다”고 답변했다.이어 “민주당 구파도 좋고,무소속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거국내각을 조속히 구성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신문들은 이를 두고 “張총리 자신이 아마 신파 단독내각에 몹시 불만이 있거나여론의 압박을 느끼는 모양’이라고 풀이했다. 국민에게 내각출범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개각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것이 張勉이 처한 현실이었다.‘7·29 총선’에서 80% 가까운 의석을 독점했으나 그것은 민주당 신·구파를 합한 숫자일뿐,신파건 구파건 단독으로는 의회에서 안정세력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였다. 張총리가 이처럼 기자회견 석상에서 공식적인 ‘구애(求愛)’를 했는데도구파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尹潽善·張勉·郭尙勳·柳珍山 등 청와대 4자회담에서 ‘신·구파 장관 비율을 5대5로 한다’고 합의한 내용을 깼으므로 더이상 신파를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구파의 반격은 즉각 나타났다.8월31일 민의원(民議院)에 ‘구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했다.가입한 의원은 86명이었다.9월3일에는 柳珍山을 원내총무로 선출했다.내각책임제 아래 힘의 원천인 민의원에서 신·구파는 공식적인 별거에 들어간 것이다. 張총리는 9월2일 “구파의 교섭단체 등록은 사실상 분당행위”라고 비난하면서도 한쪽으로는 구파를 품에 안는 개각을 추진했다.“장관 5석을 줄테니들어오라”는 제의였다. 사태에 큰 진전이 없자 洪翼杓내무,玄錫虎국방,李泰鎔상공,吳緯泳 국무원사무처장 등이 9월7일 사표를 낸다.구파를 받아들이려고 빈 자리를 미리 만든신파의 고육지계(苦肉之計)였다.이틀뒤 구파는 조건부로 입각을 결정한다.입각은 단순히 ‘파견’이며 지도부가 ‘소환’하면 언제라도 그만둔다는 내용이었다. 張내각은 출범 20일만인 9월12일 權仲敦국방,金佑枰부흥,朴海楨교통,趙漢栢체신,羅容均보사 등 구파 5명을 새로 받아들인 개각을 단행했다.구파로서 처음부터 입각한 鄭憲柱는 교통장관에서 국무원사무처장으로 옮겼다. 2차내각이 비록 ‘연립’의 모양을 갖추긴 했지만 구파의 불만은 여전했다. 張勉 회고록에 따르면 “尹潽善씨는 구파에 준 자리가 빈탕이라고 말했다”는 것이고,또다른 구파 지도자인 金度演도 “어느 부 장관에 누구를 배정해달라고 시사했는데도 무시했으니 참다운 협조정신으로 보기 어렵다”고 공식적으로 평했다. 이제 분당(分黨)이라는 물줄기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구파는 내각 참여 나흘만에 분당작업에 착수해 민의원 65명,참의원 17명에게서 서명을 받았다.이에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미루던 신파도 민주당 명의로 교섭단체를 공식화한다. 60년 9월23일 현재 민의원의 교섭단체별 의원 수는 민주당(신파)95,구파동지회 86,무소속 모임인 민정구락부가 41,그밖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의원9명 등이었다.아직도 신파만으로는 과반수에서 21명이 모자란,여당의 ‘안정다수 확보’와는 거리가 먼 세력판도였다. 분당이 현실로 나타나자 구파 내에서 이를 거부하고 신·구파 화합을 이루려는 의원들,세칭 ‘합작파’가 등장한다.합작파에는 구파의 공식참모기구인 ‘7인위’의 閔寬植을 중심으로 31명이 참여했다. 합작파는 9월30일 성명을 발표한다.“내각책임제 정치는 원내 안정세력 유지에서만 가능한 것인데,신파나 구파나 단독으로 안정세력을 구축할 수 없음은 사실상 입증됐다.그러므로 신·구파가 일치단결하여 난국타개의 힘찬 기개를 국민 앞에 실증해야 한다”는 요지였다.아울러 ‘분당을 추진하는 자를 제명처분하라’는 등의 5가지 사항도 요구했다. 그러나 구파는 한발한발 분당의 길로 나아간다.11월8일 신당발기준비대회를 열어 이때부터 신민당(新民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민주당과 별개의당으로서 독립한다.민주당은 창당 5년한달여만에,또 7·29총선에서 국민의전폭적인 지지를 받은지 석달여만에 신파의 민주당과 구파의 신민당으로갈라선 것이다. 그렇다면 신·구파 분당을 당시에는 어떻게 평가했을까.7·29총선 직후인 8월3일 서울신문은 ‘민주당은 갈려야 하나’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를 실어분당에 대한 학계인사 3명의 찬반론을 소개했다. 먼저 金成熺 서울대교수(정치학)는 “신·구파는 전연 노선 차이가 없고 문제는 관직의 분배에 있다”고 지적하고 “민주당이 구체적인 정책실현도 해보지 않고 분당한다는 것은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金相浹 고려대교수(정치학)도 “민주당이 분당하려면 절차를 밟아 다시 총선거를 함으로써 국민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申奭鎬 고려대교수(역사학)는 “민주당이 7·29총선에서 예상외의 압승을 함으로써 국민은 또다시 일당독재를 염려할 현실에 처하였다”면서 “대국적인 견지에서 일당독재를 방지하려면 절대적으로 분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도 분당을 찬성하는 여론은 일부 있었다.그러나 그후의 역사는,분당과정과 그후 민주당(신파)·신민당(구파)의 대립이 내각책임제에서 정치안정을 무너뜨리고 張내각의 정책수행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고 신·구파 정쟁이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다만 국민 여망을 저버리고 내부의 권력투쟁에만 집착하는 정치세력은스스로를 망치고 국민에게도 큰 불행을 가져온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60년 11월 발기준비대회를 열어 딴살림을 차린 신민당은 61년 2월20일 창당식을 갖고 정식 출범한다.위원장에는 金度演이 선출됐고 당의 실질적인 살림을 맡는 간사장에는 柳珍山이 뽑혔다. 李容遠
  • [제2공화국과 張勉](10)신구파 대립과 分黨(中)

    1960년 민주당은 좌절 속에서 출발한다.대통령후보인 趙炳玉이 신병치료차미국에 갔다가 2월 15일 현지에서 별세한 것이다.선거법상 후보를 교체할 수 없었으므로 민주당은 4년 전 申翼熙의 서거에 이어 또다시 대통령후보 없는 선거를 치르게 됐다. 홀로 남은 張勉부통령후보는 ‘3·15 부정선거’에서 자유당 李起鵬후보에게 패한다.득표 결과가 ‘李起鵬 833만표,張勉 184만표’라는,자유당 사람들 스스로도 너무 심했다고 인정한 부정선거였다. 분노한 국민은 ‘3·15 마산시위-4·11 제2차 마산시위-4·19 전국시위-4·25 대학교수단시위’로 이어진 4월혁명을 이룩해냈다.4월 27일 李承晩이 국회에 낸 대통령직 사임서가 수리돼 許政 외무장관을 수반으로 한 과도정부가 들어선다. 이 무렵 민주당 신·구파는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부딪친다.내각책임제로의 개헌문제였다.내각책임제는 원래 민주당이 창당때부터 내세운 주요 목표였다.그런데도 이를 채택하는 일이 새삼 논란이 된 까닭은 정파간 이해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사실 내각책임제 개헌은 59년 초한 차례 추진된 적이 있었다.추진세력은자유당 내 온건파와 민주당 구파였다.59년 2월 자유당 온건파를 대표하는 李在鶴국회부의장이 柳珍山민주당원내총무를 방문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제의한다.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여야의 격심한 대립을 그냥둔 채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치르다가는 끝내 국민이 피를 흘리는 사태를 초래할 것 같아서”였다. 柳珍山은 물론 흔쾌히 받아들였다.이후 李在鶴과 柳珍山은 李起鵬·趙炳玉의 승인을 얻어 극비리에 개헌을 추진한다.그러다가 趙淳(자유당)·金義澤(민주당)·梁一東(무소속) 세 사람이 4월 6일 수안보에서 만나 개헌을 논의한 사실이 보도되는 바람에 만천하에 공개된다. 추진 사실을 몰랐던 민주당 신파는 큰 충격을 받고 반발한다.신파는 자유당과 구파가 손잡은 개헌 논의를 ‘張勉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을 박탈하려는음모’로 보았다.개헌 추진은 자유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심해 흐지부지된다. 그러나 1년 후인 60년 4월의 내각제 개헌은 전혀 양상이 달랐다.먼저 4월혁명을 이룩한 국민의 여론이 독재를 방지하려면 내각책임제를 해야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민주당 구파와 자유당도 개헌을 당연하게 여겼다. 문제는 민주당 신파에 있었다.일각에서 “4월혁명의 원인이 3·15 부정선거에 있는 만큼 정·부통령선거를 먼저 하고 개헌은 그 다음에 해야 한다”는주장을 들고 나왔다.이른바 ‘선(先)선거 후(後)개헌’론이었다.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면 張勉이 대통령에 당선되리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파 쪽의 이같은 주장은 곧 무너진다.李承晩의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국회 해산-즉시 총선거’라는 일정을 담은 시국수습결의안을 채택한다.내각책임제 개헌안은 6월 15일 국회 투표에서 찬성 208표,반대 3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된다. 신·구파 대립은 뒤이은 7·29 총선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됐다.내각책임제로 개헌한 이상 정권은 민의원을 많이 낸 쪽으로 가게 돼 있었다.총선일이 확정되자 신파는 중앙당에,구파는 삼각동 전업회관에 지휘본부를 차려 치열한경쟁에 들어간다.공식적인 당 후보는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선정했지만 사실은 신파 따로,구파 따로 공천했다. 심지어 張勉이 출마한 용산갑구,尹潽善의 종로갑구,金度演의 서대문갑구에도 자파 후보를 내세웠다.이들이 다른 후보의 지원유세에 나서지 못하도록발목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이와 함께 분당론(分黨論)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때구파의 중진인 蘇宣奎가 전주에서 “우리는 보수양당제를 실현하기 위해 총선거 후 분당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柳珍山·徐範錫 등 구파 중진들의 지지발언이 이어졌다.총선 결과 민주당은 민의원 219석(재선거 대상 제외)가운데 17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신·구파는 소속의원의 수를 계산하며 각각 자파가 승리했다고 공언했다. 구파는 실제로 신파를 앞섰다고 자신한 듯하다.지난해 작고한 高興門은 회고록에서 “대충 표계산을 끝내니 구파 우세가 분명해 보였다.진산 등의 계산으론 구파의 3∼4표 우세였다”고 기술했다. 8월 3일 민의원 부의장 선출을 놓고 신·구파는 처음으로 표대결을 벌인다. 신·구파는 민의원 의장에 신파의 郭尙勳,부의장 한 석에 구파의 李榮俊을추대했다.무소속 몫으로 남긴 부의장 한 자리가 표대결의 대상이었다.투표결과 구파가 지지한 徐珉濠(무소속)가 신파에서 민 李載灐(무소속)을 114 대 99의 15표차로 눌렀다.구파의 우세가 숫자상으로 확인된 셈이다. 이에 고무된 구파는 8월 4일 신파와의 결별을 선언했다.이어 6일에는 비슷한 시각에 신·구파가 당선자대회를 따로 가졌다.신파 모임에 민의원 75명,구파 모임에 83명이 참석했다. 尹潽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구파는 내친 김에 총리까지 독점할 양으로 金度演을 지명하지만 실패한다.총리 자리는 여론의 지지와 무소속 일부의 동조에 힘입은 張勉에게 돌아갔다.張勉이 총리 인준을 받은 다음날 구파는 민·참의원 총회를 열어 국회에 별도의 교섭단체로 등록할 것을 결의한다. 한편 張勉총리는 8월 21일 청와대에서 4자회담을 갖고 신·구파를 아우르는 조각(組閣)을 논의한다.이 자리에는 張총리와 尹潽善대통령,郭尙勳민의원의장,柳珍山이 모여 신파에서 5명,구파에서 5명,무소속 2명으로 내각을 구성하기로 합의한다.구파는 이튿날 총회를 열고 7시간의 격론 끝에 張勉내각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신·구파 연립내각은 끝내 성립되지 않았다.구파 모임을 마친 金度演과 柳珍山이 자정 가까운 시각에 구파 각료 명단을 들고 張총리를 찾았을때 張총리의 입장은 그새 바뀌어 있었다.“구파가 별도의 교섭단체를 포기해야 받아들이겠다”는 새로운 조건을 내건 것이다. 신·구파 연립내각 구상은 깨졌다.張총리는 8월 23일 신파 10명,구파 1명(鄭憲柱교통),무소속 2명(朴濟煥농림,吳天錫문교)으로 구성된 각료 명단을 발표한다.조각을 둘러싼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신·구파는 더이상 화합할 수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 ‘分黨' 세력은 역사의 죄인 10대 국회 부의장으로서 국회의장 직무대행을 지낸 閔寬植씨(81)는 1954년12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뛰쳐나온 ‘자유당 탈당파’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무소속으로 남아 58년 5월 선거에서 재선 의원이 된 그는 그해 9월 1일 민주당에 들어가 趙炳玉의 참모로 구파에서 맹활약했다.그런데도 구파가총리로 金度演을 지명했을 때와 분당(分黨)을 추진할 때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끝까지 반대했다. “내가 상산(金度演의 아호) 총리 지명을 반대하자 상산이 창신동 집으로세 차례나 찾아왔습니다.‘유석(趙炳玉의 아호) 생전에는 열심이더니 왜 그러느냐’면서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閔전의장은 그때마다 金度演을 오히려 설득했다고 한다.민주당에는 엄연히신·구파가 있으니 대통령과 총리 자리를 하나씩 나눠가져야 할 것 아니냐,그런데 구파가 힘이 약해 대통령을 맡았으면 총리는 당연히 신파에게 넘겨야 한다고 했다는 것.閔씨는 “하지만 상산의 귀에는 내 얘기가 전혀 들리지않는 모양이었다”고 회고했다. 張勉이 총리가 되고 나서 농림장관으로 입각하라는 교섭을 받지만 거절한다.“개인적으로 나이 50이 되기 전에는 당에서건,행정부에서건 큰 감투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데다,어쨌든 구파의 결정을 무시하고 개인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張勉내각 명단이 발표되니까 제외된 사람들이 일제히 ‘도각(倒閣)운운’하며 공격에 나서더라”면서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정말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들어 서글펐다”고 말했다.구파에서 분당 움직임이 확연해지자 閔전의장은 뜻을 같이하는 동료의원들을 이끌고 분당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선다.‘합작파’라고 불린 이들은 한때 그 숫자가 30명쯤에 이를 정도로 세를 모았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閔전의장은 “분당을 추진하는 세력들은 합작파가 張총리에게서 공작금을타다 쓴다느니,장관 자리를 약속받았다느니 온갖 중상모략을 해댔다”면서“신파는 신파대로 합작파를 냉대했다”고 술회했다. 합작파 의원 가운데 20여명이 민주당 교섭단체에 가입하고 일부는 구파의신민당에 들어가 사실상 해체된 뒤 그는 61년 2월 신민당에 합세한다.“유석(趙炳玉)선생을 따르던 대부분의 동지들이 이미 신민당에 들어가 있어 다수에 복종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였다고는 하지만 몇달 가지 못했고 게다가 신·구파 싸움으로 제대로 운영해볼 기회조차 없었다”고 말하는 閔전의장은 “지금 국민이 내각책임제에 관해 좋다,싫다를 말할 수 없는 이유가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는 “신·구파가 힘을 합쳐 내각책임제를 잘 운영해 민주주의를 멋지게 꽃피우고 경제건설도 완성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아쉬워하면서 “분당에 앞장선 정치인들은 역사의 죄인”이라고 단정했다.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공과를 평가해 달라고 하자 閔전의장은 “제2공화국이 무너지는 데 두 분 다 책임이 크다”고 운을 뗀 뒤 “더이상 구체적으로 평가하고 싶지않다”고 말문을 닫았다.
  • [제2공화국과 張勉]- (9) 신구파 대립과 分黨(상)/비교

    李承晩독재체제에 맞선 통합야당 민주당은 1955년 9월19일 탄생한다.이날서울 태평로 시공관은 하루종일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열기로 들끓었다.전국에서 모여든 민주당 대의원 2,000여명이 오전에는 발기인대회를,오후에는 창당대회를 잇달아 열었다.오전 대회에서 鄭一亨의 경과보고에 이어 張勉의 인사말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대한민국을 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일체의 독재를 배격한다고 정강의 서두에 내걸었습니다.우리는 진실한 민주주의를 살려나가기 위해 공정한 선거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후의 창당대회에서는 申翼熙가 민주당 출범의 의의를 밝히는 인사말을 했고 朴順天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는 민주세력의 집결 강화만이 국정쇄신의 방도임을 확신한다”고 선언문을 읽어내려갔다. 창당대회 다음날 민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 申翼熙는 234표를 얻어 49표에 그친 張勉을 누르고 선출됐다.이어 연기명으로 실시한 최고위원 투표 결과 趙炳玉(282표)·張勉(278표)·郭尙勳(262표)·白南薰(111표)이 뽑혔다. 이들 가운데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申翼熙,내무장관을 역임한 趙炳玉,민국당 최고위원 출신인 白南薰은 구파였고 총리를 지낸 張勉,국회부의장인 郭尙勳은 신파였다.이밖에 중앙상무위 의장은 成元慶(신파)이 맡았다. 집행기구 16부 부장은 尹潽善(원내총무격인 의원부장)·柳珍山(노동부장)·鄭一亨(섭외부장)·玄錫虎(조직부장) 등으로 구성됐다.구파는 대표최고위원을 포함한 최고위원 세 자리와 부장 7석,신파는 최고위원 두 자리에 상무위의장과 부장 9석을 차지해 신·구파는 처음부터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출발했다. 민주당 창당후 처음 맞은 큰 이슈는 다음해 치르는 제3대 정·부통령 후보를 뽑는 일이었다.당시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거론될 만한 인물은 申翼熙·趙炳玉·張勉 세 사람 정도였지만 대세는 申翼熙에게 기울어 있었다.초점은 부통령후보였다.신파는 張勉을 대통령후보로 민다고 공표했으나 내심은부통령후보를 노리고 있었다.구파는 구파대로 ‘대통령후보 申翼熙’를 기정사실로하는 한편 趙炳玉을 부통령후보로 세우려고 물밑작업을 벌였다. 이 문제는 郭尙勳이 적극 나서 해결됐다.郭尙勳은 趙炳玉을 찾아가 “이번에는 당신이 양보합시다.이번에는 누가 보아도 해공(申翼熙)이 적격이니 그를 시켜야 할 것이 아니오? 차후에 입후보하면 내가 적극 지원하겠오”라고설득한다(郭尙勳 회고록에서). 이에 趙炳玉은 “운석(張勉)이 대통령후보 경쟁에 나서지 않도록 책임져라”라는 조건으로 받아들인다.전당대회에서 申翼熙·張勉을 정·부통령 후보로 뽑은 민주당은 신·구파 구분없이 힘을 합쳐 선거운동에 매진한다. 56년 정·부통령 선거는 민주당이 李承晩정권을 누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할 절호의 기회였다.52년의 ‘발췌 개헌’과 56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어진 李承晩의 영구집권 음모와 자유당의 폭정(暴政)에 이미 많은국민이 염증을 느끼는 상태였다.게다가 申翼熙·張勉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민주당이 내건 선거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도 돌풍을 몰고 왔다. 56년 5월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유세에는 당시로서는 짐작도 못할 30만∼4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그러나 민주당의 손에 들어온 듯하던 대통령 자리는한강백사장 유세 3일 후에 그만 손아귀를 빠져나간다.호남 유세에 나선 申翼熙가 5월5일 열차칸에서 급서한 것이다. 대통령후보 부재에도 불구하고 張勉은 李起鵬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된다. 이로써 민주당은 창당 9개월 만에 수권 능력을 가진 야당으로서 당당히 자리잡는다.이같은 자리매김은 58년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로 연결돼 민주당은 78석을 확보한다.창당 때의 33석에 비하면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민주당 위상 강화와 비례해 신·구파 대립도 점차 심해져 갔다.첫 충돌은정·부통령선거 직후에 찾아왔다.56년 7월 金度演·金俊淵·蘇宣奎 등 구파중앙위원 60여명이 연명(連名)해 최고위원 불신임안을 제출한다.이에 최고위원 전원이 사표를 내고 후임자 선출을 논의하게 된다. 신파는 “국민에게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張勉부통령이 당연히 대표최고위원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구파는 표대결을 요구한다.투표 결과 대표최고위원에는 趙炳玉이,최고위원에는 郭尙勳·張勉·金俊淵·金度演이 뽑힌다. 일부에서 분당을 거론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끝에 신·구 양파는 다음해부터 대표 및 최고위원을 중앙상무위가 아닌 전당대회에서 선출한다는 등 몇 가지에 타협하고 수습한다.이후 구파는 부통령인 張勉에게 당의 주도권을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그를 더욱 견제하게 됐고,신파는 張勉을 중심으로 더욱 똘똘 뭉치게 됐다. 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신·구파는 다시 한번 격돌한다.60년 정·부통령선거에 나갈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趙炳玉은 483대480 단 3표차로 張勉에게 신승한다.다음날 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는 거꾸로 張勉이 趙炳玉을 70여표차로 물리친다.최고위원에는 郭尙勳·白南薰·尹潽善·朴順天이 올랐다. 이 전당대회는 신·구파 사이에 메우기 힘든 골을 파놓았다.대회를 몇달 앞두고부터 양쪽의 경쟁은 한계를 넘어서 각종 추태가 난무했다. 趙炳玉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고 인신공격한 ‘결격사유 10개조’라는 괴문서가 전국 지구당에 배포되는가 하면,경남도당대회가신·구파 당원 간의난투극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신·구파의 격한 대립 속에서도 민주당은 趙炳玉대통령후보,張勉부통령후보 겸 당 대표최고위원 체제로 1960년을 맞는다.56년 申翼熙의 급서로 이루지못한 정권교체의 꿈을 이번에는 꼭 이룬다는 각오와 함께였다. 李容遠 - 신구파 내력과 특징 비교 민주당(民主黨)창당은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자유당(自由黨)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重任)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의 제5차 개헌안을 마련한다. 李承晩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터주려는 이 개헌안은 1954년 11월27일 국회에서 찬성 135,반대 60표로 부결된다.그러나 이틀뒤 자유당은 수학의 ‘사사오입’규정을 적용하면 개헌 정족수를 통과한 것이라는 궤변으로 헌법개정을공포한다. 이후 열달동안 반(反)李承晩세력은 통합야당 결성에 노력한다.한민당(韓民黨)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民國黨)과 무소속 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한다.여기에는 자유당을 뛰쳐나온 ‘탈당파’의원12명도 가세한다. 당시야당으로서는 민국당이 가장 컸지만 원내의석이 15석에 불과해 다른 야당 세력을 흡수,통합하지는 못했다.따라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전제로 55년 12월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신당추진 세력은 곧 의견대립에 부딪친다.민국당의 申翼熙 趙炳玉과재야의 張勉 등 ‘자유민주파’는 좌익에서 전향한 자,독재 또는 부패혐의가 짙은 자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명분으로 혁신계인 曺奉岩과 족청계 李範奭을 배제하려고 한다.반면 張澤相 徐相日 등 ‘민주대동파’는 범야세력의총결집을 주장하며 맞선다. 결국 민주당은 ‘자유민주파’만으로 출발하는데 당시 원내 의석은 33명이었다.이에 비해 자유당은 120여명,무소속은 40여명이었다.‘통합야당’을 표방했는데도 무소속으로 남은 의원이 40여명이나 된 사실은 야당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증거이자,민주당의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당후 민주당은 다시 신·구파로 갈린다.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申翼熙 趙炳玉이 중심인물이었다.한민당을 실질적으로 이끈 金性洙가 55년 2월별세한 뒤여서 구파의 대표성은 申翼熙가 갖고 있었다. 반면 신파는 張勉을 지도자로 鄭一亨 朱耀翰 등의 흥사단계(張勉은 흥사단계로 알려졌지만 흥사단에 가입한 일이 없다),吳緯泳 金永善 李相喆 등의 원내자유당계,玄錫虎 李泰鎔의 자유당 탈당파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한마디로 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구세력’이고 신파는 이를 제외한,새로 야당에 가입한 ‘신세력’이었다.하지만 더욱 중요한 차이점은 신·구파가 출신 배경,사회활동,이념적 지향에서 어느정도 구분지어진다는 점이다. 구파는 대부분 지주집안 출신에 독립운동가나 지사형이었고 상당히 보수적이었다.이에 견줘 신파는 관료·법관·금융계 출신의 전문인이 주류였다.韓昇洲 고려대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구파 지도자 가운데 80%는 처음부터 정계에나섰으나 신파 지도자는 오히려 60%가 행정·관료직으로 출발했다.韓교수는또 “연령을 보아도 구파 지도층은 평균 51세,신파는 48세로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신파의 지도력이 사실상 명확히 젊었다”고 평가했다. 정치행태에서도 달라구파는 비조직적이고 점잖아 “하나하나가 모두 장성같았지만”,신파는 조직적이고 투쟁적이어서 상부의 명령에 일거수일투족이 움직였다.(구파 출신 閔寬植 회고록에서)민주당 신·구파는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가 강한데도 ‘李承晩정권 타도’라는 공동목표아래 힘을 모았다.초기에는 그래도 단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59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을 놓고 대립이 심해졌다.4월혁명이후 정권장악이분명해지자 그때부터는 치열한 정권쟁탈전에 들어간다. 李容遠
  • [제2공화국과 張勉](8)尹潽善과의 갈등(下)/윤보선과 평가

    1961년 5월16일 새벽2시쯤 張勉은 총리 숙소로 쓰는 반도호텔 809호실에서경호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일어났다.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이 급한 일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張都暎은 “육군 30사단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막았고,현재 해병과 공수부대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다리에서 막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염려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아십시오”라고 덧붙였다. 張勉은 와서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기다리지만 張都暎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오자 張勉은 경호대장 등과 함께 지프를타고 반도호텔을 떠났다.거리가 가까운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사택을 찾았지만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잠시 몸을 피하려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혜화동 수녀원으로 갔다”(회고록 중에서).그리고는 55시간이 지난 18일 낮12시쯤에야 모습을 드러내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尹潽善은 새벽 3시30분에서 4시 사이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張勉과 마찬가지로 張都暎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張都暎은 “쿠데타가 일어나 헌병을 동원해 한강다리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뚫렸다. 쿠데타군이 시내로 들어왔는데 진압될 것같지 않다”고 우려했다(尹潽善 회고록에서). 尹潽善은 “피신하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일신의 안전만을 위해 300만 서울시민을 버릴 수 없고” 또 “그들하고 사리를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요, 설령피살이 된대도 그리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생각해” 자리를 지킨다. 5·16쿠데타가 발생해 제2공화국이 결국 무너지기까지 국무총리 張勉은 몸을 숨겼고 대통령 尹潽善은 현장에 남아 ‘유일한 헌법기관’으로서 쿠데타세력을 상대한다.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분쇄하지 못하고 자기 한몸 피신하는 데 그쳤던 張勉은 제2공화국 붕괴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그렇다면 尹潽善은 제 할일을 다한 걸까. 16일 낮 쿠데타 주역인 朴正熙소장과 柳原植대령이 청와대로 尹潽善을 찾아왔다.이 자리에는 玄錫虎국방장관과 張都暎 등이 함께 있었다.玄錫虎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반도호텔로 가서 張勉을 만나고 헤어진 뒤 쿠데타군에게 체포된 상태였다. 접견실에서 朴正熙 일행을 만난 尹潽善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열었다.이 말은 훗날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尹潽善을 비난하는 쪽은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투의 이 표현이야말로 그가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기까지 쿠데타세력과 관련해 보여준 행동을 설명하는키워드”라고 풀이했다.현장에 있던 玄錫虎는 회고록에서,尹潽善이 이 말에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張勉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朴正熙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밝혔다. 尹潽善의 설명은 물론 다르다.“그들(朴正熙 일행)을 대하는 마음이 서글퍼나도 모르게 이 말이 떨어졌고,당시 사회적·정치적 혼란상을 생각할 때 당장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같아서”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尹潽善은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잘 수습하라”는 말로 발언을 끝낸다.모두 물러갔다가 朴正熙와 柳原植이 다시 들어왔다.柳原植이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면서과거에도 대통령에게 충성을다했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마치 張勉내각이 물러나면 권력을 尹潽善에게 넘길 것처럼 들리게끔 하는말이었다. 尹潽善은 이 자리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미 국무부 자료를 보면,그는 白樂濬 참의원의장을 쿠데타군쪽에 보내 ‘헌법 69조에 따라 尹대통령이 새 총리를 임명한다면 군부가 권력을 이양하고 철수할 것인가’를 타진한다. 한편 朴正熙 일행에 이어 마셜 그린 주한미대리대사와 매그루더 UN군사령관이 함께 尹潽善을 방문한다.두 사람은 이미 “張勉총리 영도 하의 합헌적인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였다.두 사람은 “서울시내에 들어온쿠데타군은 4,000명이 채 안되므로 4만 병력만 출동시켜 서울을 포위해 들어가면 쿠데타군이 항복할 것”이라며 무력진압을 주장했다. 그러나 尹潽善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는 논리로 끝내 반대한다.그린은 “각하의 이번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매그루더는 尹潽善과의 면담후 본국 합참본부에 전문을 보내“尹대통령은 張총리를 몰아내고 싶어 가능한 법적 절차를 찾고 있다”고 보고한다. 尹潽善은 이날 오후 張都暎이 요청한 계엄령을 승인했으며 17일 오후 2시에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해 “군사혁명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대신한다”고 밝혀 張내각 퇴진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또 쿠데타를 “애국적인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張勉은 수녀원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사태의 전개를 알고 있었고 16일아침 그린 대리대사와 통화도 한다(그린의 증언).그는 내각 총사퇴를 결심한 이유를 “미대사관에서 尹씨의 태도를 연락받았는데 그가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회고록에서밝혔다.그러나 張勉은 尹潽善에게 직접 연락해 쿠데타 저지를 논의하거나,최소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직접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尹潽善은 張勉의 행방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제2공화국을 지키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정치적 지향과 인적 구성 등에서 이질적이었던 민주당의 신·구파,그리고 그들의 대표격인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갈등과 대립은 갓 피어난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히게 하는 크나큰 비극을 초래한다.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저울질한다면 張勉과 尹潽善 그 어느쪽으로도 저울추가 결코 기울지는 않을것이다. 이용원- [기고] 張勉과 尹潽善 평가 5·16쿠데타가 일어나 張勉총리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尹潽善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한 것은 두 사람의 비극적 결합을잘 말해준다.우리가 슈뢰더 독일총리는 알아도 대통령 이름은 잘 모르듯 내각책임제 아래 대통령은 명목상 존재에 불과하다.그런데도 尹潽善은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다 막상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때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해 버렸다. 尹潽善에게 쿠데타가 ‘올 것’인 이유는 자신의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당시 집권당은 한민당 후신인 구파와,재야 민주화세력인 신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민주당이었다.申翼熙·趙炳玉같은 비중 있는 지도자가사망한 뒤 구파를 이끌게 된 尹潽善은 전형적인 과거형 정치가였다. 구파의 전신인 한민당은 우익민족주의 세력과 친일파 세력이 혼재한 정당이었다.UN한국위원단이 ‘보수적 지주정당’이라고 지적했듯이 해방직후 토지개혁에 반대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李承晩의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따라서 한민당이 李承晩과 결별하고 야당의 길을걸은 것은 이념과 정책상의 대립이라기보다 李承晩의 권력독점에 대한 반발때문이었다.한민당은 해방이후 좌익세력의 급진성과 李承晩의 독선이 낳은‘반감(反感)’이란 정치적 공간을 적절히 점유해 생존한 과거형 정당인 것이다. 4월혁명후 ‘대통령=구파,총리=신파’라는 합의 덕에 대통령에 선출된 尹潽善이,자파인 金度演을 총리로 지명한 것은 정치적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과거형 정치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대통령과 총리를 모두 차지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구파는 결국 민주당을 뛰쳐나가 신민당을 창당한다.尹潽善은대통령으로서 이런 분열적 행위를 제지하기보다는 부추기는듯한 처신을 보였고,정부를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해 張勉정부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개인과 파벌의 이익을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한 행위인 것이다. 반면 신파를 이끈 張勉은 1960년대 한국상황에서는 등장이 너무 빨랐던 미래형 정치가이다.자유민주주의에의 신념과 종교적 경건함이 밴 구도자적(求道者的) 정치가인 張勉은 2000년을 눈앞에 둔 현재에도 시기상조일지 모를 정도로 선진적인 정치가였다.그는 尹潽善이 이끄는 구파의 끝없는 시비를 인내하면서,1960년 10월 제2공화국 경축식에서 말한대로 “정부의 시정목표로서경제제일주의”를 주창한 실질적이고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쿠데타 세력이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내세운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나 국토건설사업은 모두 張勉정부에서 경제제일주의를 실천하고자 수립한 것들이다.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해 경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張勉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실천되었더라면 5·16이후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재벌신화’라는 어두운 경제성장사는 ‘국민신화’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5·16후 두 사람의행보도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張勉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간 반면,尹潽善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세력의 朴正熙 후보와 1963년과 67년 두 차례 대결했으나 패배했다.현실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을 무렵인 1980년대에는 全斗煥 정권에 협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쿠데타후 두 사람의 삶은 현재우리 정치의 낙후성의 한 원인을 말없이 웅변해준다. [李德 一 역사평론가·문학박사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 [제2공화국과 張勉] (7) 尹潽善과의 갈등/金在淳 前국회의장

    1960년 8월29일 이른 아침 張勉총리를 비롯해 제2공화국 장관들이 서울역으로 모여들었다.이들은 ‘尹潽善대통령이 휴가 겸 민정시찰을 떠나니 모두 나와 전송하라’는 대통령 비서실의 전갈을 받고 나온 참이었다.이윽고 ‘관1호’차를 타고 尹대통령 부처가 등장했다.尹대통령은 張勉내각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오전 8시 특별열차 편으로 떠난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치권에서는 한동안 수군거림이 일었다.“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나오라고 ‘지시’하는 짓은 무엇이며,그렇다고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張내각은 또 뭐냐”하는 말들이었다.한마디로 “尹潽善은 월권한 것이고 張勉은 제 밥그릇도 못챙긴다”는 평이었다. 張勉정부 출범 닷새 후에 일어난 이 간단한 삽화는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는다.민주당 신·구파의 대결이라는 큰 구도 말고도 ▒권위주의적인 尹潽善과 다툼을 싫어하는 張勉의대조적인 성격 ▒처음 도입한 내각책임제를 양쪽 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듯한 미숙함들이 이 삽화에는 들어 있다. 제2공화국은 의회가 정치의 중심인 내각책임제였다.대통령은 의전적인 의미의 국가원수에 불과하며,총리야말로 행정권 담당자인 동시에 국정(國政)에관한 총괄적인 책임자였다.그러므로 尹潽善대통령은 국민과의 접촉을 자제하고,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리를 두는 게 도리였다. 그런데 尹대통령은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에 수록)에서 “틈틈이 민정시찰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밝혔듯이 자주 거리로 나섰다.도로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절이라서 그가 지방시찰에 나설 때면 으레 특별열차가 동원되곤 했다. 문제는 대통령과의 잦은 접촉이 국민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느냐에 있었다.정치학자들은 “국가통치의 중심이 총리인지,대통령인지 국민들이 혼동을 일으킨다”면서 “이같은 혼란은 정치안정에 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또 “尹대통령이 내각책임제에 상관없이 李承晩대통령이 누린 권위를 자신도 유지하고 싶어한 듯하다”는 풀이도 뒤따른다. 尹대통령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으며 張勉내각의 정책과 배치되거나,그것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불쑥불쑥 내곤 했다. 60년 10월10일 許政과도정부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張정부가 경질하자 尹대통령은 구파의 입장을 반영해 ‘유감’을 표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張내각에서 “왜 정치에 관여하는가”라고 항의하자 그는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다음해 1월12일 尹대통령은민·참의원 합동회의 치사를 통해 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그는 “한 개인,한 당파가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張勉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 張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했다.새해 들어 사회가 안정돼 가고 따라서 경제건설에 주력하려는 마당에 ‘국가적 위기’‘난국’ 운운하며 찬물을 끼얹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분개했다.朱耀翰·金永善 등 張내각의 핵심 각료들은 尹대통령이 내각을 붕괴시키는 명분을 쌓으려 한다고 의심했다. 張勉과 尹潽善의 갈등은 3월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일명 청와대 4자회담)에 이르러 극점에 다다른다.그 전날 밤 서울에서는 반공법·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하는 횃불데모가 있었다.張勉정부 때의 마지막 대규모 시위로,밤에 횃불을 동원한 방식 때문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23일 오후 8시 청와대에는 張勉총리·尹潽善대통령·郭尙勳민의원의장·白樂濬참의원의장이 모였다.張내각의 국방장관인 玄錫虎와 이미 신민당으로 분당한 구파의 金度演 柳珍山 梁一東 趙漢栢 徐範錫도 자리를 같이했다.참석자들이 남긴 회고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어서 각기 조금씩 다르지만 그 윤곽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張총리는 ‘반공을 위한 국민운동 전개를 논의하자’는 연락을 받고청와대로 갔다.처음엔 그런 이야기가 화기애애하게 전개되더니 어느결에 ‘정권문제’로 화제가 바뀌었다.이윽고 尹대통령이 “혼란한 정국을 극복할자신이 있느냐”면서 은근히 총리 사임을 종용하더라고 회고했다. 반면 尹대통령은,참석자들이 張총리에게 “거국내각이라도 만들어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결단을 촉구했다고 밝혔다.이에 張총리는 “내가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더라는것.그러나 尹대통령은 모임이 서로를 이해하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고 술회했다. 한편 柳珍山은 “尹대통령이 ‘현상유지책만으로 안된다면(정국을 담당할인물을)한번 바꿔 봐야 할 게 아니오’라고 일격을 가하자 張총리가 얼굴이창백해져 변명을 했다”면서 張총리가 끝내 궁지를 면치 못했다고 기록했다. 참석자들은 밤 11시30분쯤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론을 내린 것은없었다.다만 이 모임에서 나온 말들은 일절 발설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그러나 다음날 白樂濬이 회담 내용을 공표하는 바람에 각 신문은 ‘尹대통령이 張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대서특필했다.張정부와 신파가 격노한 것은 당연했다.李錫基 민주당 원내총무가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야당 대표들만 불러 놓고 張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말한 사실은 언어도단이다.청와대는 음모를 꾸미는 곳이다.尹대통령이 앞으로도 그런 식의 정치간섭을 한다면 우리 민주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張勉과 尹潽善 사이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지경이 됐다.내각책임제에서 반목하고 갈등하는 총리와 대통령의 관계는 ‘정치력 약화’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했다.5·16쿠데타가 발생한 뒤 힘을 합쳐 쿠데타를 진압해야 할 두 사람은 최소한의 연락마저도 유지하지 않는다.그만큼 불신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다. - 張내각 외무부 정무차관 金在淳 前국회의장 金在淳전국회의장(76·월간 ‘샘터’ 발행인)은 張勉내각에서 외무부와 재무부의 정무차관을 지냈다.5·16쿠데타 후 ‘혁명검찰’에 의해 ‘반혁명죄’로 구속돼 복역하다 주체세력내 지인의 도움으로 열달 만에 풀려났다.이후 공화당에 참여했고 金泳三정부에서 국회의장직을 사퇴하며 정계를 떠났다. 그때 남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유행어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金전의장은 “張勉정부는 탄환 대신 투표용지로 세운 민주정부인데 지키지를 못해 아직도 국민 앞에 죄스럽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민주당이 비록 신·구파로 나뉘어 있었지만 해공(申翼熙)·유석(趙炳玉)이 계실 때는 張勉박사와의 사이에 조금도 틈바구니가 없었다”고 강조했다.그 예로 19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정·부통령 후보를 뽑을 때도 張勉이 趙炳玉에게 3표차로 석패했지만 아무런 잡음이 없었음을 들었다. “민주당 신·구파가 대통령 후보,당 대표 자리를 놓고 표대결을 벌이지만결과에는 승복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밝힌 金전의장은 “국무총리 인준때해위(尹潽善)가 상산(金度演)을 먼저 지명한 것은 배신”이라고 단정했다. ‘7·29총선’후 대통령은 구파에서,총리는 신파에서 나눠 맡기로 했는데尹潽善을 대통령으로 먼저 뽑고 나니 구파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그는 “학생·시민이 피 흘린 대가로 정부가 들어섰는데 구파가 민의를 거슬러대통령·총리를 독점하려던 게 배신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내각책임제 하에서 尹대통령의 정치 간섭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 張총리의리더십 부족이라는 평가에 대해 金전의장은 “그것이 張박사의 성격”이라고 말했다. “해위의 월권을 막으려면 사사건건 따지고 싸워야 하는데 張박사는 누구하고 다투는 분이 아니어서”라는 설명이다.그는 “훗날 되돌아보니 張박사처럼 책임을 맡은 분이 겸양만을 내세우는 게 꼭 옳으냐는 생각도 들었다”고아쉬워했다. 金전의장은 “사실 해위는 張박사와 신파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몇가지 사례를 소개했다.가령 59년 전당대회때 尹潽善이 최고위원으로 뽑힌 것도 신파에서 “점잖은 분이니 밀어주자”고 뜻을 모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張박사는 나를 평소에 ‘재순군’이라고 부르며 무척 아껴주셨다”고 회고했다.金전의장은 “민주주의는 결국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아져야이루어지는 것인데 당시는 張박사 같은 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상황에 이르지못했다”면서 “정말 아까운 분”이라고 평가했다. 이용원
  • [제2공화국과 張勉] (6) 尹潽善과의 갈등(上)/장면·윤보선

    1960년 8월19일 오후 1시24분 ‘張勉총리 인준’투표를 막 끝마친 민의원 본회의장에는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두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은 장면이 인준에 성공해 취임할 것인가,아니면 그마저 실패해 정국이 계속 표류할 것인가. 1시37분 郭尙勳 민의원의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총투표수 225,가(可)에 117,부(否)에 107,기권 1.가가 정족수인 과반수이상이므로 가결된 것을 선포합니다.”4·19가 일어난 지 딱 4개월 만에 민주혁명 수행의 대임(大任)이 장면에게맡겨지는 순간이었다.총리가 된 장면은 곧바로 그를 지명해준 尹潽善대통령을 청와대로 찾아가 취임인사를 한다. 장면과 윤보선의 이날 만남은 유쾌해야 마땅한 자리였다.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한 지 5년 만에 ‘李承晩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치의 주역이 된 두 사람이었다.같은 당의 오랜 동지인 총리와 대통령은 ‘4·19정신’을현실정치에 구현하고자 서로를 격려하고 협조를 다짐했을 법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다.‘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당 신·구파간 갈등이 앙금으로 짙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뒤 정권을 맡을 정치세력으로는 민주당이유일했다.민심도 이를 인정해 7월29일 치른 민의원·참의원(상원)선거에서민주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민의원 219개 선거구에서 민주당은 무려 172석(78.5%)을 차지했다. 문제는 민주당 신·구파가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한 의석 분포를이룬 사실이었다.따라서 신·구파 모두 내각책임제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책임지는 국무총리를 차지하려고 암투에 들어갔다. 그즈음 민주당 지도층의 면면을 보면 장면이 단연 으뜸이었다.그는 56년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됐고,‘3·15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 탓에 낙선했지만 민주당의 대표주자였다.게다가 59년 11월부터 당수인 대표최고위원을맡아왔다. 반면 구파쪽은 조병옥 서거 후 명확한 리더가 없었다.당시 구파였던 高興門(국회부의장 역임,98년 작고)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조병옥이 없는 민주당은 곧 신파인 장면의 천하가 될게 분명해 보였다.민주당 내에서 국민적 인기로 보아 그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평소 말이 없는 윤보선과 고집이 센 金度演이 있었으나 장면의 맞수는 아니었다.”국민 여론이나 당내 인식이 이같았는데도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김도연을 총리로 밀어 두 자리를 독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그 까닭은 국회 부의장선거에서 표대결로 신파를 누른 적이 있어 자신을 가진 데다 구파 내 세력이 윤보선·김도연으로 양분돼 양쪽을 함께 배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추대해 구파에게 일단 한 자리를 준 뒤 총리는 자파의 장면이 차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8월12일 열린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208표(재석 259명)를 얻어당선된다.이제 관심은 윤대통령이 누구를 총리로 지명할 것인가에 쏠렸다.신파의원들이나 국민 대다수는 ‘설마 구파가 총리까지 차지하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고 구파 내에서도 鄭憲柱·閔寬植의원 같은 이들은 정치 도의를 내세워 독점에 반대했다. 8월16일 윤대통령은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한다.통보를 받은 민의원의장 곽상훈은 장면을 지명하리라는 믿음이 깨지자 즉시 청와대로 쫓아가 항의한다.윤대통령의 해명을 들은 그는 “아마 김도연씨는 안 될거요” 라고 말하고는물러나와 김도연의 총리 인준을 적극 방해한다(회고록에서 발췌). 김도연은 다음날 총리 인준 투표에서 정족수보다 3표 모자라게 득표해 인준에 실패한다.8월18일 윤대통령은 장면을 총리로 2차 지명했고 장면은 다음날 인준을 받는 데 성공한다. 60년 8월 민주당의 선택은 마땅히 장면이어야 했다.그런데도 당내 파벌의 이익을 앞세워 김도연을 1차로 총리 지명하는 바람에 신·구파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렇다고 신·구파 갈등이 장면총리와 윤보선대통령에게 그대로 옮겨갈 이유는 없었다.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당적(黨籍)을 떠나 국내정치에 초연하게끔 자리매김돼 있었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이후에도 구파의 지도자처럼 행세하며 장면총리와 팽팽한긴장관계를 유지한다.그리고 그 긴장은 정치불안의 주요소로 작용한다. 이용원- 張勉과 尹潽善 장면과 윤보선은 제2공화국의총리와 대통령으로 만날 때까지 외형상 비슷한 삶을 살아온 듯 보인다.둘 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해외유학을 다녀오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서 차근차근 위상을 높여나간다.그러나 그같은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장면은 인천세관 간부인 張箕彬의 맏아들로 출생해 21살때 카톨릭측의 주선으로 도미,뉴욕 맨해튼대에서 교육학·종교철학 등을 공부한다.귀국해 잠시카톨릭 평양교구 일을 보다 서울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직을 시작,그 학교 교장으로서 광복을 맞는다. 윤보선은 구한말 중추원 의관을 지낸 尹致昭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다.본인말고도 6촌 이내에 집권당 당의장서리,장관,서울대총장 등 장·차관 이상만 13명이 나온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이다.영국 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을 배웠다. 둘은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장면만 당선된다.윤보선은 54년 3대 의원 선거때 비로소 국회에 진출한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장면은 UN총회 한국수석대표,초대 주미대사,제2대 국무총리를 잇따라 하며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큰 공을 세운다.이 기간 윤보선은 4대 서울시장,2대 상공장관을 지내지만 각각 재임기간이 1년도 안돼 물러난다. 두 사람은 55년 출범한 민주당에서 한식구가 된다.장면은 처음부터 최고위원 5명 가운데 하나였고 신파의 지도자였다.56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데 이어 59년 전당대회때는 대통령후보 경쟁에서 조병옥에게 지지만 대표최고위원 선출에서는 조병옥을 누른다.윤보선은 이 대회에서 조병옥의 구파 몫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최고위원이 된다. 60년 8월 제2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정치적인 경력에서 장면은 단연 윤보선을 앞선다.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장면은 삶의 어느 시점에서 무슨 일을 했건 ‘성실하고 근면했다’는 점에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반면 윤보선은 달랐다.이는 66년에 발표한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술하다’에 수록)에서 스스로 밝힌 심경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고밝혔으며,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고 회상했다.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던 그가 5·16쿠데타 후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열달 동안 대통령직을유지한다.청와대를 떠난 뒤 반(反)朴正熙 투쟁의 선봉에 서지만 박정희 사후 또 한차례 변신한다.全斗煥정권을 인정하고 87년 대선에서 盧泰愚를 지지한 것이다. 이같은 윤보선의 정치역정을 두고 학자들은 ‘명사(名士)정치’의 한 행태로 풀이한다.劉載一 대전대 정외과교수는 “명사정치의 특징은 시대적 과제를고민하기 보다 권력 획득,품위유지에 더 집중하는 데 있다”면서 “따라서명사 정치인들은 종종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궤적을 걸은 듯한 장면과 윤보선의 삶에는 이처럼 본질적인 차이가있었다.이는 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 재조명할 때 필히 고려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용원
  • [리뷰]손숙의 ‘어머니’

    최근 서울 정동극장엔 눈물 마를 날이 없다.객석 여기 저기에서 훌쩍이는소리가 들린다.감상의 중심에는 손숙 주연의 연극 ‘어머니’(이윤택 작·연출)가 자리잡고 있다. ‘어머니’의 품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겼을까. 작품을 이루는 축은 두 가지다.어머니 일순(손숙)의 회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빠른 장면교차와 그 속에 어긋매끼는 웃음과 눈물이다. 무대 중간에 설치된,자동문처럼 열리는 창문을 경계로 작품은 현실과 환상을 오르락내리락 한다.이윤택은 더 나아가 현실과 환상을 직접 만나게 하는재기를 부린다.어린 일순(이현아)이 현실의 일순과 어깨를 맞대게 하여 당시의 감정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거나 기억 속의 시어머니(이명주)가 부르는 ‘알뜰한 당신’에 현실 인물이 장단맞춰 춤추게 하여 추억이 ‘화석(化石)’으로 고정되지 않고 현실처럼 춤추게 한다.어느 한쪽에 치중하여 지루해지기 쉬운 함정을 잘 벗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갖는 큰 미덕은 ‘공감’이다.굳이 작품의 배경인일제시대에서 6·25가 아니더라도 그 속엔이 땅의 어머니라면 누구나 한번쯤 맛보았을,신산스런 삶이 잘 녹아있다.그것은 절절한 사연 하나쯤은 가슴에 묻고 살아온 어머니들이나 그런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을 자식들을 가슴찡하게 만드는 힘이다. 눈물만이 아니라 ‘못먹어도 배불렀던’ 정겨운 옛 풍경을 섞어 자연스런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미국놈 믿지말고 소련놈에 속지마라 일본놈 일어선다’든가 ‘하늘엔 김창남 땅엔 엄복동’등의 대사,무대를 찾은 원로배우고설봉씨가 감탄할 정도의 철저한 고증도 작품을 살갗에 다가오게 만든다. 무르익은 연기로 토해 내는 손숙의 청승스러움은 바로 ‘어머니’였고 김학철(아들)은 ‘어머니’가 신파에 머무르지 않게 균형을 잡아주었다.하용부(돌이)는 권위로 뭉친 아비의 전형을 잘 보여주었고 1·4후퇴때 학질에 걸려죽은 아들 찬성으로 나온 류진의 연기도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한몫했다. 막이 내리면 모처럼 잘 만든 서정시 한편 읽은 느낌을 준다. 아쉬운 점은서정만 넘치고 서사가 너무 모자란다는 것이다.정작 일순에게 무한한 인내를 강요한 사회의 얼굴은 볼 수 없다.여성에게 억눌린 삶을 강요한 사회구조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면 무리일까. “이 땅 어머니의 전형을 보이겠다”는 연출가 이윤택의 장담이 어찌보면맞았고 한편으론 부족했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4월25일까지.(02)773-8960
  • [제2공화국과 張勉](2)-국토건설사업(下)

    張勉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국토개발이라는 고유목적 외에도 공공사업을 통한 고용증대,산업활성화,국가 인재충원제도 확립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경제적,제도적 파급효과를 거두었다. 국토건설사업본부(이하 본부)는 중앙청 서남쪽의 목조 2층 건물에 자리잡았다.민(民)과 관(官)이 함께 참여한 이질적인 집단이지만 당대 엘리트를 모은 데다 대우도 좋아 본부는 활기차게 돌아갔다.본부 간사이던 朴敬洙씨(69·작가)는 “월간 ‘사상계’에서 받은 봉급이 일반직장인보다 훨씬 많았는데본부는 그 두배 정도를 주었다”고 회고했다. 본부가 처음 한 일은 국토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지휘·감독할 일꾼을 뽑는 것이었다.국무원사무처(총무처 격)는 ‘병역을 마친 30세 미만의 대학졸업자’를 대상으로 국토건설추진요원(이하 건설요원)을 공개 모집했다.석달 동안건설현장에서 근무하고 나면 국가공무원 4∼5급이나 지방공무원 3∼4급으로임용한다는 조건이었다.말하자면 공무원을 공채로 뽑은 것인데 이는 해방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모집공고가 나자 대졸자 ‘1만수천명’(당시 鄭憲柱국무원사무처장 증언)이지원했다.그 무렵 전국에 대학이 63군데,대학생 정원이 9만7,819명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였다.합격자는 사무직 1,614명,기술직 452명 등 모두 2,066명이었다.여성도 21명 포함됐다. 건설요원들은 61년 1월9일부터 교육을 받았다.교육장에는 종교인 咸錫憲과朴鍾鴻 서울대 교수 등 당대의 지성들이 나와 그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었다.이들은 2월27일 중앙청광장에서 수료식을 가진 데 이어 각 군(郡)에 15∼17명씩 배치돼 3월1일부터 현장근무에 들어갔다. 국토건설사업은 전국 각지에서 커다란 성과를 불러왔다.건설현장에는 배고픈 국민들이 새벽 5시쯤부터 몰려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섰다.하루 일을 끝내면 이들은 품삯으로 돈과,쌀·보리·비누·광목 같은 물건을 섞어 받고 만족한 표정으로 귀가했다.품삯에 현물(現物)이 포함된 까닭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이 사업의 주요 재원이기 때문이다. 장면정부는 잉여농산물을 품삯으로 지급하면서도 다른 산업에 미치는 효과를 계산했다.쌀·보리는 정미소에서 찧었고 면화는 방직공장에 보내 광목으로가공했다.유지(乳脂)는 비누로 만들었다.따라서 건설현장에 나온 국민은 구하기 힘든 생필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정미소나 방직공장·비누공장 등은 가동률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그만큼 장면정부의 경제정책은 정교했다고평가해줄 만하다. 국토건설사업은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나갔다.일부 지역에서 잡음이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3월30일 농림부는 25일까지의실적을 공개했다.2만6,089정보에 조림(造林)을 해 계획의 50%를 달성했으며,산·바닷가의 흙·모래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고자 나무를 심거나 돌을 쌓는 사방(砂防)사업도 목표의 51%인 2만8,958정보를 끝마쳤다. 국토건설사업은 이같은 업적말고도 공무원 공채의 초석이 됐다는 점에서 큰의미를 갖는다.당시는 공개 채용 없이 기관장이 발탁해 쓰면 시일이 지남에따라 자동 승진하는 구조였다. 정헌주옹(84)은 “건설요원 선발 이후 공무원사회에 공채제도가 자리잡았다“면서 그 뒤 일반기업체에도 퍼져 나갔다고 회고했다.또 “공채가 공고되자 61년 들어 대학가에서 시위횟수가 크게 주는 등 사회안정에도 큰몫을 했다”고 강조했다. 첫 공무원 공채는 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다.이는 당시 재무부 예산국장이었고 그 뒤 숭전대총장·부총리를 역임한 李漢彬의 논저 ‘사회변동과 행정’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전부총리는 건설요원 채용이 “관료제에 새로운 사회세력,특히 젊은이들을 흡수하는 기본적인 통로로서 활용됐으며 이 젊은이들은 점진적으로 승진해 관료제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활력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공무원 공채 1기’는 5·16쿠데타 후에도 지위를 보장받았으며 우리 사회 정·관계,경제계를 주도하는 인물로 성장했다.鄭寅用전부총리,金泰鎬국회의원(내무장관 역임),崔同燮전건설부장관,金昌甲전교통부차관,朴進球울주군수들이 ‘1기 출신’이다. 그러나 장면정부의 국토건설사업은 5·16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기는 바람에끝을 맺지 못했다.사업을 이어받은 쿠데타세력은 61년 말 “연인원 2,500만명을 고용해 계획의 94%를 완수했다”고 공식발표했다.장면정부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그 과정은 安京模전교통장관(82)의 증언에서 분명해진다.안옹은 본부 기술부 차장으로 일하다 5·16세력에게 불려가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브리핑했다.이후 같은 업무를 계속하다 64년 교통부장관,67년 수자원개발공사사장으로 발탁돼 소양강댐 충주댐 안동댐 대청댐 등을 직접 건설했다. 60년대 국토개발의 주역인 안옹은 “장면정부도 국토건설사업을 완수할 수있었다”고 단언하고 그 근거로▒정부 의지가 굳건했고▒미국이 적극 지원했으며▒사업에 참여한 관료들이 능력을 갖추었음을 들었다.그는 쿠데타세력이 국토개발에 성공한 것도 장면정부의 사업계획을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張勉총리의 생애▒1899년 8월28일=인천세관에 근무하는 張箕彬과 黃누시아 사이에 장남으로출생.본관 玉山,호는 雲石▒1906년=인천성당 소속 박문학교 입학▒14년=수원농림학교 입학▒16년 5월20일=金商集의 딸 金玉允과 결혼▒17년=수원농림 졸,서울 중앙기독청년학관 영어학과 입학▒20년=청년학관 수석 졸업,도미▒21년=뉴욕 맨해튼가톨릭대 입학▒25년=맨해튼대 졸업(교육학),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로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시복식’에 참석 후 8월 귀국▒29년=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 일에 전념▒31년=동성상업학교 교사 시작▒36년=동성 교장으로 취임(광복 때까지 근무)▒46년=민주의원·입법의원으로 피선▒48년=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의원 당선,9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12월 맨해튼대에서 명예법학박사 받음▒49년=초대 주미대사 부임▒50년=6·25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에 큰몫▒51년=2월에 제2대 국무총리 취임,11월 제6차 UN총회 한국수석대표▒52년=총리 사임▒55년=申翼熙 趙炳玉 등과 함께 민주당 창당,최고위원 피선▒56년=민주당 후보로 부통령 당선.9월에 피격,경상▒59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피선,▒60년 3월15일=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낙선▒4월22일=李承晩 규탄하며 제4대 부통령직 사임▒7월29일=서울 용산 갑구에서 국회의원 당선▒8월19일=국무총리 인준▒8월23일=1차 조각 마치고 내각 출범▒61년 3월1일=국토건설사업 기공▒5월16일=쿠데타로 정권 빼앗김▒이후=신앙생활 몰두하다 66년 6월4일 서거,국민장으로 포천 가톨릭묘지에 안장됨■張勉은 누구인가 한국 현대사에서 張勉이 갖는 위치는 독특하다.그는 4월혁명의 결과로 태어난 제2공화국의 총리였다.尹潽善대통령이 있었지만 내각책임제였기에 제2공화국을 장면정부라고 부른다. 장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훌륭한 인격자요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무능하고 나약했다”는 평도 따른다.이는 5·16세력이 조작해 전파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장면은 어떤 사람인가.장면은 부모 양쪽 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세례명 요안인 그는 인천성당 소속인 박문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해 이후 해방 전까지 신앙인·교육자로서 충실한 삶을 산다[연표 참조].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면모는 5·16이 나자 피신처로 선택한 곳이 수녀원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그만큼 그의 신앙심은 남다른 측면이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장면은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였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길을 택했다.따라서 그가 이끈 민주당 신파 출신 중에는 기나긴 朴正熙시대에도뜻을 굽히지 않고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이들이 유난히 많다.金大中대통령을비롯해 金相敦 鄭一亨 鄭憲柱 金判述 金應柱 吳洪錫 등이 그들이다. 해방 후 장면은 미 군정하의 민주의원으로 정계에 투신한다.건국 직후 열린UN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라는 법통(法統)을 인정받은 것과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6·25때 UN군 파병에 큰몫을 한 것은 그를 전국적인 지도자로 부상케 했다.그 결과 제2대 총리로 취임하지만 이제는 정치적으로 너무 성장한 그를 李承晩이 견제하는 바람에 1년여 만에 총리직을 사퇴한다. 그후 야당지도자로 변신해 55년 창당한 민주당의 최고위 지도자 중 한사람이 됐고 56년에는 부통령에 당선됐다.부통령 시절인 1956년 9월28일 장면은 명동 시공관에서 암살범의 저격에 왼손을 맞았다.그런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민주당 최고위원인朴順天은 훗날 회고록에서 “그때 지켜본 장박사의 모습은 태연자약했고 너무도 의연했다”면서 거인다운 풍모를 소개했다. 4·19혁명 후 제2공화국을 맡은 장면은 8개월23일 만에 쿠데타를 만나 정권을 빼앗긴다.교과서에 나오는,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던 그의 꿈은 좌절되고 그는 “국민 앞에 저지른 잘못을 속죄의 심정으로 사과할 뿐”(회고록 표현)이라며 신앙생활에 몰두하다 66년 6월4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서거한다.李容遠
  • 소 백신파동 조사·보상 철저히

    농림부가 소 유산과 불임을 막기 위한 브루셀라 백신접종으로 피해를 본 축산농가에 대해 보상대책을 발표하자 피해농민들이 일제히 반발,앞으로 그 귀추가 주목된다.농림부는 지난해 12월23일 브루셀라 백신접종으로 유산된 송아지 가운데 한우는 한 마리당 19만7,000원,교잡우 15만7,000원,젖소 4만6,000∼8만7,000원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농림부 백신피해농가대책위원회에 참여한 농민대표들은 “정부가 발표한 피해보상액은 대책위원회에서 합의된 것이 아니라 12월10일 4차회의에서 단지검토된 내용일 뿐”이라며 “농림부가 농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결정한 피해보상액을 수용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고 경실련 등 시민단체가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나섬으로써 백신파동이 증폭되고 있다. 백신파동의 발단은 국내 한 교수가 농림부로부터 허가도 받지 않고 백신균주를 수입,한 회사에 맡겨 백신을 배양하여 제품을 만든 뒤 농림부로부터 사후 추인형식의 제조허가를 받은 데서 비롯되고 있다.이 백신을 접종한 소들이 무더기로 유산하면서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으나 당국은 뒤늦게 접종 중단조치를 내림으로써 피해가 오히려 늘어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 백신접종 과정에서도 허점이 드러나 농민들은 당국의 방역사업에 구멍이뚫린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미국에서 는 이 백신을 젖소송아지에만 1㎖당 40만마리를 접종하고 어미소의 경우는 1차접종한 소에 한해 1㎖당 10만마리를 접종토록 하고 있다.그러나 국내 접종과정에서는 젖소송아지뿐 아니라 어미젖소와 한우에 까지 일률적으로 40만마리를 접종하고 접종이 금지된 임신소까지 접종토록 해 백신파동을 확산시킨 것으로 전문가와 축산농민들은 보고 있다. 또 지난해 5월 제주도 농업시험장에서 접종을 처음 시작,소가 유산되었는데도 7월 초까지 두달 동안 농림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같은달 중순에야백신접종 중단조치를 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특히 백신피해는 접종을 하지 않은 소에까지 전염된다는 사실이 특별대책반에 의해 밝혀져 그 피해는날이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인다.브루셀라병은 가축의 제1종전염병으로 소뿐 아니라 돼지와 양 등에게도 감염돼 유산과 불임증을 유발시킨다는 점에서이번 백신파동은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농림부는 백신파동을 쉬쉬 하며 넘기려 하지 말고 축산농가의 피해를 철저히 조사하고 피해보상 범위도 송아지뿐 아니라 어미소 피해를 포함한 보상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굄돌-체벌과 교권

    아이들과 교사들의 갈등이 심상치 않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체벌당한 학생이 교사를 고발하고,경찰이 학교에까지 들어와 교사를 신문한다.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가게 되었나.아이들은 아이들대로,교사들은 교사들대로 할 말 이 많은 것 같다.사안별로 성격이 다르겠지만,전체적인 문제는 교사들이 아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사실인 것같다.‘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고 한탄해 보아야 이미 아무 소용도 없다.권위로 반항을 잠재 울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무책임한 문화환경 때문에 교사들이 이중고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학교 바깥에서 십대는 오히려 귀하신 몸이다.대중문화 매체들은 십대에게 아부하느라 정신이 없다.아이들은 이미 TV편성권을 장악 하고 있다.아이들의 머리는 커질대로 커졌다.그렇게 문화적으로 잔뜩 부풀려 진 정체성을 주입받은 아이들은 자아를 확립하기도 전에 벌써 자기가 무엇이 나 된듯한 착각에 빠진다.그런데 학교에 가면 재미없는 것만 가르친다.게다 가 정해진 틀에 우겨넣어지지 않는다고 밤낮으로 닦달이다.아이들이 선생님 말을 들어먹겠는가. 교육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몰가치하고 천박한 대중문화와 이미 시 대적 가치를 잃어버린 군국주의적 규율문화 사이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진정 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줄 새로운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그 러려면,힘차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개혁 주체세력이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이미 문제는 의식있는 교사 한사람 한사람이 외롭게 싸워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전교조의 축척된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그 런데 극우 성향의‘소신파’국회의원들 때문에 전교조 법안이 상정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마음이 답답하다. 김정란 시인·상지대교수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秋美愛·李美卿/올해에 빛난 여성의원

    올해 국회는 가장 비생산적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이런 가운데서도 국민회의 秋美愛 의원과 한나라당 李美卿 의원은 ‘소신파’의원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며,돋보이는 활동을 펼쳤다.두 의원의 의정활동을 되돌아본다. ◎秋美愛 국민회의/특별검사제 주장 소신파 국민회의 秋美愛 의원(40·서울 광진을)은 당내에서 ‘소신파’로 불린다.당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색깔’을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검사제 주장이 대표적.秋의원은 “해보지 않고 특검제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문제”라고 당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정기국회 대정부질문에서는 朴相千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두눈을 부릅뜨고,자신의 소신을 밝혀 朴장관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秋의원은 특히 최근 여성특위에서 남녀차별금지법에 제동을 걸어 ‘여성편을 들지 않는다’는 여성계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여성특위 산하 ‘남녀차별개선위’에 사법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대통령 자문기구에 법률적 판단을 맡기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 이유다. 秋의원은 ‘소신파’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데 반해 당 지도부는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李美卿 한나라당/남녀고용평등법 제정 앞장 한나라당 李美卿 의원(48·전국구)은 국회 환경노동위와 여성특별위원회 소속으로 단연 돋보이는 활동을 했다.특히 ●환경 ●노동 ●여성 ●인권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방지법,남녀고용평등법을 심의처리하는 데 앞장섰다. 또 정신대문제와 관련,일본전범의 국내입국을 금지시키도록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하는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최근 관심사는 민주유공자를 위한 명예회복법안이다. ‘교원노조 허용’ 문제에 대해서는 ‘당론’과 상관없이 ‘찬성‘입장을 분명히 했다.李의원은 “전교조 문제로 10년동안 논쟁을 해왔고,이제 노사정 합의가 이루어진 만큼 교원노조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환경정치인상’을 수상했고,올해도 ‘시민운동 디딤돌 정치인’ 1위에 뽑혔다.
  • 교원노조법 처리 골머리/野 반대당론에 일부의원 “찬성” 반기

    ◎교총­전교조 등 입김 겹쳐 갈팡질팡 교원노조 허용을 골자로 한 ‘교원노조법’ 처리를 놓고 정치권에 미묘한 파장이 일고 있다.여야간은 물론 정당내 의견조율도 쉽지 않다.이익집단의 로비까지 겹쳐 관련 환경노동위 소속 의원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연내 법안처리’로 방침을 굳히고 교통정리를 거의 끝냈다.그러나 시기상조라며 ‘반대’로 기운 한나라당은 환노위 소속 자당(自黨)의원 가운데 당론과 배치된 소신파가 많아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환노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은 8명.이 가운데 李富榮 金文洙 李美卿 李壽仁 의원 등 4명이 ‘교원노조 허용’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당 지도부는 고육책(苦肉策)으로 환노위와 교육위의 공동심의를 주장하고 있으며 여의치 않으면 일부 소신파 의원의 상임위 교체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운영위가 지난 18일 환노위의 ‘교원노조 소관 상임위 재결정 의뢰’에 대해 ‘환노위 처리’로 결론지은 데다 정치 소신을 이유로 상임위를 바꾸는 것은 명분이 없다는 점 때문에 속을 태우고 있다.당초 환노위는 지난 23일 교원노조법 심의에 들어가려 했으나 한나라당 내부사정으로 인해 법안상정을 29일로 연기했다. 설혹 이날 법안이 상정되더라도 한나라당이 ‘반대’ 당론을 고집한다면 상임위 내 표대결이 불가피하다. 환노위 소속 의원이 18명으로 여대야소의 구도인 데다 야당의 이탈표를 감안하면 법안처리에는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환노위 소속 의원이 여야 없이 공개 표결처리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법안 제정을 반대하는 교총과 찬성하는 전교조 등 관련 단체의 입김이 거세기 때문에 개인별 표결내용이 알려져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비공개로 하자니 입법의 투명성과 배치돼 이래저래 고민이다.
  • 새 美 하원의장 내정 헤스터트(뉴스의 인물)

    ◎건강관리 제도 개선팀 참여 유일한 공화의원/작년 워싱턴의 100대 정책결정자에 뽑혀 차기 하원의장으로 내정됐으나 혼외정사 폭로로 19일 하원 본회의 탄핵안 최종토론에서 정계은퇴를 선언한 밥 리빙스턴 의원 후임으로 내정된 데니스 헤스터스 의원(56)은 16년간 일리노이주 고교 미국사 교사로 지내다 주의회 의원을 거쳐 연방정치무대 지도자로 성장한 전천후 노력파. 연방의회 상무위원회 소속으로 식품 의약 환경 마약 에너지 통신 방송 에너지 무역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입법활동을 전개,지난해 ‘워싱턴의 100대 정책결정자’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지난 93년 힐러리 여사가 만든 건강관리제도개선 전담팀에 공화당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한 소신파로서 96년에는 클린턴 대통령의 건강관리혜택 확대법안에 적극 동조했고 환자보호법을 주도적으로 본회의에서 통과시킨 의료보건통이다. 지금까지 하원 정부개혁감독위의 국무부·국방부·법무부 업무를 관장하는 국가안보·국제문제·형사문제 소위의 의장을 지냈으며 올해는지난해에 이어 공화당 수석 부총무보를 맡고 있다. 42년생으로 64년 일리노이주 휘튼대학을 졸업하고 67년 노든 일리노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부인 진 여사와의 사이에 조수아와 에탄 두 아들을 뒀다.
  • 평안도 출신 권력 엘리트의 비밀

    ◎서울대 김상택씨 논문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서 분석/구한말서 일제까지 번성한 기독교 영향/서양문물 접한 청소년 대거 미국 유학/해방후 남하… 미군정 특별대우 받아/냉전이데올로기속 반공·친미 성향 유지 도산 안창호,고당 조만식,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한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장면 전 총리,강영훈·이영덕 전 국무총리….이들은 한말부터 최근까지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지도층 인사들로 모두 평안도가 고향이다. 이밖에 장리욱 전 서울대 총장,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춘원 이광수 등 평안도 유명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서울대 강사 김상태씨는 역사비평 겨울호에 게재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평안도인들이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에 파워 엘리트가 된 배경을 설명한다.김씨는 평안도가 기독교 및 미국과 가지는 함수관계를 분석,권력 엘리트 충원과정의 비밀을 풀었다. 구한말부터 일제까지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세가 강했다.1898년 7,500여명의 한국 장로교 교인가운데 79.3%인 5,950명이 평안도와 황해도 즉 서북인이었다.조선후기 평안도인들은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없는 등 정치적으로 소외받았다.이 때문에 이 곳에서는 교역 및 상업이 번성했고 변화를 바라는 자립적 중산층도 많았다.1894년 발생한 청일전쟁의 주무대는 평안도였다.당시 일본은 교회를 치외법권 지역으로 보호해줬는데 평안도에서 기독교가 번성할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토양이 됐다. 평안도에서 기독교는 종교일 뿐 아니라 근대문명으로 접속하는 통로였다. 기독교계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서양문물을 접한 청소년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와 미국적 가치관을 배웠다.반면 보수적 경향이 짙었던 경상도와 전라도인들은 주로 현해탄을 건넜다.1920년대 일본에서는 사회주의가 유행하지만 미국은 사회주의 무풍지대였다.당연히 미국 유학파들은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에 경사되지만 일본 유학파들은 사회주의나 민중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해방 이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평안도인들은 반공투쟁에 나서거나 38선을 넘는다.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월남자 가운데 미국 유학을 한 기독교계 엘리트들은 미 군정의 ‘특별대우’를 받는다. 평안도 출신 인사들은 자유당 시절 이승만의 탄압을 받아 야당으로 밀려나지만 민주당 신파를 형성,반독재투쟁에 나서 4.19로 집권하게 된다.장면 총리를 비롯 외무장관 정일형,문교장관 오천석,상공장관 오정수,부흥장관 주요한,외무·정무차관 김재순,참의원 의장 백낙준,육군 참모총장 장도영,검찰총장 이태희,총리 비서관 송원영 등이 평안도인들이다. 김씨는 평안도 출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50년대의 대표적 학술잡지로 자리잡은 ‘사상계’의 전반적인 논조 역시 철저한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반공 친미 성향을 유지했다는 점을 감안,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평안도 출신 핵심 엘리트들이 일반적으로 반공 친미 성향을 띠게 된 이유를 체계적으로 규명했다.
  • 美,對北 정책조정관 페리 前 국방 임명

    ◎행정부­의회 정책조율 담당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미국 정부는 12일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북한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페리 전 장관은 앞으로 북한 정책수립과 관련,미국 행정부내 기관 내부 및 행정부와 의회간 정책을 조율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특히 미국 의회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북한의 지하핵시설 의혹 및 미사일 수출 등과 관련,내년도 대북 중유공급 예산 3,500만달러를 핵합의 이행등에 연계한 것 등에 대해 클린턴 행정부와 의회간의 중재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과의 협상이나 4자회담 문제 등은 찰스 카트먼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가 계속 맡는다. ◎페리 조정관 누구인가/민주당선 드물게 대북 강경노선 견지/교수 출신 군수통… 신무기 개발 관심 미국의 북한 정책 조정관으로 12일 임명된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71)은 민주당에서는 보기 드물게 북한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온 인물. 93년 국방부 부(副)장관 재임 당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서태평양 지역의 핵군비 경쟁이 시작되며 최악의 경우 핵전쟁까지 발발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강성 소신파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정책에 제동을 걸고 있는 의회내 공화당 인사들과의 창구역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행정부 당시 국방차관을 지낸 군수통으로 스탠퍼드대 교수와 국제 안보·군축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클린턴 대통령의 1차임기 때인 94년 국방장관에 임명됐었다.공학도 출신답게 국방부 내에서 ‘스텔스 폭격기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등 신무기 개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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